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6-29 10:21:59
6월 5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안녕하세요. 영화/ OTT 전문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이번주 씨네 뉴스는 국내외 다양한 소식으로 알차게 준비 해 보았는데요!
그럼, 어떤 이슈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킹더랜드> 임윤아 이준호 로맨스 시청률 화제성
이준호는 연애가 서툰 본부장 구원 역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의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내며 여심을 장악했습니다. 회차를 거듭할수록 넷플릭스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며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화제를 몰고있으며 시청률과 화제성 모두 상승세를 기록하며 로맨틱 코미디의 진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밀수> 김혜수X염정아X조인성 독보적인 아우라
영화 <밀수>는 바다에 던져진 생필품을 건지며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 앞에 일생일대의 큰 판이 벌어지면서 휘말리는 해양범죄활극입니다.제작사 외유내강, 류승완 감독은 영화를 기획할 때부터 김혜수와 염정아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며 웃음과 감동, 액션 이 3박자가 고루 갖춰진 작품에 예비 관객들의 기대를 자아냈습니다.
설경구, 도경수 <더 문> 전세계 155개국 선판매
<신과 함께>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는 김용화 감독의 차기작 <더 문>은 오는 8월2일 개봉을 확정했습니다. 설경구를 비롯하여 김희애, 도경수, 조한철, 박병은, 최병모, 홍승희 등 출연을 하며 제작비 280억원이 들어간 대작입니다. 국내 최초로 유인 달 탐사를 소재로 한 우주 배경의 영화며 미국, 호주,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태국 등 세계 155개국에 선판매 됐다고 밝혔습니다.
김시은 <오징어 게임2> 여주인공 캐스팅
<오징어 게임2> 원지안 비롯 박규영, 김시은, 조유리가 출연 확정을 지었습니다. 시즌2 남성 출연자 공개만 뜨면서 여성 출연자들이 없다는 논란이 일었는데 여성 출연자들의 캐스팅 소식을 알렸습니다. 앞서 넷플릭스는 지난 17일 이정재, 이병헌, 위하준, 공유, 임시완, 강하늘, 박성훈, 양동근이 출연한다고 밝혀 기대감을 고조시켰습니다.
부천국제영화제 <보 이즈 어프레이드> 감독 아리에스터 “가장 나다운 작품”
<유전>과 <미드소마>의 감독 호러 마스터 아리 에스터 감독이 <보 이즈 어프레이드>가 부천 판타스틱 영화제 개막작으로 찾아옵니다.감독은 “10년 동안 구상한, 나의 개성과 유머가 담긴 가장 나다운 작품”이라며 영화를 소개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은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특별하고 새로운 목소리를 가진 감독이자 파워풀한 도전자”라고 말을 덧붙였습니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공식협찬 최민식 배우 특별전
수많은 캐릭터로 한국영화에 획을 그은 최민식배우가 부천 국제 판타스틱 영화제의 주빈으로 선정되어 특별전의 주인공으로 선정되었습니다.대종상3회, 백상예술대상3회, 청룡영화상3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3회등 30여개의 연기상을 받은 최민식에대해 정지우 감독은 “최민식이라는 배우는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 같은 존재”라며 소개말을 남겼습니다.BIFAN은 6월 29일부터 7월 9일까지 개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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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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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히 당신을 사랑해 줄 단 하나의 아이
기술이 발전할수록 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작품 속에서 로봇, 인공지능을 소재로 다루지만 이를 통해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지점은 어디인지, 인간을 인간이 아닌 것과 구분 짓는 요소는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사유를 하게 만든다.
인간은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
에이 아이 (A.I)
기후 변화로 인해 만년설이 녹고 해수면이 상승해 많은 도시가 물에 잠겼다. 선진국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엄격한 임신 허가제를 도입했다. 로봇은 인간을 대신해 많은 일을 도맡게 된다. 사회 경제를 유지하는데 로봇은 필수품이 되었다.
로봇 제작 회사인 '사이버트로닉스'는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부부를 위해 부모로 지정된 존재를 순수하고 영원한 마음으로 사랑해 주는 로봇 아이를 만든다. 잠재의식과 꿈, 즉 내면의 세계가 있는 로봇 '데이빗'(할리 조엘 오스먼트)이 탄생한다. 하비 박사(윌리엄 허트)는 데이빗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리라고 확신한다.
모니카(프랜시스 오코너)와 헨리(샘 로바즈) 부부의 아들 마틴(제이크 톼스)은 극저온 상태에서 간신히 생명만 유지한 채 5년째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이버트로닉스는 회사의 직원인 헨리를 통해 로봇 데이빗을 테스트하고자 한다. 로봇 아이를 등록하기 위해서는 일곱 개의 단어를 순서대로 말해야 하며 한 번 등록하면 되돌릴 수 없다. 등록 절차는 구매자를 부모로 만들고 로봇은 그 부모를 영원히 사랑하게 된다. 만약 부모가 로봇 아이를 거부하면 해당 로봇은 폐기된다. 모니카는 등록 절차를 거쳐 데이빗의 '엄마'가 된다. 데이빗은 모니카의 사랑을 얻기 위해 애쓴다. 데이빗이 조금씩 적응해 갈 때쯤 마틴이 깨어나 집으로 오게 된다. 데이빗은 진짜 자식처럼 엄마의 사랑을 얻을 수 있을까?
▶ 인간의 외로움
"로봇이 진심으로 사람을 사랑해 준다면 사랑받는 사람은 그 메카에게 어떤 책임을 져야 하죠?"
작품 속 슈퍼 토이 곰돌이 인형 '테디'와 자식 대행 로봇 '데이빗' 그리고 애인 대행 로봇 '조'(주드 로)는 모두 인간의 적적함과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변하지 않고 인간을 따르며 원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심지어 데이빗은 인간에게 영원하고 순수한 사랑을 제공한다. 인간이 계속해서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 줄 존재를 생산해 내는 이유는 아마 인간 사이에서 더 큰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조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고객은 데이트 폭력 피해자다. 두 번째로 간 곳에서는 남자에 의해 살해된 여성이 침대에 누워있어 곤란에 빠진다. 사랑을 말하며 폭력과 살인이 빈번히 일어나는 곳에서 인간 사이의 사랑이 어떻게 순수할 수 있을까? 조를 부르는 이들은 주로 외롭고 약한 사람들이다. 영혼이 기댈 곳을 찾아 신과 성당을 찾듯 로봇에게 육체를 기대고자 하는 것이다. 조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데이빗을 돌보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모니카의 집에서 데이빗이 바라보던 가슴에 하트 모양의 구멍이 나 있는 모빌은 외롭고 공허한 인간이다. 자신의 사랑에 보답해 주지 못하는 그 공허한 모빌을 데이빗은 계속해서 바라본다. 로봇에게는 감정이 없다고 하지만 이 작품에서만큼은 아니다. 데이빗의 순도 높은 사랑에 비하면 인간은 그저 태어나서 먹고, 자고 그러다 사라져 버리는 존재다.
▶ 인간의 특별함
영화의 초반에 데이빗은 로봇으로서 대상화된다. 사이버트로닉스의 조형물이 창문에 비친 형상과 데이빗의 첫 등장에서의 형상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데이빗은 사이버트로닉스에서 제작된 로봇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각인시키며 '아이'이기 전에 로봇이라는 정체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렇기에 모니카의 거부 반응은 당연하게 느껴진다. 아이가 아닌 로봇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로봇의 뛰어난 기능이나 능력 혹은 멋진 모습은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주목할 점은 로봇을 대하는 인간들의 모습이다. 모니카의 아들 마틴은 데이빗과 달리 자신은 진짜 사람이고 엄마의 아들이므로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피노키오 동화책을 모니카에게 읽어달라고 하고, 인간이 할 수 없는 능력들을 보여달라고 한다. 모니카가 고장 난 데이빗을 걱정스러워하며 손을 잡아 주자 마틴은 데이빗에게 모니카의 머리카락을 잘라오라고 부탁한다. 마틴은 데이빗에게 끊임없이 경쟁심을 느끼고 우위에 서고자 한다.
로봇을 잔인하고 화려하게 파괴하며 즐기는 로봇 축제는 인간 종이 로봇을 상대로 우위를 점하려는 의식이다. 인간은 로봇을 만들었지만 로봇의 성능이 좋아지고, 개체 수가 많아질수록 위협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을 부수며 안도감을 느낀다. 인간의 특별함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온다.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신의 특별함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다. 로봇 축제를 감독하는 존슨은 데이빗을 두고 '목적 없는 특별함은 골칫덩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목적이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특별함에 목적을 찾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목적인 인간에게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로봇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데이빗 역시 인간처럼 자신은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라고 여긴다. 그렇기에 하비 박사의 방에서 상자에 들어 있는 수많은 데이빗을 발견했을 때 공포를 느낀다. 자신의 특별함과 유일성이 깨어질 위기에 처한 데이빗은 무너진다. 데이빗이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었기에 특별했듯이 인간의 특별함 역시 믿음에서 온다.
▶ 동화+ 객관적 사실
데이빗은 피노키오를 소년으로 만들어준 '파란 요정'을 찾기 위해 유식 박사를 찾아간다. '동화'와 '객관적 사실'의 카테고리를 결합해 어떻게 해야 로봇이 인간 소년이 될 수 있는지 묻는다. 파란 요정은 결국 '진짜 소년'이 되게 해 달라는 소원을 이루어 주지 않는다. 2000년이 지나 지구를 방문한 외계 생명체에 의해 단 하루 복원된 엄마를 만날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모든 동화의 마지막 장면이 그러하듯 데이빗의 하루는 평생 그가 바라왔던 대로 행복하다. 엄마에게 온전히 사랑받고 사랑해준다. 2000년을 기다려 데이빗에게 주어진 그 하루는 평생의 소원이었던 '사랑받음'을 이뤄준다. 동화적이지만 마법적이지는 않은 이 슬픈 해피 엔딩은 '동화'와 '객관적 사실'이 결합된 결말이다.
결국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에 우리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할까? 데이빗이 인간과 구별되는 점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계속해서 욕심을 내고, 끊임없이 변화할 것이다. 다만, 인간에게 받은 상처만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코두 codu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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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록 친밀한 존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다들 이야기한다. 부모만큼은 자식을 믿어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고, 그걸 알게 된 부모는 속상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온전히 아이를 믿는다는 건, 사실 말처럼 쉽지 않다. 어디까지 아이를 믿어야 할까?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다면, 어느 정도까지 그 잘못을 추궁하고 훈계해야 할까? 부모라면 누구나 맞닥뜨리는 어려운 문제다.
영화 <보통의 가족>은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를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작품이다. 제목에 '보통'이 들어가지만, 사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사회적 지위와 좋은 직업을 가진 상류층이다. 이들의 자녀는 좋은 교육을 받고 최고의 환경에서 학창 생활을 보내고 있다. 영화의 원작은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더 디너”로, 원작과는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상류층 두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나름 의미 있는 선택을 했다. 이들의 지위는 자녀들의 법적 문제조차 덮을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지점에서 부모로서의 역할과 자녀의 미래에 관한 고민이 복잡하게 얽힌다.
[첫 번째 감정] 형 재완의 안정감
변호사로서 성공한 재완(설경구)은 법적 문제가 생긴 상류층 자녀를 변호하며 형량을 최소화하려 애쓴다. 그가 변호사로서 내리는 판단에는 상대방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법적 테두리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고 그 방향으로 일을 진행한다. 그 과정에서 재완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정하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이러한 태도는 일을 진행하는 데 있어 그에게 안정감을 부여하며, 그 안정감은 자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힘을 마련해 준다.
딸이 노숙자 살인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재완은 평소 자신이 사건을 대하던 방식 그대로 상황을 처리하려 한다. 즉, 법적인 문제를 최소화하고 자신의 딸이 문제에 휘말리지 않도록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수십 년간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재완에게 이러한 방향성은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이었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에 이미 그려졌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 사건이 드러나지 않도록 노력하며, 굳이 밝히지 않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는다.
영화의 중반까지 재완은 이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며 동생 재규(장동건)와 재규의 아내 연경(김희애)과 계속해서 충돌한다. 재완에게는 도덕적인 판단보다는 안정적인 판단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순간들이 반복된다.
[두 번째 감정] 재규의 도덕성
재규는 종합병원의 유명한 의사다. 그는 어려움에 처한 환자를 돕고, 그 환자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병원비를 내지 못할지라도 일단 치료하는 것을 우선시한다. 또한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집에서 모시는 인물로, 도덕성과 책임감을 가진 따뜻한 성격을 지녔다. 그의 아내 연경 또한 여러 봉사 활동을 하는 따뜻한 인물이다. 이 부부는 기본적으로 도덕성을 갖춘 사람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아들이 노숙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재규와 연경의 의견은 갈라진다. 재규는 아들을 신고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연경은 아무도 모르니 묻어버리자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가지고 있던 단단한 도덕성은 균열을 일으킨다. 연경은 그 도덕성을 계속 깨뜨리려 하고, 재규는 이를 붙잡고자 애쓰지만 아들의 눈물을 보며 결국 무너지고 만다.
영화의 중반까지 재규는 도덕적인 것을 지키자는 입장이었으나, 아들과의 대화를 통해 점점 흔들리게 된다. 중반 이후에는 재완이 도덕적 방향으로 나아가고, 재규는 안정적인 방향으로 변모한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아이들의 태도가 큰 영향을 미친다.
[세 번째 감정] 아이들의 도덕 불감증
범죄를 저지른 혜윤(홍예지)과 시호(김정철)는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와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아이들이다. 혜윤은 부모 몰래 좀 더 과감하게 행동하고, 시호는 소심하게 억눌린 생활을 이어가지만 결국 그 억눌림이 폭발하게 된다. 이들이 노숙자를 공격한 사건은 흐릿한 CCTV에 담겨 뉴스에 보도되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들이 알아보고 추궁하는 상황이 된다.
영화 전반에 걸쳐 혜윤과 시호는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재규와 연경은 시호에게서 반성의 기미를 보았다고 느낀다. 이는 관객들이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으로, 혜윤은 전혀 반성하지 않으며 완전한 도덕 불감증을 보인다. 그 영향으로 시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상류층 부모의 힘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들은 정말 반성을 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그들에게 도덕적인 성향이 있을지를 궁금해하며 바라보지만, 적어도 관객들에게 그들은 그저 범죄를 저지른 철없는 10대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부모들은 그들을 객관적 시선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들이 태어난 이후의 모든 것들을 판단해서 그걸 상황속에 녹여내 바라본다. 그러니까 전혀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아이들의 도덕불감증이 부모의 도덕불감증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도덕은 마비된다.
영화가 제시하는 아이러니
<보통의 가족>은 후반부로 갈수록 두 형제의 태도 변화가 폭발력을 발휘하는 영화다. 도덕적인 재규가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안정적인 재완이 그 안정을 깨려는 행동을 한다. 두 사람의 모든 선택은 자녀를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관객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만약 우리도 이들처럼 사회적 지위가 있다면, 재완처럼 자녀를 위해 범죄를 덮어줄 수 있을까?
영화는 지금 이 시대에 충분히 벌어질 법한 사회적, 가족적 딜레마를 던진다. 자녀가 범죄에 연루되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도덕적인 결정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또한 영화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점점 쪼개어지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굴레가 얼마나 강력하게 유지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영화 속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선택들은 때로는 가족의 결속을 위태롭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 구성원들은 각자의 삶과 가치관을 중시하게 되면서, 과거처럼 절대적인 신뢰와 희생을 기반으로 한 가족의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서로를 보호하려는 이들의 모습은, 우리가 얼마나 이 관계를 유지하려 애쓰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가족이란 굴레가 무너져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강력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이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오랜만의 복귀작으로, 2019년 <천문: 하늘에 묻다> 이후의 작품이다. 장동건과 설경구가 연기한 두 형제의 변화는 영화의 중후반부를 강하게 이끌며, 그들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색감의 대비와 캐릭터 간의 대립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드러내는 방식도 훌륭하다.
영화 <보통의 가족>은 최근의 사회적 문제를 가족의 이야기로 풀어내며, 우리에게 도덕과 안정 중 무엇을 선택할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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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기에 도전하는 쾌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2년 전 남편과 사별한 60대 여성 '낸시(엠마 톰슨)'. 교직에서 퇴직하고 아이들마저 성인이 되어 자신을 떠나 홀로 남게 되자 그녀는 처음이지 마지막으로 인생의 숙원이었던 버킷리스트를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한다. 단 한 번도 섹스에 만족해 본 적이 없으니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과 성관계를 갖기로 한 것. 그런 그녀의 앞에 젊고 매력적이며 자신의 일에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리오 그랜드(다릴 맥코맥)'가 나타난다. 마침내 버킷리스트가 현실이 되려는 찰나에, 긴장해서인지는 몰라도 낸시는 리오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리오도 유려하게 답하며 그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두 남녀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의 방향성을 둘러싼 고민에 직면한다.
8월 11일에 개봉하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여러모로 놀라운 영화다. 수많은 영화팬들에게 익숙한 대배우 엠마 톰슨이 처음 노출 연기에 도전한 작품이자, 성매매자들의 이야기를 양지에서 다루는 영화이기도 하고, 성을 사는 이가 중년 여성이고 파는 이가 청년 남성이라서 거듭 예상을 빗겨나가는 영화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 어떤 작품보다도 선정적이고 논란으로 가득한 영화일 것 같다고 느낌을 받는 것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첫인상만으로 평가받기에는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를 관통하는 주제의 가치가 눈에 밟힌다. 이 작품은 단순히 성매수자와 성매매자가 네 차례에 걸쳐 만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상 밖의 사람을 만나 수십 년간 자신을 감싸고 있던 금기라는 단단한 알을 깨고 나오는 부화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목적이 단지 성적인 만남을 중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낸시와 리오의 첫 만남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카메라가 리오 그랜드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낸시가 아니라, 서비스의 존재 자체에 반응하는 그녀의 모습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사별한 그녀는 평생 사회의 규칙을 충실히 따른 인물이다. 은퇴한 60대 종교 교사였던 그녀는 대학원에 다니는 아들과 스페인에서 예술을 하는 딸을 하나씩 두고 있고, 오랜 기간 동안 성공적으로 결혼 생활을 유지했으며, 자신의 오랜 커리어도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그런 그녀는 리오의 서비스를 예약하면서 두 개의 서로 다른, 그러면서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반응을 보인다.
낸시는 우선 섹스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섹스를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점을 담대하고 솔직히 드러낸다. 그간 자신의 느낌이나 감정 대신 남편의 쾌감만을 우선시했던 그녀는 경험한 상대방의 수나 다양한 체위에 대해 물어본다. 리오의 청산유수 같은 대답을 들으면서 그녀는 완벽해 보이던 자신의 삶이 사실은 완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리오보다 오랜 기간을 살았지만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그래서 공허한 것들이 많다는 현실을 알게 된다. 만약 그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상태를 그대로 두었다면 그녀를 감싸고 있던 알과 껍질들은 더 강해졌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리오 그랜드를 만나면서 낸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새롭게 눈을 뜬다. 그래서 그간 억압된 삶을 살던 그녀는 리오와의 두 번째 만남에서 크게 변하기로 결심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섹스에 도전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리오를 궁금해한다. 낸시는 수십 년간 자신의 삶을 구성한 원칙과 신념으로 설명할 수 없는 리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더 알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리오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는 용기와 결함이 동시에 느껴지고, 깨달음만큼이나 깊은 고정관념과 편견도 함께 드러난다. 낸시는 리오가 숨기려 했던 사적인 정보를 캐내고, 호텔방 밖에서도 만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고 착각하며, 당당하게 직업을 밝히며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복해보라고 말한다. 정작 그녀가 모범적인 삶을 사는 아들을 지루해하고 정반대로 열정적으로 자유롭게 사는 딸을 골치 아파하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조언은 리오에게 모순적이다.
이는 모든 갈등이 끝난 뒤, 호텔방이 아닌 호텔 커피숍에서 리오를 만난 다음에야 낸시가 난생처음 오르가슴을 경험할 수 있는 이유다. 특히 리오와의 섹스가 아닌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오르가슴에 도달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는 마치 그녀가 섹스로 상징되는 스스로를 향한 억압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타인에게 지닌 고정관념과 편견마저도 떨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한 단계 성장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단지 섹스와 성매매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트리거에 불과할 뿐, 성을 비롯한 다양한 금기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개인들이 비로소 금기를 깨고 자유로워지는 순간을 영화는 진정으로 그려내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그렇기에 리오에게 이별을 고한 낸시는 거울 앞에서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바라볼 수 있다. 단순히 섹스라는 금기에 갇혀 있지 않고, 60여 년간 살아온 자신의 삶과 자기 자신마저 되돌아보는 것이다.
낸시의 섹스 파트너인 리오 그랜드도 다르지 않다. 그는 사실 상당히 신선한 캐릭터다. 열의를 다해 감정적으로 건강한 쾌락을 주고자 하는 파트너는 스크린에서 쉽게 만나는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건강한 성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낸시에게 진정한 섹스의 의미를 알려준다. 그는 섹스, 접촉, 쾌락의 관점을 모든 소통으로 확대한다. 섹스는 언제나 대화의 일부이며 친밀감과 교감을 향한 갈망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되짚어 준다. 비록 그의 직업은 윤리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섹스를 바라보는 리오의 시각만큼은 교과서적으로 건강하고 개방적이다. 그 덕분에 수치심을 느껴야 하고 통제해야 하고 몸을 가꿔야 한다는 규칙 하에서 살던 낸시는 자신의 신체를 대하는 태도가 크게 바뀐다. 사실 리오는 가족들에게 석유 회사에 다니면서 바다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석유 탐사를 하고 있다고 말해놨는데, 이는 리오의 직업과 일맥상통하며 꽤나 섹슈얼한 알레고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그조차도 낸시와의 만남 이후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또 다른 억압과 금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점이다. 세대가 다르면 섹스와 쾌락에 관한 이해도 다른데, 영화는 이를 놓치지 않는다. 실제로 낸시와의 네 차례에 걸친 만남과 대화, 그리고 갈등은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분기점이 된다. 고등학생 시절 어머니에게 문란한 모습을 보인 후 가족과 의절하며 성적인 수치심을 겪은 바 있는 리오. 이처럼 어머니와 연관된 깊은 상처는 자기 일을 잘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정체성과 쾌락을 개방적으로 탐색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오에게 낸시와의 갈등과 말다툼은 또 다른 기회가 된다. 그는 본래 자신의 과거사를 고객에게 절대 밝히지 않는다. 다름 사람과의 다양한 육체관계와 소통을 즐기면서도 그 선을 넘는 것을 원치는 않는다. 하지만 낸시를 만난 그는 때로는 규칙을 어기며 인간적 교류를 하고, 그 과정에서 그가 낸시에게 알려주었듯이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온전히 긍정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 자신의 치부라고 생각해서 완전히 단절되었던 가족과의 관계를 다시 펼치고, 리오 그랜드라는 가명 대신 그의 진짜 이름을 알아낸 낸시를 다시 만나며, 본인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회복한다.
이처럼 두 남녀가 진정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달아가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호텔 방이라는 한 공간에서 진행되기에 더욱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질감이 느껴지는 푸른 카펫과 소파, 베개처럼 관능성이 느껴지는 가구들의 배치가 눈길을 끈다. 또 그 방 안에서도 나뉘어 있는 공간들의 기능도 흥미롭다. 호텔 방 안의 공간은 크게 소파, 침대, 거울, 화장실로 나눌 수 있다. 이때 소파에서는 낸시와 리오가 서로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침대에서는 모험에 나선 낸시의 과감한 도전이 돋보이는 공간이다. 한편 화장실은 잠시 그들이 호텔 밖 현실을 만나는 공간이자 순간이다. 딸에게 걸려 온 전화를 낸시가 화장실에 받는 사이에 어떻게 하면 더 섹시해 보일까 하고 고민하는 리오의 짧은 고뇌를 담아낸 장면이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거울에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마인드의 변화를 새삼 깨닫는 낸시의 사색과 해방의 쾌감이 담겨 있다.
하지만 눈길은 이내 방의 한쪽 면을 모두 차지하는 창문으로 향한다. 두 사람의 만남이 같은 공간에서 반복되더라도, 넓디넓은 창문에 담기는 조명과 풍경의 변화는 마치 외부 세계의 이야기들을 실내 공간 안으로 미묘하게 끌어들이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첫 만남에서는 맑기 그지없었던 창문 속 날씨는 선을 넘은 낸시와 개인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리오가 다툼을 벌일 때 비로 가득하다. 이처럼 한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은 마치 낸시와 리오의 몸에 대한 비유 같기도 하다. 그들이 어떤 감정과 생각을 투사하느냐에 따라 호텔방은 대화의 공간이었다가 도전하는 공간이고, 갈등하고 싸우는 장소였다가 쾌감으로 가득한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몸도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공간적 배경을 활용한 스토리텔링을 보면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참으로 스마트한 영화라고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물론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그 자체로 논란일 작품이다. 소재이자 발단인 성매매를 둘러싼 논쟁의 연장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들을 둘러싸고 구매자가 판매자의 우위에 설 수 있다. 그러나 성은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 있다. 여성의 성을 구매하는 남성과 달리 남성의 성을 구매하는 여성은 자신이 구매자이지만 판매자인 남성에게 우위를 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본과 젠더 권력의 우열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는 성매매에 대한 전통적인 문제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신선하다. 사실 여성의 신체는 남성의 신체보다 자주 스크린에 전시되고 소비된다. 그런데 <굿 럭 투 유, 리오 그랜드>는 남성의 성과 신체를 판매 대상으로 삼으면서 그 문화적 서열을 역전시킨다. 덕분에 성매매를 둘러싼 옹호와 부정 사이에서 성매매를 매개로 만난 두 남녀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틈이 생겨난다. 물론 시작점이 성매매이기에 그 관계 자체가 호불호가 갈릴 여지가 있는 것은 여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호불호를 이유로 눈길을 안 주기에는 금기 내지는 성역이라 여겨지는 소재를 이용해 보편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도전적인 스토리텔링의 맛이 찰진 것도 사실이다. 소피 하이드 감독이 데뷔작 <52번의 화요일>로 제30회 선댄스영화제 감독상과 제6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수정곰상을 받은 이유가 새삼 느껴지기도 한다.
A(Acceptable, 무난함)
발칙한 소재를 끝까지 끌고 가는 뚝심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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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야?
인간은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 다양한 종족이 생겨나고 국가라는 집단이 만들어지면서 인간은 같은 인간을 속이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 왔다. 그건 역사적으로 무수히 벌어진 일이고, 거짓과 정치적인 전략이 늘 존재해 왔다. 그래서 인류는 그런 위험성을 대비하고 방어할 수 있는 정보들을 전달해 왔다.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진심으로 믿는다. 그 싱대방을 위해 어떤 것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 믿음을 가진 인간들끼리 가족이 되거나, 특정 집단을 형성하여 하나의 사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서로 공통점이 있거나 같은 생각을 하는 부류다. 그런 걸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인간들은 믿을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이 전제는 첫 번째 사례와 충돌한다. 인간은 믿을 수도 있고, 믿을 수 없기도 하다.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결론인가.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영화는 지난 세 편의 시리즈인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100년 이상이 지난 시기를 다룬다. 인간은 지능이 거의 없는 존재로 소수만 살아남아있고, 지능을 가지게 된 유인원이 언어를 구사하면서 생태계의 최강자로 존재하고 있다. 이들에게 인간이란 지능이 낮은 동물이면서 믿을 수 없는 존재여서 접근을 피하고 있는 존재다.
첫 번째 감정 - 노아의 의심
영화의 주인공 노아(오원 티그)는 한 부족의 젊은 청년이다. 성인식을 해야 할 정도로 성장한 노아와 친구들은 진정한 성인으로 인정받는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높은 절벽 위에 있는 독수리 둥지에서 알을 하나씩 가져온다. 노아와 친구들은 맨 처음 등장부터 높은 절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특히나 노아는 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독수리 둥지까지 올라간다. 무사히 알을 가지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노아는 인간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 이후 인간을 추적하던 다른 유인원 집단에 의해 부족의 공간이 모두 파괴되고 만다.
부족의 대부분이 납치되어 어디론가 끌려가고, 기절했다 뒤늦게 깨어난 노아는 곧바로 다른 부족원을 찾아 나선다. 이 과정에서 노아는 다른 유인원 라카(피터 메이컨)와 인간 메이(프레이아 앨런)를 만난다. 처음 인간이라는 존재를 만난 노아는 메이를 무척 경계한다. 노아가 알고 있는 정보라고는 인간은 위험하고 교활해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정보는 부족의 나이 든 장로로부터 교육받은 정보이고, 그것에 대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과의 첫 만남부터 의심으로 시작한 노아는, 메이가 다른 인간들과는 다르게 지능이 있고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더 크게 의심하게 된다. 물론 노아의 부족 사람들이 갇혀있는 곳과 메이가 가고자 하는 곳이 같고 목적이 같기에 힘을 합하지만, 노아의 마음속에 자리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영화의 말미 노아와 그의 부족에게 한 메이의 행동은 노아의 의심을 더더욱 부정적인 쪽으로 만들어간다. 이 영화 내내 노아의 의심은 조금 작아질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두 번째 감정 - 메이의 두려움
그럼 반대로 유인원인 노아를 보는 메이의 감정은 어떨까. 메이의 진짜 생각은 영화 후반부가 되면서 더 크게 드러나게 된다. 영화 초반 메이가 처음 노아와 라카의 앞에 등장했을 때, 메이는 자신이 지능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숨겼다. 지능이 낮은 존재처럼 행동해 먹을 것을 얻어내고, 따뜻한 담요까지 얻어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경계하고 무서워하는 듯한 행동을 보여준다. 그렇게 지능을 가진 유인원들이 안심하고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하지만 조금씩 메이는 자신의 똑똑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위기가 더 커지고 머리를 써야 하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나온다. 바로 ‘노아’ 다. 마치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주인공 시저가 유인원으로써 처음 입 밖으로 내뱉었던 ‘NO'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기본적으로 메이는 유인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거의 멸망직전에 있고, 인간보다 강력한 존재가 된 유인원은 인간에게 믿을 수 없는 존재다.
메이는 노아와 그 부족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두려움은 모든 유인원들을 향하고 있다. 그 두려움은 메이가 가진 비밀을 이야기하지 못하게 만든다. 노아가 나쁘지 않은 유인원의 리더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그 두려움을 거두지 못한다. 그녀는 노아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권총을 숨긴 채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노아와 그 부족을 속였다. 이 영화 안에서 메이는 그 두려움에 완전히 종속된 인간이라고 느껴진다. 그 유인원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인간이 가진 지식과 기술들을 완전히 숨기는 행동으로 귀결된다.
세 번째 감정 - 프록시무스의 욕망
이 영화의 빌런인 프록시무스(케빈 듀런드)는 적어도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 안에서 만큼은 가장 리더처럼 보이는 인물일 것이다. 그는 목표가 뚜렷하다. 바다 옆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사용했던 벙커의 문을 여는 것이다. 그 안에 담긴 여러 지식과 정보 그리고 무기들을 차지하는 것이 목표다. 그의 욕망은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한 번쯤 욕심낼만한 것들이다. 그는 영화에 등장해서 다른 유인원들을 향해 이야기한다. 힘을 합치면 강하다. 그 말을 토대로 조금은 강압적이지만, 다른 유인원들의 힘을 이용해 낸다.
그 말은 사실 과거 시저가 살아있을 때 유인원 집단이 가진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일종의 정치적 용어다. 과거 시저의 말이 모든 유인원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프록시무스의 그 말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 그의 목표대로 벙커를 열어 인간의 지식을 이용하게 되었을 때, 다른 유인원들도 잘 살게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프록시무스의 몫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프록시무스는 두려움과 의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모든 유인원을 통제하고 있다고 자신하고 있고, 지능이 있는 인간들까지 차지함으로써 못하는 것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타입인 그는 아주 단순하게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적어오 이 영화 안에서 목표가 드러나는 건 프록시무스와 노아뿐이다. 프록시무스는 자신의 욕망, 노아는 부족의 부활이 그 목표다. 개인의 목표와 집단의 목표가 충돌하고, 그것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된다.
그렇다면 인간 메이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건 이 영화가 끝까지 숨기다가 이야기가 끝나기 직전에 털어놓는다. 그건 인간의 생존욕망과 메이의 두려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표출된다. 그 모든 설명을 보고 나면 맨 처음 메이가 등장했을 때부터의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목표 역시 노아와 마찬가지로 인간 부족의 부활이다. 당연히 유인원 노아와 인간 메이의 목표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다시 시작되는 이 시리즈의 동력은 바로 그 목표의 충돌이다.
영화는 끝나기 전 다시 묻는다.
‘인간은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여기에 한 가지 더 질문을 더한다.
‘유인원과 인간은 같이 살아갈 수 있는가’.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는 그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아마도 다음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그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놓을 것 같다. 이 영화를 연출한 웨스볼 감독은 영화 <메이즈러너> 3부작을 완성하면서 액션이나 CG연출을 매끄럽게 표현할 수 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번 영화에서도 수많은 유인원들의 모습을 화면에 자연스럽게 펼쳐놓는다. 특히나 마지막 하이라이트 장면이 바닷가 절벽에서 펼쳐지는데, 이 영화에 딱 맞는 완벽한 로케이션이었다. 노아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상승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는 절벽 그리고 바다에서 들이치는 수많은 난관인 거센 파도, 댐의 붕괴로 인한 홍수는 노아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화면으로 펼치기에 최적화된 환경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성경에 있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야기 구조도 노아가 한 부족을 살리는 이야기로 이어지기 때문에 서사의 구조에 그 이야기가 덧붙여져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화 <혹성탈출 새로운 시대>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는 건, 바로 인간에 대한 신뢰다. 영화관람을 모두 마친 관객에게 영화는 묻는다. 인간을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철학적 질문을 블럭버스터의 형식을 빌려 최첨단의 기술력으로 훌륭하게 던지는 영화다.
*영화의 스틸컷은 [왓챠]에서 다운로드하였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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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MFF 데일리] ‘듣는 영화'가 제천에 떴다! 국내 최초 한국 영화 오리지날 필름콘서트의 현장 속으로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8월 12일, 한 주 내내 쏟아지던 빗방울이 거짓말처럼 뚝 그쳤습니다. 제천 의림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따사로운 햇살과 선선한 바람으로 가득 찼죠.
화창해진 날씨에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제천 의림지 야외무대를 찾았습니다.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최초의 필름콘서트를 즐기기 위해서였는데요. 필름콘서트는 영화 상영과 동시에 영화에 삽입된 음악을 처음부터 끝까지 오케스트라 라이브로 연주하는 공연 형식입니다. 영화와 만난 콘서트는 전 세계 곳곳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영화 음악을 선보이고 있죠.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한국 영화 음악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국내 최초로 한국 영화의 오리지날 필름콘서트를 제작했습니다. 아름답고 감미로운 영화 음악으로 유명한 ‘봄날은 간다’가 바로 그 위대한 첫걸음의 주인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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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오리지날 필름콘서트의 역사적인 첫 공연을 위해 <봄날은 간다>의 음악을 만든 조성우 음악 감독과 서울그랜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재즈 아코디어니스트 제희가 무대에 올라섰습니다.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연주자들은 대형 스크린 아래에 마련된 무대에 하나둘씩 자리했는데요.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제 귀엔 악기를 조율하는 저마다의 소리마저 아름다운 선율처럼 들렸습니다.
영화 상영과 함께 시작된 그들의 연주는 순식간에 의림지를 거대한 영화관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음향을 자랑한다는 여느 영화관도 이곳 ‘의림지 영화관’의 사운드를 따라올 순 없었죠.
연주자들은 영화의 모든 장면에 집중하며 완벽한 필름콘서트를 선보였습니다. 10초 안팎의 짧은 삽입곡까지도 모두 라이브로 소화해냈죠. 음악이 흘러나와야 할 정확한 순간에 연주하기 위해 수도 없이 ‘봄날을 간다’를 보았을 그들의 노고에 시도 때도 없이 깊은 감동이 몰려왔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음악이 흘러나오는 줄도 모르게 영화를 감상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 번 반복해 감상하고 나서야 사운드에 귀를 기울이곤 하죠. 음악은 관객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핵심 요소인데도 말이에요. 그러나 필름콘서트의 관객은 스크린 바로 아래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라이브 공연 덕분에 음악이 삽입되는 영화의 모든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 음악의 힘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한 체험이었습니다.
필름콘서트는 그야말로 ‘듣는 영화'입니다. 오케스트라의 라이브 공연과 영화 속 배우의 말소리 및 현장음을 조화롭게 재생한 스태프들의 노력은 영화의 듣는 매력을 극대화하죠. 이런 면에서 영화 음향과 깊은 연관이 있는 사운드 엔지니어를 주인공으로 하는 ‘봄날은 간다’가 국내 최초 오리지널 필름콘서트 작품으로 가장 적합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젊은 시절의 배우 유지태와 이영애를 대형 스크린에서 다시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정말 특별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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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영화 경험을 할 수 있는 한여름 밤의 필름콘서트는 8월 13일과 14일에도 이어집니다. 13일에는 젊은 거장 이지수 음악 감독의 ‘마당을 나온 암탉’ 필름콘서트가, 14일에는 아카데미 수상자 존 윌리엄스 음악 감독의 ‘E.T’ 40주년 기념 필름콘서트가 개최되니 절대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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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루엘라 (2021)
*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주인공이 필요하다.” 영화를 소개하는 이 문장처럼, 영화 <크루엘라>의 주인공은 디즈니가 다룬 과거의 순수하고 결백하며 완전하게 선하기만한 주인공들과는 다르다. 영화 <크루엘라>는 디즈니가 자사의 작품인 <101 마리의 달마시안개>에서 달마시안의 모피를 호시탐탐 노리는 악역 크루엘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이전 작품과의 접점은 많지 않아 보인다. <크루엘라>는 전작의 악역인 크루엘라라는 캐릭터의 설정을 그대로 쓰되 캐릭터를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전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입장에선 전작과의 연결고리가 어찌되었든 별로 신경쓰지 않고 봤다. 전작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봐도 영화 <크루엘라>는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고, 굉장히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다.
악당을 잡기위해 악역이 된다는 설정이나 복수담과 성장담을 담은 스토리, 주인공의 출생부터 시작되는 순행적인 플롯. <크루엘라>의 전반적인 이야기는 평이한 편이다. 특별히 부족한 점도, 특별히 뛰어나다고 말할 부분 역시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가치없는 영화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스토리를 전달하는 방식에 있다. 과감한 컷연출과 엠마 톰슨과 엠마 스톤의 불꽃튀는 대립구도, 1970년대의 런던, 러닝타임 내내 쉴새없이 파괴와 혁명을 부르짖는 헤비메탈과 락 사운드의 음악들, 크루엘라가 자신의 개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에 적합한 창조적 파괴의 펑키룩,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격하고 파괴적인 영상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간중간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가미된 깨알같은 개그코드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절대 다수의 컷들이 높은 밀도를 갖고 있는 영화로, 그 과함탓에 피로를 느낄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꽉찬 영상으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이 영화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속박하는 금기라면 얼마든지 깨부수고, 한껏 열망하라.
선악과를 먹지 말란 금기를 어긴 아담, 아벨을 죽인 카인 등. 예로부터 죄의 낙인은 언제나 금기를 어긴 자들에게 주어졌다. 영화 <크루엘라> 또한 수많은 금기(-을 하지말라)를 받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거의 모든 금기(맨 마지막, 바로네스를 죽여선 안된다는 금기는 깨지 않았다)를 깨는 인물이다. 이 영화에서 금기를 깬다는 것은 에스텔라에겐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에선 그녀를 빌런(악당)으로 만드는 모순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금기를 깨고 자신이 열망하는 것을 추구하는 작중 주인공인 크루엘라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금기를 깨는 인물로서 크루엘라가 이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가장 결정적인 장면은 늦은밤, 리버티 백화점 점장의 사무실을 청소하는 크루엘라가 술을 발견하고 술을 들이키고 취기에 쇼윈도를 꾸미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내겐 아담이 선악과를 따서 먹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크루엘라는 금기된 장소에서 탐해선 안될 것(리버티 상표가 붙은 와인)을 기꺼이 탐한다. 금기를 깨트린 그녀에겐 분명히 죄인의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고, 그 이유로 그녀는 빌런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에스텔라는 사회가 정해놓은 금기를 깨서라도 세상이 정해놓은 자신의 한계와 위치를 넘어서고자 한다.
금기를 깨트린 그녀에겐 분명히 죄인의 낙인이 찍히게 될 것이고, 그 이유로 그녀는 빌런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에스텔라가 와인을 꺼내어 마시는 행위는 신과 같이 군림한 절대적인 체제와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한 종속적인 여성의 위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며, 취기에 쇼윈도를 자신의 재능으로 장식해 놓는 것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세계에 자신의 재능으로 되묻고 있는 것이다. 마치 카인의 죄를 물으려는 신에게 왜 신께선 아벨만을 찾으시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것처럼, 에스텔라는 내게도 이만한 재능이 있는데, 왜 기회를 주지 않느냐고 적극적으로 반항하고 기꺼이 원죄자가 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때, 에스텔라는 쇼윈도에 전시된 마네킹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거는데, “너를 이 꼴로 둘 순 없어. 그건 너무 잔인해.” 이 말은 에스텔라 자신을 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취기에 자신의 재능을 해방하는 에스텔라. 그녀는 자신이 열망하는 바를 위해 사회가 정해놓은 한계와 금기 따위라면 얼마든지 깨고, 넘어서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는 것이야말로 곧 사회가 정해놓은 종속적인 위치에서 해방되는 길임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여성, 내 포효를 들어라.” 영화 <크루엘라>의 곳곳에서 울려터지는 크루엘라의 포효는 열망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사회의 금기를 넘어서서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하는 강렬한 열망의 목소리 말이다.
크루엘라, 잔혹한(Cruel) 세상에 맞서다.
금기를 깨는 인물로서 크루엘라가 싸우고자 하는 것은 특정한 인물이 아닌, 금기로 가득 차있는 세상이다. 물론, 이 영화는 바로네스와 크루엘라의 명징한 대립구도로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 대립구도에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본다면 크루엘라와 바로네스의 갈등은 단순히 개인간의 다툼이 아니라, 변화를 요구하는 신세대로 상징되는 크루엘라와 고유명사인 동시에 남작부인이라는 구시대의 권위적인 이름이 의미하듯이, 권위적이며 잔혹한 구세대로 상징되는 바로네스의 대립으로도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크루엘라>는 영화의 초반에서 자신이 싸우고자 하는 대상이 엄마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니까, <크루엘라>의 대립 구도는 미래와 과거 각각 크루엘라(futuer)와 바로네스(남작 부인이라는 구시대의 권위적인 이름이 의미하듯이)로 상징되는 부정한 기득권 세력과 기성 사회에 저항하는 신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정의로워 보이는 싸움에는 한가지 덫이 있다. 부정한 세계를 향해 똑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저항한다면, 그러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복수를 행한다면 결국 똑같은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진 것 하나 없는 에스텔라가 이미 사회의 높은 곳에서 업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로네스를 상대로 정당하게 싸우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에스텔라는 자신이 갖고 있는 폭력적이고 과격하며 킬러같은 잔혹한 본성(Cruel)으로 바로네스와 맞서고자 한다. 에스텔라는 복수를 다짐한 순간, 그녀의 어머니가 예의바르고 착한 아이가 되라며 붙여준 이름인 에스텔라를 버리고, 자신의 진짜 본성을 상징하는 이름, 크루엘라가 되어 복수를 위해 바로네스와의 긴 싸움을 시작한다.
<크루엘라>의 대립구도는 미래와 과거 각각 크루엘라(futuer)와 바로네스(남작 부인)로 상징되는 부정한 기득권 세력과 기성 사회에 저항하는 신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구시대의 유산은 버리고.
이미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의의 경쟁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에스텔라는 저 높은 곳에서 군림하고 있는 악인을 추락시키기 위해서 크루엘라라는 이름의 악인이 된다. 유산을 되찾는 것에서 복수로 목표가 바뀌었을 때, 크루엘라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행동을 취한다. 우선, 미래를 상징하는 그녀가 구시대 유럽 귀족들의 단장(短杖)을 들고 나타나서, 재스퍼와 호레이스의 아침 식사를 엎어버리고 자신이 할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는데, 어딘지 불편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복수를 다짐한 크루엘라에게서 보여지는 이 불편한 기시감은 크루엘라가 뒤엎으려는 부정한 기득권인 바로네스의 모습과 닮아 있는데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크루엘라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후로 그녀는 마치 자신의 진짜 친모인 바로네스처럼, 얼마든지 타인을, 힘든 유년기 시절을 함께 보낸 자신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호러스와 재스퍼마저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크루엘라는 바로네스가 그러했듯이 한동안은 자신의 재능과 카리스마로 주변 사람들을 사로 잡는다. 하지만, 그녀는 점차 바로네스의 부정한 면들까지 닮아가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결국 킬러의 본능을 가진 바로네스에게 뒤를 잡히고, 죽음의 위기에 놓인다.
유산을 되찾는 것에서 복수로 목표가 바뀌었을 때, 크루엘라는 이전과는 다른 태도와 행동을 취한다.
“이 목걸이(유산)때문에 나는 죽게 될 거야.”
영화가 시작하면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에스텔라의 말처럼, 그녀는 결국 유산(가보인 목걸이)을 되찾는 과정에서 좌절하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때의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유산이란 바로네스로부터 물려받은 잔혹한 킬러의 본능, 즉 정신적인 유산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에스텔라가 맞이하는 이 첫번째 죽음은 바로네스의 재능은 물론, 킬러의 본능이라는 사악한 유산까지 물려받은 크루엘라의 상징적인 죽음이다. 이 상징적인 죽음을 통해서 크루엘라는 새롭게 태어난다.
부정한 세상에 반발하여, 부정한 구시대를 무너뜨릴 신세대라면 당연히 부정한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어선 안 될 것이다. 크루엘라는 여전히 폭력적이고 과격하지만, 이젠 자신에게 유산을 물려준 이와 똑같은 형태의 악당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녀가 새롭게 태어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엄마를 비롯한 자신의 가족들의 마음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거칠게 저항하고, 열망하며, 꿈꾸지만, 타인을 해치지 않고 타인들의 마음을 돌아본다. 이렇게 정리한다면 다소 순진해보이지만, 그 영악한 순진함이 크루엘라라는 캐릭터의 매력이고, 순진하면서도 영악한 그 본성으로 세계를 뒤흔드는 인물인 크루엘라가 디즈니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로 하는 새로운 주인공이다. 덧붙여, 영악한 순진함이란 말은 모순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태도를 실현하기 어려울 뿐이다.
이 죽음은 바로네스의 재능은 물론, 킬러의 본능이라는 사악한 유산까지 물려받은 에스텔라의 상징적인 죽음이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주인공이 필요한 법.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진 크루엘라는 자신의 가족과 동료, 지지자들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유산을 되찾는데 성공한다. 이때, 크루엘라는 유산을 되찾는 과정에서 순진하게 금기와 권력을 따르는 여성상인 에스텔라에게 죽음을 준다. 그리하여 새롭케 태어난 크루엘라는 바로네스의 잔혹한 유산을 물려받은 인물도 아니며, 캐서린의 금기를 따르는 순진한 인물도 아니다. 크루엘라는 이전 세대에게 유산으로 물려받은 이름과 정체성 모두를 죽이고, 자신만의 이름과 정체성을 선택한다.
이 악당의 성공담 또는 성장담은 디즈니가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누구도 해치지 않되, 영악하게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 여성, 그리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거침없이 드러내는 한편, 기성세대가 유산으로서 물려준 이름과 잔혹한 본능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이름과 자신만의 능력과 열정을 발휘하는 여성. 영화속 크루엘라의 성격을 이렇게 풀어본다면, 디즈니가 새롭게 해석한 빌런 크루엘라는, 그동안 디즈니가 지켜온 전형적인 주인공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주인공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 이상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주인공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낡은 시대의 주인공을 두 번 죽인다. 그 첫 번째 죽음은, 바로네스로부터 잔혹한 구시대의 정신을 이어받은 크루엘라의 죽음이며, 두 번째의 죽음은 권력이나 환경에 기대어 순진하게만 살아가는 여성 에스텔라의 죽음이다. 이 두번의 죽음을 통해, 새롭게 태어난 크루엘라는 온갖 사회적 금기들로 속박되고 억압된 여성상에서 해방되어 낡은 금기를 깨부수고, 영악하게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발휘하는 인물이다. 디즈니는 구시대적인 인물에게 두 번의 죽음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주인공인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는, 디즈니가 1970년대의 런던을 지나 우리시대, 즉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공”으로 제시하는 인물상이기도 한 것이다.
요컨대, 영화 <크루엘라>는 과거의 속박되고 억압된 여성상에서 해방되어 거침없이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발휘하는 현대적인 여성상을 엠마 스톤의 크루엘라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공”으로써 제시하고 있기도 한 것이다.
캐릭터의 성격을 한층 더 살리는 <크루엘라>의 미술과 음악
자신의 것을 되찾기 위해서 바로네스와 맞서는 크루엘라의 퍼포먼스는 굉장히 과격하고, 기존의 세계를 흔들 정도로 파격적이다. 파격적이고 과격한 <크루엘라>를 장식하는 음악과 패션도 이 영화에 굉장히 잘 어울린다. 영화에서 쉬지않고 들려오는 1960년대 ~ 1970년대 런던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헤비메탈 / 하드락 사운드의 음악들하며,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주인공 크루엘라를 장식하는 펑크풍의 패션은 이 영화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리고, 크루엘라의 개성을 더욱 강조한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주인공이 되기위해 전력으로 질주하는 영화 <크루엘라>의 곳곳에서 터져나오는 해방과 혁명을 부르짖는 과격한 헤비메탈 사운드는 영화속의 낡고 부정한 세계를 뒤흔든다.
평이한 플롯과 스토리는 아쉽지만.
영화 <크루엘라>의 플롯과 이야기는 전형적이고 평이한 편이다. 따라서 다양한 평가가 나오는 듯한데,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섞인 복합 예술인 영화를 두고 메세지나 스토리, 플롯만 두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평가가 아닌가 싶다. 요컨대, 두 엠마의 불꽃튀는 신경전만 해도 충분히 볼 만한 영화가 아니었던가? 물론, 사람에 따라 무엇을 중요시 여기느냐는 저마다 다르고 존중해야겠지만, <크루엘라>와 같은 작품은 일단 플롯은 간결하니 플롯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고, 스토리상으로는 논리적 오류만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크루엘라>와 같은 장르 영화의 매력은 스토리 역시 중요하지만 이야기 자체보다는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시 · 청각적인 요소(배우들의 연기력, 컷 연출, 미술, 음악 등)들이다. 그러니 이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그냥 쉽고 간결하게 질문하고 대답하면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재밌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대답을 하자면, 이 영화는 분명 흡입력있는 재밌는 영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개인의 취향에 따라 평가는 다르기야 하겠다만(아마 영상 전체에 흐르고 있는 과한 에너지 탓에 피로를 느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개인적으로는 캐릭터의 매력이 강렬한, 재밌는 영화라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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