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n0932023-07-26 19:49:10
조금 특별한 형제의 이야기 |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머리잘쓰는 형과 몸을 잘쓰는 동생의 만남
여기 조금은 특별하면서 형제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몸은 불편하지만, 머리를 잘 쓰는 형과 머리가 조금 불편하지만, 몸을 잘 쓰는 동생과 함께 펼치는 코미디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잔잔하면서 울림이 있었던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살펴볼게요~
기본 정보
장르 : 드라마, 코미디
감독 / 각본 : 육상효
출연진 : 신하균, 이광수, 이솜
개봉일 : 2019년 05월 01일
평점 : 9.14
스트리밍 : tvN, Wavve, Whatch, 쿠팡
기획 의도
머리 좀 쓰는 형과 몸 좀 쓰는 동생!
세상엔 이런 형제도 있다.
비상한 뒤노를 가졌지만 동생 '박동구'없이는 아무 데도 못 가는 형
뛰어난 수영실력을 갖췄지만 형 '강세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동생
이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20년 동안
한 몸처럼 살아온 '특별한 형제'다
어느 날 형제의 보금자리 '책임의 집'을 운영하던 신부님이 돌아가시자
모든 지원금이 끊기게 되고, 각각 다른 장애를 가진 두 사람은
헤어질 위기에 처하고 만다.
세하는 '책임의 집'을 지키고 동구와 떨어지지 않기 위해
구청 수영장 알바생이자 취준생 '남미현'을 수영코치 영입하고,.
동구를 수영 대회에 출전시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성공한다.
헤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본 것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인물이 형제 앞에 등장하면서 형제는
새로운 위기를 겪게 되는데...!
여담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의 경우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실제로 캐릭터 설정과 맞다.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평가 좋게 소문이 나면서
각종 부분의 수상 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후기 및 결말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 결말을 살펴보자면..
어느 날 동구(이광수)의 친엄마가 나타나면서,
동구를 지키기 위하여 세하(신하균)는 법정 다툼까지 벌어지게 된다.
판사는 동구에게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을 정하라고 하자,
동구는 엄마를 선택하며 엄마와 함께 살게 된다.
동구의 수영장 대회에서 세하가 오지 않을 것을 확인하자
반환점에 가만히 서있다가 세하가 온 것을 확인하자
수영을 재개하여 완주에 성공하게 된다.
두 사람의 각별한 우정을 깨달은 동구의 친엄마는
세하와 같이 살 수 있도록 둘만의 아파트를 마련해 주면서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이 난다.
영화를 보면서 예능인 이광수의 허당기 매력이 가득한
웃긴 코미디언이라고 생각이 들었다가,
영화 나의 특별한 형제를 보고 단숨에 이광수라는 인물이
배우였다는 것을 한 번 더 일깨워준 작품이었다.
이광수배우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더욱더 특별했던 나의 특별한 형제.
한줄평 : 광수 바보 아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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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은 내가 마음먹기 나름
내 인생은 내가 마음먹기 나름
- 영화 <체리향기> 리뷰 -
'내 인생의 체리 한 알은 무엇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던 생각이다. <체리향기>는 한 편의 로드 무비이다. 바싹 마른 흙과 먼지로 둘러싸인 구불구불한 풍경, 주인공 '바디'와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차 안에서 주고 받는 대화가 이 영화의 전부이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연출은 정적, 생략, 절제되어 있어서 영화보다는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 강했다. 롱테이크와 정적인 움직임, 관찰자적인 시점이 주를 이루었고, 음향 역시 인위적인 음악 대신 자연의 소리만 등장한다. 때문에 인물들의 대화나 표정, 감정에 더 집중할 수 있었고 직접적인 감정 표현 대신 그들의 표정, 특히 눈빛을 통해 감정이 섬세하게 전달되는 듯 했다.
바디가 바라보는 세상
영화 속에서 카메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을 통해 바디의 내적 외로움과 적막함을 더 잘 느낄 수 있었다. 바디가 사는 동네는 나무 한 그루도 보기 힘든 허허벌판이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러한 공허한 풍경들은 자신의 감정을 함께 나눌 사람도, 쉬어갈 곳도 없던 바디의 내적 외로움을 더욱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의 시점이 곧 바디의 시점인 것이다. 바디에게 있어 몸과 마음의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은 그가 죽음을 계획했던 '나무 아래의 구덩이' 뿐이다.
영화의 중반부 쯤, 바디는 어느 공사장에 도달한다. 공사장 한복판에서 힘 없이 굴러 떨어지는 돌덩이들이 화면에 잡히고, 계속해서 떨어지는 돌 위로 바디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바디는 그런 돌과 흙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공사장 한 편에 주저앉은 채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싼다. 쉴 새 없이 낙하하는 흙과 돌의 모습은 현재 바디의 내면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끝 없는 추락을 반복하다가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어 스스로 죽음을 결심하고, 이를 계획한 자신의 인생을 고뇌하던 바디의 감정이 가장 잘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노인의 이야기
이름 모를 '노인'은 바디의 제안을 유일하게 받아들인 인물이자, 부탁을 들어주는 것을 넘어 죽음의 문턱에서 바디를 데려오고 인생의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존재이다. 극 중 노인은 자연사 박물관에서 동물 박제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박제사는 살아있는 생명을 멈추게 하는 직업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노인은 박제된 동물처럼 정지할 뻔했던 바디의 삶에 다시 움직임을 불어넣는다. 두 인물의 대화 장면에서 노인은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며, '체리 한 알'이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바디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겪는 내면의 고통은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노인만큼은 바디와 유사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기에 서로 깊은 내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바디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노인은 바디가 제안한 금전적 보상에 처음엔 큰 관심을 보이지 않다가 결국 이를 받아들이지만, 그 돈을 자신의 물질적 욕구가 아닌 아픈 자식의 치료를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노인에게 있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물질적 보상보다도 한 사람에게 인생에 대한 애착을 갖게 하는 일이었고, 어쩌면 그는 체리 한 알을 통해 금전적 풍요보다 내면의 충만함이 더 값지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바디의 이야기
바디는 자살을 결심한 한 남자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을 도와줄 사람을 찾아다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만나는 노인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깨닫는다.
극 중 노인을 다시 찾아간 바디는 찬찬히 동네의 풍경을 바라본다. 노을이 지는 풍경, 동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하늘의 색감 등, 지금 현재 살아있기에 볼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것들을 차분히 관찰한다. 이 순간은 바디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이전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공간’으로 여겨졌던 세상이 이제는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공간’으로 다가온 것이다. 노인이 '체리 한 알'로 인해 인생이 달라졌던 것처럼, 이 순간은 바디 인생의 '체리 한 알'이 되어 주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바디는 구덩이 안에 누운 채, 구름 낀 캄캄한 밤 하늘을 조용히 응시힌다. 그의 눈빛을 통해 깊은 생각에 잠긴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바디는 결국 스스로 삶을 끝냈을까? 이에 대한 결과는 보여주지 않은 채 영화는 막을 내린다. 나는 바디가 다시 삶을 선택했으리라 생각한다.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는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도와줄 사람보다 그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 혹은 죽기로 마음먹은 자신을 붙잡아줄 누군가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 아닐까. 인간은 혼자일 수 없는 존재이자, 존재의 의미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바디는 그 짧은 만남 속에서 ‘살아 있음’의 가치를 체험했고, 그 깨달음은 다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체리 향기>는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용하지만 강한 메시지를 전한다. 전체적으로 절제된 연출과 많은 생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노인이 말했듯, 같은 하루라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시간에 쫓기고, 피로에 지쳐 더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한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는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곤 한다. 이 영화는 그런 이들에게 삶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묵직한 위로가 되어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보내고 있는 이 시간들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물론 아무런 의지도 없이 그저 흘려보낸다면 의미를 갖기 어렵겠지만 마음가짐을 조금만 바꾸고 하루를 대하는 태도를 달리한다면, 지금 이 시기가 내 인생에 가장 가치 있는 순간이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 달렸다.
내 인생 역시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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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면을 벗어야 보이는 것들
슈렉
줄거리
자신만의 늪에서 아늑한 집을 짓고 살아가는 초록 오거 슈렉.
평소처럼 느긋한 저녁을 즐기려는데, 동화 속 주인공들이 갑자기 슈렉의 늪에 쳐들어온다.
알고 보니 듈락의 통치자, 파콰드 영주가 그들을 모조리 쫓아낸 것.
완전 열받은 슈렉은 파콰드를 찾아가 늪을 내놓으라 따지고, 파콰드는 한 가지 제안을 하는데...
가면을 벗어야 보이는 것들
숨은 의미 찾기
‘오거’라는 단어는 슈렉 전과 후로 완전히 다르게 다가온다. 영화 개봉 시기가 2001년인데, 그 당시에 ‘괴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것도 모자라 영웅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실로 과감한 시도였다.
“이해가 안 돼, 슈렉. 왜 오거처럼 안 했어?”
“넌 잘 모르겠지만 세상에 알려진 게 다가 아냐. 어디 보자, 오거는 양파와 같지.”
슈렉은 탑 꼭대기에서 피오나를 구출하고 계단을 뛰어내려오면서 서사시 따위는 사치라고 말한다. 그런 슈렉이지만, 왜 오거처럼 굴지 않느냐는 동키에게만은 ‘괴물은 양파다’라며 지리는 비유를 한다. 깊은 문학적 비유 따위를 알 리 없는 동키는 ‘냄새가 고약해?’라고 묻지만.
슈렉은 양파처럼 겉으로는 맵고 눈물 나게 하고 냄새도 나지만, 속을 까고 까고 까다 보면 정의롭고 여리고 순수한 면도 있다. 양파의 생김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으로 요상하다. 반으로 잘라내지 않는 한, 둥근 막을 완전히 벗겨내야만 그 속의 다른 겹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양파와 같은 슈렉의 매력, 참모습을 보기 위해선 오랜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그런데 모두가 양파를 좋아하는 건 아니야.”
괴물과 양파는 똑같이 겹이 있다는 슈렉에게 동키는 깐족거리며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덧붙인다. 물론 생양파도 물에 한 번 헹궈서 연어랑 홀스래디쉬 소스에 찍어 먹거나, 라이스페이퍼에 각종 야채와 넣어 월남쌈으로 먹으면 꿀맛이긴 하다. 하지만 생양파를 우적우적 씹어먹을 만큼 양파를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기에 슈렉이 말한 ‘괴물의 겹’은 결코 파르페나 케이크와 같은 달콤한 음식에 비유될 수 없는 것이다.
양파는 속을 까보지 않아도 누구나 좋아하는 달콤하고 아름다운 것들과는 다르니까.
“케이크는 다들 좋아해! 게다가 층으로 되어있지.”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슈렉이 양파라면 피오나는 케이크나 파르페 쯤일 것이다.
구태여 속을 까보지 않아도 모두가 달콤한 향기와 황홀한 생김새에 마음을 홀딱 뺏기고 마니까. 양파가 제대로 속을 까보지도 않고 판단해서 문제라면 케이크는 속에 얼마나 많은 겹이 있는지 아무도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 속에 초코시트가 들었는지, 바닐라 시트가 들었는지, 딸기가 들었는지, 생크림이 들었는지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위험에 처한 공주를 구해서 결혼하고 왕이 되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남성형 신분 상승’ 이야기다.
피오나를 권력 취득의 ‘수단’으로만 여긴다는 점에서 파콰드나 성에서 불타 죽은 이름 모를 기사들은 전부 동일 인물이다. 동화 속에서 여성이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것은, 남성이 주인공일 때든 여성이 주인공일 때든 마찬가지였다.
“밤과 낮에 따라 모습이 달라질지어다.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로 사랑의 참모습을 따를 때까지.”
그런 점에서 슈렉 속 마녀의 저주는 다른 마녀들의 저주와는 달리 참으로 특이하다. 진정한 사랑의 첫 키스가 ‘저주를 풀어준다’고는 하지 않는다. 피오나의 겹은 파르페나 케이크와 같다 했던가. 낮에 비치는 아름다운 공주의 모습은 모두가 독점하려 달려드는 케이크의 겉모습이지만, 그 속에 들은 진정한 모습은 괴물이었다.
내면이 괴물이라고 해서 그것이 추하다거나, 못났다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울퉁불퉁 못난 괴물이라는 생김새는 피오나 내면의 아픔을 형상화 한 것이다. 공주라고 항상 아름답고 행복하고 즐거운 것은 아니다. 성에 갇혀 홀로 살면서 느낀 외로움과 슬픔, 슈렉은 그 상처마저도 피오나의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슈렉은 케이크 속을 들여다본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슈렉이 피오나를 구한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서로가 서로를 구해준 셈이다.
슈렉과 피오나는 아주 두꺼운 가면을 쓴 채로 서로를 만났다. 슈렉은 까칠하고 투덜거리면서 자신의 상처받은 마음을 숨겼다. 피오나는 '공주다운' 외모와 지위로 자신을 포장하며 아픔을 숨겼다. 가면은 자신을 가리는데에는 꽤나 효과적이지만, 상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면이 너무 두터우면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가면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게 자기 가면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 했던가.
때론 그 가면을 벗어던져야만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페르소나다.
슈렉이라는 영화를 두고 대부분은 괴물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도전장이라고만 해석한다. 하지만 슈렉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 슈렉과 같지는 않는지 묻는다. 우리 내면에 겹겹이 쌓인 아픔과 상처들이 만들어낸 가면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라고 말한다.
우리는 슈렉처럼 깊숙한 늪지에 스스로를 가두고는, 자신을 건드리지 말라며 거칠고 위협적인 가면을 쓴다. 사실 그 가면을 쓰는 이유는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닌가? 물론 이 험난한 세상에서 뒹굴기 위해서는 맨 얼굴을 가리는 게 필수라고들 한다. 어쩔 수 없다고. 그렇다면 적어도 남들이 나의 가면만 보고 나를 판단한다고 말하지는 말자. 나 역시 남들을 그렇게 바라보았을 게 뻔하니까.
조금이나마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선,
일단 나부터 가면을 벗고 마음을 열어보는 게 우선 아닐까.
어른에게 더 필요한 동화
감상평
어릴 적 엄마는 나의 영어공부를 목적으로 수많은 애니메이션 DVD를 구매해서 끼니마다 틀어주었다. 정말 영어공부가 되었느냐고 묻는 사람은 없길 바란다. 당연히 효과 없다. 아,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이번에 영화를 보니 나도 모르게 대사를 줄줄 읊고 있더라. 아주 허튼짓을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1시간 30분짜리 영화의 대사를 거진 다 외울 정도라면 얼마나 돌려봤을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아리라 믿는다. DVD 케이스 안에 꽂힌 무수히 많은 영화 중에서도 슈렉은 늘 새로운 영화였다. 나 역시 그 영화를 볼 때는 어린아이였으므로, 사회가 규범처럼 내밀던 진부한 공주와 왕자 이야기가 정답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어린아이의 생각을 일깨워준, 그야말로 인생 영화라 할 수 있겠다.
나이를 먹고 슈렉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어릴 땐 저녁밥 먹을 때마다 틀어보던 영화였다지만, 이제는 나도 모르게 세상과 벽을 쌓고 싶을 때, 의기소침해질 때마다 보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사진 참조 : 네이버 영화 '슈렉'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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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 공간에 가득 담긴 유년의 설렘과 아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69년의 벨파스트. 날이 좋으면 골목에서 함께 춤추며 놀고, 해 질 녘엔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저녁을 먹으며, 거리의 모두가 서로의 가족을 알고 아끼며 지내던 도시. 어느 날, 종교를 이유로 폭력 사건과 격렬한 충돌, 대립, 갈등이 시내에서 발생하자 9살 소년 '버디(주드 힐)'의 세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런던에서 일하는 '아빠(제이미 도넌)'와 혼자서 육아를 책임져 온 '엄마(케이트리오나 발피)'는 정치, 경제적 이유로 이전과 달리 계속해서 싸우기 시작하고, 재미와 환상이 가득한 공간이었던 벨파스트의 골목에는 장벽이 세워지고 전과 다른 긴장감이 맴돈다. 그저 평범하게 하교를 가고 좋아하는 소녀와 데이트를 하고 가족과 함께 즐겁고 싶었던 버디의 일상과 공간은 그렇게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려낸 자전적 이야기인 영화 <벨파스트>는 아카데미 시상식 즈음에 개봉하는 작품답게 화려한 문구들로 수식된다. 당장 <벨파스트>는 제75회 영국 아카데미 영국 작품상을 수상했고, 제94회 아카데미에서도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그러나 1시간 반 가량 밖에 되지 않는 흑백 영화가 관객과 비평가의 눈을 모두 사로잡을 수 있었던 힘은 이처럼 화려한 수식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1969년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의 평화로운 일상과 예기치 않게 발생한 내전 상황을 담아낸 <벨파스트>의 진짜 힘은 당시 '공간'에 깃들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9살 아이의 시선으로 차분히 담아내는 '진솔함'이다.
<벨파스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오프닝 시퀀스다. 브래너 감독은 현시점 벨파스트의 다양한 공간을 그 어떤 부연 설명도 없이 카메라에 담는다. 가장 먼저 현대적인 조선소 일대를 비춘 카메라는 '타이타닉 호텔'의 표지판을 거쳐 오래된 배 건조장의 흔적을 담고, 고풍스러운 건물과 다양한 유적지를 비춘 후 서서히 아기자기하게 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의 모습을 비춘다.
이때 카메라는 주택가 거리마다 위치한 벽들과 그 벽에 그려진 강렬하면서도 상흔이 느껴지는 그림을 보여준 후, 거리를 가로막고 있는 그 벽 너머에서 펼쳐지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흑백으로 소개한다. 이러한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태도와 접근법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듯 보인다. 벨파스트라는 공간에 얽히고설킨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체감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묻어 나오는 것이다. 특히 오프닝에서 비추는 공간과 건물 하나하나가 벨파스트의 긴 세월을 모두 품고 있기에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우선 가장 먼저 등장한 조선소는 벨파스트의 영광을 보여준다. 벨파스트는 북아일랜드 정치, 경제, 문화의 최대 도시로, 라간(Lagan) 강을 끼고 있어서 조선업이 발달했다. 20세기 초에는 아일랜드 섬에서 가장 번성한 도시였고, 그 당시에 타이타닉 호가 벨파스트의 할랜드 앤 울프 사에서 건조되기도 했다. 반면에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peace line이라 부르는 벽들은 도시의 상처들이다. 1960년대 말 이후부터 가톨릭교도(친아일랜드) 주민과 신교도(친영국) 주민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폭력 사태가 발생하면서, 충돌 소지가 있는 거주 지역 사이에 장벽이 쳐진 것이다. 그래서 이 장벽에 그려진 정치적, 역사적 벽화와 조선소는 강한 대비를 이룬다.
또한 영화는 시작처럼 마지막도 벨파스트의 공간과 함께 한다. 클로징 시퀀스는 도시를 떠난 이들, 남은 자들, 그리고 길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점으로 되돌아가 벨파스트의 조선소를 비추면 끝난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We shape our buildings, thereafter they shape us).”는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1969년 벨파스트 거리마다 생겨난 장벽들과 그 장벽들로 인해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5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도시에 깃들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북아일랜드 분쟁'처럼 역사적인 네이밍이 아니라 벨파스트라는 단순하나 명료한 표현이 영화의 제목이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보다 보면 당시 거리의 모습과 분위기를 스크린으로 고스란히 옮겨 오려는 브래너 감독의 노력이 유달리 절실하게 느껴진다. 실제로 브래너 감독은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아르테미스 파울>, <나일 강의 죽음>을 함께 한 프로덕션 디자이너 짐 클레이와 협업해 언덕과 시골, 부두와 맞닿은 벨파스트의 공간감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 특히 팬데믹으로 인해 도시에서의 촬영이 어려워지자 영국 햄프셔에 있는 ‘판버러(Farnborough)’ 국제공항의 활주로 끝에 세트를 지어 벨파스트를 실제로 옮겨오기도 했다.
이때 <벨파스트>는 공들여 그려낸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9살 소년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이를 알 수 있는 영화적 장치는 여러 가지가 있다. 버디는 가족의 이야기를 언제나 부모의 대화를 훔쳐 듣거나 그들의 싸움을 몰래 보는 식으로 알게 된다. 또 당시 북아일랜드를 둘러싼 영국 내의 정치적 이슈, 또 역사적인 이슈에 대한 정보도 제한적으로 제공된다. 티비 속 뉴스를 통해 단순히 배경과 현황만 알려주며, 당시 격렬했던 북아일랜드 갈등의 원인을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간의 갈등으로 단순화한다. 교회에서 들은 목사의 설교를 버디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하나, 영화는 버디에게 굳이 그 답을 찾지 않으려는 식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덕분에 <벨파스트>가 모든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상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북아일랜드의 분쟁은 단순히 종교 갈등이라고 볼 수 없다.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지배가 길어진 결과 개신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이주민이 영국 잔류를 희망하고, 가톨릭교도가 다수인 랜드인은 독립국 아일랜드와의 통일을 바라는 것이 기본적인 갈등 구도다. 달리 말해 영화는 어떤 측면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종교 분쟁이 될 수도 있고, 식민 지배를 둘러싼 이념의 싸움이 될 수도 있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거대한 사건을 가장 미시적으로, 또 개인적으로 접근하여 풀어낸다. 처음으로 폭동을 마주하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영화는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구호와 외침에 집중하지 않는다. 그저 슬로 모션으로, 또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 속에 버디의 반응을 온전히 담아내려고 한다. 그가 인생 처음으로 맞이한 삶의 전환점을 강조한다. 이 장면은 잉글랜드로 이주하자는 부모님의 말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버디의 모습과도 이어진다. 그는 잉글랜드로의 이사를 격렬하게 반대한다. 사촌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학교에서 썸을 타고 있던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깰 수 없다는 것이다. 버디에게는 폭력과 갈등의 현장이 내전의 공포보다는 그저 일상의 파괴로 다가왔던 것이고, 이는 드라마틱하면서 보편적인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힘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벨파스트>는 유머만 조금 부족할 뿐,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조조 래빗>과 비슷한 인상을 준다.
또한 <벨파스트>는 흑백 연출을 통해 위기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감정선을 가능한 진솔하게, 자극적이지 않게 담아낸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모습과 분위기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직관적으로 그들의 감정선을 느끼게 하고, 누군가에게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한 도시의 역사에 불과했던 사건 속으로 잠시나마 온전히 빠져들 수 있게 한다. 비록 실제 세상과 다른 옛날 신문 기사 속 흑백 사진에서 오히려 많은 진정성이 느껴지듯이, 흑백이라는 시적인 효과로부터 더욱 현실적인 효과를 이끌어 내는 셈이다.
특히 무엇보다도 영화가 집중하고 있는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 "평범한 가족의 모습을 보다 화려하고 서사시적인 느낌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던 브래너 감독의 의도가 적중한 것이다. 혼자서 두 아이를 키울 정도로 강인한 엄마는 그 누구보다 따뜻하면서도 엄격하게 버디를 키우고, 런던에서 목수로 일하는 아빠는 함께 지내지 못하지만 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려고 노력한다. 현실적인 유머가 빛나는 '할머니(주디 덴치)'와 반대로 낭만이 넘치는 '할아버지(시어런 하인즈)'는 버디에게 삶의 지혜를 전해준다. 흑백 필름은 이러한 관계성에 담긴 진솔함을 그 어떤 방식보다도 효과적으로 끄집어내고, 강조해주는 듯 보인다.
이에 더해 순간적으로 등장하는 흑백 외의 색채는 그 진솔함에 깊이를 더해준다. 벨파스트의 풍경을 비추는 오프닝과 클로징 장면을 제외하면, 영화에서 색채가 덧입혀지는 순간은 버디가 가족과 함께 연극이나 영화를 보는 순간뿐이다. 이는 담담하고 차분하게 쌓아 올라가던 버디네 가족 간의 관계성과 감정선에 방점을 찍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가족들이 다 함께 영화를 보는 장면 다음에 가족과의 이별을 그려내는 후반부는 눈물 흘리는 이 하나 없이도, 구슬프다.
그간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사실 들쑥날쑥한 평가를 받아왔다. 본작에서도 버디가 받는 크리스마스 선물 중 하나인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오리엔트 특급 살인>과 <나일 강의 죽음>은 흥행에는 성공했으나 평가는 미묘했다. 동명의 소설을 영상화한 <아르테미스 파울>은 극장 개봉도 하지 못한 채 디즈니+ 로 직행했다. MCU 페이즈 1에 속한 <토르: 천둥의 신> 역시 독립된 작품으로서는 긍정적인 평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그는 자신의 인생 시작점으로 되돌아가 그 공간에 가득한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마침내 그 결실을 보는 듯하다. 즉, <벨파스트>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익숙한 명언이 1승을 추가하는, 그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삶은 공간이고 그 공간은 삶의 거울이다. 영화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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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된 아이, 사라진 기록
해당 콘텐츠는 씨네랩 초청으로 참석한 <케이 넘버> 시사회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해외 입양인들의 귀환을 가장 가까이에서 담은 독립 다큐멘터리, <케이 넘버>의 개봉이 다가온다. 오는 14일에 개봉 예정인 해당 다큐멘터리의 시사회에 씨네랩의 초청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시사회 참석이 처음이라 설레던 마음도 잠시, 다큐멘터리 속 해외 입양의 실태와 그 아픔에 눈물을 흘리며 점등을 맞이했다.
다큐멘터리 <케이 넘버> 포스터
<케이 넘버>는 조세영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로, 장장 6~7년의 제작기간을 거쳐 상영관을 찾아온 작품이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수상하고,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70년의 해외 입양 역사에서 나아진 것이 없음을 냉철히 지적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왼쪽부터 차례로 노혜련 숭실대 명예교수(전 홀트 직원), 조세영 감독, 김유경 배냇 대표의 모습
영화의 제목이 되는 K-NUMBER란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낼 때 입양기관이 아이를 분류하기 위해 붙인 표식이다. 한국전쟁 이후 70, 80년대에 이르기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동의 수는 자그마치 20만명에 달한다. 가정과 직장이 있는 성인이 되어 돌아온 입양인들의 귀환과, 이들의 뿌리찾기를 돕는 한국인여성모임 ‘배냇'의 추적에서 드러나는 해외 아동 입양의 진실을 영화는 조명한다. 감독의 집요한 질문과 따뜻한 시선을 따라가며 해외 입양인들이 ‘그들’이 아닌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타국으로 떠나 보낸 우리 아이들의 귀환이 될 수 있음을 느껴보자.
1970년대 초, 길에서 우연히 발견된 미오카.
어린 시절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미오카는 가족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한국을 찾는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건 조작된 서류와 감춰진 기록.
K-Number의 진실은 무엇이며, 사라진 서류는 무엇을 감추고 있을까?
시간과 국경을 넘어, 숨겨진 진실이 풀리기 시작한다.
<케이 넘버> 시놉시스, 출처 씨네 21
영화는 2004년, 관에서 본인의 입양서류 기록을 받지 못해 화를 내는 한 해외 입양인 여성의 외침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이름은 미오카 밀러, 한국 이름은 김미옥으로 ‘추정된다’. 한국 이름이 정확한지 확인 할 수 없는 것 또한 입양서류의 불분명성과 위조 가능성 때문이다. 이후 20년간 미오카는 5번의 한국 방문을 이어가며 본인의 뿌리와 가족의 기억을 찾기 위해 방방곡곡을 해메왔고, 그 여정에 사회봉사단체 ‘배냇’이 동참했다.
2004년에서 2024년. 한 사람이 태어나 성인으로 자라나기까지의 기간동안, 미오카와 배냇은 불분명한 서류와 감춰진 해외 아동 입양의 진실과 사투하며 ‘뿌리찾기’를 이어가고 있다. 입양 이후 한국에 처음 방문하는 입양인들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앞에서 자국민의 도움없이 대여섯살때의 단편적인 기억만으로 가족을 찾는 것이 말이 되냐는 배냇 김유경 대표의 물음에는, 입양민 ‘뿌리찾기’의 실태와 그 어려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공개되지 않는 기록에 대한 분노. 미국을 떠나 한국까지 와서도 미오카씨를 반기는 것은 사실확인조차 되지 않고, 본인의 정보조차 온전히 드러나지 않은 반의 반쪽짜리 서류다. ‘이 서류를 기반으로 가족을 찾는 일이 과연 의미가 있겠냐‘는 무력함의 끝에서 나온 질문에도 미오카 씨는 ‘지금 가지고 있는 패는 어쨌든 전부 뒤집어 보아야 한다‘고 답한다. 새로운 서류가 나오고, 정보가 나오고, 거짓이거나 조작되었음이, 혹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진실의 테두리임이 드러날 때 마다 그렇게 밝고 힘이 넘치던 미오카 씨의 얼굴이 조금씩 피로와 절망, 무력과 분노로 물들어간다.
한국 전쟁 이후, 국가 재정난을 겪던 대한민국은 국책 사업으로 ‘해외 입양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한국은 전 세계 유일하게 '대리 입양' 제도가 가능했던 나라로, 입양 부모는 한국에 방문하지 않고도 아이를 입양할 수 있었기에 그 수요는 폭발적이었다. 대리 입양제도에 대해 당시 미국 입양 전문가들의 반대가 극심했으나, 대표적인 해외 아동 입양 기관이었던 홀트의 로비로 무마되었다는 노혜련 교수(홀트 전 직원, 숭실대 명예교수)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 한다. 마치 품종묘를 샵에서 고르듯이, 서구 사회의 부모들은 아이의 성별, 인종적 특징을 바탕으로 원하는 아기를 고를 수 있었던 것이다. 아동을 일종의 상품처럼 여기며 타국의 양부모에게 배달하는 이러한 '우편 입양' 서비스는 그 대가로 입양기관에게 막대한 수수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국가와 사기업이 주도하는 일종의 인신매매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국가와 기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해 입양 대상 아동을 확보하고 아동의 출신 서류 위조까지 감행한 범죄이자 불법행위”라는 김영우 2024서울독립영화제 예심위원의 분석은 정확하다. 해외 아동입양은 단순히 고아 아동에게 더 나은 삶의 조건을 보장하는 취지의 해외 입양이 아니었다. 입양 이후의 아동의 안전과 생활과 관련된 어떠한 보고와 의무도 없이, 아동을 판매하면 그것으로 끝인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아동의 기본권은 사각지대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아동의 입양 과정이 강제적이냐 자발적이냐와는 관계없이, 아동의 재화화와 이로 인한 이익의 수취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문제적이다. 그것도 국가와 사기업의 주도하에 20만명의 아동이 해외로 이주되었고, 이들의 성장과 안전이 한국 사회에서 비가시화되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의 아픈 단편으로서 재조명될 가치가 충분하다.
20만명의 아동을 해외로 수출한 ‘아동 수출국’이라는 오명은, 국외 시선을 고려해 해외 아동 입양이 중단되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동 수출 과정에서 조작된 서류로 뿌리를 찾지 못하고 배신감과 무력감을 경험하는 해외 입양민들의 존재로 인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리고 이러한 오명은 저출생 국가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와 끊임없는 재생산을 거듭한다. 가장 해외 아동 입양이 많았던 1985년, 한국은 이미 출생률 1.7%를 기록하며 저출생 국가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동을 재화화 하고 떠나보낸 책임을 지고, 해외 입양인의 귀환과 ‘뿌리찾기’를 돕는 일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소외되어 왔던 해외 아동 입양의 진실과 역사 외에도, 영화를 구성하는 또 다른 축으로서 ‘여성’이 존재한다. 해외 아동 입양의 과정은 여성에게 행해지는 폭력의 또 다른 면모를 담고 있다. 북유럽으로 입양된 해외 입양민 여성들의 인터뷰에서, 한 인터뷰이는 ‘20만명의 아이들이 국가 주도의 조직적인 인신매매 정책으로 해외로 보내졌다는 잔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 보이지 않는 신원 미상의 미혼모와 여성들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망상적 서사를 너무나도 쉽게 믿어버리는 것이 안타깝다‘며, ‘더 나아가 그러한 믿음이 그녀들의 딸, 아들인 해외 입양인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보는 배려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다.
거대 권력의 국가보다 사회적 약자인 여성에게 책임과 비난의 화살이 돌려지는 익숙한 그림이다. “적어도 제가 만나본 한국 여자들은 아이를 쉽게 버릴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입양민 여성의 평가는, ‘설령 아이를 버리는 엄마가 있었더라도, 그곳에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있으며, 남아선호사상 아래에서 셋째 딸의 낙태와 입양을 권유하는 가정과 사회는 어디에 있으며, 아이를 가정으로 돌려보내주고 키울 여건을 마련해주는 대신 길고양이를 잡아 가두듯 모아와 두 당 얼마를 받고 팔아넘긴 기업과 국가는 어디에 있으며, 이를 묵인하고 심지어는 추진한 대통령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라는 무거운 질문을 불러온다.
주제가 아닌 구성의 차원에서도, 다큐멘터리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다. 여성 감독, 배냇의 여성 회원들, 뿌리를 찾는 해외 입양민 여성들과 이들의 어머니-언니, 그리고 탐문을 돕는 시장의 할머니들. 출산과 아동의 양육이라는 테마 때문만이 아니다. 연대와 공감, 실행과 보호라는 테마에서 비로소 여성은 끈끈하게 뭉친다.
‘좋은 일’과 ‘더 좋은 환경’으로 포장된 해외 아동 입양 사업의 실태를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관객은 마주하게 된다. ‘평범한 한국인들은 입양인의 귀환에 대해 뭐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다‘는 입양인의 질문 앞에, 아마 이들의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던 대다수의 관객은 할 말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감독의 끈질기고 따듯한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의 이야기를 알게 된 시점에서, <케이 넘버>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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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인생영화는 무엇인가요. 또 어떤 의미인가요
인생영화. 난 사실 인생영화가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한동안 제일 재미있었던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스릴러 장르의 영화를 뽑았다. <나이브스 아웃> <유전> <큐어> <킬빌 1,2> 같은 영화들은 재생하기만 하면 시간이 후딱 간다. 또한 나는 MCU의 팬이기도 하다. 내가 작년 동안 제일 잘한 일 뽑으라고 한다면 극장에서 어벤저스 시리즈 그러니까 MCU의 영화들을 다 봤다는 것이다. 캡틴 아메리카의 맨몸액션 영화들을 보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나한테 있어 영화는 이런 것들이었다. 무슨 일이 있든 머리를 비워줄 수 있다면 참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로맨스 영화는 왠지 나랑은 안 맞는 것 같아서 피하곤 했었다. 왜일까 생각했다. 내가 나를 숨기면서 살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내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를 보라고 한다면 두려웠다. 난 왜인지 나를 나누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런 시간은 다 간 것 같다. 물음표의 연속이던 내 머릿속에 느낌표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면 될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하는 질문이 '이러면 되는구나!'로 변했다. 이제 나도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난 나를 어두운 이야기만 할 줄 알았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나를 괴롭히던 몇몇 생각들에 이젠 구애받지 않게 됐다. 이를 서서히 깨달을 즈음에, 또 이제는 스릴러, 호러물이 아닌 잔잔한 작품도 좋다고 여길 때 이 영화가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나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셈이다. 2021년 2월. 이 영화를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해피 투게더>는 이별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크게 세 사람만 나온다. 양조위가 맡은 아휘. 장국영이 맡은 보영. 장첸이 맡은 장이다. 이 세 주인공 중 아휘와 보영은 연인관계다. 허구한 날 싸움만 하는 것 같은 두 사람. 관계 회복을 위해 홍콩 반대편에 있는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난다. 외국에 온다 해서 예외가 있는 건 아니다. 이과수 폭포에 가면서도 두 사람은 또 싸운다. 지칠 대로 지친 아휘는 보영과의 관계를 마무리한다. 보영의 빈자리를 느끼는 아휘. 없다는 것에 외로움을 느끼지만 다시 상처 받기 싫어 보영에게 냉담하게 행동한다. 보영은 이런 아휘를 다시 시작하자며 흔들어놓는다. 흔들리던 아휘.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되어 나타난 보영의 같이 있어달라는 말에 긍정도, 부정도 없이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까칠했지만 사실 아휘는 보영과 함께여서 행복했다. 보영이 다 낫게 되면 자기를 떠날 것이라는 불안감에 보영의 여권을 숨기기까지 하는 아휘. 이는 갈등의 원인이 된다. 결국 보영의 손은 다 낫는다. 보영은 아휘에게 여권이 어디 있냐며 따져 묻지만 안 돌려줄거라는 답을 듣는다. 보영은 이에 화나 아휘와 헤어진다. 혼자가 된 아휘. 아휘는 보영이 떠났다는 사실에 외로워하며 이리저리 방황한다. 방황 끝에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계획하고 원래 일하던 식당에서 그만둬 도살장에서 일하게 된다. 돈을 원하는 만큼 모은 아휘는 홍콩으로 떠난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잠깐 들른 대만에 식당에서 일하다 만난 친구 장의 사진을 보게 되고, 장을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알게 됨으로서 이 영화는 끝난다. 이게 대략적인 영화의 줄거리다. 딱히 어려울 것 없는 내용이다. 싸우다 헤어지고 난 다음의 평범한 커플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해피 투게더>는 다르다. 왕가위는 이런 보편적이라고 볼 수 있는 줄거리를 가지고도 다른 로맨스영화와의 차이점을 만들어낸다.
내가 생각하는 차이점은 왕가위 감독의 연출에서 나온다. 첫번째. 어렵지는 않지만 특이한 줄거리다. 연인이 싸우고 헤어진다. 끝. 영화의 줄거리는 1줄로 요약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산 이유는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만약'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만약에 부딫힌다. 아. 그때 그랬으면 어쨌을까. 내일 일을 미리 알수있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후회가 우리 삶에서 좋은 구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 영화는 이런 모두를 이해라도 한 듯 우리가 선택할 만약이란 가정을 전부 다 보여준다. 수도없는 결벌 후 계속해서 사랑을 이어간 둘이 행복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둘은 걸핏하면 싸웠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불행했다고 볼 수 있나? 아니다. 둘은 같이 왈츠를 추다가도 서로 사랑한다는걸 인지하고 격하게 포옹한다. 그러니까 둘에게 만약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져 연인관계이기 때문에 불행한 하루하루가 계속될 것이다. 즉, 둘의 관계는 무슨 짓을 하든 영화와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왜? 영화에서 다 보여준것과 같이 이미 이들은 할만큼 했다. 이것만큼 확실한 미래에 대한 예상은 없을 것이다. 영화는 이를 보여주며 행복했지만 불행했던 시간을 보낸 우리들에게 말 한마디를 건낸다. 그래서, 너가 선택해야 했던 미련과 후회를 골랐다고 해서 현재와 다를거라고 생각해? 아닐걸. 난 플롯을 통해서 왕가위 감독이 이 말을 하고 싶어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두번째 연출의도로 이어진다.
두번째. 메세지를 전달하기 위한 카메라 구도다. 감독의 전작에서는 볼 수 없는 구도가 보인다. 인물들을 굉장히 가깝게 찍는 카메라 워킹 여러가지가 나온다. 가령 이과수 폭포 전등을 빤히 쳐다보는 아휘의 모습도 카메라가 굉장히 가까이서 주인공을 찍는다. 또 있다. 장이 녹음기를 주며 '여기에 네가 슬픈 걸 털어놓아봐'라고 말할때 조용히 우는 아휘의 모습을 줌인한다. 아휘가 보영이 왔다는 생각에 문을 열지만 아무도 없다는걸 확인할 때에도 카메라를 가까이 대며 찍는다. 나는 이런 장면들을 보며 내가 아휘이거나 보영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혹은 내가 이들을 아는 제 3자가 되어 이들의 이야기를 바로 옆에서 보는것같은 느낌도 들었다. 난 왕가위가 이런 지점을 의도했다고 생각한다. 감정이입때문에 이렇게 매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 얼마나 이 인물이 이런 일들로 하여금 외로워하는지, 이를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카메라를 우리에게 돌린것이다. 이런 공감대의 활용은 엔딩신 지하철 장면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홍콩의 지하철 어느 장면들을 비춰준다. 마치 내가 지하철을 타는 승객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지하철이 되어 홍콩의 사람들을 주욱 비춰주고, 무언가를 다짐하는 아휘를 보여준 다음 영화는 종착지에 도착한 기차를 보여준다. 난 이 엔딩의 두 장면을 보며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지나간 일에 생각이 많아질 때 기차를 탔다고 가정해보자. 더이상 무언가를 떠올리고 싶어도 기차가 종착지에 도착하면 일단 내리고 봐야 한다. 무언가와 이별한다는 건 이런게 아닐까. 기차와도 비슷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간 일은 기차와도 같아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내려야 하는 기차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내려야 할 때 내려야한다. 난 왕가위감독이 기차와 엔딩신을 통해 이런 비유를 했다고 생각한다. 카메라 구도가 이끄는 공감대도 이와 관련이 있다. 엔딩신에서의 지하철을 바라보는 시점은 승객으로서의 시각과도 닮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아휘와 관객들은 동일시가 된 셈이다.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좋아. 그래서. 이제까지 너희 이야기 실컷 했지? 이제 네 미련과 후회에서 내릴때가 됐어. 아쉬움은 털어내라구. 난 왕가위 감독이 이 연출요소들로 이 메세지를 주고 싶어했다고 생각한다. 플롯을 독특하게 만들지 않은 대신 카메라 구도로 영화를 표현한것도 이 말을 전달하기 위한 좋은 받침대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이기도 하다.
세번째. 영화는 이런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며 한마디 더 했다. 그래서. 너가 돌아가야 할 다른 곳은 어디인가요.라는 질문이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기댈 수 있어 자유롭다. 가족이란 것도, 친구란 것도 다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할 수 있어서 든든한게 아니었다. 내가 외로울 때 두서없는 투정을 드러내도 찾아갈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다행이었다. 영화는 이런 돌아갈 곳을 잃은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 주인공 다 돌아갈곳이 없어 외롭다. 가령 아휘와 장만 해도 집을 무작정 떠나온 사람이다. 보영은 아휘라는 마음의 안식처를 잃어버렸다. 종반부로 가면 쉴 곳이 유일하게 생긴 주인공이 있다. 아휘다. 아휘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 장이다. 지하철 타는 엔딩신 이전 장면은 아휘가 장의 집을 찾는 부분이다. 아휘는 마음 아프게 누군가와 이별해 방황하지만 결국 장을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아휘는 앞으로 방황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언제든 마음이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앞의 두가지 만큼이나 이 지점이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앞에서 내가 쓴 부분을 다시 갖고올 필요가 있다. 결국 무언가와 이별한다는 건 돌아갈 길 하나 없애고 다른 길을 파는것이 아닐까. 아휘는 장이 있기 때문에 더이상 헤메지 않을 것이다. 왕가위 감독은 이런 '돌아갈 곳이 있고 없고'의 차이의 대비를 통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헤어진다는 거? 괜찮아. 그럴 수 있지. 그래도 마음이 놓일 곳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라고 말한다. 난 이 영화를 보며 이런 느낌이 들었다. 일어날 일이 일어나지. 누군가와 친했다고 해서 그 사람과 영원히 행복할리는 없다. 이걸 뻔히 알고있다면, 인생 모든게 다 정해진게 되어 외로워지게 된다. 난 가끔 이런 나를 이해해주는 무언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 작품이다. 이 영화는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진 우리를 이해하고 있다. 이래서 난 이 영화가 좋았다. 나에게 그래도 됐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이다. 영화 안에서 봄이라고 유추할만한 계절적 배경이 드러나진 않는다. 무엇이 봄의 햇볕같을까. 당연히 둘이 사랑하는 시간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헤어지는 순간을 보여주지 않느냐? 아니다. 영화는 수도 없는 결별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절대 결코 완벽한 인간일 수 없다. 영화는 이런 미숙함에 대해 아름다운 봄과도 비슷하다고 말한다. 우리 모두 다 어느 부분에선 미숙하다. 나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누구를 떠나보내기가 부지기수다. 그래도 괜찮다. 이것도 봄의 햇볕같은 날이자 '해피 투게더'한 날일 것이다. 는 이게 영화의 제목이 이것인 이유라고 생각한다. 더 나은 누군가가나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까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이해하는 무언가와 함께 해야한다. 피할 필요 없다. 어차피 일어날 일은 다 일어난다. 당신은 무얼 선택하든 같은 선택지를 골랐을 것이다. 그러니까 챙겨야할 것 몇가지만 챙기고 앞으로 나아가자. 왕가위 감독은 이 사랑이야기를 통해 보다 성숙한 대답을 해주는 것 같다. 남남 커플의 사랑이야기에서 우리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왕가위의 연출능력이 정점에 달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두고두고 볼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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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가면/코리안시네마
시놉시스
신도시 개발계획이 있는 지방의 한 마을이 있다. 마을로 부랴부랴 이사를 오는 기준의 가족. 동네가 ‘시’로 승격이 되고 난 뒤에는 진학에 유리한 농어촌 특별전형 혜택 자격도 없어진다. 새롭게 다닐 학교에서 전학 수속을 밟고 있는 사이, 기준의 새 운동화가 사라진다. 신발 도둑으로 의심을 받는 아이는 동네에서 유명한 결손가정의 형제들이다. 기준의 가족은 이 형제들이 신발 도둑이라는 의심이 강하게 들지만, 고작 신발 정도니까 모른 척 넘어가 준다.(전주국제영화제 제공)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글입니다.
〈여름이 지나가면〉은 어린이의 세계가 그리 녹록치 않음을, 다층적으로 굴곡진 어른의 세계와 닮은 점이 꽤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다. 조수석에 앉은 기준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희망에 부푼 엄마와는 달라 보인다. 서울에 살며, 적당한 재력을 가진 기준의 부모는 기준을 위해 농촌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농어촌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다. 기준이 잔뜩 불만인 이유는 단지 친구들과 헤어져 낯선 곳으로 간다는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기준은 마음 깊은 곳에서 이미 자기 삶이 자율성을 상실한 채, 부모 욕망이 투영되는 객체일 뿐이라는 점을 감각하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촘촘한 기획이라도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포박하기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 아니기 때문이다. 변화는 부모와 기준 모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다. 기준은 전학 첫날부터 브랜드 운동화를 도둑맞는다. 부모 없이 어렵게 생활하는 영문, 영준 형제가 범인인 듯 보이지만 확실한 물증은 없다. 기준에게는 이 사건이 뜻밖의 계기가 된다. 영문은 또래 집단의 우두머리 격으로 친구들은 그가 분위기를 잡고 한 마디만 하면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금방 움츠러든다. 기준도 영문이 무섭다. 동시에 영문과 가까워지면 금세 그와 비슷한 지위를 누릴 수 있겠다고도 느낀다. 기준은 자발적, 적극적으로 영문 형제에게 호의를 베푼다. 부모가 기준에게 ‘더 좋은’ 미래를 선물하기 위해 시골로 이사 왔듯이, 기준 역시 나름의 ‘더 좋은’ 미래를 위해 형제에게 잘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준은 결코 부모가 의도하지 않았을 방식으로 자신의 자율성을 발휘하고 나름의 삶 기획을 이어간다. 이후는 악화일로다. 물론, 부모의 관점에서 말이다. 기준은 영문 형제와 함께 도둑질, 폭력 사건에 자주 연루되고 그럴수록 무리에서 상승하는 자신의 지위를 은근히 즐긴다. 기준은 늘 영문에게 더 잘 보일 방법을 찾는다.
기준을 ‘나쁘게 물들인’ 영문, 영준 형제에게도 자기 삶 기획이 있다. 이들 역시 부모 없이 근근이 삶을 꾸려야 하는 상황에서 남에게 위협감을 주고 남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자신의 미래를 모색해왔다. 요컨대 모두는 자기 자신의 상황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좋은’ 미래를 모색한다. 그렇다면 누구의 기획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관철될까?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자의 기획이다. 기준은 결국 그의 비행을 참지 못하는 부모에게 이끌려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기준은 끝까지 영문, 영준 형제와 어울리고 싶다. 영문, 영준 형제는 자상한 척 시혜와 동정, 멸시의 시선을 교차로 건네는 기준의 부모님이 밉다. 하지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기준의 부모와 달리 자기 삶 기획을 관철할 아무런 자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을 반영하듯, 〈여름이 지나가면〉에는 어른과 사회가 없다. 자식에게 계급을 세습하는 일만이 중요한 부모와 형제를 방치하는 학교와 이웃이 있을 뿐이다. 공적 역할을 상실한 사회, 신자유주의적 경쟁관계가 만연한 사회는 모두가 자기 안위만을 고민하게 만들었고, 아이들까지 폭력적인 방식으로 여기에 연루되게 했다. 아이들 사이의 폭력과 경쟁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어르고 달래고 뒷받침해줘야 할 어른과 사회가 사라져가는 속도와 비례해 더욱 첨예해진다.
이렇게 결과만을 중시하는 경쟁 문화는 어린이들의 세계까지 잠식했다. 꼼수를 써도 좋은 학교 가서 성공하기만 하면 된다는 부모와 친구를 괴롭히더라도 권력감만 느낄 수 있으면 된다는 기준은 닮은 데가 많다. 영화는 여러 질문을 남긴다. 서울로 돌아간 기준은 부모의 뜻대로 ‘좋은 대학’에 들어가 부모의 계급을 세습할 수 있을까? 그런다고 기준이 정말 행복해질까? 영문과 영준은 어떨까? 그들에게 다른 삶 기획이 들어설 기회가 주어질까? 아마도 높은 확률로 지금 그들이 부득이하게 들어선 ‘비행’의 길에서 오랜 시간 허덕이지 않을까?
어린이, 청소년의 성장을 다루는 최근의 영화에서 이들이 마주한 세계는 종종 출구 없는 미로처럼 보이는 경향이 보인다. 그 양상은 갈수록 폐쇄적으로 변하고 있다. 이들이 마주한 세계는 처음부터 망해 있는 상태다. 기존 질서에 안착한 어른들은 뒤틀린 세계에 무심하고, 탈락한 어른들은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늘 외롭다. 사회가 늘 ‘우리의 미래’라며 상찬하는 어린이들은 이런 세계에서 성장하고 있다. 때문에 ‘어린이가 희망이다’라는 말은 지독한 위선이다. 썩은 토양에 뿌린 씨앗이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이 어불성설인 이유와 마찬가지다.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을 통해 제25회 국제전주영화제에 기자로 초청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여름이 지나가면〉 상영 시간은 아래와 같습니다. 다른 영화 상영 시간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월 3일 10:00 메가박스 전주객사 5관(213)
-5월 5일 21:00 CGV전주고사 4관(457)
-5월 8일 10:30 메가박스전주객사 1관(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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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메인 예고편
누가 봐도 아름다운 부부 가후쿠와 오토.
우연히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가후쿠는 이유를 묻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년 후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되어 작품의 연출을 하게 된 가후쿠.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전속 드라이버 미사키를 만나게 된다. 말없이 묵묵히 가후쿠의 차를 운전하는 미사키와 오래된 습관인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들으며 대사를 연습하는 가후쿠. 조용한 차 안에서 두 사람은 점점 마음을 열게 되고, 서로가 과거의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눈 덮인 훗카이도에서 내면에 깊숙이 자리 잡은 서로의 슬픔을 들여다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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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풍요로움이 과잉이 되어 또 다시 위협받는 인류, 위태로운 세상에 오직 원더 우먼만이 희망이다! 그 어떤 적도 피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