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3-05-06 12:53:06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
영화 <토리와 로키타> 리뷰
영화를 보기 전, 다르덴 감독이 한국 관객에게 남긴 메시지를 먼저 접하게 되었다. “<토리와 로키타>를 보는 한국 관객들이 한국에 도착하는 또 다른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들의 친구가 되어주길 바랍니다.”라는 문장을 읽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나온 ‘특별 기여자’들과 그 아이들을 떠올렸다.
‘난민’이라는 단어는 그동안 건강한 담론보다는 혐오 표현으로 이어지기 일쑤였지만, 그때만큼은 그래도 여론이 갈린다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와 함께 일해 온 ‘특별 기여자’들인데 팽해서는 안 된다는, 한국인의 의리가 불안을 이겨낸 목소리가 있었다. 여론이 이 정도라면 그래도 다행이다, 생각하며 무사 귀환에 안심한 후로는 나도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그러다 지난달 친구들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독서모임을 하다가 알게 되었다. 당시 특별 기여자 자녀들이 학교에 갈 때, 기존 학생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하나씩 들려 보냈다고. 이것이야말로 아이히만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과 무엇이 다르냐며 분개했다. 차라리 옛날 반장 엄마들처럼 햄버거나 쫙 돌리는 게 낫지, 기존 학생들이 시혜를 베푼 것이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저자세로 들어가게 만드나? 아이들은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경계를 넘어설 텐데 어른들이 먼저 선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뒤늦게 들은 내가, 토리와 로키타 같은 이주 아동의 친구라 말할 수 있나. 지긋지긋한 내 안의 아이히만을 인지하며, 다소 무거운 감정을 안고 영화관으로 들어섰다. 토리와 로키타의 행복과 무운을 비는 마음으로.

영화는 불안한 눈빛의 로키타에서 시작한다. 몇 마디 이야기가 오고 갔을 뿐인데, 관객은 금방 로키타의 거짓말을 눈치챌 수 있다. 로키타의 뒤를 따르는 카메라와 함께 가다 보면, 로키타의 상황은 점입가경이다.
토리와 로키타는 각자의 이유로 아프리카 어딘가를 떠나 온 아이들이다. 벨기에에 정착해서 함께 살고자 하지만, 진작에 체류증을 받은 토리와 달리 로키타의 서류 발급은 계속해서 지연된다. 두 사람은 남매임을 증명해서 체류증을 받고자 하지만, 삶은 녹록하지 않다.
두 사람은 식당에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돈은 모이지 않는다. 잊어버릴 만하면 나타나서 입국 비용을 내놓으라고 하는 브로커들이 있고, 고용주 또한 여러 모로 아이들을 착취하며, 심지어 로키타는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끊임없이 돈을 보내야 한다.

아이들은 피자도 배달하고, 식당에서 노래도 한다. 프랑스어로 노래하고 이어 이탈리아어로 노래한다. 이국의 언어로, 서사를 부여하면서 불러야 하면 노래도 노동이 된다. 이들의 일은 점차 위험해진다. 위험한 밤의 거리에서, 마약 배달까지 하고 있다. 아직 어려도 야무진 토리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야무지게 챙겨 받을 줄 안다.
노동이 되어야 하는 노래와 대조적으로, 두 사람의 지친 밤을 위로하는 노래가 있다. 토리가 따라 부르는 로키타의 자장가. 실제 카메룬 언어로 된 자장가라는데, 내 귀에는 어쩐지 자꾸 익숙한 찬송가처럼 들렸다. “사랑의 주 사랑의 주 내 맘 속에 찾아오사 내 모든 죄 사하시고 내 상한 맘 고치소서”라는 한 구절처럼. 아무리 뒤져봐도 찬송가라는 말은 없던데. 그러나 진짜 찬송가였다고 해도 그 노래는 로키타를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브로커들이 로키타에게 만남을 요구하는 장소는 언제나 교회다.

아직 어린 어깨에 책임이 너무 많다. 스스로를 보호하기에도 어린데, 자기 세상을 지켜야 한다. 그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로키타에게는 토리, 토리에게는 로키타이다. 두 사람이 어떤 서사를 통해 여기까지 왔는지, 어떻게 이런 유대 관계를 쌓게 되었는지 영화에서 밝히지 않는다. 다만 유독 힘든 날 보고 싶은 사람도 서로이고, 학교에서 ‘아는 사람’ 그리기를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도 서로일 뿐이다. 겁먹고 숨을 헐떡일 때 약과 물을 건네주는 한 사람, 대신 문을 두드려 따져 물어주는 사람, 착취의 세상 속에서 착취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이다.

아이들의 깊은 우정에는 이유가 있다. 아이들은 피부로 감각하여 정확히 알고 있다. “우리는 환영 못 받잖아.” 로키타가 시시각각 처하는 상황은 분명 비극이지만, 세상이 로키타를 그전까지 대해온 방식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끌고 가고, 무슨 일이 생겨도 탈출구가 없는 건물에 들어가야 하고, ‘원한다 je veux’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 로키타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아는데도, 흥청망청 사는 어른보다도 훨씬 똑똑하게 삶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영화의 많은 장면에서 카메라는 아이들의 노동하는 등을 따라간다. <로제타> 때부터 일하는 누군가의 등을 다정하게 따르던 그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자체로 조금은 안심이 된다. 그러나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가 만드는 영화의 감각에 안심할 수 없는 현실을 우리는 살고 있다는 걸. 영화 속에도 친절한 개인은 있었다. 기꺼이 제 자리에서 자기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는, 잘 곳 없을 때 오라고 주소를 주는 쉼터 선생님도. 그러나 개인의 친절로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문제를 우리는 알고 있다.
다르덴 형제는 말했다.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길, 토리와 로키타의 이야기에서 조금은 마음에 남은 것이 있길 바란다고, 그래서 주변과 이야기를 나눠 주길 바란다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 왜 다르덴 형제가 토리와 로키타의 친구가 되어 달라 말했는지 알 것 같다. 아이들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는 세상만큼은 아니었으면, 사라지지 않도록 아이들이 그 자리에만 있을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변화라도 이루어 갔으면.
그런 마음으로 잠을 자고 아침을 맞으니, 세상은 어린이날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이들을 얼마나 환대하고 있을까. <토리와 로키타>가 던진 질문을 계속 입 안에서 굴려 본다. 담담하여 다정하며, 더 깊은 담론을 끌어내는 이 영화는, 아마 남은 오월 내내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이라는 해맑은 노래와 함께 잔상처럼 남아 있을 것 같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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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적 아이러니에 대한 허먼 J. 맹키위츠의 대답
넷플릭스 영화 〈맹크〉(2020)에 따르면, 전설이 된 영화 〈시민 케인〉(1941)은 각본가를 쥐어짜는 할리우드의 '착즙'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거대 영화사는 영화를 공산품처럼 만들고 싶어 하며, 각본가가 그 과정에 기계처럼 녹아들길 바랐다. 한편, 영화는 공산품인 동시에 정치적 선전물이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한 영화사 대표가 상대 후보의 당선이 이주자 유입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영상을 제작하는 장면은 영화와 정치의 구린내 나는 결탁이 꽤 오랜 역사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걸작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적 착취와 질 낮은 정치와의 결합이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영화판에서 어떻게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흔드는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은 비단 〈시민 케인〉의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의 영화는 1930년대의 할리우드보다 더 깊게 자본에 영향을 받는다. 블록버스터 영화, 상업 영화는 지배 이데올로기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확대 재생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산업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았다'. 영화는 여전히 저항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영화는 사람들의 상상력을 지배 이데올로기에 포획하는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가능케 해준다.
〈맹크〉는 이러한 영화적 아이러니에 대한 대답이다. 영화사 대표 윌리의 말처럼, 각본가는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에 불과하다.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는 자신이 춤을 추면 사람들이 오르간 연주자에게 돈을 주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없으면 오르간 연주자가 굶어 죽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는 자신을 오르간 연주자의 ‘주인’이라 여긴다.
하지만 정작 원숭이에게 밥을 주고, 옷을 입혀 춤추게 하는 것은 오르간 연주자다. 자신에게 월급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즉 권력과 돈 앞에서 예술가 정체성을 굽히지 않는 각본가 맹크에게 윌리가 건네는 이야기다. 요컨대, 오르간 연주자는 영화사 대표인 자신이고, 맹크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인 줄 착각하는 원숭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영화 〈맹크〉 스틸컷 ⓒ넷플릭스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 우화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오르간 연주자가 원숭이를 먹이고 예쁘게 꾸미려면, 춤추는 원숭이에 기꺼이 돈을 내는 관객들이 필요하다. 오르간 연주로만은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없지만, 춤추는 원숭이가 있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그의 연주에 돈을 낸다. 결국 오르간 연주자가 계속 오르간 연주자일 수 있는 이유는 원숭이의 존재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자신의 저서 《유행의 시대》에서 예술가를 관리하는 주체가 국가에서 시장으로 바뀌었음을 비판하긴 하지만, 예술 활동에 있어서 관리행정은 본질적인 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반면, ‘작가 정신’이란 그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가난한 자유’에서 나온다는 전통적인 예술론도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제쳐두더라도, 오르간 연주자의 원숭이에게도 자율성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원숭이가 가진 자율성의 조건과 크기를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원숭이가 가진 자율성 그 자체를 부정할 순 없다. 원숭이가 어떤 춤을 추는지에 따라 오르간 연주자의 수입도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맹크〉는 〈시민 케인〉이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원숭이의 자율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다시 영화의 아이러니로 돌아와 보자. 자본이 없으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영화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의 하수인 역할을 맡기 일쑤다.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영화가 구린 이유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 산업이 이어질 수 있는 건, 빛나는 영화가 드물게나마 계속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오르간 연주자의 돈으로 밥을 먹는, 춤추는 원숭이 덕분이다. 원숭이의 생존은 연주자에게 달려있지만, 최소한의 생존을 보장받는 순간, 원숭이는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춘다. 오르간 연주자가 통제할 수 없는 춤을.
원숭이의 자율성이나마 존재하는 한, 빛나는 영화는 계속 만들어질 것이고, 영화 산업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영화의 아이러니에 대한 〈맹크〉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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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인 多역이 인상 깊은 영화
최근 종영한 JTBC의 드라마 [로스쿨]의 '류혜영' 배우가 강솔A와 스타일이 180도 다른 쌍둥이 언니 '강단' 역을 모두 소화해내며 큰 화제를 모았는데요. 극 전반을 1인 2역으로 끌어가진 않았지만, 한순간의 등장만으로도 연기력을 입증하기엔 충분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듯, 전혀 다른 스타일을 연기해야 하는 1인 다역은 연기력이 입증된 배우만 할 수 있다는 게 정설인데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이병헌, <러브레터>의 나카야마 미호 등 국내외 수많은 배우들이 1인 다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극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영화 한 편에서 하나도 둘도 아닌 여럿씩이나 연기한 배우들은 누가 있으며, 그들의 무지개보다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지금부터 같이 살펴볼까요?
잇츠 CINE PICK!!
<페어런트 트랩>, 린제이 로한
1998년 7월 개봉한 한 편의 영화로 데뷔하여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가 있습니다. 영화 <인턴>의 감독으로도 잘 알려진 '낸시 마이어스' 연출, 디즈니 제작의 영화 <페어런트 트랩>은 사실 한국에서는 정식 개봉한 적이 없음에도 2000년대 초 케이블 영화 채널 단골 상영작이었기에 국내 관객에게도 익숙한 작품인데요. 영화의 주인공, '린제이 로한'은 당시 13살의 어린 나이에 1인 2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며, 디즈니로부터 3편의 계약을 추가로 얻어냅니다. 자유분방하고 장난기 넘치는 캘리포니아 나파 밸리 출신의 '할리 파커'와, 모범생 그 자체인 런던의 '애니 제임스' 쌍둥이 역을 맡은 '린제이 로한'은 두 나라의 억양까지 무리 없이 연기해냈는데요. 덕분에, 20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1인 2역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월요일이 사라졌다>, 누미 라파스
글렌 클로즈와 윌렘 대포라는 헐리웃 대표 연기파 배우가 출연한 영화에서 이들보다 더 빛나는 활약상을 보인 배우가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스웨덴의 해리 포터라고도 불리는 "밀레니엄" 시리즈를 원작으로 한 영화! <밀레니엄> 시리즈로 전 세계를 매료시킨 배우 '누미 라파스'가 일곱 쌍둥이를 모두 연기한 영화 <월요일이 사라졌다>는 사회 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진정성 있는 작품인데요.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총 7명의 캐릭터를 연기한 누미 라파스는 걸음걸이, 제스처, 눈빛에 액션 스타일까지 일곱 쌍둥이 각자에게 개성을 불어넣으며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게다가, 넷플릭스가 상영권을 따내며 '넷플릭스 오리지널'로 공개된 작품이라니, 많은 부분에서 구미가 당기는 작품인 것 같습니다.
<매니페스토>, 케이트 블란쳇
<반지의 제왕> 속 요정부터, <토르>의 악역 '헬라'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낸 반박 불가 연기력의 '케이트 블란쳇'은 특히나 다양한 영어권 국가의 억양을 탁월하게 그려내는 배우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케이트 블란쳇'은 브로드웨이 연극 무대에 자주 오르기도 하고, 다양한 예술영화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며, 이전부터 '예술'에 대한 사랑을 여지없이 드러냈는데요. 그런 그녀가 무려 1인 13역을 맡으며 화제를 모은 영화 <매니페스토> 역시 다다이즘부터 누벨바그까지 그려낸 예술사적 선언에 관한 작품입니다. 13명의 인물이 독립적 시퀀스에서 각자의 정치적, 예술적 선언(manifesto)을 하는 영화의 촬영 기간은 단 12일이라고 하니,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 변신은 무한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합니다. 세계 3대 영화제 중 칸과 베니스의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될 만큼 대단한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또 한 편의 크랭크인 소식을 알렸는데요. 영화 <Armageddon Time>은 '로버트 드니로', '앤 해서웨이'의 출연작으로 이미 큰 화제를 모은 작품입니다.
<그린나이트>, 알리시아 비칸데르
그리고 여기, 아카데미 시상식 수상에 빛나는 또 한 명의 연기 천재가 지금 1인 2역을 통해 극장을 빛내고 있다고 하는데요. 영화 <대니쉬 걸>에서 '에디 레드메인'에 절대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낸 '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이를 통해 만 27세라는 어린 나이에 오스카를 거머쥔 배우입니다. 그런 그녀의 신작 <그린 나이트>는 가웨인 경과 녹색 기사의 명예를 건 목 베기 게임과 5개의 관문을 거쳐야 하는 거대한 여정을 그린 대사서 어드벤처 블록버스터로, 비칸데르는 카멜롯에 있는 가웨인의 연인 에셀 역과 여정 중에 가웨인을 유혹하는 귀부인 역을 맡아 전혀 다른 매력을 선보였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제작사 Vikarious Productions까지 설립한 그녀는 '에바 그린'과 자신 공동 주연의 영화를 제작한다고 밝혔는데요. 아직 젊은 배우인 만큼, 앞으로의 활약이 더욱 기대되는 배우입니다.
배우들의 이러한 노력이
더욱 눈부신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눈부신 영화와 함께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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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이 용기 없는 건 당신 탓이 아니라고 영화가 말했다
용기는 쉽게 얻을 수 없다.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기에 용기 내서 성공한 이들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그들과 자신을 하나씩 비교하며 용기 낼 수 없는 이유를 떠올린다. 그리고 '다음에'라는 기약 없는 다짐으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음속에 묻어두고 지낸다. 죄책감을 주려고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통해 당신이 용기 없는 건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제임스 서버의 단편 소설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을 영화화했다. 주인공 월터 미티(벤 스틸러)는 지루하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엉뚱한 상상을 즐기는 인물이다. 16년간 사진 잡지 ‘LIFE’에서 필름 담당자로 일한 그는 유명 사진작가 숀 오코넬(숀 펜)의 사진을 찾기 위해 예상치 못한 모험을 떠나는 내용을 담았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예고편
월터의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진 잡지 'LIFE'를 배경으로 한다. 1936년 헨리 루스에 의해 창간되었던 ‘LIFE’는 2,300개의 이슈를 발행하며 보도 사진 분야에서 굉장히 큰 기여를 한 대표적인 사진 잡지이다. 하지만 정보가 디지털화되면서 인쇄 매체는 힘을 잃었고 2007년에 폐간되었다.
영화는 ‘LIFE’의 폐간 직전 모습을 묘사하고 월터가 찾는 사진은 마지막 발행본의 표지 사진이다. 'LIFE'로 찾아온 구조조정 담당자 ‘테드 핸드릭스(아담 스콧)’는 기울어진 회사의 운명을 우스꽝스럽게 풍자한다. 그는 회사와 직원들을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공상에 빠지는 필름 담당자 월터를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테드 핸드릭스의 괴롭힘을 당하기만 하던 월터가 마침내 회사를 박차고 뛰쳐나가 모험을 시작할 때 ‘LIFE’의 사명이 자막으로 등장한다.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r,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is the purpose of life.
세상을 보고 무수한 장애물을 넘어 벽을 허물고 더 가까이 다가가 서로를 알아가고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이다.”
'LIFE'에서 청춘을 바쳐 일한 월터 외에도 재무팀 직원 ‘셰릴 멜 호프(크리스틴 위그)’, 마지막 발행본을 의미 있는 사진으로 채우려는 숀을 통해 영화는 'LIFE'가 전하고자 했던 변하지 않는 가치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메시지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화려한 연출도 눈에 띈다. 상상 속의 스펙터클한 액션씬은 물론이고 주인공의 상황을 대변하는 자막 효과가 사용되는 등 다채롭다. 본격적으로 여정을 떠나면 월터가 아주 작게 보일 정도로 멀리서 촬영한 장면이 다수 등장한다. 전체적인 배경을 비추는 풀샷을 통해 관객들은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그곳의 분위기와 상황에 몰입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월터가 그린란드에서 헬리콥터를 타는 장면, 폭발하는 화산을 뒤로하고 스케이트 보드를 타는 장면 등 관객들의 인상에 깊이 남은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월터를 화려하게 감싸는 연출을 선보인 감독이 주인공 역을 맡은 ‘벤 스틸러’ 본인이라는 사실을 알면 영화가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무엇이 당신을 용기 내게 하나요?>
'LIFE'가 오랜 시간 지켜온 월터의 일부라고 해도 그는 원래 머리로만 상상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 현실에 적응하며 살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 평범한 어른이 된 그에게 낯선 모험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특히 짝사랑하는 셰릴의 존재는 월터의 모험에 방아쇠 역할을 한다. 그녀를 생각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다음 발걸음을 내디딘다. 월터의 어머니는 숀의 사진을 찾을 단서를 알려주고 좌절에 빠진 그를 격려한다. 그리고 모험에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자극을 받으며 월터는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기적 같은 현실을 만든다.
직접 그린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인물 관계도
당신의 상상도 용기를 주는 존재를 만난다면 비로소 현실이 되지 않을까? 오늘도 용기 없는 하루였을 지라도 너무 기죽지 않길 바란다. 대신 평범하고 성실하게 삶을 일군 월터의 새로운 도전을 지켜보며 가슴 짜릿한 자극을 느껴보자. 월터처럼 용기의 방아쇠를 당겨줄 존재를 찾거나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되어주자. 용기의 방아쇠를 마주치는 날까지 아직은 상상 뿐인 모든 ‘월터’들의 건투를 빈다.
* 본 콘텐츠는 브런치 Jadeinx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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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욕망과 두려움의 표상, 그리고 삶의 의미
*영화 '아가씨'의 결말 줄거리 포함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소설(fiction)의 형태로 이 세상에 처음 소개되었다. 그것은 태생부터 이 세상에 실존하지 않는 것이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존재하는 그 개념은 생명을 가진 유기체처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역동적으로 그 의미를 달리 해왔다. 그 과정에서 ‘디스토피아’라는 개념이 새롭게 태동하여 마찬가지로 살아 움직이며 몸집을 불려왔음이 이를 방증한다. 우리는 수많은 매체와 형태, 즉 문화라는 디스플레이를 통해 그 과정을 지켜봐 왔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살아 움직일 수 있는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욕망과 두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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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디스토피아
영화 ‘아가씨’는 디스토피아에서 벗어나 유토피아로 향하는 과정으로서 인간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극 초반에서 나타나는 두 주인공의 삶은 각기 다른 형태의 디스토피아를 나타내고 있다. 두 인물의 삶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자유가 부재하는 삶이다. 이에 저항하여 생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분투하는 타마코와 분투 끝에 생존의 의지를 상실해버린 아가씨의 모습은 대조를 이룬다. 두 인물은 사회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각각을 배타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사회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둘 중 한 가지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 결과는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부재다. 그들은 분명 자유롭지만 철저하게 일면에서만 자유로운 탓에, 결국 전혀 자유롭지 않다. 한쪽은 돈에, 한쪽은 자유의지에 대한 갈망에 철저히 종속된 삶이다.
두 주인공은 서로에게서 자신이 가진 결핍으로서의 부자유를 본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는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가장 밀도 있게 함유한 개념이다. 우리의 욕망은 결코 완전히 충족되는 법이 없는 반면,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실현 가능함에서 비롯한다. 실현이 가능하지 않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두려워하는 것으로부터 멀리, 그러나 욕망하는 것에는 가까이 가고자 끊임없이 질주하는 과정이다. 디스토피아에 대한 도피와 유토피아를 향한 지향이 인간 삶을 구성하는 본질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유토피아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옥희’라는 유명한 대사는 아가씨의 관점에서 서술되지만 타마코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아가씨의 마음, 그것은 곧 생명의 불씨였기에 타마코에 의해 마음이 짓밟힌 순간 그녀는 목을 매달기 위한 밧줄을 꺼내든다. 타마코가 벚나무에 힘없이 매달려 죽음을 기다리던 아가씨를 밑에서부터 받쳐 들었을 때, 두 주인공이 깨달은 것은 단지 서로를 향한 각자의 애달픈 마음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유토피아가 반대편이 아닌 동일한 방향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이기도 했다.
서로의 존재 없이는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서로의 인생을 ‘구원’해내기로 한다. 그리고 종래에는 하나의 유토피아에 도달한다. 이는 원작 소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기도 한데, 원작에서 두 주인공은 길고 지난한 여정에 걸쳐 기존의 디스토피아에서 또 다른 디스토피아로 자리를 옮길 뿐이다. 그들은 둘의 노력으로 이룩할 수 있었던 유토피아의 존재조차 끝까지 알지 못한다. 원작과 영화의 결말, 그리고 이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극명한 차이가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은 삶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삶의 본질은 단지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는 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우리는 도피하는 동시에 어딘가로 나아가야 한다. 그곳에 각자의 유토피아가, 욕망이, 삶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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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써 대답하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각자의 유토피아를 향한 과정 그 자체라는 사실이다. 실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에 도착하기 위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오직 그것만이 삶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어떤 식으로든 유토피아에 도달함으로써 마치 기차가 역에 도착하듯이 삶도 종착역에 도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행인 것은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우리들 삶의 의미가 죽음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 이후에도 삶의 의미는 남는다. 그것은 주인을 잃었어도 기어코 이 세상에 남아 삶과 연결된다. 무엇을 두려워할 것이며 무엇을 욕망할 것인가. 하나의 질문이 있고 하나의 답이 있다. 당신의 질문과 나의 질문, 당신의 답과 나의 답은 반드시 다를 것이다. 그러나 다름 아닌 바로 그 사실로 인해 우리는 연결될 것이다. 삶으로써 질문에 대답해야만 하는 숙명을 가진 인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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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들 <레이디 버드>, <프란시스 하>
떠나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들
프란시스와 레이디 버드
처음으로 <프란시스 하>를 본 건 입시 준비를 하던 여름이었다. 계속 이곳저곳을 방황하는 프란시스를 보는 게 정말 힘들었다. 같은 해, <레이디 버드>를 본 후에는 영화 말미에 대학에 들어가는 레이디 버드가 참 부러웠다. 수능 성적이 좋은 것도, 방과 후에 연극을 하고, 줄리와 대니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고,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전부 대단해 보였다. 스물 한 살이 되어 당시에 느꼈던 무력감과 긴장감에서 한 발짝 물러나고, 새로운 고민이 생긴 후 두 작품을 다시 봤을 때 비로소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레이디 버드가 새크라멘토를 그리워하듯, 프란시스가 방황하던 시간을 지나 ‘자기만의 방’을 찾듯 그레타 거윅이 그린 성장은 단순히 귀감이 되기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작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지나온 시간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We were in one parking lot and we went to another parking lot.”
‘레이디 버드’는 고등학생인 크리스틴이 자신에게 직접 붙인 이름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부르면 반드시 고쳐 부르게 하고, 명단에 쓰인 이름은 새로 쓴 후 밑줄까지 그어 둔다. 반듯하게 인쇄된 글자 아래 적힌 손글씨는 어디서든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레이디 버드를 소개하는 듯하다. <레이디 버드>는 수십 벌의 예쁜 의상과 함께 밝은 미래를 노래하는 ‘하이틴’ 영화에서 벗어나 그 이미지를 보고 자란 소녀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깊이가 각기 다른 수많은 고민, 견뎌내야만 하는 상황, 결코 설명하지 못할 결정들, <레이디 버드>가 주인공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모녀의 이야기라는 점은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관객에게도 호소력을 지닌다.
그레타 거윅이 공동 각본을 쓰고 주연을 맡은 <프란시스 하>는 꼭 <레이디 버드>의 다음 이야기처럼 보인다. 프란시스는 여러 모로 불안정하다. 현대무용가가 되고 싶어하고, 뉴욕에 살며, 함께 살던 친구가 떠나며 갈 곳도,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어진다. 영화는 색조차 빼앗아 가며 복잡한 감정과 걱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레이디 버드처럼 다른 세상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와 원동력을 절실히 원하는 캐릭터를 보여준다. 프란시스가 자신의 이름을 줄여 쓰지 않고 반 접어 우편함에 끼워 넣은 것처럼, <프란시스 하>는 때때로 한 발자국 물러나거나 타협하는 것이 결코 최악의 선택지가 아니라고 말해준다. 화려한 스토리와 미장센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프란시스 하>는 불완전한 삶과 끝나지 않은 성장으로 위로를 준다.
레이디 버드는 “우리 주차장에서 출발했는데 또 다른 주차장에 왔네.”라고 말한다. 주차장은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출발해야 하는 장소이다. 스치듯 읊조린 대사지만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 하>의 정서를 모두 설명하는 것만 같다. 두 작품은 떠난 후에야 사랑하게 되는 것들, 다시 말해 과거의 경험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되기까지의 성장을 담았기에 특별하다.
그레타 거윅이 그린 여성의 성장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 하>가 유독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두 이야기를 충분히 내면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 프란시스와는 공통점보다 다른 점을 더 많이 찾을 수 있다. 집에서 먼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적도 없고 무대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며, 태어난 연도와 사용하는 언어조차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에서 위로를 받거나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나를 위한 영화다’라고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레타 거윅의 캐릭터들이 여성으로 살아온 경험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정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디 버드와 프란시스는 섹슈얼한 관계를 쟁취하지 않는다. 단지 자연스러운 욕망과 꼬이고 풀어지는 관계들, 보편적이고 사소한 고민을 보여준다. 현실적이고 솔직한 모녀 관계와 친구 관계 또한 위와 같은 감상에 큰 영향을 준다.
<굿 윌 헌팅>, <죽은 시인의 사회>, <길버트 그레이프>, <바스켓볼 다이어리> 등은 모두 다양한 감상과 감동을 주는 훌륭한 작품들이지만, 영화와 소통하고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자라면서 수도 없이 돌려 본 <금발이 너무해>, <클루리스>, <하이 스쿨 뮤지컬> 같은 작품들은 여성 제작자의 손을 거치거나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것임에도 아름다우면서 유능한 캐릭터를 모델로 제시한다. 이러한 영화들을 수없이 본 경험 이후에 그레타 거윅이 참여한 작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예술가, 여성 제작자로서 그레타 거윅의 행보가 기대되는 이유는 단순히 그의 이야기와 연출이 좋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나 다른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내면화하고, 다시 새로운 경험으로 만드는 것이 개인의 삶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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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4주 차, 최신 씨네 뉴스
개봉 첫 날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고 있는 <서울의 봄>이 20만명을 돌파해다고 합니다.
좋은 스타트와 함께 높은 예매율을 자랑하고 있는데요. 혹평이 쏟아진 넷플릭스 공개작 <독전2>와는
상반된 평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주 씨네뉴스 같이 만나보실까요?
독전 평점 2점대 쏟아지는 혹평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영화 <독전 2>가 혹평을 받고 있습니다. 평점은 2점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과한 설정
변경, 캐릭터성 붕괴, 메인 빌런의 연기력 등을 문제로 꼽고 있습니다.
넷플릭스 1위 오른 최수종 사극
KBS의 50주년 특별 기획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되며 공개 직후부터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판타지 사극이 아닌 정통 사극이 글로벌 OTT에서 동시 배급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며 지난 14, 15일 한국 넷플릭스 시리즈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서울의봄> 20만명 돌파, 예매율 1위
영화 <서울의 봄>이 공개 첫날 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모으며 박스오피스를 장악했습니다.
<서울의 봄>은 <비트> <태양은 없다> <아수라>등을 만든 김성수 감독의 신작을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한 뒤 같은 해 12월 12일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류이치 사카모토 유작 영화 <괴물>에서 만나볼 수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괴물>에서 류이치 사카모토의 연주를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음악 제작 요청 당시 투병 중에 피아노 두 곡을 제출했고 사카모토의 이전 곡들을 사용하여 구성하였다고
합니다. 영화 <괴물>은 제76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으며 오는 11월 29일 개봉 예정입니다
성수기 없는 영화관
영화계에서 ‘성수기 붕괴론’이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설 연휴, 7월 말~ 8월 초, 추석 연휴 등이 그런 시기였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관객이 급감하고 영화 관람 문화가 바뀌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 흥행 순위 1~3위 영화는 비수기에 장기 흥행을 통해 성과를 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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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이어트 플레이스 2' 관람 전 필히 숙지해야 할 리뷰
영화 흥신소 - 알고보면 쓸데없이 재밌는 영화리뷰
입도 뻥끗 못하는 가족들의 생존기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알아보자
'낮말도 괴물이 밤말도 괴물이 듣는다는 마을'
자그마한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예민보스 덕분에
사는게 사는게 아니라는 가족과연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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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화 / 스나이퍼 VS 스나이퍼 밀리터리 이야기 [밀덕리뷰/결말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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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길복순> 1차 예고편
제73회 베를린 영화제 초청작 죽을 때까지 숨길 것. 숨기지 못한다면 죽일 것.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킹메이커》 변성현 감독 넷플릭스 영화 《길복순》 3월 31일, 오직 넷플릭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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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스케이터 걸> 공식 예고편
[2021년 6월 11일, 넷플릭스 공개]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기분이다.
인도의 시골 마을에 사는 10대 소녀 프레르나에게 처음으로 생긴 꿈.
전국 스케이트보드 챔피언십에 나가고 싶다.
그 길이 매우 험난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