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라마 2021-11-07 21:28:25
정신을 잃고 깨어나보니 나도 모르는 남편과 아들이 생겼다?
지금만나러갑니다 리뷰
스포주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
-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2018년에 개봉한 영화이다. 중학생 때 학원에서 칭찬스티커를 많이 받아서 학원 선생님께서 영화관에 데려가 보여주신 영화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제목부터 뭔가 풋풋하고 아련한 느낌이 난다 소지섭과 손예진 두 배우가 부부로 나오는 이 영화는 아역배우 지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아역배우임에도, 비중이 많았음에도 딱히 어색한 부분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지오가 커서 데이트를 하러가는 장면에 평소에 좋아하는 배우 박서준이 등장해 깜짝 놀랐다
- 이 영화는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써 감성도 일본 감성이 녹여져있다 필터도 색감도 첫사랑 재질이 느낌이 난달까,, 오글거리고 그러진 않는다 풋풋하고 보면 살짝 미소 짓게하는 그런 영화이다 기쁜것만은 아니다 마지막은 정말 뭉클하고 슬프다
- 과거 이야기 :;; 남자주인공 우진은 운동, 수영을 잘하는 고등학생이였다 그러다 여자주인공 수아를 보고 반하게 된다 그렇게 수아를 계속 따라다니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 노력했지만 철벽녀 수아를 꼬시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체육시간 수아에게 큰 실수를 하게 됬고 그 이후로는 말 한마디조차도 못 썪게 되었다 우진은 체육특기자 전형으로 가게되고 수아는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우진은 수아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고 둘은 다시 만나게 됬다 하지만 몸이 안좋아진 우진은 수영을 못할 정도로 몸이 안좋아지고 수영을 그만두게된다 그리고 수아 그만 만나자 말하게 된다 하지만 수아를 못 잊게 된 우진은 서울로 올라갔지만 수아는 이미 다른 남자가 생긴 이후였다 그리고 이 이후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고 결국 수아는 우진을 찾아왔다 우진과 수아는 그렇게 둘이 아들을 낳고 살아간다 하지만 수아는 일찍 죽게되고 우진과 그의 아들 지오는 둘이 살게 되었다
- 현재이야기 :;; 지오와 우진은 둘이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수아는 없었지만 항상 아침마다 우진은 수아의 사진에 뽀뽀도 하였다 그러다 터널에서 일년전 죽은 수아를 기적처럼 만나게 된다 수아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고 이 상황을 굉장히 어색해했다 하지만 점차 적응하게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수아는 언젠간 떠나야했다
결말이 정말 슬펐다 마지막이 정말 슬픈영화이다 꼭 봤으면 좋겠다
에딕터 파노라마 여서진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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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드라마를 보고서야 루이14세를 이해했다, 드라마 <베르사유>
- 베르사유 (Versailles, 2015-2018) 시즌3 완결
제작 : 프랑스·캐나다, 역사·드라마 │ 연출 : 다니엘 로비, 크리스토프 슈르베, 자릴 라스페르, 또마 벵상
극본 : 사이먼 미렌, 데이비드 울스텐크로프트 │ 출연 : 조지 블래그덴(루이14세), 알렉산더 블라호스(필리프 공작),
안나 브루스터(몽테스팡 부인) 외 다수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인물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다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을 맞아,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나폴레옹에 대해 재해석한 발언이 화제였다. 오랜 시간 프랑스의 영웅으로 치하되어왔던 나폴레옹의 화려한 공적들 뒤로는, 전쟁 중독과 더불어 인종차별 및 여성차별이라는 단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 가치관은 변하기 마련이고, 따라서 과거에 평가된 인물들도 모두 현대의 관점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빛나는 태양왕으로만 익히 배워왔던 ‘루이 14세’를 보다 입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그려낸 드라마 한 편을 보게 됐다. 바로 프랑스와 캐나다가 합작하여 만든 드라마 <베르사유>다. 딱딱한 교과서로 루이 14세를 접했던 나는, 그간 루이 14세에 대해서라곤 “짐이 곧 국가다”라는 말을 남긴 절대군주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드라마 <베르사유> 역시 그가 군주로서 황금기를 걷던 시절을 조명하긴 하지만, 3편의 시즌으로 이루어진 긴 이야기 속에는 ‘인간’ 루이의 삶이 녹아있다. 군주로서의 위엄과 공존했던 오만과 허영, 그리고 여러 업적 아래 가려진 불안과 고독에 대해서 말이다. 새벽 두 시까지 눈을 붙이지 못하며 단숨에 이 드라마를 정주행 할 수 있었던 건, 그런 관음적 즐거움을 이 드라마가 가득 담고 있었기 때문인 듯 싶다.
루이는 왜 변덕스럽고 외로웠을까
드라마에 비친 루이의 모습 중 한 면은 아주 화려하고 권세가 드높았다.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 면은, 아무도 믿지 못하고 급기야 몽유병과 불면증에 시달리기까지 하는 나약한 루이를 보여준다. 실제로 베르사유 내에서는 연쇄독살사건이 일어난 적 있으며, 루이를 암살하려다 발각된 외부세력들도 몇 차례나 있었다. 그로 인한 루이의 정신적 두려움이 드라마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그 두려움을 가리는 방어적인 오만과 함께. 어쩌면 그가 건설한 절대왕정의 틀, 베르사유라는 위대한 건축물은 모두 자신이 언제 소멸할지 모른다는 공포로부터 기인했던 걸까.
루이 14세는, 선왕인 루이 13세가 결혼 23년 만에 낳은 후계자였다. 오랜 기간 아이가 생기지 않았던 선왕과 왕비를 두고 불임이라는 설도 돌았었고, 뒤늦게 태어난 루이 14세와 필리프 공작(루이의 남동생)을 두고서도 왕비가 불륜을 저질러 낳았다는 루머가 돌았었다고 한다. ─ 실제로 이 논란을 두고 시즌3에서는, 선왕이 다른 남자와 왕비를 관계하게 하여 루이 14세를 낳았다는 픽션이 가미되는데, 역사적 진실은 그 누구도 지금껏 모른다.
어쨌거나 출생부터 이야기가 많았던 루이 14세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여러 세력들 속에 성장해야 했다. 성인이 되어 궁전을 파리에서 파리 외곽인 베르사유로 옮기는 과정에서도, 귀족들의 끊임없는 불만과 대신들의 반대를 떠안아야 했다. 그러나 상처가 많은 조개일수록 더 맑고 단단한 진주가 피어난다고 했던가. 출생부터 집권 기간 내내 불안과 고독을 경험했던 루이 14세는 업적과 위세에 집착하며 살아간 결과, 결국 우리가 아는 ‘태양왕’으로 기록되며 프랑스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다.
루이 14세에게 영향을 끼친 여인들
루이의 양면을 보여준다는 것 말고도, 드라마 <베르사유>의 또 다른 재미를 꼽자면 그건 바로 그를 둘러싼 여인들일 것이다. 실제로 왕비 ‘마리 테레즈’ 말고도 여러 명의 애첩을 두었던 루이는, 옆에 어떤 정부를 두느냐에 따라 성격이 변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시즌1에서는 남동생 필리프 공작의 아내인 ‘헨리에타’와의 불륜을, 시즌2에서는 빼어난 미모로 루이를 쥐락펴락했던 ‘몽테스팡 후작부인’을, 시즌3에서는 철저한 종교적 신념으로 루이에게 내적인 안정을 안겨준 ‘맹트농 부인’을 다룬다. 세 여인의 성격이 모두 다르고, 그로 인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루이를 보는 것은 때로는 마음 아프고 때로는 분노가 치미는 일이었다.
누구도 믿지 못했던 국왕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던 루이의 갈망이었던 걸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비를 제외하고는 루이의 정부들은 모두 루이에게 역사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헨리에타는 요절했으며, 몽테스팡 부인은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어린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흑마법에 가담했고, 맹트농 부인은 훗날 루이가 개신교를 박해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드라마지만 영어 대사를 쓰는 드라마
영국 발음으로 대사를 하는 배우들을 보고, 당연히 처음엔 영국 드라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방영한 나라는 채널 ‘CANAL+’의 프랑스다. 실제로 루이 14세와 베르사유라는 소재가 프랑스의 것이니, 프랑스에서는 왜 자국의 역사를 영어로 제작해 다시 프랑스어로 더빙하냐는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처음엔 프랑스 궁정을 배경으로 영어를 쓰는 것이 적응이 안되기도 하지만, 점점 그 이질감보다는 배우의 연기력과 쫄깃하고 섬세한 연출력에 빠져들게 되는 건 이 드라마가 그만큼 잘 만들어졌다는 증거일 테다. 자부심 높은 프랑스 국민들에겐 조금 상처가 되었을지 모르나, 캐나다와의 합작으로 영미권까지 흡수한 덕에 이 드라마가 오늘날의 인기를 얻을 수 있었으니 꼭 화낼 일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역사드라마가 계속되어야 할 이유
십 년 전쯤, 오랜 시간 프랑스의 마녀로 오해되어온 ‘마리 앙투아네트’를 재해석했던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힘 있는 자에 의해 기록된 수많은 역사들이 인물을 평면적으로 묘사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녀였고, 콜럼버스는 위대한 개척자였고, 명성황후는 일본 자객에 의해 시해당했다는 이유로 선하고 가련한 왕비로 오랜 시간 각인되어왔다. 하지만 사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매우 자애로운 성격이었고, 콜럼버스는 개척이 아니라 원주민 땅을 침범한 것이며, 명성황후는 살아생전 국고를 탕진한 매우 지독한 왕비였다는 것이 현대에 이르러 조명되고 있다. 역사 속에 딱딱하게 자리 잡은 이러한 인물들을 다각도로 탐구하고 재해석할 수 있는 것은 현대인들의 즐거움이자 사명일 것이다.
자기가 세상 잘 난 줄 알았고, 실제로도 잘났던 루이 14세에게도 말 못 할 허물은 많았다. 국민들의 배고픔을 이해하지 못했고, 개신교를 박해했으며, 충직한 대신들의 진심 어린 충고를 외면하며 무리한 전쟁을 이어나갔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 독불장군이었으나, 그러면서도 하염없이 여인들의 입김에 녹아드는 한 남자였던, 인간 루이를 만나보는 기쁨 그리고 고통이 모두 <베르사유>에 담겨있다. 3편의 시즌 속에서 루이를 만나는 동안, 많은 이들이 그의 단면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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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린 너머 세계 속으로...스웨덴] 영화의 페르소나를 벗겨내는 영화, <페르소나>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는 필름이나 영사기 등의 장치들을 보여주거나, 오프닝 시퀀스에서 제작자의 이름이 적힌 흰 바탕의 화면과 인물의 얼굴, 사물의 클로즈업을 교차해 배치함으로써 관객이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영화’이며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에게 일깨워 준다. 대사 없이 소년을 따라 이어지는 영화의 다음 장면을 기대하며 집중하고 있던 관객은 인물과 사물 사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필름 인서트에, 영사기가 돌아가는 모습에 다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이것이 필름에 기록되어 영사기를 통해 상영되고 있는 영화임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때로 어두운 영화관 속에서 스크린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들이 마치 실제 현실인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영화를 보는 동안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인물 혹은 카메라의 시선에 동일시 되어 디제시스에 몰입하게 되는데, 비록 소문일 뿐이라고 알려졌지만,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처음으로 다수의 관객 앞에서 상영되었을 당시 관객이 실제로 자신에게 기차가 달려오는 줄 알고 놀라서 뛰쳐나갔다는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 효과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영화는 이처럼 때로는 허구의 세계를 현실처럼 보여주어 관객에게 실제와 같은 인상과 감각을 제공하는 페르소나를 갖는다.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는 이러한 영화가 가진 페르소나를 벗겨주는 영화이며, 그것을 통해 관객이 인물에게 몰입하고, 동일시된다기보다, 엘리자베스와 알마 두 여성이 점점 겹쳐지는 과정과 그 이면을 제대로 관찰하게 해준다.
흐릿한 여자의 초상화를 쓰다듬는 남자아이가 등장하고 엘리자베스 보글러와 알마라는 두 인물이 등장하며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되는데, 이때 알마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부분은 마치 관객인 우리가 문을 열고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영화 속 세상으로 들어간 듯한 인상을 준다. 알마를 지켜보는 시선에 몰입하려던 찰나, 그녀의 앞에 있던 카메라는 그녀의 뒤통수와 옆모습을 단절된 컷으로 비추는데, 이로써 그녀는 보이는 대상이 되고 관객은 극 중 인물에게 동일시되기보다는 그녀를 바라보는 관찰자로서의 위치를 가진다. <페르소나>에서는 인물의 클로즈업과 시점 쇼트가 빈번히 활용되는데, 덕분에 관객은 두 인물이 가지고 있는 서로에 관한 생각에 공감할 수 있으며 함께 가까워지고, 때로는 인물과 대화하고 있는 듯한 인상도 받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후반부, 서로의 내면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죄의식을 떠올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혼동하며 동일화되어 가는 두 사람의 클로즈업 샷이 점점 섞여가다가 마침내 반반으로 합쳐져 한 사람의 얼굴이 된 결정적인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하나의 얼굴은 일시적으로 사진처럼 정지한다. 이는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의 후반부에서 등장했던 인물들의 단체 사진과도 유사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데, 두 사람의 클로즈업으로 만들어진 정지된 얼굴은, 인물로부터 한 발짝 떨어져 그 누구의 시선도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응시하게 만들며, 관객에게 하나의 얼굴로 합쳐져 이제 누가 누구인지 제대로 분간하기도 어려워진 상태에서 두 인물에 대해 사유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영화가 진행되어 오는 동안 몰입하고 동일시해왔던 인물들로부터 일시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며, 스크린의 경계를 넘어 현실적인 인상을 주는 영화의 페르소나를 벗기고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두 여인의 서사가 마무리되고 오프닝에 등장했던 소년이 다시 등장하는데, 소년이 쓰다듬던 초상화 속 여인이 엘리자베스라는 것이 드러나고, 이를 통해 그 소년은 엘리자베스의 아들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스크린을 통해 엘리자베스와 알마의 이야기를 보고 있었던 것처럼 그 또한 역시 2차원의 화면을 통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로써 우리가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는 행위를 뚜렷하게 자각하게 된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부분, 초상화의 정체와 소년이 드러남과 더불어 촬영 현장에 놓여있는 듯한 촬영용 카메라들과 앞서 보았던 영사기, 그리고 끝이 거의 보이는 다 풀려가는 필름이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재차 인식하게 함과 동시에 영화가 끝을 맺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 <페르소나>는 엘리자베스와 알마라는 두 여인을 통해 인간의 깊은 심연과 이면, 죄의식 그리고 다양한 모습으로서의 삶을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가 가진 페르소나를 드러내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착각을 인지하게 해주며 관객이 인물들에 동일시되지 않고 인물 간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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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파트 공화국에 던져 잔인할 정도로 짓궂은 질문
7★/10★
사상 초유의 대지진이 일어나 서울의 모든 건물이 무너졌고, 딱 하나의 건물만 살아남았다. 바로 황궁 아파트. 생존자들이 하나둘씩 황궁 아파트로 모여든다. 누군가는 그들을 자기 집에 들이고, 누군가는 자꾸만 몰려오는 사람들을 보며 불안을 느낀다. 아노미 상태가 이어지자 주민회의가 열린다. 몸을 던져 아파트 단지 내 화재를 막은 영탁이 대표로 선출되고 아파트는 빠르게 질서를 확립해나간다. 영탁의 지침은 간단하다. ‘아파트는 주민의 것.’ 영탁은 기존의 모든 위계와 도덕, 질서가 무용해진 환경을 ‘주민 vs 외부인’의 단순하면서도 ‘합리적인’ 구도로 빠르게 정리한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기존 재난 영화와 다른 길을 간다. 보통의 재난 영화는 재난 장면의 스펙터클을 향해 서서히 나아간다. 우리는 주인공들이 재난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가던 사람들과 재난의 징조가 교차하는 장면이 포함된 영화를 여럿 떠올릴 수 있다. 이들 영화에서 거대한 재난은 영화의 중후반부, 즉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미 재난이 일어난 후에 시작된다. 이유가 있다. 대지진보다 그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한 기존 생활방식이 대지진보다 더 큰 재난이 아니냐고 묻기 때문이다.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수많은 사람이 아파트에 살길 희망한다. 그리고 개별 아파트는 거주민의 품격을 대변한다고 여겨진다.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바로 옆의 드림 팰리스 주민들에게 종종 무시당했다. 드림 팰리스 주민들은 황궁 아파트 주민이 자기네 단지 내부로 오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고, 그 근거로 종종 집값을 들먹였다. 아파트의 ‘격’이 다르다는 것이다. 즉, 드림 팰리스 주민들은 더 비싼 아파트에 사는 자신들이 황궁 아파트 주민보다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난은 드림 팰리스와 황궁 아파트의 지위를 뒤바꿨다. 떵떵거리던 드림 팰리스 주민들은 황궁 아파트 주민들에게 제발 자신들을 받아달라고 읍소한다. 그러나 황궁 아파트 주민들은 시큰둥하다. 지금껏 그들이 받아온 모욕을 생각한다면 마냥 비난할 수만은 없다. 이들은 그저 재난 이전에 자신들이 받은 것을 그대로 돌려줬을 뿐이니까.
물론 위계를 나누는 선은 두 아파트 사이에만 있지 않다. 자가, 전세, 월세, 대출 여부 등의 기준은 황궁 아파트 내부에서도 위계를 만든다. 그러나 대지진 후 황궁 아파트 주민회의 참가자들은 ‘너그럽게’ 모든 형태의 거주자를 주민으로 인정해준다. 그러나 여기까지. 그들의 온정은 더 넓게 확장되지 않는다. 재난 이후 아파트라는 특권은 오직 황궁 아파트 주민에게만 허락된다.
덥수룩한 머리에 별다른 존재감도 없던 영탁은 이 모든 과정을 능숙하게 처리해 재난 이전이라면 그가 결코 갖지 못했을 명예를 얻는다. 완장을 찬 영탁은 그 누구보다도 주민을 지키는 데 열심이다. 그는 드림 팰리스 주민들이 그러했듯 외부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장벽을 쌓고 경계를 강화한다. 기꺼이 위험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바깥으로 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주민이 아니면서도 몰래 아파트에 숨어들고, 위험 끝에 얻은 과실을 무상 취식하는 자들이 있다. 영탁과 그를 따르는 대다수의 주민들은 그들을 ‘바퀴벌레’라고 부른다. 혐오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존재들은 색출, 퇴출되어야 한다. 황궁 아파트 주민이라도 바퀴벌레를 돕는 자들은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황궁 아파트 주민들의 바퀴벌레 색출은 나치의 유대인 색출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는 나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이미 끝났고, 인류가 다시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너무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영탁/주민/바퀴벌레에게서 히틀러/나치/유대인(쥐)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히틀러와 나치도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국가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영탁과 주민들이 생존을 위해 아파트를 사수하려 했듯이 말이다. 국가주의적 욕망이 아파트를 매개한 자본주의적 생존 욕망으로 변화한 것 말고는 둘 사이에 별다른 차이는 없다. 한국 현대사의 ‘빨갱이’ 색출 메커니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시대와 맥락을 조금씩 바꾸면 황궁 아파트의 ‘바퀴벌레 색출’과 닮은 폭력의 역사적 사례는 무수히 많다.
때문에 문제는 영화를 보는 누구도 영탁과 황궁 아파트 주민들을 쉽게 손가락질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 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간주하는 시대의 욕망이 폭력의 정당성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배운 것이 없다. 혹은 외피를 바꿔 등장한 폭력의 체제에 손쉽게 속아 넘어갈 만큼 피상적으로만 역사를 배웠다고 할 수도 있겠다. 대지진보다 무서운 재난은 이미 집값과 아파트의 격을 따지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중이다. 단지 한 번에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대신 조금씩 우리를 좀먹으며 서서히 사회의 밑동을 갉아내는 중이라는 게 다를 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기존 재난 영화와 전개가 다르다는 점,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가 있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화다. ‘재미’에 관한 통상적 기준을 적용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콘크리트 유토피아〉에는 이병헌이 있다. 매번 다른 결의 독보적 연기를 선보이는 그는 이번에도 존경과 미움을 한몸에 받는 영탁이라는 인물을 탁월하게 연기해내며 서슬 퍼런 존재감을 뽐낸다. 그의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오금이 저리는 몇몇 장면이 이를 대변한다. 재난 영화의 문법 대신, 영탁이 변화와 그의 비밀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재미는 충분할 것이다. 평범한 공무원이었으나 서서히 영탁에게 물들어가는 민성과 영탁의 대척점에서 공동체를 대변하는 명화를 연기한 박서준, 박보영의 연기도 극의 몰입감을 더한다. 영탁의 든든한 조력자인 부녀회장을 연기한 김선영이 극에 선사하는 현실감도 몰입에 큰 역할을 한다.
장르의 관습을 비켜 간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 그리고 무엇보다 ‘너라면 다를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잔인할 정도로 짓궂은 영화의 질문.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잠깐이라도 멈춰 설 계기가 필요한 우리에게 도착한 시의적절한 재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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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에서 튀어나온 무색무취함의 끝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어릴 적 헤어진 형 새뮤얼 드레이크가 남겨준 추억과 반지를 간직한 채 바텐더 아르바이트를 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네이선 드레이크(톰 홀랜드)'. 어느 날, 그는 늘 그렇듯이 손재주를 발휘해 손님의 귀중품을 훔치던 사이 ‘설리’(마크 월버그)로부터 인생을 바꿀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잠적한 형의 소재를 찾고, 동시에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마젤란의 숨겨진 보물을 찾아내자는 것. 고민 끝에 제안을 받아들인 네이선은 설리와 함께 마젤란과 그의 선원들이 남긴 기록을 살피며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찾을 힌트들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막대한 보물을 노리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고, '몬카다(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위협과 추격 속에서 네이선과 설리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모험에 발을 내딛는다.
<언차티드>는 너티 독이 개발한 플레이스테이션용 액션 어드벤처 게임 시리즈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MCU의 스파이더맨인 톰 홀랜드와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마크 월버그가 각각 네이선 드레이크와 빅터 설리번 역을 맡았고, <좀비랜드> 시리즈와 <베놈> 1편을 연출한 루벤 플레셔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많은 게임 원작 영화처럼 <언차티드>는 기대보다 우려가 큰 작품이었다. 물론 화려한 배우와 감독의 면면과 본편만 4개고 외전도 2개나 출시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끈 원작의 존재는 기대를 키우는 요소였다. 그러나 게임을 원작으로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 중 성공적이라고 할만한 선례가 많지 않은 것, 신선함을 담보하지 못하는 액션 어드벤처 장르인 점은 그 기대를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예상대로 <언차티드>의 결과물은 본편에서 잔뜩 예고하는 속편이 왜 필요한 지조차 설득시키지 못하는 무색무취함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우선 <언차티드>는 유명 게임 시리즈를 기반으로 한다는 장점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영화는 원작 게임 시리즈의 스토리 라인이 시작되기 이전을 그려내는 일종의 프리퀄 같은 위치에 있다. 실제로 오프닝과 동시에 등장하는 비행기 화물 클라이밍 씬, 게임 음악을 변형한 메인 테마곡, 네이선의 형인 샘이 중요 인물로 등장한다는 등의 부분적인 유사점을 제외하면 철저히 오리지널 스토리로 진행된다. 그래서 영화는 네이선과 샘의 관계, 샘과 설리의 관계, 네이선의 반지와 같은 주요 소품 등에 대한 설정을 원작과 다르게 묘사한다. 문제는 과한 각색과 오리지널 설정의 삽입이 팬들의 비토를 이끌어내는 주된 원인이 되고, 이는 게임 원작 영화가 실패하는 결정적인 이유라는 사실이다. 자연히 <언차티드>는 굳이 게임의 이름을 달고 나올 정도의 영화였는지에 대한 의문을 자아낸다.
그렇다고 해서 <언차티드>가 오리지널 작품이라는 이점을 적절히 활용한 것도 아니다. 지나치게 안전한 길만 답습하기 때문이다. 당장 영화는 마젤란의 세계일주에 보물 찾기라는 상상력을 더하고 있는데, 이 상상력은 예측 가능한 선을 벗어나지 않는다. 마젤란이 여행 중 필리핀 막탄 섬에서 전투 중 사망했다는 점만 알아도 보물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러다 보니 마젤란의 보물이 숨겨진 장소가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는 의미의 제목인 '언차티드(uncharted)'는 물론, 보물을 쫓는 주인공들의 겪는 고생과 역경은 좀처럼 와닿지 않는다. 같은 문제는 영화의 쿠키 영상에서도 반복된다. 쿠키 영상은 나치의 숨겨진 보물을 언급하며 속편을 암시하는데, 나치가 찾거나 감춘 보물은 작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레드 노티스> 같은 작품에서도 곧장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진부한 소재다.
한편, 액션 어드벤처 영화로서도 <언차티드>는 다른 시리즈와 차별화되는 대목을 찾기 어렵다는 패착을 둔다. 일반적으로 <인디애나 존스>나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로 대표되는 액션 어드벤처 영화들은 다음의 스토리 진행을 공식처럼 따른다. 전설 혹은 역사 속 미스터리 속에 숨겨져 있던 보물이 실재함을 깨달은 주인공은 팀원과 의기투합하여 그 보물을 추적하지만 배신에 배신을 거듭한 끝에 실패를 맛본다. 그러나 그 역경까지도 극복하면서 그들은 서로를 향한 신뢰를 회복하고, 반드시 보물이 아니라 해도 그에 못지않은 마지막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한다. 이는 결국 어드벤처 영화가 무언가 변화를 주거나 자신만의 매력을 뽐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뜻이며, 그나마 화려한 볼거리를 뽐내거나 독특한 캐릭터를 구축하는 것이 시도할 수 있는 선택지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언차티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일단 잔뜩 힘을 준 듯 보이는 액션은 무미건조하다. 네이선과 설리가 보여주는 육탄전은 그 구성이 아주 재치 있거나 유머러스하지도 않고, 색다른 스타일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두 인물의 특성이나 성격을 설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지도 않는다. 그나마 클라이맥스 장면은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듯 보인다. 헬리콥터가 범선을 인양해 가는 가운데 범선의 구조를 역이용하거나 배에 딸린 대항해시대 당시 무기나 대포를 이용하는 액션은 분명 생동감을 불어넣기 충분한 장면이다. 다만 이조차도 분량이 얼마 없고 짧게 지나치기에 순간적인 서프라이즈로서의 기능은 할지 언정 그 이상의 임팩트를 남기지는 못한다.
이에 더해 <언차티드>는 두 주인공인 네이선과 설리에게 어떠한 매력도 부여하지 못했다. 인디아나 존스, 툼 레이더, 잭 스패로우처럼 계속 보고 싶게 만들고 대체될 수 없는 캐릭터를 구축하지 못한 것이다. 당장 네이선은 배우인 톰 홀랜드 혹은 그의 대표 캐릭터인 피터 파커로 보일 뿐이고, 설리 역시 그저 마크 월버그라는 배우로만 보인다. 두 캐릭터 모두 그저 기능적으로 소비되다 보니 그들이 주체적으로 사건을 이끌어간다기보다는 사건에 이끌려 간다는 인상이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작중 네이선과 설리의 파트너십 형성 과정 묘사가 단적인 예시다. 형의 영향을 받아 과거 탐험가들의 모험과 전설에 심취한 네이선은 모험에 나선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고, 보물을 찾는 것보다도 오래전 헤어진 형과의 재회에 더 기뻐하는 낭만파다. 반면에 설리에게는 그 어떤 낭만도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은 오로지 보물을 찾고 부자가 되려는 목표의 수단일 뿐이다. 가족의 죽음이나 죄책감마저도 그 욕망을 가로막지는 못한다. 영화는 이처럼 가치관이 극과 극으로 다른 두 인물이 일련의 소동을 겪으면서 점차 신뢰를 쌓아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언차티드>라는 제목은 설령 눈에 보이지 않아도 물질적 가치보다 더 뜻깊고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영화는 이 대목에 설득력을 불어넣지 못했다. 두 인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굳게 다문다. 대신 원래 이 둘은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것을 강조하고 주입시키려는 듯 유사한 대사와 갈등, 반복되는 장면을 거듭 보여준다. 이렇게 평면적이고 작위적인 설명과 묘사 때문에 둘이 마지막 순간 서로를 변화시키는 모습을 통해 메시지를 완성 지으려는 노림수는 너무나도 쉽게 간파된다. 결국 이들의 파트너십은 아무런 감흥도 깊이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귀결된다.
마지막으로 게임 원작 영화인 것이나 어드벤처 장르 영화임을 차치하더라도, 한 작품으로서의 완성도가 어설픈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언차티드>는 좀처럼 관객들을 긴장시키지 못한다. 보물찾기 힌트가 지하 터널이 아니라 패스트푸드 음식점 혹은 클럽에 숨기는 식으로 클리셰를 파괴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나, 완벽한 타이밍마다 등장하는 힌트와 조력자의 도움은 네이선의 여정을 너무나도 매끈하게 다듬어 준 나머지 오히려 몰입을 저해한다.
그럴듯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악역들의 드라마를 지나치게 얕고 빠르게 다루면서 그들을 손쉽게 소비하는 전개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강렬한 반전을 선사하거나 서스펜스를 끌어올리는 데 빌런 간의 갈등이나 배신이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최소한의 암시만 주어진 채 배신을 일삼다 보니 클라이맥스로 향할수록 영화에서는 허무함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지극히 무난한 킬링타임용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영화를 보고 나서 크게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어떠한 장점도 특색도 전혀 보여주지 못하는 작품이 뇌리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사실 <언차티드>는 제작 과정 중에 수차례에 걸쳐서 제작진과 감독이 교체되는 난항을 겪은 바 있다. 심지어 주연 배우인 톰 홀랜드마저 GQ 인터뷰에서 "아주 터프하고 자신의 내면을 잘 보이지 않고 심각한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는데(...) 내 근육이 제대로 나왔는지 등에 대해서만 신경 쓴 거 같았다."라고 회고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언차티드>의 무색무취한 결과물이 아주 놀랍지만은 않다.
P(Poor, 형편없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 트레져 헌터 듀오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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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킹메이커> 빛과 그림자로 빚는 정치의 본뜻
수 차례 국회의원에 출마했지만 낙선만 거듭하던 정치인 ‘김운범(설경구)’. 어느날 그 앞에 약방을 운영 중이던 선거 전략가 ‘서창대(이선균)’가 찾아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그의 뜻에 동참하고 싶다고 밝힌다. 고민 끝에 선거 캠프에 합류한 서창대는 객관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선거 전략을 펼치며 김운범에게 연이어 승리를 선사한다. 마침내 김운범을 강력한 경쟁자 '김영호(유재명)'까지 제치고 당을 대표하는 대통령 후보 자리에 올려놓는 데 성공한 서창대. 그러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동료이자 사제지간이라 할 수 있던 김운범과 서창대의 정치적 신념이 충돌하기 시작하고, 중앙정보부 '이 실장(조우진)'의 견제까지 더해지자 둘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변성현 감독의 신작 <킹메이커>는 1960-70년대 야당 국회의원 ‘김대중’ 전 대통령과 선거 전략가였던 ‘엄창록’의 이야기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제작된 작품이다. 엄창록은 공권 선거와 금권선거 반발해 당시 기준으로 획기적이고 전략적인 방식과 유권자 심리를 이용하는 선거 전략을 수립한 인물이다. 그는 상대편 후보 캠프 사람인 것처럼 꾸며 비호감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등의 교묘한 선거 전략을 실행에 옮겼고, 이러한 전략은 중앙정보부가 그를 눈여겨봤을 정도로 대단했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제목답게 엄창록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캐릭터인 서창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다. 이는 <킹메이커>가 단지 실제 사건을 영상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역사를 벗어나 새로운 영화로 태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승리의 수단을 취우선으로 고민하는 한 선거 기획자의 딜레마를 통해 정치의 본질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목적과 수단의 정당성이 수반된 승리만 의미가 있다고 믿는 ‘김운범’(설경구)'과 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서창대의 갈등을 중심축으로 삼는다. 이때 두 주인공의 충돌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두 접근법의 차이를 함축하는 듯 보인다. 거칠게 말해 운범은 민주주의 정치에 규범적으로, 창대는 실증적으로 접근한다. 운범은 고전적인 이상을 지닌다. 그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시민들이 선거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 사회 정의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반면에 창대는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가 정당, 후보가 공공선을 추구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정당과 후보는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데에, 시민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 몰두한다. 그에게 선거는 철저히 권력 투쟁이 게임의 장일뿐이고, 이데올로기는 정보가 부족한 유권자가 표를 선택할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지름길일 뿐이다.
두 주인공의 차이는 그들에게 국민이 어떤 의미인지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창대는 국민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그저 이익을 좇아 움직이는 존재이기에 자신과 같은 선거 기획자가 계획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그에게 운범은 국민이야말로 정의를 이루고 사회를 움직여 나갈 주역들이라고 일갈한다. 영화는 이와 같은 장면을 다채롭게 변주해 러닝타임을 두 주인공의 대담으로 채워 나간다. 표를 얻는 것이나 돈을 버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는 창대에게 운범은 그 둘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충고한다. 선거 전략에 있어서도 철저히 표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정책에 접근하는 창대와 달리, 운범은 국민들의 진심과 열망을 정책에 녹여내야 한다며 맞선다.
이때 <킹메이커>는 빛과 그림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연출을 통해 정치의 의미에 대해 한 단계 더 깊이 숙고한다. 일견 빛과 그림자를 대비시키는 연출은 김운범의 방식이 옳고, 서창대의 방식은 틀렸다고 답을 내리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창대의 방식이 이전까지의 통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의 정의와 이상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정치의 냉혹하고도 불편한 현실을 전면에 내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화는 서창대의 선거 운동을 철저히 그림자 속에 가두면서 다른 캐릭터들의 대사대로 그에게 협잡꾼의 이미지를 덧씌운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의 표현에는 다른 의미도 숨어있다. 실과 바늘처럼 빛과 그림자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이고, 또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더 짙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는 빛과 그림자가 대비된다는 이미지와 빛과 그림자는 함께 한다는 심상을 모두 영리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서창대와 김운범의 신념은 서로 상극이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바로 그렇기에 둘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 될 수밖에 없다. "정치란 때로는 짐승이 되는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의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일"이라는 유시민 작가의 표현대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려는 운범과 짐승이 되는 비천함을 견딜 줄 아는 창대는 함께할 때 비로소 정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김운범은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서창대를 멀리하지 못하며 선거 때만 되면 다시금 그를 불러올린다.
특히 이러한 빛과 그림자의 관계는 서창대라는 그림자와 중앙정보부의 이 실장이라는 그림자가 대비되는 장면 덕분에 더욱 돋보이기도 한다. 오로지 표를 획득하는 데에만 몰두하는 이들이지만, 둘은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창대는 승리를 통해 획득해야 할 김운범의 대의인 민주화라는 궁극적인 믿음과 낭만을 지니고 있지만, 이 실장에게는 승리 그 자체가 곧 목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같은 그림자이지만 둘은 빛이 있는 그림자와 어둠만이 가득한 그림자의 차이를 보여준다. 이는 김운범과 서창대가 외적으로는 대비되는 빛과 그림자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동료 내지는 사제지간처럼 느껴지는 반면, 서창대와 이 실장은 같은 그림자인데도 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빛과 그림자의 모티브와 연출을 단지 정치적 신념과 논쟁의 영역뿐만 아니라 정서적 경험으로 전환시킨다. 그 중심에는 서창대의 인생사가 위치한다. 그림자라는 별명을 본인도 싫어한다는 점에서 그의 내면에는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마음속에서 빛이 우선인지 그림자가 우선인지에 따라 영화의 감정선에는 또 다른 축인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축이 더해지고, 선거 기획자의 내적 딜레마가 전면에 나타난다.
창대는 목포에서 운범을 만나 그의 그림자가 될 기회를 잡는다. 이때 그들이 독대하는 방은 어둠으로 가득 하나, 순간적으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가 다시 그림자와 어둠으로 가득해진다. 이때 그 빛은 두 가지 의미로 보인다. 우선 자신이 믿는 대의를 위해 싸우고 함께 하고 싶다는 순수함이 엿보인다. 그러나 그 빛이 순간적으로 있다 없어진다는 점에서는 보일 듯 말 듯 꽈리를 틀고 있는 욕망과 야심이 기회를 잡은 모습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서창대의 선거 전략 덕분에 빛이 강해질수록 순수한 대의는 공천에 대한 야심과 충돌하고, 초라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속에서는 원망과 좌절이 차오른다.
더 나아가 창대의 내적 갈등은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되어 전달된다. 김운범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어도 기념사진 속에 같이 서 있을 수 없는 아픔, 빛나는 김운범을 보면서 언제나 군중 속에 있어야 하는 씁쓸함, 혼자 있으면 빛나고 함께 있으면 기쁜 김운범과 달리 혼자 있으면 고독하고 함께 있으면 존재감 없어야 하는 그의 자격지심. 이 복합적인 감정들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설경구는 물론 김영삼 전 대통령으로부터 모티브를 얻은 김영호로 분한 유재명, 이실장 역을 맡은 조우진까지 배우들의 앙상블이 빛나는 가운데 이선균의 퍼포먼스는 유달리 돋보인다. 다른 캐릭터들이 러닝타임 내에 별다른 변화를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준비가 되었는지 거듭 고민하는 서창대의 감정선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것이다.
사실 <킹메이커>는 본래 작년 12월에 개봉하려 했으나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공개 일정이 미루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정치의 이상과 현실, 목적과 수단, 정치를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에 대해서 넓게 또 좁게 들여다보는 영화라는 점에서 <킹메이커>는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더욱 뜻깊은 작품으로 느껴질 것으로 보인다. 단지 영화가 시작부터 자막을 통해 실화로부터 모티브를 얻어 재창작한 작품임을 강조하는 만큼, 주요 연도나 배경이 되는 도시와 장소 등에 대해 조금 더 과감하게 상상력을 발휘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변성현 감독의 또 다른 대표작이 될 <킹메이커>는 이러한 일말의 아쉬움만 제외하면 흠잡을 틈이 보이지 않는 품격 있는 대담이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정치의 본질에 대한 빛과 그림자의 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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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린 나이트 시사회 영화 후기 - 목 베기 게임에 참전한 겁 많은 도전자의 목 베이기
아서 왕의 조카인 가웨인 경은 크리스마스 축제 때 아서왕의 궁전에 침입한 녹색 기사의 목 베기 게임에 출전한다. 딱히 위업적인 이야기가 없었던 가웨인 경은 녹색 기사의 목을 베는 대신 1년이 지난 후에 녹색 예배당에 가서 자신의 목을 내놓아야만 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도 있었고 마녀이자 엄마인 모건 르 페이도 있었다. 그렇지만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해 떠나는 여정이니만큼 가웨인 경은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곳으로 가야만 하고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것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원작으로는 시로 되어있지만 반지의 제왕으로 유명한 J.R.R. 톨킨이 이야기로 해석하여 지금의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고 한다. 과연 녹색 기사가 가웨인 경에게 주는 마지막 의미란 무엇이었을까?
녹색 기사를 만난 가웨인 경은
목 베기 게임에서 어떤 결심을 하게 될까?
가웨인 경은 녹색 기사의 목 베기 게임에 참전해 무엇을 얻게 되고 잃게 될까?
녹색 기사와 가웨인 경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것이고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
아서 왕의 조카인 가웨인 경은 영화 속에서 녹색 기사의 목 베기 게임에 참전한다. 겁이 나지만 위업적인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떤 가웨인 경은 녹색 기사의 위협적인 제안에 두려웠을 것이다. 겁도 많고 도전의식도 많은 가웨인 경에게 녹색 예배당으로 가는 긴 여정은 많은 고난이 시작된다. 먼저 도전과제가 주어지는게 많아진다. 첫번째 고난은 어린 양아치들에게 손발이 묶인 채로 가지고 있는 물픔들을 빼앗기고 자신의 힘으로 탈출하는 것이고 두번째 고난은 괴한에게 머리가 잘린 성 위니프레드의 해골을 호숫가 깊은 곳에서 찾는 것을 보답으로 잃어버린 물품 중인 도끼(녹색 기사가 목 베기 게임에서 놓고 간 것)를 찾는다. 세번째 고난은 푹풍우를 피해 동굴에 숨어 지내었을 때 우여를 쫒아내지 않고
들여보내 여정의 동반자가 된 것이다.
가웨인 경에게 내려진 고난과 시련은 어떻게 해결될까?
여우도 도움이 많이 되는 역할로 나오는데 거인들을 불러 가웨인 경이 길을 갈 수 있게 도와준다. 계속 그렇게 비가 오고 푹풍우가 몰아쳐도 가웨인 경과 여우는 계속해서 여정을 떠난다. 그러자 그들 앞에 보이는 것은 성이었는데
성주를 만나고 귀부인을 만난다. 그리고 가웨인 경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조언도 해주고 책도 선물해준다. 완벽한 초상화 그림까지 말이다. 하지만 귀부인이 가웨인 경을 유혹하고 시험에 빠뜨린다. 그리고는 녹색 허리띠를 찢어서 주며 갖고 있으라고 한다. 아마도 녹색이란 자연을 상징하기도 하고 이끼와 부패도 상징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도 녹색 기사는 자연과 같다고 한다. 카멜롯은 발전된 문명이고 자연을 이용하는 그런 종족이다. 천년이 지난 현대 시대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자연을 개척하고 이용한다. 하지만 그런 자연에게 감사할 줄은 모르는 것 같다. 여전하게도 녹색 기사는 목 베기 게임에 가웨인 경만 참전시킨 것만이 아니라 천년이 지난 우리에게도 종식시키지 못할 목 베기 게임을 준비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목이 베이기가 두려워 겁이 나는 가웨인 경은 녹색 기사를 피해 도망쳤지만 자신에게 올 미래의 피해를 알고 있었던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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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저링3 - 악마?가 시켰다'보기 전 확인할 공포?의 연대기 - 컨저링 유니버스 정주행?
영화 흥신소 - 알고보면 쓸데없이 재밌는 영화리뷰
워렌부부의 퇴마기인 '컨저링'으로부터 시작된 공포의 세계관을 재미있게 알아보자
컨저링 유니버스
개봉순
컨저링(2013) - 애나벨(2014) - 컨저링2(2016) - 애나벨 인형의 주인(2017) - 더 넌(2018) - 요로나의 저주(2019) - 애나벨 집으로(2019)시대순
더 넌(1952) - 애나벨 인형의 주인(1955) - 애나벨(1967) - 컨저링(1971) - 애나벨 집으로(1972) - 요로나의 저주(1973) - 컨저링2(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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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트홈」 회당 제작비 30억(!)의 한국 넷플릭스 드라마 프리뷰ㅣ스위트홈 웹툰ㅣ결말포함 스포주의ㅣ여진구?ㅣ결말포함 영화리뷰ㅣ
? '스위트홈(2020)' 넷플릭스 드라마 보기 전 필수 시청
스위트홈 웹툰 스토리 요약(*결말과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위트홈" 시놉시스1
세상을 차단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10대 소년. 현수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인간이 괴물로 변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아직은 사람이니까. 이웃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스위트홈" 시놉시스2
끔찍한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외톨이 고등학생 현수는 그린 홈이라는 낡은 아파트 단지로 이사한다.
절망에 빠진 그는 점차 그린 홈에 관한 비밀을 깨닫는다.
왜곡된 인간 욕망을 여러 가지 형태로 투영하면서 인류를 몰아내려는 괴물이 그린 홈을 둘러싸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해 그린 홈 주민들은 그 괴물들에 갇혀있다는 사실을.- "스위트홈" 정보
공개일: 2020년 12월 18일
화수: 10부작
제작: 스튜디오 드래곤, StudioN
장르: 호러, 크리처, 생존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
연출: 이응복
극본: 홍소리, 김형민, 박소정
출연: 송강, 이진욱, 이시영 외
원작: 네이버 웹툰 스위트홈
시청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청소년 관람불가[2]#스위트홈 #스위트홈_웹툰 #스위트홈_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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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 티저 예고편
처음부터 사랑에 빠졌던 그 이름 구찌. 내 것이 될수록 더욱 갖고 싶었던 이름.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었던 그 이름. 구찌를 갖기 위해 구찌를 죽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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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TV+ <테헤란> 공식 예고편
"이란에 잠입한 이스라엘 정보 요원, 임무가 꼬이며 탈출할 방법도 사라진다. Apple TV+에서 '테헤란' - Tehran을 감상하세요. https://apple.co/_Tehran" "드라마 '파우다' 작가 모세 존더의 신작 첩보 스릴러. 테헤란에 잠입해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과 주변 인물들은 큰 위험에 빠지는데... 모세 존더, 다나 에덴, 마오르 콘이 제작하고 다니엘 시르킨이 연출했으며, 옴리 쉔하가 존더와 함께 각본을 썼다. 책임 프로듀서로 모세 존더, 다나 에덴, 슐라 스피겔, 아론 아란야, 줄리엥 르루, 피터 에머슨, 엘다드 코블렌즈가 참여했다. Donna and Shula Productions가 Paper Plane Productions와 함께 제작하고, Cineflix Rights 및 Cosmote TV가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