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14 18:54:19
전복된 세상에 어서 오세요
영화 <슬픔의 삼각형> 리뷰

<슬픔의 삼각형>이 시작되면 관객은 처음부터 기묘한 감각에 휩싸인다. 한가득 모여 있는 남자 모델들을 인터뷰하는 장면인데, 이 영화가 우리를 어떤 롤러코스터에 태울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행복해요” 식으로 상큼한 미소를 환하게 짓는 H&M 모델 표정과, “너희는 모두 내 발아래 있어” 식으로 얼굴을 굳히고 사람을 내려다보는 발렌시아가 모델 표정을 번갈아 짓게 시키면서 사회자가 내뱉는 단어 하나하나가 다 현대 패션계와 인스타그램 광고들을 얼마나 잘 요약해 주는지, 헛웃음이 나온다. 몸을 걸치는 수단이었던 옷과 장신구가 이제 사람의 내면까지 절여 버리려고 드는 게, 재미있긴 하지만 징그러울 때가 있는데 딱 그 느낌이었다.
뒤이어 모델들을 인터뷰하면서, “수입이 여자 모델의 1/3밖에 안 되고 작업 거는 게이들도 상대해야 하는” 남자 모델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뭐냐고 자조적으로 물을 때는 정말 기분이 묘했다. 2022년 기준으로 여성은 동일 직군에서도 남성보다 31.5% 임금을 덜 받고 있으며, 서비스직으로서 인간 대 인간의 기본적인 친절을 베풀다가 별의별 수작질과 심지어 “꼬리 쳐 놓고 이제 와서 모르는 체를 한다”는 의문의 분노까지 받았다는 사람 이야기가 수두룩한 세상을 살고 있기에.

그리고 나면 이 영화는 마치 3개의 꼭짓점처럼 3개의 파트를 톡, 톡, 톡 찍고 엔딩까지 쉼 없이 달린다. 참고로 이 영화에 대한 모든 마케팅 문구는 진실이었다. 아, 참고로 문구는 아니지만 마케팅에 가히가 붙은 것도 나를 미치게 웃기는 요소이다. 게다가 (밈 아니고 진짜로) 포브스 선정 “올해 가장 웃긴 영화.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라는 말이 진짜였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지의 “이 우스꽝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영화”라는 말도. 더불어 “어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말도 믿어주기를 바란다. “영화관에서 꼭 봐야 하는 영화”이자 “끝나고 나서 할 얘기가 있는 영화”는 모든 영화의 주장이지만, 이 영화는 정말 가급적 영화관에서, 가급적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보시길. 다만 구토와 오물이 적나라하게 나오니 비위가 약한 사람은 주의가 필요하다. 마음의 준비 하셨다면, 그럼, 전복된 세상에 어서 오세요.

#1. 자유로운 우리를 봐 자유로워
영화의 1부는 인플루언서 모델 야야와 그 남자친구 칼의 이야기다. 칼도 모델이지만 쇼의 중심에는 야야가 있고, 칼은 관객석에서도 VIP 등장으로 밀려나 뒷줄에 적당히 끼어 앉는 신세이다. 마치 제니 홀저의 작업물 같은 느낌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글씨가 번쩍거리는 쇼의 관객석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평등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진다. 조지 오웰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은 아직 자본으로 가시화되지 않는 “자산”을 자본보다 더 많이 가진 상태이다. 다시 말해 페이보다 #협찬 이 더 많다는 것. 그렇기에 돈 문제로 얼마든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수 있지만 그러는 순간 “섹시하지 않”아진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같은 상황은 다른 단어로 풀어진다. 야야에게는 “섹시하지 않”은 돈 이야기가 칼에게는 “그저 관찰한 것”, “돈 문제가 아닌 것”으로 계속해서 풀어진다. 칼은 “성별 고정관념”에 휩싸이지 말자고 이야기하며 돈 내는 문제를 가지고 따지지만, 그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엘리베이터를 손으로 막아서고 소리를 지를 수 있다는 것에 어떤 젠더 권력이 작용하고 있는지, 가슴팍에 돈을 끼워준 야야의 행위가 왜 그토록 기분이 나빴는지. 돈 얘기가 아니라지만 이야기는 돌고 돌아 돈으로 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수사학은 현란한 언어로,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하여 정신을 꼬드긴다. 칼과 야야의 관계에서도 그 양상이 재연되지만, 2부 ‘요트’에서 만나는 부자들이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는 양상을 들어 보면 헛웃음이 자꾸 나온다.
요트에서 승무원을 쥐락펴락하는 러시아 부호 여성은 “우리는 모두 평등 We are all equal” 하다는 말과 “삶은 불공평한 것 Life is unfair” 이라는 말을 한 입에서 낸다. 바로 뒤이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라고 “명령”한다는 말까지 육성으로 내뱉는다. 그런데도 승무원은 핀으로 고정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비위를 맞추다가 결국 Yes와 No의 간단한 대답조차 헝클어지고 만다.
재차 강조되는 평등은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현대에는 더 이상 계급이 없다고 교과서에 나오지만, 동시에 우리는 너의 노력으로 어디론가 올라가라고 요구하는 동시에 근로 소득의 힘을 점점 얕보는 사회를 살고 있다. 계급이 없다면 <기생충>이 계급 우화였을 리가. <기생충>에서는 계단으로, <행복한 라짜로>에서는 농민들의 마을로 표현되었던 계급이 이 영화에서는 요트 속 사람들의 옷차림과 그들이 머무는 자리로 표현된다. 일하는 위치에 따라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달라지고 음악 취향조차 달라진다. 노력으로 얼마든지 자본을 얻을 수 있는 무한의 자유가 주어진 척하지만, 자유롭지 못하도록 요구하는 무엇이, 우리와 함께, 있다.

#2. 전복의 맛, 통쾌한가요?
그러나 이 세계는 폭풍우 속에서 기울고, 이내 전복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유층은 자기의 스타일대로 최선을 다해 자기 일을 설명하지만, 그 일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생각해 보면 이들이 아무리 우아하고 고상하게 앉아 있어도 징그럽게 보인다. 극단으로 가는 천민자본주의, 사유가 부재한 사회에서 마케팅에만 절여진 뇌들이 모이면 얼마나 징그러워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서비스직이라면 누구나 ‘가끔은 그냥 바보들에게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제일 빠르지…’ 하고 어떤 기억을 떠오르게 할, 영 바보 같은 이미지도 이들 중에 덧씌워진다.
거기 그치지 않고 이들을 적극적으로 풍자의 오물에 넘어뜨린다. 불안하게 떨리던 잔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아기 우는 소리와 풍랑 소리에 정신이 없는데 피아노 음악은 계속 흐른다. 결국 비싼 술도, 비싼 식재료로 만든 음식도, 심지어는 스스로가 가치 있는 다시 말해 “비싼” 사람이라 믿었을 사람들까지 바닥에 토사물과 함께 구른다. 이 영화는 그렇게 자본주의를 오물과 함께 바닥에 굴린다. 풍랑 속에서 사람들은 구르고 있는데 조타실은 비어 있고, 선장은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다. 대처와 레이건과 케네디를 인용하는 러시아 출신의 자본주의자 비료상, 마크 트웨인과 마르크스와 레닌을 인용하는 미국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 선장의 술 냄새 나는 대화도 재미있다. “당신들이 풍요 속에 헤엄칠 때 세계는 빈곤에 허우적거린다”고 선장이 일침을 놓을 때는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물론 그 말을 듣는 부자들은 현재 토사물과 오물 사이를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부자들은 어둠과 오물 속에서, 미국이 자본으로 아작 내고 망친 나라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타인이 자기 얼굴에 전조등을 비추는 경험을 한다. 살기 위해 국경선을 넘는 사람들, 예컨대 베네수엘라에서 국경선을 넘어 미국을 향하던 사람들이 했을 경험이었다. 이 배는 자본주의 전복의 배다. 아무 사정도 봐주지 않고 가차없이 전복은 계속되다가 끝내, 배까지 전복되고 8명만이 살아 남아 무인도에 다다른다. 자본과 능력주의와 성별과 우리 사회를 이루는 수많은 것들을 뒤집은 끝에, 마침내 세계의 전복이 일단락된다. (거기에서의 내용은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아껴둔다.)
그러나 이 전복, 통쾌하기만 한가? 미친 듯이 웃다가, 가감 없는 토사물에 ‘으…’ 하다가, 모처럼 영화관에서 사람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반응하고 있다 보니 정말 ‘어른들을 위한 롤러코스터’에 탑승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통쾌하게 웃다 보면… 웃다가 생각해 보니 웃을 때가 아니다. 제가 바로 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과 마케팅에 절여져 사는 사람이랍니다? 영화를 보고 그나마 웃을 수 있는 건 단지 제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 사람들처럼 자본을 많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왜 저들이 가진 역겨운 면면은 저에게 다 있는 걸까요?

#3. 삼각형과 원
삼각형과 원은, 전혀 닮아 보이지 않지만 의외로 수학적으로는 제법 비슷하게 묶일 만한 성질이 많이 있다…고 언젠가 들은 것 같은데, 학교 졸업한 지 너무 오래라 구체적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검색을 해 보니 삼각형 하면 외접원과 내접원을 떼어 놓고 설명할 수 없고, 관련 공식 유도에서도 서로를 많이 써먹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삼각형과 원이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거다.
<슬픔의 삼각형>을 보고 나는 원을 떠올렸다. 삼각형은 어떻게 굴려도 다시 삼각형이다. 정삼각형인지 이등변삼각형인지 그 모양조차도 변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위치에 따라 어디가 밑변인지가 달라질 뿐이다. 그래 봤자 넓이는 똑같이 구해진다. 또 다른 교착 상태에 머무를 뿐이다. 그리고 그 사회에 똑 같은 얼굴로 금방 잘 적응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해서 괴로워지는 사람이 누구냐가 달라질 뿐이다.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그 지점을 생각한다. 요트에서의 삼각형과 무인도에서의 삼각형을 놓고 보면 비슷한 위치에 놓인 사람도 전혀 다른 위치에 놓인 사람도 있다. 처한 자리가 달라지면, 똑같은 재능 똑같은 노력을 갖고도 전혀 다른 성과를 내게 된다. 어제까지 비웃음을 사던 사람이 뭐 하나로 빵 뜨면 칭송을 받는 세상, 그러다가도 또 금방 비난을 받는 요지경 같은 세상에서, 삼각형 위를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미끄러지는 우리를, 나를 이 영화에서 본다.
볼 때는 미친 듯이 즐거운데 보고 나서는 할 얘기가 자꾸 생각나는 영화라면,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좋다.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모든 대화가 쫀득쫀득하게 구성된 이 영화의 롤러코스터에서 정신을 놓은 다음, 나와서는 삼각형과 원,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 공리주의, 서비스직의 애환, <기생충>과 <행복한 라짜로>, 트로이의 목마… 등등 매우 ‘있어 보이는’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다가 그조차 나의 위선 같다는 찝찝함을 안고 집에 돌아오면 된다. 그러고도 며칠 정도 이상하게 이 영화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포브스가 옳았다. 볼 때는 “올해 가장 웃긴 영화”였는데, 보고 나니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다. 그래서, 저와 함께 삼각형과 원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실 분을 찾습니다.
*영화는 5월 17일 극장에서 개봉합니다. 꼭 사람 많은 상영관에서 보세요.
**이 글은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한 후, 솔직하게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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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썩기 직전의 수박같은 사람
이 글은 영화 [미세리코르디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장마 후에 과일을 사면 맛이 없다고들 한다. 그 말에 마음이 움직여, 입이 떡 벌어지는 가격을 주고 수박 한 통을 기어이 집으로 들였다. 식칼의 끝에서 작은 파열음과 함께 쪼개진 수박의 속은 여름의 더위만큼이나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둥그런 여름 속의 한쪽에 시선이 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타오르다 못해 녹아버리기 시작한 과육에서 들큼한 냄새가 풍겨왔으니까. 절정의 단맛에서 내려오기 시작하는 순간이자 이제는 썩는다 라는 표현이 더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겠지.
영화는 딱 그런 냄새를 풍긴다.
축축하고 질척거리는 경계에서 관객에게 인사를 해야 할지 등을 돌려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거리고 있다. 그 통에 영화가 밟고 서있는 희미한 경계선마저 지저분하게 자취를 감춘다. 영화는 그렇게 넓어졌다 불러야 할지, 혹은 영역침범 되었다 해야 할지 머뭇거리기 딱 좋은 장소가 된다. 그리고 그 속의 등장인물들은 영화 속 기후에 알맞게 익어 각자의 매력을 뽐내지만, 어딘가 퀴퀴하게 골아드는 부분도 품고 있다.
과연 어디부터 도려내야 할 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무리 찬찬히 들여다봐도 그 시작점을 찾을 수가 없다. 손에 든 칼날의 행방은 정처 없이 허공에서 맴돌고, 눈은 다시 한번 바삐 인물들을 쫓아보지만 겨눈 칼날은 단 한 조각도 들어내지 못한다.
그때치고 들어오는 감정은 허탈함이 아닌 동질감이다. 사람이란 게 이토록 복잡한 존재이며, 과연 쩍 갈라진 단면만을 보았을 때 내가 평가해도 될 것인가.라는 생각도 함께 밀려온다. 내가 품고 있을 뭉그러진 부분에 대한 연민이 밀려오는 순간 영화 제목에 대한 이해와 등장인물들에 대한 너그러운 웃음이 터져 나온다
그제야 영화가 우왕좌왕하며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영화가, 그리고 인물들이 밟고 있는 것은 뱅상(장-밥티스트 뒤랑)으로 상징할 수 있는 도덕, 혹은 양심의 마지노선이었겠지. 이미 벌어진 일들이 있으니 그 앞으로도, 그렇다고 뒤로도 후퇴할 수 없이 초조해하는 마음을 안은 채 애써 발을 비비며 그 선을 지워댔던 것이다. 원래 없었던 것처럼. 이 세계와 저 세계 모두 같은 것이었던 것처럼 보여야 자신들이 서 있는 곳도, 그리고 서 있다는 사실 자체도 합리화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은 당연히 제레미(펠릭스 키실), 마르틴(캐서린 프로트), 그리고 필리페(자크 드블레)의 식사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숨기고 묻어버린 욕망 위에서 피어난 버섯을 요리해 먹는 장면. 그리고 그 불쾌함을 삼키는 의식을 가장 늦게 받아들이는 제레미의 모습을 보면서, 마치 [친절한 금자 씨]에서의 식사장면이 오버랩되는 것만 같았다.
똑같은 인간. 똑같은 흠. 그리고 서로에게만큼은 그 썩은 부분을 들켜도 괜찮을 것이라는 것만 같은 동질감을 느끼는 눈빛들. 집으로 돌아가면 따로 보관해 두었던 물컹해지기 시작한 수박을 남김없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내 입가에도 비릿한 웃음이 슬그머니 지어졌다.
[ 이 글의 TMI]
1. 회사에서 파는 샐러드 1만 원 돌파... 안 먹어....
2. 다들 비 피해 없는 한 주를 보내시길 바란다.
3. 브런치 멤버십 글을 써야 하는데... 하.. 시간 너무 걸려...
#미세리코르디 #알랭기로디 #펠릭스키실 #캐서린프로트 #장밥티스트뒤랑 #프랑스 #코미디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리뷰어 #영화해석 #결말해석 #영화감상평 #개봉영화 #영화보고글쓰기 #Munalogi #브런치작가 #네이버영화인플루언서 #내일은파란안경 #메가박스 #CGV #롯데시네마 #영화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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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리와 미학을 결합한, 당나귀의 여정
6★/10★
영화는 불연속적이고 파편화된, 그래서 단번에 그 정체를 인식하기가 어려운 붉은 조명 아래의 서커스 장면으로 시작된다. 관능적인 몸짓을 선보이는 여성 단원 카산드라에 뒤이어 당나귀 EO가 나온다. EO는 서커스단 소속이자, 카산드라의 공연 파트너다. 그러나 얼마 뒤 동물 서커스가 동물 학대라고 말하는 시위대가 등장하고, EO와 카산드라가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온다. 서커스단을 떠난 후 EO가 경험하는 무수한 폭력(혹은 폭력으로 점철된 모험)에서 알 수 있듯, 서커스단과의 결별은 EO에게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동물권 단체와 EO의 그리 산뜻하지 않은 만남은 EO가 마주할 모험의 방향성을 일러준다. 이후 EO가 마주하는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목적과 기분에 따라 EO를 대한다. 개중에는 조금 괜찮은 사람도 있고, 끔찍한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본질은 같다. 동물권 보호 단체가 초래한 역설은 이를 집약해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암시다. EO가 서커스단에서 착취당하고 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만, 이들은 서커스단에서 나온 EO가 어떻게 될지에 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EO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이런 식이다. 마구간, 농장, 인간이 늑대를 사냥하는 숲, EO를 ‘구조’한 소방대원, 훌리건, 동물 병원, 모피 사육장, 살라미 공장행 트럭, 백작 부인의 저택, 공장식 사육장/도축장……. 인과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EO의 여정은 영화의 실험적인 연출과 어우러져 그 자체로 하나의 은유가 된다. 영화는 EO가 잇따라 마주하는 인간과 그들의 행동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백작 부인의 저택에서 그녀가 자신의 의붓아들이자 도박중독자인 신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자. 언뜻 어머니가 아들을 나무라는 듯 보이지만, 이 시퀀스가 끝날 때쯤 갑자기 둘의 관계가 성애적일 수 있다는 암시가 드러난다. 돈 많은 백작 부인과 그녀의 타락한 성직자 의붓아들, 그리고 이들의 모호한 관계. 인간 관객은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하지만 EO는 그렇지 않다. EO에게는 경기장에 등장한 EO 덕에 승리했다고 믿는 축구 팬(그리고 같은 이유로 EO를 원망하고 학대하는 상대편 훌리건)과 백작 부인이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EO를 스쳐 가는 사람들을 그저 보여줄 뿐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을 상대화한다. 별다른 중요성을 갖지 않는 인간들이 동물인 EO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 슬픔 자아낼 뿐이다.
영화는 다양한 연출 기법을 활용하여 이러한 메시지를 극대화한다. 핸드헬드, EO의 시야에 맞춘 카메라워크, 붉은빛의 색감과 동물 형태의 로봇을 활용한 화면 구성 등등 영화는 예술, 미학적 실험을 반복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윤리와 미학이 별개의 영역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윤리적 주제를 다루는 영화는 미학적 요소에 둔감할 때가 있고, 미학적 영화는 종종 윤리를 들여오는 것을 정체성의 훼손으로 여긴다. 그러나 〈당나귀 EO〉에서는 윤리와 미학이 서로를 지탱한다. 미학적이고 실험적인 요소를 적극 들여옴으로써, 그래서는 안 된다는 당위로만 자리 잡았을 뿐 진지하게 고민되지는 않은 동물에 대한 인간종의 폭력을 고발하고, EO의 시각에서 인간종의 특권을 상대화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요컨대 〈당나귀 EO〉는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EO의 관점을 환기한다.
영화의 마지막, EO는 소떼와 함께 있다. 공장식 사육장/도축장으로 보이는 곳이다. EO가 인간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왔는지, 자발적으로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EO가 소떼 무리의 움직임에 동참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인간에 대한 기대와 환멸을 교대로 느끼며 걸어온 모험의 끝, EO는 최종적으로 죽음의 공간에 도달했다. 감독의 말마따나 이 영화가 “냉소적이고 냉담한 사회에서 ‘순진해 빠졌다’라고 여겨지는 순수함”에 관한 영화라면, EO는 동물에 대한 인간종의 폭력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 시대의 폭력적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가 마주하는 비극적 결말 대한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이 영화의 접근이 관객의 마음에 남긴 기괴한 흔적은 그리 쉽게 지워질 것 같지 않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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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넷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한국에서는 <잠> 북미에서는 <더 넌 2> 3주째 호러, 스릴러 돌풍이 불고 있습니다. 새로 개봉한 <가문의 영광: 리턴즈>가 2위를 기록했다고 하는데요 9월 4주차 박스오피스 순위 같이 알아볼까요?✍�
[국내 박스오피스]
영화 <잠>이 개봉 이후 3주째 정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6번째 시리즈를 맞이한 <가문의 영광: 리턴즈>는 7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2위, 할리우드 레이싱 액션 영화 <그란 투리스모>가 5만여명을 동원하며 3위를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가문의 영광: 리턴즈>는 개봉 첫 날 부터 혹평세례를 받고 있는데, 허술한 내용에 아쉬움을 표현하는 반응이 대다수였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더 넌 2>가 매출액 840만 달러를 기록하면서 3주째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익스펜더블4>는 매출액 830만 달러를 올려 2위로 출발, <베니스 유령 살인사건>이 3위를 기록했습니다. <더 넌>은 1956년 프랑스 한 성당에서 신부가 죽은 채 발견되고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아이린 수녀가 의문의 사건을 마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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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이 건네는 말 '행복해지자꾸나'
글과 기억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바로 다시 읽어보면 엥? 싶은 것이다. 나 나름대로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적었지만 신파 가득한 영화가 된 것 같아 '엥?' 싶다. 그럼 포스팅의 수정 버튼으로 마우스가 움직인다. 이거 고쳐야지. 저거 고쳐야지. '~하도록 하자'라는 말이 뭔가 어색하다. 읽는 사람들은 이 영화의 장단점을 읽고 극장에 가고 싶어서 이 포스팅을 클릭한 것인데 왠 알지도 못하는 놈이 설교하면 이상하잖아?
그래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그리고 나와 입장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그게 뭐 나쁜 것도 아니고 그 나름의 의미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타인이 나를 혐오하는 건 사실 그렇게 큰 페널티가 아니었다. 전 여자 친구 같은 존재가 아니면 신경 안 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삶을 마주하며 느끼는 감정 중에서 이겨내기 힘든 건 자기혐오였다. 그래서 난 <매그놀리아> 리뷰를 쓰며 신파와 유사한 글을 쓰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근데 뭐 그게 나쁜 걸까? 다들 그게 삶이라고 느끼니까 그와 관련된 많은 창작물이 나오는 거 아닐까 싶다. 옆 나라 일본에 사는 거장이 이런 우리에게 (비교적) 서툰 화법으로 따뜻한 진심을 건네고 있다. 프랑스 칸을 경유하고 입국한 영화를 지금 극장에서 만나보자.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
어딘가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 머뭇거리는 여자. 비가 오는 밖, 여자는 무언가를 어느 곳에 놓고 나왔다. 바바닥에 내려놓은 무언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여자가 내려놓은 건 아이다. 그것도 방금 태어난 아기였다. 여자는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라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여자. 그 다른 여자는 바닥에 놓여있던 아이를 상자 안에 밀어 넣는다.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상현. 상현은 아마 혼자 살고 있는 것 같다. 보육원에서 일하고 있는 동수. 동수의 보육원에선 베이비 박스를 운영하고 있다. 상현과 동수는 이 베이비박스를 악용해서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부모들에게 인신매매를 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엄연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둘. 둘에게 아이 한 명이 왔다. 아이의 이름은 우성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여지없이 인신매매를 준비 중인 상현. 상현은 동수에게 감시카메라를 삭제하라는 말과 함께 다른 가족들을 찾기로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이의 엄마 소영이 다시 베이비 박스로 돌아왔다. 그렇게 계획대로 착착 이어질 것 같았던 둘은 새롭게 생긴 돌발변수를 맞이하게 된다. 소영과 상현, 동수는 그렇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세 인물은 가까워지게 된다. 마치 월미도에 여행을 간 가족들처럼.
변주해서 만든 이야기
이 영화를 보다가 생각난 작품은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다. 일단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제시되기도 했다. <매그놀리아>의 하이라이트 신에 삽입되었던 OST를 주요 지점에 배치했다. 이 <매그놀리아>를 각본에서 삽입한 만큼 이 영화에도 그와 비슷한 모티브가 쓰였다. <매그놀리아>는 러닝타임이 3시간인 영화다. 3시간 동안 각자 다른 인물 9명이 자기혐오와 연민 속에서 빠져드는 이야기가 영화의 줄거리다. 이 러닝타임 동안 극의 전개를 비트는 장면이 있다. 이 인물들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아서 조금의 구원을 얻는다. 이 영화 <브로커>역시 각자 인물의 사정을 조금씩 다르게 묘사했다. <매그놀리아>에서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섹슈얼리티로 유혹하거나, 마약과 매춘에 피해자였던 여자의 입장을 중후반부에 한 사건으로 엮어놓았던 방식은 '아기'로 인물들을 묶은 것과 유사하다. 네 명의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입장을 2시간 안에 때려 박고도 각본의 구멍이 없게 착착 녹아들었다는 것은 역시 '거장은 거장'이라는 수식을 주기 충분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내가 뭘 봤나' 생각해보면 인물의 말이나 제스처가 기억에 남는다. 근데 그 인물의 특성들이 꼼꼼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하이라이트 신까지 극에 몰입하는데 용이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점도 있다.
묘하게 느껴지는 이질감
영화에 단점이 없진 않다. 사실 분명하기까지 하다. 일단 예고에서도 나타났던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 이제 행복해지자꾸나' 이 말. 난 내가 하는 이 세상에서 몇 번 못 들어봤다. '우리 이제 행복하자'도 아니고 '행복해지자꾸나'라니. 보면 영화 대사가 아니라 2000년대 초반에 나올 법한 우리나라 단편소설 문장 같다. 이 이질감은 반복된다. 예를 들어 소영과 동수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면서 '나 이 말 두 번 하는데'라고 하면서 손가락 두 개를 표시한다. 이게 뭐 무리수를 뒀다던가 그런 건 아닌데, 굳이? 싶은 것이다. 이게 고의적으로 디렉팅을 이렇게 한 거면 과하다고 생각한다. 일본 감독이 각본을 써서 그런지 이게 예전 우리나라 드라마에 나올 법하다는 걸 모르고 쓴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이런 무언가 어색한 대사 방식은 이주영 배우가 맡은 이형사 역에도 똑같이 반복된다. 이형사의 상관인 수진과 차에 타고 있을 때 누군가와 대화하는 신이 있다. 이주영 배우가 평소에 쳤던, <메기>나 <꿈의 제인>, <이태원 클라스>에서 볼 수 있던 말하기 방식이다. 그런데 이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은 많이 어색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만든 이 영화의 강점으로 작용하는 요소들은 분명하다. 근데 단점도 그만큼 뚜렷한 셈이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난 거의 두 달 전에 우리나라 독립영화 <태어나길 잘했어>를 봤다. 이 <태어나길 잘했어>를 보고 느꼈던 건 좋은 작품인 건 안다. 그런데 뭐랄까 한국 예술영화들이 거의 이런 톤인 느낌? <벌새>, <우리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소공녀> 등등 버거운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우리에게 격려를 하는 건 좋다. 당연히 나 역시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에서 위로받았으니까. 그런데 <원더풀 라이프>에서 '당신을 대표하는 기억은 무엇인가요?'를 간접적으로 전했다는 것과는 뭔가 다르다.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구나' 느끼는 것이다. 퀄리티 있는 연출법을 갖고 있던 사람이기엔 엥? 싶은 구석이 있다. 또, 소영이 누군가에게 쌍욕을 늘어놓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강간'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영화 자체가 어떤 이야기를 허구를 중심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이 대 사 자체의 개연성이 좀 많이 떨어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기서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할 사람은.. 한 20000명의 1명쯤? 솔직히 아예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근데 잘 만들었어
그렇게 단점이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수작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일단 앞에서도 썼듯 캐릭터 설정에 부여한 섬세한 디테일이 탁월했다. 특히 송강호 배우기 연기했던 상현은 나쁜 사람이다. 그 사람의 이유가 어찌 됐건 자기의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인신매매를 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자기 딸과 아내에게도 잘 못했다. 아마 도박 빚 때문에 두 사람을 떠나보낸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직업은 '세탁소 사장'이다. 무언가를 '빨아 다시 써야만 하는' 상현의 입장과 유사하다. 이뿐만이 아니라 이 인물은 자기 내면의 모순까지도 인지하고 있는 듯하다. 소영이 상현에게 '이 사람들을 일찍 만났다면 우성이를 보내지 않아도 될 텐데'리고 말한다. 상현은 대답한다. '아직 늦지 않았어'라고. 근데 그 '아직 늦지 않았어'라는 대답이 소영에게 잘 들리지 않는다. "응? 뭐라고?" 소영이 답한다. 상현은 다시 대답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삶이 계속해서 같은 하향곡선을 계속 찍게 되면 세탁으로도, 비가 내리는 것만으로도 국면전환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쩌면 극에서 각본을 쓴 사람이 유지하고자 했던 거리감은 이런 디테일한 부분까지 묘사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또 다른 장점은 수진 캐릭터다. 수진은 단서가 없는 인물이다. 수진이 왜 우성을 베이비박스 안에 놨는지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리고 왜 소영을 미워하는지, 엔딩부에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런 입장까지 놓였던 이유는 뭔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철저한 의도 아래 놓여있는 인물 설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감독은 과감하게 이 인물의 원인과 동기부여를 생략해서 감정적으로 진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을 넓혔다. 그리고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인지해서 경제적으로 극 전개를 이끌어낸다. 이 인물에게 <매그놀리아>의 래퍼런스를 넣은 이유는 분명히 있다. <매그놀리아>는 9명의 인물이 각자의 이유를 들어 자기혐오를 토하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기혐오를 우연처럼 보일 수 있는 일을 바탕으로 극복해낸다. 그 에피소드가 각자가 갖고 있는 상처를 본질적으로 해소할 수 있냐? 아니다. 전혀 상관없는 방식이다. 근데 이 사람들이 자기혐오를 겪는 이유를 일일이 찾으려면 너무 복잡해서 풀 생각조차 안 든다. 그렇게 복잡한 사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매그놀리아>가 던지는 해결 방식은 탄력을 얻는다. 그리고 그 에피소드 덕에 인물은 각자의 구원을 조금이라도 찾게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이런 방식을 택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자기혐오의 해결 방식을 얼핏 보면 생뚱맞은 수를 골랐다면 본 작의 각본가는 그냥 이유를 없애버렸다. '인과관계가 뚜렷한 해결책' 대신 '문제의 원인을 없애버린' 설루션을 고른 것이다. 이렇게 수진 캐릭터의 설정으로 영화는 관객에게 자기 연민에 빠진 사람에게 용서할 수 있는 실마리를 안겨준다. 또 이렇게 괄호 쳐져 있는 인물을 배두나 배우가 잘 소화하기도 했다. 이미 합을 맞춰본 적이 있어서 그런가 배우의 장점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수진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감독 특유의 꼼꼼한 손길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중후반부 소영이 어떤 인물을 쳐다보는 신이 있다. 한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한다. 근데 카메라는 그 행동을 찍어주지 않는다. 그 대신 소영의 모습을 클로즈업한다. 감독이 생각하는 이 영화의 거리감인 셈이다. 그렇게 소영이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걸 묘사하는 꼼꼼한 연출이다. 또 월미도의 놀이동산에 가는 신이 있다. 이 부분도 인물들의 입장과 놀이동산이 잘 어울리는 부분이 있다. 또 장소 설정도 좋았다. 극본의 하나하나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에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하다. 아무튼 이 부분은 여러분이 직접 보시길 바란다. 극에서 엄청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 난 엔딩도 이 영화의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하게 끊었다. 덧붙이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많은 분들이 매긴 이 영화의 평점들이 0.5점은 더 깎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이라이트 신에서 단점으로 작용했던 부분이 오히려 장점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게 하고 싶던 말이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감독에게 감사한 마음이었다.
이유가 있었던 칸의 선택
이 영화로 송강호 배우가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7년 역시 송강호 배우가 나왔던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 배우가 여우주연상을 받고 15년 만에 이룬 한국영화의 쾌거다. 이 영화에서 연기 정말 잘했다. 송강호 배우가 과연 어디에선 연기 못했나? 싶긴 하다. 근데 뭐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잖아? 이 작품에서 정말 반짝반짝 빛났다. 9할이 착하고 1할이 악한 인물의 이중성을 묘사하는데 탁월했다. 아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 송강호 배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든 것 같다. 전반부보다 후반부의 상현이 더 빛난다. <밀양>의 전도연 배우처럼 초장부터 끝까지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퍼포먼스가 아니더라도 이 영화의 배경을 만드는 연기였으니 과연 상 받을만하다. 근데 개인적으로는 송강호 배우의 최고작까지는 아니었다.
송강호 배우 이야기는 아니지만 배두나 배우의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에서 느껴졌던 '일본어를 한국어로 옮긴 괴리감'이 유일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배우이기도 하다. 또 뭔가 사연 있는 눈빛이나 후반부에 가서 드러나는 인물의 입장까지 뭔가 신비로운 캐릭터 설정을 잘 소화했다. 그리고 이지은 배우도 잘했다. 무난했다. 의외로 욕을 잘해서 놀랐다. 근데 몸싸움은 잘 못하는 듯하다. 아. 난 이 영화를 보고 아이유의 팬이 되었다.
너무 예쁘.....동수 역의 강동원 배우의 영화 필모그래피에서 이 <브로커>가 가장 기억에 남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유약해 보이지만 깊은 남자의 내면이 느껴지는 연기였다. 잘할 수 있는 연기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오리지널리티에 있었으니 과연 물 만난 물고기인 셈이다.삶이란 게 지겹긴 해도 좋은 게 맞는 것 같아
태어나길 잘했어라는 말, 사실 참 어려운 이야기다. 각자가 갖고 있는 상처는 가지각색으로 다르다. 0대 100쯤의 과실이라면 모르겠지만 우린 인간이기 때문에 조금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 일 때문에 태어나길 잘했다고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은 참 어렵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이럼에도 불구하고 참 이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지곤 한다. 이렇게 서글픈 우리를 <브로커>는 놀이동산으로 데려간다.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또 행복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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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잃은 이야기들의 중첩
정서는 아파트 청약 계약금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한다. 우리는 그 모습에서 아파트에 투영된 시대의 욕망을 읽어내야 할까? 아니면 정서가 비정규직 디자이너로 일하며 뱀파이어 웹툰을 그리는 데서 우리 시대의 불합리한 계급 구조와 자아실현의 관계에 질문을 던져야 할까? 정서가 외도로 이혼해 다른 가정을 꾸린 아버지와 재회해 가까워지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어떤가. 우리는 여기서 질긴 혈연의 의미를 곱씹어야 할까?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문득 마음에 들어오는 이복동생과의 관계에서는 자매애의 새로운 토대를 발견해야 할까? 결혼을 앞둔 남자 친구와의 사랑이 아파트 계약 성사 여부에 오락가락한다는 데서는 사랑의 조건을 질문해야 하는 걸까? 이혼 후 딸을 홀로 키운 어머니가 정서와 맺는 관계는 또 어떤가? 아니면 무엇보다 이 거대한 여정을 모두 거친 후 주인공이 맞이하게 될 성장에 집중해야 하는 걸까?
〈은빛살구〉를 보며 도무지 이야기의 결을 종잡기가 힘들었다. 결혼을 앞둔 정서는 비정규직 디자이너로 일하며 웹툰을 그린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지만 계약금이 없다. 어머니는 정서에게 오래전에 외도로 가정을 떠난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이 빌려주고 받지 못한 돈을 대신 받아 계약금을 해결하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재혼해 아이까지 낳고 잘 살고 있다. 운영하는 횟집도 문전성시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은 딸이 반가운 기색이다. 이복동생도 은근히 정서를 따르며 살갑게 군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른 속셈과 비밀, 오해를 불러일으킨 동생과의 해프닝 등등이 겹치며 정서의 계획은 꼬여만 간다. 계약금 마련이 어려워지자 정서는 점점 초조해지지만 남자 친구는 속도 모르고 엉뚱한 짓만 반복해 그녀를 화나게 한다. 하필 그때 옛 연인이 등장해 정서의 마음이 흔들린다. 엉망진창으로 마무리된 여정 후, 회사에서는 ‘정규직 계약’을 빌미로 정서를 못살게 군다. 결국 정서는 은근히 혹은 대놓고 자신을 옥죄어 오던 것들과 단절하고 자신의 웹툰 속 최상위 포식자 ‘뱀파이어’가 되어 결연한 표정으로 홀로 걸어간다.
결과적으로는 그럴듯한 이야기다. 하지만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이야기는 중구난방이다. 초점이 없다. 사건 전개가 유기적이라기보다는 단절된 채 이어지는 듯한 인상이고, 여러 갈래로 흩뿌려진 이야기 갈래를 꿰뚫는 하나의 주제 의식을 찾기도 어렵다. 어느새 우리는 내내 짜증이 나 있는 정서의 감정에 물들고야 만다.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의 변화와 사건의 연쇄 속에서 정서의 감정은 관객의 감정이 된다.
배우들의 호연을 고려했을 때 아쉬운 일이다. 정서를 비롯해 그녀의 아버지와 이복동생 등 영화에는 생기와 개성을 갖춘 캐릭터들이 꽤 있다. 이들이 다른 방식으로 만나고 엇갈렸다면 어땠을까. 길 잃은 이야기들의 중첩에서 헤매는 인물들의 고군분투가 못내 아쉽다. 25회 전주국제영화제 수상작(한국경쟁 배우상).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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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시 길 잃은 당신을 위한 영화
호텔방의 커다란 통창으로 시끄럽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도쿄를 한 눈에 담는 주인공 샬롯. 그러한 그녀를 비추는 씬을 극중 몇번이고 반복된다. 빼곡한 빌딩숲 속 도로의 수많은 차와 사람들로 가득 찬 창 밖의 모습과, 창틀에 걸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이 대비되며 그녀가 느끼는 알 수 없는 공허함과 외로움은, 마치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조차 피부로 느껴지는 듯 하다.
각 대학을 졸업해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요즘 필자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녀의 불안에 공감하는 밥의 모습에서는, 가끔은 그 불안과 혼란을 그대로 전부 받아들여줄 수 있고 비록 자신조차 그 답을 다 알지는 못할지라도 "괜찮다. 너는 할 수 있을거다"라 말해주는 정서적 지지의 중요성을 느꼈다.
어쩌면 지금 필자가 가장 듣고픈 말이기에 그럴까.
그가 그녀에게 해주는 말들이, 단순히 나이가 좀 더 많은 인생의 연장자로서 해주는 조언이나 첨언이 아닌
샬롯이라는 사람 자체를 믿는 그의 진심에서 비롯된 일종의 고백들의 나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내내 샬롯과 밥의 감정이 사랑일까 아닐까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키다리 아저씨와 주디일까, 사랑하는 남녀의 모습일까.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사랑에 대한 선호가 없는 개인적인 성향 때문일지 몰라도, 영화를 보는 내내 깊은 우정으로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스시집에서 삐걱대는 마지막 점심을 먹은 뒤 괜시리 어색해진 두 사람이 한밤 중 호텔 비상알람으로 인해 잠옷차림에 가운만 걸친 모습으로 그 누구랄 것도 없이 우스웠던 점심식사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보곤, 필자는 두 사람의 마음이 사랑임을 겨우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이란 그런 거 같다. 확인하려고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말과 마음이 통하는 그런 거 말이다.
오래 전에 보고 묵혀두었던 이 영화가, 지금의 필자에게 너무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Lost in Translation" ,
영화의 원제이다.
마치 통역 오류가 나듯
지금 내 상황을 제대로 된 언어로 설명할 수 없을 것만 같아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나의 생각과 진심을 상대에게 전하기가 어렵다고 해도,
나의 인생을 증명하는 그 통역의 과정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그저 오류일뿐이니까.
오류는 언제는 바로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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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8] 복제인간이 묻는 삶과 죽음의 의미-영화 서복
공유와 박보검 배우가 주연한 영화 서복이 지난 주 개봉했습니다.
불신지옥, 건축학개론을 연출했던 이용주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인데요.
이번에도 드라마적인 이야기가 강한 영화입니다.
복제인간이 등장하기 때문에 SF장르의 표피를 두르고 있고 액션도 가미되어 있는데요.
이 영화는 볼거리 보다는 두 주인공 기헌과 서복의 관계를 통해 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어요.
그래서 다양하고 박진감 넘치는 볼거리를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실망하실 거에요.
그래도 공유와 박보검의 연기가 좋은데, 특히 박보검 배우는 서복과 너무 잘 맞는 연기를 보여줍니다.
자세한 리뷰는 영샹을 참고하세요!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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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4분 44초> 공식 예고편
4시 44분⏰이 되면 공포의 저주가 다가온다 스낵 호러 무비 [4분 44초] 11월 1일 롯데시네마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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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네버 해브 아이 에버 시즌 2> 공식 예고편
[2021년 7월 15일, 넷플릭스 공개]
최고로 힘든 한 해를 보냈다. 이제 보상을 좀 받아야겠지?
인도계 미국인 소녀 데비의 반란.
올해는 학교에서 제일 불우한 애에서, 부러운 애로 신분 상승할 테다!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