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경2024-09-10 00:57:38
부정당하는 것들마저 꿋꿋이 사랑할 용기
영화 <딸에 대하여> 리뷰
주요 내용
- 영화 소개, 줄거리
- 데칼코마니 같은 엄마와 딸
- 엄마와 딸의 위치, 심경 변화
- 수박의 의미
- 덮어둔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의외의 인물
딸에 대하여 (Concerning My Daughter, 2024)
부정당하는 것들마저 꿋꿋이 사랑할 용기
개봉일 : 2024.09.04.
관람등급 : 12세 이상 관람가
장르 : 드라마
러닝타임 : 106분
감독 : 이미랑
출연 : 오민애, 허진, 임세미, 하윤경
개인적인 평점 : 3.5 / 5
쿠키 영상 : 없음
*본문에서 인물의 이름은 극 중에서 사용되는 이름인 그린, 레인, 제희(노인)와 엄마로 표기 (엄마의 이름이 잠시 스쳐 지나가듯 나오긴 하지만 의도적으로 엄마의 이름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것 같다고 느껴져 그대로 ‘엄마’로 표기하겠습니다.)
<딸에 대하여>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다른 것 같지만 닮아있는 엄마와 딸. 그리고 딸의 연인과 유한한 삶의 끝에 서있는 노인. 네 여성들의 아픔과 사랑을 재료로 찍어낸 데칼코마니 같은 영화다.
영화는 외적으로 폭발하는 지점 없이 주인공인 엄마의 내면에 집중하며 진득하게 나아간다. 외부 사건의 자리를 대신 채운 짧은 침묵과 방문 사이를 들여다보는 눈, 사랑 위로 자라난 아픈 말들엔 엄마의 두려움과 슬픔이 깃들어있다.
<딸에 대하여>의 주인공인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일하고 있는 중년의 여성이다. 그녀의 딸인 그린은 7년 동안 만난 동성 연인 레인과 동거를 하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엄마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엄마는 자신의 수박은 숟가락으로 대충 떠먹으면서도 딸이 먹을 수박은 예쁘게 썰어 준비하는, 딸을 사랑하는 엄마지만 딸이 함께 데려온 동성 연인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어느덧 중년이 된 엄마는 인생의 밝은 면보다 어두운 면을 더 많이 보며 살고 있다. 그녀는 연고 하나 없이 요양원에 방치되어 있는 노인 제희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제희는 한 어린이 제단의 설립자로 어린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희생한 사람이다.
하지만 현재 제희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노인이다. 제단 사람들과 언론인들의 관심이 끊긴지는 한참이고 가정을 이루지 않아 찾아올 자식도 없다. 제희에게 남아있는 건 작은 손가방 하나와 곧 끊길 예정인 제단의 지원금뿐이다.
엄마는 이런 제희가 가엾다. 그리고 제희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안에 자신과 그린의 미래가 그려지는 것 같아 두렵다. 남편, 아이 하나 없이 버려진 노인의 미래가.
그래서 엄마는 딸의 미래와 행복을 위해 동성 연인과의 사랑을 반대한다. 딸을 사랑한다면 이해하고 배려해야 하지만 차분히 앉아 대화를 나누기엔 엄마의 삶이 너무 팍팍하다.
극 중에서 엄마는 그린의 엄마, 요양보호사 여사님으로만 그려진다. 그녀의 이름은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갈 뿐,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고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든든한 지원군도 없다. 서서히 나를 잃어가는 중년 여성의 불안감은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노인 앞에서 더욱 짙어진다. 영화는 떨리는 중년의 마음을 따라가며 엄마와 딸의 두려움. 그리고 여전히 엄마의 곁에 남아있는 소중한 것을 재조명한다.
<딸에 대하여>는 동성 연인과 엄마 사이의 갈등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퀴어 영화이기도 하지만 꼭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늙어감과 외로움, 삶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모녀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걸 느낄 수 있으니 꼭 성소수자인 딸이 아니어도 20대 이상의 딸이 있는 모녀관계라면 혼자보단 함께 보는 걸 추천한다. (어린 딸과 엄마보다는 어른인 딸과 엄마에게 추천!)
- 아래 내용부터 스포 有
데칼코마니 같은 엄마와 딸
엄마는 딸이 자신과 다르게 살아가길 바란다. 외롭지 않게 행복하게. 엄마의 바람대로 그린은 자신의 행복을 찾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린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 성소수자를 위해 투쟁한다.
엄마의 눈엔 딸의 사랑과 정의감이 소꿉장난과 오지랖으로 느껴진다. 적당한 남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그렇게 모나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동성연애에 관계도 없는 다른 강사의 부당 해고 집회에 얼굴을 팔고 다니다니. 엄마는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속을 붙잡고 대체 왜 그러냐며 소리친다.
그린은 엄마가 자신에게 부당한 거, 싫은 거는 말하라고 가르쳤다고 답한다. 엄마는 몰랐지만 딸은 엄마의 가르침대로 잘 자랐고 엄마도 여전히 부당한 현실에 맞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엄마는 손발이 묶인 제희와 그것을 방관하는 동료를 향해 소리친다.
“어떻게 저게 남의 일이야. 우리라고 저렇게 안 될 줄 알아?”
부당 해고 사건에 대해 말하던 그린도 엄마와 똑같이 우리 일이 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모전여전 그 자체인데 엄마는 그걸 모른다.
한숨 쉬어가며 나와 우리를 이해하다.
문밖을 서성이던 엄마, 문안에서 자고 있던 딸. 두 사람의 위치 변화 / 결말 해석
요양원 과장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던 엄마는 제희와 함께 요양원에서 쫓겨난다. 엄마는 제희를 찾아 깊은 산속 병동을 방문하고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엄마보다 더 어린 딸들은 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식구를 받아들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희가 세상을 떠난 후 엄마와 그린, 레인은 함께 장례식을 진행한다. 엄마는 제희를 떠나보내며 자신이 지독하게 붙잡고 있었던 두려움을 털어놓는다. 그린이 어르신이나 자신처럼 혼자가 될까 봐 두려웠다고.
그런데 엄마는 이제 인정하려고 한다. 그린의 곁에는 레인이 있고 두 사람과 함께 웃고 싸워줄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딸이 자신의 등 뒤를 지켜줄 수 있을만큼 자랐다는 것을.
그린은 엄마 대신 상주에 이름을 올리고 친구들과 함께 장례식장을 지킨다. 그 덕분에 항상 문밖에서 전전긍긍하며 딸의 방을 바라보던 엄마는 이제 방 안에서 편하게 잠에 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횡단보도에서 함께 손을 잡고 지나가는 또 다른 딸들의 앞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엄마는 딸에게 예쁜 수박만 주고 싶다
수박의 의미
엄마는 그린이 집에 오기 전, 그린을 위해 커다란 수박을 산다. 엄마는 홀로 오르막길을 오르며 힘겹게 수박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수박을 반으로 뚝 잘라 절반은 예쁘게 썰어 그린을 위해 남겨두고 절반은 TV 앞에 앉아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는다.
엄마는 병원에 입원한 아빠를 대신해 홀로 인생의 무게를 짊어져왔다. 그렇게 살다 보니 푹푹 파먹다 금세 비어버린 수박처럼 어느덧 엄마의 인생도 탄생보다 죽음에 더 가까운 위치에 다다른다. 엄마는 이제 나이 먹는다는 게, 혼자가 된다는 게 두렵다. 그리고 2층 집에 사는 세입자 가족처럼 이상적인 가족을 이루지 못할 딸이 걱정된다.
내 수박은 아무렇게나 팍팍 퍼먹어도 괜찮지만 딸은 예쁘게 썰어진 수박을 먹이고 싶은 게, 내 삶은 모나게 흘러가도 괜찮지만 딸의 인생은 예쁘게 꾸며주고 싶은 게 엄마다. 엄마의 말대로 그린과 레인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결혼, 법적 보호자, 아이를 가진 가정.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엄마는 동성애자의 삶이 이성애자의 삶보다 어렵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린을 말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엄마가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어른이자 믿음을 나누는 연인이다. 그린과 레인은 커다란 수박을 반반 나눠 들고 웃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설령 무겁고 쉽지 않은 인생이라 해도 두 사람은 지금처럼 인생의 무게를 나눠들고 함께 웃으며 걸어갈 것이다.
그리고 영화엔 그린과 레인이 들고 온 수박이 부서지거나 소비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굳이 필요 없어서 해당 장면을 넣지 않은 걸 수도 있지만 나는 이걸 이유 삼아 영화가 두 사람이 함께 짊어지고 갈 인생을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한다.
덮어둔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레인
치매 증상이 심해진 제희는 수시로 배변 실수를 한다. 하지만 마지막 자존심인지 기저귀를 차는 것은 한사코 거부한다. 엄마는 어르신이 편한 게 제일이라며 귀찮은 빨래와 목욕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요양원 과장과 관계자들은 비품을 너무 많이 쓰고 빨래도 너무 자주 한다며 엄마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눈칫밥을 먹던 엄마는 제희에게 억지로 기저귀를 채우는데 제희는 그것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몰래 침대를 벗어나 자신을 찾으러 온 엄마와 실랑이를 벌이다 그 자리에서 소변을 보는 실수까지 한다.
엄마의 2층 집에 세 들어 사는 부부는 여전히 싱크대 위에서 물이 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전에 불렀던 분들 말고 진짜 전문가를 불러달라고 요청한다. 엄마는 그들의 요청대로 다시 전문가를 부르고 물이 새는 걸 잡으려면 천장을 다 뜯는 대공사를 해야 한다는 답변을 듣는다.
타인의 기준에 맞춰 억지로 채워놓은 기저귀, 임시로 해결해 놓은 누수는 다시 문제를 일으키고 만다. 사람의 마음도, 사람과 사이의 문제도 그렇다. 평범하지 않다고, 나와 다르다고 억지로 막고, 시간이 지나면 상대의 마음도 바뀔 거라고 대충 덮어놓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터지게 되어있다.
그린은 몰라도 레인은 이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현실적인 문제에 떠밀려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 것 같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레인이 엄마와의 관계를 극복하기 위해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불편한 건 말씀해달라, (그린에게) 우리만 참는 게 아니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을 하는 거다. 관계에 확신을 갖고 있다.. 레인은 차가운 엄마 앞에서도 또박또박 자신의 마음을 내비치고 갑작스레 등장한 제희를 정성껏 보살피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아마 레인이 없었다면 엄마는 더 오래 아니 어쩌면 평생 딸을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레인은 미움이 뚝뚝 새어 나오고 있던 모녀 관계를 지붕부터 뜯어 싹 고쳐낸다.
처음엔 당연히 엄마와 딸 그린의 갈등이 중점으로 그려지고 레인의 비중이 작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레인이 모녀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고 이야기를 봉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로 그려져 더 좋았다.
생각보다 더 곱고 어른스러웠던 레인과 빛나는 눈으로 레인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하윤경 배우의 모습은 오래 잊지 못할 것 같다. 물론 엄마의 마음속주름 하나까지도 모두 느끼게 해준 오민애 배우와 반질반질하고 예쁘고 단단한 자갈 같은 그린을 보여준 임세미 배우도 함께.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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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직시해야 할 또 하나의 케이
- 1970년대 초, 길에서 우연히 발견된 미오카.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오카는 가족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찾는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건 조작된 서류와 감춰진 기록. K-Number의 진실은 무엇이며, 사라진 서류는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 시간과 국경을 넘어, 숨겨진 진실이 풀리기 시작한다.
<케이 넘버> 줄거리
케이팝, 케이뷰티 등 'K-'를 붙여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기 이전, 이미 'K-'를 붙여 세계로 수출되던 것이 있었다. 바로 사람이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국가 허가 하에 홀트아동복지회, 한국사회봉사회, 동방사회복지회, 대한사회복지회 등의 입양알선기관에서 해외로 입양 보낸 이들은 어떠한 규칙성이 있는 일련번호, K-넘버가 붙여져 해외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렇게 보내진 해외입양인들이 추산 20만 명을 넘는다고 하는데, 이 충격적인 숫자에 입을 다물 수 없다. 이 어마무시한 숫자와 이들의 입양에 돈이 오간 걸 연관시킨다면 입양을 '사업'으로 이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이 넘버>는 이런 한국의 잘못된 입양 시스템이 횡행하던 과거를 관통한다. 영화는 국가가 주도한 거대한 사업이 된 시작점을 다루며 이 시스템의 이면에 혼혈아들에 대한 인종차별적인 계산, 기부장제에서 미혼모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것은 잘못됐다는 시선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낱낱이 들춰낸 사실들에 우리는 당연히 분노를 금치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끝낼 수 있지만, <케이 넘버>는 이 잔혹사의 가장 중심인 입양인들을 조명한다. 과거를 들추긴 하지만 영화의 중심은 언제나 현재에 있으며, 입양사업을 하던 시대에서 40-50년이 지난 지금을 살아가는 입양인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따라간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오카 역시 미국으로 보내진 입양인이다. 자신의 친생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만 4번째 방문 중인 그는 부정확한 자료와 불확실한 기억에 의존하여 탐문을 이어나가야 한다. 국가도 입양기관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은 입양인은 여정은 갑갑함과 분노를 일으킨다.
또한 사회가 조금의 책임도 없이 그들을 외면했기에 입양인들은 친생부모를 찾는 과정부터 찾은 이후, 그리고 그저 삶을 살아갈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미오카는 자신이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자신을 입양한 미국인 부모가 입양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의지 없이 입양 간 미국에서 평생을 살아왔음에도 불법 체류자가 될 위기에 처한다. 그는 다행히도 시민권을 얻었지만, 미오카는 말한다. 시민권을 취득하기 어려운 이들도 많다고. 이 문제 역시 국가와 입양기관이 그들 주도하에 아이들을 입양 보냈음에도 그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내면 끝이었던 무책임한 행태는 끝내 미국으로 입양됐다가 추방된 한 입양인이 정부와 입양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소송은 1심에서는 국가기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2심에서는 홀트의 책임 역시 인정하지 않으며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국가 주도하에 입양 보내진 아이들이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한 것에 과연 국가와 입양기관의 책임이 없다 말할 수 있을까.
입양인들이 입양된 가정에서 제대로 된 보호를 받지 못하고, 국적취득 등의 서류상의 문제가 처리되지 않아 곤란을 겪고, 자신의 입양 정보를 보기도 어려우며, 부정확한 정보에 의해 친생부모를 찾지 못하거나 찾더라도 부모의 거절로 보지 못하는 것에 과연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밖의 많은 문제들에 국가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케이 넘버>는 한국의 잘못된 입양 시스템이 잔혹했던 과거의 아픔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가해 행위임을 분명히 한다. 과거에 사후 대처 없이 무분별하게 입양 보낸 무책임한 과거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영화를 통해 입양인들을 약간이라도 알게 됐다면 이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도 직면해야 한다. 당신은 입양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국가가 전 세계로 보낸 수십만 명의 입양인들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들의 인생에 국가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전 세계로 퍼지는 우리 문화에 'K-'를 붙이며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다면 제일 처음 'K-'를 붙여 해외로 보낸 그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케이 넘버>를 통해 입양인들을 약간이라도 알게 됐다면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더 이상 비극을 이어나가지 않게 감시해야 할 것이다. 영화가 준 충격이 이 문제가 '그들'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 글은 씨네랩에서 초청받아 참석한 <케이 넘버>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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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주 차, 영화 위클리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영화계에 어떤 소식이 있었는지
정리해 보는 '위클리 뉴스'가 찾아왔습니다.
그럼, 지난주에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대외비> 피렌체 한국 영화제에 공식 초청이원태 감독의 <대외비>가 제20회 피렌체 한국 영화제에 공식 초청됐다.
<대외비>는 '돈, 권력, 명예, 각자의 욕망을 위해 위험한 거래를 시작하는 세 남자의 배신과 음모를 그린 영화'이다.
조진웅, 이성민, 김무열이 주연을 맡았다.
+ <대외비>는 올해 한국 극장 개봉을 계획하고 있다.
<엄마를 부탁해> 4월 개봉 확정65년 연기 경력의 대배우 김영옥의 첫 주연작<엄마를 부탁해>가 4월 개봉을 확정했다.
이 영화는 가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휴먼 가족 드라마다.
이 영화에는 배우 김영옥 외에
배우 김영민, 박성연, 김혜나, 이정은 등이 출연한다.
<야차> 4월 8일 ‘넷플릭스’ 공개<프리즌> 감독 나현의 신작 <야차>가 4월 8일 넷플릭스에 공개된다.
<야차>는 ‘야차’가 이끄는 국정원 비밀공작 전담 블랙팀과 특별 감찰 검사,
그리고 각국 정보부 요원들의 숨 막히는 접전을 그린 첩보 액션이다.
배우 설경구와 박해수가 주연을 맡았다.
<더 배트맨> 6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영화 <더 배트맨> 6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에 따르면<더 배트맨>의 누적 관객 수는 50만 631명을 돌파했다. (6일 기준)
<해적: 도깨비 깃발> 넷플릭스 전 세계 4위<해적: 도깨비 깃발>는 배우 한효주, 강하늘, 이광수 등이 출연한 영화다.
한국을 비롯해 홍콩,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등 9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배니싱: 미제사건> 티저 예고편 공개출처 | 네이버 영화<배니싱: 미제사건>은 배우 유연석, 올가 쿠릴렌코, 예지원 주연의 영화이다.
이 영화는 100% 대한민국 올 로케이션으로 완성된 글로벌 프로젝트로 개봉 전부터 주목받고 있다.
<배니싱: 미제사건> 티저 예고편
https://tv.naver.com/v/25498138
<오징어 게임> 채경선 미술감독 수상<오징어 게임>의 채경선 미술감독이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다운타운 호텔에서 열린 제26회 미국 미술감독조합상(ADG)을 수상했다.
에피소드 6 '깐부' 편으로 '1시간 현대극 싱글 카메라 시리즈’ 부문을 수상했다.
이번 주에는 또 어떤 영화 소식이 찾아올지 기대가 되는데요.
그럼 다음 주에 또 새로운 소식으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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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의 로맨틱 '모던타임즈'
* 이 글은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 참석한 시사회를 보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우연히 마주친 낯선 사람과의 로맨스는 많은 사람이 꿈꾸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온 세상이 새로운 사랑에 대해 노래하며,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장악하는 영화 중 적지 않은 수의 장르가 로맨스, 멜로, 로맨틱 코미디인 것만 보더라도 그러한 로맨스에 대한 우리의 환상은 여실히 드러난다. 특히 로맨틱 코미디는 우리가 가진 어떤 현실을 재치있고 로맨틱한 방식으로 재구성해낸다는 점에서 많은 인기를 누린다.
그러나 코미디에도 여러 종류가 있듯이, 로코물이라고 해서 반드시 달콤하지는 않을 수 있다. 그것이 기반한 현실이 어떻고, 감독이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자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밀크 초콜릿이 될 수도 있고, 카카오 99% 초콜릿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전자를 향유해 왔지만, 때때로 어떤 영화는, 그것이 포함한 씁쓸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기억에 남곤 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후자에 속하는 영화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헬싱키에 사는 안사와 홀라파는 어느 가라오케 바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에게 이끌렸다. 몇 차례의 우연 끝에 두 사람은 데이트를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서로에게 연락할 방법을 몰라서 몇 번이고 엇갈린다. 몇 번의 갈등과 우연한 재회가 반복되고, 두 사람은 마침내 연인이 된다. 우연과 필연을 통해 이런저런 헤프닝이 벌어지고 마치내 맺어지는 연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이러한 로맨틱 코미디의 클리셰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 속 인물들을 살펴보면,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마냥 낭만적이지 않다. 두 사람은 헬싱키의 가난한 노동자다. 안사는 유통기한이 지나 버리는 빵을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이유로 실직한다. 당장 빵 하나 살 돈조차 아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는 데이트는 커녕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대로 해야만 한다. 라디오에서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이야기가 시종 울려 퍼진다. 낭만 한 조각 찾아보기 힘들다.
홀라파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다. 세상이 그를 슬프게 하고, 그는 슬픔을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그런데 술을 마시면 다시 슬퍼지고, 그것을 다시 지우려면 술을 마시는 수밖에 없어서 그는 술꾼이 되었노라 말한다. 직장에서는 개인의 안전보다 그들의 흠결을 찾기에 급급하다. 결국 홀라파는 다쳤으면서도 도리어 해고되고 만다.
상황이 이래서일까? 이 세계의 사람들은 시종 무표정하다. 재미있는 농담을 말하더라도 어투는 건조하기 짝이 없고 인물들은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격렬하게 분노하지 않는다. 사랑을 고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분히 '연극적'이다. 이런 작위적인 연출은 마치 그들이 헬싱키라는 거대한 사회의 태엽인형처럼 움직이는 것 같다는 인상마저 주는데, 이점에서 찰리 채플린의 '모던타임즈'를 연상케 한다. 부조리함을 내세우는 직장은 기꺼이 그만두겠노라 외치는 안사와 괴롭고 답답하기만 한 현실 속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술에 손을 대는 홀라파를 보면,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처럼 인물들이 자신이 부품으로 속해야만 하는 그 자본주의 세계에 대해 저항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토록 고달픈 현실이지만 두 사람은 그럼에도 사랑하고, 돕고,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아간다. 그들의 고달픔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을테지만 홀라파는 술을 끊었고, 안사는 그의 외로움을 덜어줄 가족(개)과 연인을 얻었다. 지극히 평범한 어느 소시민들의 로맨틱 코미디는 이렇게 마무리 지어진다. '모던 타임즈' 속 채플린의 말처럼, 그들은 그 무미건조함 속에서도 그들을 살게 하는 것을 찾을 것이며, '어떻게든 버틸 것'이다. 이 무뚝뚝해 보이는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여기에 있다.
많이 고달픈 요즘이다. 물가는 치솟고 날씨는 이상하다. 멀지 않은 나라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있고, 이런저런 정치적 이슈들은 매일 같이 불거진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헬싱키에 사는 두 사람의 사정과 아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희망이 있듯, 우리의 삶에도 희망은 있기 마련이며, 우리는 그 희망으로 말미암아 앞으로 나아간다.
날도 추운데, 이런 영화 한 편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 이 무뚝뚝한 핀란드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빛나는 희망을 건져 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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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하지만 아름다운 꿈, 영화를 사랑한 이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20년대 할리우드. 무성 영화의 스타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의 저택에서는 화려한 파티가 벌어진다. 파티는 난잡하다. 그러나 매혹적이다. 영화에 출연하거나, 영화를 찍고 싶거나, 계속해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사람들의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멕시코에서 막 LA에 입성한 '매니(디에고 칼바)'와 스타가 될 거라는 확신에 가득 찬 '넬리(마고 로비)'도 다르지 않다. 우연히 만나 영화에 대한 열정을 공유한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촬영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그렇게 꿈을 이루고 스타가 되는 것도 잠시. 유성 영화가 등장하면서 세 주인공은 각자 냉혹한 현실을 마주하고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꿈을 버리고 살아가거나, 꿈을 이룬 채 퇴장하거나.
<바빌론>으로 돌아온 꿈과 현실의 마술사, 데이미언 셔젤
<위플래쉬>, <라라랜드>, <퍼스트맨>으로 연이은 성공을 거둔 데이미언 셔젤 감독. 사실 그의 특징을 콕 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의 작품은 매번 장르도, 분위기도, 소재도, 연출 방법도 다르기 때문이다. 음악 영화 전문인 줄 알았더니 어느새 우주를 배경으로 한 전기 영화를 찍었다. 빠른 편집과 몰아치는 연출이 장점인 줄 알았더니 담담하고 느릿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도 증명해 보였다.
그렇지만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그의 특징을 하나 찾을 수 있다. 데이미언 셔젤은 언제나 꿈과 현실 사이에서 양자택일해야 하는 이들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의 주인공은 가족, 사랑, 일상, 주변인의 관계를 포기한 채 꿈을 좇거나, 반대로 꿈을 포기해야 한다. 둘 모두를 갖는 해피엔딩은 없다. 인상적인 엔딩 장면들 이면에 늘 냉혹함이 깃들어 있는 이유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꿈과 현실의 매개체는 늘 매혹적이다. 현실을 잊게 하고, 찰나의 순간이라도 꿈을 이루어주기에. 꿈을 잊고 현실을 살더라도 단 한 순간 동안은 아름다웠던 꿈속으로 되돌아갈 문을 열어 주기에. 그래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했던 그 열정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다. 재즈와 뮤지컬, 그리고 달이 아름다운 것처럼.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반의 할리우드, 무성 영화의 시대가 끝나고 유성 영화의 전성기가 도래하던 시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바빌론>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꿈'을 쟁취하기 위해 할리우드에 모인 사람들이 벌이는 이 역동적인 이야기는 셔젤 감독의 이전 작품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주제를 담은 매개체가 영화이고, 무대가 할리우드일 뿐이다. 하지만 바로 '영화'라는 꿈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바빌론>은 더욱 특별하다.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가득하기에 셔젤의 작품 중 가장 야심 차고 강렬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전 필모그래피에 비해 길고 거칠며 덜 정돈된 인상이 가득하더라도.
할리우드, 추하고 난잡한 꿈의 공장
<바빌론>의 오프닝만 봐도 셔젤의 야심이 느껴진다. 잭 콘래드의 파티는 마치 배즈 루어먼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파티를 보는 듯하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재즈 연주만큼 화려하고 정신없고 난잡하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술을 들이켜고, 마약을 빤다. 소파 위, 테이블 위, 계단 아래에서 정신없이 섹스한다. 누군가는 어이없이 죽고, 또 누군가는 다음 영화에 캐스팅되기 위해 영화 제작자에게 추파를 던진다. 언제 터져도 놀라지 않을 정도로 넘쳐 나는 자극 속에서 사람들은 마비되어 간다.
30여 분간 이어진 오프닝 다음에 등장한 영화 촬영 현장도 파티 못지않은 아수라장이다. 파티에서 갑작스럽게 캐스팅된 넬리의 촬영장은 무슨 영화를 찍는지 알기 어렵다. 서부 시대 선술집 옆에는 아무런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시대와 공간을 재현한 세트장이 즐비하다. 아무 준비 없이 촬영에 투입된 넬리가 기대 이상의 눈물 연기를 선보이자 영화감독은 즉석에서 시나리오와 콘티를 수정해 가며 촬영하기 바쁘다. 바로 뒤 촬영장에서 불이 나 모두가 대피하는 와중에도.
한편, 에픽 영화를 촬영하는 잭의 촬영장은 유혈이 낭자하다. 대규모 전투 시퀀스에 참여한 엑스트라는 창에 찔리고, 마차나 말굽에 짓밟힌다. 하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케스트라는 해당 장면에 맞는 곡을 연주하고 감독은 필요한 카메라를 찾느라 정신이 없다. 대기실에서 촬영 순서를 기다리는 잭은 지루함에 지쳐 술을 진탕 마시기 시작한다. 마침내 잭의 순서가 찾아왔을 때, 술에 취한 주연 배우는 촬영장까지 걸어가지도 못한다. 한편 영화감독의 수중에는 카메라가 없다. 해가 산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에 매니가 카메라를 대여해 오자 간신히 그날 촬영을 끝마친다. 밤이 찾아오면 그들은 촬영장에서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또다시 술과 마약과 섹스에 빠져든다. 또 아침 해가 뜨면 또다시 새벽부터 촬영하러 나선다. 얼핏 보기에 1920년대의 할리우드는 추잡하고 흉하다. 영화와 사랑에 빠지는 게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빠져나올 수 없는 영화의 아름다움
하지만 정신을 쏙 빼놓는 <바빌론>의 오프닝과 초반부는 마냥 저속하지 않다. 파티와 촬영장을 가득 채운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꿈'이다. 매니는 영화계에서 어떤 일이든 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하다. 자신감으로 가득한 넬리는 기회만 준다면 스타가 될 수 있다며 파티장을 자기 무대로 만든다. 잭 역시 할리우드의 톱스타로서 지금처럼 화려한 삶을 계속해서 누리고자 한다. 파티 음악을 담당하는 색소폰 연주자 '시드니(조반 아데포)' 역시 위대한 아티스트가 되는 꿈에 부풀어 있다. 이처럼 꿈들이 모여 열망을 분출하기에 더럽고 추잡하고 혼란스러운 이 파티는 사랑스럽다.
촬영장도 다르지 않다. 촬영 장비는 항상 망가지고, 사람은 죽어 나간다. 지금이라면 난리가 날 사건 사고가 쏟아지는데도 사람들은 매일매일 영화를 찍기 위해 모인다. 마치 사막 한가운데서 코끼리 똥을 맞으면서도 기어코 코끼리를 잭의 파티장에 데려가기 위해 애쓰는 매니처럼, 그들은 영화 촬영장을 떠나지 않는다. 혜성처럼 나타난 신인 여배우의 춤과 눈물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만취한 할리우드의 스타가 하루의 마지막 태양 빛을 배경으로 운명적인 서사시를 완성하는 광경을 보기 위해서. 혼돈의 끝에서 마주한 한순간의 절정을 찍을 때 찾아오는 황홀경을 붙잡기 위해서. 그렇기에 모든 영화 촬영장도 파티만큼이나 아름답다.
실제로 꿈이 없는 파티와 촬영장은 추하다. 영화 중반부에 등장하는 또 한 번의 파티 장면만 봐도 오프닝 파티와는 묘하게 다르다. 여전히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지만, 차이점이 있다. 이 피티에는 꿈이 없다. 무성 영화의 스타로 등극한 넬리와 잭, 그리고 잭의 매니저로 영화계에 입성한 매니에게는 꿈이 없다. 유성 영화가 등장하자 그들은 촬영장 안팎에서 불안에 떤다. 과연 자기가 여전히 스타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또 영화계에서 종사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녹음 스튜디오가 갖춰진 새로운 촬영장의 모습도 아름답지 않다. 사람이 죽는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다르지 않으나, 배우와 스태프는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촬영할 만한 매력이나 보람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파티는 불안함을 떨쳐내기 위한 공간이자 시간일 뿐이다. 그래서 꿈을 잃은 이들은 코앞의 자극에만 심취한다. 이제 그들의 놀이는 아름답지 않다.
추잡함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맹목적인 사랑, 영화
이처럼 <바빌론>은 1920년대 영화 산업의 명암을 가리지 않은 채 보여준다. 동시에 영화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 할리우드의 치부를 알면서도 계속해서 사랑한다. 달리 말해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을 고백한다. 사막에서 시작한 할리우드를 건물 가득한 도시로 키워낸 열정은 물론, 그 열정이 선을 넘어버린 광기도 함께 사랑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바빌론>은 신선하다. 할리우드는 가끔 자기 역사를 미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지름길을 가지 않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연애편지가 아닌 애증의 편지라서 특별하다.
영화는 이 맹목적인 사랑을 매니의 눈빛에 담아낸다. 카메라는 그가 영화와 눈이 맞는 순간을 포착한다. 첫 번째 순간은 잭의 파티 장면이다. 막 LA에 온 매니는 온갖 잡일을 한다. 파티에 서프라이즈로 등장시킬 코끼리를 데려오고, 술과 마약을 배달하며, 대리운전을 한다. 그러던 중 매니는 넬리를 본다. 입장을 거부당하던 그녀를 몰래 파티장에 넣어주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둘 다 열렬히 영화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넬리가 파티의 무대를 휘어잡고,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으며, 곧장 캐스팅 제의를 받는 걸 본다. 그렇게 그는 넬리와 사랑에 빠진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영화의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두 번째 순간은 멕시코로 탈출하기 전 우연히 들린 파티 장면이다. 영화 제작자가 된 매니는 여러 문제로 꼬여 버린 넬리의 커리어를 되살리려 한다. 그러나 도박에 빠진 넬리는 이미 '제임스 맥케이(토비 맥과이어)'가 이끄는 LA 지역 갱들과 문제를 겪고 있다. 넬리를 도와주던 매니 역시 자연히 그들과 갈등을 겪고, 끝내 그들에게 쫓기기 시작한다. 갱을 피해 도망치던 매니와 넬리는 이동 중 작은 마을에서 열린 파티에 우연히 참석하고, 파티를 촬영하는 카메라 앞에서 함께 춤을 춘다. 바로 이때 그는 다시 영화의 매력에 빠진다. 영화의 추잡함을 온몸으로 체감했고 넬리와 영화가 인생에서 피해야 할 골칫거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그는 이번에도 영화에게 함락당한다. 이 두 장면만 보더라도 영화를 향한 맹목적인 사랑이 어떤 느낌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온몸을 던져 사랑해서 진정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셔젤 감독의 작품답게 <바빌론> 속 사랑도 현실 앞에서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무성 영화의 사람들인 세 주인공 앞에 유성 영화가 등장하고,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사랑은 비를 타고>가 새로운 시대에 발굴된 신흥 스타를 비춘다면, <바빌론>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는 이들을 그려낸 셈이다. 톱스타였던 잭은 미숙한 목소리 연기 때문에 이제 관객들의 웃음거리가 된다. 그와 몇십 년간 같이 일해온 에이전시는 그에게 더 이상 흥행 작품의 배역을 맡기지 않는다. 라이징 스타였던 넬리의 커리어도 순식간에 꺾인다. 허스키하고 거친 게 매력인 그녀의 목소리가 유성 영화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할리우드의 체계가 잡혀간 것도 그녀에게는 독이다. 거칠고 야생적인 넬리의 성격은 사교 파티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음악 영화 제작자로 이름을 알린 매니도 끝내 현실의 벽에 부닥친다. 그는 넬리의 커리어를 살리려다가 본인 경력도 끝날 위기에 처한다.
그들은 이제 선택해야 한다. 자기 꿈을 지킨 채 찬란히 부서지든가, 현실을 인정하고 꿈을 내려놓든가. 세 주인공은 제각기 달리 선택한다. 잭은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판단한다. 더 추해지기 전에 스스로 자기 시간을 끝낸다. 넬리는 잭과 비슷한, 한편으로는 그녀다운 선택을 한다. 함께 도망치자는 매니의 제안을 거부한다. 처음 등장할 때처럼 춤을 추면서 거리 저편으로 사라진다. 매니는 도망치기 직전 갱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다. 그러더니 영화라는 꿈을 포기한다. 할리우드를 떠나 평범히 살아간다. 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선택을 응원하고 또 위로한다. 온몸을 던져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라는 꿈을 꾼 이들의 마지막은 아름답기 때문이다. 잭에게 그의 시대가 끝난다고 알려준 기자 '엘리노어(진 스마트)'의 대사에 모든 게 함축되어 있다. 그녀는 잭이 "천사와 유령들과 함께 영원을 누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온몸을 던져 영화를 만든 넬리와 매니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영상과 이름으로 살아남은 채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새로운 관객과 친구가 될 것이므로.
그래서 영화의 결말은 다시 한번 매니의 눈에 주목한다. 시간이 흘러 LA로 돌아온 매니는 극장에서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본다. 작중 등장인물인 리나 라몬트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유성 영화 시대에 전성기가 끝나버린 여배우를 보며 넬리와 무성 영화의 전성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내 경탄에 가득 찬다.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동시에 영화를 보면서 자기가 사랑했던 대상이 넬리라는 인물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넬리를 담아낸, 꿈과도 같았던 영화의 한 장면에 매료됐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동시에 자기가 겪었던 모든 일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자기처럼 한순간의 장면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고생했고, 고생할 사람들이 있다는 걸 영화를 보며 배운다.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부터 이크란을 타고 제이크 설리가 하늘을 나는 순간까지. 자기가 몸담았던 할리우드는 달라졌어도, 할리우드는 계속된다는 걸 직감한다. 멸망한 후에도 시대에 따라 아름답고 위대한 나라와 도시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어 살아남았던 바빌론처럼.
영화를 사랑하게 만들다
이 모든 사랑 고백은 데이미안 셔젤이 직접 실천했기에 더 인상적이다. 사실 <바빌론>은 <위플래쉬>나 <라라랜드>, 심지어 <퍼스트맨>에 비해서도 대중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일단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은 지나치게 길다. 파티 장면이나 몇몇 에피소드는 단축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몇몇 캐릭터도 생략할 수 있다. 그러나 셔젤은 그러지 않았다. 자기 비전을 전부 스크린으로 옮겼다. 애초에 이 영화를 제작하자고 배급사를 설득할 만한 위치에 올라가기 위해 전작들을 만들었다고 했던 만큼, 타협하지 않았다. 모든 영화와 영화계 종사자들을 향한 찬가를 온전히 들려준다. 하지만 그렇기에 <바빌론>의 메시지는 강력하다. 영화를 향한 애정, 심지어 할리우드의 부끄러운 과거까지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설령 이전 필모그래피에 비해 길고 거칠며 덜 정돈된 인상이 가득하더라도.
감독의 장점과 배우들의 조화는 화룡점정이다. 또 한 번 호흡을 맞춘 저스틴 허위츠의 음악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은 여전하다. 넬리와 매니의 주제곡이나 잭의 주제곡은 미세하게 변주되면서 반복된다. 그때마다 필요한 감정을 기가 막히게 자아낸다. <라라랜드>에서 'City of stars'가 반복되지만, 들을 때마다 인상이 다른 것과 유사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 말할 게 없다. 특히 마고 로비가 눈에 띈다. 마치 할리우드의 얼굴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도 그랬지만, 그 시대의 할리우드를 또 한 번 생생하게 표현한다. 관객과 함께 광란의 20년대를 헤쳐 나가는 디에고 칼바의 신선한 페이스도, 작품 전반적으로 중후함과 위트를 불어넣는 브래드 피트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달리 말해 <바빌론>은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영화다. 설령 팬데믹을 비롯해 이런저런 이유로 영화와 멀어졌다고 하더라도.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인생과 꿈 사이에서 영화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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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의 미학
인물 뒤편을 가득 채운 붉은색 타일은 욕망을 상징하는 색채로 기능한다. 표면적으로는 따뜻하고 안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하지만, 그 강렬함 속에는 언제든 폭발할 수 있는 불안정성과 위기의 기운이 잠재되어 있다. 이 강렬한 색채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린의 얼굴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일상의 고요함 아래 숨겨진 감정의 긴장과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드라이버는 이 장면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사각형의 벽걸이 거울을 통해 '프레임 속의 프레임'으로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아이린과 드라이버 사이의 물리적 거리뿐만 아니라, 심리적, 감정적 거리감을 동시에 상징한다. 화면 왼편의 아이린은 부드럽고 따뜻한 자연광 아래 위치해 있는 반면, 오른편 거울 속 드라이버는 어둡게 반사된 실루엣으로 표현된다. 이 빛과 어둠의 대비는 단순한 시각적 구도를 넘어, 드라이버가 품고 있는 내면의 폭력성과 그림자를 암시하며, 동시에 아이린이 그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빛'은 여기서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상징적 도구로 작용한다. 아이린은 드라이버라는 어둠을 비추는 유일한 존재로 설정되며, 이는 드라이버의 내면 깊숙이 자리한 구원에 대한 갈망과 내적 갈등을 은유적으로 시각화한다. 아이린은 드라이버에게 있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존재이자, 결코 닿을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존재다. 거울 속 가족 사진은 이러한 감정 구조를 더욱 구체화한다. 사진은 드라이버가 욕망하는 관계의 형태이자, 동시에 그가 영원히 속할 수 없는 세계를 상징한다. 이 사진을 둘러싼 초록빛 액자는 생명과 희망, 일상의 따뜻함을 함축하고 있으며, 아이린과 그녀의 가족을 지켜주고 싶다는 드라이버의 바람과도 맞닿아 있다.
아이린과 그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한 드라이버는 화면의 가로 3분의 1 지점에 위치한다. 그의 얼굴은 반으로 나뉘며, 한쪽은 희미한 빛에 드리워져 있고, 다른 한쪽은 그림자에 잠겨 있다. 이 조명 대비는 낮의 평범하고 밤에는 폭력적인 이중적 정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잃어가는 존재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갈색 계열의 커튼은 규칙적인 가로결 무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드라이버가 처한 현실의 구조적 제한과 틀을 암시한다. 커튼은 바깥 세상과의 경계를 이루는 동시에, 드라이버의 시야와 선택지를 가리는 장벽으로 기능한다. 이는 마치 그가 놓인 세계의 베일, 혹은 벗어날 수 없는 감옥처럼 보인다. 아이린과 그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폭력의 세계가 출구 없는 고립만을 남긴다는 것을 시각화한다. 왼쪽 3분의 2를 채운 커튼과 오른쪽 벽면의 어둠, 그리고 그 사이 좁은 틈에 위치한 드라이버는 마치 벼랑 끝에 몰린 존재처럼 보인다. 희미한 빛조차 그에게 완전히 닿지 못하고, 그는 점점 어둠의 세계로 잠식되는 중이다. 해당 쇼트는 드라이버가 더 이상 일상으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는 이미 파괴자로 이동하고 있으며, 커튼이라는 시각적 경계는 그가 어떤 선을 넘었음을 시사한다. 돌파구는 없고, 빛은 점점 사라진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의 내면과 운명의 방향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정교한 시각적 구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드라이버는 상징적인 전갈 자켓을 입은 채, 붉은 문을 향해 좁고 긴 복도를 걷는다. 전갈은 사냥꾼이자 파괴자의 의미를 가지며, 드라이버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폭력의 숙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오른손에 망치를 들고 있으며, 이는 곧 파괴의 수단이자 보호의 도구로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드라이버는 프레임의 정확한 중심, 소실점 위에 배치되어 있다. 이는 그가 되돌아갈 수 없는 선택지에 다다랐다는 시각적 표현이자, 운명적으로 이끌리는 선형 구조 안에 있다는 암시다. 화면 끝에 위치한 붉은색 문과 벽면 장식은 드라이버 내면의 폭력성과 피를 상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린을 향한 욕망과 뜨거운 보호 본능을 상징한다. 이는 그가 폭력을 택함으로써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모순된 결단을 나타낸다. 복도 양옆에 길게 걸린 여러 개의 전구형 조명은 아이린이라는 인물의 존재를 상징하는 '빛'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빛은 드라이버가 완전히 어둠 속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유일하게 남겨진 희미한 지표이자, 그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내면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빛은 그가 도달하려는 공간을 밝히지 않는다. 그는 오직 붉은 문 너머, 불확실한 세계로 걸어 들어갈 뿐이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라는 인물이 사랑과 파괴, 구원과 타락의 경계에 서 있는 존재임을 시각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낸다. 드라이버는 스스로 선택한 길 위에 있지만, 더 이상 돌아갈 곳은 없다.
드라이버가 폭력을 휘두를 때마다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극단적인 앙각은 드라이버의 존재를 과장하고 왜곡하며, 인간의 형상을 넘어서 괴물 혹은 신화적 존재로 치환시킨다. 이 앙각은 단순한 시점의 전환이 아니라, 드라이버 내면 깊숙이 감춰진 잔혹성과 근원적인 욕망을 끌어올리는 장치로 작용한다. 화면에서 드라이버의 주먹과 손에 쥔 망치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더욱 거대하고 위협적으로 강조된다. 이는 '사랑을 위해 악마가 될 수 있는 자'라는 드라이버의 정체성과 감정의 극한을 시각적으로 압도하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배경에 깔린 강렬한 붉은색은 폭력의 순간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색채로, 파괴와 욕망, 동시에 아이린을 향한 집착적 보호 본능을 상징한다. 이 장면은 드라이버가 더 이상 인간적인 도덕성의 경계를 따르지 않음을 명확히 드러내며, 그의 사랑이 어떻게 파괴의 형태로 발현되는지를 시각적으로 응축한다.
롱샷으로 잡았지만, 좌측에 배치된 드라이버의 존재가 희미해지기는 커녕 더욱 극대화된다. 전체적으로 안개가 껴 차갑고 어두운 톤에 대비되게 가면을 쓴 드라이버의 뒤로 두 개의 주홍빛 등불이 비춰지고 있다. 더는 물러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버린 드라이버의 냉혹한 다짐을 보인다. 두 개의 등불은 드라이버와 아이린의 사랑, 또는 드라이버가 지키고 싶은 아이린과 그의 아들을 상징한다. 이 쇼트는 드라이버의 결연한 다짐을 무표정한 실루엣으로 완성한다.
<드라이브>는 말보다 색감과 조명, 구도 배치와 샷의 크기, 그리고 인물 사이의 거리감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폭력과 사랑 그리고 고독에 선 주인공 ‘드라이버’의 초상을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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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괴의 미학으로 비틀어 끝내 내리꽂는 욕망의 여정
화녀 火女 | 1971 | 김기영 | 98분
※당시 영화의 시대상에 통용되었던 단어를 일부 사용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하녀〉로 한국 영화계의 강렬한 인장을 남긴 김기영 감독은 10년이 지난 뒤 1970년대라는 시대상과 여전히 유효한 자신만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자신의 이전 영화를 리메이크한다. 기존 시나리오에 많은 수정을 가했다고 볼 수는 없지만 1971년 작 〈화녀〉의 흥행에는 단연코 당시 신인으로 첫 영화에 도전한 스물다섯의 윤여정 배우가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하녀〉와 〈화녀〉, 〈충녀〉로 대표되는 김기영의 ‘여(女) 시리즈’는 물론 당대에도 흥행하였지만 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그의 천재성과 영화적 의미를 정리 발굴하며 한국 영화사의 한 지류를 형성한 감독의 대표적인 문제작으로 꼽힌다. 그는 산업화와 근대화, 독재와 억압의 현실적 맥락에서 영화를 통해 자본과 계급으로 얽힌 대립과 파국, 성적 욕망으로 뒤틀린 인물, 특히 이상하고 기괴한 여성을 전면으로 내세워 가학성 짙은 자신만의 개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화녀〉는 시골에서 올라온 명자가 중산층 가정의 '식모'로 들어가며 욕망을 분출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내용이다. 감독은 흑백의 〈하녀〉를 지나 원색적인 컬러의 〈화녀〉에 붉은 빛을 비춘다. 그는 세 중심인물인 명자와 동식, 정숙을 욕망의 끈적한 구렁텅이에 집어넣고 지독한 파멸의 순간까지 몰아세운다.
서울의 한 중산층 이층 집에서 식모 명자(윤여정)와 주인집 남편 동식(남궁원)이 사망한 채 발견된다. 범인은 곧 경찰서에 잡혀 들어왔고 간밤에 절도를 시도하다 칼을 찔러 죽이게 되었다는 자백을 받아내며 수사는 마무리되는가 했다. 그러나 안주인 정숙(전계현)의 태도를 의심쩍게 본 형사(최무룡)는 그에게 정황을 추궁했고 곧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는다. 1960년 작 〈하녀〉에서는 일련의 사건들이 결국 남성 주인공의 꿈이었다는 미완의 결말을 제시했지만 〈화녀〉는 이미 벌어진 파국의 서사를 정공법으로 직시하며 현실의 기이한 모순이 고스란히 담긴 세계의 광경을 애써 외면하지 않는다. 미스터리 서사의 얼개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한 뒤 본 이야기를 이어가는 방식은 모호한 표현주의적 서사로부터 조금은 친절한 방식을 선택한다. 내화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과감하고 독창적인 작법은 김기영 특유의 뒤틀린 상황과 심리 묘사, 강렬한 색감의 대립으로 관객의 예측을 한참 벗어난다. 거기에 중간중간 플래시백에서 외화로 돌아오는 영화의 완급 조절은 간단치 않은 서사에 관객의 한숨을 돌리게 만든다.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려 고향에서 도망친 후 상경한 명자와 경희(김주미혜)는 서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까마득한 31빌딩을 바라보며 돈을 벌어 성공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이야기한다. 경희는 빠의 여급으로, 명자는 양계장을 운영하는 정숙과 작곡가 동식 가족의 식모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모든 것이 낯설었던 명자가 당돌하며 순수한 특유의 성정으로 고된 식모살이를 이겨내던 중 동식에게 겁탈을 당한다. 성적 순결을 잃었다는 죄책감과 절망도 잠시, 동식은 아내 정숙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고, 명자는 원치 않은 임신과 낙태를 경험한다. 충격적인 사건의 연속에 피폐해진 정신적 트라우마는 그릇된 욕망으로 자라났다. 동식과 아이, 나아가 집 전체를 차지하겠다는 그의 의지에 동식과 정숙 역시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다. 거기에 끔찍한 사건을 경험한 후 분노와 욕망으로 질주하는 세 사람의 세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김기영은 당대 한국 영화계의 틀을 벗어나 특유의 인장과 세계관으로 그로테스크한 독보적 영역을 구축한다. 당시 〈화녀〉와 결이 비슷한 멜로드라마의 중심 관념이란 가부장 전통의 속박과 여성의 정절, 정상가정의 유지와 남성성의 건재였다. 그 안에서 여성의 통속이란 남성이 지어놓은 화목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평범한 부녀자로 살아오다 남성의 불륜이나 다른 남성의 등장, 근대화의 혼란 등 특정한 계기로 기존의 삶을 도전받는다. 변화의 시대에 전통 가정의 해체만큼은 단호히 거부하던 사회에서는 아내의 도리에 맞게 갈등과 고난에도 결국 모성애의 ‘정상성’을 회복하는 교훈적 결말이 있는가 하면 유혹을 견디지 못한 불순한 여자가 타락하는 호스티스 영화나 청춘남녀의 애절하고도 순수한 사랑을 그린 로맨스 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 틈바구니 안에서 김기영의 멜로드라마는 변화하는 시대 달라지는 여성상을 날카롭고도 파격적으로 보여준다.
끊임없는 비유와 변주, 분절된 이미지의 사용은 영화의 비현실성을 극대화한다. 대상의 내면에 갇힌 인습을 과감히 폭로하며 비웃듯이 이를 과장하는 영화적 스타일은 흔들리는 카메라와 극적인 명암, 비현실적 연기로부터 파생된다. 그의 세계에 어울리는 작위적 대사와 행동은 배우의 연기로 구현한다. 시체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윤여정 배우의 연기는 그 점에서 김기영의 메시지를 담아내기에 더할 나위 없다. 예측 불가의 디렉팅에도 윤여정 배우는 자신만의 기운으로 전에 없던 여성 캐릭터를 창조해 파국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버스 안 31빌딩의 거대함에 압도되기는커녕 "떨어져 죽기 편리한 높이"라며 킬킬대는 당돌한 모습은 관객과의 첫인상부터 전형적인 여성상을 철저히 거부할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심어준다. 수직으로 높이 솟은 빌딩의 이미지로 이어지는 공고한 남성성과 계급의식은 명자에게는 그저 농담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의 비극적 운명을 스스로 내뱉는 통한의 전조는 시대의 억압이 명자의 삶을 그냥 두지만은 않겠다는 역경의 출발선과 같다. 미시정치학을 관통하는 억압 기제에 놓인 영화는 비정상적인 충동과 질투, 살인과 범죄를 다루며 한국 사회의 집단 무의식에 드리운 트라우마를 스크린에 구현한다.
명자는 태연하게 쥐꼬리를 잡고 흔드는 과감하고 야생적인 모습과 함께 쥐약을 설탕물과 바꿔치기해 정숙의 의도를 간파하는 얄궂은 지적 면모를 드러낸다. 평범한 부녀자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절규하지만 이내 주인집의 약점을 잡고 내면의 본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감정의 급격한 등락을 거침없이 표현하는 윤여정의 연기는 순수하고 서늘한 광기로 가득하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눈빛의 수줍은 몸짓은 곧 욕정과 복수의 감정을 담아 여러 이미지로 폭발한다. 과거 고향에서 동네 남성들에게 당했던 트라우마는 성적 욕망과 끊임없이 충돌하고, 이를 기괴한 신체의 뒤틀림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삶의 마지막 순간 욕망을 분출하는 명자는 이층 집 계단을 타고 거꾸로 추락한다. 붙잡은 동식의 걸음에 맞춰 계단 계단마다 머리를 찧는 명자의 장면은 비참하고도 강렬한 의지의 각인처럼 뇌리에 남는다. 이상한 여성들의 신체 훼손과 악다구니는 역설적으로 영화 곳곳의 비정상성에서 드러나듯 가부장이라는 거스를 수 없던 억압에 분열된 여성으로 사회의 정상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불의 여자’라는 제목이 무색할 만큼 영화는 물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고통과 욕망의 장면마다 물은 명자를 괴롭히는 갈급의 메타포로 사용된다. 공허를 채우는 물은 명자를 가득 메운다. 욕망과 고통의 액체는 곧 독약이자 생명수다. 정화와 죽음, 생명과 파멸처럼 물의 이미지가 가진 다중의 의미는 덧없는 가부장제의 반작용과 변주, 계급의 전복으로 나아가는 김기영식 사회비판의 한 축을 담당한다. 그밖에도 나비와 쥐, 닭의 이미지 등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반복하여 인용하는 상징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물질과 생산 기계로 전락한 생명력, 무지의 충동과 위험한 유혹 같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영화는 개성 있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워 인간과 사회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노출한다. 윤여정 배우 못지않게 극의 감정과 서사를 지탱하는 정숙 역의 전계현 배우의 에너지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비극을 목도하는 반동 인물로서 정숙은 단지 전통적 여성상으로 신진 여성 명자와 대립하는 일차원적 인물로 남지 않는다. 홀로 양계장을 운영하는 직업여성이자 허울뿐인 가부장의 권력에 순종하는 그는 달리 보면 명자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스스럼없이 내보일 기회를 얻는다. 정숙은 뒤틀린 가정의 보호 강박에 사로잡힌 채 사회적 평판이라는 대전제를 위해서라면 가정의 침입자를 언제라도 닭 모이로 만들 준비가 되어있다. 명자의 친구 경희 역시 전형적인 호스티스 영화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지만 유의미한 장면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정숙이 모든 사실을 밝히고 비 오는 거리에 쓰러져 통곡하다 신발 한 짝을 잃는 마지막 장면은 50년 전이라고 믿기 어려운 모던한 연출을 보여준다. 정숙을 부축하는 경희의 뒷모습과 저 멀리 보이는 31빌딩은 억압과 통제의 사회라는 고고한 첨탑은 건재하며, 그 밑바닥에서 욕망을 억누른 채 뒤틀리며 살아남은 여성의 쓸쓸한 걸음만 남아 바뀌지 않는 시대의 모순을 상징한다.
김기영은 자신의 괴팍한 본성을 적극적으로 영화에 표출하며 사회의 무의식을 짓이겨 근대화의 뒤편에 적재된 계급과 성별, 자본을 고발한다. 욕망이라는 절대자를 향한 파국의 행렬 한가운데 인물을 떨어뜨린 그의 결론은 한결같은 추락이다. 닿을 수 없는 갈증의 끝에는 거대한 31빌딩 옥상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에게 영감을 준 김기영의 영화는 윤여정이라는 대배우의 탄생을 열어젖혔고, 영화 속 그의 추락은 50여 년이 지나 지금의 자리에 도약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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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보면 후회하는 몰입도 최강의 공포영화 입니다.[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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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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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클리닝 레이디> 예고편
자칭 '사랑 중독자' 앨리스는 유부남 마이크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불륜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앨리스는 정신을 딴 데로 돌리려다가
화상으로 끔찍한 상처를 입은 여자 청소부 셸리와 가까워진다.
너무나 다른 겉모습과 달리 예상치 못한 유대감을 공유하는 두 사람.
그러나 셸리는 사실 외면보다 내면에 더 충격적인 상처를 안고 있었고,
앨리스를 '완벽하게' 만들어 주려는 셸리의 시도는 파국으로 치닫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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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예고편
블랙의 메시아 그리고 블랙의 유다...
혁명가를 죽여도 혁명은 죽지 않는다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미국 내 반체제적인 정치 세력을 감시하고 와해시키는 대 파괴자 정보활동을 설립하고 급부상하는 흑인 민권 지도자들을 ‘블랙 메시아’로 규정해 무력화시킨다. 1968년 FBI는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장으로서 투쟁을 이끄는 20살의 대학생 프레드 햄프턴을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대중 정치 선동가로 지목해 그를 감시하기 위한 정보원을 잠입시키기로 한다. 한편, FBI 요원을 사칭해 차를 절도하다 체포된 윌리엄 오닐은 FBI 요원 미첼에게 7년 간 감옥에서 썩을 것인지 아니면 흑표당에 잠입해 햄프턴을 감시할 것인지 제안 받는다. 조직에 들어간 오닐은 미첼 요원의 영향력에 강하게 끌리면서도, 흑표당이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사회적 불평등을 경험하면서 햄프턴의 메시지에도 동화되기 시작한다. 지부 보안 책임자의 자리까지 오르고 햄프턴과 가까워질수록 용기 있는 일과 자기 목숨 부지하는 일 사이의 기로에 놓이게 되는데…
1969년 12월 4일, 운명적인 배신과 비극적인 선택의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