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파로2023-04-11 11:50:25
세포 기억의 소재만 부유한다
영화 나는 여기에 있다
장기 기증자의 성격이나 습관이 수혜자에게 전이된다는 이른바 ‘셀룰러 메모리’라는 독특한 소재로 만든 한국 액션 스릴러 영화 나는 여기에 있다를 미리 감상하고 왔습니다. ‘불량남녀’, ‘브라더’ 등을 내놨던 신근호 감독이 연출을 맡고 그의 전작에도 출연했던 정진운이 최근 ‘리바운드’에 이어 배우 커리어를 이어 갑니다. 관객들의 호기심을 유발해 줄 흔치 않은 소재에서 비롯된 살인사건 속 범죄자와 형사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그럼 시사회를 통해 미리 만난 작품은 어땠는지, 짧게나마 후기를 남기도록 하겠습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심장 이식 수술 이력이 있다는데?”
과거, 살인자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칼에 폐를 찔린 후 장기 이식을 통해 기적적으로 살아난 형사 ‘선두’(조한선) 수사 일선에 복귀한 그는 연쇄 살인범 ‘규종’(정진운)을 쫓던 중 장기 이식 코디네이터 ‘아승’(노수산나)을 통해 ‘규종’이 자신과 같은 공여자의 장기를 이식받은 것은 물론, 공여자가 과거 자신이 검거했던 살인자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예고편│Trailer
영제: I AM HERE│감독·각본: 신근호
출연진: 조한선, 정진운, 정태우, 노수산나, 정인기 외 多
장르: 범죄, 액션, 스릴러│상영 시간: 82분
국가: 대한민국│등급: 15세 관람가│평점: 평론가 2.0
제작: (주)미학인우주선│배급: 와이드 릴리즈
개봉일: 2023년 4월 12일
“번뜩이는 소재만이 존재한다”
‘셀룰러메모리’, 일명 세포 기억설로 불리는 장기 이식 수혜자들에게 나타나는 증상으로, 공여자의 성격이나 습관이 수혜자에게 전이된다고 주장하는 유사과학을 바탕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중반부가 되어서야 형사 선두와 살인범 규종이 같은 사람에게 장기를 이식받았고 과거 선두 자신이 붙잡았던 살인자였다는 사실까지 이어지며 혼란을 야기합니다. 공여자가 같다는 동질감 속에 극명하게 갈리는 두 인물의 이질감으로 긴장 요소를 유발하고자 합니다. 배우로서 자리 잡아가는 정지운이나 ‘스토브리그’로 되살아난 조한선, 아역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활동한 정태우, 최근 ‘신성한, 이혼’으로 인지도를 끌어올린 노수산나는 그 사이에서 나름의 역할들을 이행합니다.
맹점은 같은 공여자의 장기 기증에서 비롯된 사건이지만, 이야기의 깊이가 너무 얕게 깔려 있습니다. 저예산 제작의 문제라는 생각도 해보지만 짧은 러닝 타임에 결말로 달려가는 모양새가 조각난 퍼즐처럼 흩어집니다. 세포 기억설을 가정한 유사 연대감의 드라마틱 함으로 마무리되는 과정에서 범죄나 미스터리의 장르적 재미가 많이 무너져 몰입감이 좋지 않습니다. 현재 연기를 못하는 배우들을 찾기 힘든 충무로에서 시나리오상의 문제라고 볼 수 있겠는데, 특히 장기 기증 전문 코디네이터가 의학 서적이라도 뒤져서 실제 사례를 언급하는 편이 더 현실적이고 디테일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분명 침체된 극장가에 활기를 넣어줄 다채로운 매력의 배우들을 자주 만나기 위해선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분명한 장르 색채를 가지고 있다면, 관객들이 더 실망하고 외면할지도 모릅니다. 시사회로 먼저 감상하며 제작진과 배우들의 노력이 보임에도 아쉬움보다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더 컸던 것도 그런 부분이겠죠. 아무리 따져봐도 액션 대작 블록버스터 시리즈와 맞붙기에는 힘이 많이 부족해 보입니다.
ps. 시사회에서 어떻게든 재미를 찾아 전해드리고 싶은데, ;ㅅ;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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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2021)> 리뷰
《박강아름 결혼하다(2021)》는 정직한 이름표를 단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영화를 감상하기 전, 우리는 제목으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주인공이 박강아름이라는 사람이라는 것, 그가 결혼을 했다는 것, 이에 따라 다큐멘터리의 테마는 ‘결혼’이라는 점. 그런데 재미있는 건, 결혼 생활에서 나타나는 일을 기반으로 하하호호 예쁜 프랑스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3유로 커피를 사치라고 부르는) 적나라한 삶의 단편을 엮어낸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게 감독이자 출연진인 박강아름은 자신만의 방식과 시각으로 왜 자신이 결혼을 했는지를 추적해보고, 결혼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거대한 시놉시스가 있는 것은 아니나, 다큐멘터리의 특성상 매분 매 초를 관객이 관람하며 함께 겪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작 몇 마디 문장으로 다큐멘터리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건 처음부터 불가능한 시도이겠으나, 짤막하게 소개하자면 영화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감독인 박강아름은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서 생활하며, 자신의 학업을 이어간다. 부부 중 불어에 더 능통한 사람인 그가 행정과 경제를 담당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남편인 정성만은 가사를 (그리고 훗날 육아가 추가된다) 맡는다. 성만에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자기소개를 해달라고 요청하자 그는 나는 식모입니다, 식몬데 무슨 이름이 있어요, 정도로 대답하는 건 코믹하게 보이나 분명 유의미한 장면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앞날을 위해 프랑스 이주에 참여하였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땅에서 성만의 세계는 자꾸만 좁아지며, 이것이 안쓰러운 아름은 그에게 일주일에 한 번 문을 여는 ‘외길 식당’ 운영을 제안한다. 이 외길 식당은 이사를 비롯한 기타 여러 사유로 인해 시즌제로 운영된지라 두 사람이 프랑스에 있는 내내 운영된 것은 아님에도, 성만에게 분명한 활력소가 되어주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아름은 임신한다. 아이가 생겼다. 보리는 귀여운 두 사람의 아이이지만 여전히 성만이 독박 가사와 독박 육아를 지속한다. 이따금 부침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의 '평범한' 일상은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굳이 엄청난 통계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까지의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일들이 앞으로 펼쳐지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가부장적 제도 하에서 정상 가족이라 불렸던 시스템이 해체되고 있으며 가족 내 구성원의 권력구도가 기존과는 다르다는 걸, 그리고 이런 변화의 속도는 가속하리라는 것을. 예컨대 아름-성만 부부가 프랑스로 오게 된 것 역시 이주의 여성화(Feminization of Migration)에 부합하는 사회적 현상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만, 감독이 보다 집중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래. 결혼 말이다. 남들 다 한다는 결혼, 안 한 사람에겐 왜 안 하냐는 말이 쉽게 따라붙는 이 제도. 결혼은 대체 뭘까?
비혼을 외치는 청년층이 많아진다는 점, 정상가족의 해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외길 식당의 손님들처럼 결혼을 위한 이주 역시 발생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가족 가치관은 분명 예전과 다르다. 다만,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하긴 어렵고, ‘부분적으로 탈전통적으로 변화(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했다고 하는데, 아름과 남편 성만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요소를 엿볼 수 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기존 성별분업의 단순한 젠더 역전에 기인하고 있어, 기존 시스템의 젠더 관계를 완전히 해체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했듯 성만은 자신을 ‘식모’로 규정하며 돌봄/가사 노동을 담당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돌봄/가사노동은 육아휴가 등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를 전통적인 ‘아버지’로 규정하기보단 ‘어머니’ 포지션으로 인식하는 듯 보인다.
반면 아름은 한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펀딩을 받는 등 경제적 책임을 이끌고, 프랑스인에게도 어려운 관공서 서류 제출 등을 신경 쓰는 역할을 맡는다. 또한 남편을 위해 외길 식당을 먼저 제안했음에도 좋은 식재료를 쓰는지라 늘 발생하는 적자를 떠올리고, 매 순간 가계부를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하며 성만과 싸우기도 한다. 이러한 관계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인 보리가 태어난 후에도 지속된다. 물론 아름 역시 가사노동에 일부 참여하지만, 주 양육자 포지션에 위치한다고 말하긴 어렵다. 이러한 모습에서 나는 김경민(2021)이 인용한 러딕의 구절을 일부 반복하고 싶다. 그러니까,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자녀를 낳는 경험’을 선택적으로 할 수 있으나 ‘자녀 양육자로써 운명 지워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름은 그렇게 전통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답습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난한 일상 속에서 아름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결혼을 하려 했을까? ‘아버지’라는 위치에 더 가까운 – 그러니까 집안의 ‘가장’인 그는 거듭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왜 비혼주의자였던 성만과 결혼했고, 아이 계획을 세울 때 침묵한 성만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을까…….
그가 방황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 일부분은 아름의 과거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은 개인의 가족가치관은 개인 자신의 성장 경험에서 발생한다 말한 바 있다. 즉, 자라는 동안 매일 봐온 가족/부모의 가치관 등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면화하여 미래의 결혼 여부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아름 역시 이러한 부분을 설명하고자 함인지, 영화 내에서 자신의 성장과정을 짤막하게 언급한다. 남동생에게만 집중한 아버지, 아버지에게 관심을 끌고자 애썼던 어린 소녀에 대해서. 하지만 오로지 과거에서만 대답을 찾아야 할까? 어쩌면 일찍 세상을 뜬 아버지의 빈자리를 보며 저도 모르게 안정적인 가정을 꿈꿔왔을지도 모르지만, 아름은 과거에서만 이유를 찾지 않는다. 그는 외길 식당 시즌 2를 계획하고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손님들에게 묻는다. 짧은 시간 동안 신선한 시각과 사유가 점차 흘러들어온다. 프랑스의 팍스(PACs)라는 새로운 개념도 그렇게 영화에 등장했다. 그러나 아름은 여전히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결혼이란 '남녀가 정식으로 부부 관계를 맺'는 것이라지만 사회/문화적으로 결혼은 이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한다. 아름이 말했듯 입덧이란 미디어에서처럼 우아한 ‘우욱’ 정도가 아니었고 개인마다 다른 신체적 증상이었다. 마찬가지로 결혼 역시 미디어에서 비춰주는 양 매일매일 완벽하고 풍성한 생활을 담보하는 사회 시스템이 아니며 연애시절처럼 매양 낭만적일 순 없다. 주례에서도 알 수 있지만, 결혼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는 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해야 한다는 뜻이다. 즐거울 때야 상관이 없겠다만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건 어쩔 수 없다는 걸 이성적으로 이해한다 해도 어렵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시간이 연애 시절보다 늘어난다는 것. 그것이 어쩌면 결혼의 단면일 것이고, 《박강아름 결혼하다》는 그런 과정을 미화하지 않았다.혼전 합의서를 통해서든 아니든, 합리적으로 가사를 분담하고 경제적 책임감을 공유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점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젠더가 단순히 전복된 관계를 살고 있는 아름-성만 부부가 기실, 처음부터 끊임없이 합의하고 민주적인 가정을 이룩하고나 노력했을지라도 아마 이 과정은 어느 순간부터 중단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점은 보리가 태어난 이후일 확률이 높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본이 풍부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이를 키울 때엔 너/나를 가릴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족의 공동체적 특성이 강조되고 가족 구성원 간의 자원 공유가 미덕으로 수용(나성은 (2014))’되는 동안, 가족 내의 권력관계는 쉽게 기울어지기 마련인데, '사랑'과 '협력'이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린 이상 구성원의 기울어진 운동장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는 점차 미뤄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인 결혼(생활)은 그럼 무엇인가? 에 대한 내 대답은 '글쎄'이다. 몇 천년 전부터 인류는 이 물음에 대해 대답하려 했지만 여전히 질문을 하고 있는데, 내가 감히 이것이 정답입니다, 하고 무언가를 내놓을 자신은 없다. 정 안되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순 있겠다만, 다큐멘터리와 함께 고민하다 보면 관객은 관객 나름의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비관적인 이야기만 한 걸까? 아마 영화 내에서 아름이 자신이 겪는 결혼의 특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어떤 캐릭터성을 강조/축소하고, 일상을 편집한 측면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여튼 결혼에 대해 환상을 심어주는 멋진 드라마와 영화는 이미 많으니까, 그러한 미디어와(마음에 드는 작품 하나를 마음속으로 떠올리고) 《박강아름 결혼하다》를 동시에 펼쳐 놓고 생각해보자. 결론적으로 결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 모든 것의 총체라고밖엔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아웅다웅 삶을 일체화 시키며 추억을 쌓고, 헤어질 수 없는 사이로 변모하는 과정 말이다. 외길식당의 손님이 말했듯 자신의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다 너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과정이 수반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결혼이란, 관계의 한 자락에서 낭만에 취해 이런 선택이 있었기에 내가 네 곁에, 그리고 네가 내 곁에 있나보다 대화할 수 있는 삶의 한 양태가 아닐지.
★★★
* 본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한 후, 주관적 견해에 따라 작성되었습니다.
* 참고문헌
김경민 (2021).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좋은 엄마’ 되기: ‘어머니됨(mothering)’ 인식과 실천에 대한 고찰. 비교문화연구, 27(1), 5-56.
나성은 (2014). 남성의 양육 참여와 평등한 부모 역할의 의미 구성. 페미니즘 연구,14(2), 71-112
최연주, 문정희, 안정신 (2020). 미혼 남녀의 가족건강성과 결혼의향의 관계 : 가족가치관의 매개효과. 한국지역사회생활과학회지, 31(4), 663-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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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티 히어로 베놈, 새로운 빌런을 만나다
갑자기 누군가와 만나 시작된 사람과의 관계는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 관계는 친구사이가 될 수도 있고, 연인이 되거나 아주 사이가 나쁜 원수 같은 관계가 되기도 한다. 그 관계가 시작되는 시점에는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 생긴다.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이 꼭 연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인간관계를 맺어나가면서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상황의 주도권을 가지고 무언가를 하고, 또 반대의 상황에서는 친구에게 주도권을 주고 진행해 나간다. 그렇게 인간관계는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조금씩 그 모습을 찾아간다. 아무 모양이 없던 그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둘 사이의 특별한 모양을 만들어가고 모양을 찾지 못한 관계는 깨진다.
처음에 그렸던 서로의 모양에는 각자가 가진 능력에서 부족한 점을 채우고 반대로 부족한 점은 상대방의 능력으로 채울 수 있는 이상적인 모양일 것이다. 이런 모양을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해 많은 점을 알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시간을 통해 상대방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좀 더 좋은 관계가 되기 위해 각자가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완전히 서로를 파악하고 받아들일 때, 그 관계는 좀 더 오래 이상적인 모양을 지속할 수 있다. 이는 친구 관계, 부부 관계 등 모든 관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에디와 베놈의 관계를 중심으로 풀어나가는 영화 <베놈2>
영화 <베놈2: 렛 데어 비 카니지>는 에디 브록(톰 하디)과 그에게 들어온 외계 물질인 심비오트 베놈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실 이 둘의 관계는 2018년 개봉한 <베놈>에서 시작되었다. <베놈>에서 베놈은 여러 인물들을 돌아다니다 에디의 몸이 그에게 가장 잘 맞는다는 사실을 알고 에디의 몸속에서 기생하기로 결정한다. 영화 속 에디는 기자로 여러 취재를 하지만 유악한 인물이었다. 전편에서 여자 친구인 앤 웨잉(미셀 윌리엄스)가 다니는 회사의 정보를 바탕으로 취재를 하다 직장도 잃고 연인도 잃은 그의 몸속으로 들어온 베놈은 어쩌면 그때 그 시점에 에디에게 필요한 존재였을지 모른다. 베놈이 들어온 이후 그는 몸안에 기생하는 존재의 힘을 빌어 여러 가지 영웅적인 활동을 하기도 하며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찾기 때문이다.
전편에서 악당 심비오트를 물리친 이후에 에디와 베놈의 관계는 공생관계로 완전히 바뀐다. 그들은 계속 몸과 생각에 대한 주도권 싸움을 벌이는데, 이는 이번 <베놈 2>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들은 계속 여러 가지 활동을 하면서 티격태격 말싸움을 벌이는데, 마치 한 집에 사는 친구들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증오가 있지만 또 서로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둘의 관계는 아이러니한 상황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화가 무엇보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 둘의 관계가 변해가는 과정이다. 꽤 비중을 들여 영화 초반에서 중반까지 이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의견 충돌과 다툼을 담고 있다.
사실 이 둘의 관계에서 주도권은 베놈에게 좀 더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가 가진 힘은 일반적인 인간에 불과한 에디와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디가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에디는 가장 큰 이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에디는 기자로서의 취재나 글 쓰는 능력을 가지고는 있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유악한 점이 있다. 조금은 소심해 보이는 그의 성격과 약한 추진력은 그가 베놈과 같이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게 된다.
강력한 빌런 카니지의 등장
두 존재간의 주도권 싸움과 함께 새롭게 등장하는 빌런은 카니지(우디 헤럴슨)이다. 감옥에 갇혀있는 범죄자 클리터스의 몸에 들어간 심비오트는 베놈보다 강력한 카니지를 탄생시키게 된다. 강력한 빌런이 된 클리터스는 베놈과 에디의 관계와는 다르게 카니지의 입맛에 맞는 행위들을 벌이게 된다. 초반에는 클리터스와 카니지가 서로 협의를 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카니지가 자신의 힘을 더욱 돋보이고 폭주시키고 싶어서 그를 이용하는 것뿐이다. 클리터스와 카니지는 공생관계라기보단 인질 관계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클리터스도 굉장히 악독하고 강력한 성향을 가졌지만 카니지는 그런 악당까지 압도하며 폭주한다.
영화는 베놈이 숙주와 맺는 관계 그리고 카니지가 숙주와 맺는 관계를 대비시키게 되는데, 비록 베놈의 힘이 카니지에 비해 떨어질지라도 숙주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팀업이나 감정적 결합에서는 우위에 있다. 두 존재가 영화 속에서 마주치는 장면이 많지는 않다. 후반부에만 몰려있는 이 둘의 대결은 힘의 대결로도 보이지만 각자가 맺고 있는 숙주와의 관계가 가진 힘을 비교하면서 보게 만든다. 실제로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베놈이 이용하는 건 힘보다는 팀업과 약간의 트릭이다.
영화 <베놈2: 렛 데어 비 카니지>는 실질적으로 전편인 <베놈>의 이야기 방식을 거의 유사하게 따라가고 있다. 약간의 변주만 주었을 뿐, 베놈과 에디의 주도권 싸움을 또 한 번 다루고 있으며 악당의 출연과 마지막 대결도 거의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무엇보다 빌런인 카니지와 베놈의 치고받는 대결이 후반부에만 위치해 있다는 점은 이 영화가 긴장감을 쉽게 느끼지 못하게 한다. 영화는 후반부 클라이맥스까지 카니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이야기와 베놈과 에디의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는데 그런 이야기 자체가 꼭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
전편에 이어 2편에서는 에디가 좀 더 성장하는 이야기가 전개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영화에서도 에디라는 캐릭터는 성장이 없다. 여자 친구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기자로서의 경력은 나아졌지만 그마저도 베놈의 도움 때문이다. 전편의 그 지질한 캐릭터로 그대로 멈춰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에디라는 캐릭터의 특성이라면 할 수 없겠지만 그것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변함없이 지질한 그는 답답하게 느껴진다. 외계 물질인 베놈도 마찬가지다 전편에서 하던 유아기적 대화와 행동이 여전하며 영화 내내 그것이 반복적으로 보인다.
결국은 1편의 이야기와 비슷한 동어반복적인 이야기
적어도 베놈과 에디의 관계는 안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겠다. 두 존재에게 서로가 필요하기에 어느 정도의 타협점을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다음 시리즈가 이어진다면 이 두 존재의 성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둘의 관계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이민자와 본토 사람들 간의 갈등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베놈이 이민자라고 한다면 에디는 원래 살던 사람이 된다. 외부의 존재가 온다면 그 둘 간에 주도권 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에는 두 존재가 서로 타협점을 찾아 안정을 찾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 부분에 대한 방향성도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앤디 서키스 감독은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골룸과 <혹성탈출> 시리즈의 시저를 연기한 연기자다. 최근에 정글북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장편영화 <모글리> 연출을 하면서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이번 <베놈2>에서는 무난한 연출 실력을 보여주는데 그가 연출가로서 가진 특별한 재능이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1편을 다른 방식으로 복제한 것 같은 이야기 전개와 크게 변화 없는 CG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주인공 에디 역할을 맡은 톰 하디는 <베놈> 시리즈에서 지질한 캐릭터로 연기 변신을 성공적으로 했다. 이번 <베놈2>에서도 근육질의 에디가 실수를 남발하고 겁먹은 모습을 보여주는데 꽤 만족스러운 연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의 엔딩 타이틀이 올라가고 나서 쿠키영상이 하나 등장한다. 향후 제작사 소니가 판권을 가지고 있는 베놈과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지 살짝 엿볼 수 있는 영상이어서 팬들이라면 꼭 보고 나서 극장을 나서길 바란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주로 말 위주로 전달되기 때문에 라디오처럼 들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유튜브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베놈2:렛 데어 비 카니지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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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가 망했다고? 왜?
우리 잡히지 말자! 리들리 스콧 감독은 낭만을 잘 살리는 감독이었다. <델마와 루이스>는 아주 좋은 예시가 될 것이다. 가부장적인 곳에서 잡혀 살던 주인공이 한 사건을 계기로 자아를 찾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나도 그게 와닿을 시기에 그 작품을 봐서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물론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나 <에일리언> <블레이드 러너> 이런 것들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작품이겠지. 아니 사실 나는 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리들리 스콧의 감독 작품 중에 본 것 <델마와 루이스>밖에 없다. 그래서 그를 감성적으로 기억하고 있나 보다. <마션>이나 <블레이드 러너> 한번쯤 봐야 하는데 공익근무요원 일이 너무나도 힘드니 볼 틈이 없다.
근데 그런 바쁜 와중에도 최신작은 못 참는다. 후에 스파이더맨 유니버스에 굉장히 중요한 포지션을 차지할, <베놈 2 : 렛 데어 비 카니지>와 함께 자웅을 겨뤘던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를 다루려고 한다. 원래는 <라스트 나잇 인 소호>를 써보고 싶었지만 뭔가 극장에서 시간이 안 날 것 같아서 근래 상영작 중 좋았지만 저평가가 있었던 것을 고르려고 한다. 나는 이 영화가 러닝타임도 길고 중세 서부라는 한국인들이 접근하긴 어려운 소재임에도 훌륭한 메시지와 좋은 연기를 담았다고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과연 2021년의 과소평가 작품 1등으로 꼽힐만하며, 이 작품의 조디 코머는 주요 시상식의 여자 주인공 후보로 뽑힐 수도 있다는 소심한 주장을 해본다. 아마 아무도 동의 안 하겠지만..ㅋㅋ
1. 감독 리들리 스콧, 장기를 살렸나요?
물론 이 감독의 영화를 <델마와 루이스> 빼곤 보진 않은 게 맞다. 근데 (자칭) 시네필로 살고 있다는 가오는 어느 누구와도 바꿀 수 없지 않은가? 그의 대표작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리들리 스콧은 상상력이 좋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에일리언>이나 <블레이드 러너> <마션> 같은 작품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주위에 화성 갔다 온 사람 있는가? 비트코인으로 간 거 말고 실제로 화성에 간 사람 말이다. 또 실제 존재하는 에일리언 본 적 있는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리들리 스콧의 최고 강점은 '가상의 현실을 직조시켜 최대한으로 서스펜스를 유지시키는 것'인 것이다. 근데 이 작품은 에릭 제거가 쓴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이 원작이 되는 소설은 실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없던 현실을 만들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13세기로 넘어가는 타임머신이 있는 건 아니라서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건 아니겠지? 근데 영화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않아도 2021년의 현재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만들었다. (내가 아는) 리들리 스콧의 영화와는 살짝 다른 감이 있지만 그 나름대로의 묵직함이 있다.
2. 배우들의 연기는 어떠한가요?
일단 주인공 자크 드 거리를 맡은 아담 드라이버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결혼 이야기>에서의 부부싸움 연기나 <인사이드 르윈>에서의 그냥 포크 뮤지션 역할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래도 중요한 건 역시 <스타워즈> 시리즈에 나왔던 것 아닐까? 다방면의 역할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의 이선균 아담 드라이버는 그야말로 전천후 연기자다. 난 이런 그의 연기력이 이 작품에서 극대화됐다고 생각한다. <아네트>에서도 어마어마했고 <패터슨>도 잘했다고 들었다. 근데 두 작품을 안 본 것과 별개로 나는 이 역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난이도가 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가 되는 사건이 있는데, 사실 극을 보다 보면 이 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는지 누구나 다 알 수 있다. 결말을 예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근데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것이 이 자크 드 그리의 캐릭터가 보통 미친놈이 아니라는 것인데, 현실적으로도 있어서는 안 될 돌아이라 내가 배우 입장이라면 이 역을 맡는 게 무서웠을 것 같다. 근데 우리의 아담 드라이버는 이를 200% 소화해낸다. 다른 주인공은 맷 데이먼이 맡은 장 드 카루 주인데 이 인물 역시 딱히 우리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자크 드 그리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가 그렇게 좋은 인간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근데 <악마를 보았다>의 장경철이나 <다크 나이트>의 조커같이 비현실적인 미친놈들도 연기의 난이도가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근데 이 장 드 카루 주같이 어느 정도는 현실성 있는 돌아이도 어렵다면 어렵지 않을까? 맷 데이먼은 그때는 보편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보기엔 돌아이인 그런 인물을 아주 멋지게 소화해낸다. 본 시리즈에 나왔던 샤프한 모습은 없다. 그냥 배 나온 아저씨가 보일 것이다. 근데 맷 데이먼은 나이가 들어도 역시나 연기를 너무 잘해서 포스가 흘러넘친다. 다음은 조디 코머다. 조디 코머가 맡은 마르그리트는 많은 것을 감내하는 중세시대 여자 역할을 한다. '많은 것을 감내한다'에서도 알 수 있듯 그녀는 수도 없는 개소리를 참아야만 하는데, 터닝포인트가 되는 핵심 사건을 비롯 그녀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감정적으로 참는 것이 배우로서 힘들었을 것 같다. 인간적으로 영화의 마르그리트는 살아있는 부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외에도 벤 애플랙을 비롯한 나머지 배우들도 좋은 연기를 보여줬지만 나머지 세 배우가 워낙 탁월했기에 글을 줄이도록 한다.
3. 난이도는 어떤가요?
쉽지는 않다. 무슨 말이냐. 리들리 스콧 감독이 서스펜스를 차곡차곡 쌓은 것도 맞지만 일단 이 영화는 같은 에피소드를 세 번 반복한다. 만약 우리가 같은 말을 세 번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솔직히 지루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래서 결론이 어떻게 나는데?'가 궁금한 분들은 긴 러닝타임을 견디기 어려워할 수도 있다. 웬만하면 극장에서 보는 게 좋은 작품인 건 맞는데 모바일 환경에서 보는 게 어마 장장한 손해를 품고 있지는 않으니 스릴러, 역사물 좋아하는 분들은 부담 없을 듯. 아, 살짝 지루할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이 있기야 하지만 플롯을 성실히 따라가다 보면 이해하기 크게 어려운 작품은 아니다.
4. 왜 과소평가되었다고 생각하나요?
물론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마음을 꿰뚫을 순 없겠지만 난 사실 되게 간단한 이유로 과소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첫 번째 요인, 같은 이야기를 세 번 반복한다. 인스타그램 쇼츠가 유행하는 세상이다. 나도 본론 결론 딱 임팩트 있게 끝나는 영화가 더 손이 갈 때가 있다. 이런 세태에 같은 과정을 세 번 반복하는 영화가 대중적인 입맛에 딱 맞아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두 번째. 전염병이 창궐한 세상에 인터넷이 너무나도 발달했다. 14세기 중세시대를 다뤘던 게 소수의 덕후들이 아닌 나머지들에겐 접근 난이도가 있었을지도? 또, 세 번째. 러닝타임이 길다. 솔직히 나도 극장에서 이 작품을 봤을 때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에 놀랐다. <이터널스>가 아마 비슷하지 않았나? <이터널스>는 10명의 히어로들을 밸런스 있게 배치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기라도 했지 이 영화는 같은 이야기만 세 번을 쓰니 반복이 지치다면 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근데 이것은 이 영화의 단점에 대한 이야기가 될 테고, 나는 14세기의 원작 소설이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단점을 충분히 감추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 지점이 리들리 스콧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이기도 하겠지. 이 모티브를 부담 없이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극찬받을만하다.
5. 어떤 것에 대한 영화인가요?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미투 운동이다. 미투 운동. 우리 사회에서 상처를 입은 이들을 위로하는 운동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미투 운동은 역선택을 품고 있다. 무고한 사람을 걸고넘어지면 그 사람의 마음에 구멍이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애 먼 사람의 삶을 망가트리는 짓은 그만큼의 대가가 치러져야 마땅하다. 근데 이런 역선택의 위험성이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면 안 되지 않을까? 이 영화의 마르그리트는 한 사건의 주인공으로서 그때의 성차별적인 행동에 대해 적극적으로 답한다. 또 현대사회의 미투 운동을 연상케 하는 여러 말들을 통해 왜 우리 사회가 약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야만 하는가? 에 대해 조명한다. 또 그녀 역시 역선택의 위험부담에 놓여 정체성을 잃을 뻔 하지만 어쨌든 당당하게 그녀의 목소리를 낸다. 우리는 이런 그녀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 과연 현재의 우리에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이 사회에서 꼭 우리와 함께 양립해야 할 가치는 무엇일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할까? 뭐 그런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런 질문들을 통해 뇌 비운 혐오가 팽배하는 우리 현실에서 그 자체를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가치를 지니는지를 전해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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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임지 선정 '2021년 최고의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안녕하세요! 씨네랩입니다.
어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요아킴 트리에 감독의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가 개봉을 했는데요!
매력적인 소재가 담긴 스토리와 주연 배우들의 연기에 빠져든 관객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관람객들의 실시간 반응을 살펴볼까요?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٩( ᐛ )و
'나'라는 인간은 곧 내가 범한 엉망진창이고
아름다운 오류들의 집합체
(네이버 / lxxq****)그냥 단순 로맨스라기보다는성장물의 느낌이 강해서 좋았다(네이버 / the_****)사랑에 대한 욕망과 성찰을책 한 권의 챕터를 통해 읽어나가는 기분이 든다(CGV / J**u_)너무나도 공감이 됐던 영화…친구랑 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CGV / pd**860)사랑과 인간관계에 대한 감독의 성찰도 돋보이지만,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오슬로의 아름다움도 인상 깊다(롯데시네마 /차*식)달콤 씁쓰름한 사랑과 인생을감각적이고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에 버무려현실적으로 잘 그려냈다(메가박스 / dynkki19**)사랑이란 무엇일까, 진짜 완벽한 사랑은 무엇일까생각하게 되는 영화(메가박스 / patty20**)최악이 최선으로, 깨달아가는 사랑과 인생의 여로(씨네랩 / 모모**)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에게,인생의 조연 같은 느낌을 받는 사람에게,인생의 다음 챕터로 성장하고 싶은 사람에게<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추천드립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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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불한당>,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거야
*<불한당>과 <무뢰한>의 스포일러가 많습니다.
고품격(?) 막장 드라마 <부부의 세계>를 두고 누군가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불륜이 선빵이면 그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않겠냐고 농담조로 말하자 상대방은 부부, 아니 인간관계에서 믿음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보여주는 드라마가 아니냐고 진지한 답을 내어놓았다. 동감하며 답했다. 맞다. 그런 메세지는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믿는 게 얼마나 비효율적인 짓인지를. 안 믿고 있다가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는 게, 믿었다가 못 믿을 놈이란 걸 확인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데 말이다. 그런 인생의 교훈을 일찍 깨달아서 도움이 되었겠다는 말에 웃으며 답했다. 아뇨, 알면서도 당했다고. 이번은 다르겠지. 이 사람은 다르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결국 결과가 똑같았다고. 알면서 당하면 진짜 바보인데. 안 그런가?
현수 曰 "(어휴) 촌스러워요"
<불한당>은 촌스러운 듯하면서 까리하다.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빨간 스포츠카 같은 영화다. 맛깔나는 대사나 장면도 많다. 다년간의 드라마와 영화 학습으로 쌓인 우리의 기대와 예지력을 조금씩 벗어난다. 처음부터 생선 눈이 무서워서 회를 못 먹는다는 둥, 사람 눈을 보면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냐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최후의 만찬처럼 회를 사주고 머리에 총알을 박질 않나, 사람 죽이는 건 안 무서운데 여전히 생선 눈은 무섭다고 깻잎을 덮질 않나. 그러다간 또 푼수 떼기처럼 허세를 부리다가 삼촌에게 얻어맞고 차에 가서 훌쩍거린다. 그 눈물이 어찌나 새롭게 느껴지던지. 덩치가 작은 현수가 덩치 큰 수감자와 뺨 때리기를 하면서 주먹을 쓰는 반칙을 하면서도 당당하고, 재호는 그걸 보며 '혁신적인 또라이'라며 마음에 들어하기도 한다. 그런 현수에게 열광하는 당신도 두말할 것 없이 압도적인 또라이 아니겠어.
숨겨둔 카드를 빨리 보여준다. 아니, 벌써? 살짝 당황스럽지만 별로 걱정되진 않았다. 재호는 현수가 위장 경찰인 걸 일찌감치 알고 있고, 현수는 심지어 순진무구한 얼굴로 "형, 나 경찰이야"라고 자백을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알아차리게 된다. 무간도 같은 언더커버 전개가 아닐 거라는 것. 실제로 영화는 나쁜 놈인 건 둘째치고 등장인물들이 어지간히 또라이들이다. 이상하게 순정파 같은 또라이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실 재밌어서 도와준 거 같기도 하고
재호와 현수의 영화이다. 좀 더 치자면 재호와 현수, 병갑과 천 팀장이 남는다. 현수의 행동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차피 재호는 잘해야 미끼 혹은 돌다리다. 검거해야 할 타켓 중 일부에 불과했다. 어지간해선 칼을 가지고 재호를 얼마나 다치게 할 수 있을까 싶은데 기를 쓰고 그렇게 말리고선 대신 다친다. 재호를 구하지 않았어도, 다치지 않았어도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있진 않았을까. 목숨은 어머니 말씀처럼 박애주의적인 입장에서 구할 수도 있다 쳐도 교도소에서 남은 기간 동안 모든 힘을 다시 찾을 수 있게까지 해준 게 제법 과하게 느껴졌다. 목적을 위해 마음을 얻는 일이 이렇게 정성이 가득한 일이었나 싶었다. 재호에게 든든한 믿음을 얻으려는 전략이었을까, 그 사이에 진심이 있었던 걸까.
게임 끝나버렸는데요
재호가 왜 현수를 아까워하고 아꼈는지는 분명하다. 고아원부터 함께한 병갑과는 다르다. 병갑은 무조건적으로 재호를 좋아하고 무해하다. 하지만 그라고 뒤통수를 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재호는 늘 뒤통수를 조심하라고, 뒤를 돌아보며 살라 하지 않았나. 병갑이 현수를 꼬마 새끼, 짭새 새끼라며 부르며 질투하고, 회장 자리에 앉아보면서 히히덕거리는 순진한 힘에 대한 로망은 빤히 보이니까 괜찮다. 병갑이 정말 재호를 아끼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던 건 삼촌이 재호를 죽이려고 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놀라지 않았을 때였다. 별스럽지 않게 면회를 와선 뒤늦게 삼촌이 널 죽이려고 했다며 재호의 뒤통수에 대고 말하는 장면. 아, 이래서 병갑이와는 안 되겠구나 했다. 만약 재호가 잘못됐어도 지금처럼 침착할 수 있었을까. 훌쩍거리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현수가 재호의 뒤통수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진 것과는 대조적이다. 병갑은 늘 한 박자 늦고 어딘가 빈틈이 있다. 재호는 병갑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야속하게도 마음이 수평을 이루는 사이는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병갑의 마음이 재호보다 훨씬 깊고 무거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이나 상황이냐, 앞통수냐 뒤통수냐
<불한당>은 내게 믿음에 관한 영화다. 그 안에 사랑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지만 <무뢰한> 이후에 믿음의 씁쓸한 얼굴이 떠오르는 영화다. 누구나 거짓말을 하고 누구나 뒤통수를 칠 수 있다. 신뢰가 필요하다는 말은 역으로 현재 세상의 기본값이 거짓말과 뒤통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뢰한>은 <불한당>과 비교하면 그나마 해피엔딩이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만 재곤과 해경은 살아있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완전히 믿진 못했다. 재곤은 해경을 속일 힘과 집요함이 있었고 혜경은 속일 수는 있지만 끝까지 모질지 못했다. 그에게 칼을 꽂아도 치명상에 이르지 못한다. 재곤은 혜경을 찾아가 변명도 하고 믿음을 저버린 걸 나름의 방식대로 속죄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일반적인 방식은 아니다. 해경의 복수는 바들바들 떨면서 그에게 칼을 꽂는 것이고, 재곤의 속죄는 그 칼을 그대로 맞고서도 그녀의 새해 복을 챙기는 것이다.
그러나 <불한당>은 다르다. 현수와 재호는 둘 다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있다. 인정사정없이 칼을 꽂고 목을 조르고, 얼굴을 뭉개고 총을 쏜다. 재호의 배신은 순순히 넘어가기 힘들다. 다른 건 몰라도 부모님은 건드리는 게 아니지 않나. 재호가 현수를 감는 방법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었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아끼는 현수를 알고도 완전히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기려면 어머니의 죽음쯤은 감수해야 할 일이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오열하는 현수를 보던 재호의 얼떨떨한 표정이 인상 깊다. 마치 "그렇게까지 괴롭고 슬퍼할 일인가" 싶으면서 약간은 잘못했나 싶은 표정.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의 죽음으로 현수가 심지어 신분을 드러내는, 평생 재호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믿음을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모든 비밀과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게, 가족을 그렇게 아낄 수 있다는 게 재호에게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재호의 마음도, 어깨도 무거워진다. 우리만 생각한 건 아니었겠지.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그 생각.
이렇게 어려운 건 현수 네가 처음이야
재호는 착실히 판을 짜고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서 원하는 것들을 이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곁에 왔다 가면서 세워놓은 방법이었다. 이제 현수도 곁에 있고 고병철 회장도 사라졌다. 살기 위한 일이었을 뿐 지겹고 피로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현수에게는 마지막까지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수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다른 게 분명한데도, 주변의 공기도 날씨도 다른데도 함정에 걸어 들어갔다. 병갑을 직접 명패로 때려죽이면서도 현수가 복수를 하고 있구나, 내 손으로 복수를 하게 하는구나 했을 것이다.
묘하게 밉고 묘하게 미워할 수 없다
재호의 병 주고 약 주고(어머니는 돌아가시게 하곤 장례식 비용과 마무리는 도와주는) 식의 행동을 알게 된 후, 현수는 재호를 이상하게도 많이 배려해 준다. 일찌감치 어머니를 죽인 사실을 얘기해서 자신을 죽일 기회도 주고, 경찰들로부터 피할 수 있게 작전을 모조리 바꿔버린다. 재호 역시 자기 한 몸 지키기 바쁜 와중에도 현수가 곤경에 처하자 다가와서 도와주고. 가까스로 빠져나온 재호를 천 팀장이 차로 받아버릴 때는 순간 이 영화의 악역이 천 팀장이었나 싶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천 팀장이 제일 못된 사람은 아니지만 제일 야멸찬 사람이긴 하다. 모든 걸 알고도 원하는 걸 위해서만 움직이는 사람. 죄책감 같은 건 스스로 괴롭기만 하고 당하는 놈이 바보라고 하더니 그럼 이제 누가 바보인가. 얼마나 악역인지는 재호의 웃음소리 뒤에 현수가 천 팀장에게 박아 넣은 총알 소리를 세어보자.
현수가 될 수도 있었지
재호와 현수를 보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안타까워진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건드리지 않았다면, 아니 현수가 원하는 대로 감방으로 입학하지 않고 취직을 했다면, 재호가 오세안 무역 사람이 아니고 현수가 경찰이 아니었다면, 재호가 가족애라는 걸 공감하거나 현수가 좀 더 솔직하지 않았다면 많은 게 달라졌을 것이다. 현수가 바라던 대로 취직을 했다면 회를 먹으면서 영화 시작과 동시에 머리에 총알이 박혔을 것이고 오열하면서 홀로 남은 쪽은 어머니였을 수도 있다. 재호가 현수의 어머니를 알뜰히 챙겨줬다면 어머니를 핑계로 현수를 움직이게 했던 천 팀장이 무슨 짓을 했을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뭔가 달라졌다고 해도 결과가 과연 안타깝지 않았으리란 보장은 없다.
처음에는 현수 입장에서 재호를 원망했다. 하고많은 방법 중에 꼭 어머니를 죽이는 방법이었어야 했을까. 좀 더 솔직할 순 없었을까.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으면 너를 죽였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한 번도 누굴 믿어본 적 없는 사람이라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말이다.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마다, 나를 믿는다고 말할 때마다 괴로웠다고도. 천 팀장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이야기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을 입도 이해는 간다. 경찰인 걸 속이는 것과 어머니를 죽였다는 점을 속이는 것은 다른 문제다. 말했다 하더라도 현수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재호가 밝히는 순간 현수는 세상에 홀로 버려지게 된다. 차라리 끝까지 몰랐으면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다시 영화를 보고 나선, 현수에게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과연 현수가 재호의 숨을 끊었을까 싶었다. 총도 맞고 차에도 치어 치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재호의 고통을 줄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는 끈질기니까 살아남을 순 있겠지만 어차피 이젠 함께할 수가 없다. 현수와 재호는 정말 모든 걸 그만두고 버리고 떠날 용기는 없었다. 재호가 다시 감방에 잡아넣는다고 치면 지난날처럼 감방을 주무르며 지낼 수 있을까. 또 나온다 한들 다시 이 일에서 손을 뗄 수 있을까. 현수는 이 일을 계기로 경찰을 그만둘 수 있을까. 현수는 모든 것을 재호에게로 돌린다. 이 모든 상황도, 사람들도, 시간도. 사람들도 역시 상황을 믿을 테니까. 재호의 손에 쥐여준 그 총을 믿을 테니까.
마지막 장면의 현수의 표정은 춥다. 늦은 후회와 밀려오는 공포와 두려움에 허여멀건 하게 질려있다. 굳이 손으로 재호의 숨통을 막을 필요가 있었을까. 여태까지 잠입을 위해 때리고 죽였던 수많은 사람들과 재호는 다르다. 의미가 생기고 믿어버리게 됐다. 차라리 그가 알아서 고통받도록 그대로 두었다면 적어도 죽음은 현수의 탓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죽이고 믿음을 저버린 복수는 현수를 스스로 세상에 홀로 버려진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현수가 재호를 덮었던 손을 늦지 않게 놓아버리고 뒤도 돌아버리지 않고 걸어갔으면 어땠을까. 그 빨간 스포츠카가 비어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리고 들이마시는 재호의 숨은 인셉션의 팽이처럼 마지막 숨인지 계속되는 숨인지 알 수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영화는 불한당이고, 나쁜 놈들의 세상이다. 현수는 재호를 죽게 함으로써 불한당이 되고, 재호의 마음을 이해한 채로 살아가게 됐다.
여담이지만 <무뢰한>에서 목적을 위해 믿음을 뒤로했던 형사 재곤은 <열혈 사제>에 가서는 신부가 되어 "너에게 말한다. 77번이라도 용서해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역대급으로 성장한 인내심과 믿음을 보여주었다. <불한당>의 피와 눈물, 배신감과 불안, 슬픔과 두려움에 젖은 경찰 현수는 재호와의 사이에서 용서가 물 건너가 버린 게 마음 아프기도 하다. 인생이 그런 걸지도 모른다.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용서를 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내 안에 살아있던 그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사라지게 하기도 한다.
아무래도 부정할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을 것이다. 언제 봤다고 대뜸 자기라고 부를 때였는지, 처진 어깨로 등 뒤에 칼이 있는지도 모르고 감방 복도를 걸어갈 때였는지, 출세하기 한참 전에 낡아빠진 사무실에 데려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인지, 알면서도 자기가 불러들인 죽을 자리로 들어오는 초연함 때문인지, 혹은 언제든 총을 쏠 수 있던 사람이 자신 앞에서는 결국 총을 제대로 겨누지도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인지. 다만 현수는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차마 총을 쏘지 못하고, 손을 떼지 못하는 그 순간에 여실히. 그 마음이 미안함 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어둠 속에서 느낀 모든 것들이 날이 밝아오면서 밀려올 때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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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너네 오빠도 그럴 수 있어.
이 글은
영화 [성덕]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글을 인용 및 퍼가는 경우 출처를 반드시 표시해주세요.
사진출처:다음 영화
사실 너를 이해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의 “오빠”가 포승줄에 묶여 기자들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미안한 척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래도 우리 오빠는 아니니까 괜찮아.라는 말을 서슴없이 뱉는 또 다른 “오빠”의 덕후인 너를.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괜찮은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자기 오빠만 아니라면 저런 일이 일어나도 된다고 생각하는 너의 태도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네가 웃고 있다는 점이 나를 불쾌하게 했다. 미소 안에 숨겨진 알 수 없는 우월감과 안도감을 결국 숨기지 못해 내게 들켰다는 사실을 네가 알까.
우리 사이를 10년이나 지속하며 지내온 나조차도 덕후가 되어 이상한 필터가 눈과 마음에 씌워버린 채 내 앞에 앉아 있는 낯선 너를 이해할 수 없는데. 어째서 만들어진 신(God)에 가까운 검은 머리 짐승에게 이토록 마음뿐 아니라 이성까지 빼앗겨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너와 있을 때 생겨나는 묘한 불편함은 손톱 옆 거스러미처럼 계속 나를 긁어 댔다. 너는 늘 우리 오빠 이야기만 했고. 우리 오빠의 작품을 보기를 강요했으며. 우리 오빠가 팬들 중 유일하게 너를 팔로우했다며 제주도에서도 보인다는 롯데 타워만큼이나 올라간 어깨를 으쓱댔으니까. 만난 것은 우리 두 사람인데 어째서 약속 장소에는 나는 허락하지 않은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 같기만 한지. 그리고 왜 약속을 잡은 나와는 이야기하지 않고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주제에 내 약속 상대를 뺏아간 그 누군가와만 이야기하는 것 같은지. 네가 즐거워서 얼굴이 더 밝아질수록 나의 불쾌함은 그 밝음의 그림자처럼 깊어져만 갔다.
네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너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늘 입버릇처럼 자존감의 성립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했고. 나는 그 틈을 비집고 심리학에서 의존할 대상이 필요하거나, 누군가에게 받지 못한 인정과 사랑을 충족시킬 대상을 내세울 때 연예인에게 집착하는 성향이 생긴다는 사실을 대입했다. 그만큼 너의 애정은 자신을 향한 푸념만큼이나 광기에 가까웠고. 나는 너의 그런 찬란함만 가득한 광기가 이해가 가면서도 온전히 안을 수는 없었다.
그 와중에도 너는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했다.”저런 거”쫓아다니는 애들은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는다던가. 혹은 직업에서 그다지 입지를 다지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너는 참 열심히도 살았다. 덕질하느라 적금도 겨우 넣는다는 너의 푸념은 입가에서 마를 날이 없었던 건 너는 쏙 빼고 말하겠지만.
영화 속엔 네 친구들이 참 많더라. 그런 사건이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오빠가 그럴 리가 없다며 옹호하기도 했고. 쿨한 척 죗값을 치르고 다시 돌아오라는 말을 내뱉기도 했으며. “너네 오빠”의 가면 벗은 모습을 밝힌 기자 한 사람이. 세상에서 잠시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느낄 때까지 무지성으로 헐뜯기도 했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나는 팬으로 대변되는 집단의 대다수가 가진 좋아한다는 감정이 참으로 우습다는 생각도 한다. 그 죽고 못 사는 오빠가 어느 정도 그런 사람인 줄 짐작으로 알았으면서도 기꺼이 눈을 가렸음을 말할 때는 머뭇거리는 영화 속 인물들을 보면서 더더욱. 결국 그들의 선택적 눈가림이 진짜 피해자들에겐 2차 가해이기도 함을 모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일하며 그 사람을 좋아하는 행위 자체가 사회적으로는 어떤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해도 온전히 떳떳함을 느끼지 못하고 슬그머니 어깨를 움츠리는 것처럼.
물론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너희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문제는 있을 것이다. 억울하기도 하겠지. 입에도 담기 싫은 그 일이 생긴 후, 팬들은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동급 취급을 당하거나. 걔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말을 당사자가 아닌 팬들에게 넘겼을 테니까. 그뿐일까. 이 영화를 보면서 너를 떠올리고 있는 나조차도 내가 너를 이해해 “주겠다”는 시건방진 마음을 가지고 다리나 꼰 채로 의자에 앉아 맘껏 너를 비웃으며 영화를 관람하고 있으니까. 너를 포함한 그 집단은 이런 시선과 아니꼬움까지 업은 채 본질보다 더 왜곡되고 있을지도 모르지.
영화가 다루는 대상, 혹은 질문에서 빠져 있는 게 피해자라는 생각이 드는데. 어쩌면 너도 피해자 중 한 부류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도 들긴 한다. 그것도 돈, 시간, 마음까지 다 바친 대상에게.
세연이 박사모를 찾아가는 모습을 비추었을 때의 얼굴을 네가 보았어야 했다.세연에겐 거울 요법이었을 테고. 그 어떤 기준도 없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열변을 토하는 박사모 회원 중 한 사람을 보면서 세연이 느꼈을 어이없음은 내게도 조금의 통쾌함으로 다가왔다. 누군가의 기세에 밀린다는 생각을 아마 너네 오빠가 최고인 줄 알던 너도 저 자리에 있었다면 처음 만나보는 감정이 아니었을까 한다. 뭐 요새 하는 말을 빌리자면 자강두천(자존심 강한 두 천재) 정도가 되겠지.
사진출처:다음 영화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영화의 마지막 지점은 묘하게 내가 너와 별반 다른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나 조차도 은근히 선을 긋고 있음을 알게 되는 그 시작점. 불쾌하지만 사실적이고 어딘가 축축하지만 화려한 독버섯이 가득 피어 있는 길티 플레저를 닮은 이 영화처럼.
나도 충동적으로 용돈의 일부를 털어 [리틀 드러머 걸] 블루레이 세트를 사고(언제 오냐ㅠ), 일주일에 한 편 이상의 영화를 보고 리뷰를 쓰는 것에 강박적이며. 남들은 모르는 나만의 영화를 찾기 위한 여정을 외롭게 걷는 것을 즐기는 데다 “대다수”의 사람이 좋아하는 영화는 입맛에 맞지 않는다며 고급인 척 하지만. 그래도 “너 정도”는 아니니까.라는 말로 포장했을지도 모른다. 네가 “그 오빠”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너보다는 “수준 높은”것을 하고 있다고 너를 매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훅 밀려왔다.
그런 사람 좋아하지 말고 네 인생에나 신경 쓰라고 말하고 싶어 늘 마음속 파우치에 그 문장을 고이 챙겨 다녔던 나도 그다지 떳떳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든다. 물론 그 말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개입해야 할 문제일지 아닐지 투표를 한다면 개입하지 않는다에 더 많은 표가 들어있을 것임은 투표 전인 지금도 명백해 보이니까. 어차피 정도와 대상의 차이만 있을 뿐. 좋아하는 것을 향한 다양한 감정은 네가 그렇고, 영화 속 인물이 그렇고 나에게도 그랬듯이, 모두의 마음속 하늘에 뜬 채 지지 않는 엉망진창 무지개일 텐데 말이다.
사진출처:다음 영화
뿌리 깊은 덕질이 하루 안에 그칠 리 없다. 그러나 영화의 말미에 그려진 것처럼. 행복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건강하게 덕질을 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그러나 그 행복하기 위한 덕질의 전제 조건으로 나중에 상처받을까 봐 애초에 마음을 다 주지 말자고 말하는 영화 속 인물의 말에는 반대한다. 사랑이란 것이 우연처럼 찾아와 남남이던 두 사람을 우리로 엮어 뗄 수도, 떼고 싶지도 않게 여겨지던 때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과연 그 다짐이 제대로 작동해서 헤어질 때 마음 한 구석이 마취도 하지 않은 채 강판에 갈려 나가는 것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 적은 없지 않은가.
어차피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의 행동이 정상에 가까울 리 없다. 그러니 너도 나도. 정상인 척 숨기려 하지는 말자. 하지만 일상만은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자. 여전히 나보다 정도가 심한 덕질을 하는 네게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두 발 모두를 허공에 띄워 정처 없이 표류하기보다 적어도 가계부만은 쓰기를.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 선택한 덕질이라 할지라도 현실 앞에 눈 감기보다 한쪽 눈 정도는 뜰 수 있기를.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지긋지긋하게 너를 덕질하는 현실이 너를 놓아버릴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는 말자.
그러니 다음에 만날 때는 너의 23 아이덴티티 중 그 오빠의 덕후인 모습은 숨긴 채 만나자. 덕질은 너만의 것일 뿐. 다른 사람 마음의 옷걸이에 제멋대로 걸어두는 외투가 아니다. 불쾌함을 느낀 상대방이 너의 외투를 툭 떨어뜨린다고 해서 네가 옷걸이를 욕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너와 나는 그 사실을 반드시 인지해야만 한다. 그래야 서로 간의 시간도 감정도 존중하는 길일 테니까.
또한 네가 좋아해 마지않는 그 오빠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자. 우리 오빠는 그럴 리가 없다라던가 어떻게 팬들한테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철학적으로라도 인정해야 한다. 행여나 네 마음속 감옥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런 “안 좋은 일”이 탈옥해서 세상에 돌아다닌다 해도. 그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늘 알아야 한다. 애초에 너네 오빠의 자유의지가 그랬을 뿐이다. 너네 오빠는 그럴 수 있는 여지를 충분히 가진 사람이었을 뿐. 너는 그 사람을 소유할 수 없고. 그 사람은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어야 할 의무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의 덕질은. 이 모든 것을 마음에 새길 때 비로소 더 자유로울 것이다. 물론 어렵겠지만.
삶에 지쳐 오아시스를 찾을 수는 있을지언정. 신기루에 마음을 빼앗기지는 말자.
우리, 남보다 나를 앞세운 삶을 살자.
마치면서
정말 뒤틀려있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분명 어이없는 마음이 들게 하면서도 마지막의 성찰을 보여 주는 부분에서 세연의 얼굴 표정은 아 자신이 이렇게 비쳤을 수도 있겠구나를 알게 한다. 어머니의 부분도 좋았다. 적어도 어머니는 팬심에 삶의 지혜가 더해져 조금 더 건강한 방법으로 강제 탈덕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이제 웃으면서 지나 보낸 것 같은 모습을 보이셨으니까.
정말 영화 보는 내내 친구의 모습이 겹쳤다. 실제로 리뷰 속 사건들과 친구의 태도 때문에 절교를 마음먹은 적도 있었지만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챈 친구가 이제는 만날 때 더 이상 내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 기간제 연장을 한 것 이긴 하지만. 내가 누굴 이해하려는 스스로의 마음에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에 대한 좀 더 나이 들어버린 자가 할 수 있는 꼰대 마인드를 온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학생=공부라서 나는 전교에서 놀았고 혹은 사범대를 갔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부분도 우스웠다. 어차피 학벌이 그 사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님은 스스로들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애초에 화이트 칼라에 해당하는 집단들이 도덕적이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그게 말이 되는 일이었다면 탈의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는 의대생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테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올 만큼 노력한 사람이니 사람 하나쯤 화장실에서 죽인다고 매장당하는 게 아깝다는 말에 이토록 분노감을 느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리뷰를 쓰는 방식도 매우 고민했다. 애초에 덕질에 대한 과도한 친구로 인해 그다지 좋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보통 덕질을 바라보는 사람이 훈계하는 글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똑같은 사람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보다 낫다는 시선을 가진. 내 모습의 일부이기도 하기에 영화의 내용과 녹여서.
흑역사에 대해 가감 없이 털어놓고 성찰하려는 태도를 가진 감독의 배짱도. 영화도 모두 좋았다.
[이 글의 TMI]
1. 은근히 터지는 부분이 있음.
2. 9월에 본 영화 중 최고라 자부할 수 있음.
3. 마지막 남은 사랑니가 대공사(+위험함)를 해야만 뽑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됨.
4. 치과에서 이 덩치에 울 뻔함.
5. 정말 지옥의 카운트다운만 남은 셈.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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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_#1] 이미지의 영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with. 김승원 감독)
🎙️ Episode 1. 영화 감독 김승원 편 ‘우리의 감독을 찾아서’는 단편 영화 감독을 만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입니다. 영화를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었는지, 영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술이란 무엇인지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 김승원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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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옴표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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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한산 : 용의 출현> 티저 예고편
나라의 운명을 바꾼 압.도.적 승리!! [한산: 용의 출현] 티저 예고편 大공개! 웅장이 가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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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그림자꽃> 메인 예고편
일종의 사고였다. 2011년, 평양시민 김련희 씨는 지병인 간 치료 차 중국의 친척집을 방문했지만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병원비로 식당 일을 하던 중 남한에 가서 돈을 벌라는 브로커 말에 속아 북한 여권을 빼앗겼다.
탈북하지 않겠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남한에 들어오자마자 북송을 요청했지만 국가보안법은 억지로 남한시민으로 만들었다.
국가정보원은 김련희 씨를 간첩으로 기소했고 법무부는 보호관찰 대상자로 가둬 출국금지로 묶어놨다.
베트남대사관에 망명 신청도 해보고, 북한선수단에 사정도 해봤다. 새 정권으로 희망을 가져봤다.
번번히 실패해도 매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행복을 꿈꾼다. “그런 날이 오겠죠, 우리 함께 대동강변에서 꽃이 되는 그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