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2024-11-14 10:45:57
정년이는 왜 금쪽이가 되었나
드라마 [정년이] 리뷰
이 글은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정년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3년. 드라마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국극 장르를 위해 소리부터 배우며 보낸 시간. 제아무리 다른 사람의 인생으로 사는 삶을 업으로 삼고 있다고 해도 쉽지는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극 속의 정년이가 그랬듯,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연습에 임했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 덕에 극 중 가장 큰 시간을 할애한다고 봐도 무방할 국극 장면에서 립싱크(?)의 이질감 없이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시청자의 입장에서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OTT다이어트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신규 작품들이 쏟아지는 이 시점에서,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없다고 가정한다 해도, 국극 장면을 제외한 이 드라마의 큰 줄기는 식상하다는 말조차도 먼지를 툴툴 털어내야 쓸 수 있을 만큼 낡아빠졌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식상하다는 이야기는 여태까지는 잘 “먹혔다”는 말이기도 한데, 어째서인지 이 엉뚱한 데다 국극밖에 모르는 주인공 정년이는 달갑거나 기특하기는커녕 금쪽이에 가깝게 느껴져 분통이 터질 때가 많다. 연기자들의 피땀눈물이 이렇게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시대가 변했다.
생각해 보면, 정년이는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하늘이 내린 재능. 그리고 그 재능을 발휘하는 찰나에 정년이의 잠재력을 단박에 알아봐 준 사람들. 게다가 언제나 정년이를 믿고 도와줄 수 있는 주변인들. 게다가 알고 보니 출생의 비밀까지(?) 안성맞춤으로 갖추었다. 우리를 스쳐 지나간 다른 주인공들처럼. 정년이 역시 원석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 원석을 보석으로 세공하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 보통 드라마의 여정이며, 최종회에서는 그것이 명성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심지어 사랑이든. 원하는 것을 손에 가득 쥔 채 웃는 주인공을 보며 박수를 치는 것이 어쩌면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러나 마치 동화 같은 정해진 결말인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의 저주는 중간의 모든 세공과정을 망쳐놓았다.
천방지축에 씩씩한 것이 정년이라는 인물을 감싸고 있는 가장 큰 골자임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정년이는 그 발랄함, 혹은 무지에서 오는 열정이라 불리는 용기를 자신 앞에 다가온 힘든 고난들을 극복하는데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정년이는 시종일관 자신 앞의 장애물들에게 화를 나거나 왜 내 말을 들어주지 않냐고 떼쓴다. 덕분에 드라마의 모든 룰과 일부 등장인물들은 정년이의 민폐에 가까운 행동들을 커버해 주기 위해 존재하고 있으며. 그마저도 뒤처리가 깔끔하지 못해 ”주인공 버프“ 혹은 주인공 특혜라는 단어가 단박에 머릿속에서 떠올라버린다.
수많은 드라마에서의 여주인공들은 극이 진행되면서 결국에는 클리셰라는 지독히 두껍고 미끄러지지 않는 레드카펫을 밟을지언정 최소한 그 어떤 작은 벽이라도 넘어보려는 시도를 했다. 그러나 정년이는 소리 잘한다는 그 능력 하나만 내세워 모든 일에서 프리패스를 받아버린다. 주인공에게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천부적인 능력뿐만이 아니다. 목표를 위해 달려가는 동안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그 간극 사이에서 발생하는 고뇌와 인간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년이에게서는 그 어떤 매력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성서사라고?
한창 “조폭영화”가 유행할 때가 있었다.
당연히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남자였고. 간혹 가다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은 그마저도 신나게 ”이용당하다 “ 죽거나 사라지곤 했다. 여성 서사.라는 말 자체가 현재에 들어서야 겨우 조금씩 나오고 있는 지금. 거의 모든 역을 여성들이 꿰차고 있는 이 드라마에도 여성 서사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그다지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물론 여성들이 애초에 “제대로 된 역으로”출연하는 작품들 자체가 적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여성들이 많이 나온다 해서. 또는 주요 인물로 나온다고 해서. 우리는 과연 그런 작품들을 여성 서사라는 이름을 붙여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유행했던 조폭영화들에서 다루려 노력했던 것이 “의리”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 있다면, 드라마 [정년이]에서도 꽤나 비중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동성애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원작에 있는 부용이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삭제해 버림으로써 애초에 이 작품에서는 그에 대해 다루지 않거나. 겉만 핥고 지나가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물론 방대한 원작을 한정된 시간에 담아내려면 삭제해야 할 것들이 반드시 있어야 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다른 인물들도 아니고 부용 캐릭터를 삭제함으로 인해 드라마의 서사는 한 없이 헐거워지고. 채울 수 없이 늘어져버린 감정선과 공간들은 정년이의 금쪽이 쇼로 모조리 채워야만 했다. 그 덕에 정년이는 자기 지분 이상의 욕을 들어먹으며 금쪽력을 더 키우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여성들이 떼거지로 나오니 여성서사다.라는. 말을 붙이기보다는 여성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도 가감 없이 다룰 수 있는 작품에 그 단어를 뿌듯하게 붙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모든 서사가 아름다운 이야기만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과연 드라마 [정년이]는 나쁜 작품인가.
그렇다면 과연 드라마 [정년이]는 나쁜, 혹은 실패한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나는 전설이다]라는 작품을 떠올려보라고 말할 것이다.
영화가 먼저 떠오르는지, 책이 먼저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두 작품을 모두 감상한 사람이라면 절대 동명의 책과 영화가 “같은”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물론 나에게는 원작이 압승을 거두는 시시한 질문이다) 특히 영화의 경우, 미국에서 있었던 9.11 테러 이후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에서 다시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골적으로 그라운드 제로라는 단어가 몇 번이고 반복된다. 그렇기에 주인공 윌 스미스는 그 누구보다 인류의 구호에 앞장서고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인다.
고로 한 번의 각색을 거친 작품이라면, 제2 창작물은 원작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있다. 다행히(?) 영화판 [나는 전설이다] 작품도 그다지 나쁜 오락영화는 아니었기에 두 작품에 대한 호불호 테스트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원작과 창작물을 올려놓은 저울의 한쪽이 처참하게 망가진 경우라면 애초에 게임 자체가 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드라마 [정년이]는 내게는 후자에 속한다. 이 드라마를 위해 수많은 시도와 노력을 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 노고를 깎아내리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그러나 더 이상 지금의 우리에게 “먹히는”이야기는 되지 못했다. 오늘도 나는 연습생 주제에 단체 연습도 말없이 나오지 않은 아이패드 속 정년이를 보며 이를 뿌득 뿌득 갈 뿐이다.
마치면서
다니엘 레드클리프가 해리포터 오디션장을 들어서자마자. 심사위원들이 무릎을 탁 쳤단다. 그래 바로 이 아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배우(와 스타일을 담당하시는 분들) 덕에 우리는 해리포터 시리즈 내내 마치 “책을 찢고 나온”것 같은 주인공을 보며 황홀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었다. 모든 원작에서 인물들이 “찢고 “ 나와야 하는 것은 싱크로율이 아니다. 그 인물이 전하려는 이야기(메시지) 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 앞에 만화를 찢고 나타난 정년이는 너무도 변해버린 시대에, 단 하나도 발전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버렸고. 그 결과 원작을 사랑하는 이들의 애꿎은 마음만 벅벅 찢고 있다.
이 글의 TMI
1. 어휴, 영서야 니가 고생이 많다.
2. 요새 피티하느라 손바닥에 굳은살 박힘
3. 사워도우 오픈 샌드위치에 꽂혀가지고 아주 통장에 펑크날 때까지 이것만 만들어 먹는 중.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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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놈 2> 부전자전인 속편에 희망을 주는 마지막 2분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베놈'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지내던 '에디 브룩(톰 하디)'. 통제된 삶을 답답해하는 베놈과 충돌하고, 기자로서도 실패했으며, 전 여자 친구인 '앤(미셸 윌리엄스)'의 결혼 소식을 접하며 괴로워하던 그의 앞에 어느 날 수감된 연쇄살인범 '클리터스 캐서디(우디 해럴슨)'가 만남을 요청한다. 캐서디는 자신의 말을 기사로 쓰면 숨겨진 이야기를 독점으로 제공하겠다며 에디에게 거래를 제안하고, 거래에 응한 에디는 그가 던져준 단서를 통해 미해결 살인사건을 추가로 밝혀내 기자로서 재기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에디는 인터뷰 도중 의도치 않게 캐서디가 빌런 '카니지'로 거듭나는 빌미를 제공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 카니지는 옛 연인이자 돌연변이인 '프랜시스 배리슨/슈리크(나오미 해리스)'를 구함과 동시에 자신을 사형의 길로 인도한 에디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세운다. 이에 에디와 베놈은 카니지에 맞서 다시 한번 안티 히어로의 여정에 나선다.
2018년에 개봉했던 <베놈>은 혹평과 호평을 동시에 들은 작품이었다. 주인공 에디와 베놈이 한 몸을 공유하게 되는 과정에서의 개연성 부재, 흥행을 위해 관람 등급을 내리려는 수단으로 자행된 분량 편집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스파이더맨의 숙적이라는 유명세, 톰 하디의 열연, 그리고 외계 괴물에 걸맞은 강렬한 비주얼과 독특한 액션 연출은 시리즈의 성공적인 시작을 알리는 발판이기도 했다. 이에 베놈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빌런 카니지의 등장을 예고한 <베놈 2: 렛 데어 비 카니지>에게는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은 발전시켜서 시리즈를 안정적으로 확장시켜야 하는 미션이 주어졌다. 그러나 수 차례의 개봉 연기 끝에 3년 만에 공개된 속편 <베놈 2>는 그저 전편을 답습한 범작에 그치고 말았다.
당장 <베놈 2>의 구성은 같은 스케치에다가 색만 검은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꿔 칠한 그림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전편과 유사하다. 전편의 세 가지 플롯인 에디 브룩과 베놈의 관계 형성, 베놈과 빌런과의 대결, 연애와 커리어에서 실패를 겪는 에디의 개인사에 카니지의 탄생 경위만 더하면 정확히 <베놈 2>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는 달리 말해 결국 베놈의 자식이자 숙적인 카니지와 그의 숙주인 캐서디의 매력과 완성도에 따라 영화의 만족도가 좌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베놈 2>는 결정적인 문제를 노출한다.
사실 캐서디라는 인물 자체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피에 집착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라를 캐릭터는 정형화된 느낌이 없잖아 있지만, 우디 해럴슨의 열연 덕분에 이 빨간 괴물은 개성과 생동감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클리터스 캐서디와 에디 브룩 사이에 가정 학대와 폭력의 피해자라는 공통의 유년 시절을 위치시킨 것도 카니지와 베놈의 대결을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둘 모두에게 반사회적 동기를 심어주면서 빌런과 안티 히어로의 대결에 부합할 만한 감정선과 당위성을 안기기 때문이다. 이는 에디와 베놈이 공유하는 소외감과 패배감을 부각해 최소한의 개연성을 확보했던 전편의 스토리텔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 외에 카니지에게 부여된 서사와 그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이 들려주는 불협화음은 위의 장점을 모두 잊게 만든다.
작중 캐서디의 이야기는 또 다른 빌런 슈리크와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학창 시절부터 이어져 온 둘의 비극적인 로맨스는 캐서디의 중요한 심리적 동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로맨스가 진부함으로 가득하다는 점이다.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슈리크를 캐서디가 구하러 간다는 전개, 두 연인이 결혼식을 올리고 슈퍼카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들은 2016년 작품인 <수어사이드 스쿼드> 속 조커와 할리퀸을 보는 듯한 기시감으로 가득하다.
캐서디와 슈리크의 이야기가 작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도 아쉬움을 남긴다. 영화는 초반부에 둘이 헤어진 후 한 명은 정신병원에 갇히고 다른 한 명은 살인범의 길에 들어서는 과거를 팀 버튼의 영화와 같은 그로테스크한 표현주의적 스타일로 간략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 짧은 오프닝에는 우연히도 추후에 일어날 사건들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 모두 등장하며, 이들은 또 우연히 한 데 모이기도 한다. 이처럼 과도하게 운과 우연에 기대는 전개는 몰입도를 헤칠 뿐만 아니라 카니지 및 그와 관련된 캐릭터들이 단지 이야기 진행을 위한 도구로 소비되는 듯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영화는 캐서디의 여러 과장된 시적 대사를 통해서 연인의 행보를 암시하는데, 정작 해당 대사들이 복선이라는 사실이 너무 또렷하다 보니 어떤 사건이 벌어져도 충격이나 긴장감 등이 고조되지 않는 문제도 나타난다.
그렇다고 주인공의 서사가 진일보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전편에서 베놈과 에디는 관계성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각자의 공동체와 인생에서 실패자와 패배자로 낙인찍혀 소외당한 이들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의기투합해서 사회에 존재감을 보여주는 이야기는 충분히 감정적으로 어필할 만한 힘이 있었다. 문제는 <베놈 2>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데 그친다는 사실이다. 물론 에디와 베놈을 분리하여 각자의 심리나 내적 고민을 한층 깊이 살펴보려는 시도를 통해 차별화를 꾀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 대목조차 희화화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둘의 갈등과 이별, 그리고 재회의 과정은 그저 중재자 역할을 하는 앤의 분량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면적이고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래도 이미 호평받았던 액션의 경우 한층 더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며 오락 영화로서의 본분을 다한다. 카니지는 베놈과 차별화되는 비주얼과 능력을 앞세워서 감옥에서의 탈옥 장면처럼 다양한 스펙터클을 선사한다. 늘어난 제작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화려한 CG를 통해 꾸며진 액션씬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한다. 전편과 달리 베놈과 카니지가 끝까지 박력 있고 육중하며 강렬한 액션을 유지하는 것이나, 배경 장소의 디자인 등에서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3>을 연상시키는 클라이맥스에서의 마지막 대결도 인상적이다.
다만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15세 등급으로 개봉했기 때문에 외양에 비해 액션의 강도가 심심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정확히 초점을 잡지 못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인해 두 캐릭터가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장면도 몇몇 눈에 띈다. 또한 전편의 액션씬 진행을 반복하며 스스로 긴장감을 낮추는 문제도 있다. 자신보다 압도적인 적을 만나 위기에 몰린 베놈이 심비오트 종족의 약점인 고주파의 소리를 이용해 숙주와 심비오트를 분리하고 상황을 반전시킨다는 틀에 박힌 패턴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산만한 인상을 안기던 단점도 답습한다. 1시간 반 가량 되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에디와 베놈의 좌절과 각성, 카니지의 탄생, 에디와 캐서디 각각의 로맨스까지 챙겨야 하다 보니 필수적인 장면들을 삽입하기에도 바쁜 것이다. 이는 어찌 보면 앞서 나열한 모든 문제점의 근원이기도 하다. 스크린에 누가 등장하느냐에 따라서 분위기가 급격하게 달라지는 것이 이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학적인 대사를 주로 건네는 캐서디와 카니지의 장면은 대체적으로 무겁고 극적이며 기괴한 느낌을 자아내면서 진중한 인상을 주는 반면, 에디의 집이나 클럽에서 주로 진행되는 베놈과 에디의 이야기에서는 코미디적 요소가 두드러져서 한없이 가볍다. 이처럼 상반된 분위기를 오가다 보니 광기와 잔혹함으로 가득 차야 할 카니지는 그저 폼 잡는 것을 좋아하는 악당으로 보이기도 하고, 안티 히어로와 빌런의 대결을 그려내야 하는 영화도 러닝타임 내내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듯 느껴진다.
클라이맥스로 갈수록 어느 대목이 편집되었는지 보일 정도로 영화의 완성도가 하락하며 앞뒤 장면조차 이어지지 않는 갑작스러운 전개가 등장하는 것도 같은 문제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슈리크는 에디가 앤에게 선물하려던 반지를 훔치는데, 그 이후로 반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보니 클라이맥스에서 슈리크와 앤의 행동과 대사에는 이유와 일관성이 없어지고 그들의 비중과 역할도 애매해진다. 민간인이나 경찰을 공격하는 데 거리낌 없던 슈리크가 돌연 자비를 호소하거나, 갑작스럽게 암시되는 다음 빌런의 존재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그 결과 전편을 빼닮은 장단점이 한 데 모여 만든 혼란으로 가득 채운 90분 간의 이야기에게는 부전자전이라는 말만큼 적절한 표현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놈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것은 전적으로 엔딩 크레디트에 삽입된 쿠키영상의 임팩트 덕분이다. 이미 앤디 서키스 감독이나 톰 하디의 인터뷰에서 언급되었듯이 2분이 되지 않는 이 영상은 12월 개봉 예정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더 나아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속 베놈을 예상케 한다. 특히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3>에서 베놈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들었기에, 원작 코믹스에서부터 숙적이었던 스파이더맨과 베놈의 두 번째 조우에 대한 암시는 기대와 희망을 부풀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쿠키 영상을 보고 느끼는 만족감 자체가 결국 앞선 본편 내용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하다. 그렇게 <베놈 2>는 길어진 부제와 쌓여간 개봉 연기일만큼 커진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간신히 시리즈의 존속과 확장을 기대할 한 줄기 희망만 남긴 채 아쉬움 속에서 마무리된다.
P(Poor, 형편없음)
쿠키 영상이 없어도 과연 베놈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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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보다 발전하지 못한 리메이크
영화 <모탈컴뱃>은 90년대에 인기를 끌었던 게임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꽤 폭력적인 격투 게임이었던 모탈컴뱃은 게임 캐릭터의 여러 동작들을 실제로 촬영하여 게임 속으로 넣어 구현했다. 때리고 피가 튀는 모습을 꽤 잔인하게 묘사했던 게임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많이 플레이했던 게임이다. 다양한 나라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한국에서의 인기는 그것보다는 좀 덜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마니아층이 만들어져 게임을 즐기고 나온 영화도 즐겼다.
과거에 실제로 게임을 플레이해 본 적이 있다. 좀 괴상해 보이는 CG가 이질감이 들어 조금 해보고는 이내 그만둬 버렸지만 그 당시 개봉했던 영화를 본 기억은 남아있다. 그 당시에는 신기하게 느껴졌던 여러 CG들과 효과들은 주요 배역으로 등장하는 배우 크리스토퍼 램버트의 얼굴과 함께 기억된다. 온갖 폼을 잡는 배우들이 등장하는 영화였지만 그래도 호기심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들었다. 1편 이후 기대감에 2편을 보고 나서 더욱 떨어져 버린 완성도에 실망했던 기억까지 이 영화에 대한 기억은 ‘신기했지만 실망스러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두 세력이 지구의 운명을 두고 싸운다는, 그것도 토너먼트를 해 우승자가 나온 세력이 그것을 결정한다는 것이 매우 이상한 설정이었다.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그걸 그냥 그 내용대로 받아들이고 영화를 봤다. 이번에 리메이크된 <모탈컴뱃>은 과거의 전략을 그대로 따라서 구사한다. 게임 영상 연출에 재능이 있는 신인감독에게 연출을 맡기고 출연하는 배우도 모두 신인급으로 뽑아 배역을 맡긴다. 시나리오나 이야기를 크게 신경 쓰지 않고 CG와 액션으로 나머지를 채운다.
사실 이번 리메이크에서도 보여줄 건 다 보여준다. 화려한 특수효과와 액션은 영화 내내 이어져 볼거리를 전달한다. 하지만 이야기 전개 자체가 90년대에 머물러있는 것처럼 올드하게 느껴진다. 영상이 잘 구현되어서 게임의 실사화가 잘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세력 간의 싸움과 캐릭터들이 각성하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으로 가득하다. 아무래도 나는 과거의 영화가 가졌던 한계를 조금은 극복하고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길 기대했기 때문에 더욱 실망감이 큰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에서는 OTT 플랫폼 등에서 공개가 되었는데 꽤 반응이 괜찮은 것 같다. 이 영화를 본 숫자가 꽤 되는 것으로 봐서 추후 후속 편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완성도라면 굳이 더 챙겨봐야 할 필요가 있나 싶다. 과거 격투 게임을 여러 번 영화화했던 <스트리트 파이터> 같은 것들도 영화의 이야기 전개 자체에 문제가 있었고 관객들의 반응도 안 좋았다. 아무래도 격투 게임을 좋은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모탈컴뱃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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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MZ Docs] 1983년, 외계인 침공?
1983 미지와의 조우
감독: 이은규
러닝타임: 76분
시놉시스: 1983년, 한국전쟁이 멈춘 지 30년. 세계는 냉전의 긴장감이 팽팽하다. 한편,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 상공 위로 불쑥 북한귀순 용사와 공산국가 민간항공기가 날아든다. 냉전의 한복판에 불시착한 사람들은 마치 지구에 온 외계인처럼 방송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생중계 되는데... 현실을 떠나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이들은 모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을까.
(출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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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에서 재미있는 프로젝트를 했다. 수십 년간의 아카이빙을 바탕으로 푸티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내레이션 없이 오직 영상만으로 서사를 만들어낸다.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는 '모던코리아 시네마' 섹션이 따로 있는데,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의 영화판을 볼 수 있다. <코리아 드림:남아진흥 믹스테이프>, <한국의 시간>, <한국음식 만들기>, <1983 미지와의 조우>, <누구에게나 계획은 있었다> 총 5편의 다큐멘터리가 영화관에서 영화의 형태로 상영된다. <1983 미지와의 조우> 역시 48분의 다큐멘터리가 76분으로 확장된 감독판이다.
1983년에 두 대의 비행기가 한국에 착륙했다. 2월 25일, 북한 공군 이웅평 대위가 미그 19기(MiG-19)를 몰고 귀순했고, 5월 5일 중공 민항기 납치 사건으로, 납치된 민항기는 춘천에 착륙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두 번이나 떨어지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냉전으로 분단된 마지막 국가인 한국 땅에.
감독은 1983년의 날벼락을 마치 우주에서 우주선이 떨어진 것처럼 표현하면서, 푸티지들을 모은다. 1981년 데뷔한 가수 민해경의 노래로 시작하는 화면이 누군가에게는 향수를 불러올지도 모르겠다.
외계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영웅?
영화 <E.T>의 장면들 또한 간간이 삽입되는데, 냉전시대였던 1983년의 한국 사람들에게 이들의 등장은 외계인의 침공과 비슷했다. 그때만 해도 철저한 반공 교육으로 공산당은 머리에 뿔이 나고 얼굴이 빨갛다고(제 어머니 피셜입니다) 생각했다고 한다. 반공 포스터에 등장하는 공산당들은 죄다 뿔난 괴물이었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어도 그때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소련제 미그 19기를 몰고 귀순한 이웅평 대위는 키가 180cm에 멀쩡한 남자였던 것이다.
이웅평 대위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귀순 환영 인파가 백만 명이 넘었단다. 그가 몰고 온 미그 19기 역시 군사적 가치가 높아 무려 10억 원이라는 금액을 받는다. 은마아파트가 1983년에 준공되었는데, 34평이 오천만 원 정도 했단다. 은마아파트 20채 살 만큼의 어마어마한 보상이다.
그리고 다시 5월 5일. 경쾌한 어린이날 잔치에 공습 경보가 울린다. 대만으로 망명을 기도하던 6인조 납치범들이 중공 민항기를 납치한 것. 민항기에 타 있던 승객이 무려 96명이나 되었고, 승무원도 9명이었다. 이들은 국내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형을 선고받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중화민국(대만)으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대만에서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우리나라에서 이웅평 대위가 극진한 대접을 받았던 것처럼. 이때의 협상으로 우리나라와 중화민국이 교역을 시작한다.
영웅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1983년에 남한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 10억 원의 보상을 받고 대한민국공군이 된 이웅평 대위와, 국민 영웅이 된 민항기 납치범.
이미 뉴스로 결말이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 시절 이웅평 대위(최종 계급은 대령이다)의 표정, 눈빛을 영상으로 보는 것과 글로 읽는 것은 전혀 다르다.
냉전의 끝자락이었던 1983년, 우리나라는 6.25전쟁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공습 경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실제 같은 해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대통령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북한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했다.
광분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야 한다'며 소리친다. 지금에 와서 보면 광기 같기도 하지만, 그때는 두려움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때의 긴박했던 상황과 인터뷰, 뉴스 영상을 <1983 미지와의 조우>는 E.T, 외계인, 우주선 등의 메타포를 이용해 다소 깜찍하게 그려낸다.
때마침 생중계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야말로 외계인이라도 나타난 듯한 리얼한 반응, 이제는 희미해진 서울 사투리 또한 재미있는 포인트다. 푸티지 다큐멘터리라는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감상하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
미래도 미지이지만 과거 또한 미지이다. 태어나지도 않았던 40년 전의 미지와 조우한 시간이었다. 모던코리아를 흥미롭게 보았다면 영화판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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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일정
09.28.(토) 13:30-14:45 메가박스 킨텍스 3관
10.01.(화) 13:30-14:45 메가박스 킨텍스 4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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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들만의 리그(1992)> 리뷰
평생 스포츠와 관계 없는 일상을 살았고, 올림픽 시즌엔 늘 소외감을 느꼈으며, 올해에도 어김없이 도쿄 올림픽 열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소시민이지만, 시즌이 시즌인 만큼 스포츠가 주요 골자인 영화를 감상했다. 바로 페니 마셜 감독의 《그들만의 리그(1992) 》다. 미국 의회도서관 선정 영구 보존 영화로도 꼽혔다고 하는 만큼 영화 내에서 문화적, 사회적 텍스트를 구석구석 살피는 것도 영화를 감상할 때의 한 가지 재미일 것이다. 물론 ‘신예로만 꾸려진 스포츠 팀’과 ‘급작스럽게 몰락했으나 어쨌든 유능하긴 한 코치’의 조합에 질렸을 수도 있고, 세월이 흐른 만큼 영화의 세련미를 느끼기 어려울 수도 있겠으나 이런 지점은 이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데에 큰 장애물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그들만의 리그》가 다큐멘터리인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가볍게라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영화의 스토리적 배경인 AAGPBL의 창립 과정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단 것이 아니라, 여성 프로 야구 경기가 미국을 휩쓸게 된 까닭엔 세계대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단 이야기다. 세계 2차 대전. 아마 의무교육기간에 모두가 들었을 서구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점이 이 때였다. 특히 “미국 정부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여성들을 국방 산업과 경제 전역으로 호출(서재철, 2016)”하였다. 그러나 국가가 장려한다 한들 ‘Rosie the Riveter’는 분명 통념에 위배되는 일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여성 스포츠, 흙 위를 달리고 굴러야 하는 야구 경기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겐 어처구니가 없는 처사다만- 몹시도 여성적이지 못한 일로, 권장한다는 건 얼토당토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선수단에게 주어지는 여러 제약은 우리에게 영화적 장치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 선수들의 증언에서 비롯되었다. 예컨대 선수의 몸을 보호하기 어려워 보이는 스커트형 유니폼, 숙녀가 되기 위한 필수 교양 수업, 상당히 강력한 사적인 생활 제재 따위가 이에 해당한다. 유감스럽게도 언론의 태도나 일부 유니폼 규정은 20세기로부터 특별히 달라지지 않은 듯 보일 때도 있으나, 최소한 아들을 데리고 원정을 다녀야만 하는 에블린(비티 슈람)같은 선수나, 외모가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탁월한 능력을 보았음에도 스카우트되지 않는 일은 감소했으리라 믿는다-혹은 믿고 싶다-. 이중에서도 마라 후치(메간 카바나프)가 스카우트 되던 장면과, 여성 프로 야구를 홍보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요구되었던 여러 ‘노력’ 에 관해선 선수 개인의 항의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존재한다는 걸 실감케 한다. 확실히, “여성과 스포츠는 결국 여성과 남성의 문제, 혹은 여성과 사회의 문제라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통적, 관습적인 이유가 있다(김은영, 이혜란., 2004)”고밖에 말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다.
특히 구조적인 요소를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선수들에게 사실상의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위에서 짧게 이야기한 스커트형 유니폼을 입지 않을 때엔 더 이상 선발된 야구 선수일 수 없으며, 신문사 촬영팀의 인터뷰에 기꺼이 응하지 않는다면, 여성 프로 야구 리그는 존속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가정이 그들을 몰아붙인다. 이밖에도, 더불어 선수들이 심각하게 자각하진 않았으나,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장면 역시 있다. 전미 여성 프로 야구라는 이름이 붙어있고, 자작곡 가사엔 캐나다와 스웨덴을 비롯한 국가 이름이 등장하는데도 미국에 사는 흑인 여성은 모집 대상조차 아니었던 점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장면은 능력이 출중하다면 어떤 인재든 등용한다는 능력주의가 기실 미국 사회의 백인 남성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한다. 브레히트까지 인용할 생각은 없으나, 《그들만의 리그》는 영화 내에서 이들의 여정이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는 점을 넌지시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어느 정도의 껄끄러움을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가 지닌 사회문화적 가치를 새삼 깨달을 수 있다.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스토리에 진입하기 전 서론이 너무 길었다. 이젠 《그들만의 리그》의 주인공 격인 도티&키트 자매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언뜻 보기에 둘은 야구 경기를 한다는 것 외에 크게 공통점을 찾기 어려워 보인다. 야구를 향한 태도 역시 크게 다르다. 언니인 도티 힌슨(지나 데이비스 & 트레이시 레이너)은 능력이 출중하나 야구에 뜻을 두지 않았으며, 동생인 키트 켈러(로리 페터 & 캐슬린 버틀러)는 도티에 비해 실력이 뛰어나진 않으나, 야구에 대한 열정은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이 외, 자매의 연결고리를 부각시킬만한 외모가 닮았다던가, 공유하는 습관이 있다던가 하는 장면은 특별히 보이지 않는다. 도티와 키트의 관계에 눈길이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키트가 언니에 대해 열등감을 품고 있다는 점이 영화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화 도입부에서부터 키트는 강하게 불만을 토로한다. 도티와 함께 있을 때 스포츠 실력에 대한 비교를 당하는 것은 물론, 외모에 대한 비교까지 당하는 경우가 잦다고. 그러던 와중 게임에 임하던 순간, 팀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 언니에게 키트는 불만을 품는다. 길게 이끌 수 있었으나, 제법 짧게 묘사된 이 갈등은 결국 키트가 트레이드 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편의상 도티와 키트를 주인공격의 인물이라 명명하긴 했으나, 영화가 이 둘의 서사에만 오롯이 집중했다고 보긴 어렵다. 우리는 키트가 트레이드 된 후 라신느에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쏟아 부었는지 알 수 없고, 남편인 밥(빌 풀만)이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야구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도티가 어떤 결심을 하고서 경기장으로 복귀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키트가 도티에게서 승리하는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자 했다면 그의 노력이 촘촘히 쌓여지는 순간을 삽입하여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거머쥐는 순간, 관객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시퀀스를 넣었어야 했는데, 페니 마셜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도티가 감독인 지미 듀간(톰 행크스)의 말을 듣고 야구에 대해 숨겨진 자신의 열정을 깨닫고 돌아오는 모습을 삽입하지도 않았으며, 키트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크게 좌절하는 모습을 넣지도 않았다. 감독이 잡아주는 숏이란 그저, 도티가 놓친 공과 승리를 만끽하는 도티를 멀어지는 샷으로 넣어준 것이 전부다. 팀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투수에게 높은 공을 치라고 했던 도티가 자신의 실수에 대해 크게 자책하는 모습 역시 없다.
그렇기에 나는 도티가 마지막 순간 공을 놓친 건, 그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마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의 유명한 대사, “결과를 알고 있을 때 우리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처럼, 언니인 자신이 아니라 야구를 위해 온몸을 날리는 키트를 위해 기꺼이 손을 놓은 것은 아니겠는가, 하고. 전미 선수로 뽑혔을 때부터 가지 않겠다고 말했던 도티는 지미가 감독직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을 때에도 나서서 게임을 지휘했을만큼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지미가 야구를 사랑했던 자신의 삶을 망친 5년에 대해 털어놓는 순간에도 감정적으로 꿈쩍하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돌아오자마자 미련없이 짐을 싸 고향으로 떠나고자 했으며, 진심으로 키트가 아닌 자신이 트레이드되길 원했다.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도티가 전미 야구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오로지 하나, 동생 키트가 떠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기 위함이었으며, 그가 남편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경기 내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면서도 야구를 떠나면서까지 피하려 했던 것은 혹시 모를 패배에 대한 두려움이나, 자신의 기량이 떨어졌다던가, 부상을 입었기에 나오는 내적 갈등 때문이 아니라, 키트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키트를 밀어내면서까지 피치팀에 남으려 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일 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를 다시금 경기장으로 부른 건, 남들이 몇 번이고 말한 ‘숨겨진 야구에 대한 열정’때문이 아니라 ‘하나뿐인 자매 키트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야구를 향해 온 몸을 내던지는 동생에게서 야구를 떠나는 것 정도로 화답해선 안된다는 생각에 돌아왔을 테니까. 그러하므로 도티와 키트는 모두 승리한 것이라 봐도 무방할 터다. 도티는 자매를 되찾았고, 키트는 야구를 되찾았으며, 둘 모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았으므로. 그러하니 이 자매가 닮은 부분은, '야구를 한다'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선 누구보다 고집이 세다는 점이며, 어려운 시대임에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했다는 점에 있으리라.
출처: 네이버 영화 포토
끝으로, 영화 속 몇 남성 캐릭터를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좀 섭섭한 일일 것이다. 예컨대 마라의 아버지, 마라의 남편이 되는 넬슨, 도티의 남편인 밥, 그리고 감독인 지미 듀간(톰 행크스)까지. 이 당시 여성들은 남성들의 트로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 및 문화가 팽배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무의미한 것인지를 이들이 함께 증명하기 때문이다. 같은 여성마저 마라를 향해 ‘야간 선수로 세우라’고 이야기하지만, 마라의 아버지와 남편인 넬슨은 그에게 크나큰 자부심을 품고 있다. 지미의 말에 따르면 ‘흔치 않은', 몇 안되는 똑똑하고 괜찮은 남자 밥은 스포츠라는 전통적 여성상과 어긋난 일을 하는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포용한다. 단순히 남성들이 없는 자리를 '계집애'들이 들러리로 채웠다 생각하였으나, 선수들이 진정한 스포츠맨십을 발휘하는 것을 발견한 지미는 자신의 리딩 방식도 바꾸려 노력(!)하는 것은 물론 도티에게 찬사를 보내며, 다른 팀의 감독직이 왔음에도 거절하기에 이른다. 그러니 보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상대를 나와 동등한 인간이라 인정할 때 우리가 얼마나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달리 말하자면, 접점 없이 먼 자리에서 선수를 조롱하던 남성 관객은 성 차별주의자의 관점에 입각하여 선수를 오로지 구경거리로만 취급하였고, 여성 프로 야구 리그를 창단했다 한들 자본주의적 관점에 입각하여 여성 선수를 경제적 손실을 방어할 대체물정도로만 인식했던 월터 하비의 태도는 인본주의적 사상에서 크게 어긋났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니 이 영화 내의 모든 여성과 남성 캐릭터는 각각의 위치에서 우리에게 성별과 인종을 떠나,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전달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90년대식 인간적 온정을 사랑한다.
★★★★
참고문헌
김은영, 이혜란. (2004). 여성스포츠의 성립배경과 페미니즘적 제 이론 고찰. 한국여성체육학회지, 18(2), 35-45.
서재철. 2016. 영화《그들만의 리그(1992)》에 대한 여성스포츠역사 및 사회적 성 역할 관점의 `교육적` 읽기. 한국여성체육학회지 30: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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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재킹 | 역사와 상상 사이에서 항로를 지켜내는 뚝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9년, 동해 상공을 비행하던 공군 파일럿 '태인'(하정우)은 비상사태를 맞이한다. 남파 간첩이 납치한 한국 민항기가 휴전선을 넘기 직전이 되자 민항기를 사격해 엔진을 멈추라는 명령이 떨어지는 것. 하지만 그는 전역한 자기 사수가 파일럿임을 확인한 후, 승무원과 승객의 안전을 우려해 상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결국 비행기는 그대로 북한에 억류되고, 태인은 군복을 벗는다.
2년 후 민항기 부기장이 된 태인'(하정우)은 기장 '규식'(성동일)과 함께 속초 공항에서 김포행 비행에 나선다. 승무원 '옥순'(채수빈)의 안내에 따라 승객들이 탑승한 후 이륙한 비행기. 그러나 '용대'(여진구)가 사제폭탄을 터뜨리자 기내는 아수라장이 되고, 용대는 조종실을 장악한 후 북으로 기수를 돌리라 협박한다. 폭발 충격으로 규식마저 한쪽 시력을 잃은 가운데, 태인은 비행기와 승객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과거의 힘을 살린 항공영화
하이재킹. 운항 중인 항공기를 불법으로 납치하는 행위. 미 연방항공청에 따르면 하이재킹은 1968년부터 1972년까지 유난히 자주 발생했다. 5년간 325건에 달할 정도. <1987>의 김경찬 작가가 각본을 맡고, 당시 조감독이었던 김성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하이재킹>은 바로 그 시기에 발생한 '대한항공 F27기 납북 미수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1971년 1월, 속초공항발 김포공항행 여객기가 이륙 30분 만에 홍천 상공에서 납치범 김상태에게 납치당했고, 이강흔 기장과 전명세 조종사는 협박범의 요구대로 기수를 북쪽으로 돌렸다. 하지만 비행기는 강원도 고성 바닷가에 무사히 비상착륙했고, 승객도 전원 생존했다. 이강흔 기장이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를 북한의 미그기라고 속이는 기지를 발휘하고, 전명세 조종사가 폭탄을 몸으로 덮는 희생정신을 보여준 결과였다.
<하이재킹>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1987> 느낌이 물씬 나는 역사적 상상력이다. 사람보다 이념이 우선시되던 시대의 그림자와 과거라서 오히려 신선한 당시 시대상을 버무려 기존 항공 영화의 한계를 피하려 했다. 과하지 않게 감정선을 살짝 '넛지(Nudge)'하는 화법도 관객을 승객 중 하나로 만드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덕분에 <하이재킹>은 난기류를 만나고도 목적지까지 비행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의 것은 역사에게, 상상의 것은 상상에게
실화 사건을 다룬 작품의 관건은 각색의 정도와 방향성이다. 상상과 왜곡은 한 끗 차이니까. 그런데 <하이재킹>은 그 어려운 일을 비교적 잘 해냈다. 역사적 사실을 부각하는 대목과 상상력을 발휘할 대목을 철저히 분리한 선택이 장르적인 측면과 스토리텔링 양쪽에서 득이 됐다.
사실 항공 영화는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다. 시간대가 현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그렇다. 숱한 사고를 겪으면서 보안 규정이 나날이 철저해졌기 때문.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만 해도 '류진석'(임시완)이 비행기 표를 사는 첫 장면부터 기내에서 범죄를 저지를 때까지 전개가 어색하다는 평가를 피하지 못했다.
<하이재킹>은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 함정을 피했다. 항공 보안 관련 규정이 미비했던 70년대를 배경 삼아 자칫 억지스러울 상황을 납득시켰다. 선착순으로 비행기 자리를 고르거나 용대가 보안 검사를 뚫고 폭탄을 반입하는 장면은 신선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역사의 빈틈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실제로는 없었던 민항기 격추 명령, 알려진 바 없는 범인의 범행 동기 등을 잘 짜 맞춰서 태인과 용대 사이에 진한 감정선을 불어넣었다. 그 덕분에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었던 이야기에서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이는 '이한열'(강동원) 열사와 '이연희'(김태리) 사이의 가상 로맨스를 활용해 6월 민주 항쟁을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한 <1987>의 장점과도 유사하다.
피해자 VS 피해자
그 덕분에 <하이재킹>은 단순한 항공기 납치 스릴러 이상의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 전혀 접점이 없는 태인과 용대의 이야기는 대조될 때 함의가 드러나기 때문. 용대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전형이다. 6.25 전쟁 때 북한 인민군 장교가 된 형 때문에 반공분자로 몰려서 감옥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 사이에 어머니까지 죽은 그는 2년 전 납북 사건 주동자가 북한에서 영웅 대우를 받는다는 소식에 착안해 하이재킹 범죄를 저질렀다.
반면에 태인은 피해자이지만 가해자는 되지 않았다. 그는 2년 전 휴전선을 넘어가는 민항기의 엔진을 쏴서 착륙시키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군에서 사수였던 파일럿과 승무원, 승객 모두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 대가로 강제전역 당한 후에도 그는 군복을 벗긴 휴머니즘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전투기 사격을 피하고, 한쪽 손만으로 비상착륙을 시도하면서 2년 전과는 달리 승객도, 승무원도, 자기 부사수도 지켜냈다.
이렇게 보면 두 주인공의 공통점과 차이는 분명하다. 국가 권력의 횡포로 인해 피해자가 됐지만 전혀 다른 답을 볼 수 있으니까. 용대는 피해의식과 정부를 향한 불신에 사로잡혀 자기 인생은 물론 무고한 이들의 인생까지 파괴하려 든다. 반면에 태인은 그 불이익을 오롯이 감내하면서 자기 신념을 증명해 보인다. 북한에서 송환을 거부한 파일럿 사수의 가족을 자기 자족처럼 돌보고, 부기장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그래서일까? 두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대면하는 순간은 <하이재킹>에서 볼 거라 예상한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자기처럼 피해자로서 고통받은 이를 마주한 후에야 가해자가 된 피해자는 마침내 자기 잘못을 깨닫는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용대는 자기처럼 무고한 피해자는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태인의 설득에 비로소 흔들린다. 여기에 다소 잔인한 과감한 연출이 더해지면 둘의 관계는 의외로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압축과 절제의 미학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사건에만 집중하는 구성도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담긴 감흥을 극대화한다. <하이재킹>은 압축과 절제의 미학을 살려 이야기를 러닝타임 100분 안에 눌러 담고, 빠른 템포로 전개하면서 사건과 주인공 둘에게만 시선이 쏠리게 한다.
사실 <하이재킹>의 구성은 자칫 익숙한 신파로 빠지기 십상이었다. 갑작스레 납치된 승객 하나하나의 사연을 풀어놓으면 눈물을 짜내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신혼여행 가는 부부, 아픈 딸 병간호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할머니 등. 하지만 영화는 승객에게 그다지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필요한 타이밍마다 장면 하나하나를 알뜰하게 활용하면서 분위기를 고조한다.
감정을 강요하는 대신, 관객이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상황만 조성하고 뒤로 물러나는 셈이다. 사법고시 붙은 아들과 어머니가 대표적이다. 검사가 된 아들이 자랑스러운 어머니와 수화 쓰는 어머니를 창피해하는 아들. 납북을 대비해 신분증을 파괴해야 상황에서 아들은 차마 검사 신분증을 버리지 못한다. 그러자 어머니는 오히려 신분증을 찢으려 하고, 잘 찢어지지 않자 아예 삼켜 버린다.
부메랑이 된 상상력
다만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든 상상력은 부메랑이 되기도 한다. 특히 과욕처럼 보이는 볼거리가 적지 않다. 물론 인상적인 대목도 있다. 용대가 폭탄을 터뜨려 조종실을 장악하는 장면은 마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 속 뉴욕 타임스 스퀘어 장면을 연상시키는 슬로 모션 효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비록 같은 퀄리티는 아닐지언정 한계를 극복하려는 대담한 시도 자체는 놀랍다.
하지만 비행 시퀀스로 서스펜스를 쌓는 장면은 다소 무리수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기체에 구멍이 나서 비행기가 급낙하 할 때나, 한국 공군이 민항기를 사격하고 이를 피하는 장면이나, 여객기가 배면비행을 보여주는 것까지. 영화적으로는 긴장감을 극대화하지만, 잠깐이라도 현실성을 따지는 순간에는 맥이 뚝 끊길 수 있는 상황이다. 마치 <비상선언>에서 항공자위대가 민항기에 위협사격을 가하는 순간처럼.
또 비행기 내부 전개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 승객들이 용대를 덮치고, 부기장이 휴전선을 넘은 척 용대를 속이고, 어떻게든 난기류를 이용해 보려는 식으로 여러 사건을 만들어내고자 애쓴다. 하지만 결국 큰 틀에서는 겁에 질린 승객과 난폭한 납치범이라는 구도를 벗어날 변곡점이나 제3의 인물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러다 보니 중반부는 같은 장면이 반복되어서 비교적 지루할 수 있다.
배우들의 퍼포먼스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나마 하정우와 성동일만이 이름값을 해냈다. 배우만의 문제는 아니다. 그보다는 극본의 한계가 드러난 지점에 가깝다. 여진구가 맡은 용대의 경우 태인과 대조되는 사연만 돋보일 뿐, 악역으로서의 카리스마나 매력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채수빈이 연기한 옥순은 단순히 시나리오의 도구에 불과하다. 없어도 이야기 전개에 문제가 없을 정도다.
이에 더해 <하이재킹>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기술적인 아쉬움도 크다. 대사가 잘 안 들리는 한국 영화의 고질병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비행기 외부 소음과 대사가 섞이거나 파일럿끼리 무전을 할 때는 OTT 자막 기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국내 배급사가 아닌 컬럼비아 픽처스가 직접 배급하는 작품인데도 고쳐지지 않은 문제라 더욱 안타깝다.
Acceptable 무난함
실화에 상상을 더해 어찌어찌 목적지에는 착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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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 같은 나와 물 같은 네가 서로 끌리는 이유
엘리멘트 시티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뭐든 열심히 하는 두 사람. 불 남자와 불 여자는 누가 봐도 천생연분이다. 부부가 된 두 사람. 원래 고향이었던 파이어랜드를 등지고 엘리멘트 시티로 이사한다. 쓰는 언어부터 달랐던 두 사람. 이름을 말하는 것도 어려워한다. 입국심사를 담당하는 풀 원소 공무원이 말한다. “그럼 버니와 신더는 어떤가요” 남자는 버니, 여자는 신더가 됐다. 몸만 달랑 온 두 사람. 엘리멘트 시티에 가게 하나를 얻어서 잡화상점을 운영한다. 어려운 사회생활. 그래도 자라는 앰버를 보면 그동안의 피로가 싹 가신다. 어느덧 성장한 앰버. 엄마와 아빠의 희망이었던 딸. 의젓한 딸은 나이 든 아버지를 대신하기 위해서 종업원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온 인류를 뒤져서라도, 아니 온 원소를 다 뒤져서라도 진상 손님이 없는 세상은 아무 데도 없다. 여러모로 화를 돋우는 원소들. 앰버는 타고난 성질 때문인지 오늘도 욱해버렸다. 화를 낸 탓에 불에 탄 가게들. 수리는 어렵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생긴 마음의 빛을 지우기는 어렵다.
몸이 약해진 듯한 아버지 버니. 얼른 노력을 해서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고 싶다. 당연하지. 이 가게는 부모님의 희망이었으니까. 약해지는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마음이 아픈 일이다. 마음속에 있던 응어리가 해소될 기회가 왔다. 어느 날 아버지 버니가 딸 앰버에게 하루만 가게를 맡긴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어깨에 힘 들어간 앰버. 첫 스타트는 좋았다. 그러나 시작만 좋았다. 여지없이 달려든 진상손님. 답답함이 터져 다시 가게가 불에 그을린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혼자 어디 가는 척했기 때문에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다. ‘난 왜 그렇지?’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쯤 비상사태가 발생했다. 불에 탄 파이프에서 물이 흐르는 것이다. 우수수 떨어지는 물벼락. 그런데 그 물에서 갑자기 한 남자가 등장했다. 엉엉 울며 등장한 이 남자. 자기소개를 전한다. “안녕. 난 웨이드!”
디즈니x픽사의 상상력
전년 <소울>과 <루카>로 대형 홈런을 친 디즈니와 픽사의 신작이다. 사실 최근의 디즈니는 그렇게 타율이 좋지 못하다. 가장 근작인 <인어공주>는 수많은 논란이 오히려 마케팅 요소로 작용하는 듯이 흥행 성적이 시원치 않다. 뿐만 아니라 디즈니는 아예 디즈니플러스 론칭 이후 헛방만 치고 있다. 그나마 ‘가오갤’이 체면치레에 성공했다. 상대적으로 기대치가 많이 떨어진 디즈니. <버즈 라이트이어>라는 ‘토이 스토리’ ip를 사용한 결과물로(픽사가 협업하긴 했지만)도 영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디즈니의 성적표가 점점 서늘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이 <엘리멘탈>은 디즈니의 상상력을 잘 구현한 작품으로 보인다. 또 픽사가 갖고 있는 낭만과 동심의 이야기를 잘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코코>에서 보여준 사후세계와 <소울>에서 볼 수 있었던 태어나기 전의 세계를 잘 구현했다. 사실 <코코>에서 볼 수 있었던 저승 묘사는 우리 삶 속에서 익숙한 장면이 어느 정도 있다. 비단 우리만 해도 ‘신과 함께’에서 저승을 봤었는걸? 영화는 이 익숙한듯한 묘사를 살짝 틀어서 변화구를 던졌다. 공간적 배경이 멕시코의 어느 마을이었다. 멕시코 토속적인 소재들과 저승이라는 세팅, 또 이승-저승을 왔다 갔다 하는 주인공의 특성을 합쳐 독특한 비주얼을 만들었다. 전적으로 사람 사는 듯한 느낌 1/3 멕시코 정취 1/3 저승의 이미지 1/3을 결합시킨 것이다. 이 <엘리멘탈>은 <코코>와 다른 점이 있다. 바로 원소들의 세계라는 점은 그 어떤 영화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해서 만들었다. 어디서 본 적 없는 도시. 시각적으로 눈정화가 되는 비주얼도 예쁘지만 신기한 건 다른 지점에 있다. 우리가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생기는 여러 도시문제가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을 위시로 한 각 도시의 원도심 문제가 그렇다. 이 마을에서 엘리멘트 시티는 이마저도 구현한 듯하다. 바로 불 종족들이 사는 도시와 물 종족들이 사는 도시가 좀 떨어져 있다는 것이 감독의 디테일을 살렸다는 점에서 신기했다. 이는 장소로서의 특성만 구현한 게 아니라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서도 도시의 양극화 문제는 핵심으로 작동한다. 이게 영화가 인종문제와 이주민들의 적응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이 역시 작품이 잘 살린 연출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빠지면 섭섭하지
이 영화를 만든 피터 손이라는 사람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1970년대에 부모님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정착해 가정을 이루셨다고 한다. 자전적인 코드가 들어갔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이 때문인지 영화 곳곳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을 비유하는 묘사가 몇 있다. 우선 불 종족인 앰버 가족이 쓰는 언어다. 이 캐릭터들은 초반에 등장할 때 자막 처리가 안 되어있다. 영화가 디즈니/픽사에서 제작되었다는 걸 상기시키면 이 이유가 어느 정도는 느껴지는 듯하다. 또 이 불 종족은 뜨거운 음식을 좋아한다. 게다가 앰버가 아버지 버니를 부를 때 '아슈파'라고 부른다. 이 세 가지는 한국인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첫째 언어와 관련된 부분은 이주민들이 한국어를 쓴다는 점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두 번째 뜨거운 것에 대한 비유는 역시 김치, 고추장을 위시로 한 매운 음식에 대한 묘사라고도 볼 수 있는 셈이다. 셋째. 호칭 '아슈라'는 아마 '아빠'라는 단어에서 온 듯하다. 그리고 영화에서 어떤 인물이 남기면서 무슨 코멘트를 남긴다. 이 기점 찍고 주인공 어머니가 어떤 소재에 대해 앰버에게 코멘트를 하는 신이 있다. 이 부분 잘 보면 우리 한국인들이 자라면서 겪는 유교문화에서 벤치마킹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위에서 서술한 la라는 곳의 지리적 특성을 봐도 그렇다. 당시 미국에 정착한 한인들이 la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누수문제라던가 치안에 있어 약점을 가진, 그러니까 땅값이 저렴한 곳에 거주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부분을 도시의 미관부터 시작해 이야기의 서사 중심으로 배치했다는 점은 영화에서 충분히 강점으로 뽑을 만하다. 이외에도 미술로 대표되는 물과 풀, 공기가 할 수 없는 것들에 능통한 모습들이 아시아인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지기도 하다.
반대로 웨이드는 백인 사회를 비유하고 있다. 처음 버니와 샌더가 입국심사를 할 때 바로 영어를 쓰는 모습이 그렇다. 또 '물'이라는 것의 본질적인 속성을 생각해 보면 더 백인에 가깝게 느껴진다. 이 백인이 없으면 엘리멘트 시티 자체가 있을 일이 없는 것이다. 영화 내적으로 가장 흔하게 보인다는 점도 백인이라는 비유에 걸맞다. 그리고 글쓴이가 더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풀은 2차 대전 당시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왜? 풀이라고 하는 것이 물을 통해 성장하는 존재다. 유대인들이 미국을 먼저 건너가서 만들었다고 보는 건 아예 무리가 있다. 미국사회가 만들어지고 유대인들이 정착한 것이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점을 생각해 보면 풀 종족이 후에 어떤 인물로 묘사되는지가 어떤 사람들에 대한 비유가 되는 듯하다. 다른 종족은 공기 종족이다. 역시 구름 종족으로 대표된다. 이 종족의 특성은 스포츠다. 이 스포츠에 대한 묘사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본다면 이 종족이 어떤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는지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종족이 엘리멘탈 시티에 온 순서를 생각해 보면 역시 어렵지 않게 근거로 매길 수 있다.
이런 소소한 묘사가 영화에서 재미있는 특징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좀 아쉽다고 느낀 부분도 역시 이 점에서 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풀과 공기에 대한 묘사가 너무 적은 느낌? 인종주의적인 코드가 들어가 있고 이 인물들이 하하 호호 다 잘 지내는 게 핵심인 것 치고 두 종족이 좀 기능적인 측면이 있다. 또 너무 스테레오 타입으로 인물을 쉽게 세팅한 감도 없지 않아 있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가장 큰 단점이다.
반대가 끌리는 이유
영화에서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맨스다. 두 캐릭터는 본질적으로 엮일 수 없는 존재다. 물과 불이라는 걸 상상해 보면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이야기 구성으로 주파하고 있다. 영화는 불, 그러니까 앰버의 특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앰버는 욱하면 무섭다. 한 번 크게 화를 내면 주위에 있는 것들을 불태운다. 이 특성은 정확히 반대로 웨이드가 갖고 있다. 중간에 누군가의 집에 가는 신에 있다. 여기서 어떤 문제가 벌어진다. 웨이드는 앰버는 가능하지만 웨이드는 불가능한 능력 묘사가 나온다. 이 가능/불가능의 대조는 영화 내내 반복되며 작품의 핵심소재인 '한 줄의 대사'로 도착한다. 이는 웨이드와 앰버의 대조점을 조명하던 영화의 이야기를 뒤엎는듯한 테마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영화의 4 원소로 멋지게 풀어낸 것이다. 이를 캐릭터의 서사로서만 푼 것은 아니다. 시각적으로 두 캐릭터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연출도 영화에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살짝 아쉽다고 느끼는 부분은 이 로맨스를 위해서 이야기가 후반부에 맥이 빠진다는 점이다. <인사이드 아웃>에서 빙봉으로 온갖 눈물은 다 나오게 하던 디즈니 x픽사치 고는 좀 관성적으로 이야기를 푼 느낌이 있다. 좀 예상되는 느낌? 또 영화 핵심 사건이 아무리 애니메이션이라지만 해결되는 과정이 디테일이 약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다. 후반부 아름다운 장면을 위해 아름답게 서사를 살짝 희생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또 이민자들 간의 관계를 지엽적으로만 접근했다는 것이 후반부의 문제해결 과정에 아쉽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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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포영화 제 8일의 밤, 실망스러운 오컬트 영화
넷플릭스에 한국 공포영화 제8일의 밤이 공개되었어요.
예고편에서 오컬트 분위기를 한껏 뽐냈기 때문에 꽤 기대하시는 분들이 많았을텐데요.
영화는 생각보다 많이 실망스럽습니다.
불교의 세계관을 가지고와서 번뇌와 번민을 요괴화 하여 전개되는 이야기인데요.
생각보다 오컬트의 분위기도 약하고 그렇게 무섭지도 않아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집니다.
이성민 배우가 열연하고 있지만 나머지 캐릭터들이 그렇게 눈에 띄지는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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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롱레그스> 메인 예고편
30년간 이어져 온 암호 연쇄 살인🔪🩸 상상을 초월하는 압도적 공포 [롱레그스] 메인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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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소년심판> 공식 예고편
소년범을 혐오하는 판사가 마주한 괴물 같은 아이들, 충격적인 현실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가장 차가운 분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