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엘2022-08-29 22:43:23
[SIWFF 데일리] 너무나 평범한 일상을 다뤘지만 그 속에 메세지도 있었던 영화!
영화 <남매의 여름밤> 리뷰
감독:윤단비
출연: 최정운(옥주 역),양홍주(아빠 역),박헌영(고모 역),박승준(동주 역),김상동(할아버지 역)
시놉시스
옥주와 동주는 아빠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할아버지 집으로 이사를 간다. 하얀색 다마쓰(흰 승합차)에 짐을 많이 싣고 운전하는 아빠는 할아버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옥주와 동주를 먼저 내리게 한다. 사실은 할아버지가 몸이 많이 아파서 아빠가 병원에서 데려와야 되는데 먼저 집으로 들어간 옥주와 동주는 2층 방을 차지하기 위해 티격태격 싸운다. 결과는 옥주가 2층 방을 차지하면서 동주는 창고에 있는 방으로 쫓겨난다. 할아버지가 도착하자 옥주와 동주는 할아버지에게 인사한다. 손주들을 오랜만에 본 할아버지는 들어온 가족들과 함께 콩국수를 먹는다. 그리고 반가운 고모가 들어오게 되고 옥주와 동주는 할아버지를 돌보는 아빠와 함께 이 집에서 살아야 하는데... 앞으로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할아버지 집에 얹혀살게 된
옥주, 동주, 아빠, 고모
이들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
평범한 일상을 다뤘지만 메세지가 있었던 영화!
저마다 사연 있는 가족들이 할아버지 집에 모였다!
아빠는 길거리에서 나이키 신발을 파는 상인이었고 옥주는 자신의 외모 콤플렉스로 인해 쌍꺼풀 수술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빠에게 70만 원을 빌려 달라고 부탁을 했으나 충분히 이쁘다는 대답만 들을 뿐이었고 썸남에게 나이키 신발을 선물하지만 나중에 짝퉁이라는 걸 알게 된다. 고모는 자신의 남편과 싸우고 집에서 나와 할아버지 집에서 살게 된다. 연애를 많이 해본 고모는 옥주에게 연애를 많이 해보라고 하면서 그래야지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알려준다. 이 영화를 만든 윤단비 감독은 고등학교 때까지 광주에서 자라면서 레이디버드의 주인공의 고향인 새크라멘토처럼 정말 아무 변화도 없고 너무 작은 도시라는 걸 느꼈고 영화에서 나오는 거대한 사건과 화려한 주인공의 모습과는 접점이 없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너무나 평범한 일상을 다뤘지만 그 속에서 우리나라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라는 피드백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윤단비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공개했을 때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너무 무서웠다고 했지만 생각보다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상실을 겪는 과정을 진행하는 것을 다루는 영화인데 배우들에게 이런 상실의 경험을 겪은 적이 있냐고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의 경험을 이 영화에서 풀어냈고 옥주에게 많이 투영이 됐을 수도 있었는데 완전히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 영화의 메세지는 누군가 굉장히 외로운 순간에 비슷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으며 작지만 위안이 될 수 있게 만들고 싶었던 영화였다고 한다.
남매인 옥주와 동주가 할아버지 집에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영화!
※ 내레이션은 박정민 배우님이 맡으셨습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08/25(목) - 09/01(목)
2022-08-27 16:00 - 17: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4관
2022-08-31 16:00 - 17:44 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 5관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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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절대 내 뒷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하... 글을 몇 번이고 지웠다. 일 하기 싫다. 공부하고는 싶다. 근데 들인 노력에 비해 올라가지 않는 실력에 또 나 자신에게 좌절했다. 이 세상에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에 앞이 깜깜했다. 나지막하게 입에서 욕을 하려다가 참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잠만 잤다. 방구석에 앉아서 게임을 하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주말을 보냈고 나름 성공적이었다. 새벽 두 시에 자서 오후 4시에 일과를 시작했으니 게임만 하던 예전의 나보다는 더 발전한 셈이다. 어제는 강박인지 재미인지 나 스스로도 구분 안 될 게임을 접으려고 했다. 그럴 시간에 공부를 해서 나의 어떤 점수를 올리는 것이 도움된다는 걸 진작에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패했다. 오늘도 이랬다. 열심히 살고는 싶지만 내 생각 외의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인생이 다 정해져 있는 무언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이런 노력들 다 할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이 루틴의 끝이 어디쯤에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알 수 없었다. 이 수많은 뻘짓거리의 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돈 얼마 벌어도 결국 어떻게 쓸지 고민하게 되고 그에 따른 후회가 온다. 아빠 노트북을 사 주면 후회하지 않게 될까. 맥북을 새로운 걸로 갈면 후회하지 않게 될까. 아주 사소한 인생의 질문들이 머리 위를 뱅뱅 맴돈다. 그럴 수 있지라는 대답과 그래서는 안됐었다는 답이 나온다. 금세 나는 지금 나에게 없는 것들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얼굴도 떠오르고 어떤 물건들도 생각난다. 그게 나에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수도 없이 되묻다 보면 한 정답에 수렴한다. 원인과 결과에 대해 머릿속에서 수천번 따진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나는 보이는 것만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만 결론을 내린다. 누가 나에게 말을 건네주어 위로라도 해주길 원하지만 사실 아무 의미 없다. 애초부터 이 지긋지긋한 루틴에는 답이 없었다. 인생은 이렇게나 뭐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생각 외의 너머를 알 수 있을까. 갑자기 이 세상에서 친절한 건 무엇일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 진짜 내 편인건 과연 무엇일까.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인생은 이렇게 외로운 게 맞다 하더라도 인간에게는 뒤를 돌아볼 구석이 필요하다. 내가 아는 세상은 너무나도 잔인하기 때문이다.
<하나 그리고 둘>은 영화에 관한 영화다. 주인공은 8살 소년 양양이다. 양양의 카메라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가족들의 얼굴을 찍는다. 가족 구성원들이 처한 상황은 가지각색이다. 일단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하기 이전에 배경으로 설명되는 가족 행사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아빠 NJ의 처남 아디의 결혼식이 영화 초반에 제시된다. 평범한 가족 행사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 결혼에는 비밀이 있다. 결혼의 계기가 혼전임신인 것도 모자라 아디는 불륜 중이었기 때문에, 이 불륜의 대상이 된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와 결혼식에 개입한 것이다. 이 일로 마음이 불편해진 할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영화는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느릿느릿 보여준다. 첫 번째 아빠 NJ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아빠 NJ에게 결혼식 도중 옛사랑이 찾아온다. 당연히 싱숭생숭해지는 아빠 NJ. 또 이것과는 무관하게 계속해서 벌어지는 인생의 좌절에 엄마 밍밍은 절로 떠나버린다. 딸 팅팅과 할머니 사이에도 사건이 있다. 팅팅이 버리지 않은 쓰레기를 버리러 가다 할머니가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것이다. 할머니의 건강 악화가 자기 탓일 거라 믿으면서도 한편으론 친구 패티의 전 남자 친구와 눈 맞기 5분 전에 놓인다. 아들 양양은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는 게 아니면 사실 학교에서 썩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영화는 이런 식으로 각자의 인물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엄청나게 느린 화법으로 전달한다. 아마 러닝타임 세 시간 중 거의 2시간 30분이 느린 템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위의 단락도 내용을 잠깐 요약해서 저 정도인 거지 영화 1 회독이 그렇게 쉬운 편은 아니다. 난 이 작품 초반 1시간에서 하차를 두 번이나 했다. 템포만 문제인 게 아니다. 느릿느릿한 화법에 등장인물이 많다는 것도 이것을 유발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 인물의 관계 때문에 영화 안에서 갑자기 혼란스러워지는 지점이 있는데, 패티는 말랐는데 뚱보라고 불린다던가, 갑자기 느닷없이 패티가 팅팅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화를 내는 장면을 몇 번이나 더 봤다. 잔잔한 템포에 갑자기 화를 내니까 이건 뭐지 싶었던 것이다. 영화 자체가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 줄거리를 이끄는 형식이 아닌 주인공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조명한다. 말이 영화지 다큐보다 더 심심한 영상이었다. 근데 이건 후반부 끝까지 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작품의 종반부에서 모든 게 다 정리된다. 패티가 느닷없이 한 명을 죽이는데, 이는 리리와 리리의 어머니 둘 다 함께 부적절한 관계이던 영어 선생님이었다. 아무 뜬금없이 이 사실이 드러나진 않겠지? 난 살인사건과 후에 할머니가(환상이었지만) 살아 계신 듯한 연출을 보고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하나만 비틀어서 은유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딱 아는 것만 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건 애초부터 알 수 없다. 우리는 그걸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그걸 다 알고 살았으면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 영화도 이런 우리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팅팅이 패티에게 받은 편지에는 어떤 내용이 있을까? 근데 그게 좋은 내용이었든 나쁜 내용이었던 팅팅이 결과를 바꿀 수 있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다른 문제. 그래서 할머니가 진짜 쓰러진 이유는 뭘까? 진짜 팅팅이 버지 않은 쓰레기 때문일까? 셰리는 재결합을 원했는데 왜 연락 없이 떠났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철저하게 감춘다. 할머니가 쓰러진 이유는 팅팅에게 굉장히 중요하다. 셰리가 갑자기 튀어나온 이유? NJ에게 역시 중요할 것이다. 양양은 수영을 하는 같은 반 여학생에게 마음이 있어 따라 해 보지만 물에만 풍덩 빠지고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다. 가족 구성원들은 목적에 따라 살아가지만 이 사람들에게 이 목표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들에게 목적만큼 중요했던 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영화는 '내가 뭘 하러 온 거지?'나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와 같은 대사로 '살아있는 증거는 무엇인가?'에 대해 조명한다. 할머니 앞에서 하는 이야기들, 엄마의 실신으로 울부짖으며 했던 대사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했던 잡생각들. <하나 그리고 둘>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것에 다룬다. 마치 인생의 의미에 욕망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어쩌면 이건 당연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가 삶의 목적이나 실패, 성공 그런 것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난 내 원래 취지에서 굉장히 어긋난 인생을 살고 있고, 하루에도 몇 번은 후회한다. 근데 더 웃기고 슬픈 건 이런 일들이 내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난 내가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아. 그래서 그게 그렇게 됐지. 그때 걔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랬었으면 어땠을까. 사실 이 생각에 답은 없다. 어차피 인생은 잔인하고 목적이 분명하다고 해서 행복을 갖다 주지는 않기 때문이란 걸 우리 스스로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건 나른함에서 왔다. 공익근무요원을 하며 버티는 지루한 하루하루. 사랑하는 사람들의 슬픔 속에 꼭 표현하고 싶은 내 마음. 토익 책을 사려다가 엄마 아빠와 맛있는 걸 먹을 때의 쾌감. 뭐 그런 것에서 나는 생의 의미를 느꼈던 것 같다. 항상 이것들은 내가 알고 있는 것 너머의 무언가를 알려줬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본다. 영화는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카메라로 사람들을 관찰한다. 가끔 내레이션도 나오고 CG도 나온다. 이런 요소들 때문에 우리는 주인공의 마음을 알 거라고 믿는다. 감정이입이란 이걸 근거해서 나타난다. 내가 저랬으니까. 저 사람도 그러겠지. <이터널 선샤인>이 좋은 작품인 이유도 여기에서 온다. 우리가 아는 사랑의 의미를 공유하는 공통분모를 정확하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근데 사실 우리가 이 <이터널 선샤인>에 공감하는 이유가 찰리 카우프먼의 해설을 들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각자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랑을 바탕으로 리액션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참 웃긴 것이다. 나는 저 사람이 아닌데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내면이 보이는 것이 아닌데도 우리는 영화를 보고 공감한다. 보이는 것 너머에 대한 이야기는 영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삶도 비슷하다. 나는 내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착각 때문에 누군가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존중하고 또 사랑을 주려고 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앞과 뒤지 내면은 알 수 없다. 또 근데 웃긴 건 인간의 이런 속성을 우리가 모르고 있을까? 위험부담? 이미 알고 있다. 애초부터 삶이 분명하게 제시는 게 하나도 없는데도 우린 무언가를 본다고 믿고 있다.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항상 쓴 대가를 치르면서, 다 알면서도 난 인생에게 계속 속는 셈이다. 삶은 이 지점에서 영화와 비슷하다. 뜬금없는 반전이 튀어나올 수도 있고 예상을 뒤엎지 않은 채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적이 애초부터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영화의 결말을 예상하다 뒤통수를 맞는 것처럼 삶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지배받는 것투성이다.
그래서 삶이 아름답다. 또 내가 앞에서 서술한 영화를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삶이란 예상치도 못한 것에 지배받는 것이 아닌 모르는 것투성이 속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걸 넓혀가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를 보고 각자 느끼는 감상이 다르기 때문에 영화가 아름다운 예술이기도 하다. 이게 내가 살면서, 또 몇 년간의 (자칭) 시네필로서 느낀 결론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 이외의 요소로 인해 삶이 결정된다는 걸 잘 안다. 이 요소가 전부는 아니더라도 절반쯤은 될 것이다. 근데 우리는 행복해진다. 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이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사실을 천천히 따라가는 예술이다. 현실과는 다르게 정해진 틀에서 보는 예술이다.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이 각자 다른 것처럼 우리는 다른 것들을 믿어 행복해진다. 어차피 불행할 것이라는 걸 다 알면서도.
그러니까 너무 애쓰지 말자. 지금을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우리에겐 정말 좋을 것 같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우리 스스로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그것도 우리의 극히 일부분에 대해서만 안다. 근데도 어찌어찌 살아진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자아의 특성은 반대로 생각하면 모르는 것 투성이에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다니!로 귀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유. 우리는 모든 것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고 이 예술은 이것을 너무나 훌륭하게 구현해낸다. 특히 <하나 그리고 둘>이란 작품은 삶을 통제하는 것이 아닌 흘러가는 대로를 보여주며 삶의 본질을 그려냈다. 우리는 우리의 뒷모습을 애초부터 볼 수 없다. 근데 뒷모습을 볼 수 없어 행복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반쪽짜리 진실에 목 메달 필요 없다. 아니, 우리는 반쪽짜리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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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은 약사에게, 멀티버스는 '스파이디'에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파이더 우먼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살면서 가족도, 친구도 잃은 '그웬 스테이시'(헤일리 스타인펠드). 그녀는 다른 평행세계의 스파이더맨이자 유일한 친구인 ‘마일스 모랄레스’(셔메이크 무어)를 그리워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빌런과 싸우던 그웬. 그녀는 또 다른 스파이더맨 '미겔'(오스카 아이작)과 '제시카(이사 레이)'를 만나고, 그들에게 합류해 우주를 넘나드는 빌런과 싸우기로 결심한다.
마찬가지로 그웬을 그리워하며 하루를 보내던 마일스. 그의 앞에는 자기도 의도치 않게 만들어 낸 빌런 '스팟'(제이슨 슈워츠먼)이 등장한다. 스팟 덕분에 마일스는 그웬과도 재회한다. 그웬 역시 스팟을 감시하러 왔기 때문.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그들은 스팟을 쫓아 다른 우주로 이동하고, 수많은 스파이더맨을 만나면서 예상치 못한 우주의 균열을 마주한다.
스파이더맨의 멀티버스는 다르다
또 한 번 멀티버스다. DCEU의 마지막 작품인 <플래시>가 개봉한 지 일주일 만에 멀티버스 히어로가 또 등장했다. 2018년에 개봉했던 애니메이션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의 속편인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이하 <스파이더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플래시>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멀티버스는 이미 관심을 끌기 어려운 소재가 됐다. 평행 우주든, 다중 우주든, 평행 다중 우주든 상관없다. 비슷한 이야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과거나 현재를 바꾸려다가 다른 우주의 '나'를 만난다. 그 만남을 통해 현실의 '나'는 현재의 중요성을 배우고, 한층 성장한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기대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파이더맨'이니까. 수많은 우주의 스파이더맨이 한 데 만나는 사건인 '스파이더버스(Spider-verse)'는 멀티버스의 상징과도 같으니까. 전편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와 실사 영화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 멀티버스를 능숙하게 다룬 전력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스파이더맨>은 기대에 완벽히 부응한다. 북미에서 개봉 9일 만에 2억 달러를 돌파하는 흥행을 기록한 이유를 제대로 보여준다. 멀티버스를 소재로 삼은 최근 히어로 영화 중 가장 뻔뻔하고, 감각적이며, 통쾌한 데다가 감동적이다. 마치 멀티버스를 다룰 줄 아는 셰프는 '스파이디' 밖에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멀티버스라는 공식을 깨부수다
멀티버스 영화는 대체로 비슷한 공식을 따른다. MCU의 피터 파커도, 닥터 스트레인지도, 완다 막시모프도, 가장 최근에 공개된 플래시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 주인공은 과거나 현재의 특정 사건을 바꾸려는 욕망이 가득하다. 하지만 멀티버스를 경험하면서 한 가지 가르침을 깨닫는다. 인생에는 필연적인 지점이 있으며, 그 사건이 현재의 나와 우주를 만들었다는 것. 운명에 순응하고 현실을 열심히 살아가는 게 최선이라는 것.
얼핏 보면 <스파이더맨>도 다르지 않다. 다른 차원의 스파이더맨인 미겔 오하라의 존재가 대표적이다. 그는 '스파이더맨 소사이어티'라는 팀을 결성해 차원을 넘나드는 빌런을 체포한다. 그들이 우주의 균형을 무너뜨리기 전에. 특히 그는 '공식설정 사건(Canon event)'을 수호하려 애쓴다. 모든 스파이더맨은 삼촌처럼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는 가족, 그리고 가장 가까운 경찰서장을 잃어야만 한다. 그의 신념은 확고하다. 미겔 본인이 공식설정 사건을 바꾸려다가 가족을 모두 잃는 가슴 아픈 경험을 했으므로.
그래서 그는 마일스를 질책하고, 통제하려 든다. 전편에서 마일스가 차원 이동기를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 차원을 넘나들며 우주의 균형을 위협하는 빌런 스팟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마일스가 '스파이더 인디아'(카린 소니)의 우주에서 싱 경감을 구한 것도 문제다. 스파이더맨과 가장 친한 경찰서장이 죽어야 하는 공식설정이 깨졌으므로.
공식대로라면 마일스는 이쯤에서 변해야 한다. 자기 행동이 미성숙하다고 반성해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를 살릴 수 없더라도 우주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가슴이 아프더라도 정해진 운명을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 <스파이더맨>은 공식을 거부하고, 과감하게 반기를 든다. 마일스는 미겔에게 말한다.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고, 무슨 일이든 처음은 있다고.
무슨 일이든 처음 있다
<스파이더맨>은 마일스의 선택에 힘을 싣는 반전도 선사한다. 미겔은 고집불통인 마일스에게 숨기고 있던 진실을 알려준다. 전편에서 방사능 거미에 물려 스파이더맨이 된 마일스. 알고 보니 그 거미는 지구-42라는 다른 우주에서 넘어온 것으로 밝혀진다. 즉, 본래 마일스는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그는 존재부터가 우주를 파괴할 수도 있는 원인인 셈이다.
이에 마일스는 미겔과는 반대로 행동한다. 애초에 스파이더맨이 될 운명이 아니었던 자기가 스파이더맨이 됐다면, 공식설정을 따라야 할 이유도 없다면서. 그래서 그는 이틀 뒤면 경찰서장으로 진급해 죽을 운명인 아버지를 구하러 간다.
"내 이야기는 내가 쓸 거야!"라는 마일스의 결심은 <스파이더맨>을 독보적인 영화로 거듭나게 하는 1등 공신이다. 앞서 봤듯이 멀티버스 영화에는 어느 정도 고정된 틀과 스토리가 있다. 그런데 이를 전면에서 부정한 결과 강렬하면서도 색다른 쾌감에 빠져들 수 있다. 모두가 운명 앞에서 겸손해지고 무거워지는 가운데 유일하게 반기를 드는 영화니까.
마일스의 결단은 멀티버스를 통해 더욱 확장된다. 그웬은 공식설정을 따르지 않을 이유를 찾아낸다. 경찰서장인 아버지가 경찰을 그만뒀는데도 공식설정이 어긋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웬. 그녀는 전편에서 한 팀이었던 스파이더맨들을 모아 마일즈를 돕기로 결심한다. 새롭게 등장한 스파이더펑크, '호비'(대니얼 칼루야)도 인상적이다. 그는 마일스와 그웬을 알게 모르게 도와주며 펑크록에 심취한 아나키스트 스파이더맨다운 활약상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마일스의 정체를 한 번 더 비틀어서 충격을 선사하는 결말도 인상적이다. <스파이더맨>은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을 연상시키는 클리프 행어로 마무리된다. 그 덕분에 3편인 <스파이더맨: 비욘드 더 유니버스>에 대한 기대치는 한껏 커진다. 결말만 놓고 보면 2023년 영화 중 최고나 다름없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스파이더 그웬
숙명을 거부한 마일스의 선택은 그웬의 이야기를 만나 더 풍부해진다. 그들은 고집 센 부모님과 부딪힌다. 스파이더맨이 청소년 히어로의 대표주자라는 걸 고려하면 일종의 세대 갈등처럼 보인다. 마일스의 부모님은 그가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란다. 경찰서장인 조지 스테이시는 스파이더 우먼이 딸의 절친을 죽였다고 믿는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딸의 말은 무시한다. 그웬의 정체를 알게 되자 딸을 체포하려 들 정도다.
하지만 마일스와 그웬은 요즘 애들답다. 자신감과 쿨함으로 무장해 자기 꿈을 실현한다. 기존의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벗어나 역동적인 삶을 그려 나간다. 차원 이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 마일스. 자기 밴드를 만들고 싶어 하는 드러머 그웬. 그들은 스파이더맨답게 꿈을 이룬다. 마일스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 스파이더 인디아를 돕는다. 그웬도 마일스를 비롯한 다른 차원의 옛 동료들과 재회해 자기만의 밴드를 꾸린다.
두 거미 인간의 패기는 감동도 안겨준다. 그들이 아버지의 고집을 꺾을 때,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이 가득 느껴진다. 끝까지 자기 정체를 숨기던 마일스.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언제나 아들 편이라고 말해준다. 더 넓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격려한다. 조지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집에 온 그웬과 화해한다. 아빠는 경찰을 그만뒀고, 딸의 선택을 전적으로 믿는다고.
이처럼 다른 듯 보이지만 맥락과 함의는 같은 그웬의 이야기 덕분에 마일스의 이야기는 더욱 진해진다. 그들의 유대감이 로맨스 코드로 자연히 이어지는 재미도 있다. 또 투톱 주인공 수준으로 늘어난 그웬의 분량이나 비중도 자연히 납득된다.
주제에 충실한 볼거리와 스타일
전편보다 발전한 볼거리와 스타일도 <스파이더맨>만의 개성을 한 층 끌어올려 준다. 전편의 가장 큰 특징은 새로운 기법이었다. 픽사와 디즈니 스타일의 3D 애니메이션 트렌드를 거부하고, CG와 2D 애니메이션을 합성한 기법을 선보였다. 그라피티 스타일의 그림을 조합하고 프레임도 낮게 잡으면서 스크린으로 만화책을 보는 듯한 착각도 불러일으켰다.
이번에도 과감함은 이어진다. 스타일은 유지하되, 한 가지 변화를 꾀했다. 색채다. 역동적이고 화려한 그림체에 다양한 색감을 더해서 이야기의 분위기를 시각적으로도 환기했다. 그웬과 아버지의 대화 장면이 대표적이다. 부녀 관계가 경색되어 있을 때는 화면이 전반적으로 푸른빛이다. 하지만 부녀가 포옹을 하거나, 둘의 관계가 회복되는 순간 영화는 분홍이나 노란색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스크린 전체를 환하게 만든다.
이에 더해 스파이더버스의 스케일을 키웠다. 덕분에 영화 곳곳에 팬서비스가 빼곡하다. 게임 시리즈 속 스파이더맨, 레고 스파이더맨 등 온갖 스파이더맨이 등장한다. 스파이더맨 실사 영화 시리즈도 스파이더버스에 포함됐다. 일례로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과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 중 몇몇 장면이 영화에 직접 등장한다. MCU와 소니 스파이더맨 유니버스도 합류한다. 미겔은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속 사건을 언급하고, <베놈> 속 조연인 첸 부인도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음악도 계승했다. 'Sunflower'나 'What's up danger' 같은 블랙 뮤직을 이번에도 적극 활용했다. 특히 메트로 부민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해서 OST 간의 통일성이 높아졌다. 대니얼 펨버턴이 1편에 이어 참여한 스코어도 인상적이다. 드럼이 인상적인 그웬의 테마를 적극 활용해 영화에 신선함을 불어넣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한계
다만 애니메이션이라서 남는 아쉬움도 있다. 길다. 러닝타임이 140분이다. 전편에 비해 23분가량 늘어났다. 그러다 보니 특히 그웬과 마일스의 가족 이야기가 중심인 초중반부가 상대적으로 지루하다. 후반부에 몰아치는 액션과 허를 찌르는 전개로 만회하려 하나, 길다는 인상 자체를 지울 수는 없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 영화 러닝타임도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화려한 그림체도 종종 어지럽게 보인다. 특히 액션씬은 호불호가 갈릴 만한 여지가 있다. 프레임이 자주 끊기고 스파이더맨들의 그림체가 제각기 다르다 보니 정리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다. 이에 더해 1편의 임팩트를 넘어서는 OST가 없어서 약간의 아쉬움도 남는다.
마지막으로 수많은 스파이더맨이 소모된다. 잠시 엑스트라로 스쳐 지나가다 보니 스파이더맨 하나하나의 임팩트는 크지 않다. 미겔과 제시카 드루 정도가 예외일 뿐이다. 모든 스파이더맨이 특유의 매력을 발산한 전편에 비하면 아쉬움이 크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아니다. 호불호와 취향의 영역이라서 영화의 완성도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독보적인 성취는 모든 아쉬움을 달래고도 남는다. 과감한 스토리텔링, 신선한 스타일, 팬 서비스와 세계관 연계까지. 이보다 완벽한 중간 다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1편인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는 놀라운 기록을 써 내려갔다. 2019년 골든글로브 최우수 애니메이션상,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석권했다. 평가에 비해 흥행이 조금 아쉬웠다. 국내에서는 관객 70만 명을 겨우 넘겼다. 그래도 북미 약 1억 9,000만 달러, 월드와이드 약 3억 8,4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다.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의 흥행 성적은 이미 전편을 뛰어넘었다. 벌써 북미 2억 달러, 월드와이드 4억 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니 궁금하다. 과연 국내에서는 어디까지 질주할 수 있을지, 시상식 시즌에는 또 어떤 뉴스를 들려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Outstanding 출중함
정점에 다다른 스파이더버스의 황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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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즈의 황홀함 속으로
재즈의 황홀함 속으로
영화 리뷰 <블루 자이언트>
감독] 타치카와 유즈루
출연] 야마다 유키, 마미야 쇼타로, 오카야마 아마네
시놉시스] “세계 최고가 될 거야, 반드시” 언제나 강가에서 홀로 색소폰을 불던 고등학생 ‘다이’는 세계 최고의 재즈 플레이어에 도전하기 위해 도쿄로 향한다. “실력이 안 되면 같이 안 할 거니까” 우연히 재즈 클럽에서 엄청난 연주 실력을 뽐내는 천재 피아니스트 ‘유키노리’를 만나 밴드 결성을 제안하고, “나도 드럼을 칠 수 있을까?” ‘다이’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평범한 대학생이던 ‘슌지’가 열정 가득한 초보 드러머로 합류하면서 밴드 ‘JASS 재스’가 탄생한다. “전력을 다해 연주하자! 분명 전해질 거야” 목표는 최고의 재즈 클럽 ‘쏘 블루’! 10대의 마지막 챕터를 바친 JASS 재스의 격렬하고 치열한 연주가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스포일러 유의#
선이 강조되는 작화
영화 블루 자이언트는 3D 애니메이션이 주름잡는 이 영화 세계에서 2D의 매력을 아주 강하게 내뿜고 있는 작품이다.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아주 강하게 받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생동감 넘치는 재즈의 모습을 만화 속에서 볼법한 날카로운 작화로 그 쨍한 재즈의 느낌이 더욱 배가 될 수 있었다. 이 작품이 3D로 제작됐다면 이런 강렬한 느낌은 받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영화 블루 자이언트는 기승전결이 매우 뚜렷한 작품이어서 그 뚜렷함이 2D인 만화적인 작화가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간감과 양, 질감이 잘 드러나는 3D였다면 영화가 전달하고자 했던 ‘날카로움’이 강력하게 관객에게 전달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선이 강조되는 만화적인 작화를 통해서만 용인이 되는 그 감성이 마지막 클라이막스 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고, 피아노와 색포폰, 드럼의 활기와 리듬감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토록이나 전율을 주는 재즈라니
재즈는 사실 클래식과 달리 정박에 박자를 맞추지 않아서 실제 치는 사람의 곡 해석과 즉흥연주에 따라 많이 갈리는 편이다. 그래서 세부 장르도 너무 다양하고 마이너한 취향으로 대변되고는 한다. 하지만 영화 블루 자이언트 속 주인공 JASS는 그런 어려운 재즈가 아닌 사람들이 그저 좋아하고 열광할 수 있는 재즈 그 자체를 살리기 위해 연주를 한다. 어려운 기교, 세부 장르에 갇히지 않고 그저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장르로 거듭나야 한다는 게 앞으로 재즈 연주가가 가져야할 미덕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세계 최고의 재즈 연주가를 꿈꾸는 다이는 세계 치고의 의미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연주가라고 말한다. 그런 그의 열정이 전해져서 일까. 엘리트주의였던 유키노리와 음악의 음도 모르던 슌지의 마음을 움직이며 JASS라는 한 팀을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연주하는 재즈는 날서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적어도 열정의 불씨를 마음에 새겨주는 연주를 한다. 필자 역시 영화를 보는 내내 저렇게 열정적인 다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갔었다. 그들이 연주하는 재즈에 그들의 노력과 감정이 다 드러나다 보니 2시간 내내 재즈를 들으며 환호하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재즈를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접하는 사람이더라도 재즈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는 작품이 되지 않을까 싶다.
재즈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영화 블루 자이언트에서 만나볼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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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진 도형을 넘어 선
DIRECTOR. 소마이 신지
CAST. 타바타 토모코, 사쿠라다 준코, 나카이 키이치 외
SYNOPSIS.
화목한 가정을 자부하던 6학년 소녀 렌
어느 날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이혼을 선언했다.
“나는 엄마 아빠가 싸워도 참았어 근데 왜 엄마 아빠는 못 참는 거야?”
엄마가 만든 ‘둘을 위한 계약서’도 싫고 친구들이 이 사실을 알아챌까 두렵다
“엄마, 부탁이 있어 이번 주 토요일 비와 호수에 가자”
몰래 꾸민 세 가족 여행 엄마 아빠와 다시 함께 살 수 있을까?
POINT.
✔️ <태풍클럽>으로 뒤늦게 국내 시네필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있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작품. 아마 이 이유만으로 이 작품을 고른 분들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 공간이 흥미롭고 매력적으로 그려진 영화
✔️ 1993년 당시 46회 칸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으로 선정되었고, 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복원영화로 상을 받았습니다.
✔️ 주인공 렌의 똑똑하고 주체적인 모습이 눈에 띕니다. 개인적으로는 <비밀의 언덕> 명은이와 소개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둘 다 보통 어린이가 아니니 언니동생으로 잘 지내보거라...
✔️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영화의 주요 내용이 서술되어 있는 글입니다.
도형을 이루는 최소 선의 개수는?
정답은 세 개다. 점 또한 자체의 도형이기는 하지만, 선을 여러 개 연결해 닫힌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이 최소 세 개가 필요하다. 이 중 선이 하나라도 빠지면 그건 더 이상 도형이 아니다. 남은 두 선은 그저 어떤 지점에서 만난 두 개의 선이 된다. 마치 엄마와 아빠가 이혼하고, 아빠가 집을 나가고, 엄마가 나름대로 애쓴다고 작성한 '둘을 위한 계약서'가 도무지 가족적이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렌의 상황처럼.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고군분투하는 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지만 이등변삼각형의 두 면은 서로 대화도 하지 않고 소스 병에 손 닿는 것조차 꺼린다. 두 사람의 꼭짓점은 날카로운 예각을 그리고, 그 맞은편 선에서 대화를 이어가려 애쓰는 렌의 말들은 도무지 그 예각에 닿을 수가 없다.
렌은 계속해서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강조하고, 심지어 아빠의 이사 당일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방해하지 말라"고도 소리치는데, 정작 아빠에게 하는 인사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코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다. 아빠에게도 재차 엄마가 보고 싶은지, 집에 가고 싶은지 묻는 렌의 말은 사실 '답정너'에 가까운 질문이다. 렌의 언어는 자신이 배워 온 (정상가족의) 세계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소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 렌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을 때에는 렌의 선택권이 반영되지 않았는데, 이루어진 가족이 해체될 때조차 렌의 선택권은 반영되어 있지 않다. 렌의 소망을 들어주는 어른은 단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렌은 무능한 어른들을 대신해 달리고 또 달린다. 러닝타임의 상당분을 소요해, 영화는 달리는 렌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어쩐지 미덥다. 어른들은 그저 빈자리를 침묵으로 응시하고, 술잔으로 회피할 뿐이다. <태풍클럽>에서도 그랬듯, 소마이 신지의 영화에서 어른들은 또다시, 보호자로 기능하지 못하고 부재중이다.
부재중인 어른들과 주체적인 아이들의 세계
아이들의 세계는 반대로 다채롭다. 비록 어른들에게 학습된 '정상가족'의 세계를 답습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미 아이들에게 가득하지만, 그래서 이혼이나 조금이라도 '다른' 것이 있는 가정과 어떻게든 선을 그으려고 하지만, 선을 그으려는 감각 자체가 이미 그들이 내심 알고 있다는 증거다. 어른들의 세계는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정상가족'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걸. 하다 못해 엄마 아빠의 싸움에 가슴 덜컥해 본 경험이라도 있을 테니까.
아이들의 생명력은 슬쩍 지나가는 교실 장면에서도 빛난다. 교사가 잠시 잠들어 있는, 그래서 또다시 어른이 '부재중'이고 아이들만이 주체적인 생명력으로 와글와글 움직이는 교실에서. 어떤 아이는 대범하게 교사 얼굴에 장난을 치고, 어떤 아이는 그 시끄러운 교실에서 꼿꼿하게 코로 오카리나를 분다.
교실에서 렌은 (코로 오카리나를 부는 아이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단독자다. 가족 이야기도 스스로의 힘으로 서술하고, "내가 뭐라고 하든 내 맘"이라고 한다. 스스로 렌의 편이라고 하는 미노루의 존재도 렌이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에는 거울 속에 위치하고 있다. 마침내 렌이 단독자처럼 느껴지지 않는 장면은, 부모님의 불륜과 이혼을 거쳐 여기까지 전학 온 학생, 교실에서는 척을 졌던 다치바나와 장을 보고 자전거를 끄는 장면이다.
두 아이는 가족을 위해 장을 보고, 가족 걱정이 가득한 대화를 하며 자전거를 끌고 언덕길을 올라간다. 그 모습을 흔히 '가장의 무게' 혹은 '가족을 위한 숭고한 희생'으로 표현되는, 부모 세대가 겪을 법한 감정을 고스란히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갑자기 내리는 폭우처럼, 현실은 아이들의 세계에 쏟아온다. 부모의 변화는 아이들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있는 힘껏 생을 끌고 가려 애써도, 폭우처럼 쏟아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몸보다 마음이 웃자라 버린 아이들은 더딘 성장이 서럽다. 까치발도 모자라서 점프를 하면서 빨래를 널고, 엄마가 쓴 '둘을 위한 계약'을 찢어버리는 이상으로 렌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렌이 그동안 해왔던 말을 하나도 듣지 않은 듯한 부모는 뒤늦게,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며 나와서 이야기하라고 한다. 렌의 행동으로 부모의 침묵은 마침내 깨지고, 싸움이 시각화되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않는다. 결국 "이럴 거면 나를 왜 낳았냐"는 렌의 외침은 또다시 응답받지 못한다.
이것은 삼각형이 아니다
삼각형 테이블부터 해서 렌의 집안 풍경은 가족들의 관계와 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어 여러 모로 대단히 흥미로운데, 이 '욕실 사건' 전후로 가족들이 집안에서 빙빙 원을 그리는 것 또한 흥미로운 포인트 중 하나다. 삼각형과 원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중심점을 가진다는 것, 그리고 서로의 접점이 존재한다는 것, 어떤 지점을 짚으면 그 자리에서 도형으로 뻗어나가는 선의 길이가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특징이 렌의 집안에서는 산산이 깨져 있는 것이 보인다. 더 이상 이 도형은 삼각형이 아니다.
한 번에 깨지는 것도 아니고 마치 깨진 유리를 자근자근 밟듯이, 계속해서 깨지고 또 깨진다. 렌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내민 손길들이 모두 다 거절당했다는 의미다. 낡은 기린 인형도, 심지어 렌이 야심차게 준비한 호수 여행에서 엄마와 아빠가 하는 말들도.
결국 함께 하려던 여행은 각자 제각각의 여행이 된다. 렌은 여행 기간 동안 엄마와도 아빠와도 짧은 대화를 나누지만, 같은 높이에 서지도 못하는 (아빠와는 제방의 위아래에, 엄마와는 다리의 위아래에) 상황에서 나눈 대화는 그동안 이미 이 도형이 깨졌다는 것을 확인하는 대화로 끝날 뿐이다.
결국 렌은 꿈꿨던 것처럼 엄마아빠와 불꽃놀이를 보며 "단란한 가족의 시간"을 보내는 데에 실패한다. 대신 아들이 죽었다는 노인의 가족을 만나 하루를 함께 보내고, 그 끝에 늘 뛰어다니던 운동화 대신 낯선 게다를 꿰어 신고 뒤뚱뒤뚱 걸으며 혼자 밤을 보내게 된다. 다소 주술적인 냄새마저 풍기는 렌의 그 밤은 어쩌면 일종의 성인식, 마치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수준의 의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붙은 짚을 돌리느라 안전모를 쓰고 물을 끼얹어 가며 버티는 사람들을 거쳐, 혼자만의 호숫가이자 불가인 곳에 다다른다.
깨진 도형을 두고, 혼자만의 선으로
성장의 필수 조건은 상실이다. 성장의 교과서 같은 영화 <인사이드 아웃>만 봐도 라일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빙봉을 잊고, 유니콘 장난감에 대한 애정도 여러 감정 안에서 퇴색된다. 렌의 경우에는 라일리를 비롯해 '정상가족' 안에 있는 경우에 비해 더 큰 것을 잃었지만. 밟고 선 세계의 면이 깨지고 흩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그 균열을 피하려 부지런히 달렸지만, 끝내 이미 깨진 도형의 면이 상실되었음만 깨닫고 만다.
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온전한 홀로 됨을 축하하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길에서 엄마와 렌의 구도는 호수로 향할 때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렌은 아주 다른 인물이 되어 있다. 렌은 더 이상 깨진 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도형의 구성 요소가 아니라, 온전히 스스로 뻗어 나가는 선이다. 수많은 선들과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수직의 각으로 만나기로 할 것이며, 어떤 선과는 평행을 감지하며 뻗어갈 선. 웃자라야만 했던 렌의 시간이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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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개 속에서 찾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인스타그램을 뒤적이다가 영화 관련한 피드에서 영화 <미스트>의 결말이 최악의 반전이라며 평 남긴 것을 보고 궁금해서 보기 시작한 영화 <미스트>. 그런데 정말 결말은 최악이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봐야할 작품이었다. 영화 자체를 못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최악이라는 결말이 칭찬인 그런 영화였다.
영화 <미스트> 시놉시스
당신이 알던 세상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평화로운 호숫가 마을 롱레이크, 어느 날 강력한 비바람이 몰아친 뒤, 기이한 안개가 몰려온다. 데이빗은 태풍으로 쓰러진 집을 수리하기 위해 읍내 그의 어린 아들 빌리와 옆집 변호사 노튼과 함께 다운타운의 마트로 향한다. 하지만 데이빗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는 도중 동네 노인이 피를 흘리면서 “안개 속에 무언가가 있다!!” 뛰쳐 들어왔다. 마트 밖은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정체 불명의 안개로 뒤덮혔고, 정체불명 거대한 괴생물체의 공격을 받는다. 마트 안에는 주민들과 데이빗, 그의 아들 빌리가 고립되었고, 지금 밖으로 나간다면 모두 죽는다는 미친 예언자가 그곳을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다. 몇 시간 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괴물들의 등장으로 목숨의 위협을 받고, 살기 위해 살아 남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한다. 과연 그들 앞에 펼쳐진 것들은 인류의 재앙일까? 그곳에서 그들은 살아나갈 수 있을까?*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미스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괴물이 어떻게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실 웬만한 SF영화를 보다보면 그 괴생명체 혹은 문제의 원인이 어떻게 발생했고 이를 어떻게 해결해나가는지 명확한 설명이 되지 않으면 도대체 이게 뭐지? 하는 감정이 든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았다. 영화 <미스트> 속에서는 이 안개의 원인과 괴생명체에 대한 출현의 이유는 군인을 통해서 짧게 설명된다. 하지만 그 해결과정에 대해서는 크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크게 의문을 품지 않았던 점은 이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의미를 굉장히 잘 풀어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SF적 요소를 활용하고는 있지만 주제 자체가 SF의 미래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과 혼란한 시대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다룬 내용이다보니 SF적 요소에 대한 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화의 몰입에 전혀 방해가 되는 않았다. 여기서 깨달은 점은 주제를 확실히 전달하고 그 메인 테마를 밀도감있게 풀어내는 것이 관객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예측가능한 종교에 매달리는 사람들
종교를 믿지 않는 나로써는 영화 중반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맹신과 예언에 몰두하기가 힘들었다. 그리고 상당히 불편했다. 그럼에도 영화를 끝까지 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설득의 과정이 굉장히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미친 여성의 헛소리에 불과했던 말들이 그저 사이비라고 생각했던 말들이 의도치 않 하나 둘씩 맞아 떨어지면서 가망이 없어 보이는 미래에 여자의 말대로 벌어지는 현재 속에서 그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혼란하거나 개인이 너무나도 힘들 때 도대체 왜 종교에 귀의를 하는 것일까 궁금했었는데 영화 <미스트>에서 조금 그 의문이 해결됐던 것 같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부분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서 변주가 들어가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당장의 현실 속에서 종교와 같은 교리는 나름의 예측가능성을 선산한다. 교리에 따르면, 성경에 따르면 현재우리는 어느 위치에 있고 다음은 이럴 것이다 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예측가능성에 대한 선호를 바탕으로 위기 상황에서 종교에 귀의하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을 굉장히 잘 표현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종교를 믿지 않는 저를 이렇게 설득할 수 있을 정도면 말이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대하여
영화 <미스트>를 최악의 결말과 반전이라고 평하는 이유는 막판 5분에 다 담겨있다. 종교에 다 홀려버린 사람들과는 분리를 선언하며 데이빗은 아들과 일부 사람들과 함께 자동차를 타고 최대한 갈 수 있는 곳까지 안개와 괴물을 피해 달려간다. 하지만 안개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ㅚ물을 어디서 나올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계속 앞으로 향해 달려나가던 차는 결국 연료가 모자라 멈추고 만다. 뒤에서는 괴물이 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고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괴물에 잡아 먹히거나 현재 가지고 있는 총으로 자살을 하는 방법 밖에 없다. 괴물에 잡아 먹히거나 현재 가지고 있는 총을 자살을 하는 방법박에 없다. 하지만 차에 탄 인원은 5명, 탄환은 4개. 데이빗은 결국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자신은 괴물에 잡아먹히는 것을 선택한다.
그렇게 괴물에게 소리를 지르며 발악하는 순간 데이빗의 눈에 목격된 것은 서서히 걷혀가는 안개와 상황을 정리하러 온 군부대였다. 조금만 기다렸다면 모두가 살 수 있었지만 극심한 공포와 미래는 이제 없다는 낙심은 죽음만이 방법이라는 결정을 내리게 만들었다. 이렇게 허탈하고 허망한 반전을 보면서 인간은 정말 한 치 앞을 보지못한다는 사실과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는 미래를 낙담하며 안좋은 선택을 하게 된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굉장히 잘 풀어낸 비극적인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 <미스트>는 보는 내내 종교와 인간 본성에 대해 굉장히 철학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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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디 (2021)
* 이 리뷰는 영화 <웬디>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영화 <웬디> 정보
감독: 벤 자이틀린 (대표작: 비스트)
출연: 데빈 프랑스, 야슈아 막, 개빈 나퀸, 게이지 나퀸
장르: 드라마
상영시간: 111분
개봉일: 2021.06.30 예정
피터팬 속 웬디의 재해석
시골 마을에서 식당일을 하는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어린 소녀 "웬디". 엄마의 식당 일을 도와주는 착한 아이이지만, 학교와 식당 일을 오가는 반복적인 삶에 바깥 세상과 새로운 모험에 궁금증을 품는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유령 기차와 함께 신비함을 품은 자유분방한 소년 '피터'가 웬디 앞에 나타나고, 웬디는 쌍둥이 오빠 "더글라스"와 "제임스"와 함께 뜻밖의 여정을 떠난다.
무작정 기차에 몸을 싣은 웬디와 오빠들은 피터를 따라 바다를 건너 웅장한 화산이 있는 황량한 섬에 도달한다. 무인도 같은 섬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고는 피터와 몇몇 흑인 아이들, 그리고 몇 년 전 웬디가 살던 마을에서 사라졌던 '토마스' 뿐이다. 오직 아이들 뿐인 이곳은 늙지 않고 영원히 어린 아이로 살아가는 공간, 즉 동화 속 '네버랜드'다. 이곳에서 수장인 피터에 대한 믿음을 잃고, 슬픔과 현실적 감각이 머릿속에 드리우는 순간 급격히 늙어버리고 만다. 판타지 같은 공간에 쉽게 적응하며 하루하루의 모험을 헤쳐 나가는 웬디와 형제들 앞에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네버랜드의 이면이 밝혀진다.
해체주의 수준의 원작 변형
디즈니 동화 속 <피터팬>을 재해석한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원작과 비교했을 때 영화 <웬디>는 외면적으로 딴판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피터팬'은 귀여운 초록색 의상에 짓궃은 장난기가 묻어난 순수한 소년의 모습이다. 하지만, 본작에 등장하는 '피터'는 캐릭터 설정부터 흑인 소년으로 바뀌었고, 성질 또한 포악하고 독선적이다. 동화 속 '네버랜드'로 비춰지는 섬의 자연 경관 또한 늙지 않는 어린 아이들의 동심으로 채워진 순수한 판타지의 공간으로 보기 어렵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은 아이들에게 위험천만한 순간들을 제공하고, 아이들은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시종일관 꾀죄죄한 모습으로 생활하며 생존을 위한 아이들의 의식 또한 잔혹하고 과격하다. 동화 속에서 한껏 포장되었던 '네버랜드'의 장면을 현실로 가져왔을 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셈이다. 사실상 '피터'와 '웬디'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가 <피터팬>과 관련된 작품이라는 것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을 것이다.
수동적이었던 웬디의 변화
<웬디>는 2021년 작품인만큼 PC한 요소들을 가미하며 원작의 형태에 변화를 주었다. '피터'가 흑인 소년으로 바뀐 것도 시대적 반영의 산물이며 원작에서 수동적인 여주인공으로 그려졌던 '웬디' 또한 능동적인 여성상으로 변화했다. 원작에서는 피터가 후크 선장에게 납치된 웬디를 구출하지만, 본작의 웬디는 누군가의 도움이나 구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등장인물 중 가장 능동적이고 앞장 서서 움직이는 인물이며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피터에게 진정한 성장과 모험의 의미를 일깨워준다. 시종일관 용감하고 씩씩한 소녀의 모습으로 그려진 '웬디'라는 캐릭터에 어느 정도 페미니즘적 요소가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구형의 인물상을 현 세대에 맞게 적절한 변화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자의식 과잉에 묻힌 화려한 CG
촬영과 편집에 굉장히 힘을 준 영화다. 인물들의 대화나 서사보다는 휴화산이 있는 섬을 배경으로 신비로운 자연의 배경을 조명하는데,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과 같은 심오한 느낌을 선사한다. 피터와 아이들이 '어머니'라고 믿는 심해 속 미스터리한 생명체를 중심으로 화산재로 뒤덮인 섬나라의 참상, 공포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바다와 해저 동굴 등 여러 자연적 요소들을 활용하며 메타포로 삼음으로써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이러한 메타포들이 자연스럽게 극에 녹아들었다기 보다는 겉보기에만 그럴 듯하게 포장한 느낌이 강하다. CG로 멋지고 광활한 자연 경관의 모습을 구현해 관객을 압도하고 싶은 의도가 컸던 나머지 다양한 메타포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그저 장치들의 나열에 불과하달까. 작품을 보면서 영화를 감상한다기 보다는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 것 역시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한다.
마음에 와닿지 않는 주제의식
외형적으로, 그리고 캐릭터의 성격 면에서 변화를 주었음에도 주제의식 측면에서는 원작의 메시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른들에게는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동심과 상상력을 일깨워주고 그와 동시에 하루하루 늙어가는 게 덧없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제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어른들에게 와닿을 만한 감정선을 형성하는데는 실패한다. <웬디>는 철저하게 아이들을 위한 꿈과 동화에 초점을 맞추며 어른들은 차마 공감할 수 없는 방향으로 스토리를 이끈다. 잔혹한 피터는 늙어가는 제임스의 손을 가차없이 자르고,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어머니라 믿는 아이들의 신념은 지극히 위험하고 맹목적으로 비춰진다. 현실적인 비주얼로 그려진 '네버랜드'에는 그림 같았던 낭만과 행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런 장면들에서 해방감과 자유를 느낄지 몰라도, 어른의 시각에서는 퍽 답답하기만 하다. <웬디>가 시사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함에도 감정적으로는 이입이 되지 않아 이내 공허함과 지루함만이 남는다. 어른들이 기억 속에 남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 거칠고 현실적인 모습이 반영된 그림의 형태가 아니었기에 영화는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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