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샤2023-05-06 17:02:20
한 번의 날숨만큼 미미한 희망일지라도
영화 <토리와 로키타> 리뷰
희망은 마냥 좋기만 한 것일까? 현재의 어려움을 자신의 힘으로 돌파하려는 의지와 노력 없이 운, 신의 은총, 불가사의한 우주의 기운 같은 막연한 기대에 의지하는 희망은 오히려 맹독이 될 수도 있다. 우리의 영혼과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희망이 현실이 되려면 어떻게든 자신의 힘으로 뭔가 해야 한다.
영화 <토리와 로키타>의 주인공 '토리'와 '로키타'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아프리카의 모국을 떠나 벨기에로 왔다. 그러나 선진국이라는 벨기에에서도 두 사람은 한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암실처럼 어둡고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다. 공황 장애 때문에 약을 먹어야 하는 로키타와 로키타보다 더 어리지만 굉장히 셈에 밝고 긍정적인 토리는 낙담하고 주저앉아 타인의 도움이나 구원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토리에겐 로키타가, 로키타에겐 토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은 한 발 앞으로 내디딜 용기를 얻는다. 두 아이는 함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닌다.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취약한 아이들은 강력한 자석과 같아서 못돼먹은 어른들을 끌어당긴다. 나쁜 어른들은 토리와 로키타에게 마약을 팔게 하고, 로키타의 성을 착취하며, 두 아이의 불안한 신분을 지렛대로 활용하여 둘을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 영화 초반, 토리와 로키타가 함께 부르는 노래의 멜로디는 밝고 경쾌하지만 "아버지가 동전 2개로 산 생쥐를 잡아먹은 고양이를 문 개를 몽둥이로 때리는 사람"이라는 가사는 두 아이를 괴롭히는 어른들처럼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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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 설계도
8★/10★
전쟁 중인 유럽을 탈출해 미국에 도착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가 한 성매매 업소에서 남성 성노동자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난 그런 쪽 아니야’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장면은 그가 훗날 마주할 해리슨의 끔찍한 성폭력을 예감하는 것이 아닐까. ‘이쪽’과 ‘저쪽’의 구획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선언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해리슨에게 강제로 자리를 부여받는 라즐로가 느낄 비감이 도입부의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느꼈다.
재능 있는 유대인 건축가가 이주 후 미국 하층부를 전전하다 한 거부의 눈에 들어 대형 프로젝트를 맡은 후 종내에는 영광을 얻는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우리가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본 이방인의 성공 스토리와는 결이 다르다. 노인이 되어 휠체어에 탄 채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전시에 참석한 그의 얼굴은 피로해 보인다. 라즐로 부부를 떠나 이스라엘로 향한 조카 조미아가 정작 라즐로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삼촌의 업적을 설명하는 대목은 그의 피로감에 공허함을 더한다.
‘성공한 유대인’이 있는 것은 맞다. 그들의 성취는 종종 아메리칸드림의 증거로 전시된다. 그러나 그 성공은 아름답지 않았다. 지적 허영과 과시욕, 속물적 근성의 화신, 즉 가장 미국적인 인물인 해리슨은 라즐로를 자신의 자랑스러운 수집품 정도로 대우하고, 라즐로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술 취한 그를 강간한다. 그는 라즐로에게 “넌 그저 밤거리 매춘부야”라고 말한다. ‘선’을 넘지 말라는 선언이다. 라즐로 프로젝트의 철학과 예산이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자 미국 사회의 주인은 돈이며, 그 돈을 가진 사람은 나라는 점, 즉 자신은 성 구매자이며 너는 성 판매자라는 점을 라즐로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방법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라즐로는 그 충격에 휩싸여 더욱 자신의 예술적 목표(혹은 해리슨의 야망)인 건축물에만 집착하고 자신이 쌓아 올린 건축물에 유폐된 듯 영혼을 강탈당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라즐로는 걸작을 창안했으나 영혼을 상실했고, 미국식 속물주의를 대변하는 해리슨은 사건이 폭로된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며, 늙고 지친 라즐로를 기념하는 행사에서는 과거 그를 떠난 조카가 확신에 찬 얼굴로 숙부의 업적을 칭송한다.
이 영화가 아메리칸드림의 오욕에 관한 문제 제기라는 인상을 받은 건 그래서다. 이 세 사람이 이루는 구도에서는 누구도 온전한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일 수 없다.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으로 예술에 대한 심미안 없이 뭐든 돈으로만 하려는 해리슨도, ‘걸작’을 만들었으나 생기를 잃어버린 라즐로도, 홀연히 등장해 숙부의 성취‘만’ 이야기하며 뒤늦게 자신이 라즐로의 혈육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조미아도.
영화가 한창 건축이 진행 중일 때 고통받던 라즐로를 비추다가 갑자기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노쇠한 라즐로의 얼굴로 점프하는 것은 아메리칸드림에 영광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설계의 일환일 것이다. 사람들은 완성된 건축물만 본다. 그 이면의 설계도를 상상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로 ‘라즐로의 아메리칸드림’에서 완성물이라 할 그의 건축물과 그로부터 피어나는 영광의 순간들을 뺀 채 그 영광의 설계도만 보여준다. 누군가의 장식품으로서만 예술가일 수 있었던 이방인, 그런 이방인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구축되지 않았을 미국이라는 허상, 설계 과정의 문제는 덮고 결과물만 바라보며 찬사를 보내는 사회가 이방인의 아메리칸드림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brutal) 설계도 말이다. 라즐로가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추구하는 브루탈리스트였다는 점은 이 설계도가 품은 역설을 더한층 도드라지게 한다. ‘사람은 죽어도 예술은 남는다’는 통념 혹은 진실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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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규정될 때
‘나’의 정체성이 ‘타자’에 의해 규정될 때
<톰보이>에는 의도적으로 불분명하게 만들어진 지점들이 존재한다. 첫 장면부터가 그렇다. 영화는 '로레'의 뒷모습으로 시작된다. 로레는 차 위로 상반신을 내밀고 팔을 뻗어 바람을 느낀다. 영화의 초반부까지 영화가 로레의 성별에 대해서 관객에게 알려주는 단서는 없다. 관객은 그저 파란색 벽지를 좋아하고, 런닝티와 반바지를 좋아하는 짧은 머리의 아이와 마주할 뿐이다. 로레는 새로 만난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한다. 친구들은 그의 성별을 묻지 않을뿐더러 그의 외형과 이름을 통해 그가 남자라 생각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로레가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했지만, 자기 자신이 남자라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로레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백히 말하자면 로레는 그들을 의도적으로 속인 것이 아니다. 로레는 단지 남자아이처럼 하고 다녔으며, 자신의 이름이 '미카엘'이라고 소개했을 뿐이다.
로레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불분명하다. 어쩌면 로레는 단순히 남자아이들과 놀기 위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리사의 말처럼 남자아이들은 여자라고 껴주지 않기 때문에, 친구들과 놀길 바라는 마음에서 순간적으로 남자 이름을 말한 것일 뿐인데 일이 예상과 다르게 커졌는지도 모른다. 혹은 로레는 정말 남자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동생 '잔'과 목욕한 후, 로레는 그만 씻고 나오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도 욕조에 앉아 잠시 동안 나가기를 주저한다. 욕조에서 일어나서 몸을 타올로 닦으면서도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핀다. 거울을 보며 자신의 등과 팔의 근육을 살피고 침을 뱉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 웃통을 까고 침을 뱉으며 축구를 하는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똑같이 행동하기도 하고, 자신의 수영복을 잘라 남자 팬티 수영복으로 만들어 입기도 한다. 로레가 남자아이처럼 보이도록 행동한 이유는 뭘까. 남자아이들과 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남자가 되고 싶어서였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지점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한다. 로레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는 영화가 중점적으로 다루는 부분이 아니다. 영화는 오히려 그런 로레를 바라보는 '타자'의 시선에 더 관심을 보이며 그 본질에 대해 묻는 것처럼 보인다. 로레는 그를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에 의해 남자아이가 된다. 그가 자신의 성별이 무엇이라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의 외형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된 것이다. 모두가 당연하게 그를 남성이라 여겼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 영화를 카메라의 초점이 두드러지게 찍었다. 카메라가 캐릭터에 초점을 맞출 때 배경은 흐리게 처리되며, 카메라의 초점 이동이 분명하게 드러나 드러내고자 하는 대상을 명확히 비춘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를 보는 관객은 더욱 인물과 인물이 느끼는 감정에 집중할 수 있다. 또한 감독은 이런 촬영 방식과 더불어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모범적으로 만드는 방식을 지양했다. 그래서 주인공 로레를 비롯한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다소 서툴다. 로레의 엄마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아이를 임신하고 아이를 낳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는 아마 로레에게 이전보다 덜 신경 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자신의 아이를 때린 '미카엘'을 찾기 위해 한 아이와 그 엄마가 집으로 찾아온 것으로 모자라, 개학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동네 아이들 모두가 자신의 아이가 남자아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에게 상당한 충격과 당혹감을 안겨줬을 것이다. 엄마는 순간적으로 로레의 뺨을 때리는 과격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다음 날, 로레의 엄마는 로레에게 파란 원피스를 입으라 건네고, 로레가 여자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로레를 억지로 끌고 가던 중에 멈춰 로레에게 이렇게 말한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본인도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서 로레 엄마의 결정은 그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로레는 로레가 때렸던 아이의 집을 들러 로레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린 후, 곧장 리사의 집으로 향한다. 리사는 모든 사실을 듣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로레는 리사의 집에서 뛰쳐나가 숲을 향해 달린다. 숲은 리사와의 추억이 깃든 공간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로레는 입고 있던 파란 원피스를 벗어던진다. 로레가 나무 위에 올려둔 파란 원피스가 카메라에 비춰지고, 로레는 그 자리를 떠난다. 로레는 친구들에게로 간다. 자신이 여자아이라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겁이 나 조심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으며 접근한다. 친구들은 로레를 발견하고 도망가는 로레를 쫓아가 붙잡는다. 남자아이들은 로레가 여자인지 사실 유무를 확인하려 하고, 리사가 그들을 제지하자 여자인 리사가 직접 그것을 하도록 만든다. 그 과정에서 수치심을 느낀 로레는 그 자리를 뛰쳐나간다. 그리고 리사는 로레를 찾아온다. 창밖을 보고 있는 로레의 눈에 나무 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리사가 보인다. 둘은 다시금 서로를 마주한다. 마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같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자못 다르다. "넌 이름이 뭐야?"라는 리사의 물음에 로레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말한다. "로레"라고. 그러고는 살짝 웃는다.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로레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 스스로가 규정한다. 영화는 거기에서 끝나지만 우리는 이들의 관계가 바로 그곳에서부터 비로소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며 이들이 함께 춤출 때 들렸던 곡 "널 사랑해, 언제나(I Love You Always)"가 들려온다. 로레와 리사는 춤을 춘 후 서로를 꼭 붙잡던 두 손처럼 서로에게 의지하며 우정을 계속 키워가지 않을까. 비슷한 상황에 부딪히더라도 로레는 더이상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로레를 사랑해줄 리사와 잔 그리고 엄마, 아빠가 있기에.
* 본 콘텐츠는 브런치 영시코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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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낮에 경험하는 보험사기 스릴러
예상치 못한 반전이 많아서 희열을 느끼며 봤던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뻔하게 흘러가는 것 같다가 한 방을 날리는 작품이었고, 환한 낮에 경험하는 스릴러다 보니 스릴러를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하는 나에게 제격이었던 작품이었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시놉시스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간단한 부탁에서 시작된 간단하지 않은 사건. 멋진 커리어우먼, 매력적인 아내, 아름다운 엄마, 모든 걸 다 갖춘 완벽한 여자 ‘에밀리’가 어느 날 사라진다. 그리고 시체가 발견되는데요. 모든 것이 내 것이 됐다고 생각한 순간, 사라진 에밀 리가 돌아온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인플루언서를 보여주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 속 스테파니는 브이로그 컨텐츠를 만드는 인플루언서로 나온다. 인플루언서가 나오는 작품을 보면 필자가 블로그를 운영하다보니 애정어린 시선으로 보게 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는 인플루언서인 스테파니가 자신의 친구인 에밀리의 실종 사건을 파헤치는데 자신의 브이로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SNS가 이렇게 이용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못했고, 물론 부산경찰SNS가 사람들을 찾는데 많이 활용된다고는 익히 들었지만 살인사건의 용의자를 브이로그로 찾고 경찰 관계자가 아닌 개인이 수사를 하는 모습에, SNS가 참 여러 가지고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파급력이 굉장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귀신은 없는데 소름돋은 1인
영화 속 장면 중 가장 소름이 돋았던 것은 에밀리의 옷장을 다 치우고 스테파니의 옷들로 다 채워넣었는데 그 다음날 다시 애밀리의 옷들이 옷장 속에 다 채워져 있어서 진짜 주스 먹다가 뿜을 뻔했다. 극중 스테파니와 함께 소리를 질렀다. 이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에밀리의 흔적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서 깜짝깜짝 놀랐고, 갑자기 에밀 리가 쌍둥이라고 해서 작가... 천재인가? 하는 생각과 서로를 속고 속이는 계략 속에서 결국 스테파니가 에밀리를 경찰에 넘기는 장면들을 보며 진이 빠질 정도였다. 반전이 적재적소에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고 텐션감이 높아 다른 생각할 틈 없이 영화에 빠져서 볼 수 있었다.
스릴러 보험사기
그렇게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결론적으로는 보험사기구나! 하는 생각에 허탈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보험사기를 소재로 코미디나 범죄물은 만들어도 이렇게 스릴러물로 만들어진 경우는 별로 없어서 색달랐다. 그리고 영화 장면들이 대부분 대낮에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환한 빛 속에서 공포감을 줄 수 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화 <부탁 하나만 들어줘>는 한국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조금 색다른 스릴러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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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 영역과 함께 사라진 시리즈의 매력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타노스로부터 우주를 구한 후 당당히 어벤져스의 일원이자 슈퍼 히어로가 된 '스콧 랭(폴 러드)'. 그는 앤트맨으로서의 업적을 책으로 써내는 등 화려한 셀러브리티의 삶을 누린다. 그러던 어느 날, 스콧은 가족 식사 자리에서 깜짝 놀랄 소식을 듣는다. 딸 '캐시 랭(캐서린 뉴트)'의 주도 하에 파트너 '호프 반 다인(에반젤린 릴리)', 그리고 은사인 '행크 핌(마이클 더글라스)'이 미지의 세계인 양자 영역에 신호를 보낼 수 있는 기계를 개발했다는 것.
하지만 스콧보다 더 놀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수십 년을 양자 영역에서 보냈다가 간신히 지구로 되돌아온 '재닛 반 다인(미셸 파이퍼)'. 그녀는 기계를 보자마자 당장 파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하지만 그녀도 기계가 오작동해 앤트맨 일행이 양자 영역에 빠지는 걸 막지는 못했고, 그들은 양자 영역을 돌아다니며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다. 그 사이, 양자 영역에 갇혀 있던 '정복자 캉(조나단 메이저스)'도 유배지에서 탈출할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하면서 앤트맨 일행을 위기에 빠트린다.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설, 드라마 등이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당연히 매력적인 캐릭터, 뛰어난 기술력, 탄탄한 시나리오 등 여러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그럴듯함'이 있어야 한다. <스타워즈> 속 타투인이나 나부 같은 외계 행성이든, <반지의 제왕> 속 중간계든 그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듯 느껴져야 한다. 이는 CG와 같은 시각적인 요소만 뜻하지 않는다. 영화가 디테일함으로 가득할 때, 비로소 실제로 주인공이 살아 숨 쉬는 시공간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빌뇌브 감독의 <듄>에서 주인공인 폴 아트레이스(티모시 샬라메)의 대련 장면을 보자. 이 장면 속 주인공들은 일반적인 액션과 달리 찌르거나 베려고 하는 순간 속도를 급격히 늦춘다. <듄>의 세계관에서 사람들은 일정 속도 이상이면 무조건 튕겨내는 방어막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호그와트, 버로우, 다이애건 앨리, 마법 정부 등에서 마법사들이 어떻게 생활하고 행동하는지를 세밀히 보여주면서 숨겨져 있던 마법 세계의 매력을 각인시킨 바 있다.
즉, 사람들의 행동 하나, 말 하나에도 이유와 맥락을 불어넣을 때 관객들은 비로소 가상의 공간을 실제처럼 인식한다. 달리 말해 그 이유와 맥락을 보여주지 못하면, 아무리 화려한 그래픽과 특수 효과를 동원해 새롭고 다른 걸 보여준다고 해도 가상공간은 진짜가 될 수 없다. 이는 MCU 페이즈 5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 <앤트맨 앤 와스프: 퀀텀매니아>(이하 <앤트맨 3>)가 공허해 보이는 결정적인 이유다.
양자 영역을 배경으로 모험을 펼치는 <앤트맨 3>는 시리즈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다. 본래 <앤트맨> 시리즈는 아기자기한 하이스트 영화이자 유쾌한 가족 영화였다. 주인공인 스콧 랭의 특징 때문이다. 우선 스콧은 도둑이다. 애초에 행크 핌의 집에 강도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스콧은 앤트맨 슈트를 입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매 작품마다 앤트맨은 항상 어딘가에 침투하고, 무언가를 훔친다. 1편에서는 어벤져스 기지에 침투했다가 팔콘을 만난다. 옐로우 재킷과의 마지막 전투에서도 생각한 것보다 더 몸 크기를 줄여서 상대의 슈트에 침투해 문제를 해결한다. 2편에서는 양자 영역에 잠시 들어가 빌런이었던 고스트를 위한 치료 입자를 가져오기도 한다. <시빌 워>에서도 스파이더맨이 잠시 뺏은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를 다시 되찾아오기도 하고, <엔드게임>에서는 아예 시간을 강탈하자는 계획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한편 그는 지극히 소시민적이다. 앤트맨 슈트를 벗은 그는 그저 캐시와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신경 쓰는 평범한 사람이다. 감옥에서 출소한 그는 범죄에 손대지 않는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다시 도둑질을 한 것도 캐시를 만나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비록 도둑질을 하다가 행크 핌에게 붙잡히기는 했지만, 행크의 요구대로 앤트맨이 된 것도 다시 한번 범죄에서 손을 떼고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즉, 기본적인 정의감은 지니고 있지만, 우선 가족부터 챙기고 지키려는 마음이 더 큰 바로 그 지점이 앤트맨이라는 히어로만의 매력인 셈이다. 그래서 <앤트맨> 시리즈는 항상 가족 영화로서의 분위기를 공유한다. 1편에서는 스콧과 캐시의 만남만큼이나 행크와 호프 부녀의 화해도 중요한 소재였다. 2편은 아예 행크의 아내이자 호프의 어머니인 재닛을 찾는 이야기가 중심 스토리였다.
그런데 <앤트맨 3>의 분위기는 이전 작품들과 다소 다르다. 유쾌함 대신 진지함이 가득하다. 막중한 임무를 맡은 까닭이다. 이번 작품은 <어벤져스: 캉 다이너스티>와 <어벤져스: 시크릿 워즈>로 나아갈 페이즈 5의 시작을 알리고, 타노스의 뒤를 이을 빌런 캉을 소개해야 한다. 그래서 <앤트맨 3>는 이전까지 맛보기로 등장했던 양자 영역을 활용해 본격적으로 스케일을 키운다. 작중 양자 영역의 묘사를 보면 이는 나름대로 흥미로운 설정이다. 비록 물리적으로 지구 외부에 있는 우주는 아니지만, 외우주에 못지않은 스케일과 다양성을 자랑하는 소우주로 양자 영역이 등장하니까. 닥터 스트레인지가 멀티버스의 문을 열었듯, 이제 앤트맨은 숨겨진 우주를 탐험하는 셈이다. 그렇기에 <앤트맨 3>는 가족 영화이기 이전에 새로운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스페이스 오페라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다 보면 거대해진 스케일을 온전히 즐기기 어렵다. 규모는 커진 반면, 이 넓고 새로운 우주를 어떻게 채울 지 고민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자 영역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주인공들이 펼치는 모험은 이미 다른 영화에서 본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닛이 양자 영역의 원주민을 만나 탈 것을 빌리는 장면만 봐도 그렇다. 사막 같은 비주얼은 <스타워즈> 속 타투인 행성을, 헬멧을 쓰고 있는 유목민과 그들의 탈 것은 타투인에서 사는 '터스켄 약탈자'를 빼닮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캉의 군대는 스톰트루퍼를, 캉의 제국은 은하제국의 수도인 코러산트를 떠올리게 한다. 사막에 숨어 있는 저항군의 존재도 마찬가지다.
눈에 띄는 몇몇 신선한 요소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양자 영역에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맞다. 해파리나 브로콜리를 변형한 듯 보이는 생명체가 여럿 눈에 띈다. '자유의 투사들'의 일원인 베브도 민달팽이처럼 생긴 독특한 생김새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되다 보면 이들은 이내 배경으로 밀려나고, '젠토라'나 '쿼즈'처럼 인간 형태의 조력자만 남아 분량과 비중을 차지한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시리즈의 로켓이나 그루트, <토르> 시리즈의 코르그와 미에크처럼 전향적으로 활용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베브와 살아 움직이는 건물들 정도가 임팩트를 남길뿐이다. 결국 <앤트맨 3>에서 양자 영역은 MCU의 지평을 한 차원 넓힐 공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저 정복자 캉이라는 새 빌런을 등장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될 뿐이다.
그 결과 <앤트맨 3>는 시리즈의 본래 개성과 지향점 사이에서 부유하는 듯 보인다. 스콧이 정복자 캉에게 저항하는 양자 영역의 원주민들, 곧 자유의 투사들을 돕는 전개만 봐도 문제점을 알 수 있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자서전도 내고 사인회를 다니며 셀러브리티로서의 삶을 누리는 스콧. 그는 세상을 위해 싸우는 대신, 마침내 되찾은 가족과 일상을 누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는 양자 영역에 빠지거나 정복자 캉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만난 후에도 얼른 집에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스콧은 끝내 다시 히어로의 길을 외면하지 못한다. 캐시 때문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아빠를 설득한다. 스콧이 좀처럼 설득되지 않자 독단적으로 캉의 군대와 싸우기도 한다. 이에 스콧도 결국 자유의 투사들 옆에서 캉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스콧이 마음을 바꾼 이유를 시리즈 내내 강조되었던 그의 부성애로부터 찾는다. 확률 폭풍 안에서 캐시의 외침을 들은 스콧의 모든 가능성들이 힘을 합쳐 진짜 스콧을 도와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스콧이 모든 선택의 기로마다 언제나 캐시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걸 보여준다. 그렇기에 스콧은 이번에도 캐시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는 앞으로 어벤져스와 캉이 멀티버스 속에서 펼칠 싸움을 암시하는 대목이기에 더욱 인상적이기도 하다. 멀티버스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나'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사실 중요한 건 가능성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단 하나의 희망과 가치를 깨닫고, 이를 지켜내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스파이더맨, 닥터 스트레인지, 그리고 이제 앤트맨이 그러하듯이. 그렇지 못하면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나'는 절망하고 좌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캐시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스콧이 생판 남인 자유의 투사들을 돕는 이야기가 말이 되는 이유다.
그런데 정작 영화는 자유의 투사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정복자 캉에게 맞서 자유를 갈망한다는 언급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피해를 입었고 캉이 그들을 어떻게 억압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양자 영역에 대한 설명과 상상력이 부재한 만큼이나 이들에 대한 설정도 대사 몇 마디를 제외하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캐시 랭을 가교로 삼아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는 모습에서는 당위성을 찾기 어렵다. 왜 앤트맨이 그들을 도와서 모험을 떠나야 하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캉이 죽고 자유를 찾아다며 기뻐하는 사람들의 카타르시스를 공유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덩달아 스캇 일행과 이들 간의 가교가 되어야 할 캐시의 역할도 애매해지고, 캐시를 따라 이들을 도와준 스콧의 이야기도 힘이 빠진다. 이처럼 양자 영역 안에서 <앤트맨> 시리즈는 본연의 매력과 개성을 잃어버리고 만다.
심지어 스콧 랭만 양자 영역에서 길을 잃은 것도 아니다. 앞으로의 MCU를 지탱할 빌런 정복자 캉도 헤매기는 매한가지다. 작중 캉은 다른 변종 캉들이 보기에도 너무 위험하기에 외부의 시공간과 분리된 양자 영역에 갇혀버린 인물이다. 어찌나 위험한 사상과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재닛 밴 다인이 가족과의 재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캉을 양자 영역에 가두기 위해 수십 년 간 노력했을 정도다. 그런데 정작 영화를 보고 나면 캉이 과연 타노스만큼 위협적인 빌런인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직접적으로 느껴지는 힘이나 능력이 인상적이지 않다. 개미 군단의 공격에 쩔쩔 매고, 앤트맨과 와스프에게 고전하기 때문이다. 인피니티 스톤 없이도 헐크를 무너뜨리던 타노스와 비교하면 더욱 평범해 보인다.
물리적으로 위협을 가하지 못하며 사상적으로라도 어벤져스의 적수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만, 그조차도 실패한다. 연출 상의 문제로 캉의 과거사나 그의 사상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캉이 앤트맨에게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는 대목을 보자. 캉은 자기가 수없이 많은 어벤져스를 죽였다고 말한다. 이때 영화는 플래시백과 같은 연출 기법을 활용하는 대신 그저 캉의 설명을 고스란히 들려줄 뿐이다.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의 과거사를 설명한 대목을 떠올려 보면, 지나치게 정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재닛이 캉과 겪었던 일을 털어놓는 장면도 다르지 않다. 재닛, 행크, 호프는 한 테이블에 나란히 둘러앉아 있다. 재닛은 어떻게 캉을 만나고, 그의 우주선을 고쳤고, 그를 양자 영역에 가둔 이유를 몇 분에 걸쳐 설명한다. 나머지 둘은 그저 리액션을 할 뿐이다. 이처럼 설명을 위한 시퀀스가 계속되다 보니 자연히 영화는 지루해진다. 설명의 내용 역시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캉이 등장하는 쿠키 영상에서도 그들이 딱히 무섭지 않은 이유다. 그들의 목적이나 사상, 대립 구도가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복자 캉의 데뷔전은 어떤 의미로든 만족스럽지 않다.
사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이후 MCU가 예전 같지 않다는 지적은 이제 새롭지 않다.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페이즈 4를 구성하는 영화와 드라마들이 줄줄이 혹평과 부진한 흥행을 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앤트맨 3>의 어깨는 무거웠다. 시들어가는 관객들의 관심을 다시 점화하고 멀티버스 사가에 몰입할 유인을 제공해야 했다. <앤트맨> 시리즈로서의 재미도 선사해야 했다.
하지만 <앤트맨 3>는 실패했다. <앤트맨> 시리즈의 연장선상이라고 보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확실하게 페이즈 5의 초석을 놨다고 하기도 어려운 결과물을 내놓고 말았다. 의문을 더 키우는 것은 덤이다. "시끄럽던 옆동네 DC 확장 유니버스가 전면 리부트를 선언한 가운데, 과연 마블의 멀티버스 사가는 평탄히 목적지까지 항해할 수 있을까?" 미래는 모를 일이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마블에게 남은 기회가 이제는 정말 많지 않다는 것. 개봉까지 두 달여를 남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OL.3>로 시선이 쏠리는 이유다.
P(Poor, 형편없음)
큰 그림도, 시리즈의 매력도, 빌런의 위압감도 양자 영역과 함께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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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험회사는 손해보지 않는다.
이 글은 영화 [더 배트맨]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난은 늘 낯설고 새로운 것의 그림자 역할을 자처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처음 007이 되었을 때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여태까지 이런 007은 본 적이 없다며 비난과 험담의 벽을 쌓아 올렸으니까.
그러나 첫 작품이었던 [카지노 로열]은 사람들이 쌓아놓은 미움의 벽을 시원하게 밀어버렸다. 덕분에 다니엘은 시리즈 사상 가장 마초적이면서 인간적인 요원으로 자리 잡았고. 15년 동안의 임무를 완수하고 기꺼이 우리에게 안녕을 고했다. (참고 1)
DC에서 가장 많은 팬을 보유하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배트맨 시리즈는. 예술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기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손에서 가장 완벽한 3부작으로 태어났다. 그리고 희대의 악역인 조커를 낳았다.
이런 시리즈에 아직 물음표가 가득한 배우인 로버트 패틴슨을 앞세운 새 배트맨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매우 큰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영화 [더 배트맨]의 시작은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고. 덕분에 그림자인 비난 역시 짙게 깔려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더 배트맨]은 이런 비난의 색을 가득 담았다. 어둡고 또 무겁다. 로버트 패틴슨은 우울하고도 생각으로 가득한 배트맨 역할을 여태 해 온 역할들과는 다른 분위기로 풀어내 영화의 깊이를 더했다.
제작진이 비난에 대처한 방식은 영화의 색깔과 같았고. 비난은 슬그머니 배트맨이 가진 고뇌의 무게에 합쳐져 긴 러닝타임 내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9회 말 2아웃 상황의 DC가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이면 가벼운 마음만큼이나 영화 속 배트맨의 마음도 조금은 밝아졌음을 느낄 수 있다.
3,6,9는 진리다.;배트맨도 피할 수 없는 3년 차 성적표
사진 출처:다음 영화
3년 차.
일반 회사로 친다면 이제 슬슬 대리 달아야지?라는 덕담 같은 압박이 귓가에 쌓이기 시작할 때다. 불가능할 것만 같던 업무 짬도 차기 시작하고 전체적인 일의 그림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익숙해져 버린 자리 덕에 슬슬 회사 전체에 대한 불만도, 그리고 이직을 했을 경우의 "조건"들에 대해 점치기도 시작한다. 또한 근원적으로 내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도 될 것인가에 대한 의심과 물음도 하나둘씩 마음을 채운다.
올해 3년 차에 들어선 고담 시 (명예) 공무원인 배트맨의 위치가 정확히 이 지점에 있다. 이제 고담 시 전체도 제법 눈에 익었고. 모든 범죄에 출동할 수 없으니 Priority를 세워 선택적으로 야근할(?) 줄도 안다. 그럼에도 고담 시의 경찰들에게는 가면을 쓴 자경단들 중 하나 정도라는 생각에 그칠 뿐이지만.
그럼에도 경찰들이 이 혼돈의 배트맨을 잡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 기대하는 "능력"이 (연차 대비) 출중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뛰지 않는다.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현란하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배트맨은 자신의 정체가 그들의 코앞에 다가갈 때까지 천천히, 그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밤이 만들어 낸 안개가 걷히면서 배트맨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범죄자들은 그제서야 허공을 향해 빛나고 있는 박쥐 모양의 경광등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킬 수밖에 없어진다. 물론 그 마른침이 다 넘어가기도 전에 얻어맞고 바닥에 뻗어 있겠지만.
영화는 배트맨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위압감을 매우 잘 묘사하고 있다. 분명 다른 히어로들보다 휘황 찬란하다거나, 빠르지도 않지만. 배트맨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오는 압박감만은 매우 대단하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그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집념을 느낀 악당들에게 배트맨은 훌륭하고도 끔찍한 악몽이며.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지만 동시에 만나보고 싶기도 한 빌런이다.
세례 받은 배트맨;자신 스스로도 구원해 내기.
사진출처:다음 영화
영화 속 배트맨은. 마치 자신의 진정한 MBTI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수많은 질문들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신이 행하던 것이 복수였는지. 혹은 정의였는지에 대해 생각하듯이.(참고 2)
리들러의 공격은 너무도 현실에 착 붙어 있어서.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점을 파고들었다. 덕분에 외면하고 싶은 연좌제에 대한 이슈를 똑바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 또한 뒷골목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을 것만 같아서.
셀리나는 자신이 드러낼 수 없는 마음속 분노의 모습과 닮아있어 더 이상의 고아가 탄생하는 것도. 고아가 저지르는 잘못도 없기를 바라는 배트맨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어둠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막아야 했다.
여기까지면 좋으련만. 브루스 웨인으로서의 삶은 일찌감치 박살 난 지 오래라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도 감을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엉망인데. 배트맨은 자신의 앞에 놓인 질문에 답을 해야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리고 정확하게. 게다가 늦지 않게.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고담 시 사람들이 사상을 입을 수도 있는 그 순간에. 배트맨은 마지막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기꺼이 물속으로 뛰어든다.
마치 영화의 진행 내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복수와 정의 중 후자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은 순간임과 동시에. 여태까지 지니고 있던 모든 고뇌를 세례를 통해 씻어내린 것처럼 느끼게 하는 장면이었다.
그의 MBTI는 결정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배트맨이 되었다. 그리고 배트맨은 망설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좀 더 가까이서 직접 돕는 것을 가장 먼저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그는 이 역할에 당위성을 고쳐 붙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구하겠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가 건져올린 것들에 자신도 있음을 알아주는 날이 오기를 빈다.
과연 이직에 성공할 수 있을까?;일단 야근부터 좀 어떻게 해보자.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의 말미에. 배트맨은 아주 잠깐이지만 그 지독한 어둠에서 벗어나 사람들을 도우는 일에 합류한다. 마치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 모습마저도 먼지 구덩이에서 한 번은 구르고 나온 것 같은 모습이지만. 배트맨의 눈길과 몸짓은 경직되어 있던 영화의 초반과는 조금은 달라 보이기까지 한다.
그전까지 자신에게는 어둠만 허락된다고 생각했다. 어둠을 먹고 사는 자들을 처리하는 것이 자신의 복수이자 고담 시의 질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밤의 지배자들에게는 두려움이라는 바이러스를 뿌려댈 수 있지만. 낮의 주인들에게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낮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 희망이 전염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이제 배트맨은 고담 시를 떠날 수 없다.
3년 차가 갖고 있던 고민도 사라졌고, 자신의 MBTI도 명확해졌다. 그리고 야근만 하던 삶을 주간 근무로 바꿀 수 있는 희망도 이젠 갖게 되었다.물론 이런 각오가 무색하게 6년 차의 헛바람은 찾아올 것이고. 이 도시는 여전히 자신을 배신하겠지만. 게다가 잊고 있었던 야근도 종종 하게 될 테지만. 이제 배트맨의 눈은 바뀌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는 매일 다른 것을 하며 자극을 찾는 것이 아닌. 똑같은 일상을 견뎌내는 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이 초보 공무원이 고담에서 보낼 영원한 시간들 중 딱 오늘 하루만이라도 부디 평온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야근도 안 하면 더 좋고.
마치면서;+좋아한 장면
호불호가 매우 강할 영화다. 액션이나 최첨단 무기, 혹은 브루스 웨인의 어마 무시한 부(Richness)를 기대한다면 한없이 지루할 것이고. 지울 수 없는 이름인 히스 레저를 떠올린다면 더더욱 실망할 영화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점들을 지우고 새로운 배트맨에 집중한 것이 좋았다. 배트맨의 탄생이나 고담 시 7급 공무원 정도의 짬을 가진 타이밍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겨우 병아리 티를 벗고 뭔가 해보려고 하는 의욕은 많지만 처음 접해보는 문제들에 부딪쳐 시무룩해지기 쉬운 딱 3년 차의 모습이라서. 그냥 응원해 주고 싶었다.
최근 영화가 길어지는 추세에 대한 큰 반감이 있긴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이 길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다못해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까 같은 쓸데없는 잡생각 없이 그저 이 야근만 하는 공무원의 고군분투 일처리를 보다 영화관을 나왔다. 그가 아주 조금은 행복.. 까지는 아니더라도 마음이 가벼워진 게 보이는 것 같아 다행이다.
[좋아한 장면]
중간에 나오는 자동차 추격전 장면과 천장을 박살 내면서 떨어져내리는 장면은 뭐 말할 것도 없지만. 글에도 쓴 홍수 난 광장으로 떨어지는 장면에서 그냥 자꾸 눈물이 났음. 기꺼이 고난으로 뛰어드는 자 만이 얻을 수 있는 재탄생을 잘 살린 것 같았음.
참고 1
007시리즈 말고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한 007에 대해 쓰다가 저장해둔 글이 있었는데 거기서 조금 갖고 옴. 개인적으로 크리스찬 베일의 엄청난 팬이기 때문에 로버트 패틴슨이 배트맨을 한다고 했을 때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했던 사람이었으나. 이 영화 보고 나서 영원히 입다물기로 함.
참고 2
내 MBTI도 제대로 못 외우는 주제에 리뷰 쓰겠다고 찾아봄. 실제로 배트맨의 MBTI는 INTJ이며. 나는 INFJ임. 문제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아직도 잘 모름.
[이 글의 TMI]
1. 영화는 (너무 무거워서) 내 취향이지만. 리뷰는 좀 가볍게 쓰고 싶었음.
2. 어두운 영화 좋아하는지 몰랐는데 내 OTT 서비스 보고 싶어요 한 목록 보니까 이건 뭐. 아포칼립스던데.
3. 샐러드 먹고 16시간 금식은 내가 봐도 너무 힘들다. 근데 그걸 두 달째 하고 있지.
#더배트맨 #맷리브스 #로버트패틴슨 #앤디서키스 #조크라비츠 #폴다노 #DC #영화추천 #최신영화 #영화인플루언서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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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라지고 변화하는 게 삶이라면, 우리는
심리적 거리가 먼 것은 평소에 의식하기 어렵다. 당장 오늘 먹고 입고 일하고 잠드는 일에 기민하게 반응하느라 그러한 일상 속에 불쑥 죽음이 끼어들 수 있단 걸 의식하긴 어렵다. 무디기 때문에 얼마나 다행인가. 매 순간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며 살아간다면, 불안과 동요로 마음이 날뛸 테다. 일상에 치여 산다고들 표현하는데 되려 그 덕에 삶의 근본적인 두려움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의 주인공, ‘산드라‘는 두 갈래의 경계를 오간다. 동시 번역 일을 하고,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등 해야 할 일로 꽉 찬 하루. 여기에 죽음과 맞닿은 존재를 돌보는 일도 포함된다. ‘벤슨 증후군’. 명칭마저 생소한 이 질병을 앓고 있는 그의 아버지. 신경 이상으로 시각 정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감각을 서서히 잃어간다. 열쇠구멍을 찾아 한참 헤맬 정도로.
철학 교수로 오랫동안 재임한 아버지는 시각과 기억을 잃어가는 변화에 적응 중이다. 사실 발병은 5년 전이라서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거 같지만, 서서히 사라지는 기억과 시력은 언제고 익숙함과 거리가 멀다.
산드라가 사별한 남편도 얼추 비슷한 햇수인데, 그는 어떨까.
홀로 여덟 살 아이를 돌보며 살림을 꾸려나가기에도 충분히 바쁜 하루다. 친절하게 아버지를 찾아뵈며 도움을 건네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벗어난 순간부터는 제게 걸려오는 전화를 애써 무시한다. 마치 일터에서 퇴근한 사람처럼. 하지만 으레 엄마 역할이 그러하듯 끝이 아니다. 아이를 돌보고, 먹이고, 그렇게 살아가고.
와중에 아버지가 더는 요양인의 도움 없이는 일상생활이 불가하자, 비용과 시설이 적절한 요양원 찾는 일도 생겼다. 할 일 투성이인 산드라에게 다른 주제로 떠들 수 있는 사람이 생겼으니, 친구 클레망이었다.
아내와 아이까지 있는 클레망. 그런 클레망과 산드라는 가까워지고, 그 거리는 어느새 입을 맞닿을 정도에 다다른다. 한 번은 손쉽게 두 번, 세 번, 새로운 일상이 된다. 딸은 기묘한 변화를 금세 눈치채고 이러한 변화에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는다. 놀러 올 때마다 자신과 다정히 놀아주는 존재가 달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산드라는 괜한 기대감을 주지 않으려 클레망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하지만, 가장 설레고 기대하는 사람은 그다. 이 사랑이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클레망이 현재 가정을 정리한 후 자신에게로 완전히 정착할 것이라고. 이곳과 저곳을 오가던 클레망은 단언한다. 다 끝내고 돌아오겠다고.
그 말을 믿으며 기다리던 산드라. 기다리는 와중에 아버지의 집안에 가득한 책 일부를 제자들에게 보내고, 원하는 요양원에 자리가 날 때까지 매번 아버지는 머무르는 거처가 바뀐다. 여전히 클레망은 소식이 없다. 서서히 직감한다. 아, 그가 날 떠났다.
아버지는 가끔 기억을 잃는다. 여기가 어디인지, 무엇을 하러 온 건지. 그러다 산드라도 잊어간다. 이혼한 전처를 잊어버렸듯.
숱한 이동과 변화의 반복. 영화는 이 모든 일을 아주 잔잔하게 풀어낸다. 극적인 음향이나 이미지도 없다. 그저 붉고 푸른색을 선연히 드러내고, 클로즈업으로 세밀한 표정을 보여주고, 구체적인 서술 없이 내레이션이나 오가는 짤막한 대화에 맥락을 넣는다.
그래서였다. 산드라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어딘가 모르게 일상적으로 느껴졌던 건. 죽음도, 기억도, 변화도, 새로움도, 기대감과 눈물도,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아 보이던 일상에서 끝없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살다 보면 별난 이벤트도 생긴다. 다 끝난 것 같던 관계, 그러니까 클레망이 정말로 산드라에게 돌아와 머무는 것처럼. 이 새로운 가족이 얼마나 단단하게 형태를 유지할지 가늠할 순 없다. 하루하루가 그러하듯. 익숙한 모습을 띤 채로 조금씩 계속 무언가가 변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살아가는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임을 영화의 ost가 말한다. 포옹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손을 뻗어 완성하는 것처럼.
모든 망각과 변화와 새로움 앞에서도,
Love will re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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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와 당신의 이야기 영화 후기 / 로맨틱 멜로 드라마 / 믿고 보는 강하늘 / 특별출연 미쳤다!! / 학원담임 김성균도 짱 멋짐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비와 당신의 이야기”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지만, 엔드크레딧 직전 숨넘어가는 반전씬이 있습니다.
폭풍오열은 아니어도 밀려온 감동에 일어나기가 쉽지 않을듯 합니다~#강하늘, #천우희, #로맨스, #멜로,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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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한 나무의 씨앗] 끝장리뷰 | 총과 씨앗 그리고 새 | 아버지 캐릭터 분석 | 오프닝과 엔딩 | 결말해석
TheSeedoftheSacredFig #신성한나무의씨앗 #TheSeedoftheSacredFigreview
[신성한 나무의 씨앗](2025)에 대한 헐거운 리뷰
Chapter 1 총과 씨앗 그리고 새
Chapter 2 이만이라는 인간
00:00 칸영화제
01:15 총과 씨앗
04:04 새(Bird)
05:15 이만이라는 인간
08:12 별점 및 한 줄 평
08:30 다음 리뷰 예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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