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란2024-10-25 18:19:50
아주 긴 예고편 속 고가의 장난감들, <해피엔드>
가진 만큼 필요없는 장난감은 있을 수 없다. 에브 역시 마찬가지다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피엔드 Happy End, 2017 | 프랑스 외 | 드라마 | 107분
감독: 미카엘 하네케
아주 긴 예고편 속 고가의 장난감들, <해피엔드>
아주 긴 예고편
난 엄마한테 완전 질렸어. 징징거리면서 모든 사람을 열 받게 해.
아빠는 벌써 몇 년 전에 떠났어. 그는 그걸 견디기 힘들었나 봐.
이젠 내가 그걸 감당해야 해.
에브는 엄마의 우울증약을 먹은 햄스터가 죽어가는 모습을 sns에 올리며 말한다. 아주 시니컬하게 자신에게 닥친 현 상황을 제시한다. 소파에 누워 발작을 일으키는 엄마를 휴대폰에 담으면서 "구급차 불러야겠다."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계획적으로 엄마를 잃을 예정인 아이가 내보인 이 태연한 행위는 <해피엔드>가 앞으로 써 내려갈 충격적인 이야기의 예고편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에브는 드디어 엄마에게서 벗어나 아빠의 집에 들어가 살게 된다. 대저택에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건 모두 누리며 살 수 있는 로랑 가문에 드디어 입성한 것이다. 부가 아닌 안전한 울타리가 필요해 아빠를 따라갔지만, 에브는 그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아빠와의 공간은 허울만 좋은 곳이었고 아이는 여전히 '혼자'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로랑 가문의 눈에만 보이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 에브. 치매 환자 할아버지(조르주), 교양만 떠는 고모(앤), 실속 없는 반항아 사촌(피에르), 거짓말쟁이 아빠(토마스), 멍청한 새엄마(아나이스)에게 에브는 잠시 있다 갈 손님에 불과했다. 엄마의 죽음으로 로랑 가문에 정식 일원으로 들어왔음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에브는 핸드폰을 들고 로랑 가문의 몰래카메라를 자처한다. 멀리서 보는 것과 가까이서 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아이는 직접 로랑 가문의 감춰진 사실을 들춰내며 자신의 삶에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깨닫는다. 할아버지는 기회만 되면 자살을 계획하고, 고모는 오로지 '나'의 세계를 완벽히 구축하기 위해 가족은 안중에도 없다. 고모의 아들은 매번 말썽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한다. 아빠는 끊임없이 다른 사랑에 빠져버리고, 새엄마는 부르주아 가문의 며느리에 만족하며 더 이상의 삶의 고민을 끝낸다.
그토록 원했던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은 에브의 손에 의해 진실이 폭로되며 산산조각 난다. 안타깝게도 아이가 본 로랑 가문의 민낯은 너무나 익숙한 그림이었다. 징징거리던 엄마의 얼굴과 다르지 않았고, 죽은 햄스터를 손으로 찔려보던 자신과 소름 돋게 똑같았다. 그들과 다른 선상에 있는 줄만 알았던 에브는 사실 로랑 가문의 3세대 공주였다. 이런 잔인한 깨달음에도 영화는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어주지 않는다. 쉽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끝이 없는 미로에 갇힌 건 관객이 아니라 로랑 가문이다. <해피엔드>의 출구 찾기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사건이 아닌 인물들의 삶만 들여다봐도 가슴이 꽉 막힌 기분이 들 것이다. <해피엔드>는 뚜렷한 해결책도 없는 예고편을 아주 길게 만들고도, 어둠에 가려진 진실과 비밀을 냉철하게 제시한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극사실적으로 보여주는 현실이 궁금하다면, 추천한다.

비싼 장난감의 탈출
로랑 가문에서 인간적인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덜 비정상적인 인물을 찾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은 아니다. 가족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이중적인지 파헤치는 에브도 사실 그들과 같은 범주에 있는 인물이니까. <해피엔드> 속 로랑 가문은 모두 고가의 장난감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절대 서로를 버리지 않는다. 더 많은 이의 눈에 모범이 되어야 하고, 기품 있게 전시되어야 하며, 가족의 비극은 또 하나의 우아한 에피소드가 돼야 한다. 강박적인 그들의 가치는 아무리 땅바닥에 내리 꽂혀도 살아남는다.
그것이 비싼 장난감을 자처하는 그들의 무시할 수 없는 가치이자 힘이다.
할아버지는 제대로 큰 자식 하나 없는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치매란 강력한 질병을 갖고 있음에도 그는 가족이란 '거대한 전시장'에서 나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가진 것이라곤 아무짝이 쓸모없는 돈뿐이다.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고 자식들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과거 병상에 누워있던 아내를 직접 하늘나라에 보낸 그 강력하고도 유일했던 힘은 홀로 로랑 가문의 마스코트로 남게 되면서 모두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그는 저녁 식사 때마다 싸우는 딸과 손자는 물론이고, 머저리인 아들의 바람기와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두려움에 떠는 손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며느리를 보며 죽음을 갈망한다. 할아버지는 딸이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려 드는 손자의 손가락을 부러트리는 것도 온몸이 묶인 채 제일 앞 좌석, 1열에서 감상해야 했다.

에브는 엄마가 처방받은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아빠가 결국 자신을 버릴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비싼 몸값으로 책정된 아이는 마음대로 죽을 수 없다. 할아버지가 매번 실패했던 것처럼 에브 역시 자유로운 삶을 가질 수 없다. 쓰레기통에 버려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고, 버려진다 하더라고 도망갈 수 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휠체어에 탄 할아버지의 삶은 자신의 암묵적인 미래로 점쳐진다.
"모두 잘 될 거야. 걱정하지 마."란 아빠의 말에 이미 신뢰를 잃은 에브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비극 속에서 탈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할아버지를 보면서 어떻게 자신의 다음 스텝을 구상할까. 에브는 적어도 그보다 더 많은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다. 어릴 뿐더러, 몰래 카메라 경험으로 보고 배운 것이 넘쳐 난다. 폭력적이기만 했던 학습 효과가 얼마나 클까. 사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다. 분명한 건 바다로 휠체어를 밀며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보고 난 후에 벌어지는 에브의 행동이 <해피엔드>의 진정한 끝맺음이 될 거란 점이다. 그러나 실현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모든 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대저택이 있는 한 로랑 가문에선 쓸모없는 장난감은 있을 수 없다. 가진 만큼 더 필요한 게 그들이니까.
긴 예고편인 <해피엔드>가 결코 해피엔딩을 그릴 수 없는 이유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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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SYNOPSIS.
[성모의 죽음], [메두사], [성 마태오의 소명], [세례 요한의 참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 화가 ‘카라바조’
살해 혐의로 도망자 신세가 된 '카라바조'는
로마 교외로 도피 생활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그림을 놓지 않는다
한편, 교황청은 그런 그의 사면 자격을 조사하기 위해
비밀리에 ‘그림자’를 파견해 뒤를 쫓는데…
POINT.
✔️ 카라바조를 아시나요? 바로크 회화 거장. 렘브란트, 루벤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등이 영향을 받은 사람. 이전까지 없던 강렬한 화풍을 가진 독특한 화가의 세계로 안내하는 작품.
✔️ 카라바조 역할을 맡은 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의 든든한 존재감 뒤로, 이자벨 위페르 & 루이 가렐이 어마어마한 아우라를 뽐내는 작품. 둘 다 프랑스 배우라 그런지 더빙을 했다는 아쉬움은 남지만, 그럼에도 이 둘을 캐스팅한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얼굴로 에너지를 다 드러냅니다.
✔️ 사랑과 예술이 함께하는 길. 종교로 대표된 권력에 맞서 인간적 에너지를 드러내는 카라바조 캐릭터의 매력을 볼 수 있어요.
✔️ 영화를 보고 나니, 마침 진행 중인 "빛의 거장 카라바조 & 바로크의 얼굴들" 전시(~2025년 3월 27일)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그가 5살쯤 되었을 때에 흑사병이 터졌다. 유럽 인구의 1/3 가량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병으로 혼란한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견습 생활을 거쳐 화가로 자라난다. 폭발적인 주목을 받은 엄청난 능력치, 다른 의미로 폭발적인... 술과 폭력과 염문으로 절여진 사생활로 숱하게 화제가 된다. 결국 말다툼이 번진 결투에서 살인죄를 저지르고, 로마를 벗어나 몰타로 도피했으나... 몰타에서도 문제를 일으켜 나폴리로 또 도피하게 된다. 도망길에서도 붓을 놓지 않으면서, 마치 당시 상황을 반영하듯 거칠고 어두운 화풍을 남긴다. 혹자는 피살되었다고도 하고 혹자는 풍토병이라고도 하는 모종의 이유로 사망한다.
여기까지가 카라바조라는 화가에 대해 알려진 개략적 사실이다. 영화 <카라바조의 그림자>가 흥미로운 지점은 이 사실들을 크게 비틀지 않으면서도, 카라바조라는 인물에게 전혀 다른 이미지를 덧입힌다는 점이다.
'까'와 '빠'를 다 미치게 만들어야 슈퍼스타라던데,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카라바조는 당대의 슈퍼스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등장인물 대다수가 그를 극도로 좋아하거나 혹은 극도로 싫어한다. 그리고 그 반응들을 보는 것은 꽤나 재미있다. 오늘날 여기저기서 쉽게 재현되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나와 거리감이 있는 시공간에서 익숙한 구도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걸 보고 있자니 알 것 같다. 왜 나는 사랑-예술 사이에 인력이 있고, 사랑-권력 사이에 척력이 있다고 느끼며 살아왔는지를.
사랑과 예술의 대척점에, 권력
천상의 이야기와 지상의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철저하게 구분되어 있던 시대. 성모 마리아 그림은 반드시 특정한 구도와 정물 등 계산된 방식대로만 그려져야 했고,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해서도 안되었다. 하물며 길거리의 매춘부를 모델로 하다니 당시의 '높으신 분들'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모르고 봤을 때는 마음을 정돈하기에 도움이 되었던 성모화가, 모델이 매춘부임을 알고 나니 더없이 거슬리는 것이 되었다.
카라바조의 천재적 재능은 '천상의 이야기'를 지상에 전하기에 적합했지만, 그가 펼치는 예술의 방식은 신성모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 그를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 그 조사관(루이 가렐)이 '그림자'처럼 어두운 데 몸을 두고, 카라바조의 '그림자'를 좇으면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카라바조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모두가 각자의 증언을 하고, 카라바조의 삶은 모자이크화처럼 점점 우리에게 다가온다.
카라바조를 싫어하는 사람들 축에, 온갖 권력자들이 있다. 이들은 솔직할 수 없기에 뒤틀린다. 카라바조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솔직하게 경탄할 수 없어, 권위를 내세운 말들로 그의 그림을 깎아내리는 아카데미의 화가들을 통해, 예술의 진실성이 빛을 잃는다. (그림 뿐 아니라 비평도 함께.)
마찬가지의 양상을 종교 지도자들도 보여준다. (종교) 권력의 속성을 체화해 보여주는 캐릭터, '그림자' 조사관을 맡은 루이 가렐은 직선적인 눈빛으로 위압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기다란 막대봉을 땅에 내리꽂으며, 사람들을 협박하다시피 강압적으로 상대의 이름을 묻고 정보를 뜯어낸다. 상대의 양쪽 귓가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속삭이는 루이 가렐의 모습은 (진짜 너무 잘생겼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악마적이다. 종교를 수호한다는 캐릭터가 가장 악마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게, 종교의 진실성 또한 빛을 잃는다.
권력은 막대봉처럼 오직 파괴적이고 직선적인 방식으로만 내리꽂힌다. 사실 예술가들처럼 당대의 종교인들 또한 카라바조에게 사랑을 보았고 내심 끌렸지만, 그들의 권력을 유지해온 모양과 다른 그 사랑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랑의 속성은 반-권력인가, 생각하다 문장을 바꿨다. 권력의 속성은 반-사랑이구나. 종교가 권력이 되면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기서 본다. 권력을 탐하는 종교에 사랑이 머물 곳은 없다. 그 자리에선 예술도 거짓될 수밖에 없다.
살아 있기에 가능한, 예술
반대로 예술과 사랑이 빛나는 카라바조의 삶은 자동으로 반-권력적이 된다. 그의 예술은 상대의 눈을 마주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상대가 매춘부든 사형수든, 그가 이름을 묻는 방식은 마치 존재를 알아봐 주는 듯한 모양이다. 그리고 상대가 자신을 직접 서술하게 한다. "당신 대역죄인이오?" 물어 상대가 아니라고 자기 서술을 할 수 있도록. 진정한 예술은 우리에게 1인칭 언어를 피어나게 한다는 점에서 그의 질문들이 인상 깊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밤을 뜯기며 시달리던 창부는 카라바조 앞에서 혼곤한 잠에 들고, 두려움과 용기를 구분 못하겠다며 마지막 밤을 회피하던 사형수는 두려움을 인정하고 심지어 두려움을 넘어서 자신의 신념을 꿋꿋하게 외친다. 카라바조는 사랑의 눈빛과 질문으로 상대의 정체성을 끌어내고, 거기서 본 얼굴을 그려낸다. 권력이 끌어낼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 끌어낸다. 예술가가 탄생하는 지점은 공교한 기술 이전에 시각의 차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
아직 천부인권이라는 말이 발명되기 전이었던 시대, 거리의 약자들은 철저하게 타자화되었다. 상처에 술을 부어주는 신부의 너털웃음, 그가 베푸는 음식과 약품 정도가 이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치의 친절이었다. 여성이 성추행을 당해도, "만지게 두었다고" 즉결 심판으로 채찍질을 당하는 시대.
그곳에서 카라바조의 사랑은 홀로 빛난다. 비록 창부를 표현한 장면들이 다소 필요 이상으로 성적 대상화를 위한 대상화를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와중에도, 카라바조의 사랑은 난봉이나 염문이라기보다 인류애로 느껴진다. 삶에 진심인 사람, 삶을 사랑하는 사람은 타인의 죽음이나 상처를 쉽게 외면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설적으로 그럴 때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영화는 카라바조의 캐릭터에 부여해 드러낸다.
이는 카라바조를 경멸한 종교의 속성을 생각할 때 더욱 흥미롭다. 죽음 뒤의 부활로 죽음에 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종교가 미세한 의심의 자국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오히려 믿음이 약한 모습을 볼 때, 진정한 사랑과 예술은 재갈에 물려 피를 흘리고 두려움을 인정하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자리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오는 미묘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 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훗날 자신이 노벨문학상을 수상자가 될 사실을 모른 채, 연필로 꾹꾹 이 문장을 눌러 썼던 여덟 살 아이의 마음. 거기 고여 있는 것을,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었다. 사랑이 없을 것 같지만 놓인 곳. 반대로 있어야 하지만 없는 곳. 그 구도를 소실점처럼 현실로 끌어와 본다. 그리고 묻는다.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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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망했다고? 왜?
우리 잡히지 말자! 리들리 스콧 감독은 낭만을 잘 살리는 감독이었다. <델마와 루이스>는 아주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가부장적인 곳에서 잡혀 살던 주인공이 한 사건을 계기로 자아를 찾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나도 그게 와닿을 시기에 그 작품을 봐서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물론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나 <에일리언> <블레이드 러너> 이런 것들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작품이겠지. 아니 사실 나는 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리들리 스콧의 감독 작품 중에 본 것 <델마와 루이스>밖에 없다. 그래서 그를 감성적으로 기억하고 있나 보다. <마션>이나 <블레이드 러너> 한번쯤 봐야 하는데 공익근무요원 일이 너무나도 힘드니 볼 틈이 없다.
근데 그런 바쁜 와중에도 최신작은 못 참는다. 후에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에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할, <베놈 2 : 렛 데어 비 카니지>와 함께 자웅을 겨뤘던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를 다루려고 한다. 원래는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써보고 싶었지만 뭔가 극장에서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 근래 상영작 중 좋았지만 저평가가 있었던 것을 고르려고 한다. 나는 이 영화가 러닝타임도 길고 중세 서부라는 한국인들이 접근하긴 어려운 소재임에도 훌륭한 메시지와 좋은 연기를 담았다고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과연 2021년의 과소평가 작품 1등으로 꼽힐만하며, 이 작품의 조디 코머는 주요 시상식의 여자 주인공 후보로 뽑힐 수도 있다는 소심한 주장을 해본다. 아마 아무도 동의 안 하겠지만..ㅋㅋ
1. 감독 리들리 스콧, 장기를 살렸나요?
물론 이 감독의 영화를 <델마와 루이스> 빼곤 보진 않은 게 맞다. 근데 (자칭) 시네필로 살고 있다는 가오는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지 않은가? 그의 대표작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리들리 스콧은 상상력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에일리언>이나 <블레이드 러너> <마션> 같은 작품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주위에 화성 갔다 온 사람 있는가? 비트코인으로 간 거 말고 실제로 화성에 간 사람 말이다. 또 실제 존재하는 에일리언 본 적 있는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리들리 스콧의 최고 강점은 '가상의 현실을 직조시켜 최대한으로 서스펜스를 유지시키는 것'인 것이다. 근데 이 작품은 에릭 제거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이 원작이 되는 소설은 실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없던 현실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13세기로 넘어가는 타임머신이 있는 건 아니라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겠지? 근데 영화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않아도 2021년의 현재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만들었다. (내가 아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와는 살짝 다른 감이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묵직함이 있다.
2.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일단 주인공 자크 드 거리를 맡은 아담 드라이버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결혼 이야기>에서의 부부싸움 연기나 <인사이드 르윈>에서의 그냥 포크 뮤지션 역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건 역시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왔던 것 아닐까? 다방면의 역할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의 이선균 아담 드라이버는 그야말로 전천후 연기자다. 난 이런 그의 연기력이 이 작품에서 극대화됐다고 생각한다. <아네트>에서도 어마어마했고 <패터슨>도 잘했다고 들었다. 근데 두 작품을 안 본 것과 별개로 나는 이 역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난이도가 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가 되는 사건이 있는데, 사실 극을 보다 보면 이 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결말을 예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근데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것이 이 자크 드 그리의 캐릭터가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것인데, 현실적으로도 있어서는 안 될 돌아이라 내가 배우 입장이라면 이 역을 맡는 게 무서웠을 것 같다. 근데 우리의 아담 드라이버는 이를 200% 소화해낸다. 다른 주인공은 맷 데이먼이 맡은 장 드 카루 주인데 이 인물 역시 딱히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자크 드 그리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가 그렇게 좋은 인간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근데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이나 <다크 나이트>의 조커같이 비현실적인 미친놈들도 연기의 난이도가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근데 이 장 드 카루 주같이 어느 정도는 현실성 있는 돌아이도 어렵다면 어렵지 않을까? 맷 데이먼은 그때는 보편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엔 돌아이인 그런 인물을 아주 멋지게 소화해낸다. 본 시리즈에 나왔던 샤프한 모습은 없다. 그냥 배 나온 아저씨가 보일 것이다. 근데 맷 데이먼은 나이가 들어도 역시나 연기를 너무 잘해서 포스가 흘러넘친다. 다음은 조디 코머다. 조디 코머가 맡은 마르그리트는 많은 것을 감내하는 중세시대 여자 역할을 한다. '많은 것을 감내한다'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는 수도 없는 개소리를 참아야만 하는데, 터닝포인트가 되는 핵심 사건을 비롯 그녀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감정적으로 참는 것이 배우로서 힘들었을 것 같다. 인간적으로 영화의 마르그리트는 살아있는 부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외에도 벤 애플랙을 비롯한 나머지 배우들도 좋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나머지 세 배우가 워낙 탁월했기에 글을 줄이도록 한다.
3. 난이도는 어떤가요?
쉽지는 않다. 무슨 말이냐. 리들리 스콧 감독이 서스펜스를 차곡차곡 쌓은 것도 맞지만 일단 이 영화는 같은 에피소드를 세 번 반복한다. 만약 우리가 같은 말을 세 번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솔직히 지루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나는데?'가 궁금한 분들은 긴 러닝타임을 견디기 어려워할 수도 있다.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게 좋은 작품인 건 맞는데 모바일 환경에서 보는 게 어마 장장한 손해를 품고 있지는 않으니 스릴러, 역사물 좋아하는 분들은 부담 없을 듯. 아, 살짝 지루할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이 있기야 하지만 플롯을 성실히 따라가다 보면 이해하기 크게 어려운 작품은 아니다.
4. 왜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하나요?
물론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을 꿰뚫을 순 없겠지만 난 사실 되게 간단한 이유로 과소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첫 번째 요인, 같은 이야기를 세 번 반복한다. 인스타그램 쇼츠가 유행하는 세상이다. 나도 본론 결론 딱 임팩트 있게 끝나는 영화가 더 손이 갈 때가 있다. 이런 세태에 같은 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영화가 대중적인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두 번째.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에 인터넷이 너무나도 발달했다. 14세기 중세시대를 다뤘던 게 소수의 덕후들이 아닌 나머지들에겐 접근 난이도가 있었을지도? 또, 세 번째. 러닝타임이 길다. 솔직히 나도 극장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때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놀랐다. <이터널스>가 아마 비슷하지 않았나? <이터널스>는 10명의 히어로들을 밸런스 있게 배치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기라도 했지 이 영화는 같은 이야기만 세 번을 쓰니 반복이 지치다면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근데 이것은 이 영화의 단점에 대한 이야기가 될 테고, 나는 14세기의 원작 소설이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단점을 충분히 감추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지점이 리들리 스콧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겠지. 이 모티브를 부담 없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극찬받을만하다.
5. 어떤 것에 대한 영화인가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미투 운동이다. 미투 운동. 우리 사회에서 상처를 입은 이들을 위로하는 운동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미투 운동은 역선택을 품고 있다. 무고한 사람을 걸고넘어지면 그 사람의 마음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애 먼 사람의 삶을 망가트리는 짓은 그만큼의 대가가 치러져야 마땅하다. 근데 이런 역선택의 위험성이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면 안 되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마르그리트는 한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그때의 성차별적인 행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한다. 또 현대사회의 미투 운동을 연상케 하는 여러 말들을 통해 왜 우리 사회가 약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야만 하는가? 에 대해 조명한다. 또 그녀 역시 역선택의 위험부담에 놓여 정체성을 잃을 뻔 하지만 어쨌든 당당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과연 현재의 우리에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이 사회에서 꼭 우리와 함께 양립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할까?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런 질문들을 통해 뇌 비운 혐오가 팽배하는 우리 현실에서 그 자체를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를 전해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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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야 | 범죄도시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이 어딘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지진이 발생한 후 폐허가 된 서울. 심지어 비도 좀처럼 내리지 않으면서 생존자들은 극심한 물부족과 갈증에 시달린다. 이런 상황에서 '남산'(마동석)은 돌아다니는 동물을 사냥하며 남동생 같은 '최지완'(이준영), 딸 같은 '한수나'(노정의)와 함께 생계를 꾸며 나간다.
어느 날, 수나 앞에 '선생님'(장영남)이 나타난다. 그녀는 물과 먹을 게 풍족한 아파트에서 수나처럼 어린아이를 특별히 보호하는 기관이 있다면서 수나에게 이주를 권한다. 망설임 끝에 선생님을 따라가기로 결정한 수나. 그러나 그녀는 이내 광기로 가득한 과학자 '양기수'(이희준)의 음모에 빠지고, 남산과 지완은 또 다른 조력자 '이은호'(안지혜)와 함께 수나를 구하러 아파트로 향한다.
<황야>, 한국 시리즈물의 암(暗)
한국 영화 시장에서 시리즈물은 2010년대를 지나며 본격적으로 대두했다. 이전까지는 속편 제작도 많지 않았다. 단적인 예시로 2017년까지 한국 천만 영화 16편 중 속편은 단 한편도 없었다. 설령 속편을 제작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름만 속편일 뿐, 주인공도 내용도 전편과 무관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2>, <친구 2>, <강철비 2>처럼.
<신과 함께> 시리즈와 <범죄도시> 시리즈의 흥행 이후 기류가 바뀌었다. <명량>, <한산>, <노량> 삼부작이나 <베테랑 2>처럼 흥행작의 속편을 기획하는 경우가 늘었다. 최근에는 처음부터 여러 편을 계획하는 시리즈물도 많아졌다. 웹소설 원작을 영화화하는 <전지적 독자 시점>은 5부작, 나홍진 감독의 차기작 <호프>는 3부작 예정으로 알려졌다.
다만 부작용도 늘었다. 일례로 <범죄도시>의 경우 빌런 배우만 바꾸고 전편 내용을 되풀이한 결과, 세 번째 시리즈에서 피로감을 호소하는 관객이 늘었다. 최동훈 감독의 야심작 <외계+인> 시리즈의 경우 배급사 CJ에게 수백억 대 적자를 안겼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마동석 주연의 <황야>는 또 다른 형태의 부작용을 보여줬다. 시리즈물의 핵심, 포지셔닝을 간과했다. <황야>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속편인 듯 아닌 듯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그 대가로 <범죄도시> 시리즈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이에서 표류한다. '콘크리트 유니버스'의 일원으로서도 인정받기 애매하고, 독립적인 디스토피아 액션 영화로서도 부족함을 노출하기 때문.
다채로워진 마동석표 액션
포스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황야>의 가장 큰 매력은 마동석의 액션이다. <범죄도시> 시리즈 무술 감독이자 <범죄도시 4> 연출을 맡은 허명행 감독과 합을 맞춰서인지 마동석의 괴력을 강조하는 액션은 이번에도 통쾌하다. <범죄도시>에서 관람등급 때문에 아껴둔 힘을 푼 것 같기도 하다. 디스토피아 장르고, 인간이 아닌 괴물과 싸우다 보니 목이나 팔을 절단하는 유혈 묘사도 망설이지 않는다.
<범죄도시>의 한계를 넘어선 부분도 있다. <범죄도시>의 '마석도'(마동석) 활용법은 단순했다. 긴장감이 없었다. 빌런이 누구여도 마석도가 이긴다는 사실을 관객 모두가 올고 있다는 핸디캡을 없애지 못했다. <황야>는 다르다. 치유 능력을 지닌 군인, 악어나 도마뱀처럼 움직이는 좀비로 변한 괴물을 남산의 상대로 내세웠다. 비록 액션의 끝은 비슷해도, 과정에 있어서는 조금이나마 긴장감을 올리려 노력한 듯 보인다.
다양함도 더했다. <범죄도시>에서는 액션 캐릭터가 마석도 하나였기에 단조롭다는 인상이 짙었다. 반면에 <황야>는 세 캐릭터가 액션 분량은 나눠 가지면서 보는 재미를 늘렸다. 최지완은 원거리에서는 활을 쓰고, 근접전에서는 화살촉을 활용하며 칼을 주로 쓰는 남산과 차별화했다. 이은호는 힘을 강조하기보다는 상대 하체나 발목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면서 또 다른 스타일의 액션을 보여줬다.
애정이냐, 집착이냐
단순한 플롯도 <황야>의 매력이다. 확실한 대립 구도 덕분에 뚝심 있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 핵심은 부성애다. 남산과 양기수는 둘 다 딸을 잃은 아버지다. 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의지를 지녔다. 영화는 두 아버지가 각자의 상실감을 어떻게 풀어내는지를 대조한다.
남산은 상실감을 사랑으로 승화한다. 딸을 똑 닮은 아이 수나를 딸처럼 돌본다. 사냥에 성공하면 수나 몫을 항상 따로 챙기는 식으로. 수나가 시설 좋은 아파트로 가게 되자 누구보다도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수나와 수나 할머니가 위험해지자 고민 없이 구하러 간다.
반면에 양기수는 상실감을 집착으로 왜곡한다. 그는 딸 소연이를 어떻게든 살리려고 한다. 자기가 개발한 약물 덕분에 소연이를 되살렸다고 믿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부모들의 애정을 악용해 비윤리적인 연구를 진행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다 허상이었다. 심장만 뛸 뿐, 소연은 절반 이상의 신체와 의식은 잃었다. 그녀는 살지도 죽지도 못했다.
그렇기에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열하는 양기수가 약간 짠하면서도 몹시 불쾌하고, 그를 처리하는 남산의 모습은 통쾌하다. 진정한 사랑과 집착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데 성공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 덕분에 <황야>가 마냥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방치된 '콘크리트 유니버스'
보통의 액션, 디스토피아 영화라면 <황야>는 위의 두 장점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황야>에게는 다른 잣대가 필요하다. '대지진'의 발생, 황궁아파트 103동의 등장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와의 연결점이 곳곳에서 등장하기 때문. <콘크리트 유토피아> 후반부에 아파트에서 갑작스레 쏟아져 나온 물을 <황야>에서는 식수와 그 외 용도로 사용하기도 한다. <황야>를 '콘크리트 유니버스' 일원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황야>는 배경과 디자인을 공유하면서도 전혀 별개의 설정과 이야기를 펼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대지진 직후 황궁 아파트 주민들이 곧바로 아파트를 통제했다. 반면에 본작에서는 대지진 발생 첫날부터 군부대가 아파트를 장악한다. 다른 차이점도 있다. 전자에서는 굶주림과 추위와의 사투가 강조된 반면, 후자에서는 유독 가뭄과 물의 부재에 주목한다.
심지어 <황야>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시간대 순서를 알려주는 장치나 연결고리가 없다. 두 작품 간의 차이를 명확히 제시하는 대목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두 영화의 세계관이 별개고, <황야>가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속편이 아니라는 허명행 감독의 주장에도 힘이 안 실린다. 눈 가리고 아웅이나 다름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황궁 아파트 외부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애매한 포지셔닝의 나비효과
결국 <콘크리트 유토피아>와의 비교도 피할 수 없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최대 장점은 심리와 인간군상의 묘사였다. 아파트 내부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다양한 갈등을 보여줬다. '영탁'(이병헌), '민성'(박서준), '명화'(박보영), '금애'(김선영) 등 주요 인물의 입장이 제각기 달라도 자연스러울 정도로 캐릭터의 서사와 감정선을 세심하게 묘사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서스펜스를 마지막 순간 일제히 터뜨리며 강렬한 임팩트를 남겼다.
그에 비하면 <황야>의 전개는 우악스럽다. 특히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층 간 갈등, 인간성 상실을 다루는 대목이 어색하다. 일례로 아이를 못 만나게 하는 방침에 부모가 항의할 때, 양기수와 군인들의 대처가 너무 안일하다. 그전까지는 그 어떤 부모도 항의한 적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수나가 도착하기 전에도 외부에서 아파트에 들어온 아이와 부모들이 더 있다는 걸 고려하면 결코 자연스럽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군인들이 양기수의 비인간적인 실험에 동조하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선생님이 양기수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이유도 정확히 짚어주지 않는다. 선생님에게 불치병이 있고, 이를 양기수가 악용했다고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수나가 실험을 위해 제조한 물을 제대로 마셨는지 양기수가 확인조차 않는 대목도 반전을 위한 장치라기에는 개연성이 부족하다.
부실함과 기시감
포지셔닝도 애매한 가운데, 독립 작품으로서의 완성도 역시 미흡하다. 몇몇 장면에서는 기본적인 컷과 컷의 연결이 부자연스럽다. 아파트 내부에서 지완과 은호가 각기 군인과 한창 싸우는 중인데, 남산의 유머가 갑자기 중간에 난입하고, 다시 싸움으로 되돌아가면서 템포를 끊는 식이다.
간단한 플롯과 명확한 갈등 구조를 위해 캐릭터를 희생하기도 했다. 남산은 마동석 그 자체이고, 지완과 수나 역시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린 남녀 커플 클리셰를 반복한다. 특히 빌런 양기수는 아파트 주민과 군인을 좌지우지하는 빌런 치고는 뻔한 음모와 계략을 반복한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캐릭터의 전형을 답습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 영탁과 비교해 보면 존재감, 무게감, 입체감의 차이가 확실하다.
이에 더해 마동석표 유머도 남발한다. 이는 대중적 이미지를 바꿀 기회를 놓치는 듯 보여서 유독 아쉽다. 마동석이 등장하거나 제작한 영화는 기시감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제목을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장르와 분위기가 비슷하니까. 이때 <황야>가 마동석 색깔을 빼고 진한 장르물 분위기를 선보였다면 고정된 이미지를 다소 탈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황야>가 극장 개봉 대신 넷플릭스 공개를 선택한 결정은 신의 한 수일 수도 있다. 몇몇 장점에도 불구하고, <황야>는 <범죄도시> 시리즈와 <콘크리트 유토피아>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하는 평범한 마동석 영화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Poor 형편없음
다시 한번 증명된 명제. 유니버스 활용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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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셰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이 글은 영화 [비상선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 선생님은 내가 본 영화에 10점을 준 사람의 평가를 보고 에이 그건 아니지. 라며 1점을 주는 행동 또한 남의 의견을 신경 쓰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영화 [포제서;Posessor] GV)
취향이란 것에는 옳고 그름도, 급의 차이도 없다고는 하지만 영화 티켓 값이 만 오천 원에 육박하는 데다 이례 없는 대작 파티가 펼쳐지고 있는 현재. 금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원하는 관객들이 다른 사람의 의견에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는 것도 이해 가능하다.
2022년 여름 4 대작 중 세 번째 영화인 [비상선언]은 이미 시사회를 통해 후반부의 진행이 다소 아쉽다는 평이 돌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아직 영화를 접하지 않은 예비 관객들 조차 소문을 통해 자신들의 선택을 조금은 단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압도한다는 말로도 부족하다는 전반부를 깎아먹을 정도로 후반부가 그렇게 나쁜지. 그리고 나쁘다면 얼마나, 어떤 점이 나쁜지. 개봉 당일에 영화를 보고 온 관객의 입장에서 느낀 점을 정리해 보았다.
그러나 그 의견이 전문가의 의견이건 한 개인의 의견이건, 혹은 천만 관객 이상의 생각이건 상관없이. 자신이 보고 싶었던 영화는 보는 것이 맞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 작품을 놓친다는 것은 자신의 취향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 한 번을 잃는 것과 같으므로.
전반전;클리셰를 영리하게 피하며 선제골을 넣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개인적으로는 이 장면에서 박해일 배우의 모습이 보였음. 선과 악이 공존하는.
단지 한국 영화계에서만 낯설었을 뿐.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이미 익숙한 항공 테러, 혹은 재난 영화를 만들겠다는 선택을 했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누가 뭐라 해도 "뻔한 것"들을 쳐내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비상선언]은 이런 장르물에서 만날 수 있는 요소들을 아주 조금씩 비틀어 기시감을 최대한 피하려 노력했다.
악역인 진석에게는 서사보다는 순도 높은 사이코패스 설정을 꼭 쥐어주었고. 이 테러의 목적이 돈도 인질도 누군가의 석방도 아닌 그저 모두의 죽음임을 암시하며, 타협점이 전혀 없다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높였다.
또한 대머리에 하얀 민소매를 즐겨 입고 군번줄을 걸치고 있을 것만 같은 퇴역한 특수부대 출신, 혹은 무엇이든 다 아는 방법이 있는 진실의 방으로 테러범을 데려갈 것만 같은 게임 체인저도 애초에 이 비행에 합류시키지도 않았다.
가장 놀라운 점은 비행기 안의 나머지 탑승객들이다.
그들은 이 참담한 와중에도 누구 하나 남 탓을 하지 않으며. 혼자 살려고 발버둥 치다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도 하지 않는다(참고 1). 영화 안에서 성가진 긴장감을 유발하는 파워 게임이나 자원 쟁탈전도 벌이지 않는다.
배정받은 자리에 얌전히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간이 테이블까지 착실하게 내려놓은 채 입도 뻥끗하지 않을 것만 같은 승객들 덕분에. 영화는 삶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버린 테러범이 총 한 자루, 큰 고함 한 번 없이 비행기를 탈취한 그 상황에 모든 포커스를 둘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마련된 소중한 찬스는 영화 전반부 내내 유효 골을 터뜨린다. 눈에 날아와 박히는 모든 장면들이 주는 압도감은 탄탄한 압박이 되어 그 어떤 잡생각도 하지 못하게 하는 시간으로 관객들을 꽁꽁 묶어둔다.
후반전;외나무다리에서 만난 클리셰에게 동점골 허용
사진 출처:다음 영화
사실 후반부의 "신파"라고 부를 수 있는 장면의 슬픔의 강도는 그렇게 심하지는 않다. 어느 정도 있을 법한 정도이고, 또 가족과의 마지막을 고하는 장면이니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상 그 모든 부분들이 기괴하다, 혹은 느닷없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과연 이 껄끄러움의 원천이 무엇인지 조용히 들여다보면. 애초에 영화의 원만한 흐름과 긴장감을 위해 서사는커녕 자신의 입을 기꺼이 다물었던 다수인 탑승객들에게 너무 급작스럽게 스포트라이트를 줘 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당신들의 차례입니다.라는 의도가 아닌, 시간이 좀 남았는데 어떻게라도 좀 해봐요.라는 투의 취급을 하고 있다는 점은 영화의 후반부를 매우 무성의하고 무책임하게 보이게 하기 충분하다.
그 산만함은 머릿속에서 지금 이거 날 울리려는 거지?라는 반감이 고개를 불쑥 들게 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눈물은 단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다.
과격하다 못해 무자비하게 느껴질 정도의 공격을 퍼붓는 바람에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던 상대방에게서 아주 조금씩 허점이 보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조금씩 무너지는 수비 진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피했다고 자부했고. 따돌렸다고 믿었던 클리셰는 결국 외통수처럼 좋은 결말로 가는 길목을 막아 선 최후의 수비수가 되어있었고. 이 명성도, 실력도, 소문도 자자한 선수는 결국 이번 경기에서도 보기 좋게 한 골을 넣고야 말았다.
모든 장르적 규칙을 파괴했다고 자부하는 전반부의 위엄을 한 번에 무너뜨리는 치욕적인 골로 기록될 것이다.
인저리 타임;책임감과 부담감으로 인한 어이없는 실축.
사진 출처:다음 영화
과연 이 영화가 좋은 마무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가져본다면. 영화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는지. 그리고 그 규칙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이 영화 전술의 기본은 책임감이었다.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한다. 아예 장관 숙희(전도연)의 입을 빌어 책임을 지는 일을 하는 사람이 공무원이라는 대사까지 내뱉는다. 또한 인호(송강호)는 직업적인, 그리고 가장으로의 책임감을 둘 다 내버리지 않고 허리춤에 찬 채 죽어라 뛰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는 자신의 전술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방법으로 재혁(이병헌)의 만회 비행이 성공해 안착하는 장면으로 비유하는 것을 선택했다. 비록 10분에 한 번씩 바람 방향이 바뀌어 안전한 착륙을 예측할 수 없었지만. 두 명의 사상자를 내는 바람에 조종간을 놓게 만들었던 그때를 완벽하게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책임감을 통해 놓치지 않았다고. 그러니 이 플레이는 꽤나 일관되었다고 주장한다.
결론은, 혹은 결과는 옳았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방법에 있다. 영화가 신파를 선택한 것이 문제가 아닌, 신파를 선택하는 과정이 잘못되었음이 결말에 절실히 드러난다. 재혁으로 대변할 수 있는 이 경기의 설계자는 재혁에게는 잊고 싶었을 그때의 결정보다 더 형편없는 결정을 내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마치 그 결정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처럼.
과연 이 선택이 KI501 항공편이 전반부에 겪은 생화학 테러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어떤 영화와 비교해도 지지 않을 법한 항공 재난 영화의 앞부분을 만들어 낸 비행기의 탑승객들은. 이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선택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영화는 이들에게 그런 선택지를 들이밀지 않았다. 우리는 책임졌다.라는 결말은 결국 그 어떤 것도 책임지지 못했다.
마치면서
세 사람이 도둑질을 했다.
한 사람은 도둑질이 나쁜 것인지 모르고 했고
한 사람은 도둑질이 나쁜지 알면서도 했으며
한 사람은 도둑질이 궁금해서 했다고 했다.
이 중 가장 나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정답(?)은 도둑질이 나쁜 것인지 모르고 한 사람이라 했다.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조차 없는 무지함 만큼 나쁜 것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분명 그럴 의도로 만든 결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비칠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더 나쁜 결말이 되어버렸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의 전반부가 주는 힘은 정말 대단하다. 또한 선과 악이 공존한다는 박해일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듯한 임시완의 연기는 매서움을 넘어 섬뜩하기까지 하다. 두 번 다시 이런 캐스팅을 볼 수 없을 것처럼 호화로운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많은 것을 관객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참고 1
물론 빌런(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다른 재난 영화들에 나오는 인물들에 비하면 귀여울 지경이며, 오히려 저런 상황에 처했을 때 일으킬 수 있는 정상 범위의 반응 중 하나 정도로 보인다. 솔직히 저 정도면 나도 이길 수 있다. 정도?
[이 글의 TMI]
1. 오래간만에 야식 먹고 글 쓰고 자려고 했는데 왜 벌써 새벽 다섯 시지.
2. 하지만 후회는 없다.
3. 다다음주 휴가다!!!!!
[수다쟁이의 또 다른 TMI]
여담이긴(??) 하지만.
영화에서 생화학 테러(바이러스)가 일어날 것임을 암시하는 순간부터 내 머릿속은 두 배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과연 저 영화 속 바이러스는 어떤 바이러스인지.(혹은 어떤 바이러스에 가까울지) 그리고 묘사하고 있는 증상이나 전염되는 방법 등의 고증이 얼마나 되어 있는지 등에 대해 생각하느라 박진감을 넘어서 피부로 와닿다 못해, 영화 내내 머리에서 김이 슉슉 뽑아져 나오는 걸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 아 물론 이 영화를 보신 우리 연구실 리더분에 의해 다음 주 저널 클럽에서 영화에 대한 토론을 (공부해와서) 하기로 했다.
....?? 왜 나만 새드 엔딩인데. 나도 구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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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 비추는 한 줄기 빛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감독: 신동민 | 출연: 김혜정, 신정웅, 노윤정 외 | 제공/배급: ㈜모쿠슈라 | 러닝타임: 73분 | 개봉: 2021년 10월 28일]
보통의 영화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을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묘사하거나 흉내낸다. 그런데 이 영화는 ‘흉내’라는 표현을 들먹이기 어색할 정도로 서민의 삶을 그대로 화면에 옮겨놨다. 샛노란 싸구려 장판과 청소를 자주 하지 않은 바닥을 밟느라 새카매진 발. 그리고 김혜정의 목소리는 ‘방송용’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관리에 힘쓰는 여느 중견배우의 목소리가 아니라 결이 매우 거친 날 것 그대로다. 노래방에서 술에 취한 채 음정박자를 무시하고 삶의 한이 찌든때처럼 섞인 목소리로 노래하는 노윤정 배우의 목소리는 또 어떠한가. 그래서 서민의 삶을 고스란히 재현한 영화를 지켜보고 있자면 극중 인물과 나 사이에 카메라의 존재는 온데간데없이 느껴지고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상업영화에서는 흔히 재벌이나 정치인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겪는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다뤄진다. 혹은 예쁘고 잘생긴 젊은이들의 달콤한 로맨스가 나온다. 이런 이야기는 실상 대부분의 관객들과는 무관한 딴세상 이야기들일 뿐이다. 하지만 진정 보편적인 사람들의 구질구질한 생활은 영화로 다뤄질 자격이 없는가 하는 물음에 답한 영화들도 드물지만 몇 있었다. 특히 작년에는 조민재 감독의 <작은빛>이 그러했고 올해는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가 그러하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소간의 환상과 섞어 풀어내는 이 영화는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단숨에 몰입하게 만든다. 관객이 아니라 실제로 그 공간에서 인물들의 사건을 지켜보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마력이 대단한데, 앞서 구질구질한 서민의 삶이 영화로 다뤄질만한가 하는 물음에 선명한 대답이 된다. 저마다의 인생에는 드라마틱한 서사가 있다. 특히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사람들의 삶에는 환희보다는 뻘밭 같은 고단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들의 삶에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은 특히 독립영화만이 가능하다고 느낀다. 이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3 개의 서로 다른 단편영화를 하나의 장편영화로 묶었다. 세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어머니다. 신동민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 세 영화에는 모두 ‘혜정’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3 부 에는 심지어 아들 ‘동민’은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엄마 ‘혜정’의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내내 어머니를 향한 사려 깊은 시선이 돋보인다. 신동민 감독은 지금껏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고, 영화로 표현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그려왔던 어머니랑 내 어머니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어머니는 노래 부르고 술을 마시면서 재밌게 사는 건데 내가 괜히 엄마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 진짜 어머니와 같이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사를 완벽히 준비한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엄마 같으면 무슨 얘기하고 싶’은지 늘 의견을 물어가며 촬영을 진행했다. 덕분에 실제 삶을 풀어내는 ‘혜정’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관객에게도 전해지며 저마다의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자전적인 영화에는 신동민 감독의 가족이라는 주제에 대한 내밀한 고민이 담겼다. 어머니와 아들의 삐걱대는 관계, 바람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이야기에 녹였다. 굉장히 개인적이며 선뜻 타인에게 공개하기는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신동민 감독은 솔직하고 담담하게 가족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전한다. 이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잘 하고 있는지를 돌아봤다는 감독의 작은 용기가 투영된 결과물이다. 비로소 관객들은 가족이 갈등을 겪지만 갈등을 겪고 더 끈끈해지는 전형적인 가족영화의 서사가 아니라 개인적이면서도 사실적인, 그래서 더 보편적인 가족영화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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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가 져도 끝나지 않는 잔혹한 어른들의 게임
오징어 게임 (Squid game, 2021)
개봉일 : 2021.09.17 (넷플릭스 공개)
감독 : 황동혁
출연 : 이정재, 박해수, 오영수, 위하준, 정호연, 허성태, 아누팜 트리파티, 김주령
해가 져도 끝나지 않는 잔혹한 어른들의 게임
<도가니>, <수상한 그녀>, <남한산성>까지. 매번 다른 느낌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황동혁 감독의 신작 <오징어 게임>이 9월 17일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각자의 사연을 가진 채 삶의 끝에 서있는 456명의 참가자와 인생을 완전히 뒤바꾸고도 남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상금 456억. 수많은 참가자들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굶거나 빚쟁이에게 찔려 죽느니 목숨 걸고 인생 한번 바꿔보자며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한 사람당 1억. 최후의 1인에겐 456억. 누가 이런 서바이벌을 벌였는진 알 수 없지만 참가자들은 머리 위로 쏟아지는 돈다발에 “이건 진짜다.”라는 믿음을 얻는다. 옆에 누워있는 참가자는 믿을 수 없지만 돈만큼은 착실하게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믿지 못할 경쟁자들은 모두 제거해야 한다며 공격성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이 게임에서 죽는 게 나만 아니면 되니까. 생판 모르는 이의 목숨 vs 추가되는 1억 + 나의 생존 중 어떤 걸 선택하겠냐고 묻는다면 당연 후자가 아닐까.
<오징어 게임>은 황동혁 감독이 2008년에 구상하고 2009년에 쓴 이야기다. 당시 일본 서바이벌 물인 <라이어 게임>, <배틀 로얄>과 같은 작품들을 보며 서바이벌 물의 요소를 한국적으로 접목해 내기 위해 고민한 결과로 탄생한 것이 <오징어 게임>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약간의 각색이 더해지긴 했지만 이런 소재를 10여 년 전에 이미 모두 구상해놨다는 사실을 들었을 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아쉬웠다. 그 당시에 바로 제작이 됐다면 지금보다 더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그 사이에 영화 <헝거게임>이나 웹툰 <머니게임>처럼 돈과 명예를 건 서바이벌 물들이 지나간 후라 서바이벌 물 자체의 신선함은 조금 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오징어 게임>은 아이들의 게임을 재해석하는 방법으로 다른 서바이벌물들과 차별화를 둔다. ‘극한의 공포 속에서 게임 참여자들은 서로를 의지하다가도 한순간에 의심하고 배신하고 결국엔 서로를 해하게 된다.’는 서바이벌 물 특유의 심리적 공포는 똑같이 존재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다른 서바이벌 물들과 다르게 조금 더 단순하고 귀여운 게임을 반복한다. 어릴 적 골목에서 친구들과 했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같은 게임들 말이다. 9편으로 구성된 시리즈엔 총 6종류의 추억의 게임이 등장하는데, 어떤 게임이 나오는지는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전부 언급하지 않겠다.
이 시리즈의 차별점이자 가장 큰 매력은 낯설고 아기자기한 세트장과 디테일한 요소들이다. 강박증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 만큼 완벽하게 딱 떨어지는 각진 물건들과 진짜 같은데 가짜 같은 공간들이 담고 있는 무게감, 그리고 눈에 딱 들어오는 일꾼들의 핑크색 슈트와 선물 상자처럼 포장된 관들. 기계처럼 움직이는 일꾼들이 만들어내는 동작의 흐름들이 주는 묘한 분위기가 특히 만족스러웠다. 내용은 아름답지 않지만 눈에 담긴 세트장은 빈틈없이 마음에 들었다.
서바이벌 물 특유의 설정들과 게임의 일부로 인해 앞서 나온 여러 작품들과 비교되며 표절 논란을 함께 안고 가고 있지만 작품 자체가 완전한 표절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한 부분들이 있다. 장르적 특성과 플래그, 일부 장면과 소재를 모두 독창적, 독보적으로 구성하기엔 이미 서바이벌 장르가 쌓아온 이미지와 개념, 시간이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는 사람의 심리라는 틀이 있기에 앞선 작품들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부분은 무조건 욕하기보단 개인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오징어 게임>은 간단한 룰로 이뤄진 추억의 게임들을 돈과 목숨을 건 피 튀기는 생존 게임의 주제로 이용하며 어릴 적 우리의 모습, 어른이 된 우리의 모습의 간극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끌어올린다. 어릴 땐 친구들과 골목에서 웃으며 게임을 하던 아이들이 어느새 어른이 되어 인생 한번 뒤집어보겠다고 피 흘리고 절규하며 게임을 하고 있는 모습이 씁쓸하고 슬플 뿐이다. 그때는 술래가 되거나 게임에서 져도 딱밤 한방이나 인디언 밥 한 번이면 패자 벌칙으로 충분했는데 이 게임에서 탈락하면 무조건 죽는다. 탈락한 자는 죽는다는 게임 특성상 아무래도 잔인한 장면들이 다소 많이 등장하긴 한다. 총으로 사람을 쏘거나.. 사람의 신체가 망가진다거나. 많이 고어한 편은 아니지만 반복해서 노출되다 보면 거부감이 들 수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라겠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목숨을 걸고 참여하는 게임 속 약육강식의 법칙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은 초대장을 받고 자신의 손으로 참가를 결정한다. 사람들이 우수수 죽어 나가는 걸 보면서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갔던 참가자들은 현실에 떠밀려 대부분 다시 게임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최후의 1인이 내가 될 수도 있다며 확률을 계산하고, 그 확률을 높이기 위해 이기심과 폭력성을 여과 없이 내보인다. 사람이 많아지면 당연히 무리가 생기고, 권력을 잡는 힘센 무리가, 나쁜 무리가, 그에 대응하는 착한 무리가 생기기 마련이다. 생존이라는 본능 앞에서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기 위해 어떤 행동까지 벌일 수 있는지. 추악하고 추잡한 본능의 단면을 제대로 훔쳐본 기분이었다. 근데 웃긴 건 왠지 이해가 가더라는 것이다. 나도 살아남기 위해선 충분히 그들처럼 행동했을지도..
게임의 참가자들은 게임장 입소에 앞서 똑같은 옷과 신발을 신고 이름 대신 번호를 부여받는다. 이들은 게임장의 위치도 모르고 당장 다음에 펼쳐질 게임 종목도 알 수 없고, 옆에 서있는 참가자의 이름도 알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다. 하지만 게임을 컨트롤하는 사람들은 참가자들의 모든 걸 알고 있다. 이름, 나이, 사는 곳, 학력, 특이사항을 포함해 이들 인생의 대부분을 알고 참가자들 머리 위에서 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가면에 그려진 도형과 가면의 종류에 따라 철저한 계급제로 운영되는 오징어 게임이란 작은 사회에서 참가자들은 얼굴과 몸을 속절없이 노출한 채 장난감으로 전락하고 만다.
* 이 게임에선 가면에 그려진 도형의 각이 많을수록, (네모>세모>동그라미), 상급자의 개념인 듯하다. *
끝나지 않는 게임에 대한 피로도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은 무력한 참가자의 모습이 우리 모습과, 무한히 경쟁해야 하는 게임이 우리 사회 모습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같이 살자”고 말할 여유도, 그런 약속을 지킬 여력도 없이 이기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는 지쳐버린 우리들. 그리고 465명 중에 1등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최후의 1인을 가리기 위해 자비 없이 반복되는 게임들. 이 게임은 지옥이라 불리는 우리 사회의 일부분을 아주 크게 확대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일부 후기들에선 반복되는 잔인한 장면들, 다소 느리게 느껴지는 전개에 대한 아쉬움을 볼 수 있었는데, 6번의 게임을 지나다 보면 다소 피로감이 몰려오는 건 사실이다. 단순한 게임이지만 믿었던 이들이 서로를 배신하고, 결국엔 1명만이 남아야 한다는 룰 아래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긴장감과 허탈함의 반복이 주는 감정 소모가 굉장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해? 예상은 했지만 진짜 싫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생존 게임의 늪에서 허우적대며 함께 지쳐간 기분이었다.
이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어릴 때 친구들과 골목길에서 하던 게임들은 해가 질 때쯤, 엄마의 “얘들아, 밥 먹어~”라는 말과 함께 끝났는데, 고립된 섬 안에서 펼쳐지는 생존 게임에 참여한 이들에겐 게임을 중지시켜줄 사람이 없다. 주최자들은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을 중지할 수 있다.”는 조항을 걸었지만, 참가자들은 머리 위에 쌓인 돈을 포기하지 못한다. 말려줄 사람도, 욕심을 포기할 사람도 없다.
한낮에 시작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부터 밤처럼 어두운 세트장에서 치러진 징검다리까지,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가는데 생존에 대한 긴장감을 놓을 틈이 없다. 게임 주최자들은 여러 극한의 상황들을 연출하며 참가자들을 몰아가고, 차후엔 제발 극단적인 선택을 하라며 부추기기까지 한다.
게임 안의 인물들
돈과 생존이 달린 게임 앞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변화한다. 마지막까지 남은 주인공 기훈과 상우, 새벽이 그 변화를 가장 크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새터민 새벽은 아무것도 없이 동생과 덩그러니 남겨진 세상에서 엄마를 데려올 돈을 모으기 위해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새벽은 아무도 믿지 못한다. 게임의 초반, 새벽은 어떤 무리에도 끼지 않으려 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기훈에게 마음을 열고 마지막 순간엔 기훈에게 동생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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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우는 <오징어 게임>의 최고 브레인이다. 서울대 수석 입학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그는 정형화된 지략가의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생존에 있어 가장 계산적인 인물이다.
개인적으로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마음에 들어왔던 인물은 상우였다. 상우는 처음 게임에서 쫓겨나왔을 때 알리에게 차비를 빌려주거나 달고나 게임 직전 우산을 고른 기훈에게 게임 종류를 말해줘야 할지. 같은 양심적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이기적으로 변한다. 자신을 믿은 알리를 배신하고, 부상을 입은 새벽을 찌르고 끝내 마지막 게임에선 기훈에게 칼을 휘두른다. 그는 보통 선하게 설정되는 주인공(기훈)의 편에 함께하면서도 생존을 위한 이기심을 숨기지 않는다.
마지막 게임에서 상우는 기훈에게 우승을 양보하며 죽음을 선택한다. 이 선택은 기훈에 대한 믿음, 사과의 의미 50%와 허공에 돈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결단 50%가 합쳐진 일부 계산적인 행동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훈은 약삭빠르기보단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넓은 사람이다. 가족도, 동료도, 어머니도, 내 인생도 챙기고 싶었기에 무엇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 그는 엉망이 된 인생을 되돌리기 위해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다. 그는 약자인 1번 일남과 혼자인 새벽에게 먼저 손을 내밀고 게임 안에서 경쟁자가 된 상우에게도 옛 추억을 얘기하며 적대감을 하나도 내비치지 않는다.
좋게 말하자면 살육 게임 안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선인. 나쁘게 말하면 바보 같은 오지라퍼. 그런 상우가 변하게 된 건 마지막 라운드를 앞두고 상우가 죄책감 없이 사람을 죽인 순간부터였다.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칼을 집은 상우를 경계하던 기훈은 새벽의 죽음과 함께 방어와 공생이 아닌 공격을 선택하게 된다. 6번째 게임인 오징어 게임에서 공수를 결정하라는 질문에 ‘공격’이라 답하는 기훈의 대사로 그의 확고한 심경 변화를 느낄 수 있다.
1화의 시작, 기훈과 상우가 오징어 게임을 하는 장면이 나오고 9화에선 어른이 된 두 사람이 생존을 건 싸움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함께 골목을 뛰놀고 서로를 의지하며 자란 기훈과 상우가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몰리게 된 걸까. 문득 슬퍼지는 장면이었다. 기훈과 상우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만 마지막 순간엔 다시 떠오른 추억과 기훈의 결단으로 둘의 사이가 잠시나마 회복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너무 많이 변해버린 두 사람은 함께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지영의 말대로 “6.25이후 최대의 비극”같은 게임이었다.
게임 밖의 인물들
<오징어 게임>은 잔인하다. 자의로 참가하긴 했지만 어쨌든 돈과 생존을 필사적으로 바라는 참가자들을 마치 게임 말처럼 게임판 위에 올려두고 관찰하고, 가볍게 죽인다. 참가자들은 게임 내에서 서로의 이름과 추억을 나누며 나름의 동료애와 우정을 쌓아가지만 주최자들은 극적인 게임 연출을 위해 그 심리마저도 이용한다. 아침이 지나고 해가 져갈 때쯤, 이제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될 때쯤 주최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 1:1 게임을 붙여 참가자들의 작은 위로와 희망마저 빼앗는다.
그리고 가장 잔인한 건 게임에 함께 참여한 일남의 존재다. 구슬치기 게임을 하며 양심의 가책과 일남을 잃은 슬픔에 절어있던 기훈을 농락하듯 게임이 끝난 후 1년, 일남은 다시 기훈에게 카드를 보낸다. 일남이 게임에 참가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 삶이 힘들어서가 아니었다.
“보는 것이 하는 것보다 더 재밌을 수가 없지.”
그저 인생의 재밌는 것이 없어 참여했을 뿐, 기훈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일남을 지키기 위해 진심을 다했는데, 일남은 그저 재미 때문에 게임을 열고, 게임에 참가한다. 되짚어보면 일남은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임에도 큰 걱정 없이 게임을 해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을 할 땐 걱정 없는 아이 같은 표정으로 선두로 뛰어나갔고, 구슬치기 게임에선 미련이 없다는 듯 기훈에게 구슬을 양보한다. 그리고 참가자 간 큰 싸움이 벌어지던 날 밤. 일남이 높은 침대에 올라가 “그만해, 나 너무 무서워!”라고 소리치자 프론트맨은 이내 스페셜 게임의 중지를 선언한다.
일남이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고 목숨이 달린 게임의 승리를 기훈에게 양보할 수 있었던 것, 그가 무섭다고 소리치자 상황이 종료되었던 것은 일남은 게임에서 지더라도 생명을 잃지 않기 때문에, 통제 못할 상황에서 일남이 생명을 잃는 걸 방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6화 깐부 에피소드에서 일남이 기훈에게 구슬을 양보하며 두 사람 사이의 믿음과 우정을 보여주는 장면에 울컥하긴 했으나 차후에 일남이 보여준 그 행동이 전혀 아름다운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결국 양심을 잃어버린 기훈의 모습에 대한 만족도를 구슬로 표현한 것일 뿐, 그 구슬 안에 담긴 진심이 무엇이었을지.. 더 이상 일남의 마음을 믿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일남은 기훈을 가장 우습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오징어 게임>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게임에 참가하거나 게임을 진행한다. 등장인물들 중 유일하게 게임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인물은 준호다. 경찰인 준호는 실종된 형이 남긴 명함과 기훈의 증언을 듣고 게임장 내부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가장 용감하고 정의로운 인물이다.
준호는 주최자, 참가자, 외부인의 삼각 구도를 만들어 이야기의 흐름을 팽팽히 당겨낸다. 그리고 참가자들은 하나도 파헤치지 못한 오징어 게임의 비밀과 프론트맨의 정체를 밝혀내고 새로운 궁금증을 떠올리게 만든다. 차후 시즌 2가 제작된다면 준호의 생존 여부가 기훈에게 가장 큰 힘 또는 변곡점이 되지 않을까 싶다. 주최자들을 제외하고 그 해 오징어 게임에서 생존하거나 죽는 장면을 확실히 보여주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이 유일하니 말이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지킨 주인공
주최자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참가자들이 서로를 죽이고 탈락시키는 장면을 기대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이란 이기심과 공격성이다. 기훈은 게임 내내 동료라 생각되는 인물들을 챙겼으며 마지막 라운드에서도 상우를 살리기 위해 게임을 중단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이 끝나고 상금을 받았음에도 죄책감과 여러 감정들로 인해 여전히 돈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일남은 남다른 우승자 기훈을 불러내 지나가는 사람들의 양심을 시험하는 마지막 게임을 제안한다. 하지만 기훈은 매번 일남과 주최자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타인에 대한 믿음과 인간성을 지키고 일남과의 게임에서도 승리한다. 그는 인간들의 밑바닥을 훑으며 즐거워하던 주최자들에게 커다란 한방을 먹이고 이 게임의 진정한 승자가 된다.
이 게임은 정말 평등한 걸까
“게임 안에선 모두가 평등해.”
<오징어 게임>은 반복적으로 평등을 주장한다. 이들은 밖에선 한 번도 이기지 못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모두 똑같은 위치에 놓고 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라며 참가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이건 전혀 평등한 게임이 아니다. 참가자와 주최자의 위치는 하늘과 땅 차이고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위계질서가 형성된다. 참가자들은 생존이 걸린 게임에서 본능적으로 서로를 해치고 죽지 않기 위해 숨는다. 목숨을 건 무한 경쟁을 끝내는 방법은 생명이 다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주최자들은 이 게임이 결국 평등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참가자들의 엎치락뒤치락 하는 모습을 하나의 내깃거리, 구경거리쯤으로 소비한다. 애초에 각자 다른 신체능력과 지능, 게임에 대한 경험치를 가진 400여 명의 사람에게 똑같은 게임을 제안하는 게 어떻게 평등할 수 있을까. 주최자로서 편의를 확보한 일남, 뽑기 게임에서 라이터를 사용한 미녀와 덕수, 일남 덕분에 게임을 통과한 기훈, 장기 적출로 미리 게임을 알았던 참가자 등.. 열심히 포장했지만 결국 평등하지 않은 게임이었다.
만약 456억을 얻을 수 있는 인생 역전의 기회가 온다면, 그 기회를 꽉 잡겠는가? 묻는다면 나는 절대 아니라고 답할 것이다. 일확천금의 커다란 기회라면 그걸 놓쳤을 땐 그만큼 잃는 게 많을 테니, 큰 도박은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정말 내일 죽을 수도, 내일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면 또 다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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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 파트2, 1편만한 영화가 나왔을까?
?Rabbitgumi 입니다!
마녀 파트2가 개봉했습니다.
김다미 배우의 데뷔작 마녀1이 꽤 좋은 반응을 보였었죠.
물론 그 영화도 호불호가 강하게 갈리는 편이었습니다.
이번 2편은 어땠을까요?
영화에는 다양한 배우들이 출연을 하고 있어요.
액션도 꽤 비중을 차지하고 있죠.
한국형 수퍼히어로 영화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제가 영화가 어땠을지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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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에이즈에 대한 편견, 보수주의 정치 풍자를 그린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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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1차 예고편
전 세계가 기다려 온 미션 드디어 올타임 레전드 ‘그’가 돌아온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2025년 5월 극장 개봉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