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0-02 09:44:52
‘관계성’에 관한 잊히지 않을 인장
영화 〈위국일기〉
두 장면이 있다. 여고생 ‘아사’와 친구 ‘에미리’가 텅 빈 학교 체육관에 둘이서만 있다. 두 사람은 넓은 체육관에서 때로는 가까이 앉아, 때로는 뛰어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에미리는 아사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점을 알려주려는 참이고, 아사는 그런 에미리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반응과 질문을 던져 종종 민망해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긴장은 없다. 이 장면의 주요한 정서는 두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안전하고 편안한 거리감으로 신뢰와 애정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서 나온다. 텅 빈 체육관에서 두 사람을 방해할 요소는 없다. 오롯이 둘만 마주해 말과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완벽한 접속’은 불가능할 테지만 상관없다. 타자를 완벽히 내 것으로 하는 관계는 공감이라기보다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거리는 있지만 결코 멀지는 않고,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성. 텅 빈 체육관의 두 소녀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애정이 깃든 관계의 모델이 무엇인지를 가늠케 해준다.
두 번째 장면도 그렇다. 이번에는 아사와 그의 이모 ‘마키오’다. 두 사람은 탁 트인 바닷가의 한적한 계단에 앉아 있다. 이번에도 딱 달라붙어 있는 대신 위아래로 몇 칸의 간격을 둔 상태다. 아사와 에미리가 그러했듯, 두 사람은 때로는 앉아서 때로는 일어서서 움직이며 말과 감정을 나눈다. 닫힌 공간인 체육관의 폐쇄성이 커밍아웃하는 에미리에게 안전하다는 감각을 주었다면, 탁 트인 바닷가는 뜻밖에 한 가족이 된 조카와 이모가 앞으로 만들어갈 관계의 양상이 무한히 깊고 푸르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하나가 될 필요 없는, 적당한 거리를 조정해가며 서로의 곁에 있는 관계의 모델이 다시 한번 아름다운 이미지로 재현된다.
〈위국일기〉는 관계성에 관한 영화다. 가장 주요하게 다뤄지는 건 아사와 마키오의 관계다.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아사는 자신의 엄마와 십수 년 전에 절연한 이모 마키오와 한 가족을 이룬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아사를 두고 내뱉는 무심하고 무례한 말에 분노해 홧김에 자신이 아사를 데려가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조율해야 할 것은 무수히 많다. 서로 다른 생활 습관, 성격은 당연하고 돌봄을 어떻게 주고받을지도 협상해야 한다. 비혼 여성 마키오는 갑자기 생긴 조카를 돌보고 보호하는 일에 동반되는 책임감이 생경하면서도 때로는 부담스럽고, 아사 역시 자기 엄마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면서도 그 이유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 마키오와의 관계가 쉽지만은 않다.
영화는 두 사람이 차이를 조율하며 일상을 맞추고, 새로운 관계 모델을 학습하며, 죽은 아사의 부모님을 애도하는 과정, 나아가 억압적인 엄마(아사)/언니(마키오)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아사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 어른이 맺는 친구/연애 관계에서도 지금껏 모르고 지낸 관계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키오 역시 아사를 돌보며 기존의 자기 관계망에 더욱 깊이를 더해나간다.
크든 작든 모든 등장인물의 관계성을 세심히 그려내는 〈위국일기〉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 서로를 북돋는 관계는 완벽한 이해와 공감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존중하며 곁에 머무를 때 나온다고.
공감과 이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쓰인다는 느낌을 곧잘 받는다. 그러나 자신만의 고유한 결을 축적해온 타자는 결코 누군가가 ‘완벽’하게 포착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일이 가능하려면 타자는 생동하는 존재이기를 멈춰야 한다. 완벽한 이해는 타자가 주체이기를 멈추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오롯이 희생해 내놓을 때만 가능하다. 심지어 이마저도 ‘해부학적’ 이해에 그친다. 죽은 동물과 곤충의 박제에서 우리가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장악하듯 이해하려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감으로 은은하게 보듬는 관계의 모델이 필요하다.
〈위국일기〉가 공들여 보여주고자 하는 건 바로 이러한 관계성이다. 극적인 전개나 자극적인 요소로 관심을 끌지는 않지만, 자신뿐 아니라 서로의 일상을 지탱하며 함께 나아가는 건강한 관계의 양상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국일기〉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관계가 그렇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두 장면은 영화가 그려내는 여러 인상적인 관계를 아름답게 재현하며 잊히지 않을 인장을 남긴다. 체육관과 바닷가.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미지화된 관계성은 ‘선을 넘는’ 관계에 지친 사람들에게 은은한 위로로 다가갈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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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이 여정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DIRECTOR. 미겔 고메스(Miguel GOMES)
CAST. 크리스타 알파이아테(Crista ALFAIATE), 공살로 와딩턴(Gonçalo WADDINGTON) 외
PROGRAM NOTE.
1917년 양곤. 영국인 공무원 에드워드는 약혼녀 몰리와의 결혼을 앞두고 도망친다. 그래도 그와의 결혼을 결심한 몰리는 에드워드의 뒤를 쫓는다. 영화의 제목 <그랜드 투어>는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 또는 일본에서 끝나는 아시아 투어 여정에서 기인한다. 미겔 고메스는 2019년 그랜드 투어를 시작해 태국,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에서 영상을 찍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중국의 국경이 폐쇄되자, 감독은 스태프와 포르투갈로 귀국한다. 영화의 일부는 로마와 리스본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중국의 영상은 어떻게 확보했을까? 미겔 고메스는 중국 현지에 촬영팀을 꾸린 뒤, 포르투갈에서 원격으로 촬영을 감독했다. (시차 때문에 매일 밤 자정에 작업을 했다). <그랜드 투어>의 기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두 연인의 여정을 카메라에 담으며 미겔 고메스는 자유롭고 총체적인 스펙터클을 창조한다. 영화에는 수확, 종교 축제, 오토바이 행렬 등 현대 아시아의 모습을 담은 매혹적인 아카이브 이미지, 그리고 주인공이 안개가 자욱한 강을 건너거나 매혹적인 밤의 숲을 가로지르는 모험 소설 속 상상의 아시아가 공존한다. 미겔 고메스는 <그랜드 투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영화에는 국가, 성별, 시대, 현실과 상상, 세상과 시네마 등 분리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투어가 있다. 나는 무엇보다 관객을 이 투어에 초대하고 싶다. 이것이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서승희)
그랜드 투어는 본디 17세기 중반부터 유럽 상류층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약 2-3년을 들여 신문물을 익히던 여행이다. 가정교사를 대동한 젊은 남성 귀족이 당시 유럽 문화의 최고 중심지였던 프랑스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계속해서 발달되고 구시대의 계급 구조 또한 변화되면서, 그 의미가 점차 퇴색된다. 19세기가 되면 대륙횡단철도를 포함한 각종 철도, 수에즈 운하 등이 차차 개통되면서 <80일간의 세계 일주>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이 된다.
20세기에는 제국주의의 광기가 시작되고, 이제 평범한 유럽인들도 식민지 관리를 위해 아시아로 향한다. 기이했던 이 시절은 문학의 역사에도 독특한 족적을 남긴다. 인도 벵골 지역에서 아편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나, 추후 영국 본토 생활을 그만두고 근무지를 버마(미얀마)로 신청한 인도제국 경찰관, 조지 오웰은 <버마 시절>에 그 시절의 축축한 야만을 기록했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베트남 사이공 공무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인도차이나 반도’ 곳곳을 다니며 살았고, 이는 <연인>으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 세계에 계속해서 묻어난다.
2019년, 유럽의 한 영화감독 또한 행선지가 비슷한 여정을 꾸린다. 포르투갈 출신의 미겔 고메스 감독이 영화 <그랜드 투어> 촬영을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에드워드는 1910년대 버마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7년째 약혼자 상태인 몰리와의 결혼을 코앞에 두고, 영국에서 찾아오는 예비 신부를 피하고 싶다며 갑작스러운 도주 길에 오른다. 범죄를 저질러도 저렇게 열심히 도망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저 도망은 대체 왜일까… 싶은 이 여정은 국경을 넘어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베트남을 거쳐 일본, 중국에까지 이른다. 이 여정은 에드워드의 도주를 따르는 단단한 의지의 여성, 몰리의 행적을 통해 한 번 더 펼쳐진다. 즉 이 영화 스토리의 골자는 서로 겹쳐지기도 달라지기도 하는 두 개의 여정이다.
영화 속 여정들은 17세기의 ‘그랜드 투어’와도, 19세기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와도 그다지 닮지 않았다. 20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제국주의의 광기와도 닮지 않았다. 그 닮지 않은 모양새를 아무 설명도 필요 없이 미장센으로 구현한다. 꿈을 비롯한 일부 장면을 제외하고 모두 흑백인데, 그 안에서 각지의 아름다움이 빛난다.
20세기를 재현할 때에는 환상적이다. 흑백이라 더 어렴풋하여 아름다워 보인다. 희뿌연 안개 낀 정글을 가로지르는 기찻길, 거기서 들리는 새 소리, 당시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들던 싱가포르의 호텔, 방콕의 파티 현장 등은 모두 동양인 보기에 ‘적절’하다. 20세기 동남아 내 왕족의 부를 고스란히 재현하여 노골적으로 비춰 보이는 오리엔탈리즘을 피하고, 보는 동양인 마음 복잡스럽게 만드는 일 없이, 단순하게 영화를 영화로서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선을 적절히 지킨다.
소설을 읽어주는 느낌이 드는 내레이션 또한 국경선을 넘길 때마다 그 나라의 언어와 목소리로 새로이 펼쳐진다. 화면에는 현재 그 도시의 광경이 드러난다. 일본에 도착한 에드워드가 식당에서 마주한 일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는 동안, 오사카의 작은 식당에서 국수인지 우동인지를 먹는 손님들의 모습과 음식을 내는 사장님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20세기 이야기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객석에 있는 나의 동시대성을 밟고 서게 된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라도 나올 것 같은 검박한 장면들이 겹쳐 흘러간다. 거위 알을 줍고 야자 열매 껍질을 벗기는 농부, 연꽃을 수확하여 팔기 좋게 단으로 묶는 여성, 오토바이와 차량이 줄지어 다니는 도로의 모습… 무엇보다도 감독이 꽤나 감흥을 깊이 받은 듯한, 동남아 각국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전통 인형무가 여러 차례 나온다. 덕분에 관객은 20세기와 21세기를 골고루 오가며 독특한 여행을 한다. 그러는 동안 내내 궁금해진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저 정도로 싫으면 차라리 결혼을 파하든지 대체 왜 저렇게까지 도망가는 것일까?
에드워드의 여정은 행선지를 못박아둔 여행이 아니라, 탈출이라는 목적만을 못박아둔 여행으로, 목적을 위시하여 행선지는 계속해서 추가된다. 이는 에드워드의 여정뿐 아니라 그 뒤를 따르는 몰리의 여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두 사람은 길 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유 모를 이 선형적 여정의 끝으로 점차 달려간다.
그리고 여정의 끝에서, 관객은 감독이 준비한 선물을 맞이한다. 이 선물은 거울처럼 관객을 비추며, 관객에 따라 다른 답을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여정에서 ‘왜’에 집착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뾰족한 물음표를 보고 팔짱 끼고 본 영화가, 팔짱 끼고 미간을 찌푸린 내 머리 위로 시원하게 내리치는 죽비 같았다.
모든 영화는 감독이 내놓는 상차림이다. 어떤 영화는 든든하고 친근한 밥상 같고, 또 어떤 영화는 조금 까다로운 미식의 세계 같다. 이 영화는 자기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요리사가 화려하게 꾸며 올린 테이블 같았다. 곱씹을수록 더 매력적인, 하나하나 더 뜯어 알고 싶은 그런 상차림. 영화를 본 직후보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만족스러운 상차림이었다.
10/04 20:00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상영코드 083)
10/09 13:30 CGV센텀시티 1관 (상영코드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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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주 차, 최신 씨네 뉴스
aomg 의 프로듀서이자 래퍼 #그레이 가 넷플릭스 영화 <발레리나>의 음악감독으로 참여한다고 합니다.
젊은 영화감독과 가장 핫한 프로듀서의 만남이라니 너무 기대가되는데요.
부산국제 영화제에서도 상영하는 발레리나 ! 공개되면 무조건 !
한국 추석영화 사실상 셋 다 부진
이번 추석 연휴엔 <천박사 퇴마연구소:설경의 비밀> <1947 보스톤> <거미집> 등 한국영화 기대작 3편이 공개됐습니다. 두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천박사>는 선전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일주일이나 이어진 연휴에 손익분기점 200만명을 넘기지 못한건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어 추석 연휴 대비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했습니다.
이동욱 X 임수정 로맨스 <싱글 인 서울> 예고편 공개
혼자가 좋은 파워 인플루언서 영호와 혼자는 싫은 출판사 편집장 현진이 싱글 라이프에 관한 책을 만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웰메이드 현실 공감 로맨스 <싱글 인 서울>이 티저 예고편을 공개했습니다.
이동욱과 임수정의 역대급 만남으로 기대를 모으는 <싱글 인 서울>은 오는 11월 29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고 합니다.
부산국제 영화제 이제훈 건강상 이유 불참, 배우 박은빈 단독 사회
제 28회 부산국제 영화제 개막식 공동 사회를 맡았던 배우 이제훈이 건강상의 사유로 불참하면서 배우
박은빈이 단독 사회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부산국제 영화제는 새로운 남성 사회자 선정을 고려하는 대신
박은빈 배우의 단독 사회를 결정했는데요 개막식 최로의 단독 사회자이자, 최초의 여성 단독 사회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강하늘 X 전소민 <30일> 신작 예매율 1위 급상승
영화 <30일>이 예매율 1위와 동시에 2일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라섰습니다. 30일은 서로의 찌질함과 똘기를 견디다 못해 마침내 완벽한 남남이 되기로 한 이야기로 개봉 이틀차인 오늘까지 누적 관객수 23만명을 기록했습니다.
<발레리나> 그레이, 음악 감독 참여
이충현 감독이 넷플릭스 영화 <발레리나>에 뮤지션 그레이를 음악감독으로 발탁했습니다.
<발레리나>는 경호원 출신 옥주가 소중한 친구 민희를 죽음으로 몰아간 최프로를 쫓으며 펼치는
복수극입니다. 이충현 감독은 음악이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음악으로 독보적인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최근 국내외 영화/OTT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해 보는 'LATEST CINE NEWS’였습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댓글과 좋아요 콕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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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볼 수 없는 친구를 위한 번쩍번쩍 대작전.
제25회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에서 만난 기억에 남고 재미있는 영화를 하나 꼽으라면 이 영화를 소개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영화 귀신 친구다. 영화 포스터나 첫 장면을 보기만 해도 공포스러운 분위기 그 자체를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랄 수도 있지만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품고 있다. 이렇게 유쾌한 단편 영화를 처음 경험해봐서 더욱 재미있게 영화제를 즐길 수 있었는데, 이 영화를 티빙에서 관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기뻤다. 4개의 단편을 묶어놓은 영화 우스운 게 딱! 좋아! 에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하여 관람하길 바란다.
'퉁퉁 퉁퉁퉁 퉁퉁 퉁퉁 퉁퉁!' 하는 둔탁한 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친구 지혜가 서 있었다. 소연에게 찾아와 무언가를 부탁하지만 명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소연은 지혜의 집에 방문하게 되고 방을 둘러보다 이 방에서 함께했던 그들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러다 문득 지혜가 부탁했던 그 무언가를 곳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친구를 위한 친구에 의한 '성'스러움 지키기 대작전이 시작된다. 감추면 감출수록 드러나는 지혜의 비밀을 소연은 지킬 수 있을까.
상영시간 30분 내내 이렇게 웃기면서 몰입감까지 좋은 영화는 드문데, 내겐 이 영화가 그랬다. 비밀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뒷배경의 숨 막힘으로 인해 더욱 긴박함이 더해지는 과정이 공감성 수치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유쾌하게 풀어나가 재미있었다. 즐거움으로 시작해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 짓는 영화의 흐름은 형형색색의 불과 진동소리로 감동과 재미를 더한다. 적어도 마지막은 "다시 보지 못할 나의 친구야, 안녕."이라는 말로 맞아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위잉 위잉 번쩍번쩍!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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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시선과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 "캐롤"
날 부정하며 산다면 무슨 엄마 자격이 있겠어?
캐롤의 말 중에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그 누구도 제어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자기도 모르게 우연한 어떤 계기로 점차 스며들 듯이 어느 순간 빠져들게 되죠.
자신도 모르게 말입니다.
그 대상은 한정되어 있지 않고 무한히 열려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간의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남자와 남자 간의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여자와 여자 간의 사랑으로 나타나기도 하죠.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과 눈은 속일 수 없나 봅니다.
그 순간만큼은 이게 진정 나의 모습인가 할 정도로 나조차도 몰랐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죠.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저절로 눈길이 가면서 쫓느라 바쁘고,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랑'의 면모를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캐롤'입니다.
때로는 사랑이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다가도, 또 때로는 그런 자신을 부정하기도 하며 사랑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찰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영화 '캐롤'은 사랑은 시선과 마음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시선을 통해서 그 메시지를 더욱 강렬히 전달해주죠.
영화의 가장 큰 핵심이자 매력은 바로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를 보는 여러분도 등장인물의 시선에 집중하며 같이 따라가면서 그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더욱 재미있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영화 '캐롤'은 여자와 여자 간의 사랑을 보여주는 애절하고 강한 인상을 안겨 주는 영화입니다.
그럼 어떤 영화인지 간단히 살펴볼까요?
첫 번째 사진의 갈색머리 여성의 이름은 '테레즈'이고, 두 번째 사진의 금발머리 여성의 이름은 '캐롤'입니다.
영화는 테레즈의 지인인 '잭'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면서 시작됩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음식과 바가 어우러진 어느 장소였습니다.
그는 우연히 테레즈를 발견하고 인사를 하죠.
테레즈와 캐롤은 멀리서 봤을 때 평범하디 평범하게 식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잭이 인사를 걸어오는 바람에 캐롤은 어쩐지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황급히 떠나게 됩니다.
잭을 따라 차를 타고 가게 된 테레즈 역시 얼굴에는 미련이 가득한 모습입니다.
창밖에 비춰지는 캐롤의 모습을 보면서 말이죠.
테레즈의 시선이 캐롤에게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영화는 이 장면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테레즈와 캐롤의 첫만남입니다.
테레즈는 백화점에서 일하는 직원이었고, 캐롤은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딸에게 줄 선물을 사러 온 손님이었습니다.
테레즈는 우연히 캐롤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빠져들어 넋놓고 바라보게 됩니다.
테레즈의 시선이 캐롤에게 집중되어 있죠.
이 이후부터 테레즈는 알게 모르게 캐롤을 신경쓰게 되는데요.
캐롤이 두고 간 장갑을 캐롤에게 전달해준다든지, 캐롤이 산 기차 장남감 세트가 잘 도착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재차 확인하는 등 은근히 캐롤을 생각하게 됩니다.
캐롤 또한 테레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점심 약속을 잡게 되죠.
점심시간에 만나게 된 둘은 서로에 대해 차차 알아가며 또 다른 약속을 잡게 됩니다.
21일 일요일 오후 2시, 캐롤은 테레즈로부터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게 되죠.
이렇게 테레즈와 캐롤은 이를 계기로 만남을 가지게 되는 횟수가 점차 늘어나게 됩니다.
테레즈와 캐롤에게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개인 사정이 숨겨져 있었는데요.
캐롤은 위협과 혐박을 가하는 남편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혼 소송 준비중이었습니다.
테레즈 또한 잘 챙겨주는 남자친구가 있긴 했으나,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테레즈는 사진을 좋아하긴 했으나 사람을 제외한 사진만 찍었죠. 사람을 찍는 건 사생활을 침해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사진에 있어서도 확신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중에 캐롤은 테레즈에게 같이 떠나줄 수 있겠냐며 제안하는데요.
Would you?
영화 속에서 캐롤이 테레즈에게 이렇게 두 번 질문합니다. 캐롤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이 남아서 강렬한 문장 중 하나이지 않나 싶습니다.
여행 중에 이 둘은 점차 자신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테레즈는 사람 사진을 찍지 않다가 캐롤을 계기로 사람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테레즈가 찍은 캐롤의 사진이랍니다.
여행이 깊어져가면 갈수록 테레즈와 캐롤의 관계도 점점 깊어져만 가는데요.
테레즈는 캐롤과의 여행을 통해 남자친구에게는 줄 수 없었던 확신을 캐롤에게는 확신할 수 있게 되면서 줄곧 자신을 의심해왔던 것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이 캐롤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캐롤 역시 테레즈와 같이 지내게 되면서 테레즈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게 됩니다.
첫 만남부터 이 둘은 강한 이끌림으로 인해 서로에게 확신했을 수도 있지만요.
하지만 캐롤에게는 4살이 된 어린 딸이 있습니다.
이혼 소송 중에 자신이 동성인 테레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면 양육권을 가져올 수 없게 된다는 점을 캐롤은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캐롤에게는 딸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존재이기에, 캐롤은 테레즈로부터 어쩔 수 없이 이별을 고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테레즈도 나의 상황을 이해할 것이라면서요.
마음은 테레즈에게 가 있지만, 상황이 그녀를 이렇게 만드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헤어져 있는 사이, 테레즈는 '뉴욕타임스'라는 직장을 얻게 됩니다.
캐롤은 우연히 차 안에서 길을 걷고 있는 테레즈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캐롤의 시선은 한동안 테레즈에게로 가 있었고, 테레즈의 움직임을 따라 눈을 떼지 못하는 캐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되게 마음이 찡했는데요.
앞선 영화의 첫 부분에서 테레즈가 차 안에서 캐롤을 따라 시선을 쫓는 부분이 있었잖아요.
이번에는 테레즈가 아닌, 캐롤이 테레즈를 따라 시선을 쫓는 장면이 나타나니 잠시 뭉클했답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그런 것일까요?
운명은 어찌할 수 없는 걸까요?
서로를 향한 이끌림은 어느 방해물이 있어도 막아낼 수 없나 봅니다.
캐롤은 테레즈에게 이별을 고한 것을 계속해서 후회하기 시작했고, 뒤늦게서야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테레즈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 전에 캐롤은 양육권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하죠.
캐롤은 남편을 만나 힘겹게 울음을 삼키고 딸 양육권을 포기합니다.
대신 자주 만나는 것을 조건으로 하고요.
그러면서 캐롤은 이런 말을 합니다.
날 부정하며 산다면 무슨 엄마 자격이 있겠어?
캐롤은 테레즈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아주 확실히 깨닫게 되었고, 이렇듯 나에게 솔직해져야 딸에게도 부끄럼 없이 살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 같아요.
날 부정하며 사는 건 딸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주지 못할 거라는 것이겠죠.
저는 이 대사가 순간 저의 마음을 훅 덮쳐 왔달까요?
영화 캐럴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사였어요.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자아를 되찾은 느낌이라서요.
그리고 장면은 다시 처음 장면으로 되돌아옵니다.
이렇게 끝까지 보니 처음 봤던 장면하고 이해 정도가 달라져 느낌이 이상하고 새롭더라고요..
'아, 이게 이런 장면이었구나.' 하는 느낌이었달까요.
테레즈는 캐롤을 향한 약간의 원망이 있었던 것인지 약간의 냉정함이 보였고,
캐롤은 테레즈를 다시 잡고자 하는 절실함이 돋보였습니다.
아까 위에서 혹시 캐롤이 테레즈에게 한 말, 기억나시나요?
Would you?
캐롤은 또 한번 테레즈에게 제안합니다.
넓은 집에서 같이 살면 좋겠다고.
하지만 캐롤은 안 되겠다며 거절합니다.
그럼에도 캐롤은 자신이 오크룸에서 9시에 사람들을 만난다며 저녁을 먹을 예정이니 혹시 마음 바뀌면 이곳으로 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테레즈가 말이 없는 사이 처음에 등장했던 '잭'이 테레즈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처음엔 몰랐는데, 이렇게 알고 보니까 잭.. 너무 눈치 없는 거 아니니..?
이 타이밍에 나타나는 거, 너무했다는 생각 저만 한 것일까요? ㅎㅎ
처음에는 놓쳤던 테레즈와 캐롤의 감정과 표정이 이제서야 자세하고 섬세하게 보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캐롤은 테레즈를 아쉽게 뒤로 한 채 떠납니다.
테레즈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테레즈는 잭을 따라 파티를 가게 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잠시, 테레즈의 마음 또한 알게 모르게 캐롤에게 향해 있기에 결국에는 그 파티에서 빠져나와 캐롤이 알려준 장소로 급히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테레즈는 캐롤을 발견했고, 캐롤 또한 테레즈를 발견하게 되면서 이 둘이 서로의 시선을 마주한 채 영화는 끝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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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사랑이란 통제할 수 없는 무언의 힘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마치 보이지는 않지만 캐롤과 테레즈 사이에는 끊어져야 끊어질 수 없는 실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죠.
자신들이 아무리 부정해도 숨길 수 없는 게 시선이라는 사실도요.
그래서인지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의 시선에 초점을 맞추어 시선에 따른 인물의 감정을 세세하게 나타내어 줍니다.
이 부분에 얼마나 신경을 써 가며 만들었을까 영화 관계자 입장에서도 생각해보기도 했죠.
그만큼 인물의 감정선이 돋보였던 영화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도 이렇게 애절하고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편견을 한 차례 깨 주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는 이를 떠올리며 관람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크리스마스에 맞는 영화라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따뜻한 연말이 되어줄 것 같네요!
이상 영화 '캐롤'의 관람 후기였습니다.
가장 눈여겨 봤던 점!
테레즈와 캐롤 간의 시선.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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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마가 이사왔다 | '엑시트'를 꿈꿨던 오컬트 로코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2의 <엑시트>를 꿈꾸다
2019년 여름 극장가의 주인공이었던 <엑시트>는 겉과 속이 달랐다. 예고편과 포스터만 보면 평범한 한국형 코미디 같았다. 특히 배우들의 이미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영화처럼 느껴졌다. <건축학개론> 속 조정석의 코믹한 이미지와 <공조>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임윤아의 푼수 연기를 전면에 내세운 게 분명해 보였다.
실상은 달랐다. 구조 헬기를 부르는 장면처럼 확실한 웃음 포인트를 선보이면서도 재난 영화로서의 긴장감을 잃지 않는 균형감이 돋보였다. 특히 취준생 주인공들을 내세워서 가상의 재난을 현실에 비유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화학 가스에 뒤덮인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빌딩 위로 향하는 그들은 마치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기 위해 끊임없이 사다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스크린 밖의 2030 세대와 다를 바 없었다.
<엑시트>의 이상근 감독이 선보인 신작, <악마가 이사왔다>는 제2의 <엑시트>가 목표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겉모습과는 달리 내용물은 오컬트를 활용한 코미디와 신파로 가득한 가운데, 위로와 치유의 메시지로 여러 장르를 묶어 놓은 모양새가 <엑시트>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 전략은 유효하지 않다. <엑시트>와는 달리 다양한 장르를 묶어줄 연결고리가 허술한 나머지, 그럴듯한 소재에 비해 결과물은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이다.
서양식 오컬트와 코미디의 만남
<악마가 이사왔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요소는 오컬트다. 차이가 큰 동서양 오컬트를 코미디와 드라마, 로맨스를 엮는 실로 활용하는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다. 사실 서양과 동양의 오컬트는 사뭇 다르다. 전자가 대체로 악마 같은 대상을 퇴마하는 과정을 다루지만, 후자는 원혼이나 귀신의 트라우마나 사회적 억압 등에서 비롯된 한을 풀어주는 이야기가 많다.
그렇기에 동서양 오컬트를 한 작품 내에 녹여내기는 쉽지 않다. <파묘>만 봐도 알 수 있다. 수십 년간 한 맺힌 원혼을 달래기 위해 파묘를 하고 굿을 하는 전반부는 동양적 오컬트 영화에 가까웠다. 그에 반해 후반부는 한국을 배경으로 일본의 오니를 등장시키면서도 서양식 오컬트의 퇴마 의식과 비슷한 전개를 보여줬다. 천만 관객을 돌파하고도 <파묘>에 대한 반응이 꽤 엇갈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악마가 이사왔다>의 초반부는 서양식 오컬트 외양을 띤다. 퇴사 후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중 아랫집에 이사 온 '선지'(임윤아)에게 첫눈에 반한 '길구'(안보현). 하지만 그는 밤마다 전혀 다른 인격을 변하는 선지를 목격한 뒤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그녀의 정체를 탐색하고, 마침내 그는 선지의 아버지 '장수'(성동일)로부터 진실을 듣는다. 새벽마다 깨어나는 악마 '밤선지'가 '낮선지'에게 붙었으며, 이 악마를 퇴마하는 법은 없다는 것.
장수는 반신반의하는 길구에게 새벽 동안 밤선지를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하고, 제의를 승낙한 길구는 난동 벌이는 밤선지를 제어하느라 새벽마다 고통받는다. 그녀의 난동은 코미디의 소재이기도 하다. 밤선지가 편의점 신제품을 매일 싹쓸이한 뒤 한발 늦게 온 고객을 조롱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소소하게 일상의 금기를 깨는 악마적인 사건들로 구성된 광경은 마치 <핸섬이즈>와 유사한 결의 웃음을 자아낸다.
한국형 오컬트로 빚은 신파
하지만 밤선지의 사연이 드러나는 순간부터는 동양식 오컬트가 전면에 나선다. 수백 년 전 기근이 닥쳤을 때, 밤선지는 굶주림으로 가족을 잃었고, 마을 사람들은 고아가 된 그녀를 굿의 제물로 바쳤다. 이후 원혼이 된 그녀는 불에 탄 본인 유해가 담긴 옹기에서 조용히 소멸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낮선지의 외조모가 그녀를 옹기에서 내쫓으면서 휴식을 방해하자 그녀는 선지의 가족에게 대를 이어 붙어 있는 것으로 복수했다.
즉, 그녀는 퇴치해야 할 악마가 아니라 한을 풀어줘야 할 원혼이었다. 서양식 오컬트의 겉모습을 빌렸지만, 이면에서는 동양식 오컬트 서사를 착실히 쌓아 올린 셈이다.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여러 장르의 가교 구을 한다. 감성과 형식이 다른 두 오컬트가 동시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다. 오컬트의 성격이 달라지는 순간 코미디가 신파로 전환되기에 영화의 흐름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에 더해 진부함과 식상함의 농도도 옅어진다. 기근으로 가족을 잃고, 제물로 희생되었다는 사연은 여러 사극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클리셰다. 하지만 길구가 원혼의 한을 덜어주기 위해서 그녀가 담겨 있었던 옹기를 찾으러 제주도에 도착한 순간, 이 클리셰는 비로소 눈치채지 못했던 복선을 찾는 재미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제주도는 유달리 기근으로 고생을 많이 했고, 육지와는 다른 문화를 간직해 온 공간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제주도는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1670년 9월에 42,700여 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2년 만에 27,578명으로 줄어드는 피해를 바 있다. 또 비극적인 역사와 고립된 지형으로 인해 제주도는 고유의 무속 신앙 전통이 뿌리 깊다. 지금도 해원상생굿을 통해 4.3 사건 피해자를 기리고 있으며, 환자굿으로써 당시의 트라우마를 달랜 생존자들도 많다. 이처럼 특수한 지역적 서사를 발견하는 순간, 기구한 원혼의 사연은 차별화될 수 있다.
빵과 옹기의 의미
유달리 자주 등장한 소재인 빵과 옹기의 의미 또한 같은 맥락에서 찾을 수 있다. 선지는 낮에도 밤에도 유달리 빵에 집착한다. 낮에는 제빵사로 일하면서 프랑스 제빵 유학도 준비한다. 국가대표 유망주였을 뿐만 아니라 올림픽 메달도 거뜬할 수영 재능을 지녔는데도 제빵사의 꿈에만 매달린다. 밤에는 편의점에서 파는 시폰 케이크에 집착한다. 진열대에 제품이 올라가는 즉시 전량 구매해서 먹어버릴 정도다.
선지의 행동에는 단순한 개인 취향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육지와는 달리 제주도에서 카스텔라, 롤케이크, 단팥빵 같은 빵이 전통적으로 명절 차례상이나 제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음식이기 때문이다. 즉, 항상 빵을 갈구하는 그녀의 행동은 허기짐을 표현하는 장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그녀가 받지 못했고, 또 가족들에게 차려주지 못했던 제사상에 대한 한이 담긴 음식이 바로 빵인 셈이다.
그녀가 새벽마다 옹기를 찾아 돌아다니는 이유도 지역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쓰레기장이나 꽃집을 돌면서 유독 화분이나 여러 항아리를 살펴본다. 본래 자신의 쉼터여야 할 옹기를 찾기 위해서. 이때 옹기 역시 제주도의 특수성을 상징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제주도 특유의 고냉이찰흙으로 빚어진 옹기는 불로 구웠을 때 천연 유약인 ‘자연유’가 저절로 입혀지는 등 육지의 다른 옹기와의 차이가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제주 옹기는 음식의 맛을 돋우고, 내용물의 변성을 막으며, 물을 정화하기로 유명하며, ‘숨 쉬는 항아리’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특징은 과거 사람들이 소녀의 유해를 화장해 옹기에 담은 이유, 선지의 외조모가 그 옹기를 발견한 뒤 씻어낸 후에 김치를 담그다가 원한을 산 계기로 이어진다. 즉, 옹기 또한 사후에도 평화를 얻지 못한 아픔을 강조하는 또 하나의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실종된 긴장감과 달함
하지만 오컬트 소재를 신파로 풀어내는 사이에 <악마가 이사왔다>는 오컬트 장르 본연의 서스펜스와 쾌감을 놓치고 말았다. 우선 낮선지와 밤선지라는 아이디어는 거의 활용되지 못했다. 선지와 영화 <잠>에서 몽유병을 앓는 듯 보이는 '현수'(이선균)는 처지가 유사하지만, 그를 지켜보는 주변인들의 두려움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후자와 달리 전자는 낮과 밤이 다른 선지가 유발하는 공포감을 거의 조성하지 못한다.
오컬트 분위기를 고조할 캐릭터도 제대로 못 활용했다. 무당처럼 보이는 '영식'(신현수)이 등장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은 다. 그가 선지에게 깃든 원혼을 노리는 이유도, 원혼을 퇴치하는 데 한 차례 실패한 뒤 다시 접근하지 않는 이유도 알 길이 없다. 그러다 보니 그의 등장 장면은 제대로 된 위기 상황을 만들지 못한다. 자연히 선지에게 악마가 아니라 원혼이 붙었다는 진실이 밝혀지는 반전의 순간도 임팩트가 줄어든다.
악역의 빈약한 존재감은 로맨스에도 악영향을 준다. 로맨스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은 함께 위기를 극복하면서 관계를 발전시킨다. 학교나 회사에서는 어려운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고, 집에서는 부모의 반대를 꺾는 식으로. 영식이라는 캐릭터가 별다른 기능을 못 하는 이상, 길구와 선지는 함께 극복할 특별한 위기 상황을 맞지 못한다. 결국 그들의 관계가 아파트 이웃, 직장 동료 이상으로 발전할 만한 계기도 찾아볼 수 없다.
몇 안 되는 이벤트마저 길구와 밤선지의 몫이다 보니 로맨스의 주인공도 애매하다. 길구와 낮선지가 서로 호감을 느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길구와 밤선지의 관계가 변화하는 모습에 분량과 비중이 집중된 이상, 길구와 낮선지가 주도적으로 로맨스를 만들어 나간다는 인상은 받기 어렵다. 그 결과 길구와 낮선지가 연애를 시작하는 결말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며,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만족감도 절대 크지는 않다.
무위에 그친 성공 방정식
로맨스의 실종은 길구의 서사를 공기화하면서 <악마가 이사왔다>의 완성도를 결정적으로 저해한다. 길구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영화의 의도는 유추할 수 있다. 아마도 밤선지의 한을 달래주는 여정을 겪으면서 길구가 자신의 아픔도 이겨내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 듯하다. 타인을 향한 선의가 자기 아픔도 치유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무장한 것.
이는 <엑시트>가 '용남'(조정석)을 활용한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취준생으로 지내며 무기력해졌던 용남은 잊고 있었던 장기, 클라이밍 기술을 살려서 재난 상황을 극복하는 영웅으로 거듭난다. 용남에게 재난이 덮쳤다면, 인형 뽑기가 재능인 길구에게는 귀신이 찾아왔다. 회사 생활이 남긴 상흔을 술과 인형 뽑기로 애써 가리며 지내던 길구는 선지와의 모험을 통해 자기 아픔도 치유하고, 재능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길도 찾아낸다.
그런데 로맨스 서사가 약하고, 오컬트에서 비롯된 신파가 중심 스토리라인이다 보니 길구의 서사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길구 감정선이나 내적 변화와 성장까지 들여다볼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그가 선지를 만나기 전까지의 그의 일상을 보여주는 초반부는 대체 왜 필요한 건가 싶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달리 말해 길구가 주인공이어야만 하는 이유를 관객에게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악마가 이사왔다>는 재난 영화를 빼고 오컬트를 더해서 제2의 <엑시트>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예상할 수 있 맛과 의외의 신선함을 모두 선사한 <엑시트>와 달리, <악마가 이사왔다>는 예상한 맛이 안 나는 와중에 예상 못 한 맛도 특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임윤아라는 배우가 드라마뿐만 아니라 영화도 이끌 수 있는 주연임을 확실하게 증명했다는 성과가 있을 따름이다.
Poor 형편없음
두 번은 안 통한 <엑시트>의 성공 방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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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맨스는 비하인드가 더 달달하지
작품의 뒷모습을 담아 🧡Behind-The-Scenes🧡
영화, 드라마의 비하인드 사진은 캐릭터가 현실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죠. 그래서 종종 좋아하는 영화의 비하인드를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저장을 누르게 되는 것 같은데요.
오늘은 로맨스 장르 영화와 드라마의 비하인드를 몇개 가져와 봤습니다.
망한 사랑이든... 이어진 사랑이든 뒤에서 행복한 모습의 배우들을 보면 그저 흐믓하게 보게 되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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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빈곤층에서 헐리우드 최정상까지, 스칼렛 요한슨 (블랙위도우)
#블랙위도우 #스칼렛요한슨 #어벤져스
2021. 07. 08 영상입니다.
유튜브 채널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6jj...
마블쟁이 인스타그램: @marvel_jeng2* 영상에 사용된 모든 음악은 Epidemicsound 의 정식 라이센스 음원입니다.
https://www.epidemicsound.com/*영상 타임라인*
00:00 MCU 첫 여성 히어로
00:50 미국의 빈곤층, 스스로 찾은 꿈
02:53 전환점이 된 배역, 블랙 위도우
04:52 헐리우드 최정상이 되기까지
07:14 3번의 결혼, 그리고 딸
08:29 블랙 위도우 & 페미니스트
09:36 나타샤에게 박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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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바디 리뷰 - 영화 노바디의 4가지 감상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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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시작에 앞서...
01:21 1. 액션
03:10 2. 사운드 트랙
04:48 3. B급 유머코드
06:03 4. 떡밥 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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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착하게 살고 싶었다. 참으려고 했다.
이제 나 건드리면 X된다!
비범한 과거를 숨긴 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한 가정의 가장 ‘허치’
매일 출근을 하고, 분리수거를 하고 일과 가정 모두 나름 최선을 다하지만
아들한테는 무시당하고 아내와의 관계도 소원하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에 강도가 들고 허치는 한 번의 반항도 하지 못하고 당한다.
더 큰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모두 무능력하다고 ‘허치’를 비난하고,
결국 그동안 참고 억눌렀던 분노가 폭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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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더 스파이> 메인 예고편
전운이 감도는 1960년 냉전시대, 소련 군사정보국 ‘올레그 대령’은
정부의 눈을 피해 핵전쟁 위기를 막을 중대 기밀을 CIA에 전하고자 한다.
CIA는 MI6와 협력하여 소련의 기밀 문서를 입수하기 위해
영국 사업가 ‘그레빌 윈’을 스파이로 고용해 잠입에 성공한다.
정체를 감춘 채 런던과 모스크바를 오가는 ‘그레빌 윈’과 ‘올레그 대령’의
은밀하고 위험한 관계가 계속될수록 KGB의 의심은 커져가는데...
가장 평범한 사람의 가장 위대한 첩보 실화
때론, 한 사람의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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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이브 <인 트리트먼트> 공식 예고편
정신과 의사 폴과 그가 치료하는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