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1-07-29 12:51:11
말을 빼앗긴 레즈비언은 기억과 몸짓으로 말한다
영화 〈우리, 둘〉 리뷰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은 언론시사회에 참석한 후 쓴 리뷰입니다.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말은 가장 손쉬운 자기 선언의 수단이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30대입니다." "나는 게이입니다." 등의 말을 통해 우리는 각자의 정보를 상대에게 빠르고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전부는 아니다. 말이 없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릴 수 있다. 때로는 말보다 더 선명한 방식으로. 영화 〈우리, 둘〉(원제: 'Two of Us')은 '말할 수 없는' 레즈비언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강렬하게 선포하는 일에 관한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은 노년의 레즈비언 커플인 니나와 마도다. 둘은 복도를 가운데 두고 마주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은퇴한 둘은 로마로 이주해 한 집에 같이 살 계획을 꾸린다. 그런데 니나와 마도가 갈등을 겪기 시작한다. 마도가 자녀들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고 애인인 니나와 함께 살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니나는 '말하지 못하는' 마도를 답답해한다.
둘 사이의 갈등이 심해지던 때, 마도가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관계에 기묘한 변화가 생긴다. 이제 '말하지 못하는' 건 니나다. 니나는 매일 마도를 보고 싶고, 항상 마도의 곁에 머물고 싶다. 그러나 마도의 간병인은 그런 니나를 이상하게 여긴다. 니나는 간병인에게 자신이 마도의 레즈비언 애인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니나는 자신이 마도의 이웃, 친구로만 여겨지는 상황이 너무 답답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영화의 절정, 어머니가 레즈비언임을 알게 된 마도의 딸 앤은 그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마도를 니나와 분리하려고만 한다. 그럼에도 마도가 계속 니나를 찾자 '제발 자신과 대화를 하자'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마도는 이중적 의미에서 말할 수 없다. 뇌졸중에 걸려 언어능력을 잃은 게 첫 번째 이유고, 이성애규범적 세계가 레즈비언의 발화를 허용하지 않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앤이 애타게 소리쳐봤자, 대답은 오지 않는다. 엄마와의 대화를 막는 건 이성애중심적 체제와 그에 안주하는 앤의 편견이지만, 앤은 끝내 무엇이 자신과 엄마의 대화를 막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말'이 중요한 소재임을 암시한다. 영화는 두 여자아이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한 명이 사라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술래인 아이는 사라진 친구를 애타게 부르지만, 그 목소리는 까마귀 울음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는다.' 애타게 부르짖어도 들리지 않는 아이의 목소리는 자신들이 레즈비언 커플임을 말하지 못하는 니나와 마도를 닮았다.
하지만 말이 없다고 니나와 마도가, 그들의 관계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말이 아니어도 그들의 존재와 사랑을 증명할 수단은 있다. 말의 강제적 부재라는 상황에서, 니나와 마도가 스스로를 증명하는 방식은 기억과 몸짓이다.
먼저 기억의 문제를 보자. 앤이 아무리 부정해도, 마도의 옛 앨범에 담긴 건 그녀의 아버지가 아닌 니나다. 마도의 모든 걸 제일 잘 아는 사람도 니나다. 오랜 기간 서로가 서로의 가장 친밀한 존재였던 둘은 동성애 친밀성을 배제한 가족제도와 규범이 알지 못하는 내밀한 경험들을 쌓아왔다. 니나와 함께 쌓아온 내밀한 경험은 '말을 잃은' 마도에게 가장 분명한 언어가 되어 둘의 과거를 소환하고, 현재를 구성하며, 미래를 꿈꾸게 한다. 니나와 마도는 오랫동안 함께 쌓아온 기억으로 소통한다. 이들의 소통이 앤을 비롯한 타인에게 '들리지 않는'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이다.
두 번째는 몸짓이다. 영화의 마지막, 니나는 요양 병원에 있는 마도를 몰래 자기 집으로 빼돌린 후 함께 블루스를 춘다. 밖에서는 앤이 문을 쾅쾅 두드리며 마도를 돌려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마도와 니나는 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듣지 않는 건' 앤이 아닌 마도와 니나다. 세계가 그들을 거부하자, 그들만의 세계를 만든 것이다. 사랑을 속삭이는 말은 들리지만, 사랑에 손가락질하는 말은 들리지 않는 세계를. 서툴고 경직된 그들의 블루스가 무엇보다 단단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렇게 말을 빼앗긴 늙은 레즈비언 커플은 기억과 몸짓으로 자신들을 증언한다. 〈우리, 둘〉은 '말'의 은유를 통해 존재에 대한 윤리의 문제를 다루는 수작이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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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에 다른 길을 선택한 두 친구의 우정
결국에 다른 길을 선택한 두 친구의 우정
영화 <해피엔드> 리뷰
감독] 네오 소라
출연]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도, 히야시 유타, 시나 펭, 아라지, 아니로 키라라, 나카지마 아유무
시놉시스] 점멸등이 일렁이는 근미래의 도쿄. 음악에 빠진 고등학생 유타와 코우는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나날을 보낸다. 동아리방을 찾아 늦은 밤 학교에 잠입한 그들은 교장 나가이의 고급 차량에 발칙한 장난을 치고, 분노한 학교는 AI 감시 체제를 도입한다. 그날 이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스포일러 유의#
기술은 결국 사람에 의해서 변형된다
영화 해피엔드는 시놉시스에도 나와있듯이 일본 도쿄의 근미래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기술이 꽤나 발전해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찍으면 이 사람의 신원이 바로 파악이 되고, 학교에서 AI카메라를 통해 선생님들이 감시를 하지 않더라도 자동으로 벌점이 메겨진다. 하지만 그 기술의 발전 방향은 한 나라의 문화와 맞물려서 변형된다. 그저 사람들의 얼굴만으로 신원이 확인된다는 그 기술은 이 사람의 출신과 뿌리까지 보여주면서 차별의 도구로 이용된다. 주인공 유타는 일본인이지만 코우는 재일동포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걸리면 신분증을 내놓으라며 검문이 시작된다. 코우는 신분증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며 법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하지만 경찰들은 그럼 집에가서 그 신분을 확인하자며 집으로 데리고 간다. 더불어 같은 학교 수업이더라도 자위대 특강은 일본인이 아니면 들을 필요가 없다며 교실에서 내쫓기까지 한다. 그 과정에서 AI카메라는 수업시간에 외부로 나왔다는 이유로 벌점을 메기지만 이에 대해 학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해주지 않는다.
이처럼 기술은 결국 이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변형되어 사회 속에서 자리잡는다. 그리고 그 집단의 대다수가 편리한 방향으로 기술은 자리잡기에 소외되는 계층은 더더욱 이 기술에서 더욱 도태되어 극단화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영화 해피엔드는 잘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에는 다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방향
영화 속 유타와 코우는 어렸을 때부터 같이 지내오며 둘도 없는 친구다. 하지만 점차 커가면서 코우는 현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마냥 음악을 좋아하며 좋아하는 것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유타에게서 벽을 느끼기 시작한다. 유타는 어느정도 경제적 지위를 갖춘 부모 밑에서 자라지만 부모는 각자의 일로 바빠 외롭게 혼자자랐다. 그렇기에 친구들에게 더욱 애정을 가지고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그들과 소통한다.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각자 자신만의 고민이 있다. 재외국민인 코우는 그런 유타에게 언제까지 음악을 할거나며 이렇게 계속 살건지 생각이라는 것을 하라고 강하게 쏘아붙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코우는 재외국민으로서 일본의 차별에 반대하는 시위에 나갔다가 경찰에 잡혀들어오기도 한다. 자신이 사회에 나가야 하는 그 시점에 점점 현실에 눈을 뜨면서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신과 그 차별의 당사자가 아닌 친구 유타 사이에서 코우는 계속해서 갈등한다. 결국 유타는 그런 코우를 위해서 코우와 함께 교장선생님의 차에 장난을 쳤지만 혼자서 다 한 일이라며 혼자서 퇴학을 당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떠나게 되었지만 유타는 자신이 좋아하는 레코드가게에서 계속에서 일을 해 나간다. 반면 코우는 음악이 아닌 대학은 선택하며 장학금을 받으면서 집안의 자랑이 되지만 막상 그리 행복해하지는 않는 모습을 보인다.
졸업식이 끝나고 유타와 코우는 육고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내려가면서 끝이난다. 유타와 코우는 오랜시간 함께 친구로서 지냈지만 현실과 자신에게 놓인 환경 속에서 결국 각자 다른 선택을 하게 되고 그들의 인생을 찾아간다. 차갑긴 하지만 그것이 각자의 인생을 위한 해피엔드가 아닐까 싶다. 한 때 걱정 없이 아하는 것을 함께 할 수 있었다는 친구가 존재했다는 그 기억이 상처받는 현실 속에서 어쩌면 행복한 추억이 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영화 해피엔드>
-개봉 : 2025. 4. 30. (수)
-한줄평 : 일본 특유의 잔잔함 속에서 미래의 기술과 차별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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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워즈 영화 랭킹 Star Wars Film Ranked
조지 루카스가 구상한 [스타워즈 9부작] 혹은 [스카이워커 사가]은 한마디로 '다스 베이더의 비극'라는 거대한 서사시다. 그 비극을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파토스(Pathos, 연민을 자아내는 힘, 측은지심)'을 자아내기 때문에 전설의 위치에 올랐다.
마블과 DC를 포함한 대부분의 장르물이 그렇듯이 [스타워즈] 역시 개연성을 지닌 영화는 아니다. 지난 42년간 [스타워즈]는 MCU처럼 독창적인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무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 이전에 팬들에 의해 대중문화 최초로 ‘확장세계관(EU)’를 정립했다. 그런데 [시퀄 3부작]은 [스타워즈] 특유의 ‘설정 놀음’을 간과했다. 특히 캐슬린 케네디 루카스필름 대표와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이 그랬다.
◆평가 기준
1순위 시리즈로써 의의
2순위 공유 세계관 기여도
3순위 단일 작품으로써 완성도
#11 : 에피소드 9: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Episode IX: The Rise Of Skywalker, 2019)
디즈니는 ‘스카이워커 사가의 종결’을 홍보했지만, 9편의 실제 임무는 ‘브랜드 관리’다. J.J. 에이브람스의 최우선 과제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라스트 제다이]에 대한 팬들의 반발을 잠재우는 것이다. 거기다 자신이 던져놓은 7편의 떡밥을 회수하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따지고 보면 라이언 존슨이 8편에서 7편의 떡밥을 싹 무시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그런데 제작을 맡은 밥 아이거 디즈니 회장이 ‘팬 서비스’를 핑계 삼아 8편의 아이디어를 깡그리 쓰레기통에 버린다. 속편이 나올 때마다 전편을 부정하는 [시퀄 3부작]은 구체적인 청사진 없이 팬들의 반응만 살피며 돌려 막기 하다 보니까 캐릭터, 설정, 세계관, 스토리 전부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거기다 캐슬린 케네디가 꺼내 든 황제 클론 아이디어는 그 자신이 2014년 4월 25일에 폐기한 레전드에서 가져왔다. 캐슬린 케네디의 '빈곤한 상상력'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느라 포스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만능키)' 되고, 레이는 '메리 수(천하무적)' 화 되어 시리즈 전통을 더더욱 망가뜨린다. 이게 다 라제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전부 다 수습하려고 노력하면서, 9편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시퀄 3부작 내내 기존 시리즈에 대한 지나친 오마주를 하면서 전통 파괴를 일삼는 모순을 매번 일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도통 [시퀄 3부작]의 주제가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세 편 모두 제각각 따라 놀며 [시퀄 3부작]의 정체성과 주제를 전부 잃어버렸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문제는 빈곤한 상상력과 방향성의 부재다. 이것이 디즈니가 '새로운 스타워즈'를 내세우면서도 [스타워즈 6부작]을 의존하는 [시퀄 3부작]의 한계다. 고로 창의적인 비전이 결여되었을 뿐 아니라 제작진이 [스타워즈] 시리즈 자체를 오독하고 있다는 말밖에 더 되겠는가? 실로 안타깝다.
#10 : 에피소드 8 : 라스트 제다이 (EPISODE VIII - THE LAST JEDI, 2017)
당연하게도 시리즈물은 단 한 편의 완성도로 평가할 수 없다. 라이언 존슨은 우리가 익히 알던 스타워즈의 영웅 서사를 해체시킨다. 영화 전체에 걸쳐 낡은 스타워즈를 새롭게 갈아엎지만, 5편 [제국의 역습]처럼 하는 일마다 죄다 실패하는 통에 다 보고 나면 허무하다. 왜 [제국의 역습]을 레퍼런스한 [라스트 제다이]는 감흥이 적을까? 비극은 공포와 연민을 통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완수한다. [제국의 역습]은 '부살(父殺·Patricide)' 모티브를 차용해 루크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지만, [라스트 제다이]의 성장 자체가 없는 레이에게 어떻게 연민과 공포를 가지겠는가?
라이언 존슨이 전통에만 기반해서는 발전할 수 없다는 '미래주의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따르는 건 좋다. 해체하기에 앞서서 우선 시리즈의 본질을 제대로 통찰했어야 했다. 아니면 아예 과거와는 선을 긋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덧붙여서 차라리 [라스트 제다이]를 첫 번째 영화로 내세워 [시퀄 3부작]에 걸쳐 차근차근 진행되었다면, 훨씬 순조로웠을 것이다. 결국 제대로 된 설명 없이 일부터 저지르는 8편은 J.J. 에이브람스를 포함한 스타워즈 팬들에게는 40년 동안 쌓아왔던 공유 세계관에 대한 '반달리즘'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라이언 존슨은 제다이와 시스로 구분 짓지 말자고 계속 설득하지만, 정작 '저항군 VS 퍼스트 오더' 선악구도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 또, 영화 내내 탈영웅 서사를 부르짖지만, 결국 시련과 고초를 한 번도 겪지 않는 완전무결한 레이의 영웅 서사를 보면 자기모순처럼 읽힌다. 거기다 서스펜스에 약한 라이언 존슨의 약점이 겹치면서 저항군을 계속 위기로 몰아넣지만, 지켜보는 관객 입장에서 긴박감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 ([나이브스 아웃]을 보면 그는 미스터리에 강점이 있는 감독이다.) 전부 라이언 존슨이 별다른 설득 없이 시리즈의 요소들을 본인 입맛대로 취사선택하고 변용한 결과였다. 왜 그랬을까?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두, 자크 데리다는 흔히 '선과 악' 같은 이항대립 체계를 종언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 가르침대로 라이언 존슨 역시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을 종식시키고 싶었을 테다. 그러나 사실 데리다는 이항대립의 경계, 울타리를 이야기할 뿐 종언을 고하지 않았다. 데리다는 이항대립을 해체하되 이항대립 그 자체가 종결될 수는 없다고 봤다. 왜냐하면 성경을 포함한 서구인의 사고체계 전부를 뜯어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라이언 존슨도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맹점에 빠졌던 것이다.
결국에는 괜찮은 완성도임에도 불구하고, 후속작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 그 즉시 기록 말살 형에 처해진다. 이제 루카스 필름 내부에서조차 ‘흑역사’로 공인된 셈이다. 그러나 조만간 재평가 받을지도 모른다. 현재 라이언 존슨이 집필하는 구 공화국 시점의 신규 3부작(10,11,12편)이 2022년 12월, 2024년 12월, 2026년 12월 개봉 예정으로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케빈 파이기가 제작하는 스타워즈 작품 역시 2022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어 동일한 프로젝트로 예상된다.
#9 : 에피소드 7 : 깨어난 포스 (EPISODE VII - THE FORCE AWAKENS, 2015)
첨 볼 때는 클래식 느낌이 나서 반가웠다. 다시 보니 [깨어난 포스]는 [에피소드 4·5]을 리뉴얼했을 뿐 아니라 개봉 당시 과대평가보다 실제 완성도가 떨어지고, 의미 없는 서사가 많았다.
물론 당시에는 이러한 구멍들이 차기작을 위한 떡밥으로 간주하고 넘어갔었는데, 라이언 존슨의 8편 [라스트 제다이]이 떡밥 자체를 무시하고, 세계관 자체를 붕괴시키는 바람에 에이브람스가 직접 연출한 9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 망가진 세계관을 수습하고, 설정 구멍을 막는데 급급하게 되었다.
문득 왜 에이브람스가 ‘떡밥의 제왕’이 되었을까? 가 궁금해진다. ‘쌍제이 특유의 떡밥 투척’은 독창성이 부족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다, 맥거핀(떡밥)을 많이 설정해서 재빨리 흥미를 유발하고, 연속된 위기를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며 돌려 막기일 뿐이다. 7편과 9편에서 쌍제이의 단점이 크게 부각되는데, 새로운 맥거핀이 파생될 때마다 또 다른 플롯 포인트가 생긴다는 점이다. 무언가 흥미로운 떡밥을 던지긴 하는데 전체적인 흐름은 전진된 게 없다. 게다가 쌍제이가 캐릭터들조차 도구적으로 정보와 아이템을 주는 용도로 쓴다. 아마 데이지 리들리조차도 레이가 어떤 역할인지 잘 몰랐을 것이다. 3편 내내 자꾸 설정이 바뀌니까 말이다. 핀과 포 다메론도 마찬가지다.
디즈니가 안정된 돈벌이를 위해 ‘추억 팔이‘에 안주한 결과, 시리즈로의 신규 관객 유입에 실패한다. 진부한 [시퀄 3부작]으로 스타워즈를 처음 접한 세대들에게 "개연성도 부족하고 재미없는" 시리즈로 받아질 수밖에 없다. '영혼 없는' 팬 무비를 누가 좋아하겠는가?
시퀄과 프리퀄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깨어난 포스]에서 레이가 모아 온 고물을 수거하는 배급소 주인 '운카 풀럿'은 뚱뚱한 구두쇠 정도로 단편적으로 묘사한다. 반면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부품가게 주인으로 나오는 '와토'는 어떤가? 이방인 '콰이곤 진'을 경계하지만 장사치답게 흥정을 건다. 자신의 노예인 아나킨의 포드 레이싱 재능을 인정해서 포드를 제공해준 적이 있으며, 경주 도박을 하기도 한다. 또, 자바 더 헛을 두려워하고, 세불바가 아나킨에게 해코지 못하도록 단속한다.
루카스는 '단역'이라고 해도 그 전후 배경와 상호작용을 미리 설정해둔다.
그렇기에 루카스의 형편없는 연출력에도 불구에도 [스타워즈]가 확장세계관의 선구자로 매김 할 수 있었다. 간과하기 쉽지만, 조지 루카스 세계관과 캐릭터를 설정할때 입체적 사고로 그린다. 거대한 세계관을 창조하려면 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지라 언뜻 별 관계가 없는 대상과 우리는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명시적으로 표시되지 않지만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와 관습이 있지 않은가? 제임스 카메론도 조지 루카스처럼 인류학적·미학적 맥락을 철저히 따진다. 그는 [아바타]를 제작할 때 나비족 언어와 종교, 규범, 문화, 지리까지 미리 설정한 다음에야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했다.
6편 [제다이의 귀환]에서 은하 제국이 멸망하고, 들어선 신 은하 공화국이 어떤 과정으로 붕괴되었는지 7편 [깨어난 포스]가 전혀 설명하지 않아서 납득이 가지 않았다. 즉, 정체불명의 퍼스트 오더가 왜 위협적인지를 관객 입장에서 와닿지 않기에 [시퀄 3부작] 내내 ‘긴장감의 부재’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부실한 세계관 구현이 2020년 현재 [시퀄 3부작] 관련 작품보다 이전 [프리퀄 3부작] 혹은 [클래식 3부작]에 기반한 미디어 믹스 및 파생상품이 더 많은 이유다.
#8 : 솔로 : 스타워즈 스토리 (SOLO: A STAR WARS STORY, 2018)
크리스 밀러 & 필 로드의 급작스러운 해고로 말미암아 캐슬린 케네디가 싹 다 갈아엎도록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워즈] 간판을 떼고 보면 괜찮은 하이스트 무비다. 다만, 구원투수로 등판한 론 하워드가 산으로 갈 뻔한 작품을 겨우겨우 수습한 티가 난다. 예를 들면, 항공권이 없는 한은 제국군에 의해 수배령이 내려지지만, 정작 제국군 입대 담당관은 그에게 성을 붙여준다. 이렇듯 얼렁뚱땅 넘어가는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도 베테랑 론 하워드가 촉박한 제작 기한 내에서 균열을 최소화했다.
해리슨 포드를 닮지 않은 엘든 이렌리치는 차분하게 연기를 잘했고, 까칠한 드로이드 L3-37과 도널드 글로버의 랜도 칼리시안은 씬 스틸러다. 그럭저럭 즐길만하지만, 애초부터 3부작으로 기획되어서 그런지 속 시원한 기원담을 들려주지 않는다. 꽁꽁 싸맨 채 이야기를 진행시키려다 보니 자꾸만 여타의 SF 영화들이 연상될 뿐 특별한 인상을 안겨주지 못한다. 문제작 [라스트 제다이]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프랜차이즈 최초로 적자 흥행을 기록하게 된다. 이 사단의 원흉인 캐슬린 케네디는 어쩔 수 없이 한 솔로의 속편 계획과 [오비완 케노비], [보바 펫]의 앤솔로지 시리즈를 취소한다.
그러나 [더 만달로리안]에 앞서 시리즈 최초로 '암시장의 밀수와 범죄'를 조명한 공로는 인정해야 한다. 자바 더 핫이 이끄는 핫 카르텔, 코렐리아 행성에서 제국 전함이 건조되는 장면, 우주 공항의 묘사, 코악시움 광산의 묘사, 츄바카와 우키 종족의 묘사 등 [시퀄 3부작]이 등한시했던 세계관 구현에 노력했다.
#7 : 에피소드 1 : 보이지 않는 위험 (EPISODE I - THE PHANTOM MENACE, 1999)
[프리퀄 3부작]의 밑바탕을 깔기 위한 거대한 예고편에 불과하다. 포드 레이스 장면과 다스 몰과의 검투신만 보거나 [보이지 않는 위험]을 통째로 건너뛰더라도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러나 상상력이 결여된 ‘시퀄 3부작’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위험]의 세계관 확장이 긍정적인 평가로 돌아섰다. 살다 살다 [프리퀄 3부작]을 응원하는 날이 오다니
무역협상, 분리주의 연합 등 진지한 정치적 담론, 자자 빙크스의 고통스러운 CG 슬랩스틱, 부재한 주인공, 처참한 대사, 느슨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클래식 3부작과는 확연히 차별화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바로 로마 공화정이 제국화되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주인공의 결함으로 인해 자신과 주변인이 파멸로 치닫는 셰익스피어리언 비극을 시리즈에 훌륭하게 이식시켰기 때문이다.
또, [클래식 3부작] 과는 이질적이었던 디자인이 클래식의 변영에 지나지 않는 진부한 디자인을 선보인 [시퀄 3부작]으로 말미암아 지금에 와서는 과감한 도전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끝으로 미디클로리언을 통해 '기(氣)'에서 착안한 포스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이 개념으로 노예 신분인 아나킨을 '선택받은 자'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8편 이전부터 누구나 포스를 가질 수 있다는 '포스 에브리웨어' 설정은 이미 존재했었다.
#6 : 에피소드 2 : 클론의 습격 (EPISODE II - ATTACK OF THE CLONES, 2002)
[클론의 습격]은 조지 루카스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사와 형편없는 연출, 헤이든 크리스텐슨의 발성 문제가 겹치면서 '역대 최악의 로맨스 영화'라는 혹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100% 디지털 촬영으로 완성된 첫 블록버스터이며, 이 영화를 기점으로 영화 산업은 필름에서 디지털로 넘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요다와 두쿠 백작의 라이트세이버 결투, 제다이 기사단와 분리주의 연합의 드로이드 간 전투 등으로 액션을 강화했으며, 의회를 장악한 팰버틴 의장이 무역 연합에 대항하고 분리주의자들로부터 은하 공화국을 방어할 목적으로 비상 권한을 부여받는다거나 보바 펫과 클론 트루퍼를 결부 짓는 아이디어 자체는 괜찮은 편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법이다. 루카스의 탁월한 기획력에 비해([시스의 복수]을 위해 아껴둔) 드라마의 부재를 막을 캐릭터 묘사에 실패하면서 시리즈 사상 가장 지루하다는 혹평을 면치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쉬운 점은, 조지 루카스가 프리퀄을 만들게 된 직접적인 동기인 '클론 전쟁'의 개전만을 알린다는 점이다. 추후 전쟁의 진행 상황은 [클론 전쟁(2003/2008)]로 대체됐다. 있으나 마나 한 ‘제다이의 결혼 금지 규율’ 따위보다 '클론 전쟁' 자체에 포커스를 뒀다면, [에피소드 1·2]가 이리 허무하게 낭비되지 않았을 터, 무척 안타깝다.
하지만 2편의 숨은 장점은 비극의 단초인 ‘하마르티아(Hamartia)’를 제공했다는 데에 있다. '하마르티아’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가다’ ‘길을 잃고 헤매다’이지만, 하마르티아는 주인공이 지닌 결함으로, 아나킨은 금혼 계율을 어기고 파드메와 결혼하고, 제다이답지 않게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이것이 아나킨의 하마르티아다. 그의 판단 실수는 '비극'이라는 커다란 기계를 작동시킨다. 마치 브레이크 페달이 고장 나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된 자동차의 결함처럼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2편의 빌드업이 있었기에 3편에서 극적으로 반등할 수 있었던 것이다.
#5 : 에피소드 6 : 제다이의 귀환 (EPISODE VI - RETURN OF THE JEDI, 1983)
놀란의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처럼, 3부작을 마무리 짓는 일은 어렵다. [제다이의 귀환]은 전편 [제국의 역습]이 근사하게 던져놓았던 기대감을 충족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고, 지금까지 끌어온 시리즈의 결말을 내야 하는 힘겨운 미션이 남아있었다. 그럼 [스타워즈]의 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파우스트]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과 동일하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이 어떻게 타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결국 자신의 구원을 가능케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제다이의 귀환]라는 제목은 아나킨이 메피스토펠레스(팰 버틴)을 원자로에 던져버리며, 인간성을 회복하는 걸 의미한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아들의 얼굴을 마주함으로써 부자간의 화해가 이뤄진다. 여기서 그리스 비극과 [스타워즈]의 차이점이 발견한다. 그리스 비극은 신이 정한 운명론에 의존하지만, 팰버틴에게 끌려다니던 다스 베이더가 자신의 의지로 다시금 아나킨 스카이워커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타락한 영웅이 스스로 선택해서 악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포스의 균형'이다.
더욱이 6편은 분명히 4편 [새로운 희망]의 아이디어를 재탕하고, 인물 간의 갈등구조가 할리우드 영화답게 안전하다.
그것이야말로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게 [배트맨 비긴즈]을 참고하라는 교훈으로 받아졌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제다이의 귀환]는 클래식 3부작이 남긴 수많은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무용담을 장중하고 우아하게 마무리했다. 이후 루크와 레아를 중심으로 레전드 확장 세계관(EU)이 진행되고, 팬들로 하여금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악당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뒤에 팬들의 소원은 마침내 이뤄진다.
#4 : 로그 원 : 스타워즈 스토리 (ROGUE ONE: A STAR WARS STORY, 2016)
드디어 디즈니 스타워즈가 재탕을 멈추고, [스타워즈]의 감춰진 이면을 파헤친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저항군 특공대들의 희생을 다룬다. 원래 [스타워즈] 자체가 제2차 대전 전쟁 영화들에게서 착안한 작품이었다. 은하제국 군복은 나치 독일과 매우 유사하며, 저항군은 연합 군을 연상시키지 않은가? [로그 원]은 한발 더 나아가 ‘레지스탕스‘의 이미지를 덧입힌다.
다시 말해 스타워즈 특유의 유치한 가족영화의 틀을 버리고, 본래 스타워즈 세계관에 지니고 있던 2차 대전 특공대를 내세운다. 그러면서도 [스타워즈 6부작]과 연결성을 중시한다. 무엇보다 가렛 에드워즈의 장단점이 다 발휘됐다. 무미건조한 캐릭터 구축과 초반부의 산만한 드라마가 아쉽지만, 스펙터클하게 규모를 살리는 연출이나 사실성을 강조한 서사구조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요즘 미드 [만달로디안]가 호평을 받는 이유는 [로그 원]과 동일하다. 기존 스타워즈 설정을 존중하면서도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참신한 시도가 병행되었다는 점이 성공 비결이다.
#3 : 에피소드 3 : 시스의 복수 (EPISODE III - REVENGE OF THE SITH, 2005)
조지 루카스의 여전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이야기의 본질에 다가선다. 아나킨은 한 개인이 막을 수 없는 불행이 연달아 닥치며 타락하게 되고, 공화국 역시 멸망하게 되고,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동정심을 가지게 한다. [프리퀄 3부작]을 통해 ‘제다이 vs 시스’로 세계관이 확장하게 되면서 클래식 3부작의 ‘부자간의 골육상잔'은 수 천 년간 이어진 제다이와 시스의 대립 중 하나로 재정립한다.
시스 로드인 황제가 제다이 기사단의 '선택받은 자'를 회유하며 시스의 복수를 완성한다. 스타워즈 팬들은 아니킨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가 되는 결말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창시자가 새롭게 공개한 사실들에 놀람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스승과 제자의 처절한 혈투는 물론이고, 요다가 황제 암살에 실패하면서 은거한다거나 오더 66에 의한 제다이 기사단이 몰락하고, C3P3와 R2D2가 기억을 잃는 과정, 오비완이 포스의 영이 되는 법을 요다에게 전수해준다거나 파드메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들쑥날쑥한 [프리퀄 3부작]을 매끄럽게 마무리하면서도 [클래식 3부작]에서 빠진 빈틈을 세심하게 메웠다.
또, 시리즈 최초의 배드 엔딩에도 불구하고, 라이트 세이버가 누군가에 전해지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된다. 서사와 액션이 완벽한 균형을 이룬 유일한 스타워즈 작품이며, 밝고 유쾌한 [클래식 3부작]과는 180도 다른 어둡고 진지한 [프리퀄 3부작]을 성공적으로 완결 지었다.
만약 ‘현자 다스 플레이거스의 비극’이 없었다면 9편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에서의 황제 클론 아이디어는 그야말로 휴지조각이 될 만큼 확장 세계관과 캐릭터 정립에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
#2 : 에피소드 4 : 새로운 희망 (EPISODE IV - A NEW HOPE, 1977)
대중문화를 영원히 바꾼 영화다. 처음으로 ‘블록버스터’ 영화를 정의 내리고, '콘텐츠 산업'으로의 패러다임을 바꿔, 부가상품을 대중화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영화산업 역시 [스타워즈]를 기점으로 현실의 영역에서 ‘판타지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국내에서 [스타워즈]가 유치하다고들 하는데, 실제로 그러하다. 원래 조지 루카스가 어릴 적 즐겨본 코믹스 [플래시 고든], 구로사와 아키라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1958)], 조지프 캠벨의 원형 신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동양의 '기(氣)' 개념을 서양식으로 재해석한 포스 등의 철학적 우화, 전쟁영화, 갱스터, 호러, 뮤지컬, 서부극의 요소를 섞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가족영화이자 밝고 경쾌한 어드벤처 SF 영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 복합장르 전략은 이후 영화 제작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스타워즈]는 조지프 캠벨의 원형 신화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칼로 총알(빔)을 막거나 우주가 배경인데 18세기 라인 배틀을 펼치는 광경이 의아할 것이다. 이는 시대와 문화권에 구애받지 않는 원형 신화를 차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편부터 '다스 베이더'를 그리스 비극처럼 그리면서 시리즈로써 환골탈태한다. 이때부터 할리우드 극작술에 '원형 신화'가 도입된다.
#1 : 에피소드 5 : 제국의 역습 (EPISODE V - THE EMPIRE STRIKES BACK, 1980)
루소 형제의 말마따나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이 관객의 예상과 기대를 배반한 용기는 [제국의 역습]에서 배웠다. 당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모두 "도대체 뭘 본 거지?" 싶었다고 한다. 악에게 패배한 주인공, 어긋난 로맨스, 새드 엔딩은 상업영화의 오래된 금기들이었다.
전편 [새로운 희망]이 한 편의 독립된 영화로서 완결성을 갖춘 반면에 [제국의 역습]은 어떻게 이야기를 확장시킬 것인가에 대한 지속적인 선례로 여전히 남아있다. 스타워즈 9부작의 밑그림은 여기서 출발했다. 한편 팬들은 [새로운 희망]과 [제국의 역습] 사이의 설정 구멍을 메우며 [확장 세계관 (EU)]를 만들고 놀았다. 바로 ‘원 소스 멀티 유즈의 기원’인 것이다, 이것이 ‘스타워즈’를 신화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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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랑종> 속임수와 혼란 사이에서 고개를 드는 신의 본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집 안, 숲, 산, 나무, 논밭까지 자연의 모든 것에 혼이 깃들어 있다는 전통 신앙이 남아 있는 태국 북동부 이산 지역에서 가문의 대를 이어 조상신 ‘바얀 신’을 모시는 랑종(무당) ‘님(싸와니 우툼마)’. 신의 힘을 빌어 다른 존재의 혼을 침범한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고 제사를 드리며 지내던 그녀는 언니인 '노이(시라니 얀키띠칸)'의 남편 장례식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다.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이 마치 신병에 걸린 듯한 증상을 보인 것. 밍의 증상이 날이 갈수록 점점 심각해지자 님은 그녀가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을 내린다. 이에 님과 동행하며 무당을 취재하던 촬영팀은 신내림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과 님, 그들의 가족까지 카메라에 담기고 결정하고, 이들 모두는 밍에게 빙의한 존재로 인해 미스터리한 사건에 휘말린다.
<곡성>의 나홍진 감독이 기획/제작하고, <셔터>로 유명한 태국의 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이 연출을 맡은 <랑종>은 개봉 전부터 매우 잔혹하고 섬뜩한 작품이라는 후기로 인해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직접 마주한 <랑종>에서 가장 눈길이 간 곳은 예상외의 대목이었다. 그것은 바로 영화 전반을 장악한 테마인 '속임수'와, 그 눈속임의 연속이 조성하는 혼란과 공포, 그리고 그 사이에서 고개를 드는 신과 종교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었다.
우선 <랑종>의 테마인 속임수는 영화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당장 님이 무당이 된 이유부터 눈속임에서 비롯된다. 본래 무당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님은 언니인 노이가 자신에게 부적을 몰래 붙이고 본인은 성당에 나가는 등의 꼼수를 부린 결과 바얀 신을 모시게 되었다. 이렇게 한 명은 속고, 한 명은 속이는 자매의 역사는 영화에서 반복된다. 노이와 큰오빠 '마닛(야사카 차이쏜)'의 불협조로 인해 밍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던 님은 그녀의 증상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자신의 삶이 그 자체로 다른 이들을 속여 온 것일지도 모른다고까지 말한다. 노이도 예전에 바얀 신을 속였듯이 자신과 딸을 괴롭히는 악령을 속이려고 한다. 이에 더해 퇴마사 싼티와 밍, 마닛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속인다.
영화의 구조도 마찬가지다. <랑종>은 분명 공포 영화의 외관을 가지고 있다. 악령이 빙의한 밍이 갑작스레 생리하거나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는 장면은 불쾌감과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애완견을 죽이고, 자해하고, 섹스를 갈구하는 등의 행위는 스크린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이 무섭다. 그런 그녀를 옆에서 보는 가족들의 심정, 악령으로 인해 자신이 모시는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님의 모습도 두려움과 공포를 부추긴다. 이때 <랑종>은 악령들에 의해 일가족이 고통받는 끔찍한 비극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야싼티야'라는 밍의 가문명이 적힌 인형이 클로즈업되는 순간, <랑종>이 보여준 공포영화의 겉모습은 속임수로 밝혀진다. 님과 밍의 가족이 아닌 밍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악령들의 관점에서 볼 때 <랑종>은 기본적으로 처절하면서도 짜릿한 복수극이 되기 때문이다. 보험금을 노리고 공장을 방화한 밍의 할아버지로 인해 죽은 노동자들과 동식물의 혼, 노이가 불법인 장사를 지속하면서 도축한 개들의 혼은 그저 자신들이 당한 일을 가해자들에게 그대로 되돌려줄 뿐이다. 이는 다큐멘터리 촬영팀이 화장실까지 따라오며 관음적으로 촬영하는 것을 불쾌해하던 밍이 악령에 사로잡힌 뒤 카메라맨을 역으로 촬영하면서 공격하는 것으로 복수하는 장면과도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
이처럼 속임수가 겹치고 겹친 결과 주인공들은 혼란에 휩싸이고, 혼란 속에서 선과 악의 경계선까지 모호해지자 그들은 이내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든다. 밍의 가족과 님의 입장에서 밍에게 빙의해 자신들을 공격하는 악령들은 악이고, 바얀 신은 그들을 무찔러 줄 선한 존재다. 하지만 악령들이 정작 자신들과 조상들의 업보로 인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보니 과연 그들을 순전히 악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자연히 의문스러워진다. 공포 영화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였던 악령과 밍의 가족 간의 관계가 복수극에서는 역전이 되고, 그 결과 악령이라 부르는 존재에 대한 선악의 구분은 이제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악령이 무조건적인 악에서 벗어나자 악령을 퇴치하려는 노력의 정당성도 미약해지고, 주인공들은 악령 앞에 무력해진다.
작중 바얀 신의 역할에도 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바얀 신은 밍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것 외에 철저히 침묵한다. 신을 자신의 몸에 모시는 님은 뛰어난 신통력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밍이 보이는 이상 증세의 원인을 착오하고, 악령들에게 농락당한다. 악귀들을 물리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에도 바얀 신은 마치 죽은 듯이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다. 다만 바얀 신의 침묵은 신을 철저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이해한 결론이기도 하다. 주인공들은 바얀 신이 자신들의 가문을 지켜주는 선한 존재이기에 이번에도 악령을 물리치거나 그 방법을 알려줄 것이라고 믿었다. 야싼티야 가문의 시점을 탈피하면 그들의 비극이 단지 그간 지은 업보를 되돌려 받는 것에 불과하며, 조상신인 바얀 신이 주인공들을 온전히 지키고 보살피는 것을 선한 일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구심이 생긴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이는 악령에게도 그러했듯이 인간의 선악관이 신이라는 존재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과 다름없다.
따라서 작중 바얀 신이 죽은 것처럼 묘사되는 것은 사실 인간이 상상하는 신의 형상과 이미지가 파괴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바얀 신의 석상은 그저 인간이 만든 상징일 뿐, 그의 존재와 힘은 석상 밖에 온전히 존재한다. 이는 한평생 바얀 신을 모셔온 님이 마침내 신의 본질을 마주하고 깨달은 순간 두려움에 휩싸이고 퇴마의식이 효과가 있을지 의심하며, 무당으로서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랑종>은 신이 인간의 관념을 넘어서는 존재이고, 그 앞에서 인간은 신의 의지를 이해하기는커녕 그의 힘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으며, '선함'의 껍데기를 벗고 드러난 신의 본질은 그 자체로 두렵고 공포스럽다고 이야기하는 영화다.
사실 이러한 신에 대한 고찰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 속 등장인물인 욥에게서도 님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아무런 죄를 짓지 않고 살았던 욥은 신에 의해서 난데없이 재산과 가족, 자신의 건강을 모두 잃는다. 이에 마지막까지 신의 선의를 믿던 욥도 끝내 왜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신에게 따진다. 하지만 신은 그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 단지 폭풍 속에서 모습을 잠시 드러낸 그는 힘으로써, 두려움과 공포로 압도할 뿐이다. 압도적이고 절대적인 신의 힘 앞에서 욥은 인간적 관점에서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워보지도 못한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 왜 자신이 아닌 딸에게 이런 불행을 주냐고 절규하는 노이, 선한 신이 악령들을 물리칠 거라 기대하지만 그 기대를 배신당하는 님과 닮았다.
다만 욥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과 달리, <랑종>의 주인공들은 새드엔딩을 맞는다. 그 이유를 영화는 믿음의 차이에서 찾는다. 욥은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두려움을 토로한 성경 속 다른 예언자들, 쿠란 속 무함마드처럼 끝까지 신을 믿었다. 그러나 작중 등장인물들은 신이나 종교에 대한 믿음이 없다. 그들은 성당을 다니면서도 밍에게 신내림을 받게 하려 하고, 퇴마사를 믿지 못해 결정적인 실책을 저지르며, 바얀 신의 도움을 바라면서도 그에 대한 믿음이 없다. 회색 자동차에 '이 자동차는 빨간색이다'라는 스티커를 붙이면 자동차가 빨간색이 된다고 여기는 것처럼, 합리적이지 않고 말도 안 되는 듯 보이더라도 결코 믿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작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한 결과 끝내 비극을 피하지 못한다.
그래서 선과 악이라는 인간적 관점에서 벗어나 신과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랑종>의 공포는 일반적인 공포영화의 그것과는 결이 다소 다르다. 종교와 신이라는 이미지에서 일반적으로는 고려되지 않는 공포, 신비함 안에 내재되어 있는 두려움, 강력한 힘 앞에서 무력한 인간상을 끄집어 올리기 때문이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가 <성스러움의 의미>에서 말한 대로 “절대적으로 엄청난 것, 거의 악령적인 것,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 영원한 창조력의 수수께끼와 불가해성, ‘전혀 다른 것’으로서 우리의 모든 개념적 사고를 조롱하는 것, 그러면서도 우리의 마음을 심층에서 움직이며 매혹하고 동시에 깊은 공감으로 충족시키는 것”이 영화 경험 그 자체로 표현된 것이다.
실제로 <랑종>의 구조나 형식은 이러한 주인공들의 경험과 체험, 그리고 주제의식을 온몸으로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선 영화는 바얀 신이라는 선을 따르는 님을 주인공으로 내세워서 그녀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가게 한다. 바얀 신과 악령이라는 명확한 선악 구도 안에서 악령을 퇴치하는 이야기에 빠지게 만드는 것으로, 이는 영화의 길잡이였던 님이 퇴장하는 순간의 임팩트를 극도로 높이는 장치다. 비 내리는 정글 안에 홀로 남아 길을 알 수 없는 것 마냥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종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등장인물들은 물론 관객들도 함께 빠트리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영화는 중반부까지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현실성과 사실성을 극도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순간적으로 페이크 다큐에서 벗어나는 장면을 꾸준히 삽입하며 기괴함과 두려움을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낸다. 뒤이어 후반부에서는 주인공들이 마주하는 여러 극한의 잔혹함과 공포감을 본격적으로 체험시켜준다.
다만 페이크 다큐 형식은 영화의 힘을 잃게 만드는 문제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 원인은 두 가지다. 우선 영화가 갈수록 아무런 설명 없이 우연과 운에 기대는 다소 극적이고 억지스러운 전개를 선보이다 보니 후반부의 내용은 현실감을 강조하는 형식이 소화하기에는 과하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연상케 하는 카메라 구도로 밍을 관찰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퇴마의식에서 카메라가 카메라맨들이 공격당하는 모습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도록 세팅되는 상황에서는 해당 화면을 애써 사실적으로 만들려는 작위적 장치가 숨겨지지 않는다. 또한 보기 드물었던 점프 스퀘어를 비롯한 여러 호려 영화의 클리셰가 후반부에 집중된 것도 원인이다. 너무 짧은 순간에 강렬한 자극이 반복해서 등장하다 보니 피로함을 주고, 더 나아가 영화의 전반부와의 이질감을 키우면서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다 보니 중반부까지 조성되는 으스스함, 언캐니(uncanny)함과 서스펜스에 비해 후반부는 다소 맥 빠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결과 <랑종>은 기대한 바가 무엇인지, 영화의 촬영 방식과 형식에 동의하는지, 주제의식과 메시지가 얼마나 강하게 느껴지고 다가오느냐에 따라서 평가와 호불호가 극과 극을 오갈 수밖에 없는 영화다. 누군가는 나홍진 감독과 <곡성>의 명성에 비하면 최소한의 장르적 재미조차도 잡지 못한 조잡한 공포 영화라고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쓸데없이 잔인하고 관음적인, 개인의 신념과 사상에 따라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쾌한 영화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랑종>이 신의 본질과 종교를 구성하는 근간에 대해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영화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만은 분명하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상황을 조성하는 힘에 비해 풀어내는 기교가 부족했던 신과 종교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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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추천작] 소행성을 찾아떠난 이유
제10회 서울국제어린이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 <울야는 못말려>. 어떤 작품이기에 개막작으로 선정이 됐을까 굉장히 궁금했었는데, 어린이의 모험심과 이를 둘러싼 어른들의 관심, 그리고 우정에 대해서 잘 풀어내서 개막작으로서 멋지게 SICFF를 열어준 작품이었다.
영화 <울야는 못말려> 시놉시스
삶의 이유인 천문학 연구에 방해를 받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한 열두 살 울야는, 동급생이 운전하는 훔친 영구차를 타고 동유럽을 가로질러 소행성의 충돌을 보러 간다. 이 여정을 통해 울야는 그녀를 뒤쫓는 이들뿐 아니라 그녀가 가족과 우정에 대해 가졌던 실리적인 생각도 떨쳐 버려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법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울야는 못말려>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동네가 필요하다
천재소녀 울야는 종교를 맹신하는 할머니로 인해서 더이상 집에서 천문학 연구를 할 수 없게 되자, 운전을 할 수 있는 헨크와 함께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의 추락을 직접 확인하러 국경을 넘어 파츠루크로 향한다. 12살 어린 아이들이 자신의 집에서 1,000km나 떨어진 곳을 직접 가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어쩌면 자신을 믿어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믿어준 키르시프 교수님 덕분에 울야는 1차적으로 그 먼거리를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자신의 부모님이 어떻게든 자신을 찾아낼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무모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부모님 몰래 국경을 넘는 가출을 감행한 울야를 찾기 위해 온 동네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이유로 한 데 모여 울야와 행크 찾기에 나선다. 없어진 성모마리아상을 찾기 위한 타락한 목사와 성가대 대회로 출발할 것이라고 착각한 다른 마을 주민들, 그리고 울야를 찾기 위한 울야의 부모님까지. 초반 그 목적은 달랐지만 결국에는 울야와 행크를 찾는 것으로 그 방향이 모아지면서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한 아이를 지켜내고 성장시키기는 데에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출한 울야를 쫓는 동네 사람들의 추격신을 통해 잘 풀어내고 있었다.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
그렇다면 울야와 행크는 왜 가출을 한 것일까? 표면적으로 울야는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을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였고, 행크는 자신이 운전을 해주면 울야가 4주동안 숙제를 대신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내면을 조금만 살펴보면, 그들의 가출은 어른들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울야는 겉보기에는 할머니, 엄마,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어른들은 울야가 원하는 것이 아닌 어른들이 하고 싶은 대로 그들의 방식으로 울야를 사랑하고 있었다. 울야가 얼마나 천문학에 관심이 많고 이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행크 역시 마찬가지다. 행크는 굉장히 자유로워보이는 엄마 아빠 밑에서 자라서 천방지축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 엄마와 아빠의 관심에 목마른 아이였다. 그래서 울야와 함께 떠나는 와중에도 부모님께 ‘나 어디게?’, ‘오늘 집에 안들어가’와 같은 식의 문자를 남기지만 부모는 이에 큰 반응을 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부모의 전화를 기다리지만 행크의 부모는 전화 한 통을 주지 않는다.
영화 <울야는 못말려>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관심이 어떠한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 풀어내고 있었다. 행크의 부모처럼 너무 무관심해서도, 울야의 부모처럼 아이에 대한 배려 없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관심과 애정을 쏟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상호존중과 배려가 바탕에 있는 관심이 아이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함께 가는 여정의 즐거움을 알다
행크와 함께 떠난 여행에서 울야는 굉장히 독단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이것은 내 여행이니까 내 말을 따라야 돼’, ‘내가 하자는 대로 해야 돼’라고 말하면서 행크의 의견을 묵살하거나 자신의 위치를 모조리 알려버리는 행크를 굉장히 한심하다는 듯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소행성을 직접 관찰하기 위해 지금까지 함께 운전해 온 행크를 버리고 혼자 파츠루크로 향하는 모습에서 행크라는 존재를 도구적으로 이용한 것처럼 보이기 까지 해서, 자신의 지성을 믿고 친구를 저렇게 이용만 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결국 울야는 자신이 소행성을 발견한 뒤 직접 파츠루크로 올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행크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을 추켜세우는 기자들 앞에서 행크를 자신의 가장 큰 조력자라고 밝히면서 인생에 있어서 ‘우정’이라는 요소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함께 였기에 그 먼길을 재밌게 올 수 있었고, 난관을 해결했다는 사실을 울야는 비로소 깨달은 것 같았다.
천재소녀와 자유로운 소년의 국경을 넘은 가출기를 담은 영화 <울야는 못말려>. 카툰의 요소와 함께 명랑하고도 쾌활하게 그 여정을 잘 풀어낸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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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하는 일에는 꼭 이유가 없어도 돼
줄거리
깊은 전통을 가진 스코틀랜드의 연합 부족 던브로크. 퍼거스와 엘리노어 사이에서 난 첫째 공주 '메리다'. 빨갛게 타오르는 천연 곱슬모를 가진 메리다는 어릴 적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다. 퍼거스는 그런 딸에게 활을 선물하기도 했지만, 왕비인 엘리노어는 메리다가 철저히 운명을 받아들여 공주로 살길 원한다.
메리다의 나이가 차자, 엘리노어는 다른 연합 부족과의 결혼을 서두른다. 자신들의 첫째를 메리다와 결혼시키기 위해 던브로크에 모인 '맥킨토시', '딩월', '맥거핀' 부족. 메리다는 그들보다 뛰어난 활쏘기 솜씨를 선보이며 결혼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내다가 결국 엘리노어와 싸우게 된다.
성을 뛰쳐나간 메리다는 숲에서 자신을 이끄는 도깨비불을 따라갔다가 마녀의 집을 방문한다. 그녀는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목걸이를 마녀에게 건네며, 엄마와 자신의 운명이 바뀔 수 있는 마법을 요구한다. 마녀는 작은 케이크 하나를 건네고, 성에 돌아온 메리다는 그것을 엘리노어에게 건넨다. 그러자 갑자기 엘리노어가 곰으로 변했다?
감상 포인트
1. (개인적이지만) 영어 발음이 쫜득쫜득하고 재밌어서 좋았다.
2. 메리다와 엘리노어가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서 좋은 영화.
3. 무난하게 볼만한 가족 애니메이션.
감상평
영화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정해진 대로,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이 이끄는 대로 운명을 만들어가라는 것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의미에서 영어 원제목은 [Brave]라고 할 수 있겠다.
메리다는 디즈니에서 만든 여타 공주들과는 조금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은 두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데 반해, 메리다는 그냥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싫다고 완강하게 거부한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메리다는 그저 사춘기 반항 청소년에 불과하다는 혹독한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메리다가 자신이 싫은 것을 '싫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괜찮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싫은 것에 'NO'라고 얼마나 완강하게 말할 수 있었던가?
우리는 'YES'만을 강요당했던 세상에서 이제 거절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메리다가 무엇을 할지, 활이나 쏘고 말이나 타면서 대체 어떤 삶을 살고 싶은 건지 갈피가 안 잡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누구에게나 마찬가지 아닌가?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일평생 하고 살 거란 믿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우리의 삶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것들로 가득 차 있고, 우리는 천천히 살아가며 그것들을 누리고 즐기면 된다. 그러니 메리다가 '대체 뭐해 먹고 살 건지'를 우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메리다는 목표의식이나 책임감은 없지만, 일단 현재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확신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용기다.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무언가를 책임져야만 성공한 삶은 아니다.
나 한 사람만 만족시켜도 충분히 성공했다는 것을
[메리다와 마법의 숲]은 메리다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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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만의 숲
한 아름다운 커플이 결혼을 한다. 그 결혼식의 참석자이자 약간은 얼간이같은 나일스는 사실 남의 결혼식이 열리는 그 날을 반복해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결혼식도 아니고, 자신의 친구도 아닌, 자신의 여자친구의 친구 결혼식을 어제도 보았고, 오늘도 보며, 내일도 보게 될 것이다. 무한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렇게 남들에게 지나가는 하루이지만 나일스에게는 똑같이 반복될 그 하루를 사는 와중에 세라를 만나 의도치 않게 그녀를 이 타임루프 세계에 끌어들인다.
나일스와 광란의 밤을 보내다가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혀버려 그의 인생을 망친 대가로 나일스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나일스 사냥꾼 로이를 포함해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불멸의 저주에 걸린 이들은 과연 이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아니, 헤쳐나갈 마음들은 있는 건가??
1. 병맛 코드 속 숨겨진 진지한 메시지
이 영화는 정말 웃기다. 영화 전체적인 분위기는 병맛을 넘어 정말 통통 터진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영화 속에서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힌 나일스, 세라 그리고 로이를 보고 있자면, 하루하루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을 보는 것 같았다.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에 허우적대는 그의 모습은 큰 보상없이, 이벤트 없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다보니, 어제 내가 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내가 지인을 만난 게 어제인지, 그제인지 잊는 나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면서 하루하루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의 체념, 방황에서 비롯된 현대인들의 우울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분명히 영화는 병맛 코드로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짠함, 우울함을 느낄 수 있었다.
현대인들, 특히 직장인들의 삶은 큰 변화랄 것이 없다. 그저 오늘도 회사와 집을 오가며, 내일도 회사와 집을 오갈 것이고, 어제도 회사와 집을 오갔을 것이다. 그 와중에 상사에게 스트레스를 받았을 수도 있고, 다른 친구와 비교를 하며 자괴감에 빠졌을 수도 있으며, 자신이 옳지 못한 행동을 저질러 자신을 자책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인생 자체에서 크게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잊은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난 과거에 뭘하고 살았는지 잊었어요. 기억이 잘 안나요."
현대인 중에서도 나일스는 이미 인생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이뤄내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렸는데, 다른 길을 찾아가 볼 생각조차 안하고, 체념한 사람을 상징한다. 앞으로 더 나아가볼 생각조차 포기한 사람들, 말하자면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캐릭터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마냥 웃고 있지만 속은 문드러진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았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으니, 과거에 내가 한 실수들을 바로잡을 생각도 못하고, 과거를 잊은 듯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래서였는지, 그냥 그가 처한 상황, 타임루프의 원인도 궁금해하지 않고, 그저 시니컬하게 오늘은 어떤 일을 하면서 어떻게 흘러갈지 다 보이는 결혼식 날을 보내야 할까 고민을 하면서 그저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인다. 누군가는 그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으니, 현재라도 충실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타임루프 상황에서 고통받고 있으면서도 타임루프를 벗어나 볼 생각도 없이 체념하고, 안주하는 모습이 더 현실성 있다고 보여진다.
반면, 세라는 나일스와는 달리, 그녀가 처한 이 말도안되는 현실을 바꿔보려고 발버둥치는 의지를 보여준다. 그녀가 이토록 발버둥치는 이유는 그녀의 내면 속에 자리잡은 자기비하적인 감정, 자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족에게 도움이 되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자책감, 나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사랑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비하적 감정은 그녀를 갉아먹고 있었지만 그녀 내면 깊은 곳에 그녀도 이런 거지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반작용적 감정도 있음을 보여주며, 그녀의 부정적인 일면이 그녀의 진취적인 면모를 더 부각시킨다.
이 비슷한 듯 다른 두 남녀의 차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결국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에 달려있음을 시사한다.
2.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영화가 진행될 수록 영화 속 캐릭터들은 각자의 의견을 내세우며, 각자만의 인생관을 대표하는 논리를 펼치는데, 그 차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일스의 관점은
"어차피 이 타임루프 세계를 나가도 크게 대단하게 좋은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이미 내가 익숙해진 세계이고, 크게 부족한 것이 없으니, 예상치 못하게 위험해질 수 있는 타임루프 밖의 세계는 이제 관심없어졌다."
라고 한다면, 세라의 관점은
"그래도 이 타임루프 세계를 벗어나면, 우리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되지 않는가, 내가 과거에 행했던 과오들을 털어내지 못한 채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이 똑같은 일상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한들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이렇게 죄책감을 안고, 안정감을 추구하기 보다는 과거를 청산하고, 위험한 불확실성에 배팅을 해보고자 한다."
라는 것이다. 이 비슷한 듯 다른 두 남녀의 차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쳇바퀴 같은 일상을 살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결국 그 상황을 헤쳐나가는 원동력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 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타임루프 세계관에서 살고 있는 이 두 남녀 뿐만이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적용해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은 결국 안정감 vs 도전 정신으로 압축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혹은 당신은 어떤 관점에 동의하는지. 나는 개인적으로 세라에 생각에 동감하는 편이다.
3. 당신의 어바인은 무엇인가요
개인적으로 세라의 관점에 동의하지만 로이처럼 타임루프 세계관에서 꾸준히 살아가는 것에 대해 아주 부정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세계라면, 나만의 안식처를 찾아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중에서 자신이 긍정하고 살만한 이유를 찾는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괜찮은 삶일 것이다. 로이가 그러했듯이.
하지만 난 이게 나일스의 시니컬한 체념과는 달리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일스는 자신만의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체념한 것이었다면, 로이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진행될 날들이지만 자신의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흐뭇해하고, 자신의 아내가 더 이상 나이들지 않을 수 있음을 긍정하면서 자신의 삶까지 긍정하니, 더 이상 나일스 사냥꾼 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다.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망가진 인생을 책임을 나일스에게 돌리지 않아도 될만큼 행복하게 살 만한 숨통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로이의 삶의 방식을 통해, 누군가는 세라처럼 쳇바퀴 같은 삶을 용기있게 나올 수 없을지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남탓을 하지 않고, 자신만의 어바인, 즉, 인생의 소확행을 찾고,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삶을 살아낸다면, 그 삶을 체념으로 점철된 망가진 삶이라고 누가 평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우리 모두 조금씩 우울하고, 자신을 자책하고, 원망하고, 가끔 남도 원망하면서 조금은 찌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자신을 위로하거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당신만의 어바인을 찾아낸다면, 당신은 세라처럼 쳇바퀴 같은 삶을 뚫고 나갈 용기가 없음을 비관하면서 살아갈 필요도 없어질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 모두 거창한 용기 없어도 되니까 자신만의 숲을 찾아 안정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버텨내는 미학에 대해 고찰하는 영화이다.
그래서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만의 어바인이 있나요?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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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공삼칠 리뷰 - 이름을 빼앗긴 소녀, 지옥에서 희망을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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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리뷰영상은 홍보마케팅사를 통해 저작권 협의가 진행되어 제작된 영상입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발견한 가장 빛나는 만남”
열아홉 윤영은 엄마와 단 둘이 살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한다.
친구들처럼 학교에 가고 싶기도 하지만, 얼른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공장에서 일하는 청각 장애가 있는 엄마를 편하게 해드리고 싶은 마음뿐.
착한 마음과 성실한 의지와는 상관없이 뜻밖의 사고는
윤영을 피해자에서 살인자로 돌변시켜 교도소에 몰아넣고
‘윤영’이라는 이름대신 ‘이.공.삼.칠.’이라는 수감번호로 불리게 만든다.
더 이상 절망적일 수 없는 상황에서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10호실 동료들은 윤영을 지켜주기 위해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데…
반드시 돌려줄게 너의 이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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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에서 만난 타노스와 콜렉터 #7
환몽(幻夢) CINE 리뷰 7화_ 영화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Sicario, 2015) 리뷰
** 영상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의 후속작 '시카리오 : 데이 오브 솔다도'가 개봉했습니다. 숨 막히도록 건조하게 설계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세계관이 그만큼 인상 깊었다는 의미겠지요.
기념하여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조금 깊게 이야기 해봤습니다!
(공교롭게도 멕시코라는 땅에서 어벤져스의 타노스와 가오갤의 콜렉터의 조우네요!)- 드니 빌뇌브 감독의 연출 특징!
- 정의를 위한 악이란?
- CIA와 FBI 이야기
- 아쉬운 점
- 우리가 꼽은 명장면
- 환줄평 / 몽줄평영화 '시카리오 : 암살자의 도시'를 보고나서 마구 생각하고, 마구 떠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시카리오 #시카리오암살자의도시 #드니빌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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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파이프라인> 2차 예고편
목표는 하나, 목적은 여섯!
화끈하게 뚫고, 완벽하게 빼돌려라!손만 대면 대박을 터트리는 도유 업계 최고 천공기술자 ‘핀돌이’는
수천억의 기름을 빼돌리기 위해 거대한 판을 짠 대기업 후계자 ‘건우’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에 빠져 위험천만한 도유 작전에 합류한다.
프로 용접공 '접새', 땅 속을 장기판처럼 꿰고 있는 '나과장',
괴력의 인간 굴착기 '큰삽', 이 모든 이들을 감시하는 '카운터'까지!
그러나 저마다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이 서로를 속고 속이면서
계획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데...
인생 역전을 꿈꾸는 여섯 명의 도유꾼들
그들의 막장 팀플레이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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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어웨이크> 공식 예고편
알 수 없는 현상이 전 세계를 덮친다.
모든 전자 기기는 사용 불능 상태가 되고, 인류는 잠들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세상.
과거의 상처를 간직한 전직 군인 질(지나 로드리게스)에게 이 현상을 치유할 열쇠가 있을지 모른다.
그녀의 어린 딸이 그 열쇠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