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0-05 17:45:58
[BIFF 데일리] 돌고 돌아 마음이 전해지면
영화 <아이미타가이> 리뷰
DIRECTOR. 쿠사노 쇼고
CAST. 쿠로키 하루, 나카무라 아오이, 후지마 사와코 등
PROGRAM NOTE.
인생의 어떤 갈림길은 찰나의 순간 결정된다. 몇 초 사이로 생사가 갈리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의 어떤 행동이 내 삶의 현재를 바꾸기도 한다. <아이미타가이>는 그런 인연의 연쇄 작용에 주목하는 영화다. 아주사와 카나미는 여고 시절부터 단짝인 친구. 카나미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은 뒤에도 아주사는 카나미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외로움을 달랜다. 카나미의 부모는 아주사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죽은 딸이 마음을 쏟았던 고아원을 찾아 딸의 선행에 감동받는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오지 않지만 그 흔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작은 선행들이 모여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만든다. 『중쇄를 찍자』(2016), <오키쿠와 세계>(2023) 등에 출연했던 쿠로키 하루가 주인공 아주사의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2021)을 연출했던 구사노 쇼고의 정교한 화법이 매력적인 영화다. (남동철)

이 영화의 각본은 <칠석의 여름>으로 부산과도 인연이 있는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사사베 키요시 감독이 썼다. 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으나, 생전 인연도 없던 쿠사노 쇼고 감독이 그 각본을 세상에 데려온다. 그 작품이 바로 이 <아이미타가이>다.
얼핏 기억하기도 어려운 이름이지만, 일본어를 직역하는 대신 음차로 표현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아이미타가이’라는, 현대 일본에서도 잘 쓰지 않아 거의 사어가 되었다는 이 말은, 직독직해 혹은 사전적 설명으로 가 닿기보다 이야기로 풀어질 때 훨씬 더 쉽게 이해되는 말이다.
영화는 쿠로키 하루가 연기하는 ‘아즈사’라는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있다고 편의상 설명할 수 있지만, 어느 한 사람에게만 중점을 둔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친구 ‘카나미’가 사진 촬영 차 갔던 해외 출장에서 사망한 후 괴로워하는 아즈사, 아즈사의 남자친구 스미토, 카나미의 부모님부터 시작해서 점점이 연결된 수많은 사람들을 비추어 낸다. 등장인물이 많지만, 친절하게 여러 차례 겹치는 지점들을 보여 주어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모세혈관처럼 사방으로 가늘게 퍼져 있는 이야기들이 드러날 때마다, 영화가 전하고 싶었던 온기가 느껴진다. 영화는 카나미의 죽음과 아즈사의 직업 안에서 새롭게 이어지고 또 확장되는 관계를 보이고, 그 안에서 관계의 면면을 새롭게 발견하게 해 준다. 뒤늦게 도착한 편지, 몰랐던 사실의 발견, 오래 간직했던 소중한 사실… 같은 것들이 우연처럼 보이는 인연을 드러낸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히 말할 수 없는 이런 우연과 인연은, 관점에 따라 무리수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인연의 형태를 질고 질긴 끈 모양보다 민들레 홀씨 같은 모양으로 이해한다면 납득이 된다. 우리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씩 만들어내는 언행이 있으니까. 친구에게 가볍게 한 말, 매일 혼자 했던 일, 오랫동안 소중하게 보관한 성취, 가벼운 선행… 수많은 언행이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다 멀리까지 전해지고 가 닿는다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라져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믿고 싶어진다.

때로는 내가 뻗고 있는지도 몰랐던 나의 손 끝이 우연히 상대에게 닿아 온기가 전해질 때도 있고, 있는 힘껏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조차 뒤늦게 어딘가에 닿아 그 응답이 훗날 멀리서 공명해올 수도 있다. 못 전한 마음이라도 언젠가 어디에선가 이어질 수 있다. 각본을 쓰고 사망한 사사베 키요시 감독의 마음이, 아는 사이도 아니었던 쿠사노 쇼고 감독의 마음으로 이어져, 지금 여기 당도한 것처럼.
이 마음을 받아 들고 나온 후, 어쩐지 세상에 조금 더 열려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누군가의 등을 든든하게 받쳐 주며 깊은 신뢰를 주고받고 싶고, 아무 바라는 것 없이 다정을 건네고 싶다. 그런 관계야말로 생의 선물 같다.
그런 관계의 빈자리는 절대 채워질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후에도 그 사람의 흔적은 남고, 또 어딘가에서 새로운 인연의 홀씨로 피어난다. 그렇게 생각하면 무엇도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꺾인 꿈도, 갑작스러운 비보도, 우연한 만남도. 그 모든 걸 모아 이 영화가 든든하게 등을 떠밀어 주는 걸 느끼며, 이제 앞으로 갈 시간이다.
10/03 20:00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상영코드 014)
10/04 09:00 CGV센텀시티 5관 (상영코드 089)
10/06 09:00 롯데시네마 센텀시티 9관 (상영코드 255)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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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 떠나가지 못하는 남자
공부보다는 음악, 예술에 더 관심이 많고, 현실적인 진로에 대한 고민보다는 포커로 돈을 벌어 여자친구랑 어떻게 재미있게 놀지에 대한 고민만 하는 게으른 베짱이, 개츠비. 학교에서 학보사로 활동할만큼 똑똑하고, 얼굴도 예쁜데, 심지어 집안에 돈도 많은 애슐리.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이 두 청춘 남녀가 사랑을 공고히 하려고 방문한 뉴욕에서 파토가 나고 불타는 사랑이 차갑게 식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요즘처럼 무더운 날씨에 비가 한 번 오면 땅이 식어가면서 날씨가 살만해지는 것처럼 비오는 뉴욕을 각기 다른 이유로 헤매고 다녔던 두 남녀는 비가 그친 뒤, 개츠비는 이미 식어버린 그들의 마음을 깨닫고, 세상 쿨하게 이별을 고한다.
1. 개츠비의 레이니 데이 인 뉴욕
개츠비는 포커와 술만 있다면 이 세상에 별로 불만이 없을 듯한 잘생긴 청년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어머니의 서포트를 지겨워하면서도 그 서포트를 포기할 수 없는 나약한 청춘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아리따운 여자친구 애슐리가 있는데, 영화 처음 등장하는 그의 독백을 보고 있자면 그는 그녀가 가진 배경과 그 다음 그녀의 매력, 외모 중에서 어떤 것을 1순위로 사랑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 그가 살아온 뉴욕의 정취를 함께 느끼기 위해서 완벽한 플랜을 세우고, 함께 뉴욕으로 놀러간다. 포커로 딴 비싼 호텔 스위트룸을 예약한 채로. 그는 그녀가 본래 뉴욕에 온 목적이었던 한 유명 영화감독의 인터뷰를 빨리 끝내기만을 기다리지만 그녀는 그를 밤까지 바람맞힌다. 결국 그들의 데이트 중에서 성사된 것이라곤 공원에서 말을 탄 것밖에 없었다.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에 그는 그의 형을 만나러 갔다가 그의 형이 결혼하기도 전에 파혼하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황급히 빠져나오기도 하고, 재수없고 무례한 친구도 하나 만나고, 전 여자친구의 동생도 만나서 뜬금없이 키스도 했다. 그녀를 기다리는 시간은 그에게는 대환장파티였다. 그렇게 대환장파티 속에서 그는 전여자친구의 동생, 챈과 미술관 데이트도 하고, 엄마 때문에 가기 싫어했던 가족 모임에도 창녀 한 명을 대동하고, 참석한다. 결국 그 날 그는 여자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내 인생에서 나를 옥죄며 부담을 주는 사람들을 피하려고 했던 모든 행동들이 그를 그 부담스러운 상황 속으로 몰아넣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상황을 겪고 깊은 현타를 받는데, 그 현타는 그를 한층 더 어른스럽게 성장시킨다.
2. 애슐리의 레이니 데이 인 뉴욕
애슐리는 인생에서 부족한 것을 별로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안정된 삶을 산다. 자신의 일에도 열정적이고, 자신이 오랫동안 팬으로 생각해온 감독의 인터뷰를 맡을 정도로 성덕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인터뷰 현장은 그녀의 인생에 대환장파티를 선물한다. 그 인터뷰에서 감독은 자신이 사별한 아내를 언급하며 자신의 아내와 애슐리가 많이 닮았다며 누가 봐도 개수작인데, 애슐리만 모르는 상황이 연출된다. 팬심이 그녀의 눈을 멀게 한 것일까 그녀는 그의 깊은 철학적 개소리와 겉만 번지르르한 낭만적인 멘트에 소위 말해 뻑이 가서 남자 친구와의 약속을 계속 미룬다. 그의 철학적 개소리와 낭만적인 척 하는 니글니글한 멘트는 그녀를 그의 영화 시사회에 참석하는 자리로 유도했고, 그 와중에 예술가의 변덕이었는지 갑자기 시사회를 박차고 나가는 그의 행동은 그녀로 하여금 그를 찾아다니게 만드는 옴므파탈의 매력까지 풍긴다. 순박하고 어리고, 예쁘기까지 한 애슐리는 그를 찾아 한 영화 스튜디오까지 가게 되는데, 그 스튜디오에는 굉장히 유명한 배우 하나가 그녀에게 또다른 신박한 개수작을 부린다. 애슐리의 순박함은 그의 개수작을 자신에게 보이는 순수한 호감이라고 오해를 하게 만들었다. 또한, 유명한 배우라면 응당 따라다닐 파파라치들에게 스캔들거리를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뉴욕에서의 일련의 모든 상황이 그녀의 아름다움, 순수함을 부각하는 동시에 그녀의 대책없음, 생각없음이 그대로 드러나게 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잠시동안 헐리웃 배우와 밀회를 즐기는 미인대회 출신 시골 여자가 되었던 애슐리는 그녀의 의지와는 반대로 그 헐리웃 배우가 바람피는 상황에 적극 협조하는 헐리웃 배우의 세컨드가 되었지만 헐리웃 배우의 퍼스트의 등장으로 그녀는 그의 집에서 속옷 차림으로 반강제적으로 쫓겨난다. 그 날, 비가 오는 뉴욕에서 그의 집에서 훔친 트렌치코트만이 그녀를 살렸다.
3. 애슐리와 개츠비의 비즈니스 러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개츠비와 애슐리는 서로를 의무적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개츠비는 애슐리의 돈을 마음에 들어하는 어머니의 압력에 못 이겨 애슐리를 사랑하고 있었고, 애슐리는 개츠비의 예술가적인 기질을 사랑했지만 그의 예술가적인 기질을 한심하게 여기기도 했다. 마치 이성적인 여자와 감성적인 남자가 만나 서로의 다른 점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그 호기심이 사랑이라고 믿게 되지만 그들이 헤어지는 이유도 결국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개츠비와 애슐리는 애초에 서로가 그리 잘 맞지 않는 커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떠나지 않았다. 개츠비는 자신을 옥죄는 엄마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하면 애슐리는 그에 대해서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고, 자신이 인터뷰할 감독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영화 속 첫 장면에서 이미 둘은 서로의 이야기만 하면서 서로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있다. 그들은 단지 혼자가 되기 싫어서 자기 주변에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의 사람을 골라 밍숭맹숭한 사랑을 하면서도 그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착각하는 수많은 커플들을 보여주고 있다.
4. 우디 앨런의 자가복제적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우디 앨런의 다른 영화도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이유는 '와, 우디 앨런 진짜 천재잖아!!' '영화를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지'라는 느낌 때문이 아니다. 이 영화는 전작인 미드나잇 인 파리와 비교했을 때, 파리와 뉴욕이라는 설정의 변화 그리고 시간여행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뭐가 다른 건지 잘 모르겠어서 다른 영화들도 이 두 영화들과 스토리 포맷이 비슷할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서로 그렇게까지는 사랑하지 않는 커플, 그들이 서로 각기 다른 일정으로 뉴욕, 파리를 여행하는데, 그 과정에서 남자 주인공은 자신이 그렇게까지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자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남자 주인공은 새로운 여자를 만나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설정까지 너무 일치한다.
기묘하게 다른 이유로 우디 앨런의 영화를 찾아보고 싶어지게 하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별점 ***
완벽한 캐스팅이 버무려진 기묘한 이야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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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노래로 조국에 안녕을 고하다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노래로 조국에 안녕을 고하다
한국영화사는 음악영화사다 섹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리뷰
감독] 로버트 와이즈
출연] 줄리 앤드류스, 크리스토퍼 플러머
시놉시스] 음악을 사랑하는 말괄량이 견습 수녀 마리아는 원장 수녀의 권유로 해군 명문 집안 폰 트랩가의 가정교사가 된다. 마리아는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폰 트랩가의 일곱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며 점차 교감하게 되고, 엄격한 폰 트랩 대령 역시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아는 자신이 폰 트랩 대령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신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아이들의 곁을 떠나 다시 수녀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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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e- a deer, a female deer, Ray- a drop of golden sun, Me- a name I call myself, Far- a long, long way to run …. 음악 시간에 모두가 한 번쯤 블러봤을 노래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마리아가 대령의 자식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며 부른 곡이다. 음악 영화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도레미 송 외에는 큰 줄거리가 제대로 생각나지 않아서 이번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그 이야기를 다시 만나보았다.
서툴다는 것을 인정하다
자신의 아내가 죽은 뒤 폰 트랩 대령은 자식들은 군인들을 통솔하듯이 아이들을 양육한다. 마리아가 처음 가정교사로 폰 트랩 가에 방문을 한 날 건네는 인사만 봐도 굉장히 훈련이 잘된 군인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본 마리아는 이러한 교육 방식은 동의할 수 없다며 폰 트랩 대령이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 빈으로 가 있었던 기간 동안 자신만의 방식으로 7명의 아이들에게 다가간다.
어린아이들답게 자유롭게 뛰놀면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다양한 노래를 가르쳐 주면서 감성을 깨우치도록 만든다. 처음에는 막무가내에, 자기 말을 듣지 않는 가정교사라고 생각하며 마리아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폰 트랩 대령은 연인인 남작 부인에게 아이들이 아름다운 노래를 선물로 안겨주고, 꼭 통제라는 강압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부드러움으로 아이들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마리아에게서 배워나간다. 아버지로서 아이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외부 출장이 잦은 본인에게 최선은 아이들을 그저 통제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폰 트랩 대령은 자신의 서툰 점을 빠르게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자신 역시 노래를 부르며 새롭게 다가가고, 마리아에게 무례했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이처럼 처음이기에 서툴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극에 다양하게 풀어놓고 있었다. 첫째 딸 리즐과 랄프의 첫사랑 이야기, 마리아가 폰 트랩 대령에게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 등 누구나 살아가면서 겪은 ‘처음’과 처음이기에 겪는 혼란 속에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이 모든 과정을 굉장히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었고, 문제 상황에 똑바로 직면하고 맞서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길 응원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향한 마지막 인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전쟁 중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는 사실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견습 수녀 마리아가 해군 대령의 가정교사로 들어가며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결국 폰 트랩 대령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대적 배경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던 터라 그 시기가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비극적인 현실을 다루고 있어서 놀랐고, 이와 대비되는 아름다운 넘버들에서 찬란하면서도 애잔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폰 트랩 대령은 마리아와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나치 독일의 해군 장교로 재부임을 하게 되는데, 폰 트랩 대령은 이에 반발하고 야반도주를 결심한다. 하지만 이들을 지켜보고 있던 나치 독일의 군사들은 폰 트랩 저택에 매복해 있었고, 야반도주를 들키자 마리아와 폰 트랩 대령은 가족합창대회에 나가려고 길을 나서는 중이라는 변명을 한다. 그렇게 그들은 합창 무대에 올라 그동안 갈고 닦았던 아름다운 선율을 오스트리아 국민과 나치 독일 군인 앞에서 선보인다. 이때 폰 트랩 일가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칫 잘못하면 죽음의 위기에 내몰린 상황 속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참담하면서도 굉장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을 것이다.
합창 점수 발표 집계를 위해 폰 트랩 일가는 마지막 인사라는 컨셉으로 모두에게 굿바이 송을 부른다. 집에서 있었던 파티 현장에서 불렀던 굿바이 송은 정말 즐거웠고, 이제 자러 간다는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곡이었다. 하지만 이 곡이 나의 땅이었고, 나의 조국이었던 오스트리아를 향한 마지막 인사로 변하면서 폰 트랩 일가의 생사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곡이 되어버렸다는 점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같은 곡을 다른 상황에 넣어 그 감정의 간극을 크게 준 것이 시대의 아픔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장치가 아니었나 싶다.그저 재밌고 귀여운 뮤지컬 영화라고 생각했던 ‘사운드 오브 뮤직’. 제천에서 다시 만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은 시대의 아픔과 그 속에서도 삶을 어떻게 영위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찬란한 노래로 울림을 선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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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시간표
2022-08-12 19:30
메가박스 제천 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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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 전복, 좌초
<슬픔의 삼각형, Triangle of Sadness>(2022)
감독: 루벤 외스틀룬드
출연: 해리스 디킨슨, 찰비 딘, 우디 해럴슨, 돌리 드 레온, 즐라트코 버릭 외
장르: 코미디/드라마
등급: 15세이상관람가
러닝타임: 147분
시놉시스:
호화 크루즈에 #협찬 으로 승선한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
각양각색의 부자들과 휴가를 즐기던 사이,
뜻밖의 사건으로 배가 전복되고 8명만이 간신히 무인도에 도착한다.
할 줄 아는 거라곤 구조 대기뿐인 사람들… 이때 존재감을 드러내는 건,
“여기선 내가 캡틴입니다. 자, 내가 누구라고요?”
‥‥‥‥‥
<슬픔의 삼각형>은 <더 스퀘어>(2017)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루벤 외스틀룬드 감독이 내놓은 신작으로 해당 작품 역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세간의 화제를 모았다. 전작에서는 지식인의 위선적 면모를 신랄하게 풍자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지금의 세계를 구성하는 계급적 이슈를 종횡무진으로 다룬다.
영화는 크게 3부의 구성을 하고 있다. 먼저 1부에서는 인플루언서 모델 커플 칼(해리스 디킨슨)과 아야(찰비 딘)의 이야기를 통해 젠더 이슈를 메인으로 다룬다. 동시에 첫 장면에서의 'H&M과 발렌시아가' 시퀀스처럼 영화의 냉소적 태도와 거침없는 풍자를 명확하게 가이드하는 역할을 한다.
#이탈
칼과 아야가 속한 모델 업계는 타 직종과 다르게 남성 모델이 여성 모델에 비해 1/3 수준의 페이를 받는다. 성별임금격차가 남성에게 작용하는 특이한 상황은 오히려 여성이 '미(美)'의 영역에 한해서만 가치를 높이 인정받는다는 성역할 고착화의 현실을 보여준다. 어찌됐건 칼은 아야에 비해 수입이 적은데, 남성으로서 데이트 비용을 더 내야 하는 상황에 대해 은근한 불만을 갖고 있고 결국 저녁 식사 자리에서 불만이 터져 버린다. (자기 입장에서) 성평등을 외치는 '쪼잔한 남성' 칼의 모습은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운 코믹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칼의 상황은 남성들이 여성들에 비해 '역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여러 상황들의 축소판으로 느껴진다. 사회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배제된 채 대두되는 '역차별' 담론을 꺼냈다는 점에서 기존의 젠더 이슈를 다룬 영화들의 조류를 이탈한다.
#전복
인플루언서인 아야가 호화크루즈 티켓을 협찬 받으면서 칼과 아야는 크루즈에 승선하게 되고 그곳에서 다양한 배경의 상류층 사람들을 만난다. 2부에서 영화는 수평의 공간처럼 보이는 배 안에 수직적 계급구조를 배치한다. 여유롭게 배 위에서 햇살을 쪼이는 사람들은 부유한 백인 상류층이다. 그들이 돈을 모은 방식은 '무기를 팔아서', '똥(비료)을 팔아서', '기술을 팔아서' 등등 다양하지만 인종적 구성은 매우 획일적이다. 그리고 이 부자들을 떠받들며 후한 팁을 노리는 직원들 역시 백인이다. 부자들보다 경제적 계급은 낮지만 인종적 계급은 동일한 2등 승객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 아래에서 청소와 기기 설비 등 각종 궂은 일을 도맡는 아시아계 직원이 이 배의 3등 승객이다. 서구 열강 중심의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든 부의 불평등과 인종적 착취가 배 한 척에 고스란히 담겼다.
깔끔한 부자들의 위신과 체면을 영화는 가만 두지 않는다. 악천후와 파도가 몰아치는 궂어진 기상 속 진행된 선상 디너 파티에서 부자들은 심한 멀미로 인해 먹은 음식을 연신 토하고 설사한다. 배설물 속에서 뒹구는 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돈으로 빳빳하게 세운 부자들의 체면이 마구 구겨진다. 이후 보여지는 '똥 팔이' 디미트리(즐라트코 버릭)와 토마스 선장(우디 해럴슨)의 대화는 압권이다.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철저한 자본주의자가 된 러시아인 디미트리,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자본가들을 위해 호화크루즈 여행 서비스를 제공하는 토마스. 이들이 술에 진탕 취한 채 서로의 이념을 대변하는 농담을 주고 받으며 조롱하는 모습은 이념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냉소주의적 화룡점정이다.
배를 쥐고 흔드는 악천후, 만취한 선장. 호화크루즈의 위기는 그러나 이곳이 아닌 악천후가 맑게 개인 후에 찾아왔다. 공해상의 해적은 수류탄(크루즈의 승객 중 무기 제조업체 대표의 제품)을 던져 크루즈를 파괴하고, 몇 명의 생존자만이 인근의 섬으로 떠내려온다. 선상 계급의 전복이 시작되었다. 마치 자본주의에 의한 소외로 자리를 빼앗긴 제3세계의 주민이 체제에 일격을 날리듯이(실제 테러 행위를 옹호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
#좌초
이제 섬에는 호화 크루즈에서 떠내려 온 일곱 명의 생존자가 남았다. 다양한 인종과 경제적 계급, 그리고 남자 셋 여자 넷. 자본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무인도에서 이들은 기존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각자의 생존 능력에 의해 다시 위계질서를 세운다. 여기서 크루즈의 3등 승객이었던 애비게일(돌리 드 레온)이 사냥 및 조리 실력으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된다. 그리고 우두머리의 아래로 폴라(비키 베를린)와 아야 두 여성이 빠르게 합류하면서 나머지 남성 집단(과 장애 여성)을 통솔하는 모계 사회가 형성된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야가 미(美)의 우수함으로 인해 많은 보상을 얻었다면 이곳 무인도에서는 칼이 미적 기준으로 애비게일의 눈에 들어 식량을 따로 배급받는 특혜를 얻는다. 드미트리의 롤렉스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똥' 취급을 받음은 물론이다. 기존의 계급 사회가 완벽하게 뒤집어진 자리에 마련된 새로운 사회. 과연 이 사회는 우리가 바라던 사회인가?
1부에서 칼은 아야에게 성역할의 구분 없이 평등하기를 요구했다. 2부에서 드미트리의 아내는 크루즈의 직원에게 평등한 관계형성을 위해 같이 풀에서 수영하자고 제안했고, 결국 크루즈의 전 직원이 업무를 멈추고 수영을 즐겨야만 했다. 그러나 3부에서 어떠한 신분의 구속도 받지 않는 여섯 명의 사람들은 스스로 신분을 형성해 서로를 감시하고 구속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무인도에서 전복되었지만 그 자리에 세워진 새로운 사회는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재빠르게 좌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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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탄압과 폭력, 착취에서 해방되기 위해 어떤 혁명가들은 체제의 전복을 외친다. 그러나 단순히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이상사회가 저절로 찾아오지 않는다. <슬픔의 삼각형>이 사회에 던진 냉소가 그래서 뼈아프다. 만약 무인도에 러시아 자본주의자 드미트리가 아니라 아메리칸 맑시스트 토마스가 살아남았더라면 무인도 사회의 모습은 어땠을까. 잠깐 덧없는 상상을 해보지만 영화가 전한 강력한 냉소는 이내 공허한 상상을 차단하고 만다.
**해당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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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개념 로맨스 드라마 추천
내 브런치 글들을 꾸준히 읽어오신 분들이라면, 이 사람 로맨스 드라마 잘 못 본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분들도 있으실 것이다. 그렇다. 귀가 딱지가 앉도록 서술한 바 있듯이 로맨스 드라마를 완주한 경험이 정말 없다. 그런데 정말 하루만에 완주한 드라마가 생겼다. 로맨스 장르를 이렇게 빨리 본 것도 정말 기록적인 일이지만 보다가 질리지 않고 게속 봐온 내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낄 정도로 이것은 정말 흔하지 않은 일이기는 하다. 오글거림을 참아내고, 드라마 하나를 완주한 내 자신이 너무 뿌듯하기도 하고, 괜찮은 드라마인데, 사람들이 은근히 모르는 것 같으니까, 도시남녀의 사랑법에 대한 리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1. 3쌍의 커플, 그들은 모두 현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우리네와 같은 사람들
이 드라마는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어떤 제작진이 사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이유로 3쌍의 커플, 6명의 남녀들을 각각 인터뷰를 하고,그 인터뷰의 진위 여부를 가리기 위한 실제 그들의 연애 라이프를 보여주는 포맷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각자 굉장히 쿨한 연애들을 하는 것처럼 답변하지만 실제 연애 라이프에서는 각자 조금씩은 찌질한 면모들을 보이는 것이 굉장히 인간적이기도 하다.
여기서 등장하는 세 쌍의 커플.
건축가인 재원과 마케터인 은오. 이 커플이 세 커플 중에서 가장 메인 커플이다. 그리고 프리터의 삶을 살아가는 린이, 그리고 그녀의 오래된 남자친구 경준. 그리고 또다른 커플, 선영과 건. 이 세 커플은 각자의 캐릭터로서의 관점에서는 특별히 이 두 커플들이 모여 각자만의 연애관을 공유하는 포맷은 굉장히 신선했고, 이 여섯 사람들을 보면서 시청자들도 각자의 연애라이프와 비교해보면서 공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랑 앞에서 발광을 해가면서까지 표현하는 재원, 그리고 사랑 앞에서 가장 소극적인 은오, 오래된 연애를 하고 있는 두 남녀, 그리고 겉으로는 제일 쿨한 연애를 하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지지부진한 연애를 하고 있기도 한 건과 선영, 이 세 커플 중에서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라도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있지 않을까 싶다. 마치, '당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몰라서 다 준비해봤어'같은 느낌?? 각자의 연애에 대한 고민을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상담하듯이 진행되는 포맷이라서 연애에 대해 집단지성, 토론을 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드라마이기 때문에 포맷의 매력이 다한 드라마라고 생각한다.
2. 대사의 티키타카
기본적으로 인터뷰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인터뷰 와중에도 6명의 남녀가 서로 솔직한 대화를 가장한 디스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인터뷰 도중에는 만나지 않지만 은근히 존재하는 티키타카 때문에 타격받고, 인터뷰하는 제작진들이 욕받이가 되는 그 모든 과정들이 굉장히 골때리고 재미있다.
역시 나같이 오글거림을 단 5초도 못 참는 나에게는 대사의 티키타카가 정말 중요하다. 평소엔 쿨하고, 시크한 재원이 미스테리한 은오 때문에 상사병 걸리는 과정과 아주 지랄발광하며 시들시들해져 가는 모습이 아주 재미있다. 사실 나는 재원의 그런 모습 때문에 이 드라마 끝까지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멀쩡한 척하는 또라이인 은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굉장히 흥미로웠다. 이런 캐릭터 본 적이 있었던가. 조증과 우울을 넘나드는 캐릭터라서 너무 정감이 갔다. 고백하자면, 두 사람이 알콩달콩하던 모습은 정말 못 봐주겠어서 빨리감기 했지만 두 사람이 정말 환장의 호흡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또한, 프리터로 사는 린이의 삶이 불안해보이는 경준도 이해가 가고, 헤어졌지만 헤어진 것 같진 않은 건과 선영의 관계성도 아주 재미있다. 다양한 인간상의 연애를 훔쳐본 느낌이 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연애에 대해서 굉장히 쿨한 척하기도 하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연애에 있어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그들도 연애가 항상 어렵기 때문에 그런 허세도 부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드라마를 보고 나니, 이 여섯 사람들 전부 맹탕들이었다. 우리 모두 사랑 앞에서는 하수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맹탕들.
3. 인생에 현타가 온 사람들에게 던지는 위로
살짝 스포가 될 수 있지만 은오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겪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살고 있다. 면접관의 평범하다는 말에 크게 상처를 받았던 은오는 그 말을 듣고 난 이후, 이상해보일 만큼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 내가 평범하기 때문에 나는 경쟁력이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직설적으로 듣고 나면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싶고, 그 상처는 치유가 된다고 해도 완벽히 치유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은오의 노력들이 평범하다는 말로 묵살되어 버리는 사회의 비정함에 또다시 반항심이 밀려오다가도 은오가 혼자서 정말 열심히 길을 개척해나가는 모습은 지금 현재 나에게도 큰 위안이 되었다. 나에게는 은오가 재원을 만나는 우연은 없겠지만 은오처럼 없는 길이라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허구의 인물에게 위로를 받게 되는 드라마를 만나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맨스 드라마를 보고, 이런 포인트에 감명을 받는 나는 뭐지? 좌파인가 싶지만 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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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곡을 깨는 얼굴들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말이, 글이, 작품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세계를 산다. 어제의 유행가는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는다. 시대를 풍미하며 많은 공감을 사던 장르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기도 한다. 누군가가 했다는 말은 바람 속에서 이리저리 조각나고 찢겨 날아다니다 잊힌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서 우리에게 전해지는 모든 이야기들은, 특히나 시간과 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 여기의 내게까지 와 닿은 이야기들은, 여상해 보여도 사실 엄청난 질곡을 깨뜨리고 다가온 것이다. 한 이야기와의 만남을 기적으로까지 우러러볼 순 없더라도, 소중한 경험임은 분명하다. 심지어 그 이야기가 내 마음에 깊이 와 박혔다면, 그렇다면 그건 기적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이 영화는 그래서 내게 기적이었다. 질곡의 땅에서 태어나, 밤에서 낮으로 또 아침에서 저녁으로 전해지다가, 오래 전의 음악을 덧입고 찾아온. 오월의 전주에서 이 영화를 만났다. ‘영화는 계속되어야 한다Film goes on’이라는 주제가 곳곳에 단단한 차돌처럼 박혀 있는 영화관에서. 사람들 틈에서 박수를 치고 눈물을 훔치고, 개봉하면 꼭 동종업계 사람들과 다시 봐야지 생각했다.
영화 <전장의 피아니스트>는 시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종교 극단주의자 그룹, 흔히 IS로 불리는 ‘다에시’가 시리아 일대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을 배경으로 한다. 한때는 평화롭고 풍요로웠을 도시는 딱딱한 공포의 압력으로 덮여 있다. 언제 총성으로 깨질 지 모르는 고요한 오후 햇살 아래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는 카림의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트로이메라이. 환상, 꿈이라는 뜻의 단어는 슈만의 <어린이 정경> 7번째 곡이다. 슈만이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만들었다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을 총성이 찢는다. 사람들이 숨어 지내는 곳, 굳어 있는 도시에서 유일하게 서로의 쉴 곳이 되어주는 은신처 같은 곳도, 안전하지는 않다.
그래도 거기서 사람들은 각자의 일을 한다. 카림은 피아노를 치고, 카림의 사촌은 언젠가 이 전쟁이 끝났을 때를 기다리며 로스쿨에 가고 싶다는 일념으로 토플 공부를 한다. 삼백 년 전에도 같은 모양새였을 것 같은 얼굴로 물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아이를 돌보는 사람도, 체스를 두는 노인들도 있다.
물론 이곳이 진짜 무릉도원은 아니기에, 이 모든 건 잠시뿐이다.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압제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한다. 예술까지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사회에서, 싸움보다 예술이 하고 싶은 카림은 시리아를 떠날 계획을 세운다. 연주만으로도 눈엣가시가 되는, 어머니의 유품 피아노를 팔아 그 돈으로 유럽에 가겠다는 것이다.
영화의 스토리라인은 카림의 발을 따라 간다. 함께 숨어 지내는 사람들도 마뜩찮아 하는 피아노를, 다에시의 일원들이 마음에 들어 할 리 없다. 수시로 급습 나오는 다에시 대원들은 결국 피아노를 부수고, 카림은 자신의 현재이자 미래가 모두 걸린 피아노를 수리하기 위해 똑 같은 피아노가 있다는 곳으로 무작정 길을 나선다. 피아노는 고사하고 그 집이 남아있을 지조차 보장이 없는,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폭격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도시로.
카림의 여정을 따라 수많은 인물들이 스쳐간다. 아버지가 다에시 대원들에게 끌려갔지만, 그래서 아마 돌아올 수 없겠지만, 어른들의 돌봄 아래서 자라나는 꼬마 지아드, 공개 처형 당하는 동성애자, 폭격으로 이미 텅 비어버린 도시에서 만난, IS에 맞서 싸우는 여성 부대원,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러나 친절을 베푸는 이웃… 10년도 훌쩍 넘어선 내전에서 수없이 비춰지던 얼굴들이, 그렇게 지나간다. 때로는 이름을 남기고, 가끔은 이야기를 남기고, 심지어 어떤 경우엔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채로.
한 명의 얼굴이라도 더 담고 싶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 점이 누군가에게는 너무 길고 인위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한 줄기라도 더 대변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였다. 질곡의 땅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하나하나의 이야기들. “타인의 얼굴”들. 전쟁은, 분쟁은 각양각색 소극 같은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단선적인 비극으로 가린다. 생존 외의 아무 것도 바랄 수 없는 극한으로 치달려도, 그래도 그 뒤에서 소극은 계속된다. 목숨을 걸고 피아노 부품을 구하러 폐허로 뛰어드는 카림을 손쉽게 비난할 수는 있지만, 생존 이외의 모든 것을 거세하고 살아갈 수는 없다. 삶을 이어가는 한 꿈도 이어진다.
삶이 이어지는 한 꿈을 이어간다. 광기 어린 상황에서 연필 사각이는 소리를 멈추지 않는 이. 내일이 있을 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가게 창틀을 푸른색으로 칠하는 이. 상대의 거친 믿음을 비틀어 무기로 삼는 이. 자기들의 방식으로 희망을 말하는 것. 그것이 각자의 방식대로 이어가는 싸움이다.
아마도 실화가 아닐, 환상에 가까운 결말 또한 그래서 희망으로 읽혔다. 귓병으로 유서까지 썼던 베토벤이 다시 음악으로 마음을 굳히고 시작한, 그의 제2 황금기를 상징하는 <발트슈타인>. 온 세상이 시리아를 잊어가는 것 같지만, 그렇게 다른 무수한 전쟁들처럼 시리아 사람들의 고통도 소리 없이 잊히고 있지만, 보라, 여기서도 우리는 다시 시작하겠다는, 계속해보겠다는 결연한 마음마저 읽힌다. 그건 카림의 싸움이자, 시리아의 싸움이다.
실화를 기반으로 했다는데, 이 이야기에 묻어난 실화는 대체 몇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결국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만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투사는 죽거나 잡히거나 도망치지만, 투사가 아닌 자들도 그렇다. 죽지도 잡히지도 않고 전쟁의 손아귀에서 도망친 자들만이, 생존하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다.
지극히 특정한 분쟁의, 특정한 이야기임에도, 보고 있노라면 이 땅을 지나간, 지금도 사라지지 않은 무수한 전쟁들이 보편적으로 떠오른다. <1917>도, <동주>도 생각난다. 동주와 몽규 같은 이들이, 스코필드와 블레이크 같은 이들이, 어딘가에서 죽거나 잡히거나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하나하나의 얼굴들이.
<전장의 피아니스트>가 가까이에 비춰 준 “타인의 얼굴”들을 떠올린다. 시리아의 무운과 평화를 빈다. 이제는 이 문장을 그만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쓴다. 백여 년 전 독립만세를 외친 사람들은 더 이상 독립만세를 외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오길 얼마나 바랐을 것인가. 지금도 마음 다해 하는 일이 어서 소멸되길 바라며 일하고 움직이고 꿈꾸는 모든 이들의 무운을 함께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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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시작해
좋은 음악, 좋은 영화를 찾아 떠도는 인디언(independent+ person)을 위한 영화.
"영화를 다시 보는 행위란"
나에게 영화를 다시 보는 시간은 자신의 성숙해짐에 감동하는 시간이다. 이 영화를 예시로 들었을 때 첫 번째 봤을 때보다 두 번째에 봤을 때가, 그리고 세 번째에 봤을 때에 이 영화에 대해 더 깊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았던 포인트들이 보이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고,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겪으면서 드디어 감독이 의도한대로 바라보는 느낌이라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아,, 나 멋있게 잘 컸네,,, 이런 생각도 하고"라는 생각을 주니까)
그런 의미에 있어서 다시 찾게 만드는 영화들은 베리 머치 땡큐다. (비긴 어게인은 나 자신을 3번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줬다.)"나를 3번 사랑하게 만든 이 영화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인가"
#음악
음악에 대해선 취향이 확고하며 질 인디 음악만 듣는 내가 유일하게 인정한 영화 ost다.(개인적으로 라라랜드 ost 별로 안 좋아함)
심지어 아무리 좋아하는 인디 음악이라도 여러번 들으면 질리는데, 이 영화의 ost는 도통 그럴 생각을 안 한다.#거리 녹음
내가 좋아하는 음악들은 전부 일상적인 소음이 들어간다.(캔 따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 소리 등)
이 영화 특성상 거리에서 녹음을 해서 음반을 만드는 컨셉이기 때문에 ost에도 그러한 소음이 들어간다. 이 또한 나에게 베리 머치 땡큐였다.
녹음실에서 작업한 음악들은 음질은 좋아도, 알게 모르게 가수와의 벽이 확고하게 느껴졌다. 그에 반면 소음이 들어가는 음악들은 제 3자의 입장에서 노래를 듣고 있던 나를 끌고 와 나를 바라보며 공연을 해준다.
주변에서 듣는 일상적 소리가 들어가기 때문에 더 노래에 공감할 수 있으며, 그 공간을 상상하게 만들어 더욱 더 생생하고 가사가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여기에 +a로 비긴 어게인은 녹음 장소를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비슷한 장소에 가서 이 영화의 ost를 틀면 <비긴 어게인>의 명대사"내가 음악을 이래서 좋아해, 모든 평범함도 음악을 듣는 순간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변하니까"
와 비슷한 감정을 겪을 수 있게 해준다. 주인공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영화 한 번 봤다고 사는 것이 각박한 것만이 아니고 아름다운 것일 수 있다고 희망을 갖게 만들어주니까. 주변이 비현실적으로 서정적이라 삶에 애정을 겪게 만드니까. 내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영화 주인공과 관객이 겪는 감정의 벽을 허무는 방법을 제시해준 영화는 <비긴 어게인>이 최초였다.
첨원하지면, 가로등 빛이 유난히 빛나는 밤에, 연인과 산책할 때( 비 온 다음 날 혹은 건물의 빛이 산란이 되는 한강과 호수 공원이면 더 좋다.) 이 영화 ost를 트는 걸 추천한다.
그러면 너를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이 물에 일렁이는 가로등 빛처럼 일렁이는 경험을 겪을 수 있을 테다.
더 이야기해봤자 구차해지는 것이기에
음악이 필요한 밤, 속는 셈치고 이 영화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영화는 분석해야 하는 것이 아닌, 느끼는 것이다. 오늘 밤은 느낄 수 있는 영화 <비긴 어게인 어떤가요?>
파노라마 에디터_장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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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주 최신 개봉영화(화이트데이, F20, 스틸워터, 쁘띠마망, 인어가 잠든 집)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10월 1주차 #개봉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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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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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바타: 불과 재> 예고편
[아바타: 불과 재] 예고편 공개!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선사하는 새로운 판도라로의 여정이 시작된다 불과 재로 뒤덮인 판도라의 저편, 12월, 오직 극장에서 만나보세요!🔥 [아바타: 불과 재] 12월 극장 대개봉 #아바타 #아바타불과재 #avatar #avatarfireand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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