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몽실2021-08-12 13:38:43
지금 사랑이 뜨겁지 않을 때
왓챠 영화 리뷰 <우리도 사랑일까?>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감정이 제일 두려워요.라는 말을 했다. 마고는 두려울까 봐 쉽사리 남편과 헤어지고 대니얼과 사랑하지 못한다. 남편을 떠날 수 없던 마고는 대니얼에게 30년 후 키스할 약속을 한다. 그녀가 58살, 그가 59살일 때, 남편에게 충실한 30년을 보낸 후, 죄책감 없이 대니얼과 키스할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
알코올 중독자로 치료를 받고 있던 남편의 여동생은 오빠를 떠난 마고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기와 내가 다른 게 뭐야? 인생엔 당연히 빈틈이 있게 마련이야.
그걸 미친놈처럼 일일이 다 메울 순 없어."
알코올 중독자처럼 마고도 사랑에 중독된 걸까. 마고는 끊임없이 빈틈을 메어줄 강렬하고 짜릿한 사랑을 찾는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걸까?
어둡고 음악도 나오는데 엄청 빨라서 아무 짓도 할 수 없는 놀이기구는 짜릿하고 설렌다.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우리 둘 밖에 없고, 모든 게 아름답게만 보인다.
대니얼과 마고가 다시 만나고 새로운 사랑을 하면서 영화가 끝났다면 그저 그런 로맨스 영화가 됐겠지만, 상대방이 달라도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사랑의 모습을 보여줘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깊은 여운이 남았다. 사랑이 무엇일까. 또 원초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되었다. 배우들의 연기, 자연스럽고 따듯한 장면들, 감탄사가 절로 나오던 연출들, 영화에서 단점을 꼽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최고의 여름 영화가 되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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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원섭섭하게 끝난 그들의 복수극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기대와 불안함 속에 <더 글로리>의 남은 이야기를 기다렸다. 권선징악을 향해 맹렬하게 질주하는 복수극의 끝, 동은과 그녀의 조력자가 되찾을 행복, 죄책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다섯 악인의 발악이 궁금했다. 걱정했다. 출생의 비밀을 둘러싼 친부와 생부의 대립. 복수의 칼날 앞에서 맥없이 당하기만 하는 평면적인 악역. 주제의식을 강조한다 해도 과해 보이는 적나라한 가혹 행위 묘사. 1부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단점이 더 커지면서 마무리를 방해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베일을 벗은 <더 글로리>의 모습은 반반이다. 기대도 우려도 절반만 충족하고, 절반은 덜어냈다. 주제의식은 일관성을 잃지 않았다. 모든 일의 시발점이었던 연진은 "그 누구도 옆에 남지 않는" 고통을 맛봤다. 사라, 혜정, 재준도 욕망에 매몰돼 차례대로 파멸했다. 중심 내용을 변주하지 않고 묵직하게 끌고 가며 복수극은 나름대로 깔끔하게 끝맺었다. 그러나 달콤한 복수의 끝은 쌉쌀했다. 동은의 복수에 담긴 쾌감이 온전히 살아있냐고 묻으면 그렇다고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개다. 우선 파트 1에서 부각되지 않았던 로맨스가 극에 잘 녹아들지 못했다. 또 느리고 우연에 기대는 전개 때문에 복수의 칼을 제대로 갈지도 못했다.
신뢰를 불신으로 바꾼 동은의 복수
동은의 목적은 명백했다. '연진에게 직접 복수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킨다. 딸과 남편을 포함한 세상 모든 사람에게 그녀가 버림받게 만든다.' 동은이 선택한 방법도 간접적이다. 그녀는 굳이 자기 손을 더럽히지 않는다. 대신 훌륭한 조력자의 손을 빌린다. 연진, 명오, 혜정, 사라, 재준의 손이다. 동은의 사주대로 명오가 연진을 협박하자, 연진은 명오를 폭행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대가로 연진은 동은이 조작한 증거에 걸려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살인죄의 누명을 쓴다. 사라도 동은의 덫에 빠진다. 그녀가 마약사범이라는 사실은 온 세상이 안다. 동은에게 약점을 잡혀 친구들을 이간질하던 혜정은 사라의 연필에 목이 꿰뚫여 말을 할 수 없다. 하나같이 몰락하는 친구들을 조롱하던 재준도 혜정의 활약 덕분에 시력을 잃는다. 동은이 심은 자그마한 불신의 싹 때문에 그들은 자승자박한다.
이러한 전개는 작위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다섯 친구가 힘을 합쳐 문동은에 맞설 생각을 하지 않는 건 비상식적이다. 연진만 동은의 어머니를 조종해 동은을 괴롭히려 할 뿐, 다른 이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동은의 계략에 걸러 무너진다. 그러나 이들이 몰락하는 과정은 고구마가 아닌 사이다다. 그들 내부의 갈등은 단순히 심리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재준, 사라, 연진이 혜정과 명오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다섯 사이에도 돈과 지위로 쌓은 벽이 있다. 그런데 혜정과 명오가 동은의 칼이 된 순간, 이 벽은 무너진다. 시청자가 좁게는 동은의, 넓게는 혜정과 명오의 처지에도 공감하며 위계가 역전되는 순간을 즐길 수 있는 이유다.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욕망이 영리하게 투영한 결과인 셈이다.
시원함을 넘어 스산한 '그들의' 복수
<더 글로리>의 사이다는 단순히 시원하지 않다. 스산하기까지 하다. 한 장면 때문이다. 동은의 협박을 받아 마치 윤소희의 혼이 접신한 것처럼 굿을 펼치던 무당. 그녀는 갑자기 진짜로 윤소희의 영혼이 보이는 듯한 말들을 늘어놓다가 벌전을 받아 목숨을 잃는다. 윤소희의 죽음과 관련해 동은도 모르는 사실에 대해 말하던 걸 보면 이때 무당은 실제로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정작 동은은 그 존재를 믿지 않는다. 그녀는 신이 자신을 돕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절, 교회, 점집 등 종교적인 장소에서 신을 대신해 직접 협박하고 벌을 준다. 복수극의 끝에 ‘영광’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은의 생각과 달리 신은 그녀를 도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당이, 왕년에는 놀라운 신기를 보여줬던 무당이 돌풍이 부는 기이한 상황에서 급사했으니. 신을 믿을 수 없는 사람도 '신'이라는 존재 말고는 이유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졌으니. 윤소희의 모습을 빌어 하늘이나 신이 천벌을 내리고 권선징악을 행한 장면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신은 왜 이 순간에 동은의 복수를 도왔을까? 드라마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답은 하나다. 연대다. 소희의 시신이 아직 병원 냉동실에 있다는 걸 알고 난 뒤, 동은은 자기뿐만 아니라 소희의 복수를 위해서도 온몸을 던졌다. 밀려 있던 시신 안치 비용을 내기 위해 병원을 찾은 것만 보더라도, 그녀의 복수가 개인적인 만족감 그 이상의 것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연대는 <더 글로리>가 학교 폭력 외의 '악'을 처단하는 드라마인 이유이기도 하다. 다른 형태의 악행에 시달린 피해자가 등장하고, 그들과의 연대가 동은의 복수를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정폭력과 살인범죄의 피해자인 '현남'과 '여정'과 대화할 때는 언제나 따뜻하고 웃음이 꽃핀다. 이는 동은의 빌라 월세가 더 싸고, 각자 삶을 살 것처럼 보였던 이들이 다시 손잡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더 글로리>는 큰 고통을 겪은 피해자가 연대하고 서로 아껴줄 때 권선징악이라는 신의 위로와 도움에 가까워진다고 말하는 듯하다.
최소한의 역할만 해낸 로맨스
하지만 동은의 복수극은 못내 아쉽다. 더 짜릿할 수 있을 텐데 싶은 실망감이 남는다. 특히 로맨스가 부자연스럽다는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이 미련은 주여정이라는 캐릭터의 역할로부터 비롯된다. 여정은 동은이 가장 필요로 하는 조력자다. 그의 직업, 집안, 재력과 사회적 지위 등은 동은의 부족함을 메꾸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가 없었다면 동은인 버려진 장례식장 건물을 통째로 구입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연진이 시술받는 동안 그녀의 표피를 떼내지도 못했을 터. 뒤집어 말하면 여정은 '그가 없어도 동은의 복수극이 과연 성공했을까?'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이때 로맨스는 도구적으로 소비되는 주여정 인물을 극에 자연스레 녹여내는 도구여야 했다. 그가 자기만의 복수를 마음에 품고 있는 게 그 일환이다. 복수의 열망이 있었기에 설령 동은이 자기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도 그녀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로맨스를 전달하는 방식에서 기인한다. <더 글로리>는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작품이다. 그런데 동은과 여정이 한 장면에 등장하면 드라마는 순간적으로 뻔한 로맨스 작품이 되어 버린다. 분위기에 맞지 않는 달달한 OST의 사용이 대표적이다. 이는 로맨스와 역사적 비극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은 작가의 전작, <미스터 션샤인>과 대조된다. 그 결과 몰입감이 떨어진 <더 글로리> 속 로맨스는 자꾸만 '앞으로 가기'를 누르게 만든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로맨스는 극의 메시지를 극대화하는 역할에는 충실하다. <더 글로리>는 많은 복수극과 달리 해피엔딩으로 끝맺는다. 복수를 끝내고 허망해하는 동은. 하지만 그녀에게는 새로운 삶의 이유가 생긴다. 주여정이다. 동은과 달리 여정은 아직 아버지의 살인범에게 복수하지 못했다.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여정을 보면서 그의 엄마는 동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동은은 계속해서 살아갈 이유를 찾고, 그동안 못 누린 행복을 누릴 기회를 잡는다. 즉, 동은과 여정의 로맨스 덕분에 동은도 해피엔딩을 누릴 수 있고, 여정도 트라우마를 극복할 새 기회를 잡았고, 권선징악이라는 주제는 마지막까지 강조될 수 있다.
우연과 운에 의존한 전개
마지막으로 2부의 전개가 1부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운과 우연에 의지한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동은의 엄마인 정미희의 재등장이 대표적이다. 2부에서 그녀의 활약은 눈부셨다. 바둑을 잘 못 두는 연진이 예상치 못한 신의 한 수를 뒀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동은이 학교에서 쫓겨나는 과정을 자세히 보면 의아한 대목이 많다. 학부모들이 외관부터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이 명백한 정미희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나, 그 대가로 거액의 명품 가방 등을 건네는 것 모두 쉽사리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학생들이 얼마 되지 않는 선물도 학교 선생님에게 주기 어렵다는 걸 고려하면 더욱 이상하다. 동은이 정미희와 모녀지간이라는 점을 이용한 복수의 쾌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다소 작위적으로 상황을 조성했다고 보이는 이유다.
그러다 보니 2부에서 조연 캐릭터가 지나치게 의도적으로 활용되는 듯한 인상이 짙다. 물론 조연이 본래 극 중 사건이나 계기를 만드는 장치이기는 하지만, 우연적인 전개가 반복되자 그들의 역할이 도구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일례로 동은의 동료 교사인 추 선생은 몰카 범죄자였던 것으로 밝혀진다. 이는 놀랍지 않다. 이미 1부에서 그가 추잡한 인물이라는 점이 꾸준히 암시됐으므로. 하지만 그의 실체는 재준과 도영이 갈등을 빚으면서 조명 밖으로 밀려난다. 그는 단지 재준과 도영의 대조적인 부성애를 강조하고, 이들의 갈등을 키우며, 주먹다툼을 벌이는 계기로 활용될 뿐이다. 이 장면 이후 추 선생은 조용히 모습을 감춰버린다.
여정의 엄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복수를 끝마친 동은이 자살하려는 순간 등장한다. 동은의 자살을 막고, 여정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그런데 이 장면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작중 동은과 여정의 어머니는 별다른 접점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장면 역시 동은과 여정의 로맨스를 다시 이어주고, 아직 남은 복수가 있다는 걸 상기시키기 위해 여정의 엄마라는 캐릭터를 수단으로 활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복수극 아니라 블랙코미디인 현실
최근 <더 글로리>만큼 많은 이슈를 낳은 작품은 찾기 힘들다. 요즘 따라 길거리에 많은 정당 현수막이 <더 글로리>를 활용한 세태만 보더라도 그 파급력을 느낄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교폭력을 넘어 교사 폭력도 이슈화되는 걸 보면 <더 글로리>의 메시지가 때마침 우리 사회에 필요했던, 시의적절한 울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연출을 맡은 안길호 PD의 학교 폭력 논란은 <더 글로리>의 현실성을 역설적으로 방증한다. 학교 폭력 가해자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피해자는 오랜 기간 가슴속에 응어리를 품고 살다가 힘겹게 피해 사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현실. 연진과 동은이 드라마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손수 증명한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비록 몇몇 대목의 완성도를 두고 설왕설래가 있더라도, <더 글로리>가 오래도록 기억될 드라마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을 이유다.
A(Acceptable, 무난함)
어쨌든 무사히 항해를 마쳤다는 안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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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숙한 사랑의 계절, 그 아름다움
SYNOPSIS.
20년간 최고의 요리를 함께 탄생시킨 외제니와 도댕. 그들의 요리 안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인생의 가을에 다다른 두 사람, 한여름과 자유를 사랑하는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POINT.
✔️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신인이었던 트란 안 훙(사실 발음은 쩐안훙에 가까워요..)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게 한 그 작품.
✔️ 다시 말해... 타협 없이 담아낸 영상미가 보장되는 작품!
✔️ 줄리엣 비노쉬 & 브누아 마지멜 두 주연배우는 실제 부부였던 사이. 이별하고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요. 뭐랄까 오래 끓인 국물 같은 느낌입니다. 프리마(?) 풀어서는 흉내낼 수 없는.
✔️ 영상미를 부정할 수 없지만 전 사실 이 영화에서 영상보다도 대사들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빛 고운 영상 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고스란히 녹인 대사들이 풀어집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
'진짜' 요리로 보여준 것
이 영화는 밭에서 야채를 고르고 다듬는 외제니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선포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요리는 진짜일 것이라고. 얼기설기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깊이 보여줄 거라고.
촬영에 최적화하기 위해 가짜 음식을 적당히 섞어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진짜 요리들을 활용해 담아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요리가 '진짜'라고 느껴진 건 그 때문만이 아니다. 현장의 배우들이야 눈앞의 요리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생생하고 중요하겠지만, 사실 촬영을 위해서라면 꼭 진짜 요리가 베스트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서 변형되고 빛이 바뀌는 진짜 요리에 비해 어쩌면 정교한 가짜 요리가 더 나은 선택지일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필요한 그 이상으로 공을 들인다. 마치 요리의 재료를 준비하는 외제니의 손길처럼, 영화 바깥의 요소들이 섬세하게 준비되었다. 우선 미슐랭 3스타 셰프인 피에르 가니에르가 직접 '요리 감독'으로 참여해 음식을 직접 감수했다. (중간에 왕세자 옆의 셰프 역할로 출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음식에 그의 손이 닿았고, 마치 도댕과 외제니처럼, 실제로 오래 함께 일한 동료가 그 작업을 함께 했다.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아 마자엘 사이에 감도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은은한 존중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영화의 '밑작업'들이 영화 속 요리를 통해 표현되는 관계를 더욱 '진짜'로 만든다. 오래 끓인 국물처럼, 입에 톡 튀는 재료 없이도 깊은 맛으로 배어난다.
이 맛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 바로 영화 초반 외제니와 도댕의 요리 장면이다. 아주 긴 시퀀스로 비춰주는, 합이 탁탁 맞는 이 장면은,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설명한다. 조수 역할을 하는 비올레트와, 비올레트를 따라왔다가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요리에 흥미를 느끼는 소녀 폴린까지, 네 사람이 부엌에서 움직이는 장면은 높낮이 없는 협력과 존중 그 자체다. 고기를 굽고, 가재를 데치고, 소스를 끓이고, 야채에서 물기를 짜내고, 무거운 냄비를 나르고... 자신 있게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 모든 동작에는, 각자의 전문성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성별과 연령이 지금보다 극명히 갈리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정갈하게 섞여 협력하는 주방, 햇빛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주방은 아름답기만 하다.
사랑의 계절이 보여준 것
영화 속 도댕과 외제니는 이미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교감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지만,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한다. 외제니를 위한 요리를 준비하는 도댕과, 그런 도댕을 바라보는 외제니.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가볍게 들뜨거나 설익지 않는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눈빛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과일을 후숙시켜야 하고, 때로는 반죽을 숙성시켜야 하고... 요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법과,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배웠다. 사람들을 초대한 테이블에서 도댕이 하는 대사는 그래서 유독 아름답다. 그들은 이미 계절마다 무엇이 찾아오고 또 떠나가는지,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들의 범위를 명확히 알고 있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이미 그 계절을 돌고 돌아 원숙해진 사람들임을 떠올린다면, 모든 계절을 함께 축제처럼 즐기고 싶어하는 도댕과, 늘 한여름의 태양 볕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외제니의 서로 다른 계절관 또한 원숙해진 어떤 지점에서 맞물릴 수밖에 없다. 천진한 첫사랑의 기쁨은 이내 계절을 돌고 돌아 단단해지므로.
외제니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이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며, 나서서 손님을 대접하고 요리를 해체하는 도댕과 달리 주방에서 식재료와 요리를 통해 손님들과 대화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작열하는 태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외제니 안에 이미 온 계절이 있다. 온 계절을 사랑하는 도댕과 외제니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풍부하고 깊고 아름답다.
외제니가 있는 부엌은 늘 빛으로 가득하다.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던 밤과 그렇지 않았던 밤들을 모두 내면에 머금은 채로,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난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영화에서 본 것도 참 오랜만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홀린 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결혼에 대한 생각의 차이. 도댕은 외제니에게 청혼을 하고 외제니는 그 청혼을 거절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명확함에도.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한쪽이 답답한 이야기로만 소비해온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의 차이,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각자의 성숙함, 생각의 차이를 빚어낸 것들까지도 존중하는 사랑으로 더욱 아름다워진 관계를 바라본다. 일치하는 생각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어쩌면 차이를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이 더 아름다운지도.
예술가의 언어로 보여준 것
영화가 전개되면서, 처음부터 아름다운 협력의 합을 보여준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풍성하게 풀어진다.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이해 또한 관객에게 깊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가로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도댕의 말마따나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하다. 요리에도 인생에도, 영화에도 예술에도, 배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도댕과 외제니에게 요리는 사랑이었고 협력이었으며 예술이었고 이해였다. 그 모든 것을 말보다 더 뚜렷한 영상으로 보여준 이 영화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언어였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오래 응시하고 공기까지 느끼게 만들던 그 실력 그대로, 트란 안 훙 감독의 언어는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오래오래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에도 다시 꺼내 보고 싶은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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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ONJU IFF 데일리] 문명과 야만의 경계
영화 정보
감독: 타티아나 마수 곤살레스 (Tatiana MAZÚ GONZÁLEZ)
제작국가: 아르헨티나
제작연도: 2024년
상영시간: 90분
장르: Experimental
상영 형식: DCP, 컬러/흑백
상영 섹션: 프론트라인
Korean Premiere
시놉시스
부에노스아이레스시와 교외의 경계에 위치한 교차로. 경찰의 손에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일상의 이미지와 부딪힌다. 그녀의 투쟁과 목소리는 그들이 함께 상상했던 쥘 베른의 가상 세계를 그려낸다.
리뷰
다큐멘터리 <모든 문명의 기록>은 한 개인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시작으로 국가가 가행한 폭력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시적인 상상과 강렬한 사실로 엮어낸다. 감독 타티아나 마수 곤살레스는 실종된 10대 소년과 그의 어머니 이야기를 통해, 한 국가가 어떻게 자국민을 억압하고 희생시키는지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이 다큐멘터리가 다루는 사건은 비극적이고 충격적이다. 아들이 경찰에 의해 구타당하고 실종된다. 그러나 국가와 경찰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들의 폭력을 ‘민주적’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이는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국가가 빈민층에 대해 저지르는 체계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에 주목해야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빈민가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국가는 보호자가 아닌 억압자, 심지어 가해자 역할을 한다. 아들을 잃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경찰을 찾아가거나, 기다리거나, 울부짖는것 밖에 할 수없을 정도로 무력하다. 이는 국가 폭력의 비극을 여실히 드러낸다. 더구나, 경찰이 저지른 범죄는 고작 10년형이라는 형량으로 끝난다. 이는 국가의 폭력과 그에 대한 처벌의 불균형, 정의의 결여를 극명히 보여준다. 아들은 죽어서 돌아오지 않는데, 가해자는 10년 뒤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국가 권력의 야만성과 불공정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타티아나 마수 곤살레스 감독은 이러한 비극을 기록하면서도 그녀는 쥘 베른의 상상 세계를 차용한다. 관객에게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보여준다. 쥘 베른의 작품은 종종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탐험과 호기심을 상징한다. 이는 현실의 억압과 비극을 초월하고자 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망을 반영한다. 쥘 베른의 세계는 현실에서 빼앗긴 아들과의 연결을 상상 속에서 회복하는 도구로 작용한다.
상상과 현실을 교차시키며 관객에게 더 깊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발터 벤야민이 ‘모든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라고 말했듯이, 영화는 국가 폭력이라는 야만이 문명이라는 이름 아래 묵인되고 정당화되는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이와 동시에, 문명은 이러한 폭력을 기록하며, 잊지 않으려는 노력 또한 포함한다. 이 기록은 과거의 사건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경고로 작용한다.
<모든 문명의 기록>은 국가 폭력과 개인의 상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저항과 연대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러한 작은 불꽃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은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 중 하나다. 아무리 억압적이고 부당한 현실이라 해도, 기억하고 기록하며 저항하려는 인간의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다.
상영 일정
2025년 5월 1일 13:30
메가박스 전주객사 9관
2025년 5월 5일 17:30
메가박스 전주객사 4관
2025년 5월 9일 14:30
CGV 전주고사 5관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 : 2025.04.30 ~ 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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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의 뒷모습
*영화 <안녕 미누>에 들어간 미누 씨의 삶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네팔에 사는 미노드 목탄 씨의 침실 벽에는 목장갑이 액자에 걸려 있다. 그 모습은 여러 의미로 생경하다. 지극히 한국적인 아이템이기도 하거니와, 소중하게 액자에 끼워놓을 일은 더더욱 없는 일상의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미노드 목탄 씨의 인생을 고스란히 담은 풍경이기도 하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20대 초반 어린 나이였던 1992년 한국으로 일하러 떠났다. "미누"라는 이름으로, "1세대 이주 노동자"라 불리던 그는 2009년 어느 날 갑작스럽게 추방을 당했다. 이 영화는 그 미누 씨의 삶을 담았다.
미누 씨는 네팔에서 성실하게 살고 있다. 한국 어학원에서 강의를 하고, 강의를 수료한 후 자격을 갖춘 청년들이 한국으로 일하러 떠날 때 다정한 말로 격려한다. 카페를 열고, 인형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고, 판로까지 터 주면서 청년들이 네팔을 떠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도 열심히 찾는다. 그가 처음 한국에 온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함이었을 테니, 이만큼 든든하게 섰다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등에서는 이방인의 뒷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는 자기가 나고 자랐을 네팔 시장을 걸으며 "남대문 시장 생각난다"며 웃는다. 네팔 사람이라고 다 히말라야 가본 건 아니라며, 자기 히말라야는 안 가봤다고 웃지만 <목포의 눈물>을 구성지게 부를 줄 안다. 한국에서 일하던 시절, 고향을 떠나 일을 한다는 점에서 동병상련이었던 아주머니들이 밥도 챙겨주고 건강도 걱정해주고 그러면서 가르쳐 주었던 노래란다.
그의 웃음은 어쩐지 씁쓸하고 외롭다. 분명 활짝 웃는데 눈물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 긴 시간 동안 살았던 나라에서 추방당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네팔 사람으로 태어나 네팔에서 자랐어도 그를 이루는 것들의 상당수는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일 텐데. 한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한국식 밥상을 차려주는 솜씨를 봐도, 나이를 물으면 "한국 나이로"를 접두어처럼 붙여 대답하는 모습을 봐도, 놀라면 "깜짝이야"가 먼저 나온다는 걸 봐도, 그의 어딘가에서 분명 한국 DNA가 느껴진다. 네팔 사람들과 네팔어로 대화하고 네팔의 명절을 챙기고 있어도 그는 네팔에서 오래 산 한국 사람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한국인보다 더 지독하고 치열하게 한국의 모든 것과 부딪고 얽힌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네팔에서 늘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있듯 그는 한국에서도 그런 사람이었다. 식당에서도 일하고 봉제공장에서도 일했지만, 밴드도 결성했다. 신나고 경쾌한 멜로디인데 "오늘은 나의 월급날 가슴이 두근두근합니다"로 시작한 가사가 "오 사장님 이러지 마세요 그동안 밀린 내 월급을 주세요 날 욕한 건 참을 수 있어요 내 월급만은 돌려주세요"로 흘러가는 <월급날>이나 박노해 시인이 쓴 동명의 시를 모티프로 쓴 <손무덤> 같은 노래들. 이주 노동자들이 줄줄이 자살로 죽어나가던 시절, 밴드 스탑크랙다운("단속을 멈춰라')은 현장의 분위기를 만들고 이주 노동자들과 사회의 중간다리가 되어 주었다. 미누는 자연히 이들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밴드 공연이 잡혀있던 어느 날 갑작스럽게 추방을 당한다. 불법 체류자를 추방하는 게 무엇이 나쁘냐 할 수도 있겠지만, 며칠씩 미누를 따라다니다가 집 앞에 있는 그를 잡아간, 말하자면 '표적 수사'였다. 당시에도 게다가 추방 이후 미누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이게 법치국가냐"라고 되묻는 스탑크랙다운 멤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법치국가면 법대로 해야지, 왜 미누는 예외가 되는가. 한국 사는 동안에도 그저 노동을 했고 노동에 당연히 따르는 권리를 말했을 뿐인 그가, 이제는 버젓이 사업가가 되어 한국에 들어오려는 그가 얼마나 체제에 반동적인 인물이라고 법에 예외까지 두는 것일까.
불법 체류와 이주 노동자 문제는 언제나 첨예한 사회 갈등 소재가 되었고, 담론은 나뉠 수밖에 없다. 법은 잘 지키라고 있는 거고 그러니까 지키면 되잖아,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애초에 법을 지킬 만한 여건이 주어지지 않은 이들에게 불법은 선택이 아니었다. 또한 법치국가가 법을 형평성 없이 적용했다는 것은 누구든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는 별도의 문제다.
게다가 미누 씨의 인생을 보고 나면 법과 국적을 다 떠나서 숙연해지는 것을 느낀다. 추방과 격리로 응답한 한국 사회에게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이 가진 나눔과 연대, 따뜻한 애정만을 주고 떠났다. 이 영화는 그가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이다.
인도로 떠나던 20대 초반의 내게 누군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한 사람이 어떤 사회의 일원으로 완전히 흡수되기까지 2년이 걸린대."로 시작된 그 말은 "그러니까 너 돌아오면 많이 힘들 거야.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덜 힘들 거고. 나중 되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로 끝났다. 그리고 그 말은 정말 꼭 맞았다.
인도 산 지 1년 반쯤 되었을 때,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고 인도 루피화를 꺼내어 계산을 치르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인도 내의 한국 식당은 거의 안 가봤으니까 그건 현실 반영이라기보단 내 상태를 고스란히 비추는 꿈이었을 거다. 더 시간이 지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는 더욱 당황스러웠다. 나고 자란 땅에서, 평생을 살아온 내 방에서 나는 남처럼 서성거렸다. 내 자신이 낯설고, 낯설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예방주사처럼 내게 누군가 넣어준 몇 마디 말을 동아줄 삼아 그 시간을 보냈다.
하물며 1992년에서 2009년, 아이 하나가 장성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도록 한국에 산 그가 그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어떤 친구는 내게 "너 3년 있었지? 그럼 딱 그만큼 힘들 거야."라고 말했고, 실제로 귀국한 지 3년쯤 지나니 인도는 내게 추억이 되었다. 미누 씨에게 한국은 아직 추억이 될 수 없는, 자기 안에서 너무 팔팔하게 날뛰는 기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팔 거리를 걷는 그의 뒷모습, 여권 가진 자기의 모국을 걸어다니면서도 이방인의 냄새를 풍기는 그 뒷모습이 너무 슬펐다. "고향에 고향에 이르러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러뇨"라는 지용의 시구가 과연 우리만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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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선악과를 손에 쥐고 소설 밖으로 뛰쳐나간 창조물
가여운 것들 (Poor Things, 2023)
"스스로 선악과를 손에 쥐고 소설 밖으로 뛰쳐나간 창조물"
개봉일 : 2024.03.06.
관람등급 : 청소년 관람불가
장르 : 로맨스, SF, 모험
러닝타임 : 141분
감독 : 요르고스 란티모스
출연 : 엠마 스톤, 마크 러팔로, 윌렘 대포, 라마 유세프, 제러드 카마이클, 크리스토퍼 애벗
이 영화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오래 고민했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신작<가여운 것들>은 지금껏 봐온 그의 영화 중 가장 노골적이고 파격적인 영화였다.
나는 <더 랍스터>를 통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 <더 랍스터>를 봤을 땐 이 영화가 주는 새로운 기묘함에 정수리를 한대 맞은 느낌이었고 그 후 <킬링 디어>를 봤을 땐 제대로 취향을 저격 당해 심장에 스트레이트를 한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봤을 땐 정말 만족스러운 괴식을 먹은 느낌이었고.. 지금 <가여운 것들>을 본 후의 느낌은.. 맛있어 보여서 허겁지겁 흡입한 아이스크림 안에서 머리카락 뭉치가 발견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를 보기 전 고려해야 할 점
영화의 수위와 소재
<가여운 것들>? 일단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작품이라 봐야겠고, 예고편을 보니 때깔 좋고, 소재 자체도 완전 취향 저격이다! 게다가 영화 개봉 전에 원작 소설에 도전했다가 독서력 부족으로 장렬하게 실패했기에 어떤 형식으로든 이 이야기를 소화하고 싶다는 열망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군침을 참으며 기다린 시간이 지나가고 영화가 개봉했다. 다른 관객들의 반응은 신경도 안 쓰고 일단 허겁지겁 먹었다. 처음엔 "아~ 역시 이 맛이지~”싶어서 행복했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소화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차올랐다. <가여운 것들>이 안 좋은 영화라고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주인공 벨라가 집을 떠나 여행을 하며 그녀가 겪는 경험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게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영화 자체의 수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가슴이 열린 시체, 장기가 나오는 장면도 있고 선정성 짙은 장면도 길게 나온다. 그리고 시선에 따라 크게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요소도 있다. 스포지만 긴 시간 동안 보여주는 부분이기에 미리 이야기하고 가겠다. 이 영화엔 벨라가 매음굴에서 몸을 파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도 꽤 긴 시간 동안,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전시된다. 개인적으론 해부 장면보다 이 장면들이 굉장히 힘들게 다가왔다. 벨라가 선택한 성적인 행위들이 그녀의 성장, 해방에 영향을 미치긴 하지만, 이것을 이야기하는 실질적 주체가 남성(남성 감독, 각본가 토니 맥나마라도 남성)이다 보니 약간의 찝찝함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보기엔 힘들었지만 매력적이었던 <가여운 것들>
엠마 스톤의 연기 / 시각적인 자극과 흥미로움
힘들었던 것과 반대로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게 만드는 부분들도 많았다.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부분은 엠마 스톤의 연기다. 엠마 스톤은 <가여운 것들>로 올해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 왜 그녀가 이 상을 받았는지 바로 이해가 갈 것이다. <가여운 것들>에서 보여준 그녀의 연기는 정말 괄목할 만하다. 엠마 스톤은 유아기 수준에 머물러 있던 벨라가 세상을 마주하며 성장하고 마침내 완전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정말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절뚝거리던 걸음은 딱딱하고 어색한 걸음을 지나 유연한 발걸음으로 바뀌고 그에 따라 말투, 눈빛 또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또한 나는 이 섬세한 연기를 해내고, 수많은 노출과 격렬한 관계 장면 또한 ‘벨라에게 필요한 것’이라며 받아들인 그녀의 담대한 마음가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시각적 아름다움이다. 갓윈의 집안에 있는 빈티지한 가구와 가까이서 들여다보고 싶게 만드는 흥미로운 기계, 작지만 알차게 꾸며진 정원, 꿈에 가깝게 느껴질 만큼 환상적이면서 기괴한 도시의 모습, 화려한 벨라의 의상 등.. 시선을 끄는 요소들이 참 많다. 이 외에도 귀를 살살 긁어대는 음악과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작품 특유의 기묘함과 불쾌함, ‘어른 몸과 아이의 뇌’라는 소재가 주는 흥미로움과 자극까지, <가여운 것들>은 소화하긴 힘들지언정 매력적임은 부정할 수 없는 영화였다.
어른의 몸을 가진 어린아이
<가여운 것들>은 타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고, 사랑과 억압을 동시에 받으며 살아온 여성 벨라가 스스로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벨라를 만든 사람은 괴짜 과학자 갓윈 백스터다. 우연한 기회에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임산부 시체를 건진 갓윈은 미약한 신체 전류만 남아있는 임산부의 시체를 보며 고민한다. ‘생이 버거워 자살한 사람을 내 맘대로 살리는 게 맞는 일인가?’. 어차피 기독교 국가에선 자살을 정신병이나 죄로 보니 그녀가 살아난들 정신병원 또는 감옥행일 텐데.. 잠시 고민하던 그는 그녀가 고깃덩어리로 변하기 전에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 이미 진행 중이었던 이 임산부의 생을 함부로 결정하는 것은 좀 그러니까, 아예 살아갈 기회조차 없었던 임산부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새로운 생을 주기로. 갓윈은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의 뇌를 꺼내 임산부의 머리에 이식한다. 그는 벨라는 그렇게 갓윈에 의해 창조된다. 벨라의 일상은 창조주 갓윈이 만든 세계 안에서, 탄생과 성장의 과정은 모두 갓윈의 손안에서 진행된다.
벨라는 아름다운 성인 여성의 몸과 어린아이의 뇌를 가진 존재다. 벨라가 창조된 후 얼마나 지났는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행동을 보면 대략 3~6세(남근기)쯤 되는 것 같다. 이때의 아이들은 성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특히 강해지고 아들은 엄마를, 딸은 아빠를 특히 애정 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침 이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가득 찬 시기를 지나고 있는 불완전한 생명 앞에 흥미로운 인물이 둘이나 나타난다. 맥스와 덩컨. 특히 적극적으로 벨라를 꼬신 덩컨의 영향으로 벨라는 세상을 향한 모험심을 키우고 처음으로 집을 떠나 세계를 여행하기로 맘먹는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브
스스로 선악과를 손에 쥐고 완벽한 세상을 벗어난 벨라
벨라가 사과를 자위에 사용한 이유
벨라는 갓윈이 자칭 ‘완벽하다’고 표현하는 세계를 떠나 온갖 추악하고 슬픈 현실 세계를 마주하며 성장과 변화를 겪는다. 벨라의 여정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와 일부 닮아있다.
에덴동산에 머물고 있던 아담과 이브는 뱀의 속삭임에 속아 선악과(사과)를 따먹고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난다. 벨라는 갓윈의 보호 아래 아무런 차별도 위험도 없는 그의 집안에서 살아왔다. 벨라가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갓윈은 “바깥에 위험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라고 화내며 벨라를 말린다. 하지만 벨라는 갓윈의 걱정을 뒤로한 채 스스로 당대 사회의 금기로 여겨졌던 ‘여성의 성적 욕망’에 눈을 뜨고 여러 위험과 지저분한 것들이 가득한 세계로 모험을 떠난다. 쫓겨난 것인지 자의로 나간 것인지의 차이를 제외하면 이 두 이야기는 상당히 비슷하다.
어느 날 아침, 홀로 식탁에 앉아있던 벨라는 사과를 손에 쥐고 자신의 몸에 갖다댄다. 벨라를 관찰하기 위해 뒤따라온 갓윈의 제자 맥스는 자위를 하는 벨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다. 그는 자위를 ‘상류사회에선 하면 안 될 행위’라고 말한다. 여성이 스스로 느끼는 성적 쾌락은 하나의 죄악이며 벨라는 선악과인 사과를 통해 그 죄악으로 취급받는 감정을 느낀다.
이후 벨라가 성장했음을 느낀 갓윈은 벨라를 위해 믿을만한 남자인 맥스와의 결혼을 추진하는데, 그 결혼 계약을 보증하기 위해 집에 방문한 덩컨이 벨라를 적극적으로 꼬드긴다. 덩컨은 얌전히 옷장에 들어가 비눗방울을 불고 있던 벨라의 몸을 만지고 자유와 육체적 쾌락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녀를 꼬드긴다. 안 그래도 집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에 차있던 벨라는 모든 걸 지원해 주겠다는 덩컨 덕분에 추진력을 얻는다. 그렇게 벨라는 안전한 갓윈의 세계를 벗어나 온갖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로 떠난다.
금기를 깨고 성장하는 여성 벨라, 자유로움이 묻어나는 그녀의 외모
여성의 성적 해방
벨라는 여행을 하며 그 당시 사회에서 여성에게 금기로 지정된 것들을 깨나간다. 이는 사회 통념상 ‘여성이 해선 안될 것’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고 원래 몸의 주인인 엄마 빅토리아의 삶을 옭아맸던 것을 깨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벨라는 상류사회에선 금지된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육체적 쾌락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남성 중심으로 쓰인 책을 읽으며 그들 말고 그녀의 이야기는 왜 없는지 질문하기도 한다. 벨라는 스와이니 부인의 매음굴에 들어가는 자신의 행동을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것이라 이야기한다. 물론 금기에 대항하는 방법치고 필요 이상으로 과격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것 또한 벨라 나름의 싸움이었던 거다.
벨라의 이러한 거침없는 성격과 자유에 대한 갈망은 그녀의 외모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빅토리아(엄마)와 배에서 만난 미스 프림 등 대부분 상류층 여인들이 머리를 깔끔히 틀어올리는데 반해 벨라의 긴 머리는 자유롭게 풀어헤쳐져 있다. 의상 다른 여인들이 입는 고풍스럽고 긴 드레스와는 다르게 화려하고 다리와 팔이 자유롭게 노출된 형태다. 미스 프림은 긴 벨라의 머리를 만지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칭찬하며 부러워한다. 이는 벨라의 까맣고 긴 머리카락에 대한 부러움일 수도 있겠지만, 자유롭게 쾌락을 즐기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자유롭고 맑은 여인에 대한 부러움일 수도 있겠다.
어른이 된 아이, 가여운 존재를 대신해 싸우다.
죽음을 선택한 빅토리아를 위해, 가여운 그녀들을 위해.
갓윈의 집을 나온 후 벨라의 세상은 여러 의미의 색(color, 색정) 가득 차고, 벨라는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성장한다. 벨라는 리스본에서 폭력과 달콤함을 맛보았고 해리와 식사를 하며 충격적인 빈민가의 모습도 보았고 온갖 책들을 읽었다. 아테네로 가는 배 위에선 별거 아닌 이유로 기러기를 죽이는 선원의 잔인함도 보았다. 그리고 매음굴에서 온갖 남자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추함과 외로움, 치욕을 모두 느낀다. 스와이니 부인은 “치욕, 공포를 모두 경험해야 완전한 어른이 된다.”라고 말한다. 벨라는 그렇게 다양한 것들을 느끼며 어른이 된다.
어린아이 같았던 벨라의 말투는 여느 지식인 못지않게 단단해졌고 비틀거리던 발걸음은 올바르고 거침없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창조자 갓윈을 생각하지 않았지만 갓윈이 위독하다는 소식까지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매음굴을 떠나 런던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갓윈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듣게 된다. 아이가 없는데 왜 배를 가른 흔적이 있는지, 나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여행을 갔다 죽었다던 내 진짜 엄마는 어디에 있는지… 갓윈이 지금껏 숨겼던 진실은 너무도 잔인하고 역겨운 것이다. 하지만 벨라는 그에 굴하거나 자신의 삶을 혐오하지 않는다. 벨라는 벨라로서 살아온 삶이 즐거웠다고 말하며 스스로 맥스와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벨라가 스스로 만든 삶은 퍽 단단하고 강인하다.
벨라는 많은 것을 이겨냈다. 하지만 벨라가 갖고 있는 몸의 원래 주인이자 엄마인 빅토리아는 자신의 삶을 혐오하고 끝내 죽음을 선택했다. 빅토리아의 선택은 배와 목덜미의 수술 흉터가 되어 여전히 벨라에게 남아있다. 맥스와 결혼식을 올리던 중 벨라의 아빠이자 빅토리아의 남편인 블레싱턴 경이 찾아온다. 벨라는 별다른 말없이 그를 따라 빅토리아가 살았던 집으로 간다. 집 밖에선 그래도 멀쩡해보 였던 블레싱턴 경은 집에 오자마자 본색을 드러낸다. 그는 갈등이 생길 만큼 하인들을 잔인하게 괴롭히는 주인이고 아내를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남자였다.
빅토리아가 살던 집으로 간 날 밤, 블레싱턴 경이 주문한 저녁 식탁엔 벨라가 맛이 없다며 뱉어냈던 훈제 청어와 거위 요리가 잔뜩 올라와 있다. 블레싱턴 경은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다.”라며 음식을 권한다. 빅토리아와 벨라는 같은 신체를 가졌으니 두 사람이 비슷한 입맛을 가졌을 확률이 높을 텐데, 이는 블레싱턴 경이 아내에게 아예 관심이 없었던걸 넘어서 어쩌면 아내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압적으로 음식을 권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벨라는 빅토리아를 대신해 이 몹쓸 남자에게 복수한다. 벨라는 그의 발에 총을 쏘고 그의 뇌를 염소의 몸에 이식한다. 창조자의 딸로서 의술을 가진 의사로서 내릴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을 내린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와 벨라의 연결점
각기 다른 인간의 신체와 뇌가 합쳐진 존재. 벨라를 보며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괴생물체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가여운 것들>과 [프랑켄슈타인] 사이엔 크게 두 가지 연결점이 있다. 작품 내적 연결점은 신에게 도전한 과학자가 만든 생명체가 나온다는 점, 작품 외적 연결점은 메리 셸리와 셸리의 어머니, 그리고 벨라 모두 당대 여성으로서 쉽게 할 수 없는 일을 행했다는 점이다.
벨라는 위에서도 반복해 얘기했듯이 사회적 억압을 이겨낸 여성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메리 셸리도 벨라와 같다. 1818년, 메리 셸리가 처음으로 [프랑켄슈타인]을 냈던 당시 사회에서 여성 작가들은 유령 같은 존재였다. 여성들은 자신의 이름이 아닌 남편과 같은 남성의 이름을 빌리거나 남성적인 필명으로 본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몇 년의 시간이 지난 후 1831년, [프랑켄슈타인]의 개정판을 내며 자신이 이 작품의 작가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혔다. 그리고 셸리의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한 현대 최초의 페미니스트 중 한 명이다.
메리 셸리가 작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이 시대를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이때는 영국이 큰 번영을 누리던 시기였지만 그 화려함 뒤에 가려진 갈등도 많았다고 한다. 누군가는 이때를 여성의 인권이 바닥을 쳤던 시기라 말하기도 한다. 메리 셸리가 처음 익명으로 책을 출판한 것만 봐도 여성에게 사회적 억압, 차별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벨라의 엄마 빅토리아의 이름도 ‘빅토리아 시대’에서 따온 것이 아닐까 싶다.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들처럼 남편의 손안에 잡혀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왔을 빅토리아, 벨라는 가여운 빅토리아를 대신해 싸우고 승리한다.
가여운 창조물이 아닌 가여움을 느끼는 인간이 되다.
소설 속 괴생물체와 닮았던 벨라, 성장을 거쳐 소설 밖으로 나오다.
“나는 가엾은 놈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들어낸 비참한 모습의 괴물이었다.” -[프랑켄슈타인]
영화의 초반, 벨라는 갓윈의 창조물이었다. 벨라는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가엾은 괴생물체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성장을 반복한 그녀는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가고, 가여운 여성(빅토리아)을 대신해 싸우는 인간이 되었다. 벨라의 성장은 마치 [프랑켄슈타인] 소설 속 가여운 괴생물체가 소설의 저자인 당당한 여성 메리 셸리로 변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벨라는 작가(창조주 갓윈)의 뜻대로 써내려가는 소설 속 괴생물체 역할을 벗어나 스스로 소설을 써 내려가는 여성 작가가 된 것이다.
고깃덩어리가 아닌 인간
갓윈은 뇌의 신호가 없는 인간의 몸은 고깃덩어리라고 말한다. 의학적으로 살아있지 않다는 뜻이다. <가여운 것들>을 보고 이 말을 다시 떠올렸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은 뇌의 신호, 즉 뇌가 담당하고 있는 요소 중 하나인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된 사람은 죽어있는 고깃덩어리와 다르지 않다는 뜻일지도 모르겠다고. 벨라가 막 새로운 몸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전류로 되살려낸 괴생물체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여행을 하며 분노, 슬픔, 사랑, 행복, 치욕, 정신적 고통 등을 느끼며 정신적 성장을 이뤄냈고,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살아있는 인간이 되었다.
<가여운 것들>은 극 중에 나오는 개+거위, 개+닭, 오리+염소, 말머리가 달린 증기 자동차처럼 기괴하고 이상하고 불쾌한, 혼종 같은 영화다. 누군가 이해할 수 없다고, 상스럽다고 욕을 한다 해도 이해할 만큼 나 또한 이 영화가 상당히 이상한 영화임은 인정한다. 솔직히 빠른 시일 내에 <가여운 것들>을 다시 볼 것 같진 않지만 이 영화가 남긴 충격은 꽤 오래갈 것 같다. 그리고 그 충격이 다 가실 때쯤 벨라를 다시 떠올리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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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변방 행성 벨트의 한 농촌에 마더월드의 군대 임페리움을 이끄는 '노블'(에드 스크레인) 제독이 나타난다. 그는 촌장을 때려죽인 후 다시 돌아올 때까지 군대를 먹일 식량을 준비하라고 협박한 뒤 떠난다. 농촌 주민들이 공포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자, 과거 마더월드의 장교였던 자기 신분을 숨긴 채 지내던 '코라'(소피아 부텔라)가 마침내 목소리를 낸다. 어차피 노블 제독이 우리를 모두 죽일 테니, 그전에 그들과 싸울 준비를 하자고.
이에 친구 '군나르'(미힐 하위스만)와 함께 노블 제독에 맞설 전사를 찾아 나선 코라. 그녀는 항구 도시에서 만난 '카이'(찰리 허냄)의 도움을 받아 은하계 각지에 흩어진 숨은 전사들을 발견한다. 노예가 된 왕자 '타라크'(스타즈 네어), 갓을 쓴 검사 '네메시스'(배두나), 임페리움에 반기를 든 전설적인 장군 '타이투스'(자이먼 혼수), 저항군의 리더 '다리안 블러드엑스'(레이 피셔)까지. 그러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나선다. 마더월드의 폭정에 맞서 벨트를 구할 영웅들과 함께.
황새 쫓다 가랑이 찢어진 뱁새, <레벨 문>
<스타워즈>. 스페이스 오페라의 고전. 첫 등장 이후 40년이 지나도 인기를 유지 중인 미국의 신화. 사실 <스타워즈> 이야기는 명성에 비해 그다지 참신하지 않다. 좋게 말하면 왕도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클리셰로 가득하다. 조지 루카스가 조지프 캠벨의 연구를 차용한 결과물이기 때문. 캠벨은 여러 신화가 공유하는 모티브를 정리했고, 그 내용은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의 서사에 고스란히 반영됐다.
대신 <스타워즈>는 다른 영역에서 독자적인 매력을 구축했다. 이야기는 평범해도,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세계관은 특별했다. 다양한 행성과 생명체, 제다이와 시스의 갈등, 현실세계로 역수입된 광선검 결투, 임페리얼급 스타 디스트로이어와 X-윙 같은 전투기, 여러 외피의 드로이드까지. 익숙한 이야기를 따라가면 상상 속에서만 존재했던 은하계를 탐험할 수 있는 게 <스타워즈>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이는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를 꿈꾼 잭 스나이더 감독 신작 <레벨 문: 파트 1 불의 아이>의 실수이기도 하다. 본래 스나이더가 <스타워즈> 스핀오프로 기획한 <레벨 문>. 이 프로젝트는 디즈니의 루카스필름 인수 후 취소됐고, 넷플릭스에서 되살아났다. 그런데 이상하다. <레벨 문>은 더 이상 <스타워즈> 세계관에 속하지 않는데, 여전히 <스타워즈>를 답습한다. 그 결과 <레벨 문>은 <스타워즈>의 강점 대신 약점만 노출하고 말았다.
첫 번째 실수: <스타워즈>의 세계를 답습하다
할리우드의 스페이스 오페라 영화가 <스타워즈>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스타워즈> 세계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유사한 세계관 속에서 참신한 이야기를 보여줄 것인가? 가렛 에드워즈의 <크리에이터>는 전자라 할 수 있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감독인 그는 스타워즈 세계관의 근간인 '프런티어 정신'과 '오리엔탈리즘'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독자적인 세계관을 그렸다.
<레벨 문>은 후자다. 이름과 외양만 다를 뿐, <스타워즈>의 세계관을 이어받았다. 마더월드와 은하 제국은 전 우주를 억압하는 군국주의 권력이다.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섭정 벨리사리우스는 황제를, 반은 인간이고 반은 사이보그인 노블 제독은 다스 베이더의 변형이다. 그들의 관계도 유사하다. 황제가 다스 베이더를 겁박하고 이용했듯이, 섭정 역시 노블 제독을 장기짝으로 다룬다.
주인공 삼인방인 코라, 군나르, 카이는 루크, 레아, 한 솔로 삼총사를 연상케 한다. 루크와 레아의 성별과 신분을 맞바꾸고, 한 솔로를 더 비열하게 만든 게 전부다. 마더월드에 대항하는 저항군과 은하 제국에 맞서는 반란 연합은 규모도, 위상도, 역할도 유사하다. 일반 함선으로는 맞설 수 없는 함선 '킹스 게이즈'의 존재 역시 <스타워즈> 속 스타 디스트로이어의 대체재나 다름없다.
문제는 <스타워즈>의 본래 장점도 세계관이라는 것. 달리 말해 <스타워즈>가 40년이 넘도록 쌓아 올린 세계관을 답습한다면, 그 작품은 결코 <스타워즈>로부터 차별화될 수 없다. 실제로 <레벨 문>은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스타워즈>와의 비교를 끝끝내 피하지 못한다. 왜 이 영화가 <스타워즈>가 아닌 다른 제목을 달고 제작되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두 번째 실수: 또 다른 고전을 답습하다
그렇다면 <레벨 문>은 스토리텔링으로 승부를 봐야 했다. <스타워즈>의 도식적인 이야기와 확연히 다른, 참신하고 치밀한 이야기로 관객을 매료해야 했다. <레벨 문>은 그러지 못했다. <스타워즈>라는 클래식에 또 다른 고전, <7인의 사무라이>를 더했다. 자연히 <레벨 문>의 러닝타임 148분은 모두가 이미 알고, 예측할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로 가득 차 버렸다.
물론 잭 스나이더의 의도는 추측할 수 있다. 그의 연출작은 한 가지 경향성이 있다. '에픽'을 좋아한다는 것. 그는 자기 신념을 관철시키려는 인물의 투쟁을 웅장하고 장엄한 서사시로 그려내는 데 관심이 많다. <300>, <맨 오브 스틸>, <배트맨 대 슈퍼맨>, <왓치맨>, <저스티스 리그> 모두 마찬가지다. 바로 여기서 <스타워즈>를 배경으로 <7인의 사무라이>를 보여주려 한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사실 명작이라는 점과 별개로 <7인의 사무라이>는 스케일이 큰 영화가 아니었다. 한 농촌을 배경으로 도적 떼와 사무라이 7명이 싸우는 이야기였다. 잭 스나이더는 이 이야기를 서사시로 바꾸려 한다. 자유의 투사들이 정의롭지 않고 부당한 탄압에 맞서는 우주적 대서사시를 꿈꾼 셈이다. 그래서 그는 스타워즈를 빼닮은 세계관을 더해 도적 떼를 마더월드로, 7인의 사무라이도 마더월드에 복수하려는 영웅들로 바꿨다.
문제는 잭 스나이더의 큰 그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선악을 딱 잘라 나눈 이분법적인 구도는 이제 소구력이 없다. 당장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도 은하 제국을 퍼스트 오더로, 반란 연합을 저항군로 변형했다가 발전한 게 없다는 비판을 못 피했다. 파시즘, 공산주의 같은 거악과 싸우는 시대가 아닌 상황에서 이분법적 구도는 구시대적이니까. 근래 히어로 영화, 첩보 영화가 괜히 선악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 게 아니다.
세 번째 실수: 허점이 많은 플롯
큰 그림의 매력이 부족한 가운데, <7인의 사무라이>를 차용한 플롯도 안일하다. 벨트의 한 농촌을 구하기 위해 전사를 모으는 게 주된 내용이지만, 정작 코라가 조력자를 모으는 과정이 빈약하게 제시된다. 일례로 코라가 무슨 수로 타이투스 장군과 블러드엑스 남매를 찾을 것인지 그 계획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항구 도시 술집에서 타이투스 장군을 아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것 이상의 비전을 못 보여준다.
대신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카이에게 전적으로 의존한다. 우주선도 카이에게 빌리고, 티라크와 네메시스라는 전사도 카이에게서 추천받고, 벨트로 돌아가는 항로도 카이가 정한다. 즉, 마더 월드의 폭정에 저항하는 투사로서도, 섭정의 양녀이자 엘리트 군인으로서도 코라는 걸맞은 능력을 거의 보여주지 못한다. 그러니 우연의 일치일 뿐이고, 연속성도 부족한 코라의 여정에는 재미가 붙지 않는다.
각 캐릭터의 매력도 못 살렸다. 시리즈의 시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각 인물을 소개하고 그들이 한 팀이 되는 과정만 잘 보여줘도 <레벨 문>은 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하지만 <레벨 문>은 그저 캐릭터를 나열할 뿐이다. 그들의 전사, 능력, 심경 변화, 팀에 합류하기로 한 동기 등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노블 제독의 입을 빌려 그들의 프로필을 하나하나 읊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코라와 군나르가 그들을 한 명씩 만나는 내용은 그저 다음 시리즈를 위한 발판 같아 보인다.
마지막 실수: 본연의 장점마저 잃었다
물론 잭 스나이더를 위한 변명이 있기는 하다. 그의 장점은 본래 스토리텔링이 아니다. 분량 제한이 없는 스트리밍 환경에서 공개된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아미 오브 데드>도 개연성이나 완급 조절 문제를 못 피했을 정도다. 대신 비주얼과 액션 연출은 특출 난 장점이었다. 그가 기획한 DCEU의 비주얼은 만화책을 찢고 나왔다는 평을 받았고, <300>과 <맨 오브 스틸>의 액션은 다른 블록버스터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레벨 문>에서는 잭 스나이더 본연의 장점을 찾기 어렵다. 비교적 저예산으로 스페이스 오페라에 걸맞은 비주얼을 보여주기는 했다. 렌즈 플레어 효과를 적극 활용한 총격씬과 폭발씬은 시선을 사로잡을만하다. 그러나 몇몇 장면에서는 그린 스크린에서 촬영한 티를 숨기지 못했고, 잭 스나이더의 특징인 슬로 모션도 남발돼 몰입도를 저해한다.
또 합을 맞춘 티가 많이 나는 액션씬도 기대 이하다. 코라가 마더월드 군인들과 싸우는 초반부, 네메시스가 광선검 비슷한 검을 든 채 거미 괴물과 맞서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에 더해 슬로 모션을 남발한 결과 생동감도 살지 않는다. 그나마 타라크가 배누를 길들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지만, 진부함을 피하지는 못했다. <아즈카반의 죄수>에서 해리가 히포그리프를, <아바타>에서 제이크가 이크란과 교감하는 장면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스타워즈> 스핀오프였다면 어땠을까 싶다. <스타워즈>의 일부라면 익숙하거나 진부한 설정도 '<스타워즈>니까'라는 이유로 용인했을지 모른다. 어쩌면 <로그 원>이나 디즈니+ 드라마 <안도르>처럼 호평을 받았을 수도 있다. 제다이와 시스의 대결, 광선검 액션을 반복하는 대신 색다른 이야기를 보여준 것만은 확실하니까.
애초에 기획과 아이디어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스타워즈> 자체가 서부극에 근간을 뒀고, 조지 루카스도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흔적이 많기 때문. 그러니 '초심에 가까워진 시리즈' 같은 식의 평가가 나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스타워즈>가 아니면서 <스타워즈>를 닮으려 애쓰고 있으니, 모두 무의미한 가정일 뿐이다.
종합하면, <레벨 문>은 넷플릭스의 <스타워즈>라는 야심만 있을 뿐, 야심을 실현할 방법론은 볼 수 없는 영화다. 잭 스나이더에게 과제를 잔뜩 안겨준 듯 보이기까지 한다. 언뜻 흥미로워 보이는 아이디어의 스케일만 키우는 대신, 이야기의 밀도를 높이는 근본적 쇄신이 먼저라는 사실을 증명했기 때문. 그래야 잭 스나이더와 넷플릭스가 각각 삼부작으로 계획한 <아미 오브 데드>와 <레벨 문> 시리즈도 안정적으로 확장될 수 있을 테니.
Dreadful 끔찍한
<스타워즈>를 기대해도, 잭 스나이더를 기대해도 실망스러운 2시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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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르노빌 1986 영화 후기 /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 / 실화바탕 / 생각보다 안 국뽕임
영화직관하는 남자 영직남의 “체르노빌 1986”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습니다~ 장엄한 클래식 OST 가 흐르는 엔드크레딧이 제법 기네요.#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폭발사고, #러시아영화, #재난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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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낫아웃> 티저 예고편
고교 야구부 유망주 광호는 프로야구 드래프트 선발에서 탈락한다. 야구를 계속하기 위해 대학 진학을 원하는 광호. 하지만 광호의 선택은 동료들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만들고, 기댈 곳이 없어진 광호는 친구 민철과 함께 가짜 휘발유를 판매하는 불법적인 일에 가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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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애덤 프로젝트> 공식 티저 예고편
과거, 미래를 만나다. 《애덤 프로젝트》를 시청하세요. 넷플릭스에서 곧 공개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