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3-05-04 21:13:33
[JIFF 데일리] 인생은 찾는 즐거움의 연속이니까요
동네책방 폴란
<동네책방 폴란>의 주인 교스케씨가 말했듯, 인생은 찾는 즐거움의 연속이고, 이는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찾은 이 보물 같은 작품에 들어맞는 말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고통받던 2021년 2월, 도쿄의 작은 서점 '폴란'(Polan) 역시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35년이라는 세월을 뒤로하고 '폐점'을 결심했다. 2021년 2월, 영업 종료를 한 달밖에 남겨두지 않은 않은 시점에서도 언제나처럼 '새' 중고책을 선반에 채워 넣던 주인 부부는, 35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그들의 일상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낸 것이다.
처음 헌책방의 영업 등록을 하러 갔을 때, '교스케' 씨의 머릿속에 아버지가 자신에게 자주 하던 말이 떠올랐다고 한다. '챠란포란'(ちゃらんぽら). 이 헌책방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하는 방식을 뜻하는 이 단어처럼 시작되었을지 몰라도, 35년간의 세월을 거치며 점차 '다양성'을 존중하는, 편중되지 않고 모든 걸 수용하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운영되어왔다. 심지어 폐점이라는 마지막 순간까지 '교스케' 씨는 팔다 남은 책만 두는 것 대신, 새로운 '헌책'으로 선반을 채워 넣으며 손님들에게 찾는 즐거움을 안겨 주었으니 말이다.
주인 '교스케' 씨는 계산대 옆에 자리 잡은 고릴라 인형, 일명 고리쨩을 보러 매일 가게를 찾는 손님을 보며 '헌책방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고 말한다. 팬데믹이라는 재앙으로부터 자신의 '폴란'은 지키지 못했지만, 종이책은 지키고 싶다는 그에게 있어 '종이책'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전자책은 종이책을 대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종이책과의 대결에서 참패하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재앙 이후, 사람들은 OTT로 인해 극장에 가야 할 이유를 굳이 찾지 않고 있다. 많은 감독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작품은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 설파하지만,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조차 관객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극장이 마주한 현실이다. VR 놀이기구가 대체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의 스릴, 전자책은 가질 수 없는 종이책의 질감. 영화도, 극장도 결국 "Cinema"의 의미를 다시 찾아야 할 것이다.
"책은 돌고 돈다"라는 3부 제목처럼, 책방에서 주인 부부와 직원 '유키' 씨의 사랑을 듬뿍 받던 책들이 폐지 처리장에서 푸대접 받을 때, 이 책들은 더 이상 '책'으로써의 가치는 남아있지 않지만, 결국 다시 제 역할을 찾아갈 것이다. 마치, 직원 '유키'씨가 '폴란'의 폐점 이후 자신의 취향을 담은 '책방'을 연 것처럼 말이다.
화려하진 않아도 누군가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반추할 수 있는, 나에게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 그리고 평양냉면보다 슴슴한 이 영화는 정말 매력적인 작품이었으며, 최후의 보루로 '푸대접' 받던 이 작품을 전주에서 만났다니, 정말 인생은 찾는 즐거움의 연속이지 아니한가?
동네책방 폴란(Polan)
나카무라 코타
일본 | 2022 | 75min | DCP | Color/B&W | Documentary | G | International Premiere
시네마천국 - <동네책방 폴란> -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시간표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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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기완 | 사랑하기에는 둘의 고통이 너무 달랐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머니 '옥희'(김성령)의 죽음과 함께 중국에서의 터전마저 잃어버린 탈북자 '로기완'(송중기). 그는 마지막 재산과 희망을 쥐어짜서 벨기에 브뤼셀로 향한다. 난민으로 인정받은 후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하지만 그의 세상은 여전히 혹독하다. 벨기에 정부의 난민 심사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진행되고, 잠잘 곳도 직업도 없는 기완은 브뤼셀의 길거리에서 간신히 살아남는다.
어느 날, 기완은 무인 세탁실에서 눈을 붙이던 중 어머니와의 추억을 간직한 지갑을 도난당한다. 그는 경찰서에서 범인 '이마리'(최성은)를 만나고, 마리는 황당한 부탁을 한다. 자기가 전과가 있으니 잃어버린 금액을 줄여서 진술해 달라는 것. 기완은 지갑이 있는 곳에 바로 데려가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그렇게 그는 미처 예상 못한, 마리와 함께 하는 삶에 첫 발을 내딛는다.
<로기완>에게 건 기대
근래 넷플릭스에서 한국 영화를 보면 실망스러운 작품이 많다. 그러다 보니 넷플릭스에서 공개되는 작품에 대한 선입견도 생겨난다. 이번에도 기대보다 못할 것이고, 단순한 킬링타임 영화일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것. 배우나 제작진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는 완성도로 인한 나비효과다.
<로기완>은 조심스럽게 다른 기대를 걸어볼 만한 작품이었다. 소재를 다루는 관점이 독특했기 때문. 물론 탈북자들의 어려움 자체는 새롭지 않다. 차인표 주연의 <크로싱>(2008)이 대표적이다. <로기완>은 달랐다. 한국에 입국하려는 탈북자가 아니라 유럽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탈북자를 다룬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기대는 일부 충족된다. <로기완>은 통상적으로 고려하지 못했거나 조명받지 못한 현실을 드러낸다. 인간답게 살려고 북한을 탈출했지만, 또다시 '거주할 권리'와 '떠날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아이러니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탈북자의 절박함과 억울함을 연기한 송중기의 연기력도 시청자의 시선을 붙들기에 충분하다.
대신 한계도 명확하다. <로기완>은 한 탈북자의 사연을 보다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하기 위해 장르를 전환한다. 그러나 탈북자의 난민 신청기가 멜로로 전환되는 분기점을 보여줄 방식을 잘못 선택했다. 그 결과 <로기완>은 시청자를 설득할 힘까지는 보여주지 못했고, 끝내 기대를 저버린다.
생존의 의미를 묻다
<로기완>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생존'이다. 구체적으로는 '생존의 의미'를 묻는다. 시작부터 카메라는 로기완의 생존기를 화면에 담는다. 벨기에 정부가 난민 신청을 받아주기 전까지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완. 그는 공중화장실을 숙소로 삼고, 쓰레기통을 뒤져서 밥을 먹고, 공병을 모아 번 푼돈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이 시퀀스는 담담하기에 강렬하다. 일련의 사건이 픽션보다 팩트에 가까울 것이기에 울림이 더 크다.
중반부터는 그의 생존기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묻는다. 자기 때문에 어머니가 죽었다고 자책하는 기완. 그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어머니의 유언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마리의 아버지 '이윤성'(조한철)은 정반대의 조언을 한다. 사람답게 사는 것은 지금 처지에서 사치가 아니냐고. 일단 살아남는 것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기완의 이야기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난민 심사 과정이나 고기 공장에 불법으로 취업하는 장면은 문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사투를 보여준다. 반면에 쓰레기를 찾아 먹던 기완이 멀끔하게 고기를 구워 먹고, 마리와의 사랑을 싹 틔우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는 대목은 그가 어머니의 유언을 따르려는 노력을 상징한다. 즉, <로기완>은 그가 어떤 생존을 선택하는지를 뒤쫓는 영화인 셈이다.
멜로가 등장하는 이유
이에 더해 영화는 기완의 선택에 담긴 의미를 확장하려 한다. 그 일환으로 인간다운 삶을 기완의 마지막 말마따나 "떠날 권리"로 재정의한다. 이는 이중적인 말이다. 일단 물리적인 의미가 있다. 당장 탈북은 그 자체로 '떠날 권리'를 되찾기 위한 사투다. 또 이 싸움은 탈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난민 심사에서 탈락하면 중국으로 강제 송환되고, 심사가 끝날 때까지는 벨기에를 떠날 수 없으니까.
동시에 심리적인 의미도 엿볼 수 있다. 기완은 어머니가 남긴 지갑과 돈을 자기 목숨만큼이나 소중히 여긴다. 도난당한 지갑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벨기에 마피아들에게 대책 없이 달려들 정도다. 그의 몸에 남은 흉터는 그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인해 어머니를 잃은 고통과 죄책감을 항상 상기한다. 이렇게 보면 그의 "떠날 권리"는 마음의 상처를 딛고, 자기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삶을 말한다.
<로기완>은 그 연장선상에서 마리를 등장시킨다. 사격 선수였던 마리는 전지훈련을 간 사이에 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안락사로 사망하자, 그 책임을 안락사에 동의한 윤성에게 돌리며 그를 비난한다. 가족을 한 순간 잃은 트라우마로 인해 그녀는 선수 생활을 그만둔 후 마피아의 도박장에서 이용당한다. 그녀 몸에 있는 문신은 기완의 흉터럼 어머니를 뜻하고, 문신이 있는 한 그녀 역시 트라우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 공통점 덕분에 <로기완>의 장르는 멜로로 바뀔 수 있다. 심리적으로 '떠날 권리'가 없는 남녀. 그 둘은 악연 또는 운명으로 만나 서로의 버팀목이 된다. 기완에게 마리는 취직하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마리 역시 기완 덕분에 약물을 끊고 마피아로부터 벗어난다. 그들의 사랑을 탈북자, 난민뿐만 아니라 자기 과거를 떠나고 싶은 모든 이들의 발악 혹은 절박함의 표출로 읽을 수 있는 이유다.
공통점을 찾기에는 너무 먼 남녀
그런데 <로기완>의 장르 전환은 매끄럽지 않다. 기완과 마리의 이야기를 하나로 이어주는 과정이 부족하기 때문. 물론 따로 놓고 보면 둘의 이야기는 분명 인상적이다. 탈북자로서 고통받는 기완의 삶도, 마피아에게 협박당하고 마약을 끊지 못하는 마리의 삶도 비참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나 <로기완>은 둘의 아픔이 같은 층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간과했다. 기완의 아픔은 직관적이고, 현실적이다. 일단 한국 시청자는 탈북자라는 신분 때문에 그의 고난에 쉽게 이입할 수 있다. 또 미처 몰랐던 현실은 그의 난민 신청 심사 과정을 더 험난하게 만든다. 일례로 일부 조선족이 탈북자로 위장해 유럽 국가에서 난민 지위를 얻으려 했던 실제 시도 때문에 벨기에 정부는 준비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한 서류와 증거를 요구한다.
반면에 마리의 사연은 기완에 비해 추상적이고, 거리감이 느껴진다. 마피아와 얽힌 전직 사격 선수라는 설정과 안락사 문제로 아버지와 빚는 갈등. 이 이야기는 피부에 그리 와닿지 않는다. 탈북자가 겪는 고난에 비하면 현실 감각과 무게감이 필연적으로 부족한 이야기이기 때문. 그러다 보니 기완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따라갈 경우, 마리의 이야기는 더욱 동떨어진 세계처럼 느껴진다.
둘 사이의 간극을 줄이려는 시도도 눈에 띄지 않는다. 기완의 사투를 긴 호흡으로 따라가는 동안, 그녀의 사연은 짧은 플래시백으로만 암시된다. 복선은 후반부에 가서야 회수되고, 그녀가 마피아와 손잡게 된 전사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처럼 두 주인공 중 한쪽이 비중도, 분량도 없으니 <로기완>의 멜로는 전체 분위기에 끝내 녹아들지 못한다.
긴장감도 부족하다
멜로 자체도 특색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부모의 반대로 난관에 빠지는 전개는 식상하다. 위기를 고조하는 과정은 다소 급작스럽고 작위적이다. 결국 기완과 마리가 사랑을 키우고 재확인하는 순간순간의 긴장감도, 설득력도 약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 난민 심사가 진행되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마리로 인해 브뤼셀과 베를린 마피아 간의 알력 싸움이 커지고, 그로 인해 마리와 기완은 목숨까지 위험해진다. 그런데 마리의 서사가 애초에 빈약하다 보니, 브뤼셀 마피아의 대장인 '씨릴'(와엘 세르숩)의 동기나 목적에 대한 설명 역시 충분치 않다. 그러다 보니 최후반부에는 기완도, 마리도, 씨릴도 무리수를 남발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로기완>은 분명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탈북이라는 행위에 새로운 의미를 덧대 이야기를 확장하려는 시도 자체는 남달랐다. 단지 메시지에 힘을 주려는 의도가 과했고, 그 대가로 지향점이 불분명해졌을 따름이다. 특히 영화의 시작과 끝을 비교하면 괴리감이 크다. 지극히 영화적인 결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중간 과정을 납득시키지 못했으니 그 또한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만약 로기완의 난민 심사 과정에 온전히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로맨스를 양념으로 활용하고, 마리도 조연 중 하나였다면? 유럽 내에서 살아가는 탈북자 사회, 조선족과의 갈등 관계를 더 부각했더라면? 그러면 소재의 신선함을 온전히 살려낸, 더 특색 있는 영화가 아니었을까? 수많은 멀티버스를 상상할 수 있기에 <로기완>의 결과물은 더욱 아쉽다.
Poor 형편없음
시작과 의도는 좋았던 탈북자의 멜로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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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WIFF 데일리] 보이는 자에서 보는 자로
시선의 방향
그리스로마신화에 아르고스(Argos)라는 이름의 괴물이 등장한다. 그는 온몸에 붙어있는 100개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보는 자다. 아르고스는 제우스의 애인인 이오를 감시하다 제우스에게 죽임을 당하는데, 헤라는 그 100개의 눈을 공작의 깃털에 붙여준다. 모든 것을 보는 눈은 뛰어난 감시자를 뜻한다. 판옵티콘의 감독자들은 죄수들의 모든 것을 본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 있는 자들은 결코 위를 볼 수 없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항상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관음되던 여성이 고개를 들고 관찰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는 곧 비난으로 이어진다. 은밀하게, 자기들끼리 관음하고 관찰하는 '보는 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다 한순간에 '보이는 자'의 위치에 서버린 관객들은 당황스럽다.
아시아단편 단편선은 아시아 여성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 중 경쟁에서 선정된 작품들을 모아둔 섹션으로, 단편선 1부터 4까지 나뉘어 있다. 단편선 1에 속한 몇 작품을 살펴보자. 작품들에서 여성은 더 이상 '보이는 자'로만 머무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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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고 싶지만(Crack)(2021)
감독 : 이현주
상영시간 : 23분
시놉시스 : 25년 동안 혼자 살아온 민영은 함께 살게 된 조카 연정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만, 연정의 행동 하나하나가 거슬리기 시작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잘 지내고 싶지만>의 민영과 연정을 보자. 민영은 연정이 오기 전 집을 깨끗이 닦고 연정을 맞을 준비를 한다. 연정의 약봉투를 세심히 살피고, 배탈이 난 연정을 위해 죽을 배달시켜 준다. 연정은 연정대로, 민영이 기침을 하자 쌍화탕을 먹어 보라고 권하고, 민영의 몫까지 삼겹살을 사온다. 민영은 엘리베이터도 없고 방도 한 칸뿐이지만 자본과 권력을 가진 집 주인으로서 객식구인 연정을 관찰하고 살핀다.
그러나 민영은 혼자 산 사람이다. 혼자 오래 살아온 사람이 느끼는 양가감정이 있다. 혼자 있으니 쓸쓸해서 누가 옆에 있었으면 싶은 감정과 누구도 내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혼자만의 공간을 지키고 싶은 감정. 홍성은 감독의 <혼자 사는 사람들>(2021)에서 혼자 밥 먹고 혼자 TV보는 진아처럼, 민영도 혼자 사는 게 익숙한 사람이다. 혼자 산다는 것은 내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제가능한 삶에는 특별한 사건이 있지 않는 한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다.
민영의 평화로운 삶에 조카 연정의 침입은 미세한 균열(Crack)을 만들어낸다. 호기롭게 '잘 지내보자'고 했지만, 그럴 수 없다. 이제 민영의 집에는 연정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25년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타인의 눈. 그 눈으로 민영은 관찰당하기 시작한다.
아플 때 쌍화탕을 데워주었더라도, 밤에 시끄럽게 뭘 먹지 않았어도. 아침에 잠에서 깬 민영이 TV를 켰을 때 연정이 인상을 찌푸리지 않았어도, 화장대 앞에 누워있는 연정의 다리를 치웠을 때 연정이 몸을 돌리지 않았어도 민영은 견디기 어려웠을 거다. 민영은 통제불가능한 연정의 눈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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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The Dress)(2022)
감독 : 스팡팅
상영시간 : 30분
시놉시스 : 리얼돌 호텔에서 일하는 원치는 어느 날 이상한 손님을 맞는다. 그는 매 방문마다 인형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 놓고 떠난다. 원치는 리얼돌이 되고픈 욕망을 난생처음 느끼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드레스>는 리얼돌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과 그 호텔을 청소하는 청소부의 눈으로 호텔을 관음한다. 호텔 청소부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봐도 못본 척, 알아도 모른 척, 호텔을 드나드는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모른 척 해주는 사람이다. 사람일까? 어쩌면 NPC라고 볼 수도 있겠다. 여기서 다시 <프리 가이>의 가이를 소환해보자. NPC였던 가이는 자신이 살던 세상의 수상함을 깨닫고 세상 밖 현실의 진짜 사람과 소통하게 되면서 감정을 깨닫는다.
호텔이든 모텔이든 여관이든 묵을 일이 생기면 이따금 청소하는 사람들을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내 눈에 보이는 자들이며 그들의 눈에 나는 보이지 않는다(못본 척 한다에 가깝지만). 리얼돌 호텔을 찾는 자들 역시 자신은 볼 수 있지만 인형은 절대 자신을 볼 수 없으므로 시선으로부터 자유롭다. 그렇기에 이곳에서는 무슨 짓이든 가능하다. 죽은 어머니의 드레스를 입히는 것까지도 할 수 있다.
청소부 원치는 리얼돌에 빨간 드레스를 입혀놓고 떠나는 남자가 궁금해진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원치는 보는 자다. 섹스돌에 드레스를 입히는 괴상한 취향을 가진 남자를 훔쳐보는 자. 그는 원치의 존재를 모르고 보여지는 자로 전복된다.
호텔에 전기가 끊겨 손님을 받을 수 없게 된 날, 원치는 그의 예약을 취소하지 않고 그가 이용할 방에 들어가 옷을 벗고 기다린다. 그는 보는 자로 들어갔으나 인형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이는 자로 전락한다. 그렇기에 그는 호텔을 황급히 떠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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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중의 탑(The Top of the Tower)(2022)
감독 : 박은새
상영시간 : 22분
시놉시스 : 반지하에 살고 있는 지숙이네 가족. 어느 날 십자가에서 빛이 나는 광경을 목격하고 그 빛을 다시 보기 위해 이사를 결심하게 된다.(출처: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사는 반지하 집은 침수피해만 겪은 게 아니라 지나가는 행인들이 창문에다 대고 노상방뇨하고 구토하는 등의 일상적인 테러를 겪는다. 사람이 살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화가 아니더라도 반지하 성범죄, 반지하 불법촬영 등의 뉴스기사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시선은 권력을 가진다.
수험생인 지숙의 가족도 반지하에 산다. 지숙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갑자기 방에 걸어둔 십자가에서 빛이 나더니 천장으로 튀어오르는 것을 목격한다. 아! 드디어 성령을 본 것이다. 지숙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는 성령을 본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간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신도는 성령이 십자가에서 빛나다가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이후 아들이 연금복권에 당첨되었단다.
하지만 지숙은 반지하에 산다. 목사가 이르기를, 성령이 하늘로 올라가야 간절한 기도가 하나님께 닿을 텐데, 지숙네 가족은 너무 낮은 곳에 있다. 이들이 반지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지숙이 잘 되는 것이다. 지숙은 서울대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사실 택도 없지 싶다.
목사는 이 가족에게 옥탑방을 소개해준다. 엄마 아빠는 있는 돈 없는 돈, 친구 친척 사돈의 팔촌의 돈까지 끌어다가 무리하게 이사를 한다. 이삿짐 비용이라도 아껴보려고 세 가족이 죽도록 짐을 올린다. 이 집도 역시 엘베 없는 집이다.
마지막 매트리스만 올리면 이사도 끝인데, 문 앞에 다다랐을 때 지숙은 또 다시 성령을 목격한다. 지숙을 가여이 여긴 하나님의 은혜일까. 지숙은 성령의 빛을 따라 옥상으로 뛰쳐나간다. 그러나 지숙의 눈 앞에는 거대한 고층건물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리고 하늘에서 빛나는 것은 성령이 아니라 폭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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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단편 단편선1에는 위의 세 작품 외에도 <로봇이 아닙니다.>와 <거미>까지 총 다섯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거미>는 에도시대에 강도의 습격으로 부상당한 동생의 복수를 하는 여자 이야기이고, <로봇이 아닙니다.>는 자율주행자동차가 백인이 아닌 여성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여 발생한 사고를 다룬다. 서두의 아르고스 이야기는 <로봇이 아닙니다.>에서 가지고 왔다. 연구에서 과소대표되고 비표준화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선의 방향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묶어보기로 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아시아단편 단편선1을 상영하던 날, 영화제 현장에서 한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아마 동시간에 나와 함께 영화관에 있었던 분들이 계실 것이다). 시선을 집중시킬 만큼 제법 큰소리였다. 양손으로 성기를 쥐고 흔드는 짓을 몇십 분은 한 것 같은데(하필 나는 그 남자 근처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는 중이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옛날 같았으면 여자들이 꺅 하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그는 당당하게 성기를 흔들고, 놀란 여성들을 보는 자로 군림하고 싶었겠으나 딱하게도 현장에서 그는 보이는 자, 아무리 봐 달라고 소리를 질러도 그 누구도 대꾸해주지 않는 자가 되어 있었다.
자동차 창문 열고 따라오며 똑같은 짓을 하던 성인 남성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던 교복 입은 어린 여자 아이도, 그런 사람을 보니 딱하더라는 글을 쓰는 어른 여자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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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2022년 8월 27일 14:00~15:4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1관
2022년 8월 29일 16:30~18:15 /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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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2주 차, 최신 씨네 뉴스
제78회 칸영화제에 초청될 것으로 점쳐졌던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의 출품이 불발되었습니다.
‘문화일보’에 의하면, 투자배급사인 CJ ENM 측은 “하반기 공개 예정이며, 현재 후반 작업이 진행 중”이라 밝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어쩔수가없다>와 더불어, 나홍진 감독의 신작 <호프> 역시 미완성으로 출품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롯데엔터테인먼트는 <전지적 독자 시점>, <경주기행> 두 편을 출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전지적 독자 시점>은 약 300억 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으로, 이민호, 블랙핑크 지수, 안효섭 등이 출연하였습니다.배우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이 주연을 맡은 <경주기행>은 막내딸 경주를 살해한 범인의 출소 날, 복수를 위해 경주로 떠난 네 모녀의 여행기입니다.
제61회 백상예술대상 개최일 및 수상 후보 공개
제61회 백상예술대상이 내달 5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최됩니다.
개최일과 함께 방송/영화/연극 부문 수상 후보를 공개했습니다.심사는 2024년 4월부터 2025년 3월까지 방영되거나 공개/공연된 작품을 기준으로 합니다.
영화 부문 작품상 후보로는 <대도시의 사랑법>, <리볼버>, <장손>, <전,란>, <하얼빈>이,감독상 후보로는 <아침바다 갈매기는> 박이웅 감독, <리볼버> 오승욱 감독, <하얼빈> 우민호 감독, <대도시의 사랑법> 이언희 감독, <탈주> 이종필 감독이 올랐으며,
외에 최우수연기상, 조연상 등의 수상 후보가 공개되었습니다.
<트론: 아레스> 트레일러 첫 공개
‘트론’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 <트론: 아레스>의 첫 번째 트레일러가 공개되었습니다.
<트론: 아레스>는 <말레피센트 2>를 연출한 노르웨이 감독 요아킴 뢰닝이 맡았으며,2025년 10월 10일 IMAX를 포함한 극장에서 개봉할 예정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번 작품은 고도로 발달한 프로그램 '아레스'가 디지털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보내져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면서,인류가 AI 존재와 처음으로 조우하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며, 자레드 레토, 제프 브리지스, 그레타 리, 에반 피터스, 하산 미나즈,
조디 터너-스미스, 아르투로 카스트로, 카메론 모나한, 질리언 앤더슨 등이 캐스팅되었습니다.
<데스 스트랜딩> 실사 영화, 감독 확정
A24에서 세계적으로 성공한 코지마 히데오의 게임 <데스 스트렌딩>을 2년 간의 개발 끝에 실사 영화 제작과 감독을 확정 지었습니다.
실사 영화 감독은 <피그>를 연출한 마이클 사노스키가 맡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게임에는 노먼 리더스, 매즈 미켈슨, 레아 세이두, 기예르모 델 토로, 엘르 패닝, 마거릿 퀄리 등 걸출한 배우들이 출연해 화제를 모았으나,해당 캐스팅이 실사 영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질지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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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까운 작품에서 빛나버린 배우들의 연기력
어떠한 정보도 없이 조승우가 나오는구나! 사극이구나! 라는 점만 알고 왔던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이 작품이 명성황후, 민비에 대한 이야기인 줄 꿈에도 모르고 봤다. 극이 시작하면서 민자영이 어쩌고 이래서 민,,,자영,,? 명성황후? 하고 뒤늦게 깨달았고, 역사왜곡은 이해하더라도 과연 그 입장 차이를 잘 풀어낼 수 있을지 불안해 하며 본 작품이었다.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 시놉시스
세상에 존재를 알리지 않은 채 자객으로 살아가던 무명은 어느 날,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바로, 피비린내에 찌든 자신과 너무나 다른 여인, 자영을 만나게 된 것. 하지만 그녀는 곧 왕후가 될 몸으로, 며칠 후 고종과 자영의 혼례가 치러진다. 무명은 왕이 아닌 하늘 아래 누구도 그녀를 가질 수 없다면, 자영을 죽음까지 지켜주겠다고 다짐하고, 입궁 시험에 통과해 그녀의 호위무사가 되어 주변을 맴돈다.
한편, 차가운 궁궐 생활과 시아버지와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하루도 안심할 수 없는 나날들을 보내던 자영은 무명의 칼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따뜻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외압과 그로부터 조선을 지키기 위한 자영의 외교가 충돌하면서 그녀를 향한 무명의 사랑 또한 광풍의 역사 속으로 휩쓸리게 된다.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왜곡이야 그렇다치고,, 그럼 개연성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명성황후, 민비에 대한 재현은 언제나 역사왜곡 논란이 거듭된다. 왜냐면 그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기 때문이다. 개혁 개방 정책을 한 왕후를 좋게 보기도 하지만 그 방향은 옳았을지 모르지만 그 방법은 옳지 못했기에 나쁘게 평가를 하기도 한다. 더불어 을미사변으로 시해됐을 때 목격자들 마저 모조리 몰살당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과정에 대해서 상세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 그 소재는 미디어 재현으로서 굉장히 적합한 소재이면서도 역사 왜곡이 너무나도 쉽게 될 수밖에 없는 소재이기도 하다.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이처럼 논란이 많은 명성황후, 민비를 소재로 택햇기 때문에 역사 왜곡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왜곡을 한다 하더라도 그 왜곡된 내용 안에서는 개연성이라도 갖춰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보는 내내 도대체 저 둘은 왜 사랑에 빠진 것인지 알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번 봤는데...? 수애 정도의 미모면 물론 한 눈에 반할 수도 있겠지만 저렇게까지 목숨바쳐 사랑할 일인가? 저렇게까지 식음을 전폐할 수 있는 것인가? 사랑이라는 큰 주제 자체에서 이미 개연성을 잃어버려서 영화를 보는 내내 큰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불필요한 장면들이 너무 많았던 작품
주제 자체로도 개연성이 없는데 장면장면도 개연성이 없었다. 불필요한 장면들이 너무 많이 나왔다. 무명이 자객이고 무술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굳이 저렇게 티나는 CG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휘영청 달빛이 쏟아지는 바다 위 쪽배에서 칼로 싸우는데,,, 무슨 만화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 물 마시며 보다가 사례 들릴 뻔 했다. 그리고 연희장에서 뜻하지 않게 펼쳐진 대련에서 갑자기 빙판 CG라니.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격동적이고 화려한 무술을 보여주고 싶다면 저런 CG 말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는게 훨씬 더 임펙트가 있었을텐데 안타까웠다.
또한, 무명을 의식하기 시작한 고종이 무명의 자존심을 깎아 내리기 위해 일부러 무명을 침실밖에서 호위를 하게 하고 자영과 관계를 갖는다. 굳이,,? 이런 질투유발작전을 펼칠 이유가 있었을까? 이렇게 정말 쓸데없는 장면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잇어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안타까운 작품에서 빛나버린 배우들의 연기력
이렇게 안타까운 작품에서 더 안타까웠던 점은 저렇게 평면적인 캐릭터들을 배우들이 너무 연기를 잘 소화해냈다. 진짜 너무 안타까웠다. 어떻게 조승우, 수애를 데리고 와서 이런 작품에 출연시킬 수 있었을까? 솔직히 조승우, 사극, 액션, 멜로 이 조합을 보고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보는 내내 손발이 오글거리고 대본을 보고 출연을 결심한 것이 맞을까? 어디 누구한테 협박당해서 출연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었던 작품이었다.
작품은 정말 안타까웠지만 그 와중에 배우들은 무명과 자영의 캐릭터에 온전히 녹아들어서 그들은 빛이 나고 있었다. 하지만 빛이 난다고 해도 이 영화는 추천할 수가 없다. 킬링타임용으로도 아까운 작품이니 말이다.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은 조승우 필모 깨기 프로젝트가 아니었다면 보지 않았을 작품이었을 텐데,, 정말 안타깝고 씁쓸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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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에 관한 마지막
INTRODUCTION.
“우리는 여왕을 사랑하며 자랐습니다” -비틀즈 폴 매카트니-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왕좌에 머무른 퀸 엘리자베스의 다양한 얼굴을 마주하다.
POINT.
✔️ 시대의 아이콘,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풋티지를 실컷 볼 수 있는 영화
✔️ 영국 왕실에 관심 혹은 지식이 있다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영화
✔️ 여왕의 재위 기간이 워낙 길다 보니, 윈스턴 처칠부터 폴 매카트니, 이건희, 마릴린 먼로까지 다양한 얼굴이 등장합니다.
✔️ 2021년 사망한 로저 미첼 감독의 마지막 영화
시대의 아이콘, 아주 독특하게 자리한
이 영화는 눈을 감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사진으로 시작한다. 늘 눈 뜬 모습만 보았던, 아주 오랫동안 삶 전체가 공적 영역에 드러나 있던 사람의 눈 감은 모습은 낯설다. 영화는 이내 엘리자베스 여왕을 닮은 풋티지 영상을 성실하게 수집해 보여준다. 편집점이 짤막하게 구성되어 있고 음악을 현란하게 써서, 여러 편의 뮤직비디오를 연달아 보고 있는 기분마저 든다. 일대기적으로 구성하기보다는, 다양한 면을 보여주고 싶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마치 원석을 다양한 면으로 커팅한 것처럼, 여왕 생애의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주 독특한 인물이다. 물론 여왕이라는 직함 자체가 그렇지만, '군주'라는 단어 자체의 아우라가 많이 사라진 시대에, 아이콘으로 기능하면서도 역할을 톡톡히 해내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드레스를 입고 손을 흔들며 웃어 보이는 역할도 하고, 군복을 입고 비행기 옆에 서 있거나 총을 쏘는 모습으로도 남았다. 너무 앳되어 보이는 비틀즈에게 훈장을 건넸던 역할도, 윈스턴 처칠부터 블레어, 보리스 존슨까지 다양한 총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동시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운운하던 이전의 시대에 작별을 고한 후, 영연방(Commonwealth)이라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다양한 국가를 순방하는 것 또한 그의 역할이었다. 구한말에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까지의 역사에서 항상 일본보다 선진 문화 국가였던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지만, 많은 나라들이 여러 실리적인 혹은 상징적인 이유로 영연방이라는 국제기구에 소속을 남겨두었다.
보고 있노라면 그가 '여'왕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데, 부드럽고 우아한 미소를 짓는 그 얼굴을 보면서 다양한 국가들이 어떤 이유로든 영연방이라는 국제기구에 소속을 두기로 한 데에는 그의 아우라와 영향력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겠다 싶은 것이다. 식민지배라는 공격적이고 비인간적인 제도 이후에, 남성의 얼굴을 하고 오는 지도자보다는 분명 좋은 선택지였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또한 그의 선택은 아니었다. 에드워드 8세가 사랑을 위해 왕위를 포기하면서 동생이 갑작스럽게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동생 즉 조지 6세 또한 "너무 일찍"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엘리자베스 또한 마땅히 준비할 만한 기간을 갖지 못한 채로 어느 날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최초의 대관식을 포함하여, 여왕의 생애가 선형적이지 않은 형태로 영화 속에서 흩날린다. 영국 왕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해도 느낄 수 있다. 71년이 얼마나 긴 시간인지를. 그리고 그 내내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이콘으로서 얼마나 건재했는지를.
시대의 아이콘, 이제는 끝난 시간의
그러나 여왕의 시대는 끝났다. 영연방을 순회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모습은 분명 우아하고 그의 정치적 리더십을 느낄 수 있지만, 식민지였던 땅의 사람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전통 춤을 추며 여왕을 맞이하는 장면 위로 "down on my knees(무릎을 꿇고)"라는 곡이 흘러나오는 것은, 식민지 출신으로서 영 편치 않다. 독일 폭격에 대해, 독일을 방문했던 여왕에게 계란이 던져지는 모습 또한 풋티지에서 빼먹지 않았다.
전쟁에 선은 없으니까. 히틀러가 절대악이었다면 문제는 간단했겠지만, 그렇지 않았으니까. 입헌 군주제의 여왕으로서 엘리자베스가 자기 역량을 아무리 발휘하고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한다 한들, 전쟁의 시기를 보낸 입장에서 그도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의 뛰어난 역량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시대는 이제 달라졌다. 그런 의도가 담긴 걸까. 이 영화에는 여왕에 대한 경의와 인정이 아닌 마음들이 느껴지는 장면들이 종종 있었다. 대관식 장면 위로 흐르는 "hero", 심지어 데이비드 보위 원곡 버전도 아닌 것. 여왕이 걷는 장면과 뒤섞여 등장하는 비너스 상들. 뼈 있는 농담을 의도했겠으나 실없이 느껴지는 선택에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가십으로 소비되어 더욱 안타까운 그의 자식 농사 이야기도 펼쳐진다. 다이애나에 대해서는 짧게 짚고 넘어가는 정도이지만, 찰스 3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엘리자베스 2세가 수행한 아이콘으로서의 역할을 그에게 기대하는 사람도 없었겠지만, 역시나 기대할 수 없음이 확인된다. 그럴수록 엘리자베스 2세의 역량이 빛나기는 했구나 싶다.
영화 <스펜서>까지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엘리자베스 2세의 공적 인생에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죽음으로 수렴되는 일련의 상황들은 분명 치명적이었다. 늘 이 부분만 잘라 다이애나 혹은 찰스, 심지어 카밀라에 더 주목하여 이야기되던 것을 엘리자베스의 공적 인생을 쭉 연결한 지점에서 보는 건 독특한 경험이었다.
마지막에 관한 마지막
늘 정해진 원칙에 따라야 하는 엄숙한 왕실의 모습이었지만,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의 시대로 점차 친근한 모습도 많이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 또한 시대의 요청에 응한 것이었다. 경마 결과를 이야기하며 해사하게 웃는 모습, <피터팬>의 저자인 제임스 매튜 배리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회상하는 모습을 보며 여왕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고, 긴 세월을 산 사람이었음을 동시에 느낀다.
역량이 뛰어난 시대의 아이콘인 동시에 한 인간. 이제 그 시대는 갔고, 인간도 떠났다. 찰스 3세는 개인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들로 엘리자베스 2세의 반만큼도 사랑받기 어려워 보이지만, 설령 그가 아주 매력적으로 자기 역할을 수행했다 한들 시대가 이미 가버렸으니 엘리자베스 2세 같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미 가버린 시간의 빈 자리를, 이미 우리 곁을 떠난 감독의 손길로, 짧고 급한 호흡으로 뒤척여 보는 것은, 마지막에 관한 마지막이라는 관점에서, 꽤나 씁쓸한 경험이었다. 지금보다 수십 년 후에 더 유의미해질 기록이 아닐까.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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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쇼스키 자매가 창조한 환상적인 세계
넷플릭스 드라마 〈센스8〉은 공통적인 것을 지키는 싸움에 관한 이야기다. '공통적인 것'은 보통 경제적 논의에서 언급되는 개념이다. 토지, 재화, 이윤과 이를 둘러싼 관계성 등을 특정인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모두의 것으로 가져오는 방식을 논하는 과정에서 이 용어가 활용되어 온 것이다.
〈센스8〉은 감정, 느낌, 감각 그리고 몸으로 공통적인 것의 영역을 확장한다. 호모 센소리움(일명 센세이트)은 같은 날 태어난 8명의 존재가 하나처럼 느낄 수 있는 종족이다. 베를린에 사는 볼프강이 총에 맞으면, 인도에 사는 칼라도 그와 같은 아픔을 느낀다. 선과 윌이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잠기면, 모두가 함께 슬퍼한다. 쾌락도 마찬가지다. 각자의 공간에서 섹스하며 만들어지는 쾌락이 모두의 섹스와 쾌락으로 확장되는 장면은 지금껏 본 최고의 베드신이었다. 지극히 자극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센세이트들의 황홀한 베드신은 우리가 감정, 느낌, 감각, 몸을 공유했을 때 얻게 될 자유의 크기를 가늠케 해준다.
이 드라마에서 퀴어, 여성 서사가 도드라지는 건 이 때문이다. 오랫동안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어 자신만의 감정, 느낌, 감각, 쾌락을 계발해 깊이를 더해온 이들은 센세이트가 담지하는 가능성의 중심에 있을 수밖에 없다. 더불어 드라마는 이성애 남성성이 어떻게 이들과 어우러지며 화합하는지도 보여준다. 이번에도 감정, 느낌, 감각, 쾌락의 공유를 통해서다. 당황스럽고 낯설더라도 이를 통해 우리는 더 살만한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대가 아닌 환대, 사랑, 공감, 깊이 있는 이해다.
요컨대, 센세이트들은 서로가 남인 동시에 자신인 셈이다. 이들에게 공감, 연민, 연대는 도덕과 의무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과 생존의 문제다. 모든 공통적인 것이 그러하듯, 센세이트들도 자신의 힘을 빼앗으려는 자들과 싸움을 벌인다. 거대 기업 BPO와 싸우는 센세이트들은 처음엔 마냥 신기하게만 느껴졌던 공통의 감정, 느낌, 감각, 쾌락이 자기 존재의 핵심임을 깨닫는다. 감정과 느낌, 몸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의 원친이 될 수 있는지를 인지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드라마는 끝내 '정치적인 것'이 된다. 인간을 끊임없이 개별화하여 단절시키는 신자유주의와 폭력적 단결만을 강조하는 여러 극우 포퓰리즘 사이에서, 같은 감각과 느낌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센세이트는 우리가 무엇을 빼앗겼는지, 빼앗긴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킴으로써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정치의 지평을 연다. 워쇼스키 자매가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제시하고자 했던 꿈틀거리던 잠재성은 〈센스8〉을 통해 피어올랐다.
전 세계 수많은 팬덤에도 불구하고 압도적 스케일의 로케이션으로 인한 제작비 문제로 다소 성급하게 결말을 냈다는 점,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이 개입된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는 결점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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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주얼과 흥이 살아있는 모아나 2 / 전작보단 별로인듯 / 열정적인 음악과 춤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모아나 2" 후기입니다.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드는 쿠키영상이 엔드크레딧 전에 1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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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18] 아동학대를 막는 가장 좋은 방법
영화 고백 시사회에 다녀왔습니다.
아동학대를 다루도 있는 영화여서 어둡고 슬픈 영화인데요.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사회 제도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면서
주변의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긎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도 알려주는 영화입니다.
박하선 배우의 연기와 하윤경 배우의 연기가 좋아요.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영화여서 많은 분들이 불편하겠지만 꼭 보면 좋을 것 같아요,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참고 하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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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메간 2.0> 메인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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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2> 티저 예고편
게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모두 준비되었는가? 《오징어 게임》 시즌 2, 12월 26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