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06 12:53:06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
영화 <토리와 로키타> 리뷰
영화를 보기 전, 다르덴 감독이 한국 관객에게 남긴 메시지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토리와 로키타>를 보는 한국 관객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또 다른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읽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온 ‘특별 기여자’들과 그 아이들을 떠올렸다.
‘난민’이라는 단어는 그동안 건강한 담론보다는 혐오 표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래도 여론이 갈린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일해 온 ‘특별 기여자’들인데 팽해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의 의리가 불안을 이겨낸 목소리가 있었다. 여론이 이 정도라면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하며 무사 귀환에 안심한 후로는 나도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달 친구들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독서모임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당시 특별 기여자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 기존 학생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하나씩 들려 보냈다고. 이것이야말로 아이히만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과 무엇이 다르냐며 분개했다. 차라리 옛날 반장 엄마들처럼 햄버거나 쫙 돌리는 게 낫지, 기존 학생들이 시혜를 베푼 것이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저자세로 들어가게 만드나?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경계를 넘어설 텐데 어른들이 먼저 선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뒤늦게 들은 내가,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의 친구라 말할 수 있나. 지긋지긋한 내 안의 아이히만을 인지하며, 다소 무거운 감정을 안고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토리와 로키타의 행복과 무운을 비는 마음으로.

영화는 불안한 눈빛의 로키타에서 시작한다. 몇 마디 이야기가 오고 갔을 뿐인데, 관객은 금방 로키타의 거짓말을 눈치챌 수 있다. 로키타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와 함께 가다 보면, 로키타의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토리와 로키타는 각자의 이유로 아프리카 어딘가를 떠나 온 아이들이다. 벨기에에 정착해서 함께 살고자 하지만, 진작에 체류증을 받은 토리와 달리 로키타의 서류 발급은 계속해서 지연된다. 두 사람은 남매임을 증명해서 체류증을 받고자 하지만, 삶은 녹록하지 않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는다.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서 입국 비용을 내놓으라고 하는 브로커들이 있고, 고용주 또한 여러 모로 아이들을 착취하며, 심지어 로키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돈을 보내야 한다.

아이들은 피자도 배달하고, 식당에서 노래도 한다. 프랑스어로 노래하고 이어 이탈리아어로 노래한다. 이국의 언어로, 서사를 부여하면서 불러야 하면 노래도 노동이 된다. 이들의 일은 점차 위험해진다. 위험한 밤의 거리에서, 마약 배달까지 하고 있다. 아직 어려도 야무진 토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야무지게 챙겨 받을 줄 안다.
노동이 되어야 하는 노래와 대조적으로, 두 사람의 지친 밤을 위로하는 노래가 있다. 토리가 따라 부르는 로키타의 자장가. 실제 카메룬 언어로 된 자장가라는데, 내 귀에는 어쩐지 자꾸 익숙한 찬송가처럼 들렸다.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 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라는 한 구절처럼. 아무리 뒤져봐도 찬송가라는 말은 없던데. 그러나 진짜 찬송가였다고 해도 그 노래는 로키타를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브로커들이 로키타에게 만남을 요구하는 장소는 언제나 교회다.

아직 어린 어깨에 책임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보호하기에도 어린데, 자기 세상을 지켜야 한다. 그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로키타에게는 토리, 토리에게는 로키타이다. 두 사람이 어떤 서사를 통해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이런 유대 관계를 쌓게 되었는지 영화에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유독 힘든 날 보고 싶은 사람도 서로이고, 학교에서 ‘아는 사람’ 그리기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도 서로일 뿐이다. 겁먹고 숨을 헐떡일 때 약과 물을 건네주는 한 사람, 대신 문을 두드려 따져 물어주는 사람, 착취의 세상 속에서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이다.

아이들의 깊은 우정에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은 피부로 감각하여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는 환영 못 받잖아.” 로키타가 시시각각 처하는 상황은 분명 비극이지만, 세상이 로키타를 그전까지 대해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끌고 가고, 무슨 일이 생겨도 탈출구가 없는 건물에 들어가야 하고, ‘원한다 je veux’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로키타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데도, 흥청망청 사는 어른보다도 훨씬 똑똑하게 삶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들의 노동하는 등을 따라간다. <로제타> 때부터 일하는 누군가의 등을 다정하게 따르던 그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러나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가 만드는 영화의 감각에 안심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걸. 영화 속에도 친절한 개인은 있었다. 기꺼이 제 자리에서 자기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잘 곳 없을 때 오라고 주소를 주는 쉼터 선생님도. 그러나 개인의 친절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문제를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는 말했다.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 토리와 로키타의 이야기에서 조금은 마음에 남은 것이 있길 바란다고, 그래서 주변과 이야기를 나눠 주길 바란다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왜 다르덴 형제가 토리와 로키타의 친구가 되어 달라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세상만큼은 아니었으면, 사라지지 않도록 아이들이 그 자리에만 있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변화라도 이루어 갔으면.
그런 마음으로 잠을 자고 아침을 맞으니, 세상은 어린이날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얼마나 환대하고 있을까. <토리와 로키타>가 던진 질문을 계속 입 안에서 굴려 본다. 담담하여 다정하며, 더 깊은 담론을 끌어내는 이 영화는, 아마 남은 오월 내내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해맑은 노래와 함께 잔상처럼 남아 있을 것 같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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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믿음으로 무너지는 권력자를 그려내다
영화 <검은사제들> 장재현 감독의 차기작이었던 영화 <사바하>. 영화 <검은사제들>을 나름 재밌게 봤기에 영화 <사바하> 역시 기대를 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영화 <사바하>에 대한 평이 많이 갈렸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꽤 괜찮았던 작품이었다.
영화 <사바하> 시놉시스
사람들은 말했다. 그때, 그냥, 그것이 죽었어야 한다고.
그것이 태어나고 모든 사건이 시작되었다.한 시골 마을에서 쌍둥이 자매가 태어난다. 온전치 못한 다리로 태어난 금화와 모두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언니 ‘그것’. 하지만 그들은 올해로 16살이 되었다. 신흥 종교 비리를 찾아내는 종교문제연구소 박목사는 사슴동산이라는 새로운 종교 단체를 조사 중이다.
영월 터널에서 여중생이 사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쫓던 경찰과 우연히 사슴동산에서 마주친 박목사는 이번 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하지만 진실이 밝혀지기 전 터널 사건의 용의자는 자살하고,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실체를 알 수 없는 정비공 나한과 16년 전 태어난 쌍둥이 동생 금화의 존재까지 사슴동산에 대해 파고들수록 박목사는 점점 더 많은 미스터리와 마주하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사바하>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종교적인 지식은 덤
크리스찬에서는 선과 악을 명확하게 구분을 해놓는 편이다. 하지만 영화 속 드러나는 불교에서는 선과 악은 없으며 짐승이나 악귀도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천왕을 데마로 소년원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소년들을 김제석이 자신을 수호하는 사천왕으로 만들고자 했다는 점에서 크리스찬과 결이 다르다는 것을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종교적인 지식이 없다고 하더라도 영화 속에서 다뤄지는 일반적인 상식과 그 상식에 반하는 종교적인 믿음, 그 종교적인 믿음이 어떤 식으로 현실에 구현이 됐는지 캐치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해주고 있어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쩌면 불교에 관련된 지식이 많은 사람이 봤다면 영화 전반적으로 드러나는 불교의 색채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목사의 시선으로 따라가는 반전스토리
솔직히 초반 영화를 보다보면 도대체 박정민의 캐릭터는 무엇일까? 이 영화의 주제는 무엇일까? 하는 굉장히 모호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쌍둥이 언니가 악의 온상처럼 그려지는 듯하고 사슴동산을 구축한 인물이 도대체 누구이며, 박정민은 왜 갑자기 등장해서 자살을 권유하는 것인지 매우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박목사의 내면심리가 아닐까 싶다. 영화의 시선 자체가 박목사의 생각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처음에 사슴동산을 알게 되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관객들도 충분히 같이 느낄 수 있게끔 만들어주고 있었다.
솔직히 박목사보다 사슴동산에 대해서 노출도는 정보의 양은 관객이 더 많다. 박정민의 존재, 경찰의 수사반경 등 박목사의 시선에서 분리되는 컷들이 중간중간 등장하지만 그 컷들이 박목사의 생각을 앞서나게끔 만들지는 않아서 더욱 혼란스러움을 많이 야기했고, 그로 인해 결말의 반전이 나름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자의 잘못된 신념
옛날 옛적 진시황 때부터 영생은 사람들이 이루고 싶은 마지막 소원이었다. 그래서 사슴동산의 종교적인 신이었던 김제석 역시 영생을 꿈꾸며 자신의 영생을 위해 99년에 태어난 여자 이이들을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여기서 종교적인 요소를 떠나 일반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오르면 어긋난 신념과 욕심 때문에 무너진다는 점을 엿볼 수 있었다. 영화에서 네팔의 승려는 김제석에게 당신을 죽일 수 있는 아이가 99년에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을 한다.
사실 김제석은 이 예언 전부터 그리고 현재까지 늙지 않는 불로불사의 존재로 살아왔다. 깨달음을 얻은 자였지만 예언에 흔들려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깨달음대로 살아가고 예언에 흔들려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정말 불로불사를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듯한 느낌이 들어서 최고의 권력에 오른 자들이 한 순간 잘못된 믿음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싶다.
영화 <사바하>는 굉장히 새로운 시각이었고, 나름의 작품성과 교훈성을 지닌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색채가 진하긴 하지만 종교가 없는 필자도 큰 거부감 없이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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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의 삶으로 '인간 대우'에 대해 돌아보다
모두의 삶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난 성매매와 노출될 일이 없다. 당연히 평범한 일반인들이 성매매를 할 일이 없지만 이건 나의 개인적 에피소드와도 관련이 있다. 어느 길거리를 걸어가다 어떤 할머니가 '학생! 여자 있어!'라고 한 걸 듣고 갑자기 겁이 나서 와다다 도망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성매매에 노출될 일이 없다기 보단 그때의 기괴했던 사건을 생각하면 가까이하기 싫은 게 정답이다.
그래서 성매매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영화나 책에서 포르노 배우에 대한 묘사를 몇 번 보긴 했다. 당연히 이들도 사람이다. 뭐 인스타그램에 노출이 있는 사진을 올린다고 해서 이상한 일들을 겪어야 한다는 자격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보라고 올린 것 맞는데, 그걸 입 밖에 실제로 꺼내서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은 또 다른 차원 아닌가? 이는 사실 외국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많은 유명 셀럽들은 매력 있는 남자, 여자라는 이유로 성희롱을 당한다. 당장 네이버에 'dm 성희롱'이라 검색하면 기사가 몇 개 보인다. '무언가를 선택해서(유명해져서) 나쁜 일을 겪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는 건 좀 잔인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들도 선택지를 고르기 이전에 사람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의 인도에 한 여성 정치인이 이와 관련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고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컨텐츠로 가보자.
실제로 있었다고 하는 몇몇 사건들
1960년대 인도다. 변호사 아버지 아래에서 유복하게 자랐던 강가. 강가는 남자친구 한 명이 있다.. 영화배우가 꿈이었던 강가. 강가는 애인의 제안에 뭄바이로 향하게 된다. 근데 그것은 뭄바이로 향하는 길이 아니었다. 애인을 사창가로 팔아넘겼던 강가의 남자친구. 한 순간에 모든 게 사라졌다. 꿈과 목적까지 잃어버린 강가. 유곽에서 하고 싶지도 않았던 일을 하며 남자를 대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어쩔 때는 두들겨 맞기도 하는 강가. 그녀에겐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돌아갈 길 같은 건 없다. 이미 돌아가도 가족들에게 손가락질받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멍투성이의 얼굴과 함께 지역 마피아에게 향한다. 복수를 원하는 강가. 복수는 보기 좋게 성공한다. 강가는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 지역의 짱이 되겠다는 다짐을 아로새긴다. 많은 돈을 모으고, 같은 편의 사람들을 영입하며 점점 성장하는 강가. 영화는 강가라는 이름이 강구 바이가 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한 여인의 성장과정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해가 되는 소재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야한 장면 안 나온다. 영화의 후반부에 특정 인물의 연설 장면을 말하기 위해서 불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 사람과 사람을 때리는 장면은 몇 번 나온다. 이 외에는 잘 짜인 스릴러라고 생각이 들었다. 인도라는 낯선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전개가 잘 감겨서 촘촘했다. 그런데 앞에서 적었던 영화의 하이라이트 신이 굳이 필요했나?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며 들 수 있는 생각은 연대와 주체성일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 두 요소들을 낯설 수도 있는 인물을 통해서 무언가 뭉클하게 전달한다. 잘했다. 각본이나 디렉팅을 맡았던 제작진 분들은 좋은 선택을 골랐다. 그런데 굳이 그런 요소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지가 전부였을까? 싶다. 얼핏 보면 그녀를 그렇게 만든 세상을 합리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녀가 매력적인 정치인이고, 또 자기와 같은 피해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했는지만 묘사해도 영화는 충분했다. 그런데 굳이 하이라이트 신에서 자극적인 단어가 나온다. 솔직히 불필요했다. 품위와 존엄성은 이 영화가 19금 코드를 적당히 묘사했다는 점에서 충분하다고 느낀다. 성적으로 자극적이지 않으니 나름의 품위가 생기는 것이다. 영화의 이야기 전개 상으로 후반부 한 10분은 컷 하거나 적당히 줄였다면 극을 보는데 깔끔했을 것 같다.
눈치 보며 춤추기
인도 영화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세 얼간이>이다. 알 이즈 웰! 잘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로 웃고 춤췄던 인도 영화. 그냥 뮤지컬 영화니까 이런 거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일부만 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인도 영화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부분이 개연성 없이 마구 난사된다는 것들을 몇 번 읽었다. 인도 영화라는 넷플릭스의 분류 등급을 읽기 이전에 염려부터 했다. 마피아 퀸이라는 부제만 봐도 이 영화는 범죄/스릴러인데 갑자기 춤추고 노래할까 무서웠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잘 만들었다. 이런 요소들을 아예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있을 때 들어갔고, 없을 때 없다. 그러니까 극을 볼 때 나 같은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각본을 쓴 사람이 할리우드 영화를 많이 본 티가 난다.
밝은 건 밝고 어두운 건 어둡게
또한 이 영화하면 생각나는 강점은 색감이다. 까무잡잡한 피부와는 대조되는 흰 옷은 곳곳에 자주 쓰인다. 정치인으로 연설할 때, 최후 반부 엔딩신, 유곽에 잡혀온 애들을 해방해줄 때 등등 뭔가 감독이 인물들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라고 생각이 들 때 흰 옷이 나온다. 감독이 인물의 의상으로 처지를 비유한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뒷배경에서 탁한 세트장을 고른 점이나 촬영했던 카메라 렌즈까지 색채 대비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연대로 함께 나아가다
앞에서도 썼듯 영화의 주요 소재는 연대다. 그리고 부제는 '마피아 퀸'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주인공 강구 바이는 마피아와 연대를 한다. 이 마피아는 주로 남자로 묘사된다. 만약 마피아까지 여성으로 묘사됐다면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 마피아들의 성격이 나름 합리적인 부분이 있는 점이나 선한 남성 캐릭터도 출연했다는 부분은 감독이 단순히 여성 서사만을 중심으로 극본을 짜지 않았다는 것이 충분하다. 뭐 성매매 피해자들에 대한 묘사를 중심으로 쓰는 게 주요 플롯인 것은 맞다. 그러나 영화는 절대 이 사람들과의 연대가 현재 사회가 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전부 다 해결할 것이라고 믿지 않고 있다. 보시면 안다.
좋은 퍼포먼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도 배우다. 인도 여배우를 다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처음 봤다. 좋은 퍼포먼스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당차고 씩씩하게 여러 관문들을 격파하고 성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몰입이 되게 탁월한 묘사가 돋보였다. 만약 인도에도 영화 시상식이 있다면 상을 받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엔딩의 눈빛 연기에선 뭉클함도 있다. 또 주조연으로 출연했던 다른 배우들도 당시 인도에 대한 묘사가 강점으로 잘 발휘되어 나름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 영화 자체가 1960년대 인도 묘사를 적절히 잘해놔서 그냥 무난하게 보기 좋은 영화다. <오징어 게임>이 성공한 것처럼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이 있으니 다른 나라의 창작물들을 보게 되니 이런 건 참 좋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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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몇 번 보고 나면 어렵지 않게 회스네 집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영화는 회스네 집의 내부를 영화 전체에 걸쳐 거의 강박적으로 속속들이 보여준다. 대표적으로 초반부 집에 군인 손님들이 찾아오는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이 장면에서 특이한 점은 샴페인을 테라스로 갖다놓고 문 밖의 신발을 집 안으로 들여놓는 하녀의 동선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장면은 하녀의 동선을 따라갈 이유가 없는 장면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회스 부부이고, 두 주인공인 헤트비히와 루돌프의 대화는 각각 부엌과 루돌프의 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대화들을 배경 삼아 이 집에서 가장 중요하지 않은 인물인 하녀의 움직임만을 따라 이 장면을 찍은 목적은 (물론 그 자체로 정치적 함의를 지닐 수도 있겠으나,) 이 집 1층의 구조를 낱낱이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 장면 외에도 루돌프가 밤에 모든 방의 불을 끄며 집안을 활보하는 장면, 헤트비히가 친정어머니와 뒤뜰을 산책하는 장면 등 1층과 2층, 안과 밖까지 이 집 전체의 공간적 구조를 관객에게 정확하게 인지시키기 위한 장면들은 많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카메라워크나 편집의 리듬 그 자체보다 그 목적이 더 중요하다. 이 영화에는 짧고 빈번한 컷 편집으로 이루어진 장면과 긴 공간을 끊지 않고 트래킹한 장면들이 등장한다. 언뜻 보면 이 둘은 대비를 이루는 듯하지만, 그 공간 전체를 빠짐없이 보여주는 것이라는 동일한 목적 하에 기능한다는 점에서 대조적이지 않다. 그저 단순한 공간이기 때문에 트래킹했고, 복잡한 공간이기 때문에 숏을 나눈 것뿐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왕가위가 <화양연화>의 배경이 되는 집을 공간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 미로와 같이 찍은 것이 영화 속 홍콩의 화양연화를 추억 속에 가둬두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같은 논리를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적용해본다면 흥미로워진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화양연화>와는 정반대로 공간의 모든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관객을 홀로코스트의 그 시간으로 적극적으로 초대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조나단 글레이저는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과격한 점프컷까지 동원하여 우리들을 그 공간, 그 시간으로 부르기도 한다(다만 마지막 장면의 경우에는 반대로 루돌프가 우리의 시간으로 끌려온 양상이기는 하다).
이 관점에서 봤을 때 이상한 장면은 또 있다. 집의 모든 공간을 관객에게 오픈한 글레이저는 한 공간만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찍었다. 회스네 집에는 지하실이 있다. 영화 중반, 루돌프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젊은 하녀와 심상치 않은 눈빛을 주고받더니 지하의 길고 복잡한 복도를 지나 의문의 공간에서 자신의 성기를 씻는다. 그리고는 집의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 옆에 달린 문에서 나온다. 주어진 장면들로 짐작해보자면 루돌프의 집무실은 수용소 내부에 있는 듯하고, 지하의 복도는 수용소와 집을 잇고 있으며 그 지하 안에 또 하나의 의문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영화 전체의 맥락을 봐도 불필요한 이 장면은 왜 등장한 것일까? 초반부 하녀의 동선을 낱낱이 찍은 장면이 집의 구조를 자세하게 보여주어 관객을 영화 속으로 초대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장면은 그 반대의 의도, 즉 <화양연화>의 경우와 비슷한 것이라고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장면을 통해 그 미로같은 지하 복도를 헤매는 루돌프를 어디 있는지도 모를 바로 그 지하실에 가둬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하강운동은 이질적이다.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은 대부분 수평적으로만 운동한다. 집 안을 활보할 때도, 집 밖을 나설 때도, 그리고 특히 시냇물에서도 인물들은 위아래로 움직이지 않는다. 수평운동은 이 영화에서 디폴트이다. 그래서 지하 복도와 지하실로의 하강운동은 영화 속에서 이질적이다. 하강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또다른 흥미로운 숏은 부감 숏이다.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부감 숏은 두 번 정도 있다. 하나는 루돌프의 방에서 군인 손님들이 회의하는 장면의 수용소 설계도를 부감으로 보여주는 숏이고, 다른 하나는 루돌프가 무도회장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숏이다. 수용소 설계도 숏에서 군인들은 연기를 효율적으로 내보낼 수 있는 굴뚝에 대해 이야기하고, 무도회 숏에서 루돌프는 가스실을 떠올렸다고 이야기한다. 두 부감 숏은 각각에서 연상되는 연기의 섬뜩함으로 분명 이어져있다. 완전한 직부감은 아니지만, 장교들의 타원형 탁상에서의 회의 장면도 하이앵글로 찍혔다. 이 장면의 타원형 탁상에 장교들이 둘러앉은 숏은 수용소 설계도면와 매우 비슷하다. 다시 말해 직부감 혹은 하이앵글로 찍힌 이 세 숏은 모두 연결된 숏들이다. 이 영화 속 하강운동과 하이앵글/부감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보자. 복도의 저쪽 끝을 뒤로한 채 이쪽 끝을 응시하던 루돌프는 잠시 우리의 시간으로 끌려왔다가 계단 아래로 내려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루돌프의 계단 하강은 영화 속 몇 안 되는 하강운동 중 하나이다. 지하복도와 지하실로, 파티장의 계단 아래로 끝없이 하강하는 루돌프는 그렇게 심연에 갇힌다. 파티장에서처럼 수용소에서도 아마 유대인들을 내려다봤을 루돌프의 그 폭력적인 부감은 서늘한 하강운동으로 응징받는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지상 공간을 열어 우리를 초대하고 지하 공간을 닫아 루돌프를 가둔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후자만이 응징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컷 편집과 트래킹 숏이 같은 목적을 두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이 둘도 동일한 목적 하에 있다. 단지 방법이 다를 뿐이다. 조나단 글레이저는 우리에게도 경고하는 중이다. 이것 때문에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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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숙한 사랑의 계절, 그 아름다움
SYNOPSIS.
20년간 최고의 요리를 함께 탄생시킨 외제니와 도댕. 그들의 요리 안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인생의 가을에 다다른 두 사람, 한여름과 자유를 사랑하는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POINT.
✔️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신인이었던 트란 안 훙(사실 발음은 쩐안훙에 가까워요..)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게 한 그 작품.
✔️ 다시 말해... 타협 없이 담아낸 영상미가 보장되는 작품!
✔️ 줄리엣 비노쉬 & 브누아 마지멜 두 주연배우는 실제 부부였던 사이. 이별하고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요. 뭐랄까 오래 끓인 국물 같은 느낌입니다. 프리마(?) 풀어서는 흉내낼 수 없는.
✔️ 영상미를 부정할 수 없지만 전 사실 이 영화에서 영상보다도 대사들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빛 고운 영상 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고스란히 녹인 대사들이 풀어집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
'진짜' 요리로 보여준 것
이 영화는 밭에서 야채를 고르고 다듬는 외제니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선포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요리는 진짜일 것이라고. 얼기설기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깊이 보여줄 거라고.
촬영에 최적화하기 위해 가짜 음식을 적당히 섞어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진짜 요리들을 활용해 담아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요리가 '진짜'라고 느껴진 건 그 때문만이 아니다. 현장의 배우들이야 눈앞의 요리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생생하고 중요하겠지만, 사실 촬영을 위해서라면 꼭 진짜 요리가 베스트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서 변형되고 빛이 바뀌는 진짜 요리에 비해 어쩌면 정교한 가짜 요리가 더 나은 선택지일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필요한 그 이상으로 공을 들인다. 마치 요리의 재료를 준비하는 외제니의 손길처럼, 영화 바깥의 요소들이 섬세하게 준비되었다. 우선 미슐랭 3스타 셰프인 피에르 가니에르가 직접 '요리 감독'으로 참여해 음식을 직접 감수했다. (중간에 왕세자 옆의 셰프 역할로 출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음식에 그의 손이 닿았고, 마치 도댕과 외제니처럼, 실제로 오래 함께 일한 동료가 그 작업을 함께 했다.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아 마자엘 사이에 감도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은은한 존중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영화의 '밑작업'들이 영화 속 요리를 통해 표현되는 관계를 더욱 '진짜'로 만든다. 오래 끓인 국물처럼, 입에 톡 튀는 재료 없이도 깊은 맛으로 배어난다.
이 맛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 바로 영화 초반 외제니와 도댕의 요리 장면이다. 아주 긴 시퀀스로 비춰주는, 합이 탁탁 맞는 이 장면은,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설명한다. 조수 역할을 하는 비올레트와, 비올레트를 따라왔다가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요리에 흥미를 느끼는 소녀 폴린까지, 네 사람이 부엌에서 움직이는 장면은 높낮이 없는 협력과 존중 그 자체다. 고기를 굽고, 가재를 데치고, 소스를 끓이고, 야채에서 물기를 짜내고, 무거운 냄비를 나르고... 자신 있게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 모든 동작에는, 각자의 전문성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성별과 연령이 지금보다 극명히 갈리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정갈하게 섞여 협력하는 주방, 햇빛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주방은 아름답기만 하다.
사랑의 계절이 보여준 것
영화 속 도댕과 외제니는 이미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교감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지만,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한다. 외제니를 위한 요리를 준비하는 도댕과, 그런 도댕을 바라보는 외제니.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가볍게 들뜨거나 설익지 않는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눈빛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과일을 후숙시켜야 하고, 때로는 반죽을 숙성시켜야 하고... 요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법과,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배웠다. 사람들을 초대한 테이블에서 도댕이 하는 대사는 그래서 유독 아름답다. 그들은 이미 계절마다 무엇이 찾아오고 또 떠나가는지,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들의 범위를 명확히 알고 있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이미 그 계절을 돌고 돌아 원숙해진 사람들임을 떠올린다면, 모든 계절을 함께 축제처럼 즐기고 싶어하는 도댕과, 늘 한여름의 태양 볕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외제니의 서로 다른 계절관 또한 원숙해진 어떤 지점에서 맞물릴 수밖에 없다. 천진한 첫사랑의 기쁨은 이내 계절을 돌고 돌아 단단해지므로.
외제니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이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며, 나서서 손님을 대접하고 요리를 해체하는 도댕과 달리 주방에서 식재료와 요리를 통해 손님들과 대화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작열하는 태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외제니 안에 이미 온 계절이 있다. 온 계절을 사랑하는 도댕과 외제니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풍부하고 깊고 아름답다.
외제니가 있는 부엌은 늘 빛으로 가득하다.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던 밤과 그렇지 않았던 밤들을 모두 내면에 머금은 채로,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난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영화에서 본 것도 참 오랜만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홀린 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결혼에 대한 생각의 차이. 도댕은 외제니에게 청혼을 하고 외제니는 그 청혼을 거절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명확함에도.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한쪽이 답답한 이야기로만 소비해온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의 차이,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각자의 성숙함, 생각의 차이를 빚어낸 것들까지도 존중하는 사랑으로 더욱 아름다워진 관계를 바라본다. 일치하는 생각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어쩌면 차이를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이 더 아름다운지도.
예술가의 언어로 보여준 것
영화가 전개되면서, 처음부터 아름다운 협력의 합을 보여준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풍성하게 풀어진다.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이해 또한 관객에게 깊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가로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도댕의 말마따나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하다. 요리에도 인생에도, 영화에도 예술에도, 배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도댕과 외제니에게 요리는 사랑이었고 협력이었으며 예술이었고 이해였다. 그 모든 것을 말보다 더 뚜렷한 영상으로 보여준 이 영화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언어였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오래 응시하고 공기까지 느끼게 만들던 그 실력 그대로, 트란 안 훙 감독의 언어는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오래오래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에도 다시 꺼내 보고 싶은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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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액션과 혼란이 충돌해 탄생한 칼춤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에서 이례적으로 OTT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한 이유를 알겠다. 모니터나 TV화면으로만 시청하기엔 아까운 퀄리티 높은 작품이 나왔다.
'전쟁으로 인한 난리통'이라는 의미를 담은 단어를 제목으로 삼은 영화 '전, 란'은 두 차례 왜란을 겪으며 양반의 아들 이종려(박정민)와 몸종 천영(강동원)이 빚는 오해와 갈등을 그린다.
'전란'이라는 단어 한가운데 쉼표를 찍어 나눈 것이 눈에 띄는데,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과 메시지를 상징한다. 먼저 싸움 전(戰), 이는 두 주인공 종려와 천영의 개인적인 갈등을 의미함과 동시에 이 영화의 장르가 액션 영화인 점을 상징한다. 이어 어지러울 란(亂), 영화 속 패러다임을 둘러싼 혼란한 시대를 담아낸다. 그리고 숨어있는 단어인 다툼 쟁(爭)을 통해 다툼이 벌어짐을 암시한다.
그러면서 정작 전란이라는 말을 담고 있는 전쟁에 대해 비중 있게 그리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시대적 배경인 임진왜란 7년을 과감하게 생략했다. 대신 무서운 기세로 북진하는 왜군 부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허겁지겁 피난 가는 선조(차승원) 일행과 아비규환에 빠진 백성들, 불타는 경복궁, 종전 후 처참한 상처만 남은 조선 전역의 모습 등으로 전란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대변한다.
'전, 란'은 액션 영화로서 본질을 잊지 않고 100% 재현한다. 영화 속 액션의 지분 1위를 차지하는 천영 역의 강동원이 극 전체를 이끄는 선봉장으로 맹활약한다.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화려한 검술 액션을 펼치는 그의 존재감은 영화의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형사 Duelist', '전우치', '군도: 민란의 시대'에 이어 '강동원의 사극액션영화=맛집' 공식을 다시 한번 인증한다.
동시에 신분 차이로 엇갈리는 두 남자의 운명과 이들이 살아가는 혼란스러운 시대상 또한 볼만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평등'을 꺼낸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으로 인해 기존 체제가 흔들리고,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세워야 할 조선의 체계를 둘러싸고 다양한 캐릭터들이 충돌한다. 기존 패러다임을 수호하려는 자와 파괴하려는 자, 그래도 인정하려는 자와 어쩔 수 없이 포기해 버린 자, 그리고 탈출하려는 자와 전환을 시도하는 자를 그들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될 운명을 향해 밀어붙이며 전진한다.
그 과정에서 아쉬움도 있다.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여럿 등장하긴 하나, 이들이 가진 생각이나 변화 과정까지 정교하게 담아내진 못했다. 아무래도 천영과 종려, 속칭 '혐관 서사'로 일컫는 비극적인 브로맨스에도 무게를 둬야 하기에 어떤 부분은 얼렁뚱땅 넘어가거나 급정리되기도 했다. 평등을 담은 메시지를 대중에 전달할 힘이 조금 부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전, 란'의 단점을 상당 부분 상쇄하는 게 배우들의 열연이다. 박정민,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등이 출연해 존재감을 뽐내는데, 그중에서 선조 역할을 맡은 차승원이 도드라진다. 시대의 변화와 민중의 요구를 외면하며 시대착오적인 관념과 행동을 취하는 선조를 왕조의 위엄을 뺀 채로 연기하며 분노를 유발한다. '무능함의 아이콘' 선조를 연기하는 데 새로운 지침서를 마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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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 게임 3 | 다음 딱지치기를 위해 희생된 완결편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마침내 드러난 공허한 큰 그림
<오징어 게임 2>는 '성기훈'(이정재)의 반란으로 끝맺었다. 오징어 게임 자체를 중단하기 위한 그의 반란은 처절히 실패했다. 인원도 부족하고, 탄알도 부족한 채로 시도한 무모한 반란이 유발한 참혹한 대가였다. 그는 게임장 밖에서부터 친구였던 '정배'(이서환)를 비롯해 봉기에 가담한 이들을 모두 잃었다. 이 반란의 실패는 단순한 물리적 패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기훈의 신념과 소신이 완전히 패배했음을 방증하는 결과물이었다.
시즌 2 초입에 기훈과 '프론트맨'(이병헌)은 각자의 신념을 명확히 밝힌다. 프론트맨은 거대한 이익과 가혹한 환경 앞에서 사람들의 가치 판단은 달라지기 마련이라고 믿는다. 그렇기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결과라면 악한 행위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징어 게임을 중단하고 상금을 나눠 가질 수 있도록 변경된 투표 규칙은 선택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장치이자 그의 신념이 반영된 제도였다.
반면에 기훈은 설령 오징어 게임처럼 극단적인 환경이라 해도 지켜야만 하는 선이 있다고, 타인이 그 선을 넘도록 부추기는 것 또한 그 자체로서 악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가 프론트맨과의 대립에서 승리할 방법은 두 가지였다. 참가자들을 설득해서 투표로 게임을 끝내거나, 투표 자체의 진행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참가자들을 설득하지 못했고, 투표 진행 자체를 막기 위해 반란을 획책했으나 게임의 진행을 막지 못했다.
이제 기훈에게는 무슨 목표가 있을까? <오징어 게임 3>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의 목적은 더 이상 참가자들을 살리는 것도, 프론트맨에 맞서 이기는 것도 아니라고. 설령 프론트맨에게 패배했어도, 결코 그와 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기훈은 사투를 벌여야 한다고. 문제는 '증명'이라는 테마가 서사적으로도, 장르적으로도 악수라는 점. 결국 <오징어 게임 3>는 공허한 큰 그림과 욕망만 남긴 채 막을 내린다.
성기훈의 마지막 반격
반란에 실패한 뒤 혼자만 살아남은 기훈은 절망한다. 게임 진행 여부를 묻는 투표에서 열변을 펼치던 지는 시즌과는 달리 아예 투표 자체를 포기할 정도로 목표를 잃어버린다. 자기 때문에 친구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죄책감을 회피하려고도 한다. 탄창을 가져오려다가 겁에 질려 도망친 '대호'(강하늘)를 원망하고, 술래잡기 게임에서 그를 찾아내 죽이고, 그러고도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자 자살까지 시도한다.
발버둥 치던 기훈에게 실패를 만회할 기회가 찾아온다. 비록 반란이 실패했어도 기훈의 선한 의도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금자'(강애심)가 그에게 '준희'(조유리)와 준희가 술래잡기 도중 낳은 아이를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 유언이 된 부탁을 들은 기훈은 게임과 아무런 관련도 없고 죄도 없는 아기를 끝까지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게임 안에서 프론트맨을 이길 수 없다면, 모든 사람이 그와 같지는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결승전 전날 밤, 프론트맨은 칼을 건네며 다른 참가자들을 다 죽이고 아기와 함께 우승자가 되라고 제안하지만, 기훈은 유혹을 끝내 뿌리친다. '오일남'(오영수)이 똑같은 제안을 했을 때 수용한 프런트맨과는 다른 선택을 한다. 이에 더해 고공 오징어 게임에서도 기훈은 목숨을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아기를 보호한다. 이렇게 그는 모든 인간이 자신과 같을 거라는 프론트맨의 믿음에 금을 내고, 가능한 유일한 반격을 가한다.
이 반격은 유효했다. 무엇보다도 돈이 우선시되고, 생명과 같은 가치도 돈으로 환원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추기는 세태에 대한 비판이자, 인간성의 각성을 촉구하는 메시지가 다시 한번 결말을 장식한다. 게임장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프론트맨이 아기를 챙겨서 상금과 함께 동생인 '준호'(위하준)에게 맡긴 것, 기훈의 유품을 LA에 있는 그의 딸에게 전해주는 것은 프런트맨이 패배를 인정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폭거'라는 진짜 적수
이렇게 보면 <오징어 게임 3>는 기훈의 서사를 잘 갈무리한 듯싶다. 문제는 이 마무리가 첫 번째 시즌의 결말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 즉, <오징어 게임 3>는 기훈을 다시 한번 오징어 게임에 던져 놓은 근본적인 동기와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출발선으로 U턴한 셈이다. 심지어 기훈이 넘어서야 할 난관과 장애물을 짚어내고 직시하는 데 성공했는데도 답을 회피했기에 <오징어 게임 3>의 끝은 더 실망스럽다.
<오징어 게임 3>는 프론트맨과의 갈등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기훈을 조명한다. 그러나 시즌 2와 3에서 그의 적수는 사실 프론트맨이 아니었다. 바로 다른 참가자들이었다. 애초에 기훈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기 신념을 증명하는 데 집착하게 된 원인은 투표로써 이뤄진 다수의 폭거이기 때문. 만약 기훈이 투표에서 한 번이라도 더 많은 표를 얻을 수 있었다면, 그는 아기를 지키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기훈은 왜 투표 결과 앞에서 무기력했을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권자 중 과반이 찬성한 투표 결과에는 누구도 부정 못 할 절대적인 권위가 깃든다. 설령 상금을 위해 인명을 죽이는 비윤리적인 일이 그 결과라 하더라도. 이는 게임 진행 요원이 매번 참가자들의 자유로운 투표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다. 시즌 2에서 기훈은 이처럼 투표 결과가 권위를 낳고, 권위가 오징어 게임을 지지하는 메커니즘을 한 번도 논파하지 못했다.
시즌 3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눈앞에서 악한 일이 저질러져도 다수가 악을 지지하는 한, 기훈은 무력이 아닌 방법으로는 그 결과를 뒤집지 못한다. 고공 오징어 게임 도중에 참가자 9명 중 6명이 아기를 죽이고 상금을 나눠 갖는 데에 찬성으로 투표해도 기훈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 '다수의 폭거'라는 의사 결정 방식을 파괴하지 못하는 이상 그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 한, 게임은 중단되지 않는다"라는 프론트맨의 말을 부정할 수 없다.
칼은 뽑았는데 무를 안 썰었어
즉, <오징어 게임> 시즌 2와 3가 기훈을 다시 게임에 참여시킨 동기는 위와 같은 '다수의 폭거'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 비판물이라는 <오징어 게임>의 정체성에도 부합한다. '다수의 폭거'는 거부할 수 없는 미래의 사회적 모순이니까.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는 숫자가 많은 중노년층의 정치적 의사나 이익이 초과 반영되는 실버 민주주의의 폐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따라서 <오징어 게임 3>는 투표라는 규칙을 통해 화두에 올린 이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해 답을 제시해야만 했다. 다수결이라는 형식의 논리가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압도하며 본말이 전도된 상황에 대해 기훈의 입을 빌려 첫 시즌보다 진일보한 해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완전히 해결하거나 대안을 제시할 수 없으면 새 판을 짜기 위해서 오징어 게임을 완전히 파괴하는 식으로라도.
하지만 <오징어 게임 3>의 결말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환상에서 '새벽'(정호연)이를 본 뒤 다른 참가자 목에 겨눴던 칼을 거두고,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아기를 살리는 선택. 이 장면들은 첫 시즌 결말의 반복에 불과하다. 그가 돈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인간의 선함을 믿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이미 새벽이의 동생을 챙겨주고 남은 상금은 사적으로 한 푼도 쓰지 않은 시즌 1의 결말이 보여준 바 있다.
결국 기훈은 프론트맨에게 승리했을지언정 그의 논리와 세계는 못 이겼다. 기훈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오징어 게임은 언제든지 열릴 테니까.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인정한 채 고고히 자기 소신을 지키려고 은둔하는 역사 속 지식인들과 자기 증명에 집착한 기훈이 겹쳐 보이기도 하다. 그러니 <오징어 게임 3>은 사회 비판물로써 얻은 명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비겁한 완결판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다
사회비판적 주제 의식이 쳇바퀴를 헛도는 사이, <오징어 게임 3>은 장르물로서의 쾌감도 놓치고 말았다. 데스 게임 장르의 본질적인 재미는 각 게임의 규칙을 역이용하거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합종연횡을 거듭하는 과정에 있다. 그러한 장면들이 없지는 않다. 줄넘기 게임을 먼저 통과한 참가자가 다른 참가자들이 통과할 길목을 막고 그들을 제거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고공 오징어 게임에서 불리한 상황에 놓인 참가자들이 기훈과 명기를 설득하려고 가장 약한 참가자를 급습한 뒤 이른바 '도시락' 작전을 제안하는 순간도 유사한 대목이다. 기훈이 무기를 꺼내자 아기 친부임을 밝히며 동맹을 맺고, 그들만 살아남자 다시 기훈과 아기를 위협하면서 우승을 노리는 '명기'(임시완)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이 장면들은 극이 늘어지려는 찰나에 긴장감과 몰입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린다.
문제는 그럴 때마다 기훈이 그들의 전략을 방해하거나 제지하는 나머지 극의 흐름이 다시 끊긴다는 것. 시즌 3의 첫 게임인 술래잡기 이후 기훈은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게임에 참여한다. 아기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선택도 불사한다. 그런데 정작 기훈의 서사에 담긴 의미가 안 돋보이다 보니 메시지 전달에 초점을 맞춘 기훈의 행적이 늘어날수록 도리어 생존 게임의 재미는 저해될 수밖에 없다.
즉, <오징어 게임 3>는 기훈의 드라마를 살리기 위해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물의 쾌감을 의도적으로 줄인 작품인 셈이다. 시즌 1과 2에 비해 유달리 시즌 3에서 인상적인 게임이 없는 이유와도 맞닿아 있다. 다만 전쟁마저도 또 하나의 생존 게임 형태로 묘사하면서 메시지와 장르물의 정체성을 모두 살리는 데 성공했던 <헝거게임> 시리즈의 사례를 고려하면, 최선의 수단이었는지는 의문이다.
너무 많고 무의미한 곁가지
그렇다고 기훈의 서사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지도 않다. 불필요한 곁가지가 너무 많기 때문. 준호의 섬 수색극은 없어도 스토리 전개에 영향이 없다. '민수'(이다윗)의 플롯도 마찬가지다. '세미'(원지안)를 못 지킨 자책감은 공감할 수 있으나, 다른 생존자와의 접점이 전혀 없다 보니 캐릭터의 필요성을 어필하지 못했다. 또 과거사가 안 밝혀졌던 대호, 게임마다 활약을 펼친 '현주'(박성훈)처럼 필요한 곁가지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남은 곁가지도 제대로 써먹지 못했다. 금자와 '용식'(양동근) 모자가 대표적이다. 금자는 준희와 아기를 지키려고 용식을 직접 죽이고, 본인은 자살한다. 이 전개는 부모-자식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설득력이 없다. 인간성의 회복과 중요성을 역설하는 작품치고는 도리어 인간성에 대한 공감과 고찰이 부족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시즌 2부터 예측한 아들과 엄마의 가슴 절절한 신파극을 피하려다가 둔 악수인 셈이다.
'노을'(박규영)과 '경석'(이진욱)의 서사도 필요한 만큼 제대로 보여주지는 못했다. 특히 노을은 비록 기훈과 직접적인 접점이 없어도 그의 플롯에 담긴 메시지를 뒷받침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경석의 절박한 상황을 아는 이상, 자신에게 돌아오는 손익과 무관하게 경석을 살리는 게 옳은 일이라서 옳은 일을 실천하는 또 다른 사람이 바로 노을이기 때문. 그들이 해피엔딩을 맞이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포함된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은 억지스럽다. 노을과 '부대장'(박희순)이 싸울 때, 부대장은 노을을 완전히 제압하지도 않은 채로 시가를 태우며 여유를 부린다. 또 몇 분 전까지 노을이 겨눴던 총의 존재를 잊었다가 허무하게 총살당한다. 이에 더해 앞뒤도 안 맞는다. 마지막에 경석은 주변의 도움을 받아 딸 치료비를 구했다고 말한다. 이는 애초에 그가 목숨 걸고 오징어 게임에 참여한 동인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뱀의 꼬리도 아쉽다
결과적으로 <오징어 게임 3>는 근본적인 의문과 메시지에 힘을 실을 정도로 과감하지 못했고, 한 편의 독립된 작품으로서도 장점마저 못 살린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시즌 2의 첫 에피소드에서 공유가 죽을 때의 전율과 충격을 생각하면 용두사미라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심지어 <오징어 게임>의 상징성을 스스로 불태워버렸기에 이 뱀의 꼬리도 실망스럽다. <오징어 게임>의 열풍은 게임의 재미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의 시스템을 고발하는 메시지에서 비롯됐다. 돈을 좇아 인간성을 포기하고, 그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을 다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이 메커니즘을 구조화해서 더 많은 돈을 창출하는 체계를 비판하는 드라마가 바로 <오징어 게임>이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 3>의 끝은 자신이 칼날 세워 비판한 그 시스템의 일부였음을 당당히 자백한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갈라드리엘, <토르> 시리즈의 헬라인 케이트 블란쳇이 딱지녀로 등장하는 순간, 작품성과 완성도 이전에 세계관 확장 IP 수익 극대화에 힘을 쏟았다는 정황은 너무나도 명백해진다. 케이트 블란쳇이 딱지치기를 하고, 상대방 뺨을 때리는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을 보면서도 실망감이 놀라움을 앞서는 이유다.
Dreadful 끔찍한
쌓아 올린 유산을 불태우고 새출발할 준비를 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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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과 - 연상연하 킬러 선후배의 애증섞인 서열정리
지킬 게 생긴 킬러 VS 잃을 게 없는 킬러. 40여 년간 감정 없이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방역해온 60대 킬러 ‘조각’(이혜영). ‘대모님’이라 불리며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지만 오랜 시간 몸담은 회사 ‘신성방역’에서도 점차 한물간 취급을 받는다. 한편, 평생 ‘조각’을 쫓은 젊고 혈기 왕성한 킬러 ‘투우’(김성철)는 ‘신성방역’의 새로운 일원이 되고 ‘조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다. 스승 ‘류’(김무열)와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고 약속했던 ‘조각’은 예기치 않게 상처를 입은 그날 밤, 자신을 치료해 준 수의사 ‘강선생’(연우진)과 그의 딸에게 남다른 감정을 느낀다. ‘투우’는 그런 낯선 ‘조각’의 모습에 분노가 폭발하는데… 삶의 끝자락에서, 가장 강렬한 대결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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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캐리온> 티저 예고편
매년 크리스마스 연휴가 되면 수많은 여행객이 안심하고 비행기를 탄다. 이번 크리스마스는 사뭇 다르겠지만. 《캐리온》, 12월 13일 공개.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