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4-06-30 23:46:40
그녀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이렇게 재구성하다니
블론드
나는 마릴린 먼로를 좋아한다. 세상은 그녀를 백치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녀의 백치 캐릭터는 일종의 마케팅의 일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대중이 보고 싶어하는 자신에 대한 편견에 그녀를 맞춘 영리한 여자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블론드는 좀 심각하게 그녀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찬 영화라고 생각한다. 남성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섹스 심볼로서의 그녀의 외면적 모습을 세간에 알려진 그녀의 가정사에 대한 소문, 스캔들에 대한 내용들을 버무린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픽션이라고 해도 일말의 사실 조차 포함시키지 않고, 수많은 소문들만을 가지고 그녀에 대한 영화를 만든 건 인권유린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의 스토리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 걸까. 티비 속 모습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대중들은 여전히 존재하는 걸까. 그녀의 죽음이 미스터리했기에, 진실은 저멀리에 있어 그녀에 대한 소문은 무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소문의 주인공이 헐리우드의 섹스 심볼이라면, 연예인이라는 이유로 인권이 유린되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걸까. 마치 연예인의 열애 소식을 전하는 파파라치 컷이 국민의 알권리라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걸까 생각한다.
대중이란 존재는 개인의 작은 몰매함이 모여 당연시되기 쉬운 집단이다. 집단 사회에서 소문이란 위험하고 낯선 요소를 제외시켜 집단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한 개인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후자와 관련된 영화라고 본다.
다만, 배우의 연기는 인상적이었고, 그녀와의 싱크로율은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 속 그녀는 영리하기보다는 사랑에 목을 매는 어리버리한 백치 이미지에서 크게 차이가 없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것인가 싶은 장면도 많았다. 분명 자기 주장을 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남자를 홀리는 섹스 심볼로서의 그녀를 강조하며 남자에 목을 매는 그녀의 모습은 아버지의 부재를 채우기 위한 병적인 집착에서 비롯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고착화된 이미지에 갇혀 캐릭터를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짐작도 결국 소문에서 비롯되었기에 이 영화는 한 영화 배우의 인생을 보고싶은대로 보고 멋대로 재단한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가 픽션이라는 것은 이런 영화의 단점을 어떻게든 가려보려는 노력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실존 인물의 삶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면서 내용의 큰 줄기를 제외한 그녀의 삶 속 디테일들을 모두 픽션으로 채워넣은 것부터가 영화의 미흡한 점을 드러낸 것이다. 보통 실존 인물의 영화에서 픽션으로 처리할 때 실제 삶을 사료에 근거해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리되, 미스터리로 남은 부분들을 일부 부분들을 픽션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 영화는 대부분이 픽션이고 실제에 가까운 내용은 그녀의 영화 배우로서의 스코어밖에 없다. 그만큼 그녀의 인생이 미스터리로 가득하다는 뜻이겠지만 그 정도의 미스터리라면, 그녀의 얼굴을 앞세워 영화를 만들지 않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 영화는 biography도 아니고 픽션으로만 봐주기에도 한계가 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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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으로 물드는 사랑, 영화 <로마>
- 로마 (Roma, 2018)
제작 : 멕시코, 드라마 │ 감독 : 알폰소 쿠아론
출연 : 얄리차 아파리시오(클레오), 마리나 데 타비라(소피아)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35분뛰어난 색감 구현이 가능한 컬러영화 시대에 흑백영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흑백영화인 <로마>를 보았을 때, 색을 볼 수 없으니 왠지 답답할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들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영화가 끝날 때까지 단 한차례도 답답함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흑백판으로 다시 개봉된 바 있고, 이준익 감독의 <동주>와 <자산어보>는 아예 흑백으로 제작되었다. 이에 대해 두 감독은 비슷한 이야길 한다. 봉준호 감독은 “색이 없으면 텍스쳐에 더 집중할 수 있다”라고 했으며, 이준익 감독 역시 “현란한 컬러를 배제하면 물체나 인물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형태가 더욱 뚜렷하게 전달된다”라고 말한다. <로마> 역시 그러했다. 이 놀라운 흑백영화가 다시 컬러판으로 재상영한다고 하면 이제는 왠지 배신감이 들 것 같을 정도다.
<로마>는 우리가 아는 이탈리아의 수도, 그 로마가 아니다. 멕시코시티에 위치한 동명의 작은 지역을 가리킨다. 그곳은 멕시코 출신의 감독 ‘알폰소 쿠아론’이 자란 곳으로, 영화는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의 멕시코, 즉 알폰소 쿠아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자전적 이야기이다.
감독의 어린 시절에는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자신을 낳고 기른 엄마 ‘소피아’. 그리고 엄마 못지않게 자신을 사랑으로 보살폈던 여인 ‘클레오’. 중산층에서 태어난 그의 집에는 입주 가정부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극 중의 ‘클레오’라는 멕시코 여성이다.
가정부 클레오가 집을 이리저리 치우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네 명의 아이들과 엄마 아빠 할머니, 그리고 분명히 그들이 고용한 고용인이지만 어쩐지 가족처럼 친밀해 보이는 클레오까지. 화목해 보이는 이 중산층이 그려질 때만 해도 영화는 따스하기만 했다.
어느 날 아빠는 해외로 출장을 떠나게 되는데, 엄마 소피아가 떠나는 아빠의 등을 움켜잡고 울먹이는 게 왠지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길로 아빠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에게 새 연인이 생겼고, 그래서 다시는 이 가족을 보러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우리 관객들은 알 수 있었는데, 천진한 아이들은 미처 이 상황을 모른다. 그 모습이 너무도 마음 아팠다.
그 무렵 가정부 클레오는 만나던 남자의 아이를 갖는다. 그러나 비겁한 남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자취를 감추었다. 영화관 앞에 앉아 도망간 남자를 기다리는 클레오의 모습은 얼마 전 소피아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마찬가지로 그 남자도 돌아올 일은 없겠지. 온기가 맴돌던 집안에 남겨진 두 명의 여자.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때는 1970년대다. 가장이던 남편이 떠난 후 네 명의 아이를 홀로 책임져야 하는 그 시절 여성의 삶은 너무도 막막하다. 내 뱃속의 애를 부인하고 내뺀 그놈 앞에 유전자 검사결과지를 뿌리며 인생을 조져주겠다는 용기도 쉬이 내기 힘들던 시절이다. 소피아는 양육비도 주지 않는 남편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해 일을 구하고, 클레오는 비록 아빠는 없지만 뱃속의 아이를 낳을 생각으로 지낸다. 두 여성의 삶이 그 암흑 같던 시절에 얼마나 버거웠을지는 감히 헤아리기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다행으로, 그 돌풍 속에서도 아이들만큼은 아버지의 부재를 크게 실감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 이유는 당연히도, 아버지의 자리를 메우는 두 여성의 눈부신 애정이 있었기 때문. 관객들은 알고 있었다. 그녀들만큼은 이 아이들, 이 집을 떠나지 않을 거란 걸. ‘부모와 아이들’로 구성되어있던 한 가족은, 그렇게 점차 ‘두 엄마(소피아와 클레오)와 아이들’이라는 새로운 가족형태로 자리 잡아가고, 고용주-고용인 관계였던 소피아와 클레오의 관계도 여성 간의 연대라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러 집에 들르기로 한 날, 가족은 여행을 떠난다. 물론 여기서의 가족은 엄마 소피아와 가정부 클레오 그리고 아이들이다. 제법 단단해진 엄마 소피아는 저녁을 먹으며 아이들에게, 이제 아빠는 오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아이들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 “아빠가 더는 우리를 안 사랑하세요?” 아니, 많이 사랑하시지. “그럼 언제 볼 수 있어요?” 그건 엄마도 몰라.
경제적 지원마저 끊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야 했을 아이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 당시 쿠아론 감독은 고작 열 살이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면 왜 돌아오지 않는지, 넷 씩이나 자식을 낳아놓고도 왜 돈을 보내주지 못하는지, 아이들도 소피아도 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 비정한 남자를 대신해 그 옆에 앉아 아이들의 밥을 먹이는 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클레오다.
여행의 마지막 날. 아이들은 다소 파도가 거세 보이는 바다에서 수영을 한다. 위험하니 깊은 곳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은 영 듣지 않으며. 결국 아이들은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빠지고, 이를 지켜보던 클레오가 놀라 성큼성큼 바다로 들어간다. (클레오는 이 여행을 오기 전, 멕시코 독재정부를 타도하는 시위대가 정부의 총격에 맞아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유산을 했다.) 그녀는, 죽을 뻔한 아이를 건져내고는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때 달려온 엄마 소피아는 그녀와 아이들을 부둥켜안으며 이렇게 말한다. “클레오, 우린 너를 사랑한단다. 정말로 사랑한단다.” 유산한 클레오의 곁에 있던 것도, 그 남자가 아닌 고용주 소피아와 그 가족들이었다.
그야말로 눈물이 주룩주룩.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던 이 두 여인의 남자들은 어디 있는가. 바닷가에서 두 여인과 아이들이 오랫동안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보며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그들은 여지없는 분명한 가족이었다. 텍스트에 집중할 수 있다는 건 이런 것일까. 이 영화에는 색감뿐 아니라 음악도 없는데, 영화의 매력적인 두 요소가 빠졌다는 게 정말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이라 표현하긴 진부하고, 가족애라 표현하기엔 편협한 어떤 커다란 감정이, 오로지 이 영화를 채우는 전부다. 하지만 모자람을 느낄 겨를 따윈 없다는 거.
새소리로 지저귀며 끝나는 이 영화의 엔딩을 통해, 쿠아론 감독이 두 여인의 사랑 속에 얼마나 따뜻한 삶을 살아왔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가족은 다시 그들의 일상을 영위해나간다. 아이들은 할머니에게 바다에서 빠져 죽을 뻔한 이야기를 전하고, 클레오는 유산 후의 실어증을 극복하며, 소피아는 새로운 직장과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알폰소 쿠아론이라는 명 감독을 선물해 준, 감독의 두 여인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다. 그녀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알폰소 쿠아론이 없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들은 과연 엄마이자 아빠였고, 그 사랑은 가족애라는 개념을 넘어선 연대정신이었다. 쿠아론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들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묵직하고 다정한 시선은, 자신을 키워낸 여인들의 그 따스한 품에서 피어났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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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왜 272kg이 되었는가
- 더 웨일(The Whale, 2023)
장르 : 미국·드라마 │ 감독 : 대런 애러노프스키
출연 : 브렌든 프레이저(찰리), 세이디 싱크(엘리), 홍 차우(리즈)
등급 : 15세 관람가 │ 러닝타임 : 117분그는 왜 272kg의 거구가 되었는가
자기혐오를 유발하는 순간들 중 하나가 바로 ‘식탐을 절제하지 못할 때’가 아닐까 싶다. 스트레스를 받아 절제력을 상실한 채 입안 가득 음식들을 밀어 넣고 나면, 배부름과 함께 걷잡을 수 없는 혐오가 밀려오곤 한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살이 찌고, 그렇게 스스로를 미워하고 있으리라. <더 웨일>의 주인공 ‘찰리’도 그 과정을 반복한 끝에 272kg의 거구가 되었다.
하지만 찰리가 소파에서 혼자 몸을 일으키는 것도 힘겨운 상태의 비만이 된 데에는 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그에게는 가정을 저버릴 만큼 사랑했던 연인이 있었는데, 그 연인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물리적으로 잃은 것도 괴롭지만, 그 사랑을 위해 포기한 원래의 가족 또한 잃은 셈이니 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너진 그의 세상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삶의 고통을 식음을 전폐하는 방식으로 견디듯, 그는 끊임없이 음식을 채워 넣으며 견뎠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맛’이 아니라 그저 먹는 ‘행위’를 추구했는지도.
집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 다양한 주제
영화는 한 발짝도 제 힘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거구의 남성이 집안에서 어떻게 삶을 비관하고 죽어가는지를 보여주기에, 화면 자체는 단조롭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의 세상은 온통 집뿐이다. 그럼에도 플래시백을 통해서조차 과거를 보여주지 않고 집안만을 조명하는 것은, 어쩌면 272kg의 찰리가 겪을 단조로움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 영화가 다루는 주제들은 화면과 달리 결코 단조롭지 않았다. 퀴어와 종교, 가족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 나아가 자기 파괴와 구원까지도 다루고 있으니 말이다.
272kg의 거구를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물론 많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들겠지. ‘그래도 그렇지 얼마나 자기 관리가 안되면 저 지경이 돼?’ 사실은 나도 도입부의 찰리를 보고 함부로 그를 판단했다. 어쩌면 세상 모두가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찰리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깨닫고 난 이후부터는 그가 단순한 ‘비만인’으로 보이지만은 않았다. ‘자기 관리의 부재’, ‘절제력 부족’이라는 말만으로 한 인생을 가볍게 판단하기에 사람에게는 누구나 복잡다단하고 커다란 세계가 있음을 새삼스레 확인하게 되었을 뿐.
나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
단순한 스트레스를 찰리의 고통에 견줄 수야 없겠지만, 오늘도 수많은 이들이 부정적 감정을 떨쳐내기 위해 입으로 음식을 밀어 넣고 있다. 나 또한 자주 그렇다. 세상은 그런 우리에게 자주 이런 잣대를 들이댄다. “정말 너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구나. 살을 빼야지! 건강해져야지! 이겨내야지!” 그리고 정신력을 발휘해 비만을 탈출하는 것만이 제대로 된 구원이라고 믿게 만든다. 물론 보통의 할리우드 영화였다면 아마도 찰리는 사랑하는 딸과 친구를 위해 열심히 살을 빼고 다시 리즈시절의 몸으로 돌아왔을지도 모르지만, <블랙스완>의 ‘대런 애러노프스키’가 연출한 이 작품은 고요하게 현실적이었다.
그는 오히려 그 육신을 포기함으로써 구원받았다. 종교로도 그 무엇으로도 떨쳐내지 못한 이 생에서의 슬픔은, 그렇게 홀연히 껍데기를 벗으면서야 마무리 된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대목이다. 나를 과연 내 육신으로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진정한 구원은 과연 무엇일까? “내가 역겨워?”라고 묻던 찰리의 처연한 눈동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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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가족 이야기, 영화 <위국일기>
<위국일기(違国日記)>는 갑작스럽게 함께 살게 된 이모와 조카가 서로를 이해하며 서서히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담은 일본 영화입니다. 소설가 마키오는 소식을 끊고 지내던 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합니다. 그곳에서, 고아가 된 조카 아사를 두고 ‘버려진 대야 같은 신세’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본 마키오는 충동적으로 아사를 맡기로 결심합니다.
‘위국일기(違国日記)’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긋난 나라의 일기’입니다. 이 제목은 이모와 조카의 태생적 거리감과 서로의 성격과 생활방식이 달라 불편함을 느끼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두 사람이 전부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같은 제목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는 가족과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차분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주연을 맡은 아라가키 유이(이모 역)와 하야세 이코이(조카 역), 카호(이모 친구 역)의 섬세한 연기는 마치 그들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몰입감을 줍니다. 감독의 서정적인 연출 역시 이들의 일상을 조용히 담아냅니다.
씨네랩의 영화 크리에이터로 영화의 시사회에 초대받아 좋은 영화를 감상했습니다. <위국일기>는 일상 속에서 각자가 품고 있는 외로움과 상처를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이모와 조카의 복잡한 감정선과 세대 간의 이해와 소통을 담아낸 이 영화는 관객에게 잔잔한 감동과 따뜻한 여운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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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찾아온 토네이도와 함께 옛 기억을 쫓다
다시 찾아온 손님
이 영화의 주인공은 기상청 직원 케이트(데이지 에드가 존스)다. 평범한 직장인인 케이트. 하지만 이런 케이트에게는 거대한 상처가 있다. 어렸을 때 케이트의 꿈은 토네이도를 공부하는 일이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케이트. 하지만 토네이도에 친구들을 잃고 나서 케이트의 마음에는 거대한 폭풍이 있었다. 하지만 애써 눈 감는다고 해서 뉴스를 안 볼 수가 있나? 여기저기에 들이닥치는 토네이도들.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과 함께 케이트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케이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손님은 친구 하비(앤서니 라모스)다. 토네이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케이트. 하비에겐 빵빵한 팀이 있다. 본인과 함께 토네이도를 연구하자고 제의하는 하비. 케이트의 마음이 흔들리고 오클라호마로 향한다. 거기서 만난 토네이도 인플루언서 타일러(글렌 파월)와 함께 사소하게 부딪히는 케이트 일행. 이런 세 사람에게 초거대한 토네이도가 주인공 일행을 습격했다. 토네이도 전문가 세 사람과 각 팀원들은 이 자연재해에 맞서기 시작한다.
반복과 차이
이 영화는 훌륭한 재난물이면서 따뜻한 내면을 다룬 휴먼드라마이기도 하다. 우선 첫째. 영화 자체가 과거라는 모티브를 다뤘다는 점에 있다. 우선 케이트. 케이트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휘둘리는 인물이다. 이 설정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다. 어렸을 때 친구들을 토네이도에 의해 잃었으니까. 그럼 극복하고 싶은 내지는 여전히 큰 상처로 남은 과거가 있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있으니 이걸 극복해야겠지? 그런데 영화는 판에 박힌 듯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성장물로서의 장르적인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 영화는 여러 요소를 덧붙였다. 이 성장서사가 1차원적이었으면 영화의 몰입감이 분산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 뻔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을 재난이라는 배경 하에 섬세하게 붙여놓았다. 글쓴이는 인간관계를 서로 엇갈리게 묘사한 것이 인상 깊었는데, 토네이도를 다루면서 인간 내면에 있어서도 탄탄한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영화의 온기가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이 인간 관계성 묘사는 <미나리>가 연상되는 부분이기도 한데 불의 이미지를 가족 간의 연대와 병치시킨다는 점에서 극이 문학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둘째. 이 영화는 인간관계성을 묘사하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여러 가지를 덧붙여 관객을 격려한다. 어떻게? 이 영화는 현재의 나를 통해 과거의 나를 극복하는 영화다. 한 마디로 성장서사다. 이 성장서사가 굳이 이런 플롯으로 이어져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 영화와 다른 예시인 <데드풀과 울버린>도 일종의 성장영화다. 둘은 과거와 유사점이 없는 사건을 마주하고 진짜 슈퍼히어로가 된다(MCU에 편입한다). 이 <트위스터스>는 <데드풀과 울버린>과 다르다. 오클라호마로 돌아온다는 공간적 설정, 케이트가 과거에 했던 시도, 케이트-타일러의 관계, 다시 찾아온 친구 하비, 어머니의 대사들까지 과거와 묘하게 다른 차이를 반복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 인물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과거를 현재로 돌아와 다시 겪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은 정말 중요하다. 왜? 데이비드 흄이 말했듯 필연적으로 과거의 일이 맞는다는 보장이 없다. 영화는 이 간단한 명제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토네이도도 휘몰아치고 두 남자도 등장시키고 하비를 핵심인물로 내세우며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 사이의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토네이도도 이런 우리의 모습과 별 다르지 않다. 토네이도가 인류에 등장한 지 굉장히 오래됐을 것이다. 그 원인을 몇 백 년 동안 조사해 온 인류라면 그걸 막고도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자연재해에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이런 토네이도의 속성은 글쓴이가 앞에 쓴 영화의 핵심과도 닿아있다. 과거에 겪어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오늘은 다르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낀 것
이 영화를 보며 느낀 것은 정이삭 감독의 덕업일치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이야기 외 내적으로 핵심이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첫째. 외적인 부분. 어떤 영화 든 간에 연출자가 지닌 과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점이다. 글쓴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떻게’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고전적인 향취가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재난을 보여주는 카메라가 그렇다. 영화 중후반부에 숙박업소에서 일어나는 일이 있다. 이 장면은 스필버그의 <쥐라기 공원>과 <죠스>에서 봤던 연출법이다. 뭔가 기괴한 이미지를 보여준다던가 사운드로 관객들을 휘어잡기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클래식한 이미지들이다. 무언가를 꽉 잡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을 <타이타닉>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2024년에 구현했다. 그리고 영화의 두 주인공 중 하나인 타일러를 묘사하는 방식도 고전적인 섹시가이(?)다. 이 고전적인 섹시가이가 무슨 말이냐. 뭔가 비주얼이 깔끔하지 않다(대표적으로 수염자국). 성격도 잘난 체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나르시시스트다. 하지만 그 내면을 보면 여주인공을 단단하게 사로잡으며 스트레이트로 직진한다. 겉으로 단단한 내면을 그대로 노출하며 직진하는 서양 사나이들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글쓴이는 <매그놀리아>, <탑건>에서 톰 크루즈나 <델마와 루이스>에서의 브래드 피트를 떠올렸다. 두 영화를 참고한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당시 시대상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감독이 과거의 것들을 가져온 근거가 된다.
다른 부분. 글쓴이는 이 영화가 자연에 대해서도 어떤 걸 말하고 싶었던 작품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는 정이삭 감독이 어렸을 때 경험했던 두 가지가 그대로 핵심이 된다. 첫째는 어렸을 때 구경했던 토네이도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건 ‘어렸을 때 구경했던’이라는 뜻이다. 좀 찾아보면 정이삭 감독이 어렸을 적 미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낼 때 토네이도를 구경했던 기억이 선명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동경했다고 전해진다. 이 관점이 영화 안에 그대로 들어가 있다. 토네이도에 도전하는 인간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자연재해의 공간적 배경인 오클라호마가 <미나리>의 일부 공간과 겹쳐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 토네이도에 대한 경외감은 엔딩 하이라이트 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토네이도가 이 공간을 공격하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이 영화감독이라는 점은 창작자가 ‘이곳’과 토네이도를 동일시시킨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둘은 하나가 되어 <트위스터스>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도착했기 때문에.
토네이도가 뭐게
이 영화에서 글쓴이가 가장 좋았던 부분은 장르적인 재미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재난영화다. 그럼 그 재난을 묘사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 몫을 철저하게 해낸다. 이게 토네이도를 실제로 만들었을 리는 없다. 그건 크리스토퍼 놀런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하다. 그럼 VFX로 구현했다는 의미인데. 이 자세한 부분들을 어떻게 구현했는지는 관객들이 다 다른 장점을 말할 것 같다. 정말 잘 만들어서 토론의 여지가 다분한 토네이도였다는 뜻이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장점은 물건이나 사람이 날아가는 방향이다. 이게 터무니 없으면 맥없이 날아갈 것 같은데 빠른 속도와 정확한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어 아주 생생하다. 이 토네이도가 인물들의 절체절명의 위기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재난 외적인 이야기도 잘 만들었지만 내적인 이야기도 잡았으니 장르물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
하지만 이 장르적인 재미로서의 토네이도는 후반부에 이르러 어떤 변화를 표현한다. 글쓴이가 생각했을 때 이 영화에서의 토네이도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암시하고 있다. 어리면 잘 모른다. 저거 할 수 있겠는데? 객기 부린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상처가 늘어나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감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에게 치유받는다고 했던가. 과거에도 ‘이 것’이었고 지금 현재도 ‘이 것’을 만났지만, 또 둘 중 뭐가 더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토네이도처럼 피할 수 없이 사람에게 다가오고 강력한 상처를 만든다. 미래를 예측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하다. 영화를 다 본 글쓴이의 입장에서는 토네이도와 ‘그 어떤 것’ 역시 위의 문장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엔딩에서 특히 이것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고. 이 연출이 이물감이 없이 자연스럽다는 점은 재난영화로서의 특징과 변화구를 둔 영화의 선택 둘 다 빛내는 좋은 선택이었다. 흐뭇한 웃음이 저절로 지어진다.
아는 것 그 자체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단점은 타일러 일행 묘사다. 구체적으로 영화가 이 인물의 설정을 잘 살린 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타일러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크리에이터이면서 섹시가이다. 그럼 뭐가 필요할까? 비전문가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전문성 중 하나인 경험이 부각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영상을 라이브로 송출하는 준비단계에 대한 부분이 더 들어갔어야 했다. 만약 글쓴이가 이 영화의 각본을 썼다면 카메라 장비에 관한 부분을 더 보여주면서 타일러의 과거 서사를 더 넣었을 것 같다. 영화가 불필요한 걸 다 잘라내고 간단한 플롯으로, 고전적인 영웅서사로 질주하기 때문에 이 선택은 당연하게 따라오는 단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런 초거대한 자연재해에도 의외로 무덤덤한 타일러의 행보가 의아하기도 했다. 또 섹시하다는 이미지도 정이삭 감독이 자기 것이 아닌 걸 만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글쓴이라면 영화에서 타일러의 피지컬적인 능력이나 리더십을 더 부각하는 장면을 넣었을 것 같다. 인물의 개성이 납작하기 때문에 초반부가 진부해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후반부의 장르 변주가 이 인물의 다양한 내면에서 온다는 점을 생각해 봐서도 그렇다.
영화 잘하시네
<트위스터스>에 대한 글쓴이의 총평은 좋은 장르영화라는 것이다. 초반부가 납작해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영화 전부를 보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미나리>처럼 소담한 이야기를 바란 관객이 있을 수도 있다. 글쓴이는 이 영화가 <미나리>와 비슷하면서 아예 다른 점이 재미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나리>를 넘은 정이삭 감독의 연출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만족스러웠다. 8월 14일 4편의 영화가 대규모로 개봉하며 빅매치가 예고된다. 이 빅매치에서 의외의 복병이 되기 충분한 <트위스터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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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키는 사람들이 있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여성국극
- 다큐멘터리 영화 <여성국극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영원하다> 리뷰
작은 캐리어를 끌고 일본에 도착한 두 여성은 다카라즈카시의 한 대극장으로 향한다. 모두 여성 배우로 이루어져있는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이다. 2층까지 있는 극장에는 공연을 보러 온 이들로 가득하다. 공연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빠져나가는 인파 사이에서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서러움과 부러움이 뒤섞인 대화를 나누는 두 여성. 그들은 여성국극 3세대 배우 박수빈과 황지영이다.
얼마 전 방영된 드라마 <정년이> 를 통해서 여성국극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이전까지는 여성국극이라는 것의 존재조차 몰랐다는 말이다. 여성국극 안의 모든 배역은 여성 배우가 맡는다. 춘향이도, 이몽룡도, 변사또와 방자도 모두 여성이 노래하고 연기한다. 여성국극의 전성기 시절, 남자 캐릭터를 연기하는 남역배우들의 인기는 지금 아이돌을 그것을 방불케했다.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여성국극이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 하다. 여성국극을 위한 제대로 된 무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큐멘터리 속에서 박수빈과 황지영 배우가 열명 남짓도 안되는 사람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공연하는 모습을 보면 어딘가 짠하고 안타갑게 느껴진다. 공연을 끝내고는 캠핑카를 끌고 이동하며 무대에 대한 고민와 평가를 나눈다. 그들의 일상은 여성국극이 전부인 듯 보인다.
박수빈과 황지영은 여성국극을 통해 만났다. 함께 노래를 배우며 자란 그들의 스승은 여성국극의 전성기 시절 한획을 그었던 인간문화재 조영숙 선생. 그는 1939년생이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공연을 한다. 상투를 틀고 남자 한복을 입고, 인간문화재라고 불리는 만큼의 소리를 내는 조영숙 선생님의 모습은 머릿속에 강렬히 각인되었다. 여성국극을 사랑하는 스승과 그 스승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여성국극을 지키려는 제자들. 세 사람의 모습은 스승과 제자를 넘어서 가족의 모습과 닮아있다. 스승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멱살 잡고 끌고 가보자던 제자들은 그렇게 소원하던 대극장 공연을 기획해보기로 한다. 당신들이 사랑하는 스승님, 그리고 여성국극을 이끌었던 선배님들과 함께. 과연 두 사람은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의 매력적인 부분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면 첫 번째, 여성국극 그 자체이다. 낯설지만 매력적인 문화인 여성국극. 국악을 베이스로 노래를 하는 최초의 뮤지컬, 여성국극이라는 문화를 알고 배움이 흥미롭다. 드라마 <정년이>의 실제 모델이라고 불리는 배우들의 면밀한 이야기와 예술과 상업 사이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 또한 그렇다.
두 번째는 고군분투하는 젊은 여성국극 배우 박수빈과 황지영 모습이다. 박수빈은 자신과 여성국극이 닮아있다고 말한다. 끊임없이 증명하는 삶을 살아왔다는 말에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다가온다. 그렇지만 때로는 쓴소리로 때로는 목표를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는 모습으로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귀감을 준다.
그리고 세 번째, 조영숙 선생과 두 제자들의 관계성이다. 이들의 모습은 영화에 숨을 불어넣는 듯하다. 이들을 통해 단순한 이야기가 입체적이고 특별하게 바뀐다. 스승님을 위해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는 제자들이라니. 실제로 영화의 연출을 맡은 유수연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처음에는 조영숙 선생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했는데, 조 선생을 만나러 갈 때마다 수빈과 지영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의 방향이 바뀌게 된 것 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이들의 관계가 몹시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중에는 조영숙 선생님이 등장하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영화의 촬영 배경은 2023년. 드라마 <정년이>의 영향으로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가기 이전이다. 지금 이들의 모습은 어떨까?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100번 이상의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기분 좋은 소식이다. 국악을 토대로 한 우리 문화인만큼, 끊어질 듯 이어지고 사라질 듯 영원할 여성국극을 응원하게 되는 영화였다.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관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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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도와 해석이 빚어낸 광기의 끝
3년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다. 작품 전체가 휘청이는 위기도 있었지만, 연상호 감독은 이를 극복하고 혼돈에 휩싸인 아수라장(阿修羅場)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시즌 2로 돌아온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은 정체불명의 '사자(使)'들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한순간에 혼란에 빠진 세계관을 그렸던 시즌 1에서 8년 뒤 시점을 주요 배경으로 삼고 있다. 시즌 1 말미를 장식했던 시연에서 살아남은 배영재(박정민)-송소현(원진아) 부부의 딸, 새진리회 1대 의장 정진수(유아인→김성철)의 시연, 부활한 '죄인' 박정자(김신록)로 포문을 연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고지(告知)-시연(試演), 이 재앙으로 인한 혼란과 갈등을 시즌 1 6부작을 통해 설명했다면, '지옥' 시즌 2는 재앙이 만연화된 사회의 주요 구성원인 새진리회, 화살촉, 소도 등 여러 단체들이 각자의 상징을 내세워 주도권을 잡으려고 대립각을 세우는 모습이 주류를 이룬다. 그 사이에 희생되는 개인의 서사까지 조명하며 디스토피아 세계관의 정점을 찍는다.
재밌는 건, 한 배를 탔던 새진리회와 화살촉이 고지-시연에 대해 서로 엇갈리는 견해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여기에 부활자 2인(박정자, 정진수)의 존재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세상은 사자들이 처음 등장했던 8년 전과 비슷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부활 또한 고지-시연과 마찬가지로 원인 모를 불가해한 현상인데, 저마다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의도'를 찾고 '해석'을 가져다 붙이려고 급급하다. 심지어 정진수마저 같은 부활자인 박정자를 통해 자신에게 던져진 질문을 찾으려고 했으니 말이다.
사실 '지옥' 시리즈에서 고지와 시연, 부활이 의미하는 바, 혹은 상징성을 찾아내는 건 무의미하다. 천세형(임성재)의 극 중 대사처럼 아무 의미도 없는 것에 광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인간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참혹한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연상호 감독의 진짜 목적인 셈. 시즌 2 6부작이 끝난 뒤에도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떡밥이 남았다고 생각드는 것도 어찌보면 드라마 속 인물들 같이 의도와 해석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이러한 유형의 작품 특성상, 출연 배우들의 밀도 높은 감정 연기가 필수이며 시즌 2에 새롭게 합류한 배우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마약류 투약 혐의 건으로 하차한 유아인을 대신해 정진수 역을 맡은 김성철이 모두의 관심이 받았다. 누가 더 우위라고 비교하여 판정 내릴 순 없으나, 최소 실점 위기를 훌륭히 틀어막은 구원투수 역할은 톡톡히 해냈다. 좌중을 휘어잡는 아우라와 더불어 본연의 감정에 깊게 빠진 정진수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화살촉의 교리에 경도되어 세력의 리더격으로 활약한 햇살반 선생님 오지원 역의 문근영의 파격 변신은 매우 강렬했다. 배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 가린 괴기한 분장과 괴성에 가까운 소리, 급격한 변화와 혼란을 겪는 과정 등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문근영이 아닌 새로운 얼굴을 선보이며 충격을 선사했다.
그 외 '무빙', '최악의 악' 등에서 비릿한 악역으로 눈도장받았던 임성재의 절절한 감정 연기와 새진리회, 소도, 화살촉을 주무르며 잇속을 챙기려는 정무수석 이수경 역의 문소리의 영악함도 인상깊었다.
다만, 시즌 1에서 강한 임팩트를 심어줬던 사자들의 CG나 광기로 폭주하는 화살촉 집단의 분장은 기대치에 못 미친 게 아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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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비상선언> 30초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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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에이리언: 로물루스> 메인 예고편
고요한 우주를 가르는 절규 피할 수 없는 그것과의 사투 [맨 인 더 다크] 페데 알바레즈 감독 [에이리언] 리들리 스콧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