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10-08 17:11:26
치고, 달려라! '야없날'을 위한 야구 영화 9선
다시 개막하는 그날을 위해!

어느새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을 맞아, '야없날'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야구를 보지 못해 쓸쓸할 이들을 위해 야구 영화 9선을 준비해 보았습니다.
벌써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지는 기분이지만,
영화를 보며 새로운 시즌을 함께 기다려보아요!
다시 개막하는 그날까지 잠시 안녕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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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제 28회 부산국제영화제 기대작 모아보기
부산국제영화제 BIFF 가 10.04(수) ~ 10.13일 개최됩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1996년 제1회를 시작으로 현재는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 중 하나로 자리잡았는데요.
초청영화들은 장르에 구애되지 않고 다양하게 선정하는 것이 바로 BIFF가 내새우는 상징성이죠.
할리우드 제작 영화부터 칸, 베를린,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 애니메이션, 독립영화, 예술영화, 단편영화등 다양한 시각을 경험 할 수 있는 영화의 축제! 2023년도 기대작 같이 보아요
[한국이 싫어서 / 장건재]
cinepick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2015년)를 원작으로 20대 후반의 ‘계나’가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어느 날 갑자기 직장과 가족, 남자친구를 뒤로하고 홀로 뉴질랜드로 떠나는 이야기
[공드리의 솔루션북 / 미셸공드리]
cinepick
괴짜 영화감독 마크는 자신을 해고하려는 영화사 경영진으로부터 도망친다. 작은 마을에 도착한 마크는 부족한 자신의 영화와 현실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솔루션북을 만들게 된다.
[괴물 / 고레에다 히로카즈]
cinepick
초등학교 5학년 미나토가 담임 선생님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을 듣고 구타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화가 난 어머니가 항의를 하러 간다. 학교는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는 대신 형식적인 사과만 반복된다.
[나의 올드오크 / 켄 로치]
cinepick
영국의 북동쪽에 위치한 한 마을, 폐광이후 몇 주민들만이 마을을 지키며 사는데 빈집이 늘어나면서 집값을 계속 떨어지고 영국 정부에서 허가한 시리아 난민들이 이 마을로 집단 이주를 하면서 묘한 긴장감이흐르게 되는데..
[더 비스트 / 베르트랑 보넬로]
cinepick
『정글의 짐승』을 자유롭게 각색, 세 시대에 걸쳐 환생하는한 여자와 남자, 그리고 매번 두려움 때문에 실패하는 이들의 관계를 카메라에 담았다.
[더 킬러 / 데이비드 핀처]
cinepick
이 남자의 정체는 전문 암살자이다. 암살해야 하는 인물이 도착하고 실패할 경우 상상치 못했던 결과가 올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수일동안 기다려왔던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지막 준비를한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하마구치 류스케]
cinepick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작은 산골 마을. 코로나 위기가 끝나가자 마을에 글램핑 야영장을 건설하겠다는 주민 설명회가 열린다. 주민의 반대 의견이 이어지자 회사는 주민을 설득하기 위한 묘수를 고안해낸다.
[가여운 것들 / 요르고스 란티모스]
cinepick
젊고 아름다운 여성 벨라와 함께 살고 있는 해부학 교수 고드윈 벡스터. 그의 제자인 맥스는 벨라에게 마음을 뺏기게되고 고드윈 박사로부터 벨라는 얼마 전에 자살한 여자를 자신이 의학적으로 되살린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게되는데
[영화의 황제 / 닝하오]
cinepick
홍콩 영화 스타 라우 웨이치는 홍콩필름어워즈에서, 이번에도 남우주연상을 놓친다. 진지한 영화로 영화제 수상을 노리기 위해 린하오 감독과 영화를 찍게되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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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착적 소유욕, '사랑'이 되다
7★/10★
폴 토마스 앤더슨의 〈팬텀 스레드〉에서, 알마는 사랑하는 레이놀즈를 자기 곁에 붙들어두기 위해 음식에 독을 넣는다. 치사량은 아니지만 레이놀즈의 몸이 허약해져 알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는 많다. 알마를 그저 자기를 구성하는 여러 세계 중 하나로만 대우했던 레이놀즈는 기꺼이 알마의 요리를 먹는다. 그러고는 “사랑해”라고 말한다. 더는 알마가 아닌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애정을 나눠주지 않겠다는 듯이. 이렇게 알마는 레이놀즈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둘의 사랑은 ‘완성’된다.
〈엘리자벳과 나〉는 사랑의 권태를 피학과 가학으로 돌파하고자 했던 알마와 레이놀즈의 길을 잇는다. 주인공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이자 헝가리 왕국의 왕비인 엘리자벳과 그의 시녀 이르마다. 엘리자벳은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 왕족으로 손꼽힐 정도로 타고난 외모를 엄격하게 관리한 여인이다. 173의 큰 키임에도 평생 50kg 이하로 몸무게를 유지했다고 한다. 지독할 정도로 엄격한 관리가 동반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는 대중이 생각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성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외모로 살기 위해 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황후를 맞이하러 나온 대중 앞에서 기절할 만큼 코르사주를 꽉 조일 정도로 말이다. 여성의 섭식장애는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획득할 수 없는 공적 권력‧역능을 향한 욕망의 방향을 바꿔 자기 몸에 행사하는 일일 때가 많다. 엘리자벳이 주인공인 또 다른 영화 〈코르사주〉에서 드러나듯, 그녀의 공적‧사적 욕망이 ‘황후’라는 이름으로 제한될수록 엘리자벳은 더욱 엄격한 자기 통제로 이를 보상하려 했을 것이다.
이르마는 백작 가문 출신의 42세 미혼 여성으로 결혼하지 않으면 수녀원에 가야만 한다. 결혼과 수녀원은 모두 이르마에게 답답함을 상징하기에 그녀는 황후의 시녀가 되고자 한다. 엄격한 식이요법과 활동적인 운동을 즐긴 엘리자벳의 시녀가 되기 위해 달리기 테스트까지 마친 후 엘리자벳의 시녀가 된 이르마. 그녀는 금세 엘리자벳과 가까워지며 총애를 받는다. 그리스의 한 휴양지, 즉 엘리자벳의 의지와 명령만이 중요한 장소에서 남성 사회에서 가져온 습관(식이요법)을 유지하면서도 자신들만의 가능성(여성들의 우정과 사랑)을 벼려내기도 한다.
두 사람이 만들어내는 발랄하면서도 격정적인 친밀성은 마찬가지로 비극적 황후의 삶을 조명한 〈코르사주〉와의 결정적 질감 차이를 만든다. 〈코르사주〉가 질식 직전의 삶에서 황후가 갈망한 자유를 그녀 삶 전반에 걸쳐 풀어냈다면 〈엘리자벳과 나〉는 황후의 삶과 그런 황후를 사랑하는 이르마를 통해 남성 사회가 여성의 욕망을 취급하는 방식을 고발한다. 〈코르사주〉가 전반적으로 질식할 듯한 답답함으로 점철된 엘리자벳의 삶을 담담히 애도‧추모한다면, 〈엘리자벳과 나〉는 폭발할 듯 분출되는 황후의 욕망과 자유의지가 끝끝내 좌절하고야 마는 현실과 그에 괴로워하며 변덕을 부리는 엘리자벳을 사랑하는 이르마의 관계성에 천착하여 영화를 황후에 대한 헌사를 넘은 여성 친밀성과 사랑에 대한 통찰로 이끈다.
엘리자벳과 이르마의 사랑은 다정하거나 살갑지 않다. 상호적이지 않다. 황후의 변덕에 이르마는 늘 안달한다. 엘리자벳 시동생의 말마따나 이르마는 또 하나의 “쓰고 버릴 여자”일지도 모른다. 즉 이르마에겐 황후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인물이지만, 엘리자벳에겐 이르마가 억눌린 욕망과 자유의지를 분출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시적 대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 헌신적일수록 멀어지기만 하는 엘리자벳을 보며 이르마는 황후를 완전히 소유할 방법을 찾는다.
역사 속 실제 인물 엘리자벳은 1898년 무정부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그러나 〈코르사주〉는 상상력을 발휘해 황후에게 대안적 역사, 품위 있는 죽음을 선물했다. 〈엘리자벳과 나〉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번에는 그 목적이 다르다. 〈코르사주〉의 상상력이 황후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엘리자벳과 나〉의 상상력은 잡히지 않는 황후를 자기 곁에 붙들어두기 위한 이르마의 결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팬텀 스레드〉의 레이놀즈가 독약을 탄 알마의 음식을 기꺼이 먹으며 사랑에 투신하듯, 죽기 직전의 엘리자벳도 이르마의 집착적 소유욕을 사랑의 표현으로 용인해준다. 이제 황후는 죽었고, 더는 자신을 떠날 수 없게 된 황후 앞에서 이르마는 평온을 얻는다. 더는 위기에 빠지지 않을 영원한 사랑을 획득한 자의 표정이다. 소유욕이 사랑일 수는 없다. 동시대의 감각으로는 오히려 범죄에 가깝다. 그럼에도 〈코르사주〉를 경유해〈팬텀 스레드〉로 나아가는 〈엘리자벳과 나〉의 극단적 소유욕이 ‘사랑’일 수 있는 건, 사랑의 불확실성과 필멸성을 온몸으로 거부하겠다는 광기에 우리가 무언가 애잔한 공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르마가 언제나 두 사람의 관계성에 더 목말랐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납득이 되는 집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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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담 웹 |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를 코마에 빠뜨리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위험에 빠진 시민을 구하기 위해 뉴욕 시내를 바쁘게 가로지르는 구급대원 '캐시 웹'(다코타 존슨). 여느 때처럼 교통사고 때문에 다친 시민을 돕던 그녀는 강물에 빠지는 사고를 당하고, 동료 '벤 파커'(아담 스콧)의 도움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하지만 그날 이후 캐시는 미래에 일어나는 일을 먼저 보는 환영에 시달리고, 미래의 사고와 비극을 먼저 알았지만 막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빠져든다.
그러던 중 그녀는 거미처럼 천장을 기어 다니는 적 '이지키얼 심스'(타하르 라힘)가 세 여학생 '줄리아'(시드니 스위니), '아냐'(이사벨라 메르세드), '매티'(셀레스터 오코너)를 죽이는 미래를 목격한다. 그들을 구하려다가 싸움에 말려든 캐시는 미처 몰랐던 이지키얼과의 악연을 발견하고, 그를 막기 위해 '마담 웹'으로 각성한다.
<마담 웹>, SSU 최악의 자충수
<아이언맨>과 <어벤져스>로 슈퍼 히어로 영화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MCU. 이에 다른 스튜디오들은 MCU의 성공 방정식을 허겁지겁 벤치마킹했다. 그 결과 2010년대 할리우드에는 시네마틱 유니버스 열풍이 불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을 앞세운 DCEU, 고질라와 킹콩을 내세운 몬스터버스, 프랑켄슈타인이나 드라큘라 같은 고전 괴물을 엮어 만든 유니버셜의 다크 유니버스 등이 연달아 출범했다.
SSU(소니의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도 후발주자 중 하나다. 소니 픽처스는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이 MCU에 출연하는 상황을 활용해 스파이더맨의 빌런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꾸렸다. 시작은 좋았다. 톰 하디의 <베놈>이 월드와이드 8억 달러가 넘는 흥행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포문을 열었다. <베놈 2>와 <모비우스>로 MCU와의 연계를 시도하며 세계관도 확장했다.
하지만 SSU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았다. <베놈> 시리즈와 <모비우스>의 경우 비주얼은 화려하나 서사의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또 MCU와의 연계에만 목을 맬 뿐, 스파이더맨을 언제 어떻게 등장시킬지 확실한 로드맵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개된 신작 <마담 웹>은 끝내 SSU를 혼수상태에 빠트렸다. 히어로 영화로서도, SSU의 일원으로서도 무엇 하나 확실한 장점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녀들의 보호자를 꿈꾸다
히어로 영화의 구성요소는 크게 세 가지다. 영웅으로 거듭나는 서사, 빌런과의 대립, 액션을 비롯한 볼거리. 안타깝게도 <마담 웹>은 셋 중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우선 <마담 웹>은 새 히어로의 당위성을 제시하지 못했다. 물론 히어로 영화로서의 콘셉트는 존재한다. 모성애를 중심으로 여성 서사를 풀어나간다. 그러나 콘셉트의 설득력이 부족했다.
입양아로 자라난 캐시는 평생 친엄마를 원망했다. 그녀가 아마존에서 만삭의 몸으로 거미 연구를 진행하다가 출산 직후 사망했기 때문. 하지만 캐시는 미래를 예견하는 능력의 기원을 파헤치던 중 미처 몰랐던 진실을 발견한다. 엄마가 자기 희귀병을 고치기 위해 거미 연구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는 사실을. 이에 그녀는 엄마의 모성애와 희생정신을 본받고, 거미에게서 받은 예지 능력을 활용하기로 결심한다.
더 나아가 캐시는 자기처럼 가족 문제로 고통받는 소녀들을 보살피고, 그들이 히어로로 거듭나는 길을 알려주는 멘토로 거듭난다. 그렇게 그녀는 엄마가 정신병원에 갇힌 줄리, 부모가 불법이민자라 추방당한 아냐, 사업가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매티와 한 가족이 된다. 이러한 여성 서사를 강조하는 장치도 여럿이다. 캐시의 아버지에 관한 언급이 전무한 점, 이지키얼 심스와 벤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여성인 점이 대표적이다.
설득력 없는 시나리오
하지만 <마담 웹>의 헐거운 각본은 영화의 콘셉트와 히어로의 신념을 뒷받침하지 못한다. 캐시와 나머지 세 캐릭터가 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순전히 우연이다. 캐시는 미래에 히어로가 될 세 캐릭터가 이지키얼 심스에게 살해될 미래를 '우연히' 목격하고, 이에 그녀들을 구해준다. 도망치던 중 캐시는 셋 모두와 '우연히' 마주친 인연이 있고, '우연히도' 셋 모두 가족 무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계속되는 우연 외에 캐시가 이들에게 그토록 강한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 세 소녀가 캐시를 엄마처럼 신뢰하는 이유는 제시되지 않는다. 그들이 서로 유대감을 쌓는 서사도 얕다. 식당에서 다른 남자애들과 눈이 맞아 노는 장면, 캐시가 CPR를 알려주는 장면 정도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의 유지, 희생정신울 계승하겠다는 결심은 공허해진다.
그 결과 <마담 웹>은 러닝타임 116분 중 첫 20분만 흥미롭다. 캐시가 예지 능력을 처음 깨닫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플래시백과 포워드를 오가는 편집 덕분에 꽤 신선하다. 그녀가 예견한 비극을 못 막았다며 자책하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캐시와 벤 파커의 티키타카도 다른 세 소녀와의 대화에 비하면 합이 잘 맞는다. 기승전결 중 기가 가장 눈길을 끄는 부작용이 발생한 셈이다.
역할이 없는 빌런
이에 더해 빌런 이지키얼은 별다른 존재감이 없다. 히어로 영화에서 빌런은 히어로를 위기에 빠트린다. 그는 히어로를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피폐하게 만든다. 하지만 비 온 뒤에 땅이 굳듯이, 히어로는 빌런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더 굳은 신념을 지닌 영웅이 된다. 배트맨이 조커를 만난 후에 다크나이트가 되듯이. MCU의 스파이더맨이 그린 고블린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사람들의 선함을 믿고 싸웠듯이.
이지키얼의 경우 마담 웹의 아치 에너미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예지 능력을 갖고 있는 마담 웹은 자기 능력을 활용해 미래를 바꾼다. 반면에 이지키얼은 예지 된 미래를 바꾸려고 발버둥치지만 끝내 실패한다. 즉, 그들의 운명과 자유 의지의 차이점을 대조하는 식으로 이야기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물론 미래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히어로 영화에서 신선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데드풀 2>,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 모두 같은 문제를 다뤘기 때문. 하지만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지키얼 때문에 캐시의 엄마가 죽었으니, 둘의 대립을 감정적으로 격화시킬 수도 있었다. 자유와 통제라는 가치의 충돌을 배경으로 우정 싸움을 다뤘던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처럼.
하지만 <마담 웹>은 이지키얼에게 이렇다 할 플롯을 전혀 부어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가 왜 캐시의 엄마에게 접근해서 거미를 훔쳤는지, 훔친 거미를 어떻게 활용해서 뉴욕을 주름잡는 거물이 됐는지에 대해 전혀 알 수 없다. 이 모든 이야기를 관객이 직접 추측하고, 유추해야 한다. 이처럼 빌런이 평면적이고, 플롯 상의 도구로만 느껴지다 보니 <마담 웹>은 긴장감이 현저히 부족하다.
볼품없는 액션
심지어 세 번째 구성 요소인 볼거리도 미흡하다. 히어로 영화에서 액션을 기대하는 것은 사실 단지 화려함 때문이 아니다. 액션은 히어로와 빌런의 대립이 절정에 달했음을 암시하고, 또 이를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영화와 관객이 맺은 암묵적이고 장르적인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액션 대신 원더우먼의 일장연설로 클라이맥스를 채운 <원더우먼 1984>가 당혹스럽다고 실망스럽다는 혹평을 피하지 못했던 이유기도 했다.
<마담 웹>의 액션은 일단 분량이 부족하다. 기차역, 식당, 뉴욕 시내와 부두에서 펼쳐지는 시퀀스 4개가 전부다. 액션의 구성도 인상적이지 않다. 캐시가 먼저 본 미래를 피하는 전개가 되풀이되기 때문에 긴장감이 없다. 캐시를 제외한 나머지 세 주인공이 히어로로 각성해 능력을 보여주는 장면도 없고, 전작인 <베놈>과 <모비우스>에 비해 CG도 어색하다. 종합하면, 히어로 영화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액션도 보여주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 대목이야말로 <마담 웹>의 가장 큰 문제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SSU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으니까. 사실 <베놈> 시리즈나 <모비우스>에서도 영웅이나 안티 히어로가 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은 부족했다. 빌런과 싸워야 하는 동기나 원인도 뚜렷하지 않았다. 배우들의 열연과 CG에 힘입은 액션과 비주얼만이 강점이었다. 그런데 <마담 웹>은 SSU의 마지막 미덕조차도 갖추지 못했다.
SSU에 비수를 꽂다
더 나아가 <마담 웹>은 존재 의의조차 의문이다. 쿠키 영상조차 없기 때문. <베놈 2>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홈>과 연결되는 쿠키 영상으로 기대감을 키우며 실망스러운 완성도를 상쇄한 바 있었다. <모비우스>도 벌쳐와 모비우스의 만남을 보여주며 SSU의 미래를 궁금하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마담 웹>에서는 쿠키 영상도 없고, 극 중에서도 스파이더맨이나 다른 빌런을 암시하려는 시도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이쯤 되면 소니가 극장 개봉을 선택한 이유도 의문이며, 자연히 SSU가 치러야 할 대가도 꽤나 가혹해 보인다. SSU를 향한 얼마 안 되는 신뢰와 기대치마저 무너뜨렸으니, 다음 주자인 <크레이븐 더 헌터>와 <베놈 3>의 전망은 밝으래야 밝을 수가 없다.
Dreadful 끔찍한
지금이야말로 OTT를 활용할 타이밍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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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영화지만 무섭다, 하지만 재미있다. | 영화 위플래쉬
혹시 음악영화 좋아하시나요?~
보통 음악영화라고 하면 잔잔하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멋진 연주와 그에 맞는 사랑을 꽃피워야 할 것 같은 이야기가 대부분이잖아요?!
오늘 소개할 위플래쉬 라는 영화는 분명 음악영화이지만, 그 속에는 광기와 피로 물든 노력이 담겨있어요. 지금까지 봤던 음악영화 중 기억에 오래오래 남았던 영화 위플래쉬 입니다.
기본 정보
장르 : 드라마, 음악, 스릴러
감독 / 각본 : 데미언 샤젤
출연진 : 마일스 텔러, JK 시몬스
개봉일 : 2015년 3월 12일
평점 : 8.88
스트리밍 : tvN , 웨이브, 쿠팡, 왓챠
기획의도
"박자가 안 맞잖아, 다시"
뉴욕의 명문 셰이퍼 음악학교에서
최고의 스튜디오 밴드에 들어가게 된 신입생 '앤드류'
최고의 지휘자이지만 동시에 최악의 폭군인 '플레쳐'교수는
폭언과 학대로 '앤드류'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또 몰아붙인다.
드럼 주위로 뚝뚝 떨어지는 피,
빠르게 달리는 선율 뒤로 아득해지는 의식,
그 순간, 드럼에 대한 앤드류의 집착과 광기가 폭발한다.
최고의 연주를 위한 완벽한 스윙이 시작된다!
여담
영화 위플래쉬는 입소문과 인기에 힘입어 2020년 10월 28일 재개봉을 했다고 한다! (아~ 왜 이때는 몰랐을까~)
영화 위플래쉬는 평론가 이동진의 5점을 받은 영화이다. "JK 시몬스의 명언조차 이 영화의 탁원한 성취 중 일부분일 뿐." 이라는 감상문을 남길 만큼. 이 영화는 단순 음악영화를 뛰어넘은 영화였다.
후기 및 결말
위플래쉬 결말을 살펴보자면 결전의 날, 앤드루에게 플레처가 조용히 다가와 말 한마디를 건네며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네놈이 찔렀잖아"
라는 말과 함께 그동안 연습했던 곡이 아닌 새로운 곡으로 연주는 시작이 된다.
그동안 연습은 "위플래쉬"만 연주했던 앤드류는 잠시 절망에 빠지지만, 플래처가 지휘할 틈도 없이 앤드루가 순식간에 밴드를 장악하며 "캐러번"연주가 시작된다. 연주가 끝났음에도 앤드루는 드럼 솔로를 이어가며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광기의 찬 표정으로 드럼을 연주하며 결국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었음을 확인하며 앤드류의 미소와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는 화려한 액션과 거대한 스케일이 넘쳐나는 기존 영화는 다르게 오직 두 사람의 심리와 표정 그리고 음악으로 이 모든 것을 다 표현한다.
분명 저예산 영화인데도 그 어떤 영화보다 아름답고 멋지게 잘 만들었다.
이제 재개봉은 당분간 안 할 것 같으니!! 침대 위에서 맛있는 팝콘과 함께 위플래쉬 영화 한편 어떨까 싶다. 이 영화 안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빨랐을까, 느렸을까"
대사가 절대절대 사라지지 않는 영화
위플래쉬! 꼭 보세요 두번보세요! 세번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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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복된 세상에 어서 오세요
<슬픔의 삼각형>이 시작되면 관객은 처음부터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다. 한가득 모여 있는 남자 모델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인데, 이 영화가 우리를 어떤 롤러코스터에 태울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요” 식으로 상큼한 미소를 환하게 짓는 H&M 모델 표정과, “너희는 모두 내 발아래 있어” 식으로 얼굴을 굳히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발렌시아가 모델 표정을 번갈아 짓게 시키면서 사회자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다 현대 패션계와 인스타그램 광고들을 얼마나 잘 요약해 주는지, 헛웃음이 나온다. 몸을 걸치는 수단이었던 옷과 장신구가 이제 사람의 내면까지 절여 버리려고 드는 게, 재미있긴 하지만 징그러울 때가 있는데 딱 그 느낌이었다.
뒤이어 모델들을 인터뷰하면서, “수입이 여자 모델의 1/3밖에 안 되고 작업 거는 게이들도 상대해야 하는” 남자 모델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뭐냐고 자조적으로 물을 때는 정말 기분이 묘했다. 2022년 기준으로 여성은 동일 직군에서도 남성보다 31.5% 임금을 덜 받고 있으며, 서비스직으로서 인간 대 인간의 기본적인 친절을 베풀다가 별의별 수작질과 심지어 “꼬리 쳐 놓고 이제 와서 모르는 체를 한다”는 의문의 분노까지 받았다는 사람 이야기가 수두룩한 세상을 살고 있기에.
그리고 나면 이 영화는 마치 3개의 꼭짓점처럼 3개의 파트를 톡, 톡, 톡 찍고 엔딩까지 쉼 없이 달린다. 참고로 이 영화에 대한 모든 마케팅 문구는 진실이었다. 아, 참고로 문구는 아니지만 마케팅에 가히가 붙은 것도 나를 미치게 웃기는 요소이다. 게다가 (밈 아니고 진짜로) 포브스 선정 “올해 가장 웃긴 영화.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라는 말이 진짜였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지의 “이 우스꽝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영화”라는 말도. 더불어 “어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도 믿어주기를 바란다. “영화관에서 꼭 봐야 하는 영화”이자 “끝나고 나서 할 얘기가 있는 영화”는 모든 영화의 주장이지만, 이 영화는 정말 가급적 영화관에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시길. 다만 구토와 오물이 적나라하게 나오니 비위가 약한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 마음의 준비 하셨다면, 그럼, 전복된 세상에 어서 오세요.
#1.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영화의 1부는 인플루언서 모델 야야와 그 남자친구 칼의 이야기다. 칼도 모델이지만 쇼의 중심에는 야야가 있고, 칼은 관객석에서도 VIP 등장으로 밀려나 뒷줄에 적당히 끼어 앉는 신세이다. 마치 제니 홀저의 작업물 같은 느낌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글씨가 번쩍거리는 쇼의 관객석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조지 오웰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아직 자본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자산”을 자본보다 더 많이 가진 상태이다. 다시 말해 페이보다 #협찬 이 더 많다는 것. 그렇기에 돈 문제로 얼마든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수 있지만 그러는 순간 “섹시하지 않”아진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같은 상황은 다른 단어로 풀어진다. 야야에게는 “섹시하지 않”은 돈 이야기가 칼에게는 “그저 관찰한 것”, “돈 문제가 아닌 것”으로 계속해서 풀어진다. 칼은 “성별 고정관념”에 휩싸이지 말자고 이야기하며 돈 내는 문제를 가지고 따지지만, 그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손으로 막아서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것에 어떤 젠더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지, 가슴팍에 돈을 끼워준 야야의 행위가 왜 그토록 기분이 나빴는지. 돈 얘기가 아니라지만 이야기는 돌고 돌아 돈으로 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수사학은 현란한 언어로,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여 정신을 꼬드긴다. 칼과 야야의 관계에서도 그 양상이 재연되지만, 2부 ‘요트’에서 만나는 부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는 양상을 들어 보면 헛웃음이 자꾸 나온다.
요트에서 승무원을 쥐락펴락하는 러시아 부호 여성은 “우리는 모두 평등 We are all equal” 하다는 말과 “삶은 불공평한 것 Life is unfair” 이라는 말을 한 입에서 낸다. 바로 뒤이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명령”한다는 말까지 육성으로 내뱉는다. 그런데도 승무원은 핀으로 고정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다가 결국 Yes와 No의 간단한 대답조차 헝클어지고 만다.
재차 강조되는 평등은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현대에는 더 이상 계급이 없다고 교과서에 나오지만, 동시에 우리는 너의 노력으로 어디론가 올라가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근로 소득의 힘을 점점 얕보는 사회를 살고 있다. 계급이 없다면 <기생충>이 계급 우화였을 리가. <기생충>에서는 계단으로, <행복한 라짜로>에서는 농민들의 마을로 표현되었던 계급이 이 영화에서는 요트 속 사람들의 옷차림과 그들이 머무는 자리로 표현된다. 일하는 위치에 따라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지고 음악 취향조차 달라진다. 노력으로 얼마든지 자본을 얻을 수 있는 무한의 자유가 주어진 척하지만, 자유롭지 못하도록 요구하는 무엇이, 우리와 함께, 있다.
#2. 전복의 맛, 통쾌한가요?
그러나 이 세계는 폭풍우 속에서 기울고, 이내 전복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유층은 자기의 스타일대로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설명하지만, 그 일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생각해 보면 이들이 아무리 우아하고 고상하게 앉아 있어도 징그럽게 보인다. 극단으로 가는 천민자본주의, 사유가 부재한 사회에서 마케팅에만 절여진 뇌들이 모이면 얼마나 징그러워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서비스직이라면 누구나 ‘가끔은 그냥 바보들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제일 빠르지…’ 하고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할, 영 바보 같은 이미지도 이들 중에 덧씌워진다.
거기 그치지 않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풍자의 오물에 넘어뜨린다. 불안하게 떨리던 잔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아기 우는 소리와 풍랑 소리에 정신이 없는데 피아노 음악은 계속 흐른다. 결국 비싼 술도, 비싼 식재료로 만든 음식도, 심지어는 스스로가 가치 있는 다시 말해 “비싼” 사람이라 믿었을 사람들까지 바닥에 토사물과 함께 구른다. 이 영화는 그렇게 자본주의를 오물과 함께 바닥에 굴린다. 풍랑 속에서 사람들은 구르고 있는데 조타실은 비어 있고, 선장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다. 대처와 레이건과 케네디를 인용하는 러시아 출신의 자본주의자 비료상, 마크 트웨인과 마르크스와 레닌을 인용하는 미국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선장의 술 냄새 나는 대화도 재미있다. “당신들이 풍요 속에 헤엄칠 때 세계는 빈곤에 허우적거린다”고 선장이 일침을 놓을 때는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물론 그 말을 듣는 부자들은 현재 토사물과 오물 사이를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부자들은 어둠과 오물 속에서, 미국이 자본으로 아작 내고 망친 나라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타인이 자기 얼굴에 전조등을 비추는 경험을 한다. 살기 위해 국경선을 넘는 사람들, 예컨대 베네수엘라에서 국경선을 넘어 미국을 향하던 사람들이 했을 경험이었다. 이 배는 자본주의 전복의 배다. 아무 사정도 봐주지 않고 가차없이 전복은 계속되다가 끝내, 배까지 전복되고 8명만이 살아 남아 무인도에 다다른다. 자본과 능력주의와 성별과 우리 사회를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뒤집은 끝에, 마침내 세계의 전복이 일단락된다. (거기에서의 내용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아껴둔다.)
그러나 이 전복, 통쾌하기만 한가? 미친 듯이 웃다가, 가감 없는 토사물에 ‘으…’ 하다가, 모처럼 영화관에서 사람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있다 보니 정말 ‘어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통쾌하게 웃다 보면… 웃다가 생각해 보니 웃을 때가 아니다. 제가 바로 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마케팅에 절여져 사는 사람이랍니다? 영화를 보고 그나마 웃을 수 있는 건 단지 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 사람들처럼 자본을 많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왜 저들이 가진 역겨운 면면은 저에게 다 있는 걸까요?
#3. 삼각형과 원
삼각형과 원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수학적으로는 제법 비슷하게 묶일 만한 성질이 많이 있다…고 언젠가 들은 것 같은데, 학교 졸업한 지 너무 오래라 구체적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검색을 해 보니 삼각형 하면 외접원과 내접원을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고, 관련 공식 유도에서도 서로를 많이 써먹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삼각형과 원이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거다.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나는 원을 떠올렸다. 삼각형은 어떻게 굴려도 다시 삼각형이다. 정삼각형인지 이등변삼각형인지 그 모양조차도 변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위치에 따라 어디가 밑변인지가 달라질 뿐이다. 그래 봤자 넓이는 똑같이 구해진다. 또 다른 교착 상태에 머무를 뿐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 똑 같은 얼굴로 금방 잘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해서 괴로워지는 사람이 누구냐가 달라질 뿐이다.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을 생각한다. 요트에서의 삼각형과 무인도에서의 삼각형을 놓고 보면 비슷한 위치에 놓인 사람도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인 사람도 있다. 처한 자리가 달라지면, 똑같은 재능 똑같은 노력을 갖고도 전혀 다른 성과를 내게 된다. 어제까지 비웃음을 사던 사람이 뭐 하나로 빵 뜨면 칭송을 받는 세상, 그러다가도 또 금방 비난을 받는 요지경 같은 세상에서, 삼각형 위를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미끄러지는 우리를, 나를 이 영화에서 본다.
볼 때는 미친 듯이 즐거운데 보고 나서는 할 얘기가 자꾸 생각나는 영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좋다.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모든 대화가 쫀득쫀득하게 구성된 이 영화의 롤러코스터에서 정신을 놓은 다음, 나와서는 삼각형과 원,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공리주의, 서비스직의 애환, <기생충>과 <행복한 라짜로>, 트로이의 목마… 등등 매우 ‘있어 보이는’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다가 그조차 나의 위선 같다는 찝찝함을 안고 집에 돌아오면 된다. 그러고도 며칠 정도 이상하게 이 영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포브스가 옳았다. 볼 때는 “올해 가장 웃긴 영화”였는데, 보고 나니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삼각형과 원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실 분을 찾습니다.
*영화는 5월 17일 극장에서 개봉합니다. 꼭 사람 많은 상영관에서 보세요.
**이 글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한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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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메라>의 아무도 없음과 누구도 아님
얼핏 <행복한 라짜로>에 비해 계급성에 대한 고찰은 덜 두드러지고 로맨스 / 로드 무비의 모험적 속성으로 약간의 노선 변경을 감행한 것처럼 보이지만,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서늘하고 직관적인 대비는 여전히 빛난다. 예를 들면 감독의 언니 알바 로르바케르가 연기한 부자 수집가 스파르타코의 대사 같은 것들.
더러운 옷을 입고 도굴꾼인 척 하지만 당신 본질은 그게 아냐. 저들을 봐. 자기가 예술품을 밀매하는 약탈꾼인 줄 알지만 사실 거대한 기계의 부속일 뿐이야. 우리 몸종들이지. 언젠가 완전히 녹슬어 기억 속에서 사라질 거야.
도굴로 먹고 사는 가난한 시골의 톰바롤리 친구들은 우연찮게 찾은 ‘진짜 보물’로 부자들의 유람선에 오르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스파르타코의 저주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피로의 삼촌이 괭이를 빌려갈 때 “일만 하다 돌아버렸다”며 노인을 조롱하고 박대한 바 있다. 이 장면은 도시로부터 침투한 자본과 공장의 오염에 밀려나고 자리를 뺏긴 채, 전통적인 육체노동을 경시하며 한 탕을 노리는 80년대 이탈리아 지방 청년들의 세태를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전 세대 노인들에 비해 훨씬 ‘높은’ 곳을 바라보게 됐지만, 바라던 대로 졸부가 되는 데엔 결론적으로 실패하는 젊은이들(애초에 그것은 아르투가 찾아준 기회일 뿐이었으니). 결국 노인의 운명이나 자신의 운명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단 걸 검은 머리의 에트루리아 후손들은 모르고, 오만한 금발의 스파르타코는 알았다.
에트루리아의 동물, 풍요, 번성의 여신 키벨레 상으로 인해 톰바롤리도, 스파르타코도 일확천금의 기회를 쥐지만 돌연 환멸을 느낀 아르투는 “인간이 보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야“라며 상의 얼굴 부분을 바다로 던져버리고 만다. 과거에 얽매인 그는 잃어버린 연인 베니아미나와 곧 잃어버릴 키벨레의 얼굴을 동일시한지 이미 오래다. 한순간에 절망한 피로와 친구들은 이게 무슨 짓이냐며 아우성이지만 스파르타코만은 단말마처럼 숨을 들이킨 후 가라앉는 상을 바라보며 오히려 살며시 웃고 있다. 이천 년 넘게 땅 속에 있었고 이제 일부를 영영 유실한 여신상은 영원히 얼굴 없는 아무개, ‘누구도’ 될 수 있고 ‘아무도’ 아닌 상에 머무를 수 있다. 그 편이 ‘더 낫다’는 건 아르투에겐 고대의 예술을 향한 본능적 감각이었고, 스파르타코에겐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업가로서의 이성적 판단일 테다.
이쪽과 저쪽. 지상과 지하. 아르투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꿈속 저승과 그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의 이승. 배 위의 부자를 위해 일하는 큐레이터들과 산 아래 동굴의 도굴꾼들. 아르투가 수맥을 찾을 때 쓰는 Y자의 나뭇가지와, 이탈리아가 “사람이 머리부터 거꾸로 꽂힌 것 같다”고 웃어댄 나무의 수형(Y자를 반대로 꽂아둔 듯한).
플로라 부인은 폐쇄된 기차역에서 “이쪽은 시골, 저쪽은 도시”라고 반대 방향을 가리켰지만, 실상 불행과 빈곤은 언제라도 구분 없이 공평하게 찾아들며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는 않다. <행복한 라짜로>의 귀족 부인이 과거에 가둬둔 자기 소유의 소작농들을 바라보며 “나는 저들을 착취하고 저들은 가장 약한 소년(라짜로)을 착취한다”고 말했듯이. 반세기 후 그의 아들 탄크레디 역시 귀족 집안의 부와 명예를 이어받지 못하고 문서 몇 장에 집안 땅을 모두 뺏겨 도시 빈민이 되었듯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전했으며 기원전부터 이어진 에트루리아 문명도 로마에 흡수됐다. 파비아나가 장난스레 부르짖은 “통일 이탈리아”를 구축하기 위해 지역 특색의 문화와 언어는 통제되고 소실되며 가치를 잃는다. 과거의 영광은 빛바래고 외부 자본에 의해 싸구려 ’평민의 일상품‘이라며 멸시받는다. 아르투 일생의 마지막 도굴에서 먼저 사금을 찾아낸 젊은이가 이탈리아인이 아니라 아르투와 같은 이방인(아마도 동유럽의 언어를 쓰는)이었던 것처럼, 주인 아닌 자들이 과거의 아름다움을 더 빨리 알아보고 정작 주인된 이탈리아 인들은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해 외부의 도움을 빌려야만 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이 에트루리아인들이 남긴 무덤 위에서 뛰놀며 자랐다는 알리체 로르와커가 애수를 품고 조망한 이야기의 첫 번째 골자다.
여기저기 평을 읽다가 이탈리아라는 인물 자체를 그냥 싫어하거나, (그렇게 말하긴 아무래도 너무 여혐적이었는지) 아르투가 이탈리아와 호감을 나누는 관계가 되는 게 거부감이 든다는 반응을 꽤 많이 보았다. 나도 첫 관람 때는 이입하기 힘든 인물이란 인상 정도는 받았지만,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싫어했단 점에서 오히려 갑자기 흥미가 생기고 복잡한 인물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아르투가 가진 매력의 대부분은 삶에 전혀 집착하지 않는 듯한, 덤덤하고 버석버석한 태도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이 범상치 않은 초연함에 자꾸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삶의 미련과 생동감을 불어넣고야 마는 이탈리아를 대번에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베니아미아란 과거의 사랑이 너무 선명히 버티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만큼 강력한 순정을 가진 아르투에게도 거리낌 없이 성큼성큼 접근하는 (아이 둘 둔) 여자라는 점, 푼수 같기도 당돌하기도 한 성격과 눈치 보지 않는 제멋대로인 면까지. 누군가는 이탈리아를 무척 피하고 싶은 여자, 대책 없이 해맑은 사람으로 기억할 게 뻔하다.
하지만 이 실패한 사랑의 시작을 이탈리아의 시점에서 다시 쓴다면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초목이 우거진 걸 빼곤 좋아할 수 없었던 고향을 떠나, 아버지가 다를지도 모르는 두 아이를 낳고, 그다지 잘할 생각도 없는 노래를 배우는 체하며 딸을 잃고 정신 나간 늙은 여자의 집에 입성해 아이들을 숨겨 키우고, 결국 들켜서 쫓겨났지만 굴하지 않고 같은 마을의 버려진 역을 고치고 꾸며 제 살 곳을 마련하고 같은 처지의 여자들을 불러 모은다. 이 영화는 아르투의 입장에서 보면 방황하고 회피하며 끝내 치유받지 못하는 여정에 관한 비극적 로드무비지만, 이탈리아의 입장에서 보면 태어난 고향으로부터 유리된/쫓겨난 이가 끝끝내 자기만의 새 집, 새 고향을 일구어내고 새 가족을 만드는 일종의 개척자 영웅 서사다.
고향에 자카란다 나무가 많았다는 언급이나, 라틴 또는 아프리칸계 혼혈로 추정되는 외모의 아이들 콜롬비나와 치릴로의 외모로 미루어보아 그가 떠나온 고향도 어쩌면 타국일지 모른다. 혹은 포르투갈, 멀게는 남미까지도 떠돌며 살아온 (아르투 못지않은) 방황의 시절이 있었을지도. 이 가설을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근거는 이탈리아가 확실히 ‘이방’의 인물에 끌려한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는 음악 선생의 죽은 딸의 남자친구라는 영국인 - 보다도 그가 이방인이라는 점 그 자체, 그가 움막을 살기 좋게 꾸미는 능력, 언어적 소통에 서툴다는 점 등등 -을 좋아하게 된다. 그런데 그 남자는 짜증스럽게도 돌아왔다가 떠나고 찾아왔다가 버리고 가기를 반복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내 뜻대로 통제되지 않는 상황뿐인데도 이탈리아는 평정과 긍정을 유지하는 드문 사람이다. 아르투를 비롯한 톰바롤리 남자들이 별다른 직업도 없이 스파르타코의 탐욕에 기생하며 과거에 속박된 도굴꾼에 머무르고, 플로라 부인이 페르세포네를 잃은 데메테르처럼 정신을 놓고 딸에 집착할 때, 이탈리아는 홀로 현실을 책임지고 미래를 도모한다. 누구 못지않게 신산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는데 그에겐 과거가 별로 중요치 않은 듯도 하다.
영화 중반부쯤, 스파르타코의 조카 멜로디에가 돌연 제4의벽을 뚫고 나와 관객에게 “에트루리아 인들이 로마 제국에 흡수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엔 마초가 없었을 거래요”라고 말하고 에트루리아 민족은 모계 사회였다는 점을 피로에게 일러주는 재미난 순간이 있다.
이 서술은 영화 전반에 존재감을 행사하려 애쓰는 피로의 분투를 하찮은 것으로 만들고, 그처럼 마초가 되려 하는 근현대 이탈리아 남성들의 폭력적 문화를 - “여자가 오줌 눴을 때 모양이 동그랗다면 결혼하라고 했다”는 말에서 즉각 감지되는 ‘처녀성’에의 집착, 카니발에서 춤추는 이탈리아의 모습에 동해 ‘발가벗기자’고 달려드는 관습적 성희롱 등등 - 야릇한 방식으로 조롱하고 있다. 영화가 그 대신 가만히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것은 시끄럽고 하찮은 남성 조연들에 비해 훨씬 인상적인 방식으로 ’힘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여성 조연들이다.
빼앗긴 힘의 자리로 가장 먼저 소환되는 건 베니아미아의 어머니 플로라 부인의 기이한 권위다. 플로라는 딸 뿐인 집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며 딸들과 제자를 함부로 대한다. 딸들은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낡은 집을 팔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만 그는 집과 가구들을 팔지 못하게 하며 죽은 막내딸(베니아미나란 이름은 야곱이 요셉만큼 사랑한 유일한 아들이자 막내인 베냐민에서 따왔을 게 분명하다)이 돌아오길 기다린다. 버티기 위해 건강과 경제권 그리고 정신을 놓지 않는 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다.
막내딸의 연인이었던 아르투는 오페라 가수였던 플로라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워도 되는 유일한 사람인데, 딸들은 ‘남자만/남자라서 가능하다’며 차별 대우에 대놓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사실 아르투가 대접받는 유일한 이유는 그가 베니아미나가 죽은 것을 부정하려는 플로라의 절박함에 군말 없이 동조하는 체라도 하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후 스파르타코가 자기 직원들을 손짓 하나로 몸종처럼 부리는 모습에서도 플로라와 유사한 권위가 발견된다. 스파르타코란 이름을 여성이 쓰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주로 이탈리아 남성형 이름에 붙이는 어미(-co)로 끝나는 점, 그 유명한 투쟁가 스파르타쿠스 또는 아테네를 이긴 스파르타의 군인들을 연상시키는 이름이란 점도 그의 특수한 위치성을 짐작케 한다. 그와 친지, 직원들이 전원 새하얀 금발 벽안을 가진 것은 그들이 토종 에트루리아 혈통이 아닌 역사적 침략자의 혈통이리란 사실을 의도적으로 암시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가 일군 대안 가족의 그림을 통해 에트루리아의 모계 사회는 다시 한번 불려 나온다. 이탈리아가 ‘누구의 것도 아니며 모두의 것이기도 한’ (유적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공간을 쓸만한 집으로 만들어내자 그처럼 아비 없는 자식들을 홀로 키우는 젊은 여자 친구들이 모여 거대한 양육 공동체를 이룬다. 아이도 남편도 없는 파비아나가 “짜증만 내고 지시만 하며 부려먹었“던 피로와 남자들을 떠나 여성과 아이뿐인 집에 합류한 결정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알아서 집을 고치고 먹을 것을 구하고 자급자족 노동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탈리아의 모습은 앞서 ”가서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내. 뭐라도 하면서 노래를 불러“라며 온갖 가사노동을 시킨 플로라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만든다. 클래식하고 권위 있는 음악을 가르치면서도 육체가 깨어 있어야 소리가 잘 나온다고 강조하는 것은 젊은 시절 그가 직접 몸으로 배운 교훈 때문일 것이다. 플로라와 이탈리아에게 예술과 생활, 음악과 노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며 이는 inestimable한 것을 기어이 estimate하겠다는 외지의 자본, 남성들이 추구하는 협소한 의미의 성공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미학이다. 버려진 기찻길 옆에서 일정한 소음을 만들어내는 노동은 그 자체로 저항 예술의 성격을 띠게 된다.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르투는 톰바롤리와 플로라 대신 이탈리아의 집을 찾아가며 처음으로 ‘다른 미래’를 꿈꾸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베니아미아의 망령을 그리워하며, 사람 대신 새 떼가 노니는 명계의 꿈과 망자들의 부름에 강렬히 사로잡혀 있는 운명이라 이탈리아가 마련해 준 현실 세계의 유토피아에 편히 머물지 못하고 떠나간다. 결국 부장품 하나 없이 제 발로 들어간 무덤에서 그는 비로소 진짜 웃음을 짓고 마음 저린 행복을 찾는다. 그리하여 다음 세대 도굴꾼의 재능이 발견되기 전까지 측정될 수 없는 것, 훼손할 수 없는 것들은 영영 보존될 것이다.
그가 묻힌 땅 위에서 플로라는 계속 베니아미나와 아르투를 기다릴 테지만, 이탈리아는 계속 꿋꿋이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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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이 가득한 범죄 액션 / 마약 브로커 야당 / 믿고보는 배우들 / 유해진, 강하늘, 박해준
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야당" 후기입니다.
*엔드크레딧 전 쿠키영상 하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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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1차 예고편
1970년대 평화시장에는 가난해서 혹은 여자라서 공부 대신 미싱을 타며 '시다' 또는 '공순이'로 불린 소녀들이 있었다. 저마다 가슴에 부푼 꿈을 품고 향했던 노동교실 그곳에서 소녀들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노래를 하고, 희망을 키웠다. 다른 시대를 살았던 청춘이 오늘의 청춘에게 보내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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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공식 예고편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죽거나 혹은 마지막까지 살아남거나 456억 원을 차지하게 될 단 한명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