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1-12-19 23:53:46
발리우드의 매력, 시크릿 슈퍼스타
인도의 억압받는 많은 소녀들이
탄산의 거품처럼 떠오르길.
진정한 "시크릿 슈퍼스타"는 엄마였다.
한계에 갇히지 않는 꿈을 꾸는 인시아를 만들어준,
억압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화는 이해받을 수 없다.
땅에 꽂힌 여성인권 속에서도 많은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더 큰 목소리에 파묻혀 그 새싹들은 고개를 내미는 것조차 버겁기에 수많은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인시아의 아빠는 가부장제에 찌든 가정폭력범입니다.
식구들이 집에 들어온 그만 보면 무서워 비위맞추기에 바쁘죠
나즈마가 온수를 맞추지 않았다고 손을 부러뜨리고 음식을 준비해놓지 않으면 뺨을 때리며 아들인 구두만 챙기는데요.
아빠가 나올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보기가 버거웠어요.
거기다 2017년에야 여성의 운전이 허용된 나라에 간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인시아보다 20살은 더 많아보이는 남자랑 강제혼을 시키려고 하는 모습에서 없는정까지 떨어졌습니다.
사실 이렇게 되면 남동생을 미워하기 마련인데
남동생이 어린탓인지 누나를 무시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았죠.
심지어 박스테이프로 누나의 부서진 꿈을 붙이려는 기특한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주목할만한 점은 모녀의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다는 건데요.
그래서 엄마를 위한 노래가 눈물을 자아냅니다.
큰 방패가 되어주지는 못하지만 나즈마의 한계에서 최대한 자유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인시아에겐 엄마가 답답하게 여겨졌습니다.
안시아가 엄마의 용기였다는 것을 깨달은 인시아,
정해준 삶으로 살려 하지만 또 한번 나즈마는 용기를 낸다.
씹어먹는 개연성에도, 길고긴 상영시간에도 이상의 현실을 꿈꾸고 이루어내는 이 표현이 좋았습니다.
보기 너무 힘들었던 영화 인도에 대해 여성인권을 들이댈수가없다. 짐승보다 못하니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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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임 유어 맨> 리뷰 예고편
페르가몬 박물관의 고고학자 '알마'는 연구비 마련을 위해 완벽한 배우자를 대체할 휴머노이드 로봇을 테스트하는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오직 '알마'만을 위해 뛰어난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된 맞춤형 로맨스 파트너 '톰'과 3주간의 특별한 동거르 시작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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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무도 없는 곳> 메인 예고편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느 이른 봄,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소설가 ‘창석’이
우연히 만나고 헤어진
여기, 길 잃은 마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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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치게 영리했던 <로키>가 범한 MCU다운 실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서 2012년 시점의 뉴욕으로 시간여행을 한 어벤져스 덕분에 어부지리로 테서랙트를 손에 넣은 '로키(톰 히들스턴)'. 그는 꼼짝없이 아스가르드에 죄인으로 송환될 위기 상황에서 테서랙트를 이용해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멀티버스가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우주의 시간선을 관리하는 조직인 TVA는 탈출한 로키를 즉시 체포하고, TVA 요원인 '뫼비우스(오언 윌슨)'는 로키에게 TVA와 함께 움직여 달라고 요청한다. 다른 우주의 로키인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가 우주의 타임라인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로키에게 그녀의 계획을 알아내고 막아달라는 것이다. 요청을 받아들인 로키는 실비를 쫓아 다양한 세계를 오가기 시작하고, TVA가 숨기고 있던 진실에도 한 발짝씩 다가간다.
캐릭터쇼라고 불릴 정도로 매력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를 선보여 왔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그중에서도 로키는 가장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빌런으로 등장했으나 마냥 미움을 사지는 않았고, 토르와의 애증 넘치는 관계성을 바탕으로 든든한 조력자로 변해가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역경 앞에서도 끝끝내 살아남아 왔다. 심지어 완전히 퇴장했다고 생각한 와중에도 로키는 평행세계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설정으로 다시금 모습을 보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결정적 이유로 로키가 변수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전투 중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환영을 만들어 내었듯이, 그의 행동은 항상 눈에 보이는 목적과 그렇지 않은 목적이 혼재되어 있었다. 특히 본인만 아는 진짜 목적은 더 큰 혼란을 유발하면서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토르: 다크 월드>에서는 죽은 듯했지만 살아남아 아스가르드의 왕이 되었고,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도 토르 몰래 테서랙트를 훔쳐 나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서막을 열었다. 이처럼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끌고 가는 변수라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기에 로키는 사랑받을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 내는 종잡을 수 없는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로키의 첫 단독 작품인 디즈니+의 드라마 <로키>는 만족스러움과 실망이 교차한다. <엔드게임>에서 사라진 로키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아이디어까지는 로키스러운 콘셉트였지만, 그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는 로키다운 재기 발랄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로키>의 에피소드 6개는 그의 첫 단독 작품을 접한 만족감이 MCU의 설명서를 보는 실망감으로 변하는 시간이 된다.
<로키>를 독립된 작품으로 보면 드라마의 전반부는 예상외의 고민과 성찰을 선사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다. <어벤져스> 1편 시점에서 평행세계로 도망친 로키는 우주의 시간선을 관리하고 멀티버스의 출현을 막는 TVA에서 그가 살았어야 할 미래와 그의 인생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운다. 이때 드라마는 마치 마블 스타일의 <테넷> 마냥 로키가 느끼는 회의감과 허무함, 그리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세심히 살핀다.
로키는 이미 인생의 행보가 결정되어 있다면 오딘의 양자이자 두 번째 왕자로서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자신에게 자유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고, 스스로의 존재는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특히 그가 <인피니티 워>에서 장난의 신으로 죽어가면서 타노스에게 "너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긴 점을 고려하면 그의 회의와 고뇌는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세상을 파괴하고 자신의 뜻대로 다시 창조하며 신의 행세를 하려고 한 타노스가 실패할 것을 확신했던 신조차도 그저 정해진 운명선을 착실히 걷고 있었을 뿐이라는 역설적인 전개가 아이러니함을 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담아내면서 로키의 이야기는 시청자가 이미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확장되며, 왜 그의 스핀오프 작품이 필요했는지를 증명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이전까지 <로키>가 이룬 성과는 빛이 바랜다. 마블 세계관을 구성하는 조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지면서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로키의 존재감과 이야기의 비중은 급격히 낮아진 결과다. TVA를 탈출하려 하고 진통 끝에 모비우스와의 협력을 약속하던 때와 달리, 실비가 등장 이후 로키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기능한다. 수사물처럼 TVA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대부분의 사건은 실비가 주도하며, 핵심적인 이슈에 대한 결정 역시 그녀의 손에 달려 있다. 특히 마지막 순간 멀티버스의 시작을 알리는, 그 이전에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어필할 기회 역시 로키가 아닌 실비에게 주어지며 로키는 단지 그 여파에 휩쓸리는 데 그친다. 특히 빌런부터 토르의 조력자까지 정체성이 거듭 변화하는 와중에 단 한순간도 사건의 주도권을 놓지 않은 캐릭터가 바로 로키였다는 점에서 드라마는 큰 괴리감을 유발한다.
이처럼 로키가 멀티버스로 인해 자신의 서사와 정체성, 그리고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로키>와 마블 페이즈 4의 설정집으로서의 <로키>가 충돌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로키마저 예상치 못한 속임수를 보여주는 실비나 아스가르드의 환영을 만들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선보이는 클래식 로키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로키의 단독 이야기로 멀티버스를 소개한다는 선택은 역으로 로키라는 캐릭터를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고, 지나치게 영리한 꾀에 스스로 넘어가 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로키>는 여러 한계점을 노출한다. 우선 야심 차게 막을 연 멀티버스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멀티버스는 또 다른 마블의 드라마인 <왓 이프...?>처럼 다양한 상상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지만, 후속작이 개연성이 떨어지는 무리한 전개를 남발하더라도 이를 합리화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페이즈 3에서부터 줄곧 지적되었던, 하나의 영화나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보다는 시리즈로서의 완성도를 우선시해 점점 더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를 키운다.
한편 <이터널스>에서도 본 것처럼 MCU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설정된 다양성을 녹여내는 방식도 아쉬움을 남긴다. 사실 로키는 젠더 이슈와 관련하여 정치적으로 올바른 기제를 펼쳐 보이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신화와 전승에서 엄연히 여신과 결혼한 몸이지만 암말로 변신하여 오딘이 타고 다니는 다리가 8개 달린 말 슬레이프니르를 낳기도 하는 등 분명 양성애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과감한 시도를 하는 데 인색하다. 세 번째 에피소드 속 실비와의 대화와 그 대화를 장식하는 무지갯빛 조명에서 성적 정체성을 암시할 뿐이다. 또 결국 실비와 로키의 관계가 이성 간의 로맨스로 이어지다 보니 그 진의마저 의심스러워진다.
<로키>를 멀티버스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분명 영리한 한 수였다. 우주의 균형이 무너지는 대사건을 풀어내기에 존재 자체가 속임수, 변수, 반동분자인 로키는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확립하고 세계관을 확장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최적의 주인공이었다. 또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를 복귀시키고 추가적인 등장 여지도 남기면서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늘 로키의 잔꾀와 속임수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왔듯이, <로키>의 결과물 역시 지나치게 영리했다. 이전까지의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의 간격을 가능한 한 좁혀 놓겠다는 선택은 로키를 주인공으로서 서사의 중심에 놓는 대신 거대한 세계관을 지켜보기에 급급한 목격자로 만들었다. 페이즈 4에서 단독 작품보다는 하나의 부속품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이는 실수를 반복하던 마블의 고질병이 또 도진 셈이다. 이에 더해 부수적으로는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지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남겼다.
과거 케빈 파이기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비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걱정하지 마라. 영화를 걱정하라( don't worry about the universe. Worry about the movie")"라고 답한 바 있다. 과연 현재 마블은 페이즈 4와 그 이후를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의 작품을 걱정하고 있을까? 시즌 2를 확정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우려를 달랠만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듯 보인다.
P(Poor, 형편없음)
팬들은 계속해서 MCU를 좋아하겠지만, 영화팬도 앞으로 그럴지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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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칙하고 화끈함, 직설적이고 때로는 통쾌하다!
2021년에는 2020년에 코로나로 인해 미뤄진 영화들까지 대부분 개봉하고, 신작들까지 겹쳐져 정말 볼 영화들이 많았던 해라 생각한다. 필자가 전주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한국의 핵심 영화제에 참석해 여러 영화를 보았음에도 아직 못 본 영화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2021년 최고의 영화는 바로 라드 주드 감독의 "배드 럭 뱅잉"이라 단언코 말할 수 있다. 영화의 시놉시스만 보고서는 포르노와 관련된 주제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감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루마니아의 근대사, 인종, 계급 등 여러 사회의 문제들을 신랄하게 다뤄낸다. 1부는 주인공이 작중 상황에 어떻게 처하게 되었는지 담담하게, 마치 페이크 다큐 처럼 담아내고, 2부는 통칭 기분나쁜 그림 사전으로, 정말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풍자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엘리트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는 어디서 무시한 여자가 나같은 지식인에게 대들냐며 소리지르는 직원을 보여주고, 두개골을 설명할때는 흑인 차별로 이용된 골상학의 역사에 대해 보여준다. 3부는 학부모들과의 토론을 보여주고, 어떻게 끝날지 3가지 엔딩으로 보여준다. 이 세가지 엔딩은 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비현실적이고 통쾌함을 선사하는 엔딩도 있다. 이러한 발칙하고 화끈하고 적나라한 연출들은 정말 직설적이고 때로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정말 만족스러웠지만 한국에서는 개봉 가능성은 없는게 현실이라 생각했지만, 최근 한 수입사에서 영화를 수입해왔다는 사실이 들려 곧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다만 선정성에 후하다는 일본도 일명 자가검열판으로 15세 관람가로 개봉했는데, 한국에서는 어떻게 개봉할지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 본 영화의 자가검열판은 감독 본인이 직접 일반 극장에도 틀 수 있게 검열한거라 하는데, 과연 검열을 거치고도 신랄한 풍자의 맛을 느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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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가 될 수 없는 어떤 과거
SYNOPSIS.
천재 피아니스트,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보사노바 황금기를 책으로 담으려던 기자 ‘제프 해리스’.
우연히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 주인공 ‘테노리우 주니오르’에 매료된다.
하지만 30년 넘게 음악 활동을 멈춘 그의 삶은 미스터리로 가득했다.
제프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여러 음악가들과 인터뷰를 거듭하며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데...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은 테노리우 주니오르가 아르헨티나 투어 중 실종되었다는 것!
POINT.
✔ <치코와 리타>에서 쿠바를 배경으로 재즈와 사랑을 얽어 보여주었던 바로 그 감독이,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피아노 연주자의 실화를 담아 왔습니다
✔ 보사노바 재즈 아티스트를 좋아한다면 놓치기 아쉬운 이름들이 숱하게 지나가는 작품
✔ 화려한 색감과 보사노바 재즈 음악으로 우리의 감각을 두드리는 작품
✔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둑한 이야기를 조망하는 작품
✔ (요즘 왜 자꾸 이런지 모르겠지만~ 알겠기도 하고~) 지금 이 시국에 보면 섬뜩해지면서 더 의미를 품고 다가오는 작품
✔ 1월 29일 개봉
한 장르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났던 시절을 뒤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묘한 감정을 준다. 모든 부와 시선이 집중되어 미친 듯이 빛나는 시기를 보는 일은 눈이 즐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 결말 혹은 명암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래의 입장에서 소위 황금기 혹은 전성기였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 노스탤지어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바빌론>, <맹크>, <헤일, 시저> 같은 작품들을 생각해 본다.
보사노바의 물결을 타고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제프 해리스라는 작가가 재즈 관련 칼럼으로 유명세를 얻고 새 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들었던 앨범 속 피아노 연주자 테노리우 주니오르(Tenorio Junior)의 삶과 행적을 따라가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패럴림픽 마스코트 이름에까지 쓰였던 조빔이나 비니시우스의 명성에 비해 낯선 이름이지만, 그의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브라질에서 태동한 보사노바 재즈의 물결, 그 원류를 마주하게 된다.
보사노바의 창시자처럼 여겨지는 작곡가 조빔과, <이파네마의 소녀> 작사가이기도 한 시인 비니시우스의 만남. <슬픔이여 안녕(Chega de Saudade)>라는 전설적인 곡의 탄생, 엘라 피츠제럴드가 자기 공연을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가던 클럽의 존재까지... 브라질이 세계 음악의 중심지처럼 여겨졌던 그 시절.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단어 뜻 자체도 뉴웨이브, 누벨바그와 똑같다는 지점에서 더더욱) 영화로 치면 누벨바그 같은 시절이었다. (그 과정에서 엘라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아티스트들의 육성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과 기쁨과 위대함만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보사노바가 널리널리 알려지던 그 전성기는 상처와 함께 이어진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년 간 이어진 브라질의 군부 독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해와 실종으로 이어졌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독재 세력은 사람들이 함께 음악을 듣는 행위를 싫어한다. 예술가들도 탄압을 받았고, 많은 브라질 뮤지션들은 때마침 무르익은 보사노바 음악과 함께 북미권에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살해당하고 실종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예술가가 있었다.
영화는 재즈 애니메이션에 담근 다큐멘터리로, 애니메이션 작화 이전에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말했을지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그들의 말은 다소 반복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부분이 내겐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무수한 피해 증언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거대한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그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료이자 친구였던 테노리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여전히 괴로워했고, 그를 그리워했으며, 그의 면면은 조금도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정치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고, (거의 불교도 같았다는 주변인들의 증언과는 달리) 곧 태어날 아이까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애인을 동행해 투어를 떠날 만큼 그다지 도덕적인 현자도 아니었으며, 다만 그가 남긴 악보만으로도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을 남긴 훌륭한 음악가였던 테노리우 주니오르는,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정치적'이 되었다.
미래가 될 뻔한 과거를 타고
삶의 한 순간을 강렬하게 스친, 오래도록 좋은 기억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살해되었다는 소식... 그것도 마땅히 국민을 지키고 삶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가가 주도하여 살해했다는 소식은 언제나 끔찍하다. 내 친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딘가에서 학살 당하는 세상이라니. 독재 정권이란 뭘까. 왜 음악가와 학생과 시인과 주부와 어린아이를 죽일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기관총과 군인, 검열이 거리 곳곳에 깔려 있는 당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비니시우스와 피아졸라도 있었던 도시는 그들로 인해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영영 안 돌아"오는 사람들의 도시가 되어버린 풍경. 그건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되었을 수도 있는 풍경이었다.
비록 국회와 시민들에 의해 막히기는 했으나, 우리도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으며, 누군가를 "계엄법에 의해 처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문건이 발표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것이다.
"(...) 선량한 일반 시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하겠다지만, 그런 도시에서 과연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나. 음악도, 북적이는 사람들도, 예술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영화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을 "브라질 음악의 죽음의 메타포"라고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사회에서 예술은 온전히 피어오를 수 없다. 그래서 더없이 '예술'적인 이 영화의 화려한 색감과 리드미컬한 음악에도 불구하고, 거기 실려 전해진 지구 반대편 나라의 근대사가 단순한 과거로만 느껴지지 않아 극장에서 섬뜩함을 몇 번이나 느껴야 했다.
테노리우가 2024년 12월 3일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알 수 없다. 영화에서도 몇 번이나 서술되듯, 그는 자신이 두고 간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비롯해 그 어떤 미래도 보지 못했으므로. 죽은 자를 떠올릴 때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이유다. 내 기억 속 그들은 너무 생생한데, 그는 모른다. 기후동행카드와 K-패스로 지하철을 타는 세상도, 한국에서 칸영화제와 오스카영화제를 석권한 영화가 나오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사실도,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이만큼 나이를 먹은 나의 모습도.
테노리우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 줄줄이 나오는 이 영화에서도 손 꼽히게 아름다워 전곡을 따로 듣고 싶어질 정도였으나,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테노리우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음악가의 죽음 혹은 한 장르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 이전에, 국가폭력의 희생자는 사실 "아직 우리 곁에 있었어야 할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수많은 상상을 발휘하게 한다. 어쩌면 윤동주가 전태일에 대한 시를 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군부 독재에 희생된 젊은이들 중 누군가가 세월호를 생각하고 목소리를 내는 장면을 우리가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너진 자리에 우뚝 설 기록을 타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내게 인상 깊었던 인물들은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짧게는 국가가 행한 폭력의 기록을 보관하는 이들에서부터, (이와 비슷한 이들의 존재감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두드러진다) 좀더 확장하자면 제프가 글을 쓰게 하는 뉴욕의 편집자 제시카와 브라질 현지 친구 주앙도 그렇다. 이들은 계속해서 제프에게서 글을 끌어내고 그를 조력하여, 제프가 글을 완성하게 한다.
독재 정권들이 마치 짠 것처럼 싫어하는 대상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뿐만이 아니다. 폭력에 물들고 깨진 이들의 사고는 온건한 언어를 견디지 못하여, 언어를 무너뜨린다. 고문을 기다리는 통로는 "행복의 길"로 불리고, 영원한 실종은 "수송 작전"으로 불린다. 아이히만에 대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래가 되어서는 안될, 결코 미래가 될 수 없을 어떤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 방법은 기록과 기억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일에 많은 부분을 기댄다. 영화 속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은, 죽음 이후 테노리우가 알지 못하는 세상은, 배턴을 이어받듯 여기까지 기록되어 왔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를 보는 당신을 통해, 또 한 번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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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미안해’, '고마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
넷플릭스 영화 〈맬컴과 마리〉는 영화와 비평, 남성 창작자와 여성 뮤즈, 흑인 영화가 의미를 획득하는 방식 등을 이성애 커플의 드라마와 결합한 수작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영화보다 영화 이면의 이야기가 더 재밌다고 말해 준다.
흑인 이성애 커플인 맬컴과 마리는 성공적인 파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맬컴의 영화감독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마리의 표정이 어딘가 뾰로통하다. 맬컴의 영화는 약물 중독으로 괴로워하던 어린 여성의 이야기다. 마리는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안다. 그런데 맬컴은 연설에서 자신에 대한 감사를 빼먹었다. 영화는 온전히 맬컴만의 것이 되었다. 마리는 상실감을 느낀다.
마리의 소외감은 쉬이 달래지지 않는다. 마리는 맬컴의 사랑이 자신의 삶을 영화화하려는 이기적 예술 욕망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심한다. 왜 자신이 배우를 꿈꿨던 걸 알면서도 영화에 캐스팅하지 않았냐고 따진다. 여성 감독이라면 영화 속 주인공의 상처를 다르게 접근했을 거라고 비난한다.
영화 〈맬컴과 마리〉 스틸컷 ⓒ넷플릭스
맬컴이 반격한다. 최초 영감자는 마리가 맞지만 영화가 전부 마리의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마리의 항의가 마리의 이야기를 각색한 자신의 노력을 삭제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왜 자의식 과잉으로 자신을 공격하냐고 마리를 몰아붙인다. 맬컴은 마리가 온전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나지 못하고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 감독이라 여성의 고통을 폭력적으로 재현했다는 비평가의 의견에 공감하는 마리에게는 자신이 흑인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급히 단정 짓지 말라고 반박한다. 나아가 왜 흑인이 만든 영화는 그 자체로 즐기지 않고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질문한다. 정치적이기만 한 흑인 감독에 대한 찬사 혹은 비난이 흑인이 만든 영화를 더 숨 막히게 한다고 불평한다.
둘의 복잡한 역사와 감정에 관한 싸움은 새벽이 되도록 끝나지 않는다. 웃고 키스하며 함께 음식을 먹다가도 다시 싸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끝내 ‘미안해’, ‘고마워’라고 말해 버린다. 그렇게 앞으로도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둘 사이에는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영원히 이해되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은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 영화감독과 그 애인의 사랑싸움이 강렬한 영화적 순간을 선사하는 건 이 때문이다. 끝내 가 닿지 못함에도 서로를 사랑하는 걸 멈출 수 없는 맬컴과 마리에게서 근원적 소통 불가능성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슬픈 의지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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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는 정말 달콤할까?
가장 완벽한 복수는 무엇일까. 똑같이 되갚아주는 것? 보란듯이 잘 사는 것? 아무래도 받은만큼 돌려주는 쪽에 마음이 동한다. 내가 아팠던만큼 상대도 아파야 평등한 것이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는 사람의 팔을 부러뜨린 자는 팔을 부러뜨리고, 눈을 멀게한 자는 눈을 멀게 한다는 동태(同態)복수 원칙을 명시했다. 암 역시 그렇고 말고. 그렇지만 이 원칙이 개인적 복수의 당위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복수를 끝마친 피해자는 다시 가해자로 법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 될 테니까. 가장 정의로운 방식처럼 보이지만, 본인이 다시 복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안타깝게도, 복수는 위임된 권력이 대신 행할 때에만 정당성을 갖출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복수의 칼날은 제자신에게 돌아온다. 복수는 달콤한만큼 유독하다.
복수의 유독성이 가장 강력하게 분출하는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복수가 성공하는(혹은 성공했다고 믿는) 순간이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복수의 이중성을 잘 담고있다. 복수라는 덫에 갇혀 허우적대는 두 남자의 이야기. 한 남자는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파멸했고, 다른 한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멈췄지만 영원히 구속된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사는 남자 '오대수'가 평생 수습하지 못할 과오를 저지르며 벌어지는 복수극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15년 간 그를 감금했다. 오대수가 함부로 혀를 놀렸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이수애(이우진의 누나)와 이우진이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목격했고, 친구에게 소문을 퍼뜨렸다. 이수애는 학교에서 깨끗하지 못한 여자로 소문이 났고,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이우진은 오대수를 몹시 증오했다. 그래서 좁은 골방에 가두고는 군만두만 먹였다. 심지어는 오대수의 부인을 살해하고 그가 범인인 것처럼 꾸미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이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평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우진은 최면을 걸어 오대수와 미도가 서로 사랑에 빠지도록 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두 사람이 부녀관계였음을 폭로한다. 오대수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이우진의 복수는 평등해졌다. 이우진은 자살함으로써 한 발 더 나아간다. 오대수는 홀로 덩그러니 남은 채 혀를 자름으로써 인과응보를 받아들인다.
"누나하고 난 서로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
이우진이 오대수를 15년 간 감금한 것은 더 '잘' 복수하기 위해서다. 오대수를 죽이거나 그의 딸 미도를 해코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평등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오대수와 미도가 사랑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두 사람이 부녀 관계임을 밝힘으로써 마주하게 될 죄책감과 수치심을 온전히 느끼기 바랐기 때문이다. 오대수가 이우진을 일찍이 죽이지 않은 것 역시 마찬가지다. 감금한 이유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에, 복수의 명분을 밝히기 위해서 게임에 끝까지 참여했다.
공교롭게도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붕괴는 시작된다. 오대수가 감금의 이유를 알아내고 의기양양하게 이우진을 몰아붙이는 순간, 알고보니 모든 재앙이 스스로 몰고 온 것임을 인식한다. 오대수가 혀를 잘라냄과 동시에 이우진은 일생의 후련함을 느끼지만, 이내 삶의 이유를 상실하고 자살한다. 복수가 달콤함 뒤에 숨겨둔 독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두 사람은 모두 복수의 피해자다.
이우진은 멈출 수 없었다. 누나를 잃은 뒤로 삶은 피폐해졌고 오직 복수만이 구원이라고 믿었다. 복수에 중독되고부터 어쩌면 누나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자결로써 복수를 완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대수는 멈출 수 밖에 없었다. 15년의 세월을 빼앗아 간 이우진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대수는 복수의 대상을 잃었고, 삶의 추동을 상실한 채 방황하게 됐다. 역설적이게도, 그토록 증오했던 이우진이 죽음으로써 살 이유가 사라졌다. 다만 그에게 남은 것은 불편한 진실을 감내하는 일 뿐이다.
복수에서 승자는 없다. 복수에 성공했지만 삶을 멈추게 된 이우진도, 목숨을 부지했지만 복수에 실패한 오대수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복수의 달콤함은 끝내 두 사람에게 독이 됐다. 복수는 상처의 처방전이 될 수 없다. 상처의 근본적 해결은 환부를 치료하는 것이지, 남에게 똑같이 상처를 내는 것이 아니다.
복수를 멈추고 용서를 한 자만이 자유롭다. 용서만이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과연 그 자유는 정말 행복할까? 다음 편에서는 용서라는 덫에 빠진 한 여인, 이신애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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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의 달,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 BEST 4
안녕하세요. 광남입니다. 오늘은 다가오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 BEST 4를 선정해봤습니다. 가족조차 모이기 힘든 요즘, '가족'이란 단어도 어색해지지 않았나 싶은데요. 조금은 낯간지러울 수 있지만 광남이가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로 어떤 영화들을 선정했는지 궁금하시다면 끝까지 함께해주세요. 그럼 바로 시작합니다.
가정의 달,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 BEST 4
집으로
“할머니, 저 왔어요. 할머니 손주 ‘상우’예요” 도시에 사는 7살 개구쟁이 ‘상우’가 외할머니가 혼자 살고 계신 시골집에 머물게 된다. 말도 못하고 글도 못 읽는 외할머니와의 시골살이. ‘상우’ 인생 최초의 시련은 과연 최고의 추억이 될 수 있을까?
첫 번째 가족이 생각나는 영화 '집으로' 입니다. 아마 어린시절 유승호를 볼 수 있다는 재미도 있지만, 할머니와 추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공감하면서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가 나왔을 당시에는 조폭, 건달 등을 소재로 한 한국영화가 많이 나왔었는데 이렇게 잔잔하고 할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영화가 나와 많은 공감을 얻었었죠. 어쩌면 지금의 10대는 느끼기 힘들 수 있기 때문에 더더욱 한번 보시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가정의 달,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 BEST 4
이프 온리
어느날, 사랑하는 여자 사만다(제니퍼 러브 휴잇)가 사고로 죽었다.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떠나보낸 남자 이안(폴 니콜스)은 사만다의 악보를 끌어안고 잠에 드는데.. 다음날, 눈을 떠보니 옆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리면서 사만다가 있음을 확인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만다. 지난 날을 꿈이라고 생각한 이안은 사만다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만 사만다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정해진 운명은 다시 일어나는 법! 전날 이안이 겪었던 일은 다른 방식으로 모두 나타나고, 이안은 더 늦기전에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사만다에게 전하려고 한다.
두 번째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는 '이프 온리'입니다. 이프 온리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하는 영화입니다. 영화 속 남주 이안은 매일 보는 연인 사만다에 대해 익숙함으로 인해 상대방에 대한 감정조차 까먹고 말죠. 결국, 사만다가 죽고 나서야 이안은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데, 다음 날 살아 돌아온 사만다와 보내는 마지막 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이 영화는 어찌 보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부부 관계에서 소홀해질 수 있는 감정을 다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가정의 달,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 BEST 4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
20세기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현재의 21세기 일본은 감정도 없고 메마른 곳이라며 현재의 일본을 20세기 되돌려 놓으려한다. 그래서 짱구네 가족이 자신들의 미래를 찾기 위해 이를 막아내고 다시 일본은 원래대로 돌아온다.
세 번째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는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 어른 제국의 역습'입니다. 이 작품은 어른들과 아이들의 전쟁을 짱구만의 포인트로 그려낸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 속 짱구 아빠 신영만의 과거 회상 장면이 생각보다 많은 어른들의 감정선을 터치하는 바람에 애들 보여주려고 봤다가 어른들이 울어버린 영화이기도 합니다. 영화 자체는 짱구는 못말려 애니메이션 1편을 보는 느낌이지만 그 안에 잠깐 담겨있는 짱구 아빠의 과거 회상 하나만으로도 가족이란 단어에 들어있는 수많은 의미 중 일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정의 달,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 BEST 4
어바웃 타임
모태솔로 팀(도널 글리슨)이 성인이 된 날, 아버지(빌 나이)로부터 놀랄만한 가문의 비밀을 듣게 된다. 그 비밀은 바로 대대로 집안 남자들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시간을 되돌려 히틀러를 죽이거나 여신과 뜨거운 사랑을 할 수 없지만 여자친구 정도는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팀은 가문의 비밀을 안고, 꿈을 위해 런던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메리(레이첼 맥아담스)에게 한눈에 꽂히게 된 팀은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어설픈 대시와 시간 되돌리기를 반복하면서 그녀의 마음을 사게 되는데..
마지막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는 '어바웃 타임'입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팀의 집안은 대대손손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고, 자신이 원하는 이성인 메리의 사랑을 얻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곤 합니다. 그렇게 메리와의 결혼에 성공한 팀은 더이상 시간을 되돌릴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아버지가 암으로 죽기 직전에 처하고 시간을 되돌리고자 하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현재 자신의 아이가 바뀔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에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는데요. 영화 어바웃타임에서는 팀과 메리의 관계도 있지만, 아버지와 팀의 관계 속에서 보여주는 부정에 대해 뜨겁게 느낄 수 있는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오늘은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이 보고 싶어지는 영화 BEST 4를 선정해봤습니다. 이 외에도 너무 따뜻하고 가족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들이 많이 있을 텐데요. 오늘 소개해드린 작품들도 한 번 다시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가오는 5월 가정의 달에는 부디 코로나 확진자 수가 올라가지 않고 내려가서 안정화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 광남 -
* 본 콘텐츠는 블로거 광남 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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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임 유어 맨> 리뷰 예고편
페르가몬 박물관의 고고학자 '알마'는 연구비 마련을 위해 완벽한 배우자를 대체할 휴머노이드 로봇을 테스트하는 실험에 참여하게 된다. 그렇게 오직 '알마'만을 위해 뛰어난 알고리즘으로 프로그래밍된 맞춤형 로맨스 파트너 '톰'과 3주간의 특별한 동거르 시작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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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무도 없는 곳> 메인 예고편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느 이른 봄,
7년 만에 서울로 돌아온 소설가 ‘창석’이
우연히 만나고 헤어진
여기, 길 잃은 마음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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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치게 영리했던 <로키>가 범한 MCU다운 실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벤져스: 엔드 게임>에서 2012년 시점의 뉴욕으로 시간여행을 한 어벤져스 덕분에 어부지리로 테서랙트를 손에 넣은 '로키(톰 히들스턴)'. 그는 꼼짝없이 아스가르드에 죄인으로 송환될 위기 상황에서 테서랙트를 이용해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멀티버스가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우주의 시간선을 관리하는 조직인 TVA는 탈출한 로키를 즉시 체포하고, TVA 요원인 '뫼비우스(오언 윌슨)'는 로키에게 TVA와 함께 움직여 달라고 요청한다. 다른 우주의 로키인 '실비(소피아 디 마티노)'가 우주의 타임라인을 어지럽히고 있기에 로키에게 그녀의 계획을 알아내고 막아달라는 것이다. 요청을 받아들인 로키는 실비를 쫓아 다양한 세계를 오가기 시작하고, TVA가 숨기고 있던 진실에도 한 발짝씩 다가간다.
캐릭터쇼라고 불릴 정도로 매력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를 선보여 왔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그중에서도 로키는 가장 독특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빌런으로 등장했으나 마냥 미움을 사지는 않았고, 토르와의 애증 넘치는 관계성을 바탕으로 든든한 조력자로 변해가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역경 앞에서도 끝끝내 살아남아 왔다. 심지어 완전히 퇴장했다고 생각한 와중에도 로키는 평행세계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설정으로 다시금 모습을 보였다.
이를 가능케 한 결정적 이유로 로키가 변수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다. 전투 중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환영을 만들어 내었듯이, 그의 행동은 항상 눈에 보이는 목적과 그렇지 않은 목적이 혼재되어 있었다. 특히 본인만 아는 진짜 목적은 더 큰 혼란을 유발하면서 관객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곤 했다. <토르: 다크 월드>에서는 죽은 듯했지만 살아남아 아스가르드의 왕이 되었고,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도 토르 몰래 테서랙트를 훔쳐 나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서막을 열었다. 이처럼 이야기를 더 복잡하게 끌고 가는 변수라는 독특한 매력이 있었기에 로키는 사랑받을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 내는 종잡을 수 없는 바로 그 매력 때문에 로키의 첫 단독 작품인 디즈니+의 드라마 <로키>는 만족스러움과 실망이 교차한다. <엔드게임>에서 사라진 로키를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아이디어까지는 로키스러운 콘셉트였지만, 그 아이디어가 구체화되는 과정에서는 로키다운 재기 발랄함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로키>의 에피소드 6개는 그의 첫 단독 작품을 접한 만족감이 MCU의 설명서를 보는 실망감으로 변하는 시간이 된다.
<로키>를 독립된 작품으로 보면 드라마의 전반부는 예상외의 고민과 성찰을 선사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데 성공한다. <어벤져스> 1편 시점에서 평행세계로 도망친 로키는 우주의 시간선을 관리하고 멀티버스의 출현을 막는 TVA에서 그가 살았어야 할 미래와 그의 인생에 대한 모든 것을 배운다. 이때 드라마는 마치 마블 스타일의 <테넷> 마냥 로키가 느끼는 회의감과 허무함, 그리고 새로운 삶의 의지를 세심히 살핀다.
로키는 이미 인생의 행보가 결정되어 있다면 오딘의 양자이자 두 번째 왕자로서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자신에게 자유의지는 무슨 의미가 있고, 스스로의 존재는 어떤 의의를 가질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특히 그가 <인피니티 워>에서 장난의 신으로 죽어가면서 타노스에게 "너는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유언을 남긴 점을 고려하면 그의 회의와 고뇌는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세상을 파괴하고 자신의 뜻대로 다시 창조하며 신의 행세를 하려고 한 타노스가 실패할 것을 확신했던 신조차도 그저 정해진 운명선을 착실히 걷고 있었을 뿐이라는 역설적인 전개가 아이러니함을 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을 담아내면서 로키의 이야기는 시청자가 이미 알고 있던 것 이상으로 확장되며, 왜 그의 스핀오프 작품이 필요했는지를 증명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이전까지 <로키>가 이룬 성과는 빛이 바랜다. 마블 세계관을 구성하는 조각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지면서 정작 주인공이어야 할 로키의 존재감과 이야기의 비중은 급격히 낮아진 결과다. TVA를 탈출하려 하고 진통 끝에 모비우스와의 협력을 약속하던 때와 달리, 실비가 등장 이후 로키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로 기능한다. 수사물처럼 TVA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는 대부분의 사건은 실비가 주도하며, 핵심적인 이슈에 대한 결정 역시 그녀의 손에 달려 있다. 특히 마지막 순간 멀티버스의 시작을 알리는, 그 이전에 운명에 종속되지 않는 존재임을 어필할 기회 역시 로키가 아닌 실비에게 주어지며 로키는 단지 그 여파에 휩쓸리는 데 그친다. 특히 빌런부터 토르의 조력자까지 정체성이 거듭 변화하는 와중에 단 한순간도 사건의 주도권을 놓지 않은 캐릭터가 바로 로키였다는 점에서 드라마는 큰 괴리감을 유발한다.
이처럼 로키가 멀티버스로 인해 자신의 서사와 정체성, 그리고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독립된 작품으로서의 <로키>와 마블 페이즈 4의 설정집으로서의 <로키>가 충돌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물론 로키마저 예상치 못한 속임수를 보여주는 실비나 아스가르드의 환영을 만들 정도로 강력한 마법을 선보이는 클래식 로키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로키의 단독 이야기로 멀티버스를 소개한다는 선택은 역으로 로키라는 캐릭터를 희미하게 만들어 버렸고, 지나치게 영리한 꾀에 스스로 넘어가 버렸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 외에도 <로키>는 여러 한계점을 노출한다. 우선 야심 차게 막을 연 멀티버스라는 설정은 그 자체로 양날의 검이 될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멀티버스는 또 다른 마블의 드라마인 <왓 이프...?>처럼 다양한 상상을 현실화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지만, 후속작이 개연성이 떨어지는 무리한 전개를 남발하더라도 이를 합리화해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페이즈 3에서부터 줄곧 지적되었던, 하나의 영화나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보다는 시리즈로서의 완성도를 우선시해 점점 더 많은 배경지식을 요구할 것이라는 우려를 키운다.
한편 <이터널스>에서도 본 것처럼 MCU의 새로운 지향점으로 설정된 다양성을 녹여내는 방식도 아쉬움을 남긴다. 사실 로키는 젠더 이슈와 관련하여 정치적으로 올바른 기제를 펼쳐 보이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신화와 전승에서 엄연히 여신과 결혼한 몸이지만 암말로 변신하여 오딘이 타고 다니는 다리가 8개 달린 말 슬레이프니르를 낳기도 하는 등 분명 양성애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드라마는 과감한 시도를 하는 데 인색하다. 세 번째 에피소드 속 실비와의 대화와 그 대화를 장식하는 무지갯빛 조명에서 성적 정체성을 암시할 뿐이다. 또 결국 실비와 로키의 관계가 이성 간의 로맨스로 이어지다 보니 그 진의마저 의심스러워진다.
<로키>를 멀티버스의 시작점으로 삼은 것은 분명 영리한 한 수였다. 우주의 균형이 무너지는 대사건을 풀어내기에 존재 자체가 속임수, 변수, 반동분자인 로키는 멀티버스라는 설정을 확립하고 세계관을 확장하는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최적의 주인공이었다. 또 가장 사랑받는 캐릭터 중 하나를 복귀시키고 추가적인 등장 여지도 남기면서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선택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늘 로키의 잔꾀와 속임수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불러왔듯이, <로키>의 결과물 역시 지나치게 영리했다. 이전까지의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의 간격을 가능한 한 좁혀 놓겠다는 선택은 로키를 주인공으로서 서사의 중심에 놓는 대신 거대한 세계관을 지켜보기에 급급한 목격자로 만들었다. 페이즈 4에서 단독 작품보다는 하나의 부속품에 가까운 작품을 선보이는 실수를 반복하던 마블의 고질병이 또 도진 셈이다. 이에 더해 부수적으로는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지향성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까지 남겼다.
과거 케빈 파이기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구축하는 비법을 묻는 언론의 질문에 대해 "세계관을 걱정하지 마라. 영화를 걱정하라( don't worry about the universe. Worry about the movie")"라고 답한 바 있다. 과연 현재 마블은 페이즈 4와 그 이후를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의 작품을 걱정하고 있을까? 시즌 2를 확정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로키>는 우려를 달랠만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듯 보인다.
P(Poor, 형편없음)
팬들은 계속해서 MCU를 좋아하겠지만, 영화팬도 앞으로 그럴지는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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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칙하고 화끈함, 직설적이고 때로는 통쾌하다!
2021년에는 2020년에 코로나로 인해 미뤄진 영화들까지 대부분 개봉하고, 신작들까지 겹쳐져 정말 볼 영화들이 많았던 해라 생각한다. 필자가 전주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한국의 핵심 영화제에 참석해 여러 영화를 보았음에도 아직 못 본 영화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2021년 최고의 영화는 바로 라드 주드 감독의 "배드 럭 뱅잉"이라 단언코 말할 수 있다. 영화의 시놉시스만 보고서는 포르노와 관련된 주제만 이야기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감독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루마니아의 근대사, 인종, 계급 등 여러 사회의 문제들을 신랄하게 다뤄낸다. 1부는 주인공이 작중 상황에 어떻게 처하게 되었는지 담담하게, 마치 페이크 다큐 처럼 담아내고, 2부는 통칭 기분나쁜 그림 사전으로, 정말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풍자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엘리트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는 어디서 무시한 여자가 나같은 지식인에게 대들냐며 소리지르는 직원을 보여주고, 두개골을 설명할때는 흑인 차별로 이용된 골상학의 역사에 대해 보여준다. 3부는 학부모들과의 토론을 보여주고, 어떻게 끝날지 3가지 엔딩으로 보여준다. 이 세가지 엔딩은 현실적이기도 하지만, 비현실적이고 통쾌함을 선사하는 엔딩도 있다. 이러한 발칙하고 화끈하고 적나라한 연출들은 정말 직설적이고 때로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정말 만족스러웠지만 한국에서는 개봉 가능성은 없는게 현실이라 생각했지만, 최근 한 수입사에서 영화를 수입해왔다는 사실이 들려 곧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다만 선정성에 후하다는 일본도 일명 자가검열판으로 15세 관람가로 개봉했는데, 한국에서는 어떻게 개봉할지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 본 영화의 자가검열판은 감독 본인이 직접 일반 극장에도 틀 수 있게 검열한거라 하는데, 과연 검열을 거치고도 신랄한 풍자의 맛을 느낄 수 있을까 궁금하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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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가 될 수 없는 어떤 과거
SYNOPSIS.
천재 피아니스트,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
보사노바 황금기를 책으로 담으려던 기자 ‘제프 해리스’.
우연히 감미로운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 주인공 ‘테노리우 주니오르’에 매료된다.
하지만 30년 넘게 음악 활동을 멈춘 그의 삶은 미스터리로 가득했다.
제프는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여러 음악가들과 인터뷰를 거듭하며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데...
밝혀진 충격적인 사실은 테노리우 주니오르가 아르헨티나 투어 중 실종되었다는 것!
POINT.
✔ <치코와 리타>에서 쿠바를 배경으로 재즈와 사랑을 얽어 보여주었던 바로 그 감독이, 이번에는 갑작스럽게 사라진 피아노 연주자의 실화를 담아 왔습니다
✔ 보사노바 재즈 아티스트를 좋아한다면 놓치기 아쉬운 이름들이 숱하게 지나가는 작품
✔ 화려한 색감과 보사노바 재즈 음악으로 우리의 감각을 두드리는 작품
✔ 동시에, 한 시대의 어둑한 이야기를 조망하는 작품
✔ (요즘 왜 자꾸 이런지 모르겠지만~ 알겠기도 하고~) 지금 이 시국에 보면 섬뜩해지면서 더 의미를 품고 다가오는 작품
✔ 1월 29일 개봉
한 장르가 가장 화려하게 피어났던 시절을 뒤돌아보는 것은 언제나 묘한 감정을 준다. 모든 부와 시선이 집중되어 미친 듯이 빛나는 시기를 보는 일은 눈이 즐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 결말 혹은 명암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래의 입장에서 소위 황금기 혹은 전성기였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 노스탤지어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바빌론>, <맹크>, <헤일, 시저> 같은 작품들을 생각해 본다.
보사노바의 물결을 타고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는 제프 해리스라는 작가가 재즈 관련 칼럼으로 유명세를 얻고 새 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들었던 앨범 속 피아노 연주자 테노리우 주니오르(Tenorio Junior)의 삶과 행적을 따라가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하계 올림픽/패럴림픽 마스코트 이름에까지 쓰였던 조빔이나 비니시우스의 명성에 비해 낯선 이름이지만, 그의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브라질에서 태동한 보사노바 재즈의 물결, 그 원류를 마주하게 된다.
보사노바의 창시자처럼 여겨지는 작곡가 조빔과, <이파네마의 소녀> 작사가이기도 한 시인 비니시우스의 만남. <슬픔이여 안녕(Chega de Saudade)>라는 전설적인 곡의 탄생, 엘라 피츠제럴드가 자기 공연을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가던 클럽의 존재까지... 브라질이 세계 음악의 중심지처럼 여겨졌던 그 시절. ('보사노바Bossa Nova'라는 단어 뜻 자체도 뉴웨이브, 누벨바그와 똑같다는 지점에서 더더욱) 영화로 치면 누벨바그 같은 시절이었다. (그 과정에서 엘라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아티스트들의 육성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과 기쁨과 위대함만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보사노바가 널리널리 알려지던 그 전성기는 상처와 함께 이어진다. 1964년부터 1985년까지 20년 간 이어진 브라질의 군부 독재는 수많은 사람들의 살해와 실종으로 이어졌고,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독재 세력은 사람들이 함께 음악을 듣는 행위를 싫어한다. 예술가들도 탄압을 받았고, 많은 브라질 뮤지션들은 때마침 무르익은 보사노바 음악과 함께 북미권에 진출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살해당하고 실종당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도 예술가가 있었다.
영화는 재즈 애니메이션에 담근 다큐멘터리로, 애니메이션 작화 이전에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말했을지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가 들어 있다. 그들의 말은 다소 반복적으로 전개되는데, 그 부분이 내겐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다. 무수한 피해 증언이 모자이크처럼 모여 거대한 국가 폭력을 고발하는 그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료이자 친구였던 테노리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여전히 괴로워했고, 그를 그리워했으며, 그의 면면은 조금도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정치적인 삶을 살지도 않았고, (거의 불교도 같았다는 주변인들의 증언과는 달리) 곧 태어날 아이까지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과 아내를 두고 애인을 동행해 투어를 떠날 만큼 그다지 도덕적인 현자도 아니었으며, 다만 그가 남긴 악보만으로도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곡을 남긴 훌륭한 음악가였던 테노리우 주니오르는, 그의 삶이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 '정치적'이 되었다.
미래가 될 뻔한 과거를 타고
삶의 한 순간을 강렬하게 스친, 오래도록 좋은 기억이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져 살해되었다는 소식... 그것도 마땅히 국민을 지키고 삶의 기반이 되어야 할 국가가 주도하여 살해했다는 소식은 언제나 끔찍하다. 내 친구가 아무런 이유 없이 어딘가에서 학살 당하는 세상이라니. 독재 정권이란 뭘까. 왜 음악가와 학생과 시인과 주부와 어린아이를 죽일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기관총과 군인, 검열이 거리 곳곳에 깔려 있는 당시의 부에노스아이레스. 비니시우스와 피아졸라도 있었던 도시는 그들로 인해 "모퉁이를 돌아가더니 영영 안 돌아"오는 사람들의 도시가 되어버린 풍경. 그건 어쩌면 우리의 미래가 되었을 수도 있는 풍경이었다.
비록 국회와 시민들에 의해 막히기는 했으나, 우리도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하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으며, 누군가를 "계엄법에 의해 처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문건이 발표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것이다.
"(...) 선량한 일반 시민들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하겠다지만, 그런 도시에서 과연 무엇이 살아남을 수 있나. 음악도, 북적이는 사람들도, 예술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영화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을 "브라질 음악의 죽음의 메타포"라고 언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권력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사회에서 예술은 온전히 피어오를 수 없다. 그래서 더없이 '예술'적인 이 영화의 화려한 색감과 리드미컬한 음악에도 불구하고, 거기 실려 전해진 지구 반대편 나라의 근대사가 단순한 과거로만 느껴지지 않아 극장에서 섬뜩함을 몇 번이나 느껴야 했다.
테노리우가 2024년 12월 3일 이야기를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알 수 없다. 영화에서도 몇 번이나 서술되듯, 그는 자신이 두고 간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을 비롯해 그 어떤 미래도 보지 못했으므로. 죽은 자를 떠올릴 때 기묘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이유다. 내 기억 속 그들은 너무 생생한데, 그는 모른다. 기후동행카드와 K-패스로 지하철을 타는 세상도, 한국에서 칸영화제와 오스카영화제를 석권한 영화가 나오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왔다는 사실도, 그들이 없는 세상에서 이만큼 나이를 먹은 나의 모습도.
테노리우의 음악은 좋은 음악이 줄줄이 나오는 이 영화에서도 손 꼽히게 아름다워 전곡을 따로 듣고 싶어질 정도였으나,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테노리우의 죽음은 단순히 한 음악가의 죽음 혹은 한 장르의 죽음에 대한 메타포 이전에, 국가폭력의 희생자는 사실 "아직 우리 곁에 있었어야 할 사람"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수많은 상상을 발휘하게 한다. 어쩌면 윤동주가 전태일에 대한 시를 썼을 수도 있는 것이다. 군부 독재에 희생된 젊은이들 중 누군가가 세월호를 생각하고 목소리를 내는 장면을 우리가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무너진 자리에 우뚝 설 기록을 타고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서 내게 인상 깊었던 인물들은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이다. 짧게는 국가가 행한 폭력의 기록을 보관하는 이들에서부터, (이와 비슷한 이들의 존재감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서도 두드러진다) 좀더 확장하자면 제프가 글을 쓰게 하는 뉴욕의 편집자 제시카와 브라질 현지 친구 주앙도 그렇다. 이들은 계속해서 제프에게서 글을 끌어내고 그를 조력하여, 제프가 글을 완성하게 한다.
독재 정권들이 마치 짠 것처럼 싫어하는 대상은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노래 뿐만이 아니다. 폭력에 물들고 깨진 이들의 사고는 온건한 언어를 견디지 못하여, 언어를 무너뜨린다. 고문을 기다리는 통로는 "행복의 길"로 불리고, 영원한 실종은 "수송 작전"으로 불린다. 아이히만에 대해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래가 되어서는 안될, 결코 미래가 될 수 없을 어떤 과거를 재현하지 않는 방법은 기록과 기억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일에 많은 부분을 기댄다. 영화 속에서 테노리우의 죽음은, 죽음 이후 테노리우가 알지 못하는 세상은, 배턴을 이어받듯 여기까지 기록되어 왔다. <그들은 피아노 연주자를 쐈다>를 보는 당신을 통해, 또 한 번 기억되고 기록될 것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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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국 ‘미안해’, '고마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
넷플릭스 영화 〈맬컴과 마리〉는 영화와 비평, 남성 창작자와 여성 뮤즈, 흑인 영화가 의미를 획득하는 방식 등을 이성애 커플의 드라마와 결합한 수작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영화보다 영화 이면의 이야기가 더 재밌다고 말해 준다.
흑인 이성애 커플인 맬컴과 마리는 성공적인 파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맬컴의 영화감독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마리의 표정이 어딘가 뾰로통하다. 맬컴의 영화는 약물 중독으로 괴로워하던 어린 여성의 이야기다. 마리는 영화가 자신의 이야기임을 안다. 그런데 맬컴은 연설에서 자신에 대한 감사를 빼먹었다. 영화는 온전히 맬컴만의 것이 되었다. 마리는 상실감을 느낀다.
마리의 소외감은 쉬이 달래지지 않는다. 마리는 맬컴의 사랑이 자신의 삶을 영화화하려는 이기적 예술 욕망에 불과한 건 아닌지 의심한다. 왜 자신이 배우를 꿈꿨던 걸 알면서도 영화에 캐스팅하지 않았냐고 따진다. 여성 감독이라면 영화 속 주인공의 상처를 다르게 접근했을 거라고 비난한다.
영화 〈맬컴과 마리〉 스틸컷 ⓒ넷플릭스
맬컴이 반격한다. 최초 영감자는 마리가 맞지만 영화가 전부 마리의 이야기인 것은 아니다. 마리의 항의가 마리의 이야기를 각색한 자신의 노력을 삭제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왜 자의식 과잉으로 자신을 공격하냐고 마리를 몰아붙인다. 맬컴은 마리가 온전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거듭나지 못하고 항상 불안에 시달리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남성 감독이라 여성의 고통을 폭력적으로 재현했다는 비평가의 의견에 공감하는 마리에게는 자신이 흑인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급히 단정 짓지 말라고 반박한다. 나아가 왜 흑인이 만든 영화는 그 자체로 즐기지 않고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질문한다. 정치적이기만 한 흑인 감독에 대한 찬사 혹은 비난이 흑인이 만든 영화를 더 숨 막히게 한다고 불평한다.
둘의 복잡한 역사와 감정에 관한 싸움은 새벽이 되도록 끝나지 않는다. 웃고 키스하며 함께 음식을 먹다가도 다시 싸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끝내 ‘미안해’, ‘고마워’라고 말해 버린다. 그렇게 앞으로도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다.
둘 사이에는 영원히 해소되지 않을, 영원히 이해되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둘은 서로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 영화감독과 그 애인의 사랑싸움이 강렬한 영화적 순간을 선사하는 건 이 때문이다. 끝내 가 닿지 못함에도 서로를 사랑하는 걸 멈출 수 없는 맬컴과 마리에게서 근원적 소통 불가능성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슬픈 의지를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