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10-05 23:38:54
[BIFF 데일리] 이 여정에서 무엇이 보이나요?
영화 <그랜드 투어> 리뷰
DIRECTOR. 미겔 고메스(Miguel GOMES)
CAST. 크리스타 알파이아테(Crista ALFAIATE), 공살로 와딩턴(Gonçalo WADDINGTON) 외
PROGRAM NOTE.
1917년 양곤. 영국인 공무원 에드워드는 약혼녀 몰리와의 결혼을 앞두고 도망친다. 그래도 그와의 결혼을 결심한 몰리는 에드워드의 뒤를 쫓는다. 영화의 제목 <그랜드 투어>는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 또는 일본에서 끝나는 아시아 투어 여정에서 기인한다. 미겔 고메스는 2019년 그랜드 투어를 시작해 태국, 필리핀, 베트남, 일본 등에서 영상을 찍었다. 하지만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중국의 국경이 폐쇄되자, 감독은 스태프와 포르투갈로 귀국한다. 영화의 일부는 로마와 리스본의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중국의 영상은 어떻게 확보했을까? 미겔 고메스는 중국 현지에 촬영팀을 꾸린 뒤, 포르투갈에서 원격으로 촬영을 감독했다. (시차 때문에 매일 밤 자정에 작업을 했다). <그랜드 투어>의 기적은 바로 여기에 있다. 두 연인의 여정을 카메라에 담으며 미겔 고메스는 자유롭고 총체적인 스펙터클을 창조한다. 영화에는 수확, 종교 축제, 오토바이 행렬 등 현대 아시아의 모습을 담은 매혹적인 아카이브 이미지, 그리고 주인공이 안개가 자욱한 강을 건너거나 매혹적인 밤의 숲을 가로지르는 모험 소설 속 상상의 아시아가 공존한다. 미겔 고메스는 <그랜드 투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영화에는 국가, 성별, 시대, 현실과 상상, 세상과 시네마 등 분리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투어가 있다. 나는 무엇보다 관객을 이 투어에 초대하고 싶다. 이것이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서승희)

그랜드 투어는 본디 17세기 중반부터 유럽 상류층 자제들이 사회에 나가기 전 약 2-3년을 들여 신문물을 익히던 여행이다. 가정교사를 대동한 젊은 남성 귀족이 당시 유럽 문화의 최고 중심지였던 프랑스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그러나 교통수단이 계속해서 발달되고 구시대의 계급 구조 또한 변화되면서, 그 의미가 점차 퇴색된다. 19세기가 되면 대륙횡단철도를 포함한 각종 철도, 수에즈 운하 등이 차차 개통되면서 <80일간의 세계 일주> 같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배경이 된다.
20세기에는 제국주의의 광기가 시작되고, 이제 평범한 유럽인들도 식민지 관리를 위해 아시아로 향한다. 기이했던 이 시절은 문학의 역사에도 독특한 족적을 남긴다. 인도 벵골 지역에서 아편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나, 추후 영국 본토 생활을 그만두고 근무지를 버마(미얀마)로 신청한 인도제국 경찰관, 조지 오웰은 <버마 시절>에 그 시절의 축축한 야만을 기록했다. 소설가이자 영화감독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베트남 사이공 공무원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인도차이나 반도’ 곳곳을 다니며 살았고, 이는 <연인>으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 세계에 계속해서 묻어난다.
2019년, 유럽의 한 영화감독 또한 행선지가 비슷한 여정을 꾸린다. 포르투갈 출신의 미겔 고메스 감독이 영화 <그랜드 투어> 촬영을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에드워드는 1910년대 버마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7년째 약혼자 상태인 몰리와의 결혼을 코앞에 두고, 영국에서 찾아오는 예비 신부를 피하고 싶다며 갑작스러운 도주 길에 오른다. 범죄를 저질러도 저렇게 열심히 도망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저 도망은 대체 왜일까… 싶은 이 여정은 국경을 넘어 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베트남을 거쳐 일본, 중국에까지 이른다. 이 여정은 에드워드의 도주를 따르는 단단한 의지의 여성, 몰리의 행적을 통해 한 번 더 펼쳐진다. 즉 이 영화 스토리의 골자는 서로 겹쳐지기도 달라지기도 하는 두 개의 여정이다.

영화 속 여정들은 17세기의 ‘그랜드 투어’와도, 19세기의 ‘80일간의 세계 일주’와도 그다지 닮지 않았다. 20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제국주의의 광기와도 닮지 않았다. 그 닮지 않은 모양새를 아무 설명도 필요 없이 미장센으로 구현한다. 꿈을 비롯한 일부 장면을 제외하고 모두 흑백인데, 그 안에서 각지의 아름다움이 빛난다.
20세기를 재현할 때에는 환상적이다. 흑백이라 더 어렴풋하여 아름다워 보인다. 희뿌연 안개 낀 정글을 가로지르는 기찻길, 거기서 들리는 새 소리, 당시 부유한 사람들이 모여들던 싱가포르의 호텔, 방콕의 파티 현장 등은 모두 동양인 보기에 ‘적절’하다. 20세기 동남아 내 왕족의 부를 고스란히 재현하여 노골적으로 비춰 보이는 오리엔탈리즘을 피하고, 보는 동양인 마음 복잡스럽게 만드는 일 없이, 단순하게 영화를 영화로서 아름답다 느낄 수 있는 선을 적절히 지킨다.

소설을 읽어주는 느낌이 드는 내레이션 또한 국경선을 넘길 때마다 그 나라의 언어와 목소리로 새로이 펼쳐진다. 화면에는 현재 그 도시의 광경이 드러난다. 일본에 도착한 에드워드가 식당에서 마주한 일을 내레이션으로 설명하는 동안, 오사카의 작은 식당에서 국수인지 우동인지를 먹는 손님들의 모습과 음식을 내는 사장님 모습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20세기 이야기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객석에 있는 나의 동시대성을 밟고 서게 된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에라도 나올 것 같은 검박한 장면들이 겹쳐 흘러간다. 거위 알을 줍고 야자 열매 껍질을 벗기는 농부, 연꽃을 수확하여 팔기 좋게 단으로 묶는 여성, 오토바이와 차량이 줄지어 다니는 도로의 모습… 무엇보다도 감독이 꽤나 감흥을 깊이 받은 듯한, 동남아 각국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전통 인형무가 여러 차례 나온다. 덕분에 관객은 20세기와 21세기를 골고루 오가며 독특한 여행을 한다. 그러는 동안 내내 궁금해진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저 정도로 싫으면 차라리 결혼을 파하든지 대체 왜 저렇게까지 도망가는 것일까?

에드워드의 여정은 행선지를 못박아둔 여행이 아니라, 탈출이라는 목적만을 못박아둔 여행으로, 목적을 위시하여 행선지는 계속해서 추가된다. 이는 에드워드의 여정뿐 아니라 그 뒤를 따르는 몰리의 여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두 사람은 길 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이유 모를 이 선형적 여정의 끝으로 점차 달려간다.
그리고 여정의 끝에서, 관객은 감독이 준비한 선물을 맞이한다. 이 선물은 거울처럼 관객을 비추며, 관객에 따라 다른 답을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고, 여정에서 ‘왜’에 집착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뾰족한 물음표를 보고 팔짱 끼고 본 영화가, 팔짱 끼고 미간을 찌푸린 내 머리 위로 시원하게 내리치는 죽비 같았다.

모든 영화는 감독이 내놓는 상차림이다. 어떤 영화는 든든하고 친근한 밥상 같고, 또 어떤 영화는 조금 까다로운 미식의 세계 같다. 이 영화는 자기 실력에 자부심을 가진 요리사가 화려하게 꾸며 올린 테이블 같았다. 곱씹을수록 더 매력적인, 하나하나 더 뜯어 알고 싶은 그런 상차림. 영화를 본 직후보다 시간이 갈수록 더 만족스러운 상차림이었다.
10/04 20:00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 (상영코드 083)
10/09 13:30 CGV센텀시티 1관 (상영코드 457)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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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 투 훅 투 어퍼 위빙
청각 장애인 여성 복서. 당신의 머릿속에는 이미 영화 한 편이 그려졌을 것이다. 각고의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하고, 클라이맥스에서 멋진 승리를 거두고, 희망찬 미소 혹은 결연한 눈빛 같은 것으로 마무리되는 영화. 그러나 의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장애는 “극복”의 대상인가? 그렇다고 치더라도, 경기에 승리하면 장애를 “극복”하는 것인가? 이런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사실 장애 유무가 아니다. 우리는 그냥 이런 스토리에 속절 없이 약하다. 그러니까 신체의 한계까지 몰아붙여 눈부신 성과를 거두는 사람들의 스포츠에, 올림픽과 월드컵에서 펼쳐지는 누군가의 삶에 매번 감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영화를 더 보고 싶은지 물어보면, 좀 망설여진다. 보기 전에도 다 본 느낌이 들어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연출한 미야케 쇼 감독도 같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씨네21> 인터뷰에서 “수많은 권투 영화 명작이 있다. 그들이 했던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건 큰 승리 이후에도 인생은 계속되고 시행착오 또한 있을 거라는 것이었다. (…) 20대 후반쯤 되면 지금 삶의 방식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가도 될 것인가 점검하게 되지 않나. 케이코 역시 권투로 정점을 찍고 난 후 권투를 계속 해야 하는지 고민한다.”라고 밝혔으니까.
그 마음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메시지는 이를테면 분자 단위 정도의 크기로 잘게 곱게 분쇄되어 있었고, 영화를 보는 동안 내리는 눈처럼 고요하게 내게 녹아 스며들었다. 연출도 연기도 모두 훌륭해서 그런가? 소리 없이 전해지는 말을 들으면 이런 기분이구나.
영화는 오가사와라 케이코라는 복서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하고, 우리는 어쩐지 ‘실화 바탕’이라는 말에 자꾸 집중하게 된다. 마치 거기에 단호하게 선을 긋듯이, 영화가 시작되면 오가와 케이코라는 복서의 기본 정보가 텍스트 자막으로 깔린다. 그리고 체육관의 소리들을 들려준다. 어쩐지 ‘여기까지 기본 정보는 줬으니, 이다음부터는 영화로만 집중해 줘’라고 말하는 느낌이 들었다. 눈 내리는 고요한 날, 체육관 바닥에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낡은 운동기구가 삐걱거리고 줄넘기가 바닥에 탕탕 부딪는 소리가 우리를 영화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필름의 질감 안으로. 남녀 탈의실조차 분리되어 있지 않은 낡은 체육관에서, 필담으로 훈련을 시작하는 케이코의 세상으로.
필름에 담긴 도시 외곽은 어쩐지 채도가 낮다. 곳곳에 이른 아침을 시작하는 불빛들만 담겨 있는 시간 케이코가 달리기를 위해 집을 나설 때는 더욱 그렇다. 이른 새벽의 전등들은 왜 그리 피로해 보일까? 밝지 않은 불들이 서서히 켜지는 어슴푸레한 새벽은 왜 스산해 보일까? 그 도시에서 케이코는 채도가 낮은 푸른색으로 표표히 존재하고 있다. 체육관에서 입는 티셔츠도, 성실하게 훈련 일지를 기록하는 노트 옆의 파란 얼음 컵, 한 번씩 덧바르는 짙푸른 매니큐어도.
영화는 케이코의 푸르스름한 세상을 유난스럽지 않게 펼쳐 보인다. 한겨울에 웬 선풍기일까 하고 보면 이내 그 선풍기가 핸드폰과 연동된 아침 알람임을 닫게 되고, 초인종이 울릴 때 집 안에서 플래시가 번쩍인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일터에 수어로 말을 걸어오는 동료도 있고, 케이코에게 살가운 수어로 다가오는 남동생도 있지만, 케이코의 언어는 수어만이 아니다. 케이코에게는 다양한 소통의 수단이, 다양한 언어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복싱이 그의 언어가 된다. 이 영화는 케이코가 복싱을 언어로 체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개인전은 혼자 할 수 없다
케이코에게 다양한 언어가 있지만, 케이코는 그 언어들을 적극 사용해 외부로 나아가는 사람은 아니다. 케이코는 자기 세계가 뚜렷한 사람으로 보인다. 관장님 말대로 복싱에 재능은 없지만 (청각 때문이 아니라 “작고, 짧고, 주먹도 느리”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쌓아 왔다. 복싱은 원래도 개인 스포츠지만, 경기 중에도 아무 훈수를 들을 수 없는 케이코에게는 더더욱 철저하게 자기만의 힘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고민하는 중에도 케이코는 자신의 방식을 유지하려 한다. “말하면 기분이라도 나아지지 않냐”는 남동생에게 “그런다고 달라질 게 없다”며 말하지 않으려 하고, 사람은 결국 혼자라고 생각한다. 그런 고고함이 케이코 나름의 강인함일 수 있을 것이다. 복싱은, 특히나 케이코의 복싱은 철저하게 혼자 하는 개인전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고.
그러나 아무리 자기 세계가 견고한 사람이라도 혼자 살 수는 없다. 개인전인 복싱도 사실 상대와의 합으로 이루어지는, 혼자 할 수 없는 스포츠이다. 케이코의 세계에도 이런저런 고민들이 들어온다. 프로가 된 것은 대단하지만 이제 그만하면 어떻겠냐는 어머니의 만류, 갑작스럽게 체육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 귀가 들리지 않는 케이코를 모든 체육관에서 기꺼이 받아주는 것은 아니므로, 케이코는 복싱을 그만두어야 할지, 계속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관성과 타성을 뚫고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하는 지점이다. 진짜 계속할 마음이 있는지. 계속할 것인지. 계속할 수 있는지.
가끔은 그런 질문들이 삶에 벼락같이 찾아오는 일도 있다. 어쩌면 체육관이 갑작스럽게 문을 닫기로 한 것 또한 그런 순간일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언젠가 올 날이 코로나19가 앞당겨 왔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코로나19로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 그중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도 있지만, 도시 외곽의 낡은 복싱 체육관의 경우처럼 이미 멀어져 가던 것들을 코로나19가 가속화한 것들도 있다. 마스크로 인해 입을 읽어낼 수 없어 언어 하나를 잃은 청각 장애인들의 일상도 어쩌면 그럴지 모른다. 케이코와 부딪혔을 때 무례한 언사를 펼치던 어떤 행인처럼, 누군가의 언어 하나를 틀어막는 일은 코로나19 이전에도 우리 사회에 존재하던 방향성인지 모른다.
그러니 코로나19는 특수 상황이었다고, 이 바이러스가 한물갔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길 수는 없다. 코로나19 없이도 언젠가는 왔을 날이다. 관장님의 육체처럼, 낡은 복싱 체육관처럼, 모든 것은 언젠가 쇠잔해지니까. 우리 삶은 날마다 쇠잔해지는 가운데 우리에게 몇 개의 선택지 사이 고민을 계속 요구할 것이다. 완승하고 링 위에서 기뻐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링에 오르기 위해 땀 흘리는 날이 있으며, 때로는 그조차 막막해지는 날도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 어딘가에서
복싱은 무수한 반복이다. 고쳤다고 생각한 버릇을 또 고치고, 뛴 곳을 또 뛰고. 자꾸 힘이 들어가는 몸에 힘을 빼고, 심호흡을 하면서. 숨 하나씩, 주먹 하나씩, 쌓아 올리는 하루하루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힘들고 고단한 길이지만,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이 영화의 엔딩이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눈 부릅뜨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 올리는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훅 다가와서. 세상은 복싱이 사장되어 간다고 하고, 사실 필름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는 말을 많이 듣지. 그밖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어떤 것들 또한 비슷한 평가를 받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한 면면들은 어딘가 여전히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잠깐 지나가는 것 같았던 의사 역할을 나카무라 유코가 맡고 있어, 잠시지만 반가웠던 것처럼. 곳곳에, 어딘가에, 빛나는 면면들이 여전히, 있다.
영화 내내 도시의 불빛과 질감이 피로해 보이고 스산해 보이기만 했는데, 문득 그 불을 밝히며 하루하루를 쌓고 호흡을 가다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서 힘이 솟았다. 눈을 마주할 상대가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게 복싱이라는 스포츠의 가장 좋은 점인지도 모르겠다.
겁 많은 사람이 복싱을 하면 등을 보이고 도망갈 것 같지만 오히려 앞으로 뛰어든다. 몸을 숙여 피해야 하는데, 어쩐지 몸을 피하는 그 잠깐이라도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기가 불안해, 피하지 못하고 주먹만 휘두르면서 앞으로 나가곤 한다. 케이코는 프로 선수니까 나 같은 이유는 아니겠지만, 어떤 이유로든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는 점, 두려움으로 나아간다는 나쁜 습관 하나는 공통점이었다.
케이코가 배워야 했던 것은, 물러서지 않는 마음. 물러서지 않고 대신 가드를 든든하게 올릴 것. 세상에는 겁나는 일이 많지만, 도망치고 싶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아 진퇴양난에 빠지는 순간의 괴로움도 깊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물러서지 않기, 대신 가드를 올리기.
싸울 마음이 없으면 계속할 수 없는 게 복싱이다. 고민 끝에서 51:49의 아슬아슬한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게 만드는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결국 삶에서 결정적으로 소중한 것들은 바로 그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다. 거울을 보며 원 투 훅 투 어퍼 위빙, 눈물 고인 눈으로 주먹을 휘두르던 케이코처럼.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내일 체육관에 가면 원 투 훅 투 어퍼 위빙, 케이코가 몇 번씩 하던 콤비네이션을 연습해 보기로 다짐했다. 이 동작을 잘하려면 어퍼와 위빙 사이에 몸을 잘 틀어주어야 하고, 그러려면 한쪽 발은 계속 단단한 축으로 중심을 잡아야 할 것이다. 승패와 상관없이 마침내 계속 “할 마음(やる気)”이 생긴 케이코의 모습이 링 위에서 드러났듯이, 나 또한 한쪽 발을 단단한 축 삼아 또 계속해 보기로 한다. 그게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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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까지 본 적 없는데 그냥 꿀잼
청개구리란 말이 있다. 동물 청개구리를 구글에 검색해보면 '옛날에는 자주 보였지만 지금은 잘 안 보이는 동물'이라는 결과물이 나온다. 난 사실 실제로 청개구리를 본 적은 없다. 그 대신 단어는 많이 들었다. '남들이 하지 말라는 거 굳이 하는 사람'이라는 뜻 아닌가? 어릴 때 말 더럽게 않는 사람들에게 청개구리라는 말을 붙였다. 또 비슷한 단어로 황소개구리가 있다. 황소개구리는 이름에서 오는 느낌처럼 생태계를 파괴시키는 동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많이 쓰는 단어는 아니지만 존재 자체가 반칙인 사람들을 묘사할 때 흔히 쓰인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청개구리적 특성과 황소개구리적 특성을 모두 담은 감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기본적으로 유혈이 낭자한다. 또 수위도 세다.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에서 이마에다가 낙인을 찍는 것이나 <킬빌 1>에서 엔딩부의 결투 장면이 생각난다. 뭐 잔인한 걸 표현하는 감독이야 아~주 많겠지만 타란티노처럼 묘사하는 사람은 그냥 전 세계에 없다. 무슨 칼싸움을 해도 타란티노 느낌이 나고, 말싸움읋 해도 인장이 있으니 청개구리와 황소개구리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의 필모그래피 중 (비교적) 언급이 덜한 작품이 있으니 여러분에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1. 무엇에 관한 영화인가요?
굉장히 잘 짜인 스릴러 영화다. 또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줄거리라고도 생각한다. 어느 날, 여자 네 명이 모여서 어느 산장에 놀러 가기로 한다. 요즘도 유행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아는 '여은파''쯤 될 것이다. 네 명이서 서로 야한 이야기부터 사는 에피소드까지 별의별 대화를 하고 차에 탄다. 그러다가 어느 술집에 도착한다. 술집에는 남정네들이 득시글하다. 연애를 하고 싶어서인지 남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여자들을 꼬실 생각뿐이다. 그렇게 남자 몇 명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혼자서 나초를 야무지게 먹는 한 아재가 있다. 얼굴에 큰 상처도 있고 먹는 것도 무슨 곰처럼 먹어 좀 튀어 보이는 이 남자. 이 남자에게는 얼굴에 난 상처처럼 무슨 일이 있던 게 아닐까? 이 남자처럼 혼자 온 여자가 있다. 이 여자는 비가 주룩주룩 오는 지금 집에 갈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거리고 있다. 능수능란한 남자의 화법에 점점 멀리 떨어져 있던 거리를 좁히는 여자. 그렇게 그녀는 그의 차에 동승하게 되고 끔찍하게 살해당하게 된다. 그리고 1년이 지난다. 네 명의 여자가 다시 남자의 사정권 안에 들어오게 되고 다시 같은 위험에 빠진다. 영화는 이런 '차를 활용해 사람을 죽이는' 전대미문한 사이코패스를 인물들이 어떻게 이겨내는지를 보여준다.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평범한 범죄물을 여러 번 비틀어 카체이싱을 통한 강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2. 배우들의 연기 합은 어떤가요?
이 영화는 고난도의 액션이 들어가 있다. 차를 활용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살리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1. 카체이싱 2. 때에 따라 차 내/외부에서 연기를 해야 함이라는 두 가지 과제가 있다. 또 감독이 쿠엔틴 타란티노 아닌가? 말로 관객들을 웃기는 테크니컬 한 모습도 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타란티노의 영화는 배우 입장에서 어려운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고유한 시그니처가 있다는 말은 그거에 맞게 배우들이 훌륭하게 소화해왔다는 뜻인데, 배우들이 타란티노랑 다른 사람인데 그걸 어떻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렵겠지? 근데 이 영화는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하게 배우들이 큰 무리 없이 배역을 소화해낸다. 후반부는 배우들의 호연이 돋보이는 지점까지 있을 정도다. 특히 칭찬하고 싶은 부분은 '조'역을 맡은 배우다. 찾아보니까 이 인물은 실제 스턴트맨이라고 한다. 이 말은 배우가 실제로 이 인물에게 주어진 액션을 소화했다는 뜻이 된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 부분에 놀라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가감 없는 액션만으로도 영화를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는데 무리가 없을 정도를 떠나 그냥 배우의 호연이 영화의 강점으로 작용했다는 뜻이다.
3.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나요?
그냥 친구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장면만 봐도 웃긴 데다 플롯도 쉬워서 이해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원초적인 재미로 가득 차 있다.
4. 보기 전에 알아야 할 지식이 있나요?
이게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쿠엔틴 타란티노가 손꼽히는 덕후라는 것을 알 것이라 생각한다. <킬 빌>에서 홍콩의 무술영화에 대한 오마주가 있었다는 것이나 일본 애니 좋아한다는 일화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듯. 이 영화도 고전 명작 <배니싱 포인트>를 비롯한 다양한 영화들의 오마주가 담겨있다는 말이 있다. 근데 사실 그냥 왓챠에 8천 원 내고 보는 이들에게 이런 부분은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 불가결한 작품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기 좋은 작품이다.
5. 어떤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나요?
이 영화가 무난하진 않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데뷔작 <저수지의 개들>을 보면, 초입부에 야한 농담을 하는 주인공들이 보인다. 이런 감독의 특성이 영화 줄거리 전체에서 보인다. 19금 코드가 영화 전반적으로 깔려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이 글과 영화를 보는 분들은 대부분 성인 아닌가? 원초적으로 웃기고 스릴이 넘치는 작품이니 만큼 이것에 거부감이 없는 분들이라면 아주 좋은 킬링타임 무비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또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 이 작품을 본다면 거의 '안 본 눈 삽니다' 급이다. 무난한 영화도 아닌데 장르적인 재미도 있고 감독의 강점까지 박혀있으니 어디에도 없는 경험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또 장르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스릴러로서도 아주아주 탁월하다. 후반부 절정으로 치닫는 액션이나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감독이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로 결말이 나는 부분이 흥미롭다. 이렇게 남에게 의존하지 않는 강한 주인공의 문제 해결을 보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강력 추천하는 바이다. 아, 그냥 이 영화는 재밌다. 타란티노 감독은 뭐 이 영화가 내 필모그래피 중에서 제일 구리다고 해서 뭐 어쩌라고? 그냥 영화가 재밌어서 아무나 봐도 좋다. 구구절절이 글로 쓸 필요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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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줄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기발하게 직조한 스릴러
올빼미
주인공 경수는 동생과 함께 살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지 경수 형제의 부모님은 보이지 않는다. 돈을 버는 건 경수뿐이다. 일을 하기엔 너무 어린 동생. 경수는 침술을 익힌 한의사로서 경제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벌이는 적당히 잘 된다. 나름 실력이 있는 침술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수에겐 페널티가 있다.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많은 경수. 장님이기 때문에 지팡이가 없다면 일상생활이 어렵다. 그 대신 다른 감각이 발달했다. 숨소리, 발소리, 냄새, 속삭이는 작은 소리까지 상황 판단에 능한 경수. 경수가 침술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용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건 이 역량의 힘이 컸다. 능력이 제법 있는 경수. 경수가 사는 마을에 어의를 뽑는 시험이 열렸고 주인공은 거기에 지원하려고 한다. 궁에서 나오는 월급이면 동생의 약도, 생활비도 충당할 수 있다. 그래. 한번 보는 거야. 다다른 시험장. 시험 문제는 경수 입장에서 좀 터무늬 없던 것이었다. 실 한 줄을 가지고 상대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다. 실 하나를 가지고? 이상한 문제에 의아해하며 출제자에게 태클을 거는 경수. '이 시험은 애초에 어불성설입니다!' 말 한마디에 어의 담당자였던 이형익의 눈에 들어오게 된다.
궁중에 입성한 경수. 경수가 근무하게 될 어의 집단은 위계질서가 분명했기 때문에 나이가 어린 사람이더라도 선임 대접을 깍듯이 해야 했다. 그런데 여느 군기가 심한 집단이 안 그랬나. 부조리도 있다. 앞이 안 보이는 경수. 나이 어린 선임이 반말을 찍찍 날리며 "약재를 저 칼로 정리해놔라"라고 지시한다. "앞이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해?'" "그러니까 하는 거야." 어떻게 경수가 그걸 다 해? 하지만 경수는 선임이 지시한 업무를 무탈하게 완료한다. 의외의 이유가 있었다. 경수는 낮에는 앞이 안 보이지만 어두운 밤에서는 시야가 들어오는, 병을 앓고 있는 주맹증 환자였던 것이다. 약초 정리도, 궁에서 연애질 하는 남녀에게 쌀자루를 날리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단지 어려운 것은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궁중에 들어올 수 없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는 것이다. 안 보이는 척해야 했던 경수. 그렇게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을 아예 못 봤으면 좋았을 텐데. 경수는 보지 말아야 할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청이 조선의 소현세자를 압송하고 8년 만에 세자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 세자가 죽었다. 유일한 목격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침술사 경수였다.
익숙한데
어? 이런 영화 본 적 있다. 언제? 올해 여름에. 바로 <헌트>다. <헌트>는 5공화국 당시 삼엄했던 분위기를 핵심 키워드로 삼은 영화다. 박평호와 김정도는 사냥감을 '헌트'하며 우리 현대사에서 괄호 쳐졌던 역사를 질문한다. 어떻게? 기존에 존재했던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이는 것이다. 이 당시 '아웅산 테러 사건'은 1983년에 일어난 명확한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의 중심 서사는 이정재 감독이 각본을 쓰며 창작한 이야기다. 영화에서 시간적 배경이 1983년인 이유가 뭘까? 극에서 제시되는 여러 사건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글쓴이는 '5공화국의 말로를 맞이하기엔 몇 년 남았기 때문에'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남아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현재 2022년에 다시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올빼미>가 취한 노선도 <헌트>와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감독인 안태진 감독은 조선왕조실록에 쓰여있는 '소현세자가 학질로 사망했다'라는 문장에 호기심을 얻고 이야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안태진 감독을 직접 만나 여쭤본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의도를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영화를 보면서 단순히 시대극의 틀을 빌려와서 재미있는 스릴러'만'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올빼미> 역시 <헌트>와 비슷한 화법을 쓰고 있다.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대립하는 키워드는 '보다'와 '보지 않는다'라는 대비다. 주인공 경수가 어쩔 땐 보이고 어쩔 땐 안 보이는 주맹증 환자라는 1차적인 세팅 때문은 아니다. 영화는 인조와 소현세자, 최대감, 소현세자의 부인, 원손까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고, 또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질문한다. 이 질문은 현재의 한국사회에게도 질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밝지만 어두운 사실을 직면할 것인지. 어둡지만 아픈 사실을 받아들여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 <헌트>가 현대사의 상처를 묻는다면 <올빼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현재에 대해 반문한다.
그래도 다른 것
그렇게 <헌트>와 유사한 영화지만 글쓴이는 <헌트>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물론 <헌트>만큼이나 훌륭한 부분도 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주인공을 인조로 설정하지 않으면 이야기의 어느 부분도 성립되지 않는다. 인조라는 인물이 고르는 선택지가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 인조반정, 당시의 주전론/주화론 간의 대립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 이는 감독이 인조라는 왕에 대해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는 것과도 이어지고, <헌트>와 공통점을 갖는 지점이기도 하다. 또한. '진범이 누구인가?'라는 중심으로 서스펜스를 끈끈하게 이끌어간다는 부분은 두 영화가 공통점을 갖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이야기가 전복되는 부분도 왠지 모르게 공통점을 가진다.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동림'의 행적이 중요하다가 물 흐르듯 서서히 하이라이트로 넘어가는 <헌트>처럼 '소현세자'를 암살한 흑막을 찾다가 후반부로 전개되는 이야기 전개 역시 두 작품의 공통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글쓴이가 이 <올빼미>를 보고 아쉬웠던 점은 이야기의 만듦새가 살짝 아쉽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일단 소현세자를 죽인 흑막이 누구인지 드러났을 때까지 이야기는 촘촘하다. 그런데 이 이후부터 제일 마지막 시퀀스까지 그 엔딩부의 장면 하나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하나 끼워 맞췄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주인공이 흑막의 정체를 알고 나서 어떤 행동들을 계속한다. 그런데 여기에 너무 페널티가 없다. 아예 생경한 전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려면 주인공 경수는 거의 국정원 요원급에 준하는 스펙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 글쓴이는 가장 마지막 시퀀스를 넣은 의도가 궁금해졌다. 거기서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를 지었다고 해서 쾌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쾌감 넣으라고 그 장면 넣은 거 아닌데?'라고 하면 할 말 없다. 그런데 그렇게 이야기를 끝마무리 짓지 않아도 영화 흐름에 아무 지장이 없다.
또 인조라는 인물에 너무 감정선이 얕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조는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인물이다. 세자가 독살당했다는 전대미문의 사건에서 왕의 포지션은 당연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물의 행적을 유해진 배우의 표정연기와 역사적인 평가에 의존한다. 이 인물의 입장에서 더 감정적으로 비틀대거나, 어떤 것을 표현하거나 하는 식의 장면이 초중반부부터 살짝 들어갔다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더 용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사람이 청의 문물을 거부하는 이유는 뭔지. 대립할 수밖에 없는 소현세자와의 관계에 대한 묘사는 무엇인지. 지금 명, 청에 대한 인조의 생각은 무엇인지. 인조가 보여줄 수 있는 외교적인 한 수는 무엇인지까지 이 인물의 내적인 동기부여에 확실했다면 이야기가 흐름이 윤활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유해진 배우의 열연만 기억에 남는 것이다.
유해진 배우 멋있어요
이 영화에서 두 배우는 굉장히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일단 가장 중요한 주인공 류준열 배우는 자기랑 맞는 옷을 입었다. 올해 류준열 배우의 출연작으로 <외계+인> 1부가 있었다. 많은 분들이 지적한 부분이기도 한데, 여기서 류준열 배우는 좀 이질감이 든다. 이 영화에서 대사가 갖고 있는 임무는 막중했다. 바로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세계관을 보다 쉽게 이해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류준열 배우가 맡은 캐릭터가 품고 있는 비밀이 있음에도 경박한 모습만 기억에 남는 것은 감독의 무리수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 <올빼미>에서 류준열 배우가 맡은 '경수'는 앞에서 제시한 예시와 정반대에 있다. 영화에서 코미디가 없진 않지만 경수와는 정반대의 인물이 담당하고 있다. 또한 경수는 앞이 보이지 않으나 밤에는 시야가 밝아지는 이중적인 모습이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쉭쉭 무너져내리는 감정연기까지 수행해야 한다. 경수가 영화의 배경을 담당한 셈인데 류준열 배우는 어느 곳에 뭐가 들어야 전달이 쉬울지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다. 류준열 배우만 할 수 있는 연기를 한다.
또한 유해진 배우가 맡은 인조 캐릭터도 연기를 정말 잘했다. 영화에서 인조의 서사에 구멍이 났다는 점은 좀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유해진 배우의 경험치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신이 있다. 인조가 청나라 사신의 히스테리에 반응하는 신이다. 영화에서 이 장면은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로 작동한다. 이때 인조가 갖고 있던 정신질환과 나라의 대표가 겪는 굴욕이라는, 역할 갈등에 해당하는 스트레스를 표정으로 보여주는 호연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자체가 인조의 평가에 대해 살짝 의존한 감이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의 무능력을 최소한의 범위에서 어떻게 보여줘야 할 것인가? 는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때 인조가 궁에 있는 신하들에게 신뢰를 잃어가는 과정을 영화가 보여준다. 이 연기를 하면서, 유해진 배우는 눈빛 연기 하나로 감정전달에 입체성을 부여하며 극을 이해시킨다. 역시 유해진 배우도 올해 개봉작 <공조 : 인터내셔날>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때 "아니 무슨 ~~ 도 아니고"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낡은 화법은 좀 아쉽게 느껴졌다. 그러나 유해진 배우는 그동안 맡았던 가벼운 역할을 뒤엎는 중량감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올해 개봉작 중 남자 주연 배우들이 엄청난 연기를 보여준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유해진 배우의 인조도 낄 만하다.
무리 짓는 것
영화에서 '본다'와 '보지 않는다'의 대비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무리 짓다'와 '무리 짓지 않는 것'의 대비다. 영화는 끊임없이 두 집단을 대비시킨다. 인조와 대립각을 세우는 최 대감 무리. 침 하나와 나머지. 경수와 군인들. 청나라 사신과 조선의 신하들 등등 인물의 밀도에 템포를 바꾸며 영화에서 어떤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영화의 핵심 키워드로 작동한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가장 큰 범주이자 선명한 대비는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바로 백성들과 조선 지도부와의 대립이다. 이를 다양한 측면에서 조명할 수 있게 촘촘하게 이미지를 보여줬다. 좋은 스릴러 영화다. 또 우리에게 밝지만 떼거지로 몰려있는 흑역사를 맞이할 것인지, 어둡고 혼자 밌지만 아픈 사실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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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켄 로치 할아버지가 묻는다.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켄 로치 감독이 1936년생이니까 2023년 기준 87세이다.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 같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영화 <나의 올드 오크>는 아마도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영화 <지미스 홀, 2014년>을 보여주면서 은퇴 선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뭔가 돌아가는 꼴을 보니 마음에 들지 않은 구석이 있었던 것인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을 가지고 와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아간다. 이후 영국 북동부 지역의 낙후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영화 <미안해요 리키, 2019>,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나의 올드 오크, 2023>까지 3부작으로 구성된 연작을 완성하게 되었다. 영국 북동부 3부작 영화를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켄 로치 할아버지가 묻는 '그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영화 <나의 올드 오크, 2023> 포스터
복지 수당 받기 더럽게 힘드네 :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다니엘의 부인은 오랫동안 앓았다. 평생 목수로 일했지만, 남은 것은 늙고 쇠약해진 몸뚱이와 간병으로 기울어진 가정뿐이다. 다니엘은 정부에 복지 대상자로 신청해 수당을 받으려고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빙글빙글 여기저기 돌다가 자기네들이 설정해 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그나마 신청할 수 있는 복지 사업은 서류를 컴퓨터로 제출해야만 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진짜 심각한 지병이 있어서 일하기도 어려운데, 자꾸 근로 능력이 있는데 복지 수당만 챙기려는 사람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노인 대상 복지 체계만 이런 것도 아니다. 어린아이들을 혼자 양육해야 하는 케이티도 마찬가지다. 소통되지 않는 원칙과 각종 서류들, 증빙이 되는 번호들, 성실하지 못해 복지 대상자가 되었다는 따가운 시선들 등 모든 장애물을 넘고 넘어가야 겨우 복지 수당이라는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2016> 포스터
자영업자는 아닌데, 노동자도 아니라네요 : <미안해요 리키, 2019>
제인네 가족은 아빠, 엄마, 오빠, 제인. 이렇게 네 식구가 같이 살고 있다. 아빠는 택배 일을 하시고,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계시다. 두 분이 맞벌이를 하시기 때문에 제인은 학교가 끝나면 혼자 빈 집에 들어와서 엄마가 요리해 놓은 음식을 먹고, 숙제를 한다. 오빠 셉은 집에 늦게 들어오는 날이 많은데,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택배 일이나 요양보호사 일은 자영업자는 아닌데, 노동자도 아니란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직종을 특수형태근로종사자라고 한다. 회사의 보호를 받아야 할 때에는 자영업자로 내몰리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노동 유연성을 발휘하려 할 때에는 노동자로 당겨진다. 팽팽하게 당겨진 줄 사이에 묶인 제인의 아빠와 엄마는 더 많은 근로를 요구받고, 혹사를 당한다. 혹사당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영화 <미안해요 리키, 2019> 포스터
똑똑똑, 들어가도 되나요? 저는 난민이에요 : <나의 올드 오크, 2023>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2016년 난민법을 제정하였다. 2024년부터는 한국의 이주민 비율이 공식적으로 5%를 넘기 때문에 '다문화 국가'에 진입한다. 사실 미등록 이주민들이 빠진 수치이기 때문에 이미 5%는 진작에 넘었다. 난민법에는 재정착 희망난민제라는 것이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정부가 직접 난민 캠프로 가 그 곳에서 한국에 정착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이다. 태국의 난민 캠프에서 어렵게 살고 있는 미얀마 출신의 가족들이 이 제도를 통해 한국으로 들어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만약 재정착 희망난민제로 한국에 들어온 난민 가족들을 버스에 태워 인구 유출이 심각한 문제인 지역에 정착하도록 보낸다면,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까? 이런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기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한다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너무 무관심한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영화 초반, 더럼 지역으로 버스가 들어온다. 이 버스에는 시리아 난민 캠프에 살던 가족들이 타고 있다. 버스에서 내린 야라는 동네 사람들의 혐오를 온몸으로 받아낸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올드 오크 사장님 TJ는 마음이 불편하다. TJ는 야라의 카메라는 수리하도록 도와주고, 자신의 공간에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해 준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 나누며 둘은 친구가 된다.
친구가 된 TJ와 야라
<나, 다니엘 블레이크>나 <미안해요 리키>는 영화 제목에 주인공의 이름이 들어있지만, <나의 올드 오크>는 공간명이 제목이 되었다. 물론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그렇지 않은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름을 넣는 것으로 지어졌다. 앞선 두 영화가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를 전달한다면, 나의 올드 오크는 인물들이 만나서 대화하는 장소가 강조된다. '올드 오크'라는 펍은 원래 40년 동안 단골로 다녔던 사람들이 '우리의 공간'이라고 여기는 곳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담긴 공간이 '우리가 아닌 자'들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쉽고, 서운하고, 화가 난다. 그래서 쉬이 내어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돈은 없는데, 돈 들어갈 곳은 많고,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결과가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는 일은 부지기수며, 인생이 쉬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는 것을 포기하면 안 된다. 포기하는 순간, 사람 인(人) 글자가 바로 무너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뉴캐슬어폰타인 - 선더랜드 - 더럼 순으로 영국 북동부 3부작 영화의 배경이 이동한다.
* 해당 리뷰는 씨네 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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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tflix 영화] 그녀의 조각들 / Pieces of a Woman, 2020 - 맞춰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나'라는 그림
영화 <그녀의 조각들>의 포스터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주연 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관심이 생기는 영화입니다.
이제는 어엿한 연기파 배우이지만, 아직도 관객들에게는 <트랜스포머>시리즈의 주인공 "샤이아 라보프"와 국내에서 <분노의 질주: 홉스&쇼>와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이라는 액션 프랜차이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준 "바네사 커비"가 출연하는 이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이들의 필모를 생각하면, 맞지 않는 영화 같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바네사 커비"에게 '제77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안겨주며 우리의 선입견을 깨버렸는데요.
그런 점에서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그녀의 조각들>은 당연히, 기대할 수밖에 없는 영화가 되었습니다.
'과연,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어떤 내용을 보여줄지?' - 영화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의 장면
영화는 출산을 코앞에 둔 "마사"와 "숀"부부를 보여줍니다.
다리를 건설하는 노동자 "숀"은 앞으로 태어날 딸과 걷기 위해서 놀고 있는 다른 동료들을 채근하고, 자동차도 픽업트럭이 아닌 "SUV"로 바꾸는 등 "마사"만큼이나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그렇게, 집에서 출산을 결정한 "마사"에게 뜻하지 않는 변수가 생깁니다.
이전까지 봐주던 조산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찾아왔고, 힘들게 태어난 아기는 곧장 호흡에 이상이 생기는데…
“
맞춰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나'라는 그림
1. 모든 것을 쏟아부은 초반 30분!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126분의 영화로 적은 분량을 가진 영화는 아닙니다.
이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라고 언급한 만큼 그 소재가 대중적이지 않다는 선입견이 있을 겁니다.
여기에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30분간 "원테이크"처럼 출산 장면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니 이를 보는 관객들이 느끼는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눈을 뗄 수가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은 이를 연기하는 배우들과 연기를 더 살려주는 연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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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 하면, 짝하는 호흡!
흔히, 관객들에게 "다큐멘터리"는 "진짜"라는 인식이 있지만 이 역시 "편집"이라는 과정이 거치는 거짓의 산물입니다.
물론, 보이는 영상 말고도 읽는 글에도 이런 과정이 들어가니 창작자의 의도에 맞게 움직이는 것이죠.
그런데도 관객들은 진실을 요구하고, 이를 진짜로 보이게 만들어야겠죠.
그렇기에 화면을 끊이지 않고 연속적으로 방과 방을 보여주는 "원테이크"는 관객들에게 출산 상황을 진짜로 인식하게 만드는데요.
여기에 이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연기도 확실하니 부담이 크더라도 <그녀의 조각들>이 어떤 영화인지를 관객들에게 첫인상을 확실하게 찍어내는데 성공합니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의 장면
2. 30분이 끝나고, 영화도 지쳤나 보다.
초반에 힘을 몰아붙인 이유 때문일까요?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이후 늘어지는 전개로 좀체 관객들을 집중시키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후 영화가 보여주는 주된 내용이 "마사"와 "숀"부부의 불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는데요.
여기에 영화는 "조산사"와의 법적 다툼도 다루지만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지 못하며 별개의 이야기, 단편적으로 쓰이는데요.
그러면서, 각기 다른 이야기로 인한 피로감과 개연성에 많은 부분들이 부딪히는데요.
이야기적으로 "숀"의 외도가 이해가 되면서도 마무리를 그렇게 지었어야만 하는 끝맺음처럼 "마사"의 법정에서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 뜬금없이 보이고 맙니다.
이처럼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전반전과 후반전이 완벽하게 다른 영화가 돼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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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유가 있었을까요?
이런 이유에는 영화 <그녀의 조각들>이 "마사"라는 인물에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이야기에 있어 다양한 인물들과의 관계를 가져오지 않기에 발생하는 에피소드의 가짓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데요.
그래서, 남편인 "숀"과의 에피소드는 반드시 필요한데 이마저도 앞에서 언급했듯이 마무리가 아쉬우니 126분이라는 시간은 더더욱 길게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마사"의 심리는 완벽했을까요?
이에 대해서도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과 비교한다면,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짙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해당 영화를 소개하자면 시한부인 주인공이 하루를 살아가는데 특정 기억을 하나씩 지운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과 비교한다면, 만족감보다는 아쉬움이 더 짙은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일단, 해당 영화를 소개하자면 시한부인 주인공이 하루를 살아가는데 특정 기억을 하나씩 지운다는 내용입니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의 장면
3. 연기력에 비해 한없이 아쉽다?
영화 <세상에서 고양이가 사라진다면>에서는 이를 "시계"에 비유해 자그마한 부품이라도 없다면 시계로서의 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데요.
여기에 비선형적으로 보여주는 단편적인 기억들까지 더하며, 영화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또한 지금의 나 자신이 존재하는 구성요소임을 말합니다.
이처럼 영화 <그녀의 조각들>도 "마사"의 심경 변화를 "사진"으로 보여주는데요.
냉장고에 있는 "숀"과의 사진을 정리한 "마사"와 딸과의 사진을 받는 "마사"의 모습으로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말합니다.
이전에는 이를 부정하고 거부했다면, 끝내 이를 받아들임으로 비로소 오늘날의 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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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강에도 다리는 이어진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은 특이하게도 날짜와 "숀"이 진행하던 다리 공사의 진행도를 이야기의 챕터로 보여주는데요.
단순한 장면으로 보일 수 있지만, 꽁꽁 얼어붙은 강으로 모든 것이 정체된 것으로 사건 이후 이들의 상황을 간접적으로 말합니다.
특히, "마사"가 입에 무는 "사과"는 갈색으로 변해 썩어 버리며 점차 악화되는 상황을 말하나 이런 상황과 다르게, 다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모습은 점차 개선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마사"는 사과씨를 발아하는 장면은 이에 딱 맞는 장면입니다.
생명을 잉태하는 과정에서 좌절을 겪은 "마사"가 비록, 사과이지만 이를 밟음으로 점차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죠.
물론, 이후 나무에 가려진 장면은 사족으로 느껴질 만큼 아쉬움이 생겼지만 배우들이 보여주는 연기에 비해 이야기가 아쉽다는 인상을 지우기는 어렵네요.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파천황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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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꾼 계 자강두천의 볼만한 대결
영화의 시작은 심플하다. 전후 상황에 대한 설명 없이 그저 시체를 집 바닥에 숨기고 집을 불태워버린다. 시체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주인공이 죽인 건지, 그저 죽은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이 의심받을까봐 그렇게라도 처리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영화는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 스탠턴은 특별한 대사를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그 누구보다도 추진력이 있었다. 그 추진력의 바탕이 된 그의 과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성공하는 사람이라면 가질 법한 야망이 있는 남자였다. 그런 야망과 영리함에 반한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가 잠시 몸을 숨긴 유랑단에 소속된 외로운 여자였다. 두 외로운 남녀가 눈이 맞아 더 넓은 세상으로 뛰쳐나가는데, 이들의 미래는 순탄하기만 할까?
1. 내용이 예상가지만 그래도 끝까지 보게 된다
영화 초반에 감독은 관객들에게 굉장히 불친절하다. 스탠턴이 왜 유랑단에 숨어들어가게 되었는지, 대사가 암시하듯 그의 과거에 아버지와 관련한 안 좋은 추억이 있는 듯한데, 그 추억이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다만, 그의 과거가 어떠했을지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짐작만으로는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가 왜 그렇게까지 야망을 표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는지 그저 대사가 주는 암시로 짐작만 하기에는 납득이 잘 안되었었다.
하지만 명확하게 납득이 가지는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다음에 이 남자가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갈등이 있을지 혹은 어떻게 추락할지 어렴풋이 예상이 가능할 만큼 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지루하지는 않았다. 영화의 크레딧이 가면서 꽤 곰곰이 생각했던 부분이었다. 내용이 드라마틱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내용도 이정도면 드라마틱하긴 했지만 꽤나 클리셰들이 많았다. 욕망이 가득한 남자가 갈 곳이 결국 어디겠는가? 당연히 타락인 것을. 그리고 그 타락의 과정에서 등장한 묘령의 매력적인 여인, 릴리스 박사의 존재도 주인공의 목적 실현에 도움이 되는 듯하다가도 그의 집중력을 흐릿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본드걸과 비슷한 역할이어서 찾으려면 다른 영화에서도 그런 역할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영화에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을까 되짚어보면, 결국 연출의 힘이었던 것 같다.이 영화가 연출이 정말 좋은 영화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인물 하나하나의 감정이 알 것 같으면서도 그렇다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도록 미스터리함을 유지하는 배우들의 표정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그런 배우들의 표정을 잘 담을 수 있도록 점진적으로 클로즈업하는 카메라 워킹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되돌아보니, 오히려 초반에 캐릭터에 대한 인식을 헷갈리게 한 것도 오히려 이 영화가 가진 클리셰를 미스터리로 푸는 데에 도움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 포스터에서는 근 10년간 나오지 않았던 반전이라고 홍보했던데, 그 정도로 반전이었는가라고 생각해 본다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결말로 인해 이 영화, 굉장히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인상은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2. 기예르모 델 토로인 듯 그렇지 않은
오히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갈 때, 더 놀랐던 점이 있다면, 감독이 기예르모 델 토로였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양심선언을 하자면, 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과거에 LA시립뮤지엄에 놀러갔다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세계를 총망라한 영화 소품들을 모아놓은 전시회를 갔던 적은 있었다. 그 때, 이 감독의 작품 세계에 대해 얼추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그 때, 느꼈던 이 감독에 대한 인상은
"아니, 기괴하고 고어(gore)한 생물체를 왜 이렇게 많이 등장시킨 거야? 이 감독 진짜 특이하고, 웃긴(좋은 쪽으로) 사람이다."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딱히 외관적으로 기괴한 생물체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행위들이 죄다 기괴하다. 서커스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영화의 초반부에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슬로건을 마음 속에 품고, 비인류적인 행위(멀쩡한 사람을 데려다가 반불구를 만드는 일)도 서슴치 않고, 다른 이들을 위로한다는 명분 아래 사기치는 것도 당연시되는 그 서커스 사회 자체가 이미 기괴하고, 고어하다. 외관적으로 기이해 보이지 않아도 이미 그 사회 속에 들어가서 주인공이 적응하는 것만 봐도, 이 주인공 또한 범상치 않은 인간임을 보여준다. 주인공을 묘사한다면, 그가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던 새디즘적 기질과 기괴한 환경이 만들어낸 괴물, 딱 그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감독의 의도를 감히 뇌필셜로 유추해 본다면, 이 영화는 더 이상 외적으로 솟구쳐 표현된 기괴함보다는 인간의 내면에 깊게 자리잡은 울퉁불퉁한 욕망의 위험성에 대해 고찰해 본 그의 시간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스탠턴은
3. 나쁜 놈 위에 나쁜 놈
“사람들을 속이는 게 아냐, 사람들이 스스로를 속이는 거지”
스탠턴은 사람을 속이는 일에 대해 점점 대담해지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고, 돈 많은 사람들에게서 돈 버는 게 왜 나쁘냐는 식이다. 하지만 릴리스 박사는 좀 다르다. 영화를 보는 중간중간 왜 이 여자는 이 위험한 게임에 동참하는 것인지 도저히 목적이 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명백하게 돈 때문에 이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끝으로 갈수록 이 여자가 더 큰 빌런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마치 막장 드라마를 볼 때의 시원함을 느꼈다. 스탠턴과 같은 나쁜 놈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는 것은 회개도 아니고, 착한 사람들의 존재가 아니다. 결국, 더 나쁜 캐릭터가 등장해 뚜들겨 패놓아야 비로소 자신의 현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애매모호하게 나쁜 놈 위에 날고 기는 더 나쁜 사람으로 분한 릴리스 박사가 오히려 이 영화의 리얼 주인공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해 후반부의 스릴러를 담당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에서는 스탠턴이 소시오패스 같았는데, 영화를 다 보면, 결국 이 세게의 최강 소시오패스는 릴리스 박사임을 깨닫게 된다. 그녀는 돈도 아니고, 스탠턴의 파멸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본인의 즐거움을 위해서 움직인 것이기 때문에 공부도 즐거워서 하는 이를 이기지 못한다고 하듯, 스탠턴은 그녀를 이길 수가 없었다. 애초에.
4. 총평
결국 스탠턴은 본인이 다른 이에게 행하던 사기를 다른 이에게 똑같이 당하고 만다. 자신이 만든 덫에 다른 이들만 잡아넣은 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빨려 들어간 셈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계속적으로 되돌아봐야 하는 것 같다.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맞는지, 너무 달리기만 하느라, 놓친 것은 없는지 등등을 점검해보아야 한다. 뭐, 과거에 매여서 후회하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만든 덫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지는 않은지 최소한의 점검 정도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최소 틀린 길은 아닌지 인지한다면, 당신의 욕망에 눈을 가려진 스탠턴이 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당신의 삶은 최소한 불행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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