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2-12-18 22:00:49
황후에게 필요했던 건 과연 무엇이길래?
영화 <코르사주> 시사회 후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인 엘리자베트는 아름답기로 소문났으며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한 식단 관리와 엄격한 운동을 해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왕실을 벗어나 불륜도 하고 이상한 행동들도 많이 했다. 그녀의 딸인 발레리는 엄마인 엘리자베트에게 귀여움을 받는 사랑스러운 딸이었으며 그런 엄마를 좋아한다. 또한 황제인 프란츠 요세프 1세는 자신의 아내이자 황후인 엘리자베트에게 무엇이든 해주려고 하지만 엄격한 왕실 속에서 살아가기가 힘든 엘리자베트였기에 그녀는 다양한 일탈을 하게 된다. 그토록 원하는 것을 누리던 황후에게 부족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황족이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닌가 보다.
일탈을 꿈꾸는 황후에 비추어진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
엄격하고 풍유로운 황실에서 벗어나고픈 엘리자베트는 1킬로나 되는 가발을 쓰고 우아하게 지내왔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엄격한 체중 관리와 몸무게를 재는 것은 답답하면서도 자신이 하고픈 일과는 거리가 멀었던 게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하인들을 불러 욕조 속에서 숨을 참고 얼마나 버티는지 시간을 재도록 하고 답답한 가발을 가위로 자르는 행위도 한다. 그리고 많은 귀족 남자들에게 구애도 받고 불륜도 했던 엘리자베트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정신병원으로 위문을 간 엘리자베트는 다양한 정신질환자들을 만나 보면서 자신의 삶도 왕실의 구속에 갇혀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딸인 발레리가 그린 그림을 앨리자베트에게 보여주는데 그 그림은 국민들에게 황후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는 모습이었다. 과연 수많은 일탈을 하던 그녀가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이었을까? 진정한 행복은 구속된 왕실에서 벗어나 평범한 자유가 아니었나 싶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후에 대한 비극의 말로는?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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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가감정이 들긴 하지만 다시 보고픈 아름다운 영화 <신데렐라>
신데렐라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아지만 동화 속 이야기를 어떻게 실사화 했을지 궁금해서, 그리고 디즈니는 워낙 좋아하다보니 얼마나 화려할까 라는 기대감에 보기 시작한 영화 <신데렐라>. 그런데 정말 예뻤다. 현대 여성상에 대한 생각은 잠시 잊을 만큼 영상미가 굉장히 아름다웠던 작품이었다.
영화 <신데렐라> 시놉시스
“착한 마음과 용기를 가지렴. 꿈꾸던 일이 이루어질 거야.”
어렸을 적 어머니를 여읜 엘라는 아버지가 재혼한 미모의 새엄마와 그녀의 두 딸과 함께 살게 된다. 무역상인 엘라의 아버지마저 타지에서 돌아가시자 새엄마와 의붓언니들은 엘라에게 재투성이라는 뜻의 신데렐라라고 부르며 온갖 구박을 일삼는다.
착한 마음씨와 용기를 가지라는 엄마의 유언을 지켜나가던 엘라는 숲 속에서 왕궁의 견습생이라는 키트(왕자)를 만나 마침내 마음이 맞는 사람을 찾았다고 느끼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신데렐라>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원작을 충실히 따르다
영화 <신데렐라>를 지금에야 봤을까? 후회가 됐던 순간이었다. 영화가 원작을 너무나도 잘 따라서 이렇게 불편해도 되나 싶으면서도 너무 예쁜 영상미에 넋을 놓고 보게 되는 이 모순된 양가감정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어서 굉장히 오묘했다.
차라리 이걸 개봉했던 2015년에 봤더라면, 아니 기술이 발전을 해서 초등학생 때 이 영화가 개봉했더라면 이 작품을 볼 때 불편한 감정이 없지 않았을까,, 그때까지만 해도 신데렐라 이야기가 먹었던 장르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는 2021년이고 신데렐라의 컨셉은 잘못 다뤘다가가는 욕먹기 쉬상인 장르이기 때문에 이게 너무 예쁜데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는 현실에 안타까웠다.
다른 작품들은 원작을 충실히 따르지 않았다 해서 욕을 먹는데 신데렐라는 왜 하필 이런 때 실사화를 해서 원작을 충실히 따라도 답답한 감정을 들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정말 잘 만들었다. 이 양가감정 속에서도 신데렐라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은 영화 자체는 정말 잘 만든 것이 틀림없다.
화려함으로 모든 것을 무마시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 <신데렐라>를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읽으면서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을 정도로 구현을 너무나도 잘했기 때문이다. 디즈니가 작정이라도 한 듯이 2015년에 개봉을 하면서 원작을 충실히 따랐기에 현대 여성상과 너무나도 불합치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는지 그 지점들이 최대한 부각이 되지 않도록 화려함으로 관객들을 홀려놓았다.
사람이라면 저 신데렐라 드레스 한번쯤은 입어보고 싶다. 입혀주고 싶다 이 감정이 들게끔 표현을 해서 디즈니가 정말 똑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에 방점을 찍다
답답한 부분이 없었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현대 사회에도 유효한 신데렐라의 감성이 있었다. 바로 내면을 가꿔야 한다는 것이다. 계모와 새언니, 신데렐라의 이항대립 구조 중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부분은 바로 외면과 내면 중 어디에 공을 들이느냐다. 아버지가 일을 하러 떠날 때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난다. 계모와 새언니들은 자신의 외모를 치장할 소품들을 사와달라 부탁하지만 신데렐라는 첫 여행지에서 스치는 나뭇가지를 가져와달라 부탁한다. 그 나뭇가지를 들고 다니며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자신을 생각해달라 말한다.
이러한 신데렐라의 내면 가꾸기에 방점을 찍다보니 원작 신데렐라의 한계점이었던 백마 탄 왕자만을 기다리는 여성이라는 캐릭터에서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원작에서 도대체 왜 백마 탄 왕자는 많고 많은 여성 중에서 신데렐라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나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할 개연성이 부재했다면 영화 <신데렐라>에서는 내면 가꾸기에 포기를 하지 않았던 신데렐라의 심성을 보고 왕자가 그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이 가능했으니 말이다. 사람은 내면이 중요하다는 것, 내면이 건강한 사람이 긍정적인 에너지를 내뿜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 작품이었다.
영화 <신데렐라>가 수동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원작을 유지하면서도 현재에 시의성이 있는 주제로 방점을 찍으려 한 디즈니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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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브의 모든 것
이브의 모든 것
1950년 작품. 영화 형식으로 보면, 1945년 개봉한 영화 '밀회'와 매우 비슷하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같은 장면이며,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나레이션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다.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순환구조를 갖는 영화는 이후에도 가끔 등장한다.
이 영화도 '밀회'처럼 각종 영화상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영화 자체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국 의회도서관과 미국 국립영화등기부에 등록되었다. 등장인물 역시 쟁쟁해서 주인공 베티 데이비스, 앤 박스터, 마릴린 먼로 등 당대 유명 배우들과 미래의 탑스타가 단역으로 출연하는 귀한 장면을 볼 수 있다.
마고 역의 베티 데이비스는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이브 역을 한 앤 박스터는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그리고 마릴린 먼로는 이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한다.
연극배우에게 주는 최고의 상을 받는 시상식장. 이브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상을 받기 위해 앉아 있고, 앞쪽 테이블에는 마고와 그의 친구들이 앉아 있다. 나레이션이 시작되고, 이 시상식이 있기까지의 과정이 처음부터 시작된다.
연극배우로 탑스타인 마고(베티 데이비스)는 그가 출연하는 연극이 전부 흥행에 성공하고 남부러울 것 없는 스타의 삶을 살아간다. 마고 주변에는 연극연출가, 극작가, 비평가 등 수많은 남성들이 따르고, 그녀를 흠모한다.
하지만 마고 스스로는 이제 곧 마흔 살이 되고, 나이 드는 것에 대한 공포가 있으며, 자기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연출가 빌이 연하의 남성이어서 다른 여자들이 넘본다는 의심을 끊이지 못하고 있다. 그날도 연극이 끝나고 무대 뒤 대기실에서 마고와 마고의 친구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마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캐런이 한 젊은 여성을 데리고 들어온다. 마고의 열성 팬이며, 마고가 등장한 연극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봤다는 이 젊은 여성은 이브(앤 박스터)였다. 이브는 공연장 후문에서 오래도록 누군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침 마고의 친구 캐런이 나타나자 자신이 마고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마고의 공연을 보기 위해 멀리서 왔다는 것을 말한다. 캐런은 안쓰러운 마음에 대기실로 이브를 데리고 들어가 마고에게 소개한다.
이브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일찍 결혼했고, 남편은 전쟁터에서 사망했으며, 돈을 훔쳐 대도시로 나와서 근근히 생활하지만 마고의 공연은 빠뜨리지 않고 다 봤다고 말한다. 그 사실에 살짝 감동한 마고가 자기 일을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묻고, 이브는 감격한다.
이브는 마고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마고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마고의 생활, 연기에 필요한 보조 역할을 철저하게 해낸다. 이브는 마고 뿐 아니라 마고의 친구들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고 완벽한 인물이었다. 마고의 스케줄 관리, 집안 정리, 정돈, 청소, 무대 의상 준비 등 마고가 미리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준비하는 이브를 보면서 마고는 이브를 더욱 신뢰한다.
이브는 연극 무대에 서기 위해 마고는 물론, 마고 주변의 지인들에게 접근해 마고의 대역으로 무대에 설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이 과정에서 이브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끊임없이 거짓말을 한다. '리플리 증후군'에 해당하는 이브의 행동은 결국 이브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이브는 마고가 맡아야 할 배역을 차지한다.
그 과정에서 이브가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다르게 말하고, 행동했던 과거가 드러나고, 이브가 처음에 마고와 그의 지인들을 만났을 때 했던 자신의 과거도 거짓임이 드러난다. 이브는 자기의 과거를 속였고, 가능한 동정을 받을 만한 내용으로 꾸며 거짓말을 했으며, 그렇게 톱스타의 동정과 안쓰러움을 바탕으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다.
이브는 당대 최고의 극작가 로이드의 작품으로 연극 무대에 올라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고, 결국 상을 받게 된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첫 시작점에서 이어진다. 그 자리에 참석한 마고와 그의 지인들은 이브가 화려하게 스타로 탄생하는 것을 지켜본다. 마고는 자신이 나이 들고, 젊은 애인을 질투했다는 걸 인정하고, 톱스타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마고의 시대는 저물어 간다는 것을.
반면 이브는 과거 마고가 올랐던 그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시상식이 끝나 대기실로 돌아오는데, 대기실에서 낯선 여성을 발견한다. 그 여성은 이브의 연기를 존경한다며, 자기도 이브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과거 이브가 마고에게 했던 말과 똑같이 말하며, 이브의 손과 발이 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물결은 끊임없이 밀려들고, 앞선 물결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이브는 지금 톱스타가 되었지만, 언젠가 자신도 마고처럼 가장 높은 곳에서 물러나게 될 것임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이브는 연극계에서 성공하기 위해 인맥을 만든다. 최초에는 공연장 후문에서 무작정 기다리다 우연히 대스타 마고의 가장 친한 친구 캐런을 만나게 되지만, 이후 마고의 인맥들 가운데 마고의 애인이자 연출가인 빌, 희곡을 쓰는 로이드, 연극비평가 애디슨 등을 개별적으로 만나면서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는 욕망을 서서히 드러낸다.
중요한 것은, 이브가 연기에 재능이 있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미인이고, 연기를 잘 하며, 사람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리며 좋은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 개별적으로 만나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절박한 처지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결과는 주변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세우고, 자신의 출세에 사람들을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결국 이브는 자신이 원하는 무대에 서고, 훌륭한 연기로 상까지 받지만, 자기의 뒷조사를 완벽하게 한 평론가 애디슨에게 약점을 잡힌다. 이브는 거짓말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 역시 모두가 선량한 사람만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물론 이들은 좋은 사람들이지만, 자기의 영역, 연출, 극본, 비평에서 이브를 이용해 보다 좋은 평판을 얻으려는 욕심을 보인다. 즉,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최대한 보기 좋게 포장하려는 이중성을 보인다. 그것이 예술가의 한계라는 비판이기도 하고, 인간의 나약한 속성이라는 비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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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 디 에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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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끝까지 다보자마자 떠오른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저서 <인간은 모두 혼자다>와 <그러나 혼자만은 아니다>라는 두 책의 제목이었다. 이 역설적인 두 제목을 합쳐보면, 영화 <인 디 에어>의 역설적인 이야기와 삶의 모순을 담고 있는 이 영화의 주제가 쉽게 드러난다. 물론, 좋은 작품이 언제나 하나의 주제만을 말하고 있지 않듯이, 이 영화 역시 인간의 고독과 삶의 의미 뿐만아니라,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2009)가 덮친 미국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자본주의의 비정함과 우리시대가 마주하고 있는 고용자의 퇴직 이후의 보장되지 않는 삶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있다. 때문에 다양한 주제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시사점이 많은 영화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해당분야의 전문가의 몫으로 넘기고, 이 글에선 인간의 오래된 고독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말해보려고 한다.
인간은 결국 홀로 남겨진다
<인 디 에어>는 해고 전문가 라이언 빙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라이언은 미국 각지를 비행기로 돌아다니며(그래서 제목이 업 인 디 에어인 것), 다른 회사의 직원들에게 그 회사의 경영진 대신 해고 사실을 통보하는 베테랑 해고 전문가다. 어려서부터 노인들의 죽음을 목격하며, 결국 사람은 혼자 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라이언은 누군가와 오랜 시간 함께 하는 삶을 꺼려한다. 그때문에, 가족인 누나와 동생과도 자주 연락하지 않고 1년중 집에 있는 날이 고작 43시간밖에 되지 않는 자신의 일과 삶에 편안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이렇듯 영화 <인 디 에어>속에서 보여지는 라이언의 행동들을 통해 그의 생각을 추적해가는 일은 어려운 작업은 아니다. “어차피 홀로 남겨질 삶이라면, 누구와 이별하는 아픔도 없이 혼자 살다가 조용히 떠나자, 인연이란 어떤 의미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일 수도 있다” 라이언은 대략 이런 생각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닐까. 그의 말은 어떤 면에선 타당해보인다.
그의 확고해보이는 생각과는 다르게, 라이언은 인간은 결국 혼자 남겨지게 되고, 때문에 홀로 떠나는 일이 자신에게 훨씬 편하다고 말하면서도 고독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작중 초반에 오랜만에 만난 이웃과 저녁 약속을 제안하는 부분이나, 알렉스와의 첫 만남에서 그녀를 대하는 그의 태도, 거추장스러운 후배라고 생각했던 나탈리를 떨쳐내지 못하고 신경쓰는 부분들, 그리고 결국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오는 모습, 결정적으로 업무적인 관계에 불과한 수많은 해고자들에게 신경쓰는 부분들로 보아 감정과 공감능력이 풍부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선택을 하는데, 아마도 그건 그가 여지껏 숱하게 겪어온 이별을 다시 겪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을 것이고, 수많은 고용자들을 만나서 해고 사실을 수없이 통보해야 하는 직업적 특성과 어느 한 곳에 오래 정착할 수 없는 여건 탓이리라고 예상된다.
어차피 홀로 남겨질 운명이라면.
넓다면 넓고 작다면 작고, 길다면 길고 또 짧다면 또 짧은 이 세상속에서 우리는 언젠가 누군가와 만나고, 그 시간을 함께 보내며 언젠가는 이별한다. 만남은 정해져있지 않지만, 이별은 분명하게 정해져있다. 그리고 만남은 행복하고 이별의 때에는 언제나 슬프고 아픔을 동반한다. 그러니, 애초에 누군가와 만나지 않는다면,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이별로 인한 아픔과 슬픔을 겪을 필요도 없지 않을까. 또한 어차피 헤어질 상대와의 만남이라면 나 자신에게 더욱 많은 시간을 쏟고 나의 삶에 충실한 편이 낫지 않을까. <인 디 에어>의 라이언은 바로 그런 입장에 서있다. 그는 공항수색대에서 보내는 시간들을 환산하여 최대한 경제적으로 시간을 쓰는 한편, 마일리지를 꾸준히 적립하고 아껴서 항공사로부터 최고 등급의 회원이 되고자 한다. 그의 시간속에는 그 어디에도 타인이 끼어들 틈이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만으로 가득하다.
그런 라이언의 앞에 나타난 두 사람으로 인해서, 라이언은 변하게 된다. 먼저 알렉스와의 만남을 통해서 라이언은 외로움과 고독감을 채워간다. 단순히 외로움과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서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만남을 유지하려 했으나, 라이언은 알렉스에게 빠져들고, 알렉스 역시 라이언에게 빠져 들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라이언 자신은 본인은 이제껏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알렉스를 만나기 이전의 이야기일 것이다. 라이언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져가면서 그와 함께하는 여생을 그려본다. 처음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해서 그토록 부정적이었던 라이언이었지만, 이제 라이언은 알렉스를 가족들에게 소개하고, 그의 집을 찾아갈 정도로 마음을 열었다.
라이언이 알렉스와 관계가 깊어진 것은 서로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레 빠져들어간 것도 있으나, 무엇보다 나타샤의 영향이 컸다. 당돌한 신입사원 나타샤는 유능하고 똑똑한 직원이지만, 아직 실무경험이 부족한 라이언의 후배 직원이다. 영화 <인 디 에어>속 라이언은 자신의 오랜 실무 경험을 토대로 신입사원인 나타샤를 교육하고 이끌며, 수많은 일상속 문제들속에서도 나타샤를 이끌지만, 반대로 사랑의 문제 앞에서는 나타샤에게 배워야하는 입장이었다. 나타샤는 알렉스에 대한 마음을 라이언에게 묻고, 라이언은 그저 가벼운 사이라고 대답한다. 나타샤는 가벼운 사이라는 말에 분노하며 라이언에게 왜 상대방을 격하시키냐고 따져 묻는다. 이 순간이 라이언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타샤가 이때 강조한 진심(real)은 후에 라이언에게 중요한 의미가 되고, 알렉스를 진심으로 대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알렉스의 진심(real)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결코 혼자만은 아니다.
라이언은 그런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를 속박하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반감과 가족마저도 등지고 싶어하는 그 마음에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서로의 진심과 진실을 알 수 없다는 데에 인간관계에는 불완전한 요소가 있다. 결국 인간관계도 자신이 가진 시간과 기회비용으로 일종의 투자를 하는 셈인데, 깊이있게 투자하기 전까지는 상대방의 정확한 진심을 알 수 없고, 때로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상대방의 진심을 알 수 없을 때도 많다. 인간관계란 우선 비용을 지불하고 그 가치를 알아가는 투자방식인데, 주식 투자를 이렇게 한다면 분명 주변에선 미쳤냐고 물어볼 것이다. 라이언의 경우를 보더라도 알렉스에게 자신의 진심과 기회비용을 투자했음에도 알렉스의 진실은 전혀 엉뚱한 곳에 있지 않았나. 때문에, “어차피 홀로 남겨질 삶이라면, 누구와 이별하는 아픔도 없이 혼자 살다가 조용히 떠나자, 인연이란 어떤 의미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일 수도 있다”는 나름대로 라이언을 표현한 문장이 일견 타당해보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선 그의 말은 옳지 않다. 인간은 홀로 남겨지게 된다는 말은 옳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평생을 혼자 사는 편이 낫다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인간은 어느순간 홀로 남겨지기 때문에, 함께라는 이유로 행복했던 기억들을 간직하고 있어야만, 후에 찾아올 긴 고독의 시간들을 견뎌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사회적 동물로 태생적으로 고독을 좋아할 수는 있어도, 수많은 인간관계의 바깥에서 고립되어 평생을 살아가는 것은 절대다수의 인간들에겐 힘든 일이다. 영화 <인디에어>는 라이언의 입을 통해서 인간은 결국 혼자라고 말하는 한편으로 이 영화는 라이언, 알렉스, 나타샤 모두가 결국 외로움을 이겨내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로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말도 안되는 연애를 하고(나타샤), 잠깐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목적없이 만나고(라이언), 불륜 생활을 이어가며(알렉스), 저마다의 방식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긴 고독의 시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특히나 라이언은 자기 입으로 인간은 결국 홀로 죽게된다고, 낯선 비행기와 기내식이 편하다고 말하면서도 깊은 고독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역설적으로 라이언은 고독을 자처하고 있는 한편으로 영화 전반에서 자신이 자처한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라이언은 해고 사실을 전달하는 베테랑 해고 담당자로 누구보다도 스스로의 감정을 잘 관리하고 있는 강인한 사람일 것 같고, 실제로 나름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강인한 사람이지만, 강인한 그 역시도 고독앞에서 수없이 무너져내리고 갈팡질팡한다. 이건 무슨 의미인가. 영화속에서 해고된 직원들의 마지막 인터뷰 장면을 빌려서 대답하자면, 인간은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홀로 죽는다는 라이언의 가정이 옳다고 치자. 하지만, 그 짧은 마지막 순간에만 사람은 홀로 남겨지며, 우리는 삶속 대다수의 시간들을 서로 교류를 맺으며 살아간다. 물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이별은 언제나 슬프고, 오랜 여운을 남긴다.
이별과 죽음을 앞둔 순간은 분명 길고 슬프다. 하지만, 우리 삶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이별의 순간과 죽음을 앞둔 순간은 얼마나 짧은 찰나와 같은 순간인가를 생각해본다면, 그 짧은 순간을 피하고자 삶 전체를 고독하고 칙칙하게만 살아가겠다는 계산은 누가보아도 손해다. 애초에 수지가 맞질 않는다. 또한, 이별의 순간과 죽음을 앞둔 짧은 순간, 아주 힘겨운 시기를 지나가는 순간에, 힘이 되어주는 것은 사회적 고립이 아니다. 누군가가 뻗어준 손을 잡아야만 일어날 수 있는 순간도 있고, 몸은 노쇠해져 초라하게 홀로 남겨지는 순간에, 그대로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버틸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만하게 보낸 어느 한 시절의 기억들 덕분일 것이다.
나만의 별을 찾아서
영화속 라이언은 그 의미를 아주 뒤늦게서야 깨닫는다. 실무 경력은 라이언에 비할바가 못되지만, 누군가와 열렬하게 사랑해보고, 미친듯이 울어보기도 한 나타샤는 라이언보다 먼저 그 의미를 깨닫고, 라이언에게 진실된 마음과 삶의 의미를 알려준다. 똑똑하고 젊은 여성인 나타샤는 첫 직장생활도 실패했고, 첫사랑도 실패했지만, 왠지 그녀는 그 실패를 딛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갈 것만 같다. 라이언은 여전히 공항에서 탑승수속을 밟고, 기약없는 비행편에 올라탄다. 그의 목적지는 정해져있지 않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그의 마음이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가족과도 연을 끊고, 직장 동료들과의 연결도 최소한으로 하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는 일은 더더욱 싫었던 그였지만, 그는 이제 결혼한 동생 부부를 위해 자신의 항공사 마일리지를 양도하고, 나탈리를 위해 추천서를 써주고, 알렉스를 향한 마음으로 그녀의 집앞까지 찾아간다.
그가 탄 비행기는 미국 전역을 떠돌 것이다. 그리고 그 역시 언제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의 마음만은 아무런 정처없이 떠돌지는 않을 것처럼 보인다. 가족에게로 되돌아오고, 사랑에 실패도 해보고, 한참 어린 후배에게 철 좀 들라고 한 소리도 들어본 라이언은 이제 이전과는 다르다. 라이언의 다음 목적지는 어디일까. 누나와 동생의 가정도 그의 마음이 머무를 목적지일 수도 있을테고, 아니면 새로운 목적지를 찾아 헤매고 다닐지도 모르겠지만, 다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제 그의 여행은 정처없는 비행에 그치는 것이 아닌, 자신만의 별을 찾아 헤메는 비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날아 오르기를, Up in the air
영화 <인디에어>는 21세기에 들어서 경제적으로 가장 곤란한 시기에 직면한 미국 내부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어려움을 견딜수 있는 힘이란 가족이나 친구를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에게 달려있다고 말하는 영화로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수많은 이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머지 않은 곳에 있고, 언젠가는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주고 있다. 해고 통보를 아웃소싱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해고 절차마저도 비용의 문제로 간소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비정함도 엿보이는데, 이렇듯 엿보이는 자본주의의 비정함이 주제의식을 더 강화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회가 그렇게나 비정하기 때문에 비정한 사회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마음이 머무를 곳이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만들어지고, 개봉해서, 어려운 상황에 놓인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날아오르기를 권유하고 있는 영화 <인디에어>였다.
*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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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 끝은 있는거야! 영화 <트루먼쇼>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여기 딜레마가 하나 있다.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다른 다수의 사람들은 힘들어진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이 아이는 영원히 갇혀 살게 된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다수가 행복한 게 중요하다면, 웰컴 투 공리주의. 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의 수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크기를 비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나만 해도 어느 면접에서 '공리주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불가피하다면 최선이라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트루먼쇼>, 영화 한 편으로 정말로,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앞서 말한 바로 그 딜레마가 가정이 아니라 실제상황이라면? <트루먼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트루먼 버뱅크, 태아 때부터 30대로 추정되는 현재까지 하루 24시간 그의 모든 것이 전 세계에 방송된다. 나의 모든 것이 나도 모르는 이들에게 공유된다니. 이건 비밀인데, 하던 말, 나만 알고 싶은 민망하고 부끄러운 일까지 모두. 소름끼친다. 방송국에 입양되었으니 이런 식으로 쓰일 수 있다나.
영화에서 트루먼을 제외하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방관한 모든 인물이 악당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 꼽자면 프로듀서를 대표적으로 꼽겠다. 트루먼쇼는 트루먼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모욕의 집합체다. 그는 사람 대접을 받은 게 아니라 돈 되는 투자처였다. 트루먼쇼는 트루먼에 대한 동의없는 일방적인 사기이자 감금, 사생활 침해, 인권 유린이자 착취다. 죄목을 몇 개나 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트루먼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프로듀서는 그의 신인 양, 그의 아버지라도 되는 양 스크린에서 그를 쓰다듬고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한다. 프로듀서는 그가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즉흥적인 삶을 살지 못하도록, 이 섬을 벗어날 수 없도록 그에게 트라우마나 시련을 주었다. 물을보면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도록. 그를 위해 섬을 전부 꾸몄고, 인간관계는 배우들로 채워넣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를 롱런하는 드라마를 보듯 흥미롭게 시청할 뿐이다. 그들에겐 어차피 '방송 프로그램'일 뿐이니까. 가끔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트루먼쇼는 대세다.
하려면 빈틈없이 제대로나 하지, 곳곳에서 그의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실수가 일어났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하는 방송이 라디오에서 들렸다. 하늘에선 조명이 떨어졌다. 그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하면 모두가 당황한다. 아이를 갖자는 아내 메릴은 사실 별로 그를 안 좋아한다. 겁쟁이인 줄 알았던 그가 수많은 눈과 카메라를 속이고 그렇게 무서워하던 물로 나아갔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은 대가로 프로듀서가 만든 폭풍우에 휩쓸릴 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화내지 않았다. 모두에게 위트있게 인사를 한다. '미리 인사하죠, 굿애프터눈, 굿 이브닝, 굿 나잇.' 그는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만들어진 세상, 거짓된 진실, 빈 껍데기의 평온한 일상에서. 다들 그를 시청하기만 했지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그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 프로듀서마저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멍청한 듯 했지만 똑똑했다. 시청자가 느낀 감동과 재미는 프로듀서의 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남의 이야기가 세상 꿀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프로듀서를, 시청자들을 못됐다고 비난만 할 수 있을까. 1998년에 만들어진 트루먼쇼는 놀랍게도 최근의 예능 트렌드와 흡사하다. 프로듀서는 10년, 20년을 앞서 본 선구자인 것이다. 트루먼쇼는 그냥 쇼가 아니었다. 시청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열일하는 연출로 더 많은 광고와 각종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작은 국가의 GDP 수준의 경제적 성공을 이뤘다. 트루먼이 함께 하는 이상 이 수익은 고정적이다. 누가 아나. 늘 단역 자리는 필요하니 일자리를 창출하고 그의 생활 속 제품 홍보로 소비를 촉진시키고, 그 수익으로 파이를 분배하는 등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바지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신적 안정감은 어떤가. 트루먼이 성장하는 것을 다같이 흐뭇하게 보며 울고 웃는다. 먼 얘기는 아니다. 우리 역시 만나본 적도 없는 연예인과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게 공감하고 위로받고 힐링받는다.
트루먼쇼의 프로듀서의 말은 사실이다. 트루먼쇼는 좋은 의도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기쁨, 위로를 주는 프로그램.' 다만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빠졌을 뿐. 전 세계 TV는 리얼리티 쇼가 가득 채웠다. 모델, 가수, 아이돌 등을 뽑는 부분적인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2016-17년 예능을 쥐어잡은 <나 혼자 산다>, <미운 오리 새끼>, <슈퍼맨이 돌아왔다> 까지. 일상을 노출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 그리 다르지 않다. 앞의 두 프로그램은 연말 예능프로그램에서 온갖 상을 휩쓸었다. 차이가 있다면 당사자가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집집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일상에 자리잡았다. 집을 공개하고, 생활하는 날 것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출연자의 '진짜 모습'을 안다고 믿도록. 물론 무엇이 어디까지 진짜인지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다. 지금은 진실의 경계가 혼란스러운 정도지만, 나중엔 사람들의 역치가 높아질 것이다. 더 강한 자극은 진실된 존재의 진실된 감정에서 온다. 몰래카메라가 재밌는 이유와 같다. 예전에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란 존재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다. 어차피 방송은 짜고 치는 대본이 암암리에 있는 게 아니던가? 사람들은 불신했다. 그러나 지금은? 익숙하다. 진심이 있는 부분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미래는? 트루먼쇼 같은 것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시청률이 잘 나오니까. 돈이 되니까. 사람들이 열광하니까.
훌륭한 프로듀서가 뜻밖의 상황을 맞이할 때의 자세
냉정하게 생각하자. 프로듀서의 역량은 훌륭하다. 눈치를 채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트루먼에 대처하기 위해 그 역시 열심히 대처하느라 바빴다. 갑자기 돌아가신 설정의 아버지를 우연찮게 만나자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전개와 대사를 마련한다. 트루먼의 고뇌에 대한 위로, 트루먼과 아버지의 재회. 기쁨의 눈물. 바로 클로즈업을 해선 안 된다. 서서히 멀리서부터 마지막 그의 얼굴로 다가가야 한다. 트루먼이 그가 만든 세상을 박차고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프로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나쁜 역할을 맡기도 했다. 트루먼이 폭풍우에서 모진 고생을 하게 만들었고 폭풍이 지나간 쨍쨍한 햇살에 비친 만족감을 대조하며 극의 밀도를 높였다. 마지막 문을 열고 나가기 전 이 곳에서 계속 함께하자며 그의 내면의 두려움을 건드렸다. 물론 진심도 있었을 것이다. 나와 오래 함께 하자. 그러나 한 구석으로는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레전드는 만들어야지. 부정할 수 없는 최고시청률을 갱신하며 전 세계 사람들에게 감동과 재미를 선사했다. 프로듀서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트루먼에게 마냥 좋은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그만두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 세계의 시청자, 자신의 밑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얽힌 이해관계자의 기대에 찬 눈빛. 그는 트루먼의 인생동안의 시간만큼 그들의 무게 아래 짓눌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저울에 두자면 프로듀서 입장에서는 트루먼의 벗어나고 싶다는 고민은 묵인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에게 이 상황은 딜레마가 아니다. 이제와서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에 나가지 않는 것이 트루먼에게도 좋다고 생각하니까. 어차피 스타가 된 이상 바깥 세상에서도 그가 원하던 자유는 얻을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니까. 여기선 고작 갑갑할 뿐이지만 진짜 세상에서 그는 욕을 먹고 상처를 받을테니까. 게다가 적어도 트루먼에게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기도 하니까. 심지어 이혼한 후에 재혼할 두번째 아내까지. 귀차니즘이나 결정장애에 빠져있다면 이 만한 직업도 없다.
프로듀서는 트루먼쇼를 딜레마로 보지 않았다. 한 사람의 완전한 희생으로 다른 이들이 이득을 보는, 일방이 희생하는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스타와 지켜보는 수많은 지지자들, 윈윈이나 협조 관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 인간도 아니라고 비난의 화살만 퍼부을 텐가. 그는 자신의 일을 그저 잘 알고, 잘 하고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쇼는 끝이 없다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하나뿐인 스타인 트루먼은 쇼도 끝이 있는 거라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프로듀서는 말문을 잃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끝을 맞이한 것이다. 아직 트루먼을 보내줄 어떤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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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 나이트> ★★ 초속 5mm
<그린 나이트>
21세기 들어 서서히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영화계(특히 할리우드)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며 위기를 타개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널리 팔린 마블-DC 코믹스 기반의 히어로 영화를 만들고, 이미 나와있는 애니메이션을 실사영화로 리메이크하기도 하며, 오랜 설화와 신화에서 소재를 잔뜩 가져다 쓰기도 하죠. 아무렴 잘 닦아놓은 길을 걸어가는 게 머리를 짜내 새로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써서 황무지를 헤쳐나가는 거보다 평가+흥행적으로 훨씬 안정적일 테니까요.
▲ '원탁의 기사'를 소재로 하는 수많은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전설 '원탁의 기사'는 쉴 새 없이 우려먹어도 뽑아낼게 많은 매우 훌륭한 기출 답안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작품 소재로 한 영화만 1년에 최소 1-2편씩 극장에서 매년 개봉하고 있으니 사골도 이런 훌륭한 사골이 없죠.
대충 최근 개봉작 생각나는 것만 해도 <킹 아서: 제왕의 검>(2015),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2017), <왕이 될 아이>(2019), <레드 슈즈>(2019)... 등등 넘쳐나니까요.
▲ 이번엔 A24가 이 전설을 각색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술영화 전문 제작사 'A24'가 또 이 원탁의 기사 이야기로 <그린 나이트>를 만들어 왔습니다. 정확히는 원탁의 기사 중 '아서 왕'의 친척이자 오른팔인 기사 '가웨인'의 이야기를 들고 말이죠.
참고로 영화는 개봉 이전에 '씨네랩' 초청으로 언론배급 시사회를 통해 참석하여 보고 왔습니다. 관계자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 아서왕의 오른팔 '가웨인'의 이야기 <그린 나이트>
<그린 나이트>의 시놉시스
중세 시대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만찬을 즐기고 있는 원탁의 기사들 앞에 나타난 녹색 기사 '그린 나이트'(랄프 이네슨)가 나타나서 자신의 목을 내리치면 명예를 얻을 수 있지만, 1년 후 똑같이 목을 대야 한다는 게임을 제안합니다. 아무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아서왕의 조카 '가웨인'(데브 파텔)이 이에 응하고 그는 손수 목을 칩니다.
그렇게 1년 후, 그는 연인 '에셀'(알리시아 비칸데르) 등 소중한 사람을 등지고 명예를 위해 녹색 기사를 향한 아주 먼 길을 떠나게 되는데...
▲ 녹색 기사를 향한 여정을 담은 <그린 나이트>
★주의★
'영화의 주제와 특징'부분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스포 당하기 싫으신 분들은
'영화를 보고...'부분까지
쭉 넘어가 주시길...<그린 나이트>의 주제와 특징
'중세 기사문학'하면 영웅이 되려는 기사가 모험을 나서서 종국에 영광을 얻고 돌아오는 시나리오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보통은 여기서 괴물이랑 싸우는 처절한 액션+가는 동안 만나는 여자와의 스쳐 지나가는 사랑 등을 이야기하기 마련이죠.영화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린 나이트>는 사실상 이 구도를 그대로 따라가는 로드무비거든요.
▲ 로드무비 스타일을 따르는 <그린 나이트>
여기서 우리는 이 영화의 제작사 'A24'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A24가 과거에 만든 영화들
할리우드에서 '서치라이트 픽처스'와 함께 예술영화 제작사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A24는 <엑스 마키나>(2015), <플로리다 프로젝트>(2018), <레이디버드>(2018), <미드소마>(2019) 등등 개성 넘치는 수많은 작품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이쯤 되면 슬슬 감이 오시겠지만 이 영화는 상업성과 거리가 매우 멀다는 걸 짐작하실 수 있겠죠?
▲ 영화는 상업성과 거리가 매우 매우 멉니다.
영화는 내용은 지극히 단순합니다. 원탁의 기사 중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라는 1500년대 장편 시의 스토리를 차분히 따라가죠.
그런데 녹색 기사의 목을 내리치는 순간부터 가웨인의 목을 치는 순간까지의 로드무비 모험극은 흔히 우리가 봐왔던 <반지의 제왕>이나 <왕좌의 게임>시리즈와는 결이 많이 다릅니다... 아니다. 하나도 같은 점이 없다고 봐도 무리가 없죠.
▲ 우리가 주로 보는 판타지 영화와 결이 달라도 너무나 다른 <그린 나이트>
기껏 성수까지 뿌려준 방패는 10분 만에 써보지도 못하고 두 동강 나고, 모험을 나선 뒤 영화가 끝날 때까지 가웨인은 칼이나 도끼를 단 한 번도 똑바로 휘두르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액션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고, 당당함과 자신감이 넘쳐야 할 기사의 얼굴에는 근심과 서러움 만이 가득합니다.
계속 보다 보면 작중내내 가웨인 입가에 제대로 된 미소란 찾아볼 수 없는 데다, 날강도들에게 물건을 다 털리거나 독버섯 먹고 죽기 직전까지 가는 등... 이게 무슨 기사인가 싶은 생각까지 들게 됩니다.
처음엔 왜 이렇게 영화가 전개되는 건가 당황스러웠는데, 생각을 좀 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 일부로 주인공 심리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수많은 장치들
서양권 교도소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Dead Man Walking"
감옥의 사형수가 전기의자로 걸어갈 때 하는 말이죠.
마찬가지로 작중 인형극으로 수없이 언급되듯이 가웨인은 영웅이 되러 가는 게 아니라 죽으러 가는 게 너무나 명확하니까 고의적으로 이런 심리 상황을 영화로 진득하게 표현한 게 아닐까 싶더군요.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영화는 너무 느~립니다
사람은 죽기 직전에 주마등(파노라마)처럼 인생이 스쳐 지나간다고 합니다. 그만큼 시간이 왜곡돼서 흘러간다고 하죠. 이를 반영했듯이 영화의 흐름은 아~~~주~~~느~~~리~~~게 전개됩니다. 마치 작중에 수없이 보여진 녹색 식물이 자라듯, 초속 5mm 정도로 천천히 전개되죠.
영화는 대충 잔가지 다 치고 썰 풀면 5분 안에 설명할 내용을 러닝타임으로 130분으로 늘렸고, 덕분에 감독 '데이빗 로워리'가 이걸 의도했든 안 했든 엄청나게 영화는 길게 늘어집니다.
▲ 일반적인 대중의 시선으로는 좋은 평가 주기 어렵네요.
늘어진 수준이 얼마나 지나치면 최소한 원작인 원탁의 기사 내용을 아는 사람이나 이런 영화에 익숙한 평론가라면 가웨인에 감정을 이입하면서 꽤 좋게 볼 수 있겠으나, 그런 기본 배경이 없는 일반인들은 '이게 뭐야?'하면서 황당해 할 정도입니다.
저도 웬만하면 예술영화 특성상 긍정적으로 봐주려고 했는데 이건 정도가 심해도 좀 많이 심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졸린 영화 만들어 놓고 예술영화라고 주장하는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 여러모로 기법이 훌륭하긴 한데...
그나마 중간중간 적절히 패닝(Panning)-롤링(Rolling) 등을 활용한 여러 가지 훌륭한 촬영기법과 끊임없이 현란한 색채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한껏 살린 건 정말 좋았습니다. 이 점 덕분에 데브 파텔의 연기력이 더 부각되는 면이 있는 건 덤이고요.
그러나 이런 장점까지 종합해도 일반적인 관객들에게 합격점 맞기는 쉽지 않을 거 같네요.
▲ 종합적으로 잘 만들었으나 재밌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린 나이트>를 보고..
<그린 나이트>는 분명 잘 만든 영화입니다. 중세 시대 전설인 가웨인의 심리 변화를 중심으로 아주 천천히 전개된 영화는 연기, 촬영, 연출의 의도성 면에선 충분히 박수받을만합니다.
하지만 '잘 만든 영화'랑 '재밌는 영화'는 완전히 별개죠. 이건 흔히 볼 수 있는 재밌는 판타지 영화를 생각하면 제대로 뒤통수 맞을 수준입니다.
▲ 평가 꽤나 심각하게 나뉠 거 같네요.
이거 호불호 좀 심각하게 갈릴 거 같은데, 전 불호에 더 가깝습니다. 아직 제 뇌 속 평가 기준은 비평가보단 관람객과 일반 대중들에 더 가까우니까요.
게다가 영화가 다 끝날 때쯤(여우가 갑자기 말하는 시점)에 앞쪽에서 고개를 옆으로 숙인 채 졸고 있던 아저씨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면, 개인적으로 <그린 나이트>를 섣불리 주위 사람에게 추천하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당신은 기사가 아니에요"
<그린 나이트>
★★
초속 5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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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곳,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에는 일반적인 설명적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등장하는 내레이션과 인터뷰가 사용되지 않는다. 설명적 다큐멘터리에서 내레이션은 보통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으로 이미지만으로 전달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거나 영상에 드러나지 않는 정보를 추가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관람자의 이해를 돕는 것이다. 이 경우 ‘나’가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보다 객관적인 관점을 가진다. 두 번째 방식은 ‘나’가 화자로 등장하는 1인칭 시점의 내레이션인데 이는 다시 관찰자 시점과 주인공 시점으로 나뉜다. 이 경우 ‘나’로 등장하는 화자가 ‘나’의 시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는 것을 서술함으로써 전지적 시점보다 주관적이고 감독의 생각과 의견이 더 직접적으로 전달된다. 서술자의 위치가 어디인가에 따라 내레이션은 여러 시점으로 분류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전지적 시점이든, ‘나’로 비롯되는 1인칭 시점이든 모든 내레이션은 영상 속 이미지를 바라보는 ’ 시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세 시간이 넘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내레이션이 등장하지 않으며, 이는 곧 이들을 바라보는 ‘시점’, 즉 시선의 주인이 누군지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내레이션뿐 아니라 일반적인 설명적 다큐멘터리와 <어느 여름의 연대기>, <침묵>에서도 반복해서 등장했던 인터뷰의 형식 또한 사용하지 않았는데, 내레이션의 서술자와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가 모두 등장하지 않으며 영화 속 시선의 주인은 철저히 감춰진다.
이렇게 주인이 없는 시선은 뉴욕 시민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뉴욕 라이브러리의 성격과 맞닿아 어우러진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뉴욕 라이브러리는 예술, 인문학, 디지털, 취업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고 체득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는 공간이자 소통과 연대의 창구, 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이기도 한 장소로, 단순히 책을 읽기 위한 공간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층까지 나이에 상관없이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기회가 열려있는 뉴욕 라이브러리의 성격은 특정한 시점이 정해져 있지 않은 영화의 형식과 만나 더욱 두드러지고, 누구나 도서관의 방문자이자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기회를 얻을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관람자 누구나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람자는 도서관에서 진행되는 강연에 참여하는 청중이 될 수도, 도서관 총 운영 회의에 참여하는 위원진이 될 수도, 미술 교육과 디지털 교육에 참여한 시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가 설명해 주었더라면 단순히 “이러한 공간이 있다” 라는 소개에서 그쳤을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는 관객에게 단순한 공간 소개가 아닌 시선을 통한 간접 체험의 기회를 제공하여 카메라와 동일한 시선을 갖는 일차적 동일시를 불러일으키고, 관람자의 몰입도를 향상시킨다.
내레이션과 인터뷰를 사용하지 않은 것과 더불어 <뉴욕 라이브러리에서>에서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점이 있다면 중간중간 반복해서 등장하는 회의 장면이다. 영화 속에는 뉴욕 각지에 있는 여러 뉴욕 라이브러리 지점과 그 안에서 진행되는 행사가 등장하며 자칫 서로 다른 공간이라는 인식을 줄 수 있는데, 영화는 여러 뉴욕 라이브러리의 지점과 각양각색의 프로그램을 조명함과 동시에 중간 중간 반복되는 회의 장면을 등장시킴으로써 영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공간과 프로그램은 모두 ‘뉴욕 라이브러리’라는 하나의 공간으로 수렴된다. 이를 통해 영화는 각 공간과 인물, 사건이 분리된 것이 아닌 하나의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를 통해 바라본 도서관은 시민 소통의 중심부이자 사회. 정치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치며 다양한 경험의 기회가 주어지는 열린 공간이다. 그에 비해 나의 머릿속에 있던 도서관의 이미지는 단순히 책을 읽고 집중할, 조용한 공간과 같이 닫힌 이미지였던 것 같아 아쉬웠고 도서관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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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도 못 쉬고 봤습니다..... 충격 결말, 시간 순삭 영화 [결말포함]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세인트아가타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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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1차 예고편
전 세계가 기다려 온 미션 드디어 올타임 레전드 ‘그’가 돌아온다!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2025년 5월 극장 개봉 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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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 시즌4> 1부 최종 예고편
이번 주 금요일,
전 세계가 뒤집힌 세계로. 시즌 4의 1부. 5월 27일 대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