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1-11-03 09:41:13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 톱니바퀴에 깃든 낭만
넷플릭스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뛰어난 금고털이 실력을 지니고도 평범한 은행원으로 살아가던 '루트비히 디터(마치아스 슈바이크회퍼)'. 그런 그의 앞에 어느 날 그의 실력을 증명해보라는 의문의 메시지가 온다. 메시지 속 주소를 찾아간 디터는 우연히 금고털이 대회에 참여하고, 유감없이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다. 이에 몰래 디터를 관찰하던 '그웬(내털리 이매뉴얼)'은 그에게 접근해 전설로만 전해지던 네 개의 금고를 터는 범죄에 합류해달라고 요청하고, 기계적인 삶에 지칠 대로 지친 디터는 새로운 모험을 약속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디터는 그웬을 비롯한 팀원 '브래드(스튜어트 마틴), '코리나(루비 O. 페)', '롤프(거스 칸)'와 함께 좀비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는 틈을 타 전설이 될 은행털이에 나선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첫 넷플릭스 작품인 <아미 오브 더 데드>는 공개 후 호불호가 강하게 갈렸던 작품이었다. 좀비 영화나 블록버스터에게서 기대하는 서스펜스나 액션의 비중은 적었던 반면, 딸의 죽음을 계기로 감독 본인의 삶을 반추하는 듯한 고백록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미 오브 더 데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해서라도 딸을 살리고자 하는 부성애에 주목했다.
또한 그 논의를 확장시켜 사회적 차원에서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사회비판적 시각도 보여줬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법한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를 '제우스'라는 신의 이름을 빌린 좀비에게 넘기거나 기껏 훔쳐낸 달러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잭 스나이더 감독의 아이디어에 동의한다면 <아미 오브 더 데드>는 나름대로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상업 영화로서의 매력을 갖추지 못한 채 실패한 낯선 작품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상은 <아미 오브 더 데드>의 프리퀄이자 잭 스나이더가 각본과 제작을 맡은 신작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작에서 열쇠공이자 금고털이범으로 등장했던 루트비히 디터의 이야기를 다룬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은 금고, 신화, 그리고 낭만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통해 <아미 오브 더 데드>의 콘셉트를 충실히 따라간다. 우선 영화의 중심 소재이자 루트비히 일생의 목표인 금고는 루트비히의 삶을 비유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이 금고의 역할이듯이 은행원인 디터 역시 철저히 금고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특히 규칙적인 톱니바퀴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금고처럼 그의 삶도 철저히 기계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의미심장하다.
디터는 금고의 잠금장치를 여는 일을 가장 좋아하며, 그의 꿈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네 개의 금고를 자신의 손으로 여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를 담은 유튜브의 조회수는 0이고, 유튜브 밖의 세상에서 그는 매일 아침 똑같은 커피와 빵을 먹고,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마치 <모던 타임스>에서 컨베이어 벨트 속을 돌아다니던 찰리 채플린이 그러했듯이, 디터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하나의 부품이 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은행원으로서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도 자신의 업무나 삶에서 아무러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디터의 모습을 보면 작중 금고가 돈의 무가치성, 무의미함을 보여주며 현대 사회에 대해 통렬히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줬던 전작의 의미를 온전히 이어가는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창구에 앉아 있는 그가 창구 앞에서 빨리 돈을 달라며 극도로 흥분한 할머니 고객과 뉴스 속보에서 피와 살을 탐하는 좀비의 모습을 겹쳐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금고는 그 존재 자체로 이 작품이 전작처럼 신화적인 구성과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 힌트는 금고의 이름에 있다. 작중 등장하는 네 개의 금고는 각각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속 네 막의 제목인 라인골트(Das Rheingold), 발퀴레(Die Walküre), 지크프리트(Siegfried), 괴터데머룽(Götterdämmerung)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이 금고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특히 각 금고를 해체하기 전후로 오페라 내용이나 모티브와 유사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라인골트에서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훔친 알베리히를 디터가 자신과 일치시킨다거나, 발퀴리에서는 지그문트와 지클린데를 연상시키는 디터와 그웬의 로맨스가 본격화되는 식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형식에서도 신화적인 모티브를 확인할 수 있다. 전설적인 네 개의 금고를 만든 장인 한스 바그너의 이야기를 '옛날 옛적에 뮌헨이라 불리는 아주 먼 곳에(once upon a time, in a farsaway land called Munich)'로 시작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문구는 현대의 신화라 불리는 <스타워즈>의 상징과도 같은 오프닝 타이틀 '오래전 멀고 먼 은하계에(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를 연상시킨다.
이에 더해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잡아서 항상 꿈꿔오던 모험에 나서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곧 은행원이 아닌 금고털이로 거듭나는 디터의 서사는 신화적 이야기의 전형에 충실하다. 이는 전작에서 좀비 영화의 서스펜스나 볼거리 대신 아버지와 딸의 가족사에 더 집중했던 것처럼 돈을 두고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하이스트 장르의 쾌감 대신 다른 것에 주목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바로 기계처럼 살아가던 한 개인이 삶의 의미를 찾고, 진짜 살아있는 인생을 누리는 낭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그웬의 등장을 기점으로 영화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우연으로 시작해서 운명적인 로맨스로 발전하는 디터와 그웬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 역시 낭만으로 가득한 꿈과 모험이기 때문이다. 결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둘은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더 가슴 뛰고 흥분되는 미래를 기대하며, 그런 그들에게 금고 속에 들어있는 거액의 돈은 단지 전설로 여겨지던 금고를 실제로 여는데 성공했다는 증표에 불과하다. 이처럼 돈보다 인생의 목적을 쫓는 연인의 이야기는 돈을 매개로 그웬과 관계를 맺어왔던 브래드의 삶과 대비를 이루면서 더욱 가치 있게 빛난다.
또한 낭만이라는 키워드는 디터의 금고털이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이제 그에게 금고털이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오랫동안 고대했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동시에 기계처럼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일깨우는 쾌감을 맛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디터 본인이 금고 잠금장치나 다름없던 인생에서 깨어나듯이, 금고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자본주의의 방패막이었던 금고는 디터가 떠나는 낭만적인 모험의 일부이자 목적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영화는 이러한 변화를 바그너의 오페라 음악을 통해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디터는 항상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인 바그너의 오페라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하는데, 이 대목이 마치 그웬이 자신의 삶에 새로운 모험과 낭만을 불어넣었듯이 디터도 굳게 닫힌 금고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렇게 현실보다 이상과 꿈을 좇는 낭만으로 가득한 디터의 이야기를 그가 전편에서 처음 등장한 장면과 연결시킨다. 즉, 그의 이야기는 네 개의 금고 중 유일하게 만나지 못했던 마지막 금고인 괴터데머룽을 만나고 그의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때 금고의 이름이 '신들의 황혼'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로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이루기 위해 좀비들이 가득한 도시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고도 그 황혼의 아름다움을 장식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이나 영웅들처럼 그의 모험에도 낭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저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루트비히의 디터의 삶은 신화의 정서가 함축적으로 응축된 이야기로 끝난다.
문제는 전작의 콘셉트만큼이나 똑같이 이어받은 단점으로 인해 잭 스나이더가 보여주고자 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전작에서 좀비 영화의 매력을 살리는 대신 그 틀만 빌려왔듯이 이번에도 하이스트 영화라는 장르의 틀만 빌릴 결과 장르 영화, 상업 영화로서의 매력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일례로 다른 하이스트 영화들의 존재를 직접 언급하며 쿨한 척하는 대사는 그들이 언급한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형화된 캐릭터들의 존재 때문에 그다지 효력이 없다.
또한 범죄 계획을 설명함과 동시에 해당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편집의 경우, 이미 숱하게 사용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가이 리치 감독의 작품처럼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지도 못한다. 인터폴과 그웬 일행 사이의 악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쫓고 쫓긴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추격전에서도 그다지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워낙 분량이나 비중이 그웬과 루트비히한테 쏠려 있다 보니 이들의 대립, 긴장, 갈등이 설 자리가 없다.
이에 더해 시리즈라는 관점에서도 성공적인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속편까지 제작 진행 중인 <아미 오브 더 데드> 세계관은 엄연히 좀비 영화 시리즈물이다. 문제는 그 특징이 이번 작품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좀비의 존재가 뉴스를 통해 등장하고 영화 전개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기는 하나, 디터의 악몽과 같은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좀비는 그저 배경 설정, 상황 설정을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데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전편과 연동되는 대목들이 등장하고 디터의 관점에서 보면 새롭게 느껴질 장면이나 대사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미 본편의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이들이 프리퀄의 장점이 되거나 필요성을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분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 결과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은 본편의 장단점을 쏙 빼닮았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에 계속 애정을 갖고 남아있을지, 아니면 큰 기대와 미련 없이 시리즈에서 하차할지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나 다름없어 보인다.
P(Poor, 형편없음)
스케일이 작아진 것만 빼면 본편의 장단점, 메시지와 주제의식까지도 쏙 빼닮은 프리퀄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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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클라베 | 의심으로써 바로 세운 신비함과 믿음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교황 사망 이후 추기경단 단장 '토마스 로렌스'(랄프 파인즈) 추기경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수장을 선출하는 선거, '콘클라베'를 총괄한다. 로렌스는 무사히 선거를 관리한 뒤 다음 교황이 뽑히는 대로 교황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교황청에서 일하는 동안 오히려 신앙심이 약해진 것 같았기 때문.
하지만 콘클라베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혼란스러워진다. 후보 간의 정치 공세가 시작되면서 유력 후보인 '알도 벨리니'(스탠리 투치), '트랑블레'(존 리스고), '아데예미'(루시언 음사마티), '베니테스'(카를로스 디에스), '테데스코'(세르조 카스텔리토) 추기경과 관련된 추문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 이에 로렌스는 추문의 진상을 밝혀내는 데 집중한다. 그러는 사이 갑작스레 유력 교황 후보로 떠오른 그는 새로운 시험대에 오른다.
의심 위에 지어진 교회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토마스는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회자되는 사도는 아니다. 초대 교황 베드로, 배신자 유다, 복음서 저자인 요한 등에 비하면 성경 속 활약이 부족하기 때문. 12 사도에 포함되지 않는 사도 바오로보다도 알려진 행적이 부족할 정도다. 그나마 부각되는 이미지도 부정적이다. 예수의 손과 허리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보지 않는 한 그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린 제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사도 토마스는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의심은 가장 강력하고 명확한 신앙고백을 낳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의 신성을 의심한 것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환희를 담아 예수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Dominus meus et Deus meus)”이라고 고백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 그 자체임을 밝힌 토마스의 고백은 기독교의 근간인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된다.
즉, 토마스는 흔히 간과하는 신앙의 핵심 중 하나, 의심을 상징하는 사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거나, 자신의 확신에 사로잡혀서 새로운 앎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신까지도 의심하는 사람의 믿음이 더 건강하다는 것. 실제로 토마스를 혼내는 대신 제자의 의혹을 풀어주고 확신으로 가득 채워준 예수의 모습에서도 맹신보다 의심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토마스의 가르침은 에드워드 버거 감독이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콘클라베>를 통해 스크린 위로도 펼쳐진다. 또 한 명의 토마스,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이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를 관장하면서 깨달은 의심의 중요성이 정치 스릴러의 형식으로 드러나기 때문. 특히 그의 깨달음이 개인적, 종교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 함의로도 확장되기에 <콘클라베>는 더욱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의심하는 '토마스'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은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그의 의심은 크게 세 가지다. 우선 전임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의심한다. 추기경단 단장으로서 교황의 최측근인 그조차도 교황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 때문. 그는 교황의 사인이 무엇인지, 선종 전에 이상한 낌새는 없었는지를 캐묻는다. 더 나아가 교황이 마지막으로 접견한 사람과 처리한 업무는 무엇인지도 조사한다.
콘클라베 중에는 교황 후보로 거론된 추기경들을 의심한다. 특히 그들의 추문을 조사한다. 수녀와 관계를 맺어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 자신의 추기경직 파면 소실을 감추고 추기경들을 매수했다는 소문. 교황직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거나, 라틴어 미사 부활 및 성소수자 차별과 같이 시대를 역행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로렌스는 새 교황이 결정되는 순간까지도 모든 추문의 진상을 확인하려 애쓴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 유력 후보들의 추문이 하나 둘 사실로 밝혀지자 콘클라베 결과는 예측불가능해진다. 그 과정에서 로렌스는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유력 후보로 떠오른다. 진심을 담은 그의 강론이 결정적이었다. 콘클라베 전 미사에서 그는 십자가에 매달릴 때까지 신을 의심한 예수처럼 의심하는 교황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의심 없는 확신이 통합의 적이고, 다양성이 곧 교회의 힘이라 믿었으니까.
그의 강론은 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촉구하는 진보 성향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았고, 그를 차기 교황 후보로 만들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기뻐하거나 욕심내지 않는다. 과거보다 신앙이 약해졌다고 느끼는 그는 자신이 과연 교황직에 적합한지 의심한다. 더 나아가 다른 추치경들의 추문을 조사한 것이 교황이 되고 싶은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관리자의 업무에 충실한 것인지도 자문한다. 이처럼 끊임없이 의심하는 그는 실로 '토마스'답다.
의심으로써 쌓아 올린 스릴러
삼중의 의심 덕분에 <콘클라베>는 정치 스릴러로서의 쾌감과 종교 영화로서의 메시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아낸다. 우선 로렌스가 모든 소문을 하나씩 확인해 나가는 과정은 탁월한 서스펜스를 조성한다. 로렌스도, 관객도 진실을 모르는 입장이다 보니 마지막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의 불안감과 긴장감을 지속적으로 유도할 수 있기 때문.
랄프 파인즈의 연기도 한 몫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 <007> 시리즈, <타이탄>과 같은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볼트모트, M, 하데스 등의 역할을 맡은 배우이지만, <콘클라베>는 그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다. 모든 이야기와 의도, 장르적 쾌감까지도 토마스 로렌스의 의심에서 비롯되는데, 랄프 파인즈는 냉정한 듯 흔들리는 눈빛으로 추기경이라는 지위 뒤에 숨은 인간적인 연약함을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한 소문에 관한 상반된 정보가 투표 전후로 제공되거나, 얼마 간의 텀을 두고서 소문의 진실을 확인하는 식의 완급조절도 인상적이다. 특정 캐릭터를 악역으로 단정하지 않으면서 정치극으로서의 스릴을 끌어올리기 때문. 관객이 캐릭터가 전혀 다른 추기경 중 호감 가는 인물을 응원하도록 유도한 뒤, 자신이 선택한 캐릭터의 진실과 그의 최후를 지켜보고 확인하는 과정의 긴장감과 묘미가 상당하다.
이에 더해 일반적이지 않은 배경도 정치극의 스릴을 강화한다. 카메라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콘클라베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교황 사망 시 반지에 표식을 남기는 것, 하얀 연기와 검은 연기를 만드는 방법, 투표 순서 및 방법 등. 이러한 디테일은 콘클라베의 신비함을 벗기고 속살을 들여다보는 관음증적 쾌감을 충족시키며, 정쟁의 서스펜스도 증폭시킨다. 관음증적 욕망과 권력욕이라는 인간적 욕망이 만나 서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스릴러로 벗겨 낸 신성함
이 대목에서 삼중의 의심은 종교적 메시지도 전해준다. 교황 선거를 정치 스릴러로서 풀어낸 <콘클라베>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성함도 한 꺼풀 벗겨낸다. 실제로 카메라는 전통에 스며든 현대적 흔적을 포착한다. 최신식 호텔을 연상시키는 교황청 숙소, 어벤져스 기지처럼 자동적으로 닫혀서 외부와의 소통을 막는 창문, 투표지뿐만 아니라 염소산칼륨을 함께 태워서 만드는 하얀 연기와 검은 연기가 대표적이다.
현대적 이미지는 교회와 현실의 갈등, 전통과 미래의 모순을 시각화한다. 콘클라베의 속살을 보여줌과 동시에 가톨릭 교회의 속살도 함께 드러내는 셈이다. 실제로 극 중 추기경들을 둘러싼 추문은 사실 낯설지 않다. 이미 수차레 지적받고 공론화된 가톨릭 교회의 오래된 문제들이기 때문. 일례로 신부들의 성 추문과 교회의 조직적 은폐 시도는 <스포트라이트>나 <신의 은총으로> 같은 영화가 여러 차례 다룬 바 있다.
추치경들의 부패도 심심찮게 비판받고 있다. 당장 프란치스코 교황도 2020년에 죠반니 안젤로 베추 추기경을 시성성 장관에서 전격 경질한 바 있다. 베드로 성금으로 부동산에 투자하고 교회 기금을 사적으로 활용했다는 문제제기가 경질 이유였다. 이에 더해 교회의 방향성 역시 뜨거운 감자다. 성소수자 및 이혼자, 타 종교인에 대한 처우와 관련해서는 교회 내에서도 좀처럼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즉, <콘클라베>는 전통과 관습을 고수하는 교회가 현대 사회에 발맞추지 못한 세태를 비판하며 변화를 촉구하는 영화다. 그렇기에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 성당이 무너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로마 시내에서 발생한 테러로 인해 성당의 창문 한쪽이 파손되고, 추기경들은 부상당한다. 이 이미지는 교회와 세속을 가르는 강고한 경계의 붕괴와 현대 사회의 변화에 적응 못한 교회의 퇴락을 동시에 상징하는 듯하다.
문을 열어야 보이는 진리
흥미롭게도 <콘클라베>는 폭탄 테러가 발생한 순간의 연출을 통해 교회와 사회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로렌스는 삼중의 의심 끝에 자기 이름을 투표지에 적는다. 그가 투표함의 문을 열고, 표를 넣으며 함의 문을 닫으려는 바로 그 순간, 시스티나 성당은 폭탄 테러로 인해 먼지로 뒤덮이고 콘클라베는 중단된다. 사건이 수습된 뒤 콘클라베는 파손된 시스티나 성당의 창문이 여전히 열려 있는 상태로 재개된다.
이때 핵심은 '문'이다. 문은 로렌스의 의심을 상징하는 오브제이기 때문. 로렌스에게 문은 '판도라의 피토스'나 다름없다. 피토스 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한 판도라처럼 로렌스는 문 뒤에 숨은 진상을 찾을지, 아니면 문을 외면할지 고민을 거듭한다. 일례로 그는 행방불명된 보고서를 찾기 위해 봉인된 전임 교황의 방문을 열어야 할지 고민한다. 추문에 휩싸인 추기경들을 조사하기 위해 그들의 숙소 문을 열어야 할 지도 고뇌한다.
하지만 의심 끝에 문을 열면 그는 고통스러울지언정 진실에 한 발짝씩 가까워진다. 즉, 문은 의심을 멈추지 않을 때 비로소 진실과 진리가 보인다는 메시지의 상징이다. 테러 이후 성당 창문이 열린 채로 콘클라베가 재개된 이유이기도 하다. 반대로 그가 의심을 멈추고 투표함의 문을 닫으려는 순간, 콘클라베는 엉망이 된다. 마찬가지로 의심 없이 자신이 믿는 신과 교리에 대한 확신으로 무장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에 의해서.
의심으로 빚은 <콘클라베>의 진의
테러 이후 다른 종교에 더 강경하게 대응하자고 주장하는 보수파 추기경들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그 누구든 의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더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최근에는 보수파 추기경들처럼 특정 이념에 경도되거나, 특정 사상을 확신하는 극단주의자들로 인해 갈등이 재생산되는 악순환이 커지는 중이기 때문. 이는 <콘클라베>의 메시지에 종교적 차원을 넘어서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새로 뽑힌 교황도 의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교회 내에서 비주류 지역으로 여겨지는 분쟁 지역에서만 활동했고, 인터섹스이지만 스스로를 남성으로 규정하는 인물이다. 그의 활동과 정체성은 가톨릭 교회가 현대 사회과 교회 사이의 문제와 모순에 대해 관습과 전통에 의존하는 대신 새롭게 대응해야 함을 상징한다. 이는 그가 순결을 뜻하는 '인노첸시오'를 새 교황의 이름으로 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콘클라베>의 모든 플롯을 뒷받침하는 로렌스의 서사도 새 교황의 선출로 완결된다. 이는 콘클라베 시작 미사에서 의심하는 교황이 필요하다던 로렌스의 강론에 맞는 응답이 신으로부터 전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자신에게 아직 신앙이 있는지, 다시 기도할 수 있을지 의심하던 그는 콘클라베로써 답을 찾은 셈이다. 그렇기에 콘클라베 기간 동안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림과 동시에 영화가 끝나는 결말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Exceeds Expectations 기대 이상
끝없는 의심의 다른 이름, 진리와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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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권태 속에서 만난 그들만의 이끌림, "스프링 블라썸"
10대와 30대의 만남, 어떻게 볼 것인가?
나이 차는 꽤 나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서로 간의 공통점이 많은 둘.
이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인 건가?
10대인 '수잔'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 같지만, 그 끝에는 항상 수잔 혼자만이 홀로 남아있다.
수잔이 원해서 일부러 또래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는 장담할 순 없겠지만
수잔은 자신이 또래 친구들과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하루, 수잔은 또래 친구들처럼 파티에도 참석하여 그들만의 어울림에 끼려고 하지만 이마저도 잘 맞지 않은지 어영부영 끝나고
집 가는 길에도 친구들과 같이 가기는 커녕 혼자 따로 떨어져 간다.
그렇게 수잔은 또래 친구들과 조금씩 멀어져 간다.
일상생활, 학교생활 모두에 지친 수잔은 매일 이 거리를 드나드는데,
그곳에서 한 남자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수잔은 한 순간 그에게 빠져 그의 주위를 맴도는데..
'라파엘'은 수잔이 매일같이 드나드는 거리에 있는 한 극장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배우로,
몇 년째 똑같은 대사, 똑같은 연기만 기계처럼 반복하고 있는 자신에게 매우 지쳐있는 인물이다.
이 둘 사이를 자세히 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서로 같은 점이 있어서인지 둘은 서로를 알아보고 눈이 맞으며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수잔'과 '라파엘'의 공통점을 찾아보자면,
우선 수잔은 항상 똑같은 일상에 지쳐있는 인물이다.
여자 친구들, 남자 친구들, 선생님, 저 자신까지도.
그 모두에게 다 지쳐있어 지루하기만 한 하루를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학교 생활, 일상 생활이 모두 즐겁지 않을 수밖에.
라파엘 역시 매번 지겹도록 반복되는 일상에 심히 지쳐있는 상태인데,
연극이 행복하냐, 연극을 즐기고 있냐는 수잔의 물음에 무섭다고 답할 정도로 라파엘은 연기하는 법을 잊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이 점에서 봤을 때, 수잔과 라파엘은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일상에 지쳐있다는 점에서 서로 공통점을 가진다.
즉, 이 둘 모두 삶의 권태기를 맞이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수잔과 라파엘 모두 자신이 속해있는 곳에서 소속감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잔을 보면 친구들이 말을 걸거나 학교생활 관련하여 물어볼 때 일부러 회피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도 수잔이 먼저 거절하기 일쑤이다.
그러다보니 친구들 역시 처음엔 다가오다가도 나중에는 수잔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듯 수잔은 자신이 속해있는 곳에 자신이 원해서 소속감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
라파엘도 마찬가지이다. 연극이 끝난 후 회식 자리를 가지려고 하면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한다.
회식할 거냐는 물음에 '아니'라는 대답만 내놓기 일쑤였다.
수잔과 함께 있을 때도 동료들이 회식할 거냐는 물음에 예의상 간다고만 하지, 실제로는 가지 않는다.
이렇듯 라파엘 역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는다.
즉, 소속감에 들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수잔과 라파엘은 각자 자신의 나이대에 맞는 사람과는 잘 어울리지 않고
자신과는 다른 나이대에 더욱더 관심을 가지는 듯 싶기도 하다.
그렇게 10대인 수잔과 30대인 라파엘이 만나는 횟수가 잦아들면서 가까워지게 되고,
아침 일찍 만나 밥까지 같이 먹게 되는 등 서로에 대해 알아가게 되는데..
아침 일찍 만나 같이 밥을 먹게 된 그날, 라파엘은 수잔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연극의 서곡에 흘러나오는 오페라 곡을 들려준다.
이 오페라 곡을 들으면서 둘은 서로 짜지 않았는데도 음악에 몸을 맡긴 채 같은 동작을 취하며 춤을 추게 되는데,
이 곡이 어쩌면 두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라파엘이 좋아하는 오페라 곡은 영화에서 총 두 번 나오는데,
그 중 첫 번째로 들었을 때는 서로의 호감 정도를 표시하며 확인하는 의미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그리고 뒤이어 또 한 번의 오페라 곡이 나오는데, 두 번째로 나왔을 때는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졌다는 의미를 표현하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오페라 곡을 통해 처음에 표현했던 동작이나 움직임들이 두 번째로 표현했을 때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움직임이 느껴졌으니까.
처음에는 두 사람의 호감을 표시했다면, 두 번째에는 두 사람의 깊어진 사랑을 표현한 것 같달까.
영화를 보다 보면 아무래도 10대와 30대와의 사랑이다보니 그 차이를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사탕'과 '담배'가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수잔과 라파엘은 한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게 되는데
라파엘은 담배를, 수잔은 라파엘의 첫 선물로 사탕을 사게 된다.
담배는 10대인 수잔이 살 수 없는 영역이자 10대와는 좀 거리가 있어보이는 소재이고,
사탕도 취향이다보니 확답을 지을 순 없지만 30대보다는 10대를 나타내는 데에 더 가까워보이는 소재라고 느껴진다.
두 사람이 상점에서 산 물건을 봤을 때 10대와 30대의 간극과 사랑이 동시에 확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사탕과 담배외에도 또 다른 소재로도 10대와 30대간의 간극이 느껴지는 소재가 있는데,
그건 바로 '석류 레몬에이드'와 '맥주'이다.
라파엘은 맥주를, 수잔은 석류 레몬에이드를 시키는 장면에서 그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맥주는 아직 수잔이 먹기에는 어린 나이에 해당되고 보통 어른들이 주로 마시므로 성인에 해당되고,
석류 레몬에이드는 그에 반대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아 10대와 30대 간의 간극이 잘 보여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10대와 30대와의 만남..?
솔직히 약간 꺼려지는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당혹스러운 면도 있었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만남을 보면 처음부터 색안경 끼듯이 편견을 안고 바라봤던 것 같다.
하지만, '스프링 블라썸'을 보면서는 나이차가 무색하게도 서로간의 어떠한 공통점이 있어 마음이 잘 맞는다면 이것 또한 사랑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사랑에는 나이가 없구나 하는 생각 또한 들었다.
서로를 향한 이끌림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는 것을.
그 순간 과거, 편견을 안고 봤던 나 자신이 좀 부끄러워졌다.
나이대가 비슷해야 그래도 좀 더 잘 맞을 거라는 나의 편견..
또한 영화 안에서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등과 같은 장치가 없는데, 이렇듯 오리지널 감성으로 사랑에 대한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표현해 주었다는 점이 가장 인상깊은 듯 싶다.
덕분에 옛날 감성의 느낌으로 사랑에 대해 집중해서 본 느낌이랄까. 오히려 그 둘만의 관계에 더 집중해서 보게 된 가장 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스프링 블라썸'에 대한 나의 평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둘을 보고 있으면 괜히 나의 봄날도 기다려지고, 사랑에 나이차는 무색하다는 걸 느끼게 해준다.
가장 눈여겨 봤던 점! 1. 오페라 곡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2. 10대와 30대의 만남을 나타내주는 소재가 있을까.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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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의 신념에 동의한다.
* 이 리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영웅 스토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마블을 만난 뒤부터는 챙겨보고 있다. 마블은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헐크 등을 그려낸 ‘마블 코믹스’로 시작하였다. 지금은 그 캐릭터들로 영화를 만들어서 우리나라에선 ‘마블’ 하면 영화의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마블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곳이 ‘DC’인데 슈퍼맨, 배트맨 등이 이곳에 소속되어 있다.
예전에 본 어떤 리뷰에 "디씨의 영웅에는 스토리가 없고, 마블의 영웅은 스토리가 있다"라고 했는데 그 말은 참말로 찰떡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캡틴 아메리카는 아직도 애정이 가지 않는 캐릭터라서 전체적인 스토리를 이해하기 위해 꾸역꾸역 챙겨보기만 한다.
사실 어벤져스에 대한 그리고 마블에 대한 리뷰는 검색만 해도 많이 나온다. 약 1,100만의 관객이 있었으니 직접 보지는 않았어도 보라색 악당인 타노스를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블의 전반적인 세계관이나 영웅에 대한 캐릭터 분석도 재미있지만, 환경운동가로서 타노스의 이야기를 꼭 해보고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음모론이나 미스터리도 참 좋아한다. 언젠가 스쳐 지나가며 읽었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인간이 인구의 수를 조절하기 위해 행하는 자정작용 같은 것이다"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나에겐 신뢰감을 주는 이야기였다. 조금 다르게 말해서 이 말이 그렇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연은 오염된 것에 대해 자정작용을 끊임없이 하고 있고,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면 무의식중으로 그런 행동들을 행하는 것이 아닌가 하기 때문이다. 최근의 코로나바이러스도 '인재'냐 '자연재'냐의 논란이 많이 있지만 인재라고 하더라도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말을 쓰면 아주 조금은 쉬운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도덕적으로 혹은 인성적으로 부족한 사람의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두 완성형은 아니니까 하고 위안을 해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말도 안 되고 아주 위험한 발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 타노스가 딱 비슷한 말을 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인구는 늘어가고 격차는 심해지고.
타노스가 자신의 고향인 타이탄의 인구를 줄이는 것을 제안했지만 설득이 되지 않았고, 결국 망해버리고 말았다. 타노스는 (아마도)자신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계획을 세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심지어 딸처럼 아끼는 가모라 고향과 그와 비슷한 몇 개의 별에서 인구를 줄이는 것이 답이라는 것이 증명되었으니 이를 전 우주적으로 확장할 방법을 찾아서 실행에 옮건 것뿐 아닐까?
다들 알고 있겠지만 지금의 지구는 타노스가 걱정하는 딱 그런 상황이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몇 년 전, 아니 몇 개월 전만 해도 기후위기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이제는 지상파의 대기업 광고에서도 '기후 위기'라는 단어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남의 이야기였던 재난이 나의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게 되기까지 인정하게 만들게까지 정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음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코로나로 인해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2020년 여름 우리나라에는 물폭탄이 쏟아졌다. 그리고 이 현상을 기후위기로 인식한 국민들이 많아졌다. 수치로 따지면 관측 이래 가장 강수량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다른 나라에도 이상 기후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20년은 최근 10년의 어떤 해 보다도 가장 한국의 사계절이 뚜렷하게 나타난 해이기도 했다. 이를 이산화탄소의 발생량이 줄어서라고 극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다시 돌아온 뚜렷한 계절의 변화가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렇다고 타노스의 방식이 전부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으로 인한 고통이 없고, 잘살고 못살고 대단함과 비루함 관계없이 랜덤으로 반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참 우습게도 내가 사라지는 사람 명단에 있더라도 그렇게 나쁜 상황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 버렸다. 타노스 역시도 본인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손가락을 튕겼다.
코로나로 인해 인간의 간섭이 줄면서 나타나는 다른 변화들도 있었다. 인간이 찾지 않는 해변과 도시에 야생동물이 찾아왔고, 배가 다니지 않으니 물이 깨끗해졌고, 비행기가 적게 날아다니니 하늘이 맑아졌다. 환경운동가들이 늘 말하던 '인간의 활동'이 줄어들게 되면 변화하게 될 자연과 환경은 증명해 보일 길이 없었는데 바이러스 하나로 전 세계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지구상의 최상위 포식자라 불리는 인간의 활동이 조금 줄어든 것만으로도 이렇게 큰 변화가 나타나는데 반이나 줄어들게 되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기대가 되기도 한다면 위험한 발상일까?
그래서 그런지 타노스는 내가 본 마블의 캐릭터 중에는 가장 영특하고 인간적이고, 대의적인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근데 그 목적이 개인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었고 누군가를 잃은 슬픔을 겉으로 표현할 줄 아는 그런 캐릭터였다. 사실 보면서는 '가식 아니야?' 했고, 그가 다른 캐릭터들을 죽이는 것에는 화가 났지만 결국엔 그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그런 이중적인 마음마저 생기게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타노스가 아픈 몸을 이끌고 어떤 오두막 같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씬에 대해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요즘 현대인들이 바라는 삶이 아니냐며 웃었다. 퇴직하고 시골 내려가서 휴식하는 삶, 타노스, 우리의 타농부는 대의를 이루고 휴식의 정점인 귀촌까지 해냈다고 말이다.
그래서 다음 편이 기대된다. 감독(안소니 루소, 조 루소)들이 이번 편은 전적으로 타노스의 시점에서 만들어진 영화라고 했다. 이번 편에서는 타노스의 인간적인 면이 아주 조금 나타났지만 다음 편에서 분명 그 마음이 극대화될 것이고 (귀촌해서 혼자 살다 보니 외로움이 증폭될 것이라 판단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행동들이 그를 파멸로 이끌게 될 것으로 보인다.
마음속 깊은 곳에선 파멸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 바람이긴 하지만 말이다.
다음 편에서 타노스의 행복을 바라면서 리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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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전쟁 속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전쟁은 언제나 지배자의 논리에서 발생한다. 소시민들은 언제나 그들의 논리의 희생양이 되어 왔다. 보스니아는 각기 다른 민족, 종교가 혼재되어 공존했던 곳이었는데 항상 그런 곳들은 정치인들이 분쟁을 만들어내기 적합한 환경이라, 보스니아는 별안간 세르비아인들의 공격을 받는다. 그렇게 그들은 4년간 고립되었다. 이 이야기는 고립된 환경 속에서도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기록이다.
1.소련이 지나간 자리에
소련이라는 나라는 어떤 지점에서 대단한 나라인 것이 다른 민족, 인종, 종교들을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통일해왔다. 그 말은 즉슨 그들의 이득에 따라 국가의 경계선이 그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배자의 논리이기에 일반 소시민들은 매일 밥을 먹고 학교나 직장에 다니는 것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그저 지배자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어놓은 경계선들이 해제되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꼭 독재자들이 등장한다.
독재자들이 으레 그렇듯 민족주의를 들고 나타난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를 봉쇄하고 지옥으로 만들어버렸다. 보스니아에 이슬람만 사는 것도 아니었고,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모든 사람들이 한순간 위험에 처했다. 어디든 정치인들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위치에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일부 사람들의 이기심을 건드려 분란만 만드는 사람들이 더 많다. 굳이 같은 민족들끼리 함께 살던 사람들의 땅을 자의적으로 나누어 이산가족을 만들어내고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일개 사람들의 불만이 학살로 이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2.U2의 등장, 지옥 속에서도 희망과 사랑은 있다
사라예보 시민들은 오늘도 지상도로에서 총을 맞을 수도 있었는데 그 지옥 속에서도 음악을 듣고 클럽을 만들고 결혼식도 연다. 지배자들이 만든 세상 속에서 고통받고 있지만 그들에게 휘둘리지만은 않는다. 인간이 그저 인간의 목숨이 경시되는 전쟁터 속에서도 그들은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위한 음악을 놓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U2가 등장하는데, U2라는 그룹에 대해 잘 몰랐음에도 이런 그룹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로웠다. 문화예술인이 일반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가장 선하게 사용한 그룹이 아니었을까 싶다. 예술인들이 자신만의 정치적 이슈를 예술에 녹아내는 데에 백 프로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누가 봐도 학살의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류애를 놓치지 않도록 희망의 끈을 쥐어주는 것은 결국 예술, 음악이었던 것이다.
과거 우리 나라에서도 음악과 영화에 검열이 있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정부가 이렇듯 문화예술을 신경썼던 것은 지배자의 논리를 무시하고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화합하게 만드는 매개체라는 것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어 왔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예술은 그저 추상적인 영역으로만 여겨지지만 감동, 사랑, 애정, 실망, 분노 모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효과를 일으킬지 알 수 없어 더 강력하다. U2가 사라예보 사람들에게 심어주었던 것은 희망이자 기쁨이요, 외부 사람들의 관심이었을 수도 있다. 그 관심 덕분에 그들이 4년이란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국제 정치는 외면했지만 예술계는 그들의 저항을 승화시켜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3. 전쟁이란
전쟁은 하등 쓸모가 없다. 그저 지배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지배자들은 언제나 국민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다른 나라가 불공평하게 내 나라를 뺏어가지 않는 한 현대 사회에서 전쟁이 발생하는 이유는 상당수가 지배자들의 명분을 견고히 만들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들을 희생시키고 대의라고 포장된 작은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유 없이 죽어나간다. 소규모의 기득권층을 위해서 존재하는 개념이 전쟁이고, 인간의 이기심의 바닥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예보 사람들의 의지가 빛나는 것은, 그들은 서로와 음악에게 의지하면서 그들의 삶을 유지했다. 정치인들이 아무리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더라도 클럽을 가고, 미인대회도 열면서 그들의 윤택한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점이 존경스러웠고, 다양한 문화가 결집된 도시가 처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정답을 찾았던 것 같다.
총평
다큐멘터리라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도 극의 흐름이 지루하지 않았다. 보스니아 내전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분들이 봐도 좋을 것 같고, 무엇보다도 U2라는 유명한 밴드에 대해서 새로이 알게 되는 점이 있어 좋았다. 마지막 인터뷰이의 말 중에서, 그 떄, U2의 공연에서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화합이 지금도 다시 되살아나야 하지 않나 라는 말에 격한 공감을 표하고 싶다.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더 혼란해졌으면 혼란해졌지 더 안정적인 화합을 보여주고 있진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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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의 전성기, 40-50대 씬스틸러 여배우 특집
최근 #마스크걸 에서 김경자역의 염혜란 배우가 자식의 사랑을 넘어 광기로 변한 소름돋는 연기를 보여줬는데요 ! 이외에도 부드러움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배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씬스틸러 배우분들을 소개시켜 드리려합니다. 40-50 대의 전성기를 맞이한 배우분들의 앞으로 맡을 작품들과 배역들이 기대되지 않나요?
1994년 극단 목화에 입단한 단원이자 극단 목화의 간판배우로 1998년 <남자충동>으로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상과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2000년 <춘풍의 처>로 백상예술대상 최우수 여자연기상 수상을 수상했습니다.
드라마, 영화 출연한 작품마다 좋은 성과를 거두는 씬스틸러 이정은 배우는 <기생충>의 국문광 역으로 여우조연상을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데요. 처음 연극 조연출로 시작해서 영화, 드라마의 조,주연까지 올라온 배우입니다.
이미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잘하기로 정평이 난 김선영 배우
응답하라 1988에 출연하여 얼굴이 많이 알려지게되면서 이후 명품 조연으로 입지를 단단히 굳히며 수많은 여우조연상을 석권하였습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단역 ‘소현 엄마’로 영화 데뷔를 알린 염혜란 배우는 단역임에도 불구하고 봉준호 감독님이 단편영화를 본 후 직접 오디션을 제안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도깨비> 은탁의 이모이자 악역인 ‘지연숙’으로 대중들에게 가장 얼굴을 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학로 이영애라는 수식어가 붙을정도로 아름다운 미모와 더불어 정확한 발음과 비음이 섞인 청아한 목소리로 엄청난 연기력까지 보유한 배우입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에 수간호사 ‘박행자’ 역으로 인생 캐릭터를 탄생시키면서 믿고보는 배우로 자리잡았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한선영 역으로 널리 알려졌고, 이 외에도 <멜로가 체질> <안나>등 드라마 명품 조연을 섭렵하며 존재감을 톡톡히 알리고 있는 배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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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이름과 팔려나간 아이들
조세영 감독의 다큐멘터리 <케이 넘버>는 입양자 가족 찾기 서사가 아니다. 이 영화는 해외 입양을 개인의 선택이나 운명의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감독은 해외 입양된 사람들이 왜 부모를 찾으려 하는 지를 보여 준다. 그렇게 점차 밝혀지는 진실은 해외 입양이야말로 한국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할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문제임을 직시하게 만든다.
영화는 1970년대 초 서울 길거리에서 발견되어 미국으로 입양된 미오카 밀러의 실화를 중심에 둔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하나의 사례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를 따라가다 보면, ‘해외입양’이라는 이름 아래 아이들을 수출하듯 내보냈던 한국의 어두운 과거가 드러난다. 영화 제목인 <케이 넘버>는 해외 입양아에게 부여된 일련 번호다. 인간에게 붙은 숫자, 이름 대신 번호로 존재해야 했던 현실은 그 자체로 입양이 얼마나 체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시스템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케이 넘버>의 입양인들이 생모를 찾는 이유는 단지 혈연의 회복이 아니다. 정체성의 회복이다. 미오카 밀러는 자신의 엄마가 자기를 버렸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엄마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엄마를 찾는다. 이는 한국의 그 당시 여성들의 고통 아픔과도 연결된다.
수많은 해외 입양자들이 길거리에 버려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말 자신의 자식을 길에다 버리는 엄마는 실제로 얼마나 될까? 수십만명이 넘는 어린아이가 길에서 버려진다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일까?
영화는 해외에 입양간 입양자들의 찾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 또한 한국의 해외 입양 시스템이 큰 문제라고 말한다. 그리고 보통의 한국인들이 해외 입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는다.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보통의 한국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 문제가 그동안 얼마나 감춰지고 숨겨지고 무관심했던 한국의 현실을 보여 준다.
이러한 질문은 개인적 고민이 아니다. 가족도 이름도 빼앗긴 존재가 남은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구조적 상처이다. 이는 자본주의와 국가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소비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고발이기도 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영화가 입양인의 시선에만 머물지 않고, 아이를 떠나보낸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까지도 끌어안고 있다는 점이다. 생모들은 대부분 미혼모였다. 사회적 낙인과 제도적 지원의 부재 속에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키울 수 없도록’ 강요당한 여성들이다.
어떤 이는 분만 직후 아이를 얼굴도 못 본 채 빼앗겼고, 어떤 이는 병원 서류 하나에 서명하며 ‘아이를 포기했다’는 낙인을 평생 안고 살아간다. 감독은 이 고통을 단지 개인의 불운이나 선택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이는 국가와 사회의 명백한 방조이며, 때로는 적극적인 개입이었다.
영화는 1970~80년대 한국 정부가 경제적 실리와 외교적 명분을 위해 해외 입양을 조직적으로 장려했음을 지적한다. 아이들은 복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미화됐다. 그 이면에서 국가는 사회 문제를 외면한 채 ‘인간 수출’에 가까운 구조를 방치하거나 조장했다. 이 영화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침묵의 공범자에 한국 사회 전체가 포함돼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케이 넘버>는 미오카 밀러의 여정을 따라가면서도 다수의 입양인 증언, 서류, 과거 영상 그리고 관계자와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층적으로 구조화된다. 감독은 감정적 몰입에 기대지 않고, 증거와 목소리로 관객을 설득한다. 그렇기에 영화의 충격은 오히려 더 깊다. 이 다큐멘터리는 관객의 눈을 적시는 대신, 외면하고 있던 사회의 민낯을 들이민다.
영화가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아이들이 거래되던 이 잔혹한 역사를, 한국 사회는 언제까지 외면할 것인가. 정체성을 잃은 사람들, 아이를 잃고도 죄책감을 떠안은 여성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방관하거나 정당화해온 사회는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
이 영화는 요구한다. 반성 없는 발전은 없다. 기억하지 않는 사회는 정의로울 수 없다. 그리고 이 책임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제목: 케이 넘버 (K-Number)
감독: 조세영
각본: 조세영, 남순아
촬영: 조영춘
편집: 이윤정
제작사: 선보필름
배급사: 마노엔터테인먼트
러닝타임: 112분
장르: 다큐멘터리
개봉일: 2025년 5월 14일
+씨네랩 초청으로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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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우렌의 결혼 - 완성도보다는 힐링과 성장에 집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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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봉을 꿈꾸며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조연출 ‘승주’. 하지만 현지의 고려인 감독 ‘유라’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예정된 결혼식을 놓치게 되며 다큐멘터리 촬영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에서는 연출을 해서라도 다큐를 완성해 오라는 압박을 가하는데... 이때 ‘승주’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돕던 ‘유라’ 감독의 삼촌 ‘게오르기’는 가짜 신랑, 신부를 구해서 결혼식을 찍자고 하며 ‘승주’가 신랑 ‘다우렌’이 된다. “지금부터 가짜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 다큐 찍는 게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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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닥터 리자> 예고편
자선가이자 <공정한 도움> 재단의 설립자 엘리자베타 글린카의 인생 중 하루.
결혼 30주년을 맞아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을 계획하는 리자, 하지만 오늘도 전화를 꺼둘 수가 없다.
노숙자 식사 배식과, 죽어가는 소녀를 위해 동료 의사 셰브쿠노프에게 모르핀을 요청하기 위해 역으로 나가야 한다.
열정이 넘치는 자선가의 이 모든 순간을 정부기관이 오랜 시간 동안 관심을 가지며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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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광장> 티저 예고편
스스로 아킬레스 건을 자르고 광장 세계를 떠났던 ‘기준’이, 조직의 2인자였던 동생 ‘기석’의 죽음으로 11년 만에 돌아와 복수를 위해 그 배후를 파헤치는 느와르 액션 넷플릭스 시리즈 《광장》 6월 6일, 오직 넷플릭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