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2-06-17 16:49:19
동화 속 공주가 뉴욕 한복판에 떨어졌다
영화 <마법에 걸린 사랑>
안녕하세요!
영화/OTT 콘텐츠 큐레이션 웹 매거진 '씨네랩'입니다.
동화 속 안달라시아에 사는 공주 '지젤'이 모종의 이유로 뉴욕에 떨어지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마법에 걸린 사랑 >입니다.
환상의 세계, 동화 속 세계에 사는 주인공이 삭막한 현실 세계로 가게 되면서 주인공의 엉뚱한 매력에 푹 빠져들 수 있는 영화입니다.
누가 출연하나요?
에이미 아담스 | 지젤
FILMOGRAPHY
마법에 걸린 사랑 (2007)
빅 아이즈 (2014)
디어 에반 핸슨 (2021)
AWARDS
제 34회 새턴 어워즈 - 최우수 여우주연상, 2008
제 28회 산타바바라 국제영화제 - 시네마 뱅가드상, 2013
제 72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 여우주연상, 2015
패트릭 뎀시 | 로버트 필립
FILMOGRAPHY
연애학개론 (1987)
마법에 걸린 사랑 (2007)
그레이 아나토미 시즌 1~11 (2005~2011)
AWARDS
젊은 예술가상, 1998
미국배우조합상 - TV 드라마 시리즈 앙상블상, 2007
피플스 초이스 어워즈, 2015
제임스 마스던 | 에드워드 왕자
FILMOGRAPHY
마법에 걸린 사랑 (2007)
수퍼소닉 (2019)
보스 베이비2 (2021)
AWARDS
블록버스터 엔터테인먼트 어워즈, 2001
할리우드 필름어워즈, 2007
팜스프링스 국제 영화제, 2008
어떤 내용인가요?
동화 속 공주인 지젤의 유일한 꿈은 '백마 탄 왕자를 만나 결혼하는 것'이다.
우연히 만난 에드워드 왕자와 지젤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둘은 결혼하기로 약속한다.
결혼식 전, 지젤은 마녀의 방해로 뉴욕에 떨어지게 되고
따뜻했던 동화 속 세계와 달리 한없이 냉혹한 뉴욕에 지젤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혼 전문 변호사 로버트의 딸인 '모건'이 지젤을 발견하며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도와주게 되는데...
Reviews
"애니메이션과 현실의 조합"
ⓒ 네이버 영화
영화는 2D 애니메이션과 실제 인물들이 나오는 두 방식을 모두 사용해 제작하였다.
애니메이션과 실사 영화가 한 영화에 등장하는만큼, 두 세계가 얼마나 매끄럽게 연결되는 지가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캐스팅 후 애니메이션 작업을 해서 그런지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가 실제 주인공들과 비슷했고,
실제 배우들 또한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처럼 표정, 몸짓 연기를 해 더욱 더 자연스럽게 두 장르가 하나의 영화처럼 느껴질 수 있었다.
"OST"
ⓒ 네이버 영화
디즈니 공주 영화에서 뺄 수 없는 것! 바로 OST인데요!!
<마법에 걸린 사랑>에서도 수많은 OST가 나오는데 정말 하나도 빠짐없이 좋은 OST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OST는 바로 이거 입니다! 한번 들어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yKGzNmtJv50
지금까지 <마법에 걸린 사랑>를 간단하게 살펴보았는데요.
어떠셨나요?
<마법에 걸린 사랑>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 뮤지컬 좋아하시는 분,
로맨스 영화를 찾고 계시는 분에게 추천 드리고 싶은데요.
영화는 디즈니 +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씨네랩 에디터 Hizy
Relative contents
-
- <완다비전> 본 눈 가져오세요
영화를 넘어서 드라마까지, 어디까지 봐야 하는 건데
새로 개봉한 이 영화를 감상하려면 어떤 작품들을 미리 봐야 하나요? 이제는 마블 영화를 감상하기 전에 필수적인 질문이 되었습니다. 이는 해당 작품에 접근하기 쉬운지 아니면 어려운지, 소위 '진입 장벽'이 높은지 혹은 낮은지에 관한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진입 장벽은 <스타워즈 시리즈>·<스타 트렉 시리즈>처럼 거대해진 세계관을 가진 시리즈들의 공통된 문제점이긴 하나, 그 시리즈들 대부분이 특정 마니아층을 겨냥하는 작품들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점이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이하 MCU) 역시 이러한 시리즈 중에 하나이지만 앞선 작품들과 다른 점으로는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첫 작품이 등장한 시간대가 현재와 가장 가까운, 가장 늦게 탄생한 시리즈라는 데에 있습니다.
슈퍼 히어로의 모험담을 유려한 CG를 기반으로 그려낸 초창기 MCU는 기존의 마블 마니아들을 넘어서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이끌어내어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대중적인 시리즈가 되었습니다. 2008년에 <아이언 맨>을 시작으로 많은 MCU 시리즈 영화가 개봉하였지만 이때 당시에는 시리즈로의 진입 장벽이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스토리 흐름 파악에 필수적인 영화들만 취사선택하여 감상하면 족했으며, 그 필수적인 영화들마저 하루에서 이틀 정도 각 잡고 감상이 가능한 분량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피니티 사가가 마무리되는 시점에 이르러 MCU로의 진입 장벽에 관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로키>·<완다비전> 등 디즈니 플러스의 수많은 오리지널 드라마가 진입 장벽을 본격적으로 높이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오리지널 드라마를 감상해야지만 내용 이해가 가능한, 높은 진입 장벽을 가진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이하 닥터 스트레인지 2)를 선보임으로써 MCU도 앞선 선배 시리즈들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완다 막시모프라는 캐릭터를 다루고 묘사하는 데 탁월한 역할을 했던 <완다비전>, 드라마라는 미디어는 서사와 캐릭터를 묘사하는 점에 있어 탁월하고 명백한 장점이 있지만 긴 호흡으로 인해 영화보다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자명합니다. 더군다나 디즈니 플러스라는 특정 OTT 서비스에서만 해당 드라마를 독점적으로 제공한다는 사실과 더해져 진입 장벽은 더욱 높아지기만 할 뿐입니다. 아무리 해당 컨텐츠가 잘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때 가장 큰 문제점은 영화인 <닥터 스트레인지 2>가 드라마인 <완다비전>의 서사를 마무리 짓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서 발생합니다. 드라마로 시작했으면 드라마로 마무리 짓던가, 드라마로 시작한 이야기를 영화가 마무리 짓는다는 설명만 듣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사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리저리 흩뿌려놓은 컨텐츠를 모두 즐겨야 본인이 제공하는 재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다르게 말해 컨텐츠 강매 행위로서 거부감을 가지게 합니다. MCU가 넘기 힘든 진입 장벽을 스스로 쌓아올리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드라마의 결말을 영화로 마무리 짓는 최악의 선택
시리즈물임을 감안하더라도 독자적인 서사 파악이 도저히 불가능한
15년 만에 돌아온 샘 레이미, 오마주 가득한 아쉬운 공포 영화를 만들다
샘 레이미 감독은 이전에도 스파이더맨으로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를 제작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즈 그레이트 앤드 파워풀>과 같이 판타지 영화 등 여러 장르의 영화를 감독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특기는 <이블 데드 시리즈>로 대표되는 공포 영화입니다. 마치 초자연적 존재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듯한 연출 등 감독 특유의 기괴함과 호러틱함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그의 아이덴티티가 되었습니다. 히어로 영화인 <스파이더맨 2>에서도 특정 씬을 통해서 공포 분위기를 훌륭하게 조성했던 적이 있기에, <닥터 스트레인지 2>의 감독으로 샘 레이미가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당연히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MCU 시리즈 중 처음으로 공포 영화의 반열에 들 법한 영화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감독의 이전 작품들을 오마주한 듯한 연출이 제법 많이 등장합니다. 첫 전투인 문어 괴물과의 결투에서는 <스파이더맨 2>에서 닥터 옥토퍼스와 스파이더맨의 고층 건물에서의 전투를, 살이 썩어 문드러진 시체에 빙의하였을 때와 좀비의 외양을 한 채 전투에 임하는 스트레인지에게서는 <이블 데드>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다코>처럼 온몸의 관절이 꺾인 채 좁은 틈을 기어 나오는 스칼렛 위치, <샤이닝>과 같이 좁고 어두운 통로를 발을 질질 끌면서 끝까지 쫓아오는 스칼렛 위치가 선사하는 압박감, 곳곳에 등장하는 점프 스케어까지 더해져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일조합니다. 게다가 화룡점정으로 일루미나티가 스칼렛 위치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씬까지, 이토록 높은 수위를 보면서 샘 레이미 감독이 하고 싶은 것 다 했구나 하는 즐거움과 함께 도대체 어떻게 12세 관람가라는 상영 등급을 받을 수 있었는지 하는 의문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이 낮은 등급이 <닥터 스트레인지 2>의 족쇄로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앞선 연출들만으로도 어느 정도 공포스러웠지만, 차라리 대중성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공포 장르 영화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더라면 더 높은 평가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무서워서 오히려 아쉬운 느낌입니다.
반가운 오마주가 가득하지만 애매함도 가득하다, 수위를 더 높였으면 어땠을까
전작의 비주얼 쇼크는 어디로, 밋밋한 액션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가 처음으로 공개되었을 때, 미러 디멘션이란 만화경을 보는 듯한 특유의 왜곡된 공간을 배경으로 방향과 진행을 종잡을 수 없는 액션들로 관객들에게 비주얼 쇼크를 선사했습니다. 이는 닥터 스트레인지라는 마법사 캐릭터만이 선사할 수 있는 특유한 액션이기에, 후속작 역시 전편에 버금가는 비주얼 쇼크를 선사하리라고 기대한 관객들이 대다수입니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 2>에서 기대했던 액션은 코빼기를 찾아보기 어렵고, 빈약한 액션들로만 이뤄져 있을 뿐입니다. 먼저 배경과 관련하여 이야기해 보자면, 이 영화에서 미러 디멘션 혹은 이와 유사한 역할을 하는 장소가 한두 번 정도 등장하긴 하나 해당 장소가 임팩트 있게 다뤄지지도 않습니다. 특히 미러 디멘션과 유사한 공간은 해당 공간을 활용하여 액션을 보여주지도 않으며 그저 그 공간을 통로로서 이동하고 통과하는 용도로서만 사용하기에, 아무리 공간을 알록달록하고 왜곡된 외양으로 꾸며놓았을지라도 관객들에게 인상을 남기기에는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최고의 마법사에게 수여되는 칭호인 전·현직 소서러 슈프림이 단순히 무기 혹은 방어구만 만들어 내고, 이를 사용한 체술로만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비추는 액션은 관객들의 맥을 빠지게 만듭니다. 굳이 다른 방식으로 싸울 수 있음에도 체술을 고집하는 액션들은 그저 제작진들의 편의를 추구하기 위한 무성의함의 결과물로 느껴지게까지 할 정도입니다. 오히려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었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스트레인지가 캐릭터 본연의 액션을 더 잘 보여줬었습니다. 다만, 호불호가 크게 갈렸던 소위 '음표 액션'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액션이었습니다. 스케일이 커지지 않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클래식 곡들인 베토벤의 '5번 교향곡'과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를 활용해 편곡한 OST를 바탕으로 악보 속 음표를 실체화한 액션은 <닥터 스트레인지 2>에서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신박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아쉬움과 불호로 가득 찬 액션이었습니다.
호불호 갈리던 음표 액션만 유일하게 호, 그 외에는 <닥터 스트레인지> 영화가 맞는지 드는 의문투성이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1인 다역, 그리고 엘리자베스 올슨의 모성애에 관한 애절한 연기와 같이 두 주연 배우의 명연기는 완벽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닥터 스트레인지 2>의 다른 요소에 대해, 특히 액션에서 많은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서사에 관해서는 영화를 감상하기 전 <완다비전>의 요약본을 시청하고 가서 그나마 이 정도였지, 기존에 계획했던 대로 <완다비전>에 관한 어떠한 사전 정보를 숙지하지 않은 채 이 영화를 감상했더라면 더 혹평했을 느낌입니다. 점점 마블에 대한 정과 기대감이 감소하고 있음을 체감하게 되네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이번에 처음으로 CGV의 ScreenX관에서 영화를 감상했었습니다. 사실 영화를 예매할 때까지만 해도 해당 상영관이 ScreenX관임을 인지하지 못했는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특별관에 비해 부족한 특수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나름 3면을 활용한 색다른 경험을 선사할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체험해 보니 양 측면이 스크린과 동일한 재질이 아닌 방음을 위한 천 재질로 되어있다 보니 말끔하게 보이지 않은 점이 많이 아쉬웠습니다. 많이 애용할 특별관은 아니라고 생각되네요. 더불어, 아이맥스로 굳이 감상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 마블 영화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감독의 개인적인 선호도와는 별개로 영화는 여러모로 많이 아쉬웠습니다.
모든 세계의 너를 사랑해
★★★
-
- [JIFF 데일리] 침묵하지 않는 카메라는 마침내
SYNOPSIS.
어느 겨울밤, 주연은 아빠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는다. 아빠는 술에 취해 혀가 꼬인 목소리로 주연에게 “고모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남긴다. 그날 40년 전 자살한 고모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주연은 가족의 수치스러운 비밀이 된 고모의 흔적을 추적한다. 주연은 그동안 역사 속에서 지워져 온 여성들을 기억하며, 애니메이션을 통해 고모의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간다.
PROGRAM NOTE.
양주연 감독의 <양양>은 가족사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양 씨 집 안의 첫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남동생이 가족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익숙한 만큼, 가족 안에서 자기 자리가 없다고 생각해 왔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가족의 풍경’이다. 그런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누나가 있음을 고백했고, 그렇게 40년 전에 사라진 고모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1975년, 대학교 4학년이었던 감독의 고모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고, 할머니가 남겨 놓은 고모의 사진을 발견한 뒤,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고모가 자살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고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사라진 고모의 자리‘뿐 아니라, 가족 안에서 늘 한쪽으로 밀려나 있었던 ‘양주연 감독의 자리’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전진수)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박형규 역, 문학동네 버전) 문학사 안팎에서 길이길이 회자되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첫 문장이다. 처음 들을 땐 그렇지 뭐, 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이 문장이 언제부터인가 내 안에서 부스스 일어난다. 과연 그러한가? 정말 그러한가?
세월을 머금은 색감의 홈 비디오에서 부드럽게, 고화질의 결혼식 영상으로 넘어가며 시작하는 이 영화 또한 그렇다. 내레이션 속 감독도 스스로 인정할 만큼 화목한 가정, 부족한 것 없이 딸과 아들을 길러낸 집. 90년대에 홈 비디오로 풍성한 일상을 담을 만큼, 그 영상 안에서 생일 파티를 즐기는 아이의 웃음만큼, 밝고 환해 보이는 집.
이런 집들만 보다 보니까 가정에 고민이 있는 사람들은 "왜 우리 집만 이렇지? 왜 나만 이렇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오래 전, 누군가 지나가는 말로 남긴, 딱히 내게 던진 것도 아니었던 한 마디가 내겐 잊히지 않는다. "모든 가정에는 다 문제가 있어요. 문제 없는 집은 없고, 그러니까 상처 없는 가정도 없어요."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문장인데 우리는 그 말을 잊고 산다. 슬픈 일은 가슴에 묻고, 남부끄러운 일은 적당히 묻어 두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단란한 일상을 바지런히 꾸린다. 그러나 문제 없는 집도 없고 상처 없는 집도 없으니, 감독이 어느 날 알게 된 사실, 이미 오래 전 세상을 떠난 고모의 이야기도 그렇다.
감독은 고모 주변 사람들에게 고모의 이야기를 묻고, 고모의 죽음을 파헤친다. 그간 감독이 카메라에 담아 왔던, 보고 듣고 이야기해 온 것들이 고모의 이야기와 공명한다. 다만 이번에는 그 '고모 주변 사람들'에 감독의 어머니와 아버지도 포함될 뿐이다.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게, 하지만 자식의 작품 앞에 최선을 다해,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카메라 앞에 앉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 마찬가지로 조금 어색한 듯 이런저런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하는 감독의 목소리. 어쩐지 사랑스러워서 조금 웃음도 나왔다. 그러나 이내 이야기가 나아가면서 감독의 목소리는 점차 진중해진다.
힘들다고 덮어둔 기억을 감독은 부감한다. 자기 가족의 일을, 극화하지도 않고 민낯 그대로 인터뷰를 하면서 말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카메라는 끝내 침묵하지 않는다. 이제 그만두라는 말에도 꿋꿋하게, 고모의 죽음을 따라간다. 그건 탐정의 자세나 경찰의 태도와도 다른 그 누군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누군가의 자세와 태도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죽음. 타살인지 자살인지도 불확실한 정황. 오래 전의 아픈 일에 대해 바래고 조각난 기억들. 그 안에서 감독은 사회에 끊임없이 익숙하게 찍히는 사건들의 발자취를 본다. 그리고 그 일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자신이 가족 안에서 겪어왔던 일들이나 익숙하게 들어왔던 말들도 길어 올린다. 아무 악의 없이 부드럽게 놓인 말들, 어쩌면 감독 스스로에게도 그다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는 그런 말들. 그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일상의 작은 말 한 마디에서 누군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모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낼 수는 없다. 이 영화는 탐정이나 경찰이 아닌, 감독이 찍은 작품이니까. 고모의 죽음이 타살이었는지 자살이었는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알 길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조각조각 드러난 진실 속에서도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보면서 어쩌면 감독의 고모의 죽음과 아주 닮아 있었을 어떤 죽음들을 생각했다. 몇 시간에 하나 꼴로 새로운 기사가 뜨는 그런 사건들. 요즘 또 부쩍 많이 보이는 사건들. 피해자의 생명보다 가해자의 수능 점수 같은 것이나 주워섬기고 있는, 악의 없이도 충분히 악독해지는 얄팍한 담론들.
또 하나, 그저 사망한 존재로서만이 아닌, 삶을 영위하던 순간들의 고모를 감독은 그려낸다. 그렇게 단지 죽은 사람, 마음 아프니 덮어둘 사람만이 아닌, 살아 있었고 살아가고 있었던 존재로. 피해 대상으로서만 피해자를 묘사하는 것도 끔찍하지만 (예를 들어 피해자가 수능 만점의 의대생이었으니 그 죽음이 얼마나 아깝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피해자로서도 지워지는 경우가 허다해 더 끔찍한, 그래서 가끔 어떤 유가족들이 사진을 공개한다는 선택지를 끄집어 들게 만드는 이 사회의 서술 방식을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의 서술 방식 앞에 감독의 말하는 방식은 경종을 울리는 바가 크다. 나직나직한 감독의 내레이션이 더 많은 상영관에서 울려퍼지면 좋겠다. 침묵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야기되면 좋겠다. 이 감독의 시간이 쌓이고 또 쌓여, 더 많은 여성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전달되면 좋겠다. 침묵하지 않는 카메라는 마침내 부감에 성공하고 마니까. 더 많은 이야기가 그 부감의 시선에 밝히 드러나길.
어떤 죽음으로 떠나간 사람들, 어쩌면 나였을 수도 내 친구였을 수도 있는 그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2024. 05. 03.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229)
2024. 05. 05.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3관 (411)
2024. 05. 07. 21:00 메가박스 전주객사 1관 (652)
-
- C급 영화의 꽃말: ‘누구나’의 영화, <인천스텔라>를 기점으로
C급 영화의 꽃말: ‘누구나’의 영화, <인천스텔라>를 기점으로
당장 오늘 저녁에도 우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심지어 그 방법이 매우 간단하다. 베란다에 방치된 냉장고 택배 박스가 바로 우주선이다. 박스를 접은 뒤, 네모나게 길쭉한 구멍을 옆면에 뚫고 그 안에 탑승하면 우주로 갈 준비는 모두 마쳤다. 만일 냉장고 박스가 없다면 대안책은 어디에나 있다.
“네? 이게 우주선이라고요? 이건 그냥 자동차잖아요.”
극 중 탐사대원이 국장에게 던지는 말이다. 어떻게 우주에 자동차를 타고 갈 수 있어. 어떻게 우주에 택배 박스를 타고 갈 수가 있어. 영화 〈인천스텔라>는 이 ‘어떻게’라는 물음에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던 해답을 제시한다. 별다른 우주복이나 우주 함선, 산소 탱크도 필요없다. 1980년대를 호령하던 ‘스텔라’ 모델의 중고차 한 대만 있다면, 인천의 모 고등학교 운동장을 활주로 삼아 언제든 우주로 출발할 수 있다.
적극적인 패러디: C급 영화의 탄생
<인천스텔라>는 말 그대로 인천의 ‘스텔라’(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SF 장르의 독립영화다. 인천이 배경인 이유는 인천영상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이유도 있지만, 인간(人)과 하늘(天)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주인공 ‘기동’과 그의 딸 ‘규진’은 밤하늘의 밝은 별을 보며 세상을 떠난 그들의 가족을 추억한다. 그 별은 한 때 기동의 훌륭한 동료 우주 대원이자 아내였고, 규진의 엄마였던 ‘선호’다. 어느 날 규진은 선호가 가지고 있던 프로젝트 파일을 우연히 발견하고, 엄마가 끝내 알아내지 못한 외계 신호를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독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규진의 해독을 기반으로 좌표를 알아낸 기동은 탐사팀과 함께 우주선 ‘인천스텔라'를 타고 우주로 향한다. 그리운 아내와 엄마를 생각하며, 기동과 규진은 우주와 지구에서 각자 고군분투한다.
제목과 줄거리를 들었을 때 <인터스텔라>가 떠오른다면 그것은 지극히 감독의 의도에 부응하는 바다. 주인공의 딸 머피처럼 규진이 암호 해독에 성공하게 도와주는 인물은 미래 시간대 우주에서 온 기동이다. 우주에서 조난당한 아빠가 블랙홀에 빠져들어 미지의 공간에 도착하고, 책장 너머로 딸에게 소리치며 들리지 않는 소통에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동일하다. 다만, 전자가 광활하고도 장엄한 우주와 압도되는 스케일의 책장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정확히 그 반대다. 평범한 가정집의 적당히 낡아 친숙한 책장을 두드리는 모습과 투박한 블랙홀의 CG 효과가 돋보인다. 쉽게 책장을 보지 않는 딸 규진을 향해 “책 좀 읽어. 책 좀 봐.”라고 외치며 웃음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백승기 감독은 <인천스텔라>를 메이저 우주영화 <인터스텔라>의 ‘자매품 영화'라 소개하고, B급을 넘어 아예 제대로 된 ‘C급' 영화임을 당당하게 표명한다. 제한된 예산으로 만들어야 하는 독립영화의 현실에 기반하여 어설프게 따라할 바에야 ‘제대로 못 만든 영화’를 만들자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이렇게 백승기 감독만의 장르, B급을 넘어선 C급 영화가 탄생했다.
그의 첫 작품은 팀 버튼 감독의 <가위손>을 패러디한 <망치손>이다. 집에 망치가 있었다는 단순한 이유에서 출발했다. 지하철역에서 촬영한 <은하전철 999>와 300명의 인원을 모으지 못해 3명으로 대폭 축소한 <3>, 가내 수공업 3D 안경으로 구현한 <아바타>까지. 모방이라는 도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원본에 비해 현저히 낮은 퀄리티와 강화된 유머로 승부하는 그만의 패러디 전략은 일상의 상상력을 내세운다. 백승기 감독이 주축인 영화 제작사 ‘꾸러기’는 C급 전문 영화사라는 타이틀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항상 ‘C’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소개하는 C급 영화란 카메라(Camera)로 코믹(Comic)하게 찍어서 컴퓨터(Computer)로 편집해 영화관(Cinema)에 내건 창의성의 산물(Creative)이다. 즉, C급 영화야말로 완전한 영화의 본질을 관통한다고 역설한다. 백 감독의 영화는 단순히 원작의 ‘하위호환 모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의도된 패러디를 통해 새로운 주제와 형식을 전달한다.
‘인천스텔라’만의 기발한 우주를 완성하다
영화 <인천스텔라>는 현실에 기반한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 우주를 표현한다. 우주에서 온 신호를 해독하기 위해 고작 카세트 CD 플레이어의 버튼을 누른 뒤 헤드셋을 낀다거나, 우주로 가기 위해 학교 운동장에 주차된 빨간 중고차 ‘인천스텔라’에 탑승하는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우주로 향하는 그들이 입은 유니폼은 우주복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다. 실제 우주복은 모두가 알다시피 외부의 열을 차단하는 헬멧, 통신 헤드셋과 이어폰, 생명 유지장치 등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영화 속 그들은 은박 유니폼을 입은 뒤 오토바이 헬멧을 머리에 쓰고, 방한 장갑과 하얀 장화를 낀 채로 너무나도 태연하게 자동차에 올라탄다. 쿠킹 호일을 두른 것처럼 번쩍거리기만 하는 우주복을 착용하고 유유히 우주를 유영하기까지 한다. 다소 어설픈 행색에도 대원들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다. 웃음을 터뜨리는 게 괜히 미안할 만큼.
탐사팀에게 항로를 안내하는 인공지능 로봇이나 멋있는 AI 음성도 없다. 우주복을 입은 곰돌이 그림으로 덧칠한 블루투스 스피커만 덜렁 놓여 있을 뿐이다. ‘LG U+ 클로버 스피커’를 대신하는 ‘세잎클로버’다. 중력을 계산할 때는 공학용도 아닌 가정용 계산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집에 굴러다니던 계산기와 무선 이어폰만 있다면, 영화 속 장면을 완벽한 싱크로율로 재현할 수 있다.
SF+독립영화+C급= ?
흔한 SF 장르의 우주 영화를 생각하고 이 영화를 감상했다면 의문이 들 수 있다. 광활한 우주를 수놓는 웅장한 풍경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픈 계기판과 수식도, 최첨단 기술의 집합체인 근사한 우주선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대신 자리하고 있다. 주인공의 직장은 NASA가 아닌, ASA(아시아항공우주국)이다. 우주 신호를 감지하는 헤드셋과 카세트 플레이어, 블랙홀 시공간을 통제하는 블루투스 스피커, 나아가 새로운 행성 ‘STAR GAM(갬성)’의 토양을 검사하는 홈-매트 훈증기까지.
다른 장르도 아니고, 무려 우주 SF 영화를 집에서 당장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다니. 상당히 파격적인 도전이 아닐 수 없다. 3,700배 차이가 나는 제작비로 만든 영화는 저예산 인터스텔라를 넘어, 홈 메이드 인터스텔라에 가깝다. ‘이런 것도 영화라고', ‘이 정도는 나도 만들겠다'는 식의 관객의 반응이 예상되지만 백승기 감독은 오히려 이런 반응을 처음부터 바랐다. 실제로 그는 인터뷰에서, ‘이게 영화라면 나도 만들겠다'던 댓글에 “제발 같이 만들자"고 답했다. C급 영화는 누구나 감독이 될 수도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무대다. 할리우드 영화 중에서도 가장 높은 예산과 스케일을 자랑하는 우주 영화를 저예산 독립영화에서 만들어보겠다는 발상은 상당히 위험하지만, 그렇기에 이 영화의 주제와 일맥상통한다.
C급 영화의 꽃말: ‘누구나’의 영화
본래 패러디와 모방은 고급 예술을 따라한 저속하고 값싼 대중예술로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고급과 저급, 진짜와 가짜는 이제 분명히 구분되지 않는다. 저속한 대중예술이라 불리던 ‘키치’ 또한 새로운 스타일로써 우리 삶에 빠른 속도로 스며들었다. 과연 B급 감성과 그것을 넘어선 C급 영화는 ‘진짜 예술’을 밀어내는 저급하고 촌스러운 유행일 뿐일까. 더군다나 거대 자본과 투자력을 갖춘 할리우드의 것임이 분명했던 SF 장르를 구현했다면.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시도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과감한 도전이다. 이 영화를 단순히 모방 작품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이유도 그들이 그리는 하찮은 우주에서 우리의 일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스 하나만 있다면 우주로 갈 수 있으며 언제든 우주에 가 닿을 수 있는 존재. 그렇기에 우리는 특별하다. 영화의 주제는 그 모습만큼이나 간단하다.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초신성(super nova)은 영화의 영제목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관객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마치 태아의 모양을 본뜬 듯한 별의 폭발은 죽음의 상태를 일컫는 초신성의 뜻과는 달리, 생명의 탄생을 예고한다. 탄생과 소멸을 모두 겪을 수 있는 별은 각자의 인생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많은 자본이 투자되거나 화려한 CG와 소품은 없지만 오히려 부족하기 때문에, 우주의 빈 공간을 개개인 모두로 채울 수 있다며 역설한다. 때로는 촌스럽고 유치하고, 어설퍼 조잡해 보이는 장면에서 마침내 우리를 발견해내기까지의 과정은 즐겁다.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면 이곳은 이미 항공우주국의 한 가운데, 우주비행선의 발사대다. 아직 버리지 않은 택배 박스는 이제 우주비행선의 단단한 몸체가 되고, 어릴 적 읽던 전집이 꽂힌 투박한 책장은 다른 머나먼 우주 공간에 있는 가족이 애타게 나를 부르는 차원의 문이 된다. 시공간을 접어 차원의 지름길을 만드는 <인터스텔라>처럼, 인(人)과 천(天)이 단숨에 맞닿는 순간을 부족함 없이 표현한다. 인류를 구해야 하는 거대 자본 SF영화의 사념은 가족을 구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으로 바뀌지만, 영화가 주는 진리와 울림은 불변한다.
영화 <인천스텔라>에서는 사람이 모두 위대하고 아름다운 별이 된다. 거대 자본과 화려한 CG, 정교한 소품의 부재가 남긴 빈 자리는 사람과 사랑에 대한 애정과 따뜻한 유머가 채운다. 이 C급 세계관에서 우리는 모두 존재 자체로 특별한 항성이다. 분명 <인천스텔라>는 어딘가 이상하고 빈틈이 많으며 개연성이 부족한 영화다. 마치 내가 사는 평범하고 서툰 삶처럼. 그래서 따뜻하고, 그래서 특별하다.
-
- 그래서,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왜 우리는 살면서 잔인한 기억을 한 번쯤 겪게 될까요? 월요일에 들었던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금새 나는 한 가지의 끔찍한 순간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번 주의 내가 그 시간에 고통받았냐? 아니다. 지금의 나는 19과 20에 겪은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다. 너무 멀리 돌아왔다는 생각을 한 300번째 한 후, 내가 겪었던 고통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사실 별 것 아니다. 별 것 아니었다는 결론에 달한 것이 나의 트라우마 극복의 전부다. 이겨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머릿속에 새기는 것일 거다. 근데 이것과 별개로 내가 무언가에 휘둘려 살았던 기억은 나의 행동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대체 왜 그랬지. 이 트라우마가 만든 창피한 경험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건과 아무 상관이 없다. 난 누군가를 생각하는 법 자체를 몰랐다. 사랑받는 법도 주는 것도 몰랐기 때문에 방황했던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바보 같은 순간이 머릿속에 스쳐가는 오늘이다. 그때의 시간은 어리다는 말로 전부 수식할 수 없으니 오늘 밤도 이불을 뻥뻥 차게 생겼다.
다행인 점은 있다. 내가 미쳤지 싶었던 때에서 얻은 건 있으니 말이다. 이 얻은 것은 두 가지다. 사랑받는 인생은 무엇이고, 그걸 주는 삶이란 또 어떤 것인가? 에 관한 것이다. 이건 살면서 굉장히 중요했다. 내 정신연령이 죽을 때까지 10대에 머무를 순 없잖아? 세상의 모든 애정이 이성 간의 사랑과 그것이 아닌 무언가로 나뉜다면 삶이 퍽퍽해질 것이다. 물론 선을 넘는 건 나 역시 부담스럽겠지만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는 따뜻한 무언가를 잘 보듬으려고 한다. 살다 보니 정말 사랑이 전부였다. 내가 무언가를 위해 노력할 때는 보통 내가 좋아하는 타인에게 더 당당해지기 위함이었다. 또 언제는 그가 한 말 한마디가 내 동기부여의 전부가 되기도 했다. 이런 시간들을 보내고 나니 이성 간의 무언가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누구에게 진심인 편이 된다는 건 굉장히 어렵다는 걸 알았다. 진정성은 사소한 것에서 왔었다. 내가 지키는 소소한 것에서 섬세함이 생기고 그 사람의 말에 설득력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상대방은 보통 '이 사람이 진정성을 갖고 행동하는구나'라고 느껴 나를 좋아해 준다. 보통 그런 지레짐작은 맞는 말이다. 난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없이 나 스스로의 이미지를 속이는 것처럼 행동하는 건 싫다. 진실된 사람이라는 말에 유달리 집착했던 나는 앞과 뒤가 다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 태도에는 단점이 있다. 마음이 깊어진다는 것이다. 짝사랑을 심하게 한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에 취해있으면 그 사람에게 맞춰진다. 그러면 하나라도 더 해주고 싶어 진다. 사랑받기 위해서다. 정서적인 무언가를 받기 위해 계속해서 어떤 행동들을 하는 것이다. 언젠가 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러다가 크게 다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점점 뒤가 없어진다. 모 아니면 도인 내 방식이 가끔 질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마음을 막을 수 있느냐. 글쎄. 아마 아닐 것이다. 지극히 하고 싶은 말만 하는 나는 진정성을 위해 내 언어로만 행동하고 말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이 사람이 언젠가 날 떠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날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떠나간 후의 기분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잃고 나서 난 이런 것들을 배웠다고 자위하는 건 이제 질렸다. 점점 나이가 들수록 무서운 게 많아지는 셈이다. 차라리 누군가를 아껴주지 않는다면 다칠 일도 없을 텐데. 난 오늘도 일어나지 않은 일을 무서워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필연을 운명에 빗댄 영화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이유에는 인생에 대한 절묘한 비유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영화는 좀 심각하게 극단적이다. 아버지에게 알맞은 애정을 받지 못한 채로 자란 마츠코. 시크한 아버지가 웃음을 주지 않은 것에 마음이 답답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마츠코는 일찍 취업에 성공해 선생님이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다. 교사로서의 일과 도중, 마츠코가 재직하던 중학교 제자가 누군가의 돈을 훔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츠코는 이 사건으로 인해 억울하게 학교를 떠나게 되고 작가 지망생인 남자와 동거를 하게 된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도 못했고 믿었던 학교에서까지 배신당한 마츠코. 이번에는 정말 날 사랑해주는 곳을 찾은 것 같았다. 근데 그건 잠깐 뿐이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재림이라는 말과 함께 미래가 밝았던 첫 번째 남자 친구는 예술가의 지나친 우울함 때문인지 자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두 번째 남자 친구는 첫 번째 남자 친구에게 열등감이 가득했던 인물이었다. 마츠코를 얻음으로써 이 열등감을 해소하려 했었다는 이유로 결별을 선언한다. 자기 내적의 무언가 때문에 마츠코를 이용한 것이다. 연이은 이별 후 직장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마츠코. 새로운 일터는 마사지방이었다. 업계 톱으로 잘 나갔던 그녀지만 이내 회사가 무너지게 되고 다시 위기에 봉착한다. 이 시기에 원래 살던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의 일기를 읽고 '마츠코 연락 없음'이란 글을 읽게 된다. 아버지의 애정을 재확인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시 홀로 집을 나와 독립을 시작하고 세 번째 남자 오노 데라를 만나게 된다. 이 남자의 정체는 사기꾼이었다. 후에 마츠코를 배신하자 결국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네 번째 남자를 만나 삶을 살던 도중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8년형을 선고받고 만기출소로 나온 마츠코. 다른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 남자는 교사 시절 도둑 누명을 쓰게 만든 제자였다. 제자 류와의 사랑에 빠지는 데는 성공하지만 정작 끝은 좋지 못했다.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마츠코를 돌보기를커녕 주먹 한대 쳐버리고 류는 도망친다. 결국 버림받게 되는 마츠코. 히키코모리처럼 집에서 은둔하며 TV만 보다가 우연히 본 아이돌에게 빠지게 된다. 하는 거라곤 그 아이돌에게 편지 보내는 것 빼곤 아무것도 없던 마츠코. 감옥 동기가 재기할 수 있을 거라며 건넨 명함에 행복 회로를 돌리다 후반부에 허무하게 객사하게 된다. 그게 영화의 끝이다.
이 영화는 많이 비극적이다. 선생님이란 좋은 직업으로 시작해서 결과적으로 누구에게도 사랑을 받지 못한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과할 정도로 사랑을 찾는다. 2021년의 우리가 보기엔 '굳이 저럴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다. 영화의 주인공이 보여준 행보와 같은 질문을 우리의 삶에 던질 수 있다. 과연 사랑이 그렇게나 중요할까? 주인공의 자존심까지 다 팔아가며 받고 싶을 만큼 관심과 애정이 우리 삶에서 중요할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이거 말고 하나 더 있다. 그거 받는다고 해서 우리 삶이 극적으로 나아진다는 보장이 있는가? 어차피 누군가는 어떤 인물의 삶에서 떠나갈 수밖에 없다. 겉보기엔 오해로 멀어지는 경우는 부지기수다.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당연하다. 모든 영화에는 엔딩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필연적인 끝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불륜이든 풋풋한 첫사랑이든 우리는 끝이 어떤 결말로 이뤄질지 뻔히 아는데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연인이 아니고 친구관계이거나 형이나 누나로 불려지는 사이여도 마찬가지다. 단 한 가지의 예외라도 허용되지 않는다. 우리는 마지막을 향하고 있다.
잘 알면서도 우리는 운명을 잊어버리며 살아간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단지 섹슈얼한 무언가가 아니라 존경과 우정, 공감의 의미여도 마찬가지다. 사실 이 감정이야 말로 우리 인생의 전부다. 내가 느끼기엔 -내 기준- 이성 간의 사랑보다 이 감사함의 표시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려울 때 도와준 형들이 멋있다고 생각해서 난 게이가 아닌 것처럼 세상은 다양한 감정들로 이뤄져 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울 때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존경이라는 말이 식상해질 때 누군가에 대해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봐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순수한 동기부여는 이런 것들이다. 나를 믿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내 모습을 사랑해줄 인간이 있다면 그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가족이 소중한 이유가 이거 아닐까? 거의 대다수에게 가족이란 어떤 일을 겪어도 내 편인 존재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 가족들에게 잘하는 것일 테지. 나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근데 난 이기적 이게도 이들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싶다. 가족이 주는 무언가는 항상 고마운데. 나는 그 외에서도 쓸모를 찾고 싶다. 난 개 같던 20대의 일상 속에서도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았던 것 같다. 그 뭐 같던 순간에서 제일 찌질한건 나였단 걸 깨달은 후에도 다른 뭔가를 찾았던 것 같다. 이런 인간관계의 결말? 항상 같았다. 난 정말 나밖에 모른다. 친해지는 걸 못해 별것 아닌 것에도 이상한 사람 취급당했던 기억이 생생하고, 또 정신상태가 무너져 있을 때 본능적으로 사랑을 갈구하던 모습이 선하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나란 걸. 남 탓 열심히 해도 어차피 원인은 나에게도 있다. 정말 타인이 100% 잘못해서 무언가 발생한 경우가 없다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그 경우가 절대다수라고 하면 그건 추한 남 탓이 될 것이다. 과연 나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인가.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외부에서 우리의 쓸모를 증명받고자 한다. 우리 엄마나 아빠만 해도 자기 직업에 진심인 사람이다. 심지어 아빠는 방송에도 여러 번 나왔고 몇 박사들의 책에도 참여한 바 있다. 단순히 엄마 아빠가 돈을 벌기 위해서 이런 걸 하는 건 아닐 것 같다. 대학생 때 보이는 학생회, 대외활동 뭐 이런 것들도 그 예시다.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회 활동과 여의도 중앙정치는 사실 (물리적으로만) 거리가 멀고, 대외활동과 같이 외부의 일은 끝이 다 정해져 있다. 해단식 하면 자주 못 본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활동을 한다고 해서 취업문이 활짝 열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시시하고 재미없게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정해져 있는 결말로 향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이 모든 걸 벌였고 또 넘어지며 좌절한다. 같은 행동을 두 번 세 번 반복하게 되고 비슷한 순간을 마주한다. 씨발. 왜 나는 이거밖에 안 되는 인간이지. 나의 출생만으로도 세상에게 사과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다. 아무도 모르게 잠수 타다 죽을 때가 되면 내 머리를 방망이로 쳐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싶다.
근데 우리 거의 대부분은 이 미련을 잊어버린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엔 다를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걸 부정한다는 게 아니라 이제 그런 필연이 중요해지지 않아 진다는 뜻이다. 왜? 그게 행복하기 때문이다. 자주 못 보는 사람이더라도, 애초에 표현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도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 산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약하며 말이다. <중경삼림>과 <노매드 랜드>를 봤던 이유도 마찬가지다. 난 항상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아름다웠던 순간을 다시 돌이키는 것만큼 인생에서 즐거운 건 없다. 토익 공부를 해도, 유럽에 가도, 사고 싶었던걸 사도 항상 무언갈 상상하고 있었다. 현실은 아니었다. 어떤 선택지를 골라서 내 결과 중 아무것이 바뀌었다 하더라도 난 지금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마음 한편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자. 영원한 건 없다. 뭔 선택지를 골라도 나는 아팠을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받을 줄 몰랐고 하는 것도 서툴렀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영원히 혼자 사는 것이다. 그럼 외롭기만 하지 사람에게 상처 받는 일은 없어 좋을 것이다.
이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이 당연한 정답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건넨다. 과연 그게 맞아?라고 말이다. 아니다. 당연히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한심한 순간을 반복한다. 나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홍상수나 윤종신을 좋아하는 이유 역시 우리 인생에서 이것에 공감하는 지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생인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갈 것인가. 우리는 실패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퍼주지 말걸. 비극적인 사건에 놓인 우리를 위로하기보단 학대한다.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넨다. 극도로 비극적인 인물 설정? 현실적이지 않은 게 맞다. 근데 현실적이지 않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것에 공감한다. 상처 투성이에 그 아무도 찾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우리의 현실이다. 사람에게 상처 받아 사과받으면 그게 다 없던 일이 되나? 또 그 사람들이 사과를 과연 몇 번이나 했나? 또, 뮤지컬을 중심으로 영화를 전개한 이유? 비비드한 색감? 우리에게 이 마츠코의 삶을 비극이라고 재단할 권리가 있을까? 그 때 만큼은 행복했을텐데. '왜 굳이 3자 주인공이 나왔는가'나 '뮤지컬+색감배치'의 이유는 우리의 인생을 대변한다. 우리는 원래 이 모양 이 꼴로 살 수밖에 없다. 근데 이런 영화와 현실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왜?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무얼 주느냐에 따라 달려있기 때문이다. 비록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겹쳐 좌절하는 삶일지라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극단적인 비극을 보여준다. 근데 어떻게 전개하나? 도 중요하다. 바로 주인공을 따로 설정해 그 인물로 하여금 마츠코의 일대기를 좇게 만든 것이다. 이럼 뭐가 되냐? 어느 정도 객관화가 된다. 극한의 비극적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면 마츠코가 어떤 인물인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너무 타인의존적인 측면도 있었던 건 맞지만 당연히 좋은 부분도 많이 볼 것이다. 이 사람은 누군가를 품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원인이 사랑의 결핍이더라도 괜찮다. 마음의 구멍 한 구석을 인정하게 되는 것도 다 좋으니까, 무서워서 숨지는 말자. 그게 우리가 인생을 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동안 병의 마수에 빠져 방황하고 나서 얻은 결론도 이와 비슷하다. 어차피 결론이 똑같다면 한 번쯤 또 한 명에게 모든 사랑을 다 가져다주어도 괜찮지 않을까. 나 자신이 인기가 없더라도 누군가의 인생이 옳다는 증명이 된다면 그 나름대로 성공한 삶일 것이다. 난 나에게 이 말을 해준 사람의 이 문장을 이루기 위해 그 20대를 보내왔고, 한 번도 진정성이 없었던 적 없었으며 나름대로 행복했다. 그래서 난 내가 한 말에 당당하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이 혐오스럽게 느껴지더라도 한 번쯤은 필연에 부딪히는 시도가 필요하다. 그게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겪는 난제를 돌파하는 방식일 것이다. 영원한건 없다 하더라도 그 순간 만큼은 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가자. 마음이 괴롭다면 병원에라도 꼭 가자. 그것이야 말로 구멍이 난 사람에게 좋은 터닝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400% 확신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모름지기 이 영화가 말해주는 바와 같이, 인간의 가치는 무얼 받느냐가 아니라 뭘 해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
- 장황한 스케일 그리고 그것조차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
조선 팔도 제일의 살수 '이난'(신현준) 병마가 그를 위협하고, 점점 가까워지는 죽음에 고통스러운 몸을 이끌고 한 마을에 의탁한다 탐관오리의 횡포와 울부짖는 백성들의 비명으로 점철된 살아있는 지옥… 조선 최고의 살수 '이난' 마침내 그가 깨어난다!
<살수> 줄거리
줄거리만 봤을 때 좀 진지한 사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보고 나니 이 영화, 유머도 있고 조금은 가볍다.
하지만 그뿐이다. 아니 그도 못하다.
되지도 않는 유머는 오히려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만들 뿐이고, 말투는 자꾸만 과거와 현대를 왔다 갔다 한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우들의 연기 또한 어색해져버린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개연성이다. 자꾸 말 한마디로 퉁치려고 한다. 갑자기 등장한 살수 이난은 밑도 끝도 없이 최고의 살수라고 말해주는 걸로 그의 실력 증명을 끝낸다. 그리고 이에 적응할 틈도 없이 이난은 알 수 없는 병에 걸려버린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설정값들에 정신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괜찮다.
그런데 이 영화, 더 나간다. 이난이 조선 최고의 살수인데 무공을 쓰지 않는다는 것 하나로 바보가 되어버리는 이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조선 최고’의 살수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던 무게감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동네 바보 하나만큼의 가벼운 사람 하나만 남는다. 그런데 이게 웃기지도 않다.
후반으로 갈수록 어쩔 수 없이 이난이 악당들과 부딪히면서 액션이 많아진다. 하지만 이미 깎여버린 이난의 이미지는 너무 많이 가벼워져 긴장감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장면이 뚝뚝 잘린다. 칠복이와 선홍이네와 이난이 그렇게 정을 쌓았는지 몰랐는데 우리도 모르는 새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싸울 정도로 친해져있다. 또한 갑자기 산적들은 멋대로 민가를 침입한다. 그러고는 그 이유가 자신이 두목인 걸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란다. 내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에 몇몇 장면들이 지나갔나? 이런 급전개가 너무 당황스럽다.
그리고 왜 이난을 쫓는 여자 살수는 눈이 붉어지고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걸까. 이난을 압박하는 뒷세력은 누구인가. 이렇게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는 이야기까지 후편을 기약하는 건가. 하지만 그렇기에는 <살수> 자체가 너무 허술한 영화였다. 많은 영화를 봐왔지만 이렇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영화는 오랜만이었다.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살수> 시사회에서 관람 후 작성하였습니다.
-
- 아직은 미완성인 무슬림 히어로 탄생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뉴저지 주의 저지시티에 사는 무슬림 10대 소녀 '카말라 칸(이만 벨라니)'. 그녀는 열렬한 슈퍼 히어로 덕후로 특히 캡틴 마블을 향해 상상을 초월할 팬심을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절친인 '브루노(매튜 린츠)'와 함께 어벤져스 행사인 어벤져 콘에 놀러 간 카말라는 캡틴 마블 코스프레 대회를 앞두고 외할머니한테 받은 팔찌인 '뱅글'에 의해 자신에게 초능력이 생겼음을 알게 된다. 이에 본격적으로 능력을 연습하며 슈퍼 히어로 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한 카말라는 그녀에게 힘을 준 뱅글이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차원인 '누어 디멘션'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집안사와 지구의 안전이 걸린 모험에 나선다.
디즈니+에서 공개된 <미즈 마블>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4의 여섯 번째 드라마로, 평범한 고등학생이자 캡틴 마블의 열렬한 팬인 카말라 칸이 갑작스레 초능력을 얻어 히어로로 거듭나는 탄생기를 그린다. 사실 최근 MCU가 단기간에 많은 작품들을 쏟아내다 보니, 해당 작품만의 독특함이 없다면 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미즈 마블>은 범람하는 MCU의 세계관 내에서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 가지의 고유한 특징을 다양한 장르적 재미로 엮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미즈 마블>은 갑작스럽게 히어로가 된 고등학생 카말라 칸의 이야기를 통해 1화에서 두드러지듯이 하이틴 드라마의 재미를 준다. 다음으로는 다른 히어로들과 겹치지 않는 특성인 파키스탄계 이민자 출신의 히어로라는 특징이 있다. 이는 뻔한 하이틴 드라마의 구도를 신선하게 포장해 줄 뿐만 아니라, 4화와 5화에서 역사드라마의 특성이 부각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증조할머니의 유물인 '뱅글'의 힘과 관련된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있다. 이는 슈퍼히어로 장르 안에서도 MCU만이 줄 수 있는, 확장되어가는 세계관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준다. 그런데 세 장르의 특징이 한 데 뭉치는 순간 <미즈 마블>은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 6개의 에피소드라는 분량으로 인해 각 장르 안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풀어내지 못하며, 이에 더해 필요한 만큼 깊이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지 못한 결과 장르적 쾌감도 퇴색된다.
<미즈 마블>에서 가장 먼저 부각되는 특색은 하이틴 드라마다. 특히 '상상력 소녀'라는 1화의 부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이틴 장르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발달하고 또 불안해하는 십 대들의 사춘기를 그려낸다. 히어로 영화 중에서는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피터 파커가 거미에게 물려 엄청난 근력과 특수한 능력을 지닌 영웅이 되는 것은 청소년기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신체적 변화를 상징한다. 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고단함이 함축되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사춘기에 겪어야 하는 모든 변화와 그 당시에는 좀처럼 이겨내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변화의 무게감까지 담아내고 있다. 결코 빠질 수 없는 청춘 로맨스도.
새로운 히어로 미즈 마블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가 신체적 변화에 의한 삶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묘사한다면, <미즈 마블>에서는 정신적 변화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카말라가 꿈꾸던 초능력이 그녀에게 발현되는 사건은 사춘기 청소년의 상상이 현실이 될 때 가능해지는 변화에 대한 비유이고, 캡틴 마블의 팬인 그녀의 모습은 대상이 아이돌 그룹이 아닌 슈퍼히어로일 뿐 현실성을 더해준다. 또한 카말라의 친구인 브루노가 꿈꾸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합격 소식을 듣게 된 것 역시 이 하이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하이틴 장르의 매력은 탁월한 연출 기법 덕분에 더욱 빛난다.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녀에게 캡틴 마블과 새로운 초능력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며, 화면을 순간적으로 180도로 전환시키는 방식의 연출법은 카말라의 내면 속 환상과 덜 흥미로운 현실 사이의 간극을 잘 전달하면서 카말라 칸이라는 캐릭터를 멋지게 소개한다.
그다음으로 <미즈 마블>은 그간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문화적 배경을 전면에 내세운다. 특히 미국 사회 내의 무슬림과 서남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일단 파키스탄 전통 음식과 의상, 그리고 기도를 하기 전에 내는 일종의 외침인 '아잔 혹은 아단(أَذَان/ʾaḏān)'을 현대적으로 편곡한 ost는 이전까지의 MCU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마치 <블랙 팬서>가 아프리카 지역의 리듬감을 살려낸 ost로 찬사를 받은 것과 같다. 이는 주류 문화에서 소외되어 왔던 문화적 특성이 수용되고 조화를 이룰 때 사회적 차원에서 다양성이라는 장점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시청각적으로 매끄럽게 전달한다. 이처럼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이며 비주류인 문화적 배경을 중심에 놓은 결과, 드라마는 무슬림들의 '소외감'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성공한다.
특히 소외감은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을 향한 선입견을 고발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무슬림과 외부인의 일상이 충돌하며 무의식적으로 잠재된 편견을 보여준다. 알려지지 않은 히어로를 추적하는 '대미지 컨트롤' 요원들이 강압적으로 모스크를 수색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에 모스크의 이맘은 자신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고 오히려 요원들이 신발을 벗어야 하는 모스크의 규정을 먼저 준수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또 쿠란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 없다는 대미지 컨트롤 요원에게 자신이 인용한 문구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것이었다고도 응수한다. 카말라의 절친인 '나키아(야스민 플레처)'가 히잡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흔히 히잡은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모든 무슬림 여성이 히잡을 차별의 상징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나키아처럼 서방에 사는 여성 무슬림에게 히잡은 자신의 민족, 문화,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주류에서 소외되어 평 면화되었던 무슬림들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적 특성의 공존과 조화를 위해서는 비주류로 인식되던 특정 공동체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깨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은 미즈 마블이라는 히어로만의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능력이 평번한 인간들의 눈에, 이 세계의 주류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차원의 힘인 '누어'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점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이는 그녀가 존재 자체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사이의 가교라는 의미다. 따라서 그녀는 직접적으로는 파키스탄계 이민자, 더 넓게는 미국 내 무슬림, 보다 확장시켜서는 <미즈 마블>을 보는 모든 소외된 이들과 비쥬류들을 대변하는 히어로나 다름없다. 심지어 카말라와 친구인 브루노가 아웃사이더라는 점을 고려하면 소외감이라는 테마는 하이틴 드라마적 요소와도 잘 어우러진다. 이처럼 여러 장르적 특성을 하나의 주제 안에, 미즈 마블이라는 히어로의 정체성 하에 묶어내는 방식은 이 히어로의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만 <미즈 마블>의 매력은 근래 공개되는 마블 작품들이 모두 공유하는 단점으로 인해 목표한 만큼의 임팩트를 주지는 못한다. 세계관 확장 혹은 확립을 위한 요소들이 난립한 결과 드라마 전체의 완성도와 재미를 깎아 버리기 때문이다. 카말라가 유전적으로 돌연변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등장한 핵심 소재인 팔찌 '뱅글'에 주목해야 한다. 쿠키 영상에서 의도치 않은 사건을 일으킨 것이나 5화에서 카말라가 과거로 이동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뱅글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가능케 하기에 앞으로의 멀티버스 사가를 이끌 핵심적인 소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외계의 물건이 아무도 모르는 이유로 지구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등장한 '텐 링즈'와의 공통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다른 마블 작품들과 연계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은 일견 <미즈 마블>의 매력 포인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학교와 가족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고등학생의 고충과 미국 사회 속 파키스탄 이민자 혹은 무슬림들의 아픔을 보여주느라 많은 분량을 할애한 상황에서 세계관의 확장까지 시도한 결과 자연히 드라마의 서사적 완결성이나 개연성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드라마가 인도-파키스탄 분열과 관련된 논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사실 인도-파키스탄 분할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영리하게 활용할 경우 짧은 순간에 카말라의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MCU의 무대를 공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확장시키기에 적합한 소재일 수 있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과 <문나이트>처럼 카말라가 문화적, 역사적 배경과 진실을 찾아나가며 영웅으로 각성해 나가는 모습을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즈 마블>은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요구되는 미묘한 균형을 잡지 못했다. 4화에서 카말라의 할머니는 자신이 파키스탄과 인도 양쪽에 모두 소속감을 가지고 있기에 이를 영국인들이 만든 국경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당시 파키스탄이 먼저 인도로부터 독립과 분리를 요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언급은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백인 중심적인 시각의 설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차별한 영국의 식민통치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열을 낳았다고 이해한다면 카말라의 할머니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전달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드라마는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당시 사람들이 겪었을 혼란만 배경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예민한 역사적 사안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었고, 논란이 발생했다. 이는 세계관 확장 대신 보다 세밀한 사건 묘사를 통해 카말라 본인과 과거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쉬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이에 더해 부가적인 문제들도 생겨난다. 이야기의 키를 쥔 것처럼 보이던 '레드 대거즈'라는 단체는 MCU의 역사와 배경을 설명해준 이후로 분량과 비중이 급격히 줄어든다. 드라마의 주요 갈등이 봉합되는 마지막 회의 전개 역시 지나치게 빠르다. 액션의 비중이 지나치게 적은 것도 문제다. 물론 애초에 하이틴 드라마로 출발하였고, 첫 작품이기에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스파이더맨도 하이틴 영화에서 나름의 규모와 퀄리티로 무장한 액션씬을 선보였던 것을 고려하면, 엄연히 히어로물인 <미즈 마블>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미즈 마블>은 제목과 달리 아이러니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카말라라는 이름의 어원인 '카말'은 아랍어로 '완벽'을 뜻하며, 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드어로는 '놀라움'이라는 의미다. 이는 카말라의 히어로 이름이 미즈 마블(marvel)로 정해지는 이유다. 다만 그녀의 탄생기인 <미즈 마블>이 아쉽게도 아직 완전치 않고 놀라기에도 충분치 않기 때문에 드라마는 제목과 내용 사이에서 모순된 측면이 존재한다. 과연 서로 다른 두 마블, 캡틴 마블과 미즈 마블이 만날 <더 마블스>에서는 보다 완성된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 섞인 채 기다려봐야 알 듯싶다.
P(Poor, 형편없음)
무슬림 소녀의 상상이 현실이 될 때. 그런데 상상이 너무 장황하다.
-
-
-
- 영화 <크로스> 런칭 예고편
[서울의 봄] 황정민X [밀수] 염정아 대세 콤비의 2024 완벽 흥행 크로스! 설 개봉 확정! [크로스] 런칭 예고편 공개
-
- 영화 <더블패티>
세상을 향한 이들의 뒤집기 한.판.승!
입 찢어지게 햄버거를 먹던 너냉삼에 소맥을 찰지게 말던 너보기만 해도 ‘힘’이 솟는 이들의멋진 도전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