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1-19 07:29:47
시들어가는 영화의 운명에 대한 거장의 사색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
〈벌집의 정령〉, 〈클로즈 유어 아이즈〉
〈벌집의 정령〉(1973)에서도, 〈클로즈 유어 아이즈〉(2024)에서도 주인공은 눈을 감는다. 과거, 꿈, 기억에 조용히 침잠한 무언가를 환기해 현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다.
〈벌집의 정령〉에서 어린 소녀 아나는 영화에서 본 프랑켄슈타인을 만나고 싶어 하고, 그런 아나에게 언니는 눈을 감고 정령을 부르면 그의 유령과 대화할 수 있다고 언질한다. 아나가 발 디딘 시공간은 파시스트이자 쿠데타 세력의 수괴인 프랑코가 좌파, 공화파, 아나키스트의 연합 정부를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둔 스페인의 어느 시골 마을이다. 독버섯을 짓밟고 질서정연한 벌집의 세계에 몰입하는 아버지, 즉 프랑코의 분신이 곳곳에서 힘을 갖고 군림하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나 아나는 가족의 눈을 피해 계속 괴물 프랑켄슈타인과의 교감을 시도하고 마침내 반反프랑코 세력 군인을 마주한다. 그리고 그에게서 괴물의 정령을 읽어낸다. 그러나 파시스트의 세계에서 ‘괴물’과의 교감은 ‘반역’이다. 아버지는 신속하게 아나를 원래 세계로 되돌려놓고, 의사는 시간이 지나면 아나가 그 충격적인 경험을 잊을 것이라고 ‘안심’시킨다. 이렇게 〈벌집의 정령〉은 영화가 열어젖힌 가능성을 프랑코 치하 스페인의 암울한 현실에서 꽃피워내는 동시에, 일상에 녹아든 파시즘으로 그 가능성이 어떻게 폐제되는지를 보인다.
구체적인 시공간은 바뀌었지만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도 ‘눈’을 매개로 한 영화적 각성은 반복된다. 영화감독이자 작가인 미겔은 과거 자신의 영화 〈작별의 눈빛〉의 주연이었으나 촬영 중 실종된 훌리오를 추적해보자는 탐사 프로그램의 제안을 받는다. 실종 후 무려 22년이 지난 때였다. 실체는 사라지고 소문만 무성하게 남은 훌리오. 미겔은 결국 한 정신병원에서 자신이 가르델이라고 알고 있는 훌리오를 만난다. 여기에는 앎의 엇갈림이 있다. 미겔은 지난 22년 동안 가르델로 살아온 훌리오의 삶을 알지 못한다. 함께 보낸 가르델 이전의 시간만 기억한다. 반면 병원 관계자들은 가르델이 훌리오로 살던 시절을 알지 못한다. 자신들과 함께한 시간만 안다. 이 엇갈림에서 미겔은 과거 훌리오가 출연한 영화를 함께 봄으로써 잠든 훌리오의 영혼을 깨우고자 한다. 아나가 눈을 감고 ‘괴물’의 정령에 접속했듯 영화를 본 훌리오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영화는 그 감긴 눈 안에서 훌리오/가르델의 엇갈림이 해소될 것임을 암시한다.
스페인의 빅토르 에리세는 국제적 거장으로 인정받는 영화감독이지만 1973년 〈벌집의 정령〉으로 데뷔한 이후 지금껏 단 네 편의 장편만 만들었다. 영화 한 편 한 편에 어마어마한 공력을 넣는 감독인 것이다. 데뷔작의 메타포(눈을 감는 행위와 영화로 가능해지는 것들)를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창한다는 점, 그리고 그 마테포가 유전히 유효하고 감동적이라는 점에서는 예술가로서 그의 재능과 의지, 역량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사이 영화의 위상은 변했다. 아나에게 그러했듯, 영화는 수많은 사람에게 감각과 상상력의 확장을 선물하며 분출하는 용암처럼 성장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포화의 지점을 맞이했다. 현재 영화는 동시대 콘텐츠 플랫폼의 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웃 장르와 극심한 경계 갈등을 겪는 중이다. 영화만이 줄 수 있는 매력, 즉 ‘영화적 순간’에 대한 예찬은 소수의 마니아에게만 고착되고 있는 듯도 하다.
영화를 사랑하는 빅토르 에리세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의 영화에서 동시대 영화의 위기를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벌집의 정령〉에서 마을 아이들은 영화 필름을 실은 트럭을 격하게 반긴다. 오늘은 무슨 영화를 틀어줄 거냐며 들뜬 목소리로 물으면, 영화관 관리자는 지금껏 본 적 없는 대단한 영화를 상영할 예정이라며 으스댄다. 수용자와 공급자 모두 영화라는 단어에 지극한 설렘을 느끼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미겔은 〈작별의 눈빛〉을 완성하지 못했다. 훌리오의 기억을 찾기 위해 영화를 상영하는 장소는 폐업한 극장이다. 그러니까, 미지의 무언가와 조우해 자기 삶과 감정, 기억을 증폭시켜 세계를 확장하는 수단으로서의 영화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사람들이 영화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미겔처럼 특별한 목적을 갖고 문을 닫은 극장 주인을 설득해 먼지 쌓인 상영관을 찾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물론 여기서 ‘영화’는 빅토르 에리세의 영화, 즉 눈을 감으면 다른 차원의 세계가 열리는 통로로서의 영화다. ‘영화의 위기’에 누군가는 여전히 수많은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가 있다고 항변하겠지만, 그런 영화는 빅토르 에리세에게 영화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동시대 영화의 음울한 현실과 공명한다. 이 영화가 〈벌집의 정령〉 때 영화가 가졌던 위상을 그리워하는 향수로 은밀히 채워져 있는 이유일 것이다. 아나와 ‘괴물’의 교감이 꺾이고 마는 〈벌집의 정령〉이 슬프면서도 묘한 희망을 전하는 데 반해, 결국 훌리오가 기억을 찾을 듯 보이는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기쁘면서도 어딘가 우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50년의 세월을 거슬러 ‘눈’이라는 통로로 영화의 가능성을 모색한 두 영화는 1970년대에는 희망적인 감동을, 2020년대에는 지나가 버린 영화의 전성기에 대한 아릿함을 선사한다. 그래서다. 내게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시들어가는 영화의 운명에 대한 거장의 사색처럼 보인 것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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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콕 휴가를 책임질 홍콩영화, <무간도>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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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간지옥에 빠진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고통받게 된다. 불교의 18지옥 중 가장 고통스러운 지옥이다.
죽지도 못하는 것만큼 큰 벌이 있을까 싶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대가로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고도 다음 날이면 다시 살아나 또 쪼이는 벌을 받았다.
차라리 죽여 주십사 하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무간도는 프로메테우스 쪽보다는 시지프스에 가깝겠다. 시지프스는 하데스와의 약속을 어기고 영원히 바위를 끌어올리는 벌을 받는다.
하나의 범죄조직에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경찰으로 위장한 삼합회 조직원과 경찰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삼합회 스파이가 된 경찰.
이 영화는 본질적으로 이분법적이다. 설정 자체가 그렇다. 그 속에 회색지대는 없다. 좋은 놈은 끝까지 좋은 놈이고, 나쁜 놈은 끝까지 나쁜 놈이다.
물론 악인에게도 약간의 선의가 있을 수 있고, 선인에게도 악의가 있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그들을 괴롭게 하면서도 그 질문을 전면에 배치하지는 않는다.
<무간도>는 1편, 2편(혼돈의 시대), 3편(종극무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시간 순서로 따지면 2-1-3편의 순으로 놓인다.
1편에서 경찰 진영인과 삼합회 조직원 유건명이 만나 엇갈린 운명을 확인한다면, 2편은 그들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거슬러 올라가는 스토리다.
진영인, 유건명 뿐만 아니라 삼합회 보스인 한침, 1편에서 죽은 황 국장 등에게 이야기의 겹이 쌓이면서 1편의 인물들에게 서사가 부여된다.
3편은 진영인의 사망 이후의 사건들이며, 무간도 전체의 흐름에 마침표를 찍는 작품이다.
때는 홍콩이 반환되던 시기이다.
홍콩 영화에서 유독 자주 볼 수 있는 배경인데, 이는 홍콩 반환 당시 홍콩인들의 정체성 혼란과 거부감, 혹은 회한 등 미묘한 감정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영국인이었다가 하루아침에 중국인이 되어버린 마음들이 홍콩 출신 감독의 영화 곳곳에 아로새겨져 있다.
중국과 영국은 너무도 다른 나라다. 그리고 지금, 홍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 보자. 그러므로 어쩌면 이 영화는 우화다.
악은 선 속에서도 악하고, 선은 악 속에서도 선하다. 3편 종극무간에서 진영인과 양 반장, 심등은 서로 총을 겨누나 죽이지 않는다.
"조준하지 않았다"는 대사에서 심등은 진영인이 경찰임을 알아본다. 셋이 서로의 정체를 확인한 뒤에 잠깐 보이는 진영인의 미소는 세 편의 시리즈 중 가장 마음이 편안해 보인다.
1편에서 진영인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지 묻는 유건명에게 "미안하지만 난 경찰"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3편에서의 유건명은 분노와 광기에 휩싸여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은 그를 더욱 더 광기로 몰아붙인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보스인 한침을 죽이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아는 진영인의 경찰 기록을 삭제한다.
유건명의 말도 틀리지 않다. 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유건명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가.
하지만 기회를 갖고 싶었다면 사실대로 말했어야 했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 덮어두려고만 했기 때문에 그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썩은 부위를 도려내지 않고 덮어버렸기에, 부패는 예측불가능한 방향으로 퍼져 나간다.
유건명은 환청과 환상, 분열된 자아 속에서 고통 받는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과 외부적으로 보이는 악행의 충돌은 자아를 흔들어놓다가, 기어이 자신을 진영인과 혼돈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자신의 악이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결국 자신의 광기에 이기지 못해 양 반장을 총살하고 자신의 목에도 총을 겨눈다.
그러나 그는 자살기도마저 실패한다. 삶이라는 벌을 받는다. 모두가 죽고 혼자 남았다.
첫사랑이나 다름없었던 한침의 아내 메리를 죽게 만든 건 본인이었다. 그 뒤에 만난 아내 메리를 떠나게 만든 것도 그 자신이다.메리가 낳은 아이는 아빠라는 말을 하지만 아이를 볼 수도 없다. 진영인도, 황 국장도, 양 반장도, 한침도 죽었다.
유건명은 모두가 떠난 삶에 혼자 모든 것을 기억하고 살아내야 한다. 그곳이 무간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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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위해서 집에 머물 수밖에 없는 휴가 기간이다.
이번 휴가는 집에 콕 틀어박혀 시리즈물을 보는 건 어떨까.
시원한 액션과 양조위, 유덕화, 여명의 리즈시절 미모를 감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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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머니즘을 내세우다 길 잃은 수녀들!
수녀가 구마를 한다? <검은 수녀들>은 이 콘셉트만으로도 관객의 구미를 당긴다. <검은 사제들>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비슷한 이야기 루트로 흘러간다고 해도 신부가 아닌 수녀가 악령과 한판 대결을 벌인다는 건 관객으로서 흥미로운 부분이다. <검은 사제들>의 IP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파묘>가 불을 지핀 한국형 오컬트 장르의 붐을 또 한 번 이어 나가겠다는 영화의 야심은 그 당위성이 충분한 듯 보인다. 하지만 결과는 그 반대. 초반 가져간 특장점을 오롯이 살리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검은 수녀가 뜨면 악마도 벌벌 떤다. 일명 검은 수녀라 불리는 유니아 수녀(송혜교)는 소년 희준(문우진)의 몸에 숨어든 악령에게 성수를 들이부으며 한판 대결을 벌였지만,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소년의 몸에 숨어든 악령이 12형상 중 하나라 확신한다. 어떻게든 희준의 몸에서 악령을 쫓아내려는 유니아와 달리, 구마를 믿지 않는 소년의 담당 의사인 바오르 신부(이진욱)는 과학과 의학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더 이상 지체하면 소년의 몸이 악령에게 잠식되는 건 시간문제. 유니아는 바오르 신부의 제자인 미카엘라 수녀(전여빈)와 함께 직접 구마를 하기 위해 우진을 빼돌리고 어디론가 향한다.
“가장 중요한 건 휴머니즘이라 생각했다”
<검은 수녀들>은 오컬트 영화가 아니다. 이 장르의 외피를 쓴 휴머니즘 영화다. 연출을 맡은 권혁재가 감독이 인터뷰를 통해 소개했듯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중점은 악령과의 힘겨루기가 아닌 악령에 사로잡힌 이를,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을 어떻게든 살리려는 고군분투에 있다.
유니아 수녀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바로 ‘살려야 한다’다. 그녀가 구마 의식을 직접 거행하는 것도, 연이 있는 무당에게 데려가 굿을 하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생명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아는 그녀는 소년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진한다. 소년만 살리는 건 아니다. 직간접적으로 미카엘라도 살린다. 귀태(鬼胎)로 태어나 원혼이 보이는 그녀는 이런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살았는데, 유니아를 만난 뒤로 지우고 싶은 자신의 출신을 밝히고, 영적 능력을 받아들인다. 유니아 또한 악령의 소리가 들리는 영적 능력자로서 미카엘라를 본연의 삶으로 회귀시키고, 구원의 시간을 마련한다.
이렇듯 유니아를 통해 영화 전반에 깔린 건 모성애.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희생을 담보로 한 모성애다. 신부가 아닌 수녀라는 점, 남성이 아닌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감독은 유니아를 통해 이 부분을 강조한다. <검은 사제들>은 물론, 여타 오컬트 영화와의 차별화 포인트를 주기 위해 이같은 주제를 강조했는데, 이를 잘 활용했는지는 의문이다.
감독은 모성애를 근간으로 한 휴머니즘을 부각하지만 일차원적인 여성성에만 의존한다.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들의 모습, 같은 위치에 놓인 여성들의 연대를 이야기 하는 건 좋지만, 수녀(또는 여성)라서 안 된다는 식의 논리가 지나치게 반복되면서 새로움은 덜하다. 더불어 악령의 입에서 내뱉는 여성 비하적인 발언 등 또한 구마 의식의 긴장감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오컬트 장르적 재미도 덜하다. <검은 사제들>과 비교했을 때, 구마 의식 자체가 너무 느슨하고, 성수를 들이붓는 것 외에 특이점이 없는 행동들은 박진감을 떨어뜨린다. 수녀가 행하는 구마 의식이라는 특장점을 좀 더 다양하게 보여줬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무속신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은 있지만, 활용성 측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나마 영화를 계속해서 보게 되는 건 송혜교, 전여빈의 연기다. 1.66대 1로 좁게 찍은 영화에서 이들의 얼굴은 보다 더 크게 보이는데, 이에 따라 두 배우의 감정 연기는 더 직접적으로 다가온다. 종교적, 사회적 억압에 굴하지 않고 어떻게든 일을 행하는 송혜교의 강단(물론 <더 글로리>의 문동은이 생각나지만), 내·외면의 공포와 사투를 벌이는 전여빈의 감정 연기는 눈길을 사로잡는다. 기시감은 들지만, 무당 역을 맡은 김국희 배우의 연기도 인상깊다.
오컬트 무비, 특히 엑소시즘 영화에서 두 여성 배우가 주연을 맡아 극을 이끌어간다는 것 자체는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부분이 잘 살지 못하고, 평이하게 흘러가는 것 자체가 무엇보다 아쉽다. 구마의식을 하는 수녀들은 흔하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검은 사제들> 이후 이 세계관이 계속 이어 나간다면 다음 구마 의식은 아가토 신부(강동원), 미카엘라 수녀가 담당하게 될 듯. 다음 작품엔 꼭 신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사진 제공: NEW
평점: 2.5 /5.0
한줄평: 휴머니즘을 내세우다 길 잃은 수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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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을 내밀 용기와 그 손을 맞잡을 다정
수능이 끝난 후 코끝에 맴돌던 쨍한 공기는 내게 냄새처럼 기억되곤 한다. 계절의 냄새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난 그날의 공기로 이제 ‘진짜’ 겨울이 왔음을 느낀다. 수험장을 나서던 순간 코끝이 찡했던 건 찬 바람 때문인지, 내 학창 시절이 끝났다는 허무함 때문인진 모를 일이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수시를 준비했기 때문에 수능은 사실 내게 그리 중요한 시험은 아니었다. 수시 원서를 모두 작성하고 수능을 기다리던 그 애매한 3개월 동안,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았다. 그러나 <월플라워>만큼은 그 시기에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은 친한 친구의 ‘너의 바탕화면에 나오는 영화가 궁금하다’는 한 마디로 금세 무너지고 말았다. (학창 시절 내내 나의 노트북 바탕화면은 월플라워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월플라워>를 처음 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어쩌다 보게 되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하나 확실한 건 가끔 내가 초라하고 작아질 때 속으로 떠올리는 대사 중 하나가 ‘We accept the love we think deserve’가 되었다는 것. 그렇게 마음속에 묻어두고 다시 보게 된 이 영화는 새삼 충격적이었다. ‘이게 10대들의 이야기라고…? 역시 미국은 좀 다르다’라는 시시한 생각들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든 생각은 결국 용기와 사랑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것이다.
주인공 ‘찰리’의 인생을 뒤바꾼 ‘패트릭’, '샘'과의 만남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다. 홀로 팝콘을 들고 경기를 보러 갈 용기, 옆자리 친구에게 한 마디 걸어볼 용기로 시작되었다. 누구나 시작은 두렵다. 그 시작에 결국 끝이 있다는 걸 인정하기는 더 두렵다. 그러나 그래도 한 발짝 더 나아가는 용기 없이는 아무것도 변할 수가 없다. 어쩌면 <월플라워>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건 나 역시 용기를 내야 할 때가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다시 한번 이 영화를 보았고, 덕분에 20대의 시작을 조금은 담담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도전이 좌절되고, 사랑에 실패하고, 친구가 떠나가며, 믿음이 배신당하는 아픈 사건의 연속이다. 그래도 주인공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용기 내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듬고,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발버둥 친다.
“In this moment, I swear. We are infinite.” 10대의 끝자락. 이 대사의 모든 단어를 꼭꼭 씹어 삼켜 내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했다. 순간에 충실할 것. 우리의 무한함을 단언할 것. 비록 현실이 가끔 따갑고 아릴지라도 결국엔 그 시간도 흐르고 지난다. 버거운 하루에도 내일이라는 다음이 다행스럽게 오기 마련이다. 우리는 버텨낸 시간이 나에게 좋은 흔적으로 남기를 바라며 오늘도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 용기와 누군가의 손을 맞잡아 줄 다정이 충분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을 읽을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 새로운 출발선 앞에 설 모든 청춘들 앞에 무한한 도전과 반짝이는 기쁨이 함께하길, 가끔 찾아오는 아픔을 담대하게 마주할 용기가 함께하길 바란다.
Editor.I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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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 설계도
8★/10★
전쟁 중인 유럽을 탈출해 미국에 도착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가 한 성매매 업소에서 남성 성노동자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난 그런 쪽 아니야’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장면은 그가 훗날 마주할 해리슨의 끔찍한 성폭력을 예감하는 것이 아닐까. ‘이쪽’과 ‘저쪽’의 구획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선언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해리슨에게 강제로 자리를 부여받는 라즐로가 느낄 비감이 도입부의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느꼈다.
재능 있는 유대인 건축가가 이주 후 미국 하층부를 전전하다 한 거부의 눈에 들어 대형 프로젝트를 맡은 후 종내에는 영광을 얻는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우리가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본 이방인의 성공 스토리와는 결이 다르다. 노인이 되어 휠체어에 탄 채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전시에 참석한 그의 얼굴은 피로해 보인다. 라즐로 부부를 떠나 이스라엘로 향한 조카 조미아가 정작 라즐로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삼촌의 업적을 설명하는 대목은 그의 피로감에 공허함을 더한다.
‘성공한 유대인’이 있는 것은 맞다. 그들의 성취는 종종 아메리칸드림의 증거로 전시된다. 그러나 그 성공은 아름답지 않았다. 지적 허영과 과시욕, 속물적 근성의 화신, 즉 가장 미국적인 인물인 해리슨은 라즐로를 자신의 자랑스러운 수집품 정도로 대우하고, 라즐로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술 취한 그를 강간한다. 그는 라즐로에게 “넌 그저 밤거리 매춘부야”라고 말한다. ‘선’을 넘지 말라는 선언이다. 라즐로 프로젝트의 철학과 예산이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자 미국 사회의 주인은 돈이며, 그 돈을 가진 사람은 나라는 점, 즉 자신은 성 구매자이며 너는 성 판매자라는 점을 라즐로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방법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라즐로는 그 충격에 휩싸여 더욱 자신의 예술적 목표(혹은 해리슨의 야망)인 건축물에만 집착하고 자신이 쌓아 올린 건축물에 유폐된 듯 영혼을 강탈당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라즐로는 걸작을 창안했으나 영혼을 상실했고, 미국식 속물주의를 대변하는 해리슨은 사건이 폭로된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며, 늙고 지친 라즐로를 기념하는 행사에서는 과거 그를 떠난 조카가 확신에 찬 얼굴로 숙부의 업적을 칭송한다.
이 영화가 아메리칸드림의 오욕에 관한 문제 제기라는 인상을 받은 건 그래서다. 이 세 사람이 이루는 구도에서는 누구도 온전한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일 수 없다.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으로 예술에 대한 심미안 없이 뭐든 돈으로만 하려는 해리슨도, ‘걸작’을 만들었으나 생기를 잃어버린 라즐로도, 홀연히 등장해 숙부의 성취‘만’ 이야기하며 뒤늦게 자신이 라즐로의 혈육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조미아도.
영화가 한창 건축이 진행 중일 때 고통받던 라즐로를 비추다가 갑자기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노쇠한 라즐로의 얼굴로 점프하는 것은 아메리칸드림에 영광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설계의 일환일 것이다. 사람들은 완성된 건축물만 본다. 그 이면의 설계도를 상상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로 ‘라즐로의 아메리칸드림’에서 완성물이라 할 그의 건축물과 그로부터 피어나는 영광의 순간들을 뺀 채 그 영광의 설계도만 보여준다. 누군가의 장식품으로서만 예술가일 수 있었던 이방인, 그런 이방인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구축되지 않았을 미국이라는 허상, 설계 과정의 문제는 덮고 결과물만 바라보며 찬사를 보내는 사회가 이방인의 아메리칸드림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brutal) 설계도 말이다. 라즐로가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추구하는 브루탈리스트였다는 점은 이 설계도가 품은 역설을 더한층 도드라지게 한다. ‘사람은 죽어도 예술은 남는다’는 통념 혹은 진실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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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따가 말하는 왕따 이야기
남자는 허리가 아파 침대에 다시 누웠다. 심하게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적당히 신경만 쓰이는 정도다. 근데 허리디스크 초기 진단이 아니었다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상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폰을 가져와 인스타를 켰다. 인스타도 매번 올라오는 것들만 뜨는 것 같다. 휴대폰은 다시 유튜브로 돌아간다. 내가 웃기 위해 했던 것들. 이동진 평론가님이 나와서 작품 해설을 한다던가. 좋아하던 유튜브가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는 장면을 본다던가. 잠깐 웃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금세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을 수도 있다. 있을 수도 있을까? 맞아. 없진 않아. 몇몇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근데 몇몇은 떠오르다 말았다. 그리고 아까 봤던 인스타그램 속의 얼굴들이 스크린 사진을 찍었다는 게 생각난다. 나 스크린 사진 찍은 지 얼마나 됐지? 남자는 갑자기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떠나간 사람들. 그 사람들이 생각나 괴로웠던 것이다. 뭐 나름대로의 죄책감도 그에게 의미가 있었겠지만 사실 더 크게 다가오는 건 '지금의 내 편은 누구쯤 있는가'라는 것이다. 갑자기 믿을만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 본인 삶의 가장 큰 위기가 된 다는 것이 피부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비극은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가 아니다. 여는 법 자체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래서도 될까. 아니면 그렇지 말아야 할까. 좋은 기회가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연 그를 사랑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갑자기 그의 업보들이 떠올랐다. 노트북을 켜 키보드를 잡기 시작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사람들에게 무언갈 전해주기 위해. 수도 없이 되뇌었던 철학을 다시 마음에 돌이켜본다. 눈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혼자구나. 난 혼자구나. 세상에게 무얼 전해준다고 하기엔 너무 씁쓸하다. 그것도 혼자서만 하니까.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비극에 관한 영화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필모그래피 하면 떠오르는 작품 세 편이 있을 것이다. <하나와 앨리스>, <러브레터>, 그리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이다. 사랑의 잔상에 관한 <러브레터>나 <하나와 앨리스>같이 사랑스러운 작품도 좋아하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알았다. 또 내가 보진 않았지만 <4월 이야기>도 영화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알고 있지 않나? <러브레터>나 <하나와 앨리스>의 다른 이야기들을 계속 만드는 게 좀 1절만 하고 끝내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지 그는 좋은 감독이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일본의 시네마 감성을 형상화한 느낌? 미야자키 히야오나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 작화도 기억나지만 이와이 슌지의 개성도 '일본'하면 생각나는 부분이다. 적당히 과한 느낌.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처럼 담백한 작품도 분명 많겠지만 적당히 과하다는 것이 내가 봐온 일본 시네마의 특징이다.
적당히 과하다. 이 적당히 과하다는 정서는 우리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원래 감성적이라는 것이 과하지 않으면 드러날 수 없는 것 아닌가. 예술가에게 과한 건 거의 필요충분조건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도기라는 게 있어야 한다. 우리가 엄청 저는 작품을 봤을 때 굉장히 높은 확률도 그걸 만든 이에게도 중2병이라고 욕먹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근데 이건 사실 예술가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불행해봐야 행복했던 시간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시기가 올 수밖에 없다. 삶에서 내 선택만으로도 어두운 그림자를 피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그냥 거짓말이다.
혼자 남는다는 것은 삶의 그런 불가항력을 조명해주는 좋은 소재다. 또래들이랑 어울리고.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이자 동생, 멘토가 되고. 그런 좋은 인간관계는 거의 대부분 나의 선택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물론 당연히 힘을 많이 준다고 해서 인간관계가 다 맺어지고 그런 건 아니다. 근데 좋은 사람들은 보통 내가 선택을 잘해서 만들어졌던 것 같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혼자 남는다는 것은 내 선택과 연관이 없다. 누군가를 사귄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혼자가 되는 수많은 이유들 중 왕따라고 하는 것은 이런 사람들을 더 깊게 고립되게 만든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떠나가는 것에 무슨 원인이나 책임이 있을까? 변하니까 떠나는 거고 선천적으로 인간은 악하니까 계급을 나누는 것이다. 100명이 있으면 99명이 비호감이라고 생각할만한 인물들도 잘 들여다보면 멋지고 존경할만한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났다는 이유로 정을 무작정 때리는 게 사람이다. 무슨 말이냐고? 당신이 욕먹을 만한 구석이 있든 없든 어차피 세상은 우리를 혼자가 되게 만든다는 뜻이다. 물론 단점을 개선하는 삶은 극찬받아 마땅하다. 왕따의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것이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터널을 떠나 행복해졌다 하더라도 불행의 루틴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왕따이든 아니든 불현듯 찾아오는 우울함은 피할 수 없다. 이 우울함은 혼자가 된 시간과 합쳐져 사람들에게 더 큰 상처를 만든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세상이 우리를 도와주느냐. 그것도 아니다. 떨어진 사회성 덕인지 더더욱 혼자가 되기 쉬워진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법이나 의상, 생활 패턴 같은 감이 안 잡히니까 더 소외되기 쉽다. 상처라고 하는 건 그렇게 삶에 어두운 영향을 끼친다. 나 역시 이 패턴에서 한동안 고생했다. 날 선 말도 가슴에 담기 어려웠지만 앞으로도 계속 외로울 것이라는 막연한 비관이 나에게 더 감당하기 힘들었다.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난 이것을 좋은 사람들을 만나 빠져나왔다고 생각한다. 아픈 과거를 핑계로 외로워지는 걸 합리화한다는 걸 깨닫게 되면 자기 자신을 극도로 혐오하게 된다. 나 역시 그런 깨달음이 있어 피해의식을 벗어날 수 있었으니 나름대로 풍운아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근데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고 느낀 건 냉정한 현실이었다. 피해의식을 자각해 벗어나서 맞이한 건 나라는 인간이다. 난 왕따였다. 굳이 세상의 누군가와 사이가 좋든 비호감 세례를 받지 않던 상관없다. 난 그런 악재가 없더라도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서툴렀다. 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지 않아도 난 나를 왕따로 만들고 있었다. 내가 배운건 그것뿐이었다. 완벽하게 혼자가 되는 법이다. 내가 션택할 겨를도 없이 언제나 혼자였다. 그 누구도 내 편이 되어준 적이 없다. 알고 보면 나의 내면이 그렇게 사람들과 다를 것도 없고 세상에게 위로해줄 말도 많았음에도 마음 한 구석을 열어본 기억이 몇 번 없다. 이러니 내 모난 부분이 아니더라도 혼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 밝은 사람이 아니니까. 사랑스러운 사람이 아니니까. 난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벗어날 수 없는 무언가에 갇혀 있는 듯하다.
그래서 낸 결론은 영원히 마음이 만든 지옥도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왕따로 살았기 때문에 마음을 여는 게 익숙하지 않으니 혼자가 되고 사랑받기도 어렵다. 마음을 못 열고 못 다가가면 그게 혼자가 되는 거 아닌가? 다 내가 선택해서 만든 결과 같더라도 나 자신은 그것들을 꺼낼 용기도 방법도 모르니 자의 속에 숨은 타의가 되는 셈이다. 그렇게 점점 나는 구멍을 파고 깊게 들어간다. 혼자가 되면 당하는 일도 많아지고. 그리고 설상 그렇다 하더라도 털어놓을 구석이 없으니 쓸쓸하고 괴로워진다. 애초부터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는 슬픔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 그게 슬픔이 아니고 그냥 아무 일도 아닌 무덤덤함이겠지. 그게 지나서 단단해져도 사실 그렇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비 온 날에 땅이 굳어도 2주 후에 태풍이 부는 게 자연의 섭리니까. 삶은 지긋지긋하게도 우리를 놔주지 않는다. 난 과연 어떤 잘못을 했기에 필연적으로 왕따로 살 수밖에 없는가. 나 자신에게 반문한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이 삶의 지긋지긋한 루틴에 관해 다룬다. 다른 글처럼 영화의 연출 지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 영화의 불친절함으로 인해 플롯 분석이 어렵다는 것은 독보적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뽑고 싶은 것은 츠다의 자살이다. 고통스러운 삶을 보낸다는 걸 그녀의 주변인이면 다들 앎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슬퍼하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이런 상황을 그녀가 만들었을까? 어느 정도는 맞을 수도 있다. 근데 그녀는 단지 중학생의 아이일 뿐이다. 많은 것들을 경험하기 이전에 이 세상이 그렇게 그녀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또 성매매 피해자로서의 삶을 벗어났다고 해서 곪은 마음이 치유될리는 없기에 그녀가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내면을 오롯이 꺼내보인 방식이 죽음이었다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장치다. 또 엔딩신을 봐도 집단 따돌림을 시키고 당하는 사람들이 온라인 상에서는 둘도 없는 베프였다는 아이러니가 나오지 않는가. 인간이기 때문에 왕따를 당하든 범하든 삶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이와이 슌지의 냉소가 서려있는 듯하다. 둘은 화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만나고 끝난다. 아니 사실 화해했다고 하더라도 상처가 사라진다는 건 근원적으로 불가능해 관계의 수습을 조명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한번 다친 마음은 수습하기 어렵다. 상처가 나 곪은 마음을 열고 소통한다는 것은 아픔이 많으면 많을수록 두려워진다. 그럼 계속 반복되는 거겠지. 왕따의 굴레가.
영화는 이 굴레에 대한 이야기다. 근데 명확한 서사로 전하는 게 아니라 넌지시 전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마치 옆에 있는 사람의 기분을 느끼게 도와준다. 배운 것이 혼자가 되는 것 밖에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왕따일 수밖에 없다. 인생 세상 뭐 같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행복한 적이 과연 몇 번이나 있었나? 도와주는 건 없는데 세상이 바라는 건 맞으니 인간들이 너무나도 싫어진다. 나 역시 그 과정 한가운데 있다. 내가 배운건 혼자가 되는 것 빼곤 없다. 낯 안 가리는 성격이 되고 옷 이쁘게 입고 다녀도 난 힘이 들 때 마음을 여는 방법을 모르겠다. 인간관계도 세상도 나에겐 두려움의 연속이다. 이런 내가, 나와 비슷한 이들에게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주고자 글을 쓴다지만 그것마저도 혼자기 때문에 와닿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염치 불고하고 글을 더 써본다. 우리는 왕따다. 세상이 우리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반대로 어쩌면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을 모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한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우리를 기다릴지 모른다. 예쁘고 멋진 배우자들 만나 행복해질 수도 있고 좋은 친구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 수도 있겠지. 근데 불행이 우리를 피해 간다는 건 그냥 미친 개소리다. 불행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진 않으니까. 근데 우리는 더 버티고 버텨서 살아남아야 한다. 근거가 뭐냐고? 앞으로 행복할 거라는 걸 약속하면 되지 않냐고? 아니다. 영화같이 행복해지는 상황은 전적으로 영화에서만 일어난다. 미래는 불행할 것이다. 항우울제가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기분까지 닿을지도 모른다. 근데, 이것과 별개로 할 말이 있다. 고맙다. 살아줘서. 그동안 힘든 세상을 이겨줘서. 단지 그 말 뿐이다. 세상의 승리자가 여러분이라는 말 하지 않겠다. 언제는 승자고 패자가 되는 게 삶이니까. 근데 내가 세상에게 하고 싶은 말은 쓸쓸한 이런 굴레야 말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인생의 과정에 대해 썼고 이 영화를 골랐다. 앞으로의 순간을 보장할 수 없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살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 같은 거 찾지 못하더라도 무작정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행복해지고 가끔 불행한게 우리의 삶 아닌가. <꿈의 제인>의 엔딩신이 떠오른다. 우리 어쩌다 있을 행복할 순간을 위해 죽지 말고 오래오래 살자. 잠깐 있는 행복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더 버티자. 왕따라서 고맙고 당신이라 다행이다. 이건 빈말 아니라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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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무뢰한>, 아니면서 무뢰한 척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씨발년아."
자신을 칼로 찌른 여자가 있다. 그런데도 그 칼을 꽂힌 채로 그는 그녀를 위한 새해 덕담을 내뱉는다. 이 영화의 느낌은 마지막 대사 하나로도 충분하다. 아니다. 포스터처럼 어스름한 새벽녘의 피곤한 두 얼굴로도 충분하다. 왜 이 영화를 다시금 찾았냐고 묻는다면 그런 날이라서 그랬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담배 연기를 맡고 싶은 날이라서. 다들 그러다 담배를 시작한다고 하지만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 담배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연기를 좋아하는 거니까. 담배연기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게 보고 싶은 날이었다. 저 대사 같은 말을 해주고픈 사람이 떠올라서일 수도 있다. 처음 봤을 땐 영화의 결말이 정말 '영화'같다고 생각했었다. 뭉근하게 피어오른 담배연기에 자욱하게 빠져있다가 저 결말을 보고선 갑자기 담뱃재가 왈칵 쏟아져내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먼 얘기도 아니더라. 정말 미운데, 그래도 정이 몽당 떨어질 만큼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람. 온갖 상처를 받고도 그래도 잘 살았으면 좋겠단 생각이 드는 사람. 기분이 무척이나 나쁘지만 가끔 궁금은 한 사람. 그런 사람이 한 명쯤은, 내게도 있을 수 있다는 걸 늦게 깨달은 탓이리라.
앞서 드라마틱한 마지막 애증의 한 마디를 남긴 이는 어딘가 비뚤어진 형사 정재곤이다. 정의구현은 무슨,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법의 테두리를 왔다 갔다 한다. 그는 형사가 두려워해야 할 건 범죄자와 구분이 되지 않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범죄를 저지르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뿐이지, 그의 수단과 방법은 범죄자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딘가 헛헛해 보이는 살쾡이나 표범 같다. 그는 가장 빠른 루트로 가기 위해서라면 가장 잔인해질 수도 있다. 누군가의 약점을 빠른 시간 내에 파고들어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그가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이 돼지발정제를 써서 용의자의 애인에게 자백을 얻어 사건을 해결한 것일까. 그러나 그는 그걸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 씁쓸한 표정으로 적당히 찌들고 풀어진 눈으로, 삐딱한 걸음걸이로 그는 그의 앞에 놓인 모든 하루를 걷고 있다.
김혜경은 열쇠 7개 있는 집에 들어갈 수도 있었던 단란주점 사장이다. 남자 때문에 인생 종친 케이스라고 모두가 인정. 회장님 세컨드로 잘 나갈 수도 있었는데 그 부하와 엮이는 바람에 인생이 피곤해졌다. 그가 재곤을 만나게 된 건 그녀의 애인이 자신을 괴롭히던 남자를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남자란 어떤 존재일까. 권력과 자리에 따라 자신을 유흥거리나 정복지쯤으로 여기는 한량이나 게임중독자일까. 확실히 그녀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는 매력이 있고 그 매력을 잘 쓸 줄도 안다. 그러나 늘 여유로운 웃음을 안고 모두를 대하는 그녀라도 실상은 그녀만큼 외롭고 허망한 인생도 없을 것이다. 기껏 마음을 붙였던 애인은 이제 도망자가 되어 자신을 돈줄로 써먹고 있다. 돈과 남자는 그녀에게 등짝을 쳐주고 싶은 원수가 아닐까. 남자에게 돈을 벌어 남자에게 돈을 쓴다. 게다가 지금은 범죄자의 애인이라니. 그냥 다 버리고 떠나오기엔 그것들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발목을 족쇄에 가둔다. 흘러넘치는 건 술이요, 오도독거리는 건 얼음뿐이라. 까무룩 술이 취해 아침에 잠이 들고 밤에 펼쳐지는 아득바득한 인생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무뢰한이다. 신기한 건 주인공인 재곤과 혜경이 가장 무뢰한이라고 보긴 어렵다는 점이다. 오히려 재곤과 혜경을 묶어두고 있는 주변 인물들이 더 피도 눈물도 없는 무뢰한에 가깝다. 주인공인 재곤과 혜경의 공통점이 있다면 빈틈 있고 어딘가 짠하다는 것. 무뢰한 비스무리 사는 중인데 고민이 많다는 것. 인정사정 볼 것 없을 것 같은 재곤은 사실 자존심과 연줄 사이에서, 자신의 감정과 직업의식 사이에서 고민한다. 돈이나 받아먹는 부패한 형사가 되고 싶지 않아 성질을 부렸더니 고작 그의 스폰서가 보낸 금액은 정확히 48만원. 얼척이 없다. 범인을 잡을 때 몸 성치 않게 끝내 달라면서 형사 같지 않은 요구를 하는 건 선배 형사다. 그의 몰골이 짠하다. 그는 선배님의 '내 사람이 맞냐'는 질문에 토해내듯 대답을 했고, 적은 액수의 뇌물을 확인하고 돌려주기 전 허탈한 듯 히죽거린다. 돼지발정제를 쓸 수도 있는 무자비한 형사로서의 그의 모습은 어떠면 그가 속한 교양 있는 무뢰한들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혜경 역시 보다 보면 저렇게 짠할 수가 없다. 뭐하고 살았냐고 물으면 빚 받으러 다니고, 빚 갚으러 다녔단다. 인생의 뭔 빚이 그렇게나 많은지 모르겠다. 범죄자 애인은 몇 천이 누구 집 애 이름 같나 보다. 그의 소식에 혼자 마음 졸이고 그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버리는 그녀의 모습에 숨어 지켜보는 재곤의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혜경이 궁여지책으로 외상금을 받으려 돌아다니는 모습은 당당하고 가냘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당당함으로 무장했던 그녀는 웃으면서 돈을 받아내다가 결국은 술집 외상 때문에 인생 종 치고 싶냐며 사정하면서도 나 김혜경이라면서 힘들게 자존심을 지켜내고 있었다. 이런 생활이 익숙해진 듯한 것이 마음 아픈 사람.
둘은 서로를 믿지 않는다. 진심인 듯 아닌 듯 서로를 속이고 있다. 그것이 무뢰한들의 세상에 걸맞는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믿으면, 속으면 바보같이 당하는 세상이니까. 그러나 은연중에 드러나는 상대의 모습에 흔들리고 만다. 의심 가득했던 그녀는 재곤을 완전히 믿지 못해도 그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하고, 사건을 위해서 혜경을 이용하려 했던 재곤은 혜경이 다칠까 배려해주고도 아무 일도 모르는 척한다.
그들의 진심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서로를 가장 속여야 하는 순간에 드러난다. 진심과 거짓의 경계에서 그들은 사랑 비스무리한 걸 하고 있다. 혜경이 돈을 위해 재곤(그녀는 그를 '영준'으로 알고 있지만)을 유혹해야 하고, 재곤은 범인 검거를 위해 그 유혹을 알고 짐짓 모른 척 받아들이는 순간. 재곤이 그녀가 자신의 약점이라고 말하고, 그녀가 아끼던 목걸이를 다시 전당포에서 찾아와 내려두는 순간. 지금 애인이고 뭐고 버리고 자신과 살면 안 되냐는 재곤의 말에 진심이냐, 고 물으며 흔들리던 혜경의 눈. 에이, 그걸 믿냐 하며 어설프게 둘러대는 그의 말에 끝내 숨기지 못하는 그녀의 씁쓸한 눈빛과 미소.
혜경이 어처구니가 없는 건 결국 그렇게 자신을 흔들어 놓았던 재곤의 모든 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이름부터 자신이 알던 '이영준'이 아니라잖나. 자신의 애인을 한 방의 총알로 날려 보낸 것보다도 아무것도 몰랐던 것에 '나 김혜경이야'라는 말처럼 지켜오던 자존심이 와르르 무참히 쓸모 없어져 버려서. 아무것도 믿지 말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번에는, 그는, 그래도 자신에게만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했던 자신에게 분노한 것이리라. 그녀의 집주소며 모든 정보를 알면서 정작 그녀는 그의 아무것도 제대로 안 것이 없다는 것에, 겪을 만큼 겪어봤다 생각했는데 이토록 무방비했던 자신이 비참하고 자존심 상해서. 충격보다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떠는 것이리라. 그 총알로 날렸던 건 애인의 심장만은 아니겠지.
재곤은 사과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찾아와 나는 형사고, 내 일을 했을 뿐이라고, 그녀를 상처주려 했던 게 아니라고 할 뿐이다. 재수 없다. 술을 팔 때보다 더 구차하게 마약을 놔주며 살고 있는 혜경을 찾아가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녀를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면서도, 처량 맞게 집 앞에서 하루 종일 비나 맞고 있으면서도,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어쩌면 혜경에게 필요한 건 그 한마디일 텐데. 미안하다고, 다시 곁에 있어달라고. 한번 안아주면 될 텐데.
세상이, 영준이, 아니 영준이라고 믿었던 재곤이 그녀에게 무뢰한이 되라고 가르쳤으니 그녀는 그녀대로 '무뢰하게' 그를 꼭 안아 칼로 찌르고 만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다. 그녀에겐 진짜 이름이 뭐 건간 그는 여전히 그의 애인 준길의 이상한 감방 친구로 그녀 눈 앞에 등장했던, 이영준이다. 그를 보고 싶었던 마음, 한번 꼭 안고 싶은 마음, 왜 비를 맞고 있냐며 묻고 싶은 마음이 한 켠. 그래도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나. 나의 애인을 다리 하나 팔 하나 병신 만드는 것도 아니라 심장에 총알을 박아야만 했나. 나에게 했던 모든 말 그것도 거짓이었냐. 묻지 못한 그 야속함과 증오, 배신감이 한 켠. 그렇게 마음이 한 켠 한 켠 쌓인 뒤섞인 행동이다.
그러나 거기서 알 수 있다. 그렇게 무뢰한같이 칼을 찌르고 나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힌 혜경의 모습에서. 애초에 그렇게 모진 사람이 못된다는 걸. 혜경은 무뢰한이 아니며, 될 수도 없는 사람이란 걸. 재곤 역시 그 칼을 맞고도 유유히 경찰차도 보내고 꾸역꾸역 아파하며 길을 걸어 내려오는 걸 보면. 죗값이다 하고 받아들이는 거 보면. 그 역시 무뢰한이 아니라는 걸. 차라리 아주 못돼 쳐 먹은 사람들이었으면 좋았을 걸. 무뢰한이 아닌 그들이 주변 사람처럼, 세상처럼 무뢰하게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다.
영화는 대문짝만 하게 자신을 하드보일드 멜로라고 말한다. 세상이 녹록지 않다. 잘 믿어서도, 진심을 잘 들켜서도 안 되는 것이다. 형사인 재곤에게는 범죄자가 애인과 한바탕 나뒹굴고 있는 소리를 엿들으면서도 도시락을 아무렇지 않게 넘겨야 하는 것이고, 혜경에게는 한 때는 자기 발 밑 같았던 사람이,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자신을 은근슬쩍 더듬고 희롱해도 감정을 숨기고 웃음을 살짝 지어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그 안에 사랑이란 게, 웃음이란 게 있지만 한 군데씩 비틀려 있다. 뾰족한 송곳 같은 사랑, 우스꽝스러운 웃음 같은 것. 그와 그녀의 사랑이 시작된 순간을 꼽자면 언제일까. 그건 그녀가 그가 구구절절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따졌을 때가 아닐까. 어설픈 그의 거짓말에 그녀가 날카롭게 파고들었을 때, 그러고도 그가 예리하네, 하면서 뻔뻔하게 웃어넘겼을 때. 그럼에도 서로가 밉지 않았던 순간. 밤도 아침도 아닌 그 어스름한 새벽에 무뢰한이 아닌 이들의 '무뢰한' 사랑이 시작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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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을 전문(어)가를 모시고 리뷰 해봤습니다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나의 문어 선생님을 K-문어 선생님과 리뷰 했습니다!
씨네마사지
? 황보랑 영화 보고 싶은 사람 모여라~?? ♀
거리두기 해제 기념 씨네마사지에서 첫 번째 이벤트를 열게 되었습니다 ?
다가오는 5월 18일에 개봉하는 범죄도시2를 황보와 함께 보고 싶으신 분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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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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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문나이트> 60초 예고편
MCU 사상 가장 압도적인 히어로! 강렬하고 초월적인 힘을 가진 ‘문나이트’를 만나기까지 D-20 디즈니+ 마블 오리지널 시리즈 [문나이트] 3월 30일 디즈니+에서 글로벌 동시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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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화녀> 재개봉 예고편
작곡가 동식은 양계장을 운영하는 아내에 의지해 살고 있다.
어느날 명자가 하녀로 집안에 들면서 가정의 평온은 깨지게 된다.
아내가 집을 비운 새 동식은 명자를 겁탈하고,이후 임신사실을 알게 된 아내는 명자의 아기를 강제로 유산시킨다.
이에 명자는 쥐약으로 가족을 몰살시키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