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예슬2021-11-29 21:46:05
좋아한다는 이유로 다 용서해야만 하는가
<미저리> 영화리뷰
어릴 적 봤던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의 집 앞에서 하루종일 기다리는 것을 낭만적으로 연출하는 경우가 종종 보고는 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낭만적인 상황도 아니며 설렌다고 느껴서도 안된다. 사랑은 상호 의사소통이며 서로를 이해하는 행위인데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무조건적으로 나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닌 집착이다. 또한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으며 거절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연락하는 것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다. 명백한 스토킹이며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공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매체에서 이런 구애 행위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는지 그리고 이것을 보며 과거의 나는 왜 그것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매체의 힘은 상당히 강하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인 구애행위를 통해 끝끝내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받아줬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이 과연 건강한 사랑, 건강한 의사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만약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공포심을 느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영화 미저리에서는 폴에 대한 애니의 표현을 옳지 않은 방식, 왜곡된 사랑으로 표현했는데 나는 이처럼 미디어에서 스토킹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며 스토킹에 대해 알아보다가 현재 한국에서는 스토킹이 법적 용어가 아니기 때문에 스토킹 자체만으로는 범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연인과 같은 친밀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 살인과 같은 범죄가 스토킹의 연장선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간 나는 이런 친밀한 사이, 혹은 일방적인 구애행위가 범죄로 이어지는 뉴스들을 접하면서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가해자의 이야기, 가해자의 목소리에 더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닌가 반성하게 되었다. 이런 범죄의 피해자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굉장히 어렵고 쉽게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영화 미저리를 보면서 스토킹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행위인가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성범죄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스토킹에 대한 교육, 건강한 사랑은 무엇인가에 대한 다양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하루빨리 스토킹과 관련된 법을 제정하여 피해자를 보호하고 이것이 2차 범죄로 이어져 더 많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일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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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는 노력이 타고난 재능을 이길 수 있을까?
알렉스 돌은 대학 신입생이며 대통령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무척 잘한다. 그러나 그녀의 또 다른 관심사는 노비스 조정 훈련에 참가해서 대표팀으로 뛰어보는 것이다. 공부뿐만 아니라 로잉 머신으로 훈련을 지겹도록 연습한다. 그런 그녀에게는 남들이 자신을 인정해 줘야 하는 강박 때문인지 타고났다는 말을 들으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까지 공부든 조정 훈련이든 열심히 하는 알렉스 돌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점점 자신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코치에게도 인정받자 자신을 더욱 단련하기 위해 노력한다. 경쟁자 친구에게 지지 않으려고 1등에 집착하는 알렉스 돌은 점점 자신이 힘들어진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을 해치게 된다.
타고났다는 말을 듣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알렉스 돌'의 노력과
투쟁을 보여주는 영화!
남들보다 치열하게 노력해야 1등이 될 수 있다는 집착이 무엇을 힘들게 했나?
무언가에 푹 빠진 사람들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영화!
알렉스 돌은 자신에게 해를 입힐 정도로 공부와 조정 훈련을 열심히 한다. 그런 그녀에게 필요한 건 마음의 여유로움이었다. 남들보다 더 잘하고 싶고 친구들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노력은 노오력이 되어 자신을 힘들게 했다. 또한 1등이란 단어에 집착한 만큼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 하는 알렉스 돌은 점점 미쳐간다. 그렇기에 남들이 쉬고 있을 때 자신은 끊임없이 로잉 머신으로 신기록이 나올 때까지 연습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힘들어지는 건 자신뿐이었다. 코치가 강요하는 전문가가 되기 위한 1만 시간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 타고난 재능이 있는 친구들보다 더 잘하려고 했기에 아주 힘든 자신과의 싸움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안 좋아지고 미쳤다는 말을 듣는다.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압도하려면 필요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고 이런 알렉스 돌에게는 큰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노력에 장점은 있었는데 자신이 계획한 목표를 향해 아주 열심히 노력하는 게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이 정한 목표를 이루려고 남들과 치열한 경쟁을 해본 사람들의 끈기와 무서운 추진력을 보게 되었다. 모두 1등이 되기 힘들지만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게 정말로 전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무언가에 푹 빠지면 정말 성공하는 것일까?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점도 주는 영화 <더 노비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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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은 원래 무거운 거야
여기, 자신의 삶을 아름다움과 자유로움으로 멋 부린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하울. 금발에 파란 눈, 반짝이는 장신구와 화려한 패턴의 옷, 여유로운 모습까지. 그럴싸한 겉모습을 가졌는데도 사람들은 몰려들지 않는다. '조심해. 하울은 심장을 잡아먹는대.' 흉흉한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피하기도 하지만, 하울 또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다. 언덕 너머 매서운 바람이 부는 광활하고 어둑한 들판,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노인. 걸음은 느려도 한 순간의 주저함이나 멈칫거림 없는 소피 '할멈'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저주에 걸려서 신체 나이가 아흔 살이 된 소피겠다.
입구에 닿을 듯 말듯하던 소피 할멈을 하울의 성이 마치 퍼올리듯이 움직인다. 이 움직임의 원동력은 캘시퍼, 하울의 심장을 계약조건으로 성의 형태를 유지하는 악마다.
하울이 저주를 풀어주길 바라며 찾아온 소피 할멈. 그런데 저주가 걸렸다기엔 너무 씩씩하고 쾌활하다. 청소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얼굴은 편해 보이기까지 한다. 앳된 모습으로 모자 가게에서 일할 때엔 상상할 수 없던 표정과 말투.
함께 놀러 나가자는 다른 이들의 제안에 소피는 고개를 저었다. 일을 마저 하겠다며. 시끌벅적한 무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소피는 모자를 몇 번 뒤적이곤 자리를 뜬다. 모자 가게는 소피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마냥 해맑은 동생과 엄마 사이에서 아버지의 가게를 이어가야 한다는 중압감이었을 뿐.
해야 하는 일에 오래 골몰한 사람은 점차 자신을 잃는다.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뭘 원하는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고 무서워하는지. 아주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까지 사라진다.
자신의 내면이 외적으로 드러난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진다. 소피는 밀대를 가져와 바닥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싹싹 밀고, 옷가지들을 모아 빨래하고, 캘시퍼 주변에 한가득 쌓인 재를 퍼올린다.
방 청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까. 하울의 심장(캘시퍼)은 소피를 퍼올리듯이 안으로 들여보냈다. 반대로, 소피는 하울의 성 안을 가득 메운 먼지와 쓰레기, 재를 퍼올려서 내다 버린다. 어쩌면 하울이 소피에게 허락한 영역은 캘시퍼가 있는 1층 공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피는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청소한다. 하울이 아름다움을 위해 마법을 걸어두었던 선반까지도.
마법이 풀리기 시작하면서 하울은 말 그대로 '녹아내린다'. 무언가를 집어던지고 부수며 분노하지 않고 축 늘어진다. 이렇게나 유약한 자가 어떻게 전쟁의 최전선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것일까.
하울의 오랜 고용주, 설리만은 말했다. 하울은 어려서부터 실력이 뛰어났다고. 어린 시절의 인정은 양날의 검이다. 용기를 북돋아주는 길잡이가 될 수 있지만, 어른들의 입맛에 자신을 맞추는 시작점이 될지도 모른다. 하울은 후자였다. 어떤 일을 시키든 잘 해내고, 성과를 인정받고, 더 큰 일을 받고, 굴레는 반복된다.
많은 가명을 만들어 각 이름마다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연기하던 하울. 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모두 똑똑하고, 기품 있고, 아름답다. 이 상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한 가지를 없애야 한다. 하울 자신. 그 열망이 너무 큰 탓이었을까. 조금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선택을 내린다. 어린 시절, 하울은 심장을 꺼내어 악마에게 주었다.
소피는 텅 빈 내면이 외적으로도 드러났고, 하울은 사람들이 혹할 만한 '좋은' 것으로 빈 공간을 숨겼다.
소피의 내면이 아흔 살 노인으로 드러났다면, 하울의 내면은 영화 끝자락에서 나온다. 하울의 심장의 초대를 받아 하울의 내면을 청소하고, 이윽고 가장 깊은 곳, 하울의 본모습을 마주한 소피. 방문을 열자 하울의 방 대신 동굴이 나오고, 그 끝에 온몸을 움츠린 커다란 새가 공포에 떨고 있다.
새보다는 공에 가까운 모양새. 타인의 기대와 욕망이 덕지덕지 묻은 깃털들이 하울을 무겁게 짓이긴다. 소피는 자신의 내면을 겉으로 드러낸 후 한 차례도 망설이지 않는다. 무수한 남색 깃털까지도 털어낸다. 그제야 하울이 보인다. 남색 머리와 그와 비슷한 색을 담은 눈, 흰 티, 까만 바지. 단조롭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처음과 모습이 다르다. 금발에 반짝이는 보석, 분홍색 제복의 하울은 수수한 차림새로 바뀌었다. 갈색머리의 소피는 '별빛'색의 단발로, 황야의 마녀는 커다랗고 위엄 있는 모습에서 작고 하찮은 모습으로, 캘시퍼는 자유로운 불로.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마르클은 어린 아이다.
"마음은 원래 무거운 거야."
어른들은 그 무게를 잊고 산다. 해야 하는 것들에 둘러싸이느라 하고 싶은 것을 모르고, 들끓는 정보를 쫓아가기에 급급하고,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길 바라면서 그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불안과 걱정을 분노로 치장하고, 분노를 힘으로 치환해 과시하려 든다.
소피가 대단한 게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다. 그런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변화가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으로 보였으면 하는지, 왜 그러고 싶은지, '현실적'이라는 말을 제거하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다 보면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청소의 시작점이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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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혜선,변요한 배우의 역량으로 미스터리를 이끌다
취미는 훔쳐보기
이 영화의 주인공은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다. 얼핏 보기엔 그냥 잘생긴 남자다. 하지만 구정태에겐 은밀한 취미가 있다. 바로 훔쳐보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타인을 훔쳐보면 왠지 나 혼자만 다른 세계에 있다는 쾌감이 든다. 멀리서 보면 그냥 나도 똑같은 사람일 뿐이잖아? 조용히 취미생활을 가지면 사람들도 모르게 되어있다. 심지어 직업이 공인중개사다. 이 말은 즉슨 타인의 집에 쉽게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정태에게 어떤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 여자는 이 영화의 다른 주인공 한소라(신혜선)다. 예쁜 외모를 가진 한소라. 한소라가 소시지를 먹는 모습에 구정태가 관심을 갖게 되고, 이는 곧 두 사람과의 만남과도 이어진다. 어렵지 않게 한소라의 집 키를 얻은 구정태. 이번에도 몰래 한소라의 집에 침입한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안 한다. 그럼 아무도 없다는 뜻이겠지? 어차피 집 키도 한소라가 줬다고. 문을 열고 들어가는 구정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한소라가 칼에 찔린 채로 발견된 것이다.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경찰에 신고하기엔 변태라는 것을 스스로 시인하는 셈이 되니 난처하고, 혼자 살인마를 잡기엔 너무나도 어렵다. 정태 곁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사고들. 안 그래도 잡혀갈까 무서운데 하나같이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던데, 정태는 과연 위기를 탈출할 수 있을까?
몰입감은 뛰어나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플롯이다. 왜? 이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많은 부분을 하나의 동력으로 치환시켰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다루고 싶었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소셜 미디어의 폐해다. 일반적으로 ‘소셜 미디어의 폐해’하면 뭐가 생각날까? 금세 <더 글로리>에서 최혜정 캐릭터가 보이는 것에 대해 과하게 신경 쓰는 장면이나 <댓글부대>에서 관심을 감당하지 못한 누군가가 떠오를 것이다. 이런 류의 소셜 미디어 묘사는 그동안 많이 볼 수 있었다. 사실 이 영화에서도 이런 식의 소셜미디어 묘사가 들어가기는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들로 채워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스릴러, 미스터리물에 있어 이야기가 갑자기 폭발력을 가지는 지점이 어디일까?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흘러가야 한다. 그럼 영화가 플롯에서 보여줘야 할 것이 있다. 앞 상황을 중심으로 뭐가 진짜인지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 서스펜스에 대한 부분을 영화가 만들어가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리고 그 서스펜스는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미디어의 단점이기도 하다. 어디까지 믿고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을 영화가 플롯으로 실체화시킨 것이다. 핵심 플롯뿐만 아니라 곁가지가 되는 부분도 미디어가 발전했기 때문에 따라왔던 단점을 묘사하고 있다. 가령 여성 스트리머/BJ/유튜버가 인터넷 방송을 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 이 부분에 대한 문제나 그럴듯한 구색을 갖췄지만 타인에게 얼마든지 폭력을 가할 수 있는 언론의 역할까지 영화가 단순하고 간단한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현 세태의 다양한 모습을 품고 있다. 좋은 각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층적으로 어울리는 이야기를 만들기는 했지만 하나하나 세세하게 들어가면 걸리적거리는 부분이 몇 있다. 가령 이 영화에서 경찰의 역할은 애매하다. 왜?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전면에 드러나있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초반부부터 목적을 대놓고 드러내고 등장하기 때문에 인물의 생동감과 개연성이라는 측면에서 약점이 생기는 것이다. 심지어 경찰의 역할이 들어가야 할 때 아예 등장하지 않거나 유명무실하기까지 하다. 설정을 편의적으로 쓴 것이다. 대표적으로 첫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이 보여주는 문제제기가 우리 현실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당연하다. 하지만 이 대사가 영화 안에서 빛을 발한다면 경찰 캐릭터가 좀 더 유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또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문제상황이 영화 전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냥 단순히 특정 누군가와의 대립에서만 끝났다는 점이 이 캐릭터를 왜 이렇게 묘사했어야 하는지의 측면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또 이 인물이 영화 안에서 제기하는 사회적인 문제가 합리적인 지적이 되려면 이 인물이 경찰로서 핵심 플롯이 다루는 사건에 유의미하게 접하는 모습이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이 부분을 영화가 묘사하는 방식은 애매하다는 점에서 아쉽다. 왜 이런 캐릭터가 들어갔을까? 이는 영화의 다른 캐릭터들을 비교하면 더 두드러진다. 어떤 인물은 미디어의 병폐를 보여주다가 이야기의 방향키를 틀어서 혼자 사는 여성이 가진 어려움을 암시한다. 다른 캐릭터는 빈곤한 인간 내면을 표현함과 동시에 한국사회에서 수도 없이 봐왔던 문제 해결을 구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식으로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목적 이전에 캐릭터의 생동감을 먼저 고려하고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영화의 경찰들은 플롯 안에서 겉돌면서 극후반부가 아니면 없어도 되는 존재가 된다.
수많은 혼잣말
글쓴이 입장에서 영화에서 두드러졌던 요소는 나레이션이다. 나레이션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작동할까? 바로 형식의 가장 기본요소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영화는 어떤 장면이 있고 그 모습을 특정 인물이 해설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형식을 이끄는 인물은 구정태다. 구정태의 가장 중요한 설정이 뭘까? 바로 누군가를 염탐한다는 것이다. 구정태는 어떤 장면을 보고 그것을 해설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인물의 이 특성을 영화의 성격과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염탐한다’라는 행위는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과도 이어지는데,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바탕으로) 누군가의 일상 내지는 일대기를 지켜보는 것이 영화 아닌가? 그리고 대화는 기본적으로 타인과 하는 행위이며 구정태는 나레이션을 통해 관객과 대화하고 있다. 이 두 전제라면 이 영화는 대화를 통해 관객을 영화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는 의미기도 하다. 이 전제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그녀가 죽었다>는 관객을 구정태를 지켜보는 인물임과 동시에 그와 같이 타인들을 지켜보게 하는, 일종의 염탐꾼으로 만들어버린다. 구정태가 대화하는 대상이 우리 관객이라면 영화가 고의적으로 구정태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을 동일시시킨 것이다. 이것은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이라는 두 딜레마가 주인공 두 사람의 핵심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이야기가 가리키는 대상이 관객을 향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결국 우리도 이들을 훔쳐보는 염탐꾼인 것과 동시에 ‘보이는 것’에 대해 집착하는 인물이지 않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내레이션이 너무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는 점은 영화의 단점으로 뽑을 수 있다. 이 영화가 관통하고 지나가는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은 다 중요한 것들이다. 퇴색되지 않고 오롯이 전달하려면 감정적이지 않는 톤으로 전달하는 게 그 효과를 더할 수 있다. 그러려면 내레이션이 이렇게까지 많이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인물의 내면을 통해 감정이입을 유발하는 역할을 하기 위한 내레이션이 따로 있고, 관객을 극으로 초대하는 내레이션이 따로 있다. 그래서 어느 내레이션은 좀 사족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다가 영화 후반부쯤 되면 이 내레이션 연출에 통일성이 깨진다. 기획의도를 살리는 연출이라면 엔딩부에 누군가가 등장할 필요가 없다. 왜? 그 대사의 내용은 관객들이 알아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혼자 마무리지어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자신감이 없었는지 톤을 해치는 장면을 넣어 더 쉬운 접근법을 택했다. 어떤 관객들은 이 장면이 직접적이라서 좋았다고 할 수도 있을 듯하다. 글쓴이는 그 의견에 반대한다. 이야기의 형식에 측면에서 이 부분은 혼자 마무리지어도 좋지 않았나 생각한다. 가장 마지막 장면과 어울리기도 하고.
어느덧 베테랑
이 영화의 주인공을 맡은 변요한 배우는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구정태가 맡은 과제는 두 가지다. 거리감과 박진감이다. 전자 거리감에 대한 부분은 간단하다. 이 영화에서 구정태가 벌이는 범죄행위는 하나같이 끔찍한 것들이다. 이 글을 읽는 모두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본다고 하면 싫을 것이다. 이 싫은 느낌을 영화가 부지런하게 묘사하기 위해 변요한 배우는 사소한 차이로 기괴함을 불어넣는다. 가령 초반부 캐릭터를 설명할 때 혼자 싱글벙글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면 익숙한 것 같으면서도 조금의 차이를 두며 인물을 관객에게 설명한다. 그리고 후반부가 되면 이 인물의 내면이 사실상 이야기의 중심이 되며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게 된다. 여기서는 자유롭게 감정연기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데 후술 할 신혜선 배우가 뛰어놀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됐다.
다른 주인공을 맡은 신혜선 배우는 그동안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좋은 작품을 만났다. 일단 연기하는 데 있어 가장 개성이 있는 캐릭터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한소라 캐릭터가 약간 클리셰를 따른 감도 없지 않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신혜선 배우의 얼굴을 반대로 활용한 데에서 개성이 생긴다. 신혜선이라는 배우의 이면을 활용한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연기를 빛내주는 연출도 큰 도움이 되는데, 코디나 메이크업 같은 것도 선을 굵게 그려 한소라라는 인물이 가진 화려함과 허술함을 강조했다. 글쓴이가 감탄했던 부분은 목소리 톤을 변주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들은 여러분이 직접 확인하시길 바란다.
보이는 것 중 무엇이 진짜인지 묻다
글쓴이가 이 영화에 대해 한 단어로 요약하면 외로움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로움을 정서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장르적인 원동력으로 바꾸어 팽팽한 이야기를 만든 영화가 이 <그녀가 죽었다>다. 외롭기 때문에 인간들이 벌이는 행동이 예상하지 못할수록 더 특이점을 갖는 것이다. 글쓴이는 이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나는 다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 가득한 버스에서 인스타그램을 켜 나는 조금 달랐으면 한다는 이상한 바람. 지금 당장 고가의 브랜드 제품을 사고 싶다는 허영심. 영화는 이 수많은 모습들을 외로움으로 꿰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과연 당신의 하루를, 또 당신을 사랑하고 있나요? 답은 여러분이 내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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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의심 앞에 한없이 무력하다
의심이라는 녀석은 인간에게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눈에 보이지 않는데 굳건할 것 같은 사람의 마음을 쉽사리 뒤흔들고 현혹하는 간사한 존재다. 이 의심이라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는 종교 등에 의지해 신앙심을 키우고, 어떤 이들은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식으로 내재된 불안함을 다스린다.
그러나 쉽지 않다. 의심을 말끔히 떨쳐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반면, 믿음이라는 장벽에 조금이라도 물 샐 틈이 보인다면 의심이 쥐도새도 모르게 새어 들어와 야금야금 갉아먹는다. 그리고 낚아버린다. 나홍진 감독이 만든 '곡성'도 이러한 사람의 특성 중 하나인 의심이라는 요소를 영리하게 사용했다.
장르 소개란에는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라고 적혀 있다. 엑소시즘과 샤머니즘 소재가 나오기에 오컬트에도 포함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 의견에 동의한다. 이 영화는 정확하게 스릴러와 오컬트 요소가 아주 진한 색깔을 내기 때문이다.
156분 동안 진한 스릴러와 오컬트 향을 내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의외로 간단하다. 첫 장면에 음산한 배경과 함께 나오는 성경 구절 루카 복음서 24장 37~39절로 함축했다. 이 문구가 요약본이라는 것을 다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과 살은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으니라. -루카 복음서 24:37~39-
전라남도 곡성군 한 시골마을에서 부부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살인 현장에 출동한 종구(곽도원)와 경찰들은 수색하던 중 창고 깊숙한 곳에서 새 둥지와 비슷한 나뭇가지 뭉치와 촛불이 놓인 수상한 제단을 발견했다. 살인사건과 관련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 정체불명의 외지인(쿠니무라 준)이 마을 사람들 눈에 띄었고, 그와 관련된 소문들이 돌았다. "요렇게 소문이 파다하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거야"라는 대사는 종구의 의심은 외지인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뜻이었고, 그에게서 해답을 찾겠다는 의도가 깔려있었다. 공식수사에서 사건 발생 원인이 독버섯이 일으킨 환각작용이라고 밝혔음에도 종구와 마을 사람들은 이에 귀 기울이지 않고 외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의심에 현혹된 것이다.
여기서 종구는 사람들이 전하는 여러 가지 소문만 듣고 일본인 외지인을 만났다. 소문 덕분에 그 외지인이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일상으로 적용한다면, 외지인을 향한 종구의 생각이나 마음처럼 무언가에 의심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삶 혹은 일상서 벌어지는 현상 등을 이해할 수 없다. "쟤는 아마도 그럴 거야" 같은 사실에서 기반한 의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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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툴지만 그만큼 절실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우리들>
초등학생 시절의 나에게 ‘친구’란 어떤 존재였을까? 어린 시절, 내게 ‘친구’는 때로는 부모님보다도 더 소중하다고 느껴질만큼 내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꽤 많은 시간이 흘러 어렴풋한 기억만 남았지만,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꽤나 치열하게 살아왔던 내 모습만큼은 자주 떠오르곤 한다. 어쩌면 성인이 되어버린 지금보다도 더 예민하고, 위태롭고, 흔들리기 쉬웠던 시기였기에 그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내내 전전긍긍하곤 했다. 이러한 기억들의 색깔은 내가 커가면서 점점 흐릿해졌지만, 이 영화를 본 순간 다시금 선명한 원색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은 ‘선(최수인)’과 ‘지아(설혜인)’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친구 사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초등학교 여름방학을 맞이하고, 항상 혼자이던 선에게 ‘전학생 지아’라는 새 친구가 생긴다. 둘은 금방 친해져서 여기저기 같이 돌아다니고, 서로의 집에도 놀러가며 행복한 여름의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여름방학이 끝난 뒤, 선은 지아에게 밝게 인사하지만 지아는 그런 선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다. 방학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지아는 새 친구 ‘보라(이서연)’를 사귀었다. 보라와 보라의 친구들은 타인의 말을 자신들의 의도대로 오해해서 듣고, 만만하다고 생각되는 친구에게 함부로 말하곤 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지아는 보라와 어울리며 선과 멀어진다. 하지만 이 관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보라와 보라 친구들의 다음 괴롭힘 ‘타겟’은 지아였다. 무리에서 ‘낙오’된 지아는 선을 화나게 하는 행동을 하였고, 결국 감정이 쌓이고 쌓인 지아와 선은 몸싸움까지 벌인다.
피구
이 영화는 피구 경기로 시작해서 피구 경기로 끝난다. 영화의 첫 장면은 피구 경기를 위해 각자의 팀을 뽑는 상황 속에서의 선의 모습이다. 선은 자신이 뽑히길 기대하는 눈빛으로 팀원을 뽑는 두 아이를 계속 번갈아 쳐다본다. 다른 친구들이 뽑히는 것을 보고 부러워하고, 자신이 마지막까지 뽑히지 않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고, 입술을 뜯으며 초조해하면서 선은 조용히 기다린다. 그런 선을 향해 반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선 못한단 말이야’라는 말을 꺼내곤 한다. 아이들은 나쁜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고 해도 초등학생의 아이에게 이 말은 마음 한 구석에 꽤 오래 남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우리들’은 지금보다 더 예민하곤 했다. 이런 말 하나에도 금방 위축되곤 했다. 그렇게 피구 경기가 진행되던 중, 선은 갑자기 상대편으로부터 ‘금을 밟았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선은 금을 밟지 않았다고 주장해보지만 ‘너 아웃이야’, ‘빨리 나가’라는 등쌀을 견뎌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선이 금을 밟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반에서 외톨이인 선의 상황과 선을 대하는 반 아이들의 반응을 통해 이러한 말과 행동들은 선을 향한 심술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두 번째로 나오는 피구 경기는 지아가 전학 오고 선과 멀어진 이후에 이루어진 경기이다. 지아는 상대편인 선을 주저없이 공으로 맞춘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보라는 피구를 잘하는 지아를 의식하고 경계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세 번째 피구 경기를 보여주며 끝이 난다. 지아와 보라가 멀어지고, 지아와 선의 관계가 틀어진 이후 이루어진 경기이다. 첫 번째 피구 경기에서 아무도 자신의 팀에 데려가려고 하지 않던 선의 상황이 이제는 지아에게 일어난다. 결국 맨 마지막으로 뽑힌 지아는 앞선 선의 상황과 똑같이 ‘금을 밟았다’는 오해를 받게 된다. 지아는 금을 밟지 않았다고 주장해보지만, 주변 아이들은 지아를 둘러싸며 빨리 나가라고 재촉한다. 이런 지아를 향해 선은 ‘한지아 금 안 밟았어. 내가 봤어.’라는 말을 꺼낸다. 그리고 지아와 선은 조금은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용기를 내서 서로를 바라본다. 날이 서 있는 눈빛이 아닌 조금은 누그러진 눈빛으로.
‘피구’는 우리들 모두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빠짐없이 해 본 경기이다. 반 친구들이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스포츠 경기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 폭력적인 경기였다. 팀을 정할 때에는 자연스레 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거나 체력이 조금 약한 친구가 남게 된다. 마지막까지 남게 된 그 심정은 생각보다 더 속상하다. 경기를 진행할 때에도 선과 지아가 처한 상황과 유사하게 대뜸 금을 밟았다는 오해를 받게 되는 일도 종종 일어나곤 한다. 이렇게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된 행동들은 선과 지아의 상황에 처한 아이들에게 상처가 된다. 이렇듯 피구는 몇몇 아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남기곤 하는 폭력적인 경기였다.
김밥
자신의 집에 놀러온 지아를 위해 선은 지아가 좋아하는 오이김밥을 만들어 달라고 엄마를 재촉한다. 서로에게 장난도 치고, 다정해보이는 이들의 모습을 우연히 지아가 목격한다. 지아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엄마는 떠났다. 그래서 지아는 엄마를 보고 싶어도 당장 볼 수가 없는 상황이다. 선과 선의 엄마의 모습을 보고 약간 심술이 난 지아는 선이 권하는 오이김밥을 거절하고 옆에 있던 과자를 먹는다. 평소와 조금 다른 지아의 모습을 눈치챈 선은 더 이상 김밥을 권유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도 우리들은 자신을 대하는 친구의 미묘한 변화를 종종 쉽게 눈치채곤 했다. 어쩌면 성인이 된 지금보다도 더 쉽게 그런 상황들을 눈치챘고, 그래서 더 걱정하곤 했다.
한편, 방학이 끝나고 더 이상 자신과 놀지 않는 지아에게 선은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이후 소풍날, 선은 혼자 있는 지아에게 다가가 엄마가 싸 주신 김밥을 함께 먹자고 한다. 김밥을 먹는 지아를 보며 선은 조금은 안심한다. 자신과 함께 놀지 않던 지아가 자신이 건넨 김밥을 먹는 모습을 본 지아는 약간의 희망도 얻었을 것이다. 우리가 다시 예전처럼 함께 여기저기 놀러가며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희망. 그 시절의 예민했던 우리들은 이런 사소한 친구의 변화에 또 금세 행복해지곤 했다. 하지만 선의 의도와는 다르게 날선 말이 오가고, 결국 흥분한 지아는 선에게 ‘그러니까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그리고 동시에 선이 가져온 김밥은 바닥에 떨어진다. 흙으로 더럽혀진 김밥처럼 친구관계를 다시 회복하고 싶었던 선의 마음도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럼 언제 놀아?"
선의 동생 ‘윤(강민준)’은 친구 윤호와 놀다가 자주 맞곤 했다. 선은 이런 동생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너에게 상처를 주고 장난도 심하게 하는 친구랑 왜 계속 같이 노는 것이냐고 질문한다. 선은 동생에게 ‘윤호가 너를 때린만큼 너도 똑같이 때려야 바보가 아니다’라는 말을 한다. 이를 들은 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럼 언제 놀아?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또 연호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이 상황이 선의 상황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선은 지아에게서 모진 말도 들었고, 지아에 대한 사실을 반 친구들 앞에서 말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지아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했고, 친구라고 생각한 지아가 자신의 곁을 떠나 다시 홀로 지내기도 했지만 여전히 지아를 신경 쓰고 있다. 지아가 자꾸 눈에 밟히고, 지아에 대한 말들이 함부로 오고 가는 것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지아는 자신의 친구이기에. 내가 좋아하는, 그리고 함께 많은 추억을 쌓은 나의 친구이니까. 지아와 계속 갈등하던 선은 그냥 친구와 놀고 싶다는 동생의 말을 들은 뒤, 피구 경기에서 곤란한 상황에 처한 지아를 도와준다.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이다.
봉숭아물과 매니큐어
여름방학 중에 선은 지아에게 봉숭아물을 들여준다. 봉숭아를 빻아서 손톱에 하나하나 올리고, 비닐로 묶은 뒤 물드는 동안 기다리면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진하게 물든 손톱의 봉숭아물처럼 둘의 관계도 오래오래 지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방학이 끝난 뒤 보라와 친해진 지아는 그 손톱 위에 보라의 매니큐어를 칠한다. 그렇게 선과의 추억이 담긴 봉숭아물은 매니큐어로 인해 가려졌다. 여름방학 동안 보냈던 선과의 추억들도, ‘선’이라는 소중한 친구도 잠시 잊혀졌다.
이후 학원에서 울고 있는 보라에게 손수건을 건넨 선은 보라의 매니큐어를 받게 된다. 선의 손톱에 남아 있던 봉숭아물도 보라의 매니큐어로 인해 가려졌다. 선도 지아가 미웠다. 친구인 자신과 함께 어울리지 않으려는 지아가 미웠다.
그리고 영화의 끝부분, 피구 경기를 하며 난감한 상황에 처한 지아를 도와준 선의 손톱에는 어느덧 매니큐어가 모두 없어지고, 끝에 봉숭아물만 조금 남아 있다. 손톱 끝에 아주 조그맣게 남겨진 봉숭아물처럼 선과 지아의 관계는 거의 끝에 다다른 상태였다. 누군가의 선택으로 인해 이 관계가 회복될 수도, 혹은 영영 틀어질 수도 있는 상태였다. 이때, 선이 지아를 도움으로써 먼저 용기를 내서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지아가 이 용기에 화답해줄 차례다. 선이 먼저 지아의 손톱에 예쁜 빛깔을 선물해준 것처럼, 지아가 선의 손톱을 예쁘게 물들여주면 된다. 서로에게 남긴 상처를 또다른 소중한 추억으로 그렇게 뒤덮으면 된다.
우리들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에서 선의 눈빛은 마구 요동치고 있다. 친구들의 눈치를 살피고, 어정쩡하게 웃어보이고, 혹시 자신에게 화난 게 있는 거냐며 조심스레 물어보는 동안 계속 그 눈빛은 흔들리고 있다. 반면 방학 동안 지아를 바라보는 눈빛은 참 밝고 맑다. 오랜만에 생긴 자신의 친구가 그저 좋다. 지아의 눈빛은 보라를 만나기 전과 후가 확연히 대비된다. 방학 동안은 선을 다정하게 바라보지만, 보라와 어울리면서부터는 선을 쌀쌀맞게 바라보곤 한다. 보라의 눈빛은 항상 무언가를 꿰뚫어보는 것 같다. 동시에 가장 종잡을 수 없는 눈빛이다. 지아와 친해졌을 때는 마냥 다정하다가도 피구를 잘하는 지아를 바라볼 때와 자신을 제치고 1등을 했다는 지아를 바라볼 때는 또 한없이 날카롭다. 이 영화는 이렇게 배우들의 눈빛을 따라가다보면 그 감정선을 매우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처음에는 나는 ‘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마주한 지아와 보라의 몇몇 모습들을 통해 나는 선이었고, 지아였고, 보라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어른들의 세계보다 더 예민하고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때로는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워했고, 때로는 새로 사귄 친구가 더 좋다는 이유로 불과 어제까지 친하게 지내던 다른 친구와 거리를 두기도 했고, 때로는 살아남기 위해 영악해지기도 했다. 영화를 보며 이런 과거의 내가 계속 생각났고, 잠시는 잊고 지내던 선과 지아, 보라의 모습을 띈 몇몇 친구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은 부끄러워졌고, 슬퍼졌다.
선과 지아, 보라를 마냥 질책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의 말과 행동에서 나, 그리고 ‘우리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랬다. 그때는 그게 우리들의 모든 세상이었다. 녹록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서툰 우리들의 최선의 선택이었다. 누군가는 선이었고, 누군가는 지아였고, 또 누군가는 선과 지아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나처럼 선과 지아, 보라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들’은 선이었고, 지아였고, 보라였다. 이 영화는 서툴지만 절실했던 ‘우리들’의 이야기를 건네는 작품이다. 그리고 선, 지아, 보라의 이야기를 먼저 건넴으로써 자연스레 관객들이 어린 시절의 자신들을 기억해내고, 잠시 넣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왈칵 눈물을 쏟을 뻔했다. 그리고 영화가 러닝타임 내내 나의 마음 한 구석에 항상 남아있던 어릴 적 기억을 계속 쿡쿡 쑤셨고, 자칫 방심하면 그 기억을 금방이라도 끄집어낼 것 같아서, 그럼 바로 눈물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뒤 ‘우리들’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다시 마주했을 때 한꺼번에 몰아치는 감정은 주체할 수 없었다. 온 마음을 다 주고, 그로 인해 상처받아도 다시 또 내 마음을 주곤 했던 어린 시절의 나와 너, 우리들이 생각났다. 이 영화를 보고 서툴고 간절했던 그 시간들을 보낸, 어쩌면 힘겹게 버텨냈던 우리들에게 그저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조금은 아픈 기억들이 떠오른 이들은 꼭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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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이 아닌 곳으로
영화가 우리에게 전하는 건 서사일까. 물론 이야기의 기승전결 뼈대는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서사를 통해서도 감정을 실어나르는 쪽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사뿐 아니라 미술, 음악, 카메라 등 모든 요소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협업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서사 없는 영화는 있어도 감정 없는 영화는 없다고도 느낀다. <아네트>도 그렇다. 서사는 자못 단순하지만 그 안의 감정은 깊다.
감독 본인이 초반에 등장해 이제 시작하자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사람은 딸이다.), 배우들이 차례차례 등장하는 영화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가 현실이 아니라 극임을 똑똑히 못박는다. 이제 이 선을 넘어 현실이 아닌 곳으로 들어가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잠시 현실에서 눈을 돌려 몰입할 이 세계는 나에게 어떤 감정을 안길 것인가.
기대하는 관객 앞에, 이 영화를 함께 제작한 밴드 스팍스에 이어 배우들이 노래하며 차례차례 등장한다. 아담 드라이버와 마리옹 꼬띠야르, 사이먼 헬버그까지 나란히 서서 노래할 때, "So may we start? 이제 시작할까요?" 하고 물을 때, <라라랜드>의 오프닝 시퀀스 생각도 나고 뮤지컬 시작할 때 같은 기분도 든다.
영화는 앤(마리옹 꼬띠야르)과 헨리(아담 드라이버)의 사랑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두 사람 다 무대에 오르는 직업이지만 양상은 많이 다르다. 오페라 가수인 앤은 드레스를 입고 무대보다 더 높은 무대로 올라가 장렬한 죽음을 맞는 반면, 스탠딩 코미디언인 헨리는 속옷 하나에 복서들처럼 로브 차림으로 직접 문을 열고 나와 마이크 줄을 채찍처럼 휘두른다. 어딜 가든 사과를 깨물고 있는 앤, 담배와 바나나를 들고 몸을 푸는 헨리. 관객을 죽여주는 헨리와 관객을 위해 죽어줌으로써 그들을 구원하는 앤. 두 사람이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둘을 보는 시선까지도 모두 다르다.
두 사람의 노래는 "We love each other so much 우리는 서로를 정말 사랑해"라는 가사를 반복한다. 둘을 둘러싼 세간의 시선을 잘 알고 있고,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서로에게 푹 빠져있지만, 그 한 마디만 반복하는 사랑은 어쩐지 불안하다. 숲을 지나, 세상과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둘은 이내 결혼식을 올린다. 각자의 예술, 함께 부르는 노래, 중간중간 삽입된 기자들의 대사나 뉴스 보도를 통해, 사랑의 서사는 단순하게 쌓인다.
송스루 뮤지컬이란 참 특이한 장르다. 모든 대사가 노래로 표현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영화에서라면 인물의 표정과 입 모양으로 단박에 구분될 대사와 독백, 방백이 따로 없이 모두 노래로 흘러나온다. 그러다 보니 기묘하게 현실에서 들뜬 느낌, 현실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게다가 레오 카락스 감독 특유의 독특한 스타일은 한층 더 새로운 감각들을 이끌어낸다.
무대에 오르는 일을 업으로 삼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고, 한 사람은 승승장구를 한 사람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감정의 골이 쌓이고... 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단순한 이야기에 스타일을 부여하면서, 기묘하게 현실에서 반쯤 떠오른 느낌을 준다. 인물들이 입는 원색 옷과 계속 등장하는 소품의 색깔조차 꾸며진 세계의 느낌을 더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아빠의 농담과 엄마의 웃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아네트는 작은 목각인형으로 표현된다. 불쾌한 골짜기에 걸친, 그러니까 애매하게 사람을 닮다 말아서 더 기묘한 기분이 드는 모양새다. 이런 불쾌한 골짜기에 놓인 물체들은 어쩐지 자꾸 눈을 의심하면서 계속 바라보게 만든다. 징그러워 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그것을 계속 바라본다. 왜일까. 내가 바라보게 되는 건 어떤 지점일까.
아마도 죽음과 가까운 어딘가. 이 영화는 그곳을 심연(abyss)으로 부른다. 엔딩 크레디트의 스페셜 땡스투에 에드거 앨런 포가 있어 의아했는데,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토대로 쓴 곡이 있다고 감독이 밝힌다. "바다 위의 절벽에 매달린 상태로 바다를 쳐다보면 떨어져서 죽을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계속 쳐다본다. 멈출 수가 없는 거다. 그게 바로 심연에 대한 마음이다. 죽고자 하는 마음과 같은 것." (GQ코리아 인터뷰 <레오 카락스의 선명한 세계> 중에서)
극중 인물들은 모두 죽을 걸 알고도 뛰어드는 사람들처럼 존재한다. 생사를 의식하지 않는 인물들의 생사. 생에 아득바득하지 않는, 오히려 그 심연을 바라보는 인물들. 어쩌면 그 점이 이 영화의 모든 인물들을 무대 위 존재로 보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넓게 보면 아네트뿐 아니라 모두가 목각인형처럼 움직이고 있다. 인물들은 마지막 장면에서야 내게 사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였을까. 엔딩 장면을 보는 내내 이유 모를 눈물이 줄줄 났다.
인간은 왜 심연을 바라보게 되는가. 아니 심연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무엇을 응시하고 있었는가. 무엇에서 눈을 떼고 심연으로 시선이 이동하게 되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헨리의 삶으로 영화는 대답한다. 감독이 자랑스럽게 또 사랑스럽게 언급하는 그 딸의 존재를 비롯하여, 헨리에게서는 레오 카락스 감독의 냄새가 난다. 감독의 개인사는 물론 감독이 스스로에게 갖는 감정들이 반영된 캐릭터로 보인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만들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하는,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는 엔딩 장면은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말이 들어있다. 심연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은 다시 말하자면 심연을 바라보기 전까지 응시하던 것들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뜻으로 치환해도 괜찮지 않을까. 사랑과 예술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던, 고된 것 같아도 자부심으로 빛나던 얼굴을 잃지 않고 삶에 발 디딘 채 살라는 말로.
극중에 들어갔다 나왔는데, 그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불쾌한 골짜기 너머 심연의 존재를 인식하며, 화려하고 그로테스크한 것들이 온통 엉켜 있는 영화 바깥으로 나온다. 아주 어쩌면, 영화 산업의 빛과 어둠을 하나로 뭉치면 이 영화와 같은 색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본다.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갔다 나오는 기분을 이토록 선명하게 느끼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막이 오르면 세상은 무대가 되고, 막이 내리면 우리는 영화 바깥으로 다시 정중하게 퇴장을 요구받는다. 엔딩 크레디트 다음에 나오는, 인물들이 등을 들고 걸어가면서 부르는 노래는 "좋았다면 친구에게 이야기하세요. 친구가 없다면 모르는 사람한테라도 이야기하세요."라는 가사가 귀엽기까지 하다. 순순히 시키는 대로 안녕히 돌아오면서, 등 뒤로 막이 내리고 문이 닫힌 것 같은 착각마저 느낀다. 심연 대신 삶을 응시하며 걸어간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하고 작성한 글입니다.
*GQ코리아의 레오 카락스 인터뷰 <레오 카락스의 선명한 세계>를 참고하고 인용하였습니다.
https://www.gqkorea.co.kr/2021/10/19/%EB%A0%88%EC%98%A4-%EC%B9%B4%EB%9D%BD%EC%8A%A4%EC%9D%98-%EC%84%A0%EB%AA%85%ED%95%9C-%EC%84%B8%EA%B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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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상선언, 좋았는데 아쉬운 영화
?Rabbitgumi 입니다!
기대를 많이 모았던 작품이죠.
비상선언이 개봉했습니다.
관상, 더 킹, 연애의 목적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의 신작이죠.
배우진도 화려합니다.
송강호, 전도연, 이병헌, 김남길, 임시완 같은 탑 배우들이 출연합니다.
개봉 후 첫 주의 반응은 호불호가 갈리는데요.
이 영화가 어땠을지 좀더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
자세한 리뷰는 영상을 참고해주세요! :)
그리고 제가 매주 일요일마다 영화에세이를 전달 드리는 Rabbitgumi 영화 이야기 뉴스레터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고 많은 구독 부탁드립니다!
뉴스레터 구독하기는 아래 링크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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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는 아래 링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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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우리가 끝이야> 메인 예고편
전 세계가 주목한 용기 있는 선택 로튼토마토 팝콘지수 92%🍅 북미 박스오피스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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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애덤 프로젝트> 공식 티저 예고편
과거, 미래를 만나다. 《애덤 프로젝트》를 시청하세요. 넷플릭스에서 곧 공개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