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2024-10-02 23:59:22
다르다는 게 틀린 건 아니니까, <위국일기>
<위국일기> 시사회 리뷰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절연한 언니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소설가 ‘마키오’는
홀로 남은 조카 ‘아사’의
존재를 알게 된다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혼자가 된
‘아사’를 향해
수군거리고
이를 참지 못한 ‘마키오’는
홧김에
‘아사’를 집으로
데려오는데…
서로 다른 우리가 함께 살 수 있을까?
🔖평범하지만 특별한 동거
누적 판매 180만 부를 기록한 야마시타 작가의 동명 인기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 <위국일기>. 베스트셀러 작가 '마키오'가 절연한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언니의 딸이자 자신의 조카인 '아사'를 본인 집으로 들이게 된다. '버려진 대야 같은 신세'라고 사람들로부터 낙인이 찍힌 '아사'를 보고 충동적으로 보호자를 하기로 결정한다. '마키오'는 자신의 언니한테는 장례식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만큼 나름의 악감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의 화살이 '아사'한테까지 갈 이유는 없으니까 말이다.
'다른 나라에서 쓰는 일기', '어긋난
나라의 일기' 라는 제목이 나타내는 것처럼 '마키오'와 '아사'는 서로 다른
생활방식, 성격으로 함께 사는 데에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엄마' 혹은 '언니' 라는 인물을 향한 감정 자체가 다르기에, 그 갈등은 더 심해져갈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나라에 사는 듯하며 끊길 듯 안 끊기는 이 관계를 지속하며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한다.
😭귀엽고 예쁜 여자 캐릭터의 축복이 끝이 없다..
만화 원작을 안 봐도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영화를 보고나니 개인적으로
만화를 꼭 보고싶은 마음이다. 물론 러닝타임이 130분이
넘어 꽤 길었음에도 평온하고 따뜻한 방법으로 관객을 집중시켰다. 어른이 되어도, 나이가 여전히 들어가도 '성장'이라는
건 누구나 다 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한편으론 아라가키 유이 배우가 맡은 '마키오' 배우의 감정선이 다소 갑작스럽게 보였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다시
말해 인물의 심경 변화 서술이 쪼금 평이하게 다가왔다. 그치만 원작의 전부를 다루지 않았으며 '아사'가 밴드에 들어가 노래하는 부분에서 결말이 맺어진다는 점이
더욱 좋았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깔끔하게 끝났다는
느낌이다. 실제 다른 후기들을 찾아보니까, 원작에 비해 분위기가
밝다는 평이 꽤 보이던데 맞는듯하다.
사실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연출, 원작 비교 등등 다 괜찮고 보통이었지만!!! 어쩜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마다 다 귀엽고 예뻐서.. 원작 만화도
이런가?? 싶은 생각이었다. (이 부분 때문에 더더욱 만화를
찾아보고 싶음..) 만화찢고나온 여자 배우들이 계속 해서 나오는데 그래서 몰입이 더 잘 되었던 기분이었다.
별점 3.5 / 5 일본 작품의 훈훈한 분위기를 가볍게 느끼고 싶다면!! 보는 걸 추천한다.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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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적만 남긴, <파이어버드>
파이어버드 Firebird, 2021 제작
에스토니아, 영국 / 15세 이상 관람가 / 107분
감독: 페테르 레바네
흔적만 남긴, <파이어버드>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검은 가시와 장미, 미소와 눈물은 함께 태어나 같이 존재한다."
마치 모든 것을 통달한 사람처럼 인생이 인간에게 쥐여준 필연적인 균형에 대해 낮게 읊조리는 한 남자.
주인공 '세르게이'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파이어버드>는 배우 세르게이 페티소프의 회고록(로만 이야기)을 담은 작품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얼마나 섬세하게 뚜렷한 목적을 영화 안에 녹여내느냐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 '왜' 실제 인물의 삶을 영화로 만드는지 묻기보다, '어떻게' 그의 삶을 조명하고 그려낼 것인지가 더 중요한 이유다. 감독이 여러 실화 혹은 사건 중 콕 집어 그의 기록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하려고 애썼다면, 영화의 정체성과 세르게이의 신념을 대변하는 독백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세르게이는 1970년대 냉전 시대 안에서 수많은 금기에 묶인 채 자기 삶의 목적을 찾고자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 친구들과 달랐다. 그들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했고, 조금 더 빨리 어른이 됐다. 행복과 불행은 함께 오는 것임을 터득한 뒤로는 친구들이 오늘 뭐 하고 놀까 생각할 때 카메라를 들고 그들을 찍었다. 단순한 피사체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과 표정에서 삶을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 고민했고 그 힘에 관해 탐구했다. 이미 상실과 고통을 경험한 그에겐 반드시 해답이 필요했다. 물속에서 절친 디마를 영영 놓친 어린 세르게이는 성인이 된 후로도 여전히 그때의 사건을 악몽으로 꾸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그 당시 '다른'이 아닌 '틀린' 형태의 사랑이 찾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실 그는 처음부터 답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사랑. 단순하고도 너무 얇아 언제든 끊어질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너무 깊고 단단해서 영원할 수밖에 없는 사랑. 대체 왜 그에겐 그런 사랑이 필요했을까. 세르게이는 검은 가시와 장미. 미소와 눈물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함께 공존하는 빛과 어둠의 관계와 다르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를 맞다고 입 밖으로 내뱉으며 스스로 사각 틀에 들어가지 않았을 뿐이다.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언제든 말할 수 있는 입을 닫고 말이다. 그에게 사진을 찍는 행위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투쟁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조용히, 또 자연스럽게 자기의 풀리지 않는 길에 대해 치열하게 부딪칠 수 있는, 나만의 방법.
그의 열망을 카메라의 초점이 대신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연기자를 꿈꾸기 시작했을 때부터? 꿈을 접고 의무 복무를 하기 시작한 날부터? 아니 삶이 처음 흔들렸던 사건? 아, 디마를 잃고 난 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하나 확실한 건, 그의 침묵은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진으로 대체되었고, 지금도 대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위협적인 현실을 투정하기보다 자신의 아픔과 본인이 바라는 것을 같은 선상에 두고 끊임없이 '살아가는 방법'에 집중한 결과이기도 하다.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그는 안전한 믿음이 필요했다. 자신의 사랑에 대해 확신이 필요했고, 확신을 넘어선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길 원했다. 세르게이에게 사랑은 그런 의미였다. 문을 열고 집을 나간 순간부터 사람들이 원하는 자로 연기하며 살아도 좋으니 진짜 나란 자아를 확실하게 지켜줄 수 있는 울타리. 답은 로만이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던, 자기 사진에 담긴 격렬한 투쟁을 로만이 알아준 순간 세르게이는 카메라에서 멀어진다. 그 순간을 평생 기다려왔던 사람처럼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유로워진다. 로만이 준 비행기 모형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그때부터 꿈도 다시 꾼다. 의무 복무를 마치고 연기를 하겠다는 꿈, 그것은 분명 로만이 불어넣어 준 사랑의 결과물이 될 예정이었다. 세르게이는 '나'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 용기를 갖게 되면서 직접 사진 밖으로 나갈 아주 좋은 명분도 함께 얻었다. 그만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늘 친구들에게 현실 세계로 돌아오란 장난 섞인 진담을 들어야 했던 세르게이. 그럴 때마다 그는 "나중에-"라고 말하면서도 씁쓸한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조금만 스쳐도 살이 베어나갈 것 같은 냉전 시대 속에서 로만과 세르게이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더 단단하게 서로를 붙잡는다.
스스로 몇 번이고 되뇌며 명심하고 또 명심했던 독백을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말이다.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잊어버린 건 세르게이만이 아니다. 로만이 숨겼던 가시를 드러낸 순간 <파이어버드>는 흔들린다. 군부대에서 혼자 카메라를 들고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을 담던 세르게이는 애초에 없던 사람이 되어버린다. 여자를 바라보는 강렬한 남자의 눈과 그의 뜨거운 신호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는 여자의 입가만을 틀 안에 담으며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 또 기다렸던 세르게이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남자의 눈과 여자의 입은 아무리 강한 압력에도 절대 변하거나 바뀌지 않는 세르게이만의 사랑 언어로서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던 '나의 것'이었다. 동시에 <파이어버드>만의 독특한 색깔이었다.
로만과 세르게이에게 잇달아 주어지는 문제와 반복되는 우정과 사랑의 격돌은 구조 속에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고 다시 카메라 렌즈 안에 갇히고 만다. 직접 두 인물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알고 또 아는 퀴어 영화의 상승과 하강 꼭짓점들을 그대로 밟으며 전개된다. 영화 속 인물은 가장 먼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의 매력을 결정짓는 것 역시 인물이다. 세르게이 역시 그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쉽게 예측되는 그들의 다음 행위로 인해 <파이어버드>가 초반에 쌓았던 견고한 정체성은 무너진다. 특별하지도, 특색이 있지도 않은 무난하고 평범한 전개 방식을 그대로 표방해 초반까지만 해도 살아 숨 쉬던 인물들은 이미지 몇 장으로 기록된다. 세르게이가 담담히 건넨 인생의 균형도 물거품으로 흩어지고 만다.
출처: 영화 <파이어버드> 스틸컷(다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시점에서 벗어나, 영화 <파이어버드>가 남긴 건 무엇일까.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란 표면적인 주제를 제외하면 세르게이와 로만이 서로를 향해 혹은 자기 자신에게 했던 말들만이 남는다. 관객이 인물에게 깊이 공감하고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연민의 지점(유일한 방법)이었지만, 끝내 실패해 흔적만 남은 대사들.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선택과 결정이 작품을 다 채우지 못해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해할 순 없어도 사랑할 순 있다고 했다. 정말 그럴 수 있다고 믿지만, 그들을 완전히 사랑할 수 없었기에 <파이어버드>를 온전히 바라보는 것 또한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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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우리는 무언가를 믿으며 살아간다 – <헤레틱> 리뷰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헤레틱>은 두 몰몬 교 소녀가 미스테리한 집에 가정 전도를 하며 일어나는 일을 다룬 영화이다. 비교적 최근 개종한 금발머리의 여리여리한 팩스턴 (클로이 이스트) 과 똑똑하고 야무진 인상의 반스 (소피 대처) 는 몰몬 교의 교리에 관심을 보이는 중년 남성 리드 (휴 그랜트)의 집에 방문한다.
리드는 우호적인 태도로 그들을 맞는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반스와 팩스턴은 리드의 응접실에서 전도를 이어 나가지만, 리드가 불편한 질문을 쏟아내자 불안해진다.
리드는 궁극적인 단 하나의 믿음을 보여주겠다며 반스와 팩스턴을 지하실에 가두고,둘은 리드의 집에서 탈출하기 위하여안간힘을 쓴다.
리드의 집은 <헤레틱> 에서 하나의 중요한 캐릭터이다. 팩스턴이 작중 언급하듯 성당을 개조해 만든 듯한 구조의 집은 리드의성전이자 예배당이다.
마치 19세기 전설의 H.H 홈스 살인호텔 처럼, 겉면과 달리 오로지 감금과 통제만을 목적으로 설계한 리드의 집은 온화한 서재,응접실과 이면의 더럽고 축축한 지하실을 통해 리드의 캐릭터를 그대로 표현한다. 수직의 벽과 도형적 공간감이 유독 강조되는것 또한 ‘종교’ 라는 테마를 시각적으로 강조하고, 리드의 집에 흐르는 미로같은 폐쇄성을 전달한다. 촬영 감독 정정훈은 문이 있는 리드의 서재 장면 대부분을 아나모픽 광각 렌즈로 촬영하여 관객에게 갇힌듯한 위압감을 불어넣는다.
영화의 초중반부 리드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자신의 세상에 팩스턴, 반스와 여자들을 가두어 놓고 조종하는 리드는 그 자체로 종교를 은유한다. 영화는 종교는 궁극적으로 남성으로 표현되는 종교 지도자와 신이 그들의 규율로 세상을 얽는 행위임을 리드의 행동과 입을 빌려 말한다.
리드는 신이라도 된 듯 자신이 설계한 지옥도의 모형에 나무 인형을 깎아 넣으며 소녀들을 자신의 수중에서 굴린다. 그들이 특정한 반응을 보인 시간마저 기록하는 리드는유일한 종교는 통제이며, 통제가 곧 모든 종교가 공유하는 하나의 원칙임을 적극적으로 어필한다.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믿음’ 이란 단어는 리드의 집에서 헤게모니를 유지하는 자율적인 속박일 뿐이다.하나의 방으로 이어져 있는 믿음/불신의 문 역시 종교적 신념에 관한 리드의 냉소적 태도를 드러낸다.
시험에 든 선지자와 믿음을 시험하는 악마의 구도를 통하여 종교의 이면을 고발하던 <헤레틱> 은 결말부 이후 다른 코너를 돈다. 리드의 목을 긋고 도망친 팩스턴은 자신을 따라온 리드의 칼에 찔린다.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한 순간 팩스턴은 리드를 위해기도를 시작한다. 기도는 아무 효험이 없다 비웃는 리드에게 팩스턴은 의외의 말을 건넨다. 실험 결과에 의하면 기도는 정말 아무 효력이 없으며, 자신도 그를 알고 있다는 것. 줄곧 리드의 무기였던 수치와 이성을 팩스턴이 꺼내든 순간, 리드는 한없이 무기력 해진다. 영화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진정한 ‘믿음’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지금까지 독실하고 순수해 보였던 팩스턴이사실 리드가 말하는 통제적인 종교의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임이 드러난다.
팩스턴은 종교의 도구이자 한계인 교리와 신을 맹신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에게 믿음이란 삶의 방식이며, 자신이 선택한 삶의 가치이다. “기도의 효력은 가짜임에도 누군가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생각해 준다는 것은 좋은 일” 이라 말하는 팩스턴은 ‘신은 죽었다’ 주창하는 리드의 지하실에서 인간이 만든종교의 틀에도, 리드의 안티 테제에 갇히지도 않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끝까지 수호한다. 팩스턴은 그저 모순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팩스턴에게 종교의 모순이란 전혀 새로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팩스턴에게 쓰러지며 리드는 아마도 삼켜왔을 울음을 터뜨리며 절규한다.
<헤레틱>은 통제 수단으로의 종교, 진실보다는 편의와 자가복제를 반복한모순을 지적하며 종교를 무너뜨린다. 또, 결말부 중년 백인 남성이라는 권력을 쓰러뜨리며 영화는 기존 질서를 전복하기를 반복한다. 광기로 무너진 질서와 가치 구조에서 자신의 신념 – 종교적 신념이 아닌 삶에 대한 신념- 을 추구하는 팩스턴은 거시적 믿음과 방향성이 사라진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 스스로 삶의 가치를 정의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실존주의 철학으로 영화를 이끈다. 무엇을 믿을지 알 수 없는 폭력적인 세상 속 삶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미시적인, 지극히 개인적이고 스스로 정했기에 더욱 굳건한 믿음 뿐이다. <헤레틱>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그런 믿음이 기왕이면이타심, 혹은 서로를 향한 건전한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속삭이며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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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자 알아서 함께,<강변의 무코리타>
* 본 리뷰에는 영화의 자세한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강변의 무코리타 Riverside Mukolitta, 2021
일본 / 드라마 / 121분
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각자 알아서 함께, <강변의 무코리타>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작은 어촌 마을에 있는 오징어 공장에 취직한 야마다의 목적은 오늘을 사는 것이다. 어제를 잊고 오늘을 무사히 넘겨 힘차게 내일을 맞이하고 싶단 희망적인 메시지로 읽을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그의 '오늘' 안에는 다음 날을 향한 기쁨이나 설렘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삶의 여유는 물론이고 이를 찾으려는 의지도 없다. 그저 하루를 흘려보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인생을 알차고 즐겁게 살겠다는 다짐과는 아주 먼, 무기력하면서도 음울한 그의 억지다짐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야마다는 과거를 지우기 위해 도망쳤으나, 지울 수 없어 단순한 노동으로 몸을 혹사하지 않으면 정신이 미쳐버리는, 오늘 현재에 정체된 인물이다.
그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인물을 특이한 방식으로 소개하는 영화의 특성 덕분이다. <강변의 무코리타>는 모든 인물의 서사를 순간 포착한 사진(이미지)들로 설명한다. 사진 안에는 인물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담겨 있다. 인물을 둘러싼 환경, 인물의 말과 행동, 인물이 겪을 사건과, 이미 겪었던 사건까지 어마어마한 수의 픽셀로 이루어졌다. 나아가 한 인물에 대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내고 있어, 보는 사람의 역량과 상관없이 누구나 영화의 이야기와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주인공 야마다로 예를 들자면, 누가 툭 치면 바로 쓰러질 것처럼 아무 의욕 없이 마을에 들어서는 그의 걸음걸이와 반가움에 건넨 사장의 악수를 받지 못하고 삐걱대며 주춤거리는 그의 옆모습이 대표적이다. 두 장의 이미지는 이야기 초반에 등장해 야마다의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전달하고, 그의 이전을 짐작하게 하며, 이후의 모습까지 상상하게 만든다. 특히 한없이 무력한 두 눈과 한껏 말린 어깨는 막 오징어 공장에 떨어진 그의 현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낸다.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공장 사장의 소개로 무코리타 연립주택에 입주한 야마다에게 막무가내 이웃, 시마다가 찾아온다. 얇은 벽 탓에 목욕을 방금 마친 걸 알고 있다며 뻔뻔하게 자신도 욕실을 쓰게 해 달라는 시마다. 야마다는 난처함을 표하며 그를 내쫓는다. 찰나의 순간, 시마다는 야마다에게서 자신과 같은 구멍을 발견한다. 분명 나와 다르지만, 내가 가진 것과 같은 구멍. 주택에 사는 사람들도 당연하게 품고 있고, 인간이라면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것.
"안심하세요, 사람은 누구나 다 죽는답니다."
인간의 죽음. 태어난 순간 당연하게 예정되는 마지막 순간. 영화는 인물들의 살아있음으로 우리의 끝을 이야기한다. 주택 입주민들의 감춰진 이야기는 야마다에게 도착한 연 끊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시작으로 한 명씩 밝혀진다. 시마다는 자식을 잃었고, 미나미는 남편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미조구치는 아들과 함께 묘석 방문 판매를 하지만 반년째 집세를 내지 못하고 있다. 강변의 노숙자들은 여름 태풍이 올 때마다 친구를 잃고 있었다. 모두가 생의 끝자락에서 가족을 잃은 상실과 나를 찾지 못한 슬픔, 가치관을 바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무코리타 연립주택에 사는 이들에겐 우는 날보다 웃는 날이 더 많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내일을 생각하며 하루를 산다. 이웃의 이야기에 과도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눈과 귀로 담아내며 타인의 아픔에 소리 없이 공감한다. 세상으로 나와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 몰라 밤마다 구구단을 거꾸로 세며 삶의 공포에서 도망가려는 야마다에게, 입주민들만의 방식은 좋은 본보기로 작용한다.
야마다는 마음을 열고 그들과 교류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멈춰있던 그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과 이별, 상실을 품고 사는 그들만의 방식을 보고 들으면서 자신이 의도적으로 감췄던, 이미 커다랗게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숨은 상처받은 어린 나를 구출한다.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텃밭을 가꾸는 시마다는 소소함에서 행복을 찾는 자칭 미니멀리스트다. 그는 자신의 가난을 타인에게 숨기지 않는다. 자신만이 줄 수 있는 소소한 답례로 타인에게 도움과 배려를 당당히 요구한다. 야마다의 욕실과 밥통과 선풍기까지 마음대로 쓰면서, 건네는 건 텃밭에서 난 채소뿐이다. 야마다는 그의 무례함에 대응하지 않는다. 시마다가 건넨 채소는 그를 굶주림에서 구해줬고, 더 나아가 아버지의 끝처럼 고독사로 죽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해 줬기 때문이다. 그는 시간이 갈수록 시마다를 무례한 이웃이 아닌, 좋은 밥 친구로 인식한다. 밉상으로 전락하기 쉬운 옆집 사람이 무코리타 주택에선 친근하고도 마음 따듯한 이웃이다.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주택 주인 미나미도, 반년 만에 묘석을 팔아 집세를 내는 대신 소고기 전골을 사 먹는 미조구치도, 말없이 눈빛만으로 사람을 제압하는 스님도, 골동품으로 쌓은 쓰레기 산 위에서 외계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두 아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각자 자신만의 속도와 흐름으로 야마다를, 이웃을 살피고 자기 자신을 돕는다.
물론 그들도 자기가 만든 구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야마다와 다른 점은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함께 견디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옥죄는 고통을 아주 조금씩 일상에 녹여내며, 언제 다 녹여내고 뿌리 뽑을지 생각하지도 않는다. 초조함이나 조급함 없이 묵묵히 내일을 살아가려 시마다는 텃밭을 가꾸고, 미조구치는 아들과 함께 계속 고객의 문을 두드린다. 야마다도 오징어를 손질하듯 자신만의 속도로 아버지의 죽음을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며 해체한다. 자기를 버렸던 엄마의 기억을 떠올리고, 계속 따라다니는 두려움과 분노의 실체를 입 밖으로 털어놓는다. 이미 뚫려버린 구멍을 메우기 위해선 그 깊이를 먼저 알아야 하니까.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누구든 다시 시작할 기회가 있는 법이야."
야마다의 사정을 알고 있던 공장 사장의 첫마디, 영화는 처음부터 친절했다. 야마다를 위해 준비된 위로와 사람들, 끝내 미소를 되찾는 그의 정해진 미래까지 무난하고 뻔한 전개 방식이지만, 이는 <강변의 무코리타>가 의도한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현실 속 우릴 대변하는 건 인물밖에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가장 두렵게 하고 움츠리게 하는 건 무엇일까. 영화는 죽음이 그 시작이라 봤다. 야마다와 이웃들을 통해 '인간이 죽는 건 당연하다'는 말속에 담긴 부정을 긍정으로 바꿔 가는데, 단순히 죽음을 좋고 친숙하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같은 선상에 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마땅하다는 것을 얘기한다. <강변의 무코리타>의 강점은 이를 위해 우리의 생을 가장 먼저 찬미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지만, 영화의 추는 늘 살아감에 위치해 있다. 반드시 찾을 수 있는 행복과 희망, 그리고 용기. 야마다는 몰랐던 것뿐이다. 갓 지은 밥을 코로 먼저 맛보고 목욕 뒤 맥주 대신 우유를 마시는 일이 사실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소소한 버팀목이었고, 민달팽이를 보며 어머니를 떠올리고, 과거에 발목 잡혀 불면증에 시달리는 일은 ‘내’가 살아가고 있기에 겪는 과정이었단 진실을 말이다. 야마다는 이웃들과 똑같이 ‘종료되지 않는 치유 과정’에 들어가면서 생명의 전화를 거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랬듯, 깊은 위로로 받아들인다.
출처: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스틸컷 (다음)
<강변의 무코리타>가 세운 확실한 전제가 좋다. 연립주택에 사는 이들이 구멍을 없애려고 일부러 함께 모여 살고 계획적으로 이웃에게 관심을 주는 게 아니라는 것, 각자의 방식으로 나의 아픔을 헤아리면서 무작정 타인의 아픔을 위로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 의도적이지 않은 관심과 크기를 재지 않는 진심, 실없이 터지는 무해한 웃음으로 자연스럽게 소통하며 서로를 보살피는 그들의 이야기는, 정말 위로와 힘을 주는 영화다웠다.
야마다 아버지의 유골함, 미니멀리스트 시마다의 거미줄 이야기, 허기진 배를 채우는 미조구치의 상상극, 생명의 전화와 하늘을 헤엄치는 금붕어, 연립주택 사장 미나미가 품은 남편의 뼛조각, 외계인의 연락을 받기 위해 쌓은 전화기 산, 강변 노숙자의 기타 연주… 다양한 형태와 질감 그 속에 똬리를 튼 생의 의미까지 <강변의 무코리타>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구멍을 파고 또 파면서 이미지를 순간 포착해 생산하고, 비로소 단 한 장의 사진(영화)을 찍어 낸다.
그들의 가족사진에서 하늘을 헤엄치는 금붕어가, 떠난 이들의 유영이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강변에 노을빛을 뿜어내는 무코리타가 온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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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새
벌새
1994년에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다행히 2년 전, 산본신도시에 작은 아파트를 분양 받아 입주한 것이 30년 동안 살아온 보람이자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산동네 빈민촌에서 월세, 전세를 전전하다 어렵게 집을 마련했으니 큰 짐은 덜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프리랜서 활동을 하며 출판사, 잡지사와 계약을 맺고 이러저러한 책을 만들고 있었는데, 수입은 적었고, 그나마 불규칙하게 발생하는 수입으로 생활은 어려웠다. 마침 이 무렵 써 놓은 일기가 있어서 찾아봤더니, 이 영화에 나오는 사건들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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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18일 토요일
아침에 월드컵 축구 한국과 스페인의 경기가 있었다. 2대 2로 비긴 경기. 나라가 온통 월드컵 열풍에 휩싸여 있다.
1994년 7월 9일 토요일
김일성 주석 사망.
1994년 12월 19일 월요일
연말이 되면서 나날이 바쁘기만 했다. 주위를 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지만 집에서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에는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를 보면서 그때마다 떠오르는 숫한 상념들이 나의 감정을 흔들었다. 이제 일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지만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우리의 삶은 연속되고 있다. 오늘은 사무실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정말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써본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짧은 글이라도 내 마음을 정리하고 깊은 생각 속에서 나온 글이어야 하는데, 지금은 기능적인 글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저기 걸리고 널린 인간관계 속에서 사람은 때로 위안을 얻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제 서서히 1994년을 정리할 때도 되었다. 꼭 정리를 하지 않아도 힘겹게 달려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숨을 고를 필요는 있을 것이다. 신문의 활자를 키운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하늘은 온통 먹구름으로 덮여있다. 가끔 그 속으로 나타나는 햇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대형 사건과 사고가 줄을 이어 터지고 김영삼 정권은 무능하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 나라의 정치는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만큼 저질이다.
사무실을 얻기는 8월부터 얻었지만 출근은 9월부터 했다. 사무실 출근이 하루를 규칙성있게 하는 면이 있어서 좋다. 매달 지불되는 비용이 결코 적지 않지만 그것은 일을 하면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오지 않았던가. 사무실 유지는 그런대로 잘 되고 있는 편이다. 함께 지내고 있는 이00 씨와 00희 씨도 모두 좋은 사람들이다. 조금 성격의 차이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약간의 양보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살아가다 보면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도 많고 참여했다 떨어져나오는 모임도 수없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반복은 줄어들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바른글을 정리하고 새해에는 사람을 정리하고 맺는 관계를 보다 깔끔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다. 정리를 잘 하는 편이지만 조금이라도 걸리고 널린 관계가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서 힘들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언제나 지켜온 원칙이 '양보다 질'이었다. 친구는 적게 사귀되 깊이 사귄다. 무릇 사람의 관계란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과의 관계도 잘 정리를 해야 하겠지만 일과 관계된 것도 잘 정리를 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쓰는 실용서 단행본 작업을 그만둘 수는 없지만 빨리 소설로 돌아서야 한다. 결국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언제나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 싶은 것은 마음뿐일까. 인간이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열악한 도시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마음 속에 생각하고 떠오르는 것들이 거의 모두 작고, 말초적이고, 표피적인 내용들 뿐이다. 출퇴근을 하면서 보게 되는 그 많은 사람들의 모습, 그들의 행동이 나의 감정에 분노와 짜증을 일으킨다. 사람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교양이 없고 무식하며 질이 낮다. 또스또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꼬프'는 이런 주장으로 전당포 노파와 딸을 도끼로 살해한다.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정말 인간은 교양이 있는 사람과 무지한 사람으로 갈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은 이론적으로 이미 나와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존재는 경제적 토대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질적인 수준은 결국 경제문제에 달려있다고 본다. 계급이 없고 착취가 없다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교양있게 살아갈 수 있다. 나 역시 이런 주장을 믿고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저열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례하지는 않다. 다만 사회의 제도, 교육, 빈부의 격차, 권력의 억압, 착취, 계급제도 등 각가지 모순들이 인간들을 기형으로 만들어 갈 뿐이다.
현상은 왜곡된 인간성의 발현일 뿐이다. 이기적인 인간, 조잡스러운 인간, 한심한 인간, 사악한 인간, 더러운 인간, 비참한 인간, 음흉한 인간, 불쌍한 인간, 교활한 인간 등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독버섯으로 키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조건 희생자인가.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 품성은 어떤 사회에서든 존중되어야 하고 지켜져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 품성이란 결국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반영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품성의 미덕은 분명 있다. 권력을 소수가 장악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에 대항하는 주체는 결국 민중일 수 밖에 없고 그 민중은 권력자와 자본가를 대상으로 언제나 대립의 관계에 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민중의 단결되지 못한 현실을 이용하여 수없이 많은 이해관계를 만들고 서로 경쟁하도록 만든다. 산업예비군, 실업율, 대학의 경쟁, 학력중시, 심지어는 지방색까지 만들어서 가능하면 민중들의 단결이 안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서구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리 사회가 극도의 이기주의가 번지는 것은 자본주의 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평등하고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 않는 것은 경쟁을 최우선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와 권력자들은 민중의 삶을 피폐하고 메마르게 하기 위한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다.
이러한 제도는 국가의 경제와 깊은 관계가 있다. 50년대와 60년대는 국가 전체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여 모든 노력을 경제부흥에 쏟았다. 경제발전 속에서 최소한의 인권이나 복지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야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그들이 단지 이땅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행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80년대 이후, 경제가 어느정도 자리를 잡게 되자 자본가와 권력자는 민중을 계속 파편화하고 우매하게 묶어두기 위해 '성'과 '스포츠'를 도입했다. 초기의 권력도 파쇼이고 80년대의 권력도 파쇼임에는 갖지만 경제의 발전정도에 따라 민중을 분열시키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노동악법과 국가보안법 등 탄압과 착취를 강제하는 채찍은 언제나 동일했다.
'개발독재'로 불려진 70년대 파쇼의 시절을 지나 대외 수출이 호황을 맞이하던 80년대와 90년까지 경제의 토대는 성장했다. 대중이 누리는 물질의 풍요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이었고 스스로를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한 증거이다. 하지만 이들도 자신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다. 민중의 기본 삶은 조금 나아졌지만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 소외는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생활이 나아진 만큼 씀씀이도 커지고 경제의 개념이 소비 위주로 바뀌면서 생활 문화가 크게 달라지고 있다.
일정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시간을 노동에 바쳐야 한다. 직장과 직위,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며 갑작스러운 변수, 이를테면 질병, 사고와 같은 변수가 생기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사회의 복지제도가 기본으로 지원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는 분명한 일이다. 또한 일정한 수입은 소비문화를 따라가기에도 벅차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범죄의 유혹을 받고 있다. 공무원의 범죄가 전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그래서 너무 당연한 것이다. 공무원 뿐 아니라 몫돈을 만질 수 있는 일이라면 직업과 나이에 관계없이 한탕주의에 빠져든다. 마약의 밀매, 매춘, 인신매매, 성을 파는 모든 서비스업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격은 경제력으로 대체된다. 아파트 평수와 고급 승용차, 월 수입 등이 지위와 권위를 대신한다. 많은 사람들이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고 있지만 이런 무차별하고 단순한 비교로 심한 박탈과 소외를 느낀다. 경쟁을 부추기고 인간성을 물질로 대신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하지 않고 평등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근본에서 잘못된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서로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의마저도 무시당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나와 우리 가족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무시되고 필요없고 쓸모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가족 이기주의는 자본주의가 만든 가장 성공한 분열방법이다. 사회에 범죄가 극성이고 온갖 사고, 사건, 위험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가족끼리만 다정하고 평화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가족이라는 단위는 경제단위의 중심이기도 하다. 부(물질)의 승계가 가부장제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족은 자본가가 대대로 이어받을 수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이런 경제단위는 소비문화의 주체이기도 하다. 가족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소비문화가 대중을 유혹하고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실하게 확인하도록 만들고 있다. 가족(주로 가부장)은 고급 주택, 아파트를 구입하고 외제 승용차를 사고, 외제 의류를 철마다 사 입고, 고급 백화점에서 날마다 쇼핑을 하고 자녀를 외국에 유학시킨다. 한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보다 결국 자본가이겠지만 가부장의 존재가 가족을 대상으로 이러한 소비를 촉진시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다른 가족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은 없다. 엄격히 말하면 가족이 아니라 언제 깨질지 모르는 최소한의 경제단위일 뿐이다. 가족은 부모와 피를 이어받은 자식으로 구성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혈연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가는 단적인 몇 개의 예만 들어도 충분하다. 비록 자본가라 할지라도 그들이 풍요롭고 넉넉한 물질생활을 누리는 것이 가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이미 고유한 의미에서 혈연공동체나 평등한 관계의 가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먹고 살기 위해 아버지, 어머니, 자식이 아침이면 뿔뿔히 흩어져 공장이나 일터로 나갔다가 저녁에 잠을 자기 위해 들어오는 가정을 어떻게 가족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 돈이 없어 생활이 궁핍하면 가족은 해체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란 '굶어죽을 자유'밖에 없다고 마르크스는 말했지만 가족의 모습 역시 그들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가족의 문제는 가족 구성원의 성격, 이해관계, 희망, 욕심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가족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자본주의 제도, 경쟁, 수입원 등 경제적 이해관계가 더 중요하다. 부모가 넉넉한 수입이 없다면 자녀는 제도교육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제도교육을 일정하게 받지 못하면 좋은 취직자리를 얻을 수 없으며 이것은 결국 수입의 한계에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한계를 극복하지만 거의 모든 민중들은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가난한 가족은 가난함때문에 가족이 갖는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살며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 단칸방에서 서너 식구가 끼어 자야하는 주거생활이 그렇고 사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일상생활이 그렇다. 여기에 가족 구성원이 예기치 않은 사고를 당하면 그 가족은 거의 궤멸에 이른다. 당장 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치료비며 생활비 등 들어가야 할 돈은 평소보다 몇 배에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대책이 없다면 빚을 짊어져야 하고 이 빚은 그 가족을 더욱 가난하게 만드는 올가미가 된다.
가족이 단단히 결속을 하기란 쉽지 않다. 이렇게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하고 살아가야 할 일이 막막해지면 빠르고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어느 사회에서도 빠르고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은 없다. 그렇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편법과 불법이 존재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다. 범죄가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며 여성은 매춘을 한다. 3차 산업의 발달은 제조업 중심의 경제에서 서비스업 중심의 경제로 옮겨간다는 것을 뜻한다. 서비스 산업은 성을 상품화하는 가장 중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여기에 투여되는 여성의 인력은 언제나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유흥업이나 각종 서비스업에는 매매춘이 허용(?)되고 있다. 젊은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경제적인 이유때문에 건전한 가족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오게 된다. 여성의 경우 매매춘을 통해 인간성의 황폐화와 경제적 이익을 바꾸게 되고 남성은 극심한 노동이나 범죄의 방법을 찾게 된다. 가족은 결국 경제적인 이유로 흩어지게 되며 더 이상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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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성수대교 붕괴 사고'는 은희의 가족에게 변곡점이 된다. 은희 개인에게도 가족의 문제와 함께 영지 선생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은희를 둘러싼 세계는 무겁고 답답하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는 일하느라 바쁘고, 학교는 성적 위주로 학생을 평가하고, 어디 한 곳 편하게 마음을 내려 놓을 곳이 없다.
부모는 아들 대훈이 학교 전교회장을 하고, 서울대학교를 들어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은희와 은희의 언니 수희에게는 살뜰하지 않다. 수희는 남자 친구와 어울리느라 학원에 가지 않고,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소리나 지른다.
가족이라고 해도 다섯 명 모두 자기 삶을 사느라 바쁘고, 함께 모이는 시간은 아침 밥먹을 때 잠깐이다. 은희가 '왜 우리 가족은 모래알 같을까'라고 묻는 마음은, 그 이유를 모르지 않기 때문에 더 서글프다.
은희는 한문 학원에서 만난 영지 선생님을 보면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다. 오빠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대학을 다니던 은지 선생님은 다른 어른들이 하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학교가 재미있니, 성적은, 어느 대학 가야지, 같은 뻔하고 지겨운 질문이 아닌, 좋아하는 게 뭐지, 왜 좋아하지, 요즘 무슨 생각해, 같은 자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질문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른, 청소년 할 것 없이 모두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거의 유일하게 영지 선생만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고, 은희가 놓여 있는 상황을 공감하고 있는 인물이다. 영지 선생은 서울대학교를 휴학한 상태인데, 그가 부른 노래, 그의 책장에 있던 책으로 보아 '운동권 학생'으로 보이고, 어쩌면 수배 당한 상태였을 수 있다.
은희의 부모는 90년대 한국 부모의 스테레오 타입이다. 아버지는 가부장적 태도를 보이고, 엄마는 가게 일과 집안 일을 하느라 남편, 아이는 물론 자기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는 사람이다. 언니는 학업보다 남자 친구 만나며 노는데 신경을 쓰고, 오빠는 부모의 기대로 심한 부담을 진 채 학교를 다닌다. 은희는 아직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어린 영혼이지만, 주위 사람들을 관찰하는 관찰자 역할을 한다. 그의 세계는 아직 좁고, 부모, 학교, 학원 그리고 친구들이 세계의 전부인데, 은희가 세계를 깨고 나오게 되는 계기가 영지 선생의 죽음이다.
은희는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은희가 살고 있는 대치동은 지금이나 그때나 강남의 중심이고, 돈 많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여서 은희는 가난한 집 아이였고, 공부도 탁월하게 잘 하지 못하는 아이라 친구들에게 인기가 없다.
한국 자본주의 욕망이 응집된 강남에서 제한 없는 경쟁을 통해 사회의 기득권으로 진입하려는 부모와 그 부모의 욕망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학생들의 삶은 그 자체로 지옥이지만, 이런 지옥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 또한 한국 사회의 특성이다.
영화에서 은희를 비롯해 왼손을 쓰는 인물이 여럿 있다. 주인공이 왼손을 쓰는 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왼손잡이는 소수라는 점에서, 이들이 이 사회의 소수에 해당하는 인물이라는 걸 드러낸다. 은희와 그의 가족은 강남에서 오히려 소수에 속하고, 은희는 학교에서 소수이며, 영지 선생도 한국사회에서 소수에 속하는 인물이다. 은희와 영지 선생이 여성이라는 점 또한 사회적 소수이자 약자라는 점에서 이들이 바라보는 사회는 폭력적이다.
이렇게 영화는 1994년의 한국사회 속에서, 중학생 은희가 바라보는 세상과 만나는 사람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은희의 모습을 보여준다. 악한 사람은 없지만, 악한 행동을 하고, 선한 사람도 때론 악한 모습을 보이는 것, 인간의 다면성은 의도가 필요 없는 삶 그 자체에서 나오는 모습이며, 은희를 둘러싼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부장적이고 때로 폭력을 휘두르는 은희의 아버지도 은희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울음을 터뜨리고, 성수대교가 붕괴되었을 때, 은희를 때리던 오빠 대훈은 기적처럼 살아 돌아온 수희를 보고 눈물을 터뜨린다. 이들은 남성중심 사회에서 기득권을 공기처럼 가지고 살아가지만, 자신들이 휘두르는 폭력의 실체와 본질을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같은 해에 개봉한 영화 '기생충'이 한국사회의 계급성을 폭력적으로 드러낸 영화라면, 이 영화는 그 폭력성을 내재한 채, 체제의 무게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중하층 가족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영화에서 '계급성'을 드러내는 장면은 두 장면이 나오는데, 떡집에서 강남 '사모님'이 은희 아버지가 만드는 떡이 맛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에 반박했다는 은희 아버지의 말과, 은희가 남자 친구와 시완과 함께 있을 때, 시완의 엄마가 나타나 시완을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시완의 아버지가 의사라는 사실은 딱 한 대사에서 나타나고, 그것이 부르주아와 중하층 상인의 가족을 가르는 선으로 드러난다.
어떻든, 은희의 가족은 '생존'한 가족이다. 수희가 성수대교 붕괴에서 살아온 것도 생존이지만, 강남에서 떡집을 하며 어렵게 세 명의 아이를 가르치는 부모의 열성 덕으로 은희, 수희, 대훈 모두 살아남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은희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1995년에는 강남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한다. 성수대교 붕괴보다 이 사건은 은희에게 더욱 직접적 충격과 트라우마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친구들이 모두 강남에 살고 있고, 삼풍백화점에 갔을 확률이 높았을테니,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다.
더구나 은희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 1997년 말에 한국은 외환위기를 맞고, 수많은 사람이 파산하게 되는데, 이 가족이 과연 그때도 무사히 생존하게 될 지는 모를 일이다. 이렇게 1994년 이후, 한국, 특히 강남에 불어닥치는 사고와 불행으로 은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이다.
영화는 1994년, 은희의 수학여행에서 끝나지만, 영지 선생의 죽음으로 은희는 조금씩 변할 것으로 보인다. 평생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내면은 꺼지지 않는 불을 간직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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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없는 천사> 일제 당시 영화는 ‘역사’ 없이 말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최인규 감독의 영화 <집없는 천사>는 겉보기에는 고아를 구제하고 새로운 삶으로 이끄는 계몽적 드라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를 본 후, 그 역사적 맥락을 되짚어본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는 고아들의 ‘개인적’ 구제를 국가 이데올로기의 ‘집단적 교화’로 치환하는 식민지 파시즘의 내면화 과정을 치밀하게 그려낸 영화였다.
용길, 일남이 등 조선 아이들은 조선 민중을 상징적으로 대변해 제도 밖에서 무질서하고 이기적인 상태로 묘사돼 방 선생으로부터 ‘가르쳐야 할 존재’, ‘국가적 교화의 대상’으로 치환된다. 이때 일본 역사적 정치 방법인 스스로 일본의 규율과 질서를 내면화 당하는 ‘황국신민’의 정치적 방법이 담겨있다. 이때, 방선생이 세운 고아원은 제국이 설계한 새로운 인간을 양성하는 ‘교화의 장’으로 조선의 ‘미성숙한 국민성’을 제거하고 일본적 가치로 뱌꿔놓는 정신적 공장이다. 실제로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아이들은 일장기 앞에 모여 일본어로 맹세문을 낭독하며 자연스럽게 일본 제국의 규율을 익히고 일본 제국의 충성까지 이어지는 결말로 끝이 난다. 이렇게 어린 아이들을 계속 교화시켜 국가의 충성까지 이어지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내면화까지 연결되게 만들었다.
1930년대와 40년대 초반은 한국 영화 산업이 아직 기술적으로 기초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집없는 천사>를 시청하는 내내 음향의 불안정성과 촬영 기술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장면 곳곳에서 들리는 기계음, 세트장보다는 자연 배경을 그대로 담은 화면 등은 당시 영화 제작 환경의 제약을 여실히 보여줬지만, 그 한계 속에서도 감정선과 서사를 최대한 진실되게 담아내려는 노력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특히 인물의 내면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된 클로즈업, 과장되지 않은 절제된 감정 연기, 꾸며내지 않은 듯한 장면 구성은 영화 전반에 사실주의적 미학을 부여했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고통과 순수함을 더 깊이 공감하게 만들었고, 바로 그 사실성 덕분에 아이들이 황국신민으로 변화해 가는 장면은 더 불편하게 다가왔다.
나는 이 영화가 식민지 시대의 고아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떠올리면서 식민지 시기 예술이 어떻게 당시의 억압과 이데올로기를 표현했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저항의 틈을 어떻게 찾아내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영화 내내 나를 사로잡았다. 겉으로는 철저히 황민화 이데올로기를 따르며 만들어진 영화 같았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조선인의 상처와 구제의 욕망, 공동체 회복에 대한 희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일본 당국은 그 영화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들의 계획 속에서조차 조선인의 자율성과 연대의 기억이 억제할 수 없는 형태로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런 미세한 저항의 흔적이 위험으로 다가왔을 것 같아 한편으로는 통쾌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식민지 시기의 영화가 항상 그 역사적 배경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고아들이 모여 앉아 국수와 엿을 만들고, 도색을 하는 평범하고도 행복해 보이는 장면 속에서 나는 그들이 그저 순수와 평온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순간들 속에서도 ‘일본 제국‘이라는 배경은 그들 하나하나를 교묘히 타락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 또한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저들처럼 자연스럽게 신민화되었을 것이라는 죄책감이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그들의 일상에서 피어나는 순수함 속에 깃든 어두운 그림자는 바로 제국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을 지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게 그들은 어느새 자기 민족의 기억과 자율성을 희생하고, 황국신민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교묘하게 짜여진 억압의 서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나는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그 체제 속으로 끌려갔을 것이라는 비극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영화는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위험 속에서 점차 잃어가는 자율성과 연대의 기억에 관해 나에게 질문했고,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을 마주하며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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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신치 않고, 늘 의심할 지어다. 그 의심 속에서 성스러운 순수함만을 찾을 지어다.
우린 왜 '역설, 반골 기질, 평소와는 다름'이 담긴 예술을 좋아하는 것일까? 이는 '창의적'과는 또 다른 갈래의 영역인 것만 같다.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되는 것, 우리가 그동안 지녀왔던 그 모든 관념들과는 상이해서 이해하는데,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들을 우린 유독 예술에서 만큼은 인정하고, 좋아하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 이유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우린 예술을 경외하고, 예술이라는 분야는 예술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범주라고 여기기에 그 독창성과 다름을 단순한 틀림이 아니라 비범함으로 인정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화 <콘클라베>는 종교 영화라는 정립된 장르에 정치적, 철학적 이분법론과 인간의 타락과 의심이 불러일으킨 고뇌 그리고 종교개혁을 연상케하는 플롯 등을 이용해 마치 종교 영화계의 이단아, 반골과 같은 모습을 띤다. 영화는 인트로의 베일을 벗은 순간부터 클로징의 막을 내릴 때까지 종교 영화의 장르적 자세를 항상 취하지만 추리, 미스테리한 일들의 연속을 더해갔고, 지속적으로 타락과 진솔의 사이를 오가는 모습, 의심과 확신의 불안정한 수평선 사이 고뇌하는 인물을 보여주면서 영화의 깊이감을 더해갔다.
필자의 경우, 삭막한 공간 속 긴장감을 극도로 느끼거나 불안한 심정을 스스로에게도 감출 수 없을 때면 스스로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일정치 못한 박자감의 숨소리는 나의 불안감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그 불안감의 양을 증가시키면서 신체의 무리로까지 이어지게 한다. 작품을 제작한 감독은 이런 부분들을 경험한 것인지, 영화적으로 사용하면 분위기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적절하다는 점을 아는 것인지,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주인공 "로렌스"의 등을 비추면서 연신 그의 거친 숨소리를 들려준다. 이 점은 영화의 초반부뿐만 아니라 중후반부 "로렌스"가 고뇌에 빠져 선택의 길로에 서 결정만을 남겨두고 있을 때면 이따라 등장한다. 영화 <콘클라브>는 막을 내리기 직전까지도 이 긴장감과 고뇌, 착잡함의 냉랭한 공기를 걷지 않고, 이를 숨소리 그리고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는 OST로 아예 관객의 머리에 분위기를 각인시킨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웅장하면서 동시에 영화의 전반적인 테마를 잘 담아냈다고 생각하는 OST는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긴장감을 고조시켜야 하는 상황이면 어김없이 등장해, 소위 소름을 끼치게 한다. 물론 이런 점을 매우 반복하기 때문에 영화를 관람하다 보면 곧 OST가 나오면서 갈등을 고조시킬 것이라는 걸 미리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점은 사실 작품의 단점이면서도 안정적인 구조, 본인들이 잘 해낸 부분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점이라고도 볼 수 있다.
"확신하지 말지어다. 항상 의심할지어다." 어쩌면 영화는 본 구절을 영상화한 작품인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누구나 종교인, 특히 교황과 그 교황이 될 후보 추기경들은 어떤 경우에도 항상 진실고, 거짓이 없으며, 종교인으로서의 사명을 다 할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이 있고, 필자의 경우에도 무교지만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영화는 이 부분에서 먼저 고정관념을 깬다. 교황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새로운 교황을 뽑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선거, '콘클라베'. 교황이라는 직위가 곧 권력의 중심이라 반드시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 교황의 직위를 책임감이라고 생각해 거부하려는 사람간의 갈등이 격돌하고, 교황의 직위를 통해 종교가 기본적으로 지녀야 할 전통과 신념을 보수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교황의 직위를 통해 시대적 흐름에 맞춰 종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사람의 관념들이 부딪혔다. 이 추기경은 좋은 사람이고, 교황의 자질이 있는 사람이라 추천하였지만 교황의 직위를 쟁취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돈을 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는, 의심이 확신이 되어가는 순간 영화는 고조로 다달아 주인공 "로렌스"와 보고 있는 관객 모두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반문하게 된다.
위 문단을 읽은 분들은 아마도 더욱 영화의 플롯에 의문을 가지실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이렇게 혼란스럽고, 갈등 상황이 많아?'라고 질문을 하실 수 있겠지만, 실제로 영화는 한 시도 관객과 주인공을 갈등의 중심지에서 놓아주지 않는다. 이런 점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는 데에는 한정적인 공간에서 오는 힘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콘클라베' 기간이기 때문에 바깥 상황과도, 외부의 그 어떠한 세력과도 만나서도, 연락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교황청을 모두 철폐하고, 모든 연락들을 끊은 상태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단 한 공간, 교황청만을 비춘다. 창문도 모두 닫히고, 문도 모두 막힌 채 바깥에서 무슨 소동이 일어나는 지도 알지 못한 채 한정된 공간 안에선 전쟁을 방불케하는 피튀기는 신경전이 오갔고, 영화는 그것만을 오로지 담아냈기에 그 서스펜스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또한 영화의 분위기와 혼란을 유지하기 위해 영화가 행한 방법은 바로 주인공 "로렌스"가 알아가는 만큼 관객도 똑같이 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영화의 초반부와 중반부, 복도를 걷는 "로렌스"를 촬영할 때면 영화는 그의 등을 클로즈업하여 담아내는데, 이는 마치 관객과 "로렌스"를 일치시켜 그의 상황과 심리 상태에 공감할 수 있게 하고, 사건의 진실을 알아가는 데 자연스럽게 따라갈 수 있도록 한다. 더불어 영화는 굉장히 빈번하게 카메라의 수평 이동과 부감 숏을 활용해 "로렌스"를 비롯한 주 인물들 뿐만 아니라 교황청을 채우는 모든 추기경들을 한번에 담아낸다. 한정적인 공간을 모두 채우는 그 많은 추기경들의 숫자가 빚어낸 부감 숏은 마치 관객에게 현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면서 동시에 사건의 중압감을 선사한다. 또한 수평 이동을 통해 '콘클라베'에서 투표하고 있는 추기경들의 표정을 모두 담아내는데, 확신했던 것들이 의심이 되어가고, 한 두 차례에서 끝났을 투표가 수 차례로 이어지면서 고도화된 심리전을 관객이 모두 경험할 수 있게 되면서 극의 흥미진진함을 더해갔다.
'콘클라베'가 끝나게 되면 모든 단장직을 내려놓겠다는 "로렌스". 기도가 약해졌다는 이유이다. 그가 왜 기도가 약해져 단장직을 내려놓겠다고 이야기하는지 영화는 생각해보라고 전한다. 아마도 영화는 그가 내려놓으려 했던 이유엔 종교의 타락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믿지 않았던 이들은 정말 생각만큼의 행동들을 했고, 믿었던 이마저 사실은 타락의 결에 속했었다. 어쩌면 종교의 장을 뽑는 것인 '콘클라베'는 언쟁이 지속될 수록 정치적 논파 간의 싸움으로 변해갔고, 보수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갈등은 좀처럼 다시 꿰놓을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영화는 이 의심과 혼돈만이 가득한 상황에 한 가지의 답을 내려준다. 그게 바로 "베니테스"였다. 의문만이 가득했던 그의 등장은 전 교황의 서명을 통해서 입증되었다. 그는 '콘클라베'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로렌스"에게 투표했다. 그럴 때마다 "로렌스"는 이를 거부했지만 끝까지 그는 신념을 지켰다. 외적인 소동으로 인해 교황청이 소란에 빠졌을 때 "베니테스"는 그 모든 정치적, 실리적 이득을 위한 언쟁과 투쟁들을 비난하며 나섰고, 이 지점에서 모든 추기경들이 그의 매력을 안 것인지 그 다음 투표 때 "베니테스"가 교황이 되어 "인노켄티우스 14세 교황"이 된다. 재밌는 건 영화는 마치 좋은 교황을 선정하게 되면 이 모든 혼란이 가실 것처럼 묘사하였지만, 오히려 모든 이들의 합이 맞춰져 뽑게된 새 교황의 투표 과정, 과정 속 추기경들의 표정 등을 보여주지 않고 굉장히 빠른 속도록 축약한다. 마치 그게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로렌스"는 좋은 인물을 교황직에 세운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발표만을 남겨놓고 대기하던 와중 하나의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정체가 베일에 가려져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던, '콘클라베' 기간이라 외부와의 연락이 안 되어 더욱 궁금했던 그의 정체는 사실 생물학적 여자였던 것이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유전적으로 여자였지만 스스로가 여자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채 남자로서 살아갔고, 정신적으로도 남자였던 것이다.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은 "로렌스"는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다. 이에 "베니테스"는 과연 이 점이 문제가 되는지 물어본다. 대화를 마친 "로렌스"는 기도가 약해져 종교에 회의감을 품던 과거의 표정과는 달리 새로운 교황의 진실과 사실을 안 이후로 조금은 다른, 조금은 더 편안해진 표정을 지었고, 그렇게 영화의 막이 내린다.
어쩌면 영화는 마지막 갈등이 모두 해결되는 그 순간들까지도 관객에게 '의심을 풀면 안됩니다!'와 같은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결국 영화가 "베니테스"의 정체에 반전을 줌으로써 하고자 했던 이유는 단순히 성적 다양성이 종교에도 녹아들어져야 한다는 취지가 아닌 것 같다. 진실이 사실은 거짓이었고, 거짓이 거짓인 줄 몰랐고, 심지어 자신을 아꼈던 교황마저도 자신을 의심했었다는 그 모든 불신과 불안정함만이 존재했던 상황 속 찾아낸 진실, 진리마저도 의심해봐야함을, 의심의 결과 결국 찾은 진실에서 종교적, 인간적 순수함을 찾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 속 우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물어보는 것만 같다. 영화는 이에 대해 순수함이 중요하다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론짓는 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는 이런 모든 순간들에 의심을 더해가며 관객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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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7월 4주 신작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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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주 최신개봉영화(경관의 피, 씽2게더, 해탄적일천, 전장의 피아니스트, 원샷)
[WEEKEND CHOICE MOVIE] 2022년 1월 1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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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스트 시티> 웰컴 투 어드벤처 예고편
어드벤처 뉴비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지옥같은 섬에 어서오고~ 글로 배운 모험가 X 겉바속촉 근육 허당 어른들의 찐 어드벤처 [로스트 시티]로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