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8-18 10:33:10
[JIMFF 인터뷰] 운명처럼 찾은 제천
'오늘의 장내' 이호현 감독 인터뷰
운명처럼 찾은 제천, 영화 '오늘의 장내' 이호현 감독 |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충청북도 출신 혹은 지역에서 활동 중인 제작자가 만든 제천을 배경으로 한 영화 4편을 ‘메이드 인 제천’ 부문으로 선정하였다. ‘오늘의 장내’는 4편 중 유일한 장편영화로,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코믹하면서도 극적으로 담아내었다. 지난 8월 15일, 하소생활문화센터 산책에서 ‘오늘의 장내’의 이호현 감독님을 만나 영화에 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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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메이드인제천’ 부문에선정었는데, 소감한말씀부탁드립니다. 저는 이전부터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이게 영화 음악이 아니라서 출품할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요. 이 작품을 제천에서 촬영하게 되고, 출품할 영화제를 찾아보던 중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 ‘메이드 인 제천’ 부문이 있음을 알게 되었죠.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감사한 생각입니다.
영화의 배경을 제천으로 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장소만이 가진 고유의 캐릭터가 있다고 생각해서 시나리오를 작성할 때 어떤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설정하는데요. 예전에 제천에서 조수 생활을 하면서 머문 적이 있었어요. 너무나 깔끔하게 정돈된 수도권의 배경들이 아닌, 세월이 묻어나 있는 건물, 제천이 갖고 있는 역사가 이 영화와 맞는다고 생각해서 제천을 영화 배경으로 선택했습니다.
이 영화에서 상은이는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을 연기하면서 시작해요. 무슨 의미인지 궁금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인트로 장면을 쉽게 썼었어요. 하나와 전화 통화를 하며 버스를 내리는 장면으로 썼는데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게 들어간 거 같아 고민했죠. 상은이와 딱 맞는 장면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고민하던 중 ‘오디션’이라는 소재가 생각났어요. ‘상은이가 어떤 대본을 갖고 오디션을 볼까?’ 상은 역할의 지홍 배우와 함께 계속 고민하다가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과 오늘의 장내 ‘상은’이가 닮아있다고 생각해 쓰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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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 크래딧에 나오는 ‘그곳’ 이라는 곡을 직접 작사하셨어요. 건방진 생각일 수 있는데, 저는 영화 음악이 들어가지 않고 이야기의 힘만으로도 관객에게 메시지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화 음악을 아예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는데요. 음악 감독님을 만나 이야기를 하던 중 엔딩곡만큼은 이 영화를 대변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작사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관통할 수 있는 가사를 며칠 동안 고민해서 보내드렸어요. 음악 감독님이 마음에 드셨는지 제 가사를 보고 5분 만에 데모를 보내주셨어요. (웃음) 남자 보컬의 목소리를 얹으니, 마치 상은이가 부르는 것 같더라고요.
등장인물이 상영, 상일, 상이, 상삼까지 있는데 왜 상은이만 ‘상은’일까요? ‘상은’이라는 이름은 제 영화에서 항상 나오는 이름이에요. 매번 주인공이 아니어도 ‘상은’이라는 캐릭터는 항상 등장하죠. 저만의 재미입니다. 상은이라는 이름을 먼저 정하고 나머지는 돌림자를 생각해서 이름을 지었어요. 상영, 상일, 상이, 상삼 친구들과 달리 상은은 조금 사람다웠으면 하는..? (웃음) 나머지 사촌들과 다른 캐릭터라는 걸 말하고 싶어서 그렇게 지었습니다.
‘상은’이라는 이름은 감독님의 이스터에그인거네요. (웃음) 그러면 마지막으로 짐프 관객에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발리 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도 좋은 평을 많이 들었는데, 이번 제천에서 상영하며 한국 관객들은 어떤 반응일까 해서 긴장이 많이 되었어요. 너무 많은 분이 재밌게 봤다는 말씀을 해주셔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만약 이 영화를 보신다면 런닝 타임이 길지 않아 즐겁게 보실 수 있다고 확신해요. 제천 영화제에서 미처 못 보신 분들은 다른 영화제에서도 상영이 된다면 꼭 봐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죽음을 다룬 영화이지만 역설적으로 열심히 살고 싶어지는 영화,’ 오늘의 장내’. 비 오는 날 제천에서 관람하면 영화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을 덤으로 얻어갈 수 있다. 은근한 웃음과 파도치는 감동, 영화를 아름답게 매듭짓는 음악 ‘그곳’까지. 제18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는 이제 막을 내리지만 ‘오늘의 장내’가 주는 감동은 계속될 것이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김시은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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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승과 확장 사이 갈 길 잃은 정체성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왕이자 ‘블랙 팬서’인 '트찰라(채드윅 보즈먼)'가 갑작스레 서거하자 와칸다는 위험에 빠진다.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비브라늄을 탈취하기 위해 와칸다를 간헐적으로 공격하고, 천재 공학도 '리리 윌리엄스/아이언하트(도미니크 손)'가 만든 탐지기까지 활용해 세계 각지에서 비브라늄을 찾기 시작한다. 이에 '슈리(레티티아 라이트)', 라몬다(안젤라 바셋)', '오코예(다나이 구리라)', '음바쿠(윈스턴 듀크)', '나키아(루피타 뇽오)' 등 트찰라의 가족과 친구들은 제각기 와칸다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나선다. 한편, 마야 문명의 후예이자 해저 제국 '탈로칸'의 보호자인 '네이머(테노치 우에르타 메히아)'는 지상 국가들의 비브라늄 수색 시도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이에 심해에 은거 중이던 그는 지상 세계와의 전쟁을 결심하고, 같은 처지에 놓인 와칸다에 동맹이 되거나 전쟁을 각오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낸다.
대서양 바다 위, 와칸다의 거대한 전함이 나타난다. 와칸다의 도발에 발끈한 네이머와 탈로칸 전사들은 이내 전함을 포위한다. 거대한 물 폭탄의 폭발을 시작으로 전함을 차지하기 위한 공성전에 돌입한 와칸다와 탈로칸의 전사들. 바다를 헤엄치듯 하늘을 날아다니며 와칸다 병력을 도륙하는 네이머 덕분에 탈로칸 군은 조금씩 승기를 잡는다. 이에 질세라 슈리와 아이언하트도 피부로 호흡하는 네이머의 약점을 공략한다. 그들은 네이머의 피부를 말려 버린 후 역습을 가한다. 비브라늄을 가진 두 강대국이 전쟁을 펼치는 사이, 대서양은 처절하게 쓰러져 간 왕과 전사들의 피로 물든다.
<블랙 팬서>의 속편이자 MCU 페이즈 4의 마지막 작품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지상에 숨겨진 국가 와칸다와 심해에 숨겨진 문명 탈로칸의 거대한 전쟁을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간다. 그런데 막상 미국도 함부로 건들 수 없는 두 초강대국의 전쟁에서는 박력도, 비장함도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몰개성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트찰라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한 시도가 좀처럼 하나의 구심점으로 엮이지 않기 때문이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트찰라의 죽음으로 인해 새로운 사명을 마주한 인물들의 서사이고, 다른 하나는 와칸다와 탈로칸의 확장된 세계관이다. 전자는 시리즈를 이어갈 새로운 블랙 팬서를 소개하기 위함이고, 후자는 전편이 흑인 영화라는 정체성에 국한되어 있다는 한계를 깨기 위한 노력이다. 종합적으로는 트찰라의 존재감을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후계자의 성장을 통해 트찰라를 추모하면서도 블랙 팬서라는 영웅의 의미를 확대하는 것이다.
우선 영화는 트찰라의 죽음을 추모한다. 추모의 핵심은 계승이다. 트찰라가 남긴 유산을 어떻게 물려받을지가 관건이다. 사실 MCU 속 블랙 팬서는 언제나 복수와 밀접하게 연관된 히어로였다. <시빌 워>에서 테러로 아버지를 잃은 트찰라는 복수를 위해 윈터 솔져를 찾아 죽이는 데 혈안이었다. 그의 아치 에너미인 '에릭 킬몽거(마이클 B. 조던)'도 복수귀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자신을 버린 와칸다와 국왕인 트차카에게 복수하려 했다. 또 미국에서 성장한 흑인답게 인종 차별로 인한 피해와 억압을 되갚아 주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새로운 블랙 팬서로 거듭나는 슈리도 다르지 않다. 슈리는 트찰라의 병을 알아채지도 못했고, 인공 하트 허브를 만드는 데도 실패했다. 갑작스레 오빠와 사별한 이후로도 그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어머니 라몬다의 위로나 충고도 듣지 않은 채 왕실의 일원으로서, 또 잠정적으로 블랙 팬서의 후계자로서 주어진 책임을 외면한다. 그러던 그녀는 네이머의 테러로 어머니를 잃은 후에야 그간 거부했던 책무를 다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아픔과 상실감을 네이머에게 되돌려주기 위해서다. 직접 개발한 인공 하트 허브를 마신 슈리는 꿈속에서 어머니도, 트찰라도 아닌 에릭 킬몽거를 만난다. 세상을 파괴하겠다는 킬몽거의 야심과 슈리의 분노와 상실감이 향하는 방향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리는 결국 네이머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대신 그를 용서하고, 그와 동맹을 맺는다. 전편에서 트찰라가 남긴 메시지, 관용을 베풀 때 비로소 상실감이 치유된다는 유지를 마침내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블랙 팬서>는 복수심을 어떻게 승화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트찰라와 킬몽거는 흑인, 특히 미국 사회의 흑인들을 대변하는 캐릭터다. 그들은 피부색을 이유로 자신들을 차별한 세상에 복수할지 아니면 용서할지를 두고 격렬히 논쟁했다. 마치 마틴 루서 킹과 말콤 x가 대립하듯이. 이 맥락에서 트찰라는 한층 더 성숙해졌다. 그는 고립주의를 포기했다. 와칸다의 문호를 열고, 와칸다의 자원을 활용해 세상을 돕겠다고 선언했다. 킬몽거의 원한과 복수심에는 공감하되 보다 발전적인 방향을 찾아낸 것이다. 이는 킬몽거의 퇴장과 트찰라의 성장이 관객의 뇌리에 각인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슈리는 서로 다른 인물들의 입으로부터 트찰라의 유지를 전해 듣는다. 그녀의 가족과 친구들은 복수가 옳은 선택이 아니라며 끊임없이 그녀를 설득한다. 음바쿠는 네이머와의 전면전이 와칸다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 거라며 슈리를 말린다. 리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잃었던 라몬다도 딸이 복수심에 매몰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거라고도 덧붙인다. 나키아도 슈리가 환상 속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계속 물어보며 복수는 와칸다와 탈로칸 둘 모두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걱정한다. 슈리가 네이머에게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 순간에는 라몬다의 영혼이 직접 딸을 설득한다. 그 덕분에 슈리는 복수와 용서 사이의 갈등과 딜레마를 극복하는 데 성공하고, 진정한 블랙 팬서로 거듭나는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왜 161분에 달할 정도로 길어야 했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에게는 각 캐릭터의 세밀한 감정선을 충분히 묘사할 시간이 필요하다. 미처 풀어내지 못한 트찰라의 서사를 서로 다른 캐릭터에게 나누어주고, 그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의 유지를 계승하며, 더 나아가 그의 죽음을 추모하기 때문이다.
또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는 트찰라의 유산을 반복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복수가 아닌 용서를, 폭력 대신 연대를 선택해야 한다는 그의 유지를 한 걸음 더 발전시킨다. 그 중심에는 네이머와 탈로칸이 있다. 해저 제국의 등장 덕분에 <블랙 팬서> 시리즈는 단순한 흑백 차별 너머의 메시지까지 포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역사관을 비판하며 그 피해자들을 대변하고자 한다.
사실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국가들이 비브라늄을 탐내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몇백 년 전부터 반복되어 왔던 역사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금과 은으로 가득한 엘도라도를 꿈꿨고, 후추를 찾아 탐험을 떠났으며, 차를 사기 위해 중국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타 대륙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역사를 고려하면 와칸다와 탈로칸에 묻혀 있는 비브라늄은 아프리카, 아시아, 아메리카에 숨겨져 있던 금과 후추, 차 등과 다를 게 없다. 심지어 작중 탈로칸이 마야 문명의 후손이자 콩키스타도르에게 쫓겨난 피해자들이 세운 국가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덕분에 네이머는 단순한 빌런 이상의 매력을 뽐낼 수 있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만행을 두 눈으로 목격한 그에게는 지상 세계를 경계할 이유와 복수를 다짐할 당위성이 충분하다. 즉, 그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역사의 반복을 온몸으로 증명하는 캐릭터다. 따라서 그는 본질적으로 바닷속의 에릭 킬몽거나 다름없으며, 블랙 팬서의 아치 에너미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더 나아가 이는 미시적이면서도 동시에 거대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는 토대가 되어준다. 네이머와 슈리는 어머니를 잃은 후 복수심에 불타며, 서로 피 흘리며 싸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마야인과 흑인, 곧 소수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외부의 침략을 받았던 아픈 역사를 공유한다. 그래서 네이머와 슈리의 전쟁은 한 가정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소수 문명을 물들인 피의 역사이다. 또 와칸다와 탈로칸의 동맹이 트찰라를 향한 최고의 헌사인 이유이기도 하다. 용서와 연대의 정신으로 무장해 고립주의 노선을 포기한 트찰라의 비전이 실질적으로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전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모라는 핵심 메시지를 적절히 녹여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의 두 축은 좀처럼 하나의 영화로 연결되지 않는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MCU에 새로이 데뷔한 아이언하트가 스토리에 매끄럽게 녹아들지 못했다. 비브라늄 탐지기를 개발한 리리는 슈리와 네이머의 접점이다. 슈리는 리리를 보호하려 하고, 네이머는 리리를 죽이려 하면서 와칸다와 탈로칸은 충돌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아이언하트가 등장해야 할 이유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실 리리가 슈리와 네이머의 접점이 될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비브라늄 탐지기를 만들 만큼 뛰어난 공학자라면 그녀의 역할을 충분히 다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언하트가 클라이맥스 전투에서 눈에 띄는 활약상을 보여준 것도 아니다. <시빌 워>에서 블랙 팬서와 스파이더맨이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것과 명백히 대조를 이룬다. 그 결과 아이언하트의 등장은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고, 결과적으로 네이머와 슈리의 서사가 따로 노는 듯 보이게 된다. 리리 윌리엄스라는 캐릭터의 등장과 존재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보니, 그녀의 등장을 계기로 펼쳐지는 와칸다와 탈로칸의 서사가 긴밀히 엮이지는 않는 것이다. 네이머가 탈로칸의 역사를 설명하는 대목이 지나치게 길고 지루한 이유다.
두 번째로는 히어로 영화의 정체성이 약하다는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도 액션의 비중이나 퀄리티가 장르적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네이머의 와칸다 공격 정도를 제외하면 기계적으로 찍어낸 전투 장면이 있을 뿐, 개성적인 액션 시퀀스가 눈에 띄지 않는다. 와칸다와 탈로칸 군은 가상의 국가들이고 독특한 기술로 무장했지만 평범한 백병전으로 일관한다. 블랙 팬서에게 기대할 법한 동물적인 움직임도 잘 보이지 않는다. 배 한 척을 사이에 둔 전투가 양 국가의 총력전으로 묘사되는 것도 영화의 스케일에는 걸맞지 않다. 이에 더해 CG도 발목을 잡는다. 탈로칸의 경관을 보여주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바닷속이 지나치게 뿌옇고 흐릿해 건물이나 사람의 구분이 어렵다 보니 바닷속 강대국이라는 느낌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아쿠아맨>의 아틀란티스를 떠올려 보면 이는 충분히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사실 <블랙 팬서>가 흑인 영화로서의 메시지와 슈퍼 히어로 영화로서의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트찰라와 채드웍 보즈먼의 존재감이 결정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이야기가 트찰라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는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더 바라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헌사이자, 추모 영화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가 히어로 영화이자 액션 영화라는 정체성을 잃은 듯이 느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장르적 목표와 쾌감을 살려냈다고 보기 어렵다 보니,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 하나하나는 인상적이지만, '블랙 팬서'라는 히어로를 만난다는 느낌은 받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리오넬 메시가 떠난 바르셀로나 축구를 보는 것처럼. 결국 MCU의 페이즈 4는 트찰라와 채드윅 보즈먼이 떠나간 빈자리만 새삼 느끼며 아쉬움 가득하게 마무리된다.
P(Poor, 형편없음)
아무리 추모에 방점을 찍어도, 오프닝 로고가 최고의 장면이라면 분명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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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리함을 뽑내는 펭귄, 그리고 관심이 필요한 문어
귀여운 것에 환장하는 사람으로서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귀여운 영화를 보는 것이다. 그렇게 웨이브의 늪에서 귀여운 영화 마다가스카의 펭귄을 발견했다. 정말 처음부터 귀여운 펭귄들이 잔뜩 나와서 행복했고, 남극의 빙하 위에서 뒤뚱뒤뚱 걸어가며 생각없이 살아가는 펭귄들과 이 생각없음에 개탄하는 4총사 펭귄의 대치가 초반부터 굉장히 귀여워서 집중하면서 볼 수 있었다.
영화 마다가스카의 펭귄 시놉시스
넘치는 유머, 감쪽 같은 위장술, 똑소리 나는 브레인! 날 때부터 남달랐던 악동 펭귄 스키퍼, 코왈스키, 리코, 프라이빗! 어느 날 그들 앞에 복수심에 불타는 문어박사 옥토브레인이 나타나고, 그의 거대한 음모를 알게 된 펭귄 4총사는 비밀 조직 ‘노스윈드’와 함께 세상을 구할 사상 최대의 작전을 펼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마다가스카의 펜귄 스포가 존재합니다.
자그마한 관심도 못받던 문어의 발악
영화 마다가스카의 펭귄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관심받지 못한 문어가 열폭하고, 그 문어를 막기 위해 펭귄 4총사가 나서는 이야기다. 생김새만으로도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펭귄들과 달리 아이들에게 그리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지 못하던 문어 데이브는 이 모든 것이 펭귄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약물을 개발해 펭귄들을 세상에서 다 없애버리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그 기회가 실패로 끝나면서 문어 데이브가 좌절하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작아진 문어 데이브를 향해 한 아이가 하핫! 너무 귀엽잖아~ 이 한마디를 시전하자 데이브는 굉장히 행복해하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관심 한 번을 받지 못해 시작된 이 이야기. 어찌보면 사소한 관심이 막대한 범죄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마다가스카의 펭귄 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 특색을 잘 담아내다
문어 데이브가 세계 각지에 있는 펭귄들을 납치하면서 펭귄 4총사가 이를 막기 위해 문어 데이브를 뒤쫓는다. 그 과정에서 굉장히 여러 나라를 거치게 된다. 잠깐잠깐 등장하는 나라들이었지만 이탈리아면 이탈리아, 중국이면 중국 등 굉장히 해당 나라의 특색들을 잘 녹여내서 괜시리 여행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데이브를 따돌리며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추격전을 벌이는 모습에서는 베네치아의 가장 유명한 그,,, 배,,, 노래 불러주는 사공,, 뭐라 그러더라,,? 어쨋든 여유로운 베네치아의 모습과 상반되는 추격전이 대조되면서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뛰어난 능력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가장 멋있었어!
프라이빗은 다른 펭귄 스키퍼, 코왈스키, 리코보다 한참 어린 덕분에 사실 작전 수행을 하면서 큰 역할을 수행하진 않는다. 그래서 작품 중간쯤 프라이빗을 스피커에게 나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어!라고 말하지만 스키퍼는 지금 너가 맡은 역할도 중책이라며 어르고 달래서 쉬운 역할을 맡긴다. 하지만 그 역할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스키퍼를 당황하게 만드는 귀여운 프라이빗이다.언제나 막내일 것 같은 프라이빗이었지만 형들이 다 데이브 문어에게 잡혀가서 이상한 괴생명체로 변하는 약을 맞고 정신이 오락가락하자 일사분란하게 형들을 구하고 형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우리 프라이빗이 달라졌다!
자신의 몸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프라이빗은 자신을 희생하며 결국 모든 펭귄들을 구하는데 성동한다. 이 장면을 보면서 드래곤 시수가 생각났다. 가장 막내였기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세상을 구한 것은 막내였던 시수와 프라이빗이었다.
펭귄으로 좋아한다면, 작고 귀여운 펭귄이 얼마나 영리한지 알고 싶다면 영화 마다가스카의 펭귄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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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서울독립영화제 후기 (1)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하기.
12월 초는 압구정 cgv에서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와 함께했다. (11.30-12.8)
총 5편을 관람했다.
신생대의 삶(감독 임정환), 막걸리가 알려줄거야(감독 김다민), 세기말의 사랑(감독 임선애), 백탑지광(감독 장률), 그리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감독 하마구치 류스케)까지.
지나온 시간, 그리고 당시 느낀 생각들을 오래 붙잡아두고픈 마음이다.
관람작들에 대한 단상을 남긴다.
1. 신생대의 삶 ( 김새벽, 심달기, 박종환 배우_ 임정환 감독)
서울독립영화제 개막작. 독립영화계의 아이돌인 김새벽, 심달기, 박종환 배우가 나온다.
조금은 난해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 전개에 자꾸만 집중하게 된다. 영화 속 여러 이미지들이, 삶과 죽음이 맞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흐릿하고, 인물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거기에서 나오는 긴장감이 신선한 영화적 체험을 준다. 죽음 뒤에 바라본 삶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2.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박나은, 김희원, 박효주 배우_ 김다민 감독)
영화 속 주인공 '동춘'
지금까지 이런 영화는 없었다!
"엄마의 열성에 못 이겨 오늘도 학원 여러 개를 돌지만 그렇다고 딱히 아주 잘하는 것은 없는 우리의 피곤한 초등학생 어린이 동춘은 수련회장에서 막걸리 한 통을 줍고는 호기심에 집으로 가져온다."
‘동춘’ 역을 맡은 박나은 배우
막걸리와 페르시아어 수업, 그리고 모스부호를 통해 대한민국의 사교육 현실을 되짚어보게 한다. 참신한 이야기, 그리고 귀여운 아역배우가 영화의 재미를 더한다. 분명 웃긴데 웃을 수 없었다 (사실 웃었다)학원 뺑뺑이를 돌던 과거 내 모습이 생각났기 때문.
남들은 다 이런 거 공부하니까 너도 이런 거 해야 돼,남들은 다 이렇게 사니까 너도 이 정도는 해야 돼.
주변에서 자꾸만 부추기는 삶 속에서 주체성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막걸리를 든 채 줄을 선 아이들은 결국 해답을 찾았을까? 동춘이 (영화 속 주인공)가 지금은 조금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
3. 세기말의 사랑( 이유영, 임선우, 노재원, 김기리 배우_ 감독 임선애)
유쾌하고 희망차다.
2000년이 되면 지구가 곧 멸망한다는 등의, 여러 괴이한 소문이 나돌던 1999년에서 시작하는 영화. 상처를 가진 두 여성이 연대하여 서로가 서로를 구원한다. 내가 나 자신을 구원하진 못해도, 서로는 서로를 구원할 수 있다. 함께하는 삶 속에서는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보고, 조금 더 사랑해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다음 글에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백탑지광> 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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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가 가가?(그 외계인이 너가 말한 그 외계인이니?)
줄거리
서른 살의 홍지효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사실 외계인을 본다. 자신에게만 보이는 외계인이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애써 달래가며 살아가지만 도무지 평범하게 살 자신이 없다. 결국 지효는 동거를 앞둔 남자친구 '시국'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런데 이별을 고한 다음 날부터, 시국이 연락 두절이 되어 보이지 않는다. 지효는 시국의 마지막 위치를 추적해 한강 공원에 찾아가고, 그곳에서 외계인과 함께 우주선이 남긴 듯한 문양을 발견하게 된다. 자꾸만 주변에서 지지직거리는 전자기기들. 혹시 외계인이 납치해간 것은 아닐까?
지효는 큰마음 먹고 외계인을 연구하는 덕후 같은 모임에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감상 포인트
1. 1화에서 3화까지는 전개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아서 어떤 사람에게는 살짝 답답할 수도 있다.
2. 연기 구멍 없이 배우들 모두 연기력이 훌륭해서 소재에 비해 오글거리는 느낌 없이 볼 수 있다.
3. 장르가 단순 SF, 미스터리 라고 하기엔 여러 가지가 혼합된 형태다.
감상평
마지막 회차까지 보고 나서 바로 든 생각은, "왜?"라는 물음이었다.
보통 이런 미스터리물은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결말 부분에서는 그 궁금증이 해소되어야 하는데, 이 드라마는 많은 것이 축약된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인물의 개인적인 성장이나 인물 간의 갈등 해소 부분에서도 만족스럽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각각의 소재를 얼기설기 꿰맨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청첩장 돌리니까 되게 어른 같다."
"지효 씨도 어른이야."
지효는 누구보다 평범하게 살고자 노력했다. 모든 것이 적당한 때에 적당하게 이루어지는 듯했고, 무사히 정착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을 방해라도 하듯 야구 모자를 쓴 외계인은 지효의 삶에 깊이 침투해버리고 만다. 이윽고 지효는 자신이 여태껏 잘 싸매고 포장해온 것들이 일체 거짓임을 인정한다. 그리곤 진짜 자신의 모습이 무엇인지 고민하기에 이른다. 거기에서부터 지효의 성장은 시작된다.
시국이 자발적으로 떠난 것임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넘쳐나는데도 지효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일순간 평범하기를 포기한 지효는 몸을 사리기보단 점점 온몸으로 문제에 직접 부딪히며 대책 없는 싸움을 이어간다. 그러는 도중에 점차 지효의 내면은 단단하게 굳어간다.
지효가 자신이 쌓아온 모든 삶의 기반을 포기하면서까지 그토록 뛰어다녔던 것은, 내면의 결핍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진짜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이러한 모든 질문들을 뒤로 미뤘던 지난날들에 대한 자기반성이자 해답을 찾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인물은 비단 지효뿐만이 아니다.
사실 드라마 [글리치]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각자 이루지 못한 성장을 위해 움직인다.
시국도, 보라와 외계인 모임 사람들도, 지효의 부모도, 영기와 김직진도, 심지어는 호산나를 믿는 신도들도. 내면에 채워지지 않은 각자의 이상향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한 자신의 모습이든,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이든, 부모와 자식에 대한 애정이든, 친구에 대한 우정이든, 삶에 대한 위로이든.
보라는 자신이 찾아 헤매던 것의 답을 찾고자 한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함으로써 남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어쩌면 드라마 [글리치] 내에서 가장 확고한 답변을 얻어낸 것은 보라일지도 모르겠다. 보라는 이제 새로운 미지의 존재를 탐구한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의 이야기가 계속될 인물은 보라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시국에게 지효와 같은 외계인이 보이는 것은 아마 그들이 같은 형태의 결핍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기 때문이라 해석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안정되고 성숙한 어른이 되려고 했지만 결국은 헤어지고 만다. 스스로 어른이 되지 않고 타인에게 의존한 채로 어른의 형태만을 띠는 것은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효의 부모에 대해 '빈 둥지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언급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다. 자식에게 자신을 투영해 성공한 자식 즉, 성공한 자신을 만들고 싶었던 지효의 부모는 자식에게서 독립하여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가고자 한다.
우리들 모두가 내면에 성장하지 못한 자아를 하나씩 품고 살아간다. 드라마 [글리치]는 그 자아가 가진 불만을 해소해나가는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의 삶을 가치있게 만든다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여기서 '것 같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외계인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이미 드라마가 메시지를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 내면의 성장을 갈구하던 인물에게 외부의 존재가 실제로 존재했음을 밝혀버리는 것이야말로 그동안 쌓아온 탑을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일으켜 세운 것이 아닌, 외부의 힘을 통해 영원히 자립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 결말에 더욱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인물들이 스스로 성장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는가. 그 지점에서 실망한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현실에서 우리는 외부의 도움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도움일 뿐이다.
결국 내면의 자아가 성장하느냐 마느냐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모든 사진 출처 :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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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
*이 글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2024
감독, 팀 밀란츠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이처럼 사소한 것들>
하루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마을 전경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고요하면서도 쉽사리 떨쳐낼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지는 이곳은 수녀원을 중심으로 한 1985년 아일랜드의 한 소도시. 아일랜드 정부와 가톨릭교회가 보호, 참회, 갱생을 빌미로 젊은 여성들을 감금하고 노동착취를 일삼았던 역사(막달레나 세탁소)와 이를 고스란히 담아낸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이미 접한 관객이라면, 첫 장면에 얼마나 중요한 정보가 담겼는지 알아차릴 것이다. 마을이 구석구석 소개될 때, 고집스럽게 화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위치와 정신적 영향력을 관객에게까지 과시하는 수녀원을 과연 누가 못 본척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껴지는 어두침침한 마을을, 관객들이 단순히 '풍경'으로 인식하길 바란다. 시끄럽게 울리는 사무실 전화벨을 대수롭지 않게 흘리고 석탄 배달을 가는 빌처럼 말이다. 그의 트럭을 따라 평범하기 그지없는 소시민의 일상을, 암울한 사회 배경보다 먼저 마음에 담길 원한다. 잔혹한 역사를 고발하고 비판하는 상황보다 비극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을 더 주요하게 여겨서고, 본래 역사는 희극이든 비극이든 상관없이 인물로 설명되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조금의 덧붙임 없이 충실하게 스크린에 담아낸 이유와도 연결된다. 영화의 주제 의식과 소설의 지향점은 같다. 오직 인물만이 이 비극적 역사를 풀어낼 수 있고, 그중에서도 오직 빌 펄롱만이 어둠 속에서도 한 줄기 빛을 밝힐 수 있다는 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을 통해 쓰인 작품이다. 우린 빌에게 집중하면 할수록 그의 상황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그가 사는 세상을 경험하게 되면서 비로소 영화가 말하는 진정한 가치, 따뜻한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새벽, 빌이 트럭에 석탄을 담는다. 석탄 배달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는 그에겐 사랑하는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이 있다. 삶은 안정적이고 규칙적이다. 새벽에 출근해 석탄을 배달하고 퇴근 후 집에 오면 화장실에서 온몸에 묻은 석탄 가루를 씻어낸다. 식탁에 옹기종기 모인 귀여운 딸들의 수다를 반찬 삼아 저녁을 먹고, 아내와 이런저런 얘길 하다 잠에 든다. 자주 잠을 설치지만 새벽이 되면, 어김없이 석탄을 배달한다. 소소한 만큼 무료하기도 하지만 가족의 평안이란 확실한 대가가 충족되는 하루, 모두에게 이상적인 삶은 특별한 계기나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한 계속될 참이었다. 그가 부모에 의해 수녀원에 강제로 입소하는 소녀를 보지 않았다면 말이다.
석탄 창고 안에서 소녀의 울부짖음에도 숨죽였던 그때, 빌은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불안이 실은 시한폭탄이었고, 소녀가 수녀원에 갇힌 순간 폭탄 작동 버튼도 함께 눌렸음을 말이다. 사실 빌은 남들처럼 소소하고 평범하게 사는 게 불편했다. 정확히는 모두가 가끔은 불행하지만 대체로 행복하다고 말할 때, 본인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표현할 수 없었다. 그에게 평안의 다른 말은 불안이었고 이는 따뜻함과 혼란함이 공존했던, 그리하여 너무나도 혹독했던 유년기에서부터 축적된 결과였다.
소녀를 처음 본 이후 영화는 석탄 배달 같은 반복적인 장면은 빠르게 넘기고, 빌이 혼자인 순간엔 시간을 충분히 투자해, 어딘가 외롭고 공허해 보이는 그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클로즈업 샷으로 그가 느끼는 고통을 더 집중적으로 느끼도록 유도하고, 대체 어떤 사건이 빌의 내면에 불안을 심었으며, 목에 걸린 음울은 왜 계속 토해내지도, 삼키지도 못하는지 궁금하게 한다. 그의 불안을 역추적하는 일에 모든 힘을 소진하는 것인데, 이는 빌이 아내는 물론 동료, 이웃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빌의 어머니는 갱생의 대상, 미혼모였다. 부잣집 가정부인 그녀 또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으며 꼼짝없이 수녀원에 갇힐 처지였다. 그러나 집주인 윌슨 부인의 도움으로 빌을 낳고 길렀다. 아버지는 없었지만, 부인의 아들이 삼촌으로 곁에 있었고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그들의 보살핌은 계속됐다. 수녀원 창고 안에서 볼록한 배를 감싸고 두려움에 떠는 소녀를 보며, 빌이 어머니를 떠올린 건 당연했다.
빌은 현재와 과거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중첩되는 소용돌이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계속 과거의 나와 어머니를 떠올리고,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고, 어머니를 생각하는 걸로도 모자라 현실로 불러와 성인이 된 본인과 마주하게 한다. 소녀는 어머니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윌슨 부인과 삼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고, 빌은 그들의 따뜻한 사랑을 단 한 순간도 잊은 적 없었다. 그때 부인이 그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지금의 빌은 없었을 테니까. 더구나 작고 허름해도 온기 가득한 집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사는 삶은 아내의 말처럼 운이 좋아 얻은 결과물이 아니었다. 윌슨 부인이 어린 빌에게 준 사랑은 많은 돈과 우연이 결합해 발생한 운 좋은 얘깃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이 윌슨 부인에게 진정한 사랑을 배웠음을, 어린 빌과 부인의 추억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꺼내 증명한다. 그녀의 사랑은 그를 진정 따뜻한 어른으로 만들었다. 나를 아끼듯 타인을 생각하고, 나를 위로하듯 남을 돌보고, 나를 사랑하듯 그를 돕는 삶. 아내와 다른 이들이 바라는 수녀원의 차가운 입김이 닿지 않는 삶과는 확실히 정반대였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소녀를 돕지 않는 본인을 향한 혐오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사이, 빌은 결국 가장으로 살아온 시간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침묵이 곧 순리임을 돈과 권력으로 강요하는 수녀원장의 입김에 고갤 숙인다. 지금껏 지켜온 모두의 삶을 위태롭게 하지 말라는 단골 가게 사장의 말에도 이를 악물며 참는다. 소녀가 생각나 부끄러움이 밀려오자,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고 자괴감이 휘몰아치자, 이를 잘라내기 위해 이발소에 들어간다. 늘 그래왔듯 하루 더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그가 사는 이곳은 누군가를 가여워하거나 안쓰러워하거나, 돕는 게 불가능하고, 이를 의심조차 하지 않는 세상이니까. 수녀원에 끌려간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무관심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 힘들어할 시간도 없다고 여기는 사는 사람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빌을 무조건 추앙하지도 않는다. 그저 끝까지 빌을 보여줄 뿐이다.
오래된 침묵만 감도는 이발소 안, 빌은 거울에 비친 어린 자신과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삼촌을 발견하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뛰쳐나간다. 그 뒷모습을 끝으로, 영화는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반복과 집중을 단번에 없애고 이야기 끝자락을 수놓는 빌을 조용히 따라간다. 빌이 외면했던 사람은 소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와 윌슨 부인, 삼촌이었으며 자기 자신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결정과는 별개로 자신이 받은 사랑이 무참히 소멸하는걸,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에서 도저히 살 수 없었다. 빌에겐 그 희망이 전부였고, 여전히 삶의 기둥으로 자리하고 있으니까. 그의 처절하면서도 간절한 선택은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홀로 된다고 말하는 결연한 용기와는 다르다. 빌은 자기를 버릴 수 없었기에 용기를 냈다. 다만 그의 용기에 조건 없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고, 그가 베풀고자 하는 사랑 안엔 가족이 있었으며, 더 나아가 모두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 결과 수녀원 창고에서 소녀를 데리고 나와 집으로 향하는 빌의 모습은 알코올 중독자인 친구 아들에게 잔돈을 줬던 그날처럼, 평범한 하루로부터 퇴근하는 소소한 일상으로 비치는 동시에 우리의 마음을 한없이 울컥하게 한다.
출처: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 스틸컷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 펄롱을 통해 모두에게 전한다, 삭막한 곳에도 희망은 피어나고, 희망이 핀 곳엔 사실 희망이 이미 뿌리내려져 있었단 사실을. “이제 아무 걱정하지 마.” 빌이 소녀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다. 빌이 괴로움에 몸부림치지 않았다면, ‘막달레나 세탁소’는 여전히 수녀원장이 준 크리스마스카드 안에 감춰져 있었겠지. 그의 손에 접착제처럼 붙어있던 석탄 가루가 말끔히 씻겨 사라지는 일도 끝내 없었을 테고, 가족이 있는 시끌벅적한 부엌으로 들어가는 빌과 소녀의 모습 같은, 이처럼 사소한 것도 영영 못 봤을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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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영화가 만들어져도 '다음 소희'가 나올까 두려워
생기발랄
헉헉대는 숨소리. 누군가가 숨 가쁘게 춤을 추고 있다. 안무실의 이 누군가는 선이 있는 이어폰을 끼고 있다. 고등학생인 소희.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굳이 수능 준비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소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취업이다. 소희를 기다리고 있는 담임선생님. 담임선생님은 소희에게 '대기업 일자리가 들어왔다'라며 좋은 소식을 알린다. 대기업? 진짜? 하청 아냐? 반신반의하는 소희. 하지만 '한국통신'이라는 이름과 담임선생님과의 신뢰를 믿기로 한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소희. 사실 담임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는 친구를 만났었다. 인터넷 방송 크리에이터인 친구. 같이 곱창을 먹고 있다. 친구와 단 둘이 있는데 맞은편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저런 애들이 뭘 알겠냐. 쟤들은 세금이나 내겠어?" 시비를 걸어오는 아저씨 둘. 그 아저씨의 말에 화가 나 소희는 싸움을 벌인다. 덩치가 있는 남자들과도 싸우는 걸 마다하지 않았던 소희. 이렇게 강단이 있는 성격이었던 소희는 성격이 점점 마모되기 시작한다. 왜? 담임선생님이 권한 '대기업 일자리 현장실습' 때문에.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
영화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다. 바로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다. 극 후반부에서 반복되는 이 대사. 사실 이 대사는 굉장히 합리적인 말로 보인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삶의 과정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다. 회사를 그만둔다? 그것도 실습생이? 이거 그만두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원래 회사, 그러니까 조직이라고 하는 것이 실습생 하나 빠진다고 해서 그렇게 큰 지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그만둬도 알 빠 아니다. 또 어떤 관점에서 '네가 고른 회사'라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다.
영화는 그 논리를 완파한다. 인물의 선택지가 한정될 수밖에 없고 / 내적으로 그것만 골라야 한다는 것을 묘사하는 셈이다. 영화의 1,2부는 어떤 사건을 기점으로 나뉘어 있다. 한 사건을 분기점 찍고 소희가 처해있던 상황에 대해 묘사한다. 이는 즉 또래집단 내지는 주변인들에게 민감할 수밖에 없는 10대들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것이 관련이 있다. 이 두 가지는 영화에서 강점으로 작용한다. 우선 첫째. 소희가 회사를 그만두는 데 있어서 제약이 되는 인물이 있다. 이는 사실 초반부에 그렇게까지 두드러지는 사람이 아닌 듯 하지만,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사실상의 흑막이 되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또 이 캐릭터가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지를 물고 물리는 연출로 묘사한다. 이 연출은 쉬워 보이지만 아니다. 이걸 촘촘하게 설계해야 이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를 반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 묘사했고, 2부에서 주인공 유진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글로 쓴다면 초 강력한 스포일러다. 그러나 이 리뷰에서 이 시스템 묘사가 어땠는지를 간략히 써보자면 글쓴이는 후반부 어떤 인물이 하는 말에 너무 화가 났다. 그런데 할 말이 없었다.
또 영화에서 가장 핵심으로 작동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주인공 소희의 행적이다. 글쓴이가 봤을 때 극에서 강점으로 작동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소희가 하는 행동들이 이해하는 분들이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람은 철저할 정도로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없다. 우선 소희의 인간관계를 가족/친구/학교/직장으로 단정 짓는다고 해보자. 가족 관계에 대한 묘사가 초반부에 나온다. 소희는 밥 먹다가 멍-하니 엄마를 쳐다보는 신이다. 이 장면은 정주리 감독이 소희 같은 입장에 놓인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유심히 관찰한 듯하다. 이런 일이 있으면 있을수록 '주변 사람에게 말하지' 싶지만 사실 그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또 이 소희를 둘러싼 어머니/아버지의 리액션도 주목할 만하다. 소희의 어머니, 아버지 세대는 사실 이런 상황을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들이 아니다. 이 소희의 바뀐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나름 꼼꼼한 캐릭터 묘사로 잘 표현했다. 또 이 꼼꼼한 묘사는 극에 입체성을 부여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나? 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이 영화의 본질적인 부분이 구성된다. 다음은 친구다. 이 친구들은 보통 댄스학원에서 만나거나, 어릴 때부터 소희를 알거나 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댄스학원에서 어떤 인물과 어떤 공통점이 있었는지, 또 한 사람은 어떤 관계이며 이 인물은 어떻게 묘사되는지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하고, 후자인 '전부터 알던 친구들'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인물들은 소희랑 비슷한 입장에 놓이지만 어떤 차이점이 있어서 소희의 내면에 닿지 못한다. 이 차이점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영화를 본다면 감상이 넓어질 것이다. 미묘하고 사소한 지점이 소희에게 상처가 된 것이다. 다음은 직장이다. 직장에서의 일은 사실 살짝 아쉽다. 소희를 둘러싼 트라우마, 불안함이 직장에서 묘사되는 것은 좋았다. 좋은 소재였던 순위표가 두드러지는 연출이 2부에서 시너지를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인물과의 관계는 너무 강한 템포로만 이야기를 전개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직장에서 위안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직장의 두 인물은 영화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두 사람이다. 체감상 두 번째 인물이 좀 과하지 않았나 생각은 들기도 하지만 감상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실화 바탕
영화는 2014년에 전주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다뤘다. 당시 <그것이 알고 싶다> 팀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올랐던 사건. 당시 이 학생이 일하던 곳은 살인적인 업무 환경과 현장실습생이라는 명목 하에 이뤄진 임금 갈취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다. 지금 이 문장만 읽어도 ‘얼마나 일이 고됐을까’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런데 그 뚜껑을 열어보면 더 착잡해진다. 지금 당장 이 사건과 관련된 보도를 찾아봐도 어렵지 않게 당시의 업무환경에 대해 알 수 있다. 이 학생이 일하던 부서는 ‘해지방어부서’였다. 실제 통신사가 이런 영업방식이 있다고 서서히 이야기가 나오고 있던 곳이었다(왜냐하면 글쓴이도 이 회사에서 다루는 고객들 중 하나였다. 물론 상담사분들에게 폭언은 한 적이 없다). 통신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보통 콜센터에 전화하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막말하는 경우가 몇 있다. 요즘이야 이 노동자분들의 감정노동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이 당시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 말은 곧 그 오물 같은 폭언을 10대 소녀들이 다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다.
영화는 이 소재가 갖는 특성들을 잘 살렸다. 우선 주인공 소희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다. 수능을 준비하지 않는 소희. 이 소희만이 가지는 특성들을 잘 이용했다. 소희가 아무리 멘털이 세다고 해도 이런 일들을 감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반대로 어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묘사했다. 이 소희의 나이라는 특성을, 극에 상상력으로 부여한 것이다. 이 10대라는 특성은 역시 학교생활이라는 점에서도 굉장히 중요하다. 글쓴이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다. 인간관계도 그냥 그저 그래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사실 잘 모른다. 여기서 글쓴이와 같은 사람들이 소희의 서사에 몰입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이를 10대가 갖는 성격적인 특성과 학교생활을 잘 결부시켰다. 이는 역시 2부에서 시너지가 있다. 이 2부에 등장하는 시너지는 극에서 반복되는 한 대사와 함께 영화의 진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정주리 감독의 직업윤리 의식이 빛난 부분이 크다. 후술 하겠지만 글쓴이는 살짝 아쉽다고 느낀 지점이 있다. 그러나 좋은 부분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우선 이야기를 1/2부 구성했다는 것 자체가 좋았다고 느낀다. 작년에 개봉했던 <네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가 기억이 난다. 이 영화가 처음 보면 장르적인 쾌감으로 잘 이뤄진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불필요하게 가학적인 장면이 몇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이 그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이 쓸데없이 소상했다는 점이다. 실화 바탕이었다? 그거 치고도 너무 설명하는 건더기가 많았다. 여기서 만든 1/2부 구성은 앞의 작품과는 다르다. 소희가 겪는 스트레스 묘사를 좀 더 줄이고 2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가는 것에 있어 효과가 크다. 이는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던 <더 글로리>가 생각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피해자 문동은이 겪는 아픔을 1화로 압축시켜 극에서 복수극에 집중시킨 것이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강약조절을 잘해놔서 소희가 그런 선택을 했던 실질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에서 그냥 돈 많고 부모님이 방치하니까로 퉁 친 것과는 다른 결이다. 두 번째로는 영화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다. 이 장면 연출 좋았다. 자극적이지 않게 잘 짰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최고 강점이다. 반대로 이 장면 후에 등장하는 한 시퀀스는 왜 넣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또 영화에서 어떤 사건이 두 번 반복된다. 소희의 주변인에 관한 일이다. 이 분의 선택이 실제 그 콜센터에도 일어났던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이 영화에서 왜 반복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감상의 폭이 역시 넓어질 것이다. 이 반복되는 두 사건이, 정주리 감독이 현재 한국사회의 청년들이 처해있는 현 위치를 보여주는 듯하다. 글쓴이가 생각하는 영화의 두 번째 강점이다. 그리고 1/2부 형식 자체가 역시 반복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2부에서는 2부 자체적으로 반복되는 일이 몇 개 있다. 이 두 반복을 차이점으로 표현하는 배두나 배우의 경험치는 역시 빛난다. 유진이라는 인물이 서사가 그냥 없는 수준인데 이 사람을 신뢰할 수 있었던 건 역시 배두나 배우 덕이다.
아쉽기도 해
그렇게 직업윤리적으로 자극적이지 않게 묘사하지 않았고. 인물 내면묘사 좋았고. 배두나, 김시은 배우 연기 좋았고. 딱딱 맞아떨어지는 쾌감이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다. 바로 영화에서 작동하는 성적인 소재다. 몇몇 인물의 대사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다. 그냥 불쾌했다. 불쾌하라고 넣은 신 같긴 한데, 이건 좀 그랬다. 별 의미가 없는 느낌. 이 성적인 대사는 소희의 친구인 '태준 오빠'와도 관련이 있다. 너무 직접적인 대사가 초반부에 들어간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주인공의 두 친구는 좀 아쉽다. 어떤 인물 중 '크리에이터'있다. 이 직업적 특성은 극 중에서 별로 효과가 없다. 후반부에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장면이 있긴 하다. 그런데 그냥 백수로 놔둬도 큰 문제는 없지 않았을까? 영화 자체가 젊은 영화다. 어린 학생들의 내면을 김시은 배우의 호연과 함께 잘 끌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좀 어색하게 유튜브라는 소재가 들어오면 뭔가 이상해진다. 이 소재가 살짝 올드하게 느껴졌다. 또 소희와 묘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 있다. 이 인물 서사가 살짝 이해가 안 됐다. 이 부분은 다른 분들이 다르게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일을 겪는다는 것이 납득하기 어렵다. 난 지금 나라의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남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또 영화의 후반부에 극에서 중요했던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 좀 아쉽다. 이 장면 바로 직전까지 유진은 관객의 분신으로서 활동한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뭐가 실체인지 알 수 있게 하는 좋은 각본과 연출의 수혜자가 된다. 검정으로 칠했던 의상과 힙합 댄스라는 내적인 표현도구까지 이 감정표현에 좋은 도구가 된다. 그렇게 대놓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던 게 인물에게 감정이입 할 수 있는 이유였는데 너무 말하는 느낌? 그리고 이 메시지에 대해서 살짝 반신반의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게 하면 말하는 사람의 짐이 덜 것이고 글쓴이도 어떤 것이든 다 할 입장이지만 그때까지 쌓아놓은 서사와 흐름이 좀 안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이는 영화 엔딩과도 이어진다. 한 3%쯤 부족해서 감정적으로 과한 느낌이 엔딩에서 더 두드러진다.
진짜 주인공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김시은 배우는 아주 뛰어났다고 생각한다. 좀 어색한 부분도 있긴 했다. 욕을 잘 못하지 않았나 싶다. 그 외에는 감정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한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사무실 안에서의 표정연기, '그 장면' 연출, 비빌 곳 없는 현실까지 답답함을 드러내는 연기를 잘 보여줬다. 이거 찍을 때 20대 초반이었던 것 같은데 고등학생 비주얼과 말투가 나오는 것 역시 영화를 보고 분노할 수 없는 이유를 잘 닦아놓은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머리가 좋은 배우라고 느꼈다. 앞으로 더 많은 작품에서 볼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김시은 배우가 맡은 소희가 아니다. 바로 영화에서 지독하게 반복되는 한 단어다. 이 단어는 인물의 동기부여도 됐다가, 실체가 없는 어떤 것을 묘사하는 도구가 됐다가, 극에서 가장 중요한 방점으로 쾅 찍히기도 한다. 이 단어는 특히 2부 후반부에서 '실체가 없다'라는 말과 조응한다. 실체가 없지만 그 무엇보다 굉장히 강력하고, 저항할 수 없는 압박감으로 작용한다. 이 압박감을 여러분도 동의할 것이다. 이 압박감. 왠지 모르게 익숙해서 두렵다. 나도 이랬던 건 아닐까 싶어서. 정주리 감독이 이 부분부터 설계하고 인물을 짜 놓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적으로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문제 제기가 기억에 남을 것 같은 건 이 덕이다. 아. 시각적으로 어떤 도표로 형상화되기는 한다. 그런데 그건 정말 작은 상징에 불과하다.
이 진주인공. 몇 년 전부터 이게 문제라는 걸 봤던 것 같은데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사실 우리 한국사회에 멈춤이란 없다. 다음 소희? 당연히 나타날 것이다. 어쩌면 정주리 감독 같은 멋진 분들이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어도 우리 사회는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그럴 것이다. 글쓴이도 현장실습 일을 하며 부조리한 일을 겪었고,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침대를 주먹으로 퍽퍽 때린다. 또 이 세상에 온갖 진상들은 많아서 여기서 겪는 괴롭힘과 스트레스는 사람을 좀먹기 충분하다. 글쓴이도 지금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의 입장에서 이런 것에 대응할 수 없다는 점은 화가 난다.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라고? 인생의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는 멍청한 소리는 굳이 대응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너무나도 불합리하다. 이 압박감 때문에. 이 압박감을 두고 과연 우리가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글쓴이가 내린 답은 간단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사회에 부딪히는 이들에게 더 감사함을 표하는 것이다. 버텨줘서 고맙다. 또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혼자로 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사회에 부대끼는 많은 이들에게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글쓴이도 앞으로 이 생활을 해야 한다. 두렵지만, 그래도 살아보자.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 다 우리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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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달 역사컨텐츠 2편을 만들어 봤습니다. 1편에 이어지는 내용이니 1편을 시청하고 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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