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케2023-04-01 23:44:03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부산중앙고 농구부 이야기
영화 리바운드 시사회 후기(스포 X)

아무래도 옆나라농놀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은 듭니다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에 스포츠(농구)의 결합은 굉장했습니다.
예고편을 봤을 때만해도 사투리 연기가 조금 아쉬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생각보다 사투리 연기 어색한 부분 없었고 몰입하는데 방해되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 영화는 안재홍 배우가 5할 이상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언뜻 <족구왕> 때가 생각나기도 했죠.
처음에는 어리바리한 공익근무요원에 불과했던 '강양현'이 어느새 꼴찌팀을 XX까지 올리는 농구코치로 성장하는 모습을 함께 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또 안재홍 배우의 현실적인 연기가 장면들을 더 잘 만들어줬다고도 생각하구요^^ 조연 배우분들의 연기와 티키타카들도 너무 좋았습니다.
실제 농구부에 관한 이야기이니 만큼 농구 경기 장면 연출에 신경을 썼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실제 농구 경기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만큼 경기씬들이 나올 때마다 과몰입해서 볼 정도였으니까요.
캐스팅에도 신장과 체격과 같은 것을 다 고려했다고 하는데ㅠ마지막에 실제 사진과 영화 장면을 비교해 봤을 때 진짜 비슷하게 보이더라고요.
싱크로율 어마어마했어요, 특히 안재홍 배우가.. ㅋㅋㅋㅋㅋ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부산 중앙고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리바운드,
4월 5일 개봉예정이니 여유가 되면 한번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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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래곤 길들이기 | 모범생이지만 아류일 뿐인 리메이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수백 년간 이어진 바이킹과 드래곤의 전쟁. 드래곤과의 전투가 곧 삶의 모든 목적인 버크 섬에서 강력한 무력도 없고, 드래곤을 죽일 용기도 없는 '히컵'(메이슨 템즈)은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래서 히컵은 족장이자 혼자서 드래곤을 대적할 수 있는 전사이고, 히컵의 아버지인 '스토이크'(제라드 버틀러)와 갈등을 빚는다. 드래곤에게 아내까지 잃은 스토이크가 보기에 히컵은 바이킹으로서도, 아들로서도 낙제점이기 때문.
어느 날, 히컵은 부상당해 숲에 고립된 전설 속의 드래곤, 나이트 퓨어리를 만난다. 히컵은 그를 죽여 아버지에게 인정받으려 하지만, 끝내 드래곤을 죽이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나이트 퓨어리에게 ‘투슬리스’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바이킹의 규칙을 어긴 뒤 그와 친구가 된다. 이를 계기로 인간과 드래곤이 공존할 방법을 고민하는 히컵. 그러나 스토이크가 드래곤과의 전쟁을 시작하면서 인간과 드래곤의 우정은 시험대에 오른다.
리메이크 영화의 숙명
리메이크 영화에게는 한 가지 숙명이 있다. 원작을 다시 만들어야만 하는 이유를 작품 내에서 증명해야 한다는 것. 리메이크의 대상이 되는 영화들은 보통 평단의 호평이나 관객들의 사랑을 받은 작품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미 잘 만들어진 작품에 손을 대야 하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는 리메이크 영화는 근본적인 존재의의를 찾기 어렵다. 단순히 원작을 재현할 거라면 원작을 다시 보는 게 적절한 선택일 테니까.
디즈니가 리메이크한 <라이온 킹> 실사영화가 대표적인 예시다. 실사판 <라이온 킹>은 어색한 CG만큼이나 리메이크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혹평을 피하지 못했다. 내용을 구체화한 것 외에는 원작 애니메이션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다시 만들어야 할 이유를 납득시키지 못한 결과 <라이온 킹> 실사판은 전 세계 15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하고도 원작 애니메이션의 아성을 끝내 넘어서지 못했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영화 중 처음으로 실사화된 <드래곤 길들이기>도 비슷한 함정에 빠졌다. 원작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감독이었던 딘 드블루아가 연출을 맡은 덕분에 <드래곤 길들이기>는 원작의 설정, 볼거리, 메시지를 모범적으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시점에 리메이크가 필요한 이유를 끝내 못 보여준 나머지 <드래곤 길들이기>도 결국 원작 애니메이션의 아류에 그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영리한 '정치적 올바름' 활용범
지난 몇 년간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실사화 프로젝트가 불만족스러웠던 관객이라면 <드래곤 길들이기>는 사실 꿈같은 선물과도 같다. '실사화'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원작의 설정과 볼거리, 메시지를 모범적으로 재현해 냈기 때문. 특히 근래 할리우드에서 끊이지 않는 정적 올바름과 관한 논란을 영리하게 피해 가고, 더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을 적재적소에 활용한 각색이 인상적이다.
겉보기에는 <드래곤 길들이기>에도 논란거리가 될 만한 장면이 존재한다. 바이킹이 주인공인 작품에 흑인, 동양인 바이킹이 등장하고, 흑인 혼혈 배우인 니코 파커가 전형적인 금발 백인 여자 주인공 '아스트리드'를 연기하기 때문.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큰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실사 영화에서 변경한 버크 섬과 바이킹 설정 덕분에 세계관은 더 확장되고 비장한 분위기가 강조된다.
애니메이션과 달리 실사영화에서 버크 섬은 인류의 최전방 기지처럼 묘사된다. 인류는 전 세계에 있는 드래곤들과 싸워왔고, 그 과정에서 사막도 비단길도 건너온 여러 민족의 전사가 드래곤들의 둥지에 인접한 버크 섬에 보여서 자신들을 바이킹으로 칭했다는 것. 그 덕분에 흑인이나 동양인 바이킹의 존재는 원작 왜곡이나 훼손과는 다른 맥락으로 수용될 수 있다.
초반부 회의 장면만 봐도 그 맥락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작에서 이 장면은 스토이크가 계속되는 드래곤들의 공격에 지친 바이킹들을 격려하는 장면에 가깝다. 반면에 실사 영화에서 스토이크는 회의를 통해 바이킹의 역사를 언급하며 드래곤과 싸워야 하는 당위, 드래곤들의 둥지로 원정을 떠나야 하는 이유를 역설한다. 여러 인종이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은 개연성과 실사화에 어울리는 비장미, 두 마리 토끼를 영리하게 잡는 셈이다.
특별관이 아깝지 않은 액션
영리하게 구축된 세계관 위에서 <드래곤 길들이기>는 기대와 예상을 뛰어넘는 볼거리를 선보인다. 특히 <드래곤 길들이기>를 상징하는 투슬리스와 히컵의 첫 활공 장면은 압도적이다. 마치 <맨 오브 스틸> 속 슈퍼맨의 비행 장면처럼 흔들리는 카메라는 투슬리스의 속도감을 강조하고, 제삼자의 시점과 히컵의 시점을 오가는 카메라워크는 생동감과 현장감을 극대화한다.
여기에 원작에도 참여했던 존 파월의 더 웅장해지고 풍성해진 음악이 더해지면 3분가량 이어지는 활공 시퀀스는 무아지경에 가까운 경험을 선사한다. <탑건: 매버릭>과 유사한 형태로 특별관의 존재 의의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초점이 자주 흔들리다 보니 눈이 쉽게 피곤해진다는 단점도 있지만, 전체적인 쾌감이 그 단점을 상쇄해 주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여러 장면이 원작을 초월한다. 클라이맥스인 레드 데스와의 전투는 레드 데스가 더 거대해지고 위압적으로 묘사된 덕분에 긴박함이 극대화됐다. 또 온 인류와 드래곤의 맞대결이라는 비장미가 더해지면서 슬픔과 감동도 더 절절해진다. 반대로 원작에 못 미치는 장면들도 있다. 일례로 오프닝 시퀀스는 실사화의 한계가 느껴진다. 어두운 화면으로 인해 드래곤들이 버크 섬을 습격하는 액션을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술적인 아쉬움이 두드러지는 순간도 있다. 투슬리스가 히컵과 아스트리드를 태우고 오로라를 보여주는 시퀀스가 대표적이다. 이 장면은 본래 아름다운 밤하늘을 함께 날면서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을 보여줘 한다. 그런데 어색한 CG로 인해 배경과 두 주인공이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이 진하다 보니 이 흐름이 순간적으로 끊기고 만다.
실사라서 가능한 감정선
설정과 세계관, 볼거리 못지않게 메시지도 인상적이다. <드래곤 길들이기>의 핵심 키워드는 '소통'이었다. 좀처럼 대화가 안 통하는 부자 관계와 종족을 뛰어넘은 인간과 드래곤의 우정을 대조하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공통점과 관심사를 찾고, 상호 존중하면 오랫동안 쌓아온 종족의 벽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진정으로 소통하는 관계를 이루기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곧 <드래곤 길들이기>였다.
원작의 메시지는 실사영화의 특성 덕분에 더욱 돋보인다. 실사답게 크기도 커지고, 위압감이 더해진 투슬리스의 모습은 드래곤과 서서히 우정을 쌓아나가는 히컵의 서사에 몰입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준다. 이미 관객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투슬리스와 히컵의 관계성을 무리하게 각색하는 대신, 투슬리스와 히컵의 거리감을 부각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한 셈이다.
또 실사영화이기에 히컵과 스토이크의 관계도 더 실감 난다. 그 중심에는 원작에서 스토이크의 목소리를 연기했고, 이번에도 같은 배역을 맡은 제라드 버틀러가 있다. 그의 연기력 덕분에 막상 대화하려고 마주 보면 서로 할 말이 없는 부자의 미묘한 공기가 생생하게 전달되기 때문. 그 결과 마음을 열고 진정으로 소통하는 법을 모르는, 익숙해서 더 안타까운 두 남자에게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다.
짧게나마 다른 부모 자식 관계도 비추는 컷도 히컵과 스토이크의 관계성에 깊이를 더한다. 원작과 달리 실사영화는 아스트리드나 '스낫아웃'(게이브리얼 하월)의 아버지도 등장시킨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자녀의 노력, 실패했을 때 그들이 겪는 좌절감과 상실감을 증폭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히컵, 투슬리스, 스토이크의 관계가 더 입체화된 결과 아버지가 아들을 인정하고, 인간과 드래곤이 친구가 되는 변화 또한 더 드라마틱하다.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사회로
히컵과 스토이크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모와 자녀 관계를 묘사한 대목은 영화 외적인 맥락과 맞물리면서 의도치 않게 더 의미심장해진다. 여러 가족의 공통점이 부각됨에 따라 히컵과 스토이크의 갈등이 가족 내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와 사회적 차원의 이야기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즉, 히컵과 스토이크의 대립은 새 언어와 상식으로 무장한 젊은 세대가 기존 상식과 관성을 고집하는 기성세대에 맞서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드래곤을 대하는 태도는 이 갈등 구도를 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히컵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은 드래곤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새로운 언어로써 세상에 접근하고, 세계를 이해한다. 드래곤과 우정을 쌓은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평생을 드래곤과 싸운 어른들보다도 그들의 약점을 더 많이 발견한다. 더 나아가 드래곤들의 둥지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인간의 힘만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레드 데스와의 전투도 승리로 이끈다.
스토이크와 부모 세대는 다르다. 그들에게 드래곤은 이유 불문하고 제거해야 하는 적일 뿐이다. 뿌리 깊은 적대감과 관습과 한 몸이 된 그들에게 인간 대 드래곤의 이분법 외에 다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토이크만 하더라도 온 공동체를 파괴할 뻔한 패착과 위기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히컵의 세상, 드래곤과의 공존이라는 변화를 수용한다.
세상을 새롭게 직시하는 이들과 기존 세계를 유지하려는 이들의 대립. 안타깝게도 이 갈등은 한국 사회의 거부할 수 없는 미래이자, 이미 일부분 현실화 현재라고 할 수 있다. 세대에 따라 첨예하게 갈린 정치적 의사가 그 방증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드래곤 길들이기>를 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상념에 빠질 수 있다. 한국의 히컵과 스토이크들이 만들 버크 섬에서 드래곤이 적일지 친구일지는 아직 물음표로 가득하니까.
아류를 벗어나지 못한 모범생
하지만 <드래곤 길들이기>는 한편으로 공허하다. 실사화 작품으로서는 더 바랄 게 없을 완성도를 보여줬지만, 관점을 바꿔서 보면 명확한 한계점 또한 노출했기 때문이다. 디즈니의 실사화 프로젝트와는 달리, 상업성을 제외하면 이 실사영화가 필요한 이유를 작품 내에서 제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 한계다.
그간 디즈니의 실사화 작품들은 현대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재해석이라는 의도를 꾸준히 제시해 왔다. <알라딘>은 '자스민'(나오미 스콧)'의 주체성을 강조했고, <백설공주>도 그저 주인공의 피부색만 바꾸는 게 아니라 그녀를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존재로 탈바꿈시키려 했다. 물론 그 의도에 관객이 호응할 때도, 안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리메이크 영화의 필요성을 작품 내에서 설명할 수는 있었다.
그에 반해 <드래곤 길들이기>는 수익 창출이라는 기초적인 목적 외에 특별한 이유나 의도를 제시하지 못했다. 원작 애니메이션 개봉 후 불과 15년 만에, 3편 개봉 시점 기준으로는 6년 만에 제작된 리메이크이다 보니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명분도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드래곤 길들이기> 리메이크는 아무리 원작의 볼거리, 내용, 메시지를 충실히 재현한 모범생이라 하더라도 결코 아류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도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첫 실사화 작품이라는 점에서 <드래곤 길들이기>는 충분히 합격점을 받고도 남을 수작이 아닐까 싶다. 차별점이 부족하다는 단점 또한 첫 시도인 만큼 가급적 안정적으로 원작을 다시 보여주는 데 집중한 대가라고 이해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 드림웍스가 속편이나 다른 애니메이션도 실사화한다면, 그 초석인 <드래곤 길들이기>를 시급히 재평가하고, 추가로 고평가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모범생이 아니라 우등생이었다면 더 좋았을 리메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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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래디 코베의 정육면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쟁과 홀로코스트로 인해 국경을 넘지 못했던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은 먼저 미국 땅에 당도해 있던 라즐로(애드리언 브로디)가 한창 작업 중인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의 도면을 보며 말한다. “당신을 보고 있어.” 라즐로와 오랜 기간 마음을 주고받았을 에르제벳은 헝가리에서 타국으로 건너와 생활하고 있던 남편 라즐로의 속내를 건축 도면에서 읽는다. 건축가이자 남편인 라즐로 토스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그 안에 담겨 있다는 걸 에르제벳은 알고 있다. 에르제벳은 라즐로를 이해하는 만큼 마음과 목소리를 아끼지 않는 동반자다. 에르제벳이 라즐로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터전을 잃은 유대인 건축가가 사라지지 않을 건축물이자 자기 자신을 건설하려는 이야기다.
<브루탈리스트>에서 중요한 것은 이민자의 역사나 자본의 폭력성보다 한 예술가의 집착에 가까운 신념이다. 라즐로는 직접 정육면체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라즐로는 건축, 즉 자신의 예술품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예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는 건축가에게 3,4미터의 높이나 대리석의 종류와 색은 절대로 사소한 부분이 아니다. 자신의 급여를 내놓아서라도 지켜내야만 한다.
라즐로가 건축을 택한 이유는 그 ‘영속성’에 있다. 시간과 침식 속에서도 견고한 본질을 잃지 않는 것. 파시즘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춰 해석되더라도 침식되지 않을 건축이야말로 라즐로의 삶이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러 조피아는 ‘마가렛 리 밴 뷰런 인스티튜트’와 수용소의 유사성을 근거로 홀로코스트의 잔학성과 숭고한 유대주의를 기린다. ‘과정보다 목적지가 중요하다’는 라즐로의 말은 어느새 유대인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정당화하는 언어로 변모한다. 라즐로의 건축물은 영원히 남겠지만 그에 덧붙여지는 메시지는 언제고 달라질 수 있음을 내포한다.
인터미션을 제외하고 4개의 부분으로 나뉘어진 <브루탈리스트>에서 에필로그는 불필요해 보인다. 1980년 제1회 건축 비엔날레에는 ‘라즐로 토스: 현재 속의 과거’라는 이름의 회고전이 진행되고 있고 휠체어에 탄 라즐로를 뒤로 한 채 조피아가 연설을 맡는다. 이 연설은 자못 유대주의를 옹호하는 것으로 읽힌다. 영화의 서막에 등장했던 조피아의 심문 시퀀스가 다시 펼쳐짐으로써 유대인 박해의 부당함과 유대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듯하다. 그러나 에필로그 속에서 라즐로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조피아의 딸이 젊은 조피아를 연기한 라피 캐시디라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서막에서 조피아는 자신의 정체성과 신분을 심문받는다. 에필로그의 라피 캐시디는 또 한 번 유대주의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앞의 시험대에 서서 정체성을 증명해야만 하는 시험을 받고 있다. 무력하게 앉아 침묵하는 라즐로의 목적지는 예루살렘이 아니다. 그의 건축물에 유대인을 기리는 특별한 의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라즐로와 조피아가 향하는 목적지가 다름에도 침식되지 않고 영원히 남는 건축물을 꿈꾸는 예술가를 보며 현대를 살아가는 몇몇 관객의 앞에는 처참히 부서진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브래디 코베 감독은 라즐로가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 이민자가 결국 어떻게 정착을 이뤄냈는지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에 유린당하는 예술가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이탈리아의 카라라 대리석의 아름다움을 탐미하던 해리슨(가이 피어스)은 술과 약에 취해 비틀거리는 라즐로를 강간한다. 에르제벳은 밴 뷰런 가족의 식사시간에 해리슨의 행동을 폭로한다. 해리슨은 식사 자리에서 사라져 행방이 묘연해진다. 가족과 일꾼들은 해리슨을 찾기 위해 ‘마가렛 밴 뷰런 인스티튜트’를 훑는다. 그리고 마침내 이탈리아의 아름답고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제단 위로 십자가의 달빛이 뒤집혀 떨어진다. 거대 자본에 유린당하는 숭고한 예술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이 신은 감독이 영화를 통해 그려내고자 한 목적지에 가까운 장면이다. 브래디 코베 감독이 선보인 <브루탈리스트>라는 정육면체는 많은 이야를 품고 있지만 빛은 단연코 그 장면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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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차 -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내 모든 걸 버리고
*2017년도 영화 칼럼으로 발행한 글을 각색한 것임을 밝힙니다*
이 원고를 쓰기 전, 생각의 끈을 잡고 놓지 않으려고 애써 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금세 주의가 분산된다. 나이가 들수록 한가지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워지는 건, 그럴 여유가 사라짐과 동시에, 삶에 대한 책임이 막중해져서 그런 것인 듯 싶다. 누군가 나에게 싱가포르에 와서 직장 생활 하는 자신이 비자와 연계된 이유로 마치 ‘생계형 직장인’ 같다는 말을 했었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삶이 안정될 수록 더 갈망하게 되는 것이 늘어난다. 영주권 발급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최초 5년짜리 영주권이 내 삶에 시사 하는 바도 이리 큰데 하면서, 나는 2012년도 영화 화차(火車)를 생각해 냈다. 최근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고도 불륜이라는 스캔들 때문에 대중 앞에 나서지 못하는, 영화 ‘아가씨’의 수려하고 여리여리하고 아름다운 이 배우가 임팩트 있는 배우로서 탈바꿈된 영화는 화차가 아니었을까.
영화 속에서 첫 남편과 식당을 하며 행복하게 사는 선영의 전 모습.
그녀에게는 아버지를 죽게 해 달라는 그래서 빚을 청산해 달라는 간절한 소망과 신앙이 있었다.
화차라는 게 우리나라에서는 ‘수레 위에 총을 수십 개 장치하여 이동이 손쉽고, 한 번에 여러 개의 총을 쏠 수 있게 한 조선시대 무기’라고 검색이 되지만, 일본에서는 ‘영화의 제목인 '화차'는 불 화(火), 수레 차(車)로, '지옥으로 가는 불수레'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이 화차는 헤이안 시대 일본 전설 속의 수레라고 하며, 악행을 저지른 망자를 태워 지옥을 향해 달리는 불 수레이며 화차에 한번 올라탄 사람은 두 번 다시 내릴 수 없다고 한다. 이 무시무시한 제목 속 여주인 경선(김민희 분)은 왜 자신이 화차에 올라타 운명을 재촉해야 했는지 안타깝도록 절실하게 보여준다. 솔직히 말하면 5년 전에 본 영화라서 모든 스토리가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경선이 자신의 빚과 과거를 모두 끊어내기 위해 선영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친구가 되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 새 삶을 살아내고자 한다. 수의사였던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서, 펜션에서 술을 마시고 친구의 목을 졸라 살해하며 울부짖는 경선. 이 영화에서 김민희의 가장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슬프고, 그로테스크하고, 단죄해야 하지만 이해는 가는 그런 역할을 잘 소화했다.
그녀는 운다. 친구를 살해하고 새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기쁨에 또 웃는다.
영화의 도입부는 경선(선영의 삶을 빼앗은) 이 약혼자인 문호 (이선균 분)과 결혼 한 달을 앞두고 시부모님께 인사 가는 길에서 시작된다. 빗속에서 휴게소에 들렀으나 그녀는 돌연 사라져 버리고, 문호는 연유를 알 수 없이 그녀의 뒤를 쫓는다. 사촌 형인 형사에게 부탁해 찾아낸 그녀의 과거는 놀랍다. 원래 경선은 결혼한 적이 있었고, 남편은 건실하게 식당을 운영했고 그녀도 행복해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빚 때문에 사채업자가 들이닥쳐 생활이 망가져 버린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를 죽게 해 달라고, 빚을 탕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작은 빚에서 시작된 사채가 커진 것을 막지 못해, 그리고 또 이어진 빚을 막지 못해 괴로워하던 그녀는, 가족이 없는 선영이라는 수의사와 만난다. 그리고는 위의 전개이다. 피칠갑을 하고 속옷 차림으로 진짜 선영을 살해하고 선영으로 거듭난 경선. 그녀는 죄책감에 울부짖는 것인지 안도감에 미소 짓는 것인지 모를 새벽을 보내고, 시체를 유기한 다음 선영의 동물병원에서 일하다가 문호를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름답다. 문호와 선영. 선영의 과거에 대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문호는 선영(경선)을 사랑했고,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너로 살라며 도망치라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된 기차역에서 선영은 읊조린다.
“나?? 나 강선영 아니야..... 나 사람 아니야.. 쓰레기야... 내 곁엔 아무도 없었어...”
그리고 타인의 모든 것을 빼앗은 범죄를 저지른 것에 대해 자신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일본에서의 원작이 1992년에 써진 것을 감안하면 타인의 ‘명의 도용’이라는 범죄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가 쓴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면 일본 내의 사회적 이슈를 모티브로 인간의 삶을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뜨릴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이 영화를 한국의 영화관에서 혼자 봤던 (왜 '혼자였다는' 사실은 잊히지 않는지) 2012년 3월은 내 인생에서도 정말 추운 겨울이었다. 동트지 않은 새벽이 가장 춥다고 직장을 잠시 쉬던 그때 나는 참 많은 방황을 했더랬다. 건강 차 휴직한다고는 했으나 미래에 대한 걱정에 휴식이 온전히 휴식이 될 수 없었다. 영화 속 경선에 나를 이입한 건 아니었지만,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생기는 이러한 사회의 범죄가, 한국에서도 점점 늘어날 것 같다는 생각은 해 봤었다.
미야베 미유키 책 중에 재밌게 읽었던 낙원, 그리고 모방범. 사진은 네이버에서 찾았다.
그때 썸 타던 남자친구 집에 있던 책들을 빌려와 재밌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것도 정말 밤새서 읽었다.
그 이후의 한국 사회는 (지금은 내가 오히려 가끔 가는 곳이 되어 버렸기에 변화를 더 빨리 감지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보다 더 급격히 일본화되어가고 있다. 1인 가구의 확산화, 전통적 가족 형태의 붕괴, 사회활동 이외 취미활동의 다변화, 반려동물과 식물 추구, 졸혼, 선택적 결혼, 묻지 마 범죄, 그리고 사회적 범죄, 성매매, 인신매매, 돈을 위해서 라면 희생되는 인권. 한국의 사회적 안전망이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악함과 잔학성을 막을 정도로 촘촘한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점차 더 촘촘하게 변해가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학창 시절 일본의 문화를 동경해서 일본어를 배웠던 나는, 그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것들을 알 즈음 한국인의 정이나 따뜻함, 융통성 등을 더 높이 사게 되었다. 한국은 아직 꿈틀대는 날 것의 생동감이 있다. 위에서 아래가 아닌 아래에서 위로 생명의 샘이 솟아오른다. 민초의 힘은 여론을 형성하며 특권층을 제재하는 힘이 되어 왔다. 세계를 살펴봐도 이런 나라는 흔치 않다. 코로나 시대에도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회의 모럴(morale)적 제재가 되기를 바라본다. 작금의 나는 한국의 문화나 식품은 환영받지만,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사람들에게 배척 받는 외국인으로서 위태롭게 살아가고 있다. 이 원고를 썼던 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떤 것이 달라졌을까.
온전히 나 자신으로 서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고, 가족이라는 굴레 안에서 경제적으로 착취당했던 것도 어느 정도는 벗어났다. 돈이라는 건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다고 하는 건 가진 자들의 이야기일도 몰라. 잘 살다가도 한 순간 삐끗하면 절벽 낭떠러지로 내몰릴 만큼, 세상은 무서운 곳이다. 경선처럼 자신의 모든 걸 지우고서라도 빚에서 벗어나고 싶은 젊은이들이 많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 볼뿐. 힘들어도 범죄는 저지르지 않기를 바라 볼뿐. 이런 선한 마음들이 모여 선한 영향력을 내기를 바라볼 뿐,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씁쓸한 밤이다.
하지만 일본 문학 공부하던 그 시절 내가 읽은 소설의 탑은 바로 이것, '살인의 문' 원판. 너무 재밌어서 단숨에 읽은 문고본. 한 번쯤 살면서 생각해 볼 화와 살인의 욕망에 대해 다뤘다. 너무 그럴싸해서 나의 욕망도 함께 얹어가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읽고 싶다.
* 본 콘텐츠는 블로거 아일린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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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절반의 몫은 엉망진창 내 인생의 명장면을 향해
※영화 〈반쪽의 이야기〉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작은 마을 스쿼하미시에 사는 유일한 아시아인 여성 엘리는 다섯 살부터 살아온 이곳에서도 딱히 마음이 가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그나마 자신의 문학성을 알아주는 선생님만이 친구 비슷한 존재다. 선생님은 엘리가 같은 반 아이들의 에세이를 대신 써 주고 돈을 받는다는 걸 알지만 오히려 능력을 썩히지 말고 촌구석을 떠나 대학에 가라고 조언해준다. 하지만 엘리는 그럴만한 처지가 안 된다. 하나뿐인 가족인 아버지는 전문 지식을 갖췄음에도 영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허름한 시골의 기차역장 자리만 주어질 뿐이다. 무기력한 아버지의 보필에 곤궁한 집안 형편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대학 입학은 먼 나라 이야기다. 그러던 중 풋볼 선수 폴이 찾아와 짝사랑하는 상대 애스터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써 달라고 제안한다. 말주변은 없고 글솜씨는 더더욱 없는 폴 대신 엘리는 애스터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생각보다 애스터와 취향과 성격이 잘 맞는 엘리는 사실 예전부터 애스터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하지만 애써 감정을 숨긴 채 폴과 이어지도록 노력해본다. 대면이 필수인 데이트의 우여곡절 끝에 둘 사이에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엘리의 임무는 그렇게 끝나는가 싶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감정의 화살은 자유자재로 날아간다. 엘리와 폴이 애스터의 공감을 얻기 위한 사전 조사는 첩보 작전을 방불케 했고, 공통의 목표 달성을 위해 붙어다니며 서로의 내면과 고민을 털어놓던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쩐지 미묘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출처: NETFILX
엘리의 단호한 내레이션은 일찌감치 이 영화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하지만 대필 편지 작가라는 오래된 레퍼런스를 변주한 이 로맨틱 코미디를 연애담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단 고등학생이 짝사랑하는 대상에게 러브레터를 쓴다는, 지금은 생경하지만 어딘가 마음이 간질거리는 상황을 사랑 없이 논하기는 어려울 터. 하지만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 이상으로 영화가 빛나는 지점이라면, 낡은 서사가 가진 익숙함에 ‘나’와 ‘타인’을 이해하는 과정을 추가하며 얹은 캐릭터와 이야기의 힘일 것이다. 2020년 넷플릭스에서 공개되었던 이 매력적인 틴에이지 성장 영화 〈반쪽의 이야기〉는 아직 낯선 세상으로 뛰어들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 사랑하며 때로는 고민하고, 실패를 경험하고, 창피를 무릅쓰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진부하지만 언제나 새로우며, 포기하지 않는 그럴듯한 답을 찾아가는 작품이다.
텍스트와 음성이 전하는 진심의 공명
엘리에게 사람이란 인파가 뜸한 기차역을 지나치는 기차와 같다. 늘 같은 시간에 지나가지만, 늘 칸칸이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지고 지나가는 신기한 그것. 하지만 엘리는 누군가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란 낡은 부스 안에서 앉아 가끔 시간이 되면 의무적인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영화 속 기차역의 이별 장면에서 엘리는 그 작위적이고도 멍청해 보이는 사람의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람에게 상처 받고 싶지 않았던 엘리의 묘책은 다가오는 타인을 그냥 지나가게 두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는 최대한 자신 앞에 기차가 서지 않기를 바라며, 그의 잠을 깨우는 약한 진동조차 원하지 않는다. 영화의 첫 시퀀스는 엘리의 비평 능력이 폭발하는 머릿속을 애니메이션으로 묘사한 뒤 이 모든 것이 비좁은 부스 안에서 이뤄지는 대비를 보여준다. 엘리의 현실을 응축한 신이 지나고, 마음껏 재능을 선보이지 못한 채 용돈 벌이용으로 전락한 일상에 또 다시 기차가 찾아온다. 자신을 일으키는 미세한 떨림은 앞으로 다가올 삶의 변화를 암시한다. 어떤 이유든 엘리는 우연히, 혹은 때맞춰 다가오는 폴과 애스터를 지나치지 않기로 한다. 그 찰나의 선택이 가져온 파동은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던 진공의 삶에 정차한 절호의 기회다.
엘리는 시대의 고전 플라톤의 〈향연〉 속 사랑론을 구시대적 잔재라고 당당하게 외치지만, 사랑을 고백하는 구절은 떠올리기조차 고역이다. 엘리의 문학적 영감은 반작용에서 온다. 감정적 작용을 애써 침잠시킨 세월만큼 축적된 삶의 에너지는 자신의 말 대신 인용구와 영화 대사로 표출한다. 이는 엘리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영화의 명대사 몇 마디를 읊조리는 것으로 잠시나마 감정을 표현할 뿐이다. 아마 살아 있을 때는 집 안의 생기를 책임졌을 엘리의 어머니를 잃은 뒤에 터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둘만 남은 부녀는 감정의 촉매이자 원천이 사라진 집에서 영화와 책으로 표현을 대신한다. 사실 엘리 가족 말고도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말을 온전히 전하지 못한다. 진정한 사랑과 사람을 거부한 채 안으로 겉도는 엘리, 내면의 본모습을 감춘 채 남들이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는 애스터, 누구보다 깊은 진심을 가졌으나 전달만 하려면 버벅대는 폴까지. 영화는 나를 드러내기 어려운 사람들, 어쩌면 우리 모두의 고질병인 진심을 표현하는 법을 말하고, 쓴다.
〈반쪽의 이야기〉는 주요 소재인 대필 편지라는 상황으로 엘리와 폴, 애스터의 텍스트가 음성이 되고, 음성이 현실이 되는 공명의 과정을 찬찬히 더듬어간다. 대필 편지와 문자 메시지가 주를 이루는 영화는 텍스트와 음성의 불일치가 가져오는 오해와 단절, 수신 불량의 이야기다. 폴이 엘리에게 자기 대신 편지를 부탁하면서부터 말과 글의 주체는 달라지고, 표현에 서투른 이들은 소통을 위해 알아들을 수 없는 진심을 전달하고자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 이는 영화 곳곳에서 뒤섞이고 변주한다. 대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이들은 고해소부터 편지, 휴대전화까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모조리 동원하며 비대면 소통을 진행하고, 감독은 표현이 어색한 인물을 스크린 양 끝으로 보낸 채 대화를 이어간다. 폴과 애스터의 첫 데이트에서도 앞에 앉은 폴 대신 애스터의 눈은 엘리의 문자 메시지를 향한다. 폴의 모습에서 엘리의 이야기를 만나는 인식의 불일치는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시대와 문화의 제동으로 전면에 나설 수 없을뿐더러 그마저도 서툰 엘리의 진중함 앞에 관객은 사려 깊게 그의 진심을 눈여겨보게 된다. 나설 수 없기에 인용이 더 편했던 엘리는 짝사랑 상대였던 애스터로 결핍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점차 말문이 트이며 애스터에게 거의 진심에 근접한 말들을 털어놓기에 이른다. 플라톤부터 오스카 와일드, 빔 벤더스에 사르트르까지 인용하던 영화는 대망의 성당 삼자대면 장면에서 마침내 엘리 추의 목소리로 애스터에게 감정을 전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의 입으로 엘리의 말을 전한다. 드디어 영화는 엘리의 말을 인용하고, 그렇게 엘리의 공명은 또 하나의 걸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반쪽을 찾으려 하지 않는 이야기
엘리스 우는 전작 〈세이빙 페이스〉와 이번 〈반쪽의 이야기〉 두 편의 영화에 공히 고루한 세계에 외떨어진 인물을 등장시킨다. 주인공을 둘러싼 세계에는 개인과 충돌하는 소규모 커뮤니티의 오랜 신념이 지배한다. 미국 속 아시아 문화를 간직한 이민자 집단과 백인 기독교 중심의 보수적인 시골 마을은, 어떤 이에게 따뜻한 온기를 간직한 공허한 독방과도 같다. 존재가 부정되고 일체성을 압박받는 공간은 엘리스 우가 떠올린 현실의 지옥이다.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줄 것만 같던 집단의 공고한 관습에 홀로 반기를 드러내는 것만큼 스스로를 상처 주는 일도 없으니 말이다. 〈반쪽의 이야기〉는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비밀을 간직한 누군가에게 지옥으로 다가온다는 명제에 집중하며 수렁에서 빠져나올 비책을 알려준다.
〈닫힌 방〉의 관계성에 〈시라노〉의 서사를 입힌 엘리스 우는 〈반쪽의 이야기〉로 가족의 굴레에 생채기를 낼 용기와 깨달음을 말한다. 가족의 인정을 위안 삼지만 정작 마음 둘 공간이 아쉬운 인물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진심을 글에 담는다. 애스터와 폴(을 대신하는 엘리)가 주고받는 편지 속 〈닫힌 방〉의 세 사람은 뒤틀린 관계 속에서 탈출을 거부하고, 방문이 열려있어도 나가지 못한다. 영화는 사르트르의 희곡을 레퍼런스 삼아 “타인이 지옥인” 세상의 다음 단계를 일러준다. 엘리와 애스터의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는 마치 천상계에서 진리의 정수를 발견하는 고전소설의 주인공 같다. 오직 둘 뿐인 신비로운 호숫가에서 서로의 속마음을 교감하는 형상은 그 옛날 〈향연〉에 적힌 고대의 인간처럼 두 개의 얼굴, 네 개의 팔다리다. 그렇게 엘리스 우는 반쪽을 찾으려 필사의 노력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삶이란 저 멀리 사라진 서로의 반쪽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옆에 있지만 눈치채지 못했던 나의 나머지 절반을 깨닫는 과정이다. 다시 사르트르의 방으로 돌아가자. 타인이 내 절반이 아님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알던 지옥은 더는 작은 방이 아니게 되고, 관계에 목매지 않는 결연한 나의 눈으로 곧 열린 문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는 반쪽을 찾지 않고 깨달을 뿐이다.
지옥을 자각하는 확신의 과정
우리가 타인을 깨달았다면 다음 단계는 이곳이 지옥임을 깨닫는 것이다. 노신부는 잊지 말라는 듯 반복된 성경 구절을 내뱉고, 성당에서는 사탄이 의심을 타고 우리에게 찾아온다고 되뇐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긴 편지 한 통으로 의심이 자란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스쿼하미시의 성에서 엘리와 폴, 애스터는 모두 불경한 죄인이다. 세 사람은 각자의 두려움에 갇혀 가면을 쓰고 거짓을 말한다.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미술의 꿈을 접은 채 가족의 뜻에 순종하고, 열등감에 주눅 들어 잠재된 능력조차 발휘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진실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엘리와 폴은 대필 편지를 쓰고 애스터는 거짓된 사랑을 이어간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인간은 ‘두려워하고 거짓말하고 의심하는 자들’을 쫓아낼 성을 지었고, 신을 의심하는 자들은 바깥의 지옥으로 떨어진다(계 21:8). 하지만 엘리스 우는 단호하게 말한다. 거짓은 헛되지 않았으며 황홀한 파국은 반드시 찾아온다고.
거짓을 말하는 죄 많은 백성은 오히려 의심을 열쇠로 내가 선 이곳이 지옥이었음을 깨닫는다. ‘일이 벌어지는 곳’ 스쿼하미시 (영화 초반의 안내 푯말 “It’s happening in SQUAHAMISH”)는 사실 마을과 ‘어울리지 않는’ 일들은 아예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사라지는 곳이다. 스쿼하미시에서 마을 유일의 아시아인 가족이 받는 인종 차별과 성소수자의 정체성, 가족주의에 묻힌 개인의 꿈은 있지도 않았던 일로 치부한다. 따라서 주인공 세 명이 성당에서 서로의 진실을 털어놓는 장면은 더 묵인하지 않겠다는 고해성사이자 강박적인 안온함보다 위태로운 불안을 지지하겠다는 지옥으로부터의 선언이다. 내가 있는 공간이 곧 지옥임을 깨닫는 순간, 나를 감싸던 세계는 깨어진다. 이들 셋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각자의 말을 늘어놓는다. 이곳이 어디인지, 내 반쪽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아는 세 사람만이 상황을 이해할 뿐이다. 좋은 작품을 과감히 망가뜨려야 걸작을 만날 수 있듯, 나만의 소시지, 나만의 그림,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이들에게 지옥은 기꺼이 문을 활짝 열 준비를 끝마쳤다.
겉도는 와중에도 서로에 이끌리며 부딪쳤던 시절이 지나고, 엘리는 걸작을 그릴 대담한 선을 찾으러 스쿼하미시를 떠난다. 사랑의 반쪽이 만나고 헤어지는 그 뻔한 기차 장면처럼 절대 울지 않겠다 맹세했던 엘리는 달리는 기차 밖에서 뛰어오는 폴을 보며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하지만 엘리는 그 진부한 감정을 이제 이해할 수 있다. 엉망진창에 예측하는 대로 이뤄진 적이 없는 사랑의 기억은 가장 특별하면서도 보편적이고, 그렇기에 낡아 빠졌다는 것을. 엘리는 울음을 그치고 주변을 바라본다. 이 안의 사람들도 어쩌면 자신이 만든 인생 최고의 대사 한 구절쯤 품고 있을 것이라는 작은 깨달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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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둘 사이에> 영화 리뷰
<우리 둘 사이에> 영화 리뷰
비장애인으로 18년, 장애인으로 17년. 이제는 꿈에서도 휠체어를 타는 ‘은진’은 다정한 ‘호선’과 함께 평온한 신혼을 누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쿵쿵’ 예기치 않게 둘 사이에 찾아온 미지의 존재 ‘쪼꼬’. ‘은진’은 아이 ‘쪼꼬’를 낳겠다고 굳게 다짐하지만 출산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은 점점 더 커진다. 이를 지켜보는 ‘호선’과 친정엄마의 걱정도 더해지는데… 둘 사이에 열린 미지의 세계, 34주간의 여정이 ‘쿵쿵’ 시작된다!
- 네이버 영화 소개글 -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시사회에 초청받아 작성된 글입니다.
은진과 그의 남편 호선은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일지 모르나 그들 앞에서는 도전이 되는 일상을 함께 이겨내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느 날 그들이 마주한 도전은 평소와 다른 그리고 더 큰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었다. 바로 은진의 임신이다. 은진은 고민 끝에 임신을 지속하기로 마음을 결정하지만 호선과 친정 엄마는 그런 은진을 걱정한다. 영화는 임신한 장애인이 사회에서 겪는 상황을 은진을 통해 보여준다.
여러 사람의 걱정스러운 시선 속에 임신을 결정한 은진은 우연히 병실에서 만난 지후에게 위로를 얻는다. 퇴원 후에도 지후와 은진은 계속해서 만남을 이어가고 관계는 더 깊어진다. 은진이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도 지후는 병문안을 오는 등 지후를 찾아 온다. 병원에서 입원해야 하는 상황이 자신의 장애 때문인 것 같다며 자신의 탓을 계속해서 하는 은진에게 지후는 버팀목이자 위로가 되어준다. 어느 날 지후는 은진에게 병원 마실을 제안하지만 오후에 받아야 하는 검사로 병실에 있어야 하는 은진은 거절한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함께 병원 밖으로 마실을 나간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 은진이 검사를 받아야 할 시간에 이르게 되고 은진이 병실에 있지 않자 병원은 보호자인 호선에게 연락한다. 호선은 은진에게 지후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고 은진을 데리러 가기 위해 은진과 지후가 있는 카페로 향한다. 은진을 찾은 호선은 둘이 아닌 혼자 있는 은진만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만난 지후가 자신의 허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은진은 임신 기간 동안 의지가 되었던 사람이 거짓이었단 사실에 결국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이 또한 자신이 가진 장애 때문인 것 같아 자책한다. 그날 저녁 지후는 은진을 마지막으로 찾아오고 지후를 마주한 은진은 지후가 자신의 자아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겪어 온 아픔이 자신때문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생길 수 있는 일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 둘 사이에>는 장애를 가진 여성이 임신하면서 가지는 고민과 어려움을 관객에게 잔잔하고 차분하지만 확실하게 보여준다. 또한 은진이 나아가는 길에 차가운 현실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상한 남편, 따뜻한 친정 엄마 그리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지후를 등장시켜 따뜻한 감정으로 영화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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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 비추는 한 줄기 빛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감독: 신동민 | 출연: 김혜정, 신정웅, 노윤정 외 | 제공/배급: ㈜모쿠슈라 | 러닝타임: 73분 | 개봉: 2021년 10월 28일]
보통의 영화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사건을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묘사하거나 흉내낸다. 그런데 이 영화는 ‘흉내’라는 표현을 들먹이기 어색할 정도로 서민의 삶을 그대로 화면에 옮겨놨다. 샛노란 싸구려 장판과 청소를 자주 하지 않은 바닥을 밟느라 새카매진 발. 그리고 김혜정의 목소리는 ‘방송용’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관리에 힘쓰는 여느 중견배우의 목소리가 아니라 결이 매우 거친 날 것 그대로다. 노래방에서 술에 취한 채 음정박자를 무시하고 삶의 한이 찌든때처럼 섞인 목소리로 노래하는 노윤정 배우의 목소리는 또 어떠한가. 그래서 서민의 삶을 고스란히 재현한 영화를 지켜보고 있자면 극중 인물과 나 사이에 카메라의 존재는 온데간데없이 느껴지고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상업영화에서는 흔히 재벌이나 정치인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겪는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다뤄진다. 혹은 예쁘고 잘생긴 젊은이들의 달콤한 로맨스가 나온다. 이런 이야기는 실상 대부분의 관객들과는 무관한 딴세상 이야기들일 뿐이다. 하지만 진정 보편적인 사람들의 구질구질한 생활은 영화로 다뤄질 자격이 없는가 하는 물음에 답한 영화들도 드물지만 몇 있었다. 특히 작년에는 조민재 감독의 <작은빛>이 그러했고 올해는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가 그러하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소간의 환상과 섞어 풀어내는 이 영화는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단숨에 몰입하게 만든다. 관객이 아니라 실제로 그 공간에서 인물들의 사건을 지켜보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마력이 대단한데, 앞서 구질구질한 서민의 삶이 영화로 다뤄질만한가 하는 물음에 선명한 대답이 된다. 저마다의 인생에는 드라마틱한 서사가 있다. 특히 가진 것 없이 태어난 사람들의 삶에는 환희보다는 뻘밭 같은 고단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들의 삶에 빛을 비추는 역할을 하는 것은 특히 독립영화만이 가능하다고 느낀다. 이 영화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3 개의 서로 다른 단편영화를 하나의 장편영화로 묶었다. 세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는 어머니다. 신동민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낸 세 영화에는 모두 ‘혜정’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3 부 에는 심지어 아들 ‘동민’은 등장하지 않고 오로지 엄마 ‘혜정’의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내내 어머니를 향한 사려 깊은 시선이 돋보인다. 신동민 감독은 지금껏 어머니에 대해 글을 쓰고, 영화로 표현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그려왔던 어머니랑 내 어머니가 전혀 다른 사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어머니는 노래 부르고 술을 마시면서 재밌게 사는 건데 내가 괜히 엄마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 진짜 어머니와 같이 영화를 해야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사를 완벽히 준비한 시나리오가 있었지만 ‘엄마 같으면 무슨 얘기하고 싶’은지 늘 의견을 물어가며 촬영을 진행했다. 덕분에 실제 삶을 풀어내는 ‘혜정’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관객에게도 전해지며 저마다의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이 자전적인 영화에는 신동민 감독의 가족이라는 주제에 대한 내밀한 고민이 담겼다. 어머니와 아들의 삐걱대는 관계, 바람난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이야기에 녹였다. 굉장히 개인적이며 선뜻 타인에게 공개하기는 쉽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신동민 감독은 솔직하고 담담하게 가족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전한다. 이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잘 하고 있는지를 돌아봤다는 감독의 작은 용기가 투영된 결과물이다. 비로소 관객들은 가족이 갈등을 겪지만 갈등을 겪고 더 끈끈해지는 전형적인 가족영화의 서사가 아니라 개인적이면서도 사실적인, 그래서 더 보편적인 가족영화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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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거 아세요? 안 보면 여러분 손해에요! ⁰▿⁰ 【소름 돋는 명장면-페이즈2】
#마블 #MCU #명장면
#아이언맨3
SF, 모험, 액션│미국│129분
감독 셰인 블랙│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기네스 팰트로#토르: 다크 월드
액션, 모험, 판타지│미국│112분
감독 앨런 테일러│출연 크리스 헴스워스, 나탈리 포트만#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
액션, 모험, SF│미국│136분
감독 조 루소, 안소니 루소│출연 크리스 에반스, 스칼렛 요한슨#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액션, 모험, SF│미국│122분
감독 제임스 건│출연 크리스 프랫, 조 샐다나#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
액션, 모험, 판타지, SF│미국│141분
감독 조스 웨던│출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크리스 헴스워스#앤트맨
액션, SF│미국, 영국│117분
감독 페이튼 리드│출연 폴 러드, 마이클 더글라스#리뷰문의
adonai0919@gmail.com#트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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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instagram.com/b.writerTrack: Syn Cole - Gizmo [NCS Release]
Music provided by NoCopyrightSounds.
Watch: https://youtu.be/pZzSq8WfsKo
Free Download / Stream: http://ncs.io/Gizmo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Job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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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펠 리뷰 - 에펠탑의 모양이 A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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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가 몰랐던 에펠의 또 다른 이야기
불멸의 탑을 완성한 에펠의 고뇌와 사랑!
자유의 여신상을 완성하고 프랑스로 돌아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천재 건축가 구스타브 에펠은 1889년 파리의 세계 만국 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 최초로 300m 높이의 탑 설계도를 제안한다. 안전을 우려한 주민들의 반발과 예술가들의 탄원서, 언론의 비평으로 위기에 처하지만 20년전 떠나 보낸 옛사랑 아드리안느를 되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탑을 완성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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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1984 최동원> 30초 예고편
무쇠팔, 부산의 심장, 최고의 투수, 등번호 11번, 불꽃 투혼, 금테 안경
우리가 그를 부르는 이름
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우승, 레전드 한국 시리즈, 기적 같은 우승
우리가 기억하는 1984년 가을
1984년 프로야구 한국 시리즈 롯데 자이언츠 vs 삼성 라이온즈
모두가 절대 강자 삼성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던 한국시리즈
“코리안 시리즈에 올라왔으니까, 제가 힘이 되는 데 까지는 열심히 해서
전 게임을 다 나가더라도 이길 수 있는 게임은 전부다 이기고 싶습니다”
한국시리즈 7차전 5번 등판, 4승 1패, 완봉승, 완투승, 구원승
전세계 유일무이 깨지지 않을 만화 같은 기록
희망, 열정, 도전, 투혼
‘기록’이 아닌 ‘기적’을 선물한 최동원 선수
눈물 나게 그리운 그 이름
무쇠팔 최동원 10주기 첫 번째 다큐멘터리
“야구가 제 인생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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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검은 수녀들> 런칭 예고편
강력한 악령에 사로잡힌 소년을 구하기 위해 금지된 의식에 나서는 사람들의 이야기 NEW는 영화, 음악, 드라마, 극장사업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의 분야를 아우르는 미디어 그룹입니다. NEW 영화사업부의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시고 NEW 영화 예고편, 미공개 독점 영상 등을 가장 먼저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