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10-30 23:08:16
다정한 포옹, 괜찮다는 말
영화 <앵그리 애니> 리뷰
SYNOPSIS.
1974년 프랑스 교외의 한 작은 마을.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애니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된다.
다행히 MLAC(임신중지와 피임의 자유를 위한 운동)의 도움으로 일상으로 돌아온 애니.
하지만,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MLAC 활동에 동참하기 시작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지난날을 자책하며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데…
세상을 향한 분노, 세상을 바꾸다!

이 영화를 볼까 말까 조금 고민했다. 이 영화의 소재(임신 중단)와 국적(프랑스)을 골고루 고려했을 때, 어쩐지 이 영화가 나에게 거칠게 따져 물을 것만 같았다. 당신은 임신중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함께 분연히 일어나 투쟁하자고 나를 떠밀 것 같았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밀도 높은 하루를 보내고 퇴근한 후의 내가 그런 담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 걱정스러운 기분으로 영화관에 들어섰는데, 놀랍게도 이 영화는 오후 햇살처럼 포근하고 따뜻하고 다정했다. 영화는 나를 토론의 장에 앉히거나 쿡쿡 찌르는 대신, 나의 몸을 보드랍게 끌어안았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애니는 매트리스 공장에서 일한다. 동료들과 함께 힘을 실어 매트리스를 올려놓고 뒤집고 바늘로 쿡쿡 찌르는 모습은, 어쩐지 분만대 위의 여성을 떠올리게 된다. 실제로 당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서 임신중단은 자녀 계획의 일부였으며 집집마다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계획하는 '일상적인' 일이었지만, 불법의 영역이었다. 태아의 생명권을 소중히 여겨 임신중단을 금한다는 대원칙 자체에는 얼핏 큰 문제가 없어 보이고, 이 대원칙을 금과옥조로 여겨 아예 생명이 생길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이미 생겨난 생명이라면 모조리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에게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문제는 그렇지 못한 현실을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덮어놓고 불법화하는 것은 여성들의 생명권을, 안전한 의료 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제한한다. 그야말로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
비슷한 풍경을 박완서 소설에서도 읽은 적 있다. 국가의 정책에 따라 때로는 산아 제한이 장려되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는 풍경 속에서, 임신중단은 마치 텃밭에서 채소를 솎듯 거리낌 없이 진행되던 시절이 있었던 풍경을. 그러므로 이 영화 속 일은 몇십 년의 시대적 차이가 있다 한들 보편적인 인간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애니 또한 박완서 소설 속 인물처럼, 지금 키우는 두 아이보다 더 아이를 갖지는 않기로 한 채 남편과 상의하여 수술받을 곳을 알아보던 중에 한 단체를 알게 되었다. 퇴근 후 어두운 도로를 자전거로 달려, 서점 뒤의 커튼을 열고 들어가, 다정한 여성들의 상세한 설명을 듣는다. 이들은 수술이 몸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식임을 설명하고, 수술 전에 한 번 더 만나 수술 도구들을 하나씩 상세히 보여주며 수술 과정을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다정하게 눈을 맞추고, 숨을 함께 고르도록 해주고, 다정한 노래로 안심시켜 준다. 더없이 환자에 초점이 맞추어진 경험이었다. 급기야 애니는 병원에서의 출산 경험보다 훨씬 편안했다고 느낀다.
본인이 원했든 원치 않았는데 파트너의 강요에 의해 임하게 됐든, 의사에게 받든 '이웃집 여성'에게 받든, 이 영화 속 많은 여성들에게 임신중단은 불쾌한 경험 그 자체였다. 면박과 비방 혹은 무지와 함께 몸을 마구잡이로 뜯어내는 경험. 차가운 스테인리스 위에서 이리저리 뒤집히고 바늘로 쿡쿡 찔리는 매트리스와 비슷한 취급. 그러나 이렇게 따스한 경험도 가능했던 것이다.

한 번의 경험으로 스쳐 지나갔을 수도 있는 이 순간은, 애니가 다정하게 지내던 이웃집 여성이 '불법 낙태 시술 중 사망'으로 잃으면서 애니의 일상이 된다.
어떤 조직이든 활동가의 원동력은 어쩌면, 더는 잃고 싶지 않다는 절박함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의사와 간호사, 치즈 가게 주인까지 포함된 활동가들을 만났을 때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라는 질문을 던진 순간,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활동가가 될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애니는 MLAC의 일원이 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다.
많은 여성의 사연을 아주 길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수술대에서 그들이 하는 몇 마디 말만으로, 그들의 표정만으로, 무수한 이야기를 전한다. 누군가는 낳고 싶었지만 안된다는 남자의 말에 끌려오는 심정으로 왔고, 누군가는 괴로워하면서도 너무 지쳐서 더 이상의 아이를 키울 수는 없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죄책감과 수치심을 깊이 느껴 거의 제정신이 아니며, 누군가는 두려워한다. 임신중단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임신중단으로 수술대에 오르는 여성들의 생각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을 악마화하는 발언이 얼마나 섀도 복싱에 가까웠을까. '불법일 수밖에 없는 불법' 임신중단 수술로 매년 (많게 잡은 수치로) 5천 명가량이 사망한다는 대사가 나오는데, 사람을 죽이는 데엔 참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꼭 임신중단만은 아닐 것이다. 임신중단을 놓고 여성들(만)을 손쉽게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는 눈앞의 산 사람을 사랑하지도, 이미 태어난 아이들을 돌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애니는 자신이 위로와 지지를 받았던 것처럼 사람들을 붙들고 지지한다. 뒤에서 쏘아대는 거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휘청거리면서 혼자 페달 밟고 불안하게 갔던 길을, 이제는 굳은 표정으로 MLAC을 찾아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만 미친 듯이 반복하던 십 대 여자아이를 태워 간다. 아이는 애니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애니의 등에 뺨을 기댄다.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뭉클하다. 어떤 길은 먼저 가본 사람들이 "괜찮아. 걱정되는 게 당연하지만 괜찮을 거야."라고 말해주면서 비로소 개척되는 것 같다. 먼저 간 사람의 등에 기대서서, 그가 페달을 힘차게 밟는 그 고동을 느끼면서, 그 허리에 팔을 감고 온기를 느끼면서, 그렇게 우리는 앞으로 간다. 뒤에서 헤드라이트를 거칠게 쏘는 자동차에 굴하지 않고 자전거 하나로도 씩씩하게.
어린 아기의 요람에서 부르듯이 노래를 불러주고, 17살 어린아이의 곁을 다정하게 지켜 주고, 천천히 호흡하고 환자의 상태를 집중하여 살핀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임신중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우리가 받고 싶은 의료 서비스 또한 이러한 모습에 더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나의 서사에 관심을 가져 주고, 의료진이 다루고 있는 지금 나의 상태를 비난받지 않는 것. 병원은 법정이 아니니까.

이 영화는 누구도 비난하지 않는다. 말했듯이 당신이 임신중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져 묻지도 않는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사려 깊은 눈 맞춤, 다정한 포옹, 괜찮다는 말, 편안한 호흡, 신뢰의 눈빛, 따스한 햇살. 그 안에서 깨닫게 된다. 이건 우리 몸이다. 우리 몸은 논쟁거리나 토론 주제이기 이전에, 우리의 존재가 담긴 피와 살이다. 그토록 당연한 사실을 이 영화는 햇살처럼 살짝, 느끼게 만든다.

애니를 보고 있노라면, 이들이 바꾸고자 했던 것은 세상이지만 동시에 이들 자신이 가장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애니의 자전거 뒤에 타고 있던 샹탈 또한, 애니의 다음 세대를 사는 다른 모든 여성 우리들 또한 자기만의 자전거를 타고 씩씩하게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면 좋겠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 개봉일은 11월 1일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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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서의 삶, 농촌, 사라져 가는 것들
<리틀 포레스트>는 좋아하는 배우인 김태리, 류준열이 나오기도 하지만 동물권 활동을 열심히 하고 계신 임순례 감독님께서 만드신 작품이라 더욱 기대를 했다. 개봉하자마자 냉큼 보러 갔을 정도였다. 일본 영화인 <카모메 식당> 같은 잔잔한 영화가 한국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분위기가 있어서 좋았다. 아마 원작이 일본 만화였기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시골에서 살다가 대학을 가고, 취업을 하기 위해서 도시에 살던 혜원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살아가는 이야기다. 갈등보다는 계절마다 밥 해 먹고, 놀고, 느끼는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텃밭 정도이기는 하지만 직접 키운 농작물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먹는 것은 시끄러운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로망이다. 깡시골에서 살다가 이렇게 도시 아닌 도시에서 살고 있는 나와 오버랩되기도 했다.
나는 시골을 참 좋아한다. 농촌과 어촌을 꼽자면 농촌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서울에서 살라고 하면 아직도 좀 무섭다. 일 때문에 출근 시간에 서울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도시의 모습과 지하철의 모습은 나에게 서울에 대한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차도 우글우글 사람도 우글우글하고, 밀려서 걸어가야만 하는 상황은 멘붕이었다. 그리고 밤이면 세상 조용한 시골과 달리 시끌시끌한 도시에 나는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다.
우리 집은 시골에서 여전히 농사를 짓고 있다. 내가 업어 키우던 7살 터울의 동생과 나는 자라면서 <리틀 포레스트>에 나온 농사의 대부분을 짓거나 도와봤고, 흙바닥을 뒹굴면서 자랐다. TV도 잘 안 나왔기 때문에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노는 것이 너무 당연했고, 오락기도 없어서 온갖 놀이를 창조해냈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의 삶에 참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농촌의 인구는 대체로 적은 편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1학년 때는 국민학교였는데 2학년 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 때 폐교가 되었다. 폐교 당시 유치원생을 포함해서 전교생이 18명이었다. 친구가 많은 학교로 보내고 싶었던 부모님들은 폐교에 동의했다. 큰 학교인 본교로 옮기고 나서의 적응은 쉽지 않았다. 등교하려면 스쿨버스를 타고 다녀야만 했고, 빨라진 등교시간 덕분에 부모님은 새벽에 일을 하기 어려워졌다. 스쿨버스를 놓치기라도 하는 날에는 데려다주셔야만 했다. 우리는 등굣길에서 늘 만나던 숲, 저수지, 풀, 곤충 대신 아스팔트와 도로를 만나야만 했다. 작은 학교의 폐교가 한 마을의 아침 풍경을 바꿔놓은 것이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작은 학교에 대한 폐교 여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사실 농촌과 환경은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다. 넓은 땅덩어리지만 좁은 수도권에 복작복작하게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수도권에 전기 같은 에너지가 한꺼번에 많이 필요로 하게 된다. 그럼 그 필요한 전기는 지방에서 생성해서 보내게 된다. 이때 전기를 만들기 위한 발전소는 사람이 적은 농촌 같은 곳에 주로 만들게 되고, 환경에는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발전소 자체도 문제지만 전기를 이동시키기 위한 송전탑이 많아지는 것도 걱정스러운 부분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공상가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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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퀸 엘리자베스> 리뷰
<퀸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왕실과 국민통합을 표상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영화다.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좌에 머문 엘리자베스 2세 여왕. 1952년 즉위하여 2022년 9월 8일까지 70년간 재위한 군주다. 처칠을 시작으로 총 16명의 총리와 함께 했다.
줄리아 로버츠와 휴 그랜트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노팅 힐〉을 연출한 로저 미첼 감독이 연출했다. 미첼 감독은 로맨스 영화의 대가일 뿐만 아니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TV부문에서 최우수 단편 드라마와 최우수 미니시리즈까지 수상하여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연출력을 인정받은 감독이다.
“내 삶이 길건 짧건 내 평생을 국민들을 섬기는 데 바칠 것을 여러분 앞에서 맹세합니다.” 퀸 에리자베스가 왕세녀 시절 21세 생일을 맞이하여 연설한 내용이다. 실제로 그녀는 사망하기 이틀 전에도 신임 총리를 임명하고 접견하는 등 죽는 순간까지도 국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세상을 떠났다.
영화는 우리 가족이 영국에서 가진 추억들을 조각조각 떠오르게 했다. 아내와 우리 가족은 8년의 영국 생활을 하면서 영국 여왕과도 친근해졌다. 여왕의 생일 등 왕실의 공식 행사 때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 손을 흔드는 모습. 매년 성탄일 오후 BBC에서 전 국민에게 보내는 그녀의 크리스마스 메시지. 영국여왕 재위 50주년을 기념하는 골드 주빌리(Golden Jubilee) 행사. 부군인 필립공이 총장으로 있는 캠브릿지대학을 방문하여 가까이서 여왕을 볼 기회도 가졌다.
96년을 산 인생이 늘 영광스러운 일만 있을 수 있겠는가. 감독은 왕관의 무게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을 무겁게 했을 아픈 가족사도 적절히 드러내었다. 지난 100년의 현대사에 가장 주목할 만한 삶을 살은 여왕의 생을 담아낸 가치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러닝타임은 90분이다. 여왕은 2년 전 별세하였다. 그런데 여왕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에 장례식 장면이 없다. 왜일까? 그건 로저 미첼 감독이 여왕 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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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도로 발달된 모순은 정의와 구별할 수 없다
*이 해석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디피컬트] 속 캑터스는 사회운동가다. 거리를 통제하기도 하고, 맨몸에 메시지를 적어 시위를 하기도 하고, 블랙프라이데이에 마트를 막아서기도 한다. 그러한 그녀의 소망은 지구의 환경이 나아지는 것.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환경 보호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 환경 염려증인 그녀는 자신이 환경오염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생각 때문에 더더욱 병적으로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맹신한다.
사회가 변화하며 수많은 사회단체가 생겨왔지만, 그중 대부분은 캑터스의 이런 모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실 이 모임 속의 수많은 인원들은 개개인의 욕심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모였다. 브루노와 알베르가 그 대표격이다. 당장 빚에 허덕이고 개인 회생만을 바라고 있는 그들은 환경 문제 따위는 관심 없다. 그저 공짜 맥주와 감자칩을 받기 위해 회의에 참석하고, 활동을 통해 어떻게든 돈을 벌어보려고 꾀를 쓰고 있을 뿐.
과거 블랙 프라이데이에 캑터스와 정면으로 충돌했던 알베르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활동에 앞장선다. 장인어른에게 돈을 빌려서 파산 직전의 브루노는 아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향수를 선물한다. 아내의 진짜 냄새보단 비싼 브랜드가 주는 돈냄새가 좋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들의 사랑과 정의는 진심일까? 진심이 아니라 한들 우리에게 이들을 쉽사리 욕할 자격은 있을까? 우리 또한 그들처럼 살아가지는 않는가?
"브루노, 부자가 되고 싶니?"
기부를 받기 위해 찾아간 부잣집 할머니는 브루노에게 지폐를 보여주며 뭐가 보이냐고 묻는다. 숫자밖에 보지 못하는 브루노에게 할머니는 지폐 속에 숨은 다리를 보여준다. 그러면서 사람은 모두 다리이며,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곤 낡은 박제 개 인형을 선물로 준다.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들여다보라, 이것이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이다.
영화는 정책, 환경, 금융 등의 다양한 사회 문제를 제기하는 듯 표방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복잡하고 '디피컬트'한 문제들의 해결법은 의외로 '이지'하다. 그저 관심을 가지면 되는 것이다.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그들의 진심을 경청하고, 진솔하게 고백하는 것. 영화가 진짜 꼬집고 있는 것은 문제에 대처하는 척, 허울 뿐인 정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이중성이다.
"펌킨..."
"캑터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캑터스는 알베르를 그동안 알아왔던 닉네임으로 부른다. 알베르도 마찬가지다. 할머니의 '지폐 이론'에 따르면, 영화 속에서 인물들의 닉네임은 숫자이고 실명은 다리를 뜻한다. 닉네임은 허례허식으로 치장한 정의의 모습, 즉 모순을 의미한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마지막까지 닉네임을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감독이 연출한 '허황된 꿈'이라는 해석이 맞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외출조차 하지 않고,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거리에는 차 대신 사슴이 뛰어다니고... 진실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의 소망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감독의 강경한 태도가 엿보인다.
또 한 가지 짚어볼 것은 비영리단체의 할아버지다. (이름이 생각 안 남) 그는 사람들에게 줄곧 과소비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하라고 조언한다. 그래 놓고는 정작 자신은 카지노에 출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엔딩 크레딧의 추가 장면에서 그는 결국 카지노 입성에 성공하고 잭팟을 터트린다. 어떻게? 수정액으로 신분증을 위조해서.
이 방법은 브루노와 알베르가 프랑스 은행에 잠입해 자신들의 개인 회생 서류에 승인을 받기 위해 꾀한 방법이었다. 그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호통을 치더니, 정작 자신도 그 방법을 사용해서 카지노에 출입한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수정액으로 자신들의 진짜 욕망을 가리고 정의를 외치는 수많은 모순자들에게 일침을 날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브루노가 그토록 거부하던 여인의 집에 얹혀살고 있는 결말처럼 말이다. 그 여성도, 브루노 자신도 결국 서로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거래를 한 셈이다.
이런 식의 타협점이 과연 그들이 부르짖는 정의에 부합하는가?
한편, 엔딩 크레딧의 추가 장면에는 박제된 개 인형의 진실이 등장한다. 개 인형은 브루노에게서 알베르로, 알베르에게서 알베르의 조카에게 건네졌다. 그런데 인형을 갖고 놀던 조카가 열어본 인형 속에 돈 뭉텅이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동생이 힘들면 무엇이든 도와주겠다던 알베르의 누나는 돈을 박박 긁어 가슴속에 숨긴다. 개의 내면에는 결국, 돈이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사람의 내면을 보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도 내면에 돈을 숨기고 있었다는 모순. 그녀가 브루노에게 건넸던 첫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라. 그녀는 진정한 사랑을 찾고 싶냐고 묻지 않았다. 부자가 되고 싶느냐고 물어보았다. 부자가 되려면 내면을 봐야 한다는 것은 결국 그런 말을 하던 할머니 자신도 사실은 돈이 더 우선적인 가치임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지혜롭다고 자칭하는 노인들이 많은 젊은이에게 위선을 떨고 있음을 한 번 더 풍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한 편의 모순이다. 더할 나위 없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순. 치밀한 계산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모순은 얼핏 보아서는 정의와 구별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슬프지만 이 세상에는 정의로 포장된 모순들이 즐비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면의 진실을 보기 위한 노력뿐이지만, 그 시도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은 존재하지 않을까.
*이 리뷰는 씨네랩을 통해 초청받은 시사회를 보고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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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전이 더 재미있는, 스토브리그
야구를 좋아하지 않아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드라마를 하나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스토브리그는 프로야구의 한 시즌이 끝나고
다음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뜻합니다.
이 기간에 계약 갱신이나 트레이드가 이루어지는데요.
가상의 팀인 재송 드림즈의 꼴지 탈출을 위한 기간,
과연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곳곳에 썩어버린 땅에 심어진 사과나무 한 그루의 영향력.
잘하지 않는 팀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건 분명히 힘든 일입니다.
반대로 잘하는 팀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도 분명히 힘든 일이죠.
어느 팀이든 고민거리나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팬들은 승부가 당연히 중요하고 실망하고 돌아서기도 하지만
"졌지만 잘 싸웠다."라고 하는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건 당연합니다.
드림즈도 마찬가지였죠.
꼴찌면서 매너도 경기도 모두 지는 그런 팀이었기에 스토브리그가 굉장히 어려운 팀이 되었습니다.
곳곳에 썩은 뿌리가 심어져 있는 이 곳에 새로운 단장이 오게 되면서 많은 변화와 혼란스러움이 오지만
그럼에도 스토브리그를 드림즈는 성공적으로 보낼 수 있을까요?
저도 프로축구를 응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정말 힘들게 우승을 못하는 구단을 응원하는 사람으로서
이야기 하는 종목은 다르지만 비슷하게 다뤄지는 이야기들이 굉장히 마음에 와닿았고
선수들의 마음가짐이 저렇다면 응원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강두기 선수)
항상 조롱을 당하고 기대감과 실망감을 동시에 받아야 했던 제가 조금은 위로를 받았던 드라마 였습니다.
KBS에서 이런 소재를 다루고 또 멋진 드라마로 마무리까지 잘 해낸 스토브리그,
추천합니다.
연기도 연출도 각본도 모두 잘 어우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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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명의 배우가 전하는 가지각색의 이야기
나는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이유는 그냥 멋있어서. 난 사람들을 울릴 줄 아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멋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무언가 말을 해도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앞뒤 다른 사람들이랑 친해지는 건 그 누가 와도 싫겠지? 나는 그런 것들이 엄청 싫어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만 하곤 했다. 사람을 사귀는 것도, 어떤 말을 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다 내가 재밌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영화 리뷰를 써서 올리는 것도 대중적인 픽들을 골라 쓰는 것, 그러니까 홍상수의 작품보다는 <라라 랜드>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걸 써서 올려야 사람들이 더 많이 본다고 믿고 있다. 아니면 최근에 개봉했던 작품을 쓰는 거지. 모두의 시간은 소중하기 때문에 나름 객관적인 시선으로 글을 쓰면 사람들이 극장 가기 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 나름대로 뿌듯하겠지? 근데 나는 이게 어느 정도는 일반 대중들에게 먹힌다는 걸 앎에도 불구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 여러모로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쓴 세상들을 읽게 만들려면 사람들이 어떤 걸 궁금해야 할지를 알면서도 내가 진정성을 담아 쓸 수 있는 글만 키보드에 적는 것이다.
그런 태도에서 오는 강점은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글 쓰기가 쉽다는 것이다. 없는 내용을 만들어서 쓰기보다는 있는 생각들을 와다다 쓰는 게 쓸 때 편하다. 두 번째. 몰입이 잘 된다는 것이다. 4초당 1번꼴로 휴대전화를 보는 나는 집중이 잘 돼야 다음 문장을 쓸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 가치관이 담겨 누가 읽든 글의 힘이 느껴지게 하는 것 같다. <완다 비전>을 보고 느낀 후반부의 처연함이나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를 느낀 인연의 감사함도 다 내가 직접 보고 경험해서 쓴 글이다. 이는 비단 나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떤 씨네 아티스트들은 자기의 이야기를 결합해서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곤 하는데, 그런 식으로 극을 만들면 확실히 하고자 하는 말을 진정성 있게 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교훈을 며칠 전에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지난 8일 왓챠에 박정민-손석구-최희서-이제훈 네 명의 배우가 각본과 연출을 맡은 단편영화가 공개됐다. 아무 생각 없이 본 단편영화 4작품이지만 난 이번 해에 봤던 한국영화 중 가장 큰 감동을 받았기에 여러분에게 소개해보고자 한다. 각 배우들이 가진 진정성이 너무나 잘 느껴져 좋았다.
1) 반장선거(박정민)
반장선거는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다. 한 초등학교 반에서 반정 선거를 하는데, 세 명의 후보가 나와서 각자의 선거운동을 펼친다. 사실 돌아보면 '초등학교 반장이 별건가' '고등학교 학생회장이 별건가' '대학교 ~장이 별건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나 역시 그랬기 때문에- 물론 그 시간으로 돌아가면 나름대로 치열하게 했을 것이다. 이를 보여주듯 트와이스 섭외부터 시작해 가지각색으로 공약을 펼치는 아이들. 마치 2022 대선을 앞두고 있는 양 당의 후보를 보는 듯하다. 보통 이렇게 반장선거에 나갔던 아이들은 학생들의 주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흔히 말하는 '아싸'에 속하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지 않은 주인공. 사랑받고 싶고 어울리고 싶어 하는 마음에 반장선거를 나서는데, 여기서 오는 코미디와 서스펜스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도 저랬지'하는 공감을 일으킨다. 아마 <벌새>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작품 역시 좋다고 느낄 것 같다. <벌새>의 은희는 인간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인물인데, 이때 여기서 얻었던 따뜻한 포옹을 기억한다면 이 작품이 선사하는 뒤틀린 코미디가 인상 깊을 것이다. 아이들을 동정이나 이해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같은 인격체로 바라보는 박정민 감독의 시선이 돋보인다.
2) 재방송(손석구)
재방송은 무명배우에 관한 영화다. 아마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봤던 분들이라면 유이(박정민 역) 옆에서 '너 이 나라 감옥에서 인기 많겠다'라고 말하던 역할을 기억할 텐데, 이때 통역사를 맡았던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 임성재 배우는 이모와 함께 사는 그냥 평범한 남자다. 피지컬은 좋아서 배우로서의 재능은 충만한 것 같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무명 배우들이 그렇듯 그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 설정과 함께 이모와 함께 병원을 들렸다 결혼식장에 가는 이야기가 영화의 전부다. 두 주인공 이모와 수인은 거대한 결핍이 있다. 이에 대해 수인은 아무래도 예측하기 쉽지만 이모는 말하는 순간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적으면 안 될 것 같다. 이모가 겪고 있는 심리적 부침이 영화의 주요 메시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위로가 필요할 때가 온다. 내 옆에 소중한 사람이 울고 있을 때 같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따뜻한 손 한 번을 건넨다던가 할 때가 그 예시가 될 것이다. 이 마음의 이면에 깔려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진정성일 것이다. 겉으로는 툴툴대도 용기 내 손 한번 건네보는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데, 손석구 감독은 이런 우리에게 '어떤 마음으로 손을 건네어야 하는가'와 함께 그가 제시한 방식으로 따뜻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후의 <블루 해피니스>의 이제훈 감독처럼 수인 캐릭터가 손석구 배우의 무명배우를 연상케 하는데, 이때 겪었던 '묵묵한 위로'가 얼마나 중요한지 감독은 아는 것 같다.
3. 반디(최희서)
'없다'라는 단어는 참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든다. 늘 하던 것이 없고. 돈이 없고. 헬스장 이용권이 만료되고. 익숙하던 것이 날 떠나고 나서야 드는 슬픔은 사람을 괴롭게 만든다. 이 영화는 이 상실과 부재에 관한 영화인데, 우리가 떠나보낸 것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도 볼 수 있다. 난 아직도 사라지는 게 두렵다. 내가 사랑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서, 또 나이가 들어서 날 떠나간다면 앞이 캄캄하다. 요즘은 이런 두려움을 말해 타인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드러내긴 했지만 그게 그렇다고 해서 불안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필연적으로 우리를 따라오는 어두움에 대해 최희서 감독은 어떤 태도로 이것들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중반부 주인공의 어머니가 주인공에게 하는 대사나 딸이 엄마에게 하는 말은 우리로 하여금 따뜻한 위로를 건네주는 것이다. 상실에 대한 최희서 감독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나는 4편의 단편영화 중 가장 좋았다. 나는 아직 보내기 싫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 우리, 이별하지 말자. 사랑했다면 그 나름대로 영원히 그들을 기다리며 살자. 그게 우리의 전부가 될지도 모르니까.
4. 블루 해피니스(이제훈)
난 지금 25살이다.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이 주위에 많은 요즘, 주위에 주식이나 비트코인 하는 사람들 진~짜 많다. 부동산 정책이 어쩌니 코로나가 어쩌니 원인은 여러 가지가 제시된다고 듣는 것 같다. 근데 사실 이런 걸 떠나서 돈 벌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을 것이다. 그거 했다고 이상한 사람도 아니고 뭐 멘탈이 약한 사람도 아닐 것이다. 이렇게 평범한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취업준비생인 주인공을 내세워 어떻게 주식에 빠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훈 감독의 속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퍽퍽한 현실에 놓인 우리들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시나리오를 쓴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쁜 세상 속에서 돈 문제로 속 썩는 우리는 이런 실패들에 자연스레 노출될 수밖에 없는데, 이런 현실을 사는 각자에게 '그럴 수도 있지'라며 격려를 보낸다. 지금의 스타 이제훈이 아닌 무명 배우 때 겪었던 고민과 딜레마를 현재에 잘 녹아든 작품이다. 자기의 이야기를 훌륭하게 내면화했기 때문에 상황이 더 구체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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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데미에 올라갔어야만 했다
봄에 피어나는 벚꽃만큼이나 극장을 자주 드나드는 관객들에게 이 시기는 대작들이 개봉하는 여름 극장가 부럽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에는 "아카데미"에 이름이 올라간 영화들 때문입니다.
대개, 시상식에 이름이 올라간 이유에는 그만한 기준에 충족했기에 올라간 것이라는데 관객들은 이 영화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왜, 이 영화가 올라갔지?"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서 극장으로 가 봄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나오게 됩니다. 이런 진부한 패턴이 영화 <모리타니안>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작년이라면, 이미 "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는커녕 결과까지 나왔지만 이번에는 "코로나19"로 모든 일정들이 연기되며 이제서야 "골든글로브"가 끝났습니다.
아시다시피, <미나리>의 작품상 후보 지명 불발이 가장 큰 논란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나리>의 "윤여정"분의 후보 지명 불발도 화제였습니다. 다른 시상식에서는 다 휩쓰는데,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면서, 관객들에게는 자연스레 "윤여정"분이 빠진 "여우조연상"을 받을지에 관심이 쏠렸고 이는 오늘 소개할 <모리타니안>의 "조디 포스터"분이 수상했습니다. 이에 일부 팬들은 "호랑이가 없는 곳에 늑대가 왕이다"라고 하지만, 이미 <피고인1989>과 <양들의 침묵1992>로 여우주연상만 2번 받은 분이라 늑대로 칭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특히, 이를 30대 이전에 다 받으신 거라...)
이외에도 여기에 출연하는 "타히르 라힘"은 "남우주연상"에 이름을 올려 무슨 영화인지는 몰라도 연기 보는 맛은 쏠쏠하거라 생각했습니다.
'과연, <모리타니안>은 어떤 영화이었는지?' - 감상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9·11테러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갑작스레, 집안에 경찰이 오자 "슬라히"는 어머니에게 '잠깐만 다녀오겠다'라는 말로 진정시킨 후 집을 나섭니다. 그리고 인권 변호사 "낸시"는 지난 3년간 재판도 없이 "콴타나모 수용소"에 구금된 "슬라히"에게 관심이 생깁니다. 아무리 중한 범죄라고 해도 재판 없이 감옥에 수감된 것에 궁금한 "낸시"는 그의 변호를 맡게 되고, 숨겨져 있던 사실에 충격을 받는데...
낯선 영화에 익숙한 배우들이 나온 이유는?
1. 클리셰를 깨버리는 이 과감함, 뭐지?
영화 <모리타니안>은 제목만 봐서는 어떤 영화인지 좀체 감이 잡히지가 않습니다.
출연하는 배우들에 "베네딕트 컴버배치", "조디 포스터", "쉐일린 우들리", 그리고 <샤잠!>의 "제커리 레비"를 보아도 역시, 감이 안 잡히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포스터에도 있듯이 "재판"이라는 단어로 낯선 영화에게 "법정극"이라는 갈피가 잡히는데요. 근데, 영화 <모리타니안>에게 법정에서 주고받는 증언에 증언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의 이야기가 진행되는 곳은 "법정"이 아니거든요.
이렇게 해도 되나요?
앞에서도 말했듯이 "재판"이라는 단어로 "법정극"이라는 갈피가 잡힌 <모리타니안>의 초반 전개는 이와 비슷하게 흘러나갑니다. 마치 변호하는 "낸시"는 선역, 그에게 사형을 내리려는 "스투"는 악역으로 보이는 <모리타니안>의 시작은 뻔하게 흘러갑니다. 근데, 영화는 여기서 하나의 변곡점을 제시하는데 그게 "플래시백"입니다. 대개, "플래시백"은 직접 짜 맞추는 것과 다르게 해당 캐릭터의 시점에서 흘러가 설명보다는 감정을 먼저 제시합니다. 특히, "법정극"이라는 장르가 논리와 논리의 상충이 주되기에 이런 방법은 가급적 피해야 하는데요. 근데, 영화는 "클리셰"와 같은 규칙을 깸으로 오히려 관객들의 관심을 이끌어냅니다.
2. 이러니까, 아카데미에 이름을 올라가겠지.
앞서 말했듯이 영화 <모리타니안>은 이야기의 중간마다 "플래시백"을 삽입함으로 해당 캐릭터의 감정에 이입해 이야기를 몰입하게 만듭니다. 이외에도 부족한 설명을 채워주는 역할도 하지만 가장 큰 역할은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것이죠. 근데, 영화는 굳이 이런 몰입을 깨버립니다.
관객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물아일체"의 상태를 깨기까지 한 영화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정에 치우치면 본질이 흐려지는 것도 있지만, 두 번째 <모리타니안>이 법정극이라는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야심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이를 영화는 '반전'이라는 카드로 위장하여 보여주기도 하고요.
옳고 그름을 떠나...
아무리, "플래시백"을 경계한다고 해도 관객들에게 "슬라히"는 속내를 모르는 대상이 아닌 그저, 불쌍한 대상으로 보입니다. 근데, 텍스트로 적혀진 보고서에는 이런 설명들을 부정하니 관객들에게 인지부조화가 일으키게 되는 것이죠. '진짜 틀린가?'라는 마음으로 1차적인 반전을 일으켰다면, 영화는 곧장 2차적인 반전을 연쇄적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잠시, 영화를 떠나 글을 쓰는데 가장 쉬운 방법은 객관적인 자료로 주관적인 감정으로 끝을 짓는 것입니다. 근데, 순서를 바꿔 주관적인 감정을 객관적인 표현으로 정리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데요.
비슷한 재료인데도 순서가 틀리면, 완전히 달라지는 영화 <모리타니안>은 1차 반전으로 '전자', 2차 반전은 '후자'로 보여주여 더 깊게 빠지게 만듭니다.
3. 방법은 틀린 것이 없다. 쓰는 이에 달라질 뿐.
보통 "피해"를 입은 캐릭터를 소개하는데, 가장 기피해야 하는 것은 이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입니다.
그 장면 자체만으로도 "고문 포르노"와 별반, 다르지가 않거든요. 그렇기에 <아이 캔 스피크2017>에서는 이를 재현하기보다는 연설하는 장면에서 자신의 몸에 새겨진 낙서와 같은 문신으로 이를 관객들의 상상에 맡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모리타니안>은 세련된 방법은 아닌데도 이에 대한 충격을 받은 이유에는 이를 쌓아올린 누적된 설명들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여주느냐에 구식과 클래식이 나눠진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낸시"는 선역, "스투"는 악역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낸시"가 "테리"에게 "슬라히"의 감정에 휩쓸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듯이 "스투"에게도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영화는 "낸시"에게 "슬라히"의 편지를 읽음으로 그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면, "스투"는 관객들에게 그가 어떤 곳에 있었는지를 직접 가서 확인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낸시"가 주관적인 감정이라면, "스투"는 객관적인 관찰인데,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나 영화는 이를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데요. 그리고 극과 극에 서있던 "낸시"와 "스투"가 "슬라히"가 보여주는 재연으로 합쳐지니 "고문 포르노"였던 방법은 "현실 고발"이라는 있어 보이는 방법으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죠.
4. 옳고 그름이 아닌 모두를 아우르는 메시지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 <모리타니안>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영화는 아닙니다. 예상했던 "법정극"으로 생각하기에는 대상자의 감정에 좌지우지하는 전개는 장르를 제외하더라도 그리 좋지만은 않고요.
그럼에도 <모리타니안>은 앞서 말한 "아카데미 영화"를 보는 삼단 논법의 마지막 단계, 고개를 끄덕이며 나오는 결과에는 문제없이 도출되는 영화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말하려는 '법은 상황에 맞게 짜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적용되어야만 한다'라는 메시지는 극히, 이성적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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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캡틴아메리카4, "그"가 돌아오지 않는 이유
2021. 04. 28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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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타임라인*
00:00 이제 시작이다
00:43 캡틴아메리카4가 온다
02:34 1대 캡틴, 크리스 에반스
03:48 숙제타임
05:17 와칸다 포에버
06:05 제2의 블랙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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