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2024-11-22 07:41:11
‘말 없는 사람들의 말’, 어느 다큐멘터리스트의 집념
영화 〈되살아나는 목소리〉
딸이 묻는다. 왜 엄마는 영화를 어렵게 만드느냐고. 알기 쉽게, 친절하게 만들 수는 없느냐고. 엄마가 화내며 답한다. 그럼 내가 영화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영화는 내가 목격하고 기록한 것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딸의 질문에 화를 내는 재일조선인 다큐멘터리스트 박수남은 아마도 자신이 겪고 기록한 시대가 결코 쉽고 친절할 수는 없는 시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치열하고 집요하게, 종종 ‘어렵고’ ‘불친절하게’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10만 피트의 길이, 50시간 분량의 필름이 남았다. 〈되살아나는 목소리〉는 박수남과 그 딸이 남겨진 기록과 박수남의 삶을 교차로 엮어 만든 영화다.
차별받는 재일조선인의 문제에 천착한 박수남이 최초에 선택한 무기는 ‘펜’이었다. 그러나 ‘한계’를 마주했다. 박수남이 만난 재일조선인은 침묵하는 일이 많았다.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몸을 부르르 떨 뿐 그 세월을 어떻게 다 이야기하겠느냐며 고개를 떨궜다. 박수남은 그때 결심했다.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무수한 아픔이 만들어내는 이 떨림을 온전히 담아내는 영화에 투신하겠다고. 말 없는 사람들의 말을 영상으로 담아내겠다고.
1935년생 박수남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를 고민했다면, 그와 다른 세대인 나는 영화를 보며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박수남을 일평생 사로잡은 재일조선인의 그 무수한 떨림이 관객의 신체에까지 도달하고 새로운 물음을 촉발한 것이다. 영화가 주장하듯 기억이 보존되는 한 가해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영화를 통해 되살아나는 목소리들은 기억의 수명과 가해 책임의 기한을 넉넉히 늘린다. 박수남의 기록은 후대의 기억이 되었다.
영화는 지난 100여 년간 재일조선인이 겪은 문제를 폭넓게 다룬다. 고마쓰가와 사건, 침묵과 가난에 시달리는 피폭 재일조선인과 한일 양국 피폭 피해자의 갈등과 연대, 제암리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 인터뷰, 위안부 공론화, 군함도……. 딸 박마의가 갈무리한 박수남의 기록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차별과 오욕으로 굴곡진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그려낸다. 더불어 그 한복판을 살아낸 박수남의 삶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교차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부당하게 차별받는 집단의 당사자로서 차별에 맞서고 차별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서서히 깨닫는다.
148분의 긴 상영 시간 동안, 나는 박수남의 집요함에 압도당했다. 불합리한 구조적 모순과 그로 인해 생성되는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최초의 강렬한 각성이 어떻게 개인을, 집단을 추동하는 거대한 힘으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생생히 목격할 수 있어서였다. 이 힘은 박수남이 자신의 집념을 타인의 아픔을 기록하는 데 썼다는 점에서 또 한 번 증폭된다. 박수남의 작업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한 타인의 목소리에 꺼지지 않는 생명력을 부여해 결국은 되살아나게 한다. 치열한 기록이 윤리와 정치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정작 박수남은 과거 자신이 촬영한 영상을 보지 못한다. 건강 문제로 시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딸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는 당시의 장면을 기억해낸다. 그녀가 과거 기록한 것이 더는 보지 못하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그때의 감정과 기억을 되살려낸다. 이것이 기록의 힘이다. 박수남은 스스로 기록의 의의를 증명해낸다. 시대를 관통해 세대를 잇는 집요한 기록 의지가 내내 놀라운 힘을 뿜는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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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오르는 여인의 신작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에 빛나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화제작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능가할 마스터피스, <쁘띠 마망>이 올 가을 개봉을 확정지으며 센세이션을 예고하였습니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2007년 <워터 릴리스>로 데뷔한 이후 <톰보이>, <걸후드>까지 성장 3부작을 완성,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정체성과 욕망을 세밀히 탐구하며 연출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는데요. 그리고 2019년 연출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제72회 칸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직후 각본상과 퀴어종려상을 수상하며 전세계 평단의 폭발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국내에서는 제목이 정해지기 이전부터 '불초상'이라는 제목과 함께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당시부터 뛰어난 작품성에 대한 입소문이 더해지며 다양성 영화로는 이례적인 15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하며, 이후 정식 개봉된 적 없는 셀린 시아마 감독의 전작들이 모두 개봉되는 진풍경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국내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해야 할 시네아스트(Cineaste)로 자리매김한 셀린 시아마 감독의 신작 <쁘띠 마망>은 지난 3월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는데요. <쁘띠 마망>은 8살 소녀 '넬리'가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잠시 머물게 된 엄마의 고향집에서, 동갑내기 친구 '마리옹'을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마법 같은 시간을 그린 작품입니다. 영화제 공개 직후 "완벽한 영화, 베를린에서 발견한 보석"(The Guardian), "영화제 최고의 작품"(Otroscines.com) 등의 호평이 이어지며 로튼토마토 신선도 지수 100%, IMDb 메타스코어 93점을 유지며, 전작을 능가하는 마스터피스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셀린 시아마 감독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불리며, 그가 가진 섬세한 연출력이 극대화된 것은 물론, 보다 넓어진 세계관이 전 세대를 아우를 것으로 예상되며 올해를 장식할 최고의 아트버스터로 자리매김할 것을 예고하였습니다.
한편 개봉 소식과 함께 공개된 런칭 포스터는 팬들을 매료시킨 셀린 시아마 감독의 작품들을 상기시키며 , 신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데요. '젠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데뷔작 <톰보이>부터 퀴어 로맨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까지 착실히 세계관을 넓혀 온 셀린 시아마가 신작 <쁘띠 마망>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풀어갈지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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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세월호? 아직도 세월호!
8★/10★
조금은 이상하고 뒤늦은 슬픔이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서울 어딘가에서 열리는 추모집회에 가는 길이었다. 고백하건대, 이날 눈물 흘리기 전까지 나는 세월호의 침몰을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의심하기 바빴다. 세월호를 슬퍼하는 모든 마음이 거짓이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사회 변혁을 모색하던 때였지만 내 안에는 뿌리 깊은 패배와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감각이 나를 지배했다. 사람들이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죽음을 슬퍼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명박, 박근혜와 20대를 보낸 내게는 그들이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적 권위 국가가 상수였고 그에 반하는 다른 목소리는 늘 변수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편안한 때였다. 그때의 나는 세월호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슬퍼하리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눈과 귀를 닫았다.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섣불리 슬퍼했다가 외로워질까 봐 두려웠다. 한 달이 지나고 추모집회에서 많은 사람과 함께 슬픔을 나누며 내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많은 사람이 눈물 흘리고 있었다. 다만 접속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홀로 외롭게 슬픔을 견뎌왔을 뿐이었다.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월호는 사회적‧구조적 문제가 원인인 슬픔을 고립시키려는 모든 것과 단절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사람들은 세월호를 애도하며 공통감각으로서의 슬픔을 되찾았다. 세월호는 슬픔과 애도의 마음을 통해 개별자가 ‘우리’가 될 수 있음을, 사라진 생명을 잊지 않는 우리의 존재가 변화를 요청할 수 있음을, 누군가를 잊지 않는 마음이 부끄럽거나 낙후된 것이 아님을 일깨워줬다.
그러나 〈바람의 세월〉이 보여주듯, 이 깨달음은 지난 10년간 번번이 제도권 정치와 진실이 그리 궁금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로막혔다. 딸 문지성 양을 세월호 참사로 잃은 뒤 카메라를 든 문종택 공동 감독은 지난 10년의 세월, 3,654일 동안 세월호를 기록했다. 그렇게 쌓인 영상은 5,000여 개, 분량은 50테라바이트에 달했다. 이 긴 시간은 대체로 참사 유가족과 그들의 슬픔에 접속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바람이 번번이 미끄러지고 고꾸라지는 과정으로 채워졌다. 박근혜 정권은 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은폐하는 데 급급했고, 유족과 시민의 염원을 이뤄줄 듯하던 문재인 정권은 애매한 태도로 일관해 포괄적 진실 규명의 과제를 완수하지 않았다. 참사 후 유가족이 처음 환하게 웃은 건 박근혜 탄핵이 확정되었을 때였다. 그마저도 세월호는 탄핵 사유로 인정되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유가족은 정치권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결국 배반당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는 사회적 참사를 어떻게 법과 정치의 문제와 접속시킬지에 관해 많은 물음을 남긴다. 법조인, 정치인이 기존 법 체제 안에서 유족과 시민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고자 한 노력(특검, 특조위 등)은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공적인 슬픔에 담긴 커다란 물음과 가능성이 법 기득권과 정파적 당리당략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면 정의는 결국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누더기가 되기 십상이다. 세월호 관련 법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영화에 절망과 분노의 순간만 담기지는 않았다. 종종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의 슬픔을 느낀 건 배상‧보상을 통한 정부의 가족 분열 획책, 유가족을 향한 모욕을 담은 장면만이 아니었다. 생존 학생 등교를 응원하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국회에서 유가족 앞을 막고 선 젊은 경찰이 흐느끼며 울먹이는 장면에서도,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추모 공간을 꿋꿋이 지키며 싸움을 이어가는 유가족의 모습에서도, 세월호 유가족이 5.18 민주화 운동과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나는 무너졌다. 영화가 이토록 강렬한 감정을 추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는 세월호 유가족이 지난 10년간 견뎌내야만 했던 야만적 시간을 영화가 압축해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이 모든 시간을 유족의 시선으로 말하고 들려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개 뉴스로 사건을 접한다. 즉 누군가 한 번 매개해 가공한 상태로만 어떤 사건을 접한다. 기자가 유가족 목소리를 대변하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더라도 어쨌든 그는 유가족처럼 울부짖으며 목소리를 높인 채 글 쓰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터무니없는 의견에 그럴싸한 목소리를 입혀주기 일쑤인 기계적 중립이 더해진다면, 나아가 기계적 중립마저도 외면하고 유족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실어 나른다면 이들의 목소리는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다. 문종택 감독이 직접 촬영하고, 내레이션한 〈바람의 세월〉에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이 때문이다. 대체로 중립을 가장한 차가운 카메라가 담아내지 못한 절절한 목소리들을 꾹꾹 눌러 담은 만큼, 정제되고 정돈하여 매개하지 않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미 우리에게는 익숙한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이 영화에 담기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유족은 세월호가 가라앉는 장면보다는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의 초석을 다지겠다는 다짐을 전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영화를 보며 몇 번이나 울컥하며 감정의 공적 기능을 다시금 되새겼다. 〈바람의 세월〉에는 ‘아직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꺼이 ‘아직도!’라고 답할 힘이 있다.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 앞에 과거의 나처럼 무기력하지 않고, 슬픔에 기반한 공적이고 정의로운 연결감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이 영화에서 큰 위로와 연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유족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봤다가 되레 위로받고 나왔다. 〈바람의 세월〉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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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를 위한 재건축 계획은 없나요?
1979년 준공된 둔촌주공아파트는 한때 아시아 최대 규모의 아파트 단지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넓고 컸다. 세월이 많이 흘러, 지금은 재건축이 진행되고 있다. 넓은 땅 위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이다 보니, 둔촌주공아파트에는 사람뿐 아니라 길고양이들도 머물렀다. 사람과 고양이가 함께 아파트 ‘주민’으로서 살아왔던 것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에 나오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고양이들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재건축이 확정된 후 텅 빈 아파트에 남아 있는 고양이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꾸린 ‘둔촌냥이모임’의 이야기를 담담히 비춘다. 둔촌냥이모임은 재건축 진행 시 아파트 곳곳에 있는 250여 마리의 고양이가 다치거나 죽을 것을 우려해 입양, 중성화 수술, 고양이 이주 등의 대책을 기획‧집행하는 모임이다. 고양이가 그루밍을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구조대원들의 마음, 수많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는 마음, 자신들이 찾은 고양이들의 개성을 다른 사람들도 알아줬으면 해서 고양이 얼굴이 그려진 카드게임을 만드는 마음 등등. 둔촌냥이모임 구성원들은 재건축 과정에서 그 누구도 고려하지 않았던 고양이들을 적극적으로 재건축 계획 ‘내부’로 끌어온다.
한 활동가가 던지는 물음이 인상 깊다. ‘아파트를 철거할 때, 고양이 구출을 위해 몇 시간을 지체할 수 있을까?’ 아마 조금의 시간을 확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고양이의 안전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앞서 언급한 ‘마음’이 유일한 근거다. 즉 그들에겐 고양이의 안전과 생명도 소중하다는 주장이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다. 하지만 건설회사, 예비 입주자, 행정직원에게는 서둘러 재건축을 진행해야만 할 수많은 ‘합리적’ 이유가 있다. 〈고양이들의 아파트〉의 성취는 이토록 극단적으로 기울어진 이 둘 사이의 저울이 과연 제대로 된 것인지를 질문하는 데 있다. 고양이들의 안전과 생명을 걱정하는 마음이 그토록 하찮은 것일까? 단 몇 시간의 구조시간을 확보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그렇지 않다. 인간의 재산권, 주거권만큼이나 고양이의 안전권, 생명권도 중요하다. 문제는 지금껏 도시계획이 전자의 권리에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데 있다. 소수의 활동가와 캣맘뿐 아니라, 모든 아파트 입주민이 아파트 단지 내 고양이를 위한 대책을 고민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것이 ‘비효율적’이거나 ‘감상적인’ 일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잠시 머무는 땅이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는 ‘상식’에 비추어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경기도에 있는 한 신도시에 살고 있다.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사 온 후 가장 놀랐던 건 동네에 고양이가 없다는 거였다. 이사 온 지 반년이나 지난 후에야 아파트 근처 공원에서 고양이를 마주했다. 그전까지는 새로운 동네에 익숙해지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고양이를 보지 못했다. 신도시가 고양이들을 위한 공간을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울의 높은 주거비용에 고생하던 ‘나’에게, 신도시는 매우 훌륭한 대안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고양이’에겐 그렇지 않았다. 비단 고양이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를 포함한 동네 주민들은,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 살았던 얼굴 모를 다른 생명체들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
얼마 전 끝난 대선에서는 여야 후보 가릴 것 없이 어마어마한 물량의 신규 주택공급을 약속했다. 정권이 바뀐 후 재건축‧재개발 시장이 활성화돼 집값이 들썩인다는 뉴스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누구나 안정적이고 질 좋은 주거환경을 갈망한다.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욕망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도 당연하다. 고양이와 인간 사이에 기울어진 저울이 단번에 동등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둔촌냥이모임의 활동이 있었음일 기억하는 일이다. 그 마음을 기억함으로써 저울의 기울기를 조금씩 낮춰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조금은 음울한 음악과 함께 건물이 헐리고 평평한 흙바닥만 남은 아파트 단지를 촬영한 장면을 보며, ‘몇 마리의 고양이가 다치거나 죽었을까?’라는 슬픈 질문이 들었다. 내가, 우리가, 이 질문을 잊지 않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고양이들의 아파트’를 위한 상상력이 우리의 재건축 계획에 들어올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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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멤버 미>, 진득하게 배어 있는 누군가의 체취들
우리의 삶은 누군가 묻혀놓은 체취들로 가득하다.
그 누군가는 우리의 가족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 또한 다른 많은 이들에게 우리의 체취를 남긴다.
그 체취는 제법 여운이 짙다. 진득하게 배어 있다.
개인적으로 <리멤버 미>는 '타일러(로버트 패틴슨)'의 삶 속의 다양한 체취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형의 자살, 부모의 이혼, 아버지의 무관심 등으로 인해 내면에 깊은 상처가 있고, 자주 깊은 사색에 잠기곤 하는 타일러에게는 타인의 체취가 유난히 더 깊게 배곤 한다. 그리고 타일러는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진한 체취를 남기고선 떠난다.
"아등바등 사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열심히는 살아야 한다."
형에게 쓰는 편지이자, 타일러의 독백이다.
- 형이 전에 그랬지. 누군가 묻혀놓은 체취들이 우리 삶에 배어있다고.
누구에게나 그럴까?
아니면 그럴싸한 말일 뿐일까?
타일러에게는 아직 자살한 형의 체취가 진득하게 배어있는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삶에도 진한 체취를 남겨놓고 간 사람이 있다.
이 체취는 평생 남아있을 것 같다. 안 지워질 것 같다. 그리고 문득문득 생각나겠지.
항상 형과 함께 가서 아침을 먹던 식당,
형이 자살하던 날 마지막으로 그를 본 곳,
형이 떠난 후에도 꾸준히 가서 형에게 편지를 쓰는 곳,
자신처럼 마음 속에 상처를 지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형에게 들려주러 가는 곳,
형의 체취가 진득하게 배어 있는 그런 곳.
- 생각보단 덜 갔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말이 내 마음 속을 후벼파는 것 같다.
왜 떠난 이의 영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는 걸까.
왜 그가 남긴 체취는 날이 갈수록 더 짙어지는 걸까.
타일러가 아버지의 컴퓨터 화면에서 발견한 가족 사진들.
자식들에게 무관심하고, 무심하다고만 생각한 아버지는 사실 모든 자식들을 보고 싶어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 속에서 더 이상 나이가 들지 않고 멈춰 있는 형 '마이클'.
먼저 떠난 이의 체취는 유난히 더 짙고 무겁게 느껴지곤 한다.
아마 타일러와 그의 가족에게 마이클의 체취는 제법 묵직했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아버지는 자식들을 사랑하고 있었고, 형도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당연한 사실을 타일러는 이 화면을 보기 전까지 몰랐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표현을 안 했으니까. 알 턱이 없다.
나는 가족에게 제일 필요한 것이 바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 사실을 최근에 더욱 절실히 느꼈고, 선명하게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표현이 꼭 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서로의 오해가 쌓이지 않도록, 이 정도만이라도 표현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오해는 또다른 오해를 낳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남기게 되니까.
- 아등바등 사는 건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열심히는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소중한 인생이니까.
누가 우리 인생에 들어오면 우리 반쪽은 말한다. 넌 준비가 안됐다고.
하지만 다른 반쪽은 말한다. 영원히 네 것으로 만들라고.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테러단체에 의해 자살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미국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워싱턴의 국방부 건물이 공격을 받았다.
이 순간, 타일러는 아버지의 회사인 이 건물에 있었다.
타일러는 씁쓸하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사랑한다고.
너무 보고 싶다고.
그리고 용서한다고."
이제는 타일러의 인생에 들어왔던, 남은 이들이 간직할 말들.
왜 용서한다는 말을 타일러가 했을지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자살한 형을 미워했던 것에 대한 용서라고.
형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텐데, 힘든 결정을 내린 것일텐데. 더이상 미워하지 않을 거라고.
영화의 초반에 나왔고, 영화를 마무리하며 나왔던 타일러의 독백은 마음을 참 아프게 만드는 것 같다. 마음 속을 후벼파는 것 같다.
혼자 조용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던 사람인 타일러의 끝이 참 허망하기 그지없어서 더 슬펐다.
영화를 보며 참 많은 영화 속 인물들의 끝을 지켜보았지만, 타일러의 마지막은 유독 더 아프게 다가왔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시 보기는 힘들 것 같다. 너무 아파서.
타일러가 그 누구보다 속이 깊은 사람이라는걸 알기에 이제 이 영화를 생각하면, 그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난다.
911 테러로 인해 많은 이들이 아파했을 생각을 하니 더 씁쓸해졌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영화를 곱씹을수록 마음이 많이 무겁다.
'리멤버 미',
남은 이들의 몫은 그를, 그가 남겨놓고 간 체취를 기억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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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4주 차 개봉작 추천, 공개 예정작 추천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해외 영화를 리메이크한 두 편의 <리멤버>와 <자백>의 개봉부터
신선한 충격을 안겼던 단편영화 '몸값'을 새롭게 재탄생 시킨 티빙 시리즈 <몸값>의 공개까지!
그럼 10월 넷째 주에는 어떤 영화가 기다리고 있을지!
더 자세히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극장 개봉 영화
리멤버
ⓒ 네이버 영화
개요: 드라마 | 한국 | 128분
감독: 이일형
출연: 이성민, 남주혁 등
개봉: 2022.10.26
배급: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줄거리
가족을 모두 죽게 만든 친일파를 찾아 60년간 계획한 복수를 감행하는 알츠하이머 환자 필주와
의도치 않게 그의 복수에 휘말리게 된 20대 절친 인규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관전 포인트
버디 무비 <검사외전>에 이어 신선한 스토리로 또 다른 버디 무비를 선보일 이일형 감독의 <리멤버>.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되지만, 세대 차이에 중점을 두고 버디 영화의 관점으로 연출했다고 한다.
자백
ⓒ 네이버 영화
개요: 범죄 | 한국 | 105분
감독: 윤종석
출연: 소지섭, 김윤진, 나나 등
개봉: 2022.10.26
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줄거리
밀실 살인 사건의 유일한 용의자로 지목된 유망한 사업가 '유민호'와 그의 무죄를 입증하려는
승률 100% 변호사 '양신애'가 숨겨진 사건의 조각을 맞춰나가며 벌어지는 이야기
관전 포인트
치밀한 서사와 예측불허 반전의 스토리로 서스펜스의 밀도가 높은 영화가 탄생했다.
개봉 전 진행했던 시사회에서 많은 관객에게 호평을 받았으며, 유수의 매체에서도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카사블랑카
ⓒ 네이버 영화
개요: 멜로 | 미국 | 102분
감독: 마이클 커티즈배우: 험프리 보가트, 잉그리드 버그만 등
개봉: 2022.10.26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줄거리
2차 대전으로 어수선한 프랑스령 모로코, 미국인인 릭은 암시장과 도박이 판치는 카사블랑카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어느 날 미국으로 가기 위해 비자를 기다리는 피난민들 틈에 섞여 레지스탕스 리더인 라즐로와 아내 일리자 릭의 카페를 찾는다.
라즐로는 릭에게 미국으로 갈 수 있는 통행증을 부탁하지만 아직도 일리자를 잊지 못하는 릭은 선뜻 라즐로의 청을 들어주지 못한다.
경찰서장 르노와 독일군 소령 스트라세는 라즐로를 쫓아 릭의 카페를 찾고, 결국 릭은 라즐로와 함께 일리자를 떠나보내는데...
관전 포인트
1943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은 작품이다.
1999년에 재개봉 한 이후 23년만에 재개봉을 하는 작품이다.
도그
ⓒ 네이버 영화
개요: 코미디 | 미국 | 101분
감독: 레이드 캐롤린, 채닝 테이텀배우: 채닝 테이텀
개봉: 2022.10.26
배급: CJ CGV줄거리
이라크 파병으로 후유증으로 부대복귀가 불가능한 특수부대 출신 미군 ‘잭슨’.
어느 날, 그의 동료의 사망소식을 듣고, 그의 군견 ‘룰루’ 를 2400km나 떨어진 그의 장례식장에
데려가면 복직을 추천해주겠다는 상관의 제안을 받는다. 잭슨은 이를 수락하지만,
룰루 또한 이미 전투후유증으로 사나운 사고뭉치가 되어있었다.
잭슨과 룰루는 서로에 대한 마음도 열지 못한 채 둘 만의 여정을 떠나게 되는데…
관전 포인트
코믹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며 다채로운 매력을 뽐낸 채닝 테이텀의 신작이자 감독 데뷔작으로,
<로건 럭키>를 공동 제작한 '리드 캐롤린'과 다시 한번 합을 이룬다. 로튼 토마토에서 신선도 지수
77%, 팝콘 지수 89%를 기록하며 기대를 모으고 있는 작품이다.
스타게이저: 아스트로스코프
ⓒ 네이버 영화
개요: 공연실황 | 한국 | 119분
감독: 도하배우: 엠제이, 진진, 차은우 등
개봉: 2022.10.27
배급: CGV ICECON줄거리
2022년 5월, 아스트로의 세 번째 콘서트 가 열렸다.
아스트로만의 다채로운 매력으로 가득 채운 무대들과
수많은 땀방울과 치열한 고민이 녹아 있는 콘서트 준비 과정,
어디에서도 공개된 적 없는 멤버들의 진심 가득한 인터뷰까지.
아스트로와 아로하가 함께 달려온 길, 그리고 함께 나아갈 빛나는 여정의 기록
관전 포인트
3년 5개월 만에 열린 아스트로의 세 번째 단독 콘서트 'STARGAZER'를 준비하는 멤버들의 모습과 비하인드,
생생한 실황 무대, 그리고 멤버 6인의 진솔한 인터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OTT 공개 영화
몸값
ⓒ YVING
개요: 스릴러 | 한국 | 6부작
연출: 전우성
출연: 진선규, 전종서, 장률 등
공개: 2022.10.28
스트리밍: 티빙줄거리
서로의 ‘몸값’을 두고 흥정하던 세 사람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에 갇힌 후, 각자 마지막 기회를
붙잡기 위해 위험한 거래를 시작하며 광기의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
관전 포인트
원작의 설정에서 지진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면서, 바깥세상과 완전한 단절된
공간에서 어떻게 스토리가 전개될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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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하지 않는 악만큼 중요한 것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하라사와라는 작은 산골 마을에 딸과 살고 있는 남자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다. 조용히 일 하는 중인 타쿠미. 장작을 열심히 팬다. 톱으로 나무도 자른다. 일하다 담배 한 번 피워준다. 이런 타쿠미에겐 일행이 있다. "타쿠미 상!" 타쿠미에게 다가오는 타쿠미의 친구. 타쿠미는 친구에게 자연물의 많은 것들을 알려주며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눈다. '땅와사비' 하나를 뽑는 타쿠미. 친구에게 "너희 우동집에 이거 넣어서 먹으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숲 속에서 시간을 보내니 친구가 타쿠미에게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그런데, 딸 하나(니시카와 료)는요?" 사실 타쿠미는 건망증이 심하다. 하나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는 때가 오면 집으로 데려와야 했다. 내 정신 좀 봐! 사랑하는 딸을 데리러 가는 타쿠미. 그러나 친구가 타쿠미에게 말 한마디를 더 건넨다. "오늘 우리 동네에 글램핑을 짓겠다면서 워크숍을 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 올 거죠?"라고 묻는 친구. 타쿠미는 "간다"라고 답한다. 모든 것이 상류에서 하류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다. 영화는 서늘하게 이 마을에 일어나는 일들을 비추고, 특별한 결말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이 영화의 결말은 일반적이지 않다. 영화의 느릿느릿한 템포때문에도 그렇고, 인물의 감정선엔 특히 더 그렇다. 영화의 많은 것들은 상황만 몇 개 보여줄 뿐 이 둘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 덕에 영화가 좀 뭉뚱그려진 채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왜 타쿠미는 타카하시를 죽인 거야? 하나는 어떻게 된 거야?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아 의문점만 생긴다. 단순히 줄거리와 결말만 그럴까? 영화의 어떤 장면들은 기이할 정도로 길어서 어느 부분에서 장면이 끊길지 예상이 잘 안 간다. 단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제목만 직관적으로 들어와서 '이 영화가 복잡다단한 인간성을 보여주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글쓴이는 이 영화가 엔딩에서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공격하는 일이 영화 내내 반복됐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를 위해 영화의 몇 키워드에 대해 써 볼 것이다.
첫 번째 키워드는 단절이다. 글쓴이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단절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다. 이 팬데믹 사태는 영화에서 두 사건에 개입하며 인물 간의 갈등을 드러낸다. 우선 이 영화의 핵심 갈등은 마을의 어느 곳에 글램핑 터를 짓는 것이다. 이 글램핑 터를 짓는 이유는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경영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졌으니 정부에 보조금을 받기 위해'다. 이 공사는 곧 양 측을 갈라놓는 계기가 되어 중반부까지 인물들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방해한다. 또 다른 단절은 의사소통의 단절이다. 워크숍에서 박살이 난 타카하시와 마유즈키. 주민들에게 "사장에게 말하고 오라"라는 피드백을 듣는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 사장과 대화를 시도한다. 하지만 이 의사소통은 무언가 특별하다. 바로 줌(zoom)으로 회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 역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고 보기 어렵다. 타카하시와 마유즈키의 상사는 두 사람의 주장을 별로 귀담아 안 듣고 그냥 무작정 "선주민 남자(타쿠미)에게 글램핑 터 부지의 관리인 직을 제의해라"라고 말한다. 이 대화는 방식의 측면에서도 제약이 많은데 내용도 알차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타카하시와 마유즈키 - 둘의 상사 간의 대화가 단절됐다는 것을 단적으로 암시하는 연출이다.
두 번째로 암시하고 있는 이 영화의 단절은 건망증이다. 타쿠미는 뭐든 잘 잊어버린다. 영화 초반부에 딸 하나를 데리러 가는 것을 잊어버린다. 친구 덕에 그 약속을 떠올린다. 사실 처음 볼 때 이 장면을 그냥 별 것 없다고 넘겼다. 깜빡 잊어버리는 건 그냥 우연 같은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잊어버린다'라는 모티브를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본다면 분명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타쿠미는 앞과 뒤에 일어난 일 중 먼저 발생한 사건을 잊어버리는 건망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영화가 (후술 하겠지만) 자연의 순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의미가 특별하다. 타쿠미는 전을 잊어버리고 이후에 일어난 일만 기억했다. 이 결과로 딸 하나를 데려오는 걸 잊어버렸다. 영화가 전에 일어난 일을 잊어버린 자에게 소소한 벌을 내렸다고 볼 수 있고, 역시 타쿠미는 사건의 전부를 오롯이 받아들이지 않아 '단절'을 체화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하나를 둘러싼 단절도 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하다. 초반부에 하나는 사슴의 사체(뼈)를 본다. 아빠에게 "얘는 총에 맞았다"는 말을 들은 하나. 이 하나는 연이어서 사슴을 목격한다. 초반에 사슴이 죽은 걸 봤다. 그다음 장면은 사슴이 살아있는 장면이었다. 그다음의 다음 장면은 하나가 사슴에게 공격당한 뒤의 장면이다. 이 장면들이 시간 순서대로 읽어도 큰 문제는 없지만 글쓴이가 영화를 두 번째 볼 때는 '두 번째 장면이 진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어느 순간부터 혼자 다니는 모습만 나온다. 이야기를 이끄는 동력도 뭣도 없는 채 신화의 한 장면 같은 장소를 돌아다닌다. 하나가 공격당했다는 묘사가 있을 리가 없다. 엔딩에서 코피 흘리는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신기루 같은 하나의 행보를 더 신비롭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소파에서 잠을 자는 하나. 카메라는 아버지 타쿠미가 하나를 업고 어디론가 가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 장면이 끝나면 다시 하나가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다. 과연 뭐가 진짜일까? 어떤 장면이 영화의 메인 플롯인지는 하마구치 류스케도 모를 것 같지만 우리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와 관련된 몇 장면들은 순리를 벗어나는 연출에 근거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하나는 "숲 깊은 곳에 들어가면 사슴에게 공격당할 수 있어"라는 경고를 무시한다. 종합해 보자. 하나는 섭리를 어기는 존재다. 이를 영화 안의 이야기로, 또 연출로 보여주고 있다. 단지 하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그 모든 모순을 이을 뿐이다.
단절 다음으로 설명하고 싶은 키워드는 양 측간의 갈등이다. 영화는 성실하게 두 집단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를 묘사한다. 이 소시민스러운 순간을 보여주는 방식을 보면 흥미로운 것이 있다. 우선 전반부. 영화의 주인공이 타쿠미이기 때문에 타쿠미 쪽 서사가 나온다. 아내는 세상을 떠났고 귀여운 딸 하나와 함께 산다. 어떤 장면에선 아버지 타쿠미가 딸 하나를 업고 길을 걷는 장면이나 자연물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도 있다. 인물의 이런 감정적인 부분은 사실 영화와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타쿠미한테 어떤 사정이 있건 없건간에 살인자는 살인자 아닌가? 하지만 이 묘사는 후반부에 타카하시와 마유즈키가 자동차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 차 안 대화 장면은 사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본 분들이라면 기시감이 느껴지는 부분일 것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전작 <드라이브 마이 카>와 <우연과 상상>에서 자동차 안의 대화를 사람과 사람 간의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과정으로 소화했다. 이 장면은 그 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관객에게 역시 적용된다. 관객들도 인물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 장면의 역할까지 본다면 두 세계에 정을 붙인 감독의 의도가 느껴진다. 소개팅 앱이나 마유즈키의 직업이 요양보호사였다는 사실이 굳이 들어간 이유는 역시 이 둘(타카하시, 마유즈키)도 그냥 평범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또 이 차 안 대화 장면이 들어간 시점도 의미심장하다. 이야기의 중후반인데, 이 영화가 가령 <매그놀리아> 내지는 <도그데이즈>(2024)같이 각자의 입장이 중요한 옴니버스 영화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이 타카하시-마유즈키의 인간적인 면모는 초반부에 들어가야 적절하다. 왜? 이 둘에게도 마음을 열 만한 가치가 충분하고 역시 주인공이니까. 그런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과감하게 중후반부에 배치한다. 이 장면 이후 '하나가 실종되고 - 타카하시가 살해당한다'는 인과관계가 성립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장면을 통해 그린 인물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보여주는지 느껴지는 듯하다. 두 사람은 전적으로 동격에 놓인 선량한 사람이다. 악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이 영화의 살인사건은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더 직설적으로, 우리는 이 영화 하이라이트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100%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세상에 있는 다양한 것들이 서로 충돌하며 작용하는데 어떻게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글쓴이는 위에서 단절과 양 측의 갈등에 대해 서술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필연이다. 사실 글쓴이가 쓰지 않은 부분이 있다. 단절과 갈등에 대한 부분을 더 깊게 쓰지 않은 것이다. 사실 위에서 쓴 '단절'과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필연이라는 키워드 하에 묶여있다. 첫 번째 예시. 마유즈키가 팔을 다치고 하나가 공격당한 사건이다. 이 둘은 전적으로 별개의 사건이다. 마유즈키는 집에서 쉬는 걸 선택했고 하나는 촌장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에서 절묘하게 공통점을 가지며 반복된다. 두 인물은 자연의 경고를 들었어야 했다는 점이다. 두 인물에게 공통된 필연이 주어졌고 이 필연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차이점이 갈린 것이다. 두 번째 예시. 주인공의 집에 회장님이 와서 오순도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된다. 무엇으로? 마유즈키와 타카하시가 상사와 비대면으로 대화하는 장면이다. 둘은 겉으로 보기에 목적과 내용이 아예 다르다는 점에서 아~무 상관없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두 대화는 상호 간의 입장을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이렇게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는 일이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은 영화에서 중요하다. 각기 다른 입장에 놓인 인물들이 당연한 순리를 거치는 것이다. '사랑하는 딸'과 '집으로 데려다주는 것'을 잊어버린 것 역시 상호 충돌한다. 하지만 둘이 별개의 것인 거랑 이 두 사건은 하나의 키워드로 엮인다. 타쿠미가 건망증이 심하기 때문에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그 줄기다. 이렇게 두 별개의 사건이 하나의 필연으로 이어진다는 방식은 영화에서 하나가 공격당한 것과도 이어진다. 바로 초반부 타쿠미와 하나가 사슴의 뼈를 보고 "총을 맞았다"라고 말하는 장면과 이어지는 것이다. 이 둘은 별개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 장면을 묘사하는 전후의 톤에서 더 두드러지는데, 전반부는 다큐 같은 템포였지만 후반부는 판타지스럽게 보여주기 때문에 두 사건은 별개의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 같다. 하지만 이 두 장면 역시 공통점이 있다. 영화가 보여주지 않는 장면으로 인해 생명에 위협이 간다. 명확한 사건을 보여주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이럴 땐 보통 이런 일이 일어나지!'라는 생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필연적인 일들을 엇갈리게 제시하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필연들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것들을 느끼고 있다. 누군가가 존재해서 이 사건을 연결시킨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단순히 플롯에서만 이런 맥락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음향이나 편집, 촬영 같은 것도 이 충돌을 시청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우선 초반부. 아버지 타쿠미가 딸 하나를 업고 걸어가고 있다. 영화가 있는 그대로 보여줄 거면 하나를 만나고 업히고 하는 장면을 보여줘도 된다. 하지만 영화는 편집을 촬영으로 대체해서 부녀를 보여준다. 이러면 뭐가 생기냐. 이야기가 초장부터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기이하다는 느낌을 주기 쉽다. 이 장면에 들어가는 음향은 역시 이 연출의 연장선상이다. 사운드가 부녀간의 감정을 쭉 보여주는 듯하다가 갑자기 끊는다. 단절이다. 우리가 영화까지 가는 감정선은 단절되지만 영화 안의 내적논리는 그 순간에도 재생되고 있다. 심지어 이 장면이 아니더라도 음악이 들리다가 끊기는 형태는 반복된다. 단절의 이미지를 하나로 이어서 이야기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영화의 편집 역시 이상한 리듬감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마치 사운드가 들리다가 끊기는 것처럼 영화가 테이크를 길게 뺄 때의 규칙이 안 보인다. 가령 초반에 주인공이 물통에 물을 채울 때를 본다면 그냥 물만 길고 끝나는 게 아니라 들고 지나가는 것까지 다 보여준다. 그런데 어느 장면에서는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편집을 촬영으로 대체한다. 또 어떤 장면에선 두 사람의 시점을 고의적으로 충돌시키는 편집까지 보여준다. 가령 주인공이 땅와사비를 뽑는 장면을 보면 재미있다. 카메라에서 땅와사비 뽑는 장면을 보면 땅와사비의 시점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장면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이 땅와사비를 뽑는 장면이다. 이 두 장면은 자연물을 이용하는 인간의 모습과 그 자연물의 시점을 동시에 등장시켰다. 뿐만 아니라 타쿠미가 자동차를 끌고 주차하는 장면을 보면 초반에는 타쿠미의 차량을 보여주다가 후반에는 차 뒤편에 있는 여자를 카메라가 보여준다. 이 주차 장면이나 땅와사비 장면이나 그 자체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점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그 모습을 바라보는 영화 안의 누군가도 함께 등장시킨 것이다. 천재적인 발상이다. 이야기에서 우연처럼 보이는 두 사건에 묘한 선후관계를 제시해서 필연으로 만든 걸로 모자라 카메라워킹으로 영화 안에 존재하는 3자를 등장시킨 것이다. 악인이 존재하지 않지만 3자는 존재하다는 것. 그리고 이 3자가 이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3자는 무엇일까? 영화의 첫 장면과 가장 마지막 장면이 아예 다른 맥락임에도 이야기의 틀을 이룬다는 점에서 수미상관처럼 느껴지고, 엔딩에서 새끼 사슴과 하나를 동일시시키고, 이 폭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영화 등장인물들이 지키지 못한 것에 책임을 묻게 하는 것. 그게 무엇일까?
글쓴이는 이 엇갈리지만 영화의 세계를 움직이는 것을 한 단어로 순리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쓰다가 갑자기 네이버 검색창에 '순리'라고 검색하면 '순한 이치와 도리, 또는 도리나 이치에 순종함'이라는 의미가 나온다. 이치와 도리. 당연하게 당면한 일에 대해 책임지는 자세를 취하는 것. 하나처럼 영화 안에서 독립된 사건으로 움직이는 인물들도, 타쿠미처럼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인물도, 타카하시처럼 사람은 착하지만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지지 않은 사람들도 이 순리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이 생각은 영화에서 하나가 실종되면서 시작되는 장면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 장면의 시작을 잘 보시면 물이 위에서 아래로 쪼르르 흘러가는 장면이 기점이다. 이 장면은 영화 안에서 맥락이 생기기도 한다. 워크숍 장면에서 마을회장 할아버지는 "상류에서 만들어진 일이 하류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하류의 사람들이 상류의 주민들을 원망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인공은 이에 힘입어 "중요한 건 균형"이라고 말한다. 영화 안에서 개입을 지양하고 순리에 따르자는 논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하나의 실종도 '당연히 일어나야 할 일'이라는 맥락이라는 걸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하나의 실종이 순리에 따른 결과가 되는 셈이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물론 영화는 하나의 실종만을 순리로 단정짓지 않았다. 순리에서 벗어난 것들은 영화 전,후반부에 두 개나 있다.
순리에서 벗어난 것,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이 벌인 각각의 실수는 인물들에게 당연한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암시처럼 보인다. 실수를 저지른 인간들은 영화 안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 그 첫 번째 실수는 타카하시의 것이다. 그 질문이 뭐냐. 영화에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볼 수 있는 "사슴은 그래서 어디로 가지?"라는 질문이다. 타카하시는 이 질문에 그냥 대충 얼버무린다. 인간의 개발을 위해서라면 자연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위협이 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이 사슴의 생사에 대해 깊게 탐구하지 않은 인간의 벌이 뭘까? 타쿠미에게 글램핑 터의 관리자 역할 같은 걸 대안으로 내민 벌은? 살인이다. 목숨을 잃는 것이다. 이 영화가 필연에 관한 영화처럼 보인다고 길게 쭉 썼다. 이 필연을 그대로 적용하면? 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인간의 개입에 대해 경고하는 자연을 무시하고 대충 얼버무리다 처형당한 인간의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왜 마유즈키가 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았을까? 자연에 의해 팔을 다친 마유즈키는 타쿠미의 집에서 쉰다. 경고를 마지막엔 받아들인 마유즈키는 살인의 피해자가 되지 않은 것이다. 만약 타쿠미와 동행했다면 마유즈키가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실수에 의한 처벌'이라는 부분에 근거를 하나 더 하고 싶다. 이 영화의 인물들이 두 번째로 범한 실수에 대해 적는 것이다. 영화가 두 상황을 필연으로 잇는다고 길게 써왔다. 그럼 이 것(타쿠미의 살인)과 유사한 상황이 영화에 있다는 뜻이겠지? 글쓴이는 총성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초반부. 총성이 탕 울린다. 이 총성 때문에 사슴이 죽었다는 걸 타쿠미는 이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방관한다. 일상에 지장이 갈 정도로 큰 소리지만 원인을 규명하지 않는다. 이는 곧 타쿠미도 타카츠키와 유사하게 자연의 경고를 방관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 모든 과정을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에 노력하지 않은 것. 이는 영화 후반부 타카츠키가 의무를 포기한 것과 겹쳐 보인다. 그럼 어떻게 돼? 당연한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나태한 인간이 방관한 탓에 애 먼 사슴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사슴은 총을 쏜 인간에게 분노해서 하나를 공격했다. 심지어 하나는 마유즈키처럼 자연의 경고, 그러니까 회장 할아버지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조건이 충분하다. 이 영화가 존재하지 않는 절대자를 보여주면서 순리를 묘사하는 만큼 엔딩에서 타카하시가 살해당하는 장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에 연장선상에서 하나가 공격당한 것 내지는 죽어가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심지어 이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대신 그 이유를 뭉뚱그려 보여준 것이야 말로 영화의 기획의도를 살리는 좋은 선택이다. 애초부터 그 원인을 규명할 수 있으면 자연 그 자체지 인간이 아니다.
카메라와 편집도 이 이야기에 존재하는 절대자의 존재를 그대로 구현한다. 하나 보여준 다음 사슴 보여주고 사슴의 피살 보여준 다음 하나를 비춘다. 이건 편집이 의도적으로 두 존재를 동일시시켰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살인을 저지르고 하나와 함께 도망가는 타쿠미를 먼발치서 익스트림 롱쇼트로 찍는다. 어느새 형상조차 보이지 않으면 의식이 흐릿한 타카하시가 몸을 비틀거리면서 갑자기 튀어나온다. 중후반부 차에서 일어나는 대화와 가락국수집에서의 장면을 통해 강박적으로 대칭을 이룬 것과는 대비된다. 균형을 어긴 인간이라는 걸 영화가 기술적인 부분에서 강조하는 것이다.
그냥 뚝딱 만든 각본 같아 보이지만 영화 안에 잡혀있는 내적 체계가 굉장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영화 안에서 구현하는 것. 이거야 말로 영화의 목적이자 모든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과정을 천천히 쌓아 올려 한 번에 터트렸던 <드라이브 마이 카>의 정성이, <우연과 상상>에서 인간이 서로를 마주하며 일어나는 묘한 스파크가 터졌던 그 순간을 엔딩으로 치환시켜 관객에게 강력한 충격을 선사한다. 또한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예술의 속성과 동일시했던 것이 굉장히 신선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철저하게 우리 세상에 살고 있는 무형의 존재를 등장시키는 괴력을 보여준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치를 거부한 인간에게 응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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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춘권의 고수 견자단 이번엔 핵주먹 타이슨과 대결 엽문3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결말포함된 영상이니 시청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엽문3 이 영화는 원 저작권자의 사용허가를 받은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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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메인 예고편
아기다리고기다리던 그 영상 떴습니다, 이번 여름, 제대로 모실 준비 완료? 모든 게 무너진 서울,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이야기?? #콘유 가 궁금하다면 8월 9일 극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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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기예르모 델토로의 피노키오> 공식 티저 예고편
이탈리아 고전 동화 《피노키오》가 아카데미 수상 감독 기예르모 델토로의 손에서 스톱모션 뮤지컬로 재탄생한다. 말썽꾸러기 피노키오는 과연 인간 소년이 될 수 있을까? 그 여정을 따라가 보자. 초호화 목소리 출연진을 자랑하는 이번 작품에서는 이완 맥그리거가 크리켓 역을, 데이비드 브래들리가 제페토 역을, 그레고리 만이 피노키오 역을 맡았다. 그 외에도 핀 울프하드, 아카데미 수상자 케이트 블란쳇, 존 터투로, 론 펄먼, 팀 블레이크 넬슨, 번 고먼, 아카데미 수상자 크리스토프 발츠, 아카데미 수상자 틸다 스윈턴 등이 출연진에 이름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