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2023-12-11 00:35:57
2023 서울독립영화제 후기 (1)
영화 <신생대의 삶>,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세기말의 사랑>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기.
12월 초는 압구정 cgv에서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와 함께했다. (11.30-12.8)
총 5편을 관람했다.
신생대의 삶(감독 임정환), 막걸리가 알려줄거야(감독 김다민), 세기말의 사랑(감독 임선애), 백탑지광(감독 장률), 그리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까지.
지나온 시간, 그리고 당시 느낀 생각들을 오래 붙잡아두고픈 마음이다.
관람작들에 대한 단상을 남긴다.
1. 신생대의 삶 ( 김새벽, 심달기, 박종환 배우_ 임정환 감독)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독립영화계의 아이돌인 김새벽, 심달기, 박종환 배우가 나온다.
조금은 난해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 전개에 자꾸만 집중하게 된다. 영화 속 여러 이미지들이, 삶과 죽음이 맞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흐릿하고, 인물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거기에서 나오는 긴장감이 신선한 영화적 체험을 준다. 죽음 뒤에 바라본 삶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2.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박나은, 김희원, 박효주 배우_ 김다민 감독)
영화 속 주인공 '동춘'
지금까지 이런 영화는 없었다!
"엄마의 열성에 못 이겨 오늘도 학원 여러 개를 돌지만 그렇다고 딱히 아주 잘하는 것은 없는 우리의 피곤한 초등학생 어린이 동춘은 수련회장에서 막걸리 한 통을 줍고는 호기심에 집으로 가져온다."
‘동춘’ 역을 맡은 박나은 배우
막걸리와 페르시아어 수업, 그리고 모스부호를 통해 대한민국의 사교육 현실을 되짚어보게 한다. 참신한 이야기, 그리고 귀여운 아역배우가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분명 웃긴데 웃을 수 없었다 (사실 웃었다)학원 뺑뺑이를 돌던 과거 내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
남들은 다 이런 거 공부하니까 너도 이런 거 해야 돼,남들은 다 이렇게 사니까 너도 이 정도는 해야 돼.
주변에서 자꾸만 부추기는 삶 속에서 주체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막걸리를 든 채 줄을 선 아이들은 결국 해답을 찾았을까? 동춘이 (영화 속 주인공)가 지금은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3. 세기말의 사랑( 이유영, 임선우, 노재원, 김기리 배우_ 감독 임선애)
유쾌하고 희망차다.
2000년이 되면 지구가 곧 멸망한다는 등의, 여러 괴이한 소문이 나돌던 1999년에서 시작하는 영화. 상처를 가진 두 여성이 연대하여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하진 못해도, 서로는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 함께하는 삶 속에서는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조금 더 사랑해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다음 글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백탑지광> 이 이어집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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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마주할 나의 상처에 붙이는 마블식 반창고 한 장
갈 수록 높아져만 가는 전체 시리즈의 진입장벽, 반복되는 히어로물 특유의 클리셰들과 서사로 지쳐가던 관객들의 흥미도는 마블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크나큰 숙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숙제를 풀기 위해 채택한 방법은 좀처럼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고, 실망한 관객들은 마블에서 등을 돌린 지 오래됐다. 수많은 선택과 그 선택이 낳은 실패와 실망에 맞아보고 나서야 드디어 마블은 무언가 깨달은 듯, 영화 <썬더볼츠>를 개봉시켰다. 꽤 비장하게 말하고자 하는 이유는 영화가 지난 몇 편의 작품들과는 달라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본 작품을 모두 관람한 후 마블이 앞으로 어떠한 선택을 해나갈지 결심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썬더볼츠>는 특이하게도 액션이 주(主)인 작품이 아니다. 어쩌면 액션 보다는 감정, 위로, 용서, 후회와 같은 인간의 정서가 지배하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물론 실망스러웠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액션씬들이 유달리 흥미롭게 여겨질 정도로 매력 있었다고 보기란 어렵다. 또한 이런 액션씬들 만큼이나 전반적인 소품과 각종 의상들,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기 위한 몇몇 개의 유머씬들 또한 충분히 재미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의 본 작품의 특출난 장점 내지는 특징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화 <썬더볼츠>를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여 더욱 좋은 작품으로 받아들이게 됐고, '감정의 영화'라는 마블이 이전에 사용한 적 없는 장르를 감행했음에도 굉장히 신선하면서도 인상 깊게 다가왔을까?
최근 히어로물 관련 텐츠들을 종합적으로 놓고 보면 공통으로 포착되는 점은 바로 영웅의 불완전성이다. 요즘은 슈퍼맨처럼 완전무결한 영웅 서사보다는 현실적이고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정서적 불안에서 오는 심적 고뇌 그리고 이를 극복해가는 입체적 서사를 더욱 선호한다. 근래 히어로 장르 내에서 영화의 첫 장면부터 완벽하고 대단했던 인물이 끝날 때까지 그 모습을 이어 나가 결국 순전히 비열하고 악독하기만 한 악당을 물리치는 작품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이던 인물이 세상에 복수심과 혐오감을 갖게 되는 과정을 그려 입체적인 인물을 만들어 나가면서 영웅뿐만 아니라 악당에게도 소위 '당위성'을 부여한다.
영화 <썬더볼츠>도 이 당위성과 정당성에 집중하여 히어로로 비는 인물이 왜 히어로가 되었는지, 처음부터 히어로가 아니었던 인물들이지만 영웅이 되고자 선택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비춘다. 이 지점들을 지루하거나 매우 흔한 방식이 아니라 마블이 그동안 해오던 방식인 몇몇 볼만한 액션과 유머씬을 통해 해결했다는 점이 본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다. 또한 이 설득이 대단히 자연스러웠고, 몇 군데에서는 어색함이 다소 느껴지기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본 작품이 관객을 도중에 유기시키지 않고, 본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끝까지 친절히 설명하고자 노력했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작품을 모두 보고 난 후 생각해 본다면 영화 속 진정한 악당은 "센트리"도 "발렌티나"도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나의 진정한 악당은 나의 내면 속에 있는 어둠, 공허함, 나의 어떠한 선택도 믿어주지 않고 감싸주지 않으려 하며 나의 성장을 방해하는 이 녀석이 우리의, 영화의 진짜 악당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 "센트리"의 가장 강력한 능력은 대단한 힘이나 비행 능력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트라우마와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둬놓는 능력이다. 그 능력으로 인해 작 중 영웅들도 고통과 고뇌의 시간을 겪게 되고, 아픔을 직면한다. 이를 이겨내는 방식 또한 영화는 제시한다. 물리적으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신'급의 빌런과 힘만 조금 센 영웅들의 끝마무리는 육체적 싸움이 아닌 서로의 상처를 안아주는 위로로 정리된다. 이런 점을 미루어 보면 작품 속 어려서부터 최고 정예 스파이로서 훈련받아 왔지만 사실상 능력적으로는 크나큰 메리트가 없는 인물인 "앨레나"가 작품의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가장 큰 능력을 갖 인물처럼 보이는 이유도 자신의 아픔을 직면하여 이를 이겨낼 용기가 있고, 자기뿐만 아니라 곁에 본인처럼 힘들어하는 이들을 보듬어줄 힘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단순히 히어로물이라고 해서 싸우고, 죽이고, 폭력을 가해서 정의를 실현하려 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추세는 지났다고 말하듯 본인들이 새로운 추세를 이끌겠다고 호언장담하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장담은 필자에겐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마블의 페이즈 1, 2, 3, 4 때의 작품들과 요즘 마블 작품들을 모두 비교해 본다면 분명 기술의 발전, 영화 산업의 급성장을 통해 액션이나 CGI 기술 등으로 볼거리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화려한 볼거리를 이용해서도 관객을 설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부족했던 것인가. 이번 작품, 영화 <썬더볼츠>를 통해 하나쯤 배울 수 있지 않을까. 아무리 마블 영화, 히어로물 영화라 하더라도 현란하고 휘황찬란한 스크린 속 볼거리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볼거리들로 어떻게 관객들을 설득하고, 동화시키며, 그들의 감정을 어떻게 이용할 지에 대한 구상 내지 서사적 구조라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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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사를 바라보는 성찰의 태도
과거사를 바라보는 성찰의 태도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스파이의 아내>는 NHK에서 방영된 TV 드라마를 영화의 형식으로 다시 제작한 영화다. 일본의 어두운 과거를 폭로하고 성찰하는 파격적인 내용 때문에 투자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공영방송 NHK의 제작지원 하에 이 영화는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본래 8K 카메라로 촬영되고 NHK 자사의 4K/8K 채널에 한정적으로 방영 예정이던 드라마는 베니스 영화제 극장 상영을 위해 재작업하는 과정에서 화면비 변경(1.78:1->1.85:1)과 색보정 작업 등을 거쳐 2K로 변환됐다. 8K의 선명한 화질이 2K가 되면서 그 선명도가 떨어진 것임은 분명할 것이나 이 영화가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고, 예산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는 점 때문에라도 둘 사이의 화질 차이를 따지는 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행위일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를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은사자상)을 받으며 이 영화는 더욱 회자되었고, 영화화는 잘한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시대극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모던하게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이 생각은 영화를 볼수록 독특한 영화라는 판단으로 확대됐다. 이 영화는 분명 1940년대 고베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이고, 인물들의 연극적은 대사 톤과 당시대를 옮겨 놓은 듯한 세트, 인물의 동선을 팔로잉하는 연극적인 촬영 방식 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러나 여기서 더 나가 이 영화가 전통적인 역사 내지 시대극의 형식이나 스파이 장르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느냐는 질문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물론 이 말이 이 영화가 과거 사실을 왜곡하거나 어떠한 관점에 편향된 영화라는 말은 아니다. 이 영화가 구성되는 방식에 독특한 지점이 있다는 뜻이다.
먼저, 이 영화의 방점은 어디에 찍혀있나. 보통의 정통 스파이물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방점은 제목대로 스파이보다도 '아내'에 찍혀있다. 보통의 스파이물이라면 범인 찾기 혹은 범인이 범인임을 들키느냐 마느냐 하는 데서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파이가 누군지를 초장부터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영화의 초점 자체가 스파이가 아닌 그의 아내 사토코에게 맞춰져 있다. 영화는 대부분 사토코의 시점을 따라가고, 관객은 사토코의 심정에 이입을 하며 극을 따라가게 된다. 유사쿠가 스파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둘은 섬유무역회사를 운영하며 유복한 생활을 즐겼다. 이들의 집 내부를 보면 유사쿠가 서양의 문화를 동경하고 그에 매료됐다는 걸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고, 무척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행복은 다가오는 전쟁과 함께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어느 날 유사쿠는 전쟁이 더 심해지기 전에 만주를 보고 오겠다며 급히 만주로 떠나고, 이때부터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만주에서 돌아온 유사쿠는 달라져있다. 이상함을 눈치챈 사토코는 그를 추궁하고, 그가 만주에서 일본군이 병균으로 생체실험했고, 그로 인해 죽은 수많은 주검을 목격하고 그 증거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미국으로 가져가 폭로하려는 그의 계획을 듣는다. 헌병대장이 되어 돌아온 사토코의 옛 친구 야스하루의 존재가 부각되는 건 이 시점부터다. 세 인물이 서로를 의심하며 빚어내는 갈등은 이 영화의 서스펜스를 지탱해나간다. 야스하루는 유사쿠를 의심할 만한 정보를 일부러 그녀에게 흘리고,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풀리지 않는 그의 행동에 점점 의심을 갖게 된다. 이 지점에서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형식을 가지기도 한다.
자신은 '코스모폴리탄'이라며 세계시민을 자처하는 유사쿠는 자국 일본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려 하고, 사토코는 지금까지 유사쿠의 곁에서 누린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토코는 처음엔 그를 배신한다. 남편의 금고에 있던 노트를 야스하라에게 가져가 조카 후미오가 체포되게 만들고, 자신의 남편 또한 의심받게 만든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사랑하는 남편을 택하고, 남편이 스파이라면 자신은 스파이의 아내다 되겠다 선언한다. 그녀를 움직인 것은 '진실'을 밝힌다는 대의보다 사랑이었고, 그녀에게 중요한 건 오직 유사쿠였다. 그러나 대의가 동기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녀는 남편이 만주에서 가져온 필름을 영사해 그가 보고 들은 만주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목격하고, 그를 돕기로 마음을 굳힌다.
그러나 미국으로 떠나는 날, 사토코는 유사쿠에게 배신당한다. 누군가 사토코의 행방을 고발해 미국으로 가는 배 안에 숨어있던 사토코는 일본군에게 발각되고 붙잡힌다. 사실 그녀가 맞이하는 결말은 암시됐다. 그녀가 유사쿠, 후미오와 함께 찍은 필름에서. 바로 이 필름, 영화 안의 또 다른 영화 안에서 사토코는 연인의 금고를 털다가 연인에게 들키고, 연인은 그녀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겨 배신자가 자신의 연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달아나는 연인 사토코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고, 사토코는 그 총알에 맞아 죽음을 맞는다. 연인은 죽은 사토코를 안고 슬퍼한다. 이 필름은 영화 마지막에 가서 다시 상영된다. 많은 일본군들 앞에서. 관객은 그때서야 사토코가 봤던 만주의 참상을 담은 영상을 재촬영한 필름의 일부를 보게 되며, 또한 거기에 입혀진 유사쿠의 필름을 다시 보게 된다.
필름이라는 매개의 의의는 사실상 이 영화의 핵심이다. 관객은 만주에서 벌어지는 생체실험을 직접적으로 목격하지 못하고, 유사쿠가 만주에서 가져온 실험노트와 영상을 찍어온 필름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게 된다. 진실을 밝히고 전달하는 수단으로써 기능한다. 또한 필름은 사토코가 유사쿠를 적극 지지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단순 전달을 넘어 새로운 의의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유사쿠가 만주에서 가져온 필름은 그가 그곳의 참상을 직접 보고 들으며 찍어온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던 영상물을 재촬영한 결과물이다. 그곳의 진실은 필름 안에 다시금 담겼고, 누군가가 그것을 그 매개를 통해 간접적으로 목격하고 진실을 알게 되도록, 그것에 대한 직시와 판단을 가능토록 만들었다. 유사쿠가 사토코와 함께 찍은 필름이 덧입혀진 필름을 일본군이 다 같이 보게 되는 것 또한 반대의 의미에서 이 영화의 중요 씬 중 하나다.
덧입혀진 필름에 당황하던 사토코는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주 훌륭하다"며 실성한 사람처럼 웃는다. 이어서 배를 타고 떠나며 유유히 손인사를 하는 유사쿠의 모습이 보인다. 자신을 배신했던 연인을 역으로 배신한 인물의 통쾌한 복수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겠으나, 이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화는 수감된 사토코에게로 다시 초점을 맞춘다. 패전의 그림자가 고베에까지 드리웠을 때, 사토코가 불바다가 된 조국을 바라보며 뱉는 대사는 당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미친 나라에서 미치지 않은 사람은 미친 사람이 되고, 미친 사람은 미치지 않은 사람이 된다. 정상적이지 않은 조국의 패전은 그 비정상의 무너짐에 있어서는 기쁨이 되겠지만, 조국의 패배라는 면에서는 슬픔이 된다. 바닷가에 가 그제야 울분을 토하는 사토코의 모습은 그런 조국을 둔 개인이 결국 맞닥뜨리게 된 피할 수 없는 비극이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 과거사를 보여주면서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금의 일본이 가져야 할 양심과 반성 의식은 무엇인지를 일깨운다.
"전쟁 중인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진정한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시대물을 작업해보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자유와 행복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고, 국가 안 개인이 자신의 자유와 행복을 국가에 의해 어떻게 빼앗기게 되는지 그려낸다. 감독의 반성적이고 성찰적인 양심선언처럼도 느껴지는 이 영화는 군국주의의 잔재 속 극우주의가 만연한 일본에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 같다. 지식인이자 예술인의 입장에서 자국의 과거사를 드러내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작금의 일본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묻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성찰적 태도는 일본 영화계의 주목할 만한 새로운 물결 중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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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 2 | 넓어졌지만 얕아진 종교 디스토피아 세계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천사가 죽을 날을 고지하고, 고지받은 이를 사자가 시연하기 시작한 뒤로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 새진리회의 교리를 거부하는 화살촉의 만행이 극심해지고, '민혜진'(김현주)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소도와 새진리회의 충돌도 잦아지자 청와대 정무수석 '이수경'(문소리)은 결단을 내린다. 정부가 개입해 혼란을 잠재우기로. 이에 그녀는 부활자 '박정자'(김신록)를 내세워 새진리회의 새 교리를 공표하고, 화살촉을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수경의 계획은 뜻대로 흐르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부활자, '정진수'(김성철)가 등장했기 때문. 지옥에서 수천 번의 시연을 경험한 뒤 되살아난 그는 재빠르게 이수경과 소도의 계획을 파악하고, 화살촉과 힘을 합쳐 새진리회의 교리 공표식을 습격하기로 결심한다. 목적은 단 하나. 새진리회가 감금하고 있는 박정자를 만나 자기가 부활한 의미와 이유를 알기 위해서.
3년 전, <지옥>이 좋았던 이유
2021년 11월, 넷플릭스로 공개된 연상호 감독의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은 충격적이었다. 디스토피아적인 분위기에서 종교의 탄생 과정과 의미를 추적하는 스토리라인이 뇌리를 사로잡았기 때문. 죽을 날을 아는 정진수라는 인물을 예수에 빗대며 보여준 고찰은 장르적 재미와 메시지의 깊이 두 마리 토끼를 잡아냈다. 이해 못 할 현상을 죄악과 정죄의 관계성으로 해석하는 대목은 기독교적 세계관의 재해석으로 보기에 충분했다.
<지옥>은 자기 해석에 관해 자문자답했기에 더 인상적이었다. 박정민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연이 낳은 두려움과 혐오를 악용하는 종교조직을 언론인답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파헤쳤다. 온 세상을 삼킨 종교적 광기에 맞서 의문을 제기한 셈이다. 더 나아가 그와 그의 아내는 목숨을 던지면서까지 맹목적인 믿음 외의 길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지옥>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의식도 보여줬다.
<지옥>의 두 번째 시즌은 첫 시즌의 연장선상에 있기에 여전히 흥미롭다. 특히 한국적 맥락에서는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독특한 이미지로 녹여냈기에 더욱 눈길이 간다. 종교라는 사회적 체계에 대한 창작자의 의견이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기도 하면서, 세계관의 확장도 함께 진행되었기에 의미심장한 장면도 적지 않다. 다만 그 과정에서 본연의 색채를 일부 잃어버린 결과 여러 아쉬움도 함께 남기고 말았다.
정치와 종교의 분리
원론적으로 현대 한국인에게 종교와 정치는 철저히 분리된 영역이다. 이유가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인에게 종교는 정치와 결코 섞여서는 안 될 존재로 인식되었기 때문. 19세기말 아편 전쟁 이후 조선은 근대화의 일환으로 기독교를 수용, 인정했다. 이는 달리 말해 유럽적 종교관을 수용한다는 말이었고, 곧 정교분리와 신앙 자유의 수용을 뜻했다. 즉, 근대적 개념의 종교는 철저히 개인의 내면적 범위로 한정되는 게 핵심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기독교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의 전통적인 사상체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치사상으로서의 ‘학(學)’과 믿음으로서의 ‘교(敎)’가 공존하던 기존 사상체계도 근대적 종교로 거듭나야 했다. 그 과정에 유학과 동학 같은 전통적인 학들은 철저히 믿음으로서의 영역에 충실한 유교나 천도교와 같은 형태로 변했다. 그 외에 무속과 같은 전통 신앙들은 종교 영역 외의 사이비 종교와 같이 인식됐다.
물론 정교분리가 항상 지켜지지는 않았다. 기독교를 수용해 근대화를 이루듯이, 종교를 활용해 일제에 맞서려는 시도도 있었다. 일례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면면만 보더라도 종교가 민족 개념과 결합해 민족적 정치체로 자처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일제 강점기 때 정교분리와 종교의 사적 영역화는 법제화됐고, 그 이후로도 ‘종교-세속’ 이분법은 어길 경우 사회적 비난을 피하지 못하는 금기로 자리 잡았다.
역사를 역행하는 도전
따라서 <지옥> 시즌 2의 스토리는 신선할 수밖에 없다. 근대화라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 철저히 분리되었던 종교와 정치의 영역이 다시 만나면 발생할 상황을 그려내고자 노력하기 때문. 시즌 1에서 예수의 공생활을 본 따 정진수의 포교활동을 묘사했듯이, 기독교가 정치와 관련을 맺게 되는 과정을 본 따 한국적으로 풀어낸 듯 싶다. 그렇기에 두 번째 시즌은 정교분리라는 원칙을 파괴하고, 역사를 역행하는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지옥> 시즌 2는 로마 제국을 재통합한 콘스탄티누스 1세를 연상시킨다. 그는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삼위일체 교리를 둘러싼 논쟁이 극심해지자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열고, 삼위일체 교리를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 파를 지지해 사회를 안정시켰다. 중요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결정이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 결단이었다는 점이다. 즉, 그에게 종교는 단지 로마 제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수경이 <지옥> 시즌 2의 주동 인물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청와대 정무수석인 그녀는 종교를 정치의 영역으로 포섭한다. 정확히는 종교를 정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그녀에게는 시연, 천사, 지옥의 존재는 중요한 게 아니다. 단지 청와대와 정부에서 새진리회와 화살촉, 그리고 소도를 정치적으로 관리해 사회적 혼란을 해소하고, 종교적 광기를 이성으로써 통제하여 시스템을 바로잡고자 할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예측할 수 없는 광신도 집단인 화살촉을 제거하기 위해 종교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가장 크고 안정적인 교단인 새진리회와 종교적 해석을 거부하는 소도에게만 발언권과 영향력을 주려고 갖가지 계획을 꾸민다. 새진리회의 교리를 국가적으로 재정립하여 국교 수준의 정통성과 권위를 부여하는 한편, 이와 같은 종교적 해석을 거부하는 시민들에게는 무신론에 가까운 소도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속편다운 정체성
이처럼 종교와 정치의 접점이라는 새로운 소재를 다루는 한편, <지옥> 시즌 2는 종교 자체에 대해 더 깊이 탐구하며 시리즈의 정체성도 이어간다. 시즌 1이 새진리회와 같이 믿음을 악용하는 체계와 사람을 비판했다면, 이번 시즌은 종교 자체에 대해 근원적인 회의감을 표한다. 특히 '초월적인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이 신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을 다룬다. 그 중심에는 정진수와 박정자가 있다.
부활한 정진수는 어떻게든 박정자를 만나려 한다. 끊임없이 시연받는 지옥의 의미와 자신이 부활한 이유를 알려줄 사람을 찾으려고. 하지만 박정자에게 답이 있을 거라는 그의 기대는 산산조각 난다. 둘의 지옥은 서로 달랐고, 부활 후 그들에게 주어진 것도 달랐으니까. 신의 뜻을 알려고 노력한 정진수는 사자가 된 반면, 주어진 상황을 그저 받아들인 박정자는 그토록 염원하던 아들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정진수와 박정자의 대비는 마치 신의 의도나 계획을 알고 싶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특히 결말에서 아이러니가 극대화된다. 초자연적 현상과 종교 체계를 통제하려는 이수경의 시도가 전부 실패로 귀결되는 순간, 그녀 역시 죽을 날을 고지받기 때문.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일제히 고지가 내려지는 광경 역시 새진리회와 화살촉이 그토록 싸우면서 만들어 온 서로의 교리를 모두 무의미하게 만드는 듯 싶다.
이렇게 보면 <지옥> 시즌 2는 종교의 무의미함을 말하는 담대한 작품이다. 종교를 믿거나 이용하는 이들 모두 허상에 빠져 있다고 지적하고 있으니까. 이는 아내 오지원이 정진수 때문에 죽었다며 그를 원망하던 천세형이 죽기 직전 "신은 지금 지옥을 이 세상으로 옮기려고 한다!"라고 외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화살촉에 빠진 오지원처럼 종교에 휩쓸리지 않을 자신만의 기준점이 없다면 종교가 창궐한 세상은 곧 지옥이나 다름없을 테니.
넓어진 만큼 얇아진 이야기
다만 <지옥> 시즌 2의 대담한 상상력은 지난 시즌에 비해 큰 충격을 주지 못한다. 사실 속편인 만큼 신선함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연과 사자들은 더 이상 신기하지 않다.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해 지옥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정진수의 박정자를 대비하며 사자와 천사의 존재에 대해 복선을 암시하기도 했다. 전편에 비해 액션의 비중을 늘리고 스케일도 키워서 보는 맛을 살리려는 노력도 눈에 띈다.
문제는 이야기의 깊이와 밀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 특히 단체 간의 갈등과 대립 구도를 그려내는 방식이 다소 평면적이다 보니 주제와 소재의 흥미가 떨어진다. 새진리회는 이수경의 말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소도 역시 지나치게 민혜진의 관점에서 묘사되다 보니 내부의 갈등이 억지스럽다. 이에 더해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고려하더라도 화살촉의 테러나 방송 연출 방식은 다소 극단적이고 작위적으로 느껴진다.
몰입도를 유지할 인물도 부족하다. 배우가 바뀐 정진수는 속을 알 수 없어서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잃었다. 그에 반해 이수경은 거의 모든 사건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서 캐릭터가 일차원적으로 보인다. 그 결과 <지옥> 시즌 2는 세계관을 확장시켰을지언정, 확장되는 과정이 느슨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복선 회수보다도 시즌 1의 분위기와 깊이를 되찾는 게 시즌 3의 최우선 과제가 아닐까 싶은 이유다.
Acceptable 무난함
종교적 디스토피아를 지탱하려는 광기와 통제하려는 이성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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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에는 눈, 믿음에는 믿음
한 마디로 역겹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역겨움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오해는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 내의 장면이 구역질 난다던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싫다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그래서 역겨웠다. 이게 현실에 기반한 이야기라는 것이,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서는 영화와 같은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이런 감정을 유지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에서, 영화는 극찬을 받아 마땅하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영화의 의도를 명확히 밝힌다. 어떤 믿음을 강요하는 자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했다고. 그런 사람에겐 믿고 있는 세상이 전부일 것이라고. 그래서 영화에서 던지는 메시지가 그리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정확해서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모두 상처를 가지고 있다. 몸매에 대한 강박 때문에 거식증을 앓는 엄마를 따라 어려서부터 음식에 거부감을 느꼈던 엘사, 학부모회의 수장인 부모님의 간섭에 지친 라그나, 이혼하고 홀로 자신을 키우는 엄마를 위해 장학금을 받아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벤, 모든 가족이 해외에 나가 자신에게 무관심한 프레드까지. 대체로 가족과 얽혀있는 상처들은 어린 나이에 쉽사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스 노백은 바로 그 점을 이용한다. 불안정한 심리를 파고들어 아이들의 마음을 쓰다듬는 것이다. 의지할 곳 없던 아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라는 믿음직한 어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게 된다. 미스 노백은 아이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포착한 후, 섬세하고 치밀하게 상처를 헤집는다. 그렇게 아이들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다.
미스 노백은 아이들의 육체에 대한 주도권을 선점하고, 차차 정신을 지배해나간다. 바로 이 모든 과정이 날 역겹게 만들었다.
사춘기 아이들은 반항은 하지만 저항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일명 '반골 기질'이라 불리듯, 모든 강요받는 것들에 대해 극렬한 거부를 하긴 하지만, 이것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자신을 옭아매는 시스템에 대해 스스로 의문을 품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능력을 길러, 자신만의 태도로 행동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런 아이 곁에 모든 걸 포용해 주는 어른은 거의 없다. 자기 방식대로 밀어붙이거나, 부드러운 말투를 쓰지만 결국 자신의 말만 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거나. 때론 아이에게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어른도 있지만, 너무 일찍 철든 아이들에게는 소용이 없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이 시점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대한 관심과 들어주는 태도이다. 무언가를 말하고 조언하려는 것은 어른의 방식이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표현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 앞에서는 그저 들어주는 것만이 전부이다. 그게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한 시작점이니까.
노백 선생 같은 자에게는 청중으로부터 고립된 아이들이야말로 딱 좋은 먹잇감이다. 먼저 이야기를 들으며 약점을 찾아내면 소극적이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신념인 식사법을 권유한다. 가장 먼저 그 식사법으로 효과를 본 프레드를 바탕으로 더 많은 아이들에게 설파한다. 아이들은 또래 집단의 분위기에 따라 행동이 좌우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헬렌'은 그저 아이들과 친해지기 위해, 그룹에 끼고 싶어서 수업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아이들은 식사법을 공유하는 그룹에 속해 있으면 자신의 외로움과 상처가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다. '친구'라는 존재가 우선되는 것이 아닌, '식사법'이라는 요법이 우선되는 것이다. 그것이 노백 선생에 대한 맹신으로 이어지고, 아이들은 점차 걷잡을 수 없이 말라간다.
왜 하필 식이요법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먹었던 것을 게워내는 엘사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지식으로 치환한다면 정신을 형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세상에 놓여져 있는 지식을 거부한다. 이것을 삼키면 그들에게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기득권인 어른에게. 아이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던 노백은 그것을 먹을 필요가 없으며,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에 반해 영화에서는 어른이 식사하는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학교 교장인 도싯은 노백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에 설탕과 우유를 타고 과자를 먹는 등의 행동을 보인다. 게다가 학부모들은 식사하는 장면을 끊임없이 보여주는데, 심지어는 학부모 회의를 할 때마저도 무언가를 먹고 있다. 그들에게는 누군가의 생각을 쳐낼 힘이 있다.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식은 습득하고,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버릴 의지가 있다. 그게 과하면 치우친 어른이 되지만, 어쨌거나 그런 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행동의 자유가 주어진다.
지식이라는 단어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에 비해 깊은 단어다. 사람에게는 지식이 있어야 그것을 응용할 지혜가 생기고, 그런 지혜가 모여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 삶의 근간이 되는 지식 자체를 거부해버리면 아무것도 쌓이지 않는다. 그 무엇도 만들어낼 수가 없다. 노백의 방식은 아이들이 다른 지식에 접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온전히 자신에게만 의존하도록 하는 세뇌에 가깝다. 쉬운 예시를 들어볼까? 당장 보이스피싱만 해도,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지 않는가? 타인이 수상한 낌새를 채면 안 되니까.
결국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아침에 노백 선생과 사라져버린다. 자신의 방에 걸어두었던 액자 속 풍경에 들어간 미스 노백과 아이들. 명확한 지명을 밝히지 않은 걸로 보아선, 그들에게 있어 유토피아와 걸맞은 장소일 듯하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영생할 수 있는 곳.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아닐까. 노백 선생의 이름은 'no back'이란 발음과 똑같다.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함께 죽음을 택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그 장면에서 묘하게 노백의 모습 역시 아이들과 같다고 느꼈다. 마땅히 기댈 변변찮은 어른이 없어, 고통 속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아이들에게서 자신을 발견한 노백은 그들을 구원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진심이었겠지.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미스 노백이 설파하고자 했던 신념도, 그것의 근간이 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진보적이고 올바른 교육에 대한 논의도 아니다. 정말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 결과다. 미스 노백의 신념에 의해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자본주의는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었는지, 치우친 교육이 남긴 흔적은 무엇인지.
아이를 잃은 학부모들은 학교에 모인다. 스키장에 가느라 노백을 만나지 못했던 헬렌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학생이다. 헬렌에게 노백을 따른 이유를 묻지만, 이미 세뇌된 헬렌 역시 노백의 말을 그저 앵무새처럼 따라 할 뿐이다. 유일하게 어른들 중에서 식사를 거부했던 엘사의 엄마는 '우리도 먹지 않으면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하지만 헬렌은 '믿음의 문제'라고 말하며 영화가 끝난다.
지식을 습득하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믿음을 가지면 위험할 때도 있다. 지식의 섭취는 오로지 지식에 의거했을 경우에만 유용하다. 빈 속에는 식이섬유와 채소부터 먹고 단백질, 탄수화물 순서로 먹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말이다. 합리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지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지식을 습득하지 않으려면 믿음이 필요하다. 무언가를 거부할 때는 그에 반하는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거부해야만 마땅한 이유 말이다. 현대 사회에는 아직 그것을 가려낼 힘이 없는 아이들을 꼬드겨 그릇된 믿음을 심어주는 자들로 가득하다. 그런 자들로부터 아이들을 어떻게 지켜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믿음이다.
아이를 믿고, 그 아이의 마음과 생각에 관심을 갖고, 귀를 열어야 한다.
아이에 대한 믿음만이, 아이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믿음으로부터 구할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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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네픽 어워즈 '2022년 올해의 영화' 6편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씨네픽 인스타그램을 통해 씨네픽 팔로워분들의 올해의 영화는 무엇인지 설문을 받아봤는데요!
과연 씨네픽 팔로워가 선정한 올해의 영화는 무엇일지?!!
지금 한번 만나러 가보시죠!
헤어질 결심
ⓒ 네이버 영화
응답자 중 반 이상의 선택한 올해의 영화는 바로 <헤어질 결심>입니다.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세밀한 연출과 매혹적인 배우 앙상블로 호평을 받으며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으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보니 N차 관람
열풍이 돌기도 하였다. 뉴욕타임즈, BBC, 포브스 등 주요 외신에서 2022년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꼽히며 전 세계를 매혹시킨 마스터피스 다운 저력을 입증했다.
▶ 줄거리: 산에서 벌어진 변사 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 '해준'(박해일)이 사망자의 아내 '서래'를
만나고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리멤버
ⓒ 네이버 영화
두 번째 씨네픽 팔로워 선정 '올해의 영화'는 이성민 배우와 남주혁 배우 주연의 영화 <리멤버>
입니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자비 없는 복수 이야기를 탄탄하게 그려내고 이성민 배우와 남주혁
배우의 세대 초월 절친 케미로 호평을 받았다. 개봉 첫날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였고,
상영 당시 관객들의 입소문이 꾸준히 이어졌다.
▶ 줄거리: 가족을 모두 죽게 만든 친일파를 찾아 60년간 계획한 복수를 감행하는 알츠하이머
환자 필주와 의도치 않게 그의 복수에 휘말리게 된 20대 절친 인규의 이야기
수프와 이데올로기
ⓒ 네이버 영화
세 번째 씨네픽 팔로워 선정 '올해의 영화'는 양영희 감독의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입니다.
영화는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과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고, 박찬욱,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등 영화계 인사들로부터 열띤 지지를 받으며 올해 가장 주목해야 할 다큐멘터리로
떠올랐다. 10월 20일 개봉 이후 끊이지 않는 호평과 입소문으로 장기 상영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 줄거리: 서로의 생각은 다르지만 따뜻한 수프를 나눠 먹게 된 한 가족의 어머니가 평생 숨겨온
비밀을 알게 되며 점점 서로를 마주하는 이야기
썸머 필름을 타고
ⓒ 네이버 영화
네 번째 씨네픽 팔로워 선정 '올해의 영화'는 청춘, 로맨스, 시대극, SF 장르가 어우러진 영화
<썸머 필름을 타고!>입니다. 영화는 2022년 재팬 필름 페스티벌 온라인 상영을 통해 국내
관객들에게 알려졌고, 이후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를 장악하며 정식 개봉 요청이 쏟아졌다.
정식 개봉 후, 영화는 폭발적인 입소문을 바탕으로 최고의 좌석 판매율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 줄거리: 시대극 찐팬인 고교생 ‘맨발’이 절친인 ‘킥보드’, ‘블루 하와이’ 그리고 미래에서 온
의문의 소년 ‘린타로’와 함께 영화를 찍으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화이트 노이즈
ⓒ 네이버 영화
다섯 번째 씨네픽 팔로워 선정 '올해의 영화'는 블랙 코미디 장르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화이트 노이즈>입니다. <결혼 이야기> 이후 노아 바움백 감독과 아담 드라이버가 다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영화는 제7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으며, 올해 부산국제
영화제에서도 상영되며 공개 전부터 관객들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 줄거리: 불확실한 세상에서 사랑과 죽음, 행복의 가능성이라는 인류 보편의 수수께끼와
씨름하는 동시에 일상적인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려 애쓰는 오늘날 미국 가정의 모습을 담은
블랙 코미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네이버 영화
여섯 번째 씨네픽 팔로워 선정 '올해의 영화'는 마블 루소 형제가 제작하고, 다니엘스 듀오가
연출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입니다. 영화는 해외에서 개봉 당시 10개 관에서
시작해 3,000개 이상 확대하였고, 1억 달러 수익을 올리는 등 글로벌 흥행을 이끌었다. 이에 이어
국내에서도 N차 관람이 이어졌으며, 개봉 4주차에도 좌석 판매율 2위를 유지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 줄거리: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에블린(양자경 분)’이 어느 날 자신이 멀티버스를 통해
세상을 구원할 주인공임을 알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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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에서 보내는 응원
"나이 드니까 눈물만 많아져. 어쩐지 눈물이 나네." 같은 말에서는 괜스레 낙엽 냄새가 난다고, 그러니 내 입에서 나오기엔 좀 방정맞은 것 같다고, 아마도 십대쯤이었던 나는 생각했다. 삼십 대에 들어선 지금도 자신이 그런 말을 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내게 그런 말을 했던 이들이 왜 저런 문장을 골랐는지 알 것 같은 순간들이, 가끔 그 비슷한 말이 슬쩍 떠오르는 날들이 있다. 이전에는 무심하게 넘어가던 일들이 실은 여상하지 않음을 깨달아가는 탓이다.
꽃 한 송이 피는 순간이나 새 살이 돋아 상처가 아문 자리는 어쩜 그리 경이로운지. 남들 다 하고 사는 일 중에는 왜 이렇게 어려운 것들이 많은지. 반쯤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 느낌을 즐기며 천문학 책을 읽어보는데 중력이나 관성 같은 개념은 어쩜 그렇게 신비로운지. 모두 다 이전에는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두 번 생각해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 깨달음이 켜켜이 쌓인 자리에 무언가 와 닿았을 때, 그래서 물방울이 터지듯 눈물이 훅 고일 때, 그럴 때 우리는 "어쩐지" 눈물이 난다고 한다. 기실 이게 내 마음의 어떤 부분을 건드린 걸까 곰곰이 따져보고 생각할 시간이 우리에겐 많지 않다. 그 모든 것을 '나이 드니까', '어쩐지'라고 해도 자연스러울 만큼 많은 시간을 그렇게 허덕허덕 보내고 있는 것이다.
윤이형 작가의 <작은 마음 동호회>에 수록된 단편을 읽다가 그렇게 "어쩐지" 울컥한 장면이 있다. 어떤 자매의 이야기였는데, 동생에게 생긴 큰 변화를 엄마가 받아들일 수 있을지 언니가 엄마의 입장을 헤아려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이었다. 버는 돈 대부분을 책과 영화에 쏟아내며 사는 자신의 존재는 엄마에게 어떨까 생각하는, 뭐 대략 그런 문장이었다. 전철 한가운데서 너무나 당황스럽게도 눈물이 터졌다. 어쩐지 울컥하네. 그리고 마침 전철 한가운데였으므로, 종점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있었으므로 그 "어쩐지"의 정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건 내가 가진 불안과 맞닿아 있었다. 세상이 말하는 안정적인 것들과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오히려 점점 멀어지는 스스로를 보면서, 엄마도 아빠도 눈치를 주지 않건만 괜스레 눈치 보게 되는 때가 있었던 것이다. 십대 때처럼 대단한 입신양명을 꿈꾸는 건 아니라 해도, 최소한 이 정도는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니 하는 세간의 말에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아씨들>의 조가 그 '세간'과 반대로 가는 삶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였다면,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찬실은 그 걸음조차 흔들리는 그대로 괜찮다고 끌어안아준다. 좋은 영화, 마음에 남는 영화가 많지만 찬실은 마치 어려운 날 함께 앉아있어 주는 친구처럼 따스하고 다정하다.
이 영화의 제목을 보고 “ 정말 굉장히 운이 좋은 찬실이란 사람이 나오나 봐 ” 라고 생각한 한국인이 있을까? ( 내 친구는 자꾸 “ 찬실이는 복도 없지 ” 로 기억했다. ) 시놉시스를 볼 것도 없이 찬실이의 날들이 꽤나 박복하게 굴러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는 제목이기도 하다.
찬실은 영화를 사랑하는 프로듀서다. 즉 감독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영화라는 형태에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할 때, 그걸 현실로 어떻게 구현할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기획과 제작부터 홍보와 개봉까지 전 과정에 손이 닿는 사람, 본인 말을 빌자면 "돈도 관리하고 사람들도 모으고 뭐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이다. 찬실은 예술 영화로서 하나의 장르가 되어 버린 감독과 오래 같이 일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영화 찍으며 평생 살 줄 알았다. 감독이 갑작스레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갑작스럽게 실업자가 될 때까지는.
찬실이의 복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OST 가사처럼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는 현실이 갑작스럽게 부대껴오는 것이다. 시간과 애정을 다 바쳐 사랑한 영화가 자신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다. 때로는 엉엉 울기도 하고 때로는 애써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기도 하면서 찬실은 씩씩하게 삶을 다시 꾸려나간다. 얼마 안 되는 짐을 추려 언덕길에 할머니 혼자 사는 집 문간방으로, 사각형도 오각형도 아니고 반지하도 1층도 아닌 방으로 이사한다. 생계를 위해 친하게 지내던 배우 소피의 집에서 가사 도우미 일을 시작한다. 이렇게 급브레이크 걸린 길에서 방향을 어디로 틀어야 하나.
찬실에게는 별로 여유가 없다. "한국 영화계의 보배"라며 찬실을 추켜세우던 영화사 대표는 ‘감독의 예술이었으니 프로듀서가 누구여도 상관없었을 것’이라며 직업인으로서의 찬실을 매몰차게 거절하고, 때마침 소피에게 불어를 가르친다는 단편영화 감독 영을 보면서는 또 나름대로 심경이 복잡하다. 좋아하고 어쩌고 할 만큼 상대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그리고 정작 알아보면 그렇게까지 잘 맞지도 않지만 ("노올란?!"), 이 정도면 대충 업계도 맞겠다 사람도 다정하니 괜찮은 것 같은데 적당히 연애라도 해볼까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이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조각배 같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던 찬실의 일상에 한 남자가 더 나타난다. 어쩐지 금방이라도 맘보 춤을 출 것만 같은 속옷 차림새에, 추위에 파르라니 떨면서도 콘셉트에 충실하게 머리카락까지 고슬고슬 만지작거리는 그는, 자신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한다. 유령일까 환상일까 아니면 영화의 현신 같은 존재일까. 아무튼 그는 본인이 장국영이라고 주장하고, 찬실은 "이제 내가 미칬는갑다... 완전히 돌았는갑다..." 하고 서러워한다.
이 모든 주변인 틈바구니에서 찬실은 어떤 카테고리로 규정되지 않는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 뚜렷하게 계약서 찍힌 직업도 없고, 함께 서로를 보듬자고 미래를 약속한 사람도 없고, 하다 못해 여태까지 해왔던 일조차도 없어졌지만 찬실은 늘 최선을 다한다. 장국영에게 고민 상담을 하거나, 영과 잘해보겠다고 도시락 싸들고 따라가기도 하고, 자신에 대해서 깊이깊이 생각해봐야겠다고 다짐하고, 소피에게도 너 자신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고, 더듬더듬 한글을 배우는 집주인 할머니 숙제를 도와드리거나 함께 콩나물을 다듬으면서.
그리고 그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럽다. 도시 곳곳에 세금으로 조성한 공간을 저렇게 귀엽게 활용할 수도 있구나. 크리스토퍼 놀란을 무시하고 오즈 야스지로(를 비롯해 '시네필'들이 좋아하는 감독)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저렇게 유쾌할 수도 있구나. 빛날 찬 열매 실, "내하고 닮았나" 고민했던 모과처럼 단단하고 향기로운 사람이다. 모과 바로 뒤에 붙어나온 배, 사과, 곶감 등 영화 대박 기원 고사상의 과일들은 끝내 그녀의 것들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찬실에게는 알찬 열매라면 으레 그렇듯 은은한 윤기가 돈다.
그러는 동안 장국영은 찬실에게 계속 묻는다. 자기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영화를 "해나갈 수 있을까" 묻는 찬실에게, 찬실이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묻는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영과 "잘될 수 있을까"를 묻는 찬실에게, 외로운 건 외로운 것일 뿐이니 상대가 아닌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한다. 일련의 일들 끝에 찬실은 모든 걸 게워낸 사람이 물병을 더듬더듬 붙들듯 다시 영화를 잡는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찬실은 "하고 싶은 일"의 첫걸음을 떼어나간다.
영화 끝에서 찬실은 장국영이 메어주는 아코디언을 한 품 가득 끌어안고 희망가를 연주한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시작과 끝에 어쩐지 쓸쓸한 바람 소리를 품고 있는 악기여서일까. 제목은 희망이라지만 어쩐지 절망적인 시대에 불리던 아득한 노랫말이어서일까. 그 장면은 어쩐지 눈물겹다.
이 영화에서 내게 "어쩐지" 눈물이 난 부분은 이 장면이었다. 차분한 연주 끝, 그동안 자기 일처럼 열을 내며 해준 장국영의 조언이 더 이상 찬실에게 필요치 않다는 걸 모두가 동시에 느끼는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 제가 멀리 우주에서 응원할게요 "
" 고마웠어요. 오래오래 기억할게요."
그 차분한 인사는 마치 영화와 주고받는 말 같았다. 우리는 이래서 영화를 보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영화에 있어 늘 외부자라고만 느꼈던 내게도 영화가 말을 걸어주는 순간이었다. 우주 어딘가에서도 누군가가 담은 마음을, 때로는 택배 받듯 때로는 유리병 편지 받듯 건네어 받는 것. 그리고 그 대가로 오래오래 기억하고 마음에 품고 이따금 끄집어내어 살펴보는 것. 그게 영화와 나의 관계였다. 찬실처럼 프로듀서가 되고 감독이 될 일도, 영처럼 영화와 관련된 다양한 업을 두루 섭렵할 일도, 하다 못해 이미 폐간된 <키노> 지를 쌓아놓고 정성일 평론가의 라디오에 귀를 기울일 일도 없지만 그런 나에게도 영화는 선물처럼 가까이 와준다. 마치 이 영화, 찬실이 그랬듯.
영상으로 보다 보면 닮아 보인다. 진짜다.
영화의 현신 장국영. 그를 우리가 길이길이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잘생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영화의 아우라가 있으니까. 이 영화에도 나온 <아비정전>의 옷차림이 그의 외적 시그니처라면, <패왕별희>는 그의 내적 시그니처였다. <패왕별희>에서 그가 맡은 데이는 철저하게 이야기 속으로 침잠한 인물이었으니까. 대부분의 현대인에게 가장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가 데이인데, 그럼에도 그를 자꾸 들여다보게 되는 건 영화가,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것들 때문이다.
그가 이야기의 극단에 서 있다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쥬샨이다. 거친 현실을 뚜벅뚜벅 걸어가고자 했던 쥬샨과,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던 데이. 샬로는 그 사이에서 남편이었다 패왕이었다 하며 갈지자로 걸었다. 이야기 안에만 있고자 한 이에게 현실은 너무 거셌고, 현실을 바지런히 걷고자 한 이에게 이야기는 너무 매혹적이었다. 끝내 현실은 이야기를 밀어내지 못했고, 이야기는 현실을 지우지 못했다. 공리와 장국영은 대척점에 있었지만 실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찍힌 대척점이었다. 현실과 픽션은, 삶과 영화는 그렇게 먼 것 같지만 멀지만은 않다.
이따금 <패왕별희>의 어떤 장면이 생각나는 이유. 장국영의 눈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유. 삶에 에너지가 뚝 떨어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내가 찬실을 만난다는 기분으로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들여다보는 이유. 우리가 늘 이야기를 찾는 이유는, "사는 게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라는 찬실의 말에, 다른 이들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뒤에서 비춰주는 찬실의 플래시에 녹아 있는지 모른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선이정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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