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이정2024-06-17 23:06:05
원숙한 사랑의 계절, 그 아름다움
영화 <프렌치 수프> 리뷰
SYNOPSIS.
20년간 최고의 요리를 함께 탄생시킨 외제니와 도댕. 그들의 요리 안에는 서로에 대한 존경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 있다. 인생의 가을에 다다른 두 사람, 한여름과 자유를 사랑하는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하고 도댕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한다.
POINT.
✔️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신인이었던 트란 안 훙(사실 발음은 쩐안훙에 가까워요..)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게 한 그 작품.
✔️ 다시 말해... 타협 없이 담아낸 영상미가 보장되는 작품!
✔️ 줄리엣 비노쉬 & 브누아 마지멜 두 주연배우는 실제 부부였던 사이. 이별하고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서로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을 안고 이 영화에 출연했다고 해요. 뭐랄까 오래 끓인 국물 같은 느낌입니다. 프리마(?) 풀어서는 흉내낼 수 없는.
✔️ 영상미를 부정할 수 없지만 전 사실 이 영화에서 영상보다도 대사들이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빛 고운 영상 안에서, 아름다운 관계를 고스란히 녹인 대사들이 풀어집니다. 정말 아름다운 영화.

'진짜' 요리로 보여준 것
이 영화는 밭에서 야채를 고르고 다듬는 외제니의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시작부터 선포하는 셈이다. 이 영화의 요리는 진짜일 것이라고. 얼기설기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깊이 보여줄 거라고.
촬영에 최적화하기 위해 가짜 음식을 적당히 섞어 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영화는 진짜 요리들을 활용해 담아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요리가 '진짜'라고 느껴진 건 그 때문만이 아니다. 현장의 배우들이야 눈앞의 요리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생생하고 중요하겠지만, 사실 촬영을 위해서라면 꼭 진짜 요리가 베스트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서 변형되고 빛이 바뀌는 진짜 요리에 비해 어쩌면 정교한 가짜 요리가 더 나은 선택지일 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필요한 그 이상으로 공을 들인다. 마치 요리의 재료를 준비하는 외제니의 손길처럼, 영화 바깥의 요소들이 섬세하게 준비되었다. 우선 미슐랭 3스타 셰프인 피에르 가니에르가 직접 '요리 감독'으로 참여해 음식을 직접 감수했다. (중간에 왕세자 옆의 셰프 역할로 출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음식에 그의 손이 닿았고, 마치 도댕과 외제니처럼, 실제로 오래 함께 일한 동료가 그 작업을 함께 했다. 줄리엣 비노쉬와 브누아 마자엘 사이에 감도는,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은은한 존중 또한 마찬가지다. 이렇게 영화의 '밑작업'들이 영화 속 요리를 통해 표현되는 관계를 더욱 '진짜'로 만든다. 오래 끓인 국물처럼, 입에 톡 튀는 재료 없이도 깊은 맛으로 배어난다.
이 맛이 빛을 발하는 장면이 바로 영화 초반 외제니와 도댕의 요리 장면이다. 아주 긴 시퀀스로 비춰주는, 합이 탁탁 맞는 이 장면은, 아무 말도 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모두 설명한다. 조수 역할을 하는 비올레트와, 비올레트를 따라왔다가 천부적인 재능을 발견하고 요리에 흥미를 느끼는 소녀 폴린까지, 네 사람이 부엌에서 움직이는 장면은 높낮이 없는 협력과 존중 그 자체다. 고기를 굽고, 가재를 데치고, 소스를 끓이고, 야채에서 물기를 짜내고, 무거운 냄비를 나르고... 자신 있게 경쾌하게 움직이는 그 모든 동작에는, 각자의 전문성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다. 성별과 연령이 지금보다 극명히 갈리던, 20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영화임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정갈하게 섞여 협력하는 주방, 햇빛이 따스하게 들어오는 주방은 아름답기만 하다.

사랑의 계절이 보여준 것
영화 속 도댕과 외제니는 이미 다른 사람이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교감 세계를 완벽하게 구축하고 있지만, 외제니는 도댕의 청혼을 거절한다. 외제니를 위한 요리를 준비하는 도댕과, 그런 도댕을 바라보는 외제니.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가볍게 들뜨거나 설익지 않는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두 사람은 눈빛으로 보여준다.
때로는 과일을 후숙시켜야 하고, 때로는 반죽을 숙성시켜야 하고... 요리를 하면서 두 사람은 적절한 타이밍을 기다리는 법과, 모든 것에 때가 있다는 사실을 잘 배웠다. 사람들을 초대한 테이블에서 도댕이 하는 대사는 그래서 유독 아름답다. 그들은 이미 계절마다 무엇이 찾아오고 또 떠나가는지, 자연이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들의 범위를 명확히 알고 있다. 요리도 사랑도 원숙해질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이미 그 계절을 돌고 돌아 원숙해진 사람들임을 떠올린다면, 모든 계절을 함께 축제처럼 즐기고 싶어하는 도댕과, 늘 한여름의 태양 볕을 사랑하고 싶어하는 외제니의 서로 다른 계절관 또한 원숙해진 어떤 지점에서 맞물릴 수밖에 없다. 천진한 첫사랑의 기쁨은 이내 계절을 돌고 돌아 단단해지므로.

외제니는 단어를 신중하게 고르는 사람이고,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며, 나서서 손님을 대접하고 요리를 해체하는 도댕과 달리 주방에서 식재료와 요리를 통해 손님들과 대화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동시에 작열하는 태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외제니 안에 이미 온 계절이 있다. 온 계절을 사랑하는 도댕과 외제니의 사랑은, 그래서 더욱 풍부하고 깊고 아름답다.
외제니가 있는 부엌은 늘 빛으로 가득하다.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던 밤과 그렇지 않았던 밤들을 모두 내면에 머금은 채로, 두 사람의 사랑은 아름답게 빛난다.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을 영화에서 본 것도 참 오랜만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홀린 듯이 한참을 바라보고 싶어진다.
결혼에 대한 생각의 차이. 도댕은 외제니에게 청혼을 하고 외제니는 그 청혼을 거절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명확함에도. 이런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한쪽이 답답한 이야기로만 소비해온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의 차이, 그 안에서 느껴지는 각자의 성숙함, 생각의 차이를 빚어낸 것들까지도 존중하는 사랑으로 더욱 아름다워진 관계를 바라본다. 일치하는 생각만이 아름다운 건 아니다. 어쩌면 차이를 이해하고 끌어안는 것이 더 아름다운지도.

예술가의 언어로 보여준 것
영화가 전개되면서, 처음부터 아름다운 협력의 합을 보여준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풍성하게 풀어진다. 두 사람의 사랑뿐 아니라 이해 또한 관객에게 깊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예술가로서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게 된다. 도댕의 말마따나 "하나의 맛이 완성되려면 문화와 기억이" 필요하다. 요리에도 인생에도, 영화에도 예술에도, 배움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도댕과 외제니에게 요리는 사랑이었고 협력이었으며 예술이었고 이해였다. 그 모든 것을 말보다 더 뚜렷한 영상으로 보여준 이 영화는, 그야말로 예술가의 언어였다. <그린 파파야 향기>에서 오래 응시하고 공기까지 느끼게 만들던 그 실력 그대로, 트란 안 훙 감독의 언어는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영화였다. 오래오래 끝나지 않았으면 싶은, 시간이 아주 오래 흐른 뒤에도 다시 꺼내 보고 싶은 그런 아름다움이었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청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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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의 반전의 반전이 살아 있는 19금 스릴러 / 기생충 같은 집? / 생각보다 높은 수위 / 한 명만 다 나옴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히든페이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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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쥬라기 월드 : 도미니언 감상평 - 쥬라기 월드 시리즈의 허무한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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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작품의 최종장이라는 거창한 홍보문구에 비해 그 임팩트는 꽤나 부족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쥬라기 월드 3에서 이런 아쉬움이 느껴진 이유에는 몇가지 작품의 판단미스들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오웬과 블루의 연대와 케미스트리가 거의 전무하다는 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쥬라기월드 트릴로지의 키 메시지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공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 기대에 못 미치는걸 떠나서, 이 정도로 무난해도 되는건가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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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플래시백> 메인 예고편
“네가 선택하는 순간 그게 너의 현실이 될 거야”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금지된 약 '머큐리'단조로운 일상에 지친 직장인 ‘프레드릭'.
어느 날 길에서 마주친 낯선 남자에게서 데자뷔를 느낀 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 '신디'를 떠올린다.
신디가 졸업 시험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레드릭은
그의 실종이 친구들과 호기심에 삼킨 금지된 약 '머큐리'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나는 과거의 기억인가, 미래의 환영인가”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 갇힌 프레드릭의 마지막 선택!
과거의 미스터리를 파헤칠수록 시공간이 무너지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되고
악몽 같은 과거와 감옥 같은 미래의 경계에 갇힌 프레드릭은 자신의 현실을 결정할 최후의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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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티저 예고편
1957년 뉴욕, 라이벌 갱단인 제트와 샤크 사이의 갈등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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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리지만 반드시 도착하는 진심.
이 글은 영화 [시라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늘 자격을 요구한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과연 “어울릴”만한 사람인지 묻고 또 묻는다.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 끝없는 공방의 법정에 하루에도 몇천번을 출석해보지만.판결의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고개 숙인 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처참한 형벌일 뿐이다.
당대 최고의 검술가인 시라노에게도 이런 마음의 지옥은 존재했다.
록산.
시라노의 남루한 외모는 그녀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그를 부끄럽게 했다.
마음을 담은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시라노를,배심원인 조 라이트 감독은 구원하기로 마음 먹은 듯 하다.
이미 [어톤먼트]와 [오만과 편견]을 통해 사랑의 표현에 정통한 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이번 영화 [시라노]에서도 마음껏 발산했다.
사랑을 닮은 음악으로 가득한 뮤지컬 영화에 도전하는 그의 시도에도 박수를 보낸다.
가면, 꼭두각시.;언제나 가짜는 매력이 없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가면을 쓴 꼭두각시 인형을 비춘다.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내용을 가장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록산(헤일리 베넷)의 사랑을 위해 가면 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크리스티앙(캘빈 해리스 주니어)은 시라노(피터 딘클리지)의 글 솜씨라는 가면을 빌려 쓰고.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통해 그녀에게 오랫동안 간직했던 마음을 전달한다.
자신을 좀 더 완벽하게, 혹은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게 해주는 가면이기에 두 남자는 이 가짜가 자신의 진짜 모습이기를. 그래서 록산의 사랑을 한 조각이라도 더 가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기대가 커질수록 자신의 본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록산은 가면 뒤의 진짜 모습을 원했다. 그녀는 편지에 빼곡히 적힌 자신을 향한 미문을 쓴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고. 그녀의 이 마음은 결국 크리스티앙의 사랑이 허울뿐임을. 시라노가 진심으로 써 내려간 대사를 읊는 것에 급급한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알아챈다.
영화 속 크리스티앙의 존재감은 딱 거기까지다. 꼭두각시인데다 가면까지 쓴. 꼭두각시는 그렇게도 매력이 없기에,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거나 대사의 전달력이 가볍게 느껴진다. 이런 크리스티앙의 우스꽝스러움이 강조될 수록, 시라노의 눈빛과 마음을 담은 그의 진가는 더욱 잘 드러나며. 그 진가는 영화 내내 관객의 마음을 채우기 충분하다.
사랑 앞에선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만이 필요하며 그것만이 전달되는 것임을.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조 라이트 감독에게 특기가 있다면?;상실과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모든 감독들마다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있어 주특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조 라이트 감독의 그것은 아마 상실과 단절, 혹은 닿을 수 없음에 대해 표현하는 능력일 것이다.
감독은 늘 건널 수 없는 사랑의 절벽 앞에서 절규하기보다 절제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담기를 선택했고. 이 모든 절제 미는 영화 속의 대사나 배우들의 눈빛(연기)에서 증폭된다. 영화의 장면들은 배우들이 결국은 내뱉지 못하고 억지로 삼켜야 하는 그 무언가로 인해 더 아름다워진다.
관객들은 배우의 눈빛을 보며 이 복잡하고 생략된 마음 덩어리를 풀어헤치기 위해 자신의 감정 그릇에 담긴 모두를 쏟아붓듯이 사용해야만 한다. 관객마저도 마음의 상실에 온전히 사로잡힌 그때. 영화는 다시 사랑의 애틋함과 아름다움으로 영원히 쓰라릴 것만 같던 마음을 꽉꽉 채운다.
영화 [시라노]가 뮤지컬 영화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춤이 승무(僧舞)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모든 장면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지만. 배우들의 춤사위는 사랑의 아픔으로 공허해진 인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처연하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사랑이 록산을 해할까 싶어, 허공을 통해 뻗는 손길들 마저도 조심스럽다. 이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려, 몇 번이고 이를 깨물어야만 했다.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이별 앞에 놓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본능에 가깝고 날이 서 있기에. 영화 내내 마음의 모든 벽이 크고 작은 생채기로 가득해진다.
가슴에 담은 진심의 무게를 그 어떤 형태의 좌절 앞에서도 전달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연인들을 보고 있자면. 감독의 능력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편지의 역할.;진심을 전할 수 있는 자격.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실질적으로) 시라노가 록산에게 쓰는 편지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라는 말 외엔 그 어떤 합당한 말도 어울리지 않을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지막 편지를 써야만 하는 병사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마음속에 너무 오래 묵혀놓아 이끼가 끼어버린 진심을 돌아봐야 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종이를 채우기 위해. 숱한 단어들의 어깨를 툭툭 털어대며 마음속으로 골라내는 시간 역시 가져야 했다. 한참이고 고르고 또 고르다가. 상대를 생각하며 까맣게 타들어가 힘 없이 풀썩 내려앉은 감정의 숯검댕이들 중 하나를 겨우 손에 골라 쥐고서. 그들은 자신의 진심을 꾹꾹 써내렸다.
편지는 자신의 마음 전체를 폐허로 만들 만큼의 파급력을 지녔지만, 등장인물들 중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전해야 할 진심이 단 하나임을 편지의 발신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크리스티앙만큼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는 결국 감정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록산에게 단 한 통의 편지도 쓰지 않은 셈이다. 애초에 자신의 진심을 육성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졌기에. 록산과 물리적으로 멀어져 전쟁터로 간 지금, 크리스티앙의 마음이 그녀에게 가닿을 리 만무하다. 단 한발로 크리스티앙을 영원히 잠들게 한 총성이 록산에게 더 잘 와닿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사실 영화에서 진심을 상징하는 편지가 달가웠던 이유는 따로 있다. 마치 감독의 전작 중 하나인 [어톤먼트]에서부터 닿지 않고 왜곡되었던 진실이. 이 영화에서만큼은 비록 영화의 말미이긴 하지만 와닿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라노가 록산에게 진실을 내뱉는 순간. 나는 마치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가 진실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은 이랬노라고.
결국 자신의 마음 바닥까지 뒤집어내 록산에게 바친 시라노는 눈을 감았지만. 나는. 그리고 시라노는. 어쩌면 감독까지도 고대했던 순간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마저 드는 결말이었다.
마치면서
내게 이번 영화는 [어톤먼트]의 변주 정도로 느껴졌다. 이미 그의 영화에서는 공식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장치들도 제법 보인다. (물론 원작을 읽은 자의 슈퍼 오지랖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시라노]는 마치 감독이 호스트가 된 티타임과 같았다. 도란 도란 담소를 나누는 내내 마음 안에서 감독이 직접 고른 차가 천천히 향과 색을 내며 짙어져 갔다. 차를 기다리며 나눈 이야기는 모두 즐거웠고. 호스트가 내어온 모든 장면들은 내 마음을 울렸다.
그가 정성껏 우려준 차 한 잔은 집으로 가는 추운 날씨에 홀짝이기에 딱 알맞았으니. 다음 티타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이 글의 TMI]
1. 피터 딘클리지의 연기는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임.
2. 그의 연기를 거론하기도 입 아파서 뺀 것임.
3. 원작도 재미있음.
4. 리뷰 잘 안 써져서 여섯 번 갈아엎음.
카카오뷰도 있어요+_+
#시라노 #조라이트 #피터딘클리지 #헤일리베넷 #켈빈해리슨주니어 #영화리뷰 #최신영화 #영화추천 #네이버인플루언서 #브런치작가 #영화리뷰어 #내일은파란안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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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부장적 세계를 조용히 비집고 나아가는 여성 창작자의 힘
영화 감독인 크리스에게 창작은 엄청난 고통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아름다운 포뢰섬에 왔지만 완벽한 풍경 앞에서 좋은 작품을 써내지 못 할까봐 두렵기만 하다. 역시나 영화 감독인 크리스의 남편 토니는 반대로 시나리오 작업이 꽤 잘 풀리는 중이다. 창작자 커플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포뢰섬은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영화를 찍고 말년을 보낸 곳으로 영화인들의 성지이다. 그러나 크리스는 베르히만의 자취를 좇을수록 그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베르히만에게 6명의 부인과 9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자식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는 점, 그가 50여편의 작품을 남기고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건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점에 크리스는 실망한다.
크리스는 토니로부터도 소외된다. 그는 시나리오에 대한 고민을 토니에게 털어놓지만, 토니는 자신의 작업을 크리스에게 절대 공유하지 않는다. 토니가 작업과 책에 집중하는 동안 크리스는 토니의 세계에 초대받지 못하고 주위를 겉돈다. 관계의 불균형은 이들의 사회적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토니는 크리스 보다 나이가 많고, 포뢰섬에서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고 팬들을 만나는 등 인정받는 영화 감독처럼 보인다. 반면 크리스는 젊은 여성 감독인 데다가 짐작하건대 그의 전작은 호불호가 갈린다. 크리스는 토니의 조언을 구하지만 토니는 크리스의 조언이 필요 없다.
토니와 크리스가 다투는 장면에서 이와 같은 관계는 더욱더 두드러진다. 창작이 고문이라는 크리스의 말에 토니는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주부도 좋은 직업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점은 토니는 이 말을 악의 없이, 심지어는 크리스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했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다정하고 자연스러워서 지나칠 뻔 했지만 나는 이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힘들게 일하느니 훌륭한 직업인 주부가 어떠냐는 취지의 말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의 자리’라고 간주되는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또한 토니가 크리스의 창작을 고급 취미쯤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도 의심해본다. 창작은 원래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토니가 크리스의 창작을 진지하게 여겼다면 그렇게 말 할 수 있었을까. 내색하진 않았지만 토니는 자신을 내조해 줄 아내를 원하는 걸까. 분명한 건 크리스에게는 동등한 동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초반 크리스가 베르히만의 사생활에 실망하며 ‘작품 세계와 가정은 양립하기 힘든 것일까?’ 하고 던졌던 질문과도 이어진다. 토니에게는 별다른 쟁점이 아니었던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는 크리스가 여성 창작자로서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토니는 꽤 가정적인 남편이고, 크리스의 작업에 무심하긴 해도 힘을 실어주는 조언도 해준다. 또한 크리스는 베르히만에 대한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여전히 그의 작품에 끌린다. 크리스는 이 불화 속에서 방황한다. 결국 크리스가 남성 거장과 남성 동료의 세계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비집고 나아가는 방식은 창작이다.
미아 한센러브의 전작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가 삶에 들이닥친 상실의 고통을 철학의 힘으로 마주했다면,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크리스는 가부장적 세계에서 느끼는 불균형을 동력삼아 자신의 영화를 완성해 나간다. 두 여성 모두 자신과 불화하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싸운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두 여성은 시무룩한 얼굴로 일상을 부지런히 걸어다니고, 책상 앞에 앉아 읽고 쓴다. 그리고 어느새 크리스가 감독으로서 자신의 촬영 현장에 놓이는 장면은 쾌감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결국 내게는 이런 물음이 남는다. 나와 불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나는 무엇으로 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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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코모레비’를 찾아서
인생은 한 편의 시와 같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 자체로 멋지지만 가슴에 오롯이 새겨지지 않았던 이 말은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기여이 내 마음에 들어 앉았다. 평범한 일상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상황 속 찰나와 같은 ‘코모레비(こもれび,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의 순간은 시처럼 담백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한 부분을 그려낸다. 비록 평범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날이라 말하는 영화는 관객 모두에게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고 되묻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쩌면 이 작품은 그 물음의 답을 찾는 우리들의 여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난다. 씻고, 식물에 물 주고, 자판기에서 뽑은 캔커피를 마신 그는 차를 끌고 일터로 나간다. 출근길 동반자는 이른 아침 도심 풍경,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로 들리는 올드 팝이다. 이곳 저곳 화장실 청소를 하다 점심 시간이 되면 근처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필름 사진기로 하늘을 찍는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귀가 후 목욕탕에 가서 말끔히 씻고, 지하철 역사에 있는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잔을 기울인다. 캄캄한 밤이 되면 책을 읽다가 졸리면 잠을 청한다. 매일 이 똑같은 일상을 사는 그는 누가 뭐라 하던 간에 묵묵히 자신의 루틴대로 일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조카 니코(나카노 이리사)가 찾아오고, 그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를 통해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보여주며,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히라야마는 매일 똑같은 일을 열심히 한다. 극중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화장실을 왜 그렇게 열심히 청소하냐는 동료의 핀잔에도 히라야마는 닦고 또 닦는데, 이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행위 자체가 누군가에게 행복한 순간을 줄 수 있다는 걸 믿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매번 그의 바람처럼 세상 일이 돌아가지는 않지만, 그 또한 인생이라고 믿으며 감내하고 또 다시 일을 한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히라야마는 고단한 삶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영화는 히라야마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주변인들, 특히 매번 그 자리에 항상 있는 사람들을 주시한다. 공원에 있는 나무, 공중 화장실, 집 주차장 캔 커피 자판기 등 무심코 지나가지만 꼭 있어야 하는 존재처럼 서점 주인, 식당 사장, 사진관 사장, 공원 노숙자 등을 히라야마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들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책으로, 술 한잔으로, 사진으로, 존재 자체로 위안과 행복을 주는 이들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평범한 모습과 일상을 담은 건 이 영화의 시작점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연출을 맡은 빔 벤더스 감독은 도쿄의 공공 화장실들을 수리하는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리한 화장실을 보고 영감이 떠오른다면 관련된 작품을 하나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 노 감독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도쿄의 화장실 그리고 이 도시의 사람들 일상을 지켜보며,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히라야마처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다른 이들이 잠시나마 특별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예로 히라야마가 동료 다카시(에모토 도키오)에게 썸녀와의 데이트 비용을 주거나, 조카 니코에게 잠시나마 휴식처를 제공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영화는 감독의 시선처럼, 극중 인물과의 거리두기를 한다. 히라야마라는 인물의 감정이나 과거 이야기를 보여주고 설명하기 보다는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마치 그가 하늘을 향해 사진을 찍고, 공원 노숙자를 지켜보고, 동이 트는 도심 풍경을 바라보듯 말이다. 이를 통해 생긴 여백은 아이러니 하게도 관객이 주인공의 일상에 더 집중하고, 미세하게 변하는 그의 감정과 태도를 확인하게 만든다. 이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바라보는 시점샷으로 변주를 주는데, 이를 통해 히라야마의 감정선과 그날의 온도차를 유추할 수 있다. 장면마다 흐르는 올드 팝 또한 말 수가 적은 그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한다.
<퍼펙트 데이즈>가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야쿠쇼 코지의 연기 덕분이다. 빔 벤더스 감독이 카메라로 써내려 간 영상 시에 때로는 규칙적으로, 때로는 격렬하게 운율을 행하듯 보여주는 연기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대사가 아닌 표정과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몇 마디 말보다 임팩트가 더 강하다. 특히 극 후반부 아쿠쇼 코지의 마지막 표정은 압권이다.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처럼 하루 하루 쌓아온 모든 감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위해 2시간 내내 절제 연기를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이다. 극 중 다카시의 대사처럼 10점 만점에 10점. 아쿠쇼 코지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듯 제76회 칸영화제, 제47회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에게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겼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관객이라면 히라야마의 마지막 표정을 보며 삶이 고되기에 찰나의 행복을 느끼는 건지, 찰나의 행복이 크기에 삶이 고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결국 정답은 없기에 이 힘든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는 철학적 사유를 할지 모른다. 그보다 중요한 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아닐까. 고단한 삶을 깨우는 소리와 음악, 햇빛, 목욕, 사진, 술 한잔, 책 등 작지만 소중한 것들로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그렇게 살아가니까 말이다. 부디 이 영화를 보고 고단한 삶을 잠시 잊게 만드는 자신만의 ‘코모레비‘를 찾길 바란다. 우리들의 퍼펙트 데이즈를 위해~
덧붙이는 말: 영화를 보고 극장 밖에 나오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와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을 꼭 들게 될 것이다. K-pop 대신 올드팝을 듣는 자신에게 너무 놀라지 말고, 두 곡을 포함한 명곡 향연에 푹 빠지길 바란다. 빔 벤더스 감독님! 플레이리스트 좀 공유해주세요~
사진제공: (주)티캐스트
평점: 4.0/ 5.0
한줄평: 단조로운 일상에 스며든 특별하고도 가치있는 운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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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컬트를 빙자한 인상 깊은 여성 바디 호러
2024년 상반기 국내 개봉 호러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한 편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오멘: 저주의 시작>을 선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오컬트 장르의 기념비적인 영화인 <오멘> 시리즈의 프리퀄이라는 것에 있지 않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오면서도 그 안에서 장르적 변주를 가하고, 동시대 우리가 두려워하는 공포를 전했다는 점 때문이다. 오컬트를 빙자한 여성 바디 호러. 어쩌면 <오멘> 시리즈 중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때는 1971년, 수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한 마거릿(넬 타이거 프리)은 과거 보육원에서 연을 맺었던 로렌스 추기경(빌 나이)을 만난다. 그리고 이들은 한 보육원에 도착한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이곳에서 마거릿은 외톨이로 지내는 한 소녀에 집중한다. 과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 소녀를 그냥 놔둘 수 없었던 것.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브레넌 신부(랠프 이네슨)를 만나고 그 소녀를 조심하라는 경고와 보육원의 어두운 실체도 알려주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프리퀄답게 <오멘>의 악령 데미안의 탄생 기원을 따라간다. 데미안은 어떻게 탄생했으며, 악령의 부활은 어떤 과정을 통해 가능했는지 등 영화는 놓인 운명에 겸허히 따라간다. 브래넌 신부가 말하는 보육원의 비밀, 즉 그 유명한 ‘666’ 표식이 있는 악마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그 과정만 보더라도 영화는 시리즈의 자장 안에서 그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순수한 소년의 얼굴을 지닌 데미안처럼, 영화는 중반부 이후 장르를 달리 가져간다. 공포의 대상이 악마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서 적그리스도를 만드는 인간으로 바뀌면서 작품의 지향점은 달라진다. 이 부분에 있어 <오멘> 시리즈보단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와 유사해 보인다. 아르카샤 스티븐슨 감독은 여느 인터뷰에서 <악마의 씨>를 자주 언급했는데, 후반부 마거릿의 수난사는 <악마의 씨>의 로즈메리의 수난사와 오버랩된다. 광신도들의 잘못된 믿음, 정치적, 사회적 질서 및 권력 유지를 위해 여성의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부분은 너무나 닮아있다.
오컬트 장르의 첫 문을 열어젖힌 <엑소시스트> 이후 등장한 <오멘>은 당시 미국인들의 심연에 자리 잡은 공포, 즉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며 큰 관심을 이끌었다. 이와 반대로 <오멘: 저주의 시작>은 그동안 사회적 약자로서 권력자들에게 배신, 이용만 당했던 여성들의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따른 공포와 고통을 목도한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후반부 적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것 또한 이런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어 영화는 과거 <오멘> 시리즈가 여성은 배제된 남성 중심적 서사 구조를 가져갔다는 걸 상기시킨다. 감독은 숙명처럼 시리즈 내 서사 구조의 성 역할을 전복시킨다. 오로지 남성은 주변인으로서 존재하고 이야기를 이끄는 건 선이 되었든 악이 되었든 여성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더불어 연대 또한 여성들의 몫이다. 그동안 오컬트를 포함한 호러 장르에서 피해자로서만 각인 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제야 수면 위로 올라온 느낌이다.
호러 영화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 요소들은 충실한 편이다. 고어는 물론, 공포스러운 스코어와 음향 사운드, 그리고 점프 스케어는 관객에게 공포를 전한다. 이보다 더 극악스러운 공포는 후반부에 포진한다. 마거릿을 통해 보여주는 바디 호러 장면은 단순히 이 영화가 엔터테인먼트적인 공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실제 여성들이 가진 공포를 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르적인 재미를 원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심심할 수 있지만, 그 무게감은 기존 시리즈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미국 연예 전문지 ‘버라이어티’에서 내놓은 2024년 상반기 호러 영화 TOP 10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만큼 북미에서도 이 작품이 가진 의의, 즉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포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 듯하다. 과연 여성들은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답은 영화를 보며 찾아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평점: 3.5 / 5.0
한줄평: 종교라는 권력에 짓밟힌 오컬트적 여성 수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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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우연들과 상상들이 모이고 모여 일으키는 강력한 힘
2021년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있어 의미있는 해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와 <우연과 상상> 이렇게 한 해에 두 작품을 공개했을 뿐더러 드라이브 마이 카는 칸 영화제 각본상, 우연과 상상은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감독 세계를 인정받아왔지만, 그의 감독 세계와 우상을 더욱 견고히 하였다.
이 중 필자는 <우연과 상상>을 이야기하고 싶다.
3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영화로, 이 3편의 단편은 서로 연계되지 않는 별개의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전작들에서 보여주는 일부 씬들에 대한 실험적 시도나 재편성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 예를 들어보자면, 첫번째 단편인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에서 택시 씬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후반부 가후쿠랑 다카츠키가 차에서 이야기 나누는 장면이, "문은 열어둔 채로"는 대화 스타일이나 영상의 톤이 전체적으로 '열정'이 연상됐으며, "다시 한번"은 해피아워에서 온천으로 놀라가서 서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처럼 옴니버스이기에, 3가지 단편을 통해 감독이 보여줄 수 있었던 각자의 스타일을 보여줬다고 생각이 든다.
영화는 설정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대화를 통해 상황과 설정을 나열하는데, 그것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흥미롭게 전개되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특유의 담담하면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영상미 덕분에 더 흥미롭게 느껴진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는 현실적이면서 신비롭다고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영화는 SF, 판타지 같이 비현실적이지 않으면서 그 상황과 분위기는 전혀 평범하지 않고, 때로는 서스펜스까지 존재하는 신비로움을 풍긴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에서의 사건들은 정말 제목 그대로, '우연'과 '상상'들로 부터 이루어진 사건들이다.
우연히 만나고, 어떠한 상황을 떠올리고, 누군가를 떠올리고, 우연이 알아채는 수많은 우연들과 상상들이다.
이런 작고 작은 우연들과 상상들은 개별적으로는 정말 작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모이고 모여 보이지 않게 강력한 힘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영화를 보면서 관객들은 점점 영화의 힘에 사로잡히고, 그렇기에 하나의 에피소드가 끝날 때면 큰 여운을 남기게 된다고 생각한다.
감독의 전작인 <아사코>나 <드라이브 마이 카>에 비해 장소의 변환이나 인물이 적어 소품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지닌 영화적 연출과 영화적 힘은 여전히 강력하게 발휘한다.
*이 글은 원글 없이 새로 작성된 글이며, 출처란에는 작성자의 인스타그램 주소를 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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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적 상상력이 궁금할 땐 고개를 들어 파묘를 보라
영화적 상상력이 궁금할 땐 고개를 들어 파묘를 보라
영화 <파묘> 리뷰감독] 장재현
출연] 최민식, 김고은, 유해진, 이도현
시놉시스] 미국 LA, 거액의 의뢰를 받은 무당 화림과 봉길은 기이한 병이 대물림되는 집안의 장손을 만난다. 조상의 묫자리가 화근임을 알아챈 화림은 이장을 권하고, 돈 냄새를 맡은 최고의 풍수사 상덕과 장의사 영근이 합류한다. “전부 잘 알 거야… 묘 하나 잘못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절대 사람이 묻힐 수 없는 악지에 자리한 기이한 묘. 상덕은 불길한 기운을 느끼고 제안을 거절하지만, 화림의 설득으로 결국 파묘가 시작되고… 나와서는 안될 것이 나왔다.
#스포일러 주의#
이렇게나 매력적인 사운드라니영화 파묘는 사운드가 정말 매력적이다. 특히 극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킬 때 음향 효과를 극적으로 쓰는 작품이었다. 화림과 봉길이 악귀를 만나 두려움에 떨 때 악귀가 내뿜는 고압적인 느낌을, 악귀가 제대로 보이지 않음에도 느껴지는 거대함을 청각적으로 잘 풀어냈다. 그래서 오컬트 영화하고 했지만 관객들이 공포감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가 이러한 청각적인 요소 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느낌에 영화관이라는 어둡고 닫힌 공간에서 전달되는 사운드는 공포함을 배가 시킬 수 있었던 장치였다.
공포적인 요소를 부각하고 있었지만 그 사운드가 부산스럽지는 않았다. 사실 일반 매체에서 보여진 굿판의 장면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모습들이 많았었는데 영화 파묘에서는 절제된 사운드를 통해서 오히려 굿 자체에 집중을 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경문을 외는 목소리만을 사운드로 입히거나 단촐한 사물로 구성된 리듬을 넣음으로써 화려한 bgm이 아니어도 충분한 집중도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범과 여우라는 비유로 이런 상상을 해내다니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 이 대사는 영화 파묘를 관통하는 대사다. 범은 조선을, 여우는 일본을 상징한다. 사실 화림과 봉길이 미국을 다녀오면서 이장을 결정하기까지 이 작품이 일본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둘째 손자 박지용이 할아버지에 빙의되어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발언을 하면서 이 작품이 과거 일제강점기와 연결이 되어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 깨달을 수 있었다.
박지용의 '여우가 범의 허리를 끊었다'라는 직접적인 발언 이후 영화 속에서는 여우와 범을 상징하는 요소들이 계속적으로 등장한다. 박지용의 할아버지의 묫자리를 알아봐준 스님 이름이 기순애(여우-키츠네)라는 점과 응급실에서 태백산맥을 보여주며 한국의 허리라고 표현된 액자를 굳이 포커스 해준다는 점 등 일본 여우가 조선의 범을 노렸는데, 그 허리가 산맥 중간에 있는 박지용의 할아버지 묫자리인 것이다. 이 미스터리가 풀리면서 극장 안에서 혼자 탄성을 질렀었다.
사실 일제강점기 시절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외국인이 본다면 알 수 없는 경문을 외우고, 잘 모르겠는 음양오행 사주를 설명하며 물이 스며든 나무가 불에 달궈진 쇠를 부술 수 있다는 지독한 순환논리, 그리고 거대한 도깨비 같은 악인이 등장하고, 문신한 자리는 피해서 공격을 하고 말만 들어도 엄청나게 오컬트할 것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를 단순한 오컬트 영화라고 받아들이기는 힘들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이 보기에는 오컬트에 합쳐진 공포와 아픔으로 외국인에게는 오컬트 그 자체로 한나라의 치욕적인 지배에 대해 역사적 이해를 가진 자와 없는 자의 모든 만족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이 영화를 연출한 장재현 감독에게 박수를 쳐줄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이용만 당할 뿐장재현 감독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역사적으로 이 작품을 접근해보자면 결국 조선인은 아무리 일본에 충성을 다했다 한들 죽어서까지도 이용만 당하는 존재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줘서 친일파는 무엇을 누리고자 저렇게 친일을 했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일본은 정말 자신한테 잘해준 사람도 이용을 하는구나 하는 참담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박지용의 할아버지는 일제에 엄청난 친일을 한 사람이었다. 수많은 토지와 돈을 바치면서 일제강점기 시절 엄청난 부를 쌓으며 살았던 인물로, 이 인물을 위해 스님 기순애는 좋은 자리라며 묫자리까지 알아봐준다. 어느 누가 이들이 알려준 묫자리가 악지라고 생각했을까? 조선인한테 묫자리를 추천받은 것도 아니고 본인들이 그렇게 충성해 마지 않던 일본으로부터 묫자리를 추천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의 허리에 정기를 자를 수 있는 무언가를 심을 계획이었고, 이를 심은 뒤 절대로 뽑을 수 없게끔 고관대작의 무덤을 그 위에 겹장을 해두면 어느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것이라는 꾀를 낸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들에게 그리도 잘해준 박지용의 할아버지는 죽어서 까지도 그 일본귀신에 시달리며 구천을 떠돈 것이었다. 이는 물론 영화적 상상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을 보면서 실제 일제강점기 하에서 일본이 얼마나 조선인들을 수단적인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는지 상상이 돼서 씁쓸했다.
영화 파묘는 삼일절에 봐서 그런지 더욱 울림이 컸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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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전의 반전의 반전이 살아 있는 19금 스릴러 / 기생충 같은 집? / 생각보다 높은 수위 / 한 명만 다 나옴
영화직관하는남자 홍큐의 "히든페이스" 후기입니다.
*쿠키영상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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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쥬라기 월드 : 도미니언 감상평 - 쥬라기 월드 시리즈의 허무한 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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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작품의 최종장이라는 거창한 홍보문구에 비해 그 임팩트는 꽤나 부족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쥬라기 월드 3에서 이런 아쉬움이 느껴진 이유에는 몇가지 작품의 판단미스들이 있는데요. 첫 번째는 오웬과 블루의 연대와 케미스트리가 거의 전무하다는 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쥬라기월드 트릴로지의 키 메시지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공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 기대에 못 미치는걸 떠나서, 이 정도로 무난해도 되는건가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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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플래시백> 메인 예고편
“네가 선택하는 순간 그게 너의 현실이 될 거야”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금지된 약 '머큐리'단조로운 일상에 지친 직장인 ‘프레드릭'.
어느 날 길에서 마주친 낯선 남자에게서 데자뷔를 느낀 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 '신디'를 떠올린다.
신디가 졸업 시험을 앞두고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레드릭은
그의 실종이 친구들과 호기심에 삼킨 금지된 약 '머큐리'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직감한다.
“나는 과거의 기억인가, 미래의 환영인가”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 갇힌 프레드릭의 마지막 선택!
과거의 미스터리를 파헤칠수록 시공간이 무너지는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되고
악몽 같은 과거와 감옥 같은 미래의 경계에 갇힌 프레드릭은 자신의 현실을 결정할 최후의 선택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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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티저 예고편
1957년 뉴욕, 라이벌 갱단인 제트와 샤크 사이의 갈등과 그 안에서 이뤄지는 ‘토니’와 ‘마리아’의 사랑을 그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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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리지만 반드시 도착하는 진심.
이 글은 영화 [시라노]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늘 자격을 요구한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과연 “어울릴”만한 사람인지 묻고 또 묻는다.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 끝없는 공방의 법정에 하루에도 몇천번을 출석해보지만.판결의 끝에 남는 것은 언제나 고개 숙인 한 죄인에게 내려지는 처참한 형벌일 뿐이다.
당대 최고의 검술가인 시라노에게도 이런 마음의 지옥은 존재했다.
록산.
시라노의 남루한 외모는 그녀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도 그를 부끄럽게 했다.
마음을 담은 항변조차 하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시라노를,배심원인 조 라이트 감독은 구원하기로 마음 먹은 듯 하다.
이미 [어톤먼트]와 [오만과 편견]을 통해 사랑의 표현에 정통한 감독은 자신의 능력을 이번 영화 [시라노]에서도 마음껏 발산했다.
사랑을 닮은 음악으로 가득한 뮤지컬 영화에 도전하는 그의 시도에도 박수를 보낸다.
가면, 꼭두각시.;언제나 가짜는 매력이 없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가면을 쓴 꼭두각시 인형을 비춘다. 앞으로 펼쳐질 영화의 내용을 가장 압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남자들은 록산(헤일리 베넷)의 사랑을 위해 가면 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크리스티앙(캘빈 해리스 주니어)은 시라노(피터 딘클리지)의 글 솜씨라는 가면을 빌려 쓰고.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외모를 통해 그녀에게 오랫동안 간직했던 마음을 전달한다.
자신을 좀 더 완벽하게, 혹은 마음의 짐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게 해주는 가면이기에 두 남자는 이 가짜가 자신의 진짜 모습이기를. 그래서 록산의 사랑을 한 조각이라도 더 가질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기대가 커질수록 자신의 본 모습은 더욱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록산은 가면 뒤의 진짜 모습을 원했다. 그녀는 편지에 빼곡히 적힌 자신을 향한 미문을 쓴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고. 그녀의 이 마음은 결국 크리스티앙의 사랑이 허울뿐임을. 시라노가 진심으로 써 내려간 대사를 읊는 것에 급급한 꼭두각시에 불과함을 알아챈다.
영화 속 크리스티앙의 존재감은 딱 거기까지다. 꼭두각시인데다 가면까지 쓴. 꼭두각시는 그렇게도 매력이 없기에,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들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거나 대사의 전달력이 가볍게 느껴진다. 이런 크리스티앙의 우스꽝스러움이 강조될 수록, 시라노의 눈빛과 마음을 담은 그의 진가는 더욱 잘 드러나며. 그 진가는 영화 내내 관객의 마음을 채우기 충분하다.
사랑 앞에선 결국 자신의 진짜 모습만이 필요하며 그것만이 전달되는 것임을. 영화는 첫 장면에서부터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조 라이트 감독에게 특기가 있다면?;상실과 단절에 대해 이야기하다.
사진 출처:다음 영화
모든 감독들마다 자신의 작품을 표현하는 데 있어 주특기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조 라이트 감독의 그것은 아마 상실과 단절, 혹은 닿을 수 없음에 대해 표현하는 능력일 것이다.
감독은 늘 건널 수 없는 사랑의 절벽 앞에서 절규하기보다 절제하는 연인들의 모습을 담기를 선택했고. 이 모든 절제 미는 영화 속의 대사나 배우들의 눈빛(연기)에서 증폭된다. 영화의 장면들은 배우들이 결국은 내뱉지 못하고 억지로 삼켜야 하는 그 무언가로 인해 더 아름다워진다.
관객들은 배우의 눈빛을 보며 이 복잡하고 생략된 마음 덩어리를 풀어헤치기 위해 자신의 감정 그릇에 담긴 모두를 쏟아붓듯이 사용해야만 한다. 관객마저도 마음의 상실에 온전히 사로잡힌 그때. 영화는 다시 사랑의 애틋함과 아름다움으로 영원히 쓰라릴 것만 같던 마음을 꽉꽉 채운다.
영화 [시라노]가 뮤지컬 영화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춤이 승무(僧舞)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춤과 노래가 어우러지는 모든 장면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지만. 배우들의 춤사위는 사랑의 아픔으로 공허해진 인물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처연하다. 또한 자신도 모르게 숨길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사랑이 록산을 해할까 싶어, 허공을 통해 뻗는 손길들 마저도 조심스럽다. 이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아가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려, 몇 번이고 이를 깨물어야만 했다.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이별 앞에 놓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모든 말과 행동들은 본능에 가깝고 날이 서 있기에. 영화 내내 마음의 모든 벽이 크고 작은 생채기로 가득해진다.
가슴에 담은 진심의 무게를 그 어떤 형태의 좌절 앞에서도 전달하려 안간힘을 다하는 연인들을 보고 있자면. 감독의 능력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게 된다.
편지의 역할.;진심을 전할 수 있는 자격.
사진 출처:다음 영화
영화 속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편지를 통해 전달된다.(실질적으로) 시라노가 록산에게 쓰는 편지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총알받이라는 말 외엔 그 어떤 합당한 말도 어울리지 않을 운명을 받아들이며 마지막 편지를 써야만 하는 병사들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편지를 쓰기 위해 마음속에 너무 오래 묵혀놓아 이끼가 끼어버린 진심을 돌아봐야 했다. 또한 자신의 마음을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작은 종이를 채우기 위해. 숱한 단어들의 어깨를 툭툭 털어대며 마음속으로 골라내는 시간 역시 가져야 했다. 한참이고 고르고 또 고르다가. 상대를 생각하며 까맣게 타들어가 힘 없이 풀썩 내려앉은 감정의 숯검댕이들 중 하나를 겨우 손에 골라 쥐고서. 그들은 자신의 진심을 꾹꾹 써내렸다.
편지는 자신의 마음 전체를 폐허로 만들 만큼의 파급력을 지녔지만, 등장인물들 중 그 누구도 마다하지 않았다. 진심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그리고 전해야 할 진심이 단 하나임을 편지의 발신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일하게 크리스티앙만큼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그는 결국 감정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록산에게 단 한 통의 편지도 쓰지 않은 셈이다. 애초에 자신의 진심을 육성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졌기에. 록산과 물리적으로 멀어져 전쟁터로 간 지금, 크리스티앙의 마음이 그녀에게 가닿을 리 만무하다. 단 한발로 크리스티앙을 영원히 잠들게 한 총성이 록산에게 더 잘 와닿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사실 영화에서 진심을 상징하는 편지가 달가웠던 이유는 따로 있다. 마치 감독의 전작 중 하나인 [어톤먼트]에서부터 닿지 않고 왜곡되었던 진실이. 이 영화에서만큼은 비록 영화의 말미이긴 하지만 와닿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라노가 록산에게 진실을 내뱉는 순간. 나는 마치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가 진실을 토해내는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다. 사실은 이랬노라고.
결국 자신의 마음 바닥까지 뒤집어내 록산에게 바친 시라노는 눈을 감았지만. 나는. 그리고 시라노는. 어쩌면 감독까지도 고대했던 순간은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마저 드는 결말이었다.
마치면서
내게 이번 영화는 [어톤먼트]의 변주 정도로 느껴졌다. 이미 그의 영화에서는 공식화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법한 장치들도 제법 보인다. (물론 원작을 읽은 자의 슈퍼 오지랖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시라노]는 마치 감독이 호스트가 된 티타임과 같았다. 도란 도란 담소를 나누는 내내 마음 안에서 감독이 직접 고른 차가 천천히 향과 색을 내며 짙어져 갔다. 차를 기다리며 나눈 이야기는 모두 즐거웠고. 호스트가 내어온 모든 장면들은 내 마음을 울렸다.
그가 정성껏 우려준 차 한 잔은 집으로 가는 추운 날씨에 홀짝이기에 딱 알맞았으니. 다음 티타임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이 글의 TMI]
1. 피터 딘클리지의 연기는 이 영화의 알파이자 오메가임.
2. 그의 연기를 거론하기도 입 아파서 뺀 것임.
3. 원작도 재미있음.
4. 리뷰 잘 안 써져서 여섯 번 갈아엎음.
카카오뷰도 있어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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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부장적 세계를 조용히 비집고 나아가는 여성 창작자의 힘
영화 감독인 크리스에게 창작은 엄청난 고통이다.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아름다운 포뢰섬에 왔지만 완벽한 풍경 앞에서 좋은 작품을 써내지 못 할까봐 두렵기만 하다. 역시나 영화 감독인 크리스의 남편 토니는 반대로 시나리오 작업이 꽤 잘 풀리는 중이다. 창작자 커플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흐른다.
포뢰섬은 거장 잉그마르 베르히만이 영화를 찍고 말년을 보낸 곳으로 영화인들의 성지이다. 그러나 크리스는 베르히만의 자취를 좇을수록 그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베르히만에게 6명의 부인과 9명의 자식이 있었지만 자식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었다는 점, 그가 50여편의 작품을 남기고 거장이 될 수 있었던 건 가정에 소홀했기 때문이라는 점에 크리스는 실망한다.
크리스는 토니로부터도 소외된다. 그는 시나리오에 대한 고민을 토니에게 털어놓지만, 토니는 자신의 작업을 크리스에게 절대 공유하지 않는다. 토니가 작업과 책에 집중하는 동안 크리스는 토니의 세계에 초대받지 못하고 주위를 겉돈다. 관계의 불균형은 이들의 사회적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토니는 크리스 보다 나이가 많고, 포뢰섬에서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고 팬들을 만나는 등 인정받는 영화 감독처럼 보인다. 반면 크리스는 젊은 여성 감독인 데다가 짐작하건대 그의 전작은 호불호가 갈린다. 크리스는 토니의 조언을 구하지만 토니는 크리스의 조언이 필요 없다.
토니와 크리스가 다투는 장면에서 이와 같은 관계는 더욱더 두드러진다. 창작이 고문이라는 크리스의 말에 토니는 다른 일을 해보는 건 어떠냐고, 주부도 좋은 직업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점은 토니는 이 말을 악의 없이, 심지어는 크리스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했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다정하고 자연스러워서 지나칠 뻔 했지만 나는 이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 힘들게 일하느니 훌륭한 직업인 주부가 어떠냐는 취지의 말에서, 전통적으로 ‘여성의 자리’라고 간주되는 가정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또한 토니가 크리스의 창작을 고급 취미쯤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도 의심해본다. 창작은 원래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토니가 크리스의 창작을 진지하게 여겼다면 그렇게 말 할 수 있었을까. 내색하진 않았지만 토니는 자신을 내조해 줄 아내를 원하는 걸까. 분명한 건 크리스에게는 동등한 동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 초반 크리스가 베르히만의 사생활에 실망하며 ‘작품 세계와 가정은 양립하기 힘든 것일까?’ 하고 던졌던 질문과도 이어진다. 토니에게는 별다른 쟁점이 아니었던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는 크리스가 여성 창작자로서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문제다.
그러나 영화는 그러한 갈등을 본격적으로 다루진 않는다. 토니는 꽤 가정적인 남편이고, 크리스의 작업에 무심하긴 해도 힘을 실어주는 조언도 해준다. 또한 크리스는 베르히만에 대한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여전히 그의 작품에 끌린다. 크리스는 이 불화 속에서 방황한다. 결국 크리스가 남성 거장과 남성 동료의 세계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비집고 나아가는 방식은 창작이다.
미아 한센러브의 전작 <다가오는 것들>의 나탈리가 삶에 들이닥친 상실의 고통을 철학의 힘으로 마주했다면, <베르히만 아일랜드>의 크리스는 가부장적 세계에서 느끼는 불균형을 동력삼아 자신의 영화를 완성해 나간다. 두 여성 모두 자신과 불화하는 세계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싸운다는 점에서 닮아있다. 두 여성은 시무룩한 얼굴로 일상을 부지런히 걸어다니고, 책상 앞에 앉아 읽고 쓴다. 그리고 어느새 크리스가 감독으로서 자신의 촬영 현장에 놓이는 장면은 쾌감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결국 내게는 이런 물음이 남는다. 나와 불화하는 이 세계 속에서 나는 무엇으로 싸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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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코모레비’를 찾아서
인생은 한 편의 시와 같다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 자체로 멋지지만 가슴에 오롯이 새겨지지 않았던 이 말은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기여이 내 마음에 들어 앉았다. 평범한 일상이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상황 속 찰나와 같은 ‘코모레비(こもれび,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의 순간은 시처럼 담백하고 아름다운 인생의 한 부분을 그려낸다. 비록 평범하지만 그 자체로 완벽한 날이라 말하는 영화는 관객 모두에게 이런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고 되묻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쩌면 이 작품은 그 물음의 답을 찾는 우리들의 여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쿄 시부야의 공공시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코지)는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난다. 씻고, 식물에 물 주고, 자판기에서 뽑은 캔커피를 마신 그는 차를 끌고 일터로 나간다. 출근길 동반자는 이른 아침 도심 풍경, 그리고 카세트 테이프로 들리는 올드 팝이다. 이곳 저곳 화장실 청소를 하다 점심 시간이 되면 근처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필름 사진기로 하늘을 찍는다. 모든 일이 끝나면 귀가 후 목욕탕에 가서 말끔히 씻고, 지하철 역사에 있는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잔을 기울인다. 캄캄한 밤이 되면 책을 읽다가 졸리면 잠을 청한다. 매일 이 똑같은 일상을 사는 그는 누가 뭐라 하던 간에 묵묵히 자신의 루틴대로 일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집에 조카 니코(나카노 이리사)가 찾아오고, 그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퍼펙트 데이즈>는 히라야마를 통해 보통의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보여주며, 자신이 맡은 일을 묵묵히 해내는 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히라야마는 매일 똑같은 일을 열심히 한다. 극중 어차피 다시 더러워질 화장실을 왜 그렇게 열심히 청소하냐는 동료의 핀잔에도 히라야마는 닦고 또 닦는데, 이는 누군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행위 자체가 누군가에게 행복한 순간을 줄 수 있다는 걸 믿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매번 그의 바람처럼 세상 일이 돌아가지는 않지만, 그 또한 인생이라고 믿으며 감내하고 또 다시 일을 한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히라야마는 고단한 삶을 견디며 앞으로 나아가는 수행자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영화는 히라야마를 중심으로 우리 사회의 주변인들, 특히 매번 그 자리에 항상 있는 사람들을 주시한다. 공원에 있는 나무, 공중 화장실, 집 주차장 캔 커피 자판기 등 무심코 지나가지만 꼭 있어야 하는 존재처럼 서점 주인, 식당 사장, 사진관 사장, 공원 노숙자 등을 히라야마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그들 또한 자신의 자리에서 책으로, 술 한잔으로, 사진으로, 존재 자체로 위안과 행복을 주는 이들이다.
특별할 것 없는 이들의 평범한 모습과 일상을 담은 건 이 영화의 시작점에서 그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연출을 맡은 빔 벤더스 감독은 도쿄의 공공 화장실들을 수리하는 ‘더 도쿄 토일렛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수리한 화장실을 보고 영감이 떠오른다면 관련된 작품을 하나 만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이 노 감독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도쿄의 화장실 그리고 이 도시의 사람들 일상을 지켜보며,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한 존재들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히라야마처럼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다른 이들이 잠시나마 특별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예로 히라야마가 동료 다카시(에모토 도키오)에게 썸녀와의 데이트 비용을 주거나, 조카 니코에게 잠시나마 휴식처를 제공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영화는 감독의 시선처럼, 극중 인물과의 거리두기를 한다. 히라야마라는 인물의 감정이나 과거 이야기를 보여주고 설명하기 보다는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마치 그가 하늘을 향해 사진을 찍고, 공원 노숙자를 지켜보고, 동이 트는 도심 풍경을 바라보듯 말이다. 이를 통해 생긴 여백은 아이러니 하게도 관객이 주인공의 일상에 더 집중하고, 미세하게 변하는 그의 감정과 태도를 확인하게 만든다. 이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바라보는 시점샷으로 변주를 주는데, 이를 통해 히라야마의 감정선과 그날의 온도차를 유추할 수 있다. 장면마다 흐르는 올드 팝 또한 말 수가 적은 그의 감정을 유추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한다.
<퍼펙트 데이즈>가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하게 다가오는 건 야쿠쇼 코지의 연기 덕분이다. 빔 벤더스 감독이 카메라로 써내려 간 영상 시에 때로는 규칙적으로, 때로는 격렬하게 운율을 행하듯 보여주는 연기는 강한 인상을 남긴다. 대사가 아닌 표정과 움직임으로 감정을 표현하는데, 몇 마디 말보다 임팩트가 더 강하다. 특히 극 후반부 아쿠쇼 코지의 마지막 표정은 압권이다. 그동안 숨겨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는 것처럼 하루 하루 쌓아온 모든 감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위해 2시간 내내 절제 연기를 보여준 것 같은 느낌이다. 극 중 다카시의 대사처럼 10점 만점에 10점. 아쿠쇼 코지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듯 제76회 칸영화제, 제47회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에게 남우주연상의 영광을 안겼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관객이라면 히라야마의 마지막 표정을 보며 삶이 고되기에 찰나의 행복을 느끼는 건지, 찰나의 행복이 크기에 삶이 고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결국 정답은 없기에 이 힘든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는 철학적 사유를 할지 모른다. 그보다 중요한 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아닐까. 고단한 삶을 깨우는 소리와 음악, 햇빛, 목욕, 사진, 술 한잔, 책 등 작지만 소중한 것들로 우리는 행복을 느끼고 그렇게 살아가니까 말이다. 부디 이 영화를 보고 고단한 삶을 잠시 잊게 만드는 자신만의 ‘코모레비‘를 찾길 바란다. 우리들의 퍼펙트 데이즈를 위해~
덧붙이는 말: 영화를 보고 극장 밖에 나오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와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을 꼭 들게 될 것이다. K-pop 대신 올드팝을 듣는 자신에게 너무 놀라지 말고, 두 곡을 포함한 명곡 향연에 푹 빠지길 바란다. 빔 벤더스 감독님! 플레이리스트 좀 공유해주세요~
사진제공: (주)티캐스트
평점: 4.0/ 5.0
한줄평: 단조로운 일상에 스며든 특별하고도 가치있는 운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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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컬트를 빙자한 인상 깊은 여성 바디 호러
2024년 상반기 국내 개봉 호러 영화 중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한 편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오멘: 저주의 시작>을 선택할 것이다. 그 이유는 단순히 오컬트 장르의 기념비적인 영화인 <오멘> 시리즈의 프리퀄이라는 것에 있지 않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오면서도 그 안에서 장르적 변주를 가하고, 동시대 우리가 두려워하는 공포를 전했다는 점 때문이다. 오컬트를 빙자한 여성 바디 호러. 어쩌면 <오멘> 시리즈 중 가장 현실적인 공포를 그렸다고 볼 수 있다.
때는 1971년, 수녀가 되기 위해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한 마거릿(넬 타이거 프리)은 과거 보육원에서 연을 맺었던 로렌스 추기경(빌 나이)을 만난다. 그리고 이들은 한 보육원에 도착한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돌보는 이곳에서 마거릿은 외톨이로 지내는 한 소녀에 집중한다. 과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 소녀를 그냥 놔둘 수 없었던 것.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우연히 브레넌 신부(랠프 이네슨)를 만나고 그 소녀를 조심하라는 경고와 보육원의 어두운 실체도 알려주겠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프리퀄답게 <오멘>의 악령 데미안의 탄생 기원을 따라간다. 데미안은 어떻게 탄생했으며, 악령의 부활은 어떤 과정을 통해 가능했는지 등 영화는 놓인 운명에 겸허히 따라간다. 브래넌 신부가 말하는 보육원의 비밀, 즉 그 유명한 ‘666’ 표식이 있는 악마의 실체를 밝혀나가는 그 과정만 보더라도 영화는 시리즈의 자장 안에서 그 역할에 충실하다.
하지만 순수한 소년의 얼굴을 지닌 데미안처럼, 영화는 중반부 이후 장르를 달리 가져간다. 공포의 대상이 악마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서 적그리스도를 만드는 인간으로 바뀌면서 작품의 지향점은 달라진다. 이 부분에 있어 <오멘> 시리즈보단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와 유사해 보인다. 아르카샤 스티븐슨 감독은 여느 인터뷰에서 <악마의 씨>를 자주 언급했는데, 후반부 마거릿의 수난사는 <악마의 씨>의 로즈메리의 수난사와 오버랩된다. 광신도들의 잘못된 믿음, 정치적, 사회적 질서 및 권력 유지를 위해 여성의 신체에 폭력을 가하는 부분은 너무나 닮아있다.
오컬트 장르의 첫 문을 열어젖힌 <엑소시스트> 이후 등장한 <오멘>은 당시 미국인들의 심연에 자리 잡은 공포, 즉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의 마음을 건드리며 큰 관심을 이끌었다. 이와 반대로 <오멘: 저주의 시작>은 그동안 사회적 약자로서 권력자들에게 배신, 이용만 당했던 여성들의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 따른 공포와 고통을 목도한다. 스포일러라서 자세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후반부 적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을 길게 보여주는 것 또한 이런 의미를 부각하기 위한 부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어 영화는 과거 <오멘> 시리즈가 여성은 배제된 남성 중심적 서사 구조를 가져갔다는 걸 상기시킨다. 감독은 숙명처럼 시리즈 내 서사 구조의 성 역할을 전복시킨다. 오로지 남성은 주변인으로서 존재하고 이야기를 이끄는 건 선이 되었든 악이 되었든 여성들이 그 역할을 맡는다. 더불어 연대 또한 여성들의 몫이다. 그동안 오컬트를 포함한 호러 장르에서 피해자로서만 각인 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제야 수면 위로 올라온 느낌이다.
호러 영화로서 갖춰야 하는 기본 요소들은 충실한 편이다. 고어는 물론, 공포스러운 스코어와 음향 사운드, 그리고 점프 스케어는 관객에게 공포를 전한다. 이보다 더 극악스러운 공포는 후반부에 포진한다. 마거릿을 통해 보여주는 바디 호러 장면은 단순히 이 영화가 엔터테인먼트적인 공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실제 여성들이 가진 공포를 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르적인 재미를 원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심심할 수 있지만, 그 무게감은 기존 시리즈보다 더 무겁게 느껴진다.
<오멘: 저주의 시작>은 미국 연예 전문지 ‘버라이어티’에서 내놓은 2024년 상반기 호러 영화 TOP 10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그만큼 북미에서도 이 작품이 가진 의의, 즉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공포라는 점을 높이 평가한 듯하다. 과연 여성들은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그 답은 영화를 보며 찾아보길 바란다.
사진 제공: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제공
평점: 3.5 / 5.0
한줄평: 종교라는 권력에 짓밟힌 오컬트적 여성 수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