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12-01 15:27:24
놀라운 연기력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은 개봉작 3편
미친 연기력으로 동료 배우들에게 호평을 받은 '레슬리'역 '안드레아 라이즈 보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는 물론, 제35회 시카고비평가협회상, 제38회 필름인디펜던트스피릿어워드 여우주연상,
제60회 히혼국제영화제 여자배우상까지 거머쥐었는데요.
이번 주는 특히! 놀라운 연기력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은 영화들이 개봉했는데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연출한 마이클 모리스 감독의 <레슬리에게> /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 / <마션>, <글래디에이터>등 수많은 명작을 뽑아낸 거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나폴레옹까지 놓쳐서는 안 될 영화 신작 세편 같이 한번 만나보아요.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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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마음
영화 <로봇 드림> 리뷰
반려 로봇(Robot)을 가지게 된 도그(dog)
마치 미래를 그린 SF같지만, 배경은 아이러니 하게도 1980년대 뉴욕이다. 아날로그 감성이 가득한 빈티지 무드의 뉴욕에 사람같은 동물들과 로봇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소한 풍경. 하지만 그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물과 로봇은 지금의 우리와 너무도 닮아 있어, 마치 나의 이야기인 것 처럼 보게 되는 영화<로봇드림>
도그의 삶은 외롭다. 인스턴트 음식을 데워 먹고, 혼자 따분히 TV를 보는 삶 다른 건물의 따듯한창엔 다정한 커플들이 보이는데, 나만 외로운 것 같은 기분. 그러다 문득 TV속 광고중에 눈에 띄운 문구 ARE YOU ALONE? 도그는 눈이 반짝 빛나며, 주문을 한다. 로봇이다. 그 때 부터 도그의 삶은 달라진다. 종종걸음으로 택배를 기다리고, 조립 설명서를 읽으며 어려운 로봇 조립을 해낸다. 도그가 로봇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은 어쩌면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도그는 포기 하지 않고, 로봇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그리고 마침내 도그는 로봇과 ‘함께’ 라는 것의 기쁨을 누리는 일상을 살게 된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 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처음인 로봇에게 도그는 많은 것을 알려주고, 보여준다. 손을 잡는 법 부터, 음악을 듣고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핫도그를 먹고 바다에 간다.
이 행복이 끝나지 않을 것 처럼 즐거웠지만, 도그도 로봇이 처음이라, 물놀이 후 멈춰 버린 로봇을 데려 올 수 없게 되어 헤어지게 된다. 로봇을 다시 일으킬 설명서를 찾고, 장비를 구해 다음날 다시 해변으로 달려 가지만 해수욕장을 문을 닫았고, 도그는 로봇을 데려오기 위해, 몰래 들어 가려다 경찰에 잡혀 가고 만다. 피치 못할 사정.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도그와 로봇은 그렇게 이별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기에, 도그는 해수욕장이 개장하는 날을 메모해 냉장고에 붙여둔다.
시간이 흐르며 도그는 다시 일상을 살아나간다. 둘이 함께 들었던 음악을 들으며 로봇을 그리워 하고, 다른 친구들을 만난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의 즐거운 순간을 느끼며, 로봇을 떠올리지만 그 감정의 모양은 로봇과 다름을 느낀다. 한편 로봇은 모래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도그를 기다린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로봇은 꿈을 꾼다. 서로를 행복하게, 삶을 무지갯빛으로 다채롭게 채워 준 존재지만, 지금은 함께 할 수 없는 사이. 꿈은 그립고 슬펐다. 일상을 살아가며 그리워 하는 것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를 그리워 하는 것 어느 쪽이 더 괴로울까? 모래밭에 파 묻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하루를 보내는 로봇의 일상을 지켜보는 동안, 이별의 참담함을 마음의 동굴 속에 들어가 겪어내는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대사는 없지만 캐릭터의 감정을 표현해주는 귀에 익은 음악들이 영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고,세심하게 연출 된 장면들로 각자 다른 사정에, 다른 방법으로 관계의 변화를 지나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리고 있어, 따뜻한 위로와 공감을 느끼게 해준다.
때로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들. 곁에 있는 사람의 눈과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 오히려 대사가 없어서 더 많이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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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체성과 원팀의 감동
정체성과 원팀의 감동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리뷰
감독] 제임스 건
출연] 크리스 프랫, 조샐다나, 데이브 바티스타, 빈 디젤, 브래들리 쿠퍼, 카렌 길런, 폼 클레멘티프
시놉시스] ‘가모라’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던 ‘피터 퀼’이 위기에 처한 은하계와 동료를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가디언즈 팀과 힘을 모으고, 성공하지 못할 경우 그들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미션에 나서는 이야기
#스포일러 유의#
이토록 기존 팝을 잘 쓰다니사실 대부분의 영화들은 영화를 위한 OST를 제작한다. 그래서 그 영화만의 분위기를 잘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음악들을 영화 속에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가오갤 시리즈는 아니었다. 친구가 영화를 보기 전 한 가지 힌트를 줬는데, 가오갤 시리즈는 기존 팝송들을 영화 곳곳에 재비치를 해서 그 팝송을 영화 속에 대입해서 듣는 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알려줬다.
그래서 이미 잘 알려진 팝송의 경우 색이 너무 강해서 영화 색을 가리면 어쩔까 우려했지만 아니었다. 어쩜 그렇게 적재적소에 위치를 시켰는지 제임스 건의 탁월한 음악적 선택 능력에 박수를 치고 싶었다. 영화 가오갤 3는 Creep의 어쿠스틱 버전으로 시작한다. 별종으로 평생을 살아온 로켓의 자기혐오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곡이었다. 정말 찰떡같은 곡이기도 했고, 익숙한 노래가 들리다 보니 초반 영화 집중도를 끌어오는 데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로켓의 정체성 찾기
가오갤 3를 보기 전 1, 2를 보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꾸 로켓이 자기는 라쿤이 아니라고 할 때마다 라쿤인 걸 알면서도 라쿤이 되길 거부하는 것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라쿤과 같은 생체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기에 (물론 실험을 통해 얻게 되긴 했지만)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말 본인이 라쿤인걸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너무나도 어렸을 때 실험대상으로 끌려왔고, 그들로부터 다양한 실험을 당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탈출 후 가디언즈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으니 자신의 뿌리가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험을 당하고 자신의 친구들이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과 트라우마 속에서 평생을 살다 보니 자신 스스로를 바라볼 용기 조차 없었을테니 말이다.
마지막에 인간 실험체들을 모두 구하고, 자신과 같은 동물 실험체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로켓은 자신의 트라우마와 직면하고, 이제는 더이상 피하고 도망치지 않고 동물 실험체들을 모두 구해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철장에서 발견한 어렸을 적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어린 라쿤들을 보면서 눈물이 차오르는 로켓 라쿤. 그 철장 안에 적혀있던 글은 라쿤이었다. 자신이 진짜 라쿤이었음을 로켓은 아마 그 때 스스로 확실하게 인지를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자신의 트라우마와 직면하고, 결국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은 스스로임을 깨닫고 용기있게 도망치지 않은 로켓 라쿤. 덕분에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알게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젠 우리도 멤버인가
마지막에 울컥했던 부분은 그루트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다. 물론 로켓이 자신의 과거를 똑바로 바라보고 아기 라쿤을 구할 때부터 이미 울고 있긴 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큰 한 방은 그루트의 대사였다. 이제까지는 그루트의 모든 대사는 아임 그루트! 아임 그~루트~~~ 처럼 억양만 달라질 뿐 대사는 같았다. 그래서 가오갤 멤버들이 통역을 해줘야만 다른 이들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 그 다른 이에는 아마 관객들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오갤3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루트가 I love you, guys!라고 말한다. 나도 사랑한다고 그루트가 말을 한다. 10년 동안 아임 그루트가 전부였던 그루트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해서 1차 충격을 받았고, 다시 생각해보니 가오갤 멤버들은 그루트의 발언에 전혀 놀라지 않은 것을 보니 10년 동안 그루트를 봐 온 관객들이 이제 벽을 넘어 그루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팡-하고 터졌다. 사실 고작 150분을 함께 했는데 말이다. 전작들을 보지 않았음에도 150분밖에 함께 하지 않은 사람마저 울릴 정도였으니 1, 2편을 다 챙겨보고 가오갤3를 만난 관객이라면 더 감동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이렇게 마지막 장면에 감동을 넣어둔 제임스 건의 큰 그림에 박수를 보냅니다. 정말 그 장면에서 영화관에 있던 관객들은 일동 탄성이 튀어나왔고, 그만큼 캐릭터에 대한 애정과 서사가 너무나도 완벽했던 작품이었다.
이 멤버로 다시 가오갤이 나올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돌아올 확률이 매우 희박해보여서 너무 아쉬운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명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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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브 라이즈 블리딩> 이전에 <바운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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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라이즈 블리딩> 이전에 <바운드>가 있었다. <바운드>는 ‘퀴어 느와르’라는 장르를 개척한 영화다. 남성성의 극단을 보여주는 마피아 집단 속에서 피어나는 여성들의 사랑, 탈주, 해방까지를 보여주는 영화. 이 지점에서 <러브 라이즈 블리딩>과 <바운드>는 닮은 바가 많다.
<바운드>는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된다. 영화의 서사에 핵심적인 여러 대사들이 보이스 오버로 흘러나온 뒤 비춰지는 결박된 코키의 모습이 이 작품의 시작이다. 어쩌면 이 작품은 모든 패를 까발린 채 작품을 시작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품이 시작되며 이 작품은 ‘시선’과 ‘섹스’에 대한 작품이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암시된다. 한 건물의 엘리베이터에 함께 탑승하는 주인공 코키와 바이올렛. 바이올렛은 파트너로 보이는 남성과 함께 있음에도 그에겐 관심을 주지 않고 코키와 강렬한 눈맞춤을 나눈다. 그리고 코키의 시선은 바이올렛의 다리로 향한다. 특별한 대사 없이 그들이 첫눈에 반했음은 시선의 전개만으로 읽힌다.
이후 배관공으로서의 코키가 다루는 공구에 적힌 ‘삽입’에 대한 주의 문구, 코키의 집을 찾아온 바이올렛이 던지는 ‘손재주’에 관한 말들. 얼마 지나지 않아 귀걸이가 배수구에 빠졌다는 핑계로 코키를 자신의 집으로 부르는 바이올렛. 배수구를 공구로 다루는 손길, 그 사이로 흘러나오는 물, 그 뒤로 비춰지는 바이올렛의 다리까지. 더이상 구체화시켜 말할 것이 있을까. 두 사람은 서로를 욕망하고 있다. 그러나 마피아의 정부로 사는 바이올렛과 그들에게 고용된 코키에게 사랑이란 가능할리 없는 법. 이들은 그들에게서 벗어나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바운드>의 시작이다.
물론 두 사람의 사랑의 도피는 쉽지 않다. 남편인 시저를 속여 돈을 훔치려고 했던 두 사람의 계획은 탄로난다. 그렇게 오프닝 시퀀스의 이미지는 서사 속에서 실현된다. 코키는 바이올렛을 두고 돈을 들고 도망칠 수도 있지만, 이미 바이올렛을 사랑하게 된 코키는 그런 선택을 하지 못한다. 그렇게 코키는 바이올렛을 구하기 위해 시저의 집에 제발로 들어가 시저의 손에 결박당한다.
이제 바이올렛이 나설 차례다. 시저는 바이올렛을 이용하여 시저가 윗선에 넘길 돈을 잃었다는 것을 숨기려 하지만, 바이올렛은 그것을 역이용한다. 자신을 연약하게만 바라보는 마피아 집단을 이용하여 시저의 삶을 파국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이때 단순히 ‘강한 여성’인 코키에게 오직 의존만을 하는 것으로 비춰졌던 바이올렛은 코키를 구원해내며, ‘상호 구원’의 서사를 완성해낸다.
시저가 마지막으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바이올렛은 시저에게 총을 겨눈다. 그러자 시저는 바이올렛이 자신을 죽일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 말한다. 그러자 바이올렛은 “시저, 당신은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라며 시저를 가장 잔혹하게 죽인다. ‘살인’을 성취한 뒤에도 이어지는 총격은 그녀의 분노를 보여준다. 그 순간 쓰러지며 극적으로 드러나는 그의 벗겨진 머리는 그의 권위를 더욱 더 실추시킨다.
그렇게 바이올렛은 마피아 집단을 벗어난다. 코키와 몰래 챙긴 돈은 비밀로 한 채, 이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윗선에 마지막 키스를 건네는 바이올렛은 더없이 이 서사에 필요한 존재다. 코키가 없었다면 시작될 수 없었을 이들의 계략은 바이올렛이 없었다면 깔끔히 종결될 수 없는 것이다. 무의미한 키스를 끝낸 뒤, 뒤돌아 입꼬리를 한쪽만 올린 미소는 승리를 뜻한다. 두 사람은 이렇게 남자들을 속이고, 걸림돌을 제거한 채 자신들의 사랑을 성취한다.
이 영화의 제목인 바운드는 ‘묶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에서 이미지적으로 끈을 활용해 결박되는 사람은 코키와 바이올렛, 즉 여성들이다. 하지만 결국 이 영화에서 ‘묶인’ 존재는 누구인가. ‘남성성’의 굴레에 속박되어 ‘여성’을 연약한 존재라 단정짓고, 죽임을 당하고 놀아나는 이들이야 말로 ‘남성성’에 ‘묶인’ 존재가 아닐까. 작품의 끝에 이르러서야 작품의 제목의 의미를 되새기며 작품의 완성도에 감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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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질라 VS. 콩 / Godzilla VS. Kong
0. 이번에는 편안하게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고질라 VS. 콩>의 개봉이 있기 전에도 큰 제작비가 들어간 영화 일명, "블록버스터"가 개봉을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 이 헛헛함이 채워지지 않았는데요.
그렇게 4DX로 먼저, 만난 <고질라 VS. 콩>은 그런 비어있던 마음을 채워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생각 없이 모든 것들을 다 때려 부수는 단순한 영화를 간절하게 기다렸거든요.
4DX로 "고질라"와 "콩"이 되어 사정없이 머리를 흔들고 나서야 이들의 대결을 크게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IMAX"가 생각났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최대의 스크린"이 "IMAX"이니까 뭐든지 큰 이들의 대결을 두 눈을 크게 뜨지 않아도 크게 보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 머리를 흔드는 게 힘들었기도 했고요.
과연, "IMAX"로 보는 영화 <고질라 VS. 콩>은 어땠는지? - 해당 영화의 2회차 후기는 "IMAX"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거대 몬스터들로부터 세상은 한때 위태로운 적도 있었지만, "고질라"로 인해 지켜지게 되면서 세상은 어느 때와 별반 없이 평화롭기만 합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위태롭기만 합니다.
어느 날, "고질라"가 "에이팩스"를 공격하며 인간들에게 처음으로 위협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이에 원인을 찾지 못하고 인간들은 또다시 공격할 "고질라"의 위협에 맞서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는 "콩"의 필요성이 거론하게 됩니다.
먼 고대로부터 "알파"의 자리를 두고서 싸운 "고질라"와 "콩"이기에 "모나크"는 이 둘을 멀리 격리시키고 있었기에 애써 이들의 마찰을 피하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세상은 "콩"을 필요로 하고, 결국 처음으로 맞닥뜨리게 되는데...
직관 때 앞자리들 앉지 않나요?
1. 애당초 이유가 있을까?
일반 스포츠와 다르게, "프로레슬링"은 경기력만으로 풀어가는 스포츠가 아닙니다.
이를 대표하는 명사 "WWE"의 "E"는 "오락"을 뜻하는 'entertainment'인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인지 보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고질라 VS. 콩>은 어떤 경기에 펼쳐야 하고, 어떻게 준비를 펼쳐야 할까요?
대다수의 경기에는 이들의 싸움을 붙이는 이야기 즉, "프로모"를 찍어 감정적인 동기를 이끌어내는 것이 맞습니다.
근데, 이런 한 덩치 하는 선수들에게 이야기라는 준비 동작이 필요할까요?
빅 쇼가 사각링을 부셨습니다?
그중 이번 영화 <고질라 VS. 콩>의 구도는 2004년 "레슬매니아 20"에서 "골드버그"와 "브록 레스너"의 경기를 떠오르게 만듭니다.
당시 "골드버그"는 173연승의 사나이이며, "브록 레스너"는 20대 젊은 나이에 브랜드를 대표하는 챔피언에 오른 만큼 이들의 경기는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건 당연한 결과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들의 경기는 정작, 힘겨루기만을 반복한 채 관객들의 질타만을 받고 끝났습니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2. 생각보다 상대가 안 맞나?
이런 반응으로 살펴볼 수 있는 건 이들의 이야기보다는 경기력에 좀 더 방점을 두었다는 것을 확인되는데요.
부실한 "프로모"였다고해도 향후 전개될 경기력이 이를 충분히 가려낸 것인데, 정작 경기가 맥없이 끝나니 이에 대해서도 지적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고질라 VS. 콩>에게 관객들이 기대를 거는 건 이들의 화끈한 경기력인데 영화는 이에 대한 기대를 분명하게 충족시킵니다.
이전 시리즈들을 통해서, 쌓아온 이들의 위상이 엇비슷하더라도 그 상대들이 달랐기에 이들의 대결은 기대가 되었습니다.
이거, 상대가 맞나?
이런 차이를 보여주듯이 이들의 경기는 서로의 장·단점을 보여주는데, 첫 번째로 바다에서 싸우는 모습은 미처 다하지 못한 설명이 보입니다.
물에서 빠르게 헤엄치고 숨 쉬는 것이 가능한 "고질라"와 그렇지 못한 "콩"의 모습에서 이미, 결과는 어느 정도 예측이 됩니다.
물론, "콩"이 "고질라"의 턱에 강력한 어퍼컷도 날리는 호쾌한 모습도 보여주지만 이내 죽은척하는 모습으로 꽤 싱겁게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렇기에 다음 2차전에서 보여주는 기믹 매치는 "콩"의 학습이 엿보였습니다.
3. 망치 앞에서는 누구나 한 방이니까
앞서 말했듯이 "프로레슬링"은 이야기가 있는 스포츠이기에 다양한 기믹 매치들이 존재합니다.
서로 번갈아 링에 들어가는 "태그팀", 무기 및 반칙이 허락되는 경기, 철창에서 싸우는 것까지 다양한 경기 방식이 존재합니다.
그런 점에서 "도끼"를 들고 나타나는 "콩"의 모습은 "오함마"가 가장 잘 어울리는 레슬러 "트리플 에이치"가 연상되는데요.
그렇기에 이들의 2차전은 비슷하면서도 한층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이길 것인가?
싸우는 곳이 바다에서 도시로 바뀐 것이 먼저, 눈에 띄겠지만 여러분들이 주의 깊게 바라봐야 하는 건 "콩"의 손에 뭔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타고난 신체적인 조건으로 싸우는 "고질라"와 다르게, "콩"은 "도끼"를 사용함으로 도구를 쓸 줄 안다 즉, 머리를 쓸 수 있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고 공격하는 모습과 첫 번째 대결에서 "고질라"가 물에서 유리한 것을 배운 "콩"이기에 이번에는 물이 아닌 곳에서 싸우는 "콩"의 모습까지 "고질라"와 확연한 스타일의 차이를 보여주는데요.
그저, 비슷한 장면이 반복된다고 말하는 건 정말 서운한 이야기입니다.
4. 캐싱인, 3자간 매치
여기에 "WWE"를 오래 본 팬들에게 "머니 인 더 뱅크"라는 단어는 낯설지 않을 겁니다. 자그마한 서류 가방으로 여기에 들어있는 서류는 언제 어디든지 챔피언십 경기를 가질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데요.
그리고 이를 행하는데 흔히, "캐싱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그런 점에서 마지막 3차전에 등장하는 "메카 고질라"는 "챔피언 벨트"를 노리고 야비한 기회주의자로 보일 겁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건 "메카 고질라"의 등장으로 달라지는 경기에 있습니다.
보통 1 대 1로 진행되는 경기에는 너 아니면 내가 쓰러지는 것이 경기의 승패이지만, 3자간 경기는 내가 쓰러지지 않아도 경기에서 질 수 있거든요.
2명에서 3명으로 늘어났는데, 경우의 수가 늘어났다.
여기에 무기와 반칙 사용도 가능해지니 하나의 경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비약적으로 늘어납니다.
그런 점에서 "메카 고질라"는 이전 "고질라"와 "콩"과 다르게, 설명이 쌓여있지 않는 문제가 있지만, 영화는 이에 관객들이 잊고 있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사실, <고질라 VS. 콩>이 "몬스터버스"의 시리즈 영화라는 것을 말이죠.
제목처럼 영화가 "고질라"와 "콩"의 싸움에 초점을 두어 전개했기에 이야기의 필요성을 못 느꼈지만, 이 영화 그래도 시리즈가 있는 영화입니다.
시리즈 영화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낮은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지만, 엄연하게 전작들이 있는 영화입니다.
5. 그래도, 시리즈이고 배우들인데...
그런 점에서 영화 <고질라 VS. 콩>은 "메카 고질라"의 설명에 시리즈만이 할 수 있는 장점을 보여줍니다.
그건,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영화는 이에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나왔던 "기도라"와 <콩: 스컬 아일랜드>의 "스컬 크러셔"로 장활한 설명도 할 필요 없이 관객들을 납득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이렇게, 괴수들과의 대결에서는 두 눈이 휘둥그레지게 보여주는데 성공하지만 정작 이야기에서는 아쉬운 점들이 많습니다.
그래, 시리즈이기는 한데...
전작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에서 주인공격으로 활약한 "매디슨"과 "러셀"의 관계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는데요.
여기에 이번 영화에서 새로이 나온 "네이선 - 아일린", "시먼스 - 세리자와"까지 모든 인간 캐릭터들은 "콩"과 "고질라"를 위한 도움말로 활용해 이전 시리즈들보다 확실히 축소된 느낌인데요.
무엇보다 이에 <기묘한 이야기>의 "밀리 바비 브라운"이라는 배우가 필요한지 와 "알렉산더 스카스가드", "레베카 홀", "에이사 곤살레스", 그리고 "오구리 슌"까지 캐스팅되었어야만 하는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6. 마지막 챔피언 벨트는 누구에게?
그나마, <고질라 VS. 콩>에서 "피터 잭슨"의 <킹콩2005>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여럿 있습니다.
극 중 "콩"이 빌딩에 올라서는 장면도 있지만, 아름다운 여인과 교감하는 모습도 기억에 남을 겁니다.
영화는 이를"수화"로 직접 의사소통을 함으로 보다 직접적인 관계로 꼭 이들이 여망하는 이유와 함께 <고질라 VS. 콩>만의 장면으로 진화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그렇게, 누가 이겼을까?
한창 떠들다 보니 "콩"과 "고질라"의 세트 스코어가 1:1이었고, "메카 고질라"가 참가한 3차전의 결과에 대해 말하지 못했네요.
이에 대해서 보는 시각 차이가 존재하겠지만, "몬스터버스"의 규칙에 적용돼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리즈에서 이름있는 괴수들이 그들에게 패배로 머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누구의 손에 목이 잘렸는지가 명백한 승자를 가려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이 결과를 보고 싶다면, 여러분들이 직접 두 눈으로 극장에서 확인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IMAX"의 느낌은 '왜, 꼭 앞자리에 앉아야 하는지'라는 말이 이해가 될 정도입니다.
뭐가 되었든 두 눈으로 꽉 차게 보는 게 가장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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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의 늪
LA의 유명 코미디언, 헨리 맥헨리는 관객들을 막대하는 시크한 코미디언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유명 오페라 가수 안과의 스캔들로 아주 핫한 위치에 있다. 그의 인생은 그렇게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네트가 태어난 이후부터 눈에 띄게 자신의 인기가 떨어지고, 안과 비교해 유명세가 격차가 나기 시작하면서 그의 폭력적인 성격에 대한 루머가 커지기 시작한다. 그 루머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간이 흘러, 크루즈 가족 여행에서 안이 안타깝게 죽고, 그가 안을 죽인 용의자가 되는데, 그는 정말 안을 죽인 걸까? 그렇다면, 아네트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1. Kill or Save
"How did the show go?
"I killed them."
"I saved them."
공연을 잘 끝냈냐는 말에, 내가 다 죽여버렸지 라고 대답하는 헨리와 내가 다 살렸지 라고 대답하는 안. 똑같이 공연을 잘 끝냈다는 표현이지만 이 두 사람의 삶의 태도가 이 대사에서 드러난다. 헨리는 관객들이 웃으면, 관객들을 굴복시키고, 자신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관객들과 대결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반대로 안은 오페라 가수로서 오페라에 몰입해 감동을 주고, 관객들을 홀리는 연기를 한다. 관객들을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았던 헨리는 더 이상 관객들이 죽어주지 않자, 약올라하고, 관객들과 싸우는 것도 불사한다. 하지만 안은 관객들을 아끼고, 이 관객들을 내가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한다.
헨리는 잘 나가던 시절의 향수에 젖어 이전처럼 관객들이 자신에게 정복당해주지 않음에 분노한다. 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나이가 들고, 인기가 떨어지는 과정이 그의 몸이 망가져가는 과정으로 표현된다. 열심히 무대 전에 운동하고, 자기 관리하던 헨리 자신은 이제 없고, 아네트의 탄생 이후 육아스트레스에 찌든, 점점 배가 나오는 가장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의 자기파괴적인 성향은 그의 상황을 모두 부정적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떨어지지 않는 안의 인기에 반해, 자신은 인기가 다 떨어져 집에서 육아나 하고 있다는 삐뚤어진 자존심이 그가 한 때, 너무 사랑했던 피앙세를 질투,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게 했다. 자기 파괴가 자기 연민, 피해망상으로 커져가는 과정 속에서 그가 질투, 증오, 부러움의 대상인 안와 함께 추는 광기의 왈츠는 한 여자를 이렇게라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표출된 장면이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바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심연'이다.
그는 그녀가 그의 심연을 본 사람이고, 그 심연 속에서 끌어내어 빛의 영역으로 이끌어준 사람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심연은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정복욕, 어두운 마음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그의 마음 속에 있는 킬러 마인드에 대해 알고서도 그를 사랑한 안은 그의 인생에 그를 구원할 구원자와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그의 마음 속 심연의 어두움을 구원할 사람은 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어야 했다. 자기 자신이 그 킬러 마인드를 다스리지 못하면, 그 업보가 다 자기 자식에게 갈 것이었으므로.
2. 심연의 복제품, 아네트
영화를 잘 보다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헨리의 딸로 등장하는 아네트는 puppet 인형 같은 몸과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듯한 얼굴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아네트가 '사람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네트의 사람같지 않아 보이는 것은 헨리가 아네트를 자신의 삶의 인형처럼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는 데에서 기인한다. 아네트는 헨리의 인생을 장식할 일종의 부품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헨리가 소유한 꼭두각시처럼 표현하기 위해 아네트의 몸은 인형처럼 표현된 것이다. 이런 헨리와 아네트의 관계성을 보고 있자면, 수많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가스라이팅을 생각나게 한다. 부모는 자신의 사랑의 결과물로서 아이를 사랑해왔다고 생각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아이의 입장도 들어봐야 한다. 부모가 외치는 자식을 향한 사랑이 정말 자식을 위한 사랑인지 자식을 수단화한 부모 자신을 위한 사랑인지는 아이가 자아가 형성된 이후에 결판이 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했는지는 자식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부모가 세상의 전부이지만 그 세상의 전부였던 사람들이 날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면, 부모를 향한 무조건적인 신뢰는 증오로 변질된다. 그 증오는 그 아이의 심연으로 치환된다. 고로 이 영화는 헨리의 심연이 대물림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I won't forgive and I won't forget.
아네트는 그를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을 거라고 했다. 이 대사를 통해 아네트는 자신에게 사랑이라는 거짓말로 상처를 준 아버지를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음을, 자신에게 대물림된 심연의 어두움을 이미 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Don't cast your eyes down the abyss"
영화 후반부에 헨리가 아네트에게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 이 메시지는 아네트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아네트는 그 심연을 보면, 헨리가 자신에게 했던 행동들이 떠오를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 심연의 존재를 인지한 아네트에게 이제와서 충고랍시고 하는 헨리의 대사는 적반하장의 태도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대사를 다시 풀어 해석한다면, "내가 너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그 상처를 잊고, 너의 인생을 살렴."
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상처를 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상처를 받은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헨리의 문제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겠는, 자신의 심연, 어두운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을 소유하려고 하고, 끊임없이 남을 수단화했던 것이었다. 안을 사랑하는 시간 동안 잠시 위안을 얻었지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불타는 사랑도 결국 언젠가는 끝이 나고, 자식을 위한다는 변명 아래 자식의 유명세로 자신의 인생의 꽃을 피워보고자 했지만 그 작전도 실패한다. 자신의 업보처럼 지니고 있던 심연을 남의 힘을 빌어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업보였던 심연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이 극복하고자 노력했어야 했다.
이 영화를 통해 부모가 될 자격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 단순하게 아기가 예쁘다고,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아이를 낳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부모라는 사람이 완벽무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신의 콤플렉스를 직시하고, 그 콤플렉스를 자식에게 대물림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성숙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깊이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다. 부모는 한 아이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종의 창조자이기에.
3. 총평
이 영화를 왜 뮤지컬 형식으로 만든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난 순간까지도 왜 이 영화가 뮤지컬 형식이고, 뭐 때문에 이 영화는 난해한 걸까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의 결과, 전체적인 시나리오의 분위기는 아주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인데, 계속 정신없이 몰아치듯이 영화 속 인물들이 끊임없이 노래하고, 대사도 뮤지컬처럼 노래하듯이 진행되기 때문에 시나리오의 분위기와 영화의 형식 사이에서 미묘한 이질감을 느낀 것 같다. 우울하고, 어두운 씬인데, 인물은 계속 노래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것이 얼마나 낯선 경험인가!
결국 이 영화가 뮤지컬 형식으로 진행된 이유는 이 잔혹동화를 더 잔혹해 보이도록, 관객들이 그 잔혹함을 뼈져리게 느낄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용과 형식 사이의 이질감 때문인지 그 정신없는 영화를 곱씹는 와중에도 모든 장면들이 하나하나 감정적으로 잘 각인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계속 그러고 있는 중이다.
* 해당 영화의 시사회는 씨네 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참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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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 설계도
8★/10★
전쟁 중인 유럽을 탈출해 미국에 도착한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가 한 성매매 업소에서 남성 성노동자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난 그런 쪽 아니야’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장면은 그가 훗날 마주할 해리슨의 끔찍한 성폭력을 예감하는 것이 아닐까. ‘이쪽’과 ‘저쪽’의 구획에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선언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해리슨에게 강제로 자리를 부여받는 라즐로가 느낄 비감이 도입부의 이 장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느꼈다.
재능 있는 유대인 건축가가 이주 후 미국 하층부를 전전하다 한 거부의 눈에 들어 대형 프로젝트를 맡은 후 종내에는 영광을 얻는다는 이 영화의 줄거리는 우리가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본 이방인의 성공 스토리와는 결이 다르다. 노인이 되어 휠체어에 탄 채 자신의 업적을 기념하는 전시에 참석한 그의 얼굴은 피로해 보인다. 라즐로 부부를 떠나 이스라엘로 향한 조카 조미아가 정작 라즐로 삶의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무대 위에 서서 마이크를 잡고 삼촌의 업적을 설명하는 대목은 그의 피로감에 공허함을 더한다.
‘성공한 유대인’이 있는 것은 맞다. 그들의 성취는 종종 아메리칸드림의 증거로 전시된다. 그러나 그 성공은 아름답지 않았다. 지적 허영과 과시욕, 속물적 근성의 화신, 즉 가장 미국적인 인물인 해리슨은 라즐로를 자신의 자랑스러운 수집품 정도로 대우하고, 라즐로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자 술 취한 그를 강간한다. 그는 라즐로에게 “넌 그저 밤거리 매춘부야”라고 말한다. ‘선’을 넘지 말라는 선언이다. 라즐로 프로젝트의 철학과 예산이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자 미국 사회의 주인은 돈이며, 그 돈을 가진 사람은 나라는 점, 즉 자신은 성 구매자이며 너는 성 판매자라는 점을 라즐로에게 극한 모욕을 주는 방법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라즐로는 그 충격에 휩싸여 더욱 자신의 예술적 목표(혹은 해리슨의 야망)인 건축물에만 집착하고 자신이 쌓아 올린 건축물에 유폐된 듯 영혼을 강탈당한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라즐로는 걸작을 창안했으나 영혼을 상실했고, 미국식 속물주의를 대변하는 해리슨은 사건이 폭로된 이후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으며, 늙고 지친 라즐로를 기념하는 행사에서는 과거 그를 떠난 조카가 확신에 찬 얼굴로 숙부의 업적을 칭송한다.
이 영화가 아메리칸드림의 오욕에 관한 문제 제기라는 인상을 받은 건 그래서다. 이 세 사람이 이루는 구도에서는 누구도 온전한 아메리칸드림의 주인공일 수 없다. 자수성가했다는 자부심으로 예술에 대한 심미안 없이 뭐든 돈으로만 하려는 해리슨도, ‘걸작’을 만들었으나 생기를 잃어버린 라즐로도, 홀연히 등장해 숙부의 성취‘만’ 이야기하며 뒤늦게 자신이 라즐로의 혈육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조미아도.
영화가 한창 건축이 진행 중일 때 고통받던 라즐로를 비추다가 갑자기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노쇠한 라즐로의 얼굴로 점프하는 것은 아메리칸드림에 영광은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설계의 일환일 것이다. 사람들은 완성된 건축물만 본다. 그 이면의 설계도를 상상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반대로 ‘라즐로의 아메리칸드림’에서 완성물이라 할 그의 건축물과 그로부터 피어나는 영광의 순간들을 뺀 채 그 영광의 설계도만 보여준다. 누군가의 장식품으로서만 예술가일 수 있었던 이방인, 그런 이방인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구축되지 않았을 미국이라는 허상, 설계 과정의 문제는 덮고 결과물만 바라보며 찬사를 보내는 사회가 이방인의 아메리칸드림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누구도 주인공일 수 없는 아메리칸드림의 잔혹한(brutal) 설계도 말이다. 라즐로가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추구하는 브루탈리스트였다는 점은 이 설계도가 품은 역설을 더한층 도드라지게 한다. ‘사람은 죽어도 예술은 남는다’는 통념 혹은 진실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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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 베니스국제영화제 4관왕 '스틸 라이프' 감독 작품 내 아이의 새 부모를 찾는 특별한 여정 '노웨어 스페셜' 12월 29일 개봉?? STORY 서른네 번째 생일을 맞은 창문 청소부 ‘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 바로 네 살짜리 아들 ‘마이클’에게 새로운 부모를 찾아주는 것. 세상에 혼자 남을 아이를 위해 ‘존’은 특별한 부모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아직 어리지만, 말도 잘 듣고 예절도 잘 지켜요. 내 아이를 키워줄, 새 부모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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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바꿔 현재를 구하라! 다시 한번 간절함이 보내온 신호! 김은희 작가 [시그널] 리메이크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