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8-18 10:32:00
[JIMFF 인터뷰] 성장통을 그리다
'낮은 목소리' 박영광 감독 인터뷰
성장통을 그리다, 영화 ‘낮은 목소리’의 박영광 감독 |
박영광 감독의 ‘낮은 목소리’는 어린이 합창반의 맑은 목소리와 아이의 불안이 대비되면서, 변화를 받아들이고 다음 페이지의 악장을 넘기는 아이의 성장통을 담은 영화다. 8월 15일, 하소생활문화센터 산책에서 박영광 감독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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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낮은 목소리’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낮은 목소리’는 11살 동윤이라는 합창단 솔로이스트가 자신의 변성기와 가정의 붕괴가 함께 겹치면서 어떻게 보면 하나도 힘든 성장통을 동시에 두 개를 겪으면서 변화하는 그리고 그걸 받아들이고 거기에 저항하는 그런 내용을 담은 영화입니다.
‘낮은 목소리’만의 매력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낮은 목소리’는 어린이 영화이면서 합창이라는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 영화인데요. 성장 영화이지만, 성장을 막연히 아름답게만 그리지는 않으려고 했어요.
제목을 ‘낮은 목소리’로 정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이가 변성기를 겪으면서 목소리 음계가 낮아진다는 의미도 있고요. 또 ‘목소리가 크다’라는 표현을 하잖아요. 이를 층위에 대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이 아이가 ‘나는 이렇게 하고 싶어요’, 혹은 ‘우리 집이 이렇게 붕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라는 표현을 해도 힘이 없다는 의미에서 ‘낮다’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아역 배우의 연기와 합창의 조화가 인상적이었는데요, 혹시 영화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배우에게 특별히 요청하신 부분이 있으실까요? ‘무심함’이라는 단어를 강조했던 것 같아요. 우리 일상이 어떤 감정이나 표정으로 차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저는 오히려 그사이 빈 공간들에서 더 마음에 와닿는 순간들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게 이 영화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했어요. 무심하게 목적성을 갖지 않고 하는 반응과 표현을 강조했던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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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동윤이라는 인물이 합창단 테스트를 하는 장면이 있어요. 아이들이 하얀 옷을 입고 다 모인 곳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솔로이스트를 뺏기는 장면이에요. 물론 합창을 같이 만드는 모든 파트에 있는 아이들이 다 훌륭하고 좋지만, 동윤이에게 있어서 솔로이스트의 자리는 좀 남다르기 때문에 저는 그 장면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이의 성장기 중 변성기를 택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모두가 ‘변성기’ 같은 시기를 겪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변성기를 중요한 소재로 선택했고, 보시는 분들도 ‘내가 그때 그랬지’ 그리고 ‘그때의 그 일들로 지금의 내가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한 번씩 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과거의 성장통이 지금은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무섭고 그게 굉장히 커다란 일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때를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고통을 끄집어내서 다시 고통을 느끼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상황들을 기억하고 곱씹어 보는 게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영화 ‘낮은 목소리’는 변화의 기점에 서 있는 이들에게 공감과 응원을 전한다. 인터뷰를 마치며 박영광 감독은 머지않은 시간에 장편 영화를 찍고 싶다는 계획을 전했다. 앞으로 그가 그려나갈 또 다른 이야기들이 기대된다.
글: 하이스트레인저 김문숙 |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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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지만 결코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나의 서른에게>
* 본 리뷰에는 영화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의 서른에게 29+1 (2016)
홍콩 | 드라마 | 15세 이상 관람가 | 105분
감독: 팽수혜
아니지만 결코 아니라고 말하지 않으니까, <나의 서른에게>
서른이란 나이는 내게 어른의 증표였다. 대학교 입학하자마자 서른을 바라보는 선배들을 보며 동경 대신 늙음의 웃음을 봤었던 게 엊그제였던 거다. 막연히 '어른'을 '늙음'으로 치부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기에, 인제 와서야 그 당시 내가 얼마나 한심스러웠는지 뼈저리게 깨닫는 중이다. 군대를 다녀온 남동생이 신입생들에게, 청소년들에게 '아저씨'로 불릴 생각을 하면 뒷골부터 당기지 않겠는가? 그 와중에 내 학번이 남동생 학번 친구들에겐 몇백 년 된 유물과 동급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웃기는가.
아주 끝없이 웃음을 유발하는 게 나이인 듯싶다.
<나의 서른에게>를 접한 건 그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젊음과 늙음의 양극단에서 저울질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짓이 없음을 안 순간부터, 내게 '어른'은 참 다양한 의미를 가져다줬다. 무엇을 가슴에 품고 있는지부터, 어떤 목적이 있고, 갖고 있는 꿈은 무엇이며, 또 그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사는 방식은 어떤 것인지, 그리고 정말 앞자리가 바뀌는 날이 오면 내 세상이 천지개벽하여 엄청난 반전이 일어날까, 하는 호기심까지 아주 스펙터클 했다. 결론은 없었다. 완벽한 세상에 사는 내가 아니라서, 완벽한 내가 있을 수 없고, 그렇기에 모든 고민이 기가 막히게 해결되지도 않았다. 그저 나이 앞자리가 +1로 인해 소리 없이 바뀐다는 것 말고는 속 시원한 진실을 알 수 없었다.
<나의 서른에게> 역시 답답한 가슴을 뻥 뚫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내 옆에 앉아 홀로 사색에 잠긴 또래의 삶을 엿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 있는 건 없었다.
출처: 영화 <나의 서른에게> 스틸컷
서로 다른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순차적으로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서른을 맞이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이들의 관점 속에 고군분투하는 첫 번째 주인공, 임약군은 자신마저 같은 매너리즘에 빠져있음을 자각하지 못한다. 마치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진 법칙인 것처럼 서른을 맞이하는 데 온갖 힘을 쏟는다. 서른이 되면, 지금보다는 덜 힘들겠지, 덜 어렵겠지, 덜 아프겠지,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관점에서 나아가지 못해, 결국 우울함에 빠져버린다. 유일한 탈출구인 남자 친구와의 관계가 위태로운 마당에, 사랑하는 아버지가 떠나고, 승진했지만, 집주인의 횡포에 새로 집을 구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 그야말로 파도가 급물살에 그녀를 예고도 없이 덮쳐버렸다.
지금까지 자신 있게 열정적으로 살아왔다고 믿었던 그녀는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초토화가 된다. 그대로 주저앉은 그녀에게 이제 남은 건 고독이다. 단 한 번도 자신의 공허함을 마주 본 적 없었던 그녀는 황천락의 집에 들어가 살면서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과 같은 나이이지만, 전혀 다른 이의 삶의 방식을 엿보게 되는 그녀. 임약군은 황천락의 일기장을 통해, 가슴 깊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본다.
출처: 영화 <나의 서른에게> 스틸컷
황천락은 음반가게에서 일하는 해맑은 친구다. 자신이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 지를 아는 그런 사람. 이빨을 다 내보이며 세상을 향해 방긋 웃는 그녀의 미소가 보일 때마다 덩달아 미소가 지어지는 건 엄청난 힘이다. 고된 하루만을 보내던 임약군에게는 볼 수 없었던 즐거움과 행복이었다. 또한, '현실'이란 말 아래 스스로를 조금씩 죽이고 있는 우리가 제일 염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일상에서, 평범한 하루 속에서 찾는 소소한 행복이 쌓여 지금의 황천락의 삶을 만들었으나, 그녀 역시 지독한 현실을 살고 있었다. 암에 걸렸다는 통보를 받은 순간, 황천락은 더 이상 나이를 생각할 수 없었다 고백한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 서 있을 뿐이라는 말과 함께, 오랫동안 꿈만 꾸던 파리 여행을 떠나겠다 선포하는 그녀. 두렵고 복잡한 심경을 담담히 일기장에 써 내려가던 황천락의 글과 무수히 찍힌 사진들을 통해 임약군은 그동안 자신이 무엇을 버려둔 채 미친 듯이 달려왔는지 깨닫는다.
서른이라 부르는 말에, 어른이 되면 나아질 거란 충고에, 프로페셔널한 여성이 되면 모든 고민이 없을 거란 농담에, 다 알면서 남들에게 튀지 않기 위해 수긍하며 살아온 나를 발견하는 임약군. 의미 없는 날이 모여도 괜찮고, 한 번쯤은 쓸데없는 말들에 휘둘려도 좋은 날들 속에서 '나'를 위한 쉼터 하나조차 만들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제야 임약군은 자신에게 말을 건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겠냐고, 버틸 수 있냐고, 아니 버틴다고 착각하는 게 아니냐고.
황천락의 이야기에 유방암을 넣어 삶을 다시 꿰뚫어 본다는 점이 허무하고 텁텁한 뒤끝을 남기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자극적이진 않았지만, 뻔한 설정이란 평가는 흘려들을 수 없겠다. 인물들에게 주어진 한계 역시 배우만 다르게 나오는 주말 연속극(드라마)에 사용되는 소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측이 쉬운 만큼, 긴장감이 결말에 다다를수록 떨어지는 점도 명확하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나의 서른에게>를 가벼운 영화라 말할 수가 없었다. 주말마다 연속극을 보며 힐링하는 게 바로 나다. 결말이 무엇인지 알아도 또 보고 싶어 웃고 울면서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으니까. 솔직히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 않은가? <나의 서른에게>는 진정한 '나'를 찾자는 게 아니라, '현재의 나'를 보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함을 말해준다. 그래서 거창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확실한 감동을 선사한다. 서른을 바라보고 있는 자도, 훌쩍 넘긴 자도, 한참 기다려야 하는 자도 결국 에펠탑 앞에 서 있는 두 인물을 보고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분명 아니지만, 절대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 게, 우리가 가져야 할, 삶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틀림없다. 카메라를 들고 자기 인생 일분일초를 찍으며 그 순간을 기록하고 남기는 황천락의 습관처럼, 우리에게도 나만이 갖고 있는, 세상을 해쳐나가는 비법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그거면 된다. 서로에게서 주고받는 영향은 딱 그 정도면 된다는 소리다. 그 이상은 정말 무의미한 짓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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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 리뷰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20220>은 델리아 오언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 올리비아 뉴먼 감독 하에서 제작되었다. 드라마 장르로 분류되는 이 영화는 살인사건이 발생한 1960년대의 미국 캐롤라이나를 주 무대로 삼으며, 놀라우리만큼 아름다운 영상미로 관객들의 시선을 거침없이 사로잡는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러하다. 주인공 카야 클라크(데이지 에드가 존스)는 어릴 적부터 마을과는 동떨어진 습지에서 나고 자랐으며,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를 비롯한 형제자매는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 결국 가족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기에 이르지만, 카야만큼은 고향에 남았다. 결국 아버지마저 집을 떠나던 그 순간에도 카야는 습지 안에서 잠들었고 또 눈을 떴다.
외부인과의 접촉이 철저히 격리된 공간에서, 아버지로부터 타인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으며 자란 카야지만 그의 삶이 지루했다고 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이트 워커(테일러 존 스미스)와 애정을 쌓기도 하고, 자신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점핑의 부인인 메이블 매디슨(마이클 하이얏) 덕분에 학교를 가보기도 한다. 하지만 외부와의 접촉이 있을 때마다 돌아오는 건 어째서인지 상처뿐이다. 최소한의 접촉을 제외한 은둔 생활을 다시 이어지던 중 카야는 체이스 앤드루스(해리스 딕킨스)와 연인이 되었지만, 글쎄,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살인사건은 바로 체이스의 죽음이었다는 걸 상기해 보자. 이런 배경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외톨이 신세였던 카야에게 돌아오는 건 싸늘한 시선과 ‘언젠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수군거림 뿐이다. 심지어 그의 집을 수색하던 보안관은 이렇게 발언한다. 과학자야, 마녀야?
드라마장르라고 명명되었지만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살인사건으로 시작하는 만큼, 이 영화에는 서스펜스적 요소가 존재한다.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카야를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과 관객이 가진 정보량의 격차가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점차 벌어지기 때문이다. 관객은 카야의 인생을 따라가며 그에게 이입하게 되고, 자연스레 그의 무죄를 외치는 변호사 톰 밀턴(데이비드 스트라탄)이 승리하길 원하게 된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이 영화는 그 과정에서의 긴장을 추구하지도, 촉망받는 쿼터백 체이스를 살해한 용의자가 누구인지를 집요하게 파헤치지도 않는다. 그저 카야의 삶과 자연의 풍경에 집중한다. 마치 체이스의 죽음은 곧 사라질 바람이었다는 듯이. 카야가 법정에 서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고, 최악의 경우 사형을 선고받게 될지도 모르는데도. 왜일까.
사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라는 이야기는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에 지독하리만큼 익숙한 현대인이 카야, 아니, 습지로 대변되는 야생(혹은 자연)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라 해도 무방하다. 또한 그렇기에 그 과정엔 우리가 이분법적으로 분류한 선악의 개념도, 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규정된 윤리적 규범도 없다. 학교가 아니라 자연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고 자처하는 카야는 이렇게 말한다. 습지는 늪이 아니며, 그곳엔 빛이 있다고. 다만, 습지가 늪을 품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다, 늪은 습지의 빛을 잠식하는 어둠이 아니며 우리가 관습적으로 진흙탕과 진배없이 부정적인 공간이라 상상하고 두려워한 늪은 습지의 전부가 아니다. 빛이 쏟아지는 저지대와 늪이 어우러진 습지라는 공간은 생태계의 한 면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습지인가. 습지는 본디 “물도 아니고 뭍도 아닌(김태철, 2007)” 경계적 공간이다. 이러한 습지의 속성은 이름 있되 이름 없는 자, 세금을 낸 적 없어 자신의 땅에 대한 권리도 주체적으로 실현하기 어려웠던 자, 그러하므로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자였던 캐서린 카야 클라크의 속성과 겹친다. 특히 카야가 자신의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거나,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했던 가족조차 잊고 살았다는 사실은 어느 날 문득 깨달아 슬퍼했던 모습을 보이는 씬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 뿌리를 상실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동시에 그가 얼마큼 습지(자연)에 가까운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학사에서 한 축을 차지하는 모더니티가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띠는 습지를 결국 자아성찰의 계기로 삼았던 것처럼, ‘습지 소녀’로 불리며 배척받았던 카야 역시 마을사람들에게 자아성찰의 계기가 된다.
습지와 카야가 동화되었음을 반증하는 외부인은 비단 마을 주민뿐이 아니다. 그를 둘러싼 미국 사회 전반의 이데올로기는 카야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카야와 일면식이 없는 사회복지과 주민은 그를 여성 전용 주거 시설로 보내려 한다. 그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외부인의 시선과 계산에 따른 결과일 뿐이다. 카야는 그의 권유로부터 달아나는 방식으로 저항한다. 그는 제 뿌리를 옮기는 순간 자신이 말라죽으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버림받은 소녀는 용기 있게 자립하여 삶을 일궈내는 자가 되어, 오래전 자신의 곁을 떠난 어머니를 기다린다. 습지는 그런 곳이다. 버려진 자신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고 키워준 곳이자, 가족들이 언젠가 다시 모일 지 모른다는 소망이 숨겨진 곳. 이렇듯 그 터전은 카야의 뿌리이자 인생이기에, 카야는 옮겨질 수 없다. 그러나 사회의 시선은 다르다. 국가 권력은 ‘젊은 여성’이 ‘습지에서’ ‘혼자 사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마을 사람들은 듣기 거북한 소문을 퍼뜨린다. 심지어 습지를 말려 호텔을 지으려 한다는 자본주의가 밀어닥치기도 한다. 가부장적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지와 여성은 단죄의 대상이며 질서를 통해 교화가 필요한 대상, 즉 정복이 필요한 대상이기에.
카야는 이렇게 말한다. 갑각류의 껍질 안에는 생명이 있다는 걸 너무나 많은 사람이 잊고 있다고. 카야는 습지를 자신의 입맛에 있게 변형시키려는 문명의 시도에 분노할 때 특별한 까닭을 읊지 않는다. 개발하지 않는 것이 사회에 더 도움이 되리라는 협상을 하지도 않으며, 생태계의 교란을 심각하게 걱정하며 성명을 내지도 않는다. 카야의 분노는 순수하다. 자신의 삶을 파괴하려는 시도 자체에 분개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자연과 여성의 목소리를 ‘들려’ 주는 영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목소리를 회복시키는 것도,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그저 우리가 그동안 분명한 목소리를 지녔던 자연과 여성을 얼마나 도외시했던지를 통렬하게 시사한다. 하지만 이에 따라 영화에서 아쉬운 면모를 찾을 수도 있었는데, 습지 구석구석에서 삶과 생존의 처절한 흔적을 읽어낼 수 있을 카야에겐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수 있을 공간을, 카메라는 철저히 서정적인 시각으로 공간을 묘사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건, 영화의 제목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카야의 엄마가 말해주었다는 그 장소는 대체 어디일까. 카야의 손위오빠였던 제레미 "조디" 클라크(로건 맥레이) 또한 힘들면 그곳으로 달려 나가라고 말했던 그곳은. 영화를 보다 보면 사실, 그 제목이 맥거핀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카야는 자신이 힘들 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장소를 점차 넓혀가지 않았나. 심지어 작가가 되어 카야는 누군가의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될 수 있는 책을 출판하기까지 했다. 아빠의 눈에 띄지 않으면 된다고 말했던 소녀의 성장은, 그를 끊임없이 체제에 맞추고자 폭력을 휘둘렀던 외부에 저항하고 자신만의 삶을 갈고닦아온 누군가의 삶은 그 자체로 눈부시기만 하다.
★★★☆
참고문헌
김완구. "특집 논문 : 생태위기,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 ; 야생지(wilderness) 철학과 생태학: 그 한계와 의미." 환경철학 0.14 (2012): 61-92.
김태철.“습지의 중심은 바닥이 없다” : 모더니티와 문학적 습지 인식.외국문학연구(2007):119-146.
전연희. "여성연극에서 전통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 한국연극학 15.1 (2000): 315-345. 캐롤 처칠의 <습지>(Fen)를 중심으로, Caryl Churchill's <F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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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나를 ‘다이애나’라고 부르지만
영화가 시작하기 전,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연기한 주인공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짤막한 인터뷰가 나왔다. 그가 말했다. 다이애나 관련 영상을 ‘다’ 보았다고. 호기심이 잔뜩 일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납득할 만한 연기력을 처음으로 볼 수 있으려나.
그가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들을 꽤 보았다. 2016년 <카페 소사이어티>와 <퍼스널 쇼퍼>, 2018년 <리지>, 2019년 <찰리스 엔젤스(미녀 삼총사 3)>, 2020년 <크리스마스엔 행복이>. 감상은 늘 비슷했다. 과하지도, 약하지도 않다. 그런데 인상적이지도 않다. 꾸준히 작품을 해온다는 건 배우로서 욕심이 있고, 그만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인데. 괄목할 만한 성과가 안 보여 내심 응원했던 것 같다. 구설수 말고, 뛰어난 연기력으로 이슈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스펜서>를 보던 중 문득 생각했다. 이래서 다이애나비 영상을 ‘모두’ 보았다고 자신 있게 말했구나. 디테일한 버릇, 몸짓, 말투, 태도까지. 그 인물을 잘 모르는데도 이 사람 특유의 제스처와 걸음걸이, 시선처리까지 한눈에 보였다. 물론 이 모든 걸 계산했다면 한계가 있었을 거다. 왜, 그런 캐릭터들이 있지 않은가. ‘나 지금 연기하는 중’ 임을 온몸으로 뿜어내는 캐릭터들.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는 자신이 알게 된 사실들을 모두 잊었다고 했다. 덕분에 연기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애를 쓴다는 느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 사람을 보는 듯한 느낌. 한 인물의 감정선을 집중적으로 표현하는 영화에서 연기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 물론 있다. 연출.
이제 영화 내용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인상 깊었던 대목을 짚어보려 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를 토대로 한 허구이기 때문에 스포일러라고 해야 할지 모호하다. 게다가 실화를 다룬 이야기는 내용을 알고 보아야 더 좋기도 하다. 예를 들면,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교통사고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스펜서>
개봉: 2022.03.16
장르: 드라마
러닝타임: 116분
출연진: 크리스틴 스튜어트, 샐리 호킨스 등
영화의 색감은 전체적으로 노랗다. 이건 몇 가지 효과를 만드는데 1) 색 바랜 느낌을 준다. 2~30년쯤 지난 옛날의 분위기 말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망일이 1997년이니, 과거의 이야기를 바탕에 두었다고 표현한 것일 수 있겠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라는 영화의 주요 키워드와 연결되기도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이어가기로 한다. 2) 따뜻하다. 부드러운 햇살이 주는 따스함은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삭막하고 엄숙하다. 이미지 간의 대비가 극명한 영화다. 다이애나의 화려한 겉모습과 썩어 문드러진 속(마음, 혹은 신체적 장기)을 대조한다고도 볼 수 있다.
적막한 시작이었다. 배경이 넓게 보이는 롱샷으로. 군용차를 아주 조그맣게 보여준다. 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고요히 울렸다. 그리고 카메라의 움직임은 드론 같았다. 차 문이 열리고, 군인들이 나오는 장면까지 말이다. 멀찍이서 비춘지라 인물 개개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고로 한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 표정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게다가 똑같은 군복 차림이라서 구별하기도 어렵다. 그들은 하나의 존재처럼 턱, 턱, 턱, 묵직한 발걸음 소리를 내며 계단 아래로 향했다.
그곳은 널찍한 주방. 철제 테이블이 즐비한 곳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이곳저곳을 걷다가 말한다.
Clear.
군인들이 나가고, 요리사들이 들어온다. 새하얀 요리복을 차려입은 그들과 군인들과 다를 바 없다. 셰프의 지시에 맞춰 움직인다. 무슨 전쟁 중의 만찬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끼리 오래간만에 모이는 자리였다. 정해진 순서, 정해진 역할, 정해진 준비. 숨이 꽉 막히는 상황. 배경에 깔린 음악이 불안하고도 불편했다.
한편, 다이애나는 홀로 운전 중이다. 도무지 알 수 없단 얼굴로 지도를 들여다 보고, 식당에 들어가 여기가 어딘지 묻는다. 길을 잃은 다이애나. 그가 물리적으로 처한 상황은 심리적 상황과 동일하다.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 딴에는 최선의 저항일 수도 있겠다.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억지로 참석해야 하는 자리에 최대한 늦게 도착하려고 이런저런 핑계를 만든 적. 사방에 널린 불편함을 감내하기는 쉽지 않을 테다.
아주 느지막이, 왕실에 다이애나의 차가 들어선다. 그리고 그 위로 타이틀 <SPENCER>가 얹어진다. 현재 ‘다이애나’라고 불리는 그의 가문 이름, ‘왕세자비’에 가려진 그의 뿌리.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다. 공통점이 있다면, ‘다이애나’ 혹은 ‘프린세스’가 들어가던 것. 왕실에서의 삶을 이름으로 붙였지, 그의 과거가 담긴 패밀리 네임은 제목으로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스펜서> 포스터를 보고서도 누구의 이야기인지 예측할 수 없다. 얼굴도, 익숙한 이름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웅크린 상반신과 끝없이 펼쳐진 드레스 자락만이 마주하는 전부다. 왠지 모를 무거움이 느껴지는 뒷모습.
즐거운 크리스마스에는 한 가지 풍습이 있다. 로비에서 몸무게를 재고,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 다시 몸무게를 재서 얼마나 무게가 늘어났는지 확인한다. 잘 먹었다는 게 그만큼 시간을 잘 보냈다는 의미인 것처럼. 다이애나에겐 곤혹일 수밖에 없다. 명분뿐인 자리에서 즐거움은 찾아볼 수 없고, 무시와 조롱을 묵묵히 견뎌야만 한다. 3일. 3일만 버티자. 스스로에게 되뇌는 수밖에.
이제 환각 같은 일들이 드문드문 일어난다. 제가 앉을 의자에 각자가 맞춰 앉은 식사 자리. 남편 찰스 공이 준 진주 목걸이를 성가시다는 듯 계속 만지작대다 힘으로 뜯어낸다. 자연히 진주들은 하나씩 떨어져 일부는 수프에 퐁당 들어간다. 다이애나는 그것들을 목구멍으로 꿀꺽 삼킨다. 딱 하나가 아니라 하나씩 여러 개를.
반짝이는 진주 목걸이. 보는 사람 눈에는 아름답지만, 착용하고 있는 사람에겐 무겁기만 하다. 목을 감싼 모양새가 목줄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곳을 ‘집’으로 명명해야 하는 다이애나에게 주어진 상징물. 게다가 진주 목걸이는 찰스가 불륜 상대에게 먼저 준 것이다. 결국 다이애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간다.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해야 하는 답답함. 뭐라도 뱉어내고 싶지 않을까. 애석하게도 얼마 먹지도 못한 수프가 뱉어낼 수 있는 전부다. 차라리 목을 꽉 막고 있는 진주였다면 좋았을 텐데.
무너진 그를 어떻게든 지탱하는 건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이다.
윌리엄과 해리, 두 아들들과 함께일 땐 다이애나가 밝다. 평소에도 몸에 밴 웃음기가 있지만, 표정에 생기가 돈다. 장난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왕실을 비꼬는 상황극을 이어간다. 두 아들의 나이대는 다이애나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며 떠올리는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 마냥 행복했던 지난날. 자신의 진짜 집이 있던 때. 마구 달릴 수도, 웃을 수도, 있던 때.
두 아들은 현재에 머물면서 다이애나에게 과거를 느끼게 해 준다면, ‘앤 불린’은 말 그대로 과거의 사람이다. 온갖 누명과 추문을 뒤집어쓰고 끝내 사형당한 영국의 16세기경 왕비. 의아한 건 다이애나가 앤 불린의 언니인 메리 불린의 후손이라는 거다. 왜 자신의 선조가 아닌 앤 불린의 환영을 보고, 살아갈 힘을 얻었을까.
아마 자신과 비슷한 삶이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을 둘러싼 헛소문과 음해를 알면서도, 끝내 사형대까지 몰린 사람. 찰스의 경멸 어린 눈빛, 낮잡아 보는 태도, 미친 사람 보듯 하는 왕실의 신하들. 이러한 환경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는 건 생각만큼 어렵다. 게다가 왕실의 말을 듣지 않아서 죽게 된 선례가 버젓이 있으니, 압박감은 엄청날 테다.
그러나 비슷한 환경에 처한 사람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존재한다.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아는 셈이다. 사행 집행일에’ 나는 목이 얇으니 금방 죽이겠다’고 농담한 앤 불린의 담대함. 표적이 되었음에도 당당한 자세. 앤 불린은 사형당했으나 불쌍히 여길 사람은 아니다. 왕실이 그를 죽인 건 절대 움츠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니까.
크리스마스 만찬을 벗어난 다이애나는 자신의 옛날 집으로 향한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상태가 나빴다. 꼭 다이애나처럼. 위험한 곳이라고 왕실의 소령에게 알리고, 그는 웃으며 답한다. 썩은 계단을 밟아 죽는 건 다이애나의 선택이라는 듯이. 그곳에서 죽으려던 다이애나는 앤 불린의 환영이 걸어오는 말을 듣고, 꿋꿋이 살아가기로 한다.
다이애나,
당신의 무기는 당신 자신이에요.
다이애나의 옛날 집 주변에는 허수아비가 있는데, 아버지의 낡고 해진 재킷이 걸려있다. 다이애나는 언젠가 그것을 깨끗이 만들어 놓으라고 재단사 ‘매기’에게 말했다. 하지만 매기 또한 환영이다. 말끔하게 바뀐 줄 알았던 재킷은 여전히 더럽고, 매기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앤 불린의 환영으로 생을 다짐한 다음 날, 환영이 아닌 진짜 매기가 나타난다.
환영과 실제의 차이는 화면 구도에서 보였다. 환영에서는 인물의 얼굴이 명확하게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다이애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매기의 눈과 몸은 관객, 즉 정면이 아닌 다이애나를 향하기에.
그러니까, 다이애나는 몰랐던 거다. 자신과 몇 없는 주변 인물들 사이를 갈라 치기 하고, 헐뜯고,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도 있음을. 환영의 여성, 그리고 실존하는 여성에게서 힘을 얻은 다이애나는 두 아들을 꿩 사냥에서 빼내오기로 한다.
방법은 간단했다. 평소처럼, 그러니까 ‘미친 것처럼’ 보이면 되었다. 꿩 사냥을 하는 한복판에 나타나 아들 둘이 자신에게로 올 때까지 이곳에 서있겠노라고. 역시나 찰스는 끔찍하다는 얼굴이다. 다이애나는 그 눈빛에 개의치 않는다. 자신과 따스한 감정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 충분한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여행을 떠난다. 목적지는 없다. 영화 초반, 다이애나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던 길과는 다르다. 그 길은 하나 빼고 모두 닫혀있었고, 이 길은 모든 방향으로 열렸다. 얼마나 열렸는가 하면 드라이브 스루로 치킨을 주문할 정도로. 그리고 이때, 다이애나는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말한다.
스펜서.
모두가 그를 다이애나라고 칭하지만, 그는 자신을 스펜서라고 칭한다. 엄연히 다른 이름, 다른 존재로.
스펜서의 마지막 표정은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파파라치, 교통사고. 이로써 마냥 좋은 결말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해방감을 느낀 순간이 무의미하지도 않다. 허수아비처럼 왕실 한 자리를 지키고, 정해진 옷을 순서대로 입어야 하고, ‘좋은’ 겉모습을 꾸며내는 데에 급급한 삶에서 단 한 번이라도 자유를 얻었다면.
끝으로
매기가 말하기를, 당신에게 필요한 것.
Love 사랑
Shock 충격
Laughter 그리고 웃음.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 받아, 참석 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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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 넷째 주 극장 개봉 & 예정작 ?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이는 손석구의 신작 <댓글부대>.
1000만을 넘긴 <파묘>의 흥행을 이어갈 수 있을지?
댓글부대
Troll Factory
ⓒ 네이버영화
개요: 범죄, 드라마 | 한국 | 109분
감독: 안국진
출연: 손석구, 김성철, 김동휘, 홍경 등
개봉: 2024.03.27.
배급: (주)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시놉시스
실력 있지만 허세 가득한 사회부 기자 ‘임상진’ 대기업 ‘만전’의 비리를 취재하지만 오보로 판명되며 정직당한다. “기자님 기사 오보 아니었어요. 다 저희들이 만든 수법이에요” 그러던 어느 날, 의문의 제보자가 찾아온다. 자신을 온라인 여론 조작을 주도하는 댓글부대, 일명 ‘팀알렙’의 멤버라고 소개한 제보자는 돈만 주면 진실도 거짓으로, 거짓도 진실로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불법은 아니에요. 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제보,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가?
CINE PICK!
라이징 스타 김성철, 김동휘, 홍경과 천만 배우 손석구의 만남! 압도적인 예매율을 자랑하는 <댓글부대>는 ‘온라인 여론 조작’이라는 소재로 신선한 범죄 드라마의 탄생을 예고했습니다. 연출을 맡은 안국진 감독은 “영화 속 어느 게 진짜고 가짜인지 바로 찾아보면서 영화가 현실의 연장선상에 있길 희망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
Godzilla x Kong: The New Empire
ⓒ 네이버영화
개요: 액션, 모험, SF | 스페인, 프랑스 | 115분
감독: 애덤 윈가드
출연: 댄 스티브슨스, 레베카 홀, 브라이언 타이리 헨리
개봉: 2024.03.27.
배급: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시놉시스
고질라 X 콩, 이번에는 한 팀이다! ‘고질라’ VS ‘콩’, 두 타이탄의 전설적인 대결 이후 할로우 어스에 남은 ‘콩’은 드디어 애타게 찾던 동족을 발견하지만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예상치 못한 위협에 맞닥뜨린다. 한편, 깊은 동면에 빠진 ‘고질라’는 알 수 없는 신호로 인해 깨어나고 푸른 눈의 폭군 ‘스카 킹’의 지배 아래 위기에 처한 할로우 어스를 마주하게 된다. 할로우 어스는 물론, 지구상에도 출몰해 전세계를 초토화시키는 타이탄들의 도발 속에서 ‘고질라’와 ‘콩’은 사상 처음으로 한 팀을 이뤄 반격에 나서기로 하는데…
CINE PICK!
고질라 시리즈의 38번째 영화이자 킹콩 시리즈의 10번째 영화 <고질라 X 콩: 뉴 엠파이어>.
레전더리 픽처스와 워너 브라더스가 기획한 괴수 영화 시리즈이자 시네마틱 유니버스인 ‘몬스터 버스’ 는 이전 콩 시리즈의 어두운 기조를 내려놓고 가벼운 분위기의 속도감 있는 연출로 팬들의 호응을 얻어내고 있습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일본 | 106분
감독: 브라이스 맥과이어
출연: 하마구치 류스케, 오미카 히토시, 니시카와료, 코사카 류지 등
개봉: 2024.03.27.
배급: 그린나래미디어(주)
시놉시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작은 산골 마을에 글램핑장 설명회가 열린다. 도시에서 온 사람들로 인해 ‘타쿠미’와 그의 딸 ‘하나’에게 소동이 벌어진다.
CINE PICK!
일본의 새로운 거장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2024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 80회 베니스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작품으로 글램핑장을 세우려는 회사와 지역을 지키려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를 담으며 자연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딜레마를 다루고 있습니다.
1980
1980: The Unforgettable Day
ⓒ 네이버영화
개요: 드라마 | 한국 | 99분
감독: 유키사다 이사오
출연: 강신일, 김규리, 백성현, 한수연
개봉: 2024.03.27.
배급: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시놉시스
12·12 군사반란 불과 5개월 후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평생 중국 음식점 수타면을 뽑던 철수 할아버지는 1980년 5월 17일 드디어 자기 음식점을 오픈한다. 철수와 엄마, 아빠, 이모, 새신랑이 될 둘째 아들과 예비 신부까지 대가족은 이제 행복한 꿈만 꾸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CINE PICK!
영화 <평양성> <댄싱퀸> <사도>의 미술감독으로 이름을 알려오던 강승용 감독이 연출을 맡았으며,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상황을 담은 영화 <1980>은 서울의 봄이 오지 않아 그 어느 해보다 혹독하고 추운 겨울을 살아낸 광주 시민의 삶을 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극장 개봉 영화, 총 네 편의 영화를 소개해 드렸는데 어떠셨나요?
그럼 남은 한 주도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며, 지금까지 씨네랩 에디터 Amy였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cine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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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메이커> 빛과 그림자로 빚는 정치의 본뜻
수 차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만 거듭하던 정치인 ‘김운범(설경구)’. 어느날 그 앞에 약방을 운영 중이던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가 찾아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그의 뜻에 동참하고 싶다고 밝힌다. 고민 끝에 선거 캠프에 합류한 서창대는 객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선거 전략을 펼치며 김운범에게 연이어 승리를 선사한다. 마침내 김운범을 강력한 경쟁자 '김영호(유재명)'까지 제치고 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 자리에 올려놓는 데 성공한 서창대.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동료이자 사제지간이라 할 수 있던 김운범과 서창대의 정치적 신념이 충돌하기 시작하고, 중앙정보부 '이 실장(조우진)'의 견제까지 더해지자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변성현 감독의 신작 <킹메이커>는 1960-70년대 야당 국회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거 전략가였던 ‘엄창록’의 이야기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작품이다. 엄창록은 공권 선거와 금권선거 반발해 당시 기준으로 획기적이고 전략적인 방식과 유권자 심리를 이용하는 선거 전략을 수립한 인물이다. 그는 상대편 후보 캠프 사람인 것처럼 꾸며 비호감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등의 교묘한 선거 전략을 실행에 옮겼고, 이러한 전략은 중앙정보부가 그를 눈여겨봤을 정도로 대단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제목답게 엄창록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캐릭터인 서창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이는 <킹메이커>가 단지 실제 사건을 영상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역사를 벗어나 새로운 영화로 태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승리의 수단을 취우선으로 고민하는 한 선거 기획자의 딜레마를 통해 정치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이 수반된 승리만 의미가 있다고 믿는 ‘김운범’(설경구)'과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서창대의 갈등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이때 두 주인공의 충돌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두 접근법의 차이를 함축하는 듯 보인다. 거칠게 말해 운범은 민주주의 정치에 규범적으로, 창대는 실증적으로 접근한다. 운범은 고전적인 이상을 지닌다. 그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창대는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가 정당, 후보가 공공선을 추구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정당과 후보는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데에, 시민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몰두한다. 그에게 선거는 철저히 권력 투쟁이 게임의 장일뿐이고, 이데올로기는 정보가 부족한 유권자가 표를 선택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지름길일 뿐이다.
두 주인공의 차이는 그들에게 국민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창대는 국민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그저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존재이기에 자신과 같은 선거 기획자가 계획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그에게 운범은 국민이야말로 정의를 이루고 사회를 움직여 나갈 주역들이라고 일갈한다. 영화는 이와 같은 장면을 다채롭게 변주해 러닝타임을 두 주인공의 대담으로 채워 나간다. 표를 얻는 것이나 돈을 버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는 창대에게 운범은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충고한다. 선거 전략에 있어서도 철저히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정책에 접근하는 창대와 달리, 운범은 국민들의 진심과 열망을 정책에 녹여내야 한다며 맞선다.
이때 <킹메이커>는 빛과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을 통해 정치의 의미에 대해 한 단계 더 깊이 숙고한다. 일견 빛과 그림자를 대비시키는 연출은 김운범의 방식이 옳고, 서창대의 방식은 틀렸다고 답을 내리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창대의 방식이 이전까지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정의와 이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정치의 냉혹하고도 불편한 현실을 전면에 내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서창대의 선거 운동을 철저히 그림자 속에 가두면서 다른 캐릭터들의 대사대로 그에게 협잡꾼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의 표현에는 다른 의미도 숨어있다. 실과 바늘처럼 빛과 그림자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고, 또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빛과 그림자가 대비된다는 이미지와 빛과 그림자는 함께 한다는 심상을 모두 영리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서창대와 김운범의 신념은 서로 상극이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둘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 될 수밖에 없다. "정치란 때로는 짐승이 되는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라는 유시민 작가의 표현대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려는 운범과 짐승이 되는 비천함을 견딜 줄 아는 창대는 함께할 때 비로소 정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운범은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서창대를 멀리하지 못하며 선거 때만 되면 다시금 그를 불러올린다.
특히 이러한 빛과 그림자의 관계는 서창대라는 그림자와 중앙정보부의 이 실장이라는 그림자가 대비되는 장면 덕분에 더욱 돋보이기도 한다. 오로지 표를 획득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이들이지만, 둘은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창대는 승리를 통해 획득해야 할 김운범의 대의인 민주화라는 궁극적인 믿음과 낭만을 지니고 있지만, 이 실장에게는 승리 그 자체가 곧 목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같은 그림자이지만 둘은 빛이 있는 그림자와 어둠만이 가득한 그림자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는 김운범과 서창대가 외적으로는 대비되는 빛과 그림자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동료 내지는 사제지간처럼 느껴지는 반면, 서창대와 이 실장은 같은 그림자인데도 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빛과 그림자의 모티브와 연출을 단지 정치적 신념과 논쟁의 영역뿐만 아니라 정서적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그 중심에는 서창대의 인생사가 위치한다. 그림자라는 별명을 본인도 싫어한다는 점에서 그의 내면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마음속에서 빛이 우선인지 그림자가 우선인지에 따라 영화의 감정선에는 또 다른 축인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축이 더해지고, 선거 기획자의 내적 딜레마가 전면에 나타난다.
창대는 목포에서 운범을 만나 그의 그림자가 될 기회를 잡는다. 이때 그들이 독대하는 방은 어둠으로 가득 하나,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가 다시 그림자와 어둠으로 가득해진다. 이때 그 빛은 두 가지 의미로 보인다. 우선 자신이 믿는 대의를 위해 싸우고 함께 하고 싶다는 순수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 빛이 순간적으로 있다 없어진다는 점에서는 보일 듯 말 듯 꽈리를 틀고 있는 욕망과 야심이 기회를 잡은 모습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서창대의 선거 전략 덕분에 빛이 강해질수록 순수한 대의는 공천에 대한 야심과 충돌하고,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속에서는 원망과 좌절이 차오른다.
더 나아가 창대의 내적 갈등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달된다. 김운범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도 기념사진 속에 같이 서 있을 수 없는 아픔, 빛나는 김운범을 보면서 언제나 군중 속에 있어야 하는 씁쓸함, 혼자 있으면 빛나고 함께 있으면 기쁜 김운범과 달리 혼자 있으면 고독하고 함께 있으면 존재감 없어야 하는 그의 자격지심. 이 복합적인 감정들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설경구는 물론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김영호로 분한 유재명, 이실장 역을 맡은 조우진까지 배우들의 앙상블이 빛나는 가운데 이선균의 퍼포먼스는 유달리 돋보인다. 다른 캐릭터들이 러닝타임 내에 별다른 변화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준비가 되었는지 거듭 고민하는 서창대의 감정선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것이다.
사실 <킹메이커>는 본래 작년 12월에 개봉하려 했으나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공개 일정이 미루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정치의 이상과 현실, 목적과 수단, 정치를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에 대해서 넓게 또 좁게 들여다보는 영화라는 점에서 <킹메이커>는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더욱 뜻깊은 작품으로 느껴질 것으로 보인다. 단지 영화가 시작부터 자막을 통해 실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재창작한 작품임을 강조하는 만큼, 주요 연도나 배경이 되는 도시와 장소 등에 대해 조금 더 과감하게 상상력을 발휘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변성현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될 <킹메이커>는 이러한 일말의 아쉬움만 제외하면 흠잡을 틈이 보이지 않는 품격 있는 대담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정치의 본질에 대한 빛과 그림자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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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참혹하고, 가슴 아프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라는 영화는 오리지널 영화가 아니다. 1929년 소설 원작을 비롯 이미 1930년대와 1979년에 영화화한 작품이고, 이번 2022년에 한 번 더 리메이크화 된 작품이다. 20세기 영화들과 크게 변화된 줄거리 없이 이어지는 플롯과 대비된 더 생동감 있는 미장센이 1차 세계대전 속 참담함과 잔혹함을 부각한다.
#사진 밑으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 스틸컷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지방 동북부 지역에서 벌어지는 참호전 중 독일 병사 시선에서 플롯이 진행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이 치열한 참호전의 실태와 현실을 영화에 그대로 드러난다. 고작 몇 백 미터 땅을 진전하고자 백병전과 인해전술을 동원해 몇 백만 명이 희생되는 1차 세계대전 속 참혹함을 너무나도 훌륭한 미장센을 통해 표현한다. 색조 효과는 참호전에 띄는 푸른빛은 전쟁의 차갑고 냉담한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경기관총과 수류탄이 쏟아내는 난사로 푸른빛의 전장이 곳곳에서 터지는 갈색 먼지바람과 병사들이 흐르는 피로 붉그스름하게 섞이며 공기가 변화한다. 이 뿐만 아니라 오블리크 샷(oblique shot), 클로즈 업(close up)을 이용해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과 공포감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롱 샷(Long shot)을 통해 격전으로 죽거나 다치는 병사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던가 혹은 전쟁으로 떠들썩한 환경에 맞지 않는 주변 자연경관을 조용히 보여주며, 조용하지만 늘 불안함을 안고 있는 1910년대 풍경을 보여준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2022)가 세 번째 영화화를 할 정도인 이유는 역시 뛰어난 원작의 내용 덕분이다. 참혹한 참호전의 표현, 인간의 윤리 배반, 1분에 1명 꼴로 죽어나가는 전쟁터가 익숙하듯이 사람이 죽는 게 낯설지 않다는 뉘앙스가 강렬한 영화 제목 등이 있다. 특히, 프랑스나 여타 연합국과 마찬가지로 독일 역시 전쟁 속에서는 서로가 피해자만 되는 꼴인 의미 없는 희생과 불필요한 싸움으로밖에 없는 아픔을 영화 속에서 훌륭하게 표현하기에 원작이 칭송받지 아니한가. 그러나 흑백영화와 당시에는 대단했지만 지금 들어서는 아쉬운 사운드 연출을 이번 <서부 전선 이상 없다>(2022)에서 완전히 업그레이드하여 더 강렬하게 전쟁을 느끼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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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리 와, 이제 그만 기다려.” / 박보영, 송중기 주연 늑대소년 명대사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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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Alone Together - Mona Wonderl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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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소설과 비교분석하는 영화 '그것2' 리뷰
스티븐 킹의 동명원작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 비교
그리고 소설에서 빠진 설정과
이에 따른 영화 "그것:두 번째 이야기"의 개연성 논란#그것2리뷰 #그것2 #영화그것두번째이야기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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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헌트> 런칭 예고편
"찾지 못하면 내가 타겟이 된다" 조직 내 숨어든 스파이를 색출하라! [헌트] 런칭 예고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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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행복의 속도> 30초 예고편
꽃, 바람, 새 그리고 나뭇길...
해발 1,500미터 천상의 화원 ‘오제’
‘이가라시’와 ‘이시타카’는
산장까지 짐을 배달하는 ‘봇카’이다
70~80kg의 짐을 지고 같은 길을 걷지만
매 순간 ‘오제’의 길 위에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는 '이가라시'
반면 '봇카'를 널리 알리고 싶은 '이시타카’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이 건네는 이야기
지금, 당신은 어느 길 위에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