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oDAY2021-11-03 09:41:13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 톱니바퀴에 깃든 낭만
넷플릭스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 리뷰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뛰어난 금고털이 실력을 지니고도 평범한 은행원으로 살아가던 '루트비히 디터(마치아스 슈바이크회퍼)'. 그런 그의 앞에 어느 날 그의 실력을 증명해보라는 의문의 메시지가 온다. 메시지 속 주소를 찾아간 디터는 우연히 금고털이 대회에 참여하고, 유감없이 자신의 실력을 선보인다. 이에 몰래 디터를 관찰하던 '그웬(내털리 이매뉴얼)'은 그에게 접근해 전설로만 전해지던 네 개의 금고를 터는 범죄에 합류해달라고 요청하고, 기계적인 삶에 지칠 대로 지친 디터는 새로운 모험을 약속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디터는 그웬을 비롯한 팀원 '브래드(스튜어트 마틴), '코리나(루비 O. 페)', '롤프(거스 칸)'와 함께 좀비 아포칼립스가 시작되는 틈을 타 전설이 될 은행털이에 나선다.
잭 스나이더 감독의 첫 넷플릭스 작품인 <아미 오브 더 데드>는 공개 후 호불호가 강하게 갈렸던 작품이었다. 좀비 영화나 블록버스터에게서 기대하는 서스펜스나 액션의 비중은 적었던 반면, 딸의 죽음을 계기로 감독 본인의 삶을 반추하는 듯한 고백록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미 오브 더 데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해서라도 딸을 살리고자 하는 부성애에 주목했다.
또한 그 논의를 확장시켜 사회적 차원에서는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사회비판적 시각도 보여줬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법한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를 '제우스'라는 신의 이름을 빌린 좀비에게 넘기거나 기껏 훔쳐낸 달러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잭 스나이더 감독의 아이디어에 동의한다면 <아미 오브 더 데드>는 나름대로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그렇지 않다면 상업 영화로서의 매력을 갖추지 못한 채 실패한 낯선 작품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상은 <아미 오브 더 데드>의 프리퀄이자 잭 스나이더가 각본과 제작을 맡은 신작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전작에서 열쇠공이자 금고털이범으로 등장했던 루트비히 디터의 이야기를 다룬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은 금고, 신화, 그리고 낭만이라는 세 개의 키워드를 통해 <아미 오브 더 데드>의 콘셉트를 충실히 따라간다. 우선 영화의 중심 소재이자 루트비히 일생의 목표인 금고는 루트비히의 삶을 비유하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이 금고의 역할이듯이 은행원인 디터 역시 철저히 금고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특히 규칙적인 톱니바퀴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 금고처럼 그의 삶도 철저히 기계적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이 비유는 의미심장하다.
디터는 금고의 잠금장치를 여는 일을 가장 좋아하며, 그의 꿈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네 개의 금고를 자신의 손으로 여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를 담은 유튜브의 조회수는 0이고, 유튜브 밖의 세상에서 그는 매일 아침 똑같은 커피와 빵을 먹고,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삶을 살아간다. 마치 <모던 타임스>에서 컨베이어 벨트 속을 돌아다니던 찰리 채플린이 그러했듯이, 디터는 자본주의 사회라는 하나의 부품이 되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은행원으로서 돈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는데도 자신의 업무나 삶에서 아무러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디터의 모습을 보면 작중 금고가 돈의 무가치성, 무의미함을 보여주며 현대 사회에 대해 통렬히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줬던 전작의 의미를 온전히 이어가는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창구에 앉아 있는 그가 창구 앞에서 빨리 돈을 달라며 극도로 흥분한 할머니 고객과 뉴스 속보에서 피와 살을 탐하는 좀비의 모습을 겹쳐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금고는 그 존재 자체로 이 작품이 전작처럼 신화적인 구성과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 힌트는 금고의 이름에 있다. 작중 등장하는 네 개의 금고는 각각 북유럽 신화를 모티브로 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 속 네 막의 제목인 라인골트(Das Rheingold), 발퀴레(Die Walküre), 지크프리트(Siegfried), 괴터데머룽(Götterdämmerung)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이 금고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며, 특히 각 금고를 해체하기 전후로 오페라 내용이나 모티브와 유사한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예를 들어 라인골트에서는 니벨룽겐의 반지를 처음으로 발견하고 훔친 알베리히를 디터가 자신과 일치시킨다거나, 발퀴리에서는 지그문트와 지클린데를 연상시키는 디터와 그웬의 로맨스가 본격화되는 식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의 형식에서도 신화적인 모티브를 확인할 수 있다. 전설적인 네 개의 금고를 만든 장인 한스 바그너의 이야기를 '옛날 옛적에 뮌헨이라 불리는 아주 먼 곳에(once upon a time, in a farsaway land called Munich)'로 시작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문구는 현대의 신화라 불리는 <스타워즈>의 상징과도 같은 오프닝 타이틀 '오래전 멀고 먼 은하계에(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를 연상시킨다.
이에 더해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잡아서 항상 꿈꿔오던 모험에 나서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곧 은행원이 아닌 금고털이로 거듭나는 디터의 서사는 신화적 이야기의 전형에 충실하다. 이는 전작에서 좀비 영화의 서스펜스나 볼거리 대신 아버지와 딸의 가족사에 더 집중했던 것처럼 돈을 두고 음모와 배신이 난무하는 하이스트 장르의 쾌감 대신 다른 것에 주목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바로 기계처럼 살아가던 한 개인이 삶의 의미를 찾고, 진짜 살아있는 인생을 누리는 낭만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그웬의 등장을 기점으로 영화의 분위기가 전환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우연으로 시작해서 운명적인 로맨스로 발전하는 디터와 그웬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 역시 낭만으로 가득한 꿈과 모험이기 때문이다. 결코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둘은 과거에 집착하기보다는 더 가슴 뛰고 흥분되는 미래를 기대하며, 그런 그들에게 금고 속에 들어있는 거액의 돈은 단지 전설로 여겨지던 금고를 실제로 여는데 성공했다는 증표에 불과하다. 이처럼 돈보다 인생의 목적을 쫓는 연인의 이야기는 돈을 매개로 그웬과 관계를 맺어왔던 브래드의 삶과 대비를 이루면서 더욱 가치 있게 빛난다.
또한 낭만이라는 키워드는 디터의 금고털이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이제 그에게 금고털이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오랫동안 고대했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동시에 기계처럼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일깨우는 쾌감을 맛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디터 본인이 금고 잠금장치나 다름없던 인생에서 깨어나듯이, 금고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자본주의의 방패막이었던 금고는 디터가 떠나는 낭만적인 모험의 일부이자 목적으로 의미가 달라진다. 영화는 이러한 변화를 바그너의 오페라 음악을 통해 함축적으로 담아낸다. 디터는 항상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인 바그너의 오페라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하는데, 이 대목이 마치 그웬이 자신의 삶에 새로운 모험과 낭만을 불어넣었듯이 디터도 굳게 닫힌 금고에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렇게 현실보다 이상과 꿈을 좇는 낭만으로 가득한 디터의 이야기를 그가 전편에서 처음 등장한 장면과 연결시킨다. 즉, 그의 이야기는 네 개의 금고 중 유일하게 만나지 못했던 마지막 금고인 괴터데머룽을 만나고 그의 모든 꿈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이때 금고의 이름이 '신들의 황혼'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생각하면 오로지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이루기 위해 좀비들이 가득한 도시로 향하는 그의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다. 세상이 멸망할 것을 알고도 그 황혼의 아름다움을 장식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이나 영웅들처럼 그의 모험에도 낭만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저 평범한 은행원이었던 루트비히의 디터의 삶은 신화의 정서가 함축적으로 응축된 이야기로 끝난다.
문제는 전작의 콘셉트만큼이나 똑같이 이어받은 단점으로 인해 잭 스나이더가 보여주고자 한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인생의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전작에서 좀비 영화의 매력을 살리는 대신 그 틀만 빌려왔듯이 이번에도 하이스트 영화라는 장르의 틀만 빌릴 결과 장르 영화, 상업 영화로서의 매력이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일례로 다른 하이스트 영화들의 존재를 직접 언급하며 쿨한 척하는 대사는 그들이 언급한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형화된 캐릭터들의 존재 때문에 그다지 효력이 없다.
또한 범죄 계획을 설명함과 동시에 해당 계획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편집의 경우, 이미 숱하게 사용되는 방식일 뿐만 아니라 가이 리치 감독의 작품처럼 강렬한 임팩트를 남기지도 못한다. 인터폴과 그웬 일행 사이의 악연 때문에 이를 악물고 쫓고 쫓긴다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추격전에서도 그다지 긴장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워낙 분량이나 비중이 그웬과 루트비히한테 쏠려 있다 보니 이들의 대립, 긴장, 갈등이 설 자리가 없다.
이에 더해 시리즈라는 관점에서도 성공적인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남는다. 속편까지 제작 진행 중인 <아미 오브 더 데드> 세계관은 엄연히 좀비 영화 시리즈물이다. 문제는 그 특징이 이번 작품에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좀비의 존재가 뉴스를 통해 등장하고 영화 전개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치기는 하나, 디터의 악몽과 같은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좀비는 그저 배경 설정, 상황 설정을 위해 도구적으로 활용되는 데 그치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전편과 연동되는 대목들이 등장하고 디터의 관점에서 보면 새롭게 느껴질 장면이나 대사들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미 본편의 호불호가 극심하게 갈리는 상황에서 이들이 프리퀄의 장점이 되거나 필요성을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분명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 결과 <아미 오브 더 데드: 도둑들>은 본편의 장단점을 쏙 빼닮았다는 점에서 이 시리즈에 계속 애정을 갖고 남아있을지, 아니면 큰 기대와 미련 없이 시리즈에서 하차할지를 가르는 리트머스 시험지나 다름없어 보인다.
P(Poor, 형편없음)
스케일이 작아진 것만 빼면 본편의 장단점, 메시지와 주제의식까지도 쏙 빼닮은 프리퀄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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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어날 탈(脫)
불일부이(不一不二), 오프닝부터 기이한 거문고 소리와 함께 전면에 떠오르는 한자어는 아리송하다. 불교 철학에서 출발한 위 구절은 ‘너와 나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 (다르게 말해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라는 뜻이다. 의미를 풀어보니 이해가 더 복잡해진다. 두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임을 짐작케 한다.
불치병에 걸려 삶의 막바지에 선 영목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108배에 매진한다. 죽음을 맞기 전, 마치 열반의 경지에 이르려는 듯 여자친구의 애닳은 전화에도 굴하지 않고 단지 절을 할 뿐이다. 숭고하게 절을 하고, 물잔을 비우고, 산책을 하고, 단상을 기록하며 번뇌를 지우기 위해 노력한다. 무겁게 생각하지 않으려하지만 도리어 생각이 많아지는 역설을 발견하는 나날이 지속되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산책을 하다가 홀린 듯 나무 더미 속 공간으로 기어들어가 붉은 꽃 한 송이를 보게 된다. 그 날 이후 영목은 붉은 옷의 형상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신경이 쇠약해져 헛것을 보게 된 걸까, 혹은 부다의 현현인가. 공포에 휩싸인 영목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박차를 가한다.
지우는 작가다. 애니메이션으로 입문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그림을 그린다. 전시를 앞두고 있지만 번아웃이 온 탓에 마감기한에 쫓기고 있다. 영감을 기다리다가, 예전에 그렸던 애니메이션이나 내보라는 기획자의 독촉 전화를 받고는 자신이 애니메이션을 그만 둔 이유를 반추해보기 시작한다. 어렸을 때부터 끝을 두려워한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왜 모든 것은 끝내 멈추어야 하는가? 왜 모든 이야기는 끝이 나야 하는가? 과거 남자친구와 함께한 니스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들춰보다가 어렴풋이 답을 찾고 다시 애니메이션을 그리기 시작한다.
서보형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인 벗어날 탈은 실험적이다. 전형적인 영화 구조에서 벗어나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병치시켜 풀어내다가, 종국에는 이어버린다. 죽음을 연료삼아 깨달음으로 나아가기위해 노력하지만, 죽음(미지의 형상)을 두려워하는 영목. 멈춤을 두려워하여 영원히 유예하려고 하지만, 사진(정지한 것)에서 생명을 포착하고 애니메이션(움직이는 것)을 다시 그리게 된 지우. 서로가 두려워하는 것을 열망하고 열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먹고 먹히는 관계. 영화는 순환하며 점에서 거대한 고리 모양의 구조를 띠고 있다. 마치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대비되는 것을 나란히 보여주면서 다름을 부각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 상승과 하강, 멈춤과 움직임 그리고 물과 불. 영목(남성)과 지우(여성)은 각각 수직운동과 정지-움직임을 반복하며 삶(물)과 죽음(불)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러나 가장 짜릿한 지점은 서로 다른 개념이 접합되는, 말하자면 불일부이가 실현되는 때이다. 영목과 지우가 만나는 순간, 죽은 줄만 알았던 해변의 사나이가 영목으로 환생한 순간, 저승사자 같은 빨간 옷의 여인이 지우로 치환된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마치 영혼을 주고받듯 성스럽게 입을 맞추며 이어진다.
지우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두 사람이 합쳐지는 장면은 불일부이를 더욱 명료하게 나타낸다. 이야기 속에서 한 남성은 한 여성의 자궁으로 기어들어가 잉태된다. 남성의 모습에서 꽃을 찾으러 나무 더미 세상으로 기어들어가는 영목이 겹쳐진다. 지우는 둥그런 베개를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출산해내는 연기를 하는데, 마치 지우가 영목을 출산한 것처럼 느껴진다. 서로 대비되는 것을 좇던 두 인물이 결합하게되니, 영목은 죽음을 연료삼아 추구했던 깨달음보다 삶의 기쁨이 더 중요함을 깨닫고, 지우는 끝의 두려움을 극복하여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을 시작할 용기를 얻는다. 삶과 죽음이 구분되지 않고 이어지니 만물은 서로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뫼비우스의 띠가 완성되는 것이다.
2018년 제작한 단편영화 <탈날 탈(頉)>에서 확장된 <벗어날 탈(脫)>은 정해진 포맷 안에서 제작한다는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4대 3비율을 사용하며, 남녀 한 명씩만 등장시키고 거문고 음악을 사용할 것. 가히 제한된 조건 속에서 창의력이 극대화된 경우라 할 만하다.
4:3, 정확히는 1.375:1(아카데미 비율)의 화면비를 사용하면서 회화적 연출이 두드러진다. 수직운동을 반복하는 영목의 움직임을 담기에 탁월했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수행에 정진하거나, 몸을 꼿꼿이 편 채로 좌선하는 모습에서 잘 드러났다. 또한 프리즈프레임을 활용하여 회화적 특성을 부각하면서도, 1초 24번 이하로 프레임을 분절하여 달리는 지우의 모습을 간격있게 표현한 장면은 움직임을 중시하는 지우의 특질을 강조하는 것에서 나아가 움직이는 이미지(Moving Pictures)라는 영화 매체의 본질까지 환유한다.
박우재 음악감독의 거문고 연주는 혼란스러운 극의 분위기를 선율로서 충실하게 표현한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른 채 무작정 구도하는 마음, 미지의 형상과 조우하여 혼란스러운 마음에서 영목과 지우가 만나 하나로 이어지는 장면까지. 작은 단위로 특정 비트를 표현하는 것에서 발전하여 하나의 선율로서 장면을 뒷받침하기까지 다양하게 기능한다.
로베르 브레송은 시네마토그래프를 ‘움직이는 이미지와 소리를 가지고 하는 글쓰기.’라고 표현했다. 영화는 태동 이래 끊임없이 존재론적 위협을 받아왔다. ‘제7의 예술’로 명명되며 독립된 예술로서 지위를 공고히하는가 했지만, 회화, 문학, 연극, 음악, 무용의 특징과 비교하는 방식으로 정의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레송의 표현은 독자적인 영화의 정의를 정립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벗어날 탈>은 회화의 특징을 끌어들이면서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승화시켜 시네마토그래프로서 구현해내었다는 점이 신선하면서도 반갑다. 이미지(쇼트)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역학과 탁월한 사운드를 잘 버무려 영화의 본질을 존중하면서도, 인접 예술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저변을 확장한 실험적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202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3년 만에야 관객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익숙하지 않은 불교 교리를 영화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표현의 한계가 직관적 동요를 이끌어내는 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나, 정신적인 것을 시각화하여 필름 위에 환원해냈다는 점만으로도 괄목할 만하다.
원을 그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벗어날 탈>은 부서지면서 생겨날 것을 권한다. 멸(滅)의 끝은 생(生)의 시작이고, 생의 끝은 곧 멸의 시작이니 매끈하게 이어진 마음으로 사는 것이 진정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라는 순환의 길 위에서 마음을 기울일 것은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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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상가들 / The Dreamers
/ 간단한 줄거리 /
프랑스로 유학 온 미국인 유학생 영화광 매튜가 시네마 테크에서 이사벨,테오 남매를 만난다.
세 사람은 관심사도 같고
서로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매력에 이끌려 급격히 친해지게 된다.
테오와 이사벨 남매의 부모님이 한달간 여행을 떠난 틈을 타
매튜는 그들과 함께 남매의 집에서 살게 된다.
같이 살면서 알게 된 남매의 특이한 관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 그들의 행동.
그러나 결국 매튜 또한 그들의 행동과 생각에 물들게 되고,
서로 친구 이상의 정신적 육체적 교감을 하게 된다.
/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평 /
영화의 분위기와 색감
좀처럼 보기 힘든 독특한 스토리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세 박자가 너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영화다.
(그래서 영화가 아름답게 보이게 한다.)
근데 이 영화의 매력은 딱 여기까지.
사실 꽤 많은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꼽는 영화여서
보기 전에 기대감이 컸다.
그러나 내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명작이라고
꼽을 만한 부분이 딱히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영화의 내용이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몇번 내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이게 뭐 아름다운 청춘(?) 사랑(?) 여름밤의 꿈(?) 정도로
바라볼 수 도 있지만.
나에게는 쫌 힘들었다.
그러나
내용은 쫌 비상식적이긴 해도
서로에게 퀴즈를 내며
중간 중간 다른 영화를 삽입하여 보여주는 편집방법은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았다.
그들만의 퀴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뭔가 관객도 그 퀴즈에 참여하는 한 사람이 되게끔 한달까.
그리고 중간중간에 테오와 매튜가 서로의 생각이 더 옳다며
주장할때도 나도 모르게 어떤 배우, 어떤 기타리스트가 더 나은지
혼자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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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 /
몽상가들
The Dreamers
왜 제목이 몽상가들일까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나만의 해석이 나왔다.
몽상 :
[명사] 1. 꿈속의 생각. 2. 실현성이 없는 헛된 생각을 함. 또는 그 생각.
1-1. 비상식적인 그들의 관계와 행동들 자체가 결국
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점으로 보아
이 내용자체가 몽상이라는 것이다.
1-2. 1-1의 근거(?)라고 생각 되는 부분은
마지막 씬.
영화가 끝나고 제작진들의 이름이 올라갈때
뒷 배경은 점점 색을 잃고
마지막엔 흑백으로 물들어 있다.
흑백으로 바뀌어 버린 배경은
결국 이 또한 영화(몽상)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다.
( 몽상가들은 1960년대 배경으로 영화 중강중간 삽입 된 모든 영화들은 모두 흑백이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이 영화에서 결국 '몽상가들 또한 영화다' 라고 알려주는 근거로
흑백배경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
(그러므로 감독이 '이 또한 영화니까 비상식적인 내용에 대하여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지 마시오'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2. 테오와 이사벨.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 빠져있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생각만 옳다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라 했던 테오.
그러나 그는 사실 영화 내내 자신의 의견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는 행동은 성숙하고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언제나 테오에게 의지하고
집착하며 테오의 의견만 따르는 미성숙한 이사벨.
결국 자신의 이상향을 따라할 뿐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 한 그들은 몽상가들에 불과하다.
꿈꾸는것도 좋지만 언젠간 깨어나야해!
매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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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 너무 재미없어서 신기할 때
재미없다. 진짜 너무 재미없다. 나의 모지리함과 지루함이 덧붙여서 토할 것 같이 식상한 일상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리뷰를 써서 어딘가에 올리는 사람 같지 않게 내 일과는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 인생은 원래 영화 같은 순간의 연속 아닌가? 근데 내 하루하루는 매일이 예상이 가는 뻔한 클리셰라 너무나도 지루하다. 살면서 혹시? 하는 생각은 거의 100% 확률로 이어진다. 또한 별 일 아닐 거라는 막연한 걱정 덜기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건사고는 우리 생각 외의 곳에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벌어진다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라 뭐 새로울 것도 없다. 인생은 이렇게나 개 같은 순간의 연속이다. 잔인할 만큼 나에게 더 나은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 심지어 취업하려면 2년이나 남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역시 나를 떠나고 있거나 마음이 생각만큼 가깝지 않았다. 그러니까 세상은 역시나 혼자 사는 게 맞다. 사회복무요원 판정을 받고도 선임 놀이를 안 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생겨 나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미친놈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엿을 먹이는 게 일상의 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근데 난 그 사람 이름도 다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그런 사람에게 사회생활이란 이런 것이라며 엿을 먹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은 단편적인 설루션으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뜻이 된다. 이 귀찮음과 짜증남에서 온 스트레스의 진정한 열쇠는 소집해제다.
소집해제. 만약 직장인이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닐걸. 직장인이 되면 무슨 다른 미친놈이 튀어나와서 나를 괴롭힐 수도 있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스텝업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건 사실 나의 삶을 톺아봤을 때 100%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이 알고 보니 헛바람이었다는 걸 들켜 잘렸을 때도 그땐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그 기억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엔 반박의 여지가 없다. 또한 항우울제가 없으면 일상이 어려웠던 시기가 나의 공감능력의 중요한 베이스가 됐다는 점 역시 분명한 사실이 될 것이다. 근데 진짜 인간적으로 이건 너무한다. 너무 심각하게 재미가 없다. 내 주치의 선생님에게 이 노잼 시기가 1년 동안 이어졌다고 말하고 싶은데 어떤 식으로 전달해야 이 마음을 전할까 감이 안 잡혀서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를 '매일매일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감사한 말을 전했지만 나는 요즘 이것에 점점 질리고 있는 것 같다. 의미가 있을까. 거대한 에세이 작가가 돼서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결국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는 삶에 너무나도 지쳤다. 아무래도 영원히 이 일상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일상에 관한 영화다. 코엔 형제는 이 할리우드에서 큰 이름들 중 하나다. 내가 기억하는 코엔 형제는 살짝 염세적인 인간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령 <시리어스 맨>의 경우에서 주인공은 돌아버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로 멘털이 세다. 이 말은 그에게 달려있는 현실이 개판 5분 전이라는 뜻도 되겠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는 안톤 쉬 거라는 캐릭터를 통해 악이라는 개념을 형상화했다. 이게 사람마다 해석이 다르긴 한데 거의 대부분 미국 사회에 닥쳤던 경제위기를 은유했다는 쪽이 지배적이다.-나도 이 해석에 동의하는 바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미국은 아니다'라는 메타포를 담은 것이다.- 이렇게 코엔 형제는 암담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었다. 무기력하고. 어쩔 땐 노숙도 하고. 보통 거의 대부분은 운명에게 주인공이 당한다. <파고>에서의 잔혹한 살인사건 역시 관찰자의 관점에서 이를 막을 수 없었다는 패배의식이 담겨 있다.
<인사이드 르윈>은 이런 가치관에 근거한 '코엔 형제 초 울트라 매운맛'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포크송 부르는 사람이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면서 싸돌아다니는 게 뭐가 초 울트라 매운맛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수위는 그렇게 세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잔인할 정도로 지루하다. 심각하다. 우리의 일상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인하거나 무서워서 보기 어려운 영화가 있는 반면 '이게 도통 뭔 소린가' 싶은 작품도 있겠지? 극한의 예술영화라고 볼 수 있는, 이 <인사이드 르윈>은 좀 어려운 예술영화 축에 속한다. 심지어 음악을 사용한 방식도 쉽지 않다. <라라랜드>나 <겨울왕국> 같은 뮤지컬 영화들은 명랑한 멜로디를 베이스로 하지 않는가? 이 작품은 그런 거 없다. 주인공 오스카 아이작과 다른 등장인물들이 튀어나와서 기타 하나 덩그러니 놓고 노래 부른다. 끝이다. 그냥 그렇게 맹숭맹숭하게 2시간가량의 러닝타임을 채우고 끝난다.
근데 그러다가 끝난다는 게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특장점 중 하나는 조명의 질감이다. 그것만 있냐? 아니다. 처음 이 작품을 볼 때 사운드 믹싱이 되게 잘 됐다고 느꼈었다. 실제로 아카데미에서 음향 믹싱상에도 노미네이트 된 적이 있다고 한다. 뇌를 빼고 누군가의 일상을 멍하니 들여다본다고 생각하면 시간이 후딱 가는 환경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맞다. 이 영화는 일상에 관한 작품이다. 주인공은 무명 가수다. 근데 노래를 잘 부르거나 대스타가 됐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이 사람은 존재감이 그렇게 큰 사람이 아니다. '내 이름은 르윈(Liewyn) 데이비스요'라고 말했는데 듣는 상대역이 'Le and Davis'라고 반응하는 것이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고양이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데 그 고양이의 이름을 '르윈 데이비스'라고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이름도 똑바로 이해시키지 못하는 인물인 것이다. 근데 솔직히 르윈 데이비스는 그럴 만한 인물이다. 자기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자기를 '그린 펑'이라고 소개하자 '설마 네 이름이 진짜 그린 펑이요?'라고 묻는다. 이를 돌려 말하면 이 사람이 상대방의 존재를 받아들이거나 각인시킬 때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이런 무기력한 일상이 단편적으로 쨘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인공 르윈의 전 여자 친구 진은 임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건 누구 아이인가?'라는 의문이 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르윈에겐 어림도 없다.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른 채 전 여자 친구의 낙태를 준비하게 된다. 이 낙태 비용은 어디서 났느냐? 르윈의 전전 여자 친구 역시 임신을 했던 경험이 있다. 르윈은 이 사람에게도 낙태를 종용한 적이 있다. 더 이상한 건 전 여자 친구 다이앤은 돈을 받기만 했고 실질적으로 낙태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담당 의사는 이 돈을 갖고 있으니 이 비용으로 전 여자 친구 진의 낙태 비용을 댈 수 있다고 말한다. 르윈은 그렇게 하라!라고 답한다. 즉 전전 여자 친구가 낙태를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고/전 여자 친구 아이의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근데 이 무지라는 키워드는 이 영화 내내 나타난다. 영화 안에서 르윈의 주 수입원은 누군가에 의해 들었던 일자리가 대부분이다. 자기가 주도적으로 일자리를 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점입가경으로 발전하는 순간이 있다. 아티스트로서의 실패담만 쌓았던 그.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그는 선원이 되려고 마음먹는다. 그러나 그의 누나가 그의 지시로 며칠 전에 선원 자격증을 직접 버렸다고 한다. 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재발급할 돈이 있냐? 아니다. 또 막상 속상한 것은 아티스트일 때는 대타로서의 삶을 사는데 선원으로서의 인생은 내가 '휴 데이비스의 아들이다'라는 것을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를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은 아티스트로서의 삶을 포기했을 때인 것이다. 그렇게 자기가 자기대로 인정받는 상황이 유일한 돌파구라 믿었는데 그의 일상은 그를 그렇게 가둬놓은 것이다. 이는 줄거리의 내용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엔딩 신에서도 이를 암시하는 부분이 있다. 초반부에 르윈이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또 후반부에 같은 사람에게 또 맞는다. 이 둘은 살짝의 비틀기(?)를 넣었다. 맞기 전후에 어떤 교수의 집에서 잠을 자는 사건을 넣은 것이다. 오프닝은 자기 전에 남자에게 맞고, 엔딩은 자고 난 다음에 맞나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단적으로 봐도 그의 일상이 변하지 않았다는 암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수미상관'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사실 선후관계가 비틀어졌다. 중요한 건 이 둘이 사건의 전후관계가 바뀌었다고 해서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무엇이 달라졌나?' 하는 물음일 것이다. 그렇게 망신을 당하고 누구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했는데 어쩌면 달라진 게 없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갇혀놓은 일상 속에서 산다. 매번 다른 것 같지? 아니다. 매일같이 출근하고 이름과 얼굴, 나이까지 기억하는 게 귀찮은 놈과 산다. 원래 어디를 가도 나를 미친놈으로 보는 인간이 있지 않는가? 여러분도 예외가 없을 것이다. 또 돈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친한 친구기도 하다. 돈 없으면 글쓰기도 영화도 없다. 직장을 왜 바꾸나? 돈이 정말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별 것 아닌 이유에 목메달고 집착하며 그 이유로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우리는 그냥 평범한 소시민이다. 고양이의 이름에서 따온 '율리시스(오디세우스)' 설화는 한 영웅의 이야기이다. 집 떠난 그리스의 한 사람이 다시 귀향하기 위해 벌이는 온갖 개고생을 이야기로 만든 것이다. 근데 이건 전적으로 영웅의 이야기다. 우리가 영웅인가?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영웅이라기보단 자기밖에 모르는 악당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악당 취급을 받는 걸 떠나 심지어 우리의 목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다. 돈 벌어서 뭐하냐? 어차피 쓸 일도 없이 바쁜데. 뭐 먹는 거 빼면 카드를 사용할 일 자체가 없는 게 나의 일상이다. 적금을 굳이 들지 않아도 돈을 모을 수 있는 신기한 상황이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난 코엔 형제가 이런 우리의 삶을 꿰뚫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소시민에 가깝다. 영웅이 돼서 큰 목적을 이뤄 혼자 의기양양해 돌아오는 그런 장밋빛 미래 아무도 관심 없다. 가족들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같은 칭찬 여러 번 해도 짜증 나는데 영웅담이나 성장기 같은 거 누구든 반복해서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볼구하고 우리는 매일매일을 이겨낸다. 의미가 없는 걸 알면서도 각자가 치열하게 사는 것이다. 매일이 의미가 없다는 거 알면서도 왜 살아? 아이러니하게 허무하니까 일상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허무한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그거 진짜 의미 없어? 아닐걸. 허무하다는 걸 알았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삶에서 얻는 진정한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난다는 건 우리가 자란다는 뜻도 된다. 이 영화에서만 봐도 알 수 있다. 르윈은 율리시스의 개고생을 그대로 겪고 몇 개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원의 길이 자기의 것이 아니란 걸 알았다. 이 뿐인가? 또 돈도 없고 희망도 없고 여자 친구도 없으며 코트까지 없는 이 상황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음악뿐이란 걸 알았다. 뿐만 아니라 동료의 자살로 인해 생긴 죄책감을 어느 정도는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며, 누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두들겨 맞는 상황 속에서도 '다음에 보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쿨해진 것이다. 이 <인사이드 르윈>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관한 영화가 맞다. 근데 큰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지 몰라도 결국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는 존재다. 그 자랐단 증거가 누구에게 두들겨 맞고도 '또 보자!'라고 말하는 나이브함이 아니어도 괜찮다. 우리의 시간이 점점 무언가를 잃게 하고 있더라도 '그게 오롯이 유일하게 남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려 권태로운 일상 속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맞다. 영화는 재미가 없다.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근데 재미가 없어서 재미있다. 뭔 개소리냐 싶을 것이다. 근데 이 일상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소름 돋게 내 하루하루와 닮아있어서 웃기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일상이 재미없으니까 그런 감정으로 영화에 공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하루하루를 본다는 관점에서, 흘러가듯 본다면 블랙코미디란 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코미디가 이 영화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오디세우스가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다. 아마 유재석 같은 인물들도 별 볼 일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근데 이런 일상 속에서도 조금이라도 자라는 부분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주제는 이런 것이다. 세상과 나 자신이 부딪히며 생긴 부정교합이 우리가 살아가는 희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자. 영화를 보는 이유가 뭐야? 이 이야기가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은 아닐까? 언젠가 이런 우리에게 명랑한 일상이 돌아올 것이다. 그게 언젠지는 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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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사와 외계인이 써내려 간 사상누각 SF 판타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22년 현재, 인간의 몸에 가두어진 외계인 죄수의 탈옥을 막기 위해 지구에 상주 중인 로봇 ‘가드’(김우빈)’와 ‘썬더(김대명)’. 인간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서 이들은 지구의 여러 시간대에 죄수를 가둬두고, 자동차와 비행선으로 변신할 수 있는 썬더를 통해 시간여행을 하며 죄수들을 감시한다. 그러던 어느 날, 고려시대 말로 이동해 탈옥한 죄수를 검거한 가드와 썬더는 의도치 않게 인간의 아기를 현재로 데려와 키우기 시작한다. 한편 고려말 도사 ‘무륵(류준열)'은 현상금을 받기 위해 신검을 찾으러 나서다가 요괴를 만나고, 마찬가지로 신검을 찾는 ‘이안(김태리)'과 속고 속이는 쟁탈전을 벌인다. 두 신선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도 마찬가지로 요괴의 존재를 감지하고 신검을 좇는 가운데, 밀본의 수장 '자장(김의성)' 도사도 신검 쟁탈전에 가담한다.
SF와 판타지의 만남을 보여주는 영화 <외계+인> 1부는 <범죄의 재구성>부터 <타짜>, <전우치>, <도둑들>, <암살>에 이르기까지 흥행불패를 이어온 최동훈 감독의 7년 만의 신작이다. 류준열, 김우빈, 김태리, 소지섭, 염정아, 조우진, 김의성, 이하늬 등의 스타 배우들이 총집합했고, 387일이라는 한국 역사상 최장 프로덕션 기간을 자랑한다. <승리호>처럼 한국형 SF를 표방한 것이나, 올여름 격돌할 이른바 한국영화 Big 4 중 첫 번째이기에 기대가 더 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외계+인> 1부는 실망스럽다.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영화의 초점은 산만하고, 감독의 장점인 하이스트 장르의 특징이 발현되려는 찰나에는 리듬감이 툭툭 끊기는 느낌이 든다. 배우들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일부를 제외하면 캐릭터들의 매력도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외계+인>은 감독의 전작이자 한국형 히어로 혹은 무협 판타지 영화였던 <전우치>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지점에서 sf와 판타지라는 상이한 장르적 특성을 미처 고려하지 못한(혹은 않은) 듯 보인다.
우선 <외계+인> 1부는 여러 측면에서 <전우치>와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도사 무륵의 첫 등장은 모의고사 지문으로도 등장했던 전우치의 등장씬을 오마주하며,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한 <전우치>처럼 <외계+인> 1부도 시간여행을 펼친다. 두 신선 흑설과 청운이 코미디를 도맡는 것은 신선 3인방을 연상시키고, 고양이로 변신하는 좌왕과 우왕은 유해진이 연기했던 초랭이를 보는 듯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도사가 등장해 여러 시련 끝에 스승이 알려주지 않는 비기를 득도한다는 전개도 전우치의 성상 서사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람의 모습을 한 채 숨어 지내며 피리를 노리던 요괴 '화담(김윤석)'처럼 외계인이 사람의 모습을 취한 채 신검을 쫓는 것 역시 공통점이다.
이는 바꿔 말해 <외계+인> 1부가 제목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는 외계인의 존재가 <전우치>를 더 큰 세계관을 확장시키기 위한 핵심 도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전우치>가 일방향적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이동하는 데 그쳤으니, 영화는 더 많은 도사와 더 복잡한 시간 여행기를 보여주려 한다. 그렇다고 이미 한 차례 활용한 빌런인 요괴를 등장시킬 수 없기에 전혀 다른 존재인 외계인을 등장시켜 현재와 과거를 자유로이 넘나들고 세계관을 키운다. 그래서 외계인은 철저히 수단적으로 활용된다. 외계인 캐릭터는 생동감이나 입체감이 부여받지 못한다. 그들의 존재는 위기를 자아내고, 시간 여행의 문을 열어서 사건의 발단을 만드는 것으로 활용가치가 충분하다. 그 문을 넘어서면 더 많은 도사와 주변인들이 과거의 현재 사이에서 펼치는 화려한 티키타카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까지만 보면 외계인을 투입한 선택은 그 역할을 충실히 다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가 진행될수록 도구적인 외계인 활용법은 두 가지 문제를 발생시킨다. 하나는 무색무취한 외계인의 등장은 결국 SF 장르의 스펙터클이라는 외피만 취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이로 인해 SF와 판타지라는 장르 사이에서 영화가 좀처럼 균형점을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외계인을 통해 깔아 둔 판 위에서 펼쳐져야 할 여러 캐릭터들의 티키타카가 그 자체로 큰 재미를 끌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단 <외계+인> 1부는 SF 장르와 판타지 장르가 일반적 인식과 달리 결합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점을 간과했다. SF와 판타지는 초자연적이고 초현실적인 현상을 다룬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점이 있다. 판타지 영화는 초자연적 세계와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장르에 가깝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니라서 이해하기 어려운 마법과 같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래서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나니아 연대기>과 같은 판타지는 현실에 발붙이는 대신 초월적 세계를 주무대로 삼으며, 선악의 대립에 기초한 형이상학적 윤리관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장식한다. 반면에 SF 영화는 알려지지 않은 초자연적 세계를 향해 돌진하는 영화에 가깝다. 테크놀로지의 발전을 통해 당장은 이해할 수 없으나 미래에는 이해할 수 있을 현상과 세계에 대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요구한다. 이때 과학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주체적 노력이 이끌어내기에 SF는 판타지와 달리 당장 현실의 문제에 발 딛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SF 영화가 재현하는 세계에는 당장 오늘의 현실적 문제가 투영된다. SF 영화 속 세계는 알아볼 수 있는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새로운 발견과 기술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세계의 변화를 일으킨다. 이 지점에서 SF 영화에는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낙관만큼이나 인간의 기계화나 혹은 기계의 인간화로 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에 대한 우려가 자연히 깃들 수 있다. 그래서 SF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과학과 관련된 사회 제도와 구조와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즉, SF 영화는 과학에 근간을 둔 스펙터클을 통해 오히려 인간들이 마주하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는 통로이며, <터미네이터>, <아바타>, <쥬라기 공원> 등의 SF 명작들은 제각기 사회적 문제를 다룬다. 선악의 대립 끝에 선의 승리를 통해 기존의 세계관과 질서를 반복하는 판타지가 보수적이라면, SF는 진보적인 장르인 것이다. 이는 SF 작가 테드 창이 "판타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라면 SF는 세계가 변화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한 이유다.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돋보이는 시각적 효과를 활용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데에만 치우친 많은 한국 SF 영화는 이 대목에서 번번이 좌절을 맛봤다. 현재나 혹은 과거 사회상에 대한 의식이 느껴지지 않는 이질적인 세계를 상상해 스크린에 띄운 결과 영화에서는 현실과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도, 부정적 우려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SF 영화의 세계관을 기대하는 관객과의 소통 부재를 일으키는 결정적 이유다. 뒤집어 말하면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담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나 환경오염과 기후 변화로 인한 미래상을 그려낸 <설국열차>와 넷플릭스의 <승리호>가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외계+인> 1부는 익숙한 실수를 반복한다. 외계인들의 행성이 전쟁으로 인해 초토화된 후 평화에 반대하는 '설계자'를 비롯한 이들을 지구의 인간 속에 가두고 있다는 설정에서는 현실 세계를 향한 비판적 시선이 그다지 와닿지 않는다. 구체적인 장면 없이 대사로만 전달될 뿐만 아니라, 반전과 평화를 추구한다는 주제의식 자체도 지나치게 일반론적이다. 그나마 모든 것을 수치화하는 가드와 썬더가 인간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인간의 감정처럼 계량화 할 수 없는 요소들의 중요성을 깨닫는 대목에서는 인간성이 사라지는 세계에 대한 비판의식이 드러난다. 그러나 이 내용은 고려시대를 배경을 한 도사들의 이야기에 밀려 제대로 된 서사와 분량을 배분받지 못하며, 결국 급작스러운 전개로 인해 메시지에 설득력이 실릴 틈이 없다. 가드와 썬더를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전우치>의 연장선상인 판타지적 세계관에 속해 있기에, SF의 외적 요소를 제외하면 지향점이 근본적으로 다룬 SF영화의 스토리는 좀처럼 하나의 영화에 통합되지 않는다.
최동훈 감독이 기자간담회에서 "한국적인 방식으로 <어벤져스>만큼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힌 대목에서는 이 실수가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당장 그 <어벤져스>도 판타지와 SF의 세계를 혼합하는 데 긴 시간을 투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고도로 발전한 과학이 마법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중심이 된 시리즈에 신화 속 인물인 토르는 좀처럼 섞이지 못했다. <토르> 시리즈의 1편과 2편은 판타지도 sf도 아니라는 혹평을 들었고, 배경을 완전한 외계 행성으로 바꾼 3편부터 세계관에 녹아들 수 있었다. 그렇기에 <외계+인> 1부도 단순히 기능적으로 SF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판타지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이정표를 목표로 했다면 더 많은 준비가 있어야 했다. 판타지와 SF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를 충분히 전개할 수 있는 구조와 구성, 시리즈의 편수와 영화가 아닌 넷플릭스 시리즈와 같은 배급 방식에 이르기까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만 이는 최동훈 감독이기에 남는 아쉬움이기도 하다. 불안정한 세계관에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려면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역으로 이는 최동훈 감독의 특기였다. 그의 영화들은 자세한 설정과 배경 설명, 구체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관객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한눈에 들어오는 특출 난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관객의 귀로 곧장 꽂히는 매력적인 대사들로 무장한다. 관객의 눈과 귀를 현혹해 부족한 점을 가리고 러닝타임 내내 최동훈 감독의 시나리오를 따라 영화를 즐길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유달리 최동훈 감독의 작품은 명대사와 기억에 남는 캐릭터가 많다. 십수 년이 지나서도 명대사와 캐릭터를 재발굴할 수 있는 영화인 <타짜>, 모의고사 지문으로도 등장해 화제가 된 <전우치>, 전지현의 대표작인 <도둑들>과 이정재의 성대모사하면 빠질 수 없는 영화인 <암살>에 이르기까지.
<외계+인> 1부에서는 이러한 매력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부실한 세계관의 허점을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매력적인 포인트가 없다. 물론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한 도사들의 이야기는 나름대로 인물들의 매력을 어필한다. 흑설과 청운의 콤비는 등장인물들 중 가장 고타율의 유머를 자랑한다. 어느 시점부터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과거와 현재의 접점을 따라 전형적인 이야기를 보여주는 무륵과 이안도 2부에서 풀릴 그들의 이야기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감은 심어준다. 나름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자장 도사도 극의 무게감을 잡아준다.
문제는 현대 시점이다. 외계인 캐릭터를 철저히 도구적으로 설정한 결과 그들과 맞서 싸우는 가드는 일인다역을 소화하는 김우빈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원맨쇼를 펼치는 듯 느껴진다. 그와 합을 맞춰야 할 또 다른 캐릭터인 썬더도 문제가 적지 않다. 전투가 벌어지거나 가드가 일을 할 때 달걀 모양의 로봇인 썬더가 말하는 "비상", "위험하다", "생명력 9%"와 같은 유치한 대사의 내용이 다급한 톤과 묘한 부조화를 일으키면서 흐름을 깨기 때문이다. 그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인 점,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한 C3PO와 R2D2처럼 로봇 캐릭터가 SF 영화에 매력을 더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달리 아쉬운 대목이다.
결국 <외계+인> 1부는 한국 영화에서 여전히 생소한 SF와 판타지 간의 이종결합을 시도했다는 의의는 있을 지라도, 상업영화로서 최동훈 감독의 명성에 걸맞고 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결과물은 아닌 것 같다는 인상만을 남긴 채 내년에 개봉할 2부를 기약한다.
P(Poor, 형편없는)
한국형 SF 판타지의 도전 그 자체를 칭찬하기에는 반면교사도, 롤모델도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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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군 해녀는 잃어버린 물꽃의 추억을 떠올리고
이 글은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초청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최근 여름 휴가로 제주도에 다녀왔다. 바다가 파랗게 넘실거리고 까만 현무암이 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그 제주도 특유의 독특하고 시원스러운 풍광에 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많은 관광객들의 파도에 휩쓸려 이런저런 관광 상품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돌하르방과 감귤 말고도 눈길이 가는 몇몇 물건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바로 해녀를 모티프로 한 여러 캐릭터 상품들이었다.
해녀가 어디 제주도에만 있겠냐마는, 예로부터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기로 소문난 그 제주 땅에서 또 해녀만큼 잘 알려진 직업도 드물지 않나. 까만 잠수복에 동그란 물안경을 쓴 채 산소통도 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그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경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해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알아도 그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에 대해서 깊이 알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기껏해야 잠수를 오래할 줄 알고 바다 밑바닥에서 전복 따위를 따다가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라는 얄팍한 정보만을 알고 있을 뿐일까. 하지만 세상은 꽤나 살기 좋아졌고 대미디어의 시대에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해녀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래에서 소개할 다큐멘터리 영화 <물꽃의 전설>도 그 중 하나이다.
1. 상군 해녀와 애기 해녀
도시에서 미용 일을 하던 채지애 씨는 어느날 생업을 때려치우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돌연 선언했다. 나는 해녀가 되겠노라고. 이런 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는 기어코 자신의 어머니와 이웃, 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애기 해녀가 되었다. 바다 속을 누비는 일이 어디 쉽겠냐마는, 답답하고 꽉 막힌 것만 같던 도시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을 것이다.
험난한 바다 생활을 가르쳐 준 것은 다름 아닌 선배 해녀들이었다. 영화는 채지애 해녀의 여러 멘토 중 가장 베테랑인 현순직 씨를 조명한다. 팔순이 넘은 나이, 칠십여 년이 넘도록 제주 바다 곳곳을 누벼 온 그 대장 상군 해녀의 머릿속에는 삼달리의 채 알려지지 않은-일부만이 아는- 비밀 지도가 있다. 선배 해녀의 눈과 귀로 파악되고 입으로써 전해져 내려온 그 머릿속 지도 속에는 드넓은 바다 아래의 협곡과 언덕, 들판이 있고, 그 사이사이엔 가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할 보물이 숨겨져 있다. 그 지도 속에서 바다는 엄하면서도 자비롭고, 거칠면서도 풍요로운 세계다. 그에 대해 논하는 해녀들의 생생한 이야기는 일련의 모험담을 듣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물질로 말미암아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들의 열정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나이 차가 한참나는 상군 해녀와 애기 해녀 사이의 세대를 초월한 우정 역시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이다.
2. 잊혀져 가는 어느 삶의 터전에 대해
그러나 이러한 해녀들의 삶이 녹아 있는 바다는 점점 잊혀가고 있다. 나이든 대장 상군 해녀의 머릿속과 달리 바다가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쓰레기와 공장 오염수, 지구 온난화 따위로 인해 바다는 병들어가고, 그에 말미암아 바닷속의 생태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촬영되는 5~6년 사이에도 바다는 빠르게 황폐화됐다. 현순직 해녀가 꿈꾸듯 이야기하던 그 웅장한 물꽃과 바다 풀들의 세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다 아래에서 자연의 '물건'을 빌려오는 것을 업으로 삼는 해녀들은 이러한 바다의 변화를 가장 기민하게 알아차리지만, 인간이 낳은 대재앙 앞에서는 그저 무력해질 뿐이다.
이 영화는 해녀들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우리가 몰랐던 해녀라는 직업과 그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계기를 마련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터이자 삶의 터전이기도 한 바다의 실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누군가가 가볍게 아끼고 마는 바다를 누군가는 온 열정을 다해 사랑한다. 우리가 시원찮게 생각하는 환경 오염은 다른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인 생계적 위협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해녀들만의 일일까? 당장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방류되고 중금속과 미세플라스틱 따위로 오염된 참치가 식탁에 오르는 요즘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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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신을 잃고 깨어나보니 나도 모르는 남편과 아들이 생겼다?
스포주의
지금 만나러 갑니다
-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2018년에 개봉한 영화이다. 중학생 때 학원에서 칭찬스티커를 많이 받아서 학원 선생님께서 영화관에 데려가 보여주신 영화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제목부터 뭔가 풋풋하고 아련한 느낌이 난다 소지섭과 손예진 두 배우가 부부로 나오는 이 영화는 아역배우 지오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한다 아역배우임에도, 비중이 많았음에도 딱히 어색한 부분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지오가 커서 데이트를 하러가는 장면에 평소에 좋아하는 배우 박서준이 등장해 깜짝 놀랐다
- 이 영화는 일본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로써 감성도 일본 감성이 녹여져있다 필터도 색감도 첫사랑 재질이 느낌이 난달까,, 오글거리고 그러진 않는다 풋풋하고 보면 살짝 미소 짓게하는 그런 영화이다 기쁜것만은 아니다 마지막은 정말 뭉클하고 슬프다
- 과거 이야기 :;; 남자주인공 우진은 운동, 수영을 잘하는 고등학생이였다 그러다 여자주인공 수아를 보고 반하게 된다 그렇게 수아를 계속 따라다니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려 노력했지만 철벽녀 수아를 꼬시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체육시간 수아에게 큰 실수를 하게 됬고 그 이후로는 말 한마디조차도 못 썪게 되었다 우진은 체육특기자 전형으로 가게되고 수아는 공부를 잘해서 명문대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우진은 수아에게 연락을 하게 되었고 둘은 다시 만나게 됬다 하지만 몸이 안좋아진 우진은 수영을 못할 정도로 몸이 안좋아지고 수영을 그만두게된다 그리고 수아 그만 만나자 말하게 된다 하지만 수아를 못 잊게 된 우진은 서울로 올라갔지만 수아는 이미 다른 남자가 생긴 이후였다 그리고 이 이후 한동안 연락이 끊겼었고 결국 수아는 우진을 찾아왔다 우진과 수아는 그렇게 둘이 아들을 낳고 살아간다 하지만 수아는 일찍 죽게되고 우진과 그의 아들 지오는 둘이 살게 되었다
- 현재이야기 :;; 지오와 우진은 둘이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수아는 없었지만 항상 아침마다 우진은 수아의 사진에 뽀뽀도 하였다 그러다 터널에서 일년전 죽은 수아를 기적처럼 만나게 된다 수아는 전혀 기억을 하지 못했고 이 상황을 굉장히 어색해했다 하지만 점차 적응하게되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수아는 언젠간 떠나야했다
결말이 정말 슬펐다 마지막이 정말 슬픈영화이다 꼭 봤으면 좋겠다
에딕터 파노라마 여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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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하는 것보다 좋은 건 없지!( ͡° ͜ʖ ͡°) 블록버스터급 대환장 케미 2️⃣0️⃣0️⃣% [데드풀과 울버린] 도파민 '풀' 충전 예고편 대공개! [데드풀과 울버린] 7월 24일 극장 대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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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스트레인저> 예고편
낯선 사람을 구하지 마라!
황량한 시골마을,
청각장애 소년 웨슬리는 학교에서 돌아오던 중
총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한다.
그를 집 근처 헛간에 옮긴 후 음식과 약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낯선 남자의 정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