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LM2021-03-28 00:00:50
브라더스 / Brothers
< 브라더스 / Brothers >
/ 줄거리 /
해병대 군인인 샘은 동생 토미를 출소 시키고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헬기를 타고 가던 중 폭격을 맞는다.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샘의 부인 그레이스와 샘의 가족들.
남편을 잃은 그레이스와 아빠를 잃은 샘의 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챙겨주는 토미.
그런 자상한 토미의 모습에 조카들도 그를 따르게 되고,
그레이스와 토미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중
샘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들.
가족들은 다시 샘과 재회하게 되고,
모두 행복한 생활을 하게 될 줄 알았다..
이 씬이 토미의 모든 감정을 설명해 준다.
/ 느낀점 /
" 아무도 잘 못 하지 않았는데
모두가 고통받는 상황 "
이 짤막한 한 줄이 이 영화의 모든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 같다.
전쟁의 고통은 전장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는 평생 군인과 함께 한다.
그리고 그 고통을 누군가와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고통을 안겨주는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을 옥죄어 오는 그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소통과 사랑과 믿음과 포옹'
인 것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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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샘 역을 맡은 토비 맥과이어의 연기는 정말 놀랍다.
나는 그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사람인 줄 몰랐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의 그 찐따같음이 전혀 없다.
솔직히, 위대한 개츠비나 그의 다른 영화들에서 볼 수 있는 약간의
어벙함 조차 이 영화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진짜 무슨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다.
눈빛조차 다르다.
그의 연기에 정말 감탄하며 보게 되는 영화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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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깊은 장면
/ 인상 깊은 씬 /
나는 이 씬이 가장 인상 깊었다.
토미한테 샘이 그레이스와 잤냐며 물어보는 씬인데
그의 말에 토미가 깜짝 놀라
" 왜 그런 생각을 하냐"
라고 묻는다.
그리고 그에 대해 샘은
" 너와 그레이스의 모습이 마치 사랑에 빠진 10대들 같아서."
라고 답한다.
전쟁에서 힘겹게 살아남아 집으로 돌아와도
정신적 트라우마가 나를 괴롭히는 상황에서
자신의 동생과 부인의 사이에서 저러한 기류를 발견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내 생각에는 그의 목을 졸라온 가장 큰 고통은
현실에 돌아와서 마주하게 된 사실들이었던 것 같다.
절대 예전같은 상황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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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게 올림.
<위플래시, 2014>와 <라라랜드, 2016>만으로 평단과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데미언 셔젤"의 신작 <바빌론>은 어떤 영화일까? 그에게 있어 '가장 많은 제작비 8천만 달러를 썼다'는 것도 있겠지만, "청소년 관람불가"로 결정된 표현 수위랄까? 하지만, 이런 기대들과 다르게 영화 <바빌론>은 앞서 개봉한 북미에서 혹평과 함께 흥행에 실패했다. 다가오는 "아카데미"에서도 많은 부문에 후보 지명에도 실패했는데 그 이유가 뭘까?
영화는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1920년대 미국의 한 파티장에서 사람들이 모인다. 그렇게, 짧은 인연들을 남긴 이들은 각자 "할리우드"로 들어가 그곳의 변화를 직면하게 되는데...
1. 왜, <바빌론>이어야만 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영화 <바빌론>은 상당히 어려운 작품이다.
이런 이유에는 1920년대 미국 사회의 분위기와 문화, 그리고 영화가 겪었던 변화의 변곡점을 알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본다면, 주인공 "개츠비"는 금주령이 있던 시절 술을 팔아 경제적인 부호가 된 인물로 도덕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이처럼 겉은 화려할지 몰라도, 속으로 곯아가고 있는 게 이 시기 미국 사회의 전반이다!이를 보여주는 장면이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초반 대저택 파티이다!
굉장히 부도덕한 사건이 발생하는 데에 제시하는 해결 방안으로 큰 코끼리에 이목을 집중시켜 축 늘어진 여자를 안고 나가는 것이다!
이외에도 알고도 눈을 감아주는 경찰의 비리까지 좋은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게 그때의 미국이고, <바빌론>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그럼에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에는 "화려함"으로 대신되는 제목 <바빌론>에 숨겨져 있다.
해당 작품에 그 어느 장면들보다 "계단"이 나와 위로 오르거나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들이 자주 내비쳐 "바벨탑"을 생각하게 만든다.
"구약성서"에서도 나오는 "바벨탑"은 하늘에 도달하려다가 무너져버린 건축물로 해석하기로는 "신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무모함"으로 볼 수 있다. - 이는 현대 사회에서 "기술의 발전" 혹은 "문명의 고도화"로도 해석된다!2. 결국, 영화에게 보내는 편지
그런 점에서 "제임스 맥케이(토비 맥과이어 분)"과 함께 터널 아래로 내려가는 장면이 이 영화가 설명하려는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가 아닐까?
앞서 약에 취해 축 늘어진 여성 또한 계단 아래로 내려갔던 것처럼 해당 장면도 내려가면 갈수록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사라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어찌 보면, 성경에서도 태양이 비치지 않는 지하에는 온갖 나쁜 일들이 행해지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이미지가 아닐까?그렇다고 위에 올라간다 해도 상황이 좋아지는 건 아니다!
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자신의 피부 색깔과 성적 취향들을 숨기고 그들 사이에 숨어 있으려 한다.
어찌 보면, 1920-30년대 미국에서 가장 심했던 "인종차별"까지 언급하며 '문화적 부흥기'라고 말하기가 머쓱할 정도로 어두운 곳까지 비춘다.
하지만, 영화 <바빌론>이 관객들에게 말하고자는 하는 바는 "영화"이다.하나의 장소에서 여러 세트장을 지어 "공장"처럼 찍어내던 현장에서 하나의 스튜디오로 바뀌어가듯이 "무성"에서 "유성"까지 그 시기에 겪어나갈 영화들의 발전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사랑을 비를 타고1952>이다.
해당 작품 역시, "무성"에서 "유성"으로 넘어가는 시절의 이야기를 담아냈으며 음향에 대한 시행착오들도 에피소드로 있다. - 캐릭터들도 본다면,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분)"와 "라나 버몬트"의 구성이 비슷하다!3. 3줄 요약 좀...
여기에 해당 작품을 비롯하여 많은 영화들의 장면들이 쏟아져 흐르는 엔딩까지 <바빌론>이 말하려는 바는 뚜렷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기나긴 분량이 아닐까?
짧은 분량이 감독의 역량을 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 <바빌론>의 분량은 189분으로 그가 연출해온 <위플래시2014, 106분>와 <라라랜드2016, 128분>, 그리고 <퍼스트맨2018, 141분>보다 가장 많다!점점, 분량이 많아지는 것이 '하고 싶은 말이 많다'라는 것으로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것보다 핵심만 딱! 짚어준다면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 tmi. 1 - '데이미언 셔젤'은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아이폰으로 '디에고 칼바'와 아내이자 배우 '올리비아 해밀턴'의 2시간 버전이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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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을 자른다는 것의 의미
팔을 자른다는 것의 의미
<127시간>은 주인공 '아론 랠스턴'이 블루존 캐니언을 홀로 등반하다가 실족하고, 설상가상으로 바윗돌에 팔이 끼이는 사고를 당한 상태에서 탈출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설명이 스포일러가 아닌 것은,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영화의 한국 포스터 하단에는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꾼 감동실화’라고 적혀있기도 하다. 갇혀 있었던 시간을 정직하게 암시하는 ‘127시간’이라는 제목부터가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탈출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좋은 영화라면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럼에도 특별히 생생한 영화들은 따로 있다. <그래비티>나 <인터스텔라>, <마션>처럼 우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라든가 <타이타닉>, <죠스>처럼 재난을 다루는 영화들이 보통 그러하다. <127시간>역시 개인에게 닥친 재난으로써 보는 이로부터 한껏 집중을 이끌어낸다. 너무도 생생한 탓에 아론 랠스턴에게 닥친 시련을 멀찌감치 떨어져서 관조할 수 없게 만든다. 그의 팔과 나의 팔이 일치를 이루고, 함께 갇힌 듯한 기분을 전해준다.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실감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긴 시간 함께 갇혀 있다가 비로소 그가 자신의 팔을 자르고 탈출할 때는 '그가 탈출했다'는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탈출했다'는 기분마저 든다.
다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 이 이야기는 흔쾌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부분도 있다. 그는 과연 포스터 홍보 문구의 말대로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꾸었는가?'에 대한 점이 특히 그렇다.
내 생각에 아론 랠스턴은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꾼 것이 아닌 것 같다. 큰 돌에 팔이 낀 상태에서 팔을 자르고 탈출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끝까지 불가능한 일이다. 팔을 자르고 탈출한다는 이 기괴한 결정이 가능한 것이었다면 그것을 불가능이라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애초 가능한 것을 선택한 것일 테니까. 그가 처음부터 팔을 자르고 뚜벅뚜벅 탈출하지 않았던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힘든 선택지가 아니라 아예 고려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팔을 자르고서라도 살고 싶을 것이고, 누군가는 팔을 자른다는 행위를 불가능으로 치부하고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인데, 내 생각에 나라면 팔을 직접 자르느니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한 쪽 팔 없이 살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마취없이’ ‘직접’ 팔을 자르느냐 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팔은 레고의 그것이 아니니까. 너무 끔찍한 일이다. 그러니까 그는 불가능을 기적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선택지가 아닌 것을 선택해버린 사람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정당한 것 같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홍보문구의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트집 잡는 데에 있지 않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자신의 팔을 자르고 탈출한 사람을 예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영화를 본 관객들의 평을 종합해보면 이 이야기는 일종의 '인간승리' 서사로써 이해되는 듯하다. 사람들은 아론 랠스턴을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과감하게 결단해서 살아남은 대단한 인물 정도로 요약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줄 수 있는 교훈이라는 것은 굉장히 제한적이다.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직접 팔을 잘라서라도 살아 남아라? 호랑이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팔 하나 정도 잃고 살아남을 수 있다? 매사에 긍정적이다 보면 직접 팔을 자를 용기도 생긴다? 내가 볼 때 그가 직접 팔을 자르고 탈출한 사례는 누구에게나 권할만한 모범은 아니다. 이 영화가 진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가 아닐까 싶다. 첫째, 말하지 않으면 위기에 봉착한다. 둘째,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는 일이 늘 달콤하지는 않다.
아론 랠스턴은 말하지 않아서 실패하는 자다. 죽음을 목전에 둔 아론이 사랑했던 여자와의 달콤했던 시간을 떠올리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여자친구는 “알려줘. 널 해제할 암호.”라고 말하는데 아론은 “그걸 알면 넌 나한테서 못 벗어나”라고 농담처럼 대꾸한다. 그때문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사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고 만다. 따지고 보면 아론이 블루존 캐니언에 갇혀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이유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알릴 수도 있었고, 단골 가게 직원에게 알릴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항상 자신만만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무에게도 자신의 약점을 알리지 않는 오만함.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객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그는 탈출에 성공한 뒤에는 모험(여행)에도, 사랑에도 성공하는데 성공한 이후의 그는 이제 행선지를 꼬박꼬박 밝히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겸손해졌다. 진정한 사랑이든, 일이든, 뜻하지 않은 위기에 봉착하지 않기 위해서는 숨기지 않고 자꾸만 알려주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영화가 말하는 듯하다.
주인공의 재난을 우리가 부여받은 운명으로, 팔을 자르는 행위를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탈출하는 행위로 보면 어떨까? 그렇게 보면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는 일이 늘 달콤하지는 않다는 깨우침도 주는 것 같다. 살다보면 큰 돌에 팔이 낀 것 같은 난관에 봉착할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그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일수도, 팔을 자르고 탈출할 수도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는 없는 존재이므로, 기상이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듯이 주어진 운명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지만 때로는 선택지가 아닌것, 불가능이나 다를바 없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운명을 이겨내고 새로운 국면으로 삶을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새로운 삶,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는 것이 늘 달콤한 것은 아니다. 마치 영구적으로 한쪽 팔 없이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경우에는 운명을 극복하는 그 치열하게 끔찍한 선택이 결국 나를 나로서 살수 있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127시간>은 주인공의 결정 그 자체보다, 그에게 그러한 불운이 닥친 이유에 더 집중하는 영화다. 그리고 팔을 자른다는 그의 선택이 해피엔딩으로 귀결되었으나 영구적인 후유증을 동반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오만함으로 쉽게 망가질 수 있으며, 자연재해처럼 닥쳐오는 운명을 이겨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논조의, 비관적인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시각에서 <127시간>을 감상하다 보면 어쩌면 용기보다 두려움을 갖게 된다. 늦기 전에 조금 더 현명하게 살아가야 할 필요를 절실히 느낄 수 있기에 그렇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서댐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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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아주 오래 전에 이 영화를 비디오테이프로 봤을 때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오늘 넷플릭스에서 다시 집중해서 봤다. 기회가 되면 이 영화를 꼭 다시 볼 생각이었고, 마침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이 스티븐 소더버그라는 건 처음부터 알았지만, 그가 데뷔작인 이 영화로 곧바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건 모르고 있었다. 그동안 스티븐 소더버그의 데뷔작인 이 영화를 비롯해 그의 작품을 꽤 많이 봤다고 생각했는데, 전체 작품 가운데 30% 정도에 불과했다.
스티븐 소더버그의 작품들은 진지하거나 엄숙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영화도 아니다. 그는 대중성과 예술성, 사회성을 알맞게 버무려 관객이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만든다. 그의 작품으로 대중적인 영화는 '오션스' 시리즈다. 유쾌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실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재미도 있으면서 사회문제까지 드러내는 작품으로 '에린 브로코비치', '컨테이전', '사이드 이펙트', '시크릿 세탁소' 같은 영화들이 있는데, 나는 '사이드 이펙트'를 세 번 봤고, 다시 보고 싶은 영화다. 드라마에서 반전의 묘미가 어떤가를 교과서처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는 극적인 결말이나 반전의 묘미는 없거나 약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인공들의 대화, 그 자체가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관객은 네 명의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를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뿐 아니라, 대화가 갖는 함의가 무엇인가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관객을 괴롭히는 영화다.
앤은 심리치료 상담을 받는다. 그는 항공기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쓰레기가 너무 많이 넘쳐흘러서 세상이 쓰레기로 뒤덮이면 어떡하나 고민한다. 자기의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문제를 두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앤은 섹스가 싫다고 말한다. 남편 존을 만진 것도 오래 전이었고, 부부이긴 해도 섹스 없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앤이 심리치료를 받고 있는 그 시간에 남편 존은 앤의 여동생 신시아와 섹스를 한다. 두 사람은 앤을 속이고 있다. 존은 앤의 남편이지만,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신시아는 앤의 여동생이지만 언니에게 거짓말 한다. 거짓말은 모든 관계를 파탄내는 씨앗이자 결과이다.
존은 아직 젊은 변호사인데, 실력을 인정 받아 로펌에서 파트너로 승격할 단계에 있다. 그는 자기의 실력을 보여주어야 하고, 의뢰인에게 성실하고 유능한 변호사로 인정받아야 한다. 존은 새로 지은 주택에서 살며, 일하던 아내 앤에게 전업주부로 살도록 하고, 넉넉한 임금을 받으며, 전망 좋은 사무실을 배정받아 안정된 변호사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미국의 중산층으로, 마약도, 담배도 하지 않으며, 술도 거의 마시지 않는 건전한 시민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존은 성공한 변호사이면서, 훌륭한 미국 시민이다. 하지만 존의 내면은 어떤가. 그는 허위의식에 찌들어 있으며, 자기의 사회적 성공을 정도 이상으로 부풀려 자부심을 갖는 인물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권위적이고,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반면 앤은 중산층의 삶을 살면서도 늘 불안하고 의기소침하다. 남편은 변호사로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고, 좋은 주택에서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잘 살고 있지만, 그런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불안이 그를 두렵게 만든다. 앤은 남편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면서도 남편과 섹스를 하지 않고, 남편의 존재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앤의 내면은 공허하고 쓸쓸하다.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신시아는 앤의 동생이지만 성격이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는 좋은 의미에서는 '외향적'이지만, 나쁜 말로는 '난잡한' 인물이다. 그녀는 언니의 남편(형부)과의 관계에서 도덕적, 윤리적 갈등을 겪지 않는다. 상식적 인물이라면 형부와 불륜의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런 이성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신시아는 존의 친구인 그레이엄이 9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집을 얻었다는 걸 알자, 언니 앤에게 그레이엄의 주소를 알려달라고 하고, 직접 그레이엄을 찾아간다. 그레이엄이 누군지도 모르는 신시아였지만, 오로지 앤이 그레이엄이 이상한 사람이니 만나지 말라는 말을 했다는 것만으로, 앤에 대한 반발이자 호기심으로 그레이엄을 찾아간 것이다.
신시아는 능동적이고 즉물적 인간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적극 행동으로 움직인다. 남성과의 관계에서 주체적 인물이기 때문에 남성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신시아가 '난잡'해 보일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반여성적 시각일 뿐이다.
오히려 앤의 태도는 수동적이고 타인, 특히 남성의 시각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앤은 남편 존과의 섹스에서 한번도 오르가즘을 느낀 적이 없다고 고백하는데, 이런 단서를 통해 앤이 성적으로 몹시 억눌려 있는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존의 친구 그레이엄의 등장으로 세 사람 - 앤, 존, 신시아 - 사이의 관계에 균열이 발생하고, 그레이엄까지 네 명이 되면서 이들 사이에 화학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현상으로, 수동적이고 자폐적이었던 앤이 그레이엄을 두번째 만난 날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다. 앤은 그레이엄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먼저 섹스 이야기를 꺼내고, 그레이엄은 자신이 정서적 성불구라고 말한다.
그레이엄은 자신이 촬영한 비디오테이프의 내용을 보면서 성적 만족을 느끼는, 보통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레이엄이 녹화한 테이프에는 여러 명의 여성이 자기가 경험했던 섹스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고, 스스로 원해서 자위를 하는 장면도 있다. 그레이엄은 그런 여성의 자기 고백을 보면서 오르가즘을 느낀다.
그레이엄이 9년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9년 전, 어떤 사람, 아마도 그레이엄이 사랑했던 여성이었을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망쳤고, 그로 인한 고통으로 고향을 떠났으며, 외지를 떠돌다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그레이엄이 관계를 망쳤다는 여성은 엘리자베스였고, 엘리자베스는 이 영화에서 등장하지 않는, 맥거핀이다.
신시아는 존에게 그레이엄을 만났으며, 인터뷰를 했고, 자위도 했노라고 말한다. 존은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화를 내지만, 신시아는 자신이 선택한 것이니 아무 문제가 없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신시아와 존은 처음부터 육체 관계를 목적으로 만난 사이였고, 두 사람은 실제 섹스를 하는 것으로 목적을 달성하지만, 정작 대화가 필요할 때는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이 어렵다는 걸 보여준다.
섹스도 분명 '대화'의 한 갈래임에 틀림없지만, 섹스만으로는 충분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도 마음을 터놓는 대화 없이 섹스로 충족하는 욕구는 한계가 있다는 걸 차츰 깨닫게 된다.
처음부터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앤은 존과 여동생 신시아의 관계를 어렴풋하게 의심하고 있었고, 한번은 진지하게 존에게 사실을 말하라고 추궁하지만, 아무런 증거 없이 추궁만으로 '자백'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더구나 존은 유능한 변호사였고, 세상에서 가장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은 변호사라는 그레이엄의 말을 떠올린다.
앤은 더 이상 존을 의심하지 않기로 마음 먹고, 자신의 불안과 공허도 극복하려 노력한다. 그가 집안 청소를 하다 진주귀고리를 발견하는데, 그건 명백히 신시아의 물건이었다. 확실한 증거를 찾은 앤은 존에게 이혼하자고 말하고, 그레이엄을 찾아가 존과 신시아가 불륜 관계라고 말한다. 그레이엄은 신시아의 인터뷰에서 그 말을 들었다고 확인해준다.
앤은 그레이엄에게 인터뷰를 하겠다고 말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섹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인터뷰는 앤의 일방 고백이 아니고, 앤이 그레이엄을 인터뷰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레이엄 역시 마음의 상처를 크게 가진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고, 두 사람은 서로가 가진 내면의 아픔, 고통,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한다.
앤이 자신의 불안과 공허함, 외로움, 소외감, 박탈감 같은 부정적 감정을 극복하는 과정은 그레이엄과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진정한 오르가즘은 육체를 통한 섹스가 아니라, 서로의 내면을 드러내면서 나누는 대화라는 걸 소더버그 감독은 핍진한 장면을 통해 관객이 이해하도록 만든다.
앤이 그레이엄과 인터뷰를 했다는 말을 들은 존은 그레이엄을 찾아가 그를 때려눕히고, 앤이 찍힌 비디오를 본다. 그건 앤이 그레이엄과 섹스(육체적)를 했는가를 확인하려는 것이지만, 앤의 인터뷰를 다 본 존은 앤이 느끼고 있던 감정을 알게 되고, 스스로를 돌아본다.
존과 앤은 그동안 부부로 살았지만, 겉으로 드러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의 이면에 각자 개인이 가진 어둡고 고통스러운 내면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존이 신시아와 저지른 불륜은 용서나 이해가 필요 없는 나쁜놈이고, 신시아는 자신의 욕망을 외면하지 않은 주체적 여성이었으며, 그레이엄은 마치 '파리, 텍사스'에서 트레비스가 자신의 잘못을 탓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억압하고, 고통을 감수하는 삶을 살아왔다.
앤 역시 자신의 욕망보다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는 걸 깨닫게 되고, 존과 이혼하며 그레이엄과 가까워진다. 앤의 이혼은 존이 여동생 신시아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앤은 존과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고,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믿음을 갖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반면 앤과 그레이엄은 자신의 내면에서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어리석음과 상처를 깨닫고, 서로 믿음으로써 새로운 삶을 살아갈 자신감을 갖게 된다. 앤과 신시아는 자기의 내면을 인터뷰 형식을 통해 솔직하게 드러낸 반면, 존은 끝까지 인터뷰를 부정한다. 즉, 자기 자신의 내면을 다른 사람에게 또는 공개적으로 말하고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특히, 내면을 드러내는 방식이 가장 내밀해야 하는 '섹스'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영화가 자칫 자극적 소재를 담고 있을 거라는 선입견을 주지만, 정작 영화에서 섹스는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장면도 짧다. 섹스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정도로 내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믿을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실제 영화에서도 신시아나 앤은 그레이엄에게 자기의 섹스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그레이엄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혼은 물론 친구, 연인 사이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정직함이고, 자기의 내면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상대방을 신뢰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말한다. 솔직하라, 자기와 남을 속이지 말라. 그것이 인간관계의 기본이자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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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낮에 경험하는 보험사기 스릴러
예상치 못한 반전이 많아서 희열을 느끼며 봤던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뻔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가 한 방을 날리는 작품이었고, 환한 낮에 경험하는 스릴러다 보니 스릴러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하는 나에게 제격이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시놉시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간단한 부탁에서 시작된 간단하지 않은 사건. 멋진 커리어우먼, 매력적인 아내, 아름다운 엄마, 모든 걸 다 갖춘 완벽한 여자 ‘에밀리’가 어느 날 사라진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되는데요. 모든 것이 내 것이 됐다고 생각한 순간, 사라진 에밀 리가 돌아온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인플루언서를 보여주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속 스테파니는 브이로그 컨텐츠를 만드는 인플루언서로 나온다. 인플루언서가 나오는 작품을 보면 필자가 블로그를 운영하다보니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는 인플루언서인 스테파니가 자신의 친구인 에밀리의 실종 사건을 파헤치는데 자신의 브이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SNS가 이렇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못했고, 물론 부산경찰SNS가 사람들을 찾는데 많이 활용된다고는 익히 들었지만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브이로그로 찾고 경찰 관계자가 아닌 개인이 수사를 하는 모습에, SNS가 참 여러 가지고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파급력이 굉장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귀신은 없는데 소름돋은 1인
영화 속 장면 중 가장 소름이 돋았던 것은 에밀리의 옷장을 다 치우고 스테파니의 옷들로 다 채워넣었는데 그 다음날 다시 애밀리의 옷들이 옷장 속에 다 채워져 있어서 진짜 주스 먹다가 뿜을 뻔했다. 극중 스테파니와 함께 소리를 질렀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에밀리의 흔적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서 깜짝깜짝 놀랐고, 갑자기 에밀 리가 쌍둥이라고 해서 작가... 천재인가? 하는 생각과 서로를 속고 속이는 계략 속에서 결국 스테파니가 에밀리를 경찰에 넘기는 장면들을 보며 진이 빠질 정도였다. 반전이 적재적소에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고 텐션감이 높아 다른 생각할 틈 없이 영화에 빠져서 볼 수 있었다.
스릴러 보험사기
그렇게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결론적으로는 보험사기구나! 하는 생각에 허탈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험사기를 소재로 코미디나 범죄물은 만들어도 이렇게 스릴러물로 만들어진 경우는 별로 없어서 색달랐다. 그리고 영화 장면들이 대부분 대낮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환한 빛 속에서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조금 색다른 스릴러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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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에 관한 마지막
INTRODUCTION.
“우리는 여왕을 사랑하며 자랐습니다” -비틀즈 폴 매카트니-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좌에 머무른 퀸 엘리자베스의 다양한 얼굴을 마주하다.
POINT.
✔️ 시대의 아이콘,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풋티지를 실컷 볼 수 있는 영화
✔️ 영국 왕실에 관심 혹은 지식이 있다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영화
✔️ 여왕의 재위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윈스턴 처칠부터 폴 매카트니, 이건희, 마릴린 먼로까지 다양한 얼굴이 등장합니다.
✔️ 2021년 사망한 로저 미첼 감독의 마지막 영화
시대의 아이콘, 아주 독특하게 자리한
이 영화는 눈을 감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진으로 시작한다. 늘 눈 뜬 모습만 보았던, 아주 오랫동안 삶 전체가 공적 영역에 드러나 있던 사람의 눈 감은 모습은 낯설다. 영화는 이내 엘리자베스 여왕을 닮은 풋티지 영상을 성실하게 수집해 보여준다. 편집점이 짤막하게 구성되어 있고 음악을 현란하게 써서, 여러 편의 뮤직비디오를 연달아 보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일대기적으로 구성하기보다는,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싶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마치 원석을 다양한 면으로 커팅한 것처럼, 여왕 생애의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주 독특한 인물이다. 물론 여왕이라는 직함 자체가 그렇지만, '군주'라는 단어 자체의 아우라가 많이 사라진 시대에, 아이콘으로 기능하면서도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드레스를 입고 손을 흔들며 웃어 보이는 역할도 하고, 군복을 입고 비행기 옆에 서 있거나 총을 쏘는 모습으로도 남았다. 너무 앳되어 보이는 비틀즈에게 훈장을 건넸던 역할도, 윈스턴 처칠부터 블레어, 보리스 존슨까지 다양한 총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동시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운운하던 이전의 시대에 작별을 고한 후, 영연방(Commonwealth)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다양한 국가를 순방하는 것 또한 그의 역할이었다. 구한말에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까지의 역사에서 항상 일본보다 선진 문화 국가였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지만, 많은 나라들이 여러 실리적인 혹은 상징적인 이유로 영연방이라는 국제기구에 소속을 남겨두었다.
보고 있노라면 그가 '여'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 부드럽고 우아한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을 보면서 다양한 국가들이 어떤 이유로든 영연방이라는 국제기구에 소속을 두기로 한 데에는 그의 아우라와 영향력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겠다 싶은 것이다. 식민지배라는 공격적이고 비인간적인 제도 이후에, 남성의 얼굴을 하고 오는 지도자보다는 분명 좋은 선택지였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또한 그의 선택은 아니었다. 에드워드 8세가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면서 동생이 갑작스럽게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동생 즉 조지 6세 또한 "너무 일찍"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엘리자베스 또한 마땅히 준비할 만한 기간을 갖지 못한 채로 어느 날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최초의 대관식을 포함하여, 여왕의 생애가 선형적이지 않은 형태로 영화 속에서 흩날린다. 영국 왕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느낄 수 있다. 71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를. 그리고 그 내내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이콘으로서 얼마나 건재했는지를.
시대의 아이콘, 이제는 끝난 시간의
그러나 여왕의 시대는 끝났다. 영연방을 순회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은 분명 우아하고 그의 정치적 리더십을 느낄 수 있지만, 식민지였던 땅의 사람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전통 춤을 추며 여왕을 맞이하는 장면 위로 "down on my knees(무릎을 꿇고)"라는 곡이 흘러나오는 것은, 식민지 출신으로서 영 편치 않다. 독일 폭격에 대해, 독일을 방문했던 여왕에게 계란이 던져지는 모습 또한 풋티지에서 빼먹지 않았다.
전쟁에 선은 없으니까. 히틀러가 절대악이었다면 문제는 간단했겠지만, 그렇지 않았으니까. 입헌 군주제의 여왕으로서 엘리자베스가 자기 역량을 아무리 발휘하고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한다 한들, 전쟁의 시기를 보낸 입장에서 그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의 뛰어난 역량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시대는 이제 달라졌다. 그런 의도가 담긴 걸까. 이 영화에는 여왕에 대한 경의와 인정이 아닌 마음들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종종 있었다. 대관식 장면 위로 흐르는 "hero", 심지어 데이비드 보위 원곡 버전도 아닌 것. 여왕이 걷는 장면과 뒤섞여 등장하는 비너스 상들. 뼈 있는 농담을 의도했겠으나 실없이 느껴지는 선택에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가십으로 소비되어 더욱 안타까운 그의 자식 농사 이야기도 펼쳐진다. 다이애나에 대해서는 짧게 짚고 넘어가는 정도이지만, 찰스 3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엘리자베스 2세가 수행한 아이콘으로서의 역할을 그에게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겠지만, 역시나 기대할 수 없음이 확인된다. 그럴수록 엘리자베스 2세의 역량이 빛나기는 했구나 싶다.
영화 <스펜서>까지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엘리자베스 2세의 공적 인생에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으로 수렴되는 일련의 상황들은 분명 치명적이었다. 늘 이 부분만 잘라 다이애나 혹은 찰스, 심지어 카밀라에 더 주목하여 이야기되던 것을 엘리자베스의 공적 인생을 쭉 연결한 지점에서 보는 건 독특한 경험이었다.
마지막에 관한 마지막
늘 정해진 원칙에 따라야 하는 엄숙한 왕실의 모습이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의 시대로 점차 친근한 모습도 많이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 또한 시대의 요청에 응한 것이었다. 경마 결과를 이야기하며 해사하게 웃는 모습, <피터팬>의 저자인 제임스 매튜 배리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회상하는 모습을 보며 여왕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고, 긴 세월을 산 사람이었음을 동시에 느낀다.
역량이 뛰어난 시대의 아이콘인 동시에 한 인간. 이제 그 시대는 갔고, 인간도 떠났다. 찰스 3세는 개인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엘리자베스 2세의 반만큼도 사랑받기 어려워 보이지만, 설령 그가 아주 매력적으로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한들 시대가 이미 가버렸으니 엘리자베스 2세 같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가버린 시간의 빈 자리를, 이미 우리 곁을 떠난 감독의 손길로, 짧고 급한 호흡으로 뒤척여 보는 것은, 마지막에 관한 마지막이라는 관점에서, 꽤나 씁쓸한 경험이었다. 지금보다 수십 년 후에 더 유의미해질 기록이 아닐까.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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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열된 여자
<서브스턴스(The Substance)>(2024, 코랄리 파르자)
* 작품의 장면과 결말, 호러 이미지 묘사 포함
SNS가 메인 미디어로 자리 잡은 시대에 실물의 TV에서 방영하는 에어로빅 프로그램을 소재로 택한 것부터, <서브스턴스>는 대놓고 인위적이다. 개연성이나 현실성을 따지는 행위는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인물들은 ‘현실적’이지 않다. 대신 현실의 인간들이 감추고 있는 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방향으로 말하고 움직인다. 선명한 색을 띠는 단순화되고 과장된 배경, 자주 대칭적인 화면 구도는 극이 전하는 공포에 효과적으로 몰입하도록 길을 닦아놓는다. ‘서브스턴스’에 관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엘리자베스가 아는 바가 다인데, 그것으로 충분하다. ‘원본’을 젊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더 젊고 더 나은 나”를 분열시켜 끄집어낸다는 설정과 함께, 작품은 성공적으로 바디호러 이미지를 구현한다. 손톱에서 척추까지, 피부에서 내장까지- 주어진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주인공의 신체 외에도 두렵거나 싫은 감정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를 영리하게 포착한다. 화장실에서 통화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새우를 먹는 하비의 탐욕스러운 입과 언제 씻었는지 모를 소스 범벅이 된 손을 영화는 때로 슬로모션마저 입혀 들이민다. 잦은 클로즈업은 깔끔한 편집을 만나 부담스럽다는 감상을 피해 간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스타다. 그의 이름은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금색 별로 박혀 있다. 날달걀로 ‘서브스턴스’를 실험하는 모습을 간결하게 묘사하며 오프닝을 끊은 후, 영화가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것은 그 별이 새겨지고 잊히는 과정이다. 엘리자베스는 스타‘였’다. 그는 오랫동안 진행을 맡아 온 에어로빅 쇼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스튜디오 복도에는 그가 젊은 시절에 찍은 포스터가 걸려 있는데, 타이트한 운동복을 입고 그것을 바라보는 데미 무어의 팔다리는 여전히 매끈하다.**(맨 하단 덧붙임) 무엇이 그를 스타이거나, 스타가 아니게 하는가. ‘골드 스타’ 시퀀스에서는 꼭 수많은 팬들의 환호가 엘리자베스를 스타로 만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환호의 방향은 교묘하게 조정되기도 한다. 이름마저 하비인 프로듀서가 엘리자베스를 방송에서 내보내려는 까닭은 단순히 나이다. 엘리자베스가 진행하던 프로그램이 ‘특정한 몸이 아름답다’는 아이디어를 주입받아온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다면, 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엘리자베스의 이웃과 같이 댄서들을 성적 대상으로 관람하는 남성들을 타깃으로 짜였다. 카메라가 노골적으로 수의 신체 부위를 클로즈업하는 가운데 정작 안무는 구별하기도 힘든 쇼다. 할리우드의 공급과 수요를 통제해 온 이성애-남성 중심적 시선의 법칙에 따르면,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방송이 잘 팔리고, 나이 든 여성은 외모가 어떠하건 성적 대상일 수가 없다. 그럴듯한 재현에 힘쓰기보다는 픽션적 허용을 통해 곧장 본질substance로 돌진하는 <서브스턴스>는, 대놓고 ‘올드한’ 쇼의 ‘부활’을 그림으로써 할리우드(뿐일 리가)의 낡은 미소지니가 아직도 건재함을 꼬집는 듯하다.
엘리자베스의 경우는 그에게 USB를 건넨 남자의 경우와 다르리라 짐작한다. 그가 ‘서브스턴스’ 실험에 참여하는 동기는 젊음을 향한 동경 자체보다는, 계속해서 스타이고자(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에 가까워 보인다. 하비처럼 결정권을 쥔 남자들이 나이 든 여성을 ‘사랑받지 못한다’고 정의하기에 엘리자베스는 젊어져야만 한다. 엘리자베스가 ‘오로지 당신만 남아도 괜찮은가’라는 물음에 괴로워하며 찾은 것은 “넌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여자애girl야”라고 말한 동창 프레드의 연락처다. 본래 건강검진 결과지 귀퉁이였으며 진흙탕에 푹 젖어 변색된 종잇조각을 엘리자베스는 고이 보관했다. 그는 이제껏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타인, 특히 남성으로부터 확인받도록 학습해 왔다. (수가 처음으로 규칙을 어기는 순간이 한 남성과 하룻밤을 보내기 직전이었다는 점도 유사한 맥락에서 읽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므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매력적임을 인정해 줄 남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거울이 거기 있는 이상, 엘리자베스는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수가 규칙을 어기며 엘리자베스는 급속도로 노화한다. 엘리자베스의 체액에 기생해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수는, 마치 그것이 자신일 리 없다는 듯 ‘본체’를 기피한다. 영화도, 종종 엘리자베스 스스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선을 취한다. 그의 신체는 과장된 연출과 만나 싫은 것을 넘어 두려운 것으로 그려진다. 위협적으로 짜증을 내던 수의 하룻밤 상대 앞에서 엘리자베스는 움츠러들었으나, 후엔 자신의 구부정한 실루엣과 쉰 음성을 이웃 남자를 쫓아내는 수단으로 쓰기도 한다.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멘탈은 행동으로 발현되고, 주방을 어지럽히는 공격적인 몸짓이나 부러 이를 악물고 긁으며 내는 목소리, 먹은 음식의 지저분한 잔해들도 ‘괴물스럽게’ 다가온다. 아마도 의도된 위장이다. 이는 “자기 관리”가 잘 된 수의 외면, 몸짓과 대조를 이루며, 익히 배운 대로 ‘괴물’과 ‘천사’를 구분하도록 현혹한다.
그러나 ‘빌런’은 사실 수가 아닌가. 수는 엘리자베스가 내면화한 미소지니/메일게이즈의 의인화 혹은 판타지로 보이기도 한다. 영화의 첫 장인 “엘리자베스”는, 관객이 엘리자베스에게 이입하도록 디자인되었다. 두 번째 장 “수”의 화자는 엘리자베스와 수이고 관객 역시 양쪽 모두에게 이입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는 낯설지 않은 분열이다. 이성애-남성 중심적 시선에 일상적으로 노출돼 있는 여성의 자아분열: ‘나만으로도 괜찮다’는 목소리와 ‘나는 내가 아니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는 목소리는 충돌한다. 서로의 안타고니스트가 된 그들은 애초에 “하나”이므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고, 엘리자베스는 ‘실험을 끝내겠냐’는 물음에 매번 ‘안 돼’라는 답을 한다. ‘나’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빌런’을 ‘또 다른 나’로 설정함으로써, 작품은 그 ‘또 다른 나’가 탄생한 배경을 응시하려 한다.
엘리자베스가 실험을 중단하려다 말고 수를 살려 내면서, 두 자아는 서로를 마주하게 된다. 수는 엘리자베스를 살해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머리를 붙잡고 거울을 마주 보며 그대로 여러 차례 박아 맺힌 상을 깬다. 이는 자기 파괴와 다르지 않다. 수는 현재 ‘나’의 외형에 만족할지도 모르지만, 그 특정한 여성성을 지니지 않은 상태의 ‘나’는 용납하지 못한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엘리자베스/수는 스스로를 (여성)혐오하는 것이다. 수의 승리는 곧 패배다. 홀로 자아를 차지한 그가 곧 재분열을 택하는 전개는 필연적이다. 엘리자베스는 파괴되고, 원본 없이는 환상도 존재할 수 없으므로 새해 전야 쇼를 앞둔 수의 신체 부위는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치아가 빠져 입을 벌리지 못하는 수를 향해 하비는 “예쁜 여자는 웃어야지”라고 말하고, 수는 애써 입꼬리를 올린다. 이야말로 호러다. 하비의 사무실에 불려가 불안해하던 수가, 새해 전야 쇼 진행을 제안받고 활짝 미소 짓는 장면이 호러였던 것처럼 말이다.
패닉한 수는 집으로 달려가 ‘서브스턴스’를 재사용하며 최종 금기를 어긴다. 마지막 장 “몬스트로 엘리자수”, 자아들은 분열되지도 완전히 융합되지도 않은 채로 기이하게 공존한다. 수의 거죽을 열고 나온 ‘엘리자수’는 떨어져 나간 신체 부위들을 재조립한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카메라는 이 몸을 충실하게 전시하며 호러 연출을 하는 동시에, ‘그의 입장에서’ 움직인다. 스튜디오에 도착한 엘리자수는 사람들이 자신을 찬사와 함께 맞이하는 환영을 본다. 엘리자베스의 ‘동기’가 재확인되는 순간이다. 허나 ‘맞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새해 전야 무대에 오른 그를 맞이하는 건 침묵. 여기서 주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무대와 객석 사이를 흐르는 긴장과 위화감이다. 웃는 낯으로 굳어 눈알만 굴리는 “예쁜 여자” 백댄서들이 이 광경의 기괴함을 극대화한다. 오려 붙인 엘리자베스의 사진이 떨어지고 얼굴이 대중에게 드러나자 오히려 엷은 해방감이 끼어든다. 이즈음 영화는 엘리자베스/수가 들어 온 말들을 보이스오버로 삽입한다. 꼭 그 평가들을 한계까지 흡수한 몸의 거부반응이 모여 ‘엘리자수’로 실체화된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모든 게 제자리에 있군”, “저 코 대신 유방이 달려 있는 게 낫겠어” 오디션 시퀀스에서 캐스팅 디렉터가 뱉은 대사가 화면에 겹치는 가운데, 엘리자수는 유방을 낳는다. 결국 그는 한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다. 느닷없이 등장해 고전 호러 속 영웅이라도 된 것 마냥 엘리자수의 머리를 가르는 이 남성은, 하비, 이웃집 남자, 주주들, 객석을 채운 관중들을 ‘대표’하는 존재다. 엘리자베스를 고용하고 스타로 ‘만들고’ 그를 해고하며, 다시 엘리자베스와 같은 사람인 수를 고용하고 그의 모습이 달라지자 ‘목을 자른’다. 그것을 수행하는 ‘본질적인’ 주체는 특정한 개인이 아니다. 엘리자수의 피는 남자의 손뿐 아니라 무대와 객석 전체에 묻어 있다.
엘리자수의 몸 한쪽에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붙어 있었는데, 입이 쩍 벌어진 채로 고정돼 있는 모양이었다. 거리 한복판에서,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삼켰던 엘리자수의 신체는 무너져 내린다. 비로소 몸으로부터 해방된 얼굴(어쩌면 영혼)은 떨어져 나와 금색 별 위에 자리한다. 작품 초반- 낡아 갈라지기 시작한 엘리자베스의 별에 행인이 샌드위치를 떨어뜨려 시뻘건 소스의 흔적이 남는 컷은, 엔딩- 이 얼굴이 터져 별이 피범벅이 되는 컷과 일종의 불쾌하고 비극적인 수미상관을 이룬다.
‘먹히길 기다리는 탐스러운 복숭아’, ‘개미떼에게 점령당하는 사과’: 코랄리 파르자의 전작 <리벤지> 속 주인공 여성 젠은 그러한 위치에 놓였다가 맹금으로 되살아난다. <서브스턴스>에서 인간(대개 엘리자베스)의 몸과 연결되는 ‘음식’의 이미지는 새우, 닭뼈, 내장 따위다. 엘리자베스/수의 ‘교환’ 도중 그들은 수의 내장이 밖으로 흘러나오거나 수의 배꼽에서 닭뼈가 튀어나오는 등의 악몽을 꾸고, 스튜디오가 은퇴 선물로 엘리자베스에게 건넨 요리책엔 내장을 주재료로 하는 레시피가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수의 남자친구와 엘리자베스가 화장실 문을 사이에 두고 실랑이하는 장면에서는 그들의 벗은 둔부가 각각 스크린 중앙에 놓이기도 했는데, 어디에 무엇이 달렸건 주름이 얼마나 있건, 무방비한 인간의 몸은 하비의 손이 흔들던 새우의 몸처럼 초라하다. 댄스 쇼의 카메라가 수의 신체를 의도적으로 확대하듯 영화의 카메라는 그런 것들을 확대한다. <리벤지>가 젠을 포식자로 부활시켜 장르영화의 미소지니를 장르 화법으로 응징했다면, <서브스턴스>는 장르를 뒤집기보단 오히려 엘리자베스의 몸이 거기 철저히 잠식당하게 만든다. 여성이 내면화한 미소지니가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을 장르에 충실하게 묘사한다. 지속적으로 관객의 피부와 내장에 강렬하고 익숙한 감각을 주입해 바디호러의 기능을 다하고, 그 감각의 이면에서 ‘바디’에 관한 ‘호러’적이고 공공연한 비밀을 발견하도록 유도한다.
<서브스턴스>가 흥미로운 작품인 까닭은, 예상을 깨고 놀라게 하기 때문이 아니다. 너무 당연하게 거기 있어온 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보여주며, 어째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는가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한 여성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비체가 되고 끝내 완전히 사라지는 이야기를 목격한 우리가 도달하는 장소는 ‘그는 그렇게 했고, 대가를 치렀다’는 식의 교훈이 담긴 마침표 보다는, ‘그는 왜 그렇게까지 했나’라는 물음표에 가까워야 한다. 몸 없이는 영혼도 없을 테지만, 영혼 있는 몸은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고정된 상을 띤 채 하나의 물건이 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된’ 몸은 대체 무엇인가. 몸을 가르고 비틀고 조립하고 다시 해체하며, <서브스턴스>는 ‘어떠한 몸’에 대한 계획된 물신에 질문을 던진다.
** 덧붙임
데미 무어의 연기가 대단한 까닭 중 하나는 엘리자베스와 동일시될 위험을 감수했기 때문, 아니 기꺼이 스스로 엘리자베스가 ‘되었기’ 때문이다. 젊은 자신을 기준으로 엘리자베스(와 데미 무어)가 꾸준히 관리했기에 그러한 신체가 가능했을 것이다. ‘기준의 몸’은 “25세”의 것이므로 애초에 다다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전 세계 ‘뷰티 시장’에서는 ‘불가능한 것에 다다르라’고 ‘안티 에이징’을 부추긴다. 이 이미지는 엘리자베스와 같은 ‘스타’는 물론, 스타가 아니며 될 생각도 없는 여성들의 내면에도 침범한다. 그러나, ‘이상적인/미디어 표준의 몸’은 단지 젊은 것 뿐 아니라 촘촘한 규격을 충족시키는 몸이다. 대부분의 이십대 여성의 신체는 수의 것과는 거리가 멀고, 수의 “완벽함”은 깨지기 쉽다. 이 환상이 옥죄는 것은 ‘나이 든’ 여성만이 아닌 모든 여성, 그리고 ‘생물학적 여성’으로 인식되지만 여성이 아닌 이들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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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있었죠,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
봄이 되면 나타났다 여름이 되면 사라지는 죽음의 병.
공기를 타고 대한민국에 죽음을 몰고 온 살인무기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그들의 사투.
증발된 범인, 피해자는 증발되지 않았다!
영화라는 매개의 특성상 결국 극적인 연출과 전개를 끝끝내 놓지 못해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영화를 리뷰하는 사람으로서
특히 작고 사회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들에 조금더 마음을 쓰고 싶어하는 사람으로서
[공기살인]같은 작품들의 개봉을 응원하고, 또 미디어의 선한 영향력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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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글래디에이터 2> 2차 예고편
권력, 음모 그리고 복수 위태로운 로마의 운명이 걸린 결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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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위쳐 : 블러드 오리진> 쿠키 티저 예고편
모든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는 법. 새로운 프리퀄 시리즈 《위쳐: 블러드 오리진》으로 대륙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만나보자. 《위쳐》의 작중 시대보다 1200년 앞선 엘프 세계가 배경인 작품으로, 잊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최초의 프로토타입 위쳐의 탄생, 그리고 괴물, 인간, 엘프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핵심 시점인 '천구의 결합'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다루는 《위쳐: 블러드 오리진》은 2022년에 넷플릭스에서 단독 공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