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0-02 09:44:52
‘관계성’에 관한 잊히지 않을 인장
영화 〈위국일기〉
두 장면이 있다. 여고생 ‘아사’와 친구 ‘에미리’가 텅 빈 학교 체육관에 둘이서만 있다. 두 사람은 넓은 체육관에서 때로는 가까이 앉아, 때로는 뛰어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에미리는 아사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점을 알려주려는 참이고, 아사는 그런 에미리에게 실례가 될 수도 있는 반응과 질문을 던져 종종 민망해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긴장은 없다. 이 장면의 주요한 정서는 두 사람이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면서 안전하고 편안한 거리감으로 신뢰와 애정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서 나온다. 텅 빈 체육관에서 두 사람을 방해할 요소는 없다. 오롯이 둘만 마주해 말과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다. ‘완벽한 접속’은 불가능할 테지만 상관없다. 타자를 완벽히 내 것으로 하는 관계는 공감이라기보다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거리는 있지만 결코 멀지는 않고, 서로를 온전히 믿을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성. 텅 빈 체육관의 두 소녀는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애정이 깃든 관계의 모델이 무엇인지를 가늠케 해준다.
두 번째 장면도 그렇다. 이번에는 아사와 그의 이모 ‘마키오’다. 두 사람은 탁 트인 바닷가의 한적한 계단에 앉아 있다. 이번에도 딱 달라붙어 있는 대신 위아래로 몇 칸의 간격을 둔 상태다. 아사와 에미리가 그러했듯, 두 사람은 때로는 앉아서 때로는 일어서서 움직이며 말과 감정을 나눈다. 닫힌 공간인 체육관의 폐쇄성이 커밍아웃하는 에미리에게 안전하다는 감각을 주었다면, 탁 트인 바닷가는 뜻밖에 한 가족이 된 조카와 이모가 앞으로 만들어갈 관계의 양상이 무한히 깊고 푸르리라는 점을 암시한다. 하나가 될 필요 없는, 적당한 거리를 조정해가며 서로의 곁에 있는 관계의 모델이 다시 한번 아름다운 이미지로 재현된다.
〈위국일기〉는 관계성에 관한 영화다. 가장 주요하게 다뤄지는 건 아사와 마키오의 관계다. 하루아침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은 아사는 자신의 엄마와 십수 년 전에 절연한 이모 마키오와 한 가족을 이룬다.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아사를 두고 내뱉는 무심하고 무례한 말에 분노해 홧김에 자신이 아사를 데려가겠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조율해야 할 것은 무수히 많다. 서로 다른 생활 습관, 성격은 당연하고 돌봄을 어떻게 주고받을지도 협상해야 한다. 비혼 여성 마키오는 갑자기 생긴 조카를 돌보고 보호하는 일에 동반되는 책임감이 생경하면서도 때로는 부담스럽고, 아사 역시 자기 엄마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면서도 그 이유는 절대 말해주지 않는 마키오와의 관계가 쉽지만은 않다.
영화는 두 사람이 차이를 조율하며 일상을 맞추고, 새로운 관계 모델을 학습하며, 죽은 아사의 부모님을 애도하는 과정, 나아가 억압적인 엄마(아사)/언니(마키오)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담아낸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다. 아사는 결혼하지 않는 여성 어른이 맺는 친구/연애 관계에서도 지금껏 모르고 지낸 관계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키오 역시 아사를 돌보며 기존의 자기 관계망에 더욱 깊이를 더해나간다.
크든 작든 모든 등장인물의 관계성을 세심히 그려내는 〈위국일기〉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건강하고 행복한 관계, 서로를 북돋는 관계는 완벽한 이해와 공감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존중하며 곁에 머무를 때 나온다고.
공감과 이해라는 말이 너무 쉽게 쓰인다는 느낌을 곧잘 받는다. 그러나 자신만의 고유한 결을 축적해온 타자는 결코 누군가가 ‘완벽’하게 포착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일이 가능하려면 타자는 생동하는 존재이기를 멈춰야 한다. 완벽한 이해는 타자가 주체이기를 멈추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오롯이 희생해 내놓을 때만 가능하다. 심지어 이마저도 ‘해부학적’ 이해에 그친다. 죽은 동물과 곤충의 박제에서 우리가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듯이 말이다.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장악하듯 이해하려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감으로 은은하게 보듬는 관계의 모델이 필요하다.
〈위국일기〉가 공들여 보여주고자 하는 건 바로 이러한 관계성이다. 극적인 전개나 자극적인 요소로 관심을 끌지는 않지만, 자신뿐 아니라 서로의 일상을 지탱하며 함께 나아가는 건강한 관계의 양상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국일기〉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관계가 그렇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두 장면은 영화가 그려내는 여러 인상적인 관계를 아름답게 재현하며 잊히지 않을 인장을 남긴다. 체육관과 바닷가.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미지화된 관계성은 ‘선을 넘는’ 관계에 지친 사람들에게 은은한 위로로 다가갈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
- 다들 한번 쯤 기대해 봤을 법한 사랑이야기
당신에겐 마음속에서 품고 있는 어떤 이야기가 있는가? 난 있다. 근데 그게 사랑이야기는 아니다. 26년의 삶이 무색하게 난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의 말이 맞다. 내 인생은 더 잘 풀릴 구석이 있는 게 맞는 것이다. 내가 그냥 좋은 사람이 아니고 너무 좋은 사람이랜다. 근데 그거에 걸맞지 못한 20대의 추억이 없으니 내가 봐도 참 통탄할 일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내 마음속에 있는 일은 후회와 미련에 관한 이야기다. 왜 그랬어야 했나. 과거의 나를 때려죽여서라도 혐오해서 현재의 나에게 정당성을 찾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가 놓쳐버린 수많은 것들이 다시 떠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할 수 있다. 이렇게 다짐하지 않으면 뭔가 일상에서 생기는 기대가 없어진다. 미련하다고? 사람들에게 날것의 무언가를 보여주면 부담스러워 도망간다는 것도 30분 전에 안 나는 너무나도 바보라서 이런 식이 아니면 하루를 살 수가 없다. 이 웃기고 창피한 생각들을 마무리하는 방법은 하나다. 그 사람들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다. 또,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그런 흔적들을 상회하는 더 멋진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정신승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꿈이다. 잠깐 달콤하게 꾸다 말 것이다. 그런 희망사항 일어날 확률 0.01% 정도 됐었다. 나의 이기적인 행동에 상처를 받았던 사람들은 하늘이 두쪽 나도 돌아오지 않는다. 병 때문이라니 트라우마 때문이라니 헛소리를 해도, 나 변했다고 세상에게 소리 질러도 그럴 일은 없다. 당연하다. 그 사람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때 먹은 마음가짐이 사람을 성장시켜준다는 것 빼고는 더 이상의 의미는 없다. 젠장. 영화 같은 일이 일어나면 참 좋을 텐데. 현실성이 있을 법하다가도 그런 건 없다는 걸 자각하면 마음에 구멍이 생긴다. 이렇게 생긴 그 구멍을, 홍콩의 영화감독 왕가위가 그리움과 재회라는 키워드로 채워주려고 하는 것 같다. 1994년의 홍콩, 그리고 왓챠로 달려가 보자.
1. 어떤 것에 대한 영화인가요?
영화는 두 개의 에피소드를 하나로 묶은 옴니버스형 로맨스 영화다. 이 두 에피소드에 나오는 경찰 두 명이 있다. 금성무가 맡은 하지무/양조위가 맡은 경찰 663이다. 또 이 둘에겐 두 명의 여주인공이 있다. 임청하가 맡은 금발의 여인/왕페이가 맡은 페이다. 따끈따끈하게 여자 친구에게 차인 하지무.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 모으지만 나름의 삶이 있는지라 전부 다 거절당한다. 전 여자 친구가 좋아했던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루에 하나씩 먹고, 1달이 지나고 나서도 연락 오지 않는다면 깔끔하게 잊기로 한다. 그렇게 30캔을 먹은 4월 30일. 만우절 때 차였던 경찰 하지무는 4월 30일이 된 날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 처음 만나는 여자를 사랑하기로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이 경찰이 술집에서 만나는 여자와의 일화를 담았다.
두 번째. 경찰 663의 이야기다. 경찰 663 역시 따끈따끈하게 여자친구에게 차였다. 663의 전 여자친구는 그가 자주 가던 음식점에 663의 집 열쇠와 편지를 맡겨놓는다. 열쇠와 편지를 맡겨놓은 음식점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페이. 페이는 사실 663을 마음에 두고 있다. 누가 봐도 전 여자 친구인듯한 느낌에 호기심이 생겨 편지를 열어본다. 열쇠가 있는 것을 확인한 페이.
엄격하게 따지면 무려 경찰 집에 무단침입을 한 셈이지만그녀는 663의 집에 들어가 그의 전 여자친구가 남긴 흔적을 서서히 지워나간다. 페이의 이런 이중생활은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두 번째 에피소드는 페이의 이런 비행에 대해 다룬 영화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흔적을 제삼자가 등장해 쨘! 하고 지우는 이야기 인 셈이다. 영화의 두 에피소드는 이것들을 소재로 삼은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2. 어떤 영화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간단하다. 희망을 심어주는 영화다.
이 글을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당신이 생각하는 대표적인 로맨스 영화는 어떤 것이 있나요?라고 물으면 <이터널 선샤인> <500일의 서머>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등등이 나올 것이다. 물론 앞에서 쓴 세 단어는 무지 좋은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고 생각한다. 난 이 <중경삼림>도 앞에서 쓴 세 작품과는 살짝 다른 결이긴 하지만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실제로 그렇게 여기는 사람도 많은 듯하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서 쓴 소재, 그러니까 그리움과 재회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우리는 가끔 그 사람들과의 재회를 꿈꾼다. 근데 거의 그럴 일 없다. 이에 대한 근거가 수많은 사랑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리워하면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느 영화와 같은 일들이 이뤄져 가기를'이라는 가사도 있지 않나.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소망이 되어서 간절한 그리움이 되는 것이다. 이게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감정이니 예술작품이 되어 사람에게 다가간다. 이런 우리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공감하게 된다. 그 사람 역시 언젠가 변한 나를 보고 마음이 바뀔 수 있을 거라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때 내가 갖고 있던 악습들 다 뜯어고쳤으면 언젠간 오겠지. 예술이 사람의 삶 이면을 때리는 아주 진부한 클리셰다. 이 영화 역시 이 막연한 기대에 관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절대 진부하지 않다. 줄거리는 많은 로맨스들과 크게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는데 현실적으로 환상적인 왕가위식 미장센이 덧붙여졌다. 이 덕에 그리움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느꼈던 기분을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한다. 오래 남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어. 이 영화처럼 그 추억들이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는 거지. 이 영화처럼.
3. 이 영화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2번과도 이어진다. 첫 번째. 왕가위식 미장센이다. 보통 이 감독의 특성이 반영된 연출 방식으로 <화양연화>나 <해피 투게더>를 뽑는 사람이 많다. 난 근데 그의 미장센 연출 능력이 이 둘에 못지않은 것이 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임청하가 맡은 의문의 금발 여성을 보자. 그녀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는다. 이 종류의 의류가 있는 분들이라면 베이지가 어떤 느낌인지 알 것이다. 살짝 탁하게 어두운 노랑이다. 그리고 그녀는 가발을 쓰는 듯한 묘사가 나온다. 근데 그 가발이 금발이다. 또 립스틱은 비비드 한 빨강으로 배치한다. 또 신발은 흰색 계열이다. 그러니까 이 '의문의 여성'은 노랑머리-황색 피부-베이지색 의류-빨간색과 검은색이 들어있는 선글라스-빨강 입술-흰색 구두로 코디한 사람인 것이다. 패션디자인과 학생이 좋아할법한 3색 배치에 요즘 말로 하면 톤인톤 코디를 보여주는데, 이거 쉬운 것 같지만 고려해야 할게 많은 연출 방식이라 생각한다. 이 인물의 큰 특성은 세 가지다. 멀끔한 미녀처럼 보이지만 범죄자라는 것이다. 또 가발을 쓰는 것과 같이 타인을 속여야야 만 한다는 것이다. 또 눈빛을 보여주면 안 된다. 그냥 일 있으면 후다닥 달려갈 사람인데 뭐하러 처음 보는 남자랑 연애를 하나? 이 세 가지 캐릭터 설정을 코디 안으로 축약해놨다. 멀끔함(트렌치코트를 활용한 톤인톤) - 타인을 속여야 함(가발) - 의외로 뛰어다녀야 하고 무려 범죄자임(이동이 불편한 신발 '흰색 구두')의 요소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이 뿐인가? 어쩐지 좀 탁한 영화 전반적인 색조까지 있으니 우리가 흔히 쓰는 아날로그 카메라로 영상을 찍은 듯한 느낌이 든다. 영화가 그냥 예쁘니까 올드하고 그런 거 없다. 오히려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하는 연출이 숨어있는 것이다.
두 번째. 명대사다. 아마 <중경삼림> 하면 생각나는 대사는 '사랑의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일 것이다. 난 솔직히 이 대사가 그렇게 멋있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조명하고 싶은 대사는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사람은 변하니까'다. 왕가위는 캐릭터 설정에 능하고 그런 성격이 있을 법한 사람의 말을 잘 만들어내는 감독이라 생각하는데, 이 사람의 이런 특성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세 번째. 양조위다. 90년대 중후 반생이라면 한번쯤 봤을, 영화사에 남는 663의 첫 등장신을 볼 수 있다. 사진으로 몇 번 봤다고? 그래도 다시 보는 걸 추천한다. 이건 알고 봐도 너무 멋있다.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멋있다. 그리고 엔딩신에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하는 표정연기 역시 어마어마하다. 딱 홍콩의 그 시절 감성을 축약한 느낌. 외롭고 고독한 역할이 걸핏하면 중2병으로 보일 수 있는 극의 맹점을 채우는 훌륭한 퍼포먼스다.
4. 난이도가 있는 영화인가요?
아니오! 무난한 영화다.
5.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2-3에서 양조위의 연기에 대해 썼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근데 그렇다고 해서 양조위만 좋은 퍼포먼스고 나머지는 구렸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난 페이 역을 맡은 왕페이의 연기도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난 한국인이고 태어나기도 전에 나온 영화라 이 사람이 이게 두 번째 데뷔작이고 본업이 가수라는 것을 몰랐다. 이걸 나중에야 알 만큼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역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6.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사실이 있나요?
없다. 그냥 무난하게 볼 수 있는 로맨스 영화다. 아. 사람 일은 모르니까 미리 적어놓는다. 만약에 기적적으로 코로나19로 인한 왕가위 특별전이 열린다는 기사가 뜬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무조건 극장에서 봐야 한다. 왕가위 미장센은 극장에서 봐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모바일 환경에서 보는 거지 뭐. 태블릿이나 스마트폰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다.
7.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홍콩 영화 좋아하고. <샹치 : 텐 링즈의 전설>에서 양조위에 눈빛에 치였고. 로맨스 영화 좋아하고. 마음속에 기다림을 품고 있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각본의 이음새가 완벽한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전부 마음에 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계속 영화의 장면 하나하나가 생각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렇게 오래 남는 영화의 기억과 마음속의 그리움이 나란히 걷는다는 것도 알게 될 것 같다.
-
- [DMZ DOCS]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
영화 <아침이슬-‘세뇌’라는 스티그마> 리뷰
감독] 금선희
시놉시스 ] 이 프로젝트에서 “구(舊)-귀국자”란 1954년부터 1984년도에 걸쳐 진행된 귀국사업 (혹은 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이주했으나 최근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재일조선인들을 의미한다. 구(舊)-귀국자들은 현대 일본 재일조선인 공동체 내에 설 자리가 없다. 또한 그들은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이 수용소에 끌려갈까 두려워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상에 그들의 얼굴을 담을 수 없었기에 나는 무수한 자료들에서 찾은 푸티지를 사용해 세 개의 스크린으로 구성한 비디오 작업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자이니치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된 것은 지난 2018년 한 연극을 통해서였다. 연극 <혼마라비해?>라는 작품에서 재일동포, 자이니치들이 받는 차별과 정체성을 다루고 있었는데, 그렇게 잠시 잊고 있었던 자이니치의 존재를 이번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아침이슬-‘세뇌’라는 스티그마 시놉시스를 보면서 다시 떠올랐고, 연극이 아닌 실제 그들의 삶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에 백석 메가박스로 향했다.
어디에도 없는 국가를 국적으로 가진 이들
영화 아침이슬-‘세뇌’라는 스티그마는 일제강점기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70년에 달하는 긴 시간을 담아내고 있다. 재일조선인들이 일본에 넘어가게 된 계기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1954년부터 1984년까지 진행된 귀국사업과 이후 북한을 탈출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자이니치,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영화 초,중반까지는 자막과 영상자료들을 위주로 보여주고 딱히 등장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후반부에 들어서 북한에 있다가 탈출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한 남성의 나레이션이 펼쳐진다. 그의 담담한 독백을 들으면서 든 생각은 과연 그들이 조국이라고 느끼는 나라는 어디일까? 였다.
그들은 재일조선인, 즉 조선이 국적인 사람들이다. 하지만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진 후 조선은 이제 이 세상에 없는 국가다. 하지만 재일동포들은 제일조선인으로 일본 내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일본인이 아니지만 일본어를 모국어로 구사하고, 자신의 아버지 고향은 경상북도이지만 귀국사업을 통해 갈 수 있는 모국은 단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북한이다. 일본과 남한, 그리고 북한이라는 세 나라의 정체성 속에서 과연 제인조선인들은 자신의 뿌리를 어디라고 생각할지, 여기서 오는 혼란을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 궁금증과 함께 안타까움이 동시에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는 없는 국가를 국적으로 삼고 타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애환을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침묵 속에 감춰진 구술의 힘
장장 30년간 진행된 대규모 북송사업. 수많은 재인조선인들이 북한으로 이주했지만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취재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이 아니기에 북에서의 그들의 삶을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 그렇게 그들의 삶은 거대한 침묵 속에 자리잡았고, 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역사 속에서 점점 잊혀져 가는 듯 했다. 북한을 탈출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재일조선인들 역시 자신과 북에 남은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침묵을 지키며 살아간다.
현대사에서 식민과 냉전, 분단의 아픔을 몸소 겪으면서 그들의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은 주체들이 얼마나 있을까? 위안부, 만주사변, 관동대학살, 4.3사건 등 식민과 냉전, 분단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고 그 피해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더불어 당시 사건들이나 만행들을 객관적으로 기록해놓은 경우가 거의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 훼손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피해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 힘든 편이다. 여기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인 바로 ‘구술’이다. 당시 사건을 실제로 경험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오랜 침묵을 깰 수 있다. 영화 <아침이슬-‘세뇌’라는 스티그마>는 이러한 구술이라는 요소를 영화 후반에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삼 남매의 막내였던 주인공은 재일조선인으로서 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일본으로 탈출한 인물이다. 식민지 시대의 설움과 함께 일본에서의 차별, 그리고 북한 사회 정치 체제를 몸소 겪은 사람으로서 덤덤하게 자신의 인생을 독백으로 풀어낸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국가의 국적자로서 일본에서 태어나 북한으로 이주했고, 대기근으로 인해 북한을 탈출한 그는 일본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 과정에서 누나는 정신병원에서 죽고, 일본으로 함께 돌아온 형은 범죄를 저질러 일본에서 추방된다. 일본인 어머니를 두었기에 추방될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재일조선인이었던 그들은 일본에서 일본인으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는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말이 일본어지만 일본에서 한 존재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말로써 표현한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했던, 역사가 침묵으로 일관했던 존재들이 스스로 말함으로써 모두에게 잊혀졌던 ‘자이니치’의 삶을 이렇게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지 못했지만 역사 소용돌이를 그대로 경험한 ‘자이니치’의 삶에 대해 풀어낸 영화 <아침이슬-‘세뇌’라는 스티그마>. 그 속에서 구술의 힘이 기존의 역사가 다루지 못했던 부분을 어떻게 채워줄 수 있는지 엿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제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시간표
2022-09-24 13:30
메가박스 백석 컴포트4관
211
2022-09-27 16:30
메가박스 백석 컴포트4관
522
-
- 다시 일깨우는 ‘사랑’과 ‘공존’의 가치
▷한줄평 : 다시 죽음의 두려움조차 이겨낸 ‘소통’, ‘협력’, ‘사랑’, ‘희생’의 보편적 가치를 말하다
▷영화 : 미키 17(Mickey 17), 2025.2월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영화 <미키 17>에서 / 티모(스티븐 연), 카이 캇츠(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
우리 모두는 ‘익스펜더블’과 같은 존재
다시 살아날 수 있다 해도 매번 죽음은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미 생체실험에 자신의 생명을 제공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품)’ 직군을 선택한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죽음을 피할 방도는 없다. “다시 만나!”라고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소각로(사이클러)에 뛰어들면 그만이다. 두려움도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다시 프린트하면 되니깐. 이 순간 ‘미키’는 미키1, 미키2… 미키n과 같이 특정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전락한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에 달리 벗어날 방법이 없다. 2054년 우주 행성 개발 시대에서조차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하층 노동자는 ‘위험의 외주화’의 도구가 될 뿐이다. 미키n이 갖는 존재의 가치를 논할 필요가 없다. 삶과 죽음이 교차되는 지점에 슬픔조차 불필요한 감정이 된다. 죽는 기분이 어떤지 묻는 동료의 질문에 ‘항상 무섭다’라고 말할 것 밖에 없다. 고귀한 새로운 생명의 창조와 탄생 일조차 이제는 간단히 버튼 하나로 3D 프린터로 뚝딱 만들어내는 단순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인간 존재의 가치를 말해주는 ‘탄생’과 ‘죽음’의 신비로움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미키는 이런 소모품으로 자신이 소비되고 있음이 후회스럽다. 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는 없었을까?
어쩌면 <미키 17>에서의 새로운 복제인간의 탄생은 우리가 매일같이 잠을 자고 새로운 날을 맞는 것과 유사한 메커니즘을 갖는다. 미키가 과거의 자기를 폐기하고, 새롭게 탄생한 존재를 현재 살아있는 객체로 구분해 내듯, 우리는 연속된 생을 하루라는 날로 구분하여 매번 새로운 날들을 만들어 낸다. 3월 1일, 2일…n일 처럼 말이다. 시간의 영속적 흐름 속에서 특정 시간에 대한 의미 부여를 위해 강제로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개어 쳇바퀴에 올려놓은 꼴이다. 매일매일 지옥과 같은 일상 속에서 자아는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을 반복한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 교차하는 지점에 드는 아쉬움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한 쓸데없는 감정 소모일 뿐이다. 그래서 미키n이든 제이바다n일이든, 이 세상의 모든 ‘익스펜더블(소모품)’들은 견디기 힘들 만큼 지루한 일상을 끊임없이 버텨내야만 한다. 그 짧은 간극 사이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각 개인들의 몫이다.
영화 <미키 17> 스틸컷 / 소모품으로 소비되는 미키n의 존재들
봉준호 감독은 이 지점에 미키17이 자신을 복제한 미키18을 마주한 상황을 만들어낸다. 17번째 미키가 크레바스에서 죽었다고 착각한 이들이 18번째 미키를 리프린트하게 된 것이다. 이 세계에선 동일한 익스펜더블이 공존하는 '멀티플'은 불법이기 때문에 그들은 이 상황이 발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둘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서로 살아남기 위해 자기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마주하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존속이 행복할 것처럼 보였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마주해야 비로소 그 삶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된다.
‘그동안은 계속 사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달라. 내가 죽으면 네가 사는 거잖아.’ 영화 <미키 17>에서 / 미키 17(로버트 패틴슨)
현재는 과거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결과물은 사뭇 다르다. 기억의 저장과 재생 과정에서 성품까지도 동일하게 반복 재생시키지는 못했다. 마치 기억의 저장소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끄집어내 나의 온전한 기억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같다. 미키18는 다혈질의 성향을, 미키17은 온유한 성품을 가졌다. 어쩌면 순간마다 달라지는 우리들의 내적 자아의 분열과 같다.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는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낸다.
미키의 이러한 다른 성품은 둘 중 어느 하나가 살아남을지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변수가 된다. 이 둘은 처음에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격하게 부정한다. 서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이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소통’이 만들어낸 대결과 파멸의 극복
기록된 역사는 정복자의 관점을 투영한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나 말 그대로 우연한 ‘발견’일뿐이지, 그 대륙에도 사람들이 이미 번성한 문명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최근에는 유럽인의 시각에서 사용한 ‘발견’이라는 말 대신에 ‘만남(Encounter)’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지금도 정복자의 시선이 담긴 ‘아메리카 원주민(Native Americans)’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당시에도 문명국가를 이루며 살고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잉카, 마야, 아즈텍은 대표적인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이다. ‘니플헤임’ 식민 우주 행성 개척은 생육과 번성을 꾀해왔던 인류의 역사와 다를 바 없다.
"우리가 외계인인데 왜 쟤네더러 외계인이래?" 영화 <미키 17>에서 / 나샤(나오미 애키)
이 프로젝트의 총사령관인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과 일파 마샬(토니 콜렛) 부부는 이런 정복자 DNA의 야욕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행성에 이미 살고 있었던 외계 생명체, 크리퍼 (Creeper)를 ‘추악한 외계인’이라 부른다. 그 옛날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들을 ‘인디언(Indian)’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크리퍼들이야말로 이곳 니플헤임의 원주민이며 외계인은 오히려 지구에서 찾아온 우리 인간들이다. 크리퍼에게는 그들만의 고유한 언어체계가 있었으며, 그 수많은 개체들마다 각자의 이름(루코, 조코, 등)이 있을 정도로 공동체성을 보유하고 있는 종족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케네스 일당은 여전히 그들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마샬은 벌레의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다며 식민지 개척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크리퍼를 몰살할 계획을 세운다.
영화 <미키 17>에서는 이 지점에서 외계인을 포함한 타인을 대하는 탐욕스러운 인간 본성을 탐구한다. 아둔하고 차별적이며 폭력적인 케네스 마샬은 이 시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독재자들을 떠오르게 한다. 또한 옆에서 이를 부추기며 소스(Sauce) 개발에 열을 올리는 등 사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아내 일파 마샬과 조력자들의 존재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들은 철저히 계급을 나누고 명령과 복종을 강요한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대화와 타협, 소통은 늘 뒷전이다.
이젠 미키17과 미키18에게는 극복해야 할 공공의 적이 생겼다. 어떤 식으로든 케네스 일당으로부터 크리퍼의 파멸을 막아보겠다는 미키 17과 미키 18은 외계인과의 메신저 역할을 자처한다.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 속에 인류와 외계 인간의 공존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이렇게 ‘소통’과 ‘협력’은 파멸을 이겨내는 과정이 되었고, 종국에는 ‘희생’을 통해 희망이라는 미래를 만들어 내었다.
영화 <미키 17> 스틸컷 / 외계 생명체를 만나러 가는 미키
죽음의 두려움조차 이겨낸 ‘사랑’과 ‘희생’의 가치
이러한 분열된 자아와 같은 또 다른 미키의 등장으로 인한 혼란, 생사의 키를 쥐고 흔드는 독재자의 압박, 처음 마주한 외계 생명체와의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미키17과 미키 18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케네스 마샬은 미키가 그동안 느껴왔던 ‘두려움’조차 이용하려 든다.
"너도 두려움을 느끼는 거지? 너도 인간이잖아, 중요한 존재지."
영화 <미키 17>에서 / 케네스 마샬 (마크 러팔로)
그러나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며 맞이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영원한 사라져야 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다를 것이다. 이 ‘두려움’을 ‘희생’으로 치환 시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사랑’과 ‘공존’에 대한 염원이다. 사랑이야말로 두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가 가치 있는 인간임을 증명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멀리서 보이는 사랑하는 나샤(나오미 애키)와 미키 17을 바라보면서 ‘희생’을 선택한다.
영화 <미키 17> 스틸컷 /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나샤
봉준호 감독은 참으로 일관된 스토리텔러이다. 영화의 시간과 공간을 <설국열차>의 멈추지 않는 기차와 <기생충>의 어두침침한 지하실에서 <미키 17>의 미래와 우주로 옮겨 놓았을 뿐,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보편적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설득해 내려고 한다. 그동안 인류 역사 속에서 수없이 등장해 왔던 독재자, 아메리카 신대륙을 정복하러 나섰던 콜럼버스와 같은 야욕가, 인간의 생명의 존엄 따위는 관심조차 없는 정치가 등 부와 권력의 위계질서는 인간 사회가 유지되는 한 지속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타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의 모색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와도 같다. 영화 <미키 17>은 ‘사랑’, ‘협력’, ‘소통’, ‘희생’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낼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는 바로 우리, 여기,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영화 <미키 17> 포스터
2025.3.8
-
- 3000년을 기다려 깨달은 진정한 사랑의 의미(약간 스포 있음)
세상 모든 이야기를 연구하는 서사학자 알리테아가 한 고물상에서 우연히 구매한 유리병을 통해 정령 지니를 깨운다. 지니는 알리테아에게 단 세 번. 마음속 가장 깊은 곳, 가장 오랫동안 바라온 소원을 말하면 자신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알리테아는 '소원에 관한 이야기는 경고가 담겨 있다'라며 그에게 소원 빌기를 거부하는데........ 지니는 무슨 사연으로 그 병에 갇혀 있었으며 알리테아는 무슨 소원으로 지니를 구원할까?
1. 내용은 많지만 어딘가 빈약한 스토리 라인
이 영화의 장점은 옛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도록 그려낸 미술에 있다. 전설 속 시바 여왕의 이야기부터 페르시아의 왕가의 생활상, 제피르의 발명품 등 흥미를 자극하는 신비로운 배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겁다. 영화의 ost도 정말 좋아서 다시 듣고 있다.또한 이 영화에는 '알라딘'처럼 지니가 등장하는데 이번엔 램프가 아닌 유리병 안에 들어가 있다는 차이점도 재미있다.
여기서 지니는 정령으로서 등장하는데 알리테아는 정령은 실제로 있다고 믿고 있기에 지니가 등장했을 때 그는 지니의 천일야화에 귀를 기울인다. 이렇게 흥미로운 세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과연 알리테아는 지니에게 어떤 소원을 빌게 될지 관심이 집중됐는데 이게 왠걸 알리테아의 소원이 드러나는 순간 이 영화의 대한 기대가 하락한다. 이 때부터 갑자기 지니와 알리테아의 로맨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알리테아는 지니의 이야기를 잘 듣다가 뜬금없이 지니에게 사랑 고백을 해 당황스럽기만 했다. 알리테아의 소원은 '나를 사랑해달라'라는 것이었는데 어떤 부분에서 그녀가 사랑을 느꼈는지도 아이러니했다. 심지어 내 옆에 있던 어떤 관객 분이 '엥?' 하시는 소리를 듣기까지 했으니 이 의아함은 나만 느끼는 것은 아니겠거니 했다. 이후 두 캐릭터가 연인이 되면서 이야기의 국면이 전환된다. 고백씬이 뜬금없어서였는지 뒤이어 등장하는 연인으로서의 알리테아와 지니의 일상 장면에서도 이들의 사랑에 감정 이입하기가 힘들었다.
2. 사랑은 도구가 아니라 목적일 때 성공할 수 있는 것
하지만 영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이었을까 예상해본다면 '인생에서 사랑은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라는 것이 영화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였던 듯하다. 그래야 상대를 자신의 열등함을 채우는 데 쓰지 않고 온전히 상대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니가 유리병 속에 3번이나 갇혀 있었던 이유는 소원을 들어주는 정령 이상의 존재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시바 여왕에게는 유일무이한 사랑이 되고 싶어 시바 여왕과 솔로몬 왕의 사랑을 방해하기도 하고 한 번은 죽을 운명이었던 한 페르시아의 시녀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인간사에 개입한다. 또한 가장 사랑했던 여인 제피르를 떠나지 않기 위해 마지막 소원을 말하지 못하게 막기도 한다.
하지만 지니를 가두었던 세 여자들 모두 궁극적으로 지니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니의 사랑은 그들의 갈망을 이뤄주는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였고 그들의 목적은 지니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었다. 세 여자들은 지니를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도구로서 사용했을 뿐 목적이 아니었기에 관계 속에서 을일 수밖에 없었던 지니는 항상 관계에서 패배해 유리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지니는 소원을 통해 남을 구원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저주를 풀 수 있던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그를 사랑하겠으니 나를 사랑해달라는 직접적인 고백만이 그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소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를 온전히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는 사랑 빼고 모든 것을 이룬 알리테아 뿐이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 외롭다는 것 빼고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던 그녀였기에 지니를 더이상 도구로써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서로의 이해 관계가 완벽히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3.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
사람들은 상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자신에게 부족한 점들을 상대에게서 찾으며 상대를 괴롭히기도 한다. 하지만 '3000년의 기다림'은 이런 사람들이 찔릴 만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의 부족함을 상대에게 채워달라고 징징대지 않고 그저 온전히 나일 수 있을 때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된다는 것이다.결국 알리테아와 지니가 나눈 길고 긴 이야기는 '진정한 사랑은 상대의 인생을 통제하지 않고 그저 상대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사랑이 하고 싶다면 상대부터 찾을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서 일어서고 자립할 것, 그것부터가 사랑의 시작이다.
영화의 전개가 급작스러운 면이 있어 관객마다 해석이 다를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분들의 리뷰도 찾아보려고 한다. 왠지 내가 놓친 영화의 메타포가 있을 것 같고 정령인 지니가 전자파로 이뤄진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댓글 남겨주시기를 바란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
-
-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쏘았다> 리뷰
씨네랩의 시사회 초대로 아내와 함께 용산 CGV에서 영화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를 감상했다. 영화는 애니메이션을 통해 브라질의 천재 피아니스트 테노리오 주니오르의 실종과 비극적 죽음을 중심으로 그려진 다큐 작품이다. 테노리오의 음악적 유산과 남미 우익 독재시대에 음악과 예술인, 그리고 역사가 교차하는 드라마틱한 서사를 영화는 섬세하게 전개해 보여준다.
20세기 중반,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은 수많은 쿠데타와 계엄령, 그로 인한 인권의 억압과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아르헨티나는 브라질, 칠레, 볼리비아, 파라과이, 우루과이 등 중남미의 우익 군부독재정권과 협력하여 좌파 척결을 공동 목표로 삼으며 ‘콘도르 작전’을 벌였다. 군인들은 매일 밤 골목에서 시민들을 감시하고 체포하였다. 체포된 사람의 대부분을 군부대의 조사실에서 고문하고 살해하였다. 남미의 군사독재 체제하에서 자유로운 예술과 표현은 억압되었고, 많은 예술가들이 좌파 혹은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혀 실종되거나 살해당했다.
영화는 이 역사적 맥락 속에서 브라질의 천재 피아니스트 테노리오 주니오르의 삶과 죽음을 조명하며, 한 천재 피아니스트가 어떻게 역사의 희생물이 되었는지 드러낸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이 아니라, 우익 군부독재정권 치하의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인권과 개인의 자유가 어떤 식으로 침해되고 탄압받는지 보여준다. 영화는 한 예술가의 흔적도 없이 사라진 실종과 죽음을 그리면서 무참하게 짓밟힌 예술혼을 조명하며, 민주주의 체제와 독재와 계엄 체제의 상반된 가치를 묵직하게 전달한다.
따뜻한 색감과 부드러운 선으로 테노리오의 삶과 예술 세계를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를 통해 감성적이고 시각적인 몰입감을 제공하여 깊은 여운을 남긴다. 기록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한 전개는 실화를 다룬 다큐멘터리로서의 무게감을 더한다.
영화는 애니메이션이 실제 영상으로는 담아내기 어려운 감정과 분위기를 전달하며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에 더하여 AI가 결합되면 과거에는 재현하기 어려웠던 사건과 인물들을 더욱 정교하게 재현할 수 있을 터이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 만들어낼 새로운 영화와 다큐멘터리의 미래를 기대하게 한다.
이 영화는 음악, 예술, 그리고 역사에 관심 있는 모든 분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다.
-
- 나는 첫 번째 게임에서 죽고 말겠지만.
나는 계급에 대한 이야길 좋아한다. 특히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가 속해있던 계급, 가난 그리고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했던 서민층 이하의 계급 이야기를. 처음 TV에서 보았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티저에서는 이정재의 사정이 따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이 드라마를 오락적 요소가 다분한 머니게임 드라마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드라마의 1-2화는, 게임에 참가하기까지 이정재(극 중 이름:기훈)의 동기와 사정에 대해 충분한 이야기를 빌드업하며 진행된다. 엄마에게 용돈을 타 쓰는 철부지 캥거루족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태생적으로 착하고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었다. 10년이 넘게 자동차 회사에서 일했으나 회사는 하루아침에 그를 쫓아내고, 그는 노조활동을 벌이다 동료 한 명을 잃는 사고까지 당한다. 아내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그를 떠나 새살림을 차렸고, 열 살 된 딸아이는 비교적 넉넉한 새아빠 밑에서 지내며 이정재를 측은히 여긴다.
설상가상으로 이정재의 홀어머니는 아프다. 당장 수술과 입원을 하려면 300만 원이 필요한데 그 돈마저 없어 그는 여기저기 돈을 빌리러 다녀야 한다. 그러나 이미 경제적 신용을 잃은 그에게 손을 내미는 이는 없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게임에서 이기면 456억을 주겠다는 매우 사기스러운 세력을 만나게 되고, 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그 게임에 참가한다. 어차피 더 무너질 것도 없는 상황,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그 게임이 바로, 오징어 게임이다. 돈이 차고 넘치는 어떤 부자들이, 너무나 심심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다가 '상금을 줄 테니 목숨을 걸라'고 만들어진 황당한 취지의 게임. 게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이정재와 마찬가지로 저마다 경제적 곤경에 처한 사람들이다. 여러 이유로 터무니없는 빚을 진 사람, 탈북자,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까지 사연과 동기는 다양하다.
더 이상 물러날 현실이 없는 그들은, 상금을 얻기 위해 부자들의 놀음에 기꺼이 목숨을 던지기로 한다. 참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어차피 (게임)밖이 더 지옥이야"라고. 반면 위스키를 홀짝이며 이 게임을 관전하는 부자들은 단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돈을 건다. 애잔하거나 애처로움을 넘어서 기괴함이 느껴지는 수준의 빈부격차.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자화상이었다.
내 20대 시절이 생각났다. 스물다섯 살엔가, 어떤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는데 나에게 제시한 월급이 120만 원이었다. 거기서 세금을 떼면 통장에 100만 원 조금 넘는 돈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매달 저축도 해야 하고, 사이버대학에 편입했던 터라 간간히 등록금도 내야 했으며, 교통비와 핸드폰 요금도 물론 내야 했다. 하물며 남자 친구에게 매일 얻어먹을 순 없으니 눈치껏 밥값도 계산할 줄 아는 여자 친구여야 했기에, 이런저런 사람 구실을 하고 다니려면 주머니 사정은 늘 여의치 않았다. 자주 적금을 깼고, 어떤 날은 돈이 모자라서 마찬가지로 힘든 엄마에게 손을 벌렸다. 또 어떤 날은 도저히 밥값을 낼 형편이 안돼서 친구들을 안 만난 적도 있었다.
그때의 내게 오징어 게임의 참가 기회가 주어졌다면, 난 참가했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너무도 팍팍하고 희망이 없는 삶을 살다 보면, 목숨을 걸어서라도 인생을 바꾸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난 참가했다고 해도, 게임 운도 더럽게 없어서 아마 1차전에서 총을 맞고 죽었을 것이다. 그곳에서조차도 아무런 두각도 나타내지 못하고 엑스트라로 끝나는 삶. 그게 그때의 내 삶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 마음을 너무 잘 알아서, 오지랖 넓고 착하고 가난한 이정재를 넋 놓고 응원하게 됐다. 지 목숨도 간당간당하는 판에 여기저기 다 퍼주는 그가 속 터지면서도 말이다.
다행히 이정재는 주연이니까 끝까지 살아남는다. 456억이라는 거액의 상금을 타서 고작 하고 싶은 게 '빚 갚고, 시장에 어머니 가게를 차려주는 일'이라던 이정재의 말은 오래도록 마음을 짓눌렀다. 그 마음 또한 알 것 같았다. 돈이 너무 없어서 세상을 미워했던 20대 중반의 나도 그랬으니까. 그 때의 나는 456억을 타면 무얼 하고 싶었을까? 베란다에 곰팡이가 서리는 싸구려 빌라에서 벗어나 엄마랑 살 따뜻하고 괜찮은 집 구하기, 글쓰기 수업 받아보기. 다른 좋은 곳 취직할 때까지 맘 놓고 공부할 수 있는 생계자금으로 쓰기. 내게도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어떤 부자들은 가진 돈이 너무 많아 쓸 데가 없어서 사람들의 생명을 건 게임에 돈을 걸지만, 어떤 사람들은 고작 300만 원 병원비가 필요해서 목숨을 건다. 너무 슬프지 않은가? 페라리를 몰거나 강남 몫 좋은 곳에 건물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작 어머니의 병원비 때문에 목숨을 던진다는 게. 부자들은 모르겠지만, 경제적 곤궁에 처한 사람들의 삶은 그렇다. 당장의 내일을 도모할 자본이 없어서 삶을 포기하고, 세상을 저주한다.
<오징어 게임>은 여러 신선한 소재와 화려한 스케일로 둘러싸여 있지만, 결국은 그런 부의 불평등, 돈 있는 계급이 돈 없는 계급을 유린하는 부조리를 꼬집는 드라마였다. 세상에 너무도 많은 이정재가 있음을 말하는 드라마. 화려한 외피 속에 가려진 이 드라마의 메시지를 읽는다면, 이 드라마는 더욱 묵직하게 다가올 것이다.
시간이 흘러 삼십 대가 된 나는 다행히도 100만 원의 월급으로 힘겨워하던 삶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아직 사회는 크게 바뀐 것이 없는 것 같다. 여전히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들, 고금리의 사채빚을 져서 목숨을 끊는 사람들,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가득하다. 뭐, 어쩌면 한편에는 정말로 오징어 게임을 만들어 가난한 자들을 체스 말처럼 사용하는 부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부자들이야 그렇다 치고. 적어도, 당장 내일을 살아갈 희망이 없어 목숨을 베팅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사회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옛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
돈이 사람의 존엄을 해치는 일, 정말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두미
INSTAGRAM @woodumi
BRUNCH brunch.co.kr/@deumji
-
-
- 「킹스맨 퍼스트」 100% 실제역사 기록으로 보는 영화리뷰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영화리뷰 with 역사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리뷰 | 킹스맨 요약 리뷰 |
?킹스맨:퍼스트 에이전트 (King's Man, 2021) 영화리뷰 - 실제 역사와 비교
+셰익스피어, 영국 군대, 왕의 남자
- 킹스맨 퍼스트 에이전트 영화정보
제작사: 20세기 폭스, 마브 스튜디오, 클라우디 프로덕션
배급사: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모션 픽처스,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장르: 액션, 스릴러
감독: 매튜 본
제작: 매튜 본, 데이빗 리드, 애덤 볼링
각본: 매튜 본, 칼 가이듀섹
원안: 매튜 본
출연진: 해리스 디킨슨, 레이프 파인스, 젬마 아터튼, 다니엘 브륄, 자이먼 혼수, 스탠리 투치 외
음악: 헨리 잭맨
개봉일자: 2020년 9월 18일
-
- 영화 <피닉스> 런칭 예고편
1945년 6월 아우슈비츠 생존자 넬리가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녀의 얼굴은 심하게 훼손된 상태.
성형 수술을 받고 회복된 넬리는 사랑하는 남편 조니를 찾아 나선다.
마침내 재회하지만 아내가 죽었다고 믿는 조니는 얼굴이 변한 넬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
- 영화 <낫아웃> 메인 예고편
고교 야구부 유망주 광호는 프로야구 드래프트 선발에서 탈락한다.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원하는 광호.
하지만 광호의 선택은 동료들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만들고,
기댈 곳이 없어진 광호는 친구 민철과 함께 가짜 휘발유를 판매하는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