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5-01-03 07:46:50
길 잃은 이야기들의 중첩
영화 〈은빛살구〉

정서는 아파트 청약 계약금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한다. 우리는 그 모습에서 아파트에 투영된 시대의 욕망을 읽어내야 할까? 아니면 정서가 비정규직 디자이너로 일하며 뱀파이어 웹툰을 그리는 데서 우리 시대의 불합리한 계급 구조와 자아실현의 관계에 질문을 던져야 할까? 정서가 외도로 이혼해 다른 가정을 꾸린 아버지와 재회해 가까워지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은 어떤가. 우리는 여기서 질긴 혈연의 의미를 곱씹어야 할까?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문득 마음에 들어오는 이복동생과의 관계에서는 자매애의 새로운 토대를 발견해야 할까? 결혼을 앞둔 남자 친구와의 사랑이 아파트 계약 성사 여부에 오락가락한다는 데서는 사랑의 조건을 질문해야 하는 걸까? 이혼 후 딸을 홀로 키운 어머니가 정서와 맺는 관계는 또 어떤가? 아니면 무엇보다 이 거대한 여정을 모두 거친 후 주인공이 맞이하게 될 성장에 집중해야 하는 걸까?

〈은빛살구〉를 보며 도무지 이야기의 결을 종잡기가 힘들었다. 결혼을 앞둔 정서는 비정규직 디자이너로 일하며 웹툰을 그린다.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지만 계약금이 없다. 어머니는 정서에게 오래전에 외도로 가정을 떠난 아버지를 찾아가라고 말한다. 자신이 빌려주고 받지 못한 돈을 대신 받아 계약금을 해결하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재혼해 아이까지 낳고 잘 살고 있다. 운영하는 횟집도 문전성시다. 아버지는 오랜만에 자신을 찾은 딸이 반가운 기색이다. 이복동생도 은근히 정서를 따르며 살갑게 군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만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다른 속셈과 비밀, 오해를 불러일으킨 동생과의 해프닝 등등이 겹치며 정서의 계획은 꼬여만 간다. 계약금 마련이 어려워지자 정서는 점점 초조해지지만 남자 친구는 속도 모르고 엉뚱한 짓만 반복해 그녀를 화나게 한다. 하필 그때 옛 연인이 등장해 정서의 마음이 흔들린다. 엉망진창으로 마무리된 여정 후, 회사에서는 ‘정규직 계약’을 빌미로 정서를 못살게 군다. 결국 정서는 은근히 혹은 대놓고 자신을 옥죄어 오던 것들과 단절하고 자신의 웹툰 속 최상위 포식자 ‘뱀파이어’가 되어 결연한 표정으로 홀로 걸어간다.


결과적으로는 그럴듯한 이야기다. 하지만 결론에 다다르기까지의 이야기는 중구난방이다. 초점이 없다. 사건 전개가 유기적이라기보다는 단절된 채 이어지는 듯한 인상이고, 여러 갈래로 흩뿌려진 이야기 갈래를 꿰뚫는 하나의 주제 의식을 찾기도 어렵다. 어느새 우리는 내내 짜증이 나 있는 정서의 감정에 물들고야 만다.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의 변화와 사건의 연쇄 속에서 정서의 감정은 관객의 감정이 된다.
배우들의 호연을 고려했을 때 아쉬운 일이다. 정서를 비롯해 그녀의 아버지와 이복동생 등 영화에는 생기와 개성을 갖춘 캐릭터들이 꽤 있다. 이들이 다른 방식으로 만나고 엇갈렸다면 어땠을까. 길 잃은 이야기들의 중첩에서 헤매는 인물들의 고군분투가 못내 아쉽다. 25회 전주국제영화제 수상작(한국경쟁 배우상).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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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망무제(一望無際)
구구절절히 설명하면 재미가 없다. 또 과하게 친절하면 매력이 없다. 왠지 모르게 이성관계에서 적용되는 이론을 꺼내오고 싶어진다. 과연 배때지가 불러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네 연애나 제대로 하고 이런 문장을 쓰라고 하면 사실 할 말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간관계에도 적당한 선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던 말이지만 요즘은 그 말이 맞다고 느꼈다. 오히려 아무 연락도 안 하고 지내야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커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것 같다. 누군가가 정말 좋았다가도 ‘별 쓰잘데기 없는 소릴 하네’라는 생각이 들면 멀어지게 된다. 너무 많이 말하면 다 알아서 상상력이 줄어드는데, 적게 알면 그만큼 사람이 생각할만한 건덕지가 넓어져 관계를 오래 유지하게 된다. 그래서 생각하게 만드는 결말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는 경우가 많았나보다. 한 유령이 있다. 유령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다. 이 유령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마음을 한번 열어보자.
간단하고 단촐하게
<고스트 스토리>는 살아있는 사람에 관한 영화다. 루니 마라와 케이시 에플렉이라는 할리우드의 빅 네임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근데 제작비는 10만 달러로 초초초 저예산 영화에 속한다고 한다. 이런 초저예산 영화의 특성만큼이나 줄거리는 소박하다. C와 M은 다정한 신혼부부다. 근데 갑자기 남편 C가 교통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M는 혼자 남겨졌다. 그렇게 C가 떠난 빈자리를 감당하며 일상을 보낸다. C는 이 빈자리를 조용히 관망하기만 한다. 유령이기 때문에 말도 무엇도 할 수 없다. 그가 떠난 빈 집에서 파이를 먹거나 사람들을 만나는 등 상처가 아무는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다. M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이내 집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삿짐을 준비하는걸 전부 마무리한 M. 집을 떠나며 무언가 쪽지를 쓰고 벽에 묻는다. 유령이 된 C는 M이 떠난 후 벽을 열심히 파서 쪽지를 보게 된다.
줄거리를 쓰기에 간단한 구성이다. 그 덕에 영화는 딱 두 가지 상황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C와 M이 부부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C가 세상을 떠나고 M을 지켜본다는 것이다. 이 구분은 유령이냐/유령이 아니냐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안에서 중요한 건 M이 유령이 되고 난 후다. 이 작품은 M의 사후를 조명하는데, 이 과정이 영화라고 할 것도 없이 굉장히 심심하다. 솔직히 루니 마라가 파이 먹는 걸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가 파이를 먹는 건 새삼 놀랄 일이 아니다. 파이 먹는 게 재미있는 분들은 유튜브에 '먹방' 검색하고 아무 영상이나 재생하는 것이 더 도움 될 것이다. 별 것 아닌 일상 속의 시간까지 조명하는 이 영화다. 영화는 M의 시점에서 C를 구경한다. 다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구경만 하는 것이다.
떠나간 이가 느낄 감정들에 대해
누군가의 곁을 떠난 우리. 떠난다는 건 허무함과 우울함의 연속이다. 이를 수식할 수 없을까? 아니다. 무슨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혼자가 된다는 것은 이 영화와 같이 조용하다. 바쁘게 사는 것이 그 누군가를 떠나보내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란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바쁘게 보내려고 한다. 치열했던 일상이 끝났다. 하루를 마치고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눕는다. 그러면 알게 된다. 문득 혼자라는 걸. 난 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사람의 존재는 내 생각보다 컸었다. 그러면 무슨 행동에 전제조건이 붙게 된다. 어떤 일을 ‘그걸 이겨내기 위해’ 했었던 만큼 그 인물이 머릿속에 강하게 남는다. 그러면 일상 속에서 타인의 흔적이 강하게 박혀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라고 파이를 혼자 먹고 싶어서 먹고 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익숙한 상황을 즐기지 못한다는 그 지점은 인간에게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되게 별 것 아닌 순간에서 사람은 그제야 떠난 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외로움과 허전함이라는 감정을 묘사할 때 일반적으로 다른 영화들은 주인공이 갖고있는 정서를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보여줬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해피 투게더>의 경우 왕가위는 아휘 캐릭터가 밥알을 하나씩 하나씩 먹는 장면을 통해 주인공의 감정을 드러냈다. 이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반대의 접근법을 가지고 있다. 관객이 인물을 지켜보며 다양한 생각을 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롱테이크와 장면을 길게 늘이는 방식이 그 예인데, 파이를 먹는 신에서 그게 잘 드러난다. 이 장면은 4분 30초간의 한 장면으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부엌 안에 덩그러니 앉아서 파이를 먹는 M. 우리는 그걸 지켜보며 다양한 생각에 빠진다.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한 부엌. 집엔 아무것도 없고 여자 혼자만 있다. 그럼 감정이입이 된다.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고독하다는 걸 나타내는 행위는 없는데도, 인물이 외로움을 느끼는 걸 지켜보는 것이다.
여태까지 없던 방식으로 삶을 돌아보다
우리는 이 외로움이란 정서를 M과 함께 공유하며 각자의 삶을 돌아보게 됐다. 우리, 원래 둘이 있으면 뭐든 함께했다. 혼자서 먹을때도 재미있는 이야기 해 줄 생각에 행복하고, 슬픈 일이 있어도 같이 나눌 이가 있다는 사실에 기쁘다. '함께'라는 사실에 기댔다가 누군가가 나를 떠나면 그 기분을 느낄 수 없다는 씁쓸함에 외로워진다. 근데 인간에게 있어 이 시간은 점점 누적된다. 외로움에 지치면 무엇이든 하기 싫어진다. 근데 지치면 지칠수록 시간은 너무나 길어서 사람이 더 고독을 느끼게 된다. 영화로 돌아가서, 한 장면을 4분 30초 동안 본다고 가정해보자. 외로움을 느끼며 시간이 진짜 안 간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난 이 시간이 안 가는 기분이 너무 싫었다. 함께라면 이 파이가 더 맛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이 고개를 들었다. 금새 잊지 못했던 상처가 생각나 또 외로워진다. 그 외로움에 빠져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시간 더럽게 안 간다. 같이 하면 더 많은 걸 하면 시간을 보냈는데, 혼자서 하니까 눈이 파이 먹는 것에만 집중되는 것이다. 이는 이 정서를 100% 의도한 연출이다. 일부러 잔잔하고 조용하게 설정해서 인물이 느낀 고통을 극대화시켰다. 만약 왕가위라면 나레이션에 색감보정에 이것저것 많이 넣었겠지만 데이빗 로워리 감독은 인물 하나와 파이 하나만으로도 고독감과 외로움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는 상실의 의미와 아름다움
감독이 설정한 이 정서를 함께 느끼다 보면 우린 알게 된다. 내가 사랑했던 타인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타인의 존재감을 느낀다. 삶의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기 때문에 그 사람과 함께 있게 된다. 극 중 예언자의 말처럼 존재를 기억하는 데 있어 흔적 같은 건 필요 없다. 우리를 떠난 사람들의 흔적이 굳이 남지 않더라도 어쩌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아름답다. 완전하게 신선한 방식으로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를 표현했다. 외로움은 우리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이걸 표현한다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명제일지도 모른다. 또 우리는 각자 다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어떤 이가 내 옆을 떠났고 그 인물이 나에게 무슨 느낌을 줬는지는 모두가 다를 것이다. 감독은 이에 대한 공감의 방식으로 색다른 방법을 택했다. 정해지지 않은 유령과도 같은 무언가를 보여줬다. 우리는 이 덕에 각자가 잃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한한 상상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이다. 데이비드 로워리 감독은 인간의 이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해 우리에게 각자가 품고 있는 정서를 드러나게 했다. 일망무제가 딱 적당한 표현이다. 우리 인생은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다. 또 영화와 예술은 이런 우리의 텅 빈 무언가를 꺼내주는 아주 감사한 매개체가 아닐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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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실체가 없는 진실게임
중요한 건 진실이 아니다. 그 진실을 뒤덮은 댓글과 소설가 뺨치는 이들의 음모론들이다. 진실이란 먹잇감을 발견한 동시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하이에나처럼 음지의 작가들이 만들어낸 썰과 밈은 진실을 아예 덮어버린다. 그리고 댓글창 또는 커뮤니티는 그 자체로 그들만의 놀이동산이 된다. 24시간 동안 불빛이 꺼지지 않는 그 놀이동산. <댓글부대>는 허영심 짙은 기자의 눈으로 그곳을 들여다보는 영화인 동시에 이런 사회문제를 넌지시 보여주는 블랙코미디 영화다.
눈은 좋은데, 허영심이 높은 사회부 기자 임상진(손석구)는 대차게 미끄러진다. 한 중소기업 사장의 폭로를 통해 대기업 비리를 고발하는 기사가 오보로 판명 났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취재원은 극단적 선택을 하고, 그 즉시 임상진은 기레기로 낙인찍히며 정직당한다. 6개월 후 복직은커녕 1년 넘게 죽은 듯이 사는 그는 다시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지만, 어디 세상이 뜻대로 되나.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SNS로 메신저 하나가 도착한다. 그동안 자신이 온라인 여론조작을 해온 팀알렙의 멤버고, 그 문제의 기사가 오보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그 즉시 만남을 가진 상진은 뜻밖의 진실을 듣게 된다.
<댓글부대>는 황정민 주연의 <모비딕>, 박해일 주연의 <제보자>처럼 사건을 향한 집념과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이 중요한 작품은 아니다. 앞서 소개했듯, 영화 속 진실은 이야기의 얼개를 여는 역할로만 작용한다. 그 자리를 대신하는 건 음모론. 임상진 기자의 추리와 온라인 여론조작을 했다는 찻탓캇(김동휘)은 물론, 찡뻤킹(김성철), 팹택(홍경)의 이야기다. 실제 있을법한 온라인 여론전을 수면위로 올린 영화는 이들이 벌이는 작업 과정을 지켜본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탄생과 성장, 행동, 그리고 그 결과까지 여론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지며 소멸하는지를 관객 스스로 살펴보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름 모를 다방에서 만는 찻탓캇의 이야기는 임상진을 통해 관객에게 전해지는데, 그 자체로 있을 법한 일이라고 판단할 정도로 흡입력이 대단하다. 그만큼 흥미로운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는 것.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탑 랭크된 글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인데, 임상진 또한 기자이지만 점점 찻탓캇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이를 방증하는 증거를 수집하면서 그를 믿게 된다. 감독은 이런 임상진의 모습을 통해 100% 진실보다 거짓이 섞인 사실이 더욱 진짜처럼 여겨지는 세상, 그리고 진실을 탐문하는 기자들도 그 덫에 빠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오롯이 보여준다.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무엇인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릴 수 없는 현실을 영화로 가져온 것에 있다. 극초반 임상진 기자가 취재한 기사가 진실인지 오보인지, 찻탓캇이 말한 팀알렙이 한 여론 작전들,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 대기업 ‘만전’이 있다는 게 믿을 수 있는 것인지 그 모호함을 유지한다. 한 번쯤은 삐끗할 수도 있는 이 줄타기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유지되는데, 이로 인해 극의 긴장감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더 나아가 무엇을 믿고 걸러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이는 영화가 끝까지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부분을 우직하게 밀고 나가 후반부 모호한 결말로 끝맺음을 내는 것에 호불호가 갈리지만, 영화 자체가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극명하게 가르는 작품이 아니기에 충분히 이해되고, 장점으로까지 읽힌다.
이런 고도의 줄타기를 가능하게 한 건 손석구는 물론, 김동휘, 김성철, 홍경 등 주요 인물들의 연기 덕분이다. 손석구는 영화의 안내자인 동시에 댓글부대가 판치는 세상에 점점 빨려 들어가는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연기한다. 김동휘, 김성철, 홍경은 한 팀인 동시에 서로를 견제하는 인물처럼 보이지 않는 선과 거리를 두며 연기하는데, 그 자체로서 긴장감을 유발하며 멋진 앙상블을 이뤄낸다. 손석구는 말해 뭐하나. 김동휘, 김성철, 홍경은 앞날이 더 기대된다. 여기에 장강명 작가의 동명 소설을 각색하며 영상화한 안국진 감독은 영화가 가진 아무말 대잔치 격인 이야기를 정립하고 흥미롭게 잘 엮어내며 멋진 연출력을 선사한다. 억지로 매듭짓지 않고 열린 결말을 제시하며 판단을 관객에게 내미는 그 솜씨도 탁월하다.“댓글부대를 절대 악으로 다루고 싶지 않았다.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소비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불가피한 공생관계가 형성되는지 기자의 시선에서 조망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
인터뷰를 통해 안국진 감독은 현시대의 세태를 오롯이 보여주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처럼, <댓글부대>는 뭐든 이슈가 되면 최고라는 탈진실 시대를 보여주는 것에 있다.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 속 누군가는 그것에 좌지우지되고, 누군가는 그것을 엔터테인먼트적으로 받아쳐 내는 요지경 같은 세상 속에서 영화는 시의성 있게 이 부분을 잘 담았다. 그리고 과연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런 점에서 임상진 기자의 마지막 행동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진제공: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평점: 3.5 / 5.0
한줄평: 진실의 실체가 없는 진실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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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다시 봄이 빼앗기지 않기를
영화 '서울의 봄'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이상화 시인의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가'가 떠올랐다. 일제강점기에 쓰인 저항시로 알려져 있긴 하나, 영화 속 내용에 대입해도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듯한 느낌을 줬다. 시대만 다를 뿐 우리가 빼앗긴 것이 비슷해서였던 것 같다.
'서울의 봄'은 10.26 사태 이후 유신체제가 붕괴되고 찾아온 서울의 봄, 그리고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났던 1979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역사가 스포'이기에 이미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고 이 영화가 어떤 스토리인지는 조금만 찾아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하지만 궁금했다. 김성수 감독이 실화 바탕으로 제작한 '서울의 봄'을 통해 관객들에 보여주고 싶은 게 무엇일까.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든 '서울의 봄' 안에서 실존 인물의 이름을 그대로 살린 건 박정희 전 대통령뿐이다. 하지만 당시 사건에 책임 있는 인물들은 이름만 살짝 바꿨을 뿐 그대로 박제한다. 모두가 다 아는 전두광(황정민)의 비주얼이나 육사 동기이자 친구인 노태건(박해준)과의 대화에서 묻어 나오는 대표 어록들이 강렬하게 박힌다.
특히 김성수 감독과 '서울의 봄' 제작진은 전두광을 필두로 한 조직 하나회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당시 적과 아군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12월 12일 그날의 혼란을 가중시킨다. 또 엔딩에서 하나회의 단체사진을 박제해 서울의 겨울을 몰고 왔던 장본인이 전두광 한 명만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들은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고 자축하기 위해 남겼겠으나, 후세의 사람들은 이를 머그샷으로 기억한다.
하나회뿐만 아니라 1979년 12월 12일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또 다른 이들도 조명한다. '별들의 잔치'임에도 장성들의 뒷목 잡게 만드는 무능함, 악몽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싸우려고 했던 이들을 정치색을 넣지 않고 드라이하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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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치 않는 진실 위로 쏟아지는 새로운 조각들
스틸워터 (Stillwater, 2021)
개봉일 : 2021.10.06 (한국 기준)
감독 : 토마스 맥카시
출연 : 맷 데이먼, 아비게일 브레스린, 카일 코탄, 디애너 듀나건, 로버트 피터즈
변치 않는 진실 위로 쏟아지는 새로운 조각들
올 10월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두근거리는 달이다. <듄>, <베놈>같은 많은 영화팬들이 기대하고 있는 영화와 함께 사랑하는 배우 맷 데이먼의 영화가 2편이나 개봉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그린나이트>를 보며 시대극의 새로운 매력을 느끼고, 개봉 소식이 들리자마자 쭈욱 기다렸던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그리고 지금 후기를 쓸 이 영화 <스틸워터>가 2주의 텀을 두고 연달아 개봉하다니. 거의 한 달 내내 영화관에서 맷 데이먼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득 담고, <포드 V페라리> 이후로 거의 2년 만에! 스크린에서 맷 데이먼을 만났다.
<스틸워터>는 함께 사는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고향 땅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도시의 교도소에 갇힌 딸의 무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다. 실제로 유학 중 살인 혐의를 받아 4년간 복역했던 아만다 녹스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탄생한 이 영화는 추리 영화이자 주름진 가족 영화, 그리고 아버지로서, 온전한 나로서 성장을 거듭하는 주인공의 성장 영화다.
진실을 쫓는 발걸음
마르세유라는 여유롭고 맑은 도시 속에 똑-떨어진, 이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이방인 빌 앨리슨은 딸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적은 편지를 읽고, 딸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말도 통하지 않는 도시와 차가운 시선들에 맨몸으로 부딪힌다. 견고하게 짜여져있던 ‘유죄’라는 벽에 조금씩 금이 가는듯 보이더니, 언제부턴가 새로운 사건의 조각들이 빌의 머리위로 후두둑 떨어지기 시작한다.
언제나 내 딸은 무죄일 거라고 믿었지만 제대로 된 증거가 없어 교도소 안에 갇힌 딸을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 아버지 빌은 이제야 정말 아버지다운 일을 할 시점이라고 느꼈는지, 아니면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건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건의 실마리를 붙잡는다.
완전한 진실보단 나와 우리의 평화를 위해
<스틸워터>는 앨리슨이 연루된 사건의 진실과 분명한 선과 악의 구분보다는 빌이 바라는 평화. 즉, 이 부녀 사이의 진전과 아버지의 원초적인 부성애에 집중한다.
고강도의 육체 노동직을 소화하며 어느새 거친 얼굴을 갖게 된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딸. 고된 하루를 다시 버티기 위해 손대선 안될 영역에 기댔던 아버지와 그런 그를 증오했던 딸. 사랑하는 딸을 지키지 못했던 아버지와 최대한 멀리 떠나고 싶었던 딸.
앨리슨의 바람대로 두 사람은 미국에 있는 스틸워터(고향)와 프랑스의 마르세유에서 각자의 이유로 발이 묶인 채 긴 시간을 보낸다. 빌은 지금껏 무력하게 딸의 죄를 함께 지고 살아왔지만, 이번엔 정말 딸을 구해내겠다고 이제는 무능력하고 믿지 못할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내 딸과 우리를 위해서라면 누가 범인인지, 어떻게 이 사건을 풀어가야 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앨리슨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할 뿐이다.
맷 데이먼의 새로운 매력을 보여주는 캐릭터, 빌
주인공 ‘빌’을 맡은 맷 데이먼의 우직한 연기가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거칠지만 그렇다고 투박하지 않게 깊은 감정선을 파내려 가는 그의 연기와 감정의 흐름을 든든히 떠받쳐주는 멋진 목소리에 완전히 홀려버렸던 시간이었다.
130여 분의 러닝타임과 앨리슨의 사건, 마르세유에서 만난 버지니와 마야와의 에피소드를 숭덩숭덩 썰어놓은 이야기의 흐름에 다소 지루함을 느꼈다는 후기도 있었지만, 빌의 심경 변화와 앨리슨의 사건을 함께 풀어가려면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앨리슨의 사건만을 다뤘다면 ‘빌’이라는 캐릭터가 이만큼 빛나지 못했을 것이다.
실수와 후회를 잔뜩 쌓은 아버지, 아버지를 미워하지만 그 밖엔 믿을 사람이 없는 딸. 그리고 낯선 나라에 떨어진 두 사람의 조력자가 되는 소중한 인연들과 이방인을 차갑게 비웃는 차별적인 시선들. 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거리를 넓히고 싶었던 부녀의 틀어진 사이, 잘못된 사회의 차별과 시선, 잘못된 사랑과 극단적인 선택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사건의 전말, 빌과 앨리슨이 앞서 풀어내지 못했던 마음들을 함께 풀어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힘차게 파보길 추천한다.
스틸워터 시놉시스
진실을 파고들수록, 비밀은 깊어진다
친구를 살해한 혐의로 감옥에 갇힌 딸의 무죄를 입증할 마지막 기회를 위해 나서는 아빠 '빌'
사건의 실체에 가까워질수록 예기치 못한 사실을 알게 되는데…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아버지의 조금 늦은 부성애
빌은 아내가 자살한 후 일과 술, 약에 홀려 긴 세월을 보낸다. 앨리슨을 보살펴준 건 빌의 어머니 샤론이었고, 그는 약 때문이었는진 몰라도 경찰에 한 번 잡혀갔던, 그리 아름답지 못한 과거도 갖고 있다. 빌이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하자 샤론과 앨리슨은 술이나 약에 취한 상태냐고 묻는다. 지금껏 빌이 이들에게 어떤 가족이었는지, 이 대사에서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빌도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아니란 걸 안다. 그래서 계속 일자리를 유지하려 노력하고, 술을 끊고, 아주 멀리 떨어진 도시 마르세유까지 앨리슨을 만나러 간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아빠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딸의 진심을 아주 직관적으로 듣게 된다. 그는 그간의 실수를 만회하려 노력하지만 계속 꼬여버리는 사건 앞에서 짧은 절망을 느낀다. 하지만 아버지를 제외하면 기댈 곳이 없는 딸 앨리슨과 자신을 마치 아버지처럼 따르는 마야를 보살피며 조금 늦게 발현된 부성애를 불태운다. 빌은 앨리슨이 좋아하는 색과 옷 스타일 같은 작은 정보 하나조차 모르고 있는 아버지였지만, 그가 늦게나마 태워낸 부성애는 거짓이 아니었다.
간절함에 밀려 틀어진 방향성
‘어떤 방식을 써서든 앨리슨의 무죄를 입증하겠다.’는 게 빌의 최종적인 목표다. 빌은 버지니의 도움을 받아 파티가 있었던 바의 사장과 전직 경찰을 만나고, 위험한 동네인 칼리스테를 휘젓는다. 그리고 끝내 범인으로 추정되는 아킴을 지하실에 가두게 된다.
버지니는 아무 아랍인이나 잡아넣으라는 바 사장을 보고는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몸서리를 치며 빌과 잠깐의 대립구도를 만든다. 그 상황에서도 빌은 ”그저 내 딸을 위한 일“이라며 고집을 꺾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빌이 칼리스테에서 좌절을 한 번 맛보고 버지니와 마야의 집에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결과만을 향해 돌진하던 걸음을 좀 늦췄나 싶었는데, 그는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아킴을 보자마자 다시 방향성을 꺾어 맹렬한 추적을 시작한다.
온전한 해결법이 아닌 걸 알면서도,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결국 앨리슨의 무죄는 입증되었지만 잘못된 방향성을 선택한 빌은 다시 하나의 사랑을 잃고 만다. (사실 내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게 부모의 마음이니 그의 선택을 질타할 생각은 별로 없다. 그래도 내 자식은 지켰으니까..?)
가난한 학생과 부자 학생
<스틸워터>는 딸의 무죄를 향해 달리는 아버지의 발걸음을 중심에 두고, 사건의 일부 조건들을 겉으로 떼어내 사회에 만연하게 일어나고 있는 인종차별적 행동들과 편견들을 이야기한다.
아킴이 살고 있는 동네 칼리스테는 마약거래가 빈번히 일어나는 치안이 좋지 않은 곳이다. 아킴은 조금 포장하자면 거친 동네, 나쁘게 말하자면 버려진 동네에 가까운 그곳에서 살아온 아랍인 청년이다. 아킴을 찾기 위해 방문했던 바의 사장은 아랍인 학생들을 보고 원숭이 놈들이라 칭하고, 누구를 감옥에 잡아넣든 어차피 언젠가 죄를 지었을 것이라며 차별적인 말들을 뱉어낸다.
앨리슨의 주변인이었던 교수 또한 앨리슨이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잘 살아온, 교육받은 학생이라 생각하고 앨리슨의 연인이었던 아랍계 학생 리나를 가난한 학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둘의 사이를 애초에 어울릴 수 없었던 사이라 단정 짓는다.
빌은 시추기의 등장으로 당장 밥벌이가 어려워진 상황에 처해있으며, 앨리슨이 어렸을 때 또한 항상 땅굴을 파며 어렵게 생활을 이어왔다. 미국 출신 백인이라는 딱지에 따라붙는 카우보이라는 조롱과 혼자 잘 살아온 이기적인 놈이라는 편견은 칼리스테에 방문한 빌을 위험에 빠트리기도 한다.
여러 인물들의 대사 속에 은근하게 녹아있던 차별과 편견, 그리고 그에 따른 위험요소들에 불편함을 느끼는 순간이 꽤나 많았다.
”진실은 없어요. 이야기뿐이죠.“
결국 이 사건의 마무리에 진실은 없이 떠도는 이야기와 결과만 있을 뿐이다. 리나는 살해당했다. 하지만 앨리슨이 죽인 건 아니다. 앨리슨은 벗어나고 싶다고만 이야기했지 리나를 살해한 적은 없다. 이 말들은 진실이긴 하다. 하지만 다른 진실의 조각들은 조용히 묻혀버린다.
뒤이어 어떤 이의 흔적이 나왔다. 앨리슨은 진범이 아니다. 등등 여러 이야기가 떠돌았지만 진실은 밝혀지지 않는다. 당사자들만 알고 있을 뿐.
스틸워터로 돌아온 빌은 스틸워터의 모든 게 달라 보인다고 말한다. 사실 변한 건 없는데, 그의 눈엔 모든 게 달라 보이는거다. 묻혀있던 진실이 전부 밝혀진 건 아니지만 앨리슨이 아닌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얼핏 모든 게 뒤바뀐 것처럼 보이는 이 사건처럼 말이다.
바뀐 건 없지만 바뀌어버린 사건. 무거운 사건을 겨우 들어옮겨 맞이한 이 결말이 마냥 시원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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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몰랐던, 그래서 우리 모두 영원히 모르는 괴상함
엔딩 크레딧이 올라올 때, 극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어..?" 하는 비슷한 신음을 내뱉었다. 나도 물론 그중에 한 명이었다. 좀 더러운 표현일 수도 있지만, '뭐 누다가 끊긴 느낌'이랄까. 뭔가가 시작될 것 같은 때에 허무하게 끝을 맞이하는 기분이 들었다.
영화 [괴인]은 내가 보았던 그 어떤 영화보다 호흡이 길었다. 가장 길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계단에 가는 씬을 찍는다고 가정하면, 침대에서 주인공이 일어난 후 계단을 모두 오르는 소리를 다 들려준 후에 장면이 전환되는 식이다. 그런데 심지어 계단 꼭대기에서 기다리고 있던 앵글이 주인공이 모두 올라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가 내려갈 때까지 다시 기다린다.
이건 아마 화려한 액션이나 판타지에 익숙한 사람, 혹은 그것을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전부 담아냈기에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을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감독이 필름을 거의 안 버리고 다 썼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홍은 여러 가지 모습을 가졌다.
친구들 앞에서는 브랜드 옷을 걸치고 '네가 무슨 고생을 아냐', '언제까지 월급 받으며 살 거냐', '나는 하루 일당이 40만 원이다' 등등, 과도하게 자신을 뽐내고 잔소리를 줄기차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마트에서는 뒤에 줄 선 임산부에게 순서를 양보하기도 하고, 집주인과 있을 때는 조금 주눅 든 모습이기도 하며, 가족 앞에서는 자신의 일에 대해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등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문득 INFJ가 생각났다. 인프제는 흔히 '가면'으로 대표되는 MBTI이다.
인프제의 특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여러 개의 가면을 마음속에 걸어두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바꿔 낀다. 그래서 종종 인프제를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다. 누군가는 가면을 바꿔끼는 것이 음험하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나를 관찰해서 맞춤형 태도를 갖춘다는 것에 굉장히 감동하기도 한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아냐고? 내가 바로 그 인프제 되시겠다.
인프제를 대표하는 말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을 뽑으라면, '인프제는 히틀러이면서 동시에 예수이기도 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문하고 싶다. 우리 모두가 그렇지 않으냐고. 우리 내면에는 천사와 악마가 늘 공존하지 않던가. 당장 눈앞에 무거운 리어카를 끌고 가는 노인이나 좁은 골목에 떨어진 만원 지폐가 보인다면 내면의 소리가 부딪히며 갈등을 일으킬 것이다. 우린 그중 한 가지를 선택할 뿐이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됩니다.*
"당신도 나처럼 이상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기홍은 '괴인'이라는 제목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괴인이다. 괴이하고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을 더 많이 찾게 되는 그런 생명체. 그런 생명체들이 부딪히고 접촉하면서 세상에는 독특하고 별난 사건들이 만들어진다. 바로 이 영화처럼.
기홍은 자신의 차 위로 떨어진 범인을 우연히 찾아낸다. 범인은 집이 없어 길을 떠도는 소녀, 하나. 성인이라곤 하지만 이제 겨우 스무 살을 넘겼을까, 기홍은 안타까운 마음에 수리비를 사양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집주인 정환의 부추김으로 그녀를 집에 초대해 밥을 먹게 된다. 술을 마시고 밤늦게 집으로 하나를 돌려보내는데, 기홍은 밥값을 쥐여주며 택시를 태운다. 그렇게 모든 사건이 끝난 듯싶었다.
술 한 잔 더 하자고 정환에게 권유했지만 퇴짜를 맞은 아내 현정. 그녀는 별안간 남은 술을 들고 기홍을 찾아와 방으로 밀고 들어온다.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아쉬운 마음에 밖으로 나선다. 하필 그때, 돈을 돌려주러 온 하나가 집 문을 두드려 잠에서 깬 정환. 그리고 전화를 받지 않는 두 사람. 그렇게 영화는 또 다른 사건의 시작을 향해 흘러가며 끝이 난다.
우리 삶을 영화로 옮기면 영원히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연결된 사람에게서 또 다른 사람으로, 시선을 바꿔가며 새로운 사건은 계속 이어지니까. 그 순간에는 엔딩 크레딧의 존재가 의뭉스럽지만, 막상 돌이켜 보면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결말이었다.
기홍과 정환, 현정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은 우리의 삶을 단면적으로 잘 보여준다.
양쪽에 현관문이 두 개인 전원주택이지만, 실질적으로 안에 들어서면 2층 계단을 통해 서로 집을 오갈 수가 있다. 정환은 거리낌 없이 계단으로 기홍의 방을 들락날락하지만, 기홍은 좀처럼 계단을 이용하지 않는다. 정환이 괜찮다고 해도 현관문을 이용한다.
이어져 있는 것 같지만, 이어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끊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어져 있을 수도 있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 궤변은 하나라는 인물로 하여금 완성된다.
돈을 돌려주러 다시 찾아왔던 하나는 정환에게 부탁해 2층에서 머물게 된다. 아침이 되어 집에 돌아온 기홍이 본 것은 2층에서 자고 있는 하나의 모습이었다. 기홍이 그토록 끝끝내 잇고 싶지 않았던, 멀리하고 싶었던 집주인 부부와의 인연은 하나를 통해 억세게 매듭짓게 된다. 우리네 삶은 종종 이토록 허무하게, 부정해왔던 것을 마주하기도 한다.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던 사람이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이벤트를 만들어주기도 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금방 떠나가 버리는 경험을 하곤 한다. 초연해지려고 애쓰지만 그런 순간마다 예측할 수 없는 반전에 놀라움을 머금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영화 [괴인]은 단순히 단어나 문장으로는 정의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애쓴다. 비록 보는 순간에는 황당하지만, 다 보고 나면 계속 곱씹게 되는, 묘하게 빠져드는 영화였다.
* 이 리뷰는 씨네랩의 초청을 받고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여 작성된 주관적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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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두 번째 미래
7★/10★
〈썸머 필름을 타고!〉는 청년/성장영화에 SF 요소를 곁들인 영화다. 고등학교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주인공 ‘맨발’은 심혈을 기울여 시나리오를 집필한 사무라이 영화 〈무사의 청춘〉이 촬영 지원작 심사에서 탈락해 매우 우울한 상태다. 맨발은 자신의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타령만 하는, 이름부터 맘에 안 드는 낯 간지러운 영화 〈사랑한단 말밖에 할 수 없잖아〉에 밀렸다는 게 영 불만이다.
그래서 결심한다. 학교에서 지원받지 못하더라도 자신만의 걸작을 만들어내기로. 맨발은 아르바이트로 촬영 예산을 모은다. 동시에 “너희들의 청춘을 내가 좀 살게”라는 멋들어진 대사로 절친한 친구 ‘킥보드’, ‘블루 하와이’를 비롯한 영화 스태프도 꾸린다. 소리만 들어도 투수의 구질을 알아채는 야구팬 소년은 음향감독, 바이크에 요란한 조명을 달고 다니는 반항아는 조명감독이 되는 식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분명한 애호하는 마음을 가진 청춘의 한 순간이 맨발의 영화로 모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은 배우다. 맨발은 허름한 소극장에서 열린 사무라이 영화제에서 만난 린타로라는 남자를 주연으로 점찍는다. 린타로는 영화 출연을 완강히 거부하지만 맨발의 끈질긴 설득 끝에 팀에 합류한다. 드디어 시작된 촬영. 그러나 현장은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의 연속이다. 열정 충만한 아마추어들이 어설프게나마 어려움을 하나하나 극복해나가는 과정은 이 영화의 큰 재미 요소다. 맨발은 이 모든 순간이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마냥 행복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다. 린타로가 엉겁결에 들려준 이야기 때문이다. 사실 린타로가 맨발의 부탁을 거절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린타로는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서 왔다. 그가 증언하는 미래는 맨발에게 기쁨과 절망을 함께 안긴다. 기쁨은 맨발이 미래에 영화계 거장이 되었다는 데서 온다. 고등학고 영화 동아리에서조차 예산을 지원받지 못했던 맨발이 영화계 거장으로 성장했다니 엄청난 소식이다.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맨발이 거장이 된 미래는 영화가 사라진 시대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는 미래 사람들은 2시간이나 되는 영화를 감상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1분짜리 영상조차 너무 길다. 그래서 몇 초 분량의 쇼츠 영상이 영화를 대체한다. 린타로의 과거 여행은 여기서 시작된다. 영화가 사라진 시대, 거장이 된 맨발의 팬인 린타로는 상영기록은 있으나 필름은 남아 있지 않은 맨발의 첫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시간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영화 촬영이 결국 폐기될 장르의 역사를 쌓는 일일 뿐이라는 데서 오는 허무한 아릿함에 맨발의 고뇌는 점점 깊어진다. 그러던 중 첫 번째 변곡점이 찾아온다. 맨발의 팀이 공유하는 정서가 있다. 사무라이 영화가 경쟁작인 멜로 영화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즉 자신들만이 ‘진짜’ 영화를 찍고 있다는 자의식이 그것이다(이것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맨발의 절친한 친구인 블루 하와이에게는 말 못 할 비밀이 있다. 사실 그녀의 진짜 취향은 멜로 영화다. 맨발과의 우정 때문에 촬영을 돕고 있기는 하지만 그녀는 몰래 로맨스 만화를 보고, 〈사랑한단 말밖에 할 수 없잖아〉 촬영 현장을 궁금해한다. 맨발과 그의 팀이 공유했던 팀 스피릿이 정작 팀원의 실재하는 욕망을 억누르고 있던 셈이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블루 하와이의 솔직한 마음을 알게 된 맨발은 불의의 사고로 촬영에 위기를 맞은 〈사랑한단 말밖에 할 수 없잖아〉 팀에 블루 하와이의 출연을 제안한다. 맨발이 블루 하와이 사건을 계기로 ‘진짜’ 영화, 더 ‘우월한’ 영화 따위는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맨발은 블루 하와이와 〈사랑한단 말밖에 할 수 없잖아〉의 감독에게서 멜로 영화 역시 승부를 다룬다는 사실을 배운다. 어떤 스토리와 장르에 담아내는지가 다를 뿐, 사무라이 영화와 멜로 영화는 승부라는 공통의 주제에 천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맨발은 현실의 경험으로 영화 세계를 확장한다. 그리고 또다시 영화적 깨달음을 현실의 실천으로 전환한다. 한층 성장한 맨발 앞에 두 가지 최종 승부가 기다리고 있다. 첫째는 사라질 운명의 영화를 위한 승부고, 둘째는 린타로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에 관한 승부다.
맨발에게 영화와 현실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 두 승부는 하나의 승부로 결합된다. 맨발은 동아리 발표회에서 한창 무르익은 〈무사의 청춘〉 상영을 중단한다(이 장면은 〈썸머 필름을 타고!〉의 하이라이트이기도 하다). 그러고는 즉석에서 배우들을 불러 모아 디렉팅하며 기존 결말과는 다른 새로운 결말의 영화를 연출한다. 두 사무라이가 적당히 화합하며 공존하는 결말 대신 모든 것을 걸고 결투하는 결말, 즉 진정한 승부로 영화를 마무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맨발의 지시에 따라 즉석에서 바뀐 결말을 연기하는 배우들 그리고 그 과정에 동참하는 관객으로 인해 영화와 현실의 경계에 이어 영화와 연극의 경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가 바로 맨발의 승부처다. 영화가 사라지는 미래를 바꿔보겠다는 다짐, 누군가의 인생을 바꾼 영화가 있다면 영화는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리고 이를 버무려내는 영화의 연극적 연출 말이다. 맨발과 린타로가 검 대신 빗자루를 들고 무대에서 즉석으로 펼쳐내는 연기와 그들의 눈빛은 말한다. 영화가 그리 호락호락하게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코로나 팬데믹 이후, 많은 이들이 극장가의 부활을 이끌 주요 키워드로 4D, 4DX, 스크린X, 아이맥스, 돌비시네마 등의 특수 상영관을 꼽았다. 실제로 화려한 스펙터클을 선보인 영화의 특수 상영관 관람이 고사 직전인 극장의 희망이라는 분석이 쏟아지고 있다. 쇼츠 플랫폼 성장으로 영화의 자리가 위협받고, OTT 플랫폼의 대중화로 ‘극장에서 볼 영화’를 고르는 관객의 기준이 까다로워진 시대에 위기를 맞은 영화 산업이 나아갈 ‘첫 번째 미래’로 화려한 스펙터클을 극대화하는 특수 상영관을 꼽는 분석에는 합당한 데가 있다.
그러나 단일한 미래는 늘 균열의 가능성을 품는다. 모두의 욕망을 충족해주지도 않는다. 마츠모토 소우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썸머 필름을 타고〉를 기획하던 해에 5분, 1분짜리 짧은 드라마 작품 의뢰를 여럿 받았다고 밝혔다. 영화를 찍고 싶었던 감독은 자신의 욕망이 ‘시대에 역행’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하지만 시대의 요구에 발맞추는 대신 영화의 ‘또 다른 미래’에 천착하기로 마음먹었다. 맨발과 마찬가지로 연극적 방법론을 차용함으로써 말이다. 〈썸머 필름을 타고!〉 촬영은 배우, 스태프에게 대략적인 설정만 전달한 후 이후의 전개는 모두 현장의 즉흥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진행됐다고 하는데, 이는 영화보다는 연극에 더 어울리는 현장성과 그로 인한 생생한 감정선이 이 영화를 해석하는 키워드일 수 있음을 가늠케 한다.
마츠모토 소우시 감독의 방법론과 메시지에는 스펙터클의 극대화라는 영화의 첫 번째 미래가 품지 못한 ‘두 번째 미래’가 잉태되어 있다. 쇼츠 영상이 대세가 되고, OTT로 개봉 영화를 곧바로 즐길 수 있는 시대일수록 ‘독립영화’, ‘예술영화’ 등 이른바 비(非)상업영화의 영화관 상영은 중요해진다. 이들 영화는 인물의 감정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등을 긴 호흡으로 전한다. 줄거리만 봐서는 뻔해 보이는 영화라도 숨 죽여 2시간 동안 영화를 따라가고 나면 마치 내가 그 인물이 된 것 같은 진한 감동이 묻어나 ‘평온하고 안전한 세계’에 자그마한 파문이 인다. 즉 이들 영화는 관객에게 자신의 세계관을 설득하기 위해 ‘승부’를 건다. 뉴스의 단신으로 접한다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괴상한’ 존재와 사건들이 인식 가능한 세계 ‘내부’로 진입하는 것이다.
이런 경험을 쇼츠 영상과 OTT에서 맛보기는 어렵다. 우리의 영상 경험이 쇼츠에 익숙해지고, 언제든 끊어 볼 수 있는 OTT에 맞춰질수록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느린 호흡으로 담아내는 영화를 감상하는 일이 더욱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존재가 사실은 우리의 이웃임을, 우리와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임을 자각하게끔 해주는 영화를 포기할 수 없다. 영화관에서만 가능한 2시간의 ‘강제된 감상’이 필요한 이유다. 〈썸머 필름을 타고!〉가 보여준 길, 즉 위기를 맞은 영화에 대한 다소 낭만적인 ‘구닥다리’ 믿음과 연극의 현장성 차용, 그리고 이로써 가능해지는 세밀한 감정 전달은 영화의 두 번째 미래를 위한 최적의 길이다. 10초로 줄이기가 불가능한, 중간에 끊어 봐서는 그 감동을 온전히 느끼기 어려운, 상업영화가 포괄하지 못하는 낯선 울림을 담아내는 영화가 가야 할 길이 여기에 있다.
마츠모토 소우시 감독과 〈썸머 필름을 타고!〉가 보여준 영화의 두 번째 미래는 결코 첫 번째 미래를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세 번째, 네 번째 미래로 밀리는 일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고 오래된 미래’는 영화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비관적 전망에 저항하는 든든한 토대가 되어 영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곁에 오래도록 머물 것이다. 이것이 언젠가 거장이 될 맨발의 첫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김소미, “‘썸머 필름을 타고!’ 마쓰모토 소우시 감독 “좋아하는 마음의 힘!””, 《씨네21》, 2022. 0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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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0
꿀보이스 정재헌 성우님과 함께하는 주토피아 리뷰 두번째 시간!
출연
황보 라이언 정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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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소피의 세계> 메인 예고편
우연히 여행 블로그 속에서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 수영.
그곳에는 2년 전 만난 여행자 소피가 한국에서 머문 나흘의 기록이 있다.
수영은 소피의 일기를 통해 최악의 시기를 버티던 남편 종구와의 일상을 새롭게 바라본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감정과 사실이 이해될, 것도 같다.
소피가 써 내려간 세계 속에서
다투고 울고 웃었던 우리는 어떤 마음을 남겼을까?
2022년 봄에서 2020년 가을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상으로의 여행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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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모럴센스> 메인 예고편
- 색' 다른 그에게 관심이 생겼다 관심가던 그녀가 '색' 달라 진다 취향존중 상명하복 큐티+섹시 로맨스! 넷플릭스 영화 《모럴센스》 2월 11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