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8-11 14:55:09
나는 스크린을 찢어. 차기작이 궁금해지는 배우 최현욱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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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 이탈 체포조(D.P.) 준호와 호열이 여전히 변한 게 없는 현실과 부조리에 끊임없이 부딪히며 벌어지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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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보기에는 연약해 보이는 상위 1% 모범생 연시은이 타고난 두뇌와 분석력으로 학교 안팎의 폭력에 대항해가는 약한 소년의 강한 액션 성장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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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시대에게 꿈을 빼앗긴 청춘들의 방황과 성장을 그린 청량 청춘 케미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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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에 가려진 택시회사 무지개 운수와 택시기사 김도기가 억울한 피해자를 대신해 복수를 완성하는 사적 복수 대행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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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소년소녀들의 유기농 깨발랄 성장기
[차기작]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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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면을 벗어야 보이는 것들
슈렉
줄거리
자신만의 늪에서 아늑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초록 오거 슈렉.
평소처럼 느긋한 저녁을 즐기려는데, 동화 속 주인공들이 갑자기 슈렉의 늪에 쳐들어온다.
알고 보니 듈락의 통치자, 파콰드 영주가 그들을 모조리 쫓아낸 것.
완전 열받은 슈렉은 파콰드를 찾아가 늪을 내놓으라 따지고, 파콰드는 한 가지 제안을 하는데...
가면을 벗어야 보이는 것들
숨은 의미 찾기
‘오거’라는 단어는 슈렉 전과 후로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영화 개봉 시기가 2001년인데, 그 당시에 ‘괴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 영웅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실로 과감한 시도였다.
“이해가 안 돼, 슈렉. 왜 오거처럼 안 했어?”
“넌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 알려진 게 다가 아냐. 어디 보자, 오거는 양파와 같지.”
슈렉은 탑 꼭대기에서 피오나를 구출하고 계단을 뛰어내려오면서 서사시 따위는 사치라고 말한다. 그런 슈렉이지만, 왜 오거처럼 굴지 않느냐는 동키에게만은 ‘괴물은 양파다’라며 지리는 비유를 한다. 깊은 문학적 비유 따위를 알 리 없는 동키는 ‘냄새가 고약해?’라고 묻지만.
슈렉은 양파처럼 겉으로는 맵고 눈물 나게 하고 냄새도 나지만, 속을 까고 까고 까다 보면 정의롭고 여리고 순수한 면도 있다. 양파의 생김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으로 요상하다. 반으로 잘라내지 않는 한, 둥근 막을 완전히 벗겨내야만 그 속의 다른 겹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양파와 같은 슈렉의 매력, 참모습을 보기 위해선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그런데 모두가 양파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괴물과 양파는 똑같이 겹이 있다는 슈렉에게 동키는 깐족거리며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덧붙인다. 물론 생양파도 물에 한 번 헹궈서 연어랑 홀스래디쉬 소스에 찍어 먹거나, 라이스페이퍼에 각종 야채와 넣어 월남쌈으로 먹으면 꿀맛이긴 하다. 하지만 생양파를 우적우적 씹어먹을 만큼 양파를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에 슈렉이 말한 ‘괴물의 겹’은 결코 파르페나 케이크와 같은 달콤한 음식에 비유될 수 없는 것이다.
양파는 속을 까보지 않아도 누구나 좋아하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들과는 다르니까.
“케이크는 다들 좋아해! 게다가 층으로 되어있지.”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슈렉이 양파라면 피오나는 케이크나 파르페 쯤일 것이다.
구태여 속을 까보지 않아도 모두가 달콤한 향기와 황홀한 생김새에 마음을 홀딱 뺏기고 마니까. 양파가 제대로 속을 까보지도 않고 판단해서 문제라면 케이크는 속에 얼마나 많은 겹이 있는지 아무도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 속에 초코시트가 들었는지, 바닐라 시트가 들었는지, 딸기가 들었는지, 생크림이 들었는지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위험에 처한 공주를 구해서 결혼하고 왕이 되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남성형 신분 상승’ 이야기다.
피오나를 권력 취득의 ‘수단’으로만 여긴다는 점에서 파콰드나 성에서 불타 죽은 이름 모를 기사들은 전부 동일 인물이다. 동화 속에서 여성이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것은, 남성이 주인공일 때든 여성이 주인공일 때든 마찬가지였다.
“밤과 낮에 따라 모습이 달라질지어다.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로 사랑의 참모습을 따를 때까지.”
그런 점에서 슈렉 속 마녀의 저주는 다른 마녀들의 저주와는 달리 참으로 특이하다.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가 ‘저주를 풀어준다’고는 하지 않는다. 피오나의 겹은 파르페나 케이크와 같다 했던가. 낮에 비치는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은 모두가 독점하려 달려드는 케이크의 겉모습이지만, 그 속에 들은 진정한 모습은 괴물이었다.
내면이 괴물이라고 해서 그것이 추하다거나, 못났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울퉁불퉁 못난 괴물이라는 생김새는 피오나 내면의 아픔을 형상화 한 것이다. 공주라고 항상 아름답고 행복하고 즐거운 것은 아니다. 성에 갇혀 홀로 살면서 느낀 외로움과 슬픔, 슈렉은 그 상처마저도 피오나의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슈렉은 케이크 속을 들여다본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슈렉이 피오나를 구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구해준 셈이다.
슈렉과 피오나는 아주 두꺼운 가면을 쓴 채로 서로를 만났다. 슈렉은 까칠하고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숨겼다. 피오나는 '공주다운' 외모와 지위로 자신을 포장하며 아픔을 숨겼다. 가면은 자신을 가리는데에는 꽤나 효과적이지만, 상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면이 너무 두터우면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게 자기 가면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했던가.
때론 그 가면을 벗어던져야만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페르소나다.
슈렉이라는 영화를 두고 대부분은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도전장이라고만 해석한다. 하지만 슈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 슈렉과 같지는 않는지 묻는다. 우리 내면에 겹겹이 쌓인 아픔과 상처들이 만들어낸 가면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슈렉처럼 깊숙한 늪지에 스스로를 가두고는,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며 거칠고 위협적인 가면을 쓴다. 사실 그 가면을 쓰는 이유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가? 물론 이 험난한 세상에서 뒹굴기 위해서는 맨 얼굴을 가리는 게 필수라고들 한다. 어쩔 수 없다고. 그렇다면 적어도 남들이 나의 가면만 보고 나를 판단한다고 말하지는 말자. 나 역시 남들을 그렇게 바라보았을 게 뻔하니까.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일단 나부터 가면을 벗고 마음을 열어보는 게 우선 아닐까.
어른에게 더 필요한 동화
감상평
어릴 적 엄마는 나의 영어공부를 목적으로 수많은 애니메이션 DVD를 구매해서 끼니마다 틀어주었다. 정말 영어공부가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당연히 효과 없다. 아,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이번에 영화를 보니 나도 모르게 대사를 줄줄 읊고 있더라. 아주 허튼짓을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1시간 30분짜리 영화의 대사를 거진 다 외울 정도라면 얼마나 돌려봤을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아리라 믿는다. DVD 케이스 안에 꽂힌 무수히 많은 영화 중에서도 슈렉은 늘 새로운 영화였다. 나 역시 그 영화를 볼 때는 어린아이였으므로, 사회가 규범처럼 내밀던 진부한 공주와 왕자 이야기가 정답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어린아이의 생각을 일깨워준, 그야말로 인생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나이를 먹고 슈렉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어릴 땐 저녁밥 먹을 때마다 틀어보던 영화였다지만, 이제는 나도 모르게 세상과 벽을 쌓고 싶을 때,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보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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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날의 불꽃놀이 같던 아름다운 우리의 추억과 작별하기
모든 영화는 작별을 가르친다. 극장에서 보내는 두 시간, 우리는 다른 세계를 산다. 그저 타인의 삶을 바라보듯 관조하게 만드는 영화도 있다. 주인공과 나는 본질적으로 타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다른 영화들도 있다. 내가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 그의 삶에 이입하게 웃고 울게 된다. 그러나 극장에서의 시간은 유한하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을 비추던 형형색색의 빛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현실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렇게 우리는 한 영화와 작별한다.
영화 <이사>는 이혼을 앞두고 별거 생활 중인 부부와 이들의 재결합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딸 렌의 이야기다. 영화의 결말은 정해져 있다. 두 사람은 결국 헤어짐을 맞이할 것이다. 이혼 전의 별거는 주로 작별의 유예에 불과하니.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딸의 마음이다. 렌은 아빠에게 전화로 두 사람의 마음과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아빠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한다. 그때 렌은 말한다. 나에겐 생각할 시간이 없지 않았느냐고. 이것은 이혼이라는 어른들의 분쟁에 휘말린 아이의 마음을 응축적으로 대변하는 장면이다. 아이에겐 언제나 선택권이 없다. 그저 눈앞에 차차 다가오는 이별을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작별은 관계의 소멸을 의미하기 때문일까. 영화는 불의 이미지를 자주 사용한다. 가정의 불화로 혼란에 빠진 아이는 학교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과학 시간 아이들과 싸움이 붙었을 때, 렌은 알코올램프를 던져 자신의 분노를 표한다. 영화의 말미에서도 불은 중요한 요소로 사용된다. 렌은 두 사람의 재결합을 위해 마지막으로 필사의 시도를 한다. 세 사람의 아름다운 추억이 있던 장소로 두 사람을 불러 모은 아이. 그곳은 세 사람이 함께 축제를 즐기던 장소이다. 아빠는 아이의 간절함에 재결합을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늦었을 뿐이다. 그렇게 축제의 밤은 찾아오고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렌은 이제 인정한다. 그 아름다운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에게 말한다. “내가 어른이 될게”. 작별은 성장을 의미하는 것일까.
영화는 그 순간 끝을 맺을 법도 하나, 환상과 닮은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정글과 같은 공간에서 끝없이 헤매는 렌. 풀숲에서 바다로 나온 렌의 얼굴에는 성숙함이 묻어난다. 그리고 렌의 눈앞에는 세 사람의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이 펼쳐진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행복의 순간. 그 순간마저 불로 인해 사그라든다. 그때 렌은 “축하합니다”라고 연달아 외친다. 아이는 더 이상 분노하지도 떼를 쓰지도 않는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야 한다는 체념의 정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는 기쁨은 공존한다. 그렇게 렌은 한여름 날의 불꽃놀이 같던 아름다운 우리의 추억과 작별한다. <이사>의 러닝타임 동안, 나는 잠시나마 렌이 되었다. 나 또한 수많은 작별들을 만났다. 그리고 작별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것쯤은 안다. <이사>는 작별을 통한 성장이 아픈 성장일지언정 필연적인 것이라면, 조금은 성숙하고 아름다운 작별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지게 만드는 영화였다. 미련투성이인 삶이나, 오늘만은 내 작별들을 축하하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이 영화와 만나서, 작별해서 무척이나 좋았다.
[본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으로 관람한 작품을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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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안 본 사람의 '상견니' 리뷰 (feat. 타임슬립 영화 추천)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상견니
(23.01.25 개봉)
감독: 황천인
출연: 가가연, 허광한, 시백우 등
대만 드라마 탑으로 꼽히는 '상견니'가 이번에 영화로도 개봉했어요 ㅎㅎ 개봉 기념 배우들이 내한(무대인사)을 오시기도 했는데 티켓팅이 겁나게 힘들었기에,, 저는 그냥 영화만...
일단 저는 드라마 상견니를 보지 않았어요! 드라마를 영화화 한 거인 줄 알고 몇십 회 분량을 2시간으로 본다면 꿀이지~ 하고 예매했는데 알고보니 드라마의 스핀오프, 비하인드 느낌이라더라고요... 고로 저는 스토리는 물론 캐릭터에 대해서 1도 모른 채로 영화를 보게 되었고, 일반인(??)의 입장에서 리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항위쉬안은 재회한다.
이들은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지고, 연인이 된다.
2017년, 항위쉬안은 해외 발령을 받는다.
항위쉬안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지만
이 선택은 그녀의 미래를 를바꿀 뿐만 아니라,
리쯔웨이와 모쥔제,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천윈루의 운명까지 바꾼다.
이제 이들은 수없이 뒤엉킨 타임라인 인속에서
서로를 구하기 위해
'라스트 댄스'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한다.
'상견니' 줄거리
이게 영화의 줄거리예요! 확실히 드라마 상견니의 후속 작품인 듯한 느낌이 들죠?
근데 결말은 비슷한 분위기인 거 같더라구요. 영화 상견니에서도 테이프를 태우면서 결국 모두에게 최선인 결과를 선택하거든요. 그로 인해 미래는 온통 바뀌게 되지만 그래도 0의 상태로 돌아가는 데는 성공합니다
영화 안 본 사람은 재미없는 이유!
첫 번째, 캐릭터를 이해하기 힘들다
아무래도 리쯔웨이와 항위쉬안의 재회가 이루어진다는 것부터가 드라마를 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에요. 제가 보기에 저 둘은 어딘가에서 봤나...? 싶은 관곈데, 서로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존재인 거 같거든요? 그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어려워요 ㅠㅠ
두 번째, 타임슬립이 지나치게 자주 나온다
타임슬립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환호하시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터널 선샤인>이나 <라라랜드>처럼 과거와 현재를 왔다갔다하는 이야기를 안 좋아해요. 정신사납고 이해하기가 힘들어서요 '상견니'는 과거와 미래, 그리고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가 정말 수십 번 등장해요...
누가 누군지는 알겠다만 어디서 온 건지는 이해 불가......
세 번째, CG가 구리다
떨어져 죽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봐야 한다 싶을 정도로 영화에 중심적으로 작용하는 씬인데
CG가 증맬루... 구려용...... 떨어지면서 모래바람 후욱~ 피 그냥 줄줄...~ 한국인이 용납하지 못하는 CG의 형태랄까요.
좋았던 점은 배우들이 잘생겼다 정도... 남주는 물론이거니와 나오는 남자마다 잘생겼으니 눈호강이 되는 영화라고나 할까요. 그래도 오늘 밤 어쩌고에 미치에다 슌스케는 못 따라감
아 쿠키는 3개 정도 있는데요. 엔딩 크레딧 올라가면서 바로 나와서 (토이 스토리처럼) 크레딧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이러실 필욘 없습니다!
*스토리: ★
*연출: ★
*영상미: ★
*연기: ★★★★★
*OST: ★
*재관람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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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심과 순수 사이 공룡보다 더 위험한 건 인간이었다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더 편리한 삶을 누리게 되었지만, 그만큼 환경은 파괴되고 오염은 가까워졌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와 기업들이 대책을 세우지만, 그 속도는 자연을 회복시키기엔 너무 더디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여전히 자연을 통제하려 한다. 동물을 가두고, 보기 좋은 풍경을 만들어 인간의 흥미를 만족시키려는 태도는 여전하다. 자연을 인위적인 방식으로 꾸며놓고, 그 위에서 인간은 여전히 우월감을 느끼려 한다.
<쥬라기 공원>과 <쥬라기 월드> 시리즈는 늘 인간의 오만함과 탐욕을 경고해왔다. 이번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그 흐름을 따르면서도, 더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 공룡이야말로 이번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다.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섬에서 살아남은 그들은 이제, 인간의 세계와 충돌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는 그 충돌을 통해 묻는다. 과연 우리가 정말 자연과 공존할 수 있는가.
[첫 번째 감정] 조라의 욕심
조라(스칼렛 요한슨)는 영화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는 제약회사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이라는 말과 함께, 엄청난 돈이 제시되자 다시 그 일에 발을 들인다. 그 선택은 결코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는 평생 험한 일을 해온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번만 성공하면, 이 고된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절실함이 있었다.
조라는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는 사람이다. 그의 내면엔 욕심이 있지만 그 욕심은 본능에 가깝다. 살아남고 싶고, 더는 힘든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바로 그를 이끈다. 그래서 그의 행동은 나름의 당위성을 갖는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고용한 사람들에 대해 책임감을 느낀다. 던컨(마허샬라 알리)과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단지 이 일 하나만 성공시키면 다시 평범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문제는 이들이 간과한 것이다. 그들이 벌이는 일이 공룡에게 얼마나 해로운지, 자연의 법칙을 얼마나 심각하게 위반하고 있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그들은 이전의 재앙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했고,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인간의 욕심이 늘 그렇듯, 선의와 본능 사이에서 균형을 잃는 순간, 파국은 곧 찾아온다.
[두 번째 감정] 마틴의 추악함
마틴(루퍼트 프렌드)은 이 영화에서 제약회사의 실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는 탐험대를 이끌며 공룡 서식지로 들어가고, 어떤 윤리적 고민도 없이 생태계를 무너뜨린다. 그의 목적은 명확하다. 약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손에 넣는 것. 하지만 그 약이 정말 인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막대한 수익을 위한 것인지는 애매하다. 그는 인간 중심적이고, 자연을 도구로 여긴다.
마틴은 조라와의 결정적 차이점을 드러낸다. 조라는 인간으로서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틴은 그런 감정조차 없다. 그는 방해되는 인물이 생기면 무참히 제거하고,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의 선택은 윤리가 아닌 계산이고, 생명보다 수익을 우선시한다.
이런 마틴의 모습은 현실을 거울처럼 비춘다. 우리 역시 과거에 수많은 의약품과 기술을 개발하면서 자연을 파괴해왔고, 그 대가를 아직 치르고 있다. 영화는 마틴을 통해 말한다. 누군가는 결국 돈 앞에서 본성을 드러내며, 그런 탐욕이 결국 인간의 몰락을 이끈다는 사실을. 괴물 공룡이 등장하는 순간보다, 마틴의 얼굴에서 드러나는 무감각한 표정이 더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다.
[세 번째 감정] 헨리의 순수함
헨리 박사(조나단 베일리)는 이 시리즈의 본래 정신을 계승하는 인물이다. 그는 원작의 알란 그랜트 박사의 제자로 등장하며, 공룡을 생명체 그대로 존중하려는 과학자다. 그는 공룡을 단순한 데이터나 실험체로 보지 않고, 경이로운 생명으로 바라본다. 공룡의 생태계를 파괴해서는 안 되며, 설령 그들을 통해 약이 만들어질 수 있다 해도, 그것은 인류 전체가 공유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생각은 조라에게조차 처음에는 너무 이상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공룡과 직접 마주한 순간, 조라 역시 헨리의 시선을 이해하게 된다. 헨리는 공룡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 존재 자체에 감탄하고, 그 안에서 과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본다.
<쥬라기 월드> 시리즈는 여러 번 반복되며 피로감이 쌓였지만, 그럼에도 이 시리즈가 계속되는 이유는 헨리 같은 인물의 철학 덕분일지도 모른다. 자연은 가능한 한 자연 그대로 두어야 한다. 그걸 깨뜨린 것은 인간이지만, 그걸 다시 지킬 수 있는 것도 인간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끊임없이 희망을 말한다.
공룡은 무죄, 인간의 욕심이 유죄다
이 영화는 단순히 한 사람의 욕심이나 실수만을 비판하지 않는다. 영화 속 제약회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이며, 탐욕이 조직화되고 정당화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자연을 파괴하면서도 인류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생명을 거래하는 방식은 익숙할 만큼 현실적이다. 약 하나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그 약조차 일부만이 접근할 수 있는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이 지점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의료의 불평등, 그리고 기술과 자본이 자연을 소유하려는 태도까지 날카롭게 비추고 있다. 결국 공룡보다 더 위험한 건 인간이고, 그 인간을 움직이는 건 시스템화된 욕망일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보다 <쥬라기 월드: 새로운 시작>은 공룡을 보는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이번 편은 특히 공포적 요소와 추격전을 강조하며 <쥬라기 공원1, 2>와 <쥬라기 공원3>의 스타일을 적절히 섞었다. 이야기 구조는 익숙하지만, 시리즈의 핵심이었던 긴장감은 확실히 되살아났다. 그래서인지 호불호에도 불구하고 첫 주 전 세계 흥행은 3억 달러를 넘겼고, 공룡 이야기는 또다시 새로운 시리즈로 확장될 가능성을 보여준다.
가렛 에드워즈 감독은 <고질라>에서 보여준 괴수 연출의 감각을 이번 영화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공룡이 등장하는 타이밍, 위압적인 장면 연출, 공포와 박진감의 균형이 훌륭하다. 무엇보다 <쥬라기 공원 1, 2>의 각본을 썼던 데이비드 코엡이 이번에도 참여해, 시리즈의 감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스칼렛 요한슨은 조라라는 인물의 갈등과 감정을 절제되면서도 힘 있게 표현해냈다. 마허샬라 알리는 묵직한 존재감으로 균형을 잡아주고, 배우들의 연기가 이야기의 무게를 지탱해준다. 마지막 돌연변이 실험체 공룡의 등장은 다소 과한 설정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여름 블록버스터 영화로서 손색없는 재미와 메시지를 동시에 잡았다.
공룡은 여전히 아이들과 가족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저 공룡은 멋지다를 넘어서 우리는 자연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꽤 오래 여운을 남긴다. 비록 원작의 재미와 신선함을 넘어서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영화가 왜 필요한지, 어떤 식으로 관객을 찾아야하는지는 알고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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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담컨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장르
감독, 제작진, 배우, 장르, 줄거리 그 무엇도 알지 못한 채로 보기를 추천하기에 아무 정보도 기입하지 않겠다.
아, 러닝타임 정돈 괜찮겠다. 139분.
대체 뭐라고 표현할까.
마땅한 단어를 떠올리던 무렵, 박찬욱 감독의 한 줄 평을 발견했다.
야단법석 왁자지껄 아수라장 대환장파티에서 막 빠져나왔는데 거울로 보니 내 눈에 눈물이.
그래, 이거다. 영화의 첫인상은 '정신없다'였고, 언젠가부터 '감독의 정체가 뭘까' 싶었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땐 눈물 콧물 범벅된 마스크에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난생처음 보는 종류의 영화였으니까.
컷 전환이 쉼 없이 빠른데도 러닝 타임은 2시간을 훌쩍 넘으니 실제보다 더 길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니 기깔나는 상영관에서 보는 걸 추천한다. 또렷한 색상 구현과 입체적인 사운드를 선보이는 돌비 시네마라던가.
메가박스 코엑스. 영화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아래로 늘어진 계단 한쪽에 털썩 앉았다. 전광판은 때마침 <에에원>의 짤막한 예고편을 무한 반복 중이었다. 사전 정보 없이 보고 싶어서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았는데, 소리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I'll save you"였나. 뭘 구하겠다는 말이 반복해서 들렸다.
뭐지. 세상을 구하는 전사 이야기인가. 히어로 영화인가. 저 사람이 주인공인가 보다. 대충 예감하며, 오래 앉아야 하는 걸 대비해 화장실에 들렸다. 그리고 아쿠아리움 같은 돌비 시네마 입구에 들어서서 공연장 같은 좌석에 앉았고. 돌비 시네마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대단한지 온몸으로 체감하게 한다. 애피타이저로 입맛을 돋우듯 영화를 보기 전 오감을 일깨운다. 두근두근. 괜한 기대감에 사로잡히던 찰나,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땐 몰랐다. 화장실에서 휴지를 뜯어왔어야 했단 걸.
*아래로는 스포가 이어집니다.
거울.
그게 영화의 시작이었다. 컷 하나인데 길이가 꽤 길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들은 웃고 있었던가. 무언가 말하는 것도 같았다. 천천히 거울 속으로 들어가듯 카메라가 가까워지고, 거울 안 세계로 화면 가득 들어찼다. 거울을 마주한 나와 거울 속 나. 하나이지만 둘이고, 둘이지만 하나다. 지금 생각하면 '우린 멀티버스 세계관입니다'를 대놓고 보여준 셈이다.
그러나 관람 중에 멀티버스를 생각하지 못했던 건 이어지는 장면이 워낙 정신없어서다. 책상 위를 한가득 메운 하얀 영수증들. 다소 꾸깃꾸깃한 영수증들은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그걸 정리하는 건지 신경질을 내는 건지 모를 동작으로 주인공 '에블린'이 자신의 남편과 뭐라 뭐라 대화를 이어갔다. 국수 좀 봐달라, 아버지 생신인데, 세금 내야 하고, 조이가 여자 친구를, 영수증은 다, 세탁소가, 종잡을 수 없는 말들이 영어와 중국어를 마구 오가며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보는 이도 정신없는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더 정신이 없겠는가.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하지만, 정작 웨이먼드는 어느 하나도 제대로 못한다.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날카롭고 까칠한 에블린의 비위를 맞추는 듯했다. 여기에 그들의 딸, '조이'가 여자 친구 '베키'를 데려온다. 조이도, 베키도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 에블린에게서.
정신없이 얽히던 흐름이 뚝, 끊기던 때가 있었으니. 에블린의 아버지가 집에서 세탁소로 내려온 걸 발견하고서였다. 중국어에 서툰 조이가 할아버지에게 베키를 설명한 단어를 찾고 있을 때, 에블린이 말을 빼앗는다. 조이의 친한 친구라고. 그런 식이었다. 에블린은 조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먹고사는 데 급급해서라지만,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에블린, 조이, 웨이먼드, 이들 가족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상태에 놓였다. 웨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내밀려고 했으나 이마저도 바쁜 상황에 내쳐졌고, 막상 목숨이 오가는 급급한 상황에 치닫고서야 에블린이 그 서류를 펼쳤다. 혼돈에 또 다른 혼돈인 거다.
세무사에게 세탁소 회계감사를 받는 게 무슨 목숨까지 걸 일이 되었을까? 바로 웨이먼드가 '알파' 세계의 웨이먼드로 바뀌는, 멀티버스 세계관이 열리고부터다. '조부 투파키'라는 거대 악이 세계를 뒤흔드는 중인데 에블린이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다는 거다. 당연히, 에블린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 왔던, 꿈과 사랑이 넘치던 20대였으면 모를까. 지금은 쳇바퀴 같은 삶에 허덕대기 바쁜 시궁창 인생인데. 무슨 능력이 있다고.
그런데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지금의 에블린이 택하지 않은 삶을 택한 에블린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거다. 능력 넘치는 버전의 에블린 말이다. 그렇다. 어딘가엔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고, 늦은 밤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가 쿵후 선생님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고, 쿵후를 마스터해서 세계적인 액션 배우가 된, 돈/명예/커리어 어느 하나 놓치지 않은 에블린이 있다.
자, 이제 괴팍한 버전의 세무사 '디어드리'에게 맞설 쿵후 전문 배우 에블린이 필요하다.
이쯤 되어선 멀티버스의 개념과 스토리의 뼈대를 다 설명해서인가. 온갖 장르가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액션, 호러, 코미디, 시트콤, 블랙코미디, 공포, 드라마, 다큐멘터리, 스릴러, 로맨스, 애니메이션,... 장르의 멀티버스화라고나 할까.
멀티버스 세계관을 보여주느라 교차하는 장면이 많지만, 전체적인 톤앤매너는 비슷했다. 코미디. 다만 한없이 가볍고 허술한데 이상하게 매력적인 B급 영화인 것 같다가 진중하고 철학적인 상황으로 들어섰으니. 바로 돌들의 대화 장면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 전체 분위기는 코미디인지라 갑작스러운 전환에 영화관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지만.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조부 투파키, 그러니까 조이의 멀티버스 중 한 모습이자 어찌 보면 본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가 평온을 느끼는 건 자신이 돌인 세계가 유일하다.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누구에게 명령을 내리지도, 싸우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있는 때. 그러나 외로움은 느꼈는데, 자신처럼 모든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게 된 에블린과 함께라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에블린이 동조했을까? 일상에 전전긍긍하던 에블린이라면 그랬을 거다. 이거야 말로 자신이 꿈꾸던 거라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때의 에블린은 이전과 다르다. 특별한 능력치를 지닌 에블린과 연결하여 뭐든 될 수 있어서, 세상을 구할 히어로라서 그런 게 아니라, 용서했기 때문이다. 실패로 점철된 자기 자신을.
It was beautiful.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택하지 않은 덕에 유명한 배우가 된 세상을 경험한 후, 현재로 돌아와 남편 웨이먼드에게 했던 말이다. 꿈꾸는 표정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났지만, 마냥 재밌게 넘길 장면은 아니었다.
수천 번 생각했을 거다. 웨이먼드 대신 다른 걸 택했다면 자신의 삶이 이토록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매번 헤실대면서 긍정적으로만 굴지, 실속 없다고. 그 때문에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라고. 남 탓을 하는 건 신기하게도 자기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결국 모든 선택을 자신이 했기 때문이다.
실패하는 선택지만 쏙쏙 골라온 스스로가 얼마나 불쌍하고 멍청하게 느껴지겠는가. 비관의 늪에 빠지기 딱 적절한 상태로, 에블린은 살아왔다. 웨이먼드가 끝을 고한 것도 애정이 닳았다기보다는 괴로움 때문이었을 거다. 그와 함께 행복한 미래를 약속했는데, 자신은 에블린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까. 각자도생이 최선이라고 여겼을 거다.
현재 남편인 웨이먼드가 아니라 알파 웨이먼드를 더 의지하고 따르던 에블린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다. 싸움에 능하고, 자신에게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제시하고, 단호하게 말할 줄 아는 웨이먼드를 훨씬 마음에 들어 했으니까. 배우의 삶을 사는 다른 에블린의 세상에 평생 머물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러나 에블린이 알파 행성에서 온 이들과 완전히 대치 상태에 놓였을 때, 에블린도 조부 투파키처럼 파괴의 기로에 서려고 할 때, 에블린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하다. 남편인 웨이먼드의 절박한 외침으로 말이다. 그가 말했다. 우리 모두 솔직해지자고. 그 이전인가 이후였나. 이 말도 덧붙였다. 자신의 바보 같은 친절함은 생존 전략이라고. 우린 저마다의 방식으로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고.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런데 왜 지속적으로 싸우는가. 시작은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싸움이란 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적이 흐릿해진다. 모르겠는 순간에 놓이는 거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그러나 솔직하게 이 마음을 드러내는 순간 약점이 될 것만 같다. 싸움은 자신의 옳음을 과시하려는 행위이니까, 강해야 할 것 같은 거다. 모든 생명체는 위협을 느낄 때 그렇다. 검붉은 속 날개를 펼치는 곤충이나 독을 뿜는 전갈이나 뱀처럼.
인간은 주로 분노를 과시한다. 잔뜩 찌푸린 미간에 자극적인 욕설을 퍼붓고, 상대가 굴복할 때까지 극한으로 치닫는 거다. 제가 지닌 물리적 힘과 능력도 내세우며.
그런데 그깟 따사로운 마음이라니.
분노는 강하지만, 따스함은 유약하다. 유약하고도 솔직하다. 아프기 싫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기도 싫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무섭고, 나만 그만하고 싶은 것 같아서 더 무섭다는 걸 대놓고 내보인다. 전쟁터 한복판에 누워서 두 손 두 발 다 든 상태.
'적'이라고 상정한 존재들은 무시무시해 보인다. 하지만 집단이 아닌 각 개인으로 보다 보면, 한낱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원하는 게 있는데 얻다 말하기도 뭣하고, 말한다고 해결이 되지도 않고, 혼자 앓고만 있는 거다. 에블린은 공격하는 대신 그들의 갈망을 들여다본다. 말 못 할 성적 취향이 있고, 신경 통증 때문에 고생 중이고, 자신의 단짝을 애절하게 찾는 각각의 사람.
솔직한 마음을 받아들이고 나니 그 누구도 공격할 여력이 없다. 발라당 바닥에 누워서 행복에 겨울뿐.
영화에서 줄곧 던진 메시지가 이랬다. 죽어라 싸우고 요란법석 피워봤자 한낱 우주 먼지인 인간들. 지구도 우주에 있는 크고 작은 행성들 중에 하나이다. 지구가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면, 인간이 전부라는 생각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 무수하디 무수한 존재 중에 하나인 우리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Nothing Matters.
별 거 아니기에 부질없다는 생각으로 삶을 내던지려던 인물, 혼돈 그 자체였던 조부 투파키였다.
그가 만든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암흑, 블랙홀. 영화에서는 이걸 까만 토핑이 박힌 베이글로 유쾌하게 표현하긴 했다만. 조부 투파키는 세상을 휩쓸 생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파괴할 수단으로 베이글을 만들었다. 모든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마음껏 될 수 있기에 되레 아무것도 의미가 없던 거다.
가운데가 뻥 뚫린 베이글의 모양새가 그의 표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겉은 사악함의 결정체 같아서 모두에게 해를 끼칠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없다. 비어있는 걸 감추기 위해 겉모습을 더더욱 화려하고 시끌벅적하게 꾸며냈는지도 모른다.
다 갖춘 그에게 필요한 건, 정말이지 인간다운 결론이긴 한데, '의미'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둘째 치고, 나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나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데에 멀티버스 세계관만큼 적합한 게 있나. 에블린의 모든 선택이 무수히 많은 세상의 에블린을 만들었다. 각각의 에블린은 살아가면서 자신의 환경, 취향, 욕망을 따라 새로운 일을 겪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길을, 새로운 삶을 만들어간다. 아무것도 아닌 그토록 작은 먼지 하나가 이리도 다양한 굴곡을 헤쳐나갔단 말이다.
그러니 살면서 문득, 혹은 지금 당장 자신이 의미 없게 느껴진다면 여태까지의 삶을 돌이켜보자. 셀 수도 없이 많은 선택들을 말이다.
정말, 나 자신이 나에게 아무 의미 없었나?
세무사 디어드리와 에블린은 알파 세계관에서도, 현재 세계관에서도 앙숙이다. 디어드리는 이미 에블린을 문제 투성이라고 여기고, 그런 무지막지한 모습을 에블린은 융통성 없다고 느낀다. 그런데 손이 핫도그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둘은 애틋하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다. 이런 대비는 클리셰 같은 걸까? 잘 몰라서 멋대로 판단하는 것이지, 알고 보면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이라고. 서로 사랑하기 공익 캠페인 같은 휴머니즘일까.
영화의 끝자락. 정해진 기한(당일 오후 6시) 내에 영수증을 다시 정리하라는 디어드리의 마지막 경고는 당연히, 산전수전 다 겪은 에블린이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이때 에블린은 방망이를 들고 주저 없이 나아가 유리창을 시원하게 깨부순다. 답이 없으니 완전히 미쳐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블린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드러냈다. 세탁기와 건조기로 그득한 이 공간이 얼마나 지긋지긋할까. 다 엎고 싶었을 텐데 그걸 꾹 참고 누르고 견디기만을 반복했다. 모두가 곪아 터지면서까지. 무모하고도 무책임한 행동. 그거야말로 에블린에게 가장 필요했다. 한 번쯤은 나 몰라라 하고 도망갔어야 했다. 못해먹겠다고.
에블린이 자신의 생존전략을 썼듯 웨이먼드도 자신의 전략을 펼쳤다. 그리고 디어드리는 일주일로 기한을 늘린다. 정말 마지막이라며.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기에. 에블린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웨이먼드가 한 얘기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자신이 에블린에게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고. 디어드리도 에블린에게 솔직하게 말한다. 자신도 그 느낌이 뭔지 안다고. 오묘한 동질감과 유대감이 생긴 둘.
마치 다른 핫도그 세계 속 에블린과 디어드리의 관계가 여기까지 이어진 느낌이었다. 에블린들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게 아닌 것 같다. 라쿤에게 요리를 배운 '라따뚜기' 요리사의 이야기로 알게 되었듯, 우리는 혼자가 아니니까. '나'만 해도 내가 무수히 많아서. 지금의 나는 실패만 해왔을지언정 그게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이 엄청난 교훈과 깨달음을 싣고 영화는 마지막 장면으로 향한다. 예전처럼 세무조사를 받으러 온 상황. 하지만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함께 온 사람들과 그들 간의 관계, 디어드리와의 관계, 태도, 그 모든 것이. 이미지로 충분히 보여줄 수 있지만, 영화는 딱 한 마디로 전부를 보여준다.
죄송해요. 못 들었어요.
체면 차리느라 속마음 숨기며 애먼 일 벌이지 말고, 솔직 담백하게. 평가받을까 봐 움츠러들지 말고, 자신의 결핍 앞에서 당당히. 우스꽝스럽고, 멋지고, 재밌고, 지루하고, 진지하고, 덤벙대고, 약속을 잘 지키고, 늦고, 웃고, 우는 온갖 모습의 나 자신에게, BE KIND.
끝으로 왓챠피디아에도 남긴 감상을 이곳에 한 번 더 공유해본다.
Nothing matters.
So please, be kind to EVERYTHING EVERYWHERE.
Then you realize the whole world ALL AT ONCE.
우리는 모두 아무것도 아닌 존재랍니다.
그러니 온갖 모습을 지닌 자신을 좀 사랑스럽게 바라봐 주세요.
나 자신의 의미가 완전히 새롭게 보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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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혜선,변요한 배우의 역량으로 미스터리를 이끌다
취미는 훔쳐보기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다. 얼핏 보기엔 그냥 잘생긴 남자다. 하지만 구정태에겐 은밀한 취미가 있다. 바로 훔쳐보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타인을 훔쳐보면 왠지 나 혼자만 다른 세계에 있다는 쾌감이 든다. 멀리서 보면 그냥 나도 똑같은 사람일 뿐이잖아? 조용히 취미생활을 가지면 사람들도 모르게 되어있다. 심지어 직업이 공인중개사다. 이 말은 즉슨 타인의 집에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정태에게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여자는 이 영화의 다른 주인공 한소라(신혜선)다. 예쁜 외모를 가진 한소라. 한소라가 소시지를 먹는 모습에 구정태가 관심을 갖게 되고, 이는 곧 두 사람과의 만남과도 이어진다. 어렵지 않게 한소라의 집 키를 얻은 구정태. 이번에도 몰래 한소라의 집에 침입한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한다. 그럼 아무도 없다는 뜻이겠지? 어차피 집 키도 한소라가 줬다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정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한소라가 칼에 찔린 채로 발견된 것이다.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경찰에 신고하기엔 변태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셈이 되니 난처하고, 혼자 살인마를 잡기엔 너무나도 어렵다. 정태 곁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사고들. 안 그래도 잡혀갈까 무서운데 하나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데, 정태는 과연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까?
몰입감은 뛰어나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플롯이다. 왜?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많은 부분을 하나의 동력으로 치환시켰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다루고 싶었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소셜 미디어의 폐해다. 일반적으로 ‘소셜 미디어의 폐해’하면 뭐가 생각날까? 금세 <더 글로리>에서 최혜정 캐릭터가 보이는 것에 대해 과하게 신경 쓰는 장면이나 <댓글부대>에서 관심을 감당하지 못한 누군가가 떠오를 것이다. 이런 류의 소셜 미디어 묘사는 그동안 많이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도 이런 식의 소셜미디어 묘사가 들어가기는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로 채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스릴러, 미스터리물에 있어 이야기가 갑자기 폭발력을 가지는 지점이 어디일까?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흘러가야 한다. 그럼 영화가 플롯에서 보여줘야 할 것이 있다. 앞 상황을 중심으로 뭐가 진짜인지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 서스펜스에 대한 부분을 영화가 만들어가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서스펜스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미디어의 단점이기도 하다.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영화가 플롯으로 실체화시킨 것이다. 핵심 플롯뿐만 아니라 곁가지가 되는 부분도 미디어가 발전했기 때문에 따라왔던 단점을 묘사하고 있다. 가령 여성 스트리머/BJ/유튜버가 인터넷 방송을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이 부분에 대한 문제나 그럴듯한 구색을 갖췄지만 타인에게 얼마든지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언론의 역할까지 영화가 단순하고 간단한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현 세태의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다. 좋은 각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층적으로 어울리는 이야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하나하나 세세하게 들어가면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몇 있다. 가령 이 영화에서 경찰의 역할은 애매하다. 왜?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전면에 드러나있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초반부부터 목적을 대놓고 드러내고 등장하기 때문에 인물의 생동감과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약점이 생기는 것이다. 심지어 경찰의 역할이 들어가야 할 때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유명무실하기까지 하다. 설정을 편의적으로 쓴 것이다. 대표적으로 첫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문제제기가 우리 현실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당연하다. 하지만 이 대사가 영화 안에서 빛을 발한다면 경찰 캐릭터가 좀 더 유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또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문제상황이 영화 전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냥 단순히 특정 누군가와의 대립에서만 끝났다는 점이 이 캐릭터를 왜 이렇게 묘사했어야 하는지의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또 이 인물이 영화 안에서 제기하는 사회적인 문제가 합리적인 지적이 되려면 이 인물이 경찰로서 핵심 플롯이 다루는 사건에 유의미하게 접하는 모습이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영화가 묘사하는 방식은 애매하다는 점에서 아쉽다. 왜 이런 캐릭터가 들어갔을까? 이는 영화의 다른 캐릭터들을 비교하면 더 두드러진다. 어떤 인물은 미디어의 병폐를 보여주다가 이야기의 방향키를 틀어서 혼자 사는 여성이 가진 어려움을 암시한다. 다른 캐릭터는 빈곤한 인간 내면을 표현함과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수도 없이 봐왔던 문제 해결을 구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목적 이전에 캐릭터의 생동감을 먼저 고려하고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찰들은 플롯 안에서 겉돌면서 극후반부가 아니면 없어도 되는 존재가 된다.
수많은 혼잣말
글쓴이 입장에서 영화에서 두드러졌던 요소는 나레이션이다. 나레이션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작동할까? 바로 형식의 가장 기본요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영화는 어떤 장면이 있고 그 모습을 특정 인물이 해설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형식을 이끄는 인물은 구정태다. 구정태의 가장 중요한 설정이 뭘까? 바로 누군가를 염탐한다는 것이다. 구정태는 어떤 장면을 보고 그것을 해설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인물의 이 특성을 영화의 성격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염탐한다’라는 행위는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과도 이어지는데,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바탕으로) 누군가의 일상 내지는 일대기를 지켜보는 것이 영화 아닌가? 그리고 대화는 기본적으로 타인과 하는 행위이며 구정태는 나레이션을 통해 관객과 대화하고 있다. 이 두 전제라면 이 영화는 대화를 통해 관객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 전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그녀가 죽었다>는 관객을 구정태를 지켜보는 인물임과 동시에 그와 같이 타인들을 지켜보게 하는, 일종의 염탐꾼으로 만들어버린다. 구정태가 대화하는 대상이 우리 관객이라면 영화가 고의적으로 구정태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을 동일시시킨 것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이라는 두 딜레마가 주인공 두 사람의 핵심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가리키는 대상이 관객을 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결국 우리도 이들을 훔쳐보는 염탐꾼인 것과 동시에 ‘보이는 것’에 대해 집착하는 인물이지 않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내레이션이 너무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는 점은 영화의 단점으로 뽑을 수 있다. 이 영화가 관통하고 지나가는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은 다 중요한 것들이다. 퇴색되지 않고 오롯이 전달하려면 감정적이지 않는 톤으로 전달하는 게 그 효과를 더할 수 있다. 그러려면 내레이션이 이렇게까지 많이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인물의 내면을 통해 감정이입을 유발하는 역할을 하기 위한 내레이션이 따로 있고, 관객을 극으로 초대하는 내레이션이 따로 있다. 그래서 어느 내레이션은 좀 사족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영화 후반부쯤 되면 이 내레이션 연출에 통일성이 깨진다. 기획의도를 살리는 연출이라면 엔딩부에 누군가가 등장할 필요가 없다. 왜? 그 대사의 내용은 관객들이 알아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혼자 마무리지어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감이 없었는지 톤을 해치는 장면을 넣어 더 쉬운 접근법을 택했다. 어떤 관객들은 이 장면이 직접적이라서 좋았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글쓴이는 그 의견에 반대한다. 이야기의 형식에 측면에서 이 부분은 혼자 마무리지어도 좋지 않았나 생각한다. 가장 마지막 장면과 어울리기도 하고.
어느덧 베테랑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변요한 배우는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구정태가 맡은 과제는 두 가지다. 거리감과 박진감이다. 전자 거리감에 대한 부분은 간단하다. 이 영화에서 구정태가 벌이는 범죄행위는 하나같이 끔찍한 것들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다고 하면 싫을 것이다. 이 싫은 느낌을 영화가 부지런하게 묘사하기 위해 변요한 배우는 사소한 차이로 기괴함을 불어넣는다. 가령 초반부 캐릭터를 설명할 때 혼자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면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의 차이를 두며 인물을 관객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후반부가 되면 이 인물의 내면이 사실상 이야기의 중심이 되며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게 된다. 여기서는 자유롭게 감정연기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데 후술 할 신혜선 배우가 뛰어놀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됐다.
다른 주인공을 맡은 신혜선 배우는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좋은 작품을 만났다. 일단 연기하는 데 있어 가장 개성이 있는 캐릭터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한소라 캐릭터가 약간 클리셰를 따른 감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신혜선 배우의 얼굴을 반대로 활용한 데에서 개성이 생긴다. 신혜선이라는 배우의 이면을 활용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연기를 빛내주는 연출도 큰 도움이 되는데, 코디나 메이크업 같은 것도 선을 굵게 그려 한소라라는 인물이 가진 화려함과 허술함을 강조했다. 글쓴이가 감탄했던 부분은 목소리 톤을 변주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들은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보이는 것 중 무엇이 진짜인지 묻다
글쓴이가 이 영화에 대해 한 단어로 요약하면 외로움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로움을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장르적인 원동력으로 바꾸어 팽팽한 이야기를 만든 영화가 이 <그녀가 죽었다>다. 외롭기 때문에 인간들이 벌이는 행동이 예상하지 못할수록 더 특이점을 갖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는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가득한 버스에서 인스타그램을 켜 나는 조금 달랐으면 한다는 이상한 바람. 지금 당장 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사고 싶다는 허영심. 영화는 이 수많은 모습들을 외로움으로 꿰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과연 당신의 하루를, 또 당신을 사랑하고 있나요? 답은 여러분이 내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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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프로페서 앤 매드맨”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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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 5명이 런던에 있는 국제 투자은행 피어포인트사에 인턴으로 입사한다.
잔심부름만 도맡아 하거나 의욕만 앞서는가 하면 상사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지만 6개월 뒤에 있을 인원 감축에서 살안마고자 각자 다른 방식으로 열의를 불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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