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2025-04-23 23:05:57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누군가에겐 귀환, 누군가에겐 자유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빛을 통해 잔상으로 남는다.
대도시와 이방인들이 만들어내는 만국공통어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가 사는 도시, '뭄바이'는 인도에서 가장 큰 도시라고 한다. 이 영화는 각자의 꿈과 희망을 안고 대도시 뭄바이에서 맞딱드린 세 여자의 이야기이다. 수많은 행인, 밤 늦게까지 빛을 내는 아파트와 전철 사이에서 프라바는 간호사, 아누는 인포직원, 파르바티는 요리사로 한 병원에서 일하며 의지한다. 서울을 갈망하고 이주하는 우리를 미루어보면 '대도시에서 만나는 이방인의 서사',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교감이 만국공통어인듯 하다.
인도의 결혼제도가 던지는 설움
결혼은 했지만 남편과 따로 사는 프라바는 그의 존재 없는 '존재감'으로 인해 새로운 인연을 만나지 못한다. 아누는 부모님의 반대와 종교적 금기를 무릅쓰고 몰래 사랑을 나눈다. 파르바티는 남편의 죽음 이후 도시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주요인물들이 겪는 갈등은 인도의 결혼제도와 관습이 던지는 설움들이라 생각해볼만 하다. 허물뿐인 남편, 사랑을 넘어서는 종교적 배척정신, 남편이 없는 여성에 대한 대우 등...
누군가에겐 귀환, 누군가에겐 자유
보통의 주인공은 여행을 떠나고 귀환을 하는 여정에서 성장한다. 여기에 빗대 생각해보면 프라바, 아누, 파르바티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이 더욱 흥미롭다. 결국 고향으로 향하는 파르바티를 프라바와 아누가 배웅하는데, 파르바티의 귀환을 통해 프라바와 아누의 여행이 시작된다. 파르바티의 고향에서 남편의 환영을 마주하는 프라바, 애인과 아낌없이 사랑을 나누는 아누는 파르바티의 귀환에서 자유해진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빛'을 통해 잔상으로 남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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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콜릿 같이 달콤한 꿈을 향해 나아가기
우리 모두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 꿈은 우리를 움직이는 힘을 주기도 하지만 때론 절망을 주기도 한다. 쉽지 않은 현실의 벽 앞에서 그 꿈이 막혀버리기 쉽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기까지 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이 오기 전에 일반적으로 꿈은 우리에게 달콤한 환상을 준다. 꿈을 이룬 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달콤함을 느낀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 달콤함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과 계기를 찾으려고 애쓴다.
꿈은 초콜릿과 닮았다. 한 입 베어 물고 입안에서 녹는 초콜릿의 맛이 느껴졌을 때 느껴지는 달콤함은 무척이나 부드럽다. 그렇게 달콤함을 느끼면서 주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낸다. 마치 힘든 삶의 감초처럼 초콜릿은 모든 이들에게 달콤함을 선사한다. 꿈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꿈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거나 이야기를 할 때 마치 그 꿈을 이룬 것 같은 달콤함이 느껴진다. 심장은 두근두근 뛰고 몸 안에 도파민이 퍼지며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초콜릿과 꿈의 달콤함이 영화 <웡카>에 가득 담겨있다.
첫 번째 감정 - 웡카의 설레임
윌리 웡카(티모시 샬라메)는 무척이나 긍정적인 인물처럼 보인다. 맨 첫 장면 배를 타고 새로운 도시에 입성하는 장면부터 웡카는 자신의 꿈이 모두 이루어질 거란 생각을 한다. 즐겁게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이 만든 초콜릿으로 큰돈을 벌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긍정성을 드러낸다. 긍정적인 말을 뱉으며 경쾌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웡카가 자신의 목표에 얼마나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전달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강하게 믿는다는 것이, 주변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바보 같은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웡카의 자신감은 그가 무언가를 이룰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웡카가 도착한 도시는 쉽지 않다. 첫날부터 웡카가 가진 돈을 쓰게 하려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물가는 비싸다. 하지만 웡카가 가진 설레임은 그 모든 걱정을 날려버릴 만큼 강력하다. 자신이 만든 초콜릿을 처음 세상에 내놓을 거라는 꿈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는 것은 웡카를 더욱더 설레이게 한다. 이런 웡카의 설렘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전달된다. 그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는 관객들 뿐 아니라 영화 속에서 웡카를 돕는 인물들에게도 전달되어 꿈을 위한 도전을 하게 만든다.
결국 꿈을 향하게 하는 건 그 꿈이 이루어질 때의 설레임 때문이 아닐까.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최악의 상황에 놓이지만 웡카의 설레임에 공감하면서 그 설레임을 꿈으로 바꾸려 노력한다. 달콤한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다른 사람의 꿈을 위해 돕는 것이 결국 그들 모두의 꿈을 이룰 수 있게 만들어준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설레임의 힘이다.
두 번째 감정 - 웡카의 그리움
웡카는 돌아가신 엄마(샐리 호킨스)를 그리워한다. 늘 엄마표 초콜릿을 먹으며 행복함을 느꼈던 웡카는 늘 엄마가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마치 그 초콜릿이 엄마인 것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자신이 맞이하는 도전적인 순간과 환희의 순간들을 함께한다. 그런 중요한 순간이 시작되기 직전 늘 월카는 혼잣말로 주문처럼 이야기한다.
엄마 한 번 해볼게요. 잘 보세요!
마치 마법처럼 웡카가 자신의 초콜릿을 소개하고 홍보하는 모습은 무척 자신감이 넘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치 엄마가 지켜보는 것처럼 웡카의 마음속엔 늘 엄마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이 웡카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감정이자 위기에 빠져도 다시 일어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또한 무엇보다 웡카는 엄마가 초콜릿을 맛있게 만드는 비법을 알고 싶었지만 결국 엄마에게 듣지 못한 채 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미 웡카는 최고의 초콜릿 제조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가 가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좀 더 완벽한 초콜릿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을 만들어낸다. 그의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는 엄마표 초콜릿의 맛은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완벽한 맛이었기 때문이다.
웡카가 그리워하는 엄마는 웡카의 꿈을 만들어준 인물이면서 완벽한 스승과도 같다. 그래서 웡카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의 에너지를 초콜릿 연구에 쏟아내고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완벽한 초콜릿을 세상 사람들에게 선사해내고 만다. 어쩌면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엄마의 사랑이 웡카에게 그런 완벽한 꿈을 만들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감정 - 초콜릿 회사 사장의 두려움
영화에는 기존 초콜릿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장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심에 서있는 슬러그워스(패터슨 조셉)는 처음부터 끝까지 웡카가 도시에서 초콜릿을 팔지 못하게 방해한다. 그는 이미 엄청나게 많은 초콜릿을 가지고 있고, 엄청난 부를 축적한 인물이다. 이미 엄청난 성공을 한 그는 웡카가 만든 초콜릿을 먹어본 이후, 웡카를 도시에서 몰아내려 무척 노력한다. 사실 슬러그워스는 웡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세고 성공한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웡카라는 새로운 경쟁자를 용납하지 못한다.
슬러그워스는 왜 그렇게 두려움에 빠져있는 걸까. 그는 이미 경쟁회사의 사장들과 연합해서 도시의 모든 초콜릿을 독점 공급하고 있었다. 경쟁사의 사장들과 연합하면서 다른 작은 경쟁사들을 배제하기로 담합한 것이다. 도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달콤한 초콜릿에 빠져있는 그 상황에서 새로운 경쟁자의 유입은 그들의 입지를 줄일 수 있으니 더욱더 배타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초콜릿의 맛이 웡카가 만든 것보다 떨어졌으니까!
슬러그워스의 두려움이 강력한 힘으로 표출되지만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약점을 드러낸다. 돈과 초콜릿으로 많은 사람을 매수하여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만, 자신들만의 순수한 꿈을 가지고 있는 선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먹히지 않는다. 그래서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해 보면 슬러그워스를 포함한 초콜릿 회사 사장들은 자신의 두려움을 계속 표현했다고 느껴진다. 영화의 초반, 초콜릿 판매매장이 있는 거리에서 웡카가 자신의 초콜릿을 판매하려고 노래를 부르는 그때, 각자의 매장에서 웡카를 보는 그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두려움을 볼 수 있었다. 이후 그 두려움이 영화 내내 표현된다. 결국 그 두려움은 그들을 몰락시킨다.
영화 <웡카>는 꿈에 대한 동화다. 꿈이라는 걸 생각하면 우리는 설레임을 느낀다. 그리고 어려움이 앞에 닥쳤을 때, 과거의 어떤 순간이나 그리운 누군가를 생각하며 상황을 돌파할 힘을 얻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경쟁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두려움을 맞는다. 꿈을 이루어내는 그 모든 과정이 지나고 나서, 그 꿈이 진짜 이루어졌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든 어쨌든 우리 모두는 그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영화 속 웡카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친구들과 힘을 합쳤던 것처럼 우리도 친구들과 함께 꿈을 향해 나아가라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 모든 감정들과 함께. 무척이나 긍정적인 감정들로 가득한 초콜릿 같은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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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상한 퀴어 로맨스'로 사랑의 조건을 질문하다
7★/10★
1972년 독일 쾰른. 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영화감독 피터가 귀찮은 듯 침대에서 일어난다.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다. 새로운 영화의 제작이 결정되었는데도 그렇다. 곧 그 이유가 밝혀진다. 피터의 영화로 데뷔한 후 지금은 할리우드 스타가 된 친구 시도니와 대화하며, 피터는 얼마 전 동성 애인과 헤어진 후 상실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영화의 예술성에 심취하여 세상의 모든 속물을 비웃는 피터는 자신의 사랑 역시 영화와 같아야 한다고 믿는다. 즉, 피터는 지금 ‘비련의 여주인공’ 상태다.
시도니는 그런 피터에게 호주에서 온 배우 아미르를 소개한다. 노동계급 출신으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잘 풀리지 않는 결혼 생활에서 벗어나 유럽으로 건너온 아미르는 단숨에 피터를 사로잡는다. 복잡한 사연과 그로 인한 깊은 슬픔. 무엇보다 아름다운 육체와 매혹적인 얼굴. 아미르는 피터의 외로움을 달래줄 최적의 인물로 보인다.
피터는 곧바로 작업을 건다. 물론, ‘작업’은 제삼자의 용어다. 피터는 언제나 사랑에 진심이기에 그가 자기감정을 ‘작업’과 같은 경박한 언어로 부를 일은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이 배우 지망생에게 끈적한 눈빛을 보내며 ‘너는 재능이 있어. 내가 꽃피워줄게’라고 말한다면, 이건 사랑이 아닌 거래 제안에 가깝다. 나의 영향력과 너의 매력을 교환하자는 거래 말이다. 하지만 ‘사랑에 진심’인 피터는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자신과 아미르가 그 모든 걸 초월해 진정한 사랑에 다다를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둘은 곧 연인이 된다. 하지만 피터 마음대로 되는 건 여기까지다. 아미르는 영리하고 영악하다. 자신과 피터의 관계가 사랑의 외피를 두른 거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항상 자기 곁에 있어 달라는 피터의 구걸에 가까운 친밀성 요구에 적당히 거리를 두며 늘 피터를 불안하게 한다. 피터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미르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그러나 매번 불평하면서도 아미르를 떠날 수는 없다. 10대 청년마냥 사랑의 열병에 몸과 마음이 잔뜩 달은 피터가 아미르에게 완벽히 종속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피터 본 칸트〉는 사랑에 관한 성찰과 질문을 던진다. 먼저 두 사람이 마주한 조건을 보자.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나이 든 남자와 매력 자본을 지닌 젊은 여자의 이성애 관계는 젠더에 따라 권력이 불균등하게 배분된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의 형태다. 이러한 교환 관계는 공정하지 않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돈과 명예를 얻기가 쉽지만, 여성이 가진 자원(매력 자본)은 그 반대여서다. 교환하는 자원의 불균등한 가치와 지속성으로 인해, 남자는 여자의 매력 자본을 양껏 소진시킨 후 새로운 대상을 물색하러 떠난다. 때문에 사랑의 불안증에 시달리는 건 대개 여성이다.* 더 젊고 예쁜 여성이 나타나 자기 자리를 뺏어버릴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피터 본 칸트〉에서는 반대다. 돈 많고 영향력 있는 피터가 대개 이성애 관계에서 여성의 몫이었던 비련을 떠맡는다. 퀴어적 비틀기로 인해 가능한 일이다. 중년의 배 나온 백인이자 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남자가 상실의 우울감에 젖어 손에 술잔을 들고 슬픈 음악에 맞춰 홀로 느릿느릿 춤을 추는 장면은 압권이다. 피터는 아미르와 자기 사이에 놓인 관계의 조건을 성찰하지 못하고 자기감정을 사랑이라 부른다. 영화는 시종일관 이런 피터의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피터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종종 일깨워줌으로써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풍자의 재미가 생겨난다. 상대를 권력관계에 따른 조건의 교환물로만 ‘소유’하고자 하면서도 이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부르는 무능한 존재/관념에 대한 풍자 말이다. 영원히 사랑과 비련의 주인공으로 남고자 하는 피터는 끝내 자신의 사랑 관념을 성찰하는 데 실패한다. 그리하여 권력관계에 기인한 친밀성 교환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어리석고 딱한 사람의 표상으로 박제된다. 폭주 후 엄마 품에 안겨 자장가를 들으며 잠자는 피터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이는 유아기적 퇴행이다. 우리 중 몇이나 여기서 자유로울까?
친밀성을 물질과 별개인 ‘순수한 것’으로 보는 통념은 경계해야 한다. 현실에서 친밀성이 작동하는 방식은 그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불평등한 자원의 교환을 ‘사랑’이라 부르는 형태 또한 경계해야 마땅하다. 〈피터 본 칸트〉는 평등한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기 위해 젠더/섹슈얼리티를 비튼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물론 예외도 있다. 여성의 매력이 압도적으로 강렬한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남성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사회구조적으로 사랑에서 유리한 위치에 자리하는 것과 달리, 여성은 개인의 매력으로만 이 구도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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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솔한 에세이, 자기 구원의 문을 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더 웨일>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272kg의 거구로 세상을 거부한 채 살아가는 대학 강사 ‘찰리’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느끼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10대 딸 ‘엘리’를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매일 자신을 찾아와 에세이 한 편을 완성하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더 웨일>은 불편한 영화다. 엄청난 거구의 찰리가 포르노를 보며 자위하는 초반부 장면부터 그렇다. 자기 몸을 지탱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높은 칼로리를 자랑하는 음식을 게걸스럽게 입에 밀어넣는 걸 보다보면 팝콘과 콜라를 내려놓고 싶어진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마치 베일을 하나 하나 벗기듯 찰리가 막무가내로 사는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면 그를 지켜보기가 더 어렵다.
그에게는 삶의 의지가 없다. 그는 1주일 안에 죽을 수 있는 걸 알고도 초콜릿과 피자, 치즈를 추가한 미트볼 샌드위치와 탄산 음료를 계속해서 먹는다. 그에게 폭식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는 거식증에 걸렸던 연인을 돕지 못했던 자기 자신을 죽이려 한. 또 이는 동성애자였던 연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세상에 분노하는 마지막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서 깊은 자기 혐오에 빠진 채 자기 방에 틀어박힌 그의 모습은 거북하고, 보기 불편하다.
여기까지만 보면 <더 웨일> 또 한 번 대런 아로노프스키다운 영화처럼 보인다. 그의 영화는 대체로 우울하다. 염세적인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기독교적 가치나 상징을 부정적으로 활용하기로도 유명하다. 평범한 구원이나 행복 대신 인간의 모순과 광기를 보여주는 게 그의 장기이기 때문이다. 성경 속 등장 인물을 인간을 환멸하는 염세주의자로 만들어 버린 영화 <노아>처럼. 얼핏 보기에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더 웨일>은 찰리와 토마스의 만남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자기혐오에 빠진 채 죽어가는 한 남성은 구원 받으려면 신을 믿으라는 전도사의 조언을 가볍게 무시한다.
지옥, 현실을 부정한 대가
하지만 <더 웨일>은 예상했던 전개와 결말을 절묘하게 빗겨 나간다. 영화는 구원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더 웨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확하게 구원의 길이 존재한다고 선언한다. 단지 그 길이 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찰리와 그의 주변 사람은 본인들이 만들어 낸 지옥에 빠져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지옥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들은 현실을 부정한다. 다 각자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 우선 찰리는 자기 존재를 부정한다. 그는 자기가 허락한 몇몇 사람(~~와 토마스)을 제외하면 자기 존재를 숨긴 채 살아간다. 집 밖으로 나서지도 않고 바깥 사람에게 자기 존재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당장 본인은 대학 강사지만, 노트북 카메라를 가린 채 줌으로 강의한다. 매일 저녁 피자를 배달시키지만, 자기 안부를 물으며 걱정해주는 피자 배달부에게 단 한번도 자기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새생명 선교회 소속 전도사 토마스는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말은 처음부터 전부 거짓말이다. 그는 새생명 선교회 소속이 아니다. 한때는 소속 전도사였으나, 거리에서 전단지를 나눠주는 선교 방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다. 믿음이 강해서 찰리에게 전도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생각하는 선교 방식이 전정으로 옳다는 걸 증명하려는 아집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다. 찰리를 간호하는 리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찰리가 곧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찰리가 폭식하는 이유도 알고 있다. 하지만 현실을 알면서도 부정한다. 음식을 한 번만 잘못 삼켜도 심장에 무리가 가는 찰리에게 리즈는 고칼로리 음식을 꾸준히 가져다 준다. 이처럼 영화 속에는 자기가 처한 현실을 부정한 채 살아가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더 나아가 이들은 자기도 믿지 않는 방식으로 남들을 도우려 한다. 찰리는 그의 학생들에게 솔직하게 에세이를 쓰라고 가르친다. 화려한 수식어를 빼고, 그럴듯한 명언도 빼고 오직 자기만의 생각과 느낌을 담아서 글을 쓰라고 한다. 정작 본인은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으면서. 속했던 교회에서 도망쳐 나온 토마스는 성경을 읽고, 신을 믿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찰리를 설득한다. 리즈의 태도도 모순이다. 찰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며 그의 자기 파괴적 행동을 돕다가도, 그가 치료 받지 않고 병원도 가지 않으려 한다며 크게 화낸다. 오랜만에 찰리를 만난 전처 메리도 찰리와 화해하는 듯 하다가 결국 다투고 만다. 자기가 엘리를 잘못 키운 것 같다면서도, 다른 방법은 없다며 찰리의 도움을 무시해버린다. 그 결과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은 다 상처로 가득하다. 스스로도 믿지 않는 구원을 남들에게 강요하고 있으니 진정으로 도움이 될 리가 만무하다.
진솔한 에세이의 힘
하지만 영화는 이들을 지옥 속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 방법이 '진솔함'이다. 본인들이 천국이 아닌 지옥에 있다는 걸, 그리고 그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학생들에게 에세이를 진솔하게 쓰라고 강조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찰리도 내심 고통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엘리의 에세이를 애지중하는 것은 또 하나의 증거다. 그는 아프거나 힘겨울 때마다 소설 <모비 딕>을 비판하는 엘리의 에세이를 소리 내어 읽는다. 그 에세이는 솔직해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사실 <모비 딕>은 읽기 어려운 소설이다. 고래에 대한 설명이 매우 길게 나올 뿐만 아니라 분량도 많다. 또 여러 방면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기는 주제를 다루기에 난해하다. 하지만 <모비 딕>이 형편없다고 비판하기는 어렵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극찬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모비 딕>이 재미없다고 말하는 에세이는 다른 사람의 평가나 관점은 의식하지 않는 매우 솔직한 글이다. 바로 엘리의 에세이가 그렇다.
엘리는 <모비 딕>이 지루하고 어려운 책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대신 자기 경험을 살려 소설을 읽어나간다. 그녀는 소설 속 고래를 찰리에 비유하고, 고래를 죽이고 싶어하는 애이햅의 입장에서 에세이를 써 내려간다. 어린 시절 엄마와 자기를 떠난 찰리에 대한 미움을 고래에 투영한다. 실제로 영화에서 엘리의 첫인상은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찰리에게 상처를 주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보인다. 시를 읽고 감상을 써보라는 이야기에, 엘리는 말도 안 되는 욕을 써놓는다. 찰리가 아빠로서 호소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다가, 그가 모은 전재산 14만 달러를 주겠다고 하자 찰리의 부탁을 들어준다. 찰리의 집에 와서 학교 숙제인 에세이를 쓸 때도 찰리가 추천한 시가 엉망이라고 욕한다. 또 스스로를 혐오하게 된 찰리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고, 심지어 SNS에 올려 그를 조롱한다.
하지만 찰리는 엘리를 다르게 본다. 이미 그녀의 에세이에서 진짜 그녀의 모습을 읽었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만의 주관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엘리를 본다. 또 자기 행동 때문에 딸이 얼마나 상처 입었는지도 안다. 그래서 그는 딸의 독한 말들을 듣고서 화를 내기는 커녕 솔직함을 마음에 들어한다. 계속해서 이상한 사진을 찍는 엘리의 행동을 두고 세상을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사고뭉치 딸 엘리에게서, 찰리는 자신이 강조하던 '솔직함'의 미덕을 본다. 그래서 그것이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엘리에게 알려주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지 못했으므로. 찰리는 앨런과 함께 하기로 결정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솔직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험상 솔직한 것, 자기만의 시선과 관점을 유지하는 게 삶을 살릴 수 있는 길이라는 걸 내심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단순하고 맹목적인 부성애가 아니다.
구원을 향해 내딛는 고통스러운 발걸음
하지만 엘리의 에세이는 찰리에게 위안을 줄지언정 그를 구하지는 못했다. 찰리가 실천에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떳떳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를 실천에 옮기자니 찰리는 용기가 없다. 또 무섭다. 머리로는 알지만, 그런다 한들 자기가 진짜 구원받을 수 있을지 확신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의 나약함은 피자 배달부를 만났을 때 온전히 드러난다. 매일 같이 피자를 가져다 주던 배달부는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 찰리가 궁금한 나머지 호기심에 가는 척하다가 피자를 받으러 나온 찰리를 목격한다. 그는 거구의 찰리를 마주한 후 혐오스러워하며 자리를 뜬다. 이에 찰리는 미친듯이 폭식한다. 배달부의 호기심이, 찰리에겐 크나큰 불행이었고, 그의 자기 혐오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이러한 파괴적인 순간을 거치면서 찰리는 역으로 용기를 얻는다. 의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외부에 공개한 상황이 되었으므로. 솔직해질 수 있는 계기가 원치 않게 생긴 셈이다. 그래서 찰리는 노트북을 켜서 수강생들에게 제발 솔직하게 글을 쓰라며 욕설 섞인 메시지를 보낸다. 마지막 에세이 수업에서는 자신의 메시지대로 진정성 있는 글을 쓴 학생들을 칭찬하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노트북 카메라를 키고, 자기 모습을 공개한다.
마침내, 고래는 구원받았다
그러나 찰리가 자기 모습을 공개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엘리다. 어느 날, 찰리가 잠자는 사이 토마스와 솔직하게 이야기할 시간이 생긴 엘리. 그녀는 자기가 교회 소속 전도사도 아니고 가족과의 불화 때문에 집에서 가출했다고 털어놓은 토마스의 이야기를 몰래 녹음한다. 또 SNS를 뒤진 끝에 그의 가족을 찾아내 연락한다. 그 결과 토마스는 마침내 가족에게 돌아간다.
혹자는 이 장면을 보면서 엘리를 배신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속사정을 어렵게 털어놓은 친구를 신고한 셈이니까. 찰리는 다르다. 엘리의 에세이를 읽어 본 찰리에게 이 사건은 다른 의미다. 자기에게 미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했듯이, 엘리가 토마스에게도 동정심을 솔직하게 표현했다고 이해한다. 또 솔직함이 구원의 열쇠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예상과 달리 가족과 빠르게 화해하고, 가족에게 돌아가게 되어서 행복해하는 토마스를 보면서 더욱 확신한다. 그래서 찰리는 자기혐오의 끝을 찍은 뒤에 엘리에게 에세이를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가 에세이를 읽을 때, 찰리는 마침내 깨달음과 확신을 실천에 옮긴다. 깊은 검은 화면에 스스로를 가뒀던 고래가 드디어 밝은 세상을 마주하고 일어나 걷는다. 그렇게 고래는 자기 혐오를 버리고 구원 받는다.
더 나아가 진솔함이라는 깨달음은 찰리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구원의 문을 열어준다. 자기에게 진솔해진다는 것은 곧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깨닫는다는 의미다. 이는 타인에게 간섭하고, 구속하고, 원하는 바를 강제하는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반부에 리즈는 과거 찰리가 자기 오빠인 앨런을 도와주었듯이, 자기도 찰리를 돕고 싶었다고 말한다. 설령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오빠 대신 애정을 쏟을 사람으로 찰리를 고른 셈이다. 동시에 자기 욕심을 직시하면서 찰리와 화해한다. 그녀는 찰리가 병원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그가 병원비를 낼 수 있는 돈을 엘리에게 주겠다고 결정하자 크게 화를 낸 것이 모두 본인의 욕심과 바람 때문이었다고 인정한다. 이처럼 <더 웨일>은 찰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있던 모든 이들이 문을 열고, 스스로 채운 족쇄를 마침내 풀어버리는 구원의 이야기다.
찰리의 집이 인상적인 이유
물론 <더 웨일>의 이야기는 보편적이다.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인정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는 자아 성찰의 이야기. 이는 누구에게나 익숙할만한 메시지다. 그러나 <더 웨일>의 진가는 메시지에만 있지 않다.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찰리의 집을 활용하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몇몇 대목을 제외하면 모든 장면은 찰리의 집 안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이 집이 매우 좁다보니 찰리의 거구와 대비를 이루면서 유달리 답답하고 음울하다. 덕분에 이 공간에 담긴 여러 의미가 잘 드러난다. 찰리를 감싸고 있는 죽음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이 집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의 트라우마나 상처가 더 강조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고해소 같기도 하다. 자기 밑바닥을 마주하면서 진실을 깨닫는 공간도 되기 때문이다.
촬영 방식 덕분에 공간적 특성은 더 잘 살아난다. 1.33:1의 화면비를 선택한 게 대표적이다. 가로로 좁은 화면비에서 좁은 공간과 거구의 몸은 전체 화면을 거의 다 차지한다. 그 결과 공간의 분위기와 다층적인 의미는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클로즈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협소한 공간을 주된 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영화는 인물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때 클로즈업 컷은 대화의 흐름에 따른 각 인물의 감정선 변화를 보여주기에 적절하다. 인물의 표정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공간 미술, 촬영, 각본에 이르는 모든 영화적 선택을 최선의 결과로 엮어낸다. 찰리는 사실상 영화의 모든 장면에 등장해 혼자 힘으로 감정 굴곡이 심한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인물이다. 브랜든 프레이저는 이러한 캐릭터가 버겁지 않고, 그의 심경 변화가 충분히 이해되는 연기를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동성 성추행 피해, 과도한 스턴트 연기로 인한 혹사, 이혼과 같은 배우 본인의 사연이 더해지면서 더 짙은 호소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크리틱스 초이스와 미국배우조합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고,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유력 남우주연상 후보로 꼽히는 이유를 궁금해 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내 모습을 직시할 때, 비로소 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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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후회, 미련, 아쉬움, 기대, 그리고 헤어질 결심
어느덧 꾸준히 글을 쓰기로 한 지 1년 가까이가 되고 있다. 어찌 보면 영화평론가라면 평론가인 나다(무려 내가 쓴 글로 돈 받아본 적 있음). 사실 이 아이디어를 주위의 그 누구에게도 받지 않았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에 덧붙여서 한 것뿐이다. 그러니까 난 세상이랑 대화하려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이 영화라고 하는 것이라면 꾸준히 뭔가 세상과 대화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그래도 세상 사람들 다수에게 설명할만한 이야기가 어느 정도 있구나!'라는 걸 눈으로 보는 건 참 즐거운 일이었다. 그런데, 가끔 이야기보다 영화가 더 중요한 작품을 몇 번 만난다. 작년엔 <드라이브 마이 카>, <노매드랜드>, <당신얼굴 앞에서>, <소울>이 그랬다. 올해 상반기까지는 <소설가의 영화>나 <우연과 상상>이 그럴 것이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사실 수다 떠는걸 더 좋아하는 쪽에 가까운 나. 장르적으로 엄청난 영화를 보고 느끼는 소름보다 반응이 좋은 것에 행복해지는 나라 가끔은 이게 일 같이 느껴진다. 뭐 실제로 그런 축에 속하기도 하겠지? 회사도 잘되고 나도 잘되면 그게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일일 테니.
그리고 2022년 6월 29일, <헤어질 결심>의 개봉날이 왔다. 어떤 말을 해야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을까? 뭐 영화에 대한 불호 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 강하게 압박하는 듯한 영화였다. 사랑에 대한 섬세한 묘사, 치밀한 감정, 각본의 완성도까지 이 영화는 글로 쓰는 게 두렵다고 느껴질 정도로 걸작 중 걸작이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를 보고 그렇게 느꼈었다. 근데 이 영화는 그 마음이 더 커진 채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래서 글 쓰는 게 무섭다. 내가 다 담아내지 못할까 봐; 또 이 영화를 보고 먼저 생각나는 것은 주위 사람들과 감동을 나눠야 한다는 것이었다. 글 때문이 아니라 영화가 먼저 생각난 셈이다. 2022년 여름, 칸을 경유해 우리나라에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깐느박'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산에서 사람이 죽었다. 이 살인 사건에 형사가 출동했다. 동료이자 부하인 수완과 함께 등장한 해준. 피해자는 등산을 좋아하는 공무원 출신의 아저씨다. 높은 바위에서 몸이 두 번 부딪혀서 사망한 게 사인이었다. 수사를 지속하는 해준과 수완. '굳이 이렇게 해야 할까?'라는 말이 무색하게 해준은 우직한 사람이다. 무얼 하든 책임감이 있는 해준. 경찰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용의자를 하나둘씩 찾아보려 한다. 그런데 막상 용의자라고 할 사람도 한 명 밖에 없었다. 피해자 기도서의 아내였던 서래. 기도서는 서래에게 그렇게 좋은 남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기도서는 자기 물건에 이니셜을 새기곤 했는데, 아내 서래의 몸에도 그 인장을 박아놓았다. 또 가끔 손찌검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게 이유인가? 서래는 남편의 죽음에 단 조금도 개의치 않는 느낌이다. 무덤덤한 서래. 해준은 이상함을 느낀다. 베테랑 형사의 촉이 발휘되는 것 같다. 이상한 게 있어. 용의자 심문을 통해 한 두 마디 나누는 서래와 해준. 해준은 다시 한번 촉이 왔다. 이 여자, 뭔가 있다.
이 '뭔가 있다'라는 촉은 금세 행동으로 이어졌다. 차와 망원경 하나를 가지고 서래를 미행하는 해준. 먼발치의 아파트 밖에서, 그리고 차 안에서 서래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수면장애가 있는 게 도움이 됐나? 밤에 잠들 틈도 없이 서래를 미행하는 해준. 원전에서 일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해준은 미행에 형사 일에 몰입하게 된다. 이 호기심과 관심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스마트워치에 일기처럼 서래의 행보를 저장하는 해준. 근데 서래도 이상하다. 해준이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놔두기 시작한다. 마치, 무언가 결심한 사람처럼. 이 둘의 사랑은 그렇게 물에 잉크가 퍼지듯 서서히 진행됐다. 멈추기엔 너무나도 멀리 온 상황 속에서.
필모그래피가 갖고 있는 장점 그대로
박찬욱 감독이 워낙 유명하신 분이다. 한국영화의 팬이 아니더라도 <올드보이>는 한 번쯤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작품으로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으니 <기생충> 이전에 한국영화는 박찬욱 감독이 어느 정도 이끌었다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왜 인기가 많았나?라고 생각하면, 기억에 남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답하고 싶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초반부 특정 인물의 자해, <올드보이>에서 장도리 액션신, <친절한 금자씨>에서 '너나 잘하세요', <박쥐>에서 '해피 버스데이, 태주 씨'까지 박찬욱은 아름다운 장면을 넣어 관객의 머릿속에 오래오래 남게 하는 것에 특화된 인물이다. 이때 기억에 남게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올드보이>처럼 인물에게 감정 이입시켜 후반부에 폭발하는 에너지도 가능할 것이다. 또 <박쥐>처럼 색감을 잘 활용할 수도 있고 <복수는 나의 것>처럼 무미건조함으로 극을 시종일관 이끌 수도 있다. <친절한 금자 씨>에서 이영애 배우에게 그런 에너지를 만든 것도 감독의 장점을 새기는 훌륭한 디렉팅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장기가 전부 들어갔다. 우선 대사를 잘 썼다. 일단 이 영화를 다양한 매체에서 검색하면 '마침내'라는 단어가 주요 한줄평에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이 '마침내'라는 단어, 처음 서래의 입에서 나올 때 이질감 느껴진다. 금세 <종이의 집 : 공동 경제구역>이 생각난다. 직접적인 대사와 이질감이 드는 대화 톤이 단점으로 발현 안 된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게 나쁜 건 아닌데 아쉬운 감은 있다는 뜻이다. 이 '마침내'라는 단어는 위 드라마와는 다른 방식으로 쓰였다. 영화 이야기 전개는 익숙하면서도 굉장히 색다른 방식이라 '마침내'라는 결론을 내기 충분하다. 어찌 보면 엥? 싶은 대사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 셈이니 정서경-박찬욱 두 사람의 설계가 꼼꼼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엔딩으로 달려가는 힘은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썼지만 '마침내'라는 단어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의 중반부까지는 그렇게까지 이야기 전개가 빠른 편은 아니다. 얼핏 보면 서래와 해준이 알듯, 말듯하게 마음을 꺼내 보이는 장면의 연속이다. 이 두 사람의 미묘하게 꺾이는 감정선의 힘이 영화의 후반부까지 이어지며 잉크가 서서히 퍼지듯 영화에 녹아들게 된다. 뭐 사람에 따라 어떤 영화의 이야기가 빠르다 느리다 주관적으로 갈릴 순 있겠으나, 중후반부까지 달달했던 영화의 이야기가 후반부까지 전력질주로 달리며 강력한 에너지로 치환되는 느낌마저 든다. 이는 <올드보이>에서 하이라이트 신을 위해 오대수의 입장이 변화되는 부분이나 <복수는 나의 것>에서 잔잔하고 심심한 듯 하지만 오히려 이게 관객에게 압박 비슷하게 작용하는 지점이 감독의 특장점이 발휘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박해일-탕웨이 두 배우의 퍼포먼스 역시 탁월했다. 일단 해준 역을 맡은 박해일 배우는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서래가 중국인이고 한국어가 서툴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상대가 말을 이해하기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패널티가 있다. 근데 이건 우리 관객에게도 적용된다. 관객이 보기에도 '이 사람이 정말 서래에게 마음을 열고 있구나'라고 느낄만한 순수한 비주얼이 장점이 되어 극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눈빛 하나, 행동 하나가 정말 사랑에 빠진 인간이라고 보기 충분하다. 극이 진행되면 될수록 이 사람의 입장 헤처 나가기는 점점 난이도가 올라간다. 이를 소화하는 좋은 연기였다. 또 탕웨이 배우의 연기는 전 세계에서 이 사람만 가능한 연기다. 목소리 톤, 어쩔 수 없는 마음을 맞이하는 인간, 역시 로맨스 영화의 여주인공까지 우리가 탕웨이라고 기억하는 이미지에서 한 단계 스탭업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아마 우리나라 영화 팬들에게 탕웨이 배우의 인생작으로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는 연기였다. 이 부분(서래의 캐릭터성)을 설명하는 건 영화에 굉장히 중요해서 직접 보시는 걸 추천한다. 그녀의 입장을 견지한 채로 그에 맞게 영화를 봐도 이 작품은 걸작이다. 아, 두 배우 말고 다른 분들도 연기 잘했다. 특히 김신영 배우 인상깊었다. 취조하는 신 멋있었다. 일단 표정부터 '나 이 영화 피해 안 끼치게 잘해야 함'이 묻어나와서 귀엽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 이 천재는 영화 판에서 자주 쓰여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시 중요한 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수도 없이 봤던 미장센의 힘이다. 초록색, 빨간색, 파란색의 3색이 영화의 중요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있다. 산속에서 낑낑대며 등산하는 장면, 서래의 집 벽지, 해준의 집 벽지, 바다 두 곳, 석류 자르는 모습, 통역 앱 등등 영화 장면 장면마다 장인의 손길이 한 땀 한 땀 들어가 있다. 또 메타포도 적절히 들어간다. 일단 위치에 의한 비유다. 위에 누가 있고, 아래에 누가 있는지를 염두하고 보시면 영화의 감상이 넓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언어에 대한 비유도 상징적이다. 언어가 다르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감독이 뭘 보여주고 싶었을까?를 생각해보시라. 이 아이러니에서 오는 감정이 여러분도 마음속에 깊이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님은 갔지만 난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영화가 탁월한 또 다른 지점은 제목에서 온다. 제목을 잘 짓기도 했지만,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헤어질 결심>이라는 마음 그 자체다. 내가 경험하거나 주변인에게 들었던 사랑 이야기는 참 헷갈린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날 사랑했을까? 아닌가? 그 사람에게 나는 도구였던 걸까? 아니면 잠깐 불탔던 무책임함일까? 이 얄궂은 마음의 엇갈림은 인간에게 오랜 과제처럼 남는다. 정말 사랑했을까?
이 영화는 이 엇갈림을 묘사하는데 탁월한 강점이 있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이거 설명할 수 있을까? 할 수는 있다.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 공통점이라는 것도 지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2022년 6월 29일 18시 10분에 사랑에 빠짐'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공통점이 이거여서 사랑에 빠진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말할 수는 있겠지. 근데 둘의 입장이 정확히 딱 떨어진다는 보장이 없다. 사랑은 이런 것이다. 서로 안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모르는 것. 심지어 첫눈에 반한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공통점을 보고 사랑이 깊어지는 경우가 다수였다. 그 깊어진 사랑을 재확인하는 방법은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거 맞지?' 식의 배타성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근데 무슨 솔로몬도 아니고 그걸 일일이 직접 다 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모호함이 사랑이 주는 낭만과 비극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이 알듯 말듯한 마음의 차이점을 꼼꼼하게 묘사한다. 어떻게? 듬성듬성 설명하는 방식으로. 가타부타 설명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이 설명을 일일이 다하고 서래가 얼마큼 이쁘고 해준이 얼마나 착하고 구구절절이 다 쓰면 재미가 없다. 영화에서 해준-서래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영화에 제시되는 장면이 전부다. 그냥 단지 감정선만 따라가는 형식으로 오히려 영화가 완벽한 설명을 성사시키는 셈이다. 이 '듬성듬성 보여줘서 완벽한 설명이 되는 방법'이 무엇인지, 보지 않은 분들이 극장에서 확인하시면 좀 더 폭넓은 감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마음의 엇갈림'이라는 모티브를 작품이 어떻게 소화하고 있는지는 각자가 보고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다.
찰싹 달라붙는 각본
많은 분들이 이 영화를 보고 미장센의 힘을 강점으로 생각할 것이라고 느꼈다. 실제로도 장면 전환이나 촬영 구도나 우리나라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 함이었다. 그러나 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직도 그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왜 <헤어질 결심>일까. 이 영화는 굉장히 외로운 방식으로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해낸다. 그리고 그 외로운 설명 방법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마침내 행복한" 결론으로 마무리짓는다. 이 아름답고 품격 있는 사랑 이야기는 여러분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난 서래의 사랑에 빠져버렸다. 난 이 영화를 나이가 들어서도 지울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각본이 갖고 있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아카데미에서 볼 수 있기를
이 영화로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한국영화의 팬으로서 경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오래 기다려서 봤다. 솔직히 아쉽다. 감독상도 큰 상인데, 심사위원대상이나 황금종려상까지 받을 만큼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번 아카데미를 기대하고 싶다. 글쓴이는 충분히 국제영화상을 비롯해 작품상이나 감독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 걸작이라고 봤다. 이 영화는 사랑했기 때문에 남겨있던 감정 모든 것을 괄호 치기의 미학으로 설명한다. 이런 사랑영화는 본 적이 없다. 걸작이다. 내가 생각하는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이다. 그리고 이는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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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애나의 ‘외로움’을 가득 담은 영화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사람이 살면서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외로움은 찾아오고 긍정적인 일들이 주변에 많이 일어나도 어느 순간이 되면 갑자기 찾아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그렇게 매달리는 것인지 모른다. 사랑을 주고 또 받을 사람을 찾고, 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결혼이라는 문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서 그 외로움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그 사랑에도 익숙해질 즈음에 그 외로움은 또 찾아온다. 주변 가족이나 친구들과 만나며 그것을 해결하기도 하고, 그저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데 더 집중하면서 그 외로움일 이겨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외로움이라는 것은 그렇게 평생 우리 곁에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방송 프로그램이나 영화 같은 화면을 통해 접하는 연예인들도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낀다. 화면 속 화려함과 팬들의 동경은 그들을 스타로 만들어주지만 개인의 삶 속에서 느끼는 외로움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연예계에서 멀리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화려한 인기 속에 살고 있더라도 외로움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친구가 많아도 외로움은 찾아오고 각자만의 방식으로 달래가야만 한다. 어쩌면 그건 인간으로 태어나 평생 해결해야 할 숙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외로움을 담은 영화
영화 <스펜서>에는 외로움과 고독한 감정이 가득 담겨있는 영화다. 유명을 달리한 다이애나 황태자비(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감정을 담는 영화는 그가 이혼하기 전 왕실에 있던 1990년대 초반 즈음의 크리스마스 3일을 다룬다. 실제 사건을 재구성했다기보다는 다이애나라는 인물의 감정을 압축해서 영상으로 옮겼다는 설명이 더 적합할 것 같다. 처음 별장에 가족들과 일하는 직원들이 모이는 모습을 보여주는 초반에 다이애나는 혼자 오픈 카를 운전하여 별장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보조해주는 운전사도 없이 혼자 운전을 하는데 길을 잃고 제시간에 도착하지도 못하지만 계속 왕실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무척 애쓴다.
다이애나가 도착한 왕실의 별장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생가 근처에 있다. 영화 속 다이애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의 생가에 가려고 하거나 과거 아버지가 농사지었던 땅의 허수아비를 찾아간다. 영화 속 '현재'에 다이애나는 고립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이 있던 ‘과거’의 장소로 회귀하려는 시도를 계속 반복한다. 얼굴엔 외로움이 가득하고 쓸쓸함이 느껴진다. 왕실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은 그는 곧 그 음식을 다 비워낸다. 마치 왕실의 모든 것에 거부감을 느끼듯 속에 들어온 많은 것을 뱉어내려 애쓴다. 그의 주변에 그를 돕기 위해 파견된 도우미들이나 파티를 주관하여 총괄 관리하는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은 계속 그를 파티와 행사에 밀어 넣지만, 다이애나는 그걸 계속 밀어낸다. 그래서 가족 모임으로 다이애나를 끌어들이려는 그들이 영화 속에서 악당처럼 느껴지는 건 영화가 다이애나의 감정을 무척 잘 표현해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다이애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구성원들의 행위는 모두 적대감이 느껴진다.
다이애나가 마음을 열고 있는 왕실 사람은 두 아들과 의상 담당자 매기(셀리 호킨스)뿐이다. 두 아들은 그가 낳은 친족이기 때문에 좀 더 편하게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매기는 일하는 직원일 뿐이다. 그럼에도 매기는 다이애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답답하고 꽉 막힌 왕실 가족의 분위기에서 유일하게 다이애나가 편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인물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생각해 보면, 매기라는 인물은 다이애나를 사랑했던 소수의 주변 인물과 일반 대중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매기의 말처럼 다이애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았다. 그 사실은 실제로 그가 불운한 죽음을 맞이한 이후에 추모의 분위기로 알 수 있다.
다이애나의 자유에 대한 의지
다이애나가 자신의 생가에 어렵게 방문하여 보게 되는 과거의 환영들에서 그는 자유로움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확인한다. 그 환영을 본 후 다시 별장에 돌아와 매기와 만나며 시간을 보내고 두 아들을 시외로 데리고 나가는 장면에서 다이애나의 모습은 숨 막히는 왕실의 압박과 분위기에서 벗어나 조금은 자유로운 얼굴을 보여준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스펜서’라는 결혼 전 자신의 성으로 주문하고, 길거리에서 먹는 모습 두 아들과 다이애나의 뒷모습에는 영화 속 어떤 모습보다 자유롭게 보인다.
영화 <스펜서>에는 다이애나의 고독과 외로움이 가득 담겨있다. 무엇보다 다이애나 역을 맡은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외모부터 실제 다이애나 황태자비와 비슷해 보인다. 거기에 목소리 톤까지 그에 맞추면서 더욱 실제 다이애나가 눈앞에 서있는 듯한 착각을 준다. 그리고 과거 다이애나가 겪었을 감정적 외로움과 고독이 배우의 얼굴로 세세하게 표현한다. 거대한 왠지 위압적인 별장의 모습과 그에 비해 너무나 작아 보이는 다이애나의 모습이 잘 대비된다. 또한 연신 음식을 토해내는 모습은 그가 가진 왕실에 대한 거부감이 그대로 드러난다.
<스펜서>는 실제 사건을 요약하여 제시하는 영화라기보단 그 당시의 인물이 가졌던 감정을 함축적으로 제시하는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영화 <스티브 잡스>를 떠올리게 한다. <스티브 잡스>는 실제 사건을 다룬다기보다 무대 뒤에서 스티브 잡스(마이클 패스벤더)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의 문제점이나 감정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된 영화다. 그러니까 주인공의 감정이나 있었던 일에 대한 반응을 이야기에 함축하고 배우의 표정으로 표현해낸다는 측면에서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연출한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과거에도 퍼스트레이디인 재클린 케네디의 이야기를 다룬 <재키>나 칠레의 민중 영웅 파블로 네루다의 이야기를 다룬 <네루다>를 연출한 경험에 있다. 이번 <스펜서>에서도 실존인물인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가졌던 감정을 두 시간의 영상으로 함축하여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다이애나는 영화가 담긴 시기 이후 이혼을 하고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어쩌면 이혼 후의 시간에서는 영화를 가득 채웠던 외로움과 고독감을 조금은 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늘 억압되고 고독했던 다이애나를 이제 대중들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런 다이애나의 외로움에 담긴 영화 <스펜서>는 정적인 스타일의 영화지만 다이애나의 표정을 통해 보는 사람의 감정을 크게 움직이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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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https://www.youtube.com/watch?v=O2fcOhrE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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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박사의 그늘은 매력적이지만...
누구나 마음속의 그늘이 있다. 그걸 조금씩 드러내 놓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완전히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모든 것을 보이지 않게 감추고 살아도 과거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 그늘의 영향을 시종일관받으면서도 그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쓴다. 평생을 그렇게 벗어나고 극복하려 애쓰는 과정이 이어지면서 한 사람의 성격과 생각을 만든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그 그늘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개인에게는 극복할 목표를 주고, 그것을 극복하려 애쓰면서 좀 더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주인공 천박사(강동원)의 그늘을 다루고 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천박사는 가짜 퇴마사역할을 하는 것처럼 등장한다. 그는 퇴마를 하는 회사를 만들고 민배(이동휘)를 직원으로 고용해 함께 퇴마활동을 한다. 그 퇴마활동에는 여러 첨단 기기들이 동원된다. 즉, 천박사가 하는 퇴마 행위에는 진짜 귀신이 등장하지 않고, 심리학을 전공한 천박사의 심리적인 해결방법으로 의뢰자들을 설득해 나간다.
천박사의 숨겨진 그늘
그저 가볍게 보이는 천박사와 민배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진지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천박사의 모습은 꽤 진지하고 심지어는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의 과거가 이야기되면서 드러나는 천박사 복수는 그가 하루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부터 천박사의 그늘이 완전히 드러난다. 그는 과거에 할아버지와 동생을 잃게 되었고 그 일에 관여된 악당을 찾고 있었다. 그 과정은 꽤 길었다.
영화가 보여주는 천박사의 모습은 과장되어 있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고 괴짜처럼 보이는 그는 무당이었던 할아버지의 기운을 물려받아서인지 후반부로 갈수록 악귀와 대결에 좀 더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천박사의 모습은 과장되어 있지만 그가 가진 내면의 힘과 능력은 어느 정도 이해할만한 범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악귀와 싸우면서 크게 다치지 않고 대등하게 대결을 벌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문제는 천박사가 유경(이솜)의 의뢰를 받은 이후 악귀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아무리 천박사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수십 명이 천박사와 동료를 공격하는데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천박사의 그늘이 공개되면서 천박사의 유머는 힘을 잃고, 옆에 있는 민배만이 망가지며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의 이야기는 후반부로 갈수록 유머도, 액션도 힘이 떨어진다.
천박사가 본인의 그늘을 드러내지 않고 진지하게 악귀의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그가 평생 가지고 있던 목표였고, 그의 슬픔을 해소할 수 있는 복수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점점 사건의 실체에 다가가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도움 없이 악귀 우두머리인 범천(허준호)과 대등하게 대결을 벌인다. 영화에서는 그 대결을 마지막에 넣어 두었지만 천박사의 강력한 힘과 그가 가진 무기의 절대적인 힘이 마지막 두 인물의 싸움을 시시하게 만든다.
천박사를 제외하면 흥미가 떨어지는 이야기와 캐릭터
천박사 역을 맡은 강동원은 과거에 <전우치>나 <군도>에 등장해서 조금은 비현실적인 상황에 맞는 이미지를 보여준 적이 있다. 도술을 쓰는 존재로 등장해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과거의 작품들처럼 이번 <천박사 퇴마 연구소>에서도 가벼우면서도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등장한다. 나머지 등장인물들에 비해 천박사라는 캐릭터는 꽤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천박사는 밝지만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인물로, 이 영화 안에서 가장 복합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천박사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배는 유머 캐릭터로 소비되고 있고, 황사장(김종수)은 천박서의 퇴마활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잔소리 꾼으로 남는다. 의뢰인 유경 역의 이솜은 유일하게 유머가 없는 조용하고 진지한 인물이지만 특별히 매력적인 역할로 등장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영화의 빌런인 범천의 카리스마는 눈에 띄지만 그 카리스마를 더욱 돋보이게 할 다른 빌런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범천을 따르는 부하들은 너무 약하고 그마저도 후반부에는 완전히 모습을 감춰버린다.
영화 <천박사 퇴마 연구소>는 김성식 감독의 연출 데뷔작이다. 과거 <헤어질 결심>,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기생충>의 조감독 출신인 그는 좋은 배우와 깔끔한 화면으로 퇴마활극을 만들었지만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는 않다. 98분이라는 짧은 러닝 타임에도 이 영화는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 강동원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더욱더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영화다. <빙의>라는 원작 웹툰이 있지만 이야기의 전개는 흥미가 떨어진다. 이어지는 웹툰의 후속 시리즈가 있기 때문에 이번 첫 번째 영화가 어느 정도 흥행하느냐에 따라 연작 시리즈가 될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은 과거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천박사라는 캐릭터 자체는 매력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야기가 매끄럽지 않고 주변인물들이 이야기를 맴돌고 있다. 무엇보다 악귀가 등장할 때도 특별한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아 후반부로 갈수로 이야기의 힘이 떨어지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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