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드레2021-12-19 23:53:46
발리우드의 매력, 시크릿 슈퍼스타
인도의 억압받는 많은 소녀들이
탄산의 거품처럼 떠오르길.
진정한 "시크릿 슈퍼스타"는 엄마였다.
한계에 갇히지 않는 꿈을 꾸는 인시아를 만들어준,
억압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문화는 이해받을 수 없다.
땅에 꽂힌 여성인권 속에서도 많은 목소리가 나오고 있지만 더 큰 목소리에 파묻혀 그 새싹들은 고개를 내미는 것조차 버겁기에 수많은 목소리가 필요합니다.
인시아의 아빠는 가부장제에 찌든 가정폭력범입니다.
식구들이 집에 들어온 그만 보면 무서워 비위맞추기에 바쁘죠
나즈마가 온수를 맞추지 않았다고 손을 부러뜨리고 음식을 준비해놓지 않으면 뺨을 때리며 아들인 구두만 챙기는데요.
아빠가 나올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지고 보기가 버거웠어요.
거기다 2017년에야 여성의 운전이 허용된 나라에 간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는데, 인시아보다 20살은 더 많아보이는 남자랑 강제혼을 시키려고 하는 모습에서 없는정까지 떨어졌습니다.
사실 이렇게 되면 남동생을 미워하기 마련인데
남동생이 어린탓인지 누나를 무시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았죠.
심지어 박스테이프로 누나의 부서진 꿈을 붙이려는 기특한 모습까지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주목할만한 점은 모녀의 이야기가 집중되어 있다는 건데요.
그래서 엄마를 위한 노래가 눈물을 자아냅니다.
큰 방패가 되어주지는 못하지만 나즈마의 한계에서 최대한 자유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인시아에겐 엄마가 답답하게 여겨졌습니다.
안시아가 엄마의 용기였다는 것을 깨달은 인시아,
정해준 삶으로 살려 하지만 또 한번 나즈마는 용기를 낸다.
씹어먹는 개연성에도, 길고긴 상영시간에도 이상의 현실을 꿈꾸고 이루어내는 이 표현이 좋았습니다.
보기 너무 힘들었던 영화 인도에 대해 여성인권을 들이댈수가없다. 짐승보다 못하니까.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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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
영화를 보기 전, 다르덴 감독이 한국 관객에게 남긴 메시지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토리와 로키타>를 보는 한국 관객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또 다른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읽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온 ‘특별 기여자’들과 그 아이들을 떠올렸다.
‘난민’이라는 단어는 그동안 건강한 담론보다는 혐오 표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래도 여론이 갈린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일해 온 ‘특별 기여자’들인데 팽해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의 의리가 불안을 이겨낸 목소리가 있었다. 여론이 이 정도라면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하며 무사 귀환에 안심한 후로는 나도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달 친구들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독서모임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당시 특별 기여자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 기존 학생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하나씩 들려 보냈다고. 이것이야말로 아이히만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과 무엇이 다르냐며 분개했다. 차라리 옛날 반장 엄마들처럼 햄버거나 쫙 돌리는 게 낫지, 기존 학생들이 시혜를 베푼 것이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저자세로 들어가게 만드나?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경계를 넘어설 텐데 어른들이 먼저 선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뒤늦게 들은 내가,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의 친구라 말할 수 있나. 지긋지긋한 내 안의 아이히만을 인지하며, 다소 무거운 감정을 안고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토리와 로키타의 행복과 무운을 비는 마음으로.
영화는 불안한 눈빛의 로키타에서 시작한다. 몇 마디 이야기가 오고 갔을 뿐인데, 관객은 금방 로키타의 거짓말을 눈치챌 수 있다. 로키타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와 함께 가다 보면, 로키타의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토리와 로키타는 각자의 이유로 아프리카 어딘가를 떠나 온 아이들이다. 벨기에에 정착해서 함께 살고자 하지만, 진작에 체류증을 받은 토리와 달리 로키타의 서류 발급은 계속해서 지연된다. 두 사람은 남매임을 증명해서 체류증을 받고자 하지만, 삶은 녹록하지 않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는다.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서 입국 비용을 내놓으라고 하는 브로커들이 있고, 고용주 또한 여러 모로 아이들을 착취하며, 심지어 로키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돈을 보내야 한다.
아이들은 피자도 배달하고, 식당에서 노래도 한다. 프랑스어로 노래하고 이어 이탈리아어로 노래한다. 이국의 언어로, 서사를 부여하면서 불러야 하면 노래도 노동이 된다. 이들의 일은 점차 위험해진다. 위험한 밤의 거리에서, 마약 배달까지 하고 있다. 아직 어려도 야무진 토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야무지게 챙겨 받을 줄 안다.
노동이 되어야 하는 노래와 대조적으로, 두 사람의 지친 밤을 위로하는 노래가 있다. 토리가 따라 부르는 로키타의 자장가. 실제 카메룬 언어로 된 자장가라는데, 내 귀에는 어쩐지 자꾸 익숙한 찬송가처럼 들렸다.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 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라는 한 구절처럼. 아무리 뒤져봐도 찬송가라는 말은 없던데. 그러나 진짜 찬송가였다고 해도 그 노래는 로키타를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브로커들이 로키타에게 만남을 요구하는 장소는 언제나 교회다.
아직 어린 어깨에 책임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보호하기에도 어린데, 자기 세상을 지켜야 한다. 그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로키타에게는 토리, 토리에게는 로키타이다. 두 사람이 어떤 서사를 통해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이런 유대 관계를 쌓게 되었는지 영화에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유독 힘든 날 보고 싶은 사람도 서로이고, 학교에서 ‘아는 사람’ 그리기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도 서로일 뿐이다. 겁먹고 숨을 헐떡일 때 약과 물을 건네주는 한 사람, 대신 문을 두드려 따져 물어주는 사람, 착취의 세상 속에서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이다.
아이들의 깊은 우정에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은 피부로 감각하여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는 환영 못 받잖아.” 로키타가 시시각각 처하는 상황은 분명 비극이지만, 세상이 로키타를 그전까지 대해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끌고 가고, 무슨 일이 생겨도 탈출구가 없는 건물에 들어가야 하고, ‘원한다 je veux’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로키타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데도, 흥청망청 사는 어른보다도 훨씬 똑똑하게 삶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들의 노동하는 등을 따라간다. <로제타> 때부터 일하는 누군가의 등을 다정하게 따르던 그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러나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가 만드는 영화의 감각에 안심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걸. 영화 속에도 친절한 개인은 있었다. 기꺼이 제 자리에서 자기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잘 곳 없을 때 오라고 주소를 주는 쉼터 선생님도. 그러나 개인의 친절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문제를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는 말했다.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 토리와 로키타의 이야기에서 조금은 마음에 남은 것이 있길 바란다고, 그래서 주변과 이야기를 나눠 주길 바란다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왜 다르덴 형제가 토리와 로키타의 친구가 되어 달라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세상만큼은 아니었으면, 사라지지 않도록 아이들이 그 자리에만 있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변화라도 이루어 갔으면.
그런 마음으로 잠을 자고 아침을 맞으니, 세상은 어린이날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얼마나 환대하고 있을까. <토리와 로키타>가 던진 질문을 계속 입 안에서 굴려 본다. 담담하여 다정하며, 더 깊은 담론을 끌어내는 이 영화는, 아마 남은 오월 내내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해맑은 노래와 함께 잔상처럼 남아 있을 것 같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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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아래층의 영웅
<몽키맨(Monkey Man)>(2024, 데브 파텔)
* 위 작품의 장면과 결말 포함
* 2024년 6월에 쓴 글
영화를 보며 든 기시감의 원인은 과연, 관람 전 감독 인터뷰 클립을 일상적으로 시청해서만은 아니었다. 주요 플롯은 전형적인 복수-동력-영웅 탄생 서사의 그것을 따른다. 닳도록 들은 대사도 종종 포착된다. 그럼에도 <몽키맨>은 유일한 작품이다. 힌두교 신화에 기반을 둔 액션 장르무비의 형식을 띤 채 인도 사회를 고발한다. 종교 자체는 존중하면서 부패한 종교(정치)인은 썰어버리는, 모호하게 뭉뚱그리거나 주저하는 법이 없는- <몽키맨>이 ‘웰메이드’인 까닭 중 하나는 정확한 곳을 찌르는 적나라함에 있다.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액션의 폭력성 역시 적나라하다.
대놓고 ‘존 윅’을 언급하며 영향을 받았음을 고백하는 <몽키맨>은 동시에 스스로가 ‘인도판 존 윅’으로 분류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키드’는 무기 암매상에서 “존 윅의 것과 같지만 중국제인” 총을 마다하고 38구경을 고른다. 그러나 오로지 개인적 복수를 목적으로 택한 총은 실패의 무기다. 죽을 위기를 넘기고 약자들의 영웅 ‘몽키맨’으로 다시 태어난 키드의 무기는, 온몸, 주방 나이프, 조리용 와인, 웨이터의 쟁반, 직원의 구두 따위 것들이다.
원숭이는 종교적인 상징이면서 계급에 대한 메타포다. 격투장을 운영하는 ‘타이거’는 원숭이를 ‘야수’, 혐오스럽고 ‘낮은’ 동물로 일컫는다. 키드는 어머니의 말을 기억하며 하누만을 동경해 왔다. 밑바닥에서 ‘감히 저 위에 있는 태양을 넘본 죄’로 벌을 받은 신. 키드에게 원숭이는 ‘낮은’ 그대로 성스럽고 용기 있는 존재다. 몽키맨은 약자들의 영웅이어야만 하고, 키드의 복수는 계급의 전복, 알파가 말하듯 모두의 싸움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복수의 과정에서 약자를 짓밟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정체성을 확실히 인식하기 전에도 키드는 떠돌이 개에게 밥을 주었고, 경찰에게 쫓기는 와중 어린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신경 썼다. ‘몽키맨’이 된 그는 링 위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일 파이터를 때려눕히지만 마지막 순간 배트를 내려놓는다. 그가 망설임 없이 칼을 꽂는 대상은 부패한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 뿐이다.
중상을 입은 키드를 숨겨주고 안식처를 제공하는 이들은 히즈라, 고대 인도부터 있어 왔던 젠더퀴어들이다. (고대 인도에서 히즈라들은 존중받았으나, 영국이 인도를 점령한 후 상황이 바뀌었다고 한다. “식민지배자들이 ‘부자연스럽다’고 간주하는 것은 무엇이든 불법화하는 형법 377조”가 도입되었고, 2018년 위헌 판정이 나기 전까지 차별과 억압의 근거로 쓰였다고.[gcn]) 거리에 나가면 자주 폭행을 당하고 ‘경찰이 수색조차 불편해하는’ 이들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며 둘 다이기도 한” 신을 섬기는 사원에 모여 산다. 거기서 키드의 실루엣은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그곳이야말로 그가 편안하게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장소다. 소외되고 배제 당한 전사들의 집,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이해를 바탕으로 지어진 세이프 플레이스다.
키드에게 “네가 누구인지 기억할 때”라는 말을 전한 이는 히즈라 커뮤니티의 리더 ‘알파’다. 키드는 익명의 ‘키드’로 살아왔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그의 인생을 정의했다. 스스로 어머니의 ‘아이’에 머무르며 복수를 위해 살아왔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할 때”: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말이기도 하지만, ‘트라우마만으로 정의되지 않는 진짜 너’를 찾으라는 뜻으로 들리기도 한다. 알파는 키드에게 ‘부서진 자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너를 갈라 열어 줄cut you wide open” 독을 건넨다.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기억을 뒤덮은 강렬한 감정을 걷어내고, 거기 담긴 진실과 자아를 직면하는 고통을 감내하고, 그곳에 붙들려 있던 어린아이를 놓아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키드는 경찰청장 ‘라나’의 배후에 있는 종교 지도자 ‘바바 샥티’ 또한 인식하게 된다.
가장 ‘아래층’인 주방에서 일을 시작해 ‘승진’했다가 추방당했던 빌딩에, 키드는 전복자로서 귀환한다. 이제 그는 혼자 싸우지 않는다. 어머니, 거리의 아이들, 성노동자들, 히즈라 동료들- 전부를 등에 업고, 혹은 그들과 나란히 싸운다. 키드가 ‘몽키맨’으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격투에서 이겨 딴 돈을 히즈라 커뮤니티에 선물하는 것이다. 그것을 상납해 사원을 유지할 수 있게 됐지만, 히즈라들은 대신 신의 전사 코스튬을 입고 혁명에 힘을 보탠다. 성판매일을 하며 비인간으로 다뤄졌던 시타, 그는 고용주이자 억압자인 퀴니의 뒤통수를 쟁반으로 내리치며 이 전복에 동참한다. 키드는 ‘위층’에 모인 이들을 차례로 넘어, 해묵은 원수 라나에게 다다른다. 그를 죽여도(이 킬링의 도구가 누군가가 남겨두고 간 구두라는 것조차 완벽하다.) 복수는 끝나지 않는다. 영화 포스터에 쓰인 씬이 이즈음 화면에 떠오른다. 피범벅이 된 키드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바 샥티가 있는 꼭대기층에 내리는, 계급의 끝과 다른 끝의 마주침이다. 바바 샥티는 ‘폭력의 순환’을 끝내기를 권유하지만, 그건 애초에 잘못된 표현이었다. 폭력은 일방적이고 수직적으로 행사되어 왔고, 누군가 “왕”의 자리에 있는 이상 계속될 것이다. ‘아래층의 영웅’이 맨 위층에 올라가 “인간이 만든 신”(-Dev Patel)을 죽이며(죽여야) 이야기는 완결된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는 어머니에 대한 키드의 회상이 있다. 부패한 공권력과 왜곡된 종교를 죽이며 복수를 마친 키드는 쓰러지며 어머니의 웃는 얼굴을 떠올린다. 비로소 기억을 놓아준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죽었든 단지 정신을 잃은 것이든, 그제야 어머니의 비명을 잊고 잠들 수 있었던 것일지도. 그가 두 번째로 부활하여 보다 본격적인 ‘피플즈 히어로’로 태어나리라는 상상을 해본다. "왕"은 죽었지만 계급은 그대로이니.
정작 인도에서는 개봉 여부조차 불확실하고, 스트리밍으로 공개된다고 해도 상당부분이 검열에 의해 삭제될 상황이라고 한다.[Indiewire] 인도의 검열 시스템은 성적, 폭력적, 종교적, 정치적인 콘텐츠를 그 맥락에 관계 없이 엄격하게 규제한다는데: 예를 들어-시타가 한 백인에게 물건처럼 다뤄지는 모습을 보고 키드의 트리거가 당겨져, 남자의 손부터 벽의 초상화를 비롯한 모든 요소가 트라우마에 뒤섞여 피범벅이 되는 연출로, ‘결국 전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장면-이 통째로 잘려나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물론 공개된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다. (영화의 핵이 인도의 지배층 힌두교 민족주의자들을 겨냥하고 있고, 실제 시위 푸티지를 사용할 정도로 비판에 진심인데... 자르고 자르다 10분도 안 남을 것 같다.) 이는 <몽키맨>이 인도 사회에 필요한 작품이었다는 반증이다.
영국 이민자 2세대인 데브 파텔은 몇년 전 한 인터뷰에서, “완전히 영국인이 되기에는 충분히 영국스럽지 못하고, 완전히 인도인이 되기엔 충분히 인도스럽지 못한”, “문화적으로 노 맨즈 랜드에 묶여 있는”[The Guardian] 기분을 느껴 왔음을 털어놓은 바 있었다. 배우로서 ‘그 사이 어딘가의 클리셰’로 ‘취급’되곤 했던, 어느 국가의 대변자도 아닌, 그의 귀한 시선으로 바라본 인도가 <몽키맨>에는 담겨 있다. ‘언더독’의 히어로 몽키맨의 탄생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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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DIRECTOR. 네오 소라
CAST.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외
SYNOPSIS. 점멸등이 일렁이는 근미래의 도쿄. 음악에 빠진 고등학생 ‘유타’와 ‘코우’는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나날을 보낸다. 동아리방을 찾아 늦은 밤 학교에 잠입한 그들은 교장 ‘나가이’의 고급 차량에 발칙한 장난을 치고, 분노한 학교는 AI 감시 체제를 도입한다. 그날 이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POINT.
✔️ <사카모토 류이치: 오퍼스>를 연출한 네오 소라 감독의 장편 극영화 첫 연출작.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다운 감각이 돋보입니다. 음악, 미술 모두 아름다워요.
✔️ 최근 일본 영화의 경향성에서 현실과 공명하는 부분들을 봅니다. 솔직히 한국 영화가 이랬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한국 사회의 맥락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어요.
✔️ 얘들아 너희 우정 정말 너무... (울컥)
✔️ 연기가 처음이라는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는 그냥 유타와 코우로 태어나서 자란 존재들처럼 보입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말대로 영화가 끝난 후에도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요.
✔️ <썸머 필름을 타고>에서 블루 하와이 역할을 맡았던 이노리 키라라, 다양한 일본 영화에서 봐온 나카지마 아유무의 얼굴도 반갑습니다.
근미래라는 단어는 분명 “앞으로 다가올 가까운 미래”라고 국어사전에 등재된 단어지만, 나는 일상에서 이 단어를 써본 적이 없다. 한국어의 어미는 시제보다 다른 것들을 더 중시하는 느낌이고, (예컨대 “하다”와 “했다”의 차이보다, “하다”와 “한 것 같다”의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 서양의 언어를 배우면 오히려 시제가 명확했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어는 단순미래와 근접미래, 복합과거, 반과거, 단순과거, 대과거를 촘촘히 쪼갰다.
일본어는 과거와 현재를 나누지만 미래 시제를 따로 두지는 않는다. 현재시제가 미래시제를 대체할 수 있고, 시간 표현이나 문맥, “~할 생각이다” 같은 표현들로 미래를 담아낸다. 미래의 어미가 존재하지 않는 언어. 그 언어 안에서 근미래는 어쩌면 현재의 탈을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언가 크게 달라질 것 같은 예감 안에서 근미래를 담은 일본 영화들을 본다. 노인 안락사를 국가 정책으로 지원하는 영화 <플랜75>는 다소 극단적인 설정이지만 작금의 약자 혐오 맥락을 보면 현재의 고민과 담론이 녹아 있다. 그리고 여기 빨간 불빛 사이를 달려, 우리에게 <해피 엔드>가 찾아왔다. 그렇다면 <해피 엔드>가 근미래를 통해 비추는 현재의 모습이란 무엇일까.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판옵티’라는 회사의 AI 감시 체계가 도입되지만, 엄밀히 말해 이 세계관은 이미 감시사회다. 미셸 푸코가 말한 감시사회는 단순히 365일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 물리적 존재보다, 그 느낌을 받은 개인이 결국 자기 행동을 검열하게 되어 굳이 물리적인 통제까지 가하지 않아도 되는 쪽에 방점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기계의 도입 여부는 마치 버튼 하나를 누르는 정도의 변화이다. 그저 인물들의 내면에 있던 생각들, 이미 느끼고 있던 감정들이 외부로 표출되는 계기.
경찰관이 얼굴을 찍는 것만으로 이름과 민족 정보까지 나오고,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코우는 유타보다 더 많은 차별을 피부로 느끼며 살고 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위기 시 내각의 권한을 강화할 수 있도록 개헌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 어쩌면 나는 이 말이 얼마나 민주주의에 큰 위기를 만드는 문장인지 즉각적으로 감각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마치 2024년 12월 3일 우리 나라에서 있었던 어떤 일처럼, AI 감시 체계의 도입은 그간 사람들 안에 있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털털하게 다녔지만 코우의 내면은 차별로 상처받아 왔고, 아무 생각 없는 사람처럼 음악에 취해 살았지만 유타는 사실 불안과 절망을 너무나 깊이 느낀 존재였고 (그의 안에 있을 ‘탄광 속 카나리아’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침묵하고 있던 파시스트들도 그제야 목소리를 낸다. AI 감시 체계 도입을 둘러싼 갑론을박은 기존에 존재하던 모든 의견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는 버튼이 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에서 묵음으로 처리된 지진은, 수도 없이 개인의 내면에서 굉음을 내며 이루어지는 어떤 붕괴들과 얼마나 다를까. 가끔은 오보이기도 하고, 또 가끔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일부러 틀어놓는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그 점조차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과 닮아 있다. 미약한 지진을 그냥 내 경련이나 어지럼증으로 오인하기도 하는 경험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지진 오보가 늘어난 데에는 어떤 거짓이 있기 때문이다. 그 거짓 뒤에는 거짓을 튀어나오게 만드는 잘못된 시스템이 있다. 교장 선생님은 AI 체계에 항의하는 아이들에게 사회는 훨씬 더 차가운 곳이라고 계속 이야기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학교 교육의 목적은 감시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 정도 시스템은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그 감시 시스템은 결코 자기들의 말대로 “공정과 상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교사의 말에 순응해 교실 바깥으로 나온 ‘비-일본국민’ 학생들에게는 벌점이 부여되고, 똑같은 잘못으로 불려간 후미와 코우의 보호자들은 전혀 다른 태도로 교장실에 들어선다. 법적 의무가 아님에도 달라고 하면 따라가야 하는 경찰들의 태도 또한 이를 드러낸다.
이런 사회는 누가 언제 내 눈앞에 나타나 권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 요청할 수 있는 사회로, 그건 마치 코앞에 총구를 들이대는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례로 어둠 속에서 설왕설래하는 코우와 어머니의 대화를 끊고 다가오는 자경단의 불빛은 이청준의 소설 <소문의 벽>에 나오는 전짓불을 떠올리게 한다. 얼굴을 알아보고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물을 때에야 그 공포는 희석되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감시사회는 공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기에. 그 공포의 ‘전짓불’이 자신을 향할 일 없다 믿는, 작은 박스 안에서의 삶에 순응하면서 살아감으로 충분하다 믿는 이들만이 캐비닛에 갇힌 채로 안심한다.
뭐 캐비닛에 갇혀 괴롭힘을 당하는 데에 익숙한 누군가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이런 사회 안에서 심경이 복잡해진다. 아이들은 작은 새들처럼 예리하게 그 복잡한 감각을 받아들이고 또 내뿜는다.
톰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말을 할 때, 유타는 그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톰은 마치 유타를 달래듯 미국’도’ 끔찍하다는 말을 한다. 이 절망에 혼자 버려지고 싶지 않은 유타와, 친구들을 부드럽게 어르는 힘을 가진 톰의 사이에는 ‘주의’라고 적힌 기둥이 놓인다. 무엇을 주의하는 것일까, 궁금해하다 나중에 유타와 코우가 대화하는 그림자를 보고 깨닫는다. 기둥 위에는 거울이 있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는, 바로 그 볼록거울. 우리가 가장 경계하고 주의해야 하는 것들은 거울 속에, 가만히 바라만 보는 눈 속에 있다. 방관 속의 침묵으로 드러난 파시즘이 대를 잇는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다만 그 파시즘을 깨뜨리는 것은 결국, 아주 오래 같이 걸어온 사이의 사랑이다. 언제부턴가 사랑은 연애감정의 동의어로 쪼그라들었고, 심지어 그조차 사치라는 듯 연애 관계조차 규약처럼 바뀌어 간다. 이러한 시대에, 제각각의 생각으로 박터지는 세상에서, 서로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고서도 유타와 코우는 서브 우퍼를 같이 옮긴다. 음악을 같이 듣고, 땀을 같이 흘린다.
<해피 엔드>가 그리는 현실은 그다지 전망이 밝지 않다. 난카이 대지진이 발생한다면 그때 1923년이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실제로 감독은 그 질문을 품었고, 영화 속 캐릭터 후미 또한 가네코 후미코에서 따왔다고 밝혔다. 세상은 멈추고 또 흔들리고, 상처를 남기고, 달라지는 건 별로 없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마음 그대로가 우리의 싸움이다. 때로는 깊은 절망 안에서 회피하고, 때로는 투사처럼 싸운다. 다시 만날 수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함께 부르는 노래가 있고, 나누어 먹는 김밥이 있고, 과거에 빚진 멋진 음악도 있다. 절망하지도 희망하지도 못하는 채로,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채로, 그 모든 것을 끌어안고 혼란한 이 마음으로, 우리는 앞으로 간다. 거울은 맞세워 놓으면 무한 확장되는 세계 같지만, 깨지면 아무 것도 아닌 세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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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가족의 울타리
우리 모두는 태어나는 순간 혈연관계가 만들어진다. 부모와 형제들과 맺은 관계는 살아가는 모든 시간에 조금씩 영향을 준다. 전통사회부터 현대사회까지 아이를 출산하고 육아를 하는 일은 혈연관계에 있는 가족에게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더욱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어떤 사람들은 혈연, 자기 핏줄이라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기도 했다. 이런 혈연관계 아래에서는 각자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을 나눠서 하기도 하면서 각자는 가족에 어떤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다.
서로에게 의지하고 또 챙기면서 끈끈한 관계를 맺으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켜왔던 사람들은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조금씩 떨어져 살기 시작했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가족에 대한 의무감도 자연스럽게 약해졌다. 최근에는 1인 가구나 비혼 인구도 늘어나면서 더욱더 그 가족의 단위는 줄어들고 있다. 그래서 가족이 아닌 사람들끼리 한 집에 산다거나 어떤 감정적 교류를 하면서 살아가는 가족 아닌 가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바로 대안 가족 또는 유사 가족이라고 부르는 집단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함께 생활의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유사가족이 되어가는 인물들의 이야기
영화 <브로커>는 주인공들이 일종의 유사 가족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다. 과거 혈연관계가 시작되는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은 한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다.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쳐 세상에 나온 아이는 서서히 가족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다. <브로커>에서는 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가족의 울타리에 들어갈 기회를 박탈당해버린다. 아이 우성의 엄마인 소영(아이유)은 한 성당의 베이비 박스에 아이를 내려놓고 돌아선다. 그리고 상현(송강호)과 동수(강동원)는 그 아이를 데리고 간다. 그들은 아이를 돈 받고 파는 일종의 브로커다. 이 첫 장면이 지나가는 시점에 주요 등장인물들은 가족의 울타리를 깨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 같이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를 파는 브로커인 상현과 동수는 그렇게 나쁘지 않게 보인다. 그들은 아이를 구매할 구매자를 찾는데 돈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이상해 보이는 구매자는 걸러낸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일종의 양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아이 우성의 엄마 소영은 상현과 동수가 브로커임을 알게 된 이후 아이의 판매에 동참한다. 그렇게 더 까다롭게 아이를 키울 부모를 보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영화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아이의 울타리를 깨는 사람에서 새로운 울타리를 만들어주려는 사람들로 서서히 바뀌어나간다.
아이를 버린 엄마 소영은 미혼모다. 그만의 사정이 있고, 아이에 대한 애정도 그렇게 많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꽤 반항기 있는 말투와 센 화장이 그가 살아온 태도를 보여준다. 반면 상현은 이혼남이다. 도박으로 인해 가족들이 그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고, 그 관계도 좋지 않다. 그리고 동수는 어린 시절 보육원에 맡겨져 자라온 인물이다. 자신을 찾아오지 않은 엄마에 대한 원망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인물이다. 이 세 인물은 삶에 어딘가 결핍이 있다. 그들은 사랑받지 못하고 있고, 이후에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삐뚤어진 삶을 살게 되온 건지도 모르겠다. 이 세 인물 모두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전혀 없거나 깨져버린 인물이다.
관계가 깨진 인물들이 아이를 위해 다시 만들어가는 가족의 울타리
이렇게 자신의 삶이 깨진 채 살아가고 있는 세 인물이 우성이라는 한 아이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이고, 그 아이를 좋은 부모에게 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세 인물이 이루지 못한 삶의 어떤 부분을 채워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들은 아이의 삶이 자신들처럼 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브로커 일을 꽤 오래 했고 가장 나이가 많은 상현이 큰 생각 없이 아이를 넘길 것만 같지만 그마저도 마지막에는 마음을 돌린다. 그리고 아이 우성의 부모를 택하는 과정 속에서 엄마 소영의 마음도 서서히 풀려간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른 채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들어나갔던 것일지도 모른다.
소영과 상현, 동수는 아이와 밀접한 위치에서 부모를 찾으려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여기에 외부인의 시선이 등장한다. 바로 형사 수진(배두나)과 이형사(이주영)이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버려진 아이의 브로커 역할을 하는 상현과 동수를 수사해 왔다. 그들은 상현의 집 근처에 잠복하며 아이가 거래되는 순간을 이용해 상현과 동수를 잡으려고 하는 인물들이다. 특히나 수진은 외부에서 이들의 대화를 도청하거나 이들의 행동을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처음에는 브로커 역할을 하는 이들을 안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시간이 지나고 이들의 다른 모습을 본 이후에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영화에서 수진의 역할은 외부자의 시선일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 역할도 한다. ‘낙태와 살인 중 무엇이 더 나쁜가’ 나 ‘낙태와 아이를 버리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나쁜가’ 같은 복잡 미묘한 사회적 문제들을 소영과 수진의 대화를 통해서 던지고 있다. 조금은 기능적으로 소비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주지만 수진이라는 캐릭터가 없었다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았을 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소영, 상현, 동수 세 인물의 동선에 수진의 동선이 포함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된다. 그렇게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들도 하나로 연결되어 합쳐진다.
영화는 모든 인물이 결국 연결되고 가족처럼 그들만의 울타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담겼다. 특히나 이야기 중 어떤 인물이 “살아줘서 고마워”라고 반복해서 내뱉는 말은 꽤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것 같다. 우리 모두는 그런 가족의 울타리 안에 있고 꼭 혈연관계가 아니더라도 서로 의지하는 관계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 엄마나 아빠 역할을 못하면 다른 누군가가 성별에 상관없이 그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이제는 정해져 있는 성역할도 없고,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든 가족 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 시선이 영화 <브로커>에 담겨있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영화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가 좋은 영화다. 먼저 브로커 상현 역할을 맡은 배우 송강호는 그동안 보여줬던 송강호만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무심하지만 속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결국 모두의 아버지가 되어가는 인물을 잘 표현해내고 있다. 그는 이번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탔는데, 지금까지 모든 송강호의 연기가 녹아있는 이번 연기가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엄마 소영 역을 맡은 배우 아이유는 과거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주인공인 지안과 비슷한 연기를 하고 있다. 의도하지 않은 범죄를 저지르고 아픔을 숨긴 채 날카롭게 반응하는 캐릭터이지만 조금씩 따뜻함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센 반응을 보이는 인물인 소영의 모습을 보여준다.
동수 역할을 맡은 배우 강동원도 그가 상처를 숨기고 부드러움을 보이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가 그동안 보여줬던 로맨스 캐릭터 연기를 이번에 같이 보여주면서 관객의 웃음을 부른다. 그리고 형사 수진 역을 맡은 배우 배두나도 그가 잘 보여주는 조금 딱딱해 보이고 감정이 없는 것 같지만 조금 다른 따뜻한 선택을 하는 캐릭터를 잘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메시지를 던지는 캐릭터를 맡았다는 점에서 그의 비중이 아주 많지는 않지만 꽤 중요한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본에서 비슷한 유사 가족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온 경험이 있다. 그는 소외된 계층과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감독인데, 이번 <브로커>에서도 미혼모, 낙태, 고아, 아이 브로커 등의 문제를 한 영화에 녹아내 화두를 던지고 있다. 기존에 그가 일본에서 만들었던 영화들에 비해 너무 부드럽고 얕게만 문제를 다루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감독이 한국 배우들을 이용해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히 던지고 있고, 각 배우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좋은 연기력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꽤 안정적인 영화를 완성해냈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간단한 리뷰가 포함된 movielog를 제 유튜브 채널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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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랜만에 본 대만 로맨스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나의 소녀시대’, ‘안녕, 나의 소녀’, ‘나의 청춘은 너의 것’까지 연달아 대만 하이틴 로맨스에서 매력적인 여주인공을 연기하며
자국의 인기는 물론, 국내에서도 첫사랑 이미지로 인지도를 쌓은 송운화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그 놈, 그녀를 만나다’로
승승장구하다 2014년 모종의 사건으로 잠시 자숙의 시간을 보내던 청춘스타 가진동이 함께 출연한
구파도 감독의 신작 대만 영화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리뷰입니다.
재미있게도 두 배우 모두 감독과 데뷔작으로 인연이 있는데, 가진동과는 대표작이기도 한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 연출과 각본을,
송운화와는 데뷔작 ‘카페, 한 사람을 기다리다’에서 각본(원작 소설)을 맡아 함께했었죠.
자신의 자전적 소설을 바탕으로 했던 히트작 이후 꾸준히 활동을 이어온 구파도 감독과 청춘 로맨스라면 빠질 수 없는 두 사람,
그리고 구 감독이 직접 쓴 ‘월노’라는 베스트셀러 소설을 옮겼다기에 더욱 기다려졌던 작품입니다.
운 좋게 화요일 시사회를 통해서 미리 접할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복잡한 심경이라 이제서야 후기를 남깁니다.
※ 최대한 자제하였으나 일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만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어 간단 줄거리
넌 1초면 충분해. 난 만년을 줄게
자기소개를 하는 전학생 소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소년, 별안간 자리에서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합니다.
황당한 고백에 거절한 소녀, 하지만 그 뒤로 소년의 정주행 직진 청혼은 이어지고,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졸업, 대학 시절까지 가장 친한 친구로 성장합니다.
이제는 어엿한 청년이 된 샤오룬은 여전했고 하나뿐인 사랑 샤오미의 철벽 또한 그대로였지만,
긴 시간의 진심 때문인지 이제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하죠. 하지만, 하늘의 장난일까요? 농구장에서 비를 피해 청혼을 하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떨어진 벼락을 맞고 샤오룬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은 채 저승으로 온 그, 환생 위해서 붉은 실로 커플 매칭에 성공해 업보를 씻어야 하는 월하노인 업무를 맡으며
억지로 파트너가 된 핑키와 찰떡 호흡으로 시험을 통과한 후 이승에서의 업무를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핑키의 도움으로 기억을 되찾기 위해 자신이 살던 동네로 가게 되는데...
예고편│ Trailer
원제 : 月老, 영제 : Till We Meet Again│감독·각본 : 구파도│원작 : 2001년 구파도 소설 月老 │
출연진 : 송운화, 가진동, 왕정 외 多│장르 : 드라마, 판타지, 로맨스│상영 시간 : 128분│개봉일 : 2022년 2월 9일│
국가 : 대만│등급 : 12세 관람가│평점 : 관람객 6.54, 네티즌 7.14, 기자·평론가 5.0, 왓챠피디아 2.9, IMDB 7.0│시청 가능 서비스 : 현재 극장 상영 중
# 보고나서...
월노가 다음 생에 우릴 안이어주면 어쩌지?
걱정 마, 내가 널 찾을게
처음 15분에서 20분가량은 당황스러운 장르의 전개로 내가 다른 걸 보러 온 것인가 착각이 들었지만,
반려견 아루의 등장과 함께 과거로 플래시백이 이루어지며 기대했던 인물들의 서사가 펼쳐져 다시금 몰입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두 주인공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로맨스 관계에 이해되게끔 해주는 부분으로
감독 특유의 만화 같은 오버액션과 개그는 존재했지만, 장면에 맞춘 OST가 적절히 녹아들어 감성을 촉촉이 적셔주었죠.
샤오룬의 쾌활하고 거침없는 성격과 더불어 순정적이며 순애보적 사랑은 관객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고,
똑똑하고 털털한 샤오미의 존재는 사랑스럽기 그지없으니
왜 이들이 대만 로맨스를 대표하는 스타인지 확인시켜주기에 충분한 케미를 보여주었습니다.
솔직히 클리셰적인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기대하게 만드는 감독의 연출과 장면들은 장난스럽지만 슬프기도 한 묘한 기분을 들게 만들었죠.
하지만, 악역 귀두성의 등장에서 스토리가 설득력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갑자기 나오는 잔인한 부분들로 인해 장르의 혼합이 이루어지는데
후반부 갈수록 전작 ‘몬몬몬 몬스터’의 호러 향기가 강해지면서 주가 될 줄 알았던 로맨스와 동떨어지게 됩니다.
만년 중에 1초면 충분하다는 말을 남기긴 했지만, 우리는 달콤하고 애절한 사랑을 보러 온 것인데
대만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이 더해진 ‘신과 함께’와 호러가 펼쳐지니 감정선이 뚝 끊기고 흐름이 이어지지 않게 됩니다.
여기에 과하게 많은 과거 회상은 이들의 간절한 마음을 보여주긴 하지만 온갖 장르가 뒤섞이다 보니 이것도 몰입감을 떨어뜨리게 되죠.
그럼에도 여자 주인공 송운화가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면 한없이 사랑에 빠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배우는 확실히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말이 절로 느껴지는 게 개연성이 삼천포로 빠지든 말든
그녀의 미소와 애틋한 마음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장면들에선 다시금 로맨스를 보러 왔음을 정신 차리게 만들어주거든요.
가진동 역시 개구쟁이이자, 순정남으로 분해 나름대로 선방해 주었는데,
혼합된 장르에서 본인들도 연기함에 있어서 분명 당황스러울 만도 했을텐데
둘의 애정신만큼은 기억에 남을만큼 작품에서 얼마나 존재감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봅니다.
반면, ‘반교: 디텐션’, ‘폭포’로 얼굴을 알린 왕정의 핑키는 솔직히 캐릭터 활용도가 떨어져서 메인이라기보다는 제3자 관찰자의 느낌이 강했네요.
물론, 흔히 생각하는 저승의 모습과는 달리 컴퓨터로 서류를 정리하고 바코드도 찍고 인생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의 영상처럼 꾸며져 신선한 느낌이 있었고, 우리나라에도 인연을 맺어주는 월하노인이라는 존재를 통해
대만의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염주라는 개념도 재미있었습니다.
선한 일을 많이 했을수록 흰색 구슬이 많아 환생할 수 있는 동물들이 다르다는 점과 가장 많은 선인이 고양이로 환생한다는 점도 흥미로웠고요.
그럼에도 로맨스를 기대하고 감상했었기에 갈 피를 못 잡는 스토리는 혼선을 줄 수 있었고
그 부분이 다수 분들에게 아쉬움으로 남았으리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과 배우들을 선호하신다면 관람을 추천드리지만, 단순히 사랑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한 번쯤 고려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네요.
PS. 신과 함께를 보고 작품을 결심해서 그런지 영상에서 좀 느껴지네요. 쿠키는 하나 있어요.
지극히 개인적인 평점 : ★★◐☆☆
한 줄 평 : 호불호 강한 구파도식 판타지 호러 로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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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9일 토요일의 팜 스프링스, 여름이었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니 귀신같이 아침의 하늘색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래졌고, 저녁의 풀벌레 소리가 ASMR로 자동 재생된다. 24절기의 정확함에 이번 환절기도 소름이 돋는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팜 스프링스는 사막 지역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여름 기간은 너무 덥다. 대신에 11월부터 5월까지의 날씨가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하와이안 셔츠와 찢어진 청반바지, 그리고 시원한 물놀이가 잘 어울리는 11월 9일 토요일에 탈라와 에이브의 결혼식이 이곳에서 행해진다. 포스터의 단서들을 보며 영화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하겠다.
영화 <팜 스프링스> 한국어 포스터
위에서부터 살펴보면,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95%의 긍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그리고 2020년 공개된 미국 영화와 드라마를 대상으로 하는 제78회 골든글로브의 작품상과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아쉽지만 수상에는 실패하였고, 둘 다 <보랏 속편>에 영광이 돌아갔다. 이 외에도 제37회 선댄스 영화제의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 대상 후보에도 올랐지만, 이는 <미나리>가 수상하게 되었다.
'타임 루프 썸머 로코'라는 친절한 설명처럼 포스터 속의 두 주인공은 11월 9일 토요일에 갇혀버린다. 신랑 하객인 나일스가 먼저 끝도 없이 반복되는 11월 9일 토요일을 지겹도록 겪는다. 나일스가 걱정되었던 신부의 언니 세라는 그를 따라 동굴로 들어가다가 함께 시간의 웅덩이에 빠져버린다.
'내일을 원하는 여자' 세라는 양자역학을 마스터하며 11월 10일 일요일로 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오늘만 사는 남자' 나일스는 반복된 날들 속에서 안전한 일탈을 하며 작은 변화를 만끽한다. 세라는 날짜가 제대로 넘어가는 세상에서 나일스 없이 지루할 것을 두려워하고, 나일스는 세라가 없는 11월 9일 토요일 속에서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하여 괴로워한다. 또한 왼쪽에 있는 표지판에 그려진 염소는 세라의 꿈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고, 오른쪽에 있는 경비행기는 안전한 일탈의 최고점을 선사해준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수영장은 이들이 겪어온 11월 9일 토요일의 시간을 의미하는데, 무한대를 의미하는 기호가 개봉 날짜 옆에 숨은 그림 찾기처럼 앉아있다.
'여름이었다'라고 해도 캠핑하는 밤에는 겉옷이 필수이다.
'wake up'
영화밖에 살고 있는 우리도 휴대폰 알람의 성화에 번쩍 눈을 뜬다. 지금처럼 특히 일상이 제약된 환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창살에 갇혀 반복된 일과를 해내다 보니 매일매일 달력의 숫자는 넘어가도 마치 유사 타임 루프에 빠져버린 것 같은 착각을 느낄 때가 많다. 어제와 오늘이 너무 똑같아 지루함을 떨쳐내 버리려는 몸부림으로 끊임없이 놀거리를 탐색하고 실행하지만, 이내 의미 없다는 허무로 마무리해 본 적도 많다. 나일스와 세라가 11월 9일 월요일을 가장 진심으로 대한 날은 마지막이라는 각성이 있을 때이다. 그 각성은 놀만큼 충분히 놀아봐야 비로소 찾아오는 얄궂은 손님이다. 머물다가 금세 또 떠나면 다시 오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
영화 <팜 스프링스>는 OTT 서비스라는 단어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적절한 재미와 일상에 대한 명상이 훌륭하게 배합되었다는 칭찬을 이렇게 간단한 말로 표현해도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마침 현재 미국과 일본에서만 서비스되고 있는 훌루(Hulu) 오리지널 영화이기도 하다.
2021년 8월, 영화 <팜 스프링스>를 보았다. 여름이었다.
* 해당 리뷰는 씨네랩(CINE LAB) 크리에이터 시사회 참석 후 작성하였습니다.
* 원본 글 및 더 많은 글은 브런치 삐뚜로빼뚜로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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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vielog #26] 주눅들어있는 평범한 가장의 본 모습, 노바디
존윅의 각본가가 존윅 시리즈를 기획한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영화 노바디 입니다.
전반적으로 존윅과 비슷한 부분이 많아요. 집에 침투하는 적을 제압하는 액션 장면도 그렇고,
다양한 격투장면은 존윅을 떠오르게 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확실히 이 제작진의 인장이 확실히 들어가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조금 다른 점은 가족과 아빠의 가정 내 위치에서 소외당하는 모습을 넣어서 가족적인 감정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본래 모습을 찾고 가족에게도 그것을 보여주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죠.
다른 것 보다 액션이 좋습니다.
존윅 시리즈를 좋아하신다면 추천드려요. 하지만 아쉬운 점도 물론 있는 영화죠.
자세한 내용은 영상을 끝까지 봐주세요. :)Rabbitgumi 채널 구독과 좋아요도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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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은 몇배는 더 잔인하다! 반전 또 반전
영화에취한다 비지니스메일: allwey02@gmail.com
영화에취한다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allwey01
사용중인 이어폰 : 저지연 무선이어폰 GTW270 hybr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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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공식 예고편
한여름 찾아온 수상한 손님으로 인해, 평온한 일상이 무너지고 걷잡을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8월 23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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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샤잠! 신들의 분노> 메인 예고편
입덕 부정기는 끝?났?다? 폭풍 성장해서 돌아온 [샤잠! 신들의 분노] 메인 예고편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