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yun2023-11-27 12:15:40
두 번 다시 봄이 빼앗기지 않기를
영화 '서울의 봄' 리뷰
영화 '서울의 봄'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가 떠올랐다. 일제강점기에 쓰인 저항시로 알려져 있긴 하나, 영화 속 내용에 대입해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을 줬다. 시대만 다를 뿐 우리가 빼앗긴 것이 비슷해서였던 것 같다.
'서울의 봄'은 10.26 사태 이후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찾아온 서울의 봄, 그리고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던 1979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역사가 스포'이기에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고 이 영화가 어떤 스토리인지는 조금만 찾아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궁금했다. 김성수 감독이 실화 바탕으로 제작한 '서울의 봄'을 통해 관객들에 보여주고 싶은 게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서울의 봄' 안에서 실존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살린 건 박정희 전 대통령뿐이다. 하지만 당시 사건에 책임 있는 인물들은 이름만 살짝 바꿨을 뿐 그대로 박제한다. 모두가 다 아는 전두광(황정민)의 비주얼이나 육사 동기이자 친구인 노태건(박해준)과의 대화에서 묻어 나오는 대표 어록들이 강렬하게 박힌다.
특히 김성수 감독과 '서울의 봄' 제작진은 전두광을 필두로 한 조직 하나회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당시 적과 아군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12월 12일 그날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또 엔딩에서 하나회의 단체사진을 박제해 서울의 겨울을 몰고 왔던 장본인이 전두광 한 명만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들은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자축하기 위해 남겼겠으나, 후세의 사람들은 이를 머그샷으로 기억한다.
하나회뿐만 아니라 1979년 12월 12일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또 다른 이들도 조명한다. '별들의 잔치'임에도 장성들의 뒷목 잡게 만드는 무능함, 악몽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싸우려고 했던 이들을 정치색을 넣지 않고 드라이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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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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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없는 사람들의 말’, 어느 다큐멘터리스트의 집념
딸이 묻는다. 왜 엄마는 영화를 어렵게 만드느냐고. 알기 쉽게, 친절하게 만들 수는 없느냐고. 엄마가 화내며 답한다. 그럼 내가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영화는 내가 목격하고 기록한 것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딸의 질문에 화를 내는 재일조선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은 아마도 자신이 겪고 기록한 시대가 결코 쉽고 친절할 수는 없는 시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치열하고 집요하게, 종종 ‘어렵고’ ‘불친절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10만 피트의 길이, 50시간 분량의 필름이 남았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과 그 딸이 남겨진 기록과 박수남의 삶을 교차로 엮어 만든 영화다.
차별받는 재일조선인의 문제에 천착한 박수남이 최초에 선택한 무기는 ‘펜’이었다. 그러나 ‘한계’를 마주했다. 박수남이 만난 재일조선인은 침묵하는 일이 많았다.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몸을 부르르 떨 뿐 그 세월을 어떻게 다 이야기하겠느냐며 고개를 떨궜다. 박수남은 그때 결심했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무수한 아픔이 만들어내는 이 떨림을 온전히 담아내는 영화에 투신하겠다고. 말 없는 사람들의 말을 영상으로 담아내겠다고.
1935년생 박수남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를 고민했다면, 그와 다른 세대인 나는 영화를 보며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박수남을 일평생 사로잡은 재일조선인의 그 무수한 떨림이 관객의 신체에까지 도달하고 새로운 물음을 촉발한 것이다. 영화가 주장하듯 기억이 보존되는 한 가해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통해 되살아나는 목소리들은 기억의 수명과 가해 책임의 기한을 넉넉히 늘린다. 박수남의 기록은 후대의 기억이 되었다.
영화는 지난 100여 년간 재일조선인이 겪은 문제를 폭넓게 다룬다. 고마쓰가와 사건, 침묵과 가난에 시달리는 피폭 재일조선인과 한일 양국 피폭 피해자의 갈등과 연대, 제암리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 인터뷰, 위안부 공론화, 군함도……. 딸 박마의가 갈무리한 박수남의 기록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차별과 오욕으로 굴곡진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그려낸다. 더불어 그 한복판을 살아낸 박수남의 삶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교차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부당하게 차별받는 집단의 당사자로서 차별에 맞서고 차별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서서히 깨닫는다.
148분의 긴 상영 시간 동안, 나는 박수남의 집요함에 압도당했다. 불합리한 구조적 모순과 그로 인해 생성되는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최초의 강렬한 각성이 어떻게 개인을, 집단을 추동하는 거대한 힘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목격할 수 있어서였다. 이 힘은 박수남이 자신의 집념을 타인의 아픔을 기록하는 데 썼다는 점에서 또 한 번 증폭된다. 박수남의 작업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타인의 목소리에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부여해 결국은 되살아나게 한다. 치열한 기록이 윤리와 정치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정작 박수남은 과거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보지 못한다. 건강 문제로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는 당시의 장면을 기억해낸다. 그녀가 과거 기록한 것이 더는 보지 못하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되살려낸다. 이것이 기록의 힘이다. 박수남은 스스로 기록의 의의를 증명해낸다. 시대를 관통해 세대를 잇는 집요한 기록 의지가 내내 놀라운 힘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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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카프카의 질문에 지독하게 응수하는 아리 애스터
불안한 머릿속
이 영화의 주인공인 보 와서만은 미국 어딘가에 사는 평범한 백인 아저씨다. 심리 상담가와 상담 중인 보. 상담가는 보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솔직히. 어머니가 돌아가시길 바란 적 있었나요?” 아연실색하는 보. 어머니가 무섭다고는 느꼈지만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약에 대해 처방받는 보. 의사는 보에게 ‘반드시 약을 물과 함께 먹어라’라고 당부한다. 할 일이 있던 보. 잠깐 외출하는 길에 여려 광경을 목도한다. 누구는 옥상에서 뛰어내리려고 한다. 아예 길바닥에 시체까지 있다. 더러운 길거리. 어수선한 분위기를 무시하고 집에 돌아가려 하는 보. 문신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남자가 갑자기 뛰어온다. 당황하는 보. 집 엘리베이터까지 미친 듯이 달려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보는 안간힘을 쓰고 있다. 뭐가 문제인지 이 남자의 일상은 크게 뒤틀려있다.
어떤 일상을 살던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할 일은 해야 한다. 내일 어머니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잠을 청하는 보. 아무도 없는 한적한 집 덩그러니에 있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누가 보의 집에 저벅저벅 걸어온다. 누군가는 보의 문 틈에 쪽지를 쓱 던졌다. “선생님! 우리 다 같이 잠들어야 하잖아요. 음악 소리 조금만 자제 부탁드립니다!” 정중한 부탁이었다. 하지만 내용은 이상했다. 보는 원래 조용히 잠을 자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점점 자주 날아오는 쪽지. 음악의 m자도 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경고는 더 심각해진다. 갑자기 음악소리가 커진다. 보가 늦잠을 잤다. 비행기 타야 하는데 시간을 놓쳐버렸다. 갑자기 꼬인 보의 귀로. 설상가상으로 악재가 겹치기 시작한다. 이런 보에게 경비 아저씨가 한마디 던진다. “넌 x 됐어. xx아.” 놀랍게도 말이 정확히 이뤄진다. 보의 귀향길은 너무 어려웠다. 그에게 가늠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감독님 직업이 영화감독이라서 정말 다행이야
이 남자의 데뷔작은 무려 <유전>이다. 그리고 그 차기작은 <미드소마>다. 파멸적인 필모그래피를 갖고 있는 아리 애스터는 일반적인 호러 영화 문법을 온몸을 바쳐서 거부하던 사람이었다. 첫 번째. 데뷔작 <유전>이다. <유전>에서 기억에 남았던 점은 화면을 담는 방식이었다. 영화에서 절대자가 등장한다. 이 절대자가 짜놓은 판에 주인공 가족이 휘말리는 게 영화의 핵심이 되는 만큼 어떻게 신의 존재를 묘사할지가 작품의 핵심이었다. 이를 카메라 구도와 건물 구조로 묘사한다. 악마가 바로 옆에서 보는 듯한 촬영 방식, 디오라마로 표상되는 시각적인 무력감 묘사 같은 것들이 거부할 수 없는 저주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아주 훌륭했다. 다른 영화 <미드소마>는 이야기의 전개 방식만 봐도 다른 호러 장르물과는 다르다. 영화의 초반부-후반부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입장을 바꿨는지가 그게 대한 근거다. 트라우마가 있던 주인공. 이 트라우마를 어떻게 공감하고 치유할 것인가에 대한 내용이 <미드소마>에서 핵심으로 작동하는 부분이었다. 이 과정 중에 주인공에게 큰 상처를 남긴 그녀의 가족들, 가짜로 공감했던 남자친구를 뒤로 하고 같이 울어주는 대안 가족의 역할을 보여주던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시퀀스로 뽑을 만하다. 보통 트라우마를 주던 쪽이었던 호러영화들이 이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플롯을 끌고 갔던 것이다. 물론 공포 분위기를 주던 방식 역시 신선했다. <살인 소설>이라는 영화가 있다. 에단 호크가 주인공이었다. 이 영화는 ‘점프 스케어’와 사운드를 중심으로 한 연출법으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것 같은 서스펜스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갔다. <미드소마>는 이 반대였다. 아예 대놓고 장면으로도 나온다. ‘설마! 헉!’같이 ‘실제로 이럴지도 모르겠다’라는 부분을 진짜로 구현하며 끔찍한 비주얼 호러를 묘사했다.
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도 색다른 연출방식을 가지고 있다. 우선 이 영화가 전작 두 편에 비해 호러영화의 장르적인 특성을 띄고 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기존의 감독 필모그래피에서 다른 지점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호러영화의 색을 띠고 있긴 하지만 장르적으로 보면 모험/판타지물에 가깝다. 하지만 기존 영화관을 계승한 지점도 있다. <유전>에서 딸을 떠나보내고 연대하는 두 인물, <미드소마>의 엔딩처럼 연대와 공감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면으로 여러 번 삽입된다. 또 영화에서 호러 분위기를 나타내던 방식 중 하나는 분위기다. 이야기의 서스펜스를 끔찍하고 두려운 이미지에만 머무르지 않고 주인공의 특성에 기반해서 만들었다는 부분은 감독의 전작을 떠올리게 한다. 이전과 다른 화법이지만 ‘역시 아리 애스터’라고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다. 대표적으로 영화는 몇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구체적으로 ‘몇 장’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는다). 이 챕터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어떻게 전개하는지를 유념하고 본다면 이는 아리 애스터의 상상력이 이런 곳에서 빛을 발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반복과 차이를 드러내는 방식은 영화의 선명한 개성으로 작동하며 엔딩신이 들어갈 이유가 된다.
카프카의 농담
1880년대 후반, 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은 프란츠 카프카.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고 감성적이었다. 하지만 엄한 아버지는 이런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폭언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아버지의 하대는 카프카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이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는 카프카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이어진다. 대표적으로 <변신>이 있다. 주인공 그레고르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 가장이다. 외로운 그레고르. 어느 날 눈을 떴는데 자기가 인간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이상하게 생긴 벌레로 변한 것이다. 벌레가 됐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될 리가 없다. 그레고르는 그렇게 쓸쓸하게 혼자 죽어간다. 정작 위기에 직면할 때 가족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다.
이 실존주의라는 테마는 카프카의 작품 세계에서 핵심으로 작동했다. <변신>만 봐도 그렇다.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생존’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에 대한 문제다. 가족들에게 헌신했지만 다시 버림받은 그레고르. 인생 내내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던 그레고르를 어떻게 다른 구성원들이 지켜줄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사람이 사는 데 있어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과도 이어진다. 분명 생존을 책임졌다면 가족들이 그레고르의 실존을 긍정해도 되는 것 아닐까? 영화는 이 생존에 대한 딜레마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단순히 이야기 구조만을 갖고 온 것은 아니다. 가족 구성원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인식론의 문제, 중반부부터 제시되는 몇 사건들, ‘벌레가 되었다’ 같은 극단적인 비유 같은 것들이 카프카의 색이 영화 안에 들어갔다는 느낌이 강하다. 대표적으로 1부 마지막에 벌어지는 일들은 불안장애에 대한 비유 같기도 하지만 세상과 나 사이, 그리고 가족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소재가 들어가 있다. 과연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세상에게 악영향을 끼치고 받는지를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이 영화가 사실 대중적으로 엄청나게 호평을 받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감독의 전작 <유전> <미드소마>가 대중적인 호러영화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야기 구조가 직선 형태라서 이해하기 크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솔직히 쉽지 않다. 분위기기에서 한발 더 들어가 거리 두기도 가까이 붙이며 반복함으로써 인간을 서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초현실적인 플롯에서도 반복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느낄 수 있다면 영화를 정말 잘 보고 있다고 쓰고 싶다. 감독의 이상한 유머감각이 잘 들어간 지점이다.
탄생의 이미지
영화에서 어떤 시각적인 이미지가 후반부에 나온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고 극에서 반복되는 한 키워드를 대표하는 이미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사실 영화의 핵심을 그대로 관통한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물이다. 작품의 첫 장면이 보가 어딘가에 있다가 나오는데 그것이 물과 관련이 있다. 이 물은 1부에서 단수와 홍수로 보여주다 2,3,4부로 넘어가면 각기 템포를 변형하며 각자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극초반부야 당연히 탄생의 이미지라는 걸 말할 수 있지만 이후부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당연히 강력한 스포일러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제일 첫 장면이 탄생과 관련한 일이고, 이를 중심으로 본다면 아리 애스터가 인간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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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을 바탕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인생의 오만 군데를 다 찌른다. 이 시선이 기괴하고 이상해서 관객 입장에선 '이게 뭔 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의 정서가 어땠을까 생각하고 영화를 본다면, 그러니까 우리가 어떤 입장에서 저런 기분을 느꼈는지 생각해 보면 영화를 보다 더 넓게 이해할 수 있다. 아리 애스터의 변태 같은 디테일이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불사조 폼 미쳤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호아킨 피닉스다. 사실 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보고 극장에 들어갈 사람이면 <조커>가 어떤 영화인지 알고 있다.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상이란 상을 싹 휩쓸었던 호아킨 피닉스. 이 영화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조커’는 참고 있다 폭발하는 연기라면 반대로 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내내 분출하는 연기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핵심은 불안장애다. 이 불안장애의 특징이 뭘까?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으로 틈입해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는 의미다. 이러려면 자그마한 것에도 사람이 불안해한다는 느낌을 줘야 한다. 특히 1부에서 질주하는 몇 장면, 극후반부 시퀀스 전부는 이 사람이 가진 연기자로서의 역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다시 체감하게 한다. 이 사람의 최근작은 <컴온, 컴온>이었다. 이 영화에서 임팩트 쾅 주고 내내 배경이 됐던 연기의 반대 측면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주 흥미로웠다.
주연의 연기뿐만 아니라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도 굉장히 훌륭하다. 우선 1부에서 보의 동선이 짜여 있는 방식을 본다면 인물 간의 동선을 세팅한 점이 꼼꼼하게 느껴진다. 이 동선을 촬영하는 구도도 어쩔 땐 시점 쇼트가 들어가고 인물의 표정이 제시되는지가 적재적소에 잘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야기에서 공간적 배경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집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으로 바뀌고 이 변한 공간이 영화에서 변곡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공간을 영화가 어떻게 차이점을 두고 묘사했는지를 본다면 영화가 인간사의 어느 부분을 꼬집고 싶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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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트> 시대를 바꿀 개인의 역동성을 담은 액션의 향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 일정 중 예상치 못한 테러 공격을 받고 가까스로 범인을 제압한 안기부 해외팀 팀장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 팀장 ‘김정도’(정우성). 뒤이어 도쿄에서도 북한 고위 관리의 망명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조직 내에 북한의 간첩인 '동림'이 침투했음을 확신한 박평호는 스파이 색출 작전에 돌입하고, 상부의 지시를 받은 김정도 역시 뒤질세라 동림을 쫓기 시작한다. 서로서로를 용의선상에 올려둔 채 조사에 박차를 가하던 해외팀과 국내팀은 먼저 찾지 못하면 첩자로 지목될 위기 속에서 치열하게 대립한다. 그러던 중 박평호와 김정도는 서로 숨기고 있던 은밀한 비밀에 접근하고, ‘대한민국 1호 암살 작전’의 실체를 깨닫는다.
사극이나 시대극을 보다 보면 유달리 영상화가 잘 되는 특정 시기가 있다. 여말선초가 대표적이다. 조선이라는 새 국가가 설립되던 혼란기를 배경으로 정도전, 이방원, 이성계, 정몽주와 같은 인물들의 피 튀기는 암투는 수없이 조명되고, 또 재조명되었다. 사무라이의 전성기가 열렸던 일본의 전국시대, 한나라가 무너지고 긴 혼란기의 시작을 알린 중국의 삼국시대, 이에 더해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도 수많은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시대는 공통점이 있다. 사회적 질서가 무너지고, 국가와 법의 영향력보다 주먹과 칼, 총의 힘이 더 강하며, 개인들의 역동성이 두드러지는 시기다. 격동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본래 지녔던 신념과 명분을 고수하거나 포기하는 이들의 대립, 과거의 질서를 따르는 이와 새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이들의 갈등. 이러한 분열과 싸움은 심지어 한 개인 안에서도 치열하게 펼쳐진다. 그저 시대에 순응하여 장기 말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설령 꺾기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의 주체로서 시대에 맞설 것인지. 그 덕분에 이들의 이야기는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는 감독 이정재의 첫 연출작인 첩보 액션 영화 <헌트>에서 화려한 액션보다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두 주인공의 에너지가 눈에 먼저 들어오는 이유다. 1980~83년을 관통하는 팩션 영화인 <헌트>는 '이웅평 대위 미그-19기 귀순 사건'과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을 모티브로 삼은 사건들을 선보인다. '장영자 금융사기 사건'도 잠시 스쳐 지나가며 '5.18 광주 민주화운동' 역시 한 축을 차지한다. 이에 더해 작중 북측 간첩을 지칭하는 암호명 동림은 안기부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간첩 조작 사건인 '동베를린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들은 여말선초만큼이나 혼란했던 전두환 신군부 초반부의 시대적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과 안기부의 고문 및 간첩 조작은 전두환 정권 치하의 불안정성을 상기시킨다. 간첩을 침투시키고 전면전을 준비하는 북한은 군사 정권을 위협하면서도 그들에게 명분을 주는 양날의 검이다. 대학 운동권들은 뚜렷한 목표나 수단에 대한 합의도 없는 뜨내기일 뿐이고, CIA로 대변되는 미국은 인권보다는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 유지에만 관심 있는 존재다. 이들은 한데 모여 좀처럼 올바른 선택지를 알 수 없는 카오스와도 같은 무채색의 시대상을 그려낸다. 그래서 <헌트>는 불필요한 논란에 휩싸이지 않는다. 영화는 특정 사건에 대한 정치적 입장에 관심이 없다. 그저 사건에 휘말린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고, 그들이 어떻게 시대의 풍파에 맞서고 있는가에 주목한다.
덕분에 <헌트>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파도를 헤쳐 나가는 개인들의 발버둥에 주목할 수 있다. 당장 <1987>, <택시 운전사>, <화려한 휴가>, 그리고 살짝 앞선 시간대의 <남산의 부장들> 등만 보더라도 생사와 옳고 그름의 갈림길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는 개인들을 그려낸 바 있다. <헌트>도 다르지 않다. 그 결과 <헌트>는 첩보 액션 영화 중에서도 <007> 시리즈보다는 시대극과 스파이 장르물을 오가면서 개인의 고뇌와 선택에 주목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 가깝다.
이 혼란의 중심에는 안기부 요원 ‘박평호’와 ‘김정도’가 위치한다. 안기부 해외팀 팀장인 ‘박평호’는 조직 내 침입한 스파이 동림으로 인해 도쿄에서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실체를 맹렬히 쫓는다. ‘김정도’는 안기부 국내팀 팀장으로, 안기부 내에서의 스파이를 색출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이행한다. 박평호는 김정도를 동림으로 몰아가기 위해, 김정도는 박평호를 동림으로 몰아가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남산의 부장들>에서도 본 적 있는 2인자가 되기 위한 두 세력의 다툼이 이어진다. 이때 <헌트>는 영화 내외의 다양한 수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갈등의 양상을 다채롭게 변주한다. 우선 스타의 존재감을 활용해 긴장감을 조성한다. 이정재와 정우성이 23년 만에 한 작품에서 조우했다는 화제성을 오프닝부터 영화의 동력으로 삼아 두 주인공의 관계를 단숨에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첩보 영화의 정체성을 모범적으로 살려낸 구현해낸 구성과 연출도 인상적이다. '첩보'는 '상대편의 정보나 형편을 몰래 알아내어 보고'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잘 만든 첩보 영화는 극 중 인물들에게 언제 정보를 공개할지 그 타이밍을 정확히 잡아, 긴장감을 지속시킬 줄 안다. 또 스토리텔링이 결국 관객들에게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걸 고려하면, 정보를 둘러싼 줄다리기는 첩보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완성도를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그래서 안기부 내의 첩자인 동림의 정체를 두고 전반부와 후반부가 극명히 갈리는 <헌트>의 구성은 영리하다. 서로 다른 의미의 '사냥(hunt)'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대책 없이 부딪히는 전반부의 박평호와 김정도는 양극단에 서서 다른 극단을 제거하는 데 혈안이 된 권력의 장기짝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림의 정체라는 정보가 공개된 이후 그들은 같은 목적을 쫓는다. 서로가 감추고 있던 '불꽃 작전'과 '베드로 사냥' 계획의 일부에 대해 알게 된 두 주인공은 이제 동시에 1호라는 사냥감을 추적한다. 그런데 박평호와 김정도가 한 팀이 되었는데도 영화의 갈등선은 오히려 입체적으로 변한다. 북한의 전면전 계획이라는 정보를 알고 있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는 마지막 사냥의 목적과 의미를 두고 서로 다르게 판단하고 선택한다. 두 인물 간의 외적 갈등에 자기 자신을 쫓는 내적 갈등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사건 사이에서 권력의 장기 말이었던 이들이 시대를 거스르는 한 명의 개인으로서 움직이는 새로운 페이지의 시작을 알린다. 그렇기에 영화가 박평호와 김정도의 비밀을 공개할 때 그들이 문자 그대로, 또 상징적으로 손을 맞잡으며 사냥의 의미가 달라지는 장면의 임팩트는 대단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는 사냥의 중심에 위치한 두 인물의 타협할 수 없는 신념 간의 충돌, 곧 영화의 메시지에는 자연히 힘이 실린다. 남한과 더 나은 평화 협상을 끌어내기 위해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북한 간첩 동림과 대통령을 암살하고 독재를 청산하여 광주에서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넋을 달래주고 민주주의 실현을 꿈꾸었던 군인. 이들은 정당하지 않은 국가의 폭력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고, 대규모 유혈 사태가 필연적인 전쟁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도 남북의 군사적 대립과 유신정권의 붕괴, 쿠데타와 실패로 귀결된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는 시대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헌트>가 진정으로 비판하는 것은 그저 한 명의 독재자가 아니다. 서슬 퍼런 권력과 혼돈 앞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한 개인의 무기력함이야말로 숨어 있던 진짜 내부의 적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방콕 테러 사건은 이 메시지를 역설적으로 풀어낸다. 블록버스터에 걸맞은 액션으로 가득한 클라이맥스이자 동시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한 곳으로 집약된 고통의 현장을 그려낸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인물은 모두 자신의 신념을 실천에 옮기는 데 실패한다. 한 명은 우려했던 대규모 살상 사태를 막아 세우는 데 성공했지만, 온전히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데는 실패한다. 다른 한 명은 죄책감을 씻어낼 암살 미션의 성공을 목전에 두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모래 마냥 놓치고 만다. 하지만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너져 잿빛 가득한 테러 현장에서 기어코 다시 총을 쥐고, 또 총을 쥔 이를 막아서는 이들의 모습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그들의 신념이 강렬하게 전해진다. 권력에 충실했던 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역동적인 개인들의 에너지가 스크린 위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박평호와 '조유정(고윤정)'이 바통 터치하는 <헌트>의 에필로그는 희망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혼란한 시대의 파도 앞에서 개인의 신념과 뜻이 꺾이는 듯 보이더라도, 끝내 한 발 더 나은 세상과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포기하지 않으며 반성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꿀 줄 아는 개인들의 역동성을, 아이러니하게도 시대를 극복하지 못한 개인들의 실패가 담아낸다. 이처럼 1980년대라는 시대의 틀에 갇히지 않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확장되는 영화의 끝은 강렬한 액션만큼이나 여운이 길다.
이러한 구성과 주제, 메시지는 <헌트>가 상당히 영리한 영화이기에 더욱 눈에 띈다. 사실 <헌트>는 단점도 적지 않다. 전반적인 이야기 구조가 꽤 복잡할 뿐만 아니라, 1980년대 한국 현대사를 일정 수준 알지 못하면 100%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또 쉬어가는 틈이 없이 전력으로 내달리는 영화라서 피곤할 수도 있다. 스릴러라 하더라도 긴장감과 압박감을 조절하는 리듬감이 있어야 마지막까지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데, 끝없이 정보와 사건이 쏟아지기에 벅차게 느껴질 여지가 있다. 이에 더해 폭발음과 총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대사를 알아듣기 힘든 고질적인 음향 문제도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는 데 온 힘을 쏟은 결과 위와 같은 단점은 눈에 크게 띄지 않는다. 액션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헌트>의 액션은 기본적으로 양도 많고, 현장감을 잘 살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부닥친 주인공이 주도권을 잡지 못한 채 상황에 끌려가는 장면이 대다수라서 긴장감도 상당히 높다. 보여주기 위한 액션이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꼭 필요한 암시와 복선을 액션에 담아낸 것도 인상적이다. 액션씬을 보다 보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의문점이 있는데, 그 의문점들이 한데 모이다 보면 영화의 반전과 전체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에 더해 핵심적인 인물들의 감정이나 행동에 변화를 주는 분기점을 액션으로 표현해 강렬한 인상을 준다. 대표적인 것이 박평호와 김정도가 한데 뒤얽혀 싸우고, 계단을 뒹굴며 떨어지는 모습으로 끝나는 사내 난투극이다. 작중 유일한 일대일 맨몸 액션으로, 둘 중 누가 우위에 있고 누가 감정적으로 쫓기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의 모든 메시지가 집약된 방콕에서의 테러 장면도 개인의 에너지와 역동성을 숱한 폭발 장면을 통해 분출시킨다. 그러다 보니 관객은 자연히 숨어 있는 단점을 굳이 들춰내는 것보다 확연하게 드러나 있는 장점에 집중할 수 있다. 이렇게 감독 이정재의 데뷔작은 묵직하고 씁쓸한 첩보 액션의 참모습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총성과 폭발음 안에서 주체로 거듭나는 장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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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 오브 더 데드> 질서의 파괴가 아닌 충돌을 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군용 운송 차량이 불의의 사고로 전복되자, 그 안에 갇혀 있던 모체 좀비 '제우스'는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라스베이거스로 향한다. 제우스로부터 전염된 좀비들에게 도시가 속수무책으로 점령당하는 사이 '스콧(데이브 바티스타)'과 그의 딸 '케이트(엘라 퍼넬)', 친구인 '마리아(아나 데 라 레게라)'와 '반데로(오마리 하드윅)'는 격렬한 사투 끝에 도시가 봉쇄되기 직전 탈출에 성공하고 트라우마와 불안함 속에서 힘겹게 각자의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업가 '타나카(사나다 히로유키)'는 스콧에게 라스베이거스에 위치한 자신의 금고에 들어있는 거액의 현금을 꺼내 달라고 부탁하고, 비로소 삶의 목표를 찾은 그는 팀을 꾸려 다시금 좀비가 우글거리는 도시에 들어선다.
지금은 <저스티스 리그>, <맨 오브 스틸> 등의 히어로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잭 스나이더 감독. 사실 그는 히어로 영화를 맡기 전부터 혁명적인 좀비 영화 <새벽의 저주>(2004)로 이미 명성을 얻었다. 이는 <새벽의 저주>가 협소한 공간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수많은 좀비들이 조성하는 공포심 대신, 속도와 근력을 갖춘 좀비들이 사회와 질서를 무너뜨리는 찰나의 순간과 혼란 속에 응축된 공포와 두려움을 묘사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스나이더 감독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20여 년만에 메가폰을 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아미 오브 더 데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한번 좀비 영화에 '사회 질서의 붕괴와 혼란' 대신 '서로 다른 사회 질서의 충돌과 긴장'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당장 <아미 오브 더 데드>는 시작부터 결이 다르다. <킹스맨>의 교회 액션 시퀀스를 연상시키는 잔인하나 흥겨운 오프닝은 군용 수송 차량에서 탈출한 모체 좀비, 제우스가 라스베이거스를 장악하는 아비규환을 간결하게 묘사한다. 5분가량 되는 이 시퀀스는 카지노에서 유흥을 즐기던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고, 도시는 공습으로 불타며, 라스베이거스가 컨테이너 벽으로 봉쇄되는 와중에 스콧을 비롯한 주인공 일행 중 일부만 간신히 도시 밖으로 빠져나오는 이야기를 함축한다. 좀비 영화 한 편을 만들기에도 충분한 내용을 <아미 오브 더 데드>는 가볍게 짚고 넘어간다. 이는 과거의 관습과 규칙에 갇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기존의 좀비 영화들과는 차별화된 이야기를 보여주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스콧 일행이 라스베이거스가 첫 발을 내딛는 장면에서 영화의 의도는 더욱 분명해진다. 스콧 일행은 좀비들로 가득한 라스베이거스가 얼마나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난장판 일지 걱정한다. 하지만 이미 도시를 드나든 경험이 있는 '릴리(노라 아르네제더)'는 그들에게 좀비도 규칙이 있으며 그 규칙을 따르면 안전하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 직후 영화는 규칙을 자세히 보여준다. 지능을 가진 이 좀비들은 인간을 봤다고 바로 달려들지 않는다. 그들은 도시에 발을 내디딘 사람들을 즉시 죽이는 대신 그들과 일종의 약속을 맺는다. 인간들이 좀비들의 왕, 제우스에게 바칠 희생양을 내놓으면 좀비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무엇을 하든 관여하지 않는다. 이렇게 좀비들의 세계에 입장하는 순간부터 <아미 오브 더 데드>는 질서가 붕괴되는 과정, 무너진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투보다는 좀비의 사회와 인간의 사회가 어떻게 만나고 충돌하게 되는지에 주목한다.
이는 플롯이 상당히 유사한 연상호 감독의 <반도>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보이는 지점으로, 두 영화의 시간적 배경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어두운 밤 동안 대부분의 사건이 진행되는 <반도>에서 좀비들이 점령한 한반도는 그저 생존만이 목표인 아비규환이다. 하지만 작중 대부분 밝은 낮 동안 진행되는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사건들은 좀비들의 사회에도 나름의 규칙과 질서가 작동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렇기에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새벽의 저주>의 속편이 아니다. 보여주려는 사회상이 다르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또한 무질서함과 혼란 대신 안정적인 좀비들의 사회나 질서를 중점적으로 묘사하다 보니 자연히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기대에 비해 액션도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들이 충돌할 일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영화는 좀비와 인간이라는 이질적인 존재 간의 사회가 이루는 대립항을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하면서 좀비물 특유의 사회비판적 메시지, 더 나아가 인간 본성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다. 우선 스나이더 감독은 곳곳에 종교적, 신화적 상징물을 배치하면서 좀비와 인간 사회의 관계를 고대와 현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유비로 변환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제우스의 존재다. 그리스 신화 속 최고신의 이름을 쓰는 그는 신들의 궁전인 올림푸스의 이름을 딴 호텔을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등장 장면이 의미심장한데, 그는 자유의 여신상 위에서 태양을 등진 채 희생양을 바치는 스콧 일행을 내려다보면서 등장한다. 이러한 구도는 마치 산 위에서 신이 지상의 인간을 내려다보는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좀비에게 신화적인 치장을 덧입히는 연출 덕분에 좀비와 인간의 관계, 그리고 좀비가 점령한 라스베이거스라는 도시의 함의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작중 좀비와 인간의 관계는 신과 인간을 지속 가능한 선의의 관계로 여긴 고대인들의 믿음을 연상시킨다. <고대 이집트의 신전 Temples of Ancient Egypt>의 저자 브라이언 E. 샤퍼(Brian E. Shafer)에 따르면 고대 종교적, 신화적 질서란 신이 인간에게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삶과 세상을 베풀었다는 점에서 시작된다. 이후 인간은 신이 베푼 세상에 대한 감사함과 그 세상을 앞으로도 유지해줄 것에 대한 기대를 공물(희생양)에 담고, 인간의 선물을 받은 신은 다시 인간들에게 호의를 베푼다. 이러한 연쇄작용의 결과 신과 인간은 명령과 복종 혹은 단순한 가치의 교환이 아닌 호의의 증식 관계 안에 머문다.*
영화에서도 좀비들은 언제든 인간을 먼저 공격할 수 있었지만,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규칙을 따를지 말지 선택할 기회를 준다. 또한 희생양을 받은 후에는 인간이 자신들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가능한 한 약속을 지키며, 바쳐진 제물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죽이는 대신 새로운 생명을 부여한다. 동일한 가치를 거래,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호의로써 약속을 맺고, 신뢰를 지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라스베이거스에서 형성되는 좀비와 인간의 관계와 그 중심에 위치한 희생제물의 존재는 고대적, 신화적 질서 및 공물과 유사한 측면이 있으며, 라스베이거스는 종교적, 신화적 공간이자 고대적 질서가 자리 잡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반면에 작중 라스베이거스 외부의 공간은 철저히 현대 자본주의적 질서가 자리 잡은 곳으로 묘사된다. 자본주의 사회란 어떤 의미에서 모든 존재와 가치가 돈으로 치환될 수 있는 사회라고 볼 수 있는데, 영화는 좀비 영화에 하이스트 무비를 더하면서 이 지점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돈'이다. 난민 캠프에서 케이트와 친구 '기타(후마 쿠레시)'는 돈만 있다면 캠프 관리자에게 위협과 성희롱을 당하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돈이 그 어떤 사회적 시스템보다도 우위에 서 있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기타는 심지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좀비들이 가득한 라스베이거스에 잠입해 카지노에서 현금을 빼돌리려고 한다.
스콧이 팀원들을 모으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그는 모든 설득을 돈으로 행한다. 팀원들도 각기 어떤 삶을 살고 있든 간에 거액의 현금을 가져오면 된다는 말만 듣고 미션에 뛰어든다. 또 임무 중에도 각각의 수익을 배분하는 것에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역할의 중요도에 따라 좀비의 공격으로부터 구해줄지 말지를 정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불가능한 미션을 맡기는 흑막 타나카의 목표도 궁극적으로는 더 많은 돈인 것으로 드러난다. 상대방을 향한 호의나 신뢰 대신 철저한 계산과 교환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아미 오브 더 데드>는 이러한 좀비 대 인간의 구도를 고대 대 현대, 호의적 대 계산적, 신뢰 대 교환의 관계로 점진적으로 치환시킨다. 은연중에 전자를 '이타적이고 배려적인 삶의 태도'로, 후자를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삶의 방식'으로 정의하면서 전자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괜히 가장 황금만능주의적 이미지가 가장 강한 도시인 라스베이거스를 좀비에게 넘겨준 것이 아니다. 스콧의 팀원들이 언제 위험에 처하는지를 봐도 영화의 스탠스를 알 수 있다. 팀원 간의 기대를 저버리고 잘못된 정보를 줄 때 혹은 돈을 노리고 여왕을 공격해서 제우스의 아이를 죽였을 때 스콧의 팀은 좀비들의 공격을 유발하고 엄청난 재앙을 마주한다. 반대로 서로의 기대와 신뢰를 버리지 않고 좀비의 질서에 순종해 제우스와 여왕을 공격하지 않고, 팀워크를 발휘하자 그들은 금고의 문을 여는 데 성공한다.
특히 케이트는 이러한 주제의식을 가장 명확히 표현하는 캐릭터다.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관점에서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자신보다 타인의 목숨을 먼저 챙기는 그녀의 독단은 어리석은 행위다. 그러나 호의가 호의를 낳는 새로운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녀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실제로 케이트가 기타를 구하려고 한 행동들은 스콧과 헬기 조종사 마리안, 유튜버 마이키와 릴리의 선의를 낳고, 그들의 선의가 모인 결과 그녀는 목숨을 구한다. 스콧이 '딸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아버지'라는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데도 그의 행적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딸이 자살한 감독의 개인사도 영향이 있겠지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내러티브와 구도를 통해 좀비에게 신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연출이 좀비보다 우월한 인간의 관계를 역전시킨 결과, 인간의 존재와 가치가 무시되는 각박한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이라는 좀비 영화 다운 주제의식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말하고자 하는 내용, 메시지, 주제의식과 감정선과는 별개로 <아미 오브 더 데드>에서 상징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은 호불호가 갈리는 요소일 수밖에 없다. 상징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한 화면 안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집어넣는 특유의 스타일은 필연적으로 충분한 상황 설명의 부재로 이어져 불친절한 영화로 인식될 여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특히 좀비 영화가 캐릭터에 따라 좀비로 변하는 속도가 달라지는 등 유달리 장르 고유의 문법이 두드러지는 장르이다 보니 설명의 부족은 설득력의 저하, 개연성과 핍진성의 문제를 피하기 어렵다. 주제의식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케이트의 행동이 아무 맥락 없이 답답해 보인다는 사실은 이 작품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미 오브 더 데드>는 분명 완성도에 문제가 있다. 화려한 액션이나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를 기대하는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그 화법과 스타일이 호불호가 갈린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본인의 커리어 시작점으로 되돌아간 스나이더 감독의 초심과 변화가 동시에 느껴지는, 즉 본인이 제시했던 좀비물의 관습에 머무른 단순한 속편이 아니라는 측면에서는 주목해볼 가치가 있다. 좀비라는 소재로부터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상상력과 세계관을 마음껏 펼쳐 보인다는 점에서 <아미 오브 더 데드>가 장르물의 영역을 한 발짝 더 넓힌 것 역시 분명하기 때문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지루한 팝콘무비 혹은 상징과 유비가 가득한 좀비 영화의 새 지평
*Byron E. Shafer et al, Temples of Ancient Egypt. (New York: Cornell University Press, 1997),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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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소년과 초여름을 기다리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
-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스프링 블라썸>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글입니다.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
<스프링 블라썸>은 수수한 블라우스를 입고 광장을 배회하며 한 소년과 초여름을 기다리는 '수잔'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프랑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랑에 빠진 수잔을 바라보다보면 어느덧 그녀의 마음에 동요되어 몽글몽글해진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잔(수잔 랭동)'은 학교와 또래 친구들에게 재미를 못 느끼고 하루하루가 지루하다는 생각을 하는 16살의 여자다.
거리와 광장을 배회하던 수잔은 우연히 한 극장 앞에서 '라파엘(아르노 발로아)'을 발견한다.
라파엘에게 첫 눈에 반한 수잔은 그가 연극배우라는 것을 알아챘고, 자꾸 그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수잔은 극장에 몰래 들어가서 그가 연극 연습을 하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하고, 부모님께 대뜸 연극 보러 갈 생각은 없냐고 질문하기도 한다.
그리고 라파엘이 빵에 딸기잼을 발라먹는 모습을 본 뒤 집에 돌아와서 엄마께 빵에 딸기잼을 발라달라고 하기도 한다.
어느 날은 고장난 스쿠터를 고치고 있는 라파엘의 모습을 발견하고 집에 돌아와 아빠께 고장난 스쿠터는 고칠 때 오래 걸리냐, 와 같은 질문도 한다.
또한, 아빠께 남자들은 치마 입은 것을 좋아하냐, 바지 입은 것을 좋아하냐, 라는 질문을 던진 뒤 아빠가 치마라고 대답하니까 바로 치마를 입고 라파엘을 만나러 가기도 한다.
항상 모든 시선은 그를 향해 있고, 부모님께 대뜸 그와 관련된 질문을 던지고, 하지만 자세한 상황은 얼버무리고, 그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해보고.
모두 내가 한 번쯤은 겪어본 행동들이어서 수잔을 보며 그저 웃음이 났다.
그리고 수잔의 마음에 100% 공감이 되었다.
수잔의 서툴지만 또렷한 행동에서 그녀의 순수한 마음이 비춰져서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한편, 라파엘은 같은 연극을 계속 반복해서 하면서 점점 연기에 재미를 잃어가던 35살의 남자다.
그리고 연기하는 것을 잊어버릴까봐 항상 걱정하는 사람이다.
라파엘 역시 수잔에게 끌렸다.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어느 날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라파엘에게 수잔이 책을 들고 다가왔다.
그런 수잔을 보고 라파엘은 책을 좋아하냐, 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먼저 말을 건넨다.
이때 수잔은 소설을 주로 읽지만 극작품도 좋아한다는 답을 한다.
극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연극배우인 라파엘과의 공통점을 형성하려는 수잔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하던 사람과 닮은 점이 많다는 사실을 어필하고 싶어하던 예전의 내 모습이 비춰져서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이후 라파엘은 수잔이 시킨 석류 레모네이드를 맛보더니 자신도 같은 음료를 하나 주문한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함께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라파엘은 스쿠터를 가지고 수잔의 집에 왔다.
하지만 수잔은 아직 미성년자여서 부모님이 스쿠터를 못 타게 하시기 때문에 결국 라파엘은 이 스쿠터를 힘겹게 끌면서 다녔다.
이 영화는 이렇게 소소한 웃음포인트가 곳곳에 가득한 작품이다.
이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다.
특히나 수잔은 남자에게 큰 호감을 가졌지만, 35와 16이라는 큰 나이차라는 현실의 벽을 깨닫게 되었다.
이 감정이 북받칠 정도로 커진 어느 날, 수잔은 펑펑 울면서 엄마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너무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그런데 그 남자와의 나이차가 너무 크다고.
엄마는 딸을 안아주며 조용히 그녀를 위로해준다.
이 장면을 보자마자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마지막 즈음의 엘리오와 엄마의 장면이 떠올랐다.
첫사랑과 현실을 마주하고 처음으로 느껴보는 북받치는 감정들로 인해 펑펑 우는 아들을 조용히 위로해주는 엄마.
자식의 서툴지만 진심이었던 감정을 이해하고, 조용히 토닥여주는 엄마.
시간이 지난 뒤, 수잔의 뜨거운 감정과 짝사랑은 점점 식어갔다.
날 것 그대로였던 감정은 점점 그 뚜렷한 형태를 잃어갔다.
라파엘을 사랑하는 수잔의 감정은 자연스레 사그라들었고, 영화의 마지막, 항상 그의 근처를 배회하던 그녀는 그의 극장을 그저 바라본 뒤 자신의 길을 떠났다.
그런 영화가 있다.
독특한 전개나 색다른 내용이 담긴 것은 아니지만, 영화가 지닌 분위기 자체만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런 작품.
이 영화가 바로 그렇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영화가 지닌 분위기만으로 관객을 홀리고, 관객을 설레게 하고, 살풋 웃음이 나오게 만든다.
또한, 러닝타임 내내 관객도 영화 속 공간에, 영화에 담긴 봄과 여름 사이에 있는 선선한 날씨의 순간에 살게끔 만든다.
이 영화를 보는 순간에는 나도 내가 좋아하는 셔츠나 블라우스를 입고 내 온마음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프랑스의 거리와 광장을 배회하는 경험을 했다.
이 영화의 또다른 매력 포인트는 바로 영화의 곳곳에 있는 뮤지컬 요소였다.
뮤지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처럼 수잔이 거리를 걷다 갑자기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라파엘과 수잔이 극장에서 음악에 맞춰 조화롭게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그리고 라파엘이 수잔에게 자신의 헤드셋을 씌워준 뒤 같은 동작으로, 같은 호흡으로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처음에는 조금은 느닷없게 느껴져서 놀라기도 했지만, 이러한 요소들로 인해 오히려 영화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장면들로 인해 영화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더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감독이자 주연 배우인 수잔 랭동의 노래가 나오며 끝이 난다.
나는 봄과 여름 사이의 날씨였던, 기분 좋은 선선함이 가득한 날에 이 영화를 봤다.
리뷰를 쓰는 이 순간, 그 날의 기억을 되짚어보면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영화의 분위기와 딱 맞는 날씨에 이 영화를 관람하다니.
수잔은 자신을 한 소년과 초여름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 영화를 보다보니 어느덧 나도 초여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연한 여름이 다가오기 전에 이 낭만적인 영화를 꼭 관람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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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명적 사랑 이야기라고만 하기엔,
넷플릭스 인공지능 님께서 안보겠다고 무시하는 나를 무시하고, 꾸준히 추천해주던 드라마가 있었다. 사실 넷플릭스에 포진해있는 중국드라마는 너무 터무니없는 설정에 로맨스 부어버리기가 주요 플롯인 드라마들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왜 넷플릭스는 나에게 보지도 않을 드라마를 추천하는지 너무 짜증이 나려던 찰나에 하다하다 유튜브까지 이 드라마를 추천하기에 도대체 뭔데? 하며 짜증스레 시도한 이 드라마, 굉장히 흡입력 있었다. 이쯤되면, 인공지능 정말로 무섭다. 내 취향을 정말 잘 파악하는구나, 이녀석......
상견니, 한국어로 해석하면, "널 보고 싶어" 인만큼 이 드라마는 로맨스다. 내 글을 한 번 이상 읽어주신 분들이 계시다면, 나는 로맨스를 정말 못본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특별한 특징이 없이 멜로이기만 한, 드라마는 못본다. 이것은 드라마의 웰메이드 여부를 떠나, 내 성격의 지랄맞음 때문이며, 드라마에서 오글거리는 장면을 단 10초도 못 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일례로, 현재 내 친구들, 지인들은 모두 보고 있는 갯마을 차차차는 친구들의 권유로 8화까지 억지로 보다가 포기했다. 와, 김선호 배우를 꽤 오랫동안 좋아했음에도 로맨스의 벽을 뚫을 수는 없었다. 친구들이 정말 아까워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우선 첫 째, 이 드라마가 타임루프물이기 때문이었고, 일종의 추리물이라고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범인을 찾고, 그 범인의 행동을 유추하는 것만 해도 충분히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추리물 덕후이기에 가능했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만큼 주인공들의 로맨스 감정을 덜 부담스러워하면서 따라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 드라마의 스릴러적인 요소들이 한 몫 했다.
따라서 내가 이 드라마를 추천하는 것은 많은 이들의 동의를 받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이 드라마의 인물들 간의 로맨스 기류 때문에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본 사람들이 대다수인 것 같고, 나같이 스릴러 부분에 집중해서 본 사람은 크게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1. 운명론적 로맨스 클리셰의 변주
이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난 우리 나라의 드라마가 있었다. 찾아보니, 무려 2013년작이었던 드라마 '나인'이다. 두 드라마의 공통점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시나리오라는 점이다. 하지만 상견니에서 시간 여행을 하는 매개체는 음악이지만 나인에서는 주인공이 향을 피우면,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이었던 만큼 그 매개체가 향이었다.
시간여행을 하는 매개체가 음악이든 향이든 결국 이 드라마의 로맨스 장르적 요소를 극화시키는 부분들이다. '다음 생에, 다른 시간에 존재해도 이 세상에 내 짝은 온리원 너 하나'라는 타임루프적 세계관은 운명론적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확실히 각인시키기는 하지만 그것마저도 현 시점에서도 많이 익숙한 플롯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드라마도 굉장히 특이한 드라마인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운명론적 사랑을 논하는 클리셰가 참 많다.
하지만 클리셰에는 수많은 변주가 가능하기 때문에 이 드라마가 약간의 변주를 꾀한 부분이 있다면, 도플갱어의 존재였다. 천윈루와 황위쉬안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성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같은 상황이어도 인격이 천윈루냐 황위쉬안이냐에 따라서 상황이 달리 흘러갈 수 있는 긴장감을 조성하기 때문에 같은 몸을 두 인격이 공유한다는 설정이 이 드라마를 비단 운명론적인 클리셰에 갇히지 않게, 덜 진부하게 만드는 포인트였다고 생각한다.
2. 천윈루를 죽인 것은 사람일까, 마음일까
세대는 다르지만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살아가는 다른 인격이 있다는 설정이 이 드라마의 또다른 흥미 요소인 이유는 각기 다른 인격은 각기 다른 주체적인 행동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에서는 같은 얼굴로 태어났지만 상반된 두 여자, 황위쉬안과 천윈루가 등장한다. 황위쉬안은 인기도 많고, 사회성도 좋은 커리어우먼이지만 천윈루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학교에서도 친구 없이 자발적 왕따로 살아가는 컴플렉스 덩어리이다. 그런데 황위쉬안이 천윈루의 몸에 들어가면서 갑자기 학교에서 인기가 많아지고, 자신이 좋아하던 리쯔웨이의 사랑을 받는 황위쉬안의 모습을 보면서 어딘지 모를 공간에 갇혀있던 천위루의 정신은 황위쉬안에 대한 질투에서 비롯된 자괴감을 느낀다. 드라마를 꾸준히 보면서 천윈루가 황위쉬안을 비교하는 데에서 온 자괴감이 결국 언젠가 큰 사단을 낼 것이라는 예상을 하게 만드는데, 그렇다면, 그 자괴감이 천윈루를 죽인 것인지, 아니면 그 자괴감과 상관없이 그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인지 궁금증을 끝까지 자아낸다. 바로 이 부분이 내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된 내용적 요소였다.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것은 세상에게 실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기대가 많기 때문이란 걸
이 드라마를 시공간을 뛰어넘은 운명적 사랑 이야기로만 보지 않은 나에게 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궁극적 메시지는 시공간을 뛰어넘은 운명적인 사랑의 구현이 아니라 자존감이 낮은 한 여학생의 삶에 대한 관점 바꾸기 프로젝트의 실현이라고 생각했다. 천윈루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천윈루 자체로도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였는지 천윈루 내면의 삐뚤어진 시선을 자각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그 시선을 지적하고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는 이가 있음을 알게 하는 것만으로도 천윈루는 더 이상 우울의 터널 깊숙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천윈루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는 것보다 이런 황위쉬안과 천윈루 사이의 관계성은 모든 캐릭터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드러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작가는 황위쉬안의 몸과 정신을 빌려, 한 인간의 불안한 청춘의 삶을 응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3. 총평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의 주요 로맨스가 열린 결말로 끝나서 아쉽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도 열린 결말이다 보니, 우리가 드라마 상에서 봐온 로맨스 씬들이 결국 의미없는 씬들로 소비되고, 내 눈앞에서 주인공들이 꽁냥대는 실체적 로맨스가 없으니, 허탈해서 그런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나는 주요 커플의 로맨스가 끝난 것이 아니고, 내 눈앞에서 이 사람들이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있지 않아도 모든 캐릭터들이 행복한 상황 속에서 이들이 다시 만나 사랑할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더 긍정적이지 않나 생각했다. 많은 관객들이 바라는 것처럼 주요 인물들의 사랑에는 천윈루의 죽음과 모쥔제의 죽음과 같은 크나큰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모쥔제까지 포함된 세 사람의 우정이 비극으로 끝나는 것보다는 미래에 새로운 사랑을 그려나갈 그들의 긍정적인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더 낫지 않나 그렇게 정리했다. 그렇게 크나큰 희생을 감수해야할 만큼 대단한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드라마의 마지막 오토바이씬에서처럼 결국 이들은 어떻게든지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할 것이라는 암묵적 메시지를 넌지시 던져준 결말이 덜 슬퍼서 좋았다.
난 이게 문제다. 모든 사람들이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 현실은 그럴 수가 없으니, 영화에서조차 모든 이들의 공평한 해피엔딩을 바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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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킹스맨이 한국에서 성공한 이유 #3
환몽(幻夢) CINE 리뷰 3화_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 킹스맨 감독과 인물 소개 및 비화
- 킹스맨이 왜 유독 한국에서 성공했을까?
-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제
- 기타 영화 관련 썰 - 일루미나티 등
- 우리가 꼽은 명장면
- 몽's 한줄평
영화 '킹스맨 : 시크릿 에이전트'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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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폭행 피해자, 아줌마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지난 20회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공동 대상을 수상한 영화 갈매기가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씨네랩의 초청으로 개봉 전 시사회에 참석하고 왔는데요.
김미조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인데 인디 영화임에도 매우 흥미롭게 본 영화입니다.
한 중년 여성이 가까운 사람에게 성폭행을 당하게 되고, 그 이후에 피해자의 심리와 행동을 세심히 보여주는데요.
피해를 당하는 모습은 영상에 담지 않고 오로지 피해자의 모습을 통해 모든걸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줌마라고 불리는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중년 여성이라서 그의 피해사실을 주변에 알리기 어려워하는 장면도 나오는데요.
결국 꿋꿋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그의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특히 우리가 흔히 아줌마라고 부르는 존재들에 대해 생각이 많이 했습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 하세요!
영화는 7월 28일에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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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오필리아> 메인 예고편
“드디어 내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왔군요”
현명함과 자유로움을 지닌 오필리아는 왕비 거트루드의 총애를 받아 왕실의 시녀가 된다.
왕실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오필리아에게 첫눈에 반한 왕자 햄릿은 운명적 사랑에 빠지지만
신분의 격차로 인해 두 사람의 사랑은 위기를 맞는다.
선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왕국은 혼란에 빠지고,
오필리아는 이 사건의 배후에 커다란 음모가 감춰져 있음을 알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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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학교 가는 길> 티저 예고편
전국 특수학교 재학생의 절반은
매일 왕복 1~4시간 거리를 통학하며
전쟁 같은 아침을 맞이한다
장애 학생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특수학교
아이를 위해 거리로 나선 엄마들은
무릎까지 꿇는 강단으로 맞서는데…
세상을 바꾼 사진 한 장,
엄마들의 용기 있는 외침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