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nymoushilarious2024-02-29 22:59:05
동심은 죽지 않는다
웡카
이 영화의 혹평이 있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혹평의 주류는 각자의 동심 속 웡카가 아니라는 지적이었던 듯하다. 그 말도 일리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첫 번째 시리즈를 안 봤던 나에게, 팀버튼이 원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원작을 따라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모티프만 따왔다고 생각하고 별개의 영화로 인식하고 보니 이 영화는 그저 동심을 잃은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1. 팀 버튼의 웡카와는 다르지만 같은 메시지를 가진
웡카의 성격과는 별개로 웡카가 등장하는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있다면 동심이란 건 나이와는 상관없는 클래식이라는 것이다. 웡카가 그로테스크하든 해맑든 그 존재만으로도 동심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이가 가진 꿈은 그 어떤 이유로든 짓밟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달까.
나의 동심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하게 되는 영화였다. 나는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면 안좋았던 기억을 훑고 좋은 기억들을 그 뒤에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왠만하면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려다가도 살다보면 하게 되는 선택에 과거의 기억이 발목을 붙잡을 때가 있다. 한 때 나도 웡카와 같은 하고 싶은대로 사는 존재에 설레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현실을 고려하고 난 뒤에 하고싶은 걸 찾는달까. 무턱대고 꿈꾸기만 하는 시기는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팀 버튼의 웡카를 보든 이 해맑은 버전의 웡카를 보든 나는 여전히 웡카의 자유로움, 신비로움에 설레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심을 꺼내어 좋았던 기억들을 회고하니, 꿈같은 2시간이었다.
2. 현실이 쓰더라도, 초콜릿만 있다면
웡카에 대한 환상은 초콜릿에 대한 진심에서 비롯된다. 힘든 삶을 살아내는 누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웡카는 초콜릿을 권한다. 마치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는 듯이. 나는 초콜릿 하나를 먹어도 어차피 먹을 거면서 칼로리부터 확인하고 먹을만큼 현실 파악부터 하는 편인데, 가끔은 내 기분을 위해 무모하게 살아봐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너무 현실만 바라보면 인생이 재미없으니, 삶이란 현실 60, 꿈 30, 실행력 10으로 꾸려나가면 꿈만 좆느라 다치지도 않고, 현실에 질리지도 않을 것 같다. 다만, 꿈만 꾸지 말고 실행하자. 현실이 힘들다 싶으면 단 거 먹고 힘내자. 내가 느낀 영화의 메시지는 이거였다.
총평
최근 본 영화 중 뻔한 전개였는데 이렇게 힘이 된 적이 없었다. 나에게는 실행력이 조금 부족한데, 그냥 초콜릿을 가득 들고다니며 막막할 때 하나씩 꺼내먹어야겠다. 영화 속에서 초콜릿이 가지는 의미는 곧 꿈과 환상이자 위로를 건네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호텔 잘못골라 세탁소 시궁창에 빠져버린 웡카와 친구들에게도 초콜릿이 절망적인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소재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ost가 잔잔하게 맴돈다. 티모시 샬라메가 폭발적인 가창력을 가지진 않았는데도 노래들이 조용한 임팩트가 있다. 역시 가창력보다 중요한 것은 전달력인 걸까. 전달력과 가창력이 비례하진 않으니 말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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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노웨이 스페셜(2020)> 리뷰
인간은 유사 이래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지만, 누구에게도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공유할 수 없다. 삶에 유통기한이 뚜렷이 새겨지는 순간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두려움과 절망, 그럼에도 남겨질 이들을 떠올리며 점차 무력해지는 몸뚱이를 끝끝내 움직여야만 하는 운명에 대한 비참함과 서글픔. 그리고 그 사이에 스며드는 숭고함 따위를 어찌 감히 일반화할 수 있겠나.
우베르토 파졸리니의 <노웨이 스페셜>은 죽음을 목전에 앞둔 서른네 살 창문 청소부 존(제임스 노튼)과 그의 아들 마이클(다니엘 라몬트)의 일상을 그렸다. 언뜻 보면 의젓한 네 살 아들과 자상한 아버지의 단란한 나날 같지만, 존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점이 부자父子의 삶을 자꾸만 촉박하게 만든다. 특히 창문을 닦는 일조차 점차 버거워지는 존은 아들 마이클이 앞으로 살아가게 될 나날에서 얼룩을 지우는 막중한 일을 진행해야만 한다. 그는 영국의 입양법에 기반한 공공기관을 통해 적당하고 새로운 가정을 소개해주려 애쓰지만 그 일은 존의 예상보다도 힘들기만 하다.
※ 이하 스포일러 주의
영화의 배경이 북아일랜드이며 위에서 말했듯 아버지 존의 직업이 창문 청소부라는 점에서 <노웨어 스페셜>은 소외된 자들을 조명하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존이 공공기관을 통해 입양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작은 갈등들을 겪는 장면이 함께 있어서, 나는 영화를 감상하던 도중 켄 로치를 몇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베르토 파졸리니의 영화는 켄 로치의 것보다는 죽음을 앞둔 젊은 아버지의 심리라는 사적인 영역에 보다 집중한다.
입양 희망자에 대한 면담, 적절성 평가, 사무적인 태도 등이 비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존에겐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 쇼나(에일린 오히긴스)가 있다. 마이클을 입양하고자 하는 이들은 여럿이며 나름대로 (자신들이 믿는)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니, 정부가 개입해 입양 희망자들을 분류하는 것이 아주 그른 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일부 들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존이 마이클의 예비 가족을 만날 때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존의 내면 변화이다. 그는 끊임없이 흔들린다. 입양이 무엇이냐고 묻는 아이에게 대답을 해줘야만 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담는다. 또한 존은 자신에게 묻는다. 내가 아들의 가족을 대신 선택해 줄 만큼, 마이클에 대해 잘 알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존의 모습은 그가 진실로 마이클을 사랑하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에, 그는 끔찍하리만큼 진실된 사랑을 한 이에게만 허락되는, 가슴 아픈 성취를 획득한다. 영화 말미에 이르러 존은 자신에게 닥친 허무를 수용한다. 아이에게 자신을 그저 창문닦이로 소개하면 그만이라고 말하거나, 굳이 뿌리를 알려야 하느냐고 손사래를 쳤던 영화 초반과 달리 존은 미래의 마이클이 열어볼 수 있도록 기억 상자를 마련한다. <노웨어 스페셜>은 전반적으로 톤이 일정하며, 등장인물들이 과할 정도로 오열하는 장면은 없다. 손때가 묻은 물건을 넣고, 우연히 찾은 생모의 사진을 넣는 장면조차 더욱 드라마틱하게 진행할 수 있었음에도 별달리 극적인 효과가 개입되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감정을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던 듯하다. 그저 애달픔만으로 속이 이렇게까지 상할 수 있구나, 싶은 느낌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신문 기사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한다. 존의 직업이 창작에 기반한 것이라면, 나는 영화 제작진이 굉장히 영리했다고 말하고 싶다. 창문을 닦는 행위를 통해 존은 한 걸음 밖에서 타인의 삶을 바라보게 될 뿐만 아니라 유리는 그가 보지 못한 세상의 이면을 비춰줌으로써 , 존이 처한 상황과 자연스러운 접점을 형성한다. 또한 아버지 존의 이름은 너무도 평범한 것으로, 그의 슬픔이 사실 원치 않는 상황에 급작스럽게 떠나게 되는 모든 이들의 상실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남기는 아들 마이클은 미카엘 천사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떠나는 이들에게 당신이 세상에 남기는 희망은 곧 빛이 되지 않겠냐며 위로를 건네는 것처럼 느껴지는 면도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을 꼽자면 작중 네 살 마이클의 캐릭터다. 특별히 조숙하다는 설정을 넣지 않아도 아이들은 어른들의 예상보다 많은 것을 알며 종종 어른보다 현명한 태도를 보인다. 표현은 미숙할지 몰라도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마냥 어리게 볼 수밖에 없고, 걱정스레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의 시선에서 영화가 진행되는 것은 사실이나, 마이클이라는 캐릭터를 지금보다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더라면 더욱 좋지 않았을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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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는 당신을 위해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꿈을 안은 채 대도시 뉴욕에 발을 내딛는 젊은이를 따라가고자 한다. 조안나는 작가의 삶을 간절히 원하지만,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무시할 수 없기에, 되는대로 글과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직장에 취업한다. 언뜻 보면 최적의 조건처럼 보인다. 작가 에이전시는 작가들과 교류를 맺을 수도 있고, 출판업에 관해서도 배울 수 있으며, 글쟁이들이 모인 업계 상황을 파악하기도 좋아서, 작가 지망생에겐 분명 좋은 자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다. 조안나에게 닥쳐오는 위기들, 그녀의 심리를 뒤흔드는 순간들은 모두 이 일자리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전통 있는 뉴욕의 한 작가 에이전시에서 대표의 조수직으로 취업하게 된 조안나에게 대표 마가렛은 당신이 작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고용했다고 말한다. 우리 회사에서 일하려면 작가는 안된다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 회사에선 조안나가 작가로 등단하고 싶은 열망을 숨길 수밖에 없다.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어쩌면 가깝지만 멀리 있는 것들에 관한 딜레마를 다루기도 한다. 조안나는 근무처에서 J.D. 샐린저(『호밀밭의 파수꾼』(1951) 저자) 관련 업무를 맡게 되는 사람인데도 정작 그 작가의 소설을 단 한 편도 읽어보지 않았다. 심지어 샐린저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이며, 조안나 또한 문학 전반에 관심이 많은 작가 지망생이라, 역시 소설가를 지망하는 남자친구 돈은 이런 조안나를 보면서 신기해한다. 조안나는 샐린저와 통화까지 했는데도 정작 그녀가 그의 글과 조우하는 순간은 한참 뒤에서야 성사된다. 어떻게 보면 조안나가 몸담은 회사도 그렇다. 작가의 집필과 출판 업무 전반을 지원하는 에이전시라는 이유로 글과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정작 이 회사의 사람들은 아무도 ‘글’을 쓰지 않는다. 그래서 조안나가 할 수 있는 건, 정해진 양식에 따라 타자기로 찍어낸 ‘답장용 편지’를 공장처럼 찍어내는 일이다. 글을 쓰는 작가들을 관리하면서도 한편으론 결코 글과는 가깝지 않은 회사에서, 조안나가 혼란과 괴리감을 맛보게 되는 건 어쩌면 운명이 아니었을까.
따라서 조안나는 이 회사에서 그간 가깝게 느껴왔던 것들이 부쩍 멀어졌다는 생각에 자꾸만 사로잡힌다. 원래 글이라는 건, 자신의 내면과 헐벗은 채 마주하는 일이 아니었나. 그런데 조안나가 쓰게 되는 답장용 편지에는 그녀가 시를 쓰고 글을 적어오면서 추구해오던 것들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 진심이 사라진, 가식과 위선만이 남은 이 자리에 영혼 없이 말라가는 잉크 자국들이 진솔한 감정을 표출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셈이다. 하지만 조안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한다. 일을 그만두면 생활을 영위할 수 없으며 작가로 등단하기 위한 집필 활동 또한 이어갈 수 없다. 그런데 그녀가 아무리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이 회사에선 손에 붙잡을 수 있던 것들이 멀어져만 가는 것 같다. 따라서 중대한 결심처럼 보이는 조안나의 선택이 비록 극적인 갈등 서사 구조로 쌓아 올린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조안나에게 있어서 더없이 중요한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사실만큼은 자명하지 않을까.
<마이 뉴욕 다이어리>는 꿈을 좇는 고단한 청춘들을 보듬어 주려는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다. 오히려 아주 명확한 의도를 내비치며 관객에게 스며들고자 한다. 특히나 이 영화는 저마다의 이유로 소리 없이 잊혀간 세상 속 수많은 문학인의 마음을 스크린을 통해서 위로해주려고 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컴퓨터를 멀리하고 타자기를 고집하는 마가렛 역시, 글을 쓰려는 조안나를 고단하게 하는 포지션에 있는 인물이긴 해도 문학의 가치를 사랑하고 글을 아끼는 사람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래서 이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경시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에 관해 한 번쯤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란다. 종이와 펜을 꺼내서 손맛 가득한 글을 써보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다. 이토록 스산한 겨울에,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따스한 영화가 찾아왔다.
본 콘텐츠는 '씨네랩'으로부터 초청 받은 '영화 <마이 뉴욕 다이어리> 시사회'를 통해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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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엄마는 엄마가 아니잖아
벌써 20년이 넘도록 은퇴를 번복하는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아마 그의 최고 문제작이 될 듯하다. 난해하다는 평가부터, 최고라는 극찬까지 사람들의 해석도 제각각이다. 심지어는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도 시사회에서 "나도 무슨 얘긴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언급을 했다. 그만큼 이 애니메이션은 작가주의적 성향이 짙다. 하지만 이 애니메이션은 숨겨진 뜻을 해석하려 들지 않고 그가 그동안 만들어왔던 애니메이션처럼 동화를 보는 기분으로 따라가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세계물일 뿐이다. 그래도 역시, 이야기는 통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싶어 지는 것들 투성이다. 특히 가장 중심인물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다양한 해석이 있지만, 이 이야기는 스튜디오지브리, 나아가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상징하는 이야기들로 꽉 차있고 그 안에서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유산에 대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 시절
미야자키 하야오는 여장부였지만 결핵으로 평생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어머니와, 군수공장으로 비행기를 만들었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그의 대부분 애니메이션에는 그래서 마더 콤플렉스, 강인한 여성상, 20세기 초 전투기에 대한 로망 등이 가득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주인공 마히토는 엄마가 있던 병원이 불타 엄마가 돌아가시고, 도쿄대공습을 피해 시골 공장 근처로 이사 간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곳에서 몇 년을 보내는 도중, 집 근처 신비한 탑과 집 근처에 사는 왜가리에 대한 이야기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도 그렇게 도쿄대공습을 피해 공장 근처 시골집으로 이사 가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웃집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시골집으로 가서 이상한 세계로 가는 이야기가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첨언하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실제 어머니는 병원이 불타 일찍 돌아가시진 않았고 오래 사셨다.
군수공장으로 비행기를 만드는 아버지가 그대로 나오고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마을의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 애니메이션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최대한 전쟁에 대한 언급이나 일본의 피해를 강조하진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자해를 했는데도 다른 아이들이 그랬을 거라 철석같이 믿는 아빠가 일본 정부를 대변하는 듯하다. 아버지가 자랑스럽게 가져와 집안에 늘어놓는 비행기의 유리덮개들은 줄지어있는 유리관 같은 모습이다. 이렇듯 자국민들도 죽음으로 내몬 전쟁의 실체를 은근하게 비판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실제로 종종 일본의 제국주의가 타국에 남긴 상처를 비판했고, 군수공장을 운영하던 아버지를 전쟁부역자라 부르며 싸우기도 했다.
스승과 친구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시대적 상황이 상황인지라 드러나는 정도일 뿐이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다. 그의 일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두 사람,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승이었던 타카하타 이사오와 지브리 스튜디오의 프로듀서이자 대표이사인 스즈키 토시오에 대한 이야기다. 스즈키 토시오가 개봉 전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애니메이션 속에 등장하는 왜가리는 스즈키 토시오 본인이다. 자신과 했던 대화들이 그대로 애니메이션에 녹아있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즈키 토시오는 애증의 관계다. 애니메이션 잡지 <아니메쥬>의 기자였던 스즈키 토시오가 미야자키 하야오 특집기사를 내려고 찾아갔을 때, 미야자키 하야오가 무시하며 문전박대한 일은 유명하다. 마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끈질기게 마히토를 찾아오는 왜가리와 흡사하다. 왜가리가 이상한 유언비어를 떠들고 다녀서 죽이고 싶어 하는 것도 비슷하다. 스즈키 토시오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이 만든 <게드전기> 홍보를 할 때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이야기'로 홍보해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분노한 적이 있다. 여러 루머와 안 좋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스즈키 토시오가 지브리 초창기 작품들을 히트시킨 프로듀서임에는 분명하므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생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그걸 알고 애니메이션 속 마히토와 왜가리의 관계를 살펴보면, '자기 길을 가려는 감독'과, '감독을 속이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하고 이용해먹기도 하는 프로듀서'의 밀당이 느껴진다.
또 애니메이션 속 큰할아버지는 타카하타 이사오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토에이 동화'입사 선배로, 애니메이션에서 영화적인 내러티브와 훌륭한 미장센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이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한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으로는 <반딧불이의 묘>,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추억은 방울방울>, <이웃집 야마다 군>, <가구야 공주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내러티브가 잘 잡힌 미야자키 하야오의 20세기 작품들은 전부 타카하타 이사오가 조언을 하거나 참여한 작품이다. 그만큼 그는 애니메이션의 이야기와 구성 미장센 등의 균형을 잘 맞추는 사람이었다. 그는 <원령공주>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 이후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이 오로지 자기 멋대로 내달리는 작가주의적 작품이 되는 건 그래서다. 이것을 알고 애니메이션 속 큰할아버지의 대사나 행동을 잘 살펴보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를 얼마나 존경했었고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타카하타 이사오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제작 도중 사망했다.
인터뷰에는 나오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탑 안의 세상에서 만나게 되는 키리코는 그의 그림스승이었던 천재 작화감독 오오츠카 야스오일 것 같다.(지브리의 채색 담당인 야스다 미치요라는 이야기도 있다) 키리코는 불꽃이 나오는 막대기로 선을 그리며, 그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준다. 오오츠카 야스오도 단순한 그림 스승이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험난한 애니메이터 인생을 이끌어준 선배이기도 하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애니메이션이란 무엇인가
숲으로 들어가 사라진 마히토의 새엄마 나츠코를 찾기 위해, 마히토는 탑으로 들어간다. 불에 타 죽은 마히토의 엄마가 살아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왜가리를 따라서. 그 탑은 원래 우주에서 떨어진 물건으로, 아주 이상한 것이라고 한다. 큰 할아버지는 그 밖에다 건물을 만든 것이라고. 탑의 속 안으로 빨려 들어간 마히토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기이한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젊은 시절의 엄마와 하녀 키리코도 만난다. 탑 속의 세상 역시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이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스즈키 토시오와 타카하타 이사오의 인연을 담고 있는 만큼 이 세계가 <애니메이션의 세계> 그 자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처음 도착했을 때 마주하는 황금문에는 '나를 배운 자는 죽는다'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거대한 무덤이 있다. 애니메이션 업계는 상업미술 업계 중에서도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같은 사람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려야 하는 일, 움직임을 물리적으로 이해하고 관객에게 이해시키도록 변형해서 멋있게 만드는 일, 내 그림이 아닌 그림을 수천 장씩 그려야 하는 고통, 그것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중노동이다. 심지어 박봉. 나 역시 디자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일하므로 그 고통을 어느 정도는 안다.
내가 대학생 때, 같이 날밤새며 과제를 해 추레한 모습으로 과실을 나서는데 원서를 내러 오는 학생들이 보였다. 난 친구들과 이렇게 소리쳤다. "여긴 지옥이야! 도망가려면 지금이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나오는 황금문의 문구는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어리둥절하는 마히토는 펠리컨들에게 떠밀려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다. 가지고 온 유일한 무기인 활은 다 망가져버렸다. 그래, 그렇게 멋모르고 이 업계에 들어오게 되는 거야. 게다가 그 망가진 활처럼, 네가 기존에 배운 건 다 쓸모없거든. 다시 배워. 애니메이션을 배운다고? 넌 이제 죽었다.
젊은 키리코는 '와라와라'라고 하는 생명을 돌보고 있다. 이 세계에서 그가 하는 일은 무덤을 지키는 것과, 와라와라에게 먹을 것을 팔아 그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을 돕는 일이다. 애니메이션은 그런 일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생명을 주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일. 반복된 그림 몇 장을 그렸을 뿐인데, 그 그림은 살아서 움직이고 뛰어다닌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스승인 오오츠카 야스오도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진수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은 생명을 창조하는 것만큼 숭고한 일이다. 비록 그 일을 배운 너는 죽겠지만. 응.
그러나 이 세계에도 위험한 존재가 있다. 펠리컨들과 앵무새들이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를 먹어치우는데 몰두한다. 펠리컨은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생명인 와라와라를 먹어치운다. 앵무새들은 뜨거운 숨을 훅훅거리며 사람을 잡아먹는다. 펠리컨은 갈라파고스화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상징한다. 후대 양성의 실패, 보수적인 정치환경, 국내 내수만으로도 돌아가는 경제, 오타쿠 문화의 확산 등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침체되게 만들었다. 와라와라처럼 생명력 있는 애니가 태어나는 것을 갉아먹는다. 80~90년대만 해도 정말 독창적이고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을 많이 만들었지만, 지금은 예전 황금기 같은 애니메이션이 거의 없다. 또한 제살을 깎아먹는 업계는 스튜디오 지브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수많은 재능 있는 애니메이터를 키워냈지만, 정작 모회사나 제작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만 감독으로 원하기 때문에 제자들이 감독으로 데뷔할 기회를 주지 못했다. 결국 스튜디오 지브리는 늙고 죽어가고 있다.
앵무새는 남의 말을 따라 하는 존재다. 큰 덩치에 식욕에 침잠되어 훅훅거리는 모양새. 앵무새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토록 혐오하던 오타쿠들과 흡사하다. 앵무새들은 '애니메이션을 배운자'즉 애니메이터들을 먹이로 삼는다. 그들의 삶을 갈아 만든 모에화, 먹잇감에만 관심이 있다. 작업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업계가 똑같은 성적 모에화 대상물만 만들게 한다. 그리고 오타쿠는 대체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남이 만든 것에 열광하고 남이 만든 걸 보고 만드는 2차 창작(팬픽)에 열광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오타쿠를 치가 떨리도록 싫어했다.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유산
하지만 이런 위태위태한 세상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균형을 맞추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큰 할아버지, 타카하타 이사오다. 돌들을 깎아 만든 블럭을 아주 세밀하게 쌓아 만든 균형. 타카하타 이사오의 애니메이션은 그런 느낌이다.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그 블럭을 물려주고, 이 세계, 애니메이션의 균형을 지키게 하고 싶다.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멘토로 참여했던 작품들은 망상이나 상상보다는 현실적인 내러티브로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달한다. 하지만 잉꼬대왕, 오타쿠들의 대왕은 성격이 급해서 그 유산이 전달되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결국 블럭을 쪼개버리고, 큰할아버지가 유지하던 세상은 무너져버린다.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못한 유산은 사라져 버린다. 스튜디오 지브리도 결국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가 물려받지 못해, 지난 9월 닛폰 테레비로 경영권이 넘어갔다.
사람들은 타카하타 이사오에게 미야자키 하야오가 많은 것을 배웠다고 이야기하지만, 둘은 연출방향 자체가 다르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참여하지 않은 후기작들이 급격히 망상적인 작가주의적 애니메이션으로 가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도 타카하타 이사오가 물려주려고 한 것들을 다 물려받지 못했다고 여기는 듯하다. 큰 할아버지가 물려주려고 한 블럭들 중, 그 난리통에 한 개만 겨우 가지고 나왔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지브리 스튜디오, 미야자키 하야오도 이전 세대의 유산을 모두 물려받지 못한 불완전한 세계였던 셈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자신의 친구와 스승들이 죽어가고 자신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마땅한 자신의 후계자가 없는 일본 애니메이션과 스튜디오 지브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자신의 블럭을 펠리컨과 앵무새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지켜줄 수 있을 것인가. 팬들은 또 다음 세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럼,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느꼈던 생명과 감동을 느껴야 할까. 이것에 대한 답은 바로 새엄마 나츠코와의 일화가 말해준다. 마히토는 엄마가 죽고, 엄마의 동생이라고는 하지만 새엄마로 들어온 나츠코와 데면데면하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새엄마를 엄마로 인정하고 엄마라고 부르는 일은 쉽지 않다. 마히토가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나츠코는 이미 아버지의 아이,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있다. 나츠코가 숲 속 탑 안으로 들어가 산실에 들어가 힘들어하고 있는 장면은, 아직 관객들에게 '진정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근래의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들에 대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인 미야자키 고로가 만든 첫 작품 <게드전기>는 엄청난 혹평속에 팬들은 그 작품을 인정조차 하기 싫어한다. 게다가 최근 고로의 작품은 3D 애니메이션이었다. 수작업 애니메이션을 선호하는 지브리 스튜디오에선 정말 파격적인 행보인 셈이다.
위에서 말한 애니메이션 업계의 펠리컨들, 여러 사정으로 결국 스튜디오 지브리의 후계자가 될만한 인물은 아버지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한 미야자키 고로밖에 없게 되었다. 타카하타 이사오가 사망한 지금 앞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마저 사망하게 된다면,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름으로 나올 애니메이션은 미야자키 고로가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행보를 보니 3D 쪽으로 가게 될 것 같다. 그것을 지브리의 팬들이 받아줄 것인가? 고로의 애니메이션을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이라 인정할 것인가? 엄마가 죽어서 갑작스레 새엄마가 된 나츠코에게 엄마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죽은 엄마를 살릴 수는 없다. 죽음은 죽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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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새엄마를 받아들여 달라고 말하고 있다. 고로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사랑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나 '흉내 내는'것을 싫어하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성격을 존중한다면 더욱 그렇다. 거기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신도 역시 이전 세대의 유산을 다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온전하게 애니메이션 세상을 지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노라고 고백한다. 좋든 싫든, 미야자키 하야오는 떠나게 될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없는 세상, 그대들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자, 그대들이여.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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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 나오는 리뷰들을 보니, 충격적 이게도 이 작품이 일본 제국주의 미화로 알려지는 것 같다. 일단, 지브리의 타카하타 이사오는 일본 공산당 출신으로 제국주의 비판하는데 앞장서는 인물이다. <반딧불의의 묘>도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내용을 보면 일본의 제국이 '자국민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비판하는 이야기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당지에 만화를 연재한 경력이나 노조위원장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일본의 좌파는 자국의 제국주의를 비판한다. 지브리의 두 거장이 그런 성향이니 지브리 전체는 사실 말할 것도 없다. 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역시 도쿄대공습이 나오지만, 사람들이 비참하게 죽거나 무서운 모습보다는 병원이 불타는 모습이 보일 뿐이고, 도쿄대공습이라는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전쟁에 대한 피해나 반성등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이 애니메이션은 그냥 반전영화가 되어버리므로, 그걸 최대한 피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어린 시절에 집중한 것이다. 다음 장면은 그것을 더 잘 드러낸다.
마히토가 이사 간 시골 학교의 아이들과 다투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기가 죽을뻔했다는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돌로 자기를 쳐서 자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는 아이들이 한 게 아니라 넘어져서 그랬다고 하지만, 군수공장을 하던 아버지는 아이들이 그랬을 거라며 범인을 찾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이 장면은, 도쿄대공습이나 원폭이 일본의 자해와도 같은 원죄이며 제국이 그것을 남탓하고 있고, 사실을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변명하지 않는 일본국민을 비유하는 장면이다. 마히토는 아니라곤 하지만 거기서 더 강하게 변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에 마히토는 상처를 스스로 냈다고 큰할아버지에게 고백한다.
이런 지브리가 제국주의 미화라니, 그건 좀 억측이라 생각한다. 전작 <바람이 분다>도 일본 내부에 있는 개인의 이야기를 다룬 것에 전쟁미화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오히려 전쟁을 비판하면서도 전쟁무기 광인 자신을 비판한 내용이다.
진짜 제국주의 미화는 일본 제국의 '대동아공영'을 은근하게 깔고 있는 <크리에이터>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슈도 안되었던 점이 사실 더 의아하다.
*키리코 캐릭터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오오츠카 야스오이길 바랬으나, 이전 스즈키 토시오의 언급에 의하면 지브리 채색 담당이었던 야스다 미치오일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전우'라고 부르기도 했던 야스다 미치오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부터 <바람이 분다>까지 거의 모든 지브리의 작품에 채색을 담당해왔었다. 사실 오오츠카 야스오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림 스승으로 아주 가까운 사이는 맞으나, 지브리가 만들어질 때 합류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같이 일하면 몸이 너무 힘들어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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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인터뷰] 노래는 한밤의 불빛처럼 달려, <마이 웨이> 티에리 테스톤 감독 인터뷰
‘한국인이 사랑하는 팝송’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My Way)’가 클로드 프랑수아라는 프랑스 가수의 ‘습관처럼(Comme d’habitude)’라는 샹송이었다는 사실은 알음알음 알려져 있다. 그러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자신감을 투영해 ‘마이 웨이’를 불렀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노래 한 곡의 여정을 따라간 동명의 이 영화는 단순히 노래를 넘어 더 넓은 의미와 시대를 우리에게 전해왔다. 리자 아주엘로스 감독과 공동 연출하여, 이 풍성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 티에리 테스톤 감독을 만나 보았다.
<마이 웨이>가 이번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아시아 최초로 상영되는데요. 지금 기분이 어떠신지요?
한국에 꼭 와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이번에 처음 오게 되었어요. 그것도 영화를 소개하러 온 자리라니 너무 감동적이고,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더욱 기쁜 기회 같습니다.
어떻게 이 영화를 작업하게 되셨는지 들려주세요.
프로듀서가 <마이 웨이> 노래 이야기를 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사실 저는 이 노래를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 노래에 관한 이야기에 끌렸습니다. 특히나 흥미로운 지점은, 누가 리메이크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노래가 된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프랭크 시나트라가 불렀을 때에는 백인 남성이 은퇴를 고민하는 순간의 매력적이고 감상적인 노랫말인데, 니나 시몬이 부르면 70년대 미국에서 흑인 여성 아티스트로서 그가 해온 투쟁이 가사에서 느껴집니다. 심지어 음악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이나 블라디미르 푸틴의 정적이 장례식 때 이 곡을 연주해 달라고 요청한 것처럼 이 노래는 사회 곳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누구의 소유도 되지 않고, 리메이크될 때마다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노래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저는 마치 노래가 사람인 것처럼, 이 영화를 <마이 웨이>라는 노래의 전기 영화로 만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내레이션은 노래의 시점에서 쓴 것입니다. 노래가 화자 역할을 하는 거죠.
노래의 관점에서 쓴 내레이션을 미국 배우 제인 폰다가 맡았습니다. 어떻게 제인 폰다를 캐스팅하게 되셨는지, 캐스팅 과정의 에피소드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제인 폰다의 인생 또한 사회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로서의 측면이 강하죠. 제인 폰다의 목소리가 실리면서 이 영화에 페미니즘적 가치가 부여되었습니다. 사실 이 노래는 그동안 남성 위주 리메이크 역사를 갖고 있었거든요. 스트롱맨으로 평가받는 정치인들이 즐겨 부른 곡으로 유명해지기도 했고요. 이 작품을 통해 여성 특히 제인 폰다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되살려냄으로써, 이 노래의 소유를 뒤집는 의미가 있습니다.
노래 역할로 어떤 목소리가 어울릴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어요. 프랑스어 버전에서는 노래 역할을 맡은 배우가 일찍 정해져 그 목소리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영어 버전에서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미국 쪽 제작자가 전화를 해서, “지금 우리 사무실 옆방에 제인 폰다가 와 있는데, 제인 폰다는 내레이터로 어떨 것 같냐”고 물어 왔습니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제안을 듣는 순간 너무나 완벽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작자가 단박에 옆 사무실로 가서 제인 폰다에게 부탁을 했죠. 제인 폰다는 전설적인 대배우지만 마음이 매우 열려 있는 사람입니다. 즉각 승낙을 받고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어 다음 월요일에 바로 녹음을 했습니다. 6-7시간씩 녹음하는 강행군이었는데, 힘들다는 기색 하나도 없이 말끔하게 진행해 주었습니다. 제인 폰다라는 대배우와 함께할 수 있어 무척 행복한 기억입니다.
영화 속에 <마이 웨이>에 관한 이야기가 정말 많이 담겼는데요. 최근 프랑스 올림픽 폐막식에서도 이 노래가 불렸고,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상영작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에서도 이 노래가 주요 소재로 등장합니다. 혹시 이 영화에 실리지 않은 이야기 중, 편집 과정에 담지 못했지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저희가 찾아보니 녹음된 앨범으로 남아있는 <마이 웨이>만 4,500개 버전이 있었습니다. 그것만 170시간 정도의 분량이 되더라고요. 전 세계의 영상인데 저작권 문제도 있고 여러 이유로 사용이 어려운 것도 있었어요. 그리고 똑 같은 노래를 여러 언어 버전으로 이어 붙이면 관객 입장에서는 같은 노래를 너무 많이 듣게 되다 보니 그 중 일부를 골라내야 했습니다. 또 이 영화의 다른 편집 버전도 준비하고 있는데, 거기 들어갈 이야기들도 흥미롭지만 아직 말씀드리기 어렵겠네요. 그리고 올림픽 폐막식에 이 노래가 불린 일은 저희 영화 소개를 앞두고 너무 좋은 타이밍이라 꼭 선물처럼 느껴졌어요. 파리 올림픽이 끝나고 다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으로 넘어가는 상황이니, 실제로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넘어간 이 노래만큼 적합한 선택이 없었죠. 사실 옛날 노래다 보니 1년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가 되겠어?”라고 묻는 사람이 많았는데, 올림픽 덕분에 화제성을 얻게 된 거죠.
이 영화에는 굉장히 많은 아티스트가 등장하고, 부르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노래가 되는 것 같아요. 감독님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시는 건 어떤 버전인가요?
프랭크 시나트라 버전을 제일 좋아해요. 시나트라가 이 노래를 선택한 당시 그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마피아에 연루되었다는 루머가 들끓고, 비틀즈나 롤링 스톤즈가 등장하면서 프랭크 시나트라 같은 가수들의 노래는 한물 간 장르 취급을 받았죠. 결정적으로 배우 아바 가드너와의 사랑이 끝나 깊은 슬픔과 실패감에 빠집니다. 사실 이 영화를 만든 이유 중에서는 아바 가드너의 이야기를 꼭 담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어요. 프랭크 시나트라와 아바 가드너의 사랑 이야기가 제 마음에 그만큼 오래 남았습니다. 물론 니나 시몬, 섹스 피스톨즈처럼 전형적이지 않은 느낌으로 부르는 것도 좋고, 이 영화에 나온 벤 하퍼(Ben Harper)와 클라라 루시아니(Clara Luciani)의 노래도 제 눈앞에서 펼쳐져 유난히 좋았습니다. 결국 다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벤 하퍼와 클라라 루시아니 두 아티스트가 <마이 웨이>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요.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영화에서 다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매우 아름답고 흡입력 있었습니다. 수많은 뮤지션 중 이 두 사람을 선택한 이유가 있으실까요?
클라라 루시아니는 프랑스에서 지금 가장 인기 있는 아티스트입니다. 그런데 11살에 이미 키가 176cm까지 자라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해, 슬프고 우울한 청소년기를 보냈다고 합니다. 지금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모습과 힘들었던 성장기를 생각할 때, 그가 <마이 웨이>를 부르는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죠. 치열하게 싸워 왔고 지금은 충분히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클라라의 삶 자체가 노래와 많이 닮았습니다.
벤 하퍼는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프랭크 시나트라의 열성 팬입니다. 모르는 노래가 없고, 시나트라와 똑 같은 반지를 끼고 다니기도 해요. <마이 웨이>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는 소문을 듣고 저희한테 연락을 먼저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본인의 의지로 참여하게 된 경우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마이 웨이>라는 노래에 대해 또 하나의 기억을 가져가실 관객 분들을 위해 한 말씀 남겨 주세요.
2년 반 전에 이 영화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 노래 얘기를 지금 하는 게 맞아?” 하는 우려의 시선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미 사라지기 시작한 노래를 되살려내려 애쓴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죠. 다시 말해 젊은 사람들이 더 이상 듣지 않는 옛날 노래가 되어 간다는 거겠죠. 사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프랭크 시나트라도 잘 모르죠. 프랭크 시나트라를 비롯한 훌륭한 아티스트에 대해서도 보여주고, 이 노래와, 이 노래가 담긴 한 세대의 문화를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시고 나면, <마이 웨이> 노래를 검색해 보시고, 전세계에서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악기를 가지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노래할 만큼 많이 공유된 음악이라는 걸 함께 알아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노래 한 곡의 풍성한 이야기를 들으며 시작한 자리였는데, 한 세대의 문화가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까지 받았다. 페퍼톤스의 노래 가사처럼 “노래는 한밤의 불빛처럼 달려” 또 여기에 이른다. “수많은 날들이 흘러도 잊을 수가 없던 뒷모습” 같은 <마이 웨이>를, “서툰 첫 인사로 다시 만나기를 또 빛나기를 눈부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들어 본다. 이 마음이야말로 음악의 힘, 영화의 힘일 것이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정유선
사진: 하이스트레인저 김소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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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 명언이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라는 사실 혹시 알고 계셨나요? 사람들에게 '희극인' 그 자체로 알려진 찰리 채플린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는데요. 영국 출생의 배우이자, 코미디언, 영화 감독. 20세기 대중 문화의 판도를 바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찰리 채플린'은 그 자체가 아이콘이자 '영화'인 인물입니다. 캐릭터 자체가 센세이션이었던 그는, 그를 모델로 한 각종 상품이 출시된 것은 물론이고, '찰리 채플린 흉내 대회'까지 열리기도 했다는데요. 그 대회에서 본인이 1등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웃픈 사실도 있습니다.
10살이던 1898년, 아동 극단에 입단하며 처음 '연기'에 입문한 그는 1903년, 연극 <셜록 홈즈>에 출연한 이후, 희극단에 들어가 커리어를 쌓아 나갑니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남다른 덕분일까요? 채플린 경은 몸개그 전문 제작사 '키스턴 영화사'와 전속 계약을 맺으며 꿈의 무대 '할리우드'로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채플린 경의 '떠돌이' (The tramp) 캐릭터가 탄생하게 됩니다. 지나치게 헐렁한 바지, 그와 대조되는 지나치게 작은 자켓, 지팡이, 중절모, 그리고 콧수염까지. 현재 우리가 '찰리 채플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이렇게나 일찍 탄생하였습니다.
재능이 철철 넘쳐 흘렀던 그는, 배우로서 키스턴 사 감독들의 역량에 불만을 품기 시작하고, 결국 직접 감독이 되어 영화를 찍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탄생한 영화가 <사랑의 20분> (Twenty Minutes of Love, 1914) 인데요. 항상 아이디어가 넘쳤던 그는 거의 일주일에 한 편 꼴로 작품을 찍어내기 시작했고, 이 경험은 이후 그가 만들어낸 대작들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차츰 차츰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기 시작하고, 동시에 할리우드 내에서 명성을 쌓아가던 그는 마침내 1919년, 최초의 극영화라 불리는 <국가의 탄생>을 찍은 '데이비드 그리피스' 감독과 독립 영화사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설립하게 됩니다. 제작사의 간섭에서 벗어난 그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벗어나 많은 시도를 하기에 이르지만 이는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그는 코미디언으로 복귀하여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 <황금광 시대> (The Gold Rush, 1925)를 찍게 됩니다. 뒤이어, <서커스> (The Circus, 1928), <시티 라이트> (City Lights, 1931), <모던 타임> (Modern Times, 1936) 까지 영화사에 길이 남을 걸작들을 찍은 그는,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한 그의 작품 세계를 구성해 나가죠.
하지만,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 (The Jazz Singer, 1927)가 탄생한 후 할리우드는 '토키' 영화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이 흐름을 거부하고 그만의 작품 세계를 통해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을 보여주던 찰리 채플린은 1940년,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 1940)로 그의 첫 유성영화이자 최고의 흥행작을 만들며 '정점'을 찍게 됩니다.
이럿듯,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채플린 경에 대한 전기 영화는 너무 당연하게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그대로 딴 전기 영화 <채플린> (Chaplin, 1992)에서 '찰리 채플린' 역을 맡은 배우는 바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입니다.
정말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의 평생은 그 자체가 영화였고, 채플린이라는 인물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캐릭터처럼 느껴지기도 하죠. 영화 한 편에 1,000억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시대가 된 이후, '코미디'라는 장르 자체는 하락세를 걷기 시작하였는데요. 그럼에도 '코믹'은 영화에서 절대 사라지지 않을 요소이자, 현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습니다.
'과거'를 기억해야만 하는 오늘,
비극 같았던 현실을 희극으로 만든 '찰리 채플린' 영화 한 편 어떨까요?
저작권이 만료되어 유튜브에서도 무료로 감상 가능한 찰리 채플린 영화와 함께
오늘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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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지성에 돌 던지기
추락의 해부보다도 해부되는 것들의 추락. 이 법정 가족 스릴러 드라마 안의 모두가 진실이 무엇인가를 두고 싸우지만 역설적으로 극 밖의 관객은 ‘무엇이’ ‘왜’ 진실인지가 전혀 중요치 않으며 ‘그 중 어떤 것이' '어떻게’ 발화되는가가 훨씬 중요하며 흥미롭다는 것을 빠르게 깨닫게 된다.
거의 모든 씬이 긴장감과 흡인력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극 중 가장 흥미를 끈 것은 남편 사뮈엘이 자신의 가사노동 기여도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잘 나가는 작가이자 실질적 가장인 부인 산드라 대신 가사와 육아에 더 집중하길 선택했던 사뮈엘은 몰래 녹취한 부부 싸움에서도, 아들 다니엘의 마지막 증언 속에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희생’을 말하고 있다. 그는 ‘늘 남들을 먼저 챙겨야 해서‘ 힘들었다고, 파트너를 위해 일상 리듬, 시간, 언어까지 모두 맞춰주며 살았다고 절규한다. 사뮈엘은 심지어 시각장애인 다니엘에게 없어선 안 될 안내견 스눕에 자신을 투사한다.
그런데 이 기이한 플래시백에 다니엘의 음성을 빌어 입혀진 사뮈엘의 서사를 접한 관객은 희한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평생 독박 육아와 독박 가에 시달리던 부인들이 분노에 차 내지를 법한 진술 아닌가.
사뮈엘의 잘 계산된 분노는 같은 노역을 부인들 중 상당수가 여전히 당당하게 발화하지 못하는 와중 취해진 전략이기에 더욱 씁쓸하다. 아직 초등교육을 받는 아이가 있는 가정에서 혼자 쉬는 시간을 가져본지 너무 오래됐으니 무려 1년의 안식년을 달라고 주장하는 여성 가정주부의 사례는 분명 흔치 않다. 여자들이 평생 군말 없이 자신을 희생해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를 홀로 키웠으므로 사뮈엘 역시 군말 없이 복종해 억울함을 마냥 삼키라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법정에서 실질적 경제활동을 도맡았던 산드라를 두고도 ‘남편이 위층에서 힘들게 일을 하는데’ 아래층에서 팬과 놀아났다든가 ‘남편의 고통을 무시했다’든가 기를 세워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검사 측 증인들의 성차별적 진술을 연이어 듣다 보면, 그들이 공교롭게도 전원 남성이었음을 생각해 보면 사뮈엘의 언어와 여성들의 언어가 각기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곱씹게 된다. 산드라처럼 성공한 작가는 끝내 되지 못했어도 제1세계 지식인인 사뮈엘이 과연 그 여자들과 자신의 차이를 몰랐을까.
'남성' 주부로서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는 걸 잘 아는 사뮈엘은 고분고분한 가정의 천사 따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자기 삶을 재구성해 저항적 서사의 질료 삼아 투사로 거듭난다. 그리고 사뮈엘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는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와 구조적 경력단절의 부당함을 인정받기 위해 몇 백 년간 투쟁한 여성들의 지적 노고를 너무나 쉽게 전유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의 권리 투쟁의 언어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전파되기 마련이다. 피해자 정체화에 유용한 담론은 누구나 탐내기 때문이다. 정확한 타겟을 위해 고안되었던 언어가 대중적으로 남용되고 결국 최초의 본질과 다른 방향성을 띠게 되는 탈취의 과정을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산드라 역시 전형적인 ‘남편’의 언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부부 싸움 당시 산드라는 ”왜 이렇게 흥분했냐“고, ”사소한 데 집착하지 말자”고, “나도 고생하고 있다”고 사뮈엘을 달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를 책망하는 말을 건넴으로써 그의 화를 점점 더 돋운다. 산드라가 이기적이고 자기 시간만 중한 줄 안다고 말하는 사뮈엘의 규명은 분명 일리가 있다. 첫 장면부터 그는 질문이 많다며 불안해하는 학생 조에에게 ”아, 괜찮아, 시간은 아주 넘치도록 많아“라고 답하지 않는가.
그는 시종일관 여유 있는 승자의 자세를 취하고 때론 이기적인 가부장 특유의 나르시시즘을 재현한다. (이 오롯이 자신만의 편안함을 위해 기울어진 자세를 지켜보는 스눕이 물고 있는 공은 어느 층에서 누가 떨어뜨린 것일까. 혹시 그때 누가 그의 그 대답을 들었을까.) 그는 자신의 지위와 매력 자본을 십분 활용해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대화를 자기 입맛대로 끌어가며 이를 지켜보는 관객에게 미묘한 불편함을 선사한다. 그는 복종이나 저항보다 우아한 군림이 선천적으로 어울리는 타입, <타르>의 리디아 타르를 떠올리게 하는 영리하고 냉정하고 자기애로 충만한 여성이다.
자, 어차피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저울에 두 사람이 올랐다. 가사와 육아 때문에 저술 작업에 집중할 수 없다며 자신의 취약함을 이미 드러내버린 사람과, “내 걱정 마. 난 어떻게든 써.”라고 얄밉게도 틀린 말 없는 선고를 내려버린 사람. 산드라가 말한 것 중 가장 날카로웠던 진실, 그래서 사뮈엘이 가장 인정할 수 없었던 진실은 아마 “당신은 스스로 선택한 삶을 두고 날 원망하는 거야. 혼자 덫을 놓은 거야”보다도 “(가사노동의 배분에) 완벽한 균형은 없다고 봐. 순진하고 딱한 발상이지.”였을 것이다. 한 가정이란 무대가 이갈리아처럼 충분히 전복되기엔 너무나 작은 섬이었던 것이 비극이라면 비극이다. 이 싸움에서 누가 패자인지는 명백하다. 이때 패자에게 중요한 건 ‘왜’ 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느냐다. 녹취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긴 사뮈엘은 최대한 지저분하게 부인을 옭아매기를 선택한 듯하다.
남편의 죽음을 두고 검사는 살인을, 변호사는 자살을 주장하는 꼭두각시 극에서 주연이 된 부인은 또 한 번 남편보다 한 수 위인 역량과 그릇을 입증한다. 결론적으로 변호사 뱅상에 의해 저지당하기는 하나, 죽은 남편을 불안정한 환자로 초장부터 몰아가는 쉬운 길을 피해 오히려 ’지저분한 이야기는 빼자‘며 파트너의 품위도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로 지켜주고 싶어하는 그의 선택은 감탄을 자아낸다. 그 선택에는 배려와 도덕성뿐만 아니라 온전한 진실에 대한 본능적 지향이, 또 그 모든 걸 가능케 하는 고도의 지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산드라는 자기주장을 입증하기 어려운 논쟁이 자기 파괴로 귀결되더라도 그 논쟁 자체를 피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히려 그런 류의 복잡성을 추구하고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 그리고 비범한 작가인 그의 재능은 남편이 말하지 않고 어쩌면 그 스스로도 몰랐던 무의식 너머의 욕망과 좌절, 왜곡된 인식과 뒤틀린 감정들을 정확히 간파하고 만다. ‘큰 상황의 아주 일부’만 보고 두 개인 사이 축적된 역사의 전부를 짐작하지 말라는 산드라의 논리정연한 호소는 검사를 비롯한 청중의 적의를 잠시라도 멈춰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아주 일부’는 결국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적이고 강인하고 야망 있는 여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가. 부부간 원망은 덜하고 동등한 수준에서의 지적 교류는 더 활발했던 시절, 사뮈엘의 허락 하에 그의 개요를 가져다 소설로 발전시킨 산드라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사뮈엘이 제기한 표절 시비에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게 됐다. 양성애자로서 언제든 남성을 거부하고 남성 없는 삶을 꾸릴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산드라는 남편과 그의 정신과 상담의, 검사와 수사팀장을 위시한 남성들에게 위협적이고 미스테리한 존재가 된다.
농담이 아니라 산드라가 ‘웃지 않는’ 즉 전형적으로 독일적인 여성이라는 점부터가 그의 - 프랑스 법정에서의 - 이질적 존재감을 한 번 더 강조하는 알레고리나 마찬가지다. 그는 여러모로 남성-내국인-지식인들과 다르며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드문 이방인 여성이므로. "여성이 지능과 야망, 정신적 강인함 때문에 어떻게 공격당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의 의도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산드라가 얻은 것이 오로지 고독뿐이라는 결말의 암시를 통해 슬프게 빛을 발한다.
열악하고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산드라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생각해낸 설을 밀어붙여야 하는 처지로 몰아붙여진다. 산드라에게 아직 미묘한 애정을 품고 있는 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 변호사 뱅상은 그를 믿는다고 공언한 유일한 어른이지만 애석하게도 ‘판단하는 게 느껴진다’는 이유로 정작 산드라의 믿음을 획득하지 못한다. 뱅상은 법정에서 단 한 번 사실을 넘어선 추정을 ‘실수로’ 흘리는데 이때 그는 자기 피고인의 욕망(진실에 최대한 가까이 접근한다) 또는 자신의 직업인으로서의 의무(피고인의 결백을 입증한다)보다도 인간 뱅상으로서의 욕망(산드라를 보호한다)에 잠깐 휩쓸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산드라를 지키기 위해 사뮈엘을 비난하고 찢어발긴 후, 사뮈엘이었던 것을 다시 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재조립해 사뮈엘의 형상을 띈 것으로 창조한 직후. 지금까지의 변호 중 가장 감정적으로 설득적이었던 반론을 펼친 그가 마주한 것은 산드라의 화난 얼굴과 단호한 거부 제스처다. 말했듯 산드라는 악의나 계략에 맞서는 것보다 진실을 최대한 손상 없이 전달하는 데에 가치를 두는 이이기 때문이다.
그가 산드라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둘의 얼굴이 한 숏에 잡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 역시 산드라라는 독특한 인물의 불가피한 고립을, 단독자로서의 운명을 예고하는 듯하다. 산장 부엌에서 이뤄진 뱅상-산드라 간의 첫 진술 장면, 바로 직전까지 아주 가까이 앉은 둘을 한 번에 잡는 바스트 숏이 수 차례 등장했는데도 산드라가 진술하고 뱅상이 질문하기 시작하자 각 인물의 음성이 전개될 때마다 얼굴을 정면으로 비출 뿐이다. 함께 있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카메라의 빠르고 단호한 시점 전환 때문에 관객은 거의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단절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는 후일 법정에서 증인석에 선 채로 검사와 변호사 측 증인들의 말을 번갈아 듣고 혼란스러워하는 다니엘을 트래킹 패닝 숏으로 잡은 것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이 대칭이 상징하는 바는 명확하다. 산드라를 두고 다니엘은 흔들리나 이어지고 뱅상은 확고하나 불통한다. 뱅상은 설원에서 취한 채 함께 담배를 피우고 텐션 가득한 농담을 할 때도 산드라를 마주 보고 있으나 카메라는 다정히 이어지는 시선 대신 각자의 후면 혹은 측을 보여줄 뿐이다. 아들의 축객령으로 우는 산드라를 뱅상이 태워 어두운 산길을 내려가는 씬에서도 그는 거의 음성으로만 등장하고 화면은 산드라의 표정에 집중한다.
법정에서의 지난한 싸움이 다 끝나고 승리감에 도취해 단둘이 남겨지자 또 한 번 숨 막히는 텐션이 오르지만, 뱅상은 반쯤만 기대 오는 산드라를 딱 그 반만큼만 안아줄 수 있으며 관객 역시 그이들을 ’창 밖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한 사람은 또다시 등만 보이는 채로. 우리에게 온전한 관람이 허락되는 교감은 뱅상과 산드라의 포옹이 아니라 귀가한 산드라와 다니엘의 한밤 침실에서의 보다 완전한 포옹이다.
산드라의 이해자는 변호인단이나 조에 같은 팬들이 아니라 극 중 유일한 미성년인 다니엘이다. 엄마의 언어와 아빠의 언어가 다르고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중간 지점을 택한 부모 사이에서 가엾은 소년 역시 ‘남은 한쪽이라도’ 살리기 위한 선택을 한다. 다니엘은 사고 이후 고도 근시를 가진 소년으로 다시 태어난 존재, 그렇기에 무지와 단차와 오해를 필연적으로 달고 다니는 존재다. 극 중 산드라의 진술보다 다니엘의 진술이 먼저 의심받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법정에 선 산드라가 문득 다니엘의 시점에서 관찰되듯 그려지는 구도 역시 우연이 아니다. 흐릿한 실루엣을 집요히 좇는 그는 엄마의 진술을 듣고 가장 효과적이고 힘 있는 이야기를 생각해낸다.
완성형 작가 그리고 이제 막 자기 이야기를 처음 써낸, 작가의 운명을 타고난 아들. 그들의 ‘생각해냄’이 recall인지 invent인지 우리는 영원히 추측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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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농구의 질감을 가지고 돌아온 슬램덩크
?Rabbitgumi 입니다!
만화 슬램덩크의 극장판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개봉했습니다.
송태섭의 서사를 중심으로 북산과 산왕의 전국대회 경기를 보여주고 있죠.
산왕과의 경기가 무척 흥미롭게 전개되는 영화인데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저의 간단한 리뷰를 영상에서 말씀드릴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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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싱타는 여자들 리뷰 - 열둘, 열세 살 여공들의 울분에 대하여
*해당 영상은 씨네 랩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며 2022년 1월 개봉예정인 작품 [미싱타는 여자들]의 시사회를 다녀온 뒤 제작한 영상입니다. 1970년대 평화시장에는 가난해서 혹은 여자라서 공부 대신 미싱을 타며 `시다` 또는 `공순이`로 불린 소녀들이 있었다 저마다 가슴에 부푼 꿈을 품고 향했던 노동교실 그곳에서 소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노래를 하고, 희망을 키웠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청춘이 오늘의 청춘에게 보내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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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클라이밍> 런칭 예고편
“너는 나고, 나는 너야”
세 달 전 교통사고를 겪은 세현은 세계 클라이밍 대회를 앞두고
회복되지 않는 컨디션과 경쟁에 대한 압박으로 악몽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사고 당시 고장 났던 세현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온다.
다름 아닌, 바로 '나'로부터.
연락을 주고받을수록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는 두 사람.
급기야 세현은 또 다른 세현의 임신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이후 악몽처럼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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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조명가게> 티저 예고편
어두운 골목 끝 가장 밝은 곳 밤이 되면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와 어딘가 이상한, 낯선 사람들... [무빙] 강풀 원작 + 각본 12월 4일 [조명가게] 디즈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