CINELAB2024-11-22 10:58:40
영화에서 마주친 연극
영화 속 연극을 마주하러 떠나봅시다

영화와 가장 비슷하고도 다른 예술,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에디터는 가장 먼저 ‘연극’이 떠올랐는데요.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도 연극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이 자주 보이곤 합니다.
무대 위를 오르는 배우를, 글을 적어내는 작가를, 극을 완성시키는 연출을 비추기도 하죠.
그럼, 영화 속 연극을 마주하러 떠나볼까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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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면 팔수록 현혹되는 씻김굿!
(이 글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 몸이 아팠다. 마치 134분동안 신비롭고도 무서운 기운이 한데 몰아치는 가운데, 신명나는 굿판을 체험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파묘>는 여러모로 에너지가 상당한 작품이다. 한국형 오컬트의 길을 더 확장한 장재현 감독은 물론, 그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맞게 충실한 연기를 보여주는 일명 ‘묘벤져스’ 배우들은 그 에너지를 한 데 모아 도깨비불처럼 관객을 끝까지 현혹시킨다. 후반부 새로운 이야기가 다소 생경스러움을 줄지언정 이 굿판을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확인할 정도. 뭐가 나온다 한들, 끝까지 파고 들어가는 감독의 뚝심은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한다.
실력 있는 무당 화림(김고은)과 봉길(이도현)은 미국행 비행길에 오른다. 기이한 병이 장손에게 대물림되는 집안의 의뢰를 받았기 때문. 대번 조상 묫자리가 화근임을 알아낸 화림은 이장을 권하고, 풍수사 상덕(최민식)과 장의사 영근(유해진)이 합류한다. 거액의 의뢰엔 의심과 위험이 따르는 법. 묫자리를 본 상덕은 악지에 자리한 기이한 묘를 보고 이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화림의 설득으로 파묘를 시작한다. 그러나 예상대로 묘 하나 잘못 건들면 생기는 기이한 이들이 벌어지고, 결국 이들은 험한 것들과의 전면전을 치른다.
<파묘>는 감독의 전작인 <검은 사제들> <사바하>의 장점을 고르게 가져간다. 서울 명동에서 펼쳐지는 엑소시즘, 기독교과 불교, 사이비 종교의 만남 등 이질적인 것을 붙였을 때 느껴지는 신비로움과 그로테스크함이 영화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특히 풍수와 의례, 무속신앙과 국가를 넘은 초자연적 현상이 함께 맞물리며, 악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과 작품 전반에 깔린 기묘한 매력을 배가시킨다. 여기에 <검은 사제들> 보다 이야기 층을 두텁게 하고 영역을 확장하는 방식, <사바하>보단 더 쉽고 직관적으로 가져가려는 감독의 의도가 담기며 그 장점이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장재현 감독은 <사바하>부터 크게 전후반(전반부는 불교 후반부는 사이비 종교)을 나누어 이야기의 전복을 꾀했는데, <파묘>에서도 그 방식을 이어간다. 영화는 첩장(관이 두 개)된 묘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전반부는 파묘 이후 악의 기운을 가진 혼령의 비밀과 이를 없애려는 묘벤져스의 노력이 담겨 있다. 의뢰자 집안의 진실이 숨겨진 채로 행해지는 화림의 대살굿과 파묘, 이장 과정은 이후 괴이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을 계속 부여하며 이야기를 주시하게 만든다. 감독은 이 분위기를 계속 가져가기 위해 최대한 숨겨진 진실의 빗장을 서서히 풀어가고 혼령의 모습을 절제하면서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를 유지하는 방법을 취한다. 빛과 어둠의 대비와 교차 편집을 통한 극적 긴장감도 유지해 나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두 번째 파묘 이후 이야기는 오컬트에서 어드벤처 크리처물로 장르의 변화를, 개인에서 민족으로 대상의 변화를 꾀한다. 기존 관보다 더 깊숙하게 박혀 있는 관의 봉인이 풀려 ‘험한 것’이 나오며 비로서 이 묘가 왜 생겼는지를, 산 주위에 왜 여우들(여우 음양사)이 있었는지, 그 관이 가로가 아닌 세로로 묻혔는지(쇠말뚝)에 대한 비밀이 밝혀진다. 그리고 묘벤져스는 쇠말뚝과 같은 관 속의 험한 것의 실체를 마주하면서 또 한 번 대결을 치른다.
이야기와 장르가 전복되는 후반부는 다소 당황스럽다. 일단 악의 실체가 보이는 순간, 전반부에 고조되었던 쫀쫀한 긴장감은 풀려 버린다. 장르 선택에 따른 이 결과치에 악령을 퇴치하기 위한 목적이 애국주의로 모이면서 생기는 낯간지러움이 더해진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이 생경한 이야기는 그 목적을 이해하면 달리 보인다. ‘과거의 것을 들춰서 잘못된 것을 꺼내 없앤다’는 게 실제 ‘파묘’를 하는 목적이자 필요성이다. 위험 부담을 안고도 감독이 뚝심 있게 후반부 이야기를 밀고 나간 건, 개인에서 민족, 더 나아가 우리의 땅으로 대상을 확장하며 그동안 감춰져 곪아 터진 상처와 고통, 아픔의 근원을 꺼내 없애는 의미를 담고자 했기 때문이다.
숨겨진 진실(혹은 이름)을 찾으며 개인과 사회의 빛과 어둠을 동시에 마주하게 하고, 결국 이 과정을 통해 얻는 작은 희망을 그린 전작들을 미뤄봤을 때 이번 이야기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우리 민족의 어둡고 공포스러운 존재를 심연에서 끌어올려, 상처를 치유하고 두려움을 몰아내는 씻김굿처럼 보인다. 이에 걸맞게 영화는 음양오행이란 가장 오래되고 자연스러운 섭리로 ‘험한 것’에 대항한다. 장르 전환에 따른 낯설음을 바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영화가 품은 의미는 물론, 이야기 확장성을 위해 일정한 방향으로 ‘파묘’하는 감독의 뚝심은 영화를 끝까지 보게 한다.
관객이 끝내 설득당하는 건 배우들의 호연도 영향을 미친다.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등 각 역할에 맞게 그 선을 지키며 공조하는 연기가 돋보인다. 극중 각 영역 전문가라는 특성에 맡게 이어달리기처럼 그 순서가 되면 곧바로 바통을 전하듯 이들의 협업은 마지막까지 극적긴장감을 올린다. 특히 초반 대살굿으로 가장 확실한 인장을 찍는 김고은은 물론, 땅파먹고 산 경험을 토대로 일본의 ‘험한 것’ 을 향해 일격을 가하는 최민식, 이들과 함께 자신의 역량을 100% 표출하는 유해진, 이도현의 연기 등 이들의 앙상블은 영화에 힘을 더한다.
<파묘>에서 다룬 이야기가 어떻든간에 장재현 감독은 가장 한국적인 오컬트 장르를 길을 열어가고 있다. 후반부 봉길의 병실에서 먹을 것을 놓고, 그에게 깃든 ‘험한 것’을 불러내기 위해 구라액션을 펼치는 화림과 동료 무당인 광심(김선영), 자혜(김지안) 장면은 우리만의 엑소시즘을 멋스럽게 변형한 장면이다. 이뿐인가? 다수의 장면에서 이런 감독의 한국적인 오컬트 요소와 장면을 만날 수 있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런 말을 전했다. “진보했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전을 하고 나아가야 했다. 이 영화가 그 결과물이다.” 감독님이여~ 그 마음 변하지 말고 한 길 우직하게 열심히 파묘하기를 비나이다! 비나이다!
덧붙이는 말: 영화를 본 이후에는 꼭 소금 사시 뿌리시길. 국내산 천일염으로. 그것도 씨알 굵은놈으로다가!
사진 출처: 쇼박스
평점: 4.0 /5.0
한줄평: 파면 팔수록 현혹되는 씻김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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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엄사는 진정으로 '존엄'한 것인가
글로벌 프로젝트인 10년 프로젝트를 아는가?
2015년 홍콩에서 시작되어 대만, 태국, 일본에서 진행된 글로벌 제작 프로젝트이며 10년 후의 각자의 나라를 감독들이 단편으로 만들어 엮은 옴니버스 영화이다.
전 세계 여러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이 프로젝트 중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수입 및 개봉되었다.
이번에 소개할 영화 <플랜 75>는 이 중 동명의 단편을 동일한 감독이 장편화한 영화이다.
멀지않은 미래, 초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75세가 되면 국가에서 안락사를 권장 및 지원하는 "플랜 75"라는 제도가 생기게 된다.
플랜 75 제도를 활용해 안락사를 준비하는 노인들과 속에서 근무하는 청년들의 이야기이다.
안락사, 존엄사는 현재 일부 국가에서 불치병이나 말기 환자에 한해 실행되기도 하는 만큼 현실에 대입해 많은 고찰을 하게 만든다.
동시에 국가 체제에서 엄연한 죽음을 권장하고 지원하며, 그로 인해 무언으로 안락사를 떠미는 사회적 분위기는 그야말로 공포영화 그 자체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존엄사가 진짜 존엄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글은 원글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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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독립영화의 2020년대 청년상
언뜻 보면 자유로운 꿈을 지닌 청년이 대가족의 전통적 가치관과 갈등을 빚는 가족 코미디로 보이는 <장손>은 예측 가능한 마냥 쉬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들이 기대했을 온가족이 밥상 앞에 모여 싸우는 장면을 싱겁게 끝내버리고, 영화의 절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말녀의 죽음을 보여주면서 그 자신의 지향점을 단호하게 선언한다. 말하자면 <장손>과 더 가까운 영화는 가족 코미디 영화로서의 <이장>이 아니라 청년 영화로서의 <흐르다>인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한국 독립영화들은 청년을 어떻게 다루는가. <장손>과 <흐르다>가 그리는 2020년대의 청년들은 마냥 자유로운 반항아가 아니다. 그들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하지만, 자신의 뿌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며 그곳을 버리지 않는다(공교롭게도 두 영화는 모두 대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이전 세대와 갈등 빚을지언정 척지지는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에게 주어진 몫만큼의 기성세대에 대한 부양은 어떻게든 해낸다. <흐르다>의 주인공 진영은 대구에서 아버지의 공장 일을 도우며 살지만 캐나다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고 싶어한다. 공장의 실질적인 운영을 담당하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진영은 홀로 남게 된 아버지를 부양하며 어떻게든 공장을 살리려고 애쓴다. 그는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지닌 아버지와 자주 갈등을 빚으며 결국 캐나다로 떠나지만 그곳에서 가끔씩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보기도 하는 인물이다. <장손>의 성진은 고향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 배우로 활동한다. 보증금 문제를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 해결하며 아직은 변변찮은 커리어를 지녔지만 나름 tv 드라마에 나온 적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진은 나름 승필을 비롯한 어른들을 챙기기도 하고 말녀가 죽었을 때는 서툴지만 장례 절차를 어떻게든 마무리짓는 책임감 있는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 인물이다.
<장손>의 또다른 미덕은 현대적인 청년 캐릭터를 그리는 그 성숙한 태도로 사건을 대하는 절묘한 균형감각에 있다. 이 영화에서 돈과 눈물은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돈의 세속성과 눈물의 탈속성은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영화에는 장례식장에서의 대성통곡 장면이 두 차례 등장한다. 첫 번째는 성진이 말녀의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식장에 처음 들어설 때이고, 두 번째는 옥자와 동우가 딸을 데리고 들어올 때이다. 여기서 특이한 장면은 두 번째이다. 옥자네 가족이 장례식장에 들어오자 수희와 자매들은 대성통곡한다. 그러다가 혜숙이 ‘그렇게 우는 게 아니여’라며 통곡의 대열에 합류하고 고쳐 울기 시작한다. 이때 ‘그렇게 우는 게 아니여’라는 대사는 이 눈물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해당 대사가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는 성진이 장례식장에 입장할 때의 첫 번째 통곡을 진짜라고 믿었다. 그 대사가 등장했다고 해서 말녀의 죽음에 대한 가족들의 눈물이 모두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눈물에는 진심의 슬픔과 일말의 세속성이 공존하고 있다. 이를 방증하는 듯 통곡 장면 바로 뒤에는 가족들이 부의금을 세는 장면이 이어진다. 장례식이 끝난 후 태근 부부와 혜숙이 사라진 돈을 두고 갈등을 빚을 때에도 영화는 이를 풍자적인 시선으로 담지 않고 각자의 사정을 충분히 담아내어 그린다. 그러니까 이 갈등은 돈으로부터 말미암은 온전히 세속적인 갈등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 간의 감정들, 일말의 탈속성이 담긴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장손>은 돈과 눈물, 세속성과 탈속성, 코미디인 것과 코미디가 아닌 것 사이를 정확히 포착해내는 영화의 균형감과 자유로움과 책임감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청년 캐릭터의 균형감을 연결짓는다. 성진은 태근 부부와 혜숙의 갈등을 탐색하고 진실에 다가서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 기저에는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졸업식과 관련된 고모부의 사고에 대한 성진의 부채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브릿지 헤어를 한 채 크롭티를 입고 장례식장에 왔으나, 이해할 수 없는 통곡의 광경을 목격하고 피식 미소지을 뿐 그 자리를 망치지 않는 옥자의 딸은 또 하나의 성숙한 청년 캐릭터이다. 자유분방하되 그 자유로움이 무책임함이 되게 하지 않으려 하는 인간, 지금 시대와 이전 세대 사이에서 흔들리면서도 끊임없이 균형 잡는 인간이 바로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들이 그리는 청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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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역시 짝 찾기와 퇴사
전쟁 같은 사랑
마치 첫 만남에 내 사랑을 찾은 것 같았다. 그냥 일개 변호사였던 렌필드. 비서를 구한다는 누군가의 공고에 이끌리듯 성으로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이유가 무엇인지 어두컴컴하다. 여기요? 주인을 부르는 질문에 남자가 등장한다. 말투가 이상하다. 뭔가 중 2병의 느낌을 풍기는 남자. 알고 보니 중 2병 무드만 품기면 다행이었다. 남자의 정체는 드라큘라였다. 영생과 무한한 능력을 하사 받은 렌필드. 벌레를 먹으면 모든 걸 다 씹어먹는 빌런이 되어 사람의 팔다리 다 뜯어버린다. 이렇게 초자연적인 힘을 그냥 무료로 얻을 리는 없다. 드라큘라와 렌필드가 만나게 된 계기는 직장이다. 그러니까 렌필드가 드라큘라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입장이었던 셈이다. 피를 먹어야만 생을 연장할 수 있던 렌필드. 렌필드는 순수한 체하며 인간의 피를 구해오거나 사냥꾼들을 드라큘라와 때려잡는 일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 일이 떳떳할리는 없다. 도망자 신세인 렌필드. 드라큘라는 별생각 없어 보이지만 렌필드는 이런 삶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저 그만두고 싶습니다!" 용기 내어 드라큘라에게 고백한다. 드라큘라의 대답은 온화했다. "그래. 뭐 그만둘 수도 있지." 바로 정색하는 렌필드. 드라큘라의 대답은 곧바로 차가워진다. "내 힘으로 이 삶을 누리고 있으면서 감히 퇴사?"라는 말로 맞받아친다. 바로 렌필드를 빈사상태로 만드는 드라큘라. 드라큘라는 렌필드를 구워삶기 시작한다. "오직 나만이 너에게 사랑과 능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드라큘라. 가스라이팅이 시작됐다.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렌필드의 독립은 좀 멀리 있는 듯하다. 과연 그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런 거 좀 기다렸어
2주 전인가? <곰돌이 푸 : 피와 꿀>이라는 영화를 봤다. 본 시기가 주말이었고 cgv 공식 어플의 3천 원 할인쿠폰을 적용해서 봤으니 12000원이 들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고 극장에서 나올 때 엄청 후회했다. 그냥 <리바운드> 볼 걸. 뭐랄까 극장에서 모욕을 당하는 느낌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모욕을 당했을까. 한 35가지의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곰돌이 푸'를 활용한 방식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콘셉트는 인간에게 버림받은 곰돌이 푸와 피글렛이 살육극을 벌이는 내용이다. 퍼블릭 도메인을 패러디해서 영화를 만든 것이다. 단점 중 하나는 이 지점에서 온다. 전체적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이 푸, 피글렛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와 반대로 드라큘라와 렌필드를 활용한 이유를 보여주는 편이다. 일단 드라큘라라는 캐릭터의 가장 큰 특성 중 하나는 피를 빨아먹어야 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렌필드와 드라큘라의 관계를 은유하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 초중반부 렌필드에게 어떤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 덕에 렌필드는 시각이 넓어지는 성장을 겪게 된다. 이 시퀀스에서 하이라이트처럼 반복되는 대사가 있는데 이 문장도 생각해 보면 영화의 어떤 부분을 반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 영화에서 핵심 소재 중 하나인 '나쁜 관계 모임'을 들여다보면 역시 흥미롭다. 이 모임에 소속한 인물들이 빨아 먹히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영화에서 드라큘라의 속성을 빗대 영화의 갈등구조로 활용한 방식은 그냥 단지 재밌으려고 영화의 핵심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은 영화의 강점으로 칭찬받을만하다.
또 영화에서 드라큘라 원작의 디테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는 점 역시 좋은 점수를 줄 만하다. 앞에서 언급한 <곰돌이 푸 : 피와 꿀>은 그냥 등장인물만 갖다 놓은 수준(일례로 푸와 피글렛이 사람들에 상처받아서 극단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인물들이 지나치게 평면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정도)인데 이 <렌필드>는 다르다. 우선 원작에서 렌필드가 어떤 걸 먹으면 힘을 얻는다. 이는 원작에서도 알 수 있는 속성이다. 그러나 렌필드라는 인물의 특성을 갖고 온 지점이 원작에만 있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직업인 변호사에 대한 것도 다른 창작자가 만든 부분을 갖고 왔다. 게다가 영화에서 중후반부에 제시되는 드라큘라의 목표와 관련된 부분도 다른 작품에서 갖고 온 듯하다. 이렇게 이것들 말고 다른 드라큘라들의 특성을 갖고 와서 오마주한 것들을 찾아보는 재미도 분명한 영화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액션 칭찬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코미디적 요소나 자아 찾기라는 테마가 들어있는 대사들이 아니다. 바로 액션이다. 이 영화에서 액션은 필수적이다. 렌필드가 드라큘라에게 자아를 의탁했다는 콘셉트를 살리려면 당연히 렌필드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묘사해야 한다. 영화는 이를 잘 보여준다.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를 예를 들어 설명하면 쉽다. 캡틴 아메리카는 혈청을 맞고 인간의 운동능력 이상의 것을 가진 인물이다. 그걸 기점으로 빌런을 두들겨 패는 캡틴 아메리카. 뭐 빌런들이 붕 날아가는 것도 그의 파워를 보여주는 방식이겠지만 글쓴이는 살짝 다르게 생각한다. <더 수어사이드 스쿼드>처럼 악당들의 팔, 다리를 뽑아버리는 묘사도 그 인물의 강력함을 보여주는 연출 방식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영화는 이를 그대로 구현한다. 렌필드 역을 맡은 니콜라스 홀트는 그 큰 피지컬을 활용하며 합을 잘 맞춘 액션을 보여준다.
그중 글쓴이가 ‘액션 좋다’라고 느낀 부분은 초반부다. 렌필드가 모임을 참석하고 만난 인연이 있다. 이 인연을 괴롭히는 나쁜 인간들을 혼내주러 간다. 이 장면에서 시각적인 효과나 사운드를 잡은 방식이 경제적이었기 때문에 렌필드라는 인물을 설명하기가 용이해진다. 사실 이 시퀀스보다 좋았던 건 후반부/극후반부에 들어가는 액션이다. 이 장면들은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적인 특성을 잘 활용했다는 느낌이 든다. 렌필드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질 수도 있고, 지형지물을 뜯을 수도 있고, 벌레를 먹기에도 용이하다는 특성은 필연적으로 이곳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이 장소의 특성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에도 강점을 가진다. 니콜라스 홀트가 범주가 넓은 배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케서방과 아콰피나
이 영화에서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은 당연히 드라큘라다. 원작을 드라큘라에서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드라큘라라는 역할은 많은 드라마/영화에서 수도 없이 등장했기 때문에 살짝 식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독이 든 성배 같은 역할을 니콜라스 케이지라는 베테랑이 맡았다는 것은 어느 관점에서 신선하게 느껴진다. 니콜라스 케이지 이 영화에서 연기 정말 잘했다. 이 영화 사실 굉장히 잔인하다. 팔다리 뜯기는 건 기본이고 피가 철철 흐른다. 이는 영화의 스타일을 가로지르는 연출 방식이 된다. 반대로, 영화가 호러영화로서의 특성을 가지는 것은 이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 덕분이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정통파 빌런처럼 연기한다. 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잭 니콜슨의 ‘조커’가 생각이 났다. 장난스럽고 익살스럽지만 그만큼 괴기스러운 한 방을 갖고 있는 느낌? 자기 파괴적인 면모를 가졌던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 광기에 사로잡힌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선데이 / 기분 나쁜 느낌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더 배트맨>의 조커, 리들러보다 더 클래식에 가까운 빌런을 연기한 것이다. 실제로도 니콜라스 케이지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쩌면 예상 가능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여기서 영화의 서스펜스를 극대화시키는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또 니콜라스 케이지는 이 영화를 받자마자 자기가 할 수 있는 롤을 그대로 이해하고 연기하는 듯하다. 이런 그의 연기는 전작에서도 볼 수 있었다. <피그>에서 보여줬던 1인 캐리를 이 작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셈이다. 지금 4월이라 속단하긴 이르지만 아마 내년 초 유수의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 후보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아콰피나는 매력적인 캐릭터를 맡아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활약한다. 사실 이 아콰피나가 맡은 역도 좀 뻔하다. 뭔가 이 사람의 이면에 무언가가 있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겉으로 센척하는 그런 인물 타입이다. 어찌 보면 장르의 관습에 기댔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전형적인 캐릭터세팅은 영화의 단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아콰피나는 이를 본인만의 화법으로 주파한다. 글쓴이는 이 역할에서 개성을 부여한 방식이 눈빛연기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렌필드를 대하는 방식이 점점 변하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데, 이를 투사한 표정연기가 이야기의 핵심이 될 만큼 영화에서 악센트를 주는 퍼포먼스를 보여줬다.
강강강
뭐 니콜라스 케이지 연기 잘하고 니콜라스 홀트, 아콰피나가 매력적인 데다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도 건강한 데다 액션까지 잘 뽑아서 적당히 재밌는 영화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영화는 잔인한데도 불구하고 팝콘을 어렵지 않게 먹을 수 있을 만큼 보기 좋은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의 템포가 내내 빠르게 후다닥 진행된다는 점은 호불호가 나뉠 수 있는 한 지점이다. 보면 좀 생략되어 있는 부분도 많고 불필요하게 고어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또 캐릭터들을 사용하는 방식이 살짝 전형적이라는 느낌은 좀 아쉽다. 아이디어가 창의적이었던 것은 맞다. <조커>를 통해 악인의 발생을 탐구해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문제점을 제시했던 것과 유사하게 <렌필드>를 통해 자아 찾기의 의의를 조명한 것이다. 그러나 <렌필드>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메시지만을 표현하기 위해 공장에서 찍은 듯한 느낌이 드는 감이 있다. 왜? 인물들이 다 배우의 이미지에 어느 정도는 의존한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쓰는 시점에서 드라큘라에게 인상 깊던 장면은 있어도 렌필드와 레베카에게 인상 깊던 장면이 뭘까하면 생각이 안 난다. 심지어 이 글을 쓰면서도 아콰피나가 맡은 역을 검색했으니 말이다. 이런 공산품적인 특성은 영화의 후반부 때문에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도 어느 정도 있다. 편의적인 엔딩인 셈이다. 굳이? 싶은 것도 맞지만 영화에서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을 클리셰에 기대느라 불필요하게 사건을 벌였다는 것이 아쉽다. 영화라는 예술의 한 장르에서 엔딩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런데 엔딩을 너무 상투적으로 만드니 ‘안 그래도 뻔한’ 영화가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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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이면서 자살이자 동시에 사고인 것은?
빌어먹을 인연
독일인 작가 부부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사뮈엘(사뮈엘 테이스)이다. 어느 독일의 외딴곳에 사는 두 사람. 두 사람은 아들 다니엘(밀로 다차도 그리너), 강아지 스눕과 함께 살고 있다. 귀여운 다니엘과 대학교수인 사뮈엘, 또 성공한 커리어우먼인 산드라를 보면 이 가족은 행복해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자주 다투는 산드라와 사뮈엘. 이 감정싸움은 산드라가 대학생과 대화를 나눌 때에도 역시 이어졌다.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 산드라와 조에의 대화를 방해하는 남편 사뮈엘. 산드라는 이제 따지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 대학생에게 ‘다음에 만나자’라고 약속하고 그녀를 보낸다. 각자의 시간을 갖는 두 사람. 아들 다니엘은 이런 부모의 관계가 익숙하기라도 한 듯 스눕과 함께 산책을 나선다. 눈 밭을 몇 분 돌아다니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갑자기 강아지 스눕이 이상한 행동을 보여준다. 킁킁 냄새를 맡으며 달려가는 스눕. 다니엘 역시 스눕에게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듯 강아지를 쫓아간다. 강아지가 이끈 곳에는 아버지 사뮈엘의 시체가 있었다. 시체로 발견된 사뮈엘. 그리고 유력한 피의자가 된 산드라. 산드라를 변호해야 하는 변호사 뱅상(스완 아를로드). 이 세 사람과 강아지 스눕은 길고 긴 법정싸움을 맞이한다. 과연 이 추락의 전말에는 어떤 이면이 깔려 있을까?
우리가 아는 법정영화는 아니야
이 영화를 두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기생충>과의 공통점이다. 글쓴이가 <기생충>을 예시로 이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싶은 특징은 <추락의 해부>가 전형적인 범죄/스릴러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생충>이 전형적인 장르물을 표방했다면 문광 부부의 존재가 그렇게 입체적이지 않을 것이다. <기생충>은 문광 부부를 통해 계층 구분을 박살 내며 이 사회에 도사린 문제를 탐구한다. 이 점에서 <기생충>은 목표를 충실하게 이룬 성실한 영화가 됐다고 생각한다. 본작 <추락의 해부> 역시 이와 비슷하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한 남자의 살인사건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과 변호사를 보여주면서 포문을 연다. 살인사건 피해자의 아내가 피의자로 재판대에 선다. 여기까지 보면 그냥 일반적인 범죄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강화시킨 토대를 바탕으로 어떤 것을 탐구한다. 이 떡밥은 첫 장면부터 읽을 수 있다. 주인공 산드라가 대학생과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화는 원활하지 못한데,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이를 중심으로 플롯을 받아들이면 영화가 정말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직접 체감할 수 있다. ‘이 것’이 <추락의 해부>에서 유달리 방해받는 느낌이 강한데 이는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형식을 플롯에 녹였다고 볼 수 있다. 미스터리로 이야기를 끌고 가다 자연스럽게 인간 그 이면에 깔려있는 무언가를 비판한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가 전형적인 장르물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살인 사건이라는 소재를 다방면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어떤 관점에서 읽어도 합리적이다. 살인일 수도 있고, 타살일 수도 있고, 사고일 수도 있다. 이 <추락의 해부>의 각본은 이 세 죽음의 구분선을 흐려놓는 연출법을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법정 장면을 연출하는 방식이 이 사뮈엘의 죽음을 다층적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요소다. 빠르게 전개하고 싶었으면 전형적인 법정물처럼 더 쉽게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재판 장면은 실제 법정을 보는 것처럼 느릿느릿하다. 왜? 재판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최대한 많이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물의 감정선을 폭넓게 담아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두 가지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산드라와 사뮈엘의 관계를 비춘다. 이 유별난 관계는 사실상 이 영화의 모든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 불완전한 관계를 통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여러 소재가 빛을 발한다.
<결혼의 풍경>과 <살인의 해부>
사실 글쓴이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먼저 생각난 작품은 노아 바움벡의 <결혼 이야기>다. 이 <결혼 이야기>의 감독이 1973년 잉베르 베리만이 만든 <결혼의 풍경>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니 이 <추락의 해부>는 <결혼의 풍경>과 많이 닮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 <결혼의 풍경>과 <결혼 이야기>는 협력과는 저 멀리 떨어진 부부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 <추락의 해부> 역시 함께 같이 살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이는 부부가 등장한다. 이 부부를 둘로 가르는 소재가 흥미롭다. 이 두 사람이 갈리는 계기도 앞에서 쓴 <결혼의 풍경> 같은 영화를 인용한 흔적이 난다. 하지만 원작의 여부와는 별개로 이를 표현하는 방식도 고전적인 향을 풍기고 있다. 인물의 내면을 깊숙하게 다룬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글쓴이는 두 주인공의 직업과 관련된 부분에서 ‘고전적이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가 편집이나 음향 같은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뛰어나지만 인물을 그리는 방식에서 섬세하다고 느낀 것이 이 지점이다.
또 이 영화에 느껴지는 고전적인 향기는 <살인의 해부>라는 영화에서도 맡을 수 있는 것이다. <살인의 해부>는 1959년에 발표된 영화다. <12명의 성난 사람들>과 유사하게 법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법정극을 통해 <살인의 해부>는 말 그대로 살인(자)과 관련된 일들을 나노단위로 분해하면서 인간의 한계와 사법제도의 단점을 폭로한다. <추락의 해부>는 <살인의 해부>가 사법제도를 비판한 것처럼 어떤 것에 대해 역설한다. 논리가 뭘까? 주장은 또 뭘까? 논증은 뭘까? 이 많은 것들을 통해 어떤 것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한계가 있지 않을까? 안다는 건 뭘까? <추락의 해부>는 이 부분에 대해 인간의 인지단계를 해부한다는 점에서 뛰어난 각본 능력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영화를 담기 위해 살인사건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 역시 감독 쥐스틴 트리에가 선택한 좋은 수였다. 만약 살인사건이 아니라면 이 영화가 다루다 못해 병치시킨 두 가지 소재가 구현되지 않았을 것 같다.
쫓아가는 카메라
이 영화에서 글쓴이가 가장 좋았던 것은 촬영이다. 이 영화에서 앞/뒤/좌/우로 마치 틀이 있는 것처럼 오고 가는 카메라는 마치 관객을 법정으로 초대한 것처럼 움직인다. 이는 이 영화의 법정에서 산드라가 받는 대접을 생각하면 적절한 촬영방식이었다. 이 부분은 법정 밖에서도 그대로 이어간다. 글쓴이는 이 영화의 카메라가 관객과 다니엘을 일치시킨다고 느꼈다. 다니엘은 극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모르는 것을 새롭게 아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모르는 걸 안다'는 건 본디 불안정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를 그대로 반영하듯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획 돌려서 시체가 발견된다거나 어머니 산드라의 얼굴이 어두컴컴 해진다던가 하는 장면이 몇 보인다. 이런 것들은 영화의 핵심인 인식에 관한 문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을 보다 용이하게 끌고 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른 맥락으로 읽을 수 있어
글쓴이는 이 영화에 있어 '스눕'이라는 개가 의미심장했다. 이 스눕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적는다면 굉장히 큰 스포일러가 되니 다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꼭 써야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인간의 인식론을 떠나 여성영화로서의 측면도 있다고 글쓴이가 주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단 스눕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사건 구도만 봐도 이 영화가 가진 여성서사로서의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를 이루고 있는 많은 요소들을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작품이 가진 풍부한 함유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추락의 해부>가 그냥 1차원적인 여성영화인 것은 절-대 아니다. 이 영화는 여성 영화로 읽을 수 있는 측면을 인물을 중심으로 다방면에 깔아놓고 있다. 주인공 산드라의 행적을 주의 깊게 본다면 이 영화가 가진 입체적인 특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 여성영화로서의 맥락은 이 작품의 엔딩과도 관련이 있다. 많은 관객들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의문점이 많을 것 같다. 이렇게 쭉 달려와서 도착한 결론이 명확하게 끝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괴물>처럼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는 엔딩을 보여주진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엔딩은 사실상 이 <추락의 해부>가 끌고 가는 핵심 사건을 비유한다는 점에서 원형처럼 돌고 돈다. 산드라를 둘러싼 환경을 구도로 비유한 것이다. 이것을 한 여성 캐릭터가 당당히 주체적으로 서는 과정이라고 이해한다면 이 영화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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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둘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개봉 첫 주 150만명을 기록하며 1위로 올라선 <콘크리트 유토피아>,
누적관객수 430만명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을 넘긴 <밀수>! ✍
[1] 국내 주말 박스오피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개봉 첫 주 누적 관객 수 150만명을 동원하며 개봉 첫날부터 압도적인 수치로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으며 <밀수>가 누적 관객 430만명을 기록하며 손익분기점 돌파에 성공했습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주말 관객수 110만명을 끌어올리며 1위를 지키고 있던 <밀수>를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배우들의 열연과, 완성도 높은 작품성으로 화제를 일으키고 있으며 개봉 2주차에 광복절 휴일을 맞아 예매율을 더욱 높일것으로 예상합니다. 영화는 다음 달 7일 열리는 제 48회 토론토국제영화제 갈라 프레젠테이션 부문에 진출했다고 밝혔습니다.
<밀수>는 개봉 이후 꾸준히 높은 예매율과 좌석 판매율 역시 높은 수치를 기록하며 전 세대 관객이 사랑하는 영화의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밀수는 2주차에 총 관객 435만명을 기록했으며 개봉 4주차를 앞두고 다양한 신작 공세 속에도 예매율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손익분기점 400만명을 넘기며 <범죄도시3> 이후 가장 크게 성공한 한국영화이기도 합니다.
<엘리멘탈>이 다시 박스오피스 3위로 올라오며 두달이 넘게 흥행을 이어가면서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밀수>와 함께 'k장녀' 서사가 통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고 흥행과 더불어 OST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참담한 성적을 보이고 있는 <비공식작전>이 4위에 머물렀습니다.
<엘리멘탈>에 다시 3위 자리를 빼앗기며 관객수와 박스오피스 순위 모두 점점 밀려나는 행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미션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은 400만을 앞두고 있으며 이전 시리즈에 비해 아쉬운 성적이지만
한국 텐트폴 영화 성적에 비해 꾸준히 순위권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2] 북미 주말 박스오피스
<바비>는 북미 누적 매출액 5억 2600만 달러를 넘겼고 전 세계 총 수익은 약 1조 5천억 원을 넘긴 상태입니다. <오펜하이머> 또한 전 세계 총 수익 6억 5천만 달러를 기록하며 역대 전기 영화 중 가장 높은 수익률을 기록했습니다. <바비>가 세계적으로 히트를 하고 있는 가운데, 유독 한국에서만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중이며 오는 15일에 한국에서 개봉 예정인 <오펜하이머>는 사전 예매율만 40만 장을 넘기며 흥행 돌풍이 불 것으로 예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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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예전 흑백영화를 보고 있는 착각이 드는데요. 흑백영화 특유의 화면 질감과 음향이 완벽히 재연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맹키위츠가 보고 들었던 그 당시의 할리우드 권력과 정치인들의 위선이 그대로 영화에 담겨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그런 점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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