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0-06 11:48:16
[BIFF 데일리] 노동계급 소시민에게 구원의 모습은 어떠한가
영화 〈키케가 홈런을 칠 거야〉 리뷰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Kike Will Hit a Home Run
한국영화의 오늘: 비전
Korea/2024/97min
*시놉시스
영태와 미주는 작지만 아담한 월셋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서 기분이 좋다. 그런데 식당을 같이 운영하기로 했던 영태의 동업자 선배가 갑자기 약속을 깨뜨린다. 영태는 돈을 벌기 위해 집을 떠나고 미주가 혼자 남는다. 미주는 영태를 기다리며 자신도 열심히 살아간다.
박송열 감독의 전작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엔딩신에서 받은 충격은 여전히 생생하다. 노동계급 소시민 남자는 응당 분노해야 할 사건에 항의하기 위해 누군가를 찾아가지만, 화를 표출하는 대신 분을 삭인 후 돌아선다. 이 장면의 정서는 패배감, 울분이라기보다는 구원이다. 노동계급 소시민의 삶을 지속 가능케 하는, 기묘한 낙관의 느낌을 전하는 체념으로서의 구원 말이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는 거창하고 영웅적인 행위로서의 구원과는 거리가 먼 박송열표 구원론의 인상적인 각인이었다.
〈키케가 홈런을 칠 거야〉는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의 다음 이야기라 할 만하다. 등장인물이 같은 것뿐 아니라 주제 의식과 메시지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영태, 미주 부부는 여전히 퍽퍽한 생활을 하는 중이지만 이전보다 아주 조금 상황이 나아진 듯도 하다. 새로 들어간 월세집은 이전에 살던 집보다 더 나아 보이는, 임신을 계획 중인 두 사람이 터전을 닦기에 퍽 적절한 공간이다. 두 사람은 이 공간에서 만들어나갈 미래의 가능성에 들뜬다. 그러나 이러한 소박한 기대조차 늘 배반당하는 것이야말로 노동계급 소시민 삶의 특징이다. 영태는 동업을 하자는 선배와의 일이 틀어진 후 돈을 벌기 위해 떠나고,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더는 수업을 할 수 없게 된 미주 역시 여러 임시직을 전전하며 돈을 모으기 위해 분투한다. 전작에 이어 소시민적 고난과 애환이 펼쳐진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들이 마주한 고난의 스케일의 크기를 ‘축소’한다. 몇 년 전에 빌려준 50만 원, 300만 원이 필요한 동생, 미주에게 3만 원을 요구하는 영태……. 연일 부동산 가격을 두고 쏟아지는 뉴스에 비하면 주인공들이 울고 웃는 화폐의 단위는 지극히 ‘초라’하다. 이렇게 적은 금액에도 삶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영화적 환기는 모두가 공유하는 경제적 상승 욕망이 비가시화한 실재하는 삶의 양태를 드러내며 환상과 현실의 거리를 좁힌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비연속적인 장면, 독특한 리듬의 대사와 연출이 연달아 이어지는데도 박송열의 영화가 지독히 현실적인 감각을 일깨우는 이유다.
노동계급 소시민은 작디작은 체념을 체화하는 일상을 산다. 영화는 그 원인이 자본주의라고 말한다. 자본주의 체제하의 적대적 계급 현실이 영태와 미주가 겪는 고난의 원인이라는 점이 전작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노동계급 소시민을 위한 정치적 요구가 직접 드러나는 장면 등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영태와 미주가 겪어야 할 고난이 커진 만큼 영화의 유머도 더한층 능청스러워졌다. 이것이야말로 박송열 감독 영화의 특이점이다. 일상적 고난은 이어지고 영태와 미주의 현실은 점점 꼬여만 가지만 두 사람은 결코 비통함, 원통함, 격렬한 울분을 표하지 않는다. 언제나 있어온 일이라는 듯 가벼이 체념한 후 바로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하며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노동계급 소시민이 격렬한 감정으로 적극적으로 모색할 변혁은 도래할 국면이다. 하지만 그런 감정 상태로 일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체념하고 포기하고 한숨 쉬면서도 일상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삶의 양식(樣式)이 필요하다. 박송열이 자기만의 개성으로 포착하고 벼려낸 영화 속 이미지는 모두 이곳을 향한다.
박송열의 영화에는 노동계급 소시민의 삶이 어떻게든 이어질 것이고, 근근이 이어지는 그들의 삶이 대체로 비관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결코 그에 완전히 잠식당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묘한 낙관이 깃들어 있다. 부동산 투자업에 실패한 영태와 유산한 미주에게 홈런의 순간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심지어 섹스 시도에서조차 격렬함을 소거한 채 느긋이 서로의 몸을 포개는 엔딩 장면은 두 사람에게 홈런이 ‘대박’이나 ‘인생 역전’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태도 그 자체일 수 있음을 환기한다. 우리는 이를 구원에 대한 소시민적 감각이라 부를 수 있을 터다. 모두가 고개를 꺾어 ‘위’만 바라보며 자기가 발 디딘 ‘아래’를 보지 못하는 지금, 박송열이 견지하는 노동계급 소시민의 일상적 구원의 태도는 무척이나 귀하다. 그리고 긴요하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노동계급 소시민의 삶을 다루는 박송열의 작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그가 아키 카우리스카미의 스타일과 주제를 한국에서 계속 펼쳐내기를 강력히 희망한다.
*영화 매체 〈씨네랩〉 초청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참석 후 작성한 글입니다.
*영화 상영시간
10-05/20:0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3관
10-06/20:00/영화진흥위원회 표준시사실
10-09/16:30/롯데시네마 센텀시티 6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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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_#3] 철학과 영화 사이 (with. 정태완 감독)
🎙️ Episode 3. 촬영감독 정태완 00:00 자기소개 06:27 철학과 이야기 14:59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 18:18 [날 좋은 날]이야기 19:47 홍상수 감독을 오마주한 [날 좋은 날] 23:20 다시 [날 좋은 날] 이야기 28:13 ‘공감’에 관한 이야기 34:11 영화를 계속해서 연출하지 못한 이유 36:50 종교에 관하여 41:59 촬영 감독으로서의 정태완 43:11 [풀 메탈 브레인] 이야기 & XR 이야기1 45:22 [풀 메탈 브레인]의 연출적인 이야기 47:23 한예종과 XR 이야기2 53:09 앞으로 계획 57:18 마무리 & 쑥스러움에 관한 이야기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는 단편 영화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입니다.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영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 정태완 📍instagram @xowanc 📍사이트 https://j30n9.myportfolio.com/work ◾️ 따옴표 필름 📍 instagram @ddaompyo.film 📍 YouTube @ddaompyofilm 📍 ddaompyofil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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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드림 스캐너> 메인 예고편
경계를 넘는 순간,
악몽은 현실이 된다!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세라'
숙면에 대한 희망으로 대학 수면 임상시험에 참여하지만,
악몽 속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그녀를 괴롭힌다.
숙면을 미끼로 비밀리에 자신의 꿈을 스캔한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녀 역시 꿈속 그림자를 밝혀내기 위해 실험은 계속된다.
꿈속 검은 그림자의 실체에 다가가게 되자
그림자는 꿈이 아닌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과연 꿈속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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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정이> 공식 티저 예고편
2023년 1월 20일, 곧 공개 예정. 크로노이드사의 야심작 AI 전투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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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조 로코퀸의 소소한 귀환
가수, 배우, 사업가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멀티 엔터테이너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히스패닉 셀레브리티 중 한 사람인 제니퍼 로페즈의 2023년 신작 영화 샷건 웨딩을 관람하고 왔습니다. 하나의 장르에 특화되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성적으로 따지자면 ‘웨딩플래너’, ‘러브 인 맨하탄’, ‘퍼펙트 웨딩’ 등과 같은 상당수 로맨틱 코미디의 주연을 맡아 흥행과 대중의 사랑을 이끌었던 배우죠. 작년 ‘메리 미’도 그러했는데,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맛깔나는 로코로 돌아왔습니다. 정말 웃기다곤 할 수 없지만, 봄맞이 가벼운 로코물을 찾으신다면 딱 알맞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참고로, ‘데드풀’ 캐릭터로 최고의 만담꾼으로 자리 잡은 라이언 레이놀즈가 제작에 참여했고, ‘피치 퍼펙트’의 제이슨 무어 감독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뭔가 예감이 안 좋아”
‘달시’(제니퍼 로페즈)와 ‘톰’(조쉬 더하멜)의 결혼식 당일,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에 참석할 모두가 섬에 모인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이던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해적으로 인해 결혼식장의 모두가 인질이 되고, ‘달시’와 ‘톰’은 무사히 혼인서약을 마치기 위해 목숨을 건 버진 로드를 걷게 되는데...
예고편│Trailer
원제: Shotgun Wedding│감독: 제이슨 무어│각본: 마크 해머
출연진: 제니퍼 로페즈, 조쉬 더하멜, 제니퍼 쿨리지, 소냐 브라가 외 多
장르: 액션, 코미디,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100분
국가: 미국│등급: 15세 관람가
수입: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조이앤시네마│배급: 와이드 릴리즈(주),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평점: 평론가 4.0, 로튼토마토 신선도 45% 팝콘 51%, IMDB 5.4, 메타 스코어 46점
개봉일: 2023년 3월 29일
“로코의 정석”
서로 다른 온도 차의 메리지 블루를 겪는 신부 달시와 신랑 톰이 결혼식 당일, 예식장을 습격한 해적들로 인해 엉망이 된 자신들의 결혼식을 수습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혼인서약을 무사히 마치려는 고군분투를 담은 코믹 액션입니다. 축하하러 온 하객들이 모두 인질이 되면서 두 남녀는 소중한 사람들도 지키고, 자신들의 결혼식도 지켜야 하는 목숨을 건 특별한 버진 로드를 걷게 되죠. 포스터부터 액션을 기대하게 하지만, 실상은 달콤한 로맨스와 미국식 생활 유머가 섞이고 가끔 화끈한 액션을 보여주는 하나로 형언할 수 없는 종합적 장르 되겠습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액션, 재치만점의 유머가 고전적인 형태를 취하지만, 제니퍼 로페즈의 팬이라면 그녀의 원맨쇼에도 충분히 만족하실 듯합니다.
또한, 드라마 ‘화이트 로투스’에서 좋은 연기를 펼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배우 제니퍼 쿨리지가 톰의 엄마 캐롤로 등장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며, 지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합니다.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그녀와 달시의 엄마 레나타의 소냐 브라가가 없었다면 아주 심심할 뻔했죠. 단지 미국식 개그가 국내 관객에게 잘 먹힐지는 의문이 들고, 전체적으로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예상 가능한 범위 내의 올드한 연출이라는 점에서 요즘이 아닌 옛날 영화를 보는 기분에 상당히 호불호가 생길 수밖에 없을 합니다. 그래도 제니퍼 로페즈, 조쉬 더하멜의 케미는 장르적 즐거움을 잘 채워주고 있어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찾으셨다면 딱 알맞은 재미를 줄 것입니다. 자기 색깔을 잘 아는 배우의 연기만큼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드무니까요. :)
ps. 53살임에도 불구하고 로페즈 언니 근육이..관리를 얼마나 하시는건지 -0-
한 줄 평 : 원조 로코퀸의 웨딩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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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데렐라를 꿈꿨던 또 다른 아노라에게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웃음과 슬픔이 뒤섞인 신데렐라 스토리
- 아노라와 이반 사이의 간격을 보여주는 장면들
- 계단과 엘리베이터의 의미
-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은 대 환장 공방전
- 엔딩 결말 해석
아노라 (Anora, 2024)
신데렐라를 꿈꿨던 또 다른 아노라에게
개봉일 : 2024.11.06.
관람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드라마, 코미디,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 139분
감독 : 션 베이커
출연 : 미키 매드슨, 마크 아이델슈테인, 유리 보리소프, 카렌 카라굴리안, 바체 토브마시얀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아노라>는 진정한 사랑과 부를 꿈꿨던 여성 아노라의 이야기다. 아노라는 돈을 받고 잠깐의 사랑과 육체를 파는 성 노동자(스트리퍼)다. 그는 진심은 없지만 친절함은 가득한 말투와 아름다운 미모로 가게에 찾아온 남자 손님들을 홀려 돈을 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저분하고 천한 일이라 생각하는 직업이지만 아노라는 아무 불평 없이 그저 묵묵히 일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에 러시아어가 가능한 스트리퍼를 찾는 부자 손님이 나타나고 아노라는 사장의 손에 이끌려 테이블로 향한다. 이번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기대보다 그냥 또 일이 생겼구나-싶은 딱딱한 마음으로 향한 한 테이블. 아노라는 그 테이블에서 지금껏 만난 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남자 이반을 만난다.
아노라에게 이반은 특별한 남자였다. 보통의 부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의 재력은 기본이고 아노라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첫 시작은 손님과 구매자였지만 이반은 아노라에게 쉴 틈 없이 사랑을 속삭이고 돈 한 푼 없어도 너랑 함께하면 행복할 것 같다는 프러포즈와 함께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선물한다.
이반의 프러포즈 이후 마음을 활짝 열게 된 아노라는 한순간에 밀려온 거대한 행복을 만끽한다. 그리고 이반을 진정한 사랑이자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신분 상승 엘리베이터라 믿으며 온 마음을 다해 그를 붙잡는다.
하지만 아들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이반의 부모님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 하수인 3인방을 급파하고 이들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얼마 못가 위기를 맞이한다. 아노라는 그런 와중에도 우리의 사랑을 믿고 기대하지만 이반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아노라는 하수인 3인방과 시끄러운 공방전을 벌인다.
웃음과 슬픔이 뒤섞인 신데렐라 스토리
열심히 살아도 신데렐라는 될 수 없다고, 사랑을 믿어도 그것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주진 않는다고. 그저 나를 알고 나답게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아노라>는 말한다. 이제 ‘누구나 행복한 신데렐라가 될 순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나이인데, 그럼에도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는 매번 내 가슴을 신랄하게 들쑤신다.
그래도 <아노라>가 좋았던 건 ‘나를 알고 나답게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을 마냥 나쁘게 하고 있진 않다는 점이다. 아노라는 언제나 최대한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고 적어도 한 명쯤은 그런 아노라를 존중한다. 션 베이커 감독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그 한 명의 호의적인 시선으로 아노라를 바라보고 영화는 그것을 고스란히 담아내 스크린 밖에 있는 또 다른 아노라에게 전달한다. 그래서인지 <아노라>를 보다 보면 자연히 아노라의 인생을 응원하게 된다. 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아노라가 꼭 대단한 신데렐라가 되진 못해도 그가 진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면서.
션 베이커 감독의 성 노동자 지지 발언, 적나라하게 표현되는 성매매 행위, 여성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압박 등 누군가에겐 불편함을 줄만한 표현과 장면들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불편함보다 더 큰 웃음과 슬픔이 있다는 점에서, 나는 <아노라>가 좋았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노라와 이반 사이의 간격
두 사람의 계층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들
아노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하는 성 노동자(심지어 이반의 어머니 갈리나는 창녀라며 대놓고 욕한다), 이반은 웬만한 부자들도 접근하기 어려운 재벌 집 아들이다. 아노라와 이반은 거의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계층에 위치해있다. 아노라가 처음 이반의 집에 방문했던 날, 그는 두꺼운 철문 두 개와 그곳을 지키는 경비원, 커다란 현관문을 통과해 겨우 이반을 만난다. 아노라가 이반 같은 사람에게 닿으려면 이토록 두껍고 높은 관문들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심지어 그 관문들은 아노라가 자력으로 통과하는 건 불가능하고 건너편에서 누군가 열어줘야만 통과할 수 있다.
여차저차 이반의 호의를 받으며 들어온 집안. 다음 관문은 침실로 가는 긴 계단이다. 이반은 익숙한 듯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 2층 침실로 올라가고 불편한 신발을 신은 아노라는 이반보다 느린 속도로 어렵게 계단을 오른다. 이때 이반은 "아, 기다려줄게.”라고 말하며 잠시 아노라를 배려해 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2층에 도착한 이반과 아노라는 함께 침대에 누워 대화를 나눈다. 아노라는 이반이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이런 부를 누리는지 궁금하다. 아노라가 직업을 묻자 장난을 치던 이반은 “니콜라이 자카로프 아들이야.”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아노라는 몸을 갈아서 돈을 버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아왔기에 이반에게 직업을 물어봤는데, 이반은 ‘누구의 아들’인 것만으로도 이런 걸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삶을 살아왔기에 그저 ‘니콜라이 자카로프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소개를 끝내는 이 상황이 참 우습고 슬프다.
아무튼 니콜라이 자카로프? 아노라는 그를 모른다. 사는 세계가 다르고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언제 재벌 이름을 외우고 앉아있겠나. 이반은 구글에 검색하면 나온다며 철자도 알려주겠다고 한다. 이반의 이런 모습(+계단에서 기다려주기)은 얼핏 사랑과 친절함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 우위를 점한 자의 여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올라갈 땐 긴 계단, 내려올 땐 엘리베이터
익숙해질 때쯤 끝나버린 행복
이반은 아노라에게 프러포즈할 때 “너와 결혼하면 돈 한 푼 없어도 행복할 것 같아.” 라고 말한다. 돈 한 푼 없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아노라에게 이런 말을 하니 감미롭다기보단 우습다. 그런데 아노라는 여기에 그대로 넘어가버린다. 무시하기엔 이반이 주는 행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아노라가 사는 집은 지하철의 소음과 진동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늘진 공동주택이고 현관엔 오르기 귀찮은 계단이 있다. 그가 일하는 곳은 창문 하나 없고 소음과 어두운 조명으로 가득하다. 이에 반해 사람보다 큰 통창으로 이루어진 이반의 집은 햇빛이 잔뜩 들어오고 그 넓은 공간엔 좋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운전기사가 대신 짐을 들어 운반해 주고, 또 고용인들이 청소도 대신해 준다. 이 외에도 입이 떡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삶이라니.
아노라는 처음엔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반의 품에 안겨서도 청소해 주는 고용인들을 곁눈질로 쳐다보고 카지노에서도 이반 일행에게 잘 어울리지 못하는 어색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반의 사랑을 믿고 혼인신고를 한 후엔 일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이반의 집에 들어와 모든 걸 누리며 살기 시작한다. 아노라는 점점 자신이 신데렐라가 된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신혼여행은 디즈니랜드, 공주방 리조트가 좋을까?” 고민하며 달달한 신혼생활을 기대한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현실이 들이닥치고 이반의 도주와 결혼 무효화까지 순식간에 착착 진행된다. 베가스에서 시작된 아노라의 꿈은 베가스에서 끝을 맺는다. 호화로운 전용기를 타고 베가스로 향한 이반의 아내 애니는 아노라가 되어 아이 울음소리로 가득 찬 좁은 이코노미 석에 다시 몸을 싣는다.
모든 일이 끝나고 이고르와 하루를 보낸 후 아노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침실에서 내려온다. 계단으로 침실에 올라가는 건, 이반과 부부가 되는 건 (이별보다 비교적) 오래 걸렸는데. 침실에서 내려오는 건, 이반과 남이 되어 현실로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다.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다. 반야의 아내 애니가 아닌 아노라는 신데렐라가 되지도, 디즈니랜드에도 가지 못한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가득한 공방전
이 결혼에 대해 이반은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 그에게 아노라와의 결혼은 잠깐의 일탈, 그가 즐겨 하던 콘솔 게임 한 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반은 즐거운 미국 여행을 위해 돈을 주고 스트리퍼 아노라를 구매해 잠깐 ‘반야’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됐고, 이제 그것을 버려야 될 때가 왔음을 알고 순순히 결혼 무효화에 동참한다. 그래서 아노라와 어머니가 뭐라고 말하든 이반은 할 말이, 꼭 해야 할 말이 없다. 아노라와의 결혼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고 바꾸려고 노력할 만큼의 가치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노라는 할 말이 참 많다. 그는 이 결혼에 모든 걸 걸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곁가지로 매달린 하수인 토로스, 가닉, 이고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생계, 인생을 위해 꼭 결혼 무효화에 성공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할 말이 많다.
우리는 진짜 사랑한다고, 우리는 꼭 이걸 무효화 시켜야 한다고, 나 이 일하다가 뇌진탕 온 것 같다고. 한바탕 몸싸움이 일어난 이반의 집 거실에서 아노라, 토로스, 가닉의 온갖 말들이 뒤섞이며 대 환장 그 자체인 상황이 벌어진다. 다들 가진 건 없는데 할 말은 참 많다. 이 영화는 그 모든 말들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다 들려준다.
이런 면에서 <아노라>는 성 노동자를 위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모든 노동자를 위한 영화이기도 한 것 같다. 생계를 위해 군말 없이 일을 하는 아노라처럼, 이반을 찾기 위해 캔디 샵을 부수고 견인차에 걸린 차에서 엑셀을 밟는 토로스 일행처럼 그저 생계와 고용인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그런 이들. 영화는 이들의 마음속에 들어있을만한 온갖 불평과 짜증들을 아노라와 하수인들의 입을 통해 한 공간에 풀어놓는다. 이게 정말 우습고 골 때리기도 하고.. 한편으론 공감되고 슬프기도 하다.
내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
결말 엔딩 해석
결혼 무효화가 끝난 후 아노라와 이고르는 이반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이고르는 아노라에게 이고르라는 이름은 ‘워리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알려주며 ‘아노라’라는 이름엔 무슨 뜻이 있냐고 묻는다. 아노라는 “미국에선 이름 뜻 생각 안 해.”라고 말한다. 아노라의 답을 들은 이고르는 휴대폰을 들어 아노라의 이름 뜻을 찾아 알려준다. 석류, 빛, 밝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난 애니보다 아노라가 좋아.”
극 중에서 아노라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끔 ‘아노라’라는 이름을 부르긴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존중해 주진 않는다. 아노라 또한 자신의 이름에 관심이 없고 아예 진짜 이름보다 애니라고 불리고 싶어 한다. 아노라는 스트리퍼 아노라, 진짜 아노라의 인생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이반을 만난 후엔 신데렐라 애니의 삶을 꿈꾼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고르가 나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내 이름과 내 인생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감기 걸린다고 스카프를 주고, 본인도 좁은 비행기 좌석에 불편히 앉아있으면서 내 편의를 챙겨주고, 내 짐을 들어 계단 위로 올려다 주고, 내가 빼앗긴 다이아몬드 반지를 슬쩍해 가져와주고.. 아노라는 이런 이고르의 성의에 답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다. 돈을 주는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해주던 것처럼.
하지만 이고르는 애초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노라와 한 공간에 있다는 이유로 그를 강간할 생각도 없었고 다이아몬드로 그의 몸을 살 생각도 없었다. 이고르는 ‘무언가를 받으면 내 몸을 줘야 한다’는 아노라가 믿어온 이치를 부순다.
이고르의 이런 행동이 아노라를 향한 성애에서 시작된 것인지, 연민, 동질감에서 시작된 것인진 알 수 없지만, 이고르는 아노라가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대가 없는 호의를 전한다. 아노라가 이반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받지 못한 따뜻한 마음. 결국 아노라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건 저 위에 있는 왕자님이 아닌 무시하고 오해했던, 아노라와 같은 계급의 노동자 이고르다.
인생역전을 시켜줄 왕자와 그의 수혜를 입을 신데렐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노라에겐 그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이고르가 있다는 것이다. 둘이 꼭 아름다운 결말을 맺지 않아도, 계속 관계를 이어가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그저 이 쪽팔리고 서러운 순간에 아노라의 옆에 이고르가 있어준 것, 조용히 아노라의 눈물을 받아줄 이고르의 가슴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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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장미의 행렬 (Funeral Parade of Roses)' 리뷰
아트나인 ‘재팬무비페스티벌’ 상영작 중 하나인 <장미의 행렬>을 봤다.
포스터 속 인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보게 됐는데 영화 자체도 포스터 만큼이나 스타일리시하고 강렬했다.
“나는 상처이자 칼날이며 사형수이자 사형집행인이다”라는 문구로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가 실험적이었다.
여러 이미지가 아주 짧은 시간 깜빡이듯 노출되며 인상을 남긴다든지 하는 독특한 편집이 많았다.
조금 패션 필름 같기도 한 부분도 있었고…
에디라는 게이보이(영화 속에서 쓰는 단어다)가 주인공이다.
그는 게이바에서 잘나가는 호스트로 마담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맨 얼굴의 에디와 화장을 하고 가발을 쓰고 화려한 옷을 입는 에디는 다른 사람 같다.
이 장면에서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가면 아래 가면이 또 있기도 하다는 대사가 나오는 게 인상 깊었다.
성매매 업소의 마담을 ‘엄마’라고 부른다는 말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생모와 마담, 두 가지 인물 모두에 대해 에디가 가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룬 영화라고 볼 수 있겠다.
이 머리 너무 예쁘고 자꾸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나오는 것도 자아 성찰, 또는 자아의 분리를 상징하는 것 같아 좋았다.
복선
스포를 절대 읽지 말고 봐야 된다. 그래야 이 영화가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엔딩 때문에 원래는 별점 3점 정도로 생각하다가 4점을 줬다.
영화는 사람은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영혼의 궁극에 이른다는 문구로 끝맺는다.
이렇게 나오는 문구들도 좋았고 위에서 말했듯 영화 자체도 스타일리시하고 실험적이다.
미장센도 좋고… 결말이 특히 충격(positiv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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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기생충' 다르게 보기
이것은 파이프(로 보이는 물체)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 <이미지의 반역(배반)>이라는 그림이다. 정말 그럴까? 이 그림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사유를 차용해 물질적 속성을 따지자면, 이 이미지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반역(배반)>이라는 '그림'을 스캔한 '컴퓨터 파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철학자'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와 대상, 대상과 대상을 재현한 이미지, 언어와 이미지의 연결은 자의적이므로 얼마든지 단절되거나 자유롭게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상이 통념상 있음 직한 공간을 벗어난 생경한 장소에 위치하고, 현실에서라면 한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불가능한 대상들이 공존하는 그의 그림들은 나태한 사고를 깨부순다. 생각의 한계를 무너뜨린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는 당대를 뒤흔들었고, 후대의 다양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블랙코미디, 스릴러, 가족 드라마 등 하나의 영화 안에서 함께 존재하기 어려운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뒤섞여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영화 <기생충>을 본 후, 현실의 경계를 파괴하는 파격적 미학을 선보인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배반)>이 떠올랐다. 르네 마그리트가 회화 예술의 관습을 격파했듯이 봉준호 감독은 영화 장르의 틀을 붕괴시켰고, 언뜻 누가 보아도 빈부격차가 핵심인 것 같은 <기생충>에 빈부격차 자체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가정 형편이 극단적으로 차이나는 두 가족이 등장한다. 두 가족은 사는 곳이 정반대다. 잇따른 자영업 실패로 궁지에 몰린 기택(송강호) 가족은 누추한 반지하집에 살고, 성공한 IT기업 CEO인 박사장(이선균) 가족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대저택에 산다. 햇빛이 잘 들어올 리 없는 기택의 반지하집은 대낮에도 어둑하고, 채광이 끝내주는 박사장의 대저택은 실내에 있어도 비타민D를 합성할 수 있을 만큼 자연광이 풍부하게 들어온다. 기택 가족은 고기는커녕 한끼 제대로 챙겨 먹기도 힘들지만, 박사장의 부인 연교(조여정)는 짜장 라면에 한우 채끝살을 넣어 먹는다. 박사장 집에 사는 강아지들이 기택 가족보다 영양 상태가 훨씬 더 좋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두 가족 간의 극심한 격차는 영화 플롯의 변곡점이 되는 비 오는 밤 시퀀스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기택 가족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수직적 계급 사다리가 연상된다. 가난한 자는 달동네처럼 높이 올라가야 하거나, 반지하처럼 깊이 내려가야만 하는 곳에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다. 물론 부자도 지대가 높은 곳에 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부자는 가난한 사람처럼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지 않고,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에 앉아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집에 도착한다.
이처럼 빈부격차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설정과 상징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기생충>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빈부격차가 아니라는 생각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기생충>에는 부자와 빈자가 함께 등장하는 영화라면 으레 기대할만한 부자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없다.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박사장의 부인 연교와 기택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박사장이 재수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경제적 계급 격차를 다룬 여느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자들처럼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부를 일군 사람들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돈을 지급하고, 속마음은 다를지 몰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예우한다. 기택의 부인 충숙(장혜진)이 술에 취해 박사장 가족의 인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돈이 다리미야. 돈이 주름살을 쫘악~ 펴줘.”라고 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기생충>은 빈부격차의 ‘현상’ 자체는 실감 나게 보여주지만, 빈부격차를 타파하고 경제적으로 더 평등한 사회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화는 아니다.
돈을 매개로 엮인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의 관계는 빈부격차를 문제시하기보다 빈자와 부자 간의 상호의존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박사장 가족은 굳이 자신들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출퇴근 운전, 집안일, 자녀 교육을 자신들보다 더 잘 처리해주는 사람에게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 박사장 가족에게 귀찮고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일들을 대신해주는 기택 가족은 요긴한 존재다. 한편, 박사장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임금은 기택 가족이 당장 먹고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돈이다.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의 제목인 '기생충'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과연 박사장의 재력에 의지한 기택 가족만 누군가에게 기생한 것일까? 부자의 일상을 누리기 위해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가 꼭 필요한 박사장 가족도 기택 가족에게 기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 중에 부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택 가족의 사업이 잘 풀렸다면, 기택 가족이 누군가를 고용해 잡일을 맡겼을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기생충>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줄 따름이다. 강한 신분 상승 욕망을 지닌 기택의 아들 기우(최우식)가 자신의 계획대로 부자가 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기우는 박사장만큼 주름지지 않은 부자로 살 수 있을까? 혹시 나쁜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내면의 꿈틀거리는 욕망과 콤플렉스를 잘 살펴보라고 영화 <기생충>은 우리 앞에 거울을 들이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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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껏 본 적 없는 강렬한 모녀 관계 영화
8★/10★
모녀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지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만큼 강렬한 영화는 없었다. 엄청난 흡인력으로 2시간 20분의 러닝 타임 동안 잠시도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장르는 드라마 혹은 극사실주의적 스릴러라 할 만하다. 혈연이라는 강제적 인연에 묶인 모녀가 서로를 증오하고 원망하느라 진이 빠지는 과정을 놀랍도록 정교하게 담아내는 이 영화를 따라가 보자.
엄마 수경과 딸 이정. 둘은 모녀 관계지만 같이 있을 때 편안함보다는 불안감을 만들어낸다. 따뜻한 말 한마디는 고사하고 거칠고 상처 주는 말을 주고받고 몸싸움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다. 이들에게 갈등과 폭력, 무관심과 멸시는 일상이다. 수경은 어릴 때부터 이정을 때리며 키웠다. 이혼 후 조그마한 좌훈방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수경은 넉넉지 않은 형편으로 아이를 양육하며 거칠고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딸 이정에게만 그렇다는 게 문제다. 늘 웃는 얼굴로 손님들의 뒷이야기를 받아내야 하는 수경은 자신에게 쌓인 스트레스를 이정에게 풀었다. 이정이 아니었으면 자신이 그토록 절박하게 살 필요가 없었다는 점도 이정을 향한 원망의 감정을 키운다.
엄마의 무관심과 폭력은 이정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늘 우울한 표정의 이정은 주변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정은 늘 혼자다. 사랑받은 적이 없기에 관계 맺을 줄도 모른다. 우연히 직장 동료가 이정의 사정을 알게 되어 급격히 가까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정은 도무지 ‘적당한 선’이란 걸 모른다. 동료에게 느닷없이 동거를 제안하고 그녀의 모든 시간을 함께하고자 한다. 선의로 이정에게 손을 내밀었던 동료는 자신에게만 의지하고자 하는 이정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고 끝내 수경과 같은 표정으로 이정을 바라보기에 이른다. 이정은 상처받은 딸인 동시에 질척거리는 동료였던 것이다.
이정은 수경이 자신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수경은 이정이 제발 한 번만 사과해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해도 콧방귀만 뀐다. 수경이 이정의 나이였을 때 그녀는 아이를 낳고 홀로 양육했다. 수경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집안 살림에 별다른 도움도 주지 않고 무기력하기만 한 이정이 한심할 뿐이다. 이정과 마찬가지로 상대에게 질린 수경 역시 애인과 결혼해 변화를 모색하고자 한다. 그러나 애인의 딸과 관계를 맺는 데 어려움을 겪어 끝내 원래의 자리, 즉 이정과 함께 사는 아파트로 돌아온다. 수경과 이정은 각각 애인과 동료를 통해 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의 탈출을 도모하지만 결국 서로에게서 벗어나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절망스럽게 깨닫는다. 혈연이라는 강제적 인연과 오랜 세월을 이어 온 관성이 둘을 꼭 묶어 놓고 놔주지 않기 때문이다.
사교성이 좋지만 딸에게는 그렇지 못한 수경과 자기 스스로 일어서는 방법을 몰라 타인에게만 구원을 갈구하는 이정. 모녀의 양면성과 결함을 과연 그들 개인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숨이 턱턱 막히는 모녀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할까?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섣불리 대답하는 대신 그저 미칠 정도로 답답한 관계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작위적 화해 따위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이 모녀에게 위로, 화해, 연대, 공감 따위의 가치는 비현실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이다. 그런 두 여자가 같은 속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모녀라는 건 지독한 비극이다. 물론 그 언젠가는 현실이 될지 모를 희극의 토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저 두 모녀가 꼬일 대로 꼬여 서로에게 탈출하지 못하고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상태라는 현실인 것만이 분명하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관계의 강제성과 관성이 야기한 폭력적 현실에 관한 가장 강력한 영화적 묘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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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그라들 줄 알면서도 영원함을 바라게 되는
좋아하는 가수로 주저 없이 스다 마사키를 말하던 때가 있었다. 장발, 넥타이, 통기타를 들고 목소리를 긁어가며 부르는 ‘사요나라 엘러지’ 영상을 족히 50번은 본 듯하다. 그의 노래를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 대해서 알기 싫었던 마음이 있었다. 노래에 대한 감상이 그 가수의 사생활이나 성격으로 인해 영향을 받아 변질되는 것이 싫었다. 그가 배우로 더 유명하다는 사실은 곧 죽어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마치 오늘의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의 주인공 키누(아리무라 카스미)처럼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마. 내 감정을 덮지 마. 어젯밤의 여운 속에 있고 싶단 말이야.” 우연히 지하철 첫 차를 기다리며 가까워진 무기(스다 마사키)의 집에서 돌아온 후 키누가 한 생각이다. 같은 신발을 신고, 같은 가수를 좋아하고, 내가 읽고 싶었던 소설을 이미 그가 읽고 있다. 너무나도 닮은 그들은 서로를 속절없이 사랑하게 되었다. ‘전철을 탄다’라는 말 대신 ‘전철 속에서 흔들린다’라는 말을 쓰는 무기를, 평생을 의문스러워 한 가위바위보의 규칙을 똑같은 이유로 이상하다 여기는 키누를 말이다. ‘운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연스레 그 사람을 떠올리게 되는 일. 무기와 키누의 첫 만남이었다. 21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나이에 만난 그들은 싱그러운 사랑을 나눈다.
비록 지하철역에서 30분 동안 걸어가야 하지만, 강이 한눈에 보이는 작은 빌라에서 같이 살게 된 그들은 20대 중반을 함께 마주한다. 녹록지 않은 현실 앞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어도, 울고 있는 나의 앞에 슬리퍼를 신고라도 달려와 줄 당신이 있기에 그래도 괜찮은 날들이 이어진다. 인생의 목표가 ‘키누와의 현상 유지’였던 무기. 그러나 본격적으로 취업 전선에 나선 후, 그의 다짐은 어딘가 어긋나게 된다. 재미없는 인생은 살고 싶지 않은 키누와, 인생은 책임이라는 무기. 서로가 점점 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만 느끼고 있다는 생각에 키누는 점점 메말라간다.
끝내 헤어짐을 택한 그들은 함께 골랐던 커튼을 정리하고 가구를 옮기며 차근차근 서로의 흔적을 덜어낸다. 그 과정이 너무 아프지만은 않은 이유는, 매 순간 서로를 후회 없이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김없이 모든 것을 다 준 이들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별하고, 누군가는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미래를 약속하며 축하를 받기도 한다. 어떤 것이 좋은 결말이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알 수 없다고 얘기하고 싶다. 촘촘하게 얽혀있는 서로를 인생에서 분리해 내기란 당연하게 어려운 일이고, 함께했던 일상에서 혼자로 돌아가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나의 젊음을 함께 나눴던 이가 있다는 것, 함께한 시간들이 나의 궤적이 되는 것 역시 값진 일일 것이다.
“시작이란 건 끝의 시작. 만남은 항상 이별을 내재하고 있고 연애는 파티처럼 언젠가는 끝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이들은 좋아하는 것을 가져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수다를 떨면서 그 애달픔을 즐길 수밖에 없다.” 주인공 키누가 즐겨보던 블로그의 한 문장이다. 살아있는 꽃은 꺾는 순간 그 생명을 잃고 시간의 흐름을 느끼며 시들어간다. 메말라 버릴 미래를 그리며 안타까워하기에는 그 당장 눈앞에 놓인 싱싱함은 너무나도 아름다울 것이다. 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언젠가 사그라들 줄 알면서도 영원함을 바라게 되는 사랑이 있기를, 찾아오기를, 있었기를 바란다.
Editor. I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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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질]리뷰:인질극 없는 인질극, 캐릭터 낭비의 끝판왕,허술한 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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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대사들은 왜 나온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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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_#3] 철학과 영화 사이 (with. 정태완 감독)
🎙️ Episode 3. 촬영감독 정태완 00:00 자기소개 06:27 철학과 이야기 14:59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 18:18 [날 좋은 날]이야기 19:47 홍상수 감독을 오마주한 [날 좋은 날] 23:20 다시 [날 좋은 날] 이야기 28:13 ‘공감’에 관한 이야기 34:11 영화를 계속해서 연출하지 못한 이유 36:50 종교에 관하여 41:59 촬영 감독으로서의 정태완 43:11 [풀 메탈 브레인] 이야기 & XR 이야기1 45:22 [풀 메탈 브레인]의 연출적인 이야기 47:23 한예종과 XR 이야기2 53:09 앞으로 계획 57:18 마무리 & 쑥스러움에 관한 이야기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는 단편 영화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입니다.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영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 정태완 📍instagram @xowanc 📍사이트 https://j30n9.myportfolio.com/work ◾️ 따옴표 필름 📍 instagram @ddaompyo.film 📍 YouTube @ddaompyofilm 📍 ddaompyofil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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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드림 스캐너> 메인 예고편
경계를 넘는 순간,
악몽은 현실이 된다!악몽과 불면증에 시달리던 '세라'
숙면에 대한 희망으로 대학 수면 임상시험에 참여하지만,
악몽 속 검은 그림자는 여전히 그녀를 괴롭힌다.
숙면을 미끼로 비밀리에 자신의 꿈을 스캔한다는 걸 알게 되지만
그녀 역시 꿈속 그림자를 밝혀내기 위해 실험은 계속된다.
꿈속 검은 그림자의 실체에 다가가게 되자
그림자는 꿈이 아닌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과연 꿈속 그림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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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정이> 공식 티저 예고편
2023년 1월 20일, 곧 공개 예정. 크로노이드사의 야심작 AI 전투용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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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조 로코퀸의 소소한 귀환
가수, 배우, 사업가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멀티 엔터테이너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히스패닉 셀레브리티 중 한 사람인 제니퍼 로페즈의 2023년 신작 영화 샷건 웨딩을 관람하고 왔습니다. 하나의 장르에 특화되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성적으로 따지자면 ‘웨딩플래너’, ‘러브 인 맨하탄’, ‘퍼펙트 웨딩’ 등과 같은 상당수 로맨틱 코미디의 주연을 맡아 흥행과 대중의 사랑을 이끌었던 배우죠. 작년 ‘메리 미’도 그러했는데,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맛깔나는 로코로 돌아왔습니다. 정말 웃기다곤 할 수 없지만, 봄맞이 가벼운 로코물을 찾으신다면 딱 알맞은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참고로, ‘데드풀’ 캐릭터로 최고의 만담꾼으로 자리 잡은 라이언 레이놀즈가 제작에 참여했고, ‘피치 퍼펙트’의 제이슨 무어 감독이 연출을 맡았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뭔가 예감이 안 좋아”
‘달시’(제니퍼 로페즈)와 ‘톰’(조쉬 더하멜)의 결혼식 당일,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에 참석할 모두가 섬에 모인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이던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해적으로 인해 결혼식장의 모두가 인질이 되고, ‘달시’와 ‘톰’은 무사히 혼인서약을 마치기 위해 목숨을 건 버진 로드를 걷게 되는데...
예고편│Trailer
원제: Shotgun Wedding│감독: 제이슨 무어│각본: 마크 해머
출연진: 제니퍼 로페즈, 조쉬 더하멜, 제니퍼 쿨리지, 소냐 브라가 외 多
장르: 액션, 코미디, 멜로/로맨스│상영 시간: 100분
국가: 미국│등급: 15세 관람가
수입: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조이앤시네마│배급: 와이드 릴리즈(주),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평점: 평론가 4.0, 로튼토마토 신선도 45% 팝콘 51%, IMDB 5.4, 메타 스코어 46점
개봉일: 2023년 3월 29일
“로코의 정석”
서로 다른 온도 차의 메리지 블루를 겪는 신부 달시와 신랑 톰이 결혼식 당일, 예식장을 습격한 해적들로 인해 엉망이 된 자신들의 결혼식을 수습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혼인서약을 무사히 마치려는 고군분투를 담은 코믹 액션입니다. 축하하러 온 하객들이 모두 인질이 되면서 두 남녀는 소중한 사람들도 지키고, 자신들의 결혼식도 지켜야 하는 목숨을 건 특별한 버진 로드를 걷게 되죠. 포스터부터 액션을 기대하게 하지만, 실상은 달콤한 로맨스와 미국식 생활 유머가 섞이고 가끔 화끈한 액션을 보여주는 하나로 형언할 수 없는 종합적 장르 되겠습니다. 적재적소에 배치된 액션, 재치만점의 유머가 고전적인 형태를 취하지만, 제니퍼 로페즈의 팬이라면 그녀의 원맨쇼에도 충분히 만족하실 듯합니다.
또한, 드라마 ‘화이트 로투스’에서 좋은 연기를 펼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 배우 제니퍼 쿨리지가 톰의 엄마 캐롤로 등장해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며, 지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합니다.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그녀와 달시의 엄마 레나타의 소냐 브라가가 없었다면 아주 심심할 뻔했죠. 단지 미국식 개그가 국내 관객에게 잘 먹힐지는 의문이 들고, 전체적으로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예상 가능한 범위 내의 올드한 연출이라는 점에서 요즘이 아닌 옛날 영화를 보는 기분에 상당히 호불호가 생길 수밖에 없을 합니다. 그래도 제니퍼 로페즈, 조쉬 더하멜의 케미는 장르적 즐거움을 잘 채워주고 있어 가벼운 로맨틱 코미디를 찾으셨다면 딱 알맞은 재미를 줄 것입니다. 자기 색깔을 잘 아는 배우의 연기만큼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도 드무니까요. :)
ps. 53살임에도 불구하고 로페즈 언니 근육이..관리를 얼마나 하시는건지 -0-
한 줄 평 : 원조 로코퀸의 웨딩 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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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데렐라를 꿈꿨던 또 다른 아노라에게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웃음과 슬픔이 뒤섞인 신데렐라 스토리
- 아노라와 이반 사이의 간격을 보여주는 장면들
- 계단과 엘리베이터의 의미
- 노동자의 목소리를 담은 대 환장 공방전
- 엔딩 결말 해석
아노라 (Anora, 2024)
신데렐라를 꿈꿨던 또 다른 아노라에게
개봉일 : 2024.11.06.
관람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드라마, 코미디, 멜로/로맨스
러닝타임 : 139분
감독 : 션 베이커
출연 : 미키 매드슨, 마크 아이델슈테인, 유리 보리소프, 카렌 카라굴리안, 바체 토브마시얀
개인적인 평점 : 4 / 5
쿠키 영상 : 없음
<아노라>는 진정한 사랑과 부를 꿈꿨던 여성 아노라의 이야기다. 아노라는 돈을 받고 잠깐의 사랑과 육체를 파는 성 노동자(스트리퍼)다. 그는 진심은 없지만 친절함은 가득한 말투와 아름다운 미모로 가게에 찾아온 남자 손님들을 홀려 돈을 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저분하고 천한 일이라 생각하는 직업이지만 아노라는 아무 불평 없이 그저 묵묵히 일할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가게에 러시아어가 가능한 스트리퍼를 찾는 부자 손님이 나타나고 아노라는 사장의 손에 이끌려 테이블로 향한다. 이번엔 어떤 사람일까? 하는 기대보다 그냥 또 일이 생겼구나-싶은 딱딱한 마음으로 향한 한 테이블. 아노라는 그 테이블에서 지금껏 만난 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남자 이반을 만난다.
아노라에게 이반은 특별한 남자였다. 보통의 부자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수준의 재력은 기본이고 아노라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 첫 시작은 손님과 구매자였지만 이반은 아노라에게 쉴 틈 없이 사랑을 속삭이고 돈 한 푼 없어도 너랑 함께하면 행복할 것 같다는 프러포즈와 함께 아름다운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선물한다.
이반의 프러포즈 이후 마음을 활짝 열게 된 아노라는 한순간에 밀려온 거대한 행복을 만끽한다. 그리고 이반을 진정한 사랑이자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신분 상승 엘리베이터라 믿으며 온 마음을 다해 그를 붙잡는다.
하지만 아들의 결혼 소식을 알게 된 이반의 부모님이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 하수인 3인방을 급파하고 이들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얼마 못가 위기를 맞이한다. 아노라는 그런 와중에도 우리의 사랑을 믿고 기대하지만 이반은 그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 혼자 남겨진 아노라는 하수인 3인방과 시끄러운 공방전을 벌인다.
웃음과 슬픔이 뒤섞인 신데렐라 스토리
열심히 살아도 신데렐라는 될 수 없다고, 사랑을 믿어도 그것이 모든 걸 다 해결해 주진 않는다고. 그저 나를 알고 나답게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아노라>는 말한다. 이제 ‘누구나 행복한 신데렐라가 될 순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나이인데, 그럼에도 션 베이커 감독의 영화는 매번 내 가슴을 신랄하게 들쑤신다.
그래도 <아노라>가 좋았던 건 ‘나를 알고 나답게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을 마냥 나쁘게 하고 있진 않다는 점이다. 아노라는 언제나 최대한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고 적어도 한 명쯤은 그런 아노라를 존중한다. 션 베이커 감독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내 그 한 명의 호의적인 시선으로 아노라를 바라보고 영화는 그것을 고스란히 담아내 스크린 밖에 있는 또 다른 아노라에게 전달한다. 그래서인지 <아노라>를 보다 보면 자연히 아노라의 인생을 응원하게 된다. 이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아노라가 꼭 대단한 신데렐라가 되진 못해도 그가 진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길 바라면서.
션 베이커 감독의 성 노동자 지지 발언, 적나라하게 표현되는 성매매 행위, 여성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신체적 압박 등 누군가에겐 불편함을 줄만한 표현과 장면들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불편함보다 더 큰 웃음과 슬픔이 있다는 점에서, 나는 <아노라>가 좋았다.
- 아래 내용부터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노라와 이반 사이의 간격
두 사람의 계층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들
아노라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하는 성 노동자(심지어 이반의 어머니 갈리나는 창녀라며 대놓고 욕한다), 이반은 웬만한 부자들도 접근하기 어려운 재벌 집 아들이다. 아노라와 이반은 거의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계층에 위치해있다. 아노라가 처음 이반의 집에 방문했던 날, 그는 두꺼운 철문 두 개와 그곳을 지키는 경비원, 커다란 현관문을 통과해 겨우 이반을 만난다. 아노라가 이반 같은 사람에게 닿으려면 이토록 두껍고 높은 관문들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심지어 그 관문들은 아노라가 자력으로 통과하는 건 불가능하고 건너편에서 누군가 열어줘야만 통과할 수 있다.
여차저차 이반의 호의를 받으며 들어온 집안. 다음 관문은 침실로 가는 긴 계단이다. 이반은 익숙한 듯 재빠르게 계단을 올라 2층 침실로 올라가고 불편한 신발을 신은 아노라는 이반보다 느린 속도로 어렵게 계단을 오른다. 이때 이반은 "아, 기다려줄게.”라고 말하며 잠시 아노라를 배려해 주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2층에 도착한 이반과 아노라는 함께 침대에 누워 대화를 나눈다. 아노라는 이반이 대체 무슨 일을 하기에 이런 부를 누리는지 궁금하다. 아노라가 직업을 묻자 장난을 치던 이반은 “니콜라이 자카로프 아들이야.”라는 대답을 내놓는다. 아노라는 몸을 갈아서 돈을 버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아왔기에 이반에게 직업을 물어봤는데, 이반은 ‘누구의 아들’인 것만으로도 이런 걸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삶을 살아왔기에 그저 ‘니콜라이 자카로프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소개를 끝내는 이 상황이 참 우습고 슬프다.
아무튼 니콜라이 자카로프? 아노라는 그를 모른다. 사는 세계가 다르고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언제 재벌 이름을 외우고 앉아있겠나. 이반은 구글에 검색하면 나온다며 철자도 알려주겠다고 한다. 이반의 이런 모습(+계단에서 기다려주기)은 얼핏 사랑과 친절함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는 사실 우위를 점한 자의 여유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올라갈 땐 긴 계단, 내려올 땐 엘리베이터
익숙해질 때쯤 끝나버린 행복
이반은 아노라에게 프러포즈할 때 “너와 결혼하면 돈 한 푼 없어도 행복할 것 같아.” 라고 말한다. 돈 한 푼 없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아노라에게 이런 말을 하니 감미롭다기보단 우습다. 그런데 아노라는 여기에 그대로 넘어가버린다. 무시하기엔 이반이 주는 행복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아노라가 사는 집은 지하철의 소음과 진동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늘진 공동주택이고 현관엔 오르기 귀찮은 계단이 있다. 그가 일하는 곳은 창문 하나 없고 소음과 어두운 조명으로 가득하다. 이에 반해 사람보다 큰 통창으로 이루어진 이반의 집은 햇빛이 잔뜩 들어오고 그 넓은 공간엔 좋은 물건들로 가득하다. 엘리베이터도 있고 운전기사가 대신 짐을 들어 운반해 주고, 또 고용인들이 청소도 대신해 준다. 이 외에도 입이 떡 벌어지는 온갖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삶이라니.
아노라는 처음엔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반의 품에 안겨서도 청소해 주는 고용인들을 곁눈질로 쳐다보고 카지노에서도 이반 일행에게 잘 어울리지 못하는 어색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반의 사랑을 믿고 혼인신고를 한 후엔 일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이반의 집에 들어와 모든 걸 누리며 살기 시작한다. 아노라는 점점 자신이 신데렐라가 된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는 “신혼여행은 디즈니랜드, 공주방 리조트가 좋을까?” 고민하며 달달한 신혼생활을 기대한다.
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갑자기 현실이 들이닥치고 이반의 도주와 결혼 무효화까지 순식간에 착착 진행된다. 베가스에서 시작된 아노라의 꿈은 베가스에서 끝을 맺는다. 호화로운 전용기를 타고 베가스로 향한 이반의 아내 애니는 아노라가 되어 아이 울음소리로 가득 찬 좁은 이코노미 석에 다시 몸을 싣는다.
모든 일이 끝나고 이고르와 하루를 보낸 후 아노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침실에서 내려온다. 계단으로 침실에 올라가는 건, 이반과 부부가 되는 건 (이별보다 비교적) 오래 걸렸는데. 침실에서 내려오는 건, 이반과 남이 되어 현실로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다. 이제 잠에서 깰 시간이다. 반야의 아내 애니가 아닌 아노라는 신데렐라가 되지도, 디즈니랜드에도 가지 못한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가득한 공방전
이 결혼에 대해 이반은 이렇다 할 입장을 내놓지 않는다. 그에게 아노라와의 결혼은 잠깐의 일탈, 그가 즐겨 하던 콘솔 게임 한 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반은 즐거운 미국 여행을 위해 돈을 주고 스트리퍼 아노라를 구매해 잠깐 ‘반야’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가 됐고, 이제 그것을 버려야 될 때가 왔음을 알고 순순히 결혼 무효화에 동참한다. 그래서 아노라와 어머니가 뭐라고 말하든 이반은 할 말이, 꼭 해야 할 말이 없다. 아노라와의 결혼은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고 바꾸려고 노력할 만큼의 가치가 없으니까.
하지만 아노라는 할 말이 참 많다. 그는 이 결혼에 모든 걸 걸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곁가지로 매달린 하수인 토로스, 가닉, 이고르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생계, 인생을 위해 꼭 결혼 무효화에 성공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은 할 말이 많다.
우리는 진짜 사랑한다고, 우리는 꼭 이걸 무효화 시켜야 한다고, 나 이 일하다가 뇌진탕 온 것 같다고. 한바탕 몸싸움이 일어난 이반의 집 거실에서 아노라, 토로스, 가닉의 온갖 말들이 뒤섞이며 대 환장 그 자체인 상황이 벌어진다. 다들 가진 건 없는데 할 말은 참 많다. 이 영화는 그 모든 말들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다 들려준다.
이런 면에서 <아노라>는 성 노동자를 위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모든 노동자를 위한 영화이기도 한 것 같다. 생계를 위해 군말 없이 일을 하는 아노라처럼, 이반을 찾기 위해 캔디 샵을 부수고 견인차에 걸린 차에서 엑셀을 밟는 토로스 일행처럼 그저 생계와 고용인이 원하는 목표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그런 이들. 영화는 이들의 마음속에 들어있을만한 온갖 불평과 짜증들을 아노라와 하수인들의 입을 통해 한 공간에 풀어놓는다. 이게 정말 우습고 골 때리기도 하고.. 한편으론 공감되고 슬프기도 하다.
내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
결말 엔딩 해석
결혼 무효화가 끝난 후 아노라와 이고르는 이반의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이고르는 아노라에게 이고르라는 이름은 ‘워리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라고 알려주며 ‘아노라’라는 이름엔 무슨 뜻이 있냐고 묻는다. 아노라는 “미국에선 이름 뜻 생각 안 해.”라고 말한다. 아노라의 답을 들은 이고르는 휴대폰을 들어 아노라의 이름 뜻을 찾아 알려준다. 석류, 빛, 밝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난 애니보다 아노라가 좋아.”
극 중에서 아노라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끔 ‘아노라’라는 이름을 부르긴 하지만 그 이름을 가진 사람에 대해 궁금해하거나 존중해 주진 않는다. 아노라 또한 자신의 이름에 관심이 없고 아예 진짜 이름보다 애니라고 불리고 싶어 한다. 아노라는 스트리퍼 아노라, 진짜 아노라의 인생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이반을 만난 후엔 신데렐라 애니의 삶을 꿈꾼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고르가 나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내 이름과 내 인생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감기 걸린다고 스카프를 주고, 본인도 좁은 비행기 좌석에 불편히 앉아있으면서 내 편의를 챙겨주고, 내 짐을 들어 계단 위로 올려다 주고, 내가 빼앗긴 다이아몬드 반지를 슬쩍해 가져와주고.. 아노라는 이런 이고르의 성의에 답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바친다. 돈을 주는 고객들에게 서비스를 해주던 것처럼.
하지만 이고르는 애초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아노라와 한 공간에 있다는 이유로 그를 강간할 생각도 없었고 다이아몬드로 그의 몸을 살 생각도 없었다. 이고르는 ‘무언가를 받으면 내 몸을 줘야 한다’는 아노라가 믿어온 이치를 부순다.
이고르의 이런 행동이 아노라를 향한 성애에서 시작된 것인지, 연민, 동질감에서 시작된 것인진 알 수 없지만, 이고르는 아노라가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대가 없는 호의를 전한다. 아노라가 이반에게 기대했지만 결국 받지 못한 따뜻한 마음. 결국 아노라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건 저 위에 있는 왕자님이 아닌 무시하고 오해했던, 아노라와 같은 계급의 노동자 이고르다.
인생역전을 시켜줄 왕자와 그의 수혜를 입을 신데렐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건 아노라에겐 그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이고르가 있다는 것이다. 둘이 꼭 아름다운 결말을 맺지 않아도, 계속 관계를 이어가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그저 이 쪽팔리고 서러운 순간에 아노라의 옆에 이고르가 있어준 것, 조용히 아노라의 눈물을 받아줄 이고르의 가슴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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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장미의 행렬 (Funeral Parade of Roses)' 리뷰
아트나인 ‘재팬무비페스티벌’ 상영작 중 하나인 <장미의 행렬>을 봤다.
포스터 속 인물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보게 됐는데 영화 자체도 포스터 만큼이나 스타일리시하고 강렬했다.
“나는 상처이자 칼날이며 사형수이자 사형집행인이다”라는 문구로 영화는 시작한다.
영화가 실험적이었다.
여러 이미지가 아주 짧은 시간 깜빡이듯 노출되며 인상을 남긴다든지 하는 독특한 편집이 많았다.
조금 패션 필름 같기도 한 부분도 있었고…
에디라는 게이보이(영화 속에서 쓰는 단어다)가 주인공이다.
그는 게이바에서 잘나가는 호스트로 마담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맨 얼굴의 에디와 화장을 하고 가발을 쓰고 화려한 옷을 입는 에디는 다른 사람 같다.
이 장면에서 사람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가면 아래 가면이 또 있기도 하다는 대사가 나오는 게 인상 깊었다.
성매매 업소의 마담을 ‘엄마’라고 부른다는 말을 본 기억이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생모와 마담, 두 가지 인물 모두에 대해 에디가 가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다룬 영화라고 볼 수 있겠다.
이 머리 너무 예쁘고 자꾸 거울에 비친 이미지가 나오는 것도 자아 성찰, 또는 자아의 분리를 상징하는 것 같아 좋았다.
복선
스포를 절대 읽지 말고 봐야 된다. 그래야 이 영화가 충격으로 다가온다.
이 엔딩 때문에 원래는 별점 3점 정도로 생각하다가 4점을 줬다.
영화는 사람은 끊임없는 부정을 통해 영혼의 궁극에 이른다는 문구로 끝맺는다.
이렇게 나오는 문구들도 좋았고 위에서 말했듯 영화 자체도 스타일리시하고 실험적이다.
미장센도 좋고… 결말이 특히 충격(positiv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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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기생충' 다르게 보기
이것은 파이프(로 보이는 물체)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놓음으로써 많은 사람을 당황하게 만든 <이미지의 반역(배반)>이라는 그림이다. 정말 그럴까? 이 그림을 그린 르네 마그리트의 사유를 차용해 물질적 속성을 따지자면, 이 이미지는 '그림'이라기보다는 <이미지의 반역(배반)>이라는 '그림'을 스캔한 '컴퓨터 파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철학자' 르네 마그리트는 언어와 대상, 대상과 대상을 재현한 이미지, 언어와 이미지의 연결은 자의적이므로 얼마든지 단절되거나 자유롭게 재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떤 대상이 통념상 있음 직한 공간을 벗어난 생경한 장소에 위치하고, 현실에서라면 한 프레임 안에 있는 것이 불가능한 대상들이 공존하는 그의 그림들은 나태한 사고를 깨부순다. 생각의 한계를 무너뜨린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회화는 당대를 뒤흔들었고, 후대의 다양한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블랙코미디, 스릴러, 가족 드라마 등 하나의 영화 안에서 함께 존재하기 어려운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뒤섞여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영화 <기생충>을 본 후, 현실의 경계를 파괴하는 파격적 미학을 선보인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배반)>이 떠올랐다. 르네 마그리트가 회화 예술의 관습을 격파했듯이 봉준호 감독은 영화 장르의 틀을 붕괴시켰고, 언뜻 누가 보아도 빈부격차가 핵심인 것 같은 <기생충>에 빈부격차 자체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가정 형편이 극단적으로 차이나는 두 가족이 등장한다. 두 가족은 사는 곳이 정반대다. 잇따른 자영업 실패로 궁지에 몰린 기택(송강호) 가족은 누추한 반지하집에 살고, 성공한 IT기업 CEO인 박사장(이선균) 가족은 유명 건축가가 설계한 대저택에 산다. 햇빛이 잘 들어올 리 없는 기택의 반지하집은 대낮에도 어둑하고, 채광이 끝내주는 박사장의 대저택은 실내에 있어도 비타민D를 합성할 수 있을 만큼 자연광이 풍부하게 들어온다. 기택 가족은 고기는커녕 한끼 제대로 챙겨 먹기도 힘들지만, 박사장의 부인 연교(조여정)는 짜장 라면에 한우 채끝살을 넣어 먹는다. 박사장 집에 사는 강아지들이 기택 가족보다 영양 상태가 훨씬 더 좋으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이 두 가족 간의 극심한 격차는 영화 플롯의 변곡점이 되는 비 오는 밤 시퀀스에서 극적으로 표현된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기택 가족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레 수직적 계급 사다리가 연상된다. 가난한 자는 달동네처럼 높이 올라가야 하거나, 반지하처럼 깊이 내려가야만 하는 곳에서 자신의 거처를 마련할 수 있다. 물론 부자도 지대가 높은 곳에 사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부자는 가난한 사람처럼 좁은 계단을 걸어 올라가지 않고, 기사가 운전하는 고급 승용차에 앉아 잘 닦인 도로를 따라 집에 도착한다.
이처럼 빈부격차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설정과 상징이 영화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기생충>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빈부격차가 아니라는 생각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기생충>에는 부자와 빈자가 함께 등장하는 영화라면 으레 기대할만한 부자에 대한 부정적 묘사가 없다.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박사장의 부인 연교와 기택에게서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말하는 박사장이 재수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경제적 계급 격차를 다룬 여느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부자들처럼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 부를 일군 사람들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정당한 돈을 지급하고, 속마음은 다를지 몰라도 최소한 겉으로는 예우한다. 기택의 부인 충숙(장혜진)이 술에 취해 박사장 가족의 인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돈이 다리미야. 돈이 주름살을 쫘악~ 펴줘.”라고 말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 <기생충>은 빈부격차의 ‘현상’ 자체는 실감 나게 보여주지만, 빈부격차를 타파하고 경제적으로 더 평등한 사회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화는 아니다.
돈을 매개로 엮인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의 관계는 빈부격차를 문제시하기보다 빈자와 부자 간의 상호의존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박사장 가족은 굳이 자신들이 직접 하지 않아도 될 출퇴근 운전, 집안일, 자녀 교육을 자신들보다 더 잘 처리해주는 사람에게 기꺼이 대가를 지불한다. 박사장 가족에게 귀찮고 시간 낭비에 불과한 일들을 대신해주는 기택 가족은 요긴한 존재다. 한편, 박사장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임금은 기택 가족이 당장 먹고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돈이다.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의 제목인 '기생충'의 의미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과연 박사장의 재력에 의지한 기택 가족만 누군가에게 기생한 것일까? 부자의 일상을 누리기 위해 허드렛일을 대신해줄 누군가가 꼭 필요한 박사장 가족도 기택 가족에게 기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 중에 부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기택 가족의 사업이 잘 풀렸다면, 기택 가족이 누군가를 고용해 잡일을 맡겼을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기생충>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달성하는 데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줄 따름이다. 강한 신분 상승 욕망을 지닌 기택의 아들 기우(최우식)가 자신의 계획대로 부자가 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기우는 박사장만큼 주름지지 않은 부자로 살 수 있을까? 혹시 나쁜 인간이 되지는 않을까?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내면의 꿈틀거리는 욕망과 콤플렉스를 잘 살펴보라고 영화 <기생충>은 우리 앞에 거울을 들이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