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필 K2022-03-22 17:41:25
철학적 고찰은 없고 영상미와 액션만 자랑한다
<극장판 소드 아트 온라인 -프로그레시브-: 별 없는 밤의 아리아> REVIEW
필자는 원작 시리즈인 소드 아트 온라인을 단 한편도 보지 않은 사람이라 걸즈 앤 판처 최종장 같이 내용이 이해 안가면 어떡하나 우려가 많았지만, 다행히 본 영화의 내용은 1부의 리메이크 이기에 서사 이해에 전혀 문제는 없었다. 본 작품에 등장하는 소드 아트 온라인이라는 가상세계에서 나갈 수 없게된다는 설정은, 마치 현재 실제로 가상현실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비판적 시선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와 같은 긍정적, 부정적 시선은 이를 심도 깊게 다뤄낸 워쇼스키 자매의 "매트릭스" 같은 다른 영화에서도 볼 수 있지만, 본 작품은 단순 오락성 액션만 존재할 뿐, 철학적 고찰은 전무해 안타깝다. 이러한 고찰을 할려고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한 호소다 마모루의 "용과 주근깨 공주" 보다도 못한 수준이다. 가상현실 이라는 심도 깊은 주제를 단순히 유희성 소재로 소모해버린 것은 아쉬울 따름. 다만 액션씬은 공을 들인 것이 눈에 띄일 정도며, 캐릭터들은 현재로서는 과하게 통상적인 재패니메이션 캐릭터들이라 특이점이 없지만, 빛을 되게 아름답게 활용하는 영상미가 일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영화 외적인 부분으로 4DX 포맷이 다채롭고 세밀하게 설정되어있어, 4DX라는 포맷의 기술적 측면과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해서는 주목할만한 작품이라 생각이 든다. 심도 깊은 철학적 고찰은 전무해 예술적인 깊이는 없지만, 오락성 재미는 갖추고 있는 영화라 평하고 싶다. 솔직히 현재 TVA 기반 일본 애니메이션 중에는 오락성 마저도 전무한 캐릭터팔이만 존재하는 영화도 많은 것이 사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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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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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숨 쉬는 과거를 딛고 새 미래를 꿈꾸는 <스펜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스펜서>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여느 때처럼 별장에서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복싱데이까지 삼일 간의 연휴를 보내기로 한 영국 왕실. '다이애나 왕세자비(크리스틴 스튜어트)' 역시 왕실의 일원으로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별장으로 향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그녀의 크리스마스는 시작부터 편안하지 않다. 새롭게 별장을 담당하게 된 지배인 '그레고리 소령(티모시 스폴)'의 눈을 빌린 시어머니와 남편의 집요한 감시 속에서 헨리 8세의 두 번째 왕비였던 앤 불린의 환영을 볼 정도로 강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다이애나. 그녀는 유일한 말벗인 의상 담당자 '매기(샐리 호킨스)'와 두 아들에게 의지하며 간신히 예정된 행사들을 버텨내지만, 과거 어린 시절의 자유로운 기억은 그녀의 답답한 현재와 상충하며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힌다.
다이애나 스펜서. 20세기의 신데렐라로서 전 세계의 눈이 집중되었고, 대인지뢰 제거 운동과 같은 수많은 선행으로도 기억되었던 그녀. 동시에 그녀는 보수적이고 비밀스러운 영국 왕실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로서 수많은 가십을 만들어 냈기에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수없이 재현되고 있기도 하다. 당장 최근에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크라운>의 네 번째 시즌에서 다이애나 왕세자비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사실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소재로 한 작품은 신선함을 담보할 방법이 그리 많지 않다.
이에 파블로 라라인 감독과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만난 <스펜서>는 역사가 되어버린 그녀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다양한 상징을 토대로 15년에 걸친 왕실 속 그녀의 삶을 단 삼일 내에 농축적으로 그려내는 데 집중한다. 특히 영화는 작중 다이애나의 대사처럼 과거, 현재, 미래라는 서로 다른 타임라인을 스크린에서 교차시키며 그녀의 삶을 요약한다. 이를 토대로 <스펜서>는 새로운 미래를 그려내기 위해 살아 숨 쉬는 과거에 맞서 싸우는 현재를 살았던 한 개인의 고통을 생생히 전달한다.
<스펜서> 속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의 불륜을 묵과하고 오히려 인내하지 못하는 자신을 압박하는 영국 왕실과 맞서 싸운다. 중요한 것은 이 싸움을 개인과 과거라는 시간의 싸움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영국 왕실이 본질적으로 살아있는 과거이자 숨 쉬고 움직이는 의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에밀 뒤르켐에 따르면 의례는 종교의 내용에 깊은 의미와 활력을 주며, 종교가 목적하는 바를 완성시키는 가장 중요한 행위다. 의례는 믿음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신앙을 창조하고, 또 주기적으로 재창조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례는 역사적으로 권위가 인정된 행동 양식을 반복하며 종교의 의미와 상징성을 표현하고 강화한다.
영국 왕실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군주제는 과거 영국의 영화를 기억하게 해주는 상징이자 영국인들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과거의 관습을 유지하며 자신의 상징성을 유지하려 하고, 일원들 개개인의 개성과 삶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보수적이고 변화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이처럼 살아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고, 현존하는 과거인 영국 왕실의 본질을 왕실의 일원들을 통해 영리하게 포착한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엘리자베스 2세가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이 단적인 예시다. 카메라 앞에 모인 가족 중에 다이애나와 그녀가 두 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은 표정의 변화조차 전혀 없이 마치 인형처럼 보인다. 대화 중에 다이애나를 이해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이나 예법에 따라 불편하고 복잡한 식사 시간에 다이애나가 강한 스트레스를 토로하는 것 역시 존재 자체가 의례인 영국 왕실을 잘 보여준다.
이때 흥미로운 것은 <스펜서>가 영국 왕실이라는 액션보다는 그에 대한 다이애나의 리액션에 주목하고 있으며, 그렇기에 보다 희망찬 미래를 위해 사투를 펼치는 그녀의 고통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다. 당장 엘리자베스 2세와 찰스 왕세자와 같은 중요한 인물들이 초반부에 등장하지 않는다. 또 설령 등장하더라도 영화는 그들을 상당히 원거리에서, 뒷모습 위주로 비춘다. 이야기의 전개나 다이애나의 감정선 변화를 위한 최소한의 순간을 빼면 왕실 관련 인물은 의도적으로 배제된다. 식사 시간이 되었거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가족들이 다 같이 열어보는 시간이 되었을 때, 행사의 순간은 건너뛰고 곧장 다이애나의 반응을 보여주는 식이다. 대신 영화는 오히려 의상 담당자나 셰프처럼 그 외의 인물들과 그녀 사이의 대화에 집중한다.
굳이 왕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그려내지 않고 그녀의 리액션만을 보여줌으로써 <스펜서>는 절제된 방식으로 그녀의 아픔을 극대화한다. 그래서 영화는 고통스럽다. 영화 포스터처럼 드레스를 입은 채 구토하는 언밸런스한 그녀의 모습만 보더라도 느껴진다. 찰스가 다이애나에게 선물한 진주 목걸이에는 이 모든 고통이 함축되어 있다. 다이애나는 그 목걸이를 착용한 자신의 모습을 오래전 헨리 8세에게 버림받은 천일의 여인인 앤 불린에게서도 본다. 즉, 이 목걸이에는 과거를 갱신하기 위해 정해진 역할에만 충실할 수 없는 이들이 퇴출되어 오는 역사가 담겨 있다. 앤 불린만 하더라도 왕실에 걸맞은 왕비로서의 자질이 부족해 사형에까지 처해졌으며, 이는 영화에서 앤 불린의 유령이 시간을 넘나들어 나타나며 다이애나를 만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스펜서>는 생명력을 잃고 의례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을 격렬히 거부하는 과정을 다루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영화는 다양한 연출과 상징을 통해 과거에 억눌리는 삶이 얼마나 처절한지를 알려준다. 왕실 별장으로 가던 중 어릴 적 자신이 자란 동네인데도 불구하고 길을 잃어버린 다이애나. 아무도 그녀를 돕지 못하는 가운데, 그녀에게는 과거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허수아비와 들판만이 위안이 된다. 어린 시절의 다이애나는 발레리나를 꿈꾸던 자유로운 존재였지만 지금은 왕실이란 공간에 묶인 채 그 압박을 견뎌야 한다. 그렇기에 허수아비에게 다가가 옛날에 입혀줬던 옷을 벗기는 그녀를 지켜보다 보면 허수아비는 다이애나의 현재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한편 영화는 왕실의 강한 법도로 인해 다이애나가 느꼈던 압박감을 관객들이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군인과 요리사들의 모습이 그 중심에 있다. 언제나 왕실과 함께 움직이는 그들은 강한 규율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집단이다. 그렇기에 도입부에서 이들이 교차로 주방을 향하는 모습은 살아있는 과거이자 의례를 눈앞에 만날 수 있는 순간이고, 항상 숨 막힌 채로 지내는 다이애나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이는 저택에 들어간 다이애나가 몸무게를 재는 장면에서도 잘 나타난다. 재미로 시작된 왕실의 규칙이라는 몸무게 재기에 다이애나는 강한 반감을 표한다. 그러다 보니 찰스와 엘리자베스 2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녀의 시선은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스펜서>는 단지 다이애나의 아픔과 고통을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희망을 노래하며 한 발짝 더 나아간다. 현존하는 과거가 남긴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과거다. 저택을 벗어나 들판으로 나가고자 하는 다이애나의 투쟁은 아이러니하게도 스펜서 가문의 옛 집과 앤 불린을 통해 완성된다. 폐가가 된 옛 집에서 삶에 대한 의욕을 잃은 다이애나는 앤 불린의 환영을 본다.
그 순간 영화는 유년 시절과 청년 시절, 현재의 다이애나가 번갈아 등장하며 들판을 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지나간 과거를 통해 현재의 변화를 이끌어내며 새로운 미래를 암시한다. 앤 불린의 불린 가문과 혈연적으로 이어진 '스펜서' 가문의 과거,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되기 전에 한 개인으로 살 수 있었던 '스펜서'의 과거를 통해 현재와 미래의 다이애나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암시를 보여준다. 왕비가 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찾기로 결심한 다이애나 스펜서를 비춘다. 그래서 자신처럼 왕실 안에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할 아이들을 구하는, 억지로 꿩 사냥에 나선 아이들을 구해내는 그녀의 모습은 강렬한 쾌감을 선사한다.
이러한 희망찬 후반부는 영화의 첫 장면과 대비를 이루며 영화의 균형을 잡기에 더욱 인상적이다. 당장 첫 장면에서 영화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교차시키면서 다이애나의 비극적인 삶을 강조한다. 영국 왕실의 별장으로 향하는 차들이 스크린 위에 나타나는데, 그 차들이 지나갈 때 도로에 떨어져 죽어 있는 한 꿩의 높이에서 차들을 포착한다. 이 장면에서 현재는 차들이 지나가는 순간이지만, 간신히 차들에게 치이지 않는 꿩의 모습은 영국 왕실 내에서 고통받던 다이애나의 과거를 보여주는 듯하기도 하다. 동시에 다이애나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을 알고 있다면 도로에 누워 있는 꿩 한 마리는 마치 미래의 다이애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스펜서>의 후반부는 과거를 이겨내고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다이애나를 비춘다. 이러한 대비는 수미상관의 구조 안에서 극적인 안정감을 추구하고, 동시에 그녀의 삶으로부터 비극과 희망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즉, <스펜서>는 희망을 노래하며 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한 여성의 삶을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비극을 영화적으로 기억하는 장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살아있는 죽음, 현존하는 과거에서 피어나는 다이애나 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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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스 폰 트리에, 어둠 속의 댄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들어가기에 앞서 1973년 발매된 Paul Simon의 싱글 <American Tune>이라는 노래를 잠시 소개하고자 한다. 가사를 읽어보면, 이 노래는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뼛속까지 지쳐버린 이민자들이 부르는 '미국식 한의 정서'를 담은 노래이다. 잉글랜드인들을 태운 메이플라워 호가 막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꿈과 이상으로 가득 차 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 되었지만, 70년대에도 여전히 미국이라는 신화는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60년대 말에 소련보다 먼저 달에 도착하였으며,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룬다. 노래의 화자는, 모든 것은 진보하고 변화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민자인 내 삶만은 나아지지 않는 것인지, 이 노동은 죽을 때까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를 묻는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메이플라워 이래 아메리칸 드림을 위한 여행은 계속된다. 이제는 오직 일신의 안식을 바라며 노래는 끝이 난다. 이 곡이 <마태 수난곡>의 코랄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은 한참 뒤에 안 사실이다. 예수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수난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면, 이들은 무엇을 위해 그 수난을 감당해야 했던가?
Many's the time I've been mistaken
And many times confused
Yes, and I've often felt forsaken
And certainly misused
Oh, but I'm alright, I'm alright
I'm just weary to my bones
Still, you don't expect to be bright and bon vivant
So far away from home, so far away from home
And I don't know a soul who's not been battered
I don't have a friend who feels at ease
I don't know a dream that's not been shattered
Or driven to its knees
But it's alright, it's alright
For we lived so well so long
Still, when I think of the
Road we're traveling on
I wonder what's gone wrong
I can't help it, I wonder what has gone wrong
And I dreamed I was dying
I dreamed that my soul rose unexpectedly
And looking back down at me
Smiled reassuringly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
We come on the ship they call The Mayflower
We come on the ship that sailed the moon
We come in the age's most uncertain hours
And sing an American tune
Oh, and it's alright, it's alright, it's alright
You can't be forever blessed
Still, tomorrow's going to be another working day
And I'm trying to get some rest
That's all I'm trying to get some rest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American Tune>을 부르는 Slmon & Garfunkel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 지난 2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랩 대령 역을 맡았던 故 크리스토퍼 플러머 배우의 부음 소식을 듣고서, 부모님의 추억팔이용으로 내가 어릴 적에도 같이 DVD로 돌려 보았던 영화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많은 이들이 위 영화에 대하여 세대를 아우르는 추억이자 향수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를 보았다. 12세 관람가, 아이슬란드 가수 비요크의 주연, 칸느 2관왕의 업적, 개봉 당시 평단의 극찬, 포스터에서 비요크의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표정 때문에 라스 폰 트리에 판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안이하게 관람을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악랄한 - 이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 의도를 가진 감독이 만든 2시간 20분짜리 악몽이었다. <American Tune>을 들었을 때, 희망도 절망도 아닌 <수난>의 정서를, 영화를 보면서 똑같이 느꼈다. 과거와 미래의 희망은 이 뮤지컬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을 얻기 위한 과정, 아주 지난하고 힘든 과정만이 영화 속에 담길 뿐이다.
소음은 리듬이 되고 음악이 된다
1964년 미국 워싱턴 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들과 함께 이민을 떠나온 셀마(비요크)는 싱크대 공장에서 일하면서 자신과 같은 유전병을 가진 아들의 눈을 고치기 위한 수술비를 벌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그녀가 일과 후에 뮤지컬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직장 동료 캐시(카트린느 드뇌브)도 참여하고 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60년대를 풍미했던 <쉘부르의 우산>의 그 카트린느 드뇌브가 변변치 않은 무대에 억지로 올라가 있는 듯한 기묘한 모습, 일사불란한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지 못하고 홀로 겉도는 셀마의 모습을 모습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고 의심쩍다. 그녀의 뮤지컬 실력은 무대가 아니라 공장 소음 안에서 꾸는 몽상에서만 제대로 발휘된다. <라라랜드>에서 전주만 들어도 신이 나는 뮤지컬 ost에 맞추어 화려한 의상을 입은 이들이 LA 고속도로를 점거한 군무에 익숙했던 우리의 눈은, 미국 동부 공장 노동자들이 위험하고 비좁은 공장 안에서 추는 춤이 어색하기만 하다.
6mm 핸드헬드 필름 카메라로 촬영한 셀마의 일상은 그녀가 보는 세상에 대한 어지럽고 둔탁한 인상을 담고자 노력하며, 마치 한 체코계 이민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사실성도 부여한다. 시력이 감퇴하는 대신에 예민해진 셀마의 청각은, 그녀의 삶이 매번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에 주변의 작은 소음을 감지한다. 그 작은 소음, 규칙적인 리듬으로부터 그녀의 노래는 다시 시작되고, 셀마는 혼자서 미치기 직전의 순간에 그 박자에서 다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뮤지컬 영화와 달리 관객은 뮤지컬 장면에 매번 온전히 몰입할 수가 없는데, 위험한 공장 프레스 앞에서 몽상을 하고 있는 셀마의 현실 모습이 점차 뮤지컬 장면 안으로 침투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같은 위태로운 현실의 침투를 통해 관객의 몰입을 일부러 훼방 놓으면서, 극이 후반부로 치달아 갈수록 뮤지컬이 나오는 몇 분을 시간이 멈춰버린 지옥처럼 길게 만들어 버리는 데 성공한다.
후반부로 치달을 수록 이 소음은 하나 둘 제거되면서 성스러운 종교 음악만이 남는다. 교도소 안에서 셀마는 '여긴 왜 이렇게 조용한가요?'라고 물으면서 절망한다. 이 때 비요크의 95년도 앨범 'It's so quiet'라는 노래와 뮤비가 즉각적으로 떠올랐는데, 설마 이것까지도 감독의 시니컬한 농담인 지를 의심했다. 이 곡의 뮤비안에서 비요크는 엠마 스톤 못지않게 화려한 원색 드레스를 입고서 뮤지컬의 여주인공처럼 '여긴 너무 조용해!'라고 주변을 조용히 시킨 다음, 가장 경쾌하고 자신 있게 꽥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셀마로 분한 그녀는 자신을 미치게 하는 고요를 쫓아내지 못한다. 겨우 통풍구로 들려오는 막연한 채플 소리에 의지하여 세상에서 가장 구슬픈 <My favorite things>를 부를 뿐이다.
비요크의 <It's so quite> 뮤직 비디오
유럽 감독이 만든 악몽 'American bad dream'
감독의 비행 공포증 때문에 이 영화가 유럽 여러 지역에서 촬영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배우 또한 데이비드 모스(빌 휴스턴 역)를 제외한 주요 캐릭터들은 모두 유럽 출신의 배우들이다. 우리는 미국 땅을 제대로 밟아본 적도 없는 덴마크 감독이 가상으로 구현해 낸 미국의 허상을 보고 있다. 2차 대전 이후, 정치와 경제적 패권은 모두 이 신대륙으로 넘어갔고, 유럽에는 오직 과거에의 향수와 문화예술적 자부심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착란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지 못하며 무용한 지 영화는 낱낱이 그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셀마는 동료들과 함께 <사운드 오브 뮤직>의 뮤지컬을 연습하고 있다. 마리아와 본 트랩가 아이들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알프스 산맥의 계곡과 산,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용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미라벨 궁전을 배경으로 이제 누구에게나 친숙한 '도레미송'을 부르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손을 거쳤으므로 티 없이 밝고, 아름답게 묘사된 장면들은 이제 관객을 골리는 악취미를 가진 유럽 감독에 의하여 생활에 찌든 유럽계 이민자들의 소일거리 취미로 축소, 재현된다.
셀마의 예술적 기질과 취미는 생산 활동에 저해되는 결격 사유가 되고, 아들의 병원비가 아니라 아버지에게 돈을 보내고 있다는 변명은 '공산주의에서는 모든 것을 나누는군요'라는 조롱으로 돌아온다. 체코에서의 좋았던 시절을 발설하면 '그러면 체코로 돌아가지 왜 여기 있냐'는 핀잔이 돌아온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이웃의 얼굴을 한 미국 사회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은 놀랍지도 않지만, 그는 2차 대전 후 더 나은 삶을 찾아서 맹목적으로 미국 땅을 밟은 유럽계 이민자들의 무력함,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노래하는 백치미, 현실과 이상의 혼돈, 후세대를 위한 자발적이고 맹목적인 희생까지도 비틀어 보여준다.
빌과 제프, 체격이나 인상이 비슷한 마을의 두 남자가 셀마의 주위를 맴돈다. 빌은 그녀에게 트레일러를 내주고, 아들 진을 낮동안 돌봐 주는 친절하고 선한 이웃이고, 제프는 셀마에게 호감을 보이는 낯선 이다. 눈이 멀어가는 셀마에게는 이 둘의 의도와 진심을 분간할 능력이 없다. 결국 셀마는 태워주겠다는 제프의 호의를 거절하고 그녀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가까운 빌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결정적인 그녀의 선택, 빌을 의지하고 서로의 비밀을 공유한 것을 계기로 그녀의 운명은 추락의 길을 걷는다.
영화가 빌을 묘사하는 방식은 흔한 미국 영화에서 악당을 그리는 방식과는 다르다. 그는 사악하기보다는 저열한 인물이다. 치밀하다기보다는 '눈 가리고 아웅'식의 거짓말로 둘러대고, 부인이 그의 거짓말을 믿도록 신파 장면을 연출하며, 경제적 정신적 파산으로 인해 죽음을 생각해왔으나 스스로 죽을 용기도 없어서 셀마에게 그 역할을 위임한다. 부인과 셀마뿐 아니라, 정의를 지키다 순국한 희생양으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고 스스로 믿을 만큼 자기 자신까지 속이는 비열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셀마의 범죄 장면은, 살면서 웬만하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지리멸렬하였다. 앞서 말했듯이 이 장면을 끔찍하도록 길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뮤지컬 대사와 음악이다. 이제 그녀의 환상 속에서 강은 핏빛으로 흐르며, '날 용서할 수 있나요'라는 그녀의 노래는 부조리의 끝을 달린다.
수녀에서 어머니로, 어머니에서 수녀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는 수녀에서 선생님으로, 다시 트랩 가 아이들의 어머니로 신분이 바뀐다. 마리아의 재기 발랄함과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하는 수녀원, 트랩 대령과의 초반 대립을 거쳐, 그녀는 오직 자신의 노래로써 한 가족을 변화시킨다. 후에 그녀의 부재를 앓는 아이들을 위해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로 돌아와 한 가족을 이루게 된다. 반면 <어둠 속의 댄서>의 셀마는 숙제하는데 이상한 질문만 하는 어머니, 아들의 생일에 자전거도 못 사주는 어머니, 범죄자 어머니, 아이가 찾아도 답이 없는 어머니이다. 셀마는 그녀의 유전병 때문에 서서히 시력이 감퇴하자 주인공 마리아 역에서 수녀 역의 조연으로 밀려난다. 이것은 어머니(Mother)에서 살인자(Murderer)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아이와 어떤 연결고리도 갖지 못하는 희생당하는 성 처녀와 같은 수녀(Nun, 아이에게는 무의미함 None)로 전락하는 것을 상징한다. 마리아의 선택은 수녀원의 자비로운 허락과 자유 의지에 따랐던 반면, 셀마에게는 점점 극단적이고 좁은 A/B 선택지만 주어질 뿐이다. 그녀를 진심을 다해 돕고자 하는 캐시마저 이 시스템에 동조하게 되는 것은 슬픈 역설이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셀마를 잔다르크에 자주 비견했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진(Jean)'의 이름을 부르짖는 그녀는 브레송의 <잔다르크의 재판>에서 누구도 굽힐 수 없는 신념을 가졌던 잔(Jeanne)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녀가 원하여 자유 의지로 신념의 전쟁을 했는지, 하늘에 있는 누군가 계시를 내렸는지를 묻는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 그녀는 잔 다르크처럼 의연한지를 묻는다면 역시 그렇지 않다.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전화기에 대고 화내며 울부짖고, 두려움과 고통 때문에 몸부림친다. 사실 그녀는 평범한 어머니, 선생님이자 아이들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되고 싶어 했던 한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바라던 대로 운명의 되물림이 끊어졌다는 소식을 들으며 결국 그녀는 자신이 치른 희생에 합당한 구원을 받았다는 듯 수그러든다.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관객 앞에서 그녀의 마지막 절규 혹은 노래가 울려 퍼지고, 한 번의 추락, 그리고 뮤지컬의 막이 드디어 닫힌다.
서론에서 언급했던 폴 사이먼의 <American Tune>에서 후렴구 가사를 다시 곱씹어 보았다. "I dreamed I was dying"에서 "And I dreamed I was flying"으로 변주, 높이 승화되는 구절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노동의 고통에서 해방된 육신을 말한다. 그리고 해방된 자는 이제 자유의 여신상이 바다로 항해하는 저 이상향의 풍경을 또렷하게 내려다볼 수 있다. 강탈당한 것을 지켜내고 본인 스스로까지 제물로 바치고 나서야 셀마는 시력을 되찾아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의미였는지 또렷하게 직시할 수 있다. 그렇게 더딘,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흘러가는 이 항해는 후대에게 전승된다.
And I dreamed I was flying
And high up above my eyes could clearly see
The Statue of Liberty
Sailing away to sea
And I dreamed I was flying마치며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는 전쟁이 모든 것을 휩쓸기 직전에 사람들이 품었던 꿈과 희망, 가족의 결합을 노래하였다. 그리고 난민이 된 트랩 가 가족들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서 알프스를 희망차게 넘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어린 시절 영화를 보면서 항상 이상했던 것은 알프스는 춥고 험할 텐데 이 사람들은 동네 뒷동산을 산보하듯 노래를 부르고 행복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즉 영화는 불행했던 과거(트랩가 7남매 어머니의 죽음)와 다가올 불안한 미래(난민의 삶)는 잘라버린 채 온전하고 행복한 모습들만 보여준다. 마치 이에 대한 블랙 패러디처럼, <어둠 속의 댄서>는 셀마가 이민 전 행복했었던 체코에서의 과거를 보여주는 것도 생략하고 , 그리고 그녀의 희생을 통해 아들 진에게 주어진 좀 더 밝은 미래를 보여주지 않은 채 무대의 막을 내린다.
영화를 보면서 한부모, 장애인, 이민자, 블루칼라 노동자 등 모든 측면에서 의지할 곳 없는 사회 소수자인 한 여성을 여러 장치들을 가지고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가학성이 과연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실제로 영화는 많은 논란거리를 낳았고,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평단과 관객의 평가 또한 극명히 갈리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뮤지컬 장르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관객을 심적으로 괴롭히기 위한 인위적인 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었나? 감독은 실제로 홀로 아이를 키우고 있던 비요크를 비슷한 상황에 몰아넣어 과하게 몰입시킴으로써 훌륭한 연기가 아닌 그녀의 진실된 고통을 착취한 것이 아닌가?
사디스트적인 악취미를 가진 감독이 단지 본인의 유희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니라는 가정 하에, 이 씁쓸하고 어두운 뮤지컬 영화는 종교적인 희생과 구원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20세기판 <마태 수난곡>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감독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보다는 차라리 <셀마 수난곡>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마지막에 나무판자 위에 몸을 결박당하는 셀마의 모습을 보며 성경에 나오는 '그 존재'가 아닌 다른 누구를 떠올릴 수 있겠는가? 그녀는 20세기의 아메리칸 드림을 믿고 현실에서 구원받기 위한 모든 이민 세대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당한 대속죄인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가해지는 것들은 자식 세대가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할 시련이기에, 그녀는 친구의 얼굴을 한 어떤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도 이겨낸다. 이로써 그녀의 아들과 후손들은 광명의 한 자락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또 다른 결의 결핍과 상처를 떠안은 채 아메리칸 드림의 항해를 이어간다.
[Eurofilm 11. 덴마크, 독일,스웨덴, 네덜란드, 미국, 영국, 핀란드,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2021년 3월 6일 감상 / 2021년 3월 7일 씀
* 본 콘텐츠는 브런치 karenine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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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어날 수 없는 상실의 늪
*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아픔 중 가장 사무치는 고통은 상실에 대한 고통이다. <톡 투 미> 이후 다시금 상실이라는 소재로 극장가를 찾아온 필리포 감독의 공포영화는 한층 더 잔인하고 슬픈 서사로 무장한 채 관객을 맞이하게 되었다. 사실 공포라는 장르는 죽음을 기반으로 하는 장르다.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오는 좀비물, 죽음의 공포와 맞서야 하는 슬래셔물,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컬트물 등 어쩌면 너무 당연했기에 잊고 있었던 소재이기도 하다. 우리와 가깝고도 먼 이 죽음을 필리포 감독은 그간 어떻게 다뤄왔을까?
사실 <브링 허 백>의 경우 개봉 예정작인 <톡 투 미>의 속편을 제외한다면 그들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일관성 있는 필모를 쌓고 있는 셈인데 적어도 이 두 편의 영화를 관람한 관객이라면 한 가지 사실은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죽음에 의한 상실은 때로 누군가를 미치게 한다는 것. <톡 투 미> 속 '미아' 는 엄마의 자살을 받아들이지 못한 십 대 소녀이다. 생전 영매술사의 손이었다던 조각을 매개로 죽은 자들을 본 이후 미아는 악령들에게 시달리게 되고 결국 그들에 의해 현실과 환상의 괴리를 이기지 못한 채 최후를 맞는 인물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금기시 되던 '90초를 넘기지 말 것' 을 진즉 어겨버린 그녀였기에 마치 악령들에 의해 살해 된 것처럼 묘사되나 사실 영화를 조금 더 들여다보면 여러 인물의 대사나 행동을 통해 사실 미아가 상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원흉은 물론 생과 사의 매개체였던 조각이었을지 모르나 악령들에게 있어 죽음에 사로잡힌 미아의 영혼은 이미 죽음으로 끌어들이기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브링 허 백>은 어떨까. 아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위탁모 '로라'의 집으로 향하게 된 '파이퍼'와 '앤디' 남매의 시점으로 시작되는 영화엔 역시나 상실의 고통이 기저에 깔려있다. 하지만 <브링 허 백>은 <톡 투 미>가 보여주었던 매개로 인한 파멸 그 이상의 이야기를 전개하며 좀 더 상실이라는 키워드에 가까이 접근한다.
딸 '캐시'를 잃은 위탁모 로라는 남매 중 유난히 장애를 가진 파이퍼에게 지극한 정성을 보인다. 샐리 호킨스가 분한 로라라는 인물은 어쩐지 앤디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영화의 전개상 마냥 다정한 인물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로라의 집으로 이사 온 첫 날부터 그녀는 앤디의 핸드폰을 훔쳐보거나 노골적으로 시각장애인이었던 자신의 딸을 파이퍼와 겹쳐보는 등 심리적 거리감을 잔뜩 벌려둔 채 앞으로 그녀가 벌일 난장판으로 관객을 미리 끌어들인다. 그렇기에 관객은 더더욱 로라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오래 전 떠나보낸 강아지를 박제 해 집 한 켠에 둘 정도로 무언가를 떠나 보내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가 다름 아닌 딸의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불편한 동거가 진행될 수록 관객은 로라뿐 아니라 그녀의 아들인 '올리버'를 경계하며 긴장 속에 놓여지는데 올리버가 보여주는 기행과 간간히 보여주는 파운드 푸티지를 통해 그녀가 일종의 의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초반부부터 알 수 있게 된다. 즉 로라와 올리버로 장르적 재미를 살리는 동시에 상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녀가 어떠한 방식으로 남매를 갈라놓으려고 하는지 그 과정 자체가 보여줄 충격과 고통에 보다 집중 할 수 있도록 선택한 전개 방식인 것이다.
<톡 투 미>와 마찬가지로 <브링 허 백>에도 역시 매개가 등장한다. 일전에는 추정컨대 박제 당한 영매사의 손이었다면 이번에는 살아있는 아이 올리버이다. 관객은 올리버의 존재가 껄끄럽다.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집을 배회하거나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등 확실히 기이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아이' 이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올리버로 지칭되던 아이가 사실 '버드' 라는 이름을 가진 실종 아동이며 이는 사실 로라가 딸 캐시를 죽음으로부터 데려오기 위해서 매개체로 삼은 아이였다는 것이 아마 해당 영화의 가장 충격적인 소재가 될 것이다. 상실의 고통으로 인해 총 세 명의 아이가 고통 받고 있는 이 전개 속에서 영화는 재차 로라의 상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영화는 <톡 투 미>가 그러했듯 어떤 현상에 대한 극복을 제시하기 보다 그 현상이 끝까지 갔을 때 벌어지는 비극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 비극의 가장 큰 희생양인 앤디는 극 중 파이퍼의 이복 오빠로 친 아버지에게 폭행 당한 트라우마와 더불어 죽음을 목격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소년이다. 미아와 가장 닮아있기도 한 캐릭터이지만 그녀와 한 가지 확실히 다른 점을 꼽자면 앤디에게는 지켜야 할 동생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못해 로라의 집에서 그의 아버지가 보여준 차별적이고도 폭력적인 행동과 대치되는 듯한 로라의 행동을 견디면서 앤디는 끝까지 여동생을 지키고자 한다. 상실이라는 공통의 트라우마를 기반으로 공고해진 남매는 타자 로라에 의해 와해되지만 악령의 예언을 빗겨가게 하기 위해 그에 반항을 시도한 이들로 그려지기도 한다. 아빠와 로라, 두 어른을 향한 아이들의 반항이 성공적으로 그려지진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앤디와 파이퍼, 버드 라는 세 인물 중 앤디를 제외한 두 아이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해당 영화가 끔찍함으로 무장하고 있을지라도 이들이 상실의 늪에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란 점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다른 아이 캐시는 극 중 이미 죽은 상태로 등장하나 어쩐지 의식의 마지막 도중 급하게 '엄마'라고 외치던 것이 캐시는 아니었을까 하는 여지를 남긴다. 버드의 몸 안에 갇혀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엄마가 두 남매를 완전히 와해시키는 것을 보고 의식이 성공할즈음에 어쩌면 엄마를 일깨우고자, 말리고자 고군분투했던 또 다른 아이였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영화의 많은 부분은 설명보다는 보여주기를 택한다. 의식의 과정이나 어디서부터 오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길 택함으로 보다 로라와 파이퍼 남매에게 집중 할 수 있는 전개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만 생과 사의 매개체인 버드가 식이라는 행위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아이의 몸에 영혼이 비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해당 영화에서 중요 상징으로 등장하는 원은 생과 사가 흐려지는 공간의 안팎이라는 경계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끝내 상실의 원 안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인물들과 그 밖으로 벗어난 인물들의 차이를 보여주기도 한다.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던 앤디는 솔직함을 의미하는 남매의 수식어 '자몽'을 끝내 파이퍼에게 전달하지 못한채 죽음을 맞는다. 그가 미지막으로 파이퍼에게 남기고자 했던 말, 지난 과거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으며 그럼에도 널 사랑한다는 사실이 끝내 로라가 끌어들인 상실의 늪 안에 갇혀버리고 만 것이다. 로라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내에서 독보적인 안타고니스트로 등장하는 로라는 원 안팎으로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나 이미 의식과 무의식 모두를 상실에 사로잡혀버린 인물이다. 그녀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원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어쩌면 로라의 최후는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지 모른다. 반면 도망에 성공한 파이퍼는 물론 버드 역시 힘겨울 것을 알면서도 원 밖으로 나가 구조 된다. 영화는 말한다. 그들은 상실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연이은 상실이었음에도 분명 파이퍼는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그저 비행기를 타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여정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오빠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라라는 인물의 상실은 자신 뿐 만 아니라 다른 이들까지 끌어들이는 지독한 우울의 늪이자 구덩이로 묘사된다. 마치 공명하듯 자신과 같은 우울을 갖고 있는 이를 찾아내 어떻게든 그곳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앤디는 결국 파이퍼를 그런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게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너무나도 처절하다. 온 몸이 흙 투성이가 되고 고통에 몸부림쳐야 벗어날 수 있는 끔찍한 기억들이다. 하지만 그렇게 원 밖을 벗어나야 한다. 망자에, 상실에, 트라우마에 자신을 가두지 않기를 영화는 말한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더욱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였으나 결국 죽음에 사로잡혔던 <톡 투 미> 속 미아와 달리 <브링 허 백>이라는, 마치 로라의 절규와도 같은 제목의 영화는 아이들이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길 바라고 있다.
상실의 힘보다 사랑의 힘이 더 크기에, 스스로를 그리고 너를 구원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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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트롤 프릭 휴그랜트와 함께하는 방탈출 시간
이제는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A24. 영화사 브랜딩이라는 멋들어진 전략에 당해버린 나 역시 그들이 지금껏 보여주었던 차별화 된 작품성을 믿고 <헤레틱>을 보러 갈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드소마>, <유전>, <보 이즈 어프레이드>와 같은 아리 에스터 감독의 시리즈는 말할 것도 없으며, <톡 투 미>, <램>, <라이트 하우스>, <킬링 디어>, <더 위치>로 거슬러 올라가는 A24의 공포 영화 계보에서는 항상 거칠지만 신선한 장르적 아이디어를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각본과 감독은 <콰이어트 플레이스> 시리즈로 알려진 스콧 벡(Scott Beck)과 브라이언 우즈(Bryan Woods)가 맡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촬영 감독이 박찬욱 감독과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에서 협업한 정정훈 감독이라는 점이다. 감독의 전작을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관람을 추천한다.
<헤레틱> 북미 포스터
<헤레틱> 또한 그동안의 A24식 공포영화들처럼, 첫 입부터 구미를 당기는 자극적인 설정들로 대중을 유혹한다. 모르몬교 전도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하는 두 10대 소녀, 팩스턴과 반스가 언뜻 평범한 가정집에 들어가고, 집주인이 아내가 만든 블루베리 파이를 가져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책상 위에 올려진 블루베리 파이 향 초를 발견하고 만다… 이후 두 소녀에게 일어날 각종 호러적 환상들과 신앙적 갈등이 가져다줄 서스펜스를 기대하며 관객은 달아오른다. 꼼짝없이 갇힌 신실한 두 소녀와 전지전능한 주도권을 가진 집주인 리드 씨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공포영화의 클리셰. 여성 주인공의 몸부림과 지배 관계에서의 탈피 내러티브는 관객의 기대를 보장하는 흥행 요소 중 하나이다. 여성 피해자화의 스펙터클은 젠더화된 공포와 고통을 관음증적 차원에서 장르적으로 자원화하며, 공포영화의 묵은 관습처럼 자리해왔고, 이제는 장르적 특성을 대표하는 요소로 자리매김했다. 발전적인 차원의 신선한 기획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어찌 되었건 클리셰는 클리셰다.
<스크림> 시리즈의 시드니 프레스콧
다행히 <헤레틱>은 단순히 장르적 안정성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뻔할 수 있는 장르적 특성에 종교에 대한 사색을 가미했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전반부를 가로지르는 엄청난 양의 대사를 통해 구현된다. <헤레틱>의 전반부를 감상하며 흥미로울 만한 지점은 인물들의 대사와 대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미묘하게 변화하는 상징적 의미와 공기의 흐름을 읽는 재미에 있다. 파격적으로 변신한 휴 그렌트와 소피 대처, 클로이 이스트가 펼치는 공방에 관객들의 눈과 귀는 탁구공처럼 삼각지대를 오간다.
영화가 시작하며 팩스턴과 반스 자매가 나눈 뜬금없는 매그넘 콘돔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의 본질에 대한 의구심을 시사한다. 매그넘이 사실 일반 콘돔과 똑같은 크기이자, 마케팅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불신. 그리고 지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실제로 큰 사이즈가 맞다고 이야기하는 믿음. 그러나 둘은 모르몬교의 신실한 신도들이기에 ‘순결의 법’에 따라 자신들의 믿음/비믿음을 검증할 길이 없다. 실제로 볼 수 없고 검증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믿음/비믿음을 형성하는가. 약간은 불경하지만, 신에 대한 믿음 역시 이러한 질문들과 떨어질 수 없다. 벤치에 적힌 Who says size dosen’t matter? 이라는 카피는 언뜻 씬의 유머 감각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보이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신성이 더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종교의 의미는 사라진 지 오래라는 현대인들에게 아직도 진리-믿음의 문제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표지판 같기도 하다. 사이즈처럼 볼 수 없는 것에, 비가시화된 욕망, 신성, 진리에 인간은 휘둘린다.
리드의 집에 들어서면서, 이 질문은 점차 심화되기 시작한다. 모르몬교가 사실은 다른 종교들의 변형인 것을 알고 있냐는 질문으로 시작한 장황한 연설은 기독교의 예수를 페르시아 신화의 미트라, 이집트 신화의 호루스(a.k.a 새대가리), 힌두교 신화의 크리슈나와 연관 지어 기묘한 공통점을 드러내고, ‘표절’과 ‘변주’로 점철된 종교의 허상성을 지적한다. 그의 연설은 모노폴리와 라디오헤드의 creep에 숨겨진 3단 변신까지 더해져 결국 종교의 비본래성, 비본질성을 폭로하는 회의와 의심으로 귀결된다. 반스가 지적한 대로 조악하고 과장된 논리의 파편에 불과함에도, 휴 그랜트의 열연과 음모론적 흥미를 등에 업고 이야기는 영화의 척추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으로 관객을 이끌어간다. 진정한 하나의 종교는 무엇인가. 그 답을 알려주겠다는 리드 씨의 말에 두 소녀는 믿음과 불신의 문 앞으로 이끌린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렇듯 종교에 대해 인류가 갈망해왔던 현학적 질문들로 점철되어 관객의 기대감을 극도로 고조시킨다.
중후반부의 장르적 서스펜스를 넘어, 살아남은 팩스턴 자매가 얻은 답은 ‘진정한 하나의 종교이자 신은 통제’라는 것이었다.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일리 있는 해답임에도, 어쩐지 초반부에서부터 쌓아 올렸던 기대감은 충족되지 못한 채 헛헛한 마음을 남긴다. 그 헛헛한 마음을 나 몰라라 밟고 지나가는 후반부의 Predictable 한 마무리까지. 궁지에 몰린 팩스턴의 모습에서 처음 지하실을 탈출하려다 떨어뜨렸던 각목의 잔상이 연상되자 앞으로의 일들이 눈에 선히 펼쳐졌다. 클리셰로 흥(?)한 자, 클리셰로 망하리라. 결국, 수많은 공포영화 속 여주인공들처럼 반스의 기적적 도움을 얻은 팩스턴은 기지를 발휘해 저택을 탈출하고, 설경 속 나비와 함께 이교도의 일탈은 막을 내린다.
다시 돌아와, 진정한 하나의 종교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통제’라는 답을 내놓으며 종교를 구조주의적으로 해석한 돌파구는 흥미롭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특성과 사회학적 아이디어는 의미론적으로 충돌하며 그 한계를 갖게 된다. 리드가 설파한 통제는 외압과 폭력에 의한 강압적 통제라기보다는, 푸코적 의미에서의 통제에 가깝다. 즉, 리드가 주장한 통제의 본질은(자신이 통제 안에 있다는 것조차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깨달았던 팩스턴의 경우에서처럼) 자기 통치에 의해 자유롭게 행위하는 타자들의 행위에 대한 행위 양식이라는 점에서 드러난다. 권력과 규제의 진정한 호러적 면모는 타인의 의지를 억압하고 묵살하는 힘이 아닌, 스스로 통제의 규범에 따라 행위하고자 하는 유순한 신체의 생산에서 발견된다. 리드는 결국 선택지를 통제하고 자유로운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방식과 같이 구조주의적 통제의 방식을 종교의 본질이라고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특성은 흡사 푸코가 주장한 판옵티콘과 같은 감시 권력의 체제와 닮아 있다.
감시가 불연속적으로 작동할지라도 감시의 효과가 지속되도록 하며, 개개인이 감시 권력을 내재화한 주체이므로 형식적으로 감시 권력이 작동할 필요가 없다는 판옵티콘의 특징은 리드의 고백으로 신앙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신실한 신자의 주체를 생산하는 종교인의 모습과 얼핏 겹쳐 보인다. 신(권력)의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으며 감시 관계의 내면화를 행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냉소적 관점이다.
푸코와 판옵티콘
그러나 과연 리드의 일련의 행동들을 푸코가 주장한 비가시화된 통제성이라고 볼 수 있는가? 팩스턴과 반스라는 클리셰적 여성 캐릭터를 피해자-여성의 정체성으로 설정한 덕분에, 즉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특성을 가져갈 수밖에 없는 까닭에, 관객은 두 소녀의 선택을 ‘자유롭다’라고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처음 두 가지 문 중 하나를 선택해 지하실로 들어가는 장면에서 특히 이 모순이 증폭된다. 두 인물이 문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리드는 암묵적으로 강제력을 행한다. 어느 문을 선택하든 해치지 않을 거라는 말로 자유를 주었다고 하기엔, 두 인물에게 부과된 폭력을 행사할까 두려워하며 순종하는 공포영화에서의 피해자-여성의 양상은 리드가 주장한 구조주의적 통제의 의미와 조응하지 못하며 이중 축을 형성하고, 영화의 긴장감을 와해시키는 결정적 맹점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맹점으로 리드의 캐릭터는 진심으로 자신의 가설을 시험하고자 하는 종교적 믿음이나 사명이 있는 ‘이교도’라는 정체성보다, 그저 자신의 조악한 가설에 자기 위로를 구하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워지면서 신비주의적 아우라가 사라지고, 어쭙잖은 변명으로 자신을 포장하고자 하는 흔한 범죄자로 전락하고 만다. 때문에 구조와 통제로부터의 탈피가 우연이나 자유의지, 반스의 희생을 통한 영성의 존재로 이루어진다는 영화의 종결부는 정작 구조로부터의 탈피와 바깥에서의 사유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거론하지 못한 채로 힘을 잃고 마무리된다. 2시간에 달하는 영화의 흐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긴장감이었음에도 약간이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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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나게 야심차고 믿을 수 없게 지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완벽한 세계 바비랜드에서 매일 같이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던 '전형적인 바비'(마고 로비). 어느 날 바비는 갑작스럽게 변한 자기 자신을 깨닫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하이힐을 신기 위해 까치발이었던 발이 평발은 됐으며, 다리에는 셀룰라이트가 생겼기 때문.
이에 전형적인 바비는 이상한 바비를 찾아가 해결책을 구한다. 현실에서 자신을 가지고 노는 여자아이에게 변화가 생겼으니, 현실 세계로 넘어가 그 아이를 직접 만나라는 것. 이에 전형적인 바비는 현실 세계로 넘어 가 사태를 바로잡고 다시 완벽한 바비가 되려 한다. 그녀 없이는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없는 '켄'(라이언 고슬링)과 함께.
영화와 메시지
봉준호 감독은 "영화는 메시지를 담는 도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영화든 메시지가 있으면 좋지만, 메시지는 영화의 아름다움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렇지 않은 영화는 선동을 위한 프로파간다와 다를 게 없기 때문. 즉, 영화는 일단 흥미로워야 한다. 그래야 감독, 작가, 배우 등이 심어 놓은 메시지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잘 전달될 수 있을 테니까.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성 감독인 그레타 거윅은 위의 예술관에 부합하는 여성 감독이었다. 거윅의 영화는 주로 페미니즘 메시지로 무장했다. 하지만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는 않았다. 전작인 <작은 아씨들>만 봐도 그렇다. 거윅은 고전 소설의 매력을 한껏 살리면서 그 안에 핵심적인 목소리를 물 흐르듯 담아냈다. 어떤 모습의 삶을 살든 여성들의 선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고.
그레타 거윅의 신작 <바비>는 반대다. 화려한 분홍빛 바비랜드는 여러 메시지로 가득하다. 가부장제를 깨뜨려야 한다, 현시점 페미니즘은 문제가 있다, 백래시를 극복해야 한다, 남성에 대한 역차별도 해결해야 한다... 제각기 자기주장이 가장 중요하다며 일방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메시지를 쏟아내기 급급하다. 그 결과 이 야심차고 화려한 영화는 점차 지루해진다. 마치 대학 교양 강의를 듣는 듯한 인상까지 남는다.
바비랜드, 바비가 바꾼 세상
첫 장면부터 <바비>는 야심을 드러낸다. 바비 인형의 명암을 조명하고, 바비의 이상적인 의미를 찾아내겠다고 선언한다. 우선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오마주한 오프닝은 바비의 등장이 끼친 긍정적인 영향력을 상기시킨다. 아기 인형을 가지고 놀면서 엄마라는 꿈만 꿔야 했던 여자 아이들. 그들은 바비를 만난 이후 엄마가 아닌 다른 삶도 살 수 있다고 깨닫는다.
전 세계의 분홍색 페인트를 모두 가져다 쓴 '바비랜드'는 여성의 가능성이 완전히 꽃 피운 세상을 보여준다. 작가, 대통령, 대법관, 우주비행사, 과학자 바비 등 여성이 주도하지 않는 분야가 없다. 바비랜드에서는 인종과 피부색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두 같은 바비일 뿐이다. 그들 스스로도 세계를 더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자화자찬한다.
이는 바비의 역사를 요약하는 대목처럼 보인다. 그간 마텔은 고정된 성 역할을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간호사, 항공 승무원 등 여성 비율이 높은 직업뿐 아니라 의사, CEO, 파일럿, 경찰관 옷을 입은 바비도 출시했다. 문화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수용해 히스패닉 계 바비, 아프리카계 미국인 바비, 블랙 바비를 연달아 선보였다. 최근에는 다운증후군 바비 인형도 등장했다.
미처 바꾸지 못한 현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 <바비>는 바비 인형에 내재한 모순을 마냥 외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형적인 바비를 현실 세계에 던져 놓으면서 전면에 부각한다. 일단 영화는 바비 인형에게 늘 따라붙는 가장 일반적인 비판부터 짚고 넘어간다. 아이들이 바비를 자신의 롤모델로 여기고, 바비처럼 되고 싶어 할 거라는 우려를 투영한다.
전형적인 바비의 몸에 문제가 생기자 다른 바비와 켄이 깜짝 놀라거나 구토를 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마치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듯이. 이처럼 <바비>는 바비가 젊은 여성에게 비현실적인 신체 이미지를 홍보한다는 비판을 스토리의 시작점부터 수용한다.
이에 더해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를 대조하며 바비의 한계도 지적한다. 바비들 생각과 달리 영화 속 현실은 바비랜드와 많이 다르다. 마텔 본사에 고위급 임원 중 여성은 없고 경찰도 성희롱 발언을 일삼는다. 바비랜드에서 완벽한 여성이었던 바비는 현실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바비 인형의 여러 변화가 현실에서 실제적인 변화로 이어진다고 볼 수 없다는 일각의 지적도 반영된 셈이다.
바비와 켄, 페미니즘과 휴머니즘
바비랜드와 현실 세계의 괴리감은 켄에게도 투영돼 있다. 그의 이야기에는 바비 인형의 모순과 다소 가려져 있던 현실이 깃들어 있기 때문. 바비랜드에서 켄은 바비만 바라보고 사는 부속품이다. 그녀가 말을 걸어주고, 쳐다봐 주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런데 현실 세계를 맛본 뒤로 켄은 바뀐다. 말, 자동차, 맥주로 대변되는 남성성의 신봉자가 된다. 가부장제를 도입하고 바비랜드가 아닌 켄덤을 세운다.
켄의 행보는 페미니즘 진영에서 '백래시'라고 규정하는 사회적 반발을 반영하는 듯 보인다. 다만 바비랜드가 바비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극단적인 여성 중심 사회라는 점을 고려하면 켄의 저항은 단순히 치기 어린 반발이 아니다. 오히려 바비랜드도 텐덤도,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진 사회에서는 누구나 차별 또는 역차별당할 수 있다는 지적에 가깝다. 이는 페미니즘에 대한 자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비랜드와 같은 이상향을 만들어야 한다는 거라는 기대는 잘못됐다고.
이에 <바비>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휴머니즘이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바비는 완벽한 여성이라는 한계를, 켄은 바비의 부속물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자고 말한다. 바비와 켄 모두 원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자고 말한다. 또 누가 더 우월하고 낫다고 싸울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자고 덧붙인다. 영화는 바비는 바비, 켄은 켄, 또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막을 내린다. 마고 로비가 "완벽히 페미니즘 DNA에 기반하고 있고, 환상적인 휴머니스트 영화"라고 <바비>를 소개한 이유다.
메시지와 메신저의 부조화
문제는 메신저다. 전개와 연출이 메시지와 잘 이어지지 않으면서 영화를 혼란스럽고, 지루하게 만든다. 비중 있게 다룬 켄의 이야기와 충돌하는 후반부 전개가 대표적이다. 종국에 바비랜드는 처음 바비랜드로 되돌아온다. 모든 권력은 바비에게 넘어간다. 켄들은 약간의 권리를 얻어내지만, 이전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정반합(正反合)이 아닌 정반정(正反正)이라 해야 할 마무리다.
메시지를 보여주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그레타 거윅과 노아 바움벡의 명성을 생각하면 의아할 정도로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바비랜드를 되찾는 과정에서 바비와 글로리아는 카메라를 똑바로 보며 가부장제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읊는다. 이는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처럼 관객에게 모든 메시지를 떠먹여 주려는 듯 느껴진다. 즉, 영화와 프로파간다 사이에서 주객이 전도될 여지를 남긴다.
더 나아가 장르적 기반도 흔들린다. <바비>는 외관과 달리 블랙 코미디에 가깝다. 그런데 <바비>의 풍자는 풍자가 아니라 비웃음이나 조롱차럼 느껴질 위험성을 내포한다. 여성과 남성, 바비와 켄이 갈등을 빚는 가운데 바비의 시점에서 켄만 웃음거리로 만들기 때문이다. 해변에서 켄끼리 전투를 버리는 장면, 남자다운 척하도록 유도해서 켄을 속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블랙 코미디는 민감하고 불편한 소재를 당사자가 자조적으로 풍자할 때 성립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비>는 이 대목에서 불협화음이 들린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메시지는 정리가 안된다. 내용과 메시지가 따로 논다. 페미니즘과 휴머니즘 사이에서 접점을 찾으려 하지만 정작 결론은 한쪽으로 애매하게 치우친다. 그러니 바비와 켄이 서로를 존중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말도 서서히 공허해진다. 바비 인형의 역사와 모순을 파고들다가 스스로 발이 꼬인 형국이다.
빛 좋은 개살구
배우들의 연기력과 그레타 거윅의 개성이 느껴지는 연출도 이 모순과 부조화를 끝내 메꾸지는 못한다. 사실 <바비>는 분명 보는 재미가 있는 영화다. 마고 로비는 이견을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전형적인 바비 인형의 이미지를 잘 재현했다. 무엇보다도 라이언 고슬링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예고편에서 마냥 병맛 캐릭터 같아 보였던 켄은 온몸으로 감정 변화를 전달하며 주인공인 바비보다도 더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또 분홍빛으로 가득한 바비랜드의 풍광은 현실과 분리된 인형 세계를 아낌없이 보여준다. 긴장이 풀릴 법하면 등장하는 화려한 뮤지컬, 내레이션을 통해 제4의 벽을 넘나드는 메타적인 요소 역시 재기 넘친다. 마치 아담 맥케이의 <빅쇼트>나 <바이스>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번쩍거리는 이미지와 퍼포먼스는 그저 휘발된다. 메시지 이전에 영화의 재미와 완성도를 잡아야 한다는 전제를 <바비>는 끝끝내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Acceptable 무난함
메시지는 문제없다. 메신저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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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군 | 박훈정의 필모그래피가 여기서 모인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정원 요원 '최 국장'(김선호)의 주도로 비밀리에 진행하던 폭군 프로젝트. 바이러스를 사람에게 주입해 초인을 만들려는 프로젝트가 미국 정보기관에 발각됐다. 이에 최 국장의 반대 파벌인 '사 국장'(김주헌)과 미 정보기관 담당자인 '폴'(김강우)은 폭군 프로젝트를 폐기하고 남은 샘플을 미국 측에 넘기라고 압박한다.
이에 최 국장은 샘플을 빼돌리는 작전을 실행에 옮기지만, 작전에 참여한 킬러 '채자경'(조윤수)이 샘플을 빼돌리는 사고가 발생한다. 국정원과 폴이 눈에 불을 켜고 샘플을 찾아 나선 가운데 은퇴한 요원 '임상'(차승원)도 최 국장의 지시를 받아 자경과 샘플을 추적하기 시작하고, 자경은 곧 죽을 위기에 처한다.
박훈정 필모의 두 핏줄
<신세계>와 <마녀> 시리즈. 감독 박훈정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두 작품 덕분에 박훈정 감독은 흔히 누아르 혹은 액션 전문 감독으로 여겨지기 쉽다. 개봉한 지 10년이 지나도록 팬들이 속편을 기다리는 <신세계>의 임팩트도 강할뿐더러, 근래 공개된 작품 모두 비슷한 결이니까.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낙원의 밤>, 작년 여름에 개봉한 <귀공자>까지 전부 누아르 작품이니 이상하지는 않다.
그런데 박훈정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 대중에게 어필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꾸준히 이어지는 주제의식 혹은 메시지를 찾을 수 있기 때문. <대호>와 <브이아이피>가 대표적이다. 소재나 장르 면에서는 아무 공통점이 없지만, 세부적으로는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한국을 억압하는 외부의 적을 무찌르는 영화다. <대호>는 일제강점기의 일본군을, <브이아이피>는 21세기의 미국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디즈니+에서 공개된 박훈정 감독의 4부작 드라마 <폭군>은 흥미롭다. 두 갈래로 나뉘었던 그의 필모가 <마녀> 시리즈의 스핀오프에서 접점을 찾은 듯 보이기 때문. 그간 빛을 못 본 방계 작품의 메시지와 플롯을 직계라고 할 수 있는 <마녀> 시리즈의 세계관 속에서 절묘하게 풀어냈기 때문이다.
여성 누아르라는 직계
<폭군>의 네 주인공이 얽힌 플롯을 보면 그 접점은 쉽게 드러난다. 우선 자경과 임상의 플롯은 <마녀> 시리즈와 직접 맞닿아 있다. 자경은 '연모용'(무진성)의 의뢰로 참여한 작전에서 작전 목표였던 폭군 프로젝트의 샘플을 몰래 빼돌린 킬러다. 임상은 폭군 프로그램의 비밀을 알게 된 이들을 상부의 지시대로 제거하는 요원이다. 곧 임상이 자경을 추적하는 이야기는 숨어 있거나 탈출한 초능력자를 쫓는 <마녀>의 플롯과 유사하다.
특히 이들이 주로 보여주는 액션 시퀀스는 이 작품이 <마녀>의 세계관임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음.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임상과 자경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싸우는 장면을 보면 초능력만 없을 뿐 연출이나 카메라워크가 <마녀> 속 액션 시퀀스와 유사하다. 자경이 폭군의 샘플을 자신에게 주사한 후 초인으로 거듭나 자유롭게 괴력을 자유롭게 활용할 때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또 두 캐릭터 역시 박훈정 감독이 그간 자신의 누아르 영화에서 보여준 캐릭터와 꼭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임상은 <낙원의 밤>에 등장한 '마 이사'와 유사하다. 배우도 같고, 과할 정도로 정중하지만 폭력을 아끼지 않는 모습이 꼭 닮았다. 다만 퇴장이 다소 부자연스럽고 임팩트가 덜했던 마 이사와 달리 임상은 마지막까지 캐릭터성을 유지한 채 의미심장하게 퇴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그 덕분에 다음 이야기도 기대할만하다.
이에 더해 누아르 영화에 어울리는 여성 캐릭터를 유달리 잘 만드는 박훈정 감독의 솜씨는 여전하다. <마녀> 1편과 2편의 '구자윤'(김다미)과 '소녀'(신시아), <낙원의 밤> 속 '재연'(전여빈)처럼 자경이라는 인물도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쌍둥이 오빠와 의식을 공유하는 이중인격 설정은 자칫 유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경, 쌍둥이 오빠, 폭군 셋이 자아를 공유하는 장면의 복선으로 작용하면서 큰 임팩트를 남겼다.
민족주의라는 방계
반면에 자경과 임상의 충돌을 초래한 최 국장과 폴의 갈등은 첩보물에 가깝다. 특히 그들이 충돌하는 이유가 흥미롭다. 최 국장은 민족주의자다. 그가 속한 국정원 파벌은 미국이 한국을 억압한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핵무기나 IBCM을 개발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고, 폭군 프로그램 역시 그 일환이었다. 자연히 반대 파벌인 사 국장과 폴은 최 국장의 계획을 한미동맹과 미국의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해 막고자 한다.
그런데 이 구도는 <브이아이피>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다. 고위층 탈북자인 '김광일'(이종석)의 범죄를 두고 경찰, 국정원, CIA가 충돌한다. '채이도'(김명민)는 한국 내에서 벌어진 사건이니 경찰이 수사하겠다고 주장한다. '박재혁'(장동건)은 김광일의 범죄가 외교 문제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국정원에서 조사하겠다고 맞선다. CIA의 '폴 그레이'(피터 스토메어)는 국정원의 역량을 의심하면서 김광일의 신병을 넘기라고 요구한다.
이때 김광일을 폭군 프로젝트로, 채이도를 최 국장으로, 박재혁을 사 국장으로, 폴 그레이를 폴로 바꾸면 곧 <폭군> 플롯이다. 또 어떻게든 폭군 프로젝트를 유지하려는 최 국장의 결연한 의지, 폴에게 역공을 가하는 전개도 박훈정 감독 전작과의 공통점이다. <대호>에서는 호랑이를 잡으려던 일본군에게, <브이아이피>에서는 김광일을 추적하던 CIA에게 조선의 사냥꾼과 국정원이 각각 선수를 쳐서 물 먹이는 것과 같은 전개다.
비록 대상이 되는 국가나 기관은 다르지만, 한국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사회적 주제나 코드는 일관되게 투영되는 셈이다. 단지 <마녀> 세계관에서 그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게 차이일 뿐이다. 이러한 시도는 꽤 효과적으로 몰입도를 높였다고 볼 수 있다. 장르적으로는 눈을 즐겁게 하고, 시의적으로는 한국의 핵무장 이슈와도 맞물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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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에는 의미가 있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폭군>은 박훈정 감독의 음과 양이 한 데 모여 조화를 이룬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다. 만남 자체가 흥미롭지만, 만남 자체에만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자가복제 같은 지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상술했듯이 전반적인 스토리가 전작의 종합에 가깝고, 캐릭터 역시 전작에 등장한 인물들의 면면을 고스란히 본뜬 측면이 숨겨지지 않는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곳곳에서 엿보인다. 영화가 아닌 시리즈로 공개한 게 대표적이다. <폭군>은 본래 극장에서 장편영화로 개봉할 예정이었지만 후반 작업을 거치면서 디즈니+에서 4부작 시리즈로 공개됐다. 그 덕분에 주연 4인방이 한 데 모이는 4화를 제외한 앞선 3개의 에피소드는 등장인물 소개 위주로 극이 진행된다. 이는 익숙함을 풍성한 디테일로 상쇄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도는 되려 예기치 못한 부작용을 낳는다. 각 캐릭터의 특성과 매력은 확실하다. 박훈정 감독 작품 속 일부 캐릭터는 동기나 서사가 부자연스럽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폭군>의 주인공들은 예외니까. 하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영화였다면 긴박했을 각 인물의 서사가 늘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또 폭군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도 후반부에 가서야 나오기 때문에 다소 불친절한 것도 사실이다.
작가적 관점에서 <폭군>은 퍽 흥미롭다. <폭군>은 대중적으로 소구력이 없었던 <대호>와 <브이아이피>의 주제의식이나 플롯을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마녀> 세계관과 결합시킨 결과물이다. 즉, 박훈정 감독이 잘하던 것과 그가 보여주고 싶던 것 사이에서 드디어 찾은 균형점인 셈이다.
그와 동시에 개선점도 확인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반복되는 플롯과 익숙한 캐릭터라는 틀을 깰 때 박훈정 감독의 세계관은 더 풍성해질테니. 희망이 없지는 않다. 박훈정 감독은 <브이아이피>에서 지나치게 도구적이고 잔인하다고 비판받은 여성 캐릭터 활용법을 <마녀>부터는 장점으로 바꿔 놓은 전적이 있기 때문. 향후 이어질 <폭군> 시리즈도, 더 나아가 <마녀> 세계관에 대한 기대를 품기에 충분한 이유다.
Acceptable 무난함
박훈정의 자가발전 혹은 자가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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