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2-15 17:00:06
한국영화 르네상스 영화7선
2003년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라고도 하죠?
봉준호, 박찬욱, 김지운 감독등 신감독들의 등장과 활약으로
영화의 꽃을 피우던 시기. 한국영화는 2003년도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반향이 일어났던 해입니다.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시대 영화 7선을 소개합니다
https://www.instagram.com/reel/C03cAIzOBF5/?utm_source=ig_web_copy_link&igshid=MzRlODBiNWFlZA==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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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tcha Exclusive] 리틀 드러머 걸 : 감독판 - 관객들도 속이려는 야심찬 작품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 감독판>의 포스터
2016년에 국내에 개봉한 <아가씨>는 4,288,750명을 동원하는 등 흥행을 비롯하여 해외에서도 꽤나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미술상"은 유력한 후보였으며, "외국어 영화상"도 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는 않을까 예측들도 오갔습니다.
하지만 정작, 후보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는데 놀라운 것은 국내보다는 해외 팬들이 이에 대해서 크게 반발했다는 것이죠. (물론, 시카고와 LA 비평가에서 "외국어 영화상", 영국에서도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어찌 보면, 정점을 찍은 그의 다음 작품이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다음 작품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였습니다.
그것도 "존 르 카레"의 원작을 가지고 왔으니 이들의 협업에 궁금했습니다.
총성과 화려한 모습과 다르게, "존 르 카레"의 작품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으로 알 수 있듯이 고요하니까요.
'과연, 어떤 작품이었는지?' -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장면
본작품은 갑작스러운 폭탄 테러로 아이를 잃은 피해자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는 남자는 자신을 "마티"로 소개하며, 이번 일이 일어난 경위부터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다음으로 이 일에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쫓아다녔던 그가 있음을 알게 된 "마티"는 팀원들을 꾸리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 일에 참여하는 "찰리"만큼은 다릅니다.
그녀는 정보국에 일하는 요원도 아닌 일반인으로 "배우"로 이번 일에 참여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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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르 카레"를 잘 보시나요?
1. 심리를 잘 읽어야만 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리틀 드러머 걸>은 "존 르 카레"의 원작으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이미, 그의 이름만으로도 이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본 관람을 택하거나 포기할 텐데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모스트 원티드 맨>만 보더라도 그의 작품은 <007>의 "제임스 본드"와는 거리가 먼 작품입니다.
화려한 액션은 둘째치고, 예쁜 여성들과의 접점은 없고, "파티션"으로 내 책상을 구분하여 종이만 붙잡는 것이 그의 영화입니다.
이에 익숙지 않는 분들은 <리틀 드러머 걸>은 업무의 연장선상으로 느껴지실 겁니다.
그렇기에 <리틀 드러머 걸>은 도대체, 어떤 재미를 보는 건지 혼동도 오실 텐데 그만큼 이 작품에 특화된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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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 굴러가는 소리 다 들린다.
바로, 심리에 대한 부분입니다.
해당 작품은 각 캐릭터들을 얼굴들을 "클로즈업"을 하여 감정을 보다 많이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춥니다.
"정보"의 격차로 이를 보는 시청자들의 재미도 격차가 있듯이 이런 장르는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어내느냐에 흥미도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리틀 드러머 걸>은 각 캐릭터들의 심리를 반영한듯한 색깔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빨강"이 돌고 있는 피를 뜻하는 것처럼 활기를 띠는 감정을 의미한다면 "초록"은 썩어버린 물처럼 멈춰진 감정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주황과 노랑은 "신호등"에서 빨강과 초록 사이에 있는 것처럼 "중립"에 서있는 "찰리"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이처럼 각 주인공들이 어떤 색의 옷을 입었는지를 살펴보면, 이들의 심리를 읽어내는데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장면
2. 작품의 벽을 깨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본 작품은 가장 중요한 사실은 마지막 화에서 보여줍니다.
해당 작품을 살펴보면, 쓰이는 갈등이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분쟁임을 넌지시 밝혀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궁금증이 생깁니다. - "왜, 작품은 처음부터 이를 정확하게 소개해 주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이런 이유에는 관객들의 편향된 해석을 방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를 소개한다면, 작품 외적의 정보로 해당 작품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달리 왜곡되거나 해석되니 변질될 테니까요.
그러니 해당 작품은 과감한 생략을 하여 극의 신비함까지 챙기는 똑똑한 전개를 보여주기까지 하는데 성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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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해석도 좋지만, 과대 해석은 안돼!
무엇보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찰리"는 이를 보는 시청자들과 동일하게 가져오는데요.
극에서 해당 배역에 충실하려는 인물인데, 이는 이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과 크게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이를 겪어가면서 "왜, 싸우는가?"에 대한 동기와 이유를 알면서 점차, 감정에 노출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이를 통해서, 관객들도 "찰리"에 점점 이입되어 이야기에 몰입되고 작품 외적의 정보는 전혀 개입되지 않으니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라고 한들 쉽게 느껴질 겁니다.
이는 이 작품이 가면 갈수록 몸이 풀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의 장면
3. 알고서 입장에 서실래요?
그런 점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신념도 없이 역할에만 충실했다"라는 말은 "찰리"뿐만 아니라 "찰리"에 빙의된 시청자들에게 비수로 꽂히고 맙니다.
이런 이유에는 최근 특정 누군가를 비난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최근 출소한 "조두순"만 보더라도, 알 수 있을 겁니다.
조두순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거나 그를 보호하는 경찰이나 이를 재판한 당시 판사, 그리고 그 일대를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에게 피해가 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시도로 뒤따라오는 무수한 펭귄들처럼 이에 편승하여 너도 나도 이를 따라 하는 요즘의 트렌드를 역사적 갈등으로 빗대어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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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도 너도?
재밌는 것은 해당 작품은 지난 5화 동안 단, 한 번의 총성도 들려주지 않다가 마지막 6화 그것도 마지막 부분에 다다라서야 총소리를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하나둘씩 쓰러지는 캐릭터들 사이로 "누가 옳고 그른지?"에 대한 기준을 더 잡지를 못하게 만듭니다.
<리틀 드러머 걸>의 목적은 단순히, "테러리스트"를 잡아 "선과 악"을 가려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이들이 어떤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인데 그 누구도 이번 일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원인이 있어서 오늘날의 결과가 있는 것인데, 애써 외면하려는 그 시작에는 무엇이 있는 건지 작품 외적으로 궁금해지네요.
* 본 콘텐츠는 블로거 파천황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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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장편경쟁’ 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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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언젠가부터 소년들의 서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 영화를 기획했다고 한다. 소년들이 마주한 세계는 해결의 실마리가 없는, 폭력에 갇힌 사회다. 영구치 이후에 새로운 이는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호는 어떤 어른으로 성장했을까. 자신을 괴롭히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풀어낼 수 없는, 감당하기 힘든 폭력의 문제를 내면에 품고 성장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에서.
아마 글로리아/Àma Gloria
마리 아마추켈리 감독/France/2023/83min
개막작
특유의 섬세함으로 아이의 성장과 동시대 돌봄 회로의 역학을 함께 고민케 한다
클레오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준 글로리아를 엄마처럼 따른다. 글로리아도 그런 클레오를 무척 아낀다. 그런데 글로리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이 온다. 글로리아의 어머니는 글로리아를 대신해 그녀의 자식을 돌봐주고 있던 터였다. 이제 글로리아는 자기 자식을 돌보러 고향으로 가야만 한다. 글로리아가 떠난 후 내내 그녀를 보고 싶어 하던 클레오는 방학을 맞아 글로리아가 사는 곳으로 향한다. 글로리아는 클레오를 반가이 맞는다. 그러나 글로리아의 아들인 세자르는 클레오가 반갑지 않다. 오히려 애정 어린 말과 몸짓을 주고받는 글로리아와 클레오를 보며 소외감을 느낀다. 정작 친자인 자신은 받아본 적이 없는 엄마의 돌봄이 다른 아이에게 향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한 세자르의 기분이 좋지 않은 건 당연하다. 그러던 와중 글로리아에게 손녀가 생긴다. 이번엔 클레오가 소외감을 느낄 차례다. 글로리아의 관심을 앗아간 아기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것. 그리고 글로리아와 클레오는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며 더욱 다정하고 끈끈해진다.
이 영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돌봄 회로를 비틀어 의미를 생산한다. 부국/부자 지역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사람은 자신이 일할 동안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고, 빈국/빈곤 지역에서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자녀를 양육할 돈이 필요하다. 경제력이 뒷받침되는 사람들은 이들을 고용해 돌봄 공백을 매우고, 빈국/빈곤 지역의 여성들은 아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을 정서적으로 방치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을 견뎌야만 한다. 정작 자기 노동의 종착지였던 아이들이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이처럼 삭막한 돌봄 회로에서 소중한 친밀성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클레오와 글로리아가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듯이, 세자르가 클레오를 조금씩 수용해 가듯이, 클레오가 글로리아의 손녀를 향한 질투를 걷어내고 성숙해지듯이. 〈아미 글로리아〉는 특유의 섬세함으로 아이의 성장과 동시대 돌봄 회로의 역학을 함께 고민케 하는 수작이다.
플래닛 B/Planet B
피터르 반 에크 감독/Belgium, Netherlands/2023/74min
‘지‧평‧선(지구의 평화를 지키는 선)’ 세션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과 급박한 문제의식
열세 살 친구인 보와 루카. 이들은 기후 위기 활동가다. 플라스틱 공장이 들어설 숲을 점거하고,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촉구하며 거리의 차를 멈춰 세우며, 동료 활동가들과 치열한 논의를 전개하기도 한다. 2022년의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상영작 〈애니멀〉을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서구에는 기후 위기 문제에 천착하는 청소년 활동가가 참 많다. 다른 사회 운동에 비해 유독 그런 듯하다.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과 급박한 문제의식이 기후 위기에 대항하는 정치와 행동을 벼려내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하는 것일 테다. 머리로는 이해한다면서도 일상의 변화에는 지극히 보수적인 어른들보다 청소년 활동가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단 생각이다. 기후 위기 시대에 태어난 그들의 행동과 생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며 변화를 요구할지 기대하게 된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제11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는 9월 13일부터 9월 20일까지 진행됩니다. 영화 상영 시간표와 상영작 정보는 아래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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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다시 돌아올 그대라는 걸 알기에'
오늘은 공부하기가 싫었다. 외우던 단어책을 덮었다. 배고프다. 라면 끓일까? 아냐. 라면은 안 먹어도 될거같아. 그저께 <레 미제라블>을 봤었다. 오늘은 약속이 없다. 막학기를 맞은 대학생이란 이렇게나 심심하다. 올 봄 샀던 옷들을 입고 나가볼까. 여행을 못간다는건 이렇게 갑갑하다. 아예 그 맛을 안들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야.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과 함께 신발을 신었다. 뭘 할지도 생각 안했다. 그냥 무턱대고 앉아있는거다. 이번달 통신사 무료 영화표가 있었다. 이번달에 보려고 계획했던 작품이 하나 더 있었다. 메가박스엔 상영관이 없다. 롯데시네마는 그냥 안간다. 딱 안성맞춤이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내 계획이 순조롭게 지나갔다.
저벅저벅. 버스에서 내렸다. CGV가 있는 시청에 멍하니 서있었다. 돌아다니고 싶었다. 아무 약속도 없는 날이었다. 자주 가던 꽈배기집이 있었다. 저기 1000원치고 맛있었어. 주위를 둘러봤다. 다들 삼삼오오 누구와 함께 가고 있었다. 누구는 연인이었고 누구는 친구들과 함께 있었다. 익숙한 장소가 몇개 보였다. 아. 여기서 누가 알바했었는데. 누구는 또 무슨 일을 했었는데. 오랜만에 오는 시청이었다. 가까이 가기 싫은 곳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많은 것들이 변했다. 영원한 건 없었다. 나도 변했고 세상도 많이 자랐다. 여기 근처 살던 형은 잘 사려나. 있을 때 잘할 걸 그랬나봐. 또 어떤 술집을 지나갔다. 친해지고 싶어 다가가는 걸 잘 못하는 나는 불필요한 오해도 만들어봤었다. 또 다른 누군가가 생각났다. 세상에게 하고 싶었던, 속에 있는 말이 많았는데 말이지. 상영시간이 되자 다시 CGV로 돌아갔다. 영화가 시작 할 시간이었다.
<노매드랜드>는 돌아다니는 사람에 관한 영화다. 클로이 자오 감독은 초반 도입부부터 아마존에서 근무하는 여자 주인공의 삶을 전면으로 내세운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을까. 고장나기 5분전인 밴에서 숙식을 해결한다. 화장실은 차 안에 있는 페트병으로 해결한다. 하루 벌어서 하루 끼니 해결한다. 이렇게 고정적인 집이 없는 탓에 주위 사람들의 걱정도 많이 산다. 어떻게 사냐는 말에 어찌저찌 산다고 대답할 뿐인다. 사실 주인공 펀은 말이 좋아 유랑하는 사람이지 홈리스에 가깝다. 자그마한 밴에서 자다가 부지 관리인에게 들켜 쫓겨나기도 하는게 부지기수다. 펀은 어렸을때 부터 이런 삶을 살았을까? 아니다. 펀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일하던 공장이 문을 닫자 떠돌이 생활을 시작했다. 이런 펀을 기다리는 공동체가 있었다. 같은 노매드들이었다. 영화는 이 공동체가 어떻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갈등이나 화합의 장면이 없다. 그냥 단순히 보여줄 뿐이다. 설명해주지 않는다. 관객이 함께 같이 사는 것 같은 경험을 안겨준다.
난 이 영화의 이런 연출지점이 참 좋았다. 펀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는 연출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장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보자. 영화는 펀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공이 세상과 아예 멀어진 사람은 아니다. 그녀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나오기는 하지만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안좋은 일이 일어나느냐? 아니다. 좋은 일도 없지만 부정적인 사건이 영화에 나타나진 않는다. 펀과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영화는 이런 평탄한 각본을 통해 '어떻게 살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꼭 좋은 일이나 나쁜일만 일어나야 삶인건 아니다. 감독은 연출을 통해 이런 메세지를 보내고 싶었던 것 같고, 나는 그렇게 이해해서 이 영화가 좋았다. 동정심을 갖지 않는 화법은 이런 이점만 갖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영화는 다른 특이점을 갖는다.
어울려 산다는 것. 영화는 삶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 지점에 관해 이야기한다. 다들 그렇겠지만 주변사람들과 허구한 날 싸우면서 살진 않는다. 우리 삶의 대부분은 좋은 사람들과 항상 무언가를 공유하며 산다. 이 영화처럼 말이다. 영화 안에선 별의 별 사람과 이에 알맞은 일상들을 보여준다. 먼저 떠난 아들을 기리기도 하고, 그릇을 깨먹기도 하고 또 신나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한다. 이런 삶을 보여주다 마지막 클라이맥스 한 부분에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부분을 제외하곤 영화는 우리 일상에 있을 법한 소소한 일상을 보여준다. 난 감독이 이 연출지점을 통해 관객의 공감을 얻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영화에 극적인 사건이 있다면 그 사건과 비슷한 일이 있던 사람이 공감할거다. 그런데 에피소드를 통해 이해를 돕는것이 아닌 일상을 보여주는 화법을 썼다. 이렇게 같이 소소한 일상을 보여준다는건 '그래. 나도 저렇게 좋은 주위사람들이 있었지'같은 동질감을 느끼게 하기 위함일거라고 생각한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만약 없다면 이 사람은 미래에 무슨 사건을 겪어 사연이 생길 예정일테지.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상처를 감당하고 이겨낸 후의 입장일거다. 영화는 이렇게 각자가 갖고 있는 삶의 공통점을 영리하게 활용한다. 시끄러운 속사정을 최소화하고 현재에 집중해 관객에게 '당신이 겪는 소소한 힐링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극적인 사건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영화 후반부의 명대사 '영원한 안녕이란 없다. 언젠가 꼭 만나게 될 테니까'란 대사도 주인공과 한 인물이 대화하다 나온 말이다. 이렇게 우리 삶의 대부분의 기쁨은 관계에서 온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를 괄호치고 현재만 보여줘서 우리에게 어울려 산다는게 어떤 힘을 주는지를 말해준다. 신선한 화법이다. 거대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지 않고 '그래. 나도 저런 사람이 주위에 있지' 생각이 들게 하는거다. 그것만으로도 난 기분이 좋아졌다. 노매드랜드는 이런 특장점을 가지고 우리의 내면에 다가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세상에게 하고 싶던 말이 생각났다. 하지 못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우리는 주위에 누군가가 있어서 살 수 있다. 그것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냈다. 기억하고 싶은 사람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아직 작별인사를 하지는 못했다. 앞으로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영화가 이 생각에 힘을 보태줬다. 이 영화처럼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때 쯤이면 서로 웃으면서 볼 수 있겠지. 좋은 영화다. 아마 영화를 보는 사람들 모두 나처럼 함께 있거나 떠나보낸 이들에 대해 생각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극찬하는 이유가 있는 작품이었다. 볼까말까 고민 많이 했었는데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마 메이저 시상식에서 적지 않게 상을 타게 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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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의 늪
LA의 유명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는 관객들을 막대하는 시크한 코미디언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유명 오페라 가수 안과의 스캔들로 아주 핫한 위치에 있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네트가 태어난 이후부터 눈에 띄게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고, 안과 비교해 유명세가 격차가 나기 시작하면서 그의 폭력적인 성격에 대한 루머가 커지기 시작한다. 그 루머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간이 흘러, 크루즈 가족 여행에서 안이 안타깝게 죽고, 그가 안을 죽인 용의자가 되는데, 그는 정말 안을 죽인 걸까? 그렇다면, 아네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1. Kill or Save
"How did the show go?
"I killed them."
"I saved them."
공연을 잘 끝냈냐는 말에, 내가 다 죽여버렸지 라고 대답하는 헨리와 내가 다 살렸지 라고 대답하는 안. 똑같이 공연을 잘 끝냈다는 표현이지만 이 두 사람의 삶의 태도가 이 대사에서 드러난다. 헨리는 관객들이 웃으면, 관객들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관객들과 대결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반대로 안은 오페라 가수로서 오페라에 몰입해 감동을 주고, 관객들을 홀리는 연기를 한다. 관객들을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헨리는 더 이상 관객들이 죽어주지 않자, 약올라하고, 관객들과 싸우는 것도 불사한다. 하지만 안은 관객들을 아끼고, 이 관객들을 내가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헨리는 잘 나가던 시절의 향수에 젖어 이전처럼 관객들이 자신에게 정복당해주지 않음에 분노한다. 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이가 들고, 인기가 떨어지는 과정이 그의 몸이 망가져가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열심히 무대 전에 운동하고, 자기 관리하던 헨리 자신은 이제 없고, 아네트의 탄생 이후 육아스트레스에 찌든, 점점 배가 나오는 가장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자기파괴적인 성향은 그의 상황을 모두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떨어지지 않는 안의 인기에 반해, 자신은 인기가 다 떨어져 집에서 육아나 하고 있다는 삐뚤어진 자존심이 그가 한 때, 너무 사랑했던 피앙세를 질투,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게 했다. 자기 파괴가 자기 연민, 피해망상으로 커져가는 과정 속에서 그가 질투, 증오, 부러움의 대상인 안와 함께 추는 광기의 왈츠는 한 여자를 이렇게라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표출된 장면이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심연'이다.
그는 그녀가 그의 심연을 본 사람이고, 그 심연 속에서 끌어내어 빛의 영역으로 이끌어준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심연은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정복욕, 어두운 마음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킬러 마인드에 대해 알고서도 그를 사랑한 안은 그의 인생에 그를 구원할 구원자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의 마음 속 심연의 어두움을 구원할 사람은 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어야 했다. 자기 자신이 그 킬러 마인드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업보가 다 자기 자식에게 갈 것이었으므로.
2. 심연의 복제품, 아네트
영화를 잘 보다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헨리의 딸로 등장하는 아네트는 puppet 인형 같은 몸과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듯한 얼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아네트가 '사람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네트의 사람같지 않아 보이는 것은 헨리가 아네트를 자신의 삶의 인형처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아네트는 헨리의 인생을 장식할 일종의 부품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헨리가 소유한 꼭두각시처럼 표현하기 위해 아네트의 몸은 인형처럼 표현된 것이다. 이런 헨리와 아네트의 관계성을 보고 있자면, 수많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가스라이팅을 생각나게 한다. 부모는 자신의 사랑의 결과물로서 아이를 사랑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아이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부모가 외치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정말 자식을 위한 사랑인지 자식을 수단화한 부모 자신을 위한 사랑인지는 아이가 자아가 형성된 이후에 결판이 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했는지는 자식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지만 그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들이 날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면, 부모를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증오로 변질된다. 그 증오는 그 아이의 심연으로 치환된다. 고로 이 영화는 헨리의 심연이 대물림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I won't forgive and I won't forget.
아네트는 그를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을 거라고 했다. 이 대사를 통해 아네트는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거짓말로 상처를 준 아버지를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음을, 자신에게 대물림된 심연의 어두움을 이미 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Don't cast your eyes down the abyss"
영화 후반부에 헨리가 아네트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 이 메시지는 아네트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아네트는 그 심연을 보면, 헨리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오를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 심연의 존재를 인지한 아네트에게 이제와서 충고랍시고 하는 헨리의 대사는 적반하장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다시 풀어 해석한다면,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 상처를 잊고, 너의 인생을 살렴."
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상처를 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상처를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헨리의 문제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는, 자신의 심연,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을 소유하려고 하고, 끊임없이 남을 수단화했던 것이었다. 안을 사랑하는 시간 동안 잠시 위안을 얻었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타는 사랑도 결국 언젠가는 끝이 나고, 자식을 위한다는 변명 아래 자식의 유명세로 자신의 인생의 꽃을 피워보고자 했지만 그 작전도 실패한다. 자신의 업보처럼 지니고 있던 심연을 남의 힘을 빌어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업보였던 심연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이 극복하고자 노력했어야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부모가 될 자격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단순하게 아기가 예쁘다고,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아이를 낳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부모라는 사람이 완벽무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콤플렉스를 직시하고, 그 콤플렉스를 자식에게 대물림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성숙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깊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부모는 한 아이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창조자이기에.
3. 총평
이 영화를 왜 뮤지컬 형식으로 만든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난 순간까지도 왜 이 영화가 뮤지컬 형식이고, 뭐 때문에 이 영화는 난해한 걸까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 전체적인 시나리오의 분위기는 아주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인데, 계속 정신없이 몰아치듯이 영화 속 인물들이 끊임없이 노래하고, 대사도 뮤지컬처럼 노래하듯이 진행되기 때문에 시나리오의 분위기와 영화의 형식 사이에서 미묘한 이질감을 느낀 것 같다. 우울하고, 어두운 씬인데, 인물은 계속 노래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것이 얼마나 낯선 경험인가!
결국 이 영화가 뮤지컬 형식으로 진행된 이유는 이 잔혹동화를 더 잔혹해 보이도록, 관객들이 그 잔혹함을 뼈져리게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용과 형식 사이의 이질감 때문인지 그 정신없는 영화를 곱씹는 와중에도 모든 장면들이 하나하나 감정적으로 잘 각인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속 그러고 있는 중이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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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상호의 좀비 영화 두 편 - 서울역, 부산행
서울역 - 좀비보단 사회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무난한 생존극
부모의 집을 나와 남자친구 기웅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혜선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발생한 '좀비' 사태로 인해 모든 것을 집에 두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한편 혜선을 자신의 딸이라 주장하며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석규는 우연히 기웅과 만나 혜선을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좀비를 피해 살아남으려는 혜선과 기웅, 석규의 이야기를 그린 연상호 감독의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다.
일단 은근 재미있게 봤다. 완성도 자체는 조금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긴장감과 이야기를 갖추고 있는 평작 정도라고 생각한다. 우선 영화 자체가 조명하는 사회 비판이 굉장히 강한 편이다. 단적인 예로 감염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최루탄을 쏘는 경찰의 모습이 마치 민주화 운동을 연상시킨 다거나, 노인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부 방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이기주의, 거기다 '좀비 영화'라는 장르가 담고 있는 메시지까지 더해버리니 사회 비판물로서는 최고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랬기 때문에 [부산행] 같은 화끈한 좀비 영화를 기대한 사람이라면 실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일단 좀비가 정말 더럽게 안 나온다. 영화 시작 20분 만에 처음 등장하고, 작화 퀄리티도 프레임 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굉장히 답답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또 있다.
바로 연기인데, 이게 참 가관이다. 목소리 연기부터가 전문 성우가 아닌 배우들이고, 디렉팅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대사를 들을 때마다 정말 오글거린다. 그냥 단순히 발연기가 아니라 영화의 몰입도를 해칠 정도로 심각했고, 후반부에 벌어지는 깨알 반전도 갑작스럽기 그지없었다. 왜냐하면 이 반전의 내용은 석규가 사실 혜선의 아버지여서 찾아다닌 게 아니라 빚을 갚지 않아서 쫓아다닌 것이라고 하는데, 아무런 복선이나 맥락 없이 튀어나온 탓에 영화의 완성도를 깎아먹는데 일조한다. 물론 메시지의 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서울역]을 '좋아하는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고 재미있게 본 건 사실이니 일단은 추천하는 작품이다.
평점: 6/10부산행 - 현시점으로 가장 잘 만든 한국형 좀비 영화
아내를 만나기 위해 부산행 열차를 탄 석우와 수안은 우연히 들어온 감염자의 습격을 시작으로, 갑작스러운 '좀비' 사태에 휘말려 감염될 위기에 처한다. 그렇게 석우는 수안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게 되고, 상화와 성경 부부는 뱃속에 있는 아이를, 야구부에 참여한 영국과 진희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이야기를 다룬 연상호 감독의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다.
일단 정말 재미있게 봤다. 해당 영화의 프리퀄 [서울역]보다 좋은 작품이었고, 현재까지 나온 한국 좀비 영화들 중 최고였다고 본다. 기본적으로 작품의 긴장감이 매우 뛰어나다. 무려 20분이 지난 후에야 등장하는 [서울역]의 좀비와는 다르게 [부산행]은 전개 속도에 부스트를 걸어 좀비의 습격과 좀비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버린 열차의 모습을 굉장히 빠르게 보여준다. 거기다 열차라는 한정된 장소를 이용해 서스펜스를 극대화 시켜서 딱히 지루할 틈이 없었고 여기에 배우들의 좋은 연기까지 더해지니 좀비 영화로서는 합격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메시지 또한 훌륭했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서울역]의 집단 이기주의와 비슷한데 이를 더욱 길고 자세하게 표현한 동시에 이기주의를 대변하는 캐릭터를 하나 등장시켜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더 깊고 훌륭하게 전달한다.
이렇게 긴장감, 연기, 메시지, 드라마까지 좋으니 크게 비판할 구간은 없었으나 무시하기 힘든 심각한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일단 첫 번째로 신파가 너무 과하다. 물론 이야기의 흐름 상 크게 이상하지 않은 정서였지만, 너무 밝고 길게 연출한 탓에 상당히 지겹다는 인상을 남기는 부작용을 일으켰다. 거기다 '아빠!'라는 대사를 수도 없이 외치고 있는 수안의 모습은 흡사 [클레멘타인]의 '아빠 일어나!'가 떠올랐을 정도니 신파가 얼마나 심각한지 대강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결말부에 훌쩍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수안의 모습은 아예 화룡점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위적이었다고 본다. 그렇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신파라고 할 수 있고 연상호 감독마저 눈물 코인을 이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외에 두 번째 문제는 첫 번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사소한 문제인데, 바로 중반부 이후부터 영화의 전개가 느려지면서 지루함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열차가 뒤집히고 캐릭터들도 거의 다 사망한 상태라 영화적인 재미가 상당히 부족한 타이밍인데, 아무런 사건 없이 그저 지루함만을 유지시켜버리니 이 부분만큼은 신파 다음으로 정말 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나름 재미있게 봤고, 비교적 최근에 개봉한 [#살아있다]와 [반도]가 그지 같은 완성도로 나왔기 때문에 충분히 재평가 받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연상호 감독 역사상 [염력] 다음으로 밝은 분위기이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리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말이다.
평점: 8/10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콩까기의 종이씹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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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뿐인 삶,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고래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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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
어딘가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길을 지나가고 있는 선교사 토마스. 어느 외진 곳에서 들리는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가 보기로 한다. 뭐지? 집에 들어가 보니 어떤 남자가 낑낑대고 있다. 그러나 이 남자는 어딘가 좀 특별하다. 엄청난 거구의 남자.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도 나는 것 같다. 남자의 노트북에선 야한 동영상이 나오고 있다. 황급히 닫는 거구의 남자. 거동이 힘들어 보인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황급히 묻는 토마스. 엄청난 몸무게에 앞가림도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토마스에게 별 말 하지 않는다. “거기 종이에 써져 있는 몇 문장 보이죠? 그걸 읽어줘요!” 911이 아닌 부탁, 살짝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읽는다. 이게 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에세이 같은 글. “이게 뭐죠?”묻지만 “내가 좋아하는 책의 구절이다”란 답만 할 뿐이다. 읽어준다. 금세 침착해진 거구의 남자. 하지만 토마스가 그곳에 간 이유는 분명하다. 선교사 일을 하는 토마스. "도와드릴까요?" 하지만 어림없다. 곧이어 남자의 간호사가 왔기 때문이다. 간호사의 이름은 리즈. 어렵지 않게 거구의 남자 이름이 찰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200kg도 넘어가는 체중. 지금 바로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지만 이유가 무엇인지 찰리는 버티고 있다. 리즈의 입에서 병원 타령을 반복하기엔 이제 그녀도 지쳤다. 마지막 경고를 전하는 리즈. 이렇게 돼지 취급받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삶을 계속하다간 주말 즈음에 고혈압으로 마지막 날을 맞이할 것 같다. 언제 이렇게 와 버렸나. 끝이 두려운 찰리. 어쩌면 생의 마지막 날을 앞둔 오늘, 이제 마지막 끝마무리를 하려고 한다. 딸 엘리와의 마지막을 앞둔 채로.
연극 무대같이
영화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주인공 찰리가 272kg의 거구이기 때문에 이 특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생긴 이야기의 배경은 찰리와 영화를 설명하는 좋은 특성이 된다. 우선 첫 번째. 영화의 핵심인 구원이다. 이 영화에서 찰리가 움직이는 행동은 결국 어떤 것과 은유된다. 이는 공간을 벗어난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영화에서 공간적 배경을 설정한 것이 연출 요소 활용한 것이다. 또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는데도 경제적이다. 방구석이 더럽다. 이런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공간을 그렇게 설정한 느낌이 좀 있다.
인물들의 리액션에 집중한 영화의 특성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이 집의 공간적인 특성이 인물과의 대화에 특화된 곳으로 묘사되는 것 같이 보인다. 문이 많은 방문, 부엌과 거실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 거실과 집 입구가 근처에 있다는 것이 장면 연출에 있어 특이점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연결고리가 되었다. 그리고 영화 전체적으로 묘하게 연극 같은 느낌이 있다. 이는 인물이 음식을 먹을 때마다 느껴지는 거리감과 관련이 있는데, 후반부 폭발하는 에너지를 어느 정도는 제어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연극이 원작인 것을 영화화시킨 결과가 돋보인다.
구원에 관한
영화 전체적으로 반복되는 단어는 '구원'이다. 영화는 여러 구원을 묘사하고 있다. 우선 영화를 보다 보면 러닝타임 내내 드는 생각이 있다. '아니 왜 병원을 안 가지? / 왜 음식을 안 끊지?'라는 생각이다. 이 찰리가 지은 원죄는 굉장히 원초적이다. 그냥 폭식을 끊거나 병원에 가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우리 입장에서나 쉬운 말이다. 영화 중 어떤 인물의 입에서 찰리의 위기를 반박하는 것도 그 일부인데, 이를 반영하듯 인물의 욕망이 굉장히 복잡하게 연출된 것이 극에서 하고자 했던 말과 관련이 있다. 사실 영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은 인물의 단면마저도 촘촘하게 묘사되어 있다. 무슨 말이냐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찰리/리즈/엘리/토마스의 속사정이 후반까지 쭉 나온다. 이 중 대표적으로 찰리의 문제는 영화 모든 내용을 관통하며 이어져 있다(나머지 세 명도 마찬가지). 찰리가 왜 혼자가 되었는가? 와 찰리가 왜 음식을 끊지 못하는가? 는 큰 관련이 있는 셈이다. 이는 곧 영화 후반부에서 전반부의 떡밥을 수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모든 행동의 원인과 이유는 간단해서 말은 쉬워 보이지만 이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당연하다.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이 '너무 멀리 왔다'의 딜레마는 우리 삶 속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오늘 하는 생각들, 지금 당장 내일 일어나서 안 할 거라고 100% 확신할 수 있을까? 점점 줄어들 순 있어도 완벽하게 싹 낫지는 않을 것이다. 역시 찰리와 같이 어떤 것에 후회하는 일도 지금 당장 내일 없어질 거라는 보장이 없다. 이 깊은 골을 영화는 죽음이라는 소재로 풀어가려고 했던 흔적이 보인다. 영화에서 찰리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 또 리즈가 죽음에 반응하는 방식을 보면 묘한 공통점이 느껴진다. 이 두 사람의 각기 다른 스탠스는 결국 어떤 공통점을 도출한다. 바로 자기 파괴적이라는 속성이다. 자기 파괴적인 태도로 변한 것에 '어?'로 마음이 변해가는 것이 영화의 강점이 된다.
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어떻게 인물마다 표현하는지가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강점이 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영화의 네 인물이 갖고 있는 모티브는 '그럴 수 있는데 그럴 수가 없다'라는 아이러니다. 이 아이러니를 다른 말로 하면 '타인이 내리는 해결책이 절대 모든 것의 해결방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문장은 영화 최후반부 하이라이트 신 연출이나 전반부 주인공이 늘 갖고 사는 에세이, 토마스라는 인물이 내포하고 있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영화가 '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부분 연출이 어떤 분들에게 좀 무책임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이야기의 끝마무리가 모호한 점은 아쉽다. 그러나 영화가 제시하는 구원의 양태는 관객에게 하여금 감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삶이 서려있는 연기
1999년이었다. 한 남자가 할리우드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다. 건장한 피지컬에 섹시한 이목구비가 매력이었다. 출연 영화는 <미이라> 시리즈. 그전부터 쌓아 올린 인기가 폭발한 것이다. 연기력. 외모. 스타성 모두 다 인정받은 프레이저. 그에게 위기가 들이닥친다. 누군가의 성희롱과 이혼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크게 다가온 건 <미이라> 시리즈에서 일하다 생긴 신체적인 문제다. 무릎 연골을 죄다 수술해야 했던 프레이저. 악재는 한꺼번에 겹쳤다. 사람이 미웠다. 오랫동안 암흑기가 있었다. 2014년 이후 제대로 된 작품이 없었다.
그리고 현재. 브랜든 프레이저는 <이니셰린의 밴시> 콜린 파렐, <앨비스>의 오스틴 버틀러와 함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유력하다. 현재 미국 배우조합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레이저. BAFTA에서 상을 받은 오스틴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확신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연기가 아카데미를 위시한 여러 시상식에 안성맞춤이었다고 확신한다. 영화에서 봤던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단순히 특수효과를 끼었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가 품고 있는 딜레마인 자기 파괴라는 속성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것이 중요한지를 잘 알고 보여주는 연기였다. 가령 리즈에게 음식을 달라는 신이 있다. 이 목소리 톤과 시놉시스에 나왔던 "내가 인생에서 잘한 일이 단 하나라도 있단 것을 알아야겠어!"신의 말투는 정말 강약조절에 있어 능수능란한 배우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한다. 당연히 이 <더 웨일>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 사람의 연기 하나만으로도 감정을 이입하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이디 싱크나 홍 차우의 퍼포먼스도 좋았지만 이 브랜든 프레이저의 연기가 두드러졌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 것 같다. 심지어 폭식 연기도 잘한다. 감독 의도를 잘 살리면서 먹는다.
뭐 이런 연기를 하는 데 있어 자기의 삶이 투영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아닐까 싶다. 무의식 중에 이 찰리 캐릭터에 감정이입 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자기와 닮아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브랜든 프레이저. 이 물아일체는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나도 저렇게 이해 안 되고, 깊은 사람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기 충분하다. 또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고래'라는 키워드에 감정이입하게 도와준다. 영화는 살짝 무책임하기도 하다. 또한 영화의 몇몇 설정은 감독의 전작에서 갖고 온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전하는 카타르시스는 아는 맛임에도 폭발적이다. 이제는 멍하니 앉아있을 때가 아니다. 다시 한번 더 일어서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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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 글래디에이터 2 / 넘기 힘든 막시무스의 카리스마 / 덴젤 워싱턴의 팔색조 연기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글래디에이터 2"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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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썸머 필름을 타고 - 무언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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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엔 너희들의 청춘을 내가 좀 쓸게”
시대극 찐팬으로 영화 감독을 꿈꾸는 고교생 `맨발`.
영화 동아리에서 자신이 기획한 [무사의 청춘]이 탈락되자
직접 영화를 만들기 위해 절친 `킥보드`, `블루 하와이`와 드림팀을 결성한다.
우연히 극장에서 만난 미래에서 온 의문의 소년 `린타로`를 주인공으로 전격 캐스팅한 `맨발`은
꿈에 그리던 촬영을 시작하지만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지는데…
영화도, 꿈도, 사랑도 Ready Action!
올 여름 최고의 청춘+로맨스x시대극÷SF 걸작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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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선 브라더스> 공식 예고편
피는 못 속인다. 강력한 대만 삼합회 수장이 의문의 암살자에 의해 총격당하자 그의 장남 찰스(저스틴 첸)는 곧바로 로스앤젤레스로 향한다. 그곳에 자신이 보호해야 할 어머니 아일린(양자경)과, 가족의 실상은 전혀 모른 채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온 순진한 남동생 브루스(삼송 리)가 있기 때문. 하지만 타이베이의 무시무시한 조직들과 신흥 파벌들이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정면 대결을 벌이는 상황. 찰스와 브루스는 누군가의 손에 처치당하기 전에 형제애와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2024년 1월 4일 스트리밍 시작.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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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 <닥터 후 : 루비로드의 교회> 공식 예고편
드디어 등장한 새로운 얼굴! 닥터와 루비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속으로? 크리스마스 스페셜 [닥터 후: 루비로드의 교회] 12월 26일 오직 디즈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