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2-07-20 09:06:27
아직은 미완성인 무슬림 히어로 탄생기
디즈니+ <미즈 마블>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뉴저지 주의 저지시티에 사는 무슬림 10대 소녀 '카말라 칸(이만 벨라니)'. 그녀는 열렬한 슈퍼 히어로 덕후로 특히 캡틴 마블을 향해 상상을 초월할 팬심을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절친인 '브루노(매튜 린츠)'와 함께 어벤져스 행사인 어벤져 콘에 놀러 간 카말라는 캡틴 마블 코스프레 대회를 앞두고 외할머니한테 받은 팔찌인 '뱅글'에 의해 자신에게 초능력이 생겼음을 알게 된다. 이에 본격적으로 능력을 연습하며 슈퍼 히어로 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한 카말라는 그녀에게 힘을 준 뱅글이 현실과 분리된 또 다른 차원인 '누어 디멘션'과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고, 자신의 집안사와 지구의 안전이 걸린 모험에 나선다.
디즈니+에서 공개된 <미즈 마블>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페이즈 4의 여섯 번째 드라마로, 평범한 고등학생이자 캡틴 마블의 열렬한 팬인 카말라 칸이 갑작스레 초능력을 얻어 히어로로 거듭나는 탄생기를 그린다. 사실 최근 MCU가 단기간에 많은 작품들을 쏟아내다 보니, 해당 작품만의 독특함이 없다면 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섭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미즈 마블>은 범람하는 MCU의 세계관 내에서 충분히 생존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 가지의 고유한 특징을 다양한 장르적 재미로 엮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미즈 마블>은 갑작스럽게 히어로가 된 고등학생 카말라 칸의 이야기를 통해 1화에서 두드러지듯이 하이틴 드라마의 재미를 준다. 다음으로는 다른 히어로들과 겹치지 않는 특성인 파키스탄계 이민자 출신의 히어로라는 특징이 있다. 이는 뻔한 하이틴 드라마의 구도를 신선하게 포장해 줄 뿐만 아니라, 4화와 5화에서 역사드라마의 특성이 부각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증조할머니의 유물인 '뱅글'의 힘과 관련된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있다. 이는 슈퍼히어로 장르 안에서도 MCU만이 줄 수 있는, 확장되어가는 세계관에서 느낄 수 있는 쾌감을 준다. 그런데 세 장르의 특징이 한 데 뭉치는 순간 <미즈 마블>은 두 가지 문제점을 드러낸다. 6개의 에피소드라는 분량으로 인해 각 장르 안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깊이 있게 풀어내지 못하며, 이에 더해 필요한 만큼 깊이 있게 이야기를 전개하지 못한 결과 장르적 쾌감도 퇴색된다.

<미즈 마블>에서 가장 먼저 부각되는 특색은 하이틴 드라마다. 특히 '상상력 소녀'라는 1화의 부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이틴 장르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발달하고 또 불안해하는 십 대들의 사춘기를 그려낸다. 히어로 영화 중에서는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고등학생에 불과한 피터 파커가 거미에게 물려 엄청난 근력과 특수한 능력을 지닌 영웅이 되는 것은 청소년기에 누구나 겪어야 하는 신체적 변화를 상징한다. 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그 과정에서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청소년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고단함이 함축되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사춘기에 겪어야 하는 모든 변화와 그 당시에는 좀처럼 이겨내기 어렵다고 느껴지는 변화의 무게감까지 담아내고 있다. 결코 빠질 수 없는 청춘 로맨스도.
새로운 히어로 미즈 마블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가 신체적 변화에 의한 삶의 변화를 중점적으로 묘사한다면, <미즈 마블>에서는 정신적 변화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카말라가 꿈꾸던 초능력이 그녀에게 발현되는 사건은 사춘기 청소년의 상상이 현실이 될 때 가능해지는 변화에 대한 비유이고, 캡틴 마블의 팬인 그녀의 모습은 대상이 아이돌 그룹이 아닌 슈퍼히어로일 뿐 현실성을 더해준다. 또한 카말라의 친구인 브루노가 꿈꾸던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합격 소식을 듣게 된 것 역시 이 하이틴 드라마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하이틴 장르의 매력은 탁월한 연출 기법 덕분에 더욱 빛난다.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그녀에게 캡틴 마블과 새로운 초능력이 갖는 의미를 설명하며, 화면을 순간적으로 180도로 전환시키는 방식의 연출법은 카말라의 내면 속 환상과 덜 흥미로운 현실 사이의 간극을 잘 전달하면서 카말라 칸이라는 캐릭터를 멋지게 소개한다.

그다음으로 <미즈 마블>은 그간 쉽게 접하기 힘들었던 문화적 배경을 전면에 내세운다. 특히 미국 사회 내의 무슬림과 서남아시아계 이민자들의 이야기에 주목한다. 일단 파키스탄 전통 음식과 의상, 그리고 기도를 하기 전에 내는 일종의 외침인 '아잔 혹은 아단(أَذَان/ʾaḏān)'을 현대적으로 편곡한 ost는 이전까지의 MCU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마치 <블랙 팬서>가 아프리카 지역의 리듬감을 살려낸 ost로 찬사를 받은 것과 같다. 이는 주류 문화에서 소외되어 왔던 문화적 특성이 수용되고 조화를 이룰 때 사회적 차원에서 다양성이라는 장점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시청각적으로 매끄럽게 전달한다. 이처럼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이며 비주류인 문화적 배경을 중심에 놓은 결과, 드라마는 무슬림들의 '소외감'을 중심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 성공한다.
특히 소외감은 이슬람교와 무슬림들을 향한 선입견을 고발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무슬림과 외부인의 일상이 충돌하며 무의식적으로 잠재된 편견을 보여준다. 알려지지 않은 히어로를 추적하는 '대미지 컨트롤' 요원들이 강압적으로 모스크를 수색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에 모스크의 이맘은 자신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고 오히려 요원들이 신발을 벗어야 하는 모스크의 규정을 먼저 준수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또 쿠란의 가르침 따위는 필요 없다는 대미지 컨트롤 요원에게 자신이 인용한 문구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것이었다고도 응수한다. 카말라의 절친인 '나키아(야스민 플레처)'가 히잡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흔히 히잡은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모든 무슬림 여성이 히잡을 차별의 상징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나키아처럼 서방에 사는 여성 무슬림에게 히잡은 자신의 민족, 문화,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드라마는 주류에서 소외되어 평 면화되었던 무슬림들의 이야기를 입체적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적 특성의 공존과 조화를 위해서는 비주류로 인식되던 특정 공동체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깨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은 미즈 마블이라는 히어로만의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그녀의 능력이 평번한 인간들의 눈에, 이 세계의 주류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차원의 힘인 '누어'를 자유롭게 이용하는 점이 의미심장한 이유다. 이는 그녀가 존재 자체로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 사이의 가교라는 의미다. 따라서 그녀는 직접적으로는 파키스탄계 이민자, 더 넓게는 미국 내 무슬림, 보다 확장시켜서는 <미즈 마블>을 보는 모든 소외된 이들과 비쥬류들을 대변하는 히어로나 다름없다. 심지어 카말라와 친구인 브루노가 아웃사이더라는 점을 고려하면 소외감이라는 테마는 하이틴 드라마적 요소와도 잘 어우러진다. 이처럼 여러 장르적 특성을 하나의 주제 안에, 미즈 마블이라는 히어로의 정체성 하에 묶어내는 방식은 이 히어로의 다음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다만 <미즈 마블>의 매력은 근래 공개되는 마블 작품들이 모두 공유하는 단점으로 인해 목표한 만큼의 임팩트를 주지는 못한다. 세계관 확장 혹은 확립을 위한 요소들이 난립한 결과 드라마 전체의 완성도와 재미를 깎아 버리기 때문이다. 카말라가 유전적으로 돌연변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등장한 핵심 소재인 팔찌 '뱅글'에 주목해야 한다. 쿠키 영상에서 의도치 않은 사건을 일으킨 것이나 5화에서 카말라가 과거로 이동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뱅글은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가능케 하기에 앞으로의 멀티버스 사가를 이끌 핵심적인 소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외계의 물건이 아무도 모르는 이유로 지구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은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에서 등장한 '텐 링즈'와의 공통점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다른 마블 작품들과 연계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점은 일견 <미즈 마블>의 매력 포인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학교와 가족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고등학생의 고충과 미국 사회 속 파키스탄 이민자 혹은 무슬림들의 아픔을 보여주느라 많은 분량을 할애한 상황에서 세계관의 확장까지 시도한 결과 자연히 드라마의 서사적 완결성이나 개연성은 희생될 수밖에 없다. 이 문제는 드라마가 인도-파키스탄 분열과 관련된 논란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사실 인도-파키스탄 분할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영리하게 활용할 경우 짧은 순간에 카말라의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MCU의 무대를 공간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확장시키기에 적합한 소재일 수 있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과 <문나이트>처럼 카말라가 문화적, 역사적 배경과 진실을 찾아나가며 영웅으로 각성해 나가는 모습을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즈 마블>은 역사적 사건을 다룰 때 요구되는 미묘한 균형을 잡지 못했다. 4화에서 카말라의 할머니는 자신이 파키스탄과 인도 양쪽에 모두 소속감을 가지고 있기에 이를 영국인들이 만든 국경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당시 파키스탄이 먼저 인도로부터 독립과 분리를 요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언급은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백인 중심적인 시각의 설명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차별한 영국의 식민통치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열을 낳았다고 이해한다면 카말라의 할머니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전달할 이야기가 너무 많았던 드라마는 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채 당시 사람들이 겪었을 혼란만 배경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예민한 역사적 사안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었고, 논란이 발생했다. 이는 세계관 확장 대신 보다 세밀한 사건 묘사를 통해 카말라 본인과 과거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라는 아쉬움이 쉬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이에 더해 부가적인 문제들도 생겨난다. 이야기의 키를 쥔 것처럼 보이던 '레드 대거즈'라는 단체는 MCU의 역사와 배경을 설명해준 이후로 분량과 비중이 급격히 줄어든다. 드라마의 주요 갈등이 봉합되는 마지막 회의 전개 역시 지나치게 빠르다. 액션의 비중이 지나치게 적은 것도 문제다. 물론 애초에 하이틴 드라마로 출발하였고, 첫 작품이기에 화려한 액션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스파이더맨도 하이틴 영화에서 나름의 규모와 퀄리티로 무장한 액션씬을 선보였던 것을 고려하면, 엄연히 히어로물인 <미즈 마블>은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미즈 마블>은 제목과 달리 아이러니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카말라라는 이름의 어원인 '카말'은 아랍어로 '완벽'을 뜻하며, 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드어로는 '놀라움'이라는 의미다. 이는 카말라의 히어로 이름이 미즈 마블(marvel)로 정해지는 이유다. 다만 그녀의 탄생기인 <미즈 마블>이 아쉽게도 아직 완전치 않고 놀라기에도 충분치 않기 때문에 드라마는 제목과 내용 사이에서 모순된 측면이 존재한다. 과연 서로 다른 두 마블, 캡틴 마블과 미즈 마블이 만날 <더 마블스>에서는 보다 완성된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 섞인 채 기다려봐야 알 듯싶다.

P(Poor, 형편없음)
무슬림 소녀의 상상이 현실이 될 때. 그런데 상상이 너무 장황하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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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F의 탈을 쓰고 윤리적 딜레마를 다루는 블랙 코미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섬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최첨단 교도소에서 자타가 공인한 천재 과학자 '스티브(크리스 헴스워스)'는 실험에 자원한 재소자들에게 행복, 번뇌, 성욕, 복종 등의 여러 감정을 조절하는 여러 신약을 테스트한다. 자칫 비인간적일 수도 있는 이 실험은 죄수들이 주립 교도소에 갇히는 대신 자원해서 참여했다는 점, 그리고 상대적으로 많은 자유가 그들에게 주어진 다는 사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그러던 어느 날, 음주 운전으로 아내와 친구를 사망에 이르게 한 죗값을 갚기 위해 실험에 자원한 '제프(마일즈 텔러)'는 프로젝트의 목적과 주체에 의문을 품는다.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 약물을 주입하도록 시키는 스티브를 보면서 의구심이 피어난 것이다. 해당 실험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자 제프의 의심은 더욱 커지고, 사랑을 싹 틔워가던 '리지(저니 스몰렛)'에게 약물을 주입하라는 스티브의 명령에 그는 마침내 반발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스파이더헤드>는 조지 선더스의 단편 소설 <Escape from Spdierhead>를 영상화한 작품으로, <트로: 새로운 시작>, <오블리비언>, <온리 더 브레이브>에 이어 올해 <탑건: 매버릭>까지 연출한 조셉 코신스키 감독의 작품이다. 줄거리나 예고편만 봐도 느껴지듯이 <스파이더헤드>는 과학 기술 발전의 명암 중 암을 집중적으로 묘사하는 영화다. 비인간적 실험을 진행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해당 실험이 인류의 발전을 위한 필요악이라고 주장하는 가운데, 자유 의지 박탈당한 이들이 저항하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이 영화를 SF 작품으로 규정하는 것은 부적절해 보인다. <블랙 미러>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SF 스릴러의 분위기를 풍기던 초반부가 지나가면 <스파이더헤드>는 과학 연구 윤리를 매개로 '무엇이 옳은 행위인가'에 대해 보다 일반적인 윤리적 논쟁이 벌어지는 블랙 코미디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는 각기 다른 삶의 가치를 지닌 두 인물이 있다. 우선 제약사 주인이자 실험의 기획자인 스티브는 철저한 공리주의자다. 공리주의자는 효용의 극대화를 옳은 행위라고 본다. 개개인의 행위에 깃든 본래 가치와 무관하게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 행위는 많이 이루어질수록 좋다는 것이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한 개인의 행동이 직접 초래한 결과와 그의 간접적인 개입이 유발한 사건의 결과가 구분되지 않는다.
실제로 공리주의자는 모든 사람에게 결과의 책임을 부여한다. 본인의 행동에 대한 책임은 물론, 다른 개인이 초래한 부정적 결과를 막지 못한 책임까지도 요구한다. 이는 개인에게 지나치게 과한 도덕적 부담을 주고, 개인을 의도와 계획을 지닌 주체로 고려하지 않으며, 그들의 정체성을 추상화하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 결과 공리주의자 개개인은 자신의 신념이나 판단력에 근거하여 행동하는 대신, 효용의 극대화라는 기준을 충실히 따르며 자기 자신을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외시킨다. 그래서 공리주의를 따르는 개인은 효용 극대화의 통로이자 수단에 불과해진다.
실제로 스티브는 실험에 자원한 모든 죄수들을 동등하게 대한다. 그들의 죄가 어떤 맥락에서 이루어졌든 간에 그들은 사회적 이익을 감소시키는 범죄를 저질렀고, 따라서 의도적인 범죄와 실수의 차이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자신들의 죗값을 씻겠다는 도덕적인 이유로 실험에 자원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이러한 그의 관점에서 보면 범죄자의 인권은 말살해도 마땅하며, 처벌 대신 승인한 인권침해 실험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모든 사람이 통제를 따를 수 있게 되면 더 큰 선의와 대의를 추구할 수 있게 될 것이며, 평화와 화합이라는 가치를 전파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가 모든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는, 심지어 사랑하는 이를 해치는 일까지 하게 만드는 약물인 B-6을 개발하는 데 총력을 다하는 이유다. 그 과정에서 제프의 죄책감을 자극해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으며, 자기 자신에게도 약물을 주입한다. 그렇게 죄수들과 제프, 그리고 본인까지도 수단으로 이용한다.
반면에 제프는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지극히 칸트적인 이유로 스티브의 실험에 반대한다. 인간은 이성을 지닌 존재이며, 타인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윤리 법칙을 만들고 이를 지킬 자유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존엄한 존재이고, 따라서 인간은 수단으로 사용되면 안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프에게 약물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다. 사회적 맥락에서 다수의 효용을 극대화할 목적을 위해 인간을 도구로 활용하는 기제이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자유의지를 원천적으로 제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스티브의 신념에 비해 더 직관적으로 동의하기 쉬운 제프의 서사에 영화가 의도적으로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야기를 덧붙인다는 점이다. 영화는 제프와 리지가 범죄자들이지만 결코 나쁜 인물은 아니라고 묘사한다. 제프의 교통사고는 한순간의 치기 혹은 실수였을 뿐이고, 리지가 딸을 살해한 것 역시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라 과실치사였다면서 그들의 선함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이 경우 본래 선한 인물인 이들의 자유의지를 핍박하는 스티브와 그의 신념을 악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제프와 리지의 과거사는 그 자체로 그들의 항변과 비판의 반례가 된다. 어찌 되었건 술에 취한 채 운전을 하기로 결정한 제프의 자유의지, 한여름에 아이를 차에 태운 채 출근하기로 한 리지의 자유의지가 그들의 비극과 범죄를 유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프의 서사에 윤리적 정당성이 깃들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존재하며, 이는 작중 선인과 악인을 명확히 구분하고 옹호하거나 비난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낳는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블랙 코미디로서 <스파이더헤드> 특유의 기괴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 곧 제프의 입장은 직관적으로 옳다고 느껴진다. 사람을 도구로 쓰지 말라는 주장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다. 과학 기술의 급격한 발달에 대한 경계심이 나날이 높아지는 형국에서는 시의적절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메신저 때문에 메시지에 잡음이 생기다 보니, 역으로 극단적인 공리주의자인 크리스의 괴변은 더 인상적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에 의해 보육원에 버려졌고 이후 단 한 번도 가족을 만나지 못했다는 스티브의 개인사가 간결하게 제시되면서 오히려 그의 광기에 설득력이 더해준다. 피실험자들 중 사망자가 나와도 그저 웃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크리스 햄스워스의 소름 끼칠 정도 생생한 연기도 큰 몫을 해낸다. 이러한 제프와 스티브 사이의 불균형은 영화의 분위기를 살려내기 위해 의도된 측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작자인 조지 선더스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기존의 도덕적 가치관을 포함한 여러 기준점이 뒤틀려버린 미래의 기묘함을 글로 표현하는 데 탁월했기 때문이다. 약물에 취한 스티브가 마주하는 최후도 이러한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이는 스티브의 조수인 마크의 역할이 중요성에 비해 제한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작중 스티브의 악행, 도를 넘은 광기, 극단성은 그의 논리에 내포된 자유의지의 침해라는 취약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스티브의 악행을 외부에 고발한 마크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미 논변의 정당성을 잃은 제프보다도 스티브와 첨예한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캐릭터다. 스티브의 연구에 자발적으로 합류했기 때문에 자신의 신념에 따라 연구를 포기하고 스스로 연구 윤리를 어긴 책임을 다하는 그는 스티브의 진정한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마크의 역할이 지나치게 강조될 경우 직관적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쉽사리 반박하기 어려운 스티브의 신념에서 비롯된 딜레마와 그로 인한 불쾌함이 덜 부각되고, 이는 블랙코미디로서의 매력을 저하시킬 수 있다. 그래서 <스파이더헤드>는 적은 인물에게만 초점을 맞춘 채 그들의 심리적인 갈등을 부각하는 데 집중한다.
문제는 조셉 코신스키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줬던 단점들을 반복한 나머지 영화가 전반적으로 지루하다는 점이다. 특히 <오블리비언>과 유사한 문제점을 답습한 것이 눈에 띈다. <오블리비언>에서 코신스키 감독은 여러 가지 복선을 던지면서 초반부를 다소 길게 끌다가, 특정 사건을 분기점으로 후반부에 급전개를 선보인 바 있다. <스파이더헤드>도 마찬가지다. 실험 과정과 제프의 생활상을 오가면서 서서히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제프와 스티브의 갈등이 외면적으로 분출되는 순간 절정에 도달한다.
그런데 <스파이더헤드>의 원작이 애초에 단편이었던 관계로, 긴장감을 끌어올려야 할 초반부의 에피소드들은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면서 공허하다. 한정된 공간에서 몇 안 되는 등장인물만으로 전개되고, 화면 전환의 속도도 빠르지 않아서 매 장면마다 분량에 비해 정보량이 적은 느낌이 들다 보니 더욱 그렇다. 또한 후반부는 과하게 압축되어 주인공들의 심리적 흐름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위 문제들이 한데 모인 결과 윤리적 딜레마를 지적하는 영화의 통찰은 결코 깊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블랙 코미디로서 목표 달성에 실패한 셈이다.
따라서 <스파이더헤드>는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조합에 비해 알맹이가 부족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참신한 소재로 눈을 사로잡지만, 그 시선을 2시간 동안 고정시키지 못하는 수많은 넷플릭스 영화들의 전철을 그대로 따른다. 결국 <스파이더헤드>는 팝콘 무비로서, 또 조셉 코신스키 감독과 마일즈 텔러의 <탑건: 매버릭>과 크리스 햄스워스의 <토르: 러브 앤 썬더> 사이를 잇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데 그치고 만다.
P(Poor, 형편없음)
소재만 그럴싸한 수많은 넷플릭스 영화의 전철을 착실히 따르는 범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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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벙커를 나갈 수 있는 열쇠는 내게 있다
줄거리
*스포일러 포함*
애인과 다툰 후 집을 나온 '미셸'은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가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한다. 눈을 떴을 땐, '하워드'라는 남자의 지하벙커였다. 그는 지구가 외계인의 침략을 당했으며, 대기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벙커에서 나가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자진하여 이 벙커에 들어왔다는 '에밋'이라는 남자.
처음엔 이 말을 믿지 않아 난동을 피우던 미셸은 이내 봉쇄된 출입문 앞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여자를 보고 나가기를 포기한다. 그런 미셸에게 하워드는 자신이 교통사고를 냈고,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미셸을 데리고 왔다고 고백한다. 그의 진심을 믿기로 한 미셸은 하워드, 에밋과 함께 사는 공동생활을 받아들인다.
벙커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던 어느 날. 갑자기 공기 여과기에 무언가가 걸려 몸집이 제일 작은 미셸이 환풍구를 타고 여과기 전원을 작동하러 가게 된다. 미셸은 그 공간의 창문 안쪽에 긁어서 도와달라는(help) 메시지를 남긴 흔적과 귀걸이 한 쪽을 발견한다. 그것은 하워드가 계속 말했던 딸 '메건'의 귀걸이.
은밀하게 에밋에게만 이 사실을 알렸더니 에밋은 사진 속의 여자가 메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결국 하워드의 말은 모두 거짓인 상태. 두 사람은 밖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한다. 나가기 위해 방호복과 방독면을 만드는 미셸. 그렇게 순조롭게 진행되나 싶던 찰나, 결국 두 사람의 행각이 들통나고 만다.
극도로 화가 난 하워드 앞에서 자신의 잘못이라 거짓말을 한 에밋은 총에 맞아 죽는다. 조금의 시간을 벌었지만 이내 방호복을 들킨 미셸은 격렬한 몸싸움 끝에 탈출하게 된다. 미셸은 바깥세상에서 하워드의 말처럼 외계인과 그 군함을 보고 놀란다. 외계인에게 죽임당할 뻔했으나 기지를 발휘해 살아남은 미셸은 차를 타고 질주한다.
라디오에서는 생존자들의 피난처인 '배턴루지'와 전쟁 중에 지원을 요청하는 '휴스턴'에 대한 방송이 연달아 나온다. 마침 그 갈림길에 선 미셸. 결국 차를 꺾어 휴스턴으로 향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감상 포인트
1. 처음 보면 황당, 두 번 보면 이해, 세 번 보면 감탄.
2.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움직이는데도 지루하지 않고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된다.
3. 편하게 볼 수 있지만 잘 만든 영화.
감상평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클로버필드 10번지]는 개봉했을 당시 영화관에서 직접 봤던 영화였다. 영화관에서 남은 음료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말도 안 되는 영화, 똥 싸고 안 닦은 영화 정도로 평가했던 기억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결말이 그때의 내게는 너무나도 파격적이었기 때문... 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결말부의 외계인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래서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생각이 앞선다. 보통 이런 영화에는 '음모론이 거짓이다'라는 결말이 어울리기도 하고, 익숙하기 마련이니까. 하워드가 미셸에게 가스라이팅을 했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은 '엥? 진짜 외계인이 나온다고?'하며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SF와 미스터리, 스릴러를 가장한 성장물이다. 그래서 벙커 안에서 일어나는 심리 싸움은 모두 맥거핀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중요한 것은 미셸이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미셸이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는 것부터가 진정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것.
미셸의 삶은 벙커를 기준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벙커에서 나오기 전과 후로 나뉜다.
여태껏 미셸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도망치고 외면해왔다. 첫 장면에서 미셸이 애인과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사람들은 미셸이 심각한 폭력에 시달렸을 거란 예측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애인의 말마따나 '말싸움'을 했을 뿐이다. 전화를 건 애인과 한 마디 대화를 나눠보려 시도조차 하지 않는 미셸은 나약하다.
과거의 상처가 트라우마가 되어 사사건건 그녀의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어릴 적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렸던 미셸로서는 문제에 부딪힐 용기도, 싸워서 이겨낼 자신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도망치고 외면하는 것만이 문제의 답이요, 그 밖의 방법은 그녀로선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미셸은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앞을 막아주었던 에밋의 죽음을 목격하며 변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도, 자신조차 구원하지 못해 쩔쩔매던 미셸은 지하 벙커에서 나오기 위해 하워드와 사투를 벌인다. 방호복은 완성이 되었지만, 이제 더 이상 하워드를 막아줄 에밋은 없다. 즉, 자신이 직접 하워드와 맞서 싸우지 않으면 이 벙커에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벙커를 하나씩 품고 산다.
그곳은 어떤 위험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길 때 그곳으로 숨어버리면 안전하다. 문제가 나를 지나갈 때까지, 나를 절대로 헤칠 수 없게 문을 꽁꽁 걸어 잠그면 된다. 하지만 벙커를 나올 때는 바깥에서 날 꺼내주길 기다려선 안 된다. 스스로 나가기를 원치 않으면 이 벙커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 지하 벙커를 나온다는 것은 끔찍한 현실의 위험을 마주해야 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하지만 사실 정말 무서운 것은 바깥의 위험이 아니라, 모든 위험으로부터 숨으라고 유혹하는 벙커 안의 나 자신이다. 미셸은 자신을 구석으로 내몰던 스스로를 집어던지고 결국 벙커 바깥으로 나선 것이다.
갈림길에 선 미셸은 편히 쉴 수 있는 피난처인 배턴 루지와 전쟁 지원자를 구하는 휴스턴에서 결국 전쟁터를 택한다. 내면의 자신을 이겨냈기 때문에, 피하고 숨고 외면하기보다는 들이받아보자는 결정도 할 수 있었다. 결연한 표정으로 차를 돌린 미셸은 이제 학대당하는 어린 소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소녀가 아니다. 앞으로 나서서 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어른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얼마 전 리뷰했던 [글리치]와 완전히 다른 양상이 된다. 전개 방식과 소재까지도 모두 흡사하지만, 단언컨대 [클로버필드 10번지]가 훨씬 더 나은 결말을 내놓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하 벙커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인물의 진정한 성장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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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시감만 넘치는 오컬트 활극
강동원 주연의 캐주얼한 오컬트 활극. 작년 추석 시즌에 개봉한 <천박사 퇴마 연구소: 설경의 비밀>(이하 ‘<천박사>’)가 내세운 무기다. 하지만 기대만큼 이 무기는 관객들에게 먹히지 않았다. 결국 191만 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손익분기점은 240만 명을 넘기지 못한 것. 다양한 장르적 쾌감을 믹싱했음에도 왜 이렇게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퇴마사로 활동하는 천박사(강동원)는 귀신을 믿지 않는다. 퇴마는 곧 인간의 마음을 보살피는 과정이라 생각하는 의사이기 때문. 가짜 퇴마의식은 천박사의 뛰어난 연기와 멀티 플레이어 조수 인배(이동휘)의 기계장치 트릭이 합쳐져 만들어진다. 천박사가 잘생겨서인지, 아님 연기를 잘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뢰자들은 모두 속는다. 그러던 어느 날 천박사에게 귀신을 보는 능력자 유경(이솜)이 찾아온다. 동생 유민(박소이)에게 빙의 된 귀신을 쫓아내 달라는 것. 설마하는 생각에 유경의 집으로 가서 기존 방법대로 퇴마를 진행한 천박사는 뜻밖의 인물을 만난다. 바로 무당이었던 할아버지와 동생을 죽인 장본인 범천(허준호). 천박사는 그동안 갈아왔던 복수의 칼을 뽑아든다.
<천박사>는 원작 웹툰 ‘빙의’를 각색해 영화적 상상력, 특히 무속신앙을 기반으로 한 오컬트적인 재미와 액션 활극을 더했다. 오컬트 장르가 주는 신비롭고 독특한 느낌,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와 귀신과의 호쾌한 대결은 그 자체로서 구미를 당긴다. <천박사> 또한 이 두 가지 요소를 믹스하고 코믹함을 더해 관객들을 향한 어필을 시작한다.
초반 이야기는 궁금하다. 천박사의 과거 일과 범천과의 악연, 그리고 부제인 설경의 비밀 등 계속해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가 등장하고, 이를 동력삼아 마지막 대결까지 나아간다. CG의 힘을 빌려 오컬트와 판타지 요소 가득한 액션 비주얼은 취향을 타긴 하지만,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 역할은 충분히 한다.
하지만 이내 재미가 반감되는 건 이 영화만이 가진 오리지널리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요소가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든다. 퇴마의식이나 무속신앙의 활용도는 여타 비슷한 장르의 영화와 차별화 포인트 없이 사용된다. 특히 귀신을 가두는 ‘설경’의 비주얼은 마블 영화에서 나올법한 이미지로 구현된다. 이렇듯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와 이미지의 범람은 초반 영화의 호기심마저 잡아먹는다. 마지막 대결 장면도 긴박감이 떨어져 힘이 떨어지는 양상이다. 캐릭터 또한 이 기시감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천박사와 인배의 관계는 셜록과 왓슨 박사의 잔향이 그대로 살아있다. 변주 아닌 변주를 했음에도 그 향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나마 영화가 관객을 멱살 잡고 끌고 가는 건 강동원의 몫이다. 이 배우의 매력은 영화의 모든 단점을 메우지는 못하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관객들을 주저 앉혀 천마사의 퇴마의식과 복수극을 마주하게 한다. 허준호, 이솜, 이동희, 김종수 등도 각 역할에 최선을 다해 연기를 펼치지만 워낙 스테레오 타입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력이 분출될 여지는 좁다. 다만, 특별출연을 한 박정민의 연기는 발군이다.
<천박사>는 명절 대목 가족 단위 관객을 주요 타깃으로 한 기획물로서의 한계를 보여준다. 물론, 이 영화가 킬링 타임용으로 즐길만한 구석이 아예 없는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기대치를 넘지 못하는 기획 영화로서 머물렀다는 아쉬움은 남는다. 마치 멋지게 설경을 만들고, 그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이다. 쿠키 영상을 보면 영화는 시리즈물로서 나아가려는 계획을 가진 듯한데, 기대보다 우려가 더 앞서는 건 필자만은 아닐 것 같다.
사진 제공: CJ ENM
평점: 2.5 / 5.0
한줄평: 무색무취 퇴마굿판!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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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덤블도어의 비밀> 내용과 형식의 부조화가 초래한 난국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강력한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매즈 미켈슨)'가 과거 범죄를 사면 받고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키워나가자 '알버스 덤블도어(주드 로)'는 '뉴트 스캐맨더(에디 레드메인)'에게 마법부 오러이자 형인 '테세우스(칼럼 터너)', 순혈 마법사 가문의 후손인 '유서 프(윌리엄 네이디람)', 마법학교의 교사인 '힉스(제시카 윌리엄스)', 머글 '제이콥 코왈스키(댄 포글러)' 등으로 이루어진 팀을 이끌고 그린델왈드를 저지할 임무를 맡긴다. 이에 뉴트와 친구들은 마법 세계의 지도자로 선출되어 머글과의 전쟁에 나서려는 그린델왈드와 '퀴니(앨리슨 수돌)'를 비롯한 그의 추종자들에 맞서 치열한 혈투를 펼친다. 한편, 전쟁 못지않은 위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은 덤블도어는 가문의 비밀이 담긴 '크레덴스/아우렐리우스 덤블도어(에즈라 밀러)'를 조우하면서 더 이상 방관자로 머물 수 없는 순간을 맞이한다.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은 2016년 <신비한 동물사전>, 2018년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비밀>에 이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으로, 시리즈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다. 전편인 <그린델왈드의 범죄>가 혹평을 받으며 기대 이하의 흥행 성적을 거둔 만큼, <덤블도어의 비밀>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프리퀄이자 5부작으로 기획된 <신비한 동물사전> 시리즈의 존속 혹은 종결을 결정지을 수 있는 분기점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공개된 영화는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듯 보인다. 우선 번잡하다. 너무나도 많은 내용을 한 데 다룬다. 부제에 충실한 덤블도어 가문의 출생의 비밀과 오해, 헤어진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과거사와 정치적 수싸움, 그린델왈드를 막기 위한 뉴트와 친구들의 미션, 그리고 남은 시리즈를 위한 포석 깔기 및 전편들에서 던져진 복선 회수까지. 결코 짧지 않은 2시간 20여분의 러닝타임이 부족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공허하다. 많은 이야기를 보고 들었지만, 남는 것은 없다. 뉴트의 모험과 신비한 동물들의 활약상이 간신히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선과 악의 구도로 집결한 마법사들의 대결은 스케일에 걸맞은 긴장감을 불어넣지 못한다. 전편처럼 또 한 번 길고 긴 예고편을 본 듯한 인상도 남는다. 어째서일까? 그 중심에는 내용이 달라졌는데도 과거의 형식을 고집한 각본이 있다.
<신동사>와 <해리 포터>의 결정적 차이점, 사랑
사실 <덤블도어의 비밀>의 전반적인 구조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선을 상징하는 덤블도어가 한쪽에 있고, 악을 상징하는 어둠의 마법사 그린델왈드와 볼드모트가 반대쪽에 위치한 가운데, 덤블도어의 대리인으로서 뉴트 스캐맨더와 해리 포터가 있다. 즉, 직접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는 뉴트/해리 대 그린델왈드/볼드모트이고, 덤블도어는 뉴트와 해리를 지도하는 감독인 것이다. 문제는 덤블도어-뉴트-그린델왈드가 만드는 이야기와 덤블도어-해리-볼드모트의 관계가 빚는 이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전자와 후자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상이하다는 점을 <덤블도어의 비밀>은 간과하고 있다.
잠시 시선을 돌려 <해리 포터>를 살펴보자. <해리 포터> 시리즈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실제로 <해리 포터> 소설과 영화를 막론하고 사랑은 가장 중요한 마법으로 묘사된다. 해리가 몇 번이고 볼드모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부모님과 선생님, 동료,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과 우정의 힘이 컸다. 반면에 볼드모트는 죽을 때까지 사랑을 이해하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그에게는 연인도, 친구도, 동료, 가족도 없었다. 심지어 영혼을 잘라내는 어둠의 마법인 호크룩스를 연달아 만들며 자신의 영혼을 불구로 만들 정도로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해리 포터>가 사랑의 중요성을 외치는 방법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실천하는 이들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들을 이기는 모습만 보여주면 됐고, 비교적 단순한 선악 구도도 충분히 설득력 있었다.
그런데 그린델왈드는 볼드모트와 다르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이미 전편에서 그는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악인으로 묘사되었고, 1편에서도 자신을 도와주던 크레덴스가 눈앞에서 파괴되자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또 이번 영화에서 그와 덤블도어가 연인관계였던 것도 명시적으로 밝혀진다. 그러니 단순히 사랑의 유무로 선악을 나누는 과거의 방식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당장 덤블도어와 뉴트는 머글과 마법사, 신비한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그 자체로서 사랑한다. 하지만 그린델왈드는 머글보다는 마법사를, 또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마법사와 동물만 아낀다. 그러니 영화는 둘 중 어떤 사랑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보다 깊은 차원의 고찰을 보여주어야 한다. 머글과 전쟁을 펼치려는 계획이 원래 덤블도어의 것이었다고 일갈하는 그린델왈드의 대사만 보더라도, 이 갈등과 대립이 쉽게 매듭지어질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과거를 답습하는 데 그친 각본
하지만 <덤블도어의 비밀>의 시나리오는 익숙한 길을 고집한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차이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하기보다는 그린델왈드에게 악의 이미지를 거듭 덧씌움으로써 손쉽게 선악의 대결 구도를 만들려고 한다. 그린델왈드의 행보가 재고의 여지없는 악인인 아돌프 히틀러를 연상시키는 것이 대표적이다. 뮌헨 폭동 이후 감옥에 갔던 히틀러는 출소 이후 본래 롤모델이었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달리 쿠데타보다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의회주의 노선을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지난 두 편에서 각종 테러를 저질렀지만, 사면을 받는 데 성공하고, 끝내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 마법 세계의 권력을 회득하려고 시도하는 그린델왈드의 행보와 정확히 일치한다. 광기가 번뜩이던 조니 뎁의 그린델왈드와 달리, 매즈 미켈슨의 그린델왈드로부터는 속내와 깊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신 영화는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크레덴스, 즉 아우렐리우스 덤블도어의 서사를 최소한의 수준만 남겨둔다. 덤블도어 가문의 사생아인 그는 가문의 오점이 될 수도 있고, 알버스 본인에게도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일깨우는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알버스 덤블도어는 아우렐리우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대신, 자신의 과거 행적을 반성하고 또 일찍이 가족을 챙기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면서 그를 보호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반면에 그린델왈드는 철저히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아우렐리우스를 아끼며, 그가 가치를 입증하지 못하며 가차 없이 엄벌한다. 즉, '덤블도어의 비밀'은 그 자체로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가치관의 차이를 효과적으로 비출 수 있는 소재였지만, 과거를 답습한 시나리오에 의해 끝내 빛이 바래고 만다.
중심을 잡지 못해 흔들리는 영화와 캐릭터
더 나아가 <덤블도어의 비밀>이 해리의 자리에 뉴트를 투입하고도 왜 뉴트여야만 하는지를 보여주지 못한 것 역시 과거를 답습한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해리에게는 볼드모트와 싸워야 할 이유가 충분했다. 부모를 죽인 원수였기 때문이다. 또 호크룩스나 죽음의 성물 같은 다양한 마법으로 인해 둘의 관계는 더욱 끈끈하게 묶인 바 있다. 해리포터와 덤블도어의 사이도 단순한 학생과 교수 관계가 아님이 분명했다. 그에 반해 뉴트와 그린델왈드, 뉴트와 덤블도어의 관계는 3편에 이르기까지 명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선과 악의 대결에 뉴트가 주인공으로 나서야 할 운명적인 이유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뉴트가 자주 모습을 보일수록 오히려 영화가 중점으로 다루어야 할 덤블도어 가문과 크레덴스의 이야기, 그리고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관계가 설 자리는 줄어든다. 그렇다고 뉴트와 친구들의 비중을 줄이자니 그가 엄연히 시리즈의 주인공이라는 점이 문제가 된다. 제목이 나오기 전까지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가 처한 이 난국을 함축하고 있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짧은 만남은 그들이 갈등의 중심축이고, 크레덴스와 뉴트는 그 정치적 갈등에서 활용될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참된 지도자를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신비한 동물, '기린'만이 필연적 관계가 없는 이들을 느슨하게 엮는 유일한 연결고리가 되어준다. 그 결과 영화의 구성은 시작부터 중심을 잃고 정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는 캐릭터들의 문제로 이어진다. 핵심적인 주연 캐릭터들조차 애매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조연들도 자신만의 매력이나 개성을 보여주기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영화는 그들의 행보를 간신히 펼쳐놓고 정리하기에 급급하다. 히로인이어야 할 '티나(캐서린 워터스톤)'는 카메오나 다름없고, 퀴니나 테세우스 등은 그동안 쌓아온 매력을 상실하며, 유서프의 오락가락한 줄타기는 좀처럼 개연성을 느끼기 어렵다. 새롭게 합류한 '애버포스 덤블도어(리처드 코일)'는 활약할 만한 기회도 마땅히 않으며, 그나마 머글인 제이콥 코왈스키만이 고유의 성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활기를 불어넣으려 고군분투한다.
블록버스터에 걸맞은 최소한의 묘미
물론 <덤블도어의 비밀>에는 진일보한 측면도 있다. 기존 <해리 포터> 시리즈로부터 큰 폭의 변화를 준 액션 연출이 대표적이다. 그간 마법사 간의 결투에서는 지팡이에서 뻗어나가는 주문끼리의 충돌 혹은 주변 사물이나 환경을 이용하는 마법을 주로 묘사해 왔다. 이번 영화는 다르다. 덤블도어와 크레덴스, 덤블도어와 그린델왈드의 결투 장면처럼 액션의 형식이 육체적으로 근접전을 벌이는 가운데 지팡이와 마법의 힘을 활용하는 형태로 달라지면서 더욱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선보이는 데 성공한다.
액션을 단순한 물리적인 충돌로 삼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관계와 그 변화를 보여주는 장으로 활용하는 연출도 인상적이다. 너무 많은 에피소드와 서브플롯으로 인해 스토리 전개에 과부하가 걸린 듯 느껴지는 가운데, 주요 인물들의 심경 변화를 시각적으로 전달해 직관적으로 이해시키고 영화의 템포를 순간적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출 상의 특이점은 데이빗 예이츠 감독의 장점인 인물 간의 심리묘사를 잘 보여주며, 감독에 앞서 불완전한 각본이 이번 작품이 노출한 여러 문제의 근본 원인임을 방증한다.
또한 <해리 포터> 영화들이 그러했듯이, 최소한의 장르적 쾌감을 잡아내기도 한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가 성장 영화였고, <해리포터와 혼혈왕자>는 로맨틱 코미디였듯이, <덤블도어의 비밀>은 첩보물의 형식을 빌려오고 있다. 팀을 구성하고 그 팀으로서 실행에 옮기는 두 차례의 작전이 주요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마법사 버전의 <미션 임파서블> 같기도 하다. 다만 그 디테일이 예상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아쉽다. 첫 임무에서 실패한 후 재정비된 팀이 두 번째 임무를 성공한다는 클리셰는 물론,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대사나 뉴트의 가방을 활용한 속임수 등은 그리 낯선 디테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덤블도어의 비밀>은 <해리 포터> 본편에서 간략하게 등장했던 과거사들을 보다 풍성하게 채우고, 해리 포터 팬들을 마법 세계에 다시 한번 초대하는 팬 서비스를 하는데 그치는 듯 보인다. 호그와트와 마법사들의 마을인 호그스미드와 애버포스의 술집인 '호그스해드'가 주된 배경 중 하나인 가운데, 호그와트 대연회장과 필요의 방, 퀴디치, 맥고나걸 교수의 젊은 시절 모습은 눈길을 사로잡는다. 열성적인 팬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시리즈의 여러 설정이 어긋나는 아쉬움을 달랠 만한, 그리고 반기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만 이러한 과거 답습의 대가로 <덤블도어의 비밀>은 시리즈를 이어갈 동력을 확인시켜주거나, 독립된 작품으로서 인정받을 만한 부분은 갖추지 못했다. 특히 전편인 <그린델왈드의 범죄>에 비해 정돈된 감은 있지만 소설에 적합한 내용을 한 시나리오에 과하게 집약시킨 듯한 단점은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다. 결국 두 번째 타석에 이어 세 번째 타석에서도 삼진 아웃당한 <신비한 동물들과 덤블도어의 비밀>은 다음 타석에 대한 기대감보다도 걱정을 먼저 키우며 애매하고 답답하게 시리즈를 일단락한다.
P(Poor, 형편없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자명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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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이 번식하는 사악한 방법
논어에 '예가 아닌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에서 '예가 아닌 것 = 사악한 것'으로 인식되어 이 말은 일본에서 귀와 눈과 입을 가린 원숭이로 표현된 것으로 유명하다. 서양에서는 이를 'See No Evil, Hear No Evil, Speak No Evil'이라고 표현한다. 제목은 그 마지막을 따온 것이다. 원작은 동명의 덴마크 영화지만, 결말이 다르다. 하지만 이번에 개봉한 할리우드 리메이크작 <스픽 노 이블>이 더 제목에 걸맞은 메시지를 주고 있다.
미국인 가족인 벤과 루이스, 딸 아그네스는 이탈리아 휴양지에서 한 영국인 가족 패디, 키아라, 아들 앤트를 만난다. 나중에 벤과 루이스 가족은 영국으로 이주를 하게 되고, 거기서 패디와 키아라 가족의 초대를 받고 그 집으로 주말여행을 가게 된다. 거기에서 패디 가족의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게 된다. 줄거리만 보자면 뻔한 스토리의 스릴러물 같고, 캐릭터도 엄청 독특하거나 다층적이진 않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른 스릴러와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광기의 살인마와 그 공포를 기대한다면 초반이 아주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덩치 크고 조금 무례하게 느껴지는 이 묘한 인물인 패디(제임스 맥어보이)는 등장부터 불편하다. 남에게 피해 끼치지 않게 조용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벤과 루이스에게, 패디와 키아라 가족은 아무렇지 않게 시끄러움과 무례함으로 조금씩 선을 넘나 든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버릴 수 없는 것이, 중간중간 들어가는 친절함과 솔직한 모습들이 보여주는 매력이다. 이 영화는 낯선 환경,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 그 사이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을 교묘하게 잡아낸다. 불편하지만 감당해야 하고, 싫어도 좋은 척해야 하는 우리의 삶 그 자체다. 영국에서 운전하던 벤은 자신이 살던 미국과 운전 방향을 헷갈려 교통사고를 낼 뻔한다. 서로 다른 삶에서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한지 구분해 낼 수 있을까? 좌측 운전이 선한가 우측 운전이 선한가?
패디가 이 가족들을 옭아매는 방식은 너무나 헐렁해서, 그냥 벗어나기 쉬울 것 같다. 하지만 그 지점에 함정이 있는 것이다.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수준의 불편함이라, 그것은 문화가 다른 외국인들을 만나서도 서로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악인 줄도 모르고 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니까. 그렇게 악은 우리 안에 교묘하게 스며든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아들이라고 생각했던 앤트의 이상한 행동들이 조금씩 보일 때, 이 영국인 가족의 진실이 드러난다. 패디는 여행 중인 가족들을 초대해 살해하고, 그 아이를 잡아두고 키우고 다시 죽이는 연쇄살인범이었다는 것. 앤트는 이전에 여행온 덴마크 부부의 아들이었고, 앤트의 친부모는 죽었으며 앤트는 혀가 잘린 채 아들 노릇을 하고 있던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초반부터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고, 범죄 스릴러에서 종종 나오는 콘셉트의 살인범 유형이라 크게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 영화의 메시지는 반전이나 잔혹한 싸움과 살인의 모습 등이 아니다. 사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악의 대물림이고, 그것이 대물림되는 방식이다.
패디는 자신의 아버지를 언급하며 거의 악마처럼 묘사하고 굉장히 힘들어한다. 그리고 키아라가 자신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라며 고마워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전체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그 아버지라는 인물도 역시 연쇄살인범이었거나 혹은 그에 준하는 범죄자였거나, 패디 자신도 친아들이 아닌 납치된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에게 행했던 악한 일들을 증오하지만, 역시 자신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일들을 저지르고 있다.
루이스가 죽기 직전 커터칼로 패디를 그어 창고에서 도망칠 때, 갑자기 패디의 부인인 키아라는 자신도 데려가 달라며 자신 역시 피해자라고 말을 한다. 어릴 때 잡혀와서 지금까지 그러고 있다고. 패디가 키아라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그 말은 사실처럼 보인다. 하지만 키아라는 앤트처럼 적극적으로 도망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패디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이것은 피해자에게 자신의 범죄를 돕게 만들어, 가해자로 만들어 묶어두는 악랄한 방식이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었던 <나는 신이다> 다큐멘터리를 보면, 사이비 종교의 여신도들에게 성폭행을 하고 그들에게 여자를 데려오게 시킴으로써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든다. 그럼으로써 더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그 과정에 교묘한 가스라이팅이 들어가, 피해자의 정신에는 자신이 원해서 악을 행한 것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 잡는다.
언듯 스쳐가지만, 패디가 키아라에게 하는 '네가 원해 이 짓을 한 거야''이것은 네 탓이야'라는 가스라이팅은 결혼기간이라고 밝힌 17년간 이어져 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단순 피해자가 아닌 적극적인 범죄자가 되었다. 나 역시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기에 몸서리치게도 끔찍한 부분이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가스라이팅을 당하면 자신의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미 범죄자와 하나의 정신을 공유한다. 그렇게 악은 대물림되고 번져나간다.
결말에서 가장 악랄한 부분은 바로 부모가 살해당하고 혀를 잘린 채 아들노릇을 해야 했던, 앤트의 모습이다. 벤과 루이스는 쓰러진 패디를 두고 빨리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앤트는 패디에게 부모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복수를 한다. 그 상황에서 악은, 패디의 입을 통해 사악한 방법으로 자신의 번식을 시도한다. "그래, 그래야 내 아들이지."
나이가 어릴수록, 사람은 주변 어른들에게 큰 영향을 받는다. 부모가 아이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하지만 패디는 자신이 그렇게 벗어나지 못했던 잔혹한 아버지의 악을, 앤트에게 그 말로 물려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은 앤트를 더욱 자극해 앤트는 잔혹하게 패디를 살해한다.
'사악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말라'라고 한 것은, 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쉽게 스며들고 번지므로 악한 것 근처에는 아예 가까이하지도 말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그것은 분명 복수였다. 그리고 그렇게 끝을 내야,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악은 정말 대가 끊긴 것일까? 적어도 몇 개월 이상 악과 같이 살았던 앤트에게 패디는 어떤 존재가 되었을까. 그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을 평생 되새기며 살게 되진 않을까? 또 우리는 내가 당했던 피해의 악을 다른이에게 같은 모습으로 가해하고 있지는 않을까? 영화 시작에 조용하게 계속 비추던 백미러 속의 앤트의 모습은 많은 생각을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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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리호〉, 신파가 죽어야 한국영화가 산다
암울한 모습의 2092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승리호〉는 나쁘지 않은 오락 영화다. UTS라는 거대 기업이 주도하여 환경오염으로 황폐해진 지구를 버리고 화성 이주를 시도한다는 게 영화의 큰 얼개다. 여기에 우주 쓰레기 청소부가 UTS의 음모를 발견하고 쫓는다는 설정이 더해진다. 캐릭터들은 적당한 매력을 갖췄고 비주얼은 ‘한국형 우주영화’라는 수식어를 빼고 봐도 어색함이 없을 만큼 빼어나다. 〈승리호〉는 적당한 교훈과 재미, 시각적 쾌감이 어우러진 영화다.
하지만 나쁜 점도 있다. 〈승리호〉의 이야기 동력은 신파다. 태호(송중기 배우)의 부성애가 없으면 영화는 전개되지 못한다. 부성애가 언제나 신파인 것은 아니지만, 〈승리호〉의 부성애는 신파가 맞다. 부성애에 대한 ‘보편적’인 이미지에 기대 그 어떤 새로운 감정선도 만들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신파를 욕함에도 왜 신파는 상업영화에서 걷어지지 않는 걸까?
넷플릭스 영화 〈승리호〉 스틸컷 ⓒ넷플릭스
신파가 보편적 정서를 대변한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파는 주로 가족적 감정에 기반을 둔다. 가족이 주는 평온함, 안온함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많은 상업영화는 이 안온함·평온함이 어떻게 깨지고 복원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문제는 여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관객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
한국형 신파가 가족주의를 당연한 감동의 코드로 삼을 때 상상되는 대중의 범주는 지나치게 협소하다. ‘정상가족’으로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가족 실천 혹은 가족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할 수 없는 다양한 삶이 여기저기서 가시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가족주의적 신파가 ‘보편적 정서’의 구체적 내용으로 상상될 때, 이들은 ‘대중’의 범주에서 배제된다. 가족주의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은 대중으로 인정받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대중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언젠가부터 한국영화는 상업성을 들먹이며 규범적 정상성의 경계를 확정짓는 판관 역할을 하고 있다. 누구도 한국영화에 그런 권한을 부여한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가족주의 신파는 보편적이라서 선택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상업영화에 선택됨으로써 보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선택의 이유는 창작자의 무능(혹은 게으름)이다. 변화를 마주하길 거부하고 익숙한 상상력을 아무 고민 없이 끌어다 쓰는 것이다. 이제는 변화가 필요하다.
설령 한때 가족주의적 신파가 ‘보편’ 정서였다 하더라도, 이제는 변화한 현실에 맞는 다양한 감정선이 영화의 전면에 드러날 필요가 있다.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채, 무책임한 자기복제를 반복하며 철 지난 상상력을 재생산하는 한국영화의 가족주의적 신파는 폐기되어야 한다.
〈승리호〉가 ‘한국형 SF의 시작’이 아닌 ‘한국형 신파의 게으른 반복’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이유다. 신파의 폐기는 상업영화가 사는 길이다. 상업영화가 관객 수를 이유로 낡고 보수적인 습관을 반복하는 한, 기민한 감각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상상력을 펼쳐내는 영화는 영원히 '독립영화', '예술영화'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좋은 미래를 꿈꿀 자격이 있다. 〈승리호〉도 같은 꿈을 꾸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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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4주 최신 개봉영화(캔디맨, 나의흑역사 로맨티카, 로빈의 소원, 아하 테이크 온미, 종착역)
[WEEKEND CHOICE MOVIE] 2021년 9월 4주차 #개봉영화
#최신영화#영화추천 #영화예고편
#캔디맨 #나의흑역사로맨티카 #로빈의소원 #아하테이크온미 #종착역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s://blog.naver.com/rainbbox
@Weekend Choice Mov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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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곳의 영화제를 다녀오며 느낀 점
#한예종졸업영화제 #한국영화아카데미졸업영화제 #단편영화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직접 인사 드리는 영화등대입니다.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제 근황과 제가 다녀왔던 영화제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영화리뷰를 기대하셨던분들에게는 조금 죄송스럽지만, 근래에 제가 영화들을 보며, 영화제를 다녀오며 느껴진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건 순전히 저 개인적인 생각이고, 저는 영화관계자가 아닌, 오로지 팬의 입장에서 느껴졌던 감정을 이야기해볼테니, 제가 하는 말을 전적으로 믿어달라는것도 객관적이다는것도 아니다는 점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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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레커닝> 메인 예고편
흑사병이 유행하던 20세기 초 유럽. 흑사병으로 남편을 잃은 그레이스는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마녀로 지목되며 마녀재판에 회부된다. 지하 어두운 감옥에 갇힌 그레이스는 고문과 핍박 속에서도 진실만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레이스가 갇힌 감옥에는 너무나 끔찍하고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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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버즈 라이트이어> 파이널 예고편
상초월 스케일과 함께 돌아온 새로운 '버즈'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