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0-07 09:07:22
[BIFF 데일리] 맨 앞에 있었으나 조명되지 않았던 예술가들
영화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 리뷰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비프 올데이시네마 상영작
*시놉시스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 피터 가브리엘 등 세계 최고 뮤지션들의 앨범 커버를 만든 디자인 스튜디오 ‘힙노시스’. 영감에 한계가 없던 두 천재 디자이너의 무모한 작업 스토리, 그리고 시대의 아이콘이 된 명반들의 탄생 뒷이야기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음악이 상품이 아닌 예술이던 시대, MTV가 도래하기 이전 음악이 메시지를 던질 수 있던 시대, 록 음악이 가장 대중적이던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 이야기다. 그러나 뮤지션의 이야기는 아니다. 핑크 플로이드와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가 협업하고 싶어 한 LP 커버 예술가 ‘힙노시스’의 이야기다.
스톰과 포 두 사람이 힙하고, 쿨하고, 지혜롭고, 현명하다는 단어의 글자 일부를 따서 설립한 힙노시스는 LP 커버 이미지를 전문으로 제작한 회사다. 더불어 당시 사람들이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던 LP 커버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회사다. 골방에 모여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하던 이들이 예술가가 되던 시대, 스톰과 포 역시 이들과 같은 궤적을 따라 LP 커버의 세계로 진입했다. 영화는 힙노시스가 걸어온 파격적 예술의 궤적을 당사자, 그들과 협업한 뮤지션의 회고를 통해 복기한다. 앨범과 커버의 ‘의미’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지금, 음악과 커버로 메시지를 던지며 매 순간 혁신을 고민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인 흡인력을 뿜는다. 커버 방향성을 놓고 비틀즈와 자존심을 건 신경전을 벌이는 대목은 스톰과 포가 어떤 태도로 커버 작업에 임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1968년부터 록의 시대가 저문 8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한 힙노시스는 록의 쇠락과 함께 커리어의 절정에서 수직 낙하했다. 그리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명성을 누리지 못했고 록 음악 팬들의 기억 속에서만 예술적 생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시대의 변화에 더는 힙하고, 쿨하고, 지혜롭고, 현명할 수 없었던 이들은 되돌릴 수 없는 실패로 예술의 역사에서 퇴장했다. 고급 예술품을 소장할 수 없는 ‘가난한 이의 미술 소장품’이자 앨범 정체성의 표현으로서의 LP/커버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누군가에게는 향수를, 누군가에게는 ‘이야기’가 된 지난 시절의 매력에 몰입시켜줄 영화다. 표지가 갖는 중요성이 점차 중요해지는 도서 시장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음악과 LP 커버를 동등한 예술로서 존중하는 영화의 태도가 인상깊기도 했다.
한편 부산국제영화제 커뮤니티 비프의 올데이시네마에서 이 영화가 상영된 후, 호밀밭 출판사 장현정 대표의 사회로 장정일 작가와의 대담이 진행되었다. 대담에서 장정일 작가는 자신이 록과 팝을 거쳐 재즈에 입문하게 된 과정을 영화와 연계해 들려주었다. 그는 80년대가 민중 문화의 시대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가공된 현실일 뿐이라 일갈했다. 대학 운동권은 ‘탈춤’과 ‘김민기’를 시대의 문화로 제시했지만, 정작 ‘민중’들은 고고장에서 춤을 추었고 나훈아와 이미자를 들었다. 록과 팝은 대학에서 드러낼 수 없는 ‘죄스러운’ 취향이었다. ‘의식’이 부재하다는 가혹한 비판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때문에 장정일 작가는 자신이 대학을 경유해 팝과 록을 듣지 않은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고 회고한다. 대학에 진학했다면 ‘민족 문화’의 세례에 굴절된 상태로 팝과 록을 뒤에서만 몰래 즐길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후 영국의 풍요와 반항을 대변하는 음악이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감상되었나에 관한 장정일의 설명은 그 문화를 향유했거나 사후적으로 회고하는 모두에게 문화의 수용에 둘러싼 물음을 촉발한다. 장정일의 해설은 낭만적 흡인력의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에 ‘제3세계’를 둘러싼 권력관계를 더해 낭만 이면의 다층적 맥락에 주목하게 한다.
*영화 매체 〈씨네랩〉 초청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커뮤니티 비프 관련 정보는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biff.kr/kor/addon/10000001/page.asp?page_num=8624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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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뚝심과 확신이 부족했던 항일운동의 재해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33년, 일제강점기 경성에서 활동 중이던 항일조직 흑색단의 스파이 '유령'. 그는 새롭게 부임하는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총독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까지 성공한다. 이에 새로 부임한 경호대장 '다카하라 카이토(박해수)'는 조선총독부 내에 숨어든 유령을 잡기 위한 덫을 놓는다. 총독부 통신과 감독관 '무라야마 쥰지(설경구)', 암호문 기록 담당 '박차경(이하늬)', 정무총감 비서 '요시나가 유리코(박소담)', 암호 해독 담당 '천경호(서현우)', 통신과 직원 '이백호(김동희)'는 유령으로 의심고 벼랑 끝 호텔에 갇힌 채 추궁당하기 시작한다. 하루 안에 유령을 찾으려는 다카하라의 압박이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유령은 호텔에서 탈출해 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백방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삼는 한국 영화가 많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상업적으로 어필하기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일단 반일 정서를 겨냥해 관객들의 감정선을 공략하기 쉽다. 장르적으로도 운신의 폭이 넓다. 독립군을 다룬다면 블록버스터 영화를, 의열단이나 한인 애국단 같은 항일 운동에 초점을 맞추면 첩보 스릴러나 누아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다. <봉오동 전투>가 전자라면, <암살>이나 <밀정>은 후자다.
특히 이야기의 기본적인 얼개와 제시되어 있어서 재해석이 용이하다. 역사적 사실을 도구 삼아 이야기의 구조나 흐름을 수월하게 조직하고 매끄럽게 다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은 대개 특정 사건을 스크린에 옮기거나, 역사적 인물을 각색하는 팩션(faction) 영화다. 예를 들어 <밀정>의 모티브는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이다. <암살>은 실제 인물인 김원봉과 염동진을, <영웅>은 안중근을 전면에 내세웠다. 다만 이는 단점도 명확하다. 사건이나 인물의 재해석이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전달의 수단으로 변질되면 재미와 완성도가 떨어진다. 언제나 고증과 역사 왜곡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부담도 피할 수 없다.
이해영 감독의 신작 <유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자신만의 존재 이유를 찾는다. 중국의 소설가 마이지아의 소설 <풍성>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 <유령>에는 다른 작품들과 명확히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작중 익숙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은 찾아볼 수 없다. 흑색단이라는 이름의 항일 조직은 물론 신임 총독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물이 허구다. 흑색단의 첩자로 의심받는 주인공도 가상의 인물이다. 즉, <유령>은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처럼 일제강점기라는 배경을 빌려 허구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 데 주력한다. 이 발상은 꽤 흥미롭다. 스크린 위에 인상적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만의 개성을 마지막까지 부각할 뚝심은 부족해 보인다. 그 결과 <유령>은 신선함과 익숙함 사이에서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만다.
<유령>은 역사를 재현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진 실제 인물을 기록하거나 잊혀 가는 사건을 상기하려 들지 않는다. 대신 시대를 재현한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의 삶을 스크린에 띄운다. 재력가 딸이지만 조선총독부에서 암호문 기록 담당으로 일하는 박차경과 조선인인데도 정무총감의 직속 비서로 권력을 지니고 있는 유리코. 암호문 해독에 재능을 지녔지만. 결벽증을 지닌 채 소심한 태도로 일관하는 천은호. 조선인 어머니를 둔 것을 부끄러워하며 유령을 잡아 공을 세우려는 데 혈안이 된 무라야마. 조선인 피가 섞인 학교 선배를 무시하는 다카하라까지. 영화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제각기 남다른 사정을 품고 있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적잖은 분량을 할애한다.
중요한 건 영화가 오프닝부터 누가 유령인지 알려준다는 점이다. 이미 유령이 드러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캐릭터 사이에서 누가 정체를 숨기고 있는지는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없다. 그래서 마피아 게임 같은 추리극이나 심리극을 예상케 만드는 포스터나 홍보 문구만 믿었다가는 실망할 수밖에 없다. 각 인물의 목적이 명확하기 때문에 속고 속이는 서스펜스는 매력적이지 않다. 또 다른 유령이 등장하는 반전도 효과적이지 않다. 총독부의 암호문이 흑색단의 극장으로 전달되는 과정을 통해 이미 또 하나의 유령이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렇기에 인물 간의 관계는 눈길을 끈다. 유령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다카하라에게 결백을 주장해야 같은 상황에 부닥쳐 있기에 그들 간의 차이점은 자연히 두드러진다. 이 관계는 결국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과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수단이 된다. 일본인과 조선인의 혼혈이라는 이유로 정체성이 혼란스러운 인물은 누구보다도 '내선일체'라는 일제의 프로파간다에 충실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은 그를 배척하기도, 포용하기도 한다. 조선인 중에는 온몸과 마음을 던져 저항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소시민적으로 항일과 친일을 모두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 중간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은 소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기도, 순응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캐릭터 덕분에 허구의 세계를 항해하는 <유령>은 현실에 닻을 내릴 수 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보면 살아있는 캐릭터의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유령은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등장한다. 클라이맥스는 극장에서 펼쳐지고, 영화관으로 되돌아와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끝난다. 영화관은 허구의 공간이다. 스크린 위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하고 온갖 사건이 벌어지지만, 스크린 속 주체와 사건은 물리적으로 실체가 없다. 반면에 극장은 실체가 있는 공간이다. 실제 인물인 배우가 무대 위에서 움직일 때 이야기는 진행된다.
공간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관에서 유령과 흑색단은 지령을 전달하고 비밀을 공유한다. 그들의 신념은 아직 그들의 가슴속에만 존재할 뿐, 총독 암살과 같은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반면에 유령은 극장에서 직접 움직인다. 무대와 커튼 뒤에서 혈투를 펼친 끝에 자신의 희생과 피해가 헛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 덕분에 더 강한 의지로 영화관에서 지령을 내리며 총독 암살을 시도할 수 있다. 신념과 이념에만 갇혀 있지 않고 행동을 통해 시대를 바꾸는 것이다. 이는 <유령>의 각오와 궤를 같이하는 듯 느껴진다. 기록과 영상으로 남은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대신 생동감 넘치는 디테일을 앞세워 완전히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항일 투쟁을 다루는 영화인데도 담배를 매개로 연결된 두 여성의 처연한 사랑과 유령 간의 애절한 동지애가 유독 인상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유령>은 장르가 급변하는 순간부터 매력이 급감한다. <유령>은 감독의 전작인 <경성학교>처럼 중반부부터 장르를 전환한다. 추리극은 또 한 명의 유령이 정체를 드러내자 액션 영화로 탈바꿈한다. 그 이후로 영화는 철저히 액션의 쾌감에 집중한다. 두 유령이 힘을 합쳐 호텔에서 탈출하는 과정은 온갖 폭발음과 불길로 가득하다. 다카하라가 흑색단을 잡기 위해 함정을 펼쳐둔 극장에서는 치열한 총격과 저돌적인 맨몸 액션이 눈을 사로잡는다. 마지막으로 기관총을 든 박차경이 연인이었던 '난영(이솜)'의 못다 이룬 총독 암살을 대신하는 장면에서는 쿠엔틴 타란티노 특유의 난장판 마무리도 스쳐 보인다.
문제는 액션을 보여주기 위해 낭비되는 캐릭터가 너무 많고, 그로 인해 <유령>만의 특색도 동시에 사라진다는 점이다. 가장 보편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준 천은호 계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유령을 찾아내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그저 모든 상황을 외면하며 피하려 한다. 그러나 두 유령의 활약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는 '평범한 시민 1'이 되어 바로 이야기에서 삭제되어 버린다. 무라야마의 후배 경관 역시 그 시대를 보여주는 독특한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무라야먀의 어머니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크게 실망한다. 하지만 이내 무라야마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혈통과 관계없이 그를 좋은 선배이자 좋은 사람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도 결국에는 유령과 흑색단을 잡겠다는 무라야마의 욕망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소비되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허구의 시공간 안에서 캐릭터의 관계를 통해 역동적인 역사를 보여주려는 의도는 꺾이고, 현란하고 단순한 쾌락이 그 자리를 대신해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힘을 잔뜩 준 액션 연출이 인상적인 것도 아니다. 일례로 작중 일본군은 놀라울 정도로 무능하다. 그들은 박차경과 유리코의 액션을 빛내주기 위한 엑스트라에 불과할 뿐, 유령들을 효과적으로 압박하거나 위기에 빠뜨리지 못한다. 붙잡은 포로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채 탈출하는 걸 구경한다. 마치 <스타워즈> 속 제다이와 스톰트루퍼의 추격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주인공들이 위험하다는 인상을 주지 못한다. 다만 <스타워즈>에서는 '포스가 함께 한다'는 핑계라도 있다면, <유령>에는 그런 장치가 없다. 그러다 보니 두 여성의 액션은 그 자체로 통쾌하거나 박력 있을지 몰라도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매력은 뽐내지 못한다.
필요한 디테일을 지나치게 생략하기도 한다. 멋진 액션 시퀀스는 많은데, 그 사이가 비어 있어서 의문점을 남긴다. 후반부 극장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분명 관객의 이목을 끌만하다. 무라야마가 흑색단 총책과 연락책을 체포하여 남은 인원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대목,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루어진 유령들의 역습, 무대 뒤 커튼 사이로 펼쳐지는 숨 막히는 추격전까지 숨 가쁘게 진행된다. 그러나 모든 순간에는 설명이 없다. 무라야마가 어떻게 흑색단 일부를 체포했는지, 유령들은 어떻게 그 타이밍에 발맞춰서 경성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는지 등 액션이 등장하기 전 상황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이처럼 의문이 뒤따르다 보니 액션에 푹 빠져 즐기기도 어렵다.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선사하는 시각적인 쾌감만큼이나 극적 순간을 조성하려는 무리수가 커 보이는 이유다.
그 결과 <유령>의 도전은 끝내 절반의 성공에 그치고 만다. 장르적으로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거부한 도전과 의도를 밀고 나갈 줄 아는 뚝심은 비록 산만하기는 해도 생동감 넘치는 영화의 전반부를 만들어냈다. 반면에 더욱 드라마틱한 몇몇 순간을 꾸며내기 위한 변화는 자신만의 차별화된 매력까지 까먹어 버렸다. 영화 중반부 이후 액션영화로의 전환이라는 변화구를 던지는 대신 캐릭터 간의 심리극이라는 직구를 고집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떨치기 어렵다.
P(Poor, 형편없음)
변화구 대신 직구였다면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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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 돌리지 말고 이 고통을 응시하라
쾌락은 짧지만, 임신중지로 인한 고통의 시간은 길다. 쾌락은 둘 사이의 일이지만, 임신중지는 여성의 몫이다. 임신중지가 법으로 금지된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경험을 담은 책 《사건L’événement》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레벤느망〉은, 대학 졸업 시험을 앞둔 대학생 ‘안’이 겪는 임신중지의 어려움을 생생하게 담아낸 영화다.
임신중지를 선택한 안이 겪는 철저한 고립을 좇는 이 영화에서 가장 화가 났던 두 장면이 있다. 첫째는 도움을 청한 동료 남학생이 ‘임신했으니 안전하다’며 관계를 요구하는 장면이다(원작에서는 남자가 아니 에르노의 ‘도덕성을 알아보려고’ 그런 제안을 했다고 핑계를 대는 나온다). 둘째는 임신중지를 도울 것처럼 굴었던 의사가 사실은 임신중지에 반하는 자신의 신념에 기반해 거짓으로 유산방지제를 처방하는 장면이었다. 임신중지를 기대하고 허벅지에 주사를 찔러 넣었던 안이 느꼈을 박탈감과 분노에 함께 몸을 떨었다. 이 두 장면은 편견과 ‘불법’이 서로를 강화하며 증폭해나가는 과정, 그리고 이 어처구니없는 폭력을 개인이 감당해야만 하는 부당함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임신중지의 순간 안이 느끼는 고통을 비추는 영화의 방식이다. 안은 뜨개질바늘을 사용해 혼자서 한 번, ‘불법’ 시술소에서 두 번 임신중지를 시도한다. 영화는 이 고통의 순간을 비껴가지 않는다. 안의 거친 호흡과 고통스러운 신음, 날카로운 시술 도구가 안의 몸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럼으로써 ‘불법’이라는 추상적 규범이 초래하는 위험과 이것이 우리에게 남기는 수치심을 고발한다. 얼굴이 찌푸려지고 몸이 움츠러들더라도 안의 고통을 마주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우리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응시함으로써 그녀의 고통이 우리의 고통으로 전이되는 순간을 느껴야 한다. 이것이 안의 고통을 타자화하지 않기 위해 영화가 선택한 방식이다. 안의 고통을 수동적 응시의 객체로 놔두지 않고 관객을 그 고통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써 〈레벤느망〉의 적나라한 임신중지 시술 장면을 독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은 2019년 낙태죄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이 나왔으나 여전히 대체입법이 되지 않고 있다. 국가의 무능과 낙태 반대론자의 집요함이 합쳐진 결과다. 누군가의 고통이 심각하다는 데 사회적 합의가 있다면 어떻게든 사회적 대책이 도출된다. 코로나 시국의 자영업자가 좋은 예다. 때문에 3년이 다 되어가는 낙태죄 입법 공백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아직 임신중지로 인한 여성의 고통이 우리 모두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 이런 의미에서 〈레벤느망〉의 개봉은 시의적절하다. 〈레벤느망〉이 보여주고 느끼게 해준 ‘고통으로 매개된 정동의 공동체’가 임신중지를 “여자만 걸리는 병”, “집에 있는 여자로 만드는 병”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일로 만드는 계기 중 하나가 되길 바란다.
*원작에는 아래의 구절이 나온다. 이를 통해 영화가 아니 에르노가 품은 문제의식을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시각화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소설들이 임신 중절을 언급하긴 했지만, 그 일이 정확하게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해서까지는 세부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스스로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과 이제 더는 임신하지 않은 상태 사이는 생략되었다. (…) 실용적인 정보들을 찾을 수 있길 바랐건만 기사들은 ‘불법 중절 시술’의 뒷얘기들만 언급했고, 그런 사실들에는 관심 없었다.”(아니 에르노, 《사건》,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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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 더럽게 안 좋은 한 킬러의 운수 좋은 날
운이 없더라. 만약 사회복무요원 복무지에 노트북을 놓고 오는 건 운이 안 좋은 편에 속할까? 그런 것도 운이 안 좋은 것에 해당하면 난 정말 옴 붙었다. 좀 재미있는 일 없을까? 아니면 갑작스러운 행운에 걱정 없이 살 순 없을까? 금세 길거리에서 시비 붙었던 어떤 사람의 말이 떠오른다. 착하게 생겨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날 건든다. 진짜 좀 짜증 난다. 나 좀 안 건들 수 없나?
하지만 불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웃픈 일들은 보통 한꺼번에 몰려온다. 받아들이는 사람 속사정 같은 건 고려해주지 않는 부자비한 놈이다. 만인에게 평등한 불평등. 이 우연 같은 불평등을 만나 사람 인생이 종종 바뀌곤 한다. 긍정적인 사람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게 인간 아니겠어? 이런 모티브는 수많은 영화에 공통적으로 자리 잡혀있다. 이번에는 브래드 피트가 운 없는 킬러로 돌아왔다. 또 <불릿 트레인>을 시사회에서 본 입장에서 이 정도의 글이 감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운수 참 좋은 날
인생사의 많은 것들은 사실 설명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른다. 유달리 운이 없는 이 남자는 방금 쓴 문장에 격하게 공감할 것 같다. 운이 없는 킬러 코드명 레이디버그. 갑자기 느닷없이 주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건 일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원래 임무를 하기로 했던 킬러가 아파서 불참한다는 건 그냥 무덤덤하게 넘기기로 한다. 아니 뭐 고등학생이야? 아파서 조퇴하게? 툴툴대는 레이디버그. 그런 레이디버그를 마리아가 격려한다. 임무를 전달하는 마리아. 오늘 레이디버그가 해야 할 일은 일본을 경유하는 기차에 찌그러져 져 이 가방 하나를 무사히 가져오는 것. 그게 임무야? 일본의 한 지하철에서 가방만 찾으면 되는 게? 왠지 이번 임무는 확실히 쉬운 것 같다.
이 가정은 현실로 드러났다. 굉장히 쉬운 임무였다. 손님들이 가방을 넣는 칸에 간 레이디버그. 어렵지 않게 돈이 들어있는 가방을 찾는 데 성공한다. 이게 이렇게 쉽다고? 근데 사실 일이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같은 열차 안에 있는 손님 중 몇몇은 레이디 버그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백의 사신’에게 의뢰인의 아들을 엄호하고 돈가방을 챙기라는 지시를 들은 킬러 레몬과 탠저린이 있었다. 또 뭔가 아들과 관련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남자와 어려 보이는 여자도 기차에 탑승했다. 이 사람들은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전부 킬러였다. 운도 더럽게 없는 레이디 버그. 이 사람들은 각자 목적과 계기를 가진 채로 열차에 탑승한 것이었다. 단순히 돈가방만 찾아서 빼돌리면 되는 미션인 줄 알았는데 오늘도 잘못 걸렸다. 지독한 불운을 무릅쓰고 레이디 버그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보는 재미는 있는 편
이 영화의 강점 중 하나는 보는 재미다. 이 영화의 보는 재미는 촘촘하게 잘 구성되어 있다. 일단 보는 재미 첫 번째. 액션이다. 액션 잘 뽑았다. 이야기의 배경과 설정 상 기차라는 속성은 극에서 중요한 지분을 차지한다. 기차는 한번 탑승하면 다음 역까지는 못 내린다. 또 승객끼리 서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도 그 특징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넓게 탁 트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나 역이라는 게 있어 정류장 도착시간마다 서로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비행기, 버스와는 다른 대중교통으로서의 차이점이다.
영화는 이 특징을 십분 활용한다. 일단 좁은 공간에서 액션 잘 활용했다. 예고에도 나오는데, 이 영화의 액션이 공간이 좁았다면 상상하기 어려웠을 지점이 몇 군데 있다. 예를 들어서 극후반부엔가 열차의 운전석쯤에서 액션신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열차를 운전해야 함 + 근데 그 좁은 곳에서 총, 칼을 맞을 것 같은 긴박감이 잘 조합돼서 시너지가 난다. 이런 식으로 영화 내부에서 맨몸액션을 하는 것도 지형지물을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게다가 이것 때문에 막 벽에 부딪힌다거나 하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 그리고 인물들끼리 숨는 것도 한계가 있다. 어차피 직선 쭉 돌아다니면 보이는 게 승객들 얼굴인지라 어디 숨고 이런 묘사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렇게 '좁다'라는 특징에서 오는 큼지막한 요소들을 잘 살린다. 또 공간이 좁고 따닥따닥 붙어 있으면 소리 전파가 잘 된다. 막 멀리 있고 이러면 소리가 잘 안 들리지 않나? 또 일반 대중들이 출퇴근하며 오고 가는 지하철의 특성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면 의심 사기 쉽다. 이 덕에 총소리를 줄이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거나 주요 인물 암살을 가리려고 노력하는 등 초중반부까지는 영화의 강점이라고 볼 수 있게 잘 작동하는 편이다. 이 공간 활용은 반대 맥락에서도 작용한다. 지하철이 정차한다. 역에서 내린다. 그럼 그 하차하는 시간 동안 잠깐은 역에서 인물들이 대화할 수 있다. 이 넓은 공간에서 벌이는 액션신도 영화의 완급조절을 위해 잘 사용한 것 같다. 글쓴이 개인적으로는 좁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보다 넓은 곳에서 일어나는 액션이 더 기억에 남았다.
또 다른 강점으로는 코미디 타율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이런 미국식 B급 유머가 살짝 식상해지고 있는 것 같다. 근데 그건 영화를 많이 본 글쓴이(나) 같은 분들의 입장일 것이다. 다른 일반 대중들이 보기엔 이런 유머가 충분히 먹힐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전작인 <데드풀 2>에서 봤던 라이언 레이놀즈의 입담이 이 영화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일례로 애니메이션 <토마스와 친구들>을 활용한 유머 난 솔직히 좀 재미있었다. 내가 이런 실없는 농담 좋아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이 대사를 하는 캐릭터들이 그렇게 순수한 이야기를 하는 건 봐도 봐도 재미있다. 또 극 중에서 브래드 피트가 연기한 레이디버그의 대사를 듣고 중후반부쯤에 나를 제외한 다른 관객분들이 많이 웃는 걸 들었다. 이런 거 보면 코미디가 막 아예 재미없다고 말할 부분은 아닐 듯하다. 뭐 앞에서 쓴 부분 이외에도 'F' 단어가 많이 나오는 타란티노식 유머나 순간순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인물들의 행동은 충분히 재미있다. 이런 맛은 익숙한데도 웃길 땐 웃긴다.
말이 너무 많아
그러나 이 영화의 치명적인 단점 두 가지가 있다. 일단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주인공 레이디 버그부터 시작해서 극후 반부 장면까지 말이 너~무 많아서 러닝타임 내내 늘어진다. 레이디버그도 자기 운 없다는 거 좀 적당히 좀 하지 초중반부까지 내내 말한다. 그리고 레몬, 텐저린 뭐 그리 말이 많은지 서로 쓸데없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해서 이야기 전개가 느려진다는 느낌까지 받는다. 또 모든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기까지 해서 지나치게 친절한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례로 레몬, 텐저린 두 형제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레몬, 텐저린이 대화하는 내용 1/2를 쳐도 사실 아무 문제없을 것 같다. 또 두 형제 중 한 명이 레이디 버그와 액션신을 벌이는 장면이 있다. 예고에도 나오는 장면이기도 한데, 이 때도 왜 굳이 싸우는데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점이 든다. 아니 그런 식으로 대화할 거면 청부살인 업을 왜 해? 진짜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이 말 많아서 짜증 나는 지점은 극후 반부에서 다시 한번 나타난다. 엔딩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레이디 버그. 주절주절 말을 하는데 좀 영양가 없는 말이라서 몰입이 깨진다. 분명 중요하고 클라이맥스일 텐데 굳이? 싶은 것이다.
그리고 각본에 구멍이 있다. 이 부분을 전부 서술하기엔 살짝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대략적으로만 써보자면, 원작 소설을 읽어야 설명이 될 거라고 드는 지점이 있다. 일본에 있는 신칸센을 저렇게 관리한다고? 싶은 부분이다. 이에 대한 근거는 영화의 줄거리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총 쏘고 뱀 왔다 갔다 돌아다니고 주먹으로 때리고 창가 깨지고 불타는데 실질적인 열차 관리에 대한 대응이 많이 부족한 편이다. 물론 감독이 이에 대한 대응을 하긴 했다. 이와 관련해서 후반부에 어떤 인물이 대사를 하긴 하는데 그 한 줄로 이 모든 설정의 오류가 해결될지는 미지수다. 뭐 그렇다고 아예 개연성이 붕괴되는 영화는 아니다. 반대 측면에서 각본에서 딱딱 맞아떨어지게 설정한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왜 대타로 일을 하게 되었는가? 에 대한 부분이다. 또 어린 소녀의 개인 서사나 그 소녀와 함께하는 남자의 가족사까지 허술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을 타당한 전개로 잘 틀어막은 건 각본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 외의 설정 몇 군데를 장르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ㅋㅋ 이래도 되겠지?' 하며 소비한 부분은 좀 아쉽다. 충분히 킬러들 간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묘사했다면 이야기의 긴장감이 더 잘 나타났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방형 멋있어요
아무튼 뭐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지만 확실한 건 역시 브래드 피트는 멋있다. 이제 그의 얼굴에 주름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근데 이목구비를 따로따로 분리해서 보면 아직도 소년 같다. 그리고 액션 신도 깔끔하게 잘 소화한다. 굉장히 젊은 옷차림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이와 관련해서도 사람이 멋있으니 무리 없이 소화하는 연예인 아우라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 영화가 괜찮다고 느끼는 큰 이유 중 하나는 브래드 피트의 스타 성일엔 텐데, 이 지점은 감독이 십분 이해해 잘 활용했다고 생각한다.
브래드 피트가 아니더라도 레몬/텐저린 역을 맡은 두 배우의 코미디 연기와 중반부 갑자기 튀어나오는 암살자, 또 조이 킹이 연기한 어린 소녀 캐릭터도 캐릭터 설정과 생동감을 잘 부여했다고 생각한다. 심각하게 많은 말에도 코미디에서 안타와 홈런을 펼칠 수 있었던 이유는 뭐 이런 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후반부에 카메오 느낌으로 두 명이 나온다. 영화판에서 굉장히 알려진 슈퍼스타들이다. 그런데 우정출연 느낌으로 등장한 배우가 있다. 다른 영화에선 몰랐는데 이렇게 험한 조폭 포스도 잘 연기하는 것 같아서 신기했다. 약간 더 착하게 생긴 윌렘 더 포 느낌..
넷플릭스 오리지널 같다
이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오면서 느낀 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같다는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니다. 이 영화도 사실 마음 놓고 웃고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로서 충분하게 기능한다. 아니 액션 코미디 영화에 주인공이 싸움 잘하고 웃기면 장땡이지. 이 부분에서는 나름 괜찮은 평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영화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다. 극장에서 돈 주고 상영관에 맞게 그 시간에 들어가서 영화를 본다. 이때 뭐 재밌고 이런 거 다 좋은데 우리가 알고 있던 액션 영화들, 특히 넷플릭스 오리지널같이 뭔가 미국 중심주의적인 작품을 보기엔 살짝 아쉽다. OTT가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시대다. 이제 극장 가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러면 OTT 영화들과는 다르게 더 밀도 있는 영화를 만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질 못하니 넷플릭스로 봐도 충분한 느낌? 그냥 단순히 볼만한 영화 만들기엔 넷플릭스가 너무 잘 나가니 앞으로 영화 제작의 난이도가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든다. 뭐 나름 재미있었다고 생각하는 이 영화지만 솔직히 주변 사람들이 극장에서 뭐 보면 되냐고 물었을 때 이 작품을 거론하긴 좀 힘들 것 같다. <헌트>보라고 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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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지의 X가 파고드는 무수한 내면의 충동.
희망보다는 절규가 무수히 펼쳐지는 이 영화는 온통 공허한 소음으로 가득하다. 푸른 수염 이야기로 시작하는 소음투성이의 영화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통해 끊임없이 소리를 내고 흠집 가득한 잿빛의 건물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잿빛의 건물에서 핏빛 가득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공통의 특성을 가지는 이 사건을 파헤치던 다카베는 이 의문에 깊숙이 파고들며 누군가에 의한 살인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대면한다. cure(치료)라는 일념 하에서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극단적으로 ‘살인’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끔 만든다. 당신은 누구인지, 당신이 하고픈 이야기는 무엇인지, 아주 많이 사소하지만, 사람의 내면을 아주 깊고 면밀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걸까. 이름도 기억도 없는 그 남자는 집요하게 그 이상을 넘어 다카베에게도 끊임없이 질문을 내밀지만, 그 질문은 쉽사리 닿지 않는다. 마미야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솔직한 그의 속마음까지 새어 나오게 한다. “당신은 저놈들과 달라. 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잖아.” 다카베는 해결되지 않은 큰 사건에 빠져들면서도 안과 바깥을 구분하며 일정한 패턴을 만들어간다. 와이프가 빨래 없이 돌린 텅 빈 세탁기를 끄고 식탁에 놓인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사건이 없으면 마음 한구석이 텅 빌 것만 같은 그에게 진정한 편안함이 다가온다. 영원히 텅 빈 상태로 남아도 일시적 해방이 유일한 치료법이 된다. 하지만 그는 돌아갈 수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치유되지 않는 잘못된 방식을 전도사가 이용함으로써 이 망가진 세상의 망가진 치료제를 끊임없이 퍼뜨린다. 미지의 X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잠식하듯 무수한 공포를 가져다준다. 눈으로 보여주는 공포보다는 빠져들듯 관객을 장악하는 이 영화는 빛보다는 어둠에 너무나도 쉽게 스며드는 사회를 비추고 있다. 금방 찍은 듯한 느낌으로 특유의 서늘하고 정적인 분위기가 배우들과 영화 전반의 이야기를 극대화한다. 구름 같은 분위기는 금방 사라지고 스산함만이 존재한다. 끝끝내 사라지지 않은 치료법이 다시 다른 이에게 손을 뻗치며 또 다른 순간을 만들어내어 결국 스며들 수밖에 없는 마지막을 장식하며 모두의 목을 조여 온다. 찰칵-뚝뚝-치 이익,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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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자의 복수는 수백 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침술사 ‘천경수(류준열)’는 어의 ‘이형익(최무성)’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후 궁에 들어간다. 빛이 있을 때는 눈이 안 보이고 빛이 없으면 살짝 눈이 보이는 주맹증을 앓던 경수는 자신만의 비밀을 영리하게 활용해 조금씩 궁중 생활에 적응해나간다. 그 무렵,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소현세자(김성철)’가 8년 만에 귀국하고, 경수는 소현세자의 치료를 맡아 그와 친분을 쌓는다. 어느 날 밤, 경수는 우연히 소현세자가 독살당하는 현장을 목격한 후 그 진실을 알릴지 말지 고민에 빠진다. 한편, 마치 청 황제의 대리인 같은 아들을 보며 불안감에 휩싸였던 ‘인조(유해진)’는 세자의 죽음 이후 광기에 빠지고, 경수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관련된 인물들의 민낯을 하나둘 보기 시작한다.
역사적 사건을 영상화한 한국의 많은 사극 영화에서는 한 가지 공통적인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일반 백성이지만 특출 난 재주를 가진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로 궁중 생활에 엮이게 되고, 왕과 같은 실존 인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을 목격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맡으며 실존 인물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재해석을 유도한다. 혹은 이제는 바꿀 수 없는 역사적 사실에 관해 판단 혹은 평가한다.
<광해>가 대표적이다. 광해군을 똑 닮은 광대가 잠시나마 왕을 대리한다는 내용의 이 사극은 조선 최대 굴욕인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담긴 작품이다. 또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시도는 아니지만, 폭군으로 여겨진 광해군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관상>도 마찬가지다. 관상가의 눈을 통해 계유정난으로 인해 부당하게 폐위당하고 죽은 단종을 복권하고 권력욕에 가득 차 있던 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안태진 감독의 장편 상업영화 데뷔작 <올빼미>도 다르지 않다. 감독이 직접 “역사적 개연성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소개한 <올빼미>는 소현세자의 의문사 미스터리를 스크린 위로 옮겼다. 인조실록 23년 6월 27일의 기록을 보면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대목은 소현세자가 죽은 후 소현세자의 가족을 모두 숙청한 인조의 행적과 맞물려 의구심을 자아낸다.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개혁을 이루고자 한 소현세자와 인조는 청에 대한 입장 등 정치적 지향점이 전혀 달랐다. 그러니 그가 아들을 독살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사는 것도 자연스럽다.
물론 소현세자의 죽음은 아직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병사라는 주장과 독살이라는 주장 모두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죽음이 조선 후기의 분기점이 되었다는 시각이 존재하기에 그의 의문사는 언제나 흥미를 유발한다. 기록상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볼모 생활을 하는 동안 청에 끌려간 조선 백성을 구하기도 했고, 천주교 신부를 만나 역법을 배우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다 보니 만약 그가 왕이 되었다면 조선이 실제 역사와는 달리 근대 국가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이 자연히 자극될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올빼미>는 조선의 늦은 근대화에 대한 안타까움, 소현세자에 대한 동정심,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초래한 뒤 변화의 가능성마저 끊어버린 인조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동시다발적으로 표출된 영화인 셈이다. 즉, 수백 년이 지나서야 후대의 상상력과 평가를 통해 이루어진 일종의 복수극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올빼미>는 단지 안타까움과 책망으로만 가득한 영화가 아니기에 더 흥미롭다. 사실 특정 역사적 사건을 팩션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나갈 때는 필연적으로 감독이나 작가의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특히 사건을 재현하기 위해 활용된 허구의 소재에 주목하면 감독과 작가가 어떤 가치나 메시지를 역사에 투영하고자 했는지가 쉽게 드러나기도 한다. 사극을 비롯한 역사적 재현은 과거의 역사에 대한 정보를 얻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능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테마 모리스 스즈키도 역사적 사건의 재현에는 "한순간도 빠짐없이 해석과 동일화 사이에 내재한 밀접한 긴장관계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주인공 경수가 완전한 장님이 아니라 하루의 절반은 볼 줄 아는 주맹증 환자인 점이 사뭇 의미심장하다. 주로 백내장 초기 증상인 주맹증은 각막과 함께 빛을 굴절시켜 사물을 보게 하는 안구의 수정체가 혼탁해지면서 나타나며, 주맹증 환자는 시야가 뿌옇게 보이면서 빛이 충분해도 주변을 잘 볼 수 없다. <올빼미>는 이러한 주맹증 증상을 단순한 신체적 질환이 아니라 삶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한다. 일례로 영화에서는 '본 것도 못 본 척하며 살고, 들은 것도 못 들은 척하며 살아라'와 같은 뉘앙스의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무슨 일이 벌어졌든 간에 모르는 척하고 사는 게 이로울 거라는 말이다. 설령 경수가 어의인 이형익이 비밀리에 지령받아 누군가를 독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경수는 맹인이라는 거짓 이유를 내세워 자신이 본 모든 진실을 외면한다. 하루의 반절은 진실을 볼 줄 알았음에도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소시민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스스로 눈을 감는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는 숨겨왔던 진실을 목놓아 외치지만, 경수는 끝내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소현세자의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 자신과 남다른 친분을 쌓은 원손도 지키지 못한다. 반면에 작중 폐위될 위기였던 인조와 자칫하면 역적이 될 뻔했던 '최대감(조성하)'은 눈을 감아버린 경수의 선택 덕분에 진실을 은폐하고 각자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는 데 성공한다.
그러다 보니 작중 반복되는 대사들은 단순히 경수를 향한 말 그 이상의 의미처럼 들린다. 역사를 통해 현실적인,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한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장님이 될지, 아니면 서슬 퍼런 권력의 감시에도 굴하지 않고 밤중에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살 것인지 묻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주맹증이 실명으로 이어질 수 있듯이, 시민들이 눈을 뜨고 권력자와 기득권을 견제하지 않으면 눈을 잃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경고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희망의 끈도 놓지 않는다. 인조의 처형 명령에도 불구하고 경수가 살아남는 것, 죽기 직전의 인조와 재회하여 복수에 성공하는 장면을 통해 눈을 감지 않는 삶의 태도가 갖는 힘을 보여준다. 영화적 상상력 덕분에 가능한, 수백 년이 지난 복수가 특히 뜻깊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영화의 메시지는 주맹증이라는 소재를 밀고 나가는 힘이 굉장히 좋아서 더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일단 밤에만 눈이 보이는 주맹증이라는 증상을 제목이기도 한 '올빼미'로 연결한 착상 자체가 갖는 흡입력이 인상적이다. 경수와 인조를 올빼미에 비유한 결과 자세한 설명 없이도 영화 전체의 구도나 이야기의 구조가 직관적으로 이해되고, 영화 자체의 몰입도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일단 밤에 시력이 더 좋아지기는 경수가 올빼미에 비유되는 건 자연스럽다. 올빼미는 야간 시력이 가장 좋고 야행성이라는 점 때문에 '밤샘'을 의미하는 비유적 의미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영어 표현 중에도 밤늦게까지 깨어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night owl"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영화는 주인공이 올빼미라는 점을 장르적으로 영리하게 활용해 긴장감을 높이고 색다른 재미를 준다. 소현세자가 독살당하는 상황을 경수가 예상치 못하게 목격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는 유쾌한 분위기였던 초반부에서 본격적인 스릴러가 펼쳐지는 중후반부로 넘어가는 분기점으로 활용되기에 더욱더 인상적이다. 또 올빼미인 경수가 진짜 맹인인지 아닌지를 의심하는 이형익과의 대화 장면도 손 떨릴 정도로 박진감 넘친다. 해가 뜨거나 실내의 촛불이 켜지거나 꺼지는 등 광원의 등장과 퇴장을 기점으로 극의 분위기를 갑작스레 전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가며 감정선을 고조시키는 도구이기도 하다. 아버지처럼 독살당할 위기였던 원손을 치료하기 위해 달려가는 경수는 창덕궁 인정전의 문턱을 넘는 순간 갑자기 뜬 해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갈 길도 알지 못한다. 장애가 있는 경수와 원손이 부모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친밀해진 것을 생각하면, 원손을 구하지 못하는 비극의 슬픔과 절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한편 올빼미는 인조를 뜻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 올빼미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어 기피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올빼미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로 알려졌다. 또 밤에 올빼미가 자주 울면 마을이나 집에 전염병이 돌거나 사람이 죽거나 전쟁이나 흉년이 든다는 미신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올빼미가 암살자나 살인자를 상징하기까지 했다. 이는 올빼미 효(梟)가 붙은 단어가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삼국지의 조조처럼 능력은 있어도 인성을 갖추지 못한 인물들을 효웅(梟雄)이라고 불렀던 게 대표적이다. 그러니 아들인 소현세자를 암살하고, 며느리인 강빈과 손자인 원손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 위해 숙청하며, 밤마다 음모를 꾸미기에 바쁜 인조를 올빼미에 비유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이처럼 올빼미에 담긴 상이한 정체성 덕분에 경수와 인조가 독대하거나 대면하는 장면들은 상당히 강렬하다. 같은 올빼미이지만 둘이 얼마나 다른 인물인지 그 대비가 매우 명백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또 창덕궁 정전에서 두 주인공이 마주하는 클라이맥스가 아침인 이유이기도 하다. 경수는 야행성이라서 아침이 오면 눈이 보이지 않는다. 인조는 충과 효를 숭상하는 성리학의 나라에서 효를 무시해 정당성을 잃어버린 군주다. 두 올빼미는 자신이 가장 약해지고 모든 치부가 드러나는 아침이 되자 마침내 서로의 모든 속내를 털어놓고 마주한다.
다만 <올빼미>의 완성도에는 몇몇 단점이 있다. 주맹증에 걸린 침술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펼치는 디테일은 좋지만, 전반적인 구성이 앞서 언급했던 <광해>나 <관상>과 유사하다는 문제가 있다. 좋게 말하면 영화가 익숙하고, 나쁘게 말하면 뻔하다. 또 소현세자와 원손 부자가 경수와 친밀해지는 과정이 다소 짧게 묘사되다 보니 경수가 사실상 역모에 가담하는 전개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영화가 생각보다 빠르게 스릴러 쪽으로 나아가다 보니 기대와 다른 전개 때문에 어색해지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은 <올빼미>의 특출 난 장점 덕분에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건을 풀어내는 방식과 사용한 소재, 그리고 해당 사건을 통해 어떤 현실을 비출지 영리하게 선택한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특히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걸 고려하면 충분히 인상적이고, 성공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단지 현재 극장가에 워낙 관객이 적은 관계로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갈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A(Acceptable, 무난함)
수백 년 만에 스크린 위로 펼쳐진 군자의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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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함을 찾아 도착한 곳은 평범함이었다
영화 <노웨어 스페셜> 사은품으로 두루마리 휴지를 주길래 얼마나 슬프길래 이걸 줄까 했는데 정말 눈물이 도르륵 주르륵 좌라락 흐른 작품이었다. 입양과 죽음이라는 소재이기에 당연히 슬플 걸 알긴 했지만 극 중 배우들의 절제된 감정표현 때문인지 되려 관객이 내가 감정을 폭발시키고 나오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노웨어 스페셜> 시놉시스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은 창문 청소부 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바로 네 살짜리 아들 마이클에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주는 것. 세상에 혼자 남을 아이를 위해 존은 특별한 부모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아직 어리지만, 말도 잘 듣고 예절도 잘 지켜요. 내 아이를 키워줄, 새 부모를 찾습니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노웨어 스페셜>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창의 경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
존은 창문청소부로 일하며 돈을 번다. 이 창문의 경계가 영화 속에서는 굉장히 유의미하게 등장한다. 창문을 깨끗하게 닦을수록 안이 훤히 보이고 그 집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지만 정작 존은 그 집 안으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그 장벽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주고 있었다. 특히 존이 창문을 닦는 집들을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집들이다 보니 아이의 온전한 방, 가득찬 장난감을 바라볼 수밖에 할 수 없는 존의 상황과 입장이 너무나도 잘 드러나는 직업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꼭 자신의 아들만큼을 이렇게 유복한 가정으로 입양을 보내고 싶어하는 존의 결심이 왜 들었는지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들을 위한 특별한 곳? 과연 좋은 것일까?
존은 특별한 경우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고 죽기 전 반드시 아들을 다른 집으로 입양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기에 사회복지사들도 존에 경우에는 특별히 다루고 있었다. 그래서 사회복지사와 함께 위탁가정을 계속해서 둘러본다. 인터뷰도 하고 대화도 나누면서 집안의 분위기와 가정 환경을 살핀다. 존과 인터뷰를 본 가정은 교육에 열을 올리는 부모, 본인들의 권위를 지켜려는 부모, 본인들의 선함을 증명하려는 부모,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는 부모, 다양한 가족을 만난다.
이 과정에서 초반 존은 자신의 아들 마이클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자라길 바랐지만 점차 위탁가정들을 둘러보면서 어떤 가족이 마이클에게 특별한 가족이 되어줄 수 있을까 보다 마이클에게 관심과 사랑을 줄 수 있는 가족을 누구일까로 생각이 바뀌게 된다. 모두가 자신이 마이클에게 잘 해줄 수 있는 장점과 강점들을 자랑하는 가족과 달리 한부모 가정이지만 유일하게 존의 환경과 마이클이 좋아하는 것을 물어보고 직접 함께 놀아줬던 엄마를 선택한다. 이 선택이 왜 영화 제목이 노웨어 스페셜 인지 잘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
존은 마이클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이클은 눈치를 채고 있었던 듯 싶다. 34살의 아빠 생일에 굳이 초 한 개를 더 주며 1년을 더 함께 살자고 표현을 하는 것 같아서 정말 눈물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존은 마이클에게 죽음에 대한 동화책과 소재에 대해 알려주기 꺼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사회복지사와의 기나긴 대화를 통해 마이클이 자신을 기억할 수 있게끔 기억 상자를 만들면서 스스로 죽음을 차분히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이클에게 죽음에 대한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죽음을 슬픈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언제나 아빠는 공기 속에서 마이클 곁에 있을거라는 말을 하는데 세상에 이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정말 얼마나 애달플까 하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오래간만에 영화관에서 펑펑 울다 나온 영화 <노웨어 스페셜>. 특별함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그 특별함은 사랑과 관심으로 보듬어 안아 줄 수 있는 평범함이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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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토어웨이>
[2021년 4월 22일 넷플릭스 공개]
3인의 승무원을 싣고 화성을 향해 떠난 우주선.
우연히 그곳에 탑승한 불청객 때문에 생명 유지 장치가 심각한 손상을 입는다.
자원은 점점 떨어져 가고, 이제 치명적인 결과만이 기다리고 있다.
힘겨운 선택 앞에, 그들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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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챠 <오퍼 : 대부 비하인드 스토리> 메인 예고편
우아하게 탄생한 걸작은 없다!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에 숨겨진 최악의 비하인드! 한 편의 영화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이들의 이야기. 왓챠 익스클루시브 ⟨오퍼 : 대부 비하인드 스토리⟩ 12월 28일 왓챠 독점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