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별2021-06-22 11:06:39
날아가는 총탄과 폭탄으로 개연성을 무마한 영화 《베를린》
하정우와 전지현의 투닥거리는 연기를 좋아하는데 영화 《베를린》을 보지 않아서 이번 기회에 봐봐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사실 처음 볼 때부터 그렇게 기대를 하진 않았다. 그저 멋지고 예쁜 배우들의 연기를 그저 감상하면 되는 영화였으니 말이다.
영화 《베를린》 시놉시스
거대한 국제적 음모가 숨겨진 운명의 도시 베를린.
그 곳에 상주하는 국정원 요원 정진수는 불법무기거래장소를 감찰하던 중 국적불명, 지문마저 감지되지 않는 일명 ‘고스트’ 비밀요원 표종성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해 뒤를 쫓던 정진수는 그 배후에 숨겨진 엄청난 국제적 음모를 알게 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위기에 빠진다.
한편 표종성을 제거하고 베를린을 장악하기 위해 파견된 동명수는 그의 아내 연정희를 반역자로 몰아가며 이를 빌미로 숨통을 조이고, 표종성의 모든 것에 위협을 가한다. 표종성은 동명수의 협박 속에서 연정희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서 그녀를 미행하게 되지만, 예상치 못한 아내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 해당 내용은 네이버영화를 참고했습니다.
이 이후로는 영화 《베를린》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액션은 정말 멋있다
인정할 건 인정하고 글을 쓰자면 액션신은 정말 멋있었다. 화려한 멋으로 치장된 액션이라기 보다는 정말 저 상대방을 빠른 시간 안에 죽이겠다는 최적화된 동선으로 액션합이 맞춰져 있어서 굉장히 멋있게 다가왔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 2가지가 있는데 하정우가 끌려가는 전지현을 구하기 위해 승합차에 매달렸을 때, 두 사람의 감정이 애틋한 상태에서 구해보겠다고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전지현이 총상을 입어서 도망갈 수 없게 되자 쫓아오는 류승범을 없애버리는게 낫다고 판단한 하정우가 성치 않은 몸으로 들판에서 싸우는데 그 장면 역시 멋있었다. 약간 서부영화의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근데 언제부터 애틋했더라?
정말 궁금한 점은 하정우와 전지현, 언제부터 영화 속에서 이렇게 애틋했을까? 하정우와 전지현은 극 중에서 결혼한 사이라고 해도 그렇게 알콜달콩 서로가 죽지 못해 안달난 사이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내 기준 둘이 정략결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정우를 처리하러 온 공작원들을 피해 둘이 도망가는 과정에서 뭐,,, 전우애??? 사선에서 같이 살아남아야한다는 그런 동지애가 발동한 것일까? 아니면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갑자기 솟아난 부성애와 모성애 때문일까?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를 의심하고 믿지 못했는데 갑자기 서로만을 믿기 시작하고, 죽을거 뻔히 알면서 구하러 가고, 전지현이 죽자 처절하게 울고, 당황스러운 전개였다.
한석규는 어쩌다 동료가 되었나
또 하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남한의 한석규는 언제부터 하정우를 그렇게 챙겼나?다. 내가 영화를 대충 본 것일까? 아니 분명히 첫 장면은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심지어 방아쇠까지 당겼던 사이인데, 하정우가 전지현 구하러 가겠다고 하니까 뒤에서 엄호를 해주질 ksg나 둘이 도망가는 거 류승범이 못쫓아오도록 총알까지 박혀가며 도와주질 않나, 그리고 총상을 입은 전지현을 마지막까지 간호한 것은 한석규였다.
그래서 약간 개연성 무엇? 영화 다시보기를 해야되나? 근데 그렇게까지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은데?? 이런 감정이 든 채 영화는 마무리되고 말았다. 전반적으로 베를린은 액션이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보니 개연성에는 크게 중점을 안 둔 것 같아서 아쉬웠다.
개연성이 아쉬웠던 영화 《베를린》. 하지만 그 아쉬움이 느껴질 때마다 폭탄 펑~ 총알 피슉!! 날아가서 보는 데에는 재밌었던 작품이었다.
Relative contents
-
-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끔찍한 형벌, 징벌(Posessions, 2020)
죄를 지은 것에 대한 벌을 준다는 의미의 징벌은 드라마에서 인물들이 자주 언급하는 말이자, 극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유대교의 신앙에서 간통죄에 대한 처벌로 여겨지는 표식을 나타낸다. 갑작스레 결혼식 피로연에서 신랑이 목이 베인 채 사망하게 되고, 칼을 들고 있던 신부 나탈리는 유력한 용의자로 체포된다. 이 메인 사건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갈등과 대립, 진실을 파헤치는 추격전이 시작된다.
<징벌>은 이스라엘/프랑스 드라마인 만큼 그 정체성이 다면적이고 기존에 봐왔던 드라마들과는 다른 독특한 면모가 있다. 신랑은 이스라엘인 용의자 나탈리는 프랑스인이고, 모두가 유대교라는 신앙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서 전체적인 배경은 이스라엘이고, 불어, 영어와 히브리어가 등장한다. 6부작이라는 다소 짧지만 길게 느껴지는 전개 대다수에는 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빠르고 시원시원한 전개를 원하는 시청자들에겐 다소 불편할 수 있으니 미리 주의를 바란다. 극 전체적으로 짙게 깔린 모호한 분위기와 답답한 감정선들은 후반부로 가서야 어느 정도 해소되기 때문. 다소 여성의 인권이 낮은 이스라엘 사회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유대교의 종교 사상 등이 반영되어 형사인 에스티가 주위 남 형사들에게 듣는 차별적 말들, 나탈리의 엄마가 집착하는 종교사상들과 주위 여론에 의해 희생양이 돼버린 나탈리의 상황들은 이스라엘 여성들의 입장을 잘 대변해 주는 듯하다. 게다가 주인공 나탈리의 행동과 미묘한 표정들은 사건을 더욱 미궁으로 빠지게 하는 미스터리다. 어느 날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누가 봐도 무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또 한때는 큰 비밀을 숨기기라도 한 듯 수상쩍은 모습을 보인다. 그렇기에 마지막 화의 반전은 가히 놀라울 것이다.
물론 인물 간의 관계는 매우 촘촘하고 흥미롭다. 나탈리를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카림이라는 인물이 그중 하나인데, 프랑스 영사관 직원이자 아랍계 프랑스인이다. 영사관 직원이라는 직위답지 않게 그는 어느샌가 형사의 영역으로 넘어와 나탈리와 함께 숨겨진 비밀들을 찾아가고, 이스라엘 형사인 에스티와 함께 범인이 누구인지 같이 추적하면서 사건의 단서를 찾아내기도 한다. 카림이 이렇게까지 깊숙한 영역으로 들어온 이유에는 나탈리에 대한 연민이 어느 정도 적용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건을 설명해줄 중요한 인물들이 하나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수사에 혼선이 생기지만,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범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쉽게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그러나 이상하게도 범인의 윤곽이 드러나고 잡혔을 때에도, 그에게는 통쾌함보다 연민이 제일 강하게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것도 다 타의에 의한 압박과 비정상적인 통제에 의해서라는 생각이 확연하게 들기 때문인 것 같다. 마지막에도 공허한 눈빛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 모든 건 타의에 의해 만들어진 끔찍한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모두가 떠안고 가야 할,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새겨진 징벌이 된 것이다.
원제인 소유물로 결말을 해석해 본다면 나탈리는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야만 하는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행한 불가피한 선택들이 더 큰 파멸을 가져온 것이다.
-
- 질높은 영상 속 질낮은 이야기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건 어떤 것일까. 살기 위한 의지가 사그라든 상황에서도 다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마지막까지 살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된다. 아마도 가족은 다시 살아야 할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다시 직접 만나서 서로를 안고 보듬으면서 일상을 살아간다는 생각은 의지를 주기 충분하다. 여기에 더해 자신이 맡은 일이 국가적으로 기대가 있었던 일이라면 그 일을 완수하기 위해 더 힘을 쓰게 된다. 여러 동료를 잃은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목표점에 근접한 남은 인물은 끝까지 그 일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 <더 문>은 한국 최초로 달 탐사를 하기 위해 우주로 향하는 우리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우리호에는 3명의 대원이 타고 있었지만 태양풍으로 인한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로 황선우 대원(도경수)만 살아남는다. 그를 구하기 위해 5년 전 첫 번째로 탐사선을 만들었던 김재국 센터장(설경구)이 다시 우주센터로 돌아와 도움을 주게 된다. 김재국 센터장은 5년 전 달탐사를 위해 나래호를 발사시켰다가 폭발로 실패한 경험이 있다. 하지만 우리호는 나래호와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이기 때문에 탐사선을 잘 알고 있는 김재국 센터장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한국 최초 달 탐사선인 우리호에 닥친 재난
다른 대원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기체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달탐사를 강행하겠다고 결정한 황선우 대원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발휘해 결국 달에 도착한다. 사실 황선우 대원은 우리호에 탄 3명의 대원 중 가장 우주 비행에 대한 지식과 능력이 떨어진다. 3명 중 가장 초보자라고 할 수 있는 그가 탐사선에 남아 관제센터와 협력을 하고 그것을 통해 달에 결국 도달하는 과정이 영화에서 꽤나 긴장감 있게 담겨있다. <더 문>에서 보여지는 모든 과정은 그 황선우 대원의 의지 때문에 만들어진다.
영화는 황대원이 반복되는 위기를 극복하는 것을 보여주는 가운데 우주적인 재난인 유성우를 등장시켜 큰 위기를 만들어낸다. 수많은 위기에도 불구하고 황대원의 의지와 김재국 센터장의 원격 지원으로 많은 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이어진다. <더 문>의 내용을 이 정도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우주 재난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 이 영화는 아주 단순한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는 위기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모두가 예상 가능한 따뜻한 결말로 달려간다.
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건, 할리우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비용으로 만들어진 CG다. 달의 상공과 달 지면에서 벌어지는 장면들은 어색하지 않고 영화에 몰입감을 더해준다. 유성우가 떨어져 지면이 폭발하는 장면들과 그것을 피해 움직이는 탐사선의 모습들이 꽤 실감 나게 담겨있다. 그 장면에 과학적인 오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는 어색함을 전달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가능하면 극장에서 직접 질 높은 영상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훌륭한 우주 장면과 CG
이런 영상적인 장점에도 불구하고 각 장면들의 신선함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달탐사선의 고장으로 두 명의 우주비행사가 탐사선 외부로 나가있는 장면부터 시작하는 영화는 <그래비티>를 떠올리게 하고, 달에 혼자 살아남은 대원을 무사히 귀환시키는 이야기에서는 <마션>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달에서 유성우를 피해 차량으로 질주하는 모습은 <애드 아스트라>의 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기본적으로 할리우드에서 이미 선보였던 여러 설정과 장면들을 참고하여 장면을 구성했다는 기시감이 많이 든다. 그러니까 화면의 질은 우수하지만 신선함은 떨어진다.
이야기의 전개도 아쉽다. 황대원이 달에 도착해서 유성우를 만나게 되어 큰 위기가 발생하는데 중반부터 시작된 유성우가 끝까지 쏟아진다. 또한 그렇게 많은 유성우가 쏟아지는데 탐사선과 황대원에게는 쏟아지지 않는 시간이 꽤 길어 의아함을 느끼게 할 정도다. 그리고 미국 나사에서 한국을 공식적으로 돕지 못한다는 설정인데, 영화의 말미 나사 디렉터인 윤문영(김희애)의 신파적인 연설로 윗선의 동의 없이 진행되는 구조작전도 이해할 수 없게 느껴진다. 영화 곳곳에 포함된 신파 코드 역시 SF 영화로서의 매력을 많이 떨어뜨린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아쉬운 건, 영화에 등장하는 많은 캐릭터들이다. 혼자 남은 대원을 살리기 위해 투입되는 김재국 센터장은 과거에 일했던 사람이고 탐사선의 구조나 기능을 잘 안다. 하지만 그가 현재 우주센터에서 어떤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종 현재의 센터장을 무시하고 헤드셋을 빼앗아 황대원과 커뮤니케이션하고 직원들에게 일을 지시한다. 그의 지시에 따라 센터의 인물들이 업무를 진행하는 것 또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달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황선우 대원의 아버지는 과거 김재국 센터장과 같이 나래호 발사 준비와 진행을 했던 인물이다. 그 당시 나래호의 실패로 3명의 대원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것으로 인한 죄책감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그 당시 책임자였던 김재국 센터장 역시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다. 그래서 김센터장은 황선우 대원을 구조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황대원은 김센터장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중반에 황대원의 아버지의 편지와 김센터장의 고백을 보여주며 황대원이 마음의 변화를 하게 만들었다는 걸 보여준다. 그러니까 초반에 가졌던 김센터장에 대한 증오가 아버지의 편지 이후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바뀌고, 김센터장의 고백 이후 김센터장을 용서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이다. 글로 표현하기도 어렵지만 영화를 보면서도 이 둘 간의 감정변화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이야기와 캐릭터
이 주 인물의 주변에 있는 인물도 아쉽다. 이야기 내내 센터 안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조한철) 캐릭터는 달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보는 리액션을 많이 보여준다. 장관으로서 책임을 보여주거나 나쁜 역할을 맡아서 상황을 악화시키는 역할이 아니라 그저 놀라고 무서워하는 과한 리액션을 계속 보여준다. 또한 김센터장과 같이 일하고 있는 한별(홍승희)의 존재도 물음표를 만든다. 한별은 위기의 상황에 꽤 좋은 아이디어를 전달하지만 그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어떤 성격의 인물인지를 거의 설명하지 않으면서 기능적으로만 활용시키도 만다.
영화 <더 문>이 한국에서 제작한 SF영화로서는 적지 않은 예산으로 좋은 화면의 영화를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영상만큼 성공적이지 못하다. 인물들의 감정은 과잉이 된 듯 신파를 유발하고 각 인물들이 어떤 결정을 내리고 관계를 설정해 가는 과정에서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영상이 주는 재미는 있지만 이야기가 주는 재미는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달에서 벌어지는 탈출 장면은 긴장감 있게 보게 되지만 지구에서의 모습에서는 흥미가 떨어진다. 이야기와 캐릭터만 놓고 보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수준을 너무 낮게 본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다.
이 영화를 연출한 김용화 감독은 <신과 함께> 시리즈로 쌍천만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만큼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감독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더 문>에서 그의 장기가 유기적으로 잘 발휘되지 못했다는 느낌이다. 관객이 캐릭터에 대해서 공감하기 어렵다 보니 영화에 등장하는 신파 부분에서도 하품이 날 수밖에 없다. 기술적으로는 좋은 영상을 보여주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아쉽다. 설경구, 도경수, 김희애 같은 배우들의 연기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캐릭터에 대한 공감을 하지 못하게 구성된 이야기가 배우들의 연기를 돋보이게 하지 못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와 캐릭터에 대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영화 <더 문>은 극장에서 보기 최적화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달에 남은 대원의 의지가 발휘되면서 벌어지는 탈출 장면은 훌륭하고 깔끔한 그래픽으로 만들어져 있고 스케일도 크기 때문에 작은 화면보다는 큰 화면에서 보는 것이 좋다. 이야기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만든 SF영화가 만들어낸 우주 장면이 궁금한 관객들에게는 극장 관람을 추천한다.
*영화의 스틸컷은 [다음 영화]에서 가져왔으며, 저작권은 영화사에 있습니다.
주간 영화이야기 뉴스레터!
구독하여 읽어보세요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서 제 뉴스레터를 구독하실 수 있어요.
https://contents.premium.naver.com/rabbitgumi/rabbitgumi2
https://taling.me/vod/view/53700
https://www.notion.so/Rabbitgumi-s-links-abbcc49e7c484d2aa727b6f4ccdb9e03?pvs=4
-
- <조커> 오직 딱 하나를 바꿨을 뿐인데...
1. 웃음이 미친 듯이 나오는 정신병을 앓는 '아서 플렉(조커)'은 십 대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광대다.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그는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지만 정작 남을 웃기지 못한다. 꿈을 이루기는커녕 병을 앓으면서 알 수 없는 편지를 쓰는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어느 날 이후, 아서는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계급과 계층에 속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과 생각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는 마침내 '조커'로의 삶을 선택한다.
<조커>의 스토리 전개, 서사 구조는 새롭지 않다. 히어로 영화의 전형을 충실히 따라간다. 히어로 무비에서 내적 결핍을 지닌 주인공은 특정한 사건으로 인해 본인의 능력을, 새로운 자아와 정체성을 깨닫는다. 그는 조력자를 만나기도 하고, 시련과 역경에 놓인다. 하지만 끝내 온갖 고난을 물리친 후에 그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인정하는, 도움도 주고 도움을 받기도 하는 히어로로 거듭난다. 따라서 <조커>를 히어로의 기원을 다루는 뻔한 영화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커>는 그 어떤 히어로 영화도 보여 주지 못한 충격, 두려움, 광기와 매력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이를 가능케 하는 <조커>와 다른 히어로 영화의 차이는 단 하나, 바로 '조커'다.
2. 히어로의 자리에 사회에서 무시받는 정신병 환자를 위치시켰다는 것 외에 <조커>가 변화를 준 것은 없다. 그러나 첫 단추가 나머지 단추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처럼, 이 작은 변화는 영화의 모든 것을 바꿨다. 히어로를 빌런으로 바꾼다는 것. 이것은 단순히 주인공 한 개인이 바뀐다는 뜻이 아니다. 그 개인과 관계를 맺는 영화 속 모든 구성 요소의 의미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정상이 비정상이 되고, 진실은 거짓이 되고,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주관성은 객관성이 된다. 죽음은 삶으로, 비극은 희극으로, 웃음은 울음으로, 빌런은 영웅으로 <조커> 속 요소들은 원래 알던 히어로 영화의 그것들로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다. 조커의 말마따나, 조크는 주관적이니까. <조커>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 속 폭동과 브루스 웨인의 등장이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처럼 완전히 뒤바뀐 의미를 <조커>는 수없이 접했을 전형적인 히어로 영화의 구조 안에서 풀어낸다. 조금도 덜지 않고 조금도 더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조커>는 충격적이고, 매력적이고, 두려운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회 질서가, 세상의 의미가, 히어로를 떠받드는 행위가 일상적이고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관념과 충돌하면서 엄청난 괴리감을 유발하며, 괴리감은 개봉 전부터 우려가 일었던 <조커>의 강력한 선동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조커는 조크는 주관적인 것이라며, 살인도 조크가 될 수 있다고 항변한다. 혼란으로 가득한 현실을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니라 토마스 웨인으로 대표되는 기득권층이며, 그들이 자신을 무시하고 이해하지 않고 열등한 존재로 짓뭉게며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않은 탓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조커의 주장은 보편적인 도덕관념에서 어긋나는 변명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진실이 섞인 거짓을 파악하기 힘든 것처럼, 완전히 뒤바뀐 의미를 익숙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조커의 논리에는 설득력과 정당성이 부여된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영화와 조커가 관객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평범한 구조 안에서 폭발적인 에너지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냈기 때문에 <조커>는 가장 충격적인 히어로 영화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3. 따라서 <조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조커'를 표현하는 일이다. 조커가 관객을 매료시키지 못하고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하면 조커가 바라보는 세상, 조커와 관계를 맺은 사회는 뜬구름 잡는 헛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호아킨 피닉스는 영화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조커를 스크린에 등장시킨다.
이 영화 첫 장면은 미친 듯이 웃는 '아서'의 모습이다. 아서는 분명 웃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울고 있다. 울고 싶지만 웃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들어주지 않는 세상에 좌절하고 실망했지만 그대로 무너질 수 없기에 우는 대신 억지로라도 웃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 후반부, '조커'는 웃는다. 일말의 울음도 없이, 그는 세상을 웃게 하고 자신의 마음까지 웃게 한다. 이제 그의 웃음과 미소는 순수하며 그래서 광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광기는 다른 사람들까지 사로잡는다.
영화는 조커가 웃는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거듭해서 보여준다. 미묘한 웃음과 표정의 변화를 통해서 아서는 조커가 되어간다. 이 변화는 오롯이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 덕분이며, 그렇기에 반복적이고 안일해 보이는 클로즈업조차 그의 얼굴을 잡는 순간 최적의 연출로 느껴진다. 이렇다 할 액션이 없는데도 아이맥스로 이 영화를 감상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서에서 조커로의 변화, 사회적 약자의 분노, 인간 내면의 붕괴 등을 얼굴 표정과 웃음소리만으로 완벽하게 표현한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감히 히스 레저의 조커가 생각나지 않게 만드는 강렬한 존재감을 뽐낸다.
4. 경찰차 위에 서서 얼굴에 미소를 그리는 조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수많은 조커들. 카메라는 이를 위에서 내려다보지도 않고, 조커의 시선에서 그에게 열광하는 대중들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수많은 군중들 중 하나의 시선으로 조커를 올려다본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범죄자이고, 정신병자에 불과한 그가 하나의 히어로 혹은 빌런으로 탄생하는 감성적인 순간인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조커의 세상, 조커와 사회의 관계, 조커로 대변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논리적 전개를 숨겨버린다. 조커의 정신병은 분기점마다 어떤 것이 사실이고 아닌지를 의심하게 만들면서 영화를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크나이트>와 같은 작품과 비교했을 때 이 영화 속 각 장면들 간의 관계는 세밀하거나 아주 유기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이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고 있기 때문에 차별적이고 독특한 새로운 버전의 조커가 등장할 수 있다.
5. <조커>가 인상적인 또 다른 이유들도 있다. 조커 내면의 혼란스러움을 보여주는 공간 안에서의 다른 색깔로 이루어진 조명들, 다른 히어로 영화들이 자신을 봐달라며 화려하게 치장하는 사이 80년대 레트로 스타일로 보여주는 여유, 뼈를 울리는 듯한 ost까지. 이 모든 것들은 <조커>를 풍부하게 채워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커>의 단 한 가지 미덕을 꼽으라면 그것은 발상의 전환이다. 가장 기본적이고 단순해서 간과하기 쉬운 이야기의 시작과 주체를 과감하게 바꿀 줄 아는 것. 이를 통해 <조커>는 고정된 사회의 질서에, 세상의 의미에 도전장을 던진다. MCU와 같은 유니버스 세계관이 맹위를 떨치고 있는 히어로 영화 시장도 뒤흔들어 놓는다. 이제는 <다크 나이트>가 아니라 <조커>를 넘어서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O(Outstanding, 특출남)
물방울 하나가 바다를 넘치게 만든다
-
- <스프링 블라썸> 사랑이 피어나고, 소녀는 성인이 된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한 영화 <스프링 블라썸>의 시사회 관람 후기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 싫증이 난 '수잔(수잔 랭동)'. 맘껏 재잘거리는 친구들 사이에 있음에도 그녀의 세상은 조용하고 무료하다. 어느 날 그런 그녀에게 우연한 만남이 찾아오고, 수잔은 극장 앞에서 연극배우 '라파엘(아르노 발로아)'을 만난다. 수잔은 라파엘도 자신 못지 않게 권태로운 삶에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라파엘 역시 수잔의 고요한 일상에 깃든 공허함을 눈치 챈다. 서로를 엮어주는 공통점은 동질감으로, 더 나아가 호감과 사랑으로 이어지며 수잔과 라파엘은 연인이 된다. 그러나 우연히 찾아왔던 사랑은 이내 위기를 맞이하며 강한 애착으로 엮였던 두 사람의 관계는 시험대에 오른다.
수잔 랭동 감독의 데뷔작인 <스프링 블라썸>은 16살의 수잔이 35살의 라파엘을 만나 사랑의 싹을 틔우는 과정을 담은 영화로, ‘16살의 봄’이라는 뜻의 원제인 ‘Seize Printemps’에 충실한 작품이다. 사실 작중 수잔과 라파엘의 관계처럼 나이 차이가 큰 연애와 사랑은 편견 가득한 시선을 받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연인 중 한 명은 성인이고 다른 한 명이 미성년자라면, 순수한 사랑의 감정보다는 그 이면에 있을지도 모를 추악한 흑심이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스프링 블라썸> 속 사랑이 관객에게 소구력이 있으려면 영화는 불편한 사회적 시선이라는 장애물을 영리하게 피해 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수잔 랭동은 사랑의 시작과 그 감정선을 영리한 기교로 풀어내며 미션을 훌륭히 완수해낸다.
우선 영화는 수잔과 라파엘의 공통점을 부각하며 그들의 관계를 철저히 순수하고 낭만적인 사랑의 영역에 국한시키는 데 성공한다. 수잔과 라파엘은 권태에 빠진 이들이다. 수잔은 여자 친구들, 남자 친구들, 선생님, 자기 자신에게도 어떠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지쳐있고, 무료하고 같은 일상을 반복한다. 라파엘도 마찬가지다. 오랜 기간 같은 연극을 반복해서 하고 있고, 나무 역할을 연기해야 되는 날도 있는 그도 일상에 지쳐 있다. 당장 연극이 행복한지, 연극을 즐기고 있는지 묻는 수잔에게 연기하는 법을 잊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고 말할 정도로.
또한 수잔과 라파엘은 신이 속해있는 곳에서 소속감에 들려고 하지 않는 아웃사이더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수잔은 남자애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파티에서 춤추자고 권유하는 친구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한다. 친구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도 그 손을 뿌리치기 일수이며, 그러다 보니 그녀는 자신이 속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한다. 라파엘도 마찬가지다. 그는 연극 후 회식 자리에서 도망치기 바쁘고,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도 대화에 쉽게 끼지 못한 채 묘하게 겉을 맴돈다. 무대가 끝난 뒤 커튼콜을 할 때도, 인사를 하거나 퇴장하는 타이밍을 한 박자씩 맞추지 못한 채 따로 행동한다. 이렇게 라파엘 역시 자신이 속한 곳에서 잎을 피우지 못한다.
이처럼 수잔과 라파엘이 각자 자신의 나이대에 맞는 사람이나 주변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두 주인공의 사랑을 순수한 감정의 영역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스무 살가량 차이 나는 이들의 로맨스에서 현실적인 맥락을 제거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두 인물의 공통으로 갖는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부각하면서 그들을 여성과 남성, 미성년자와 성인 이전에 한 명 한 명의 개인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공통의 공허함은 빨간 석류 에이드를 함께 나눠 마시고, 아침을 같이 먹으며,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감으로 이어진다. 이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연대감으로 나아가고, 두 개인 사이에서 피어난 연대감은 마침내 사랑이라는 방점을 찍는다. 이렇게 영화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오직 '나' 같은 '너'와 '너' 같은 '나'가 만나는 그 순간에만 주목하도록 유도하고, 뿌리내릴 곳 없던 두 사람이 함께 뿌리내리고 사랑의 꽃잎을 피우는 과정만 스크린 위에 띄우는 데 성공한다.
실제로 영화는 공감과 동질감이 낳은 연대가 사랑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묘사함에 있어서 그들을 둘러싼 여러 구체적이고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펼쳐놓지 않는다. 사랑이 위험에 빠지고 두 사람이 이별하더라도 그 이유나 사연을 설명하기보다는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저 그 사랑의 궤적을 쫓으며 그 순간순간마다 두 연인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표현하는 데에 집중한다.
이러한 의도는 여러 기술적인 요소에서 엿보인다. 음악과 댄스가 대표적이다. <스프링 블라썸>은 두 연인이 춤추는 장면을 거듭 보여준다. 이때 평범한 서사에서 춤 장면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상당히 어색하다. 두 사람의 감정이 깊어지고 있고 서로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하며 교감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려는 찰나에 직접적인 스킨십이나 대사 대신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들은 춤을 춘다. 그래서 카페 테이블에 앉아서, 연극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춤은 서로가 깊게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상상 속 교감에 가까워 보인다. 또 그렇기에 이 댄스신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다. 합을 잘 맞춘 몸짓은 아니지만, 그 약간의 빗겨나감에서는 역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단단해지고 깊어지고 있는지가 자연스레 묻어난다. 수잔 랭동이 무용에 연극적인 요소를 결합한 ‘탄츠 테아트르’(Tanztheater, Dance Theatre) 형식의 퍼포먼스를 주로 선보이는 세계적 무용가 ‘피나 바우쉬’(Pina Baush)의 열렬한 팬이었다는 사실이 새감 실감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또한 <스프링 블라썸>에서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은 이제 거의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스마트폰이나 소셜 미디어가 일절 등장하지 않으며, 그렇기에 작중 시대적 배경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그 빈자리는 종이 책과 휴대용 CD 플레이어가 대신하며, 이는 영화 전반적으로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불어넣는다. 달리 말하자면 시대를 막론하고 10대 시절을 겪었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이 77분의 러닝타임 안에 가득한 것이며, 수잔을 보다 보면 <라붐>(1980)과 <귀여운 반항아>가 떠오르는 이유다. 이 역시 두 사람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 대신 그들의 감정 자체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사랑의 판타지 속으로 마냥 젖어드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수잔과 라파엘의 차이점, 성인과 그렇지 않은 이의 간극도 분명하게 또 반복해서 잡아주고 있다. 두 사람이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는 장면만 보더라도, 라파엘은 자신의 담배를 사면서 동시에 수잔에게는 사탕을 선물해준다. 10대와 30대의 사랑과 그 간극이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인 것이다. 사탕과 담배 외에도 10대와 30대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소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석류 에이드와 맥주다. 맥주는 아직 수잔이 먹기에는 어린 나이에 해당되고 보통 어른들이 주로 마시므로 성인에 해당되고, 석류 에이드는 그에 반대인 의미를 나타내는 것 같아 10대와 30대 간의 간극이 잘 보이는 순간이다. 또한 자연스럽게 스쿠터를 타고 수잔 집 앞에 간 라파엘과 그런 그에게 스쿠터가 무섭다며 타지 않겠다고 말하는 수잔의 모습에서도 석류 에이드와 맥주의 차이점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 간극 덕분에 <스프링 블라썸>은 단순히 사랑이 시작되는 간질거림을 간직하는 데서 그치는 대신, 10대가 바라본 사랑의 경험과 그로부터의 성장, 곧 성인으로의 발돋움을 그려내는 듯 보인다. 식음료의 차이는 수잔과 라파엘의 권태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일지언정 속사정이 꽤 다름을 보여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수잔이 겪는 일상의 무료함은 평균적인 또래 집단과 수잔 본인의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그는 여자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파티에서 어울리지 못하며, 수업 시간 중 수준 낮은 질문을 하는 친구에게 큰 애정을 베풀지 않는다. 반면에 라파엘이 겪는 권태로움은 보다 인생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같은 배역이 반복됨으로써 작품을 계속하고픈 열정이 희미해진 시간만이 지속되고 있다. 그는 약간의 번아웃 속에서도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오페라 아리아 곡과 같은 작은 요소에 기대어 일상을 이어나간다.
이러한 차이에 주목하면, 수잔과 라파엘의 동질감에 주목할 때 보였던 로맨스는 수잔의 성장영화로 바뀌어 보인다. 후반부에 들어서 수잔은 라파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또 그에 대한 관심이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이별을 고한다. 사실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이지 않은 이 대목의 전개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듯 느껴지기도 하며, 의문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수잔의 권태로움이 라파엘의 그것과 미묘하게 달랐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는 소녀가 여자가 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또래들이 시시해 어른스러운 고뇌에 가득 찬 남자에 끌리는 수잔이 그려낸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템포 더 어른이 된 그녀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스프링 블라썸>은 한 편의 성인식 같기도 하다. 오프닝 장면에서 친구들의 수다가 지겨운 수잔은 자신이 마시던 빨간 레모네이드를 빨대로 휴지에 뱉으며 하얀 휴지를 빨갛게 물들이는데, 이 장면이 마치 여성들의 초경을 암시하는 듯 보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화 내내 빨간색의 색감이 두드러지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수잔이 늘 가지고 다니는 프랑스 작가 ‘보리스 비앙’(Boris Vian)의 소설 [너희들 무덤에 침을 뱉으마]의 표지, ‘라파엘’이 타고 다니는 스쿠터와 카페에 가면 늘 먹는 딸기잼이 발라진 빵 등 <스프링 블라썸>에는 빨간색이 포인트 색상으로 꾸준히 등장한다. 이는 사랑을 통해 성인이 되는 한 소녀의 성인식을 시각적으로 비유한 것과 같은 인상을 준다.
사실 <스프링 블라썸>은 앞서 보았듯이 초점이 두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시작 지점부터 빠져드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강하게 나뉠 수밖에 없다. 또 뭔가를 설명하기보다는 그저 두 남녀의 일상과 그 일상의 찰나가 어떻게 특별해질 수 있는지를 따라가야 하므로 더욱 그렇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보편적 감정이 지닌 힘에 기대 지적될 수 있는 난점들을 가리려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우연을 가장한 운명적인, 혹은 그 반대인 사랑을 꽃피우고, 하나 되는 경험을 하고, 그 결과 그 사랑의 끝이 어찌 되든 한 단계 성장하는 경험을 누구나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수잔 랭동의 초대를 받아 넘실거리는 감정선에 한 껏 빠지는 경험은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A(Acceptable, 무난함)
막 시작되는 사랑의 순간순간을 담아낸 장면들의 모음집
-
- 일본 애니메이션들 사이에 묻히면 속상할 이 한국 영화
첫인상
“미소야, 인사 제대로 해야지!” 담임 선생님이 미소를 다그친다. “안미소.” 짧은 답변만 툭 내던진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이는 미소. 미소는 제주의 어느 초등학교에 전학 왔다. 낯을 엄청 가리는 미소. 사실 그 이전에 뭐만 하면 전학 가던 탓에 학교에 가는 일이 좀 귀찮게 느껴졌다. 어쩔 줄 몰라하는 미소. 수업 첫날에 엄마를 뒤로하고 갑자기 도망쳐 버린다. 그 짧은 순간에 눈이 마주쳤던 건 원래 짝꿍이 될 예정이었던 하은이었다.
오늘 하은이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쟤는 뭘까? 처음 내뱉었던 미소의 인사는 하은이에게 큰 인상을 남기기 충분했다. 집에 가는 길. 길지 않은 시간을 들여 집에 도착했다. 하은이 가족은 서로 사이가 좋은 편이다. 타지에서 온 어머니와 찐 제주도민인 아버지를 두고 있는 하은. 식탁에서 나오는 대화도 그렇게 무겁지가 않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모르게 대화 소재가 하은이의 인간관계였다. “얘 친구 없어서 어떵(떡)하지?” 성격도 착한 하은이지만 외로운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이런 하은이에게 갑자기 한 손님이 찾아온다. “안녕! 나는 미소야. 오늘 네 짝꿍이 될 뻔했던.”
어디서 본 것보다 나았어
이 영화는 대만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당시 주연배우였던 주동우의 ‘연기 차력쇼’를 바탕으로 살짝 다크 했던 분위기를 잘 끌고 갔던 원작. 영화를 볼 때 기억에 남았던 것은 글쓴이가 전부터 잘 알던 대만 청춘영화의 연출 방식이 살짝 보인다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부터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까지 이 대만이라는 나라에 있던 영화들은 어느 장르를 품고 있는 듯하다. 본 작은 이 특성을 잘 소화한다. 나라가 바뀌었는데 대만 청춘영화 특유의 청량감이 살아있는 것이다. 어떻게? 공간적 배경을 설정한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영화의 주요 공간은 제주와 서울이다. 영화의 특성상 전자 제주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당위성을 적절하게 사용하듯이 영화에서 위치는 굉장히 중요하다. 어느 장면에서는 공간 안에 갇혀서 바다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바다를 바라보는 데 밍밍하게 바다만 있으면 뭔가 맛이 없다. 그럼 예뻐야 한다. 이런 특성을 살리는데 제주 서귀포시의 어느 공간은 뭐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뿐일까? 미소와 하은이가 자전거를 타고 휘리릭 달려가는 것도, 스쿠터를 타고 달려가는 일도 색감과 인물들의 분위기를 설정하기 위해서 제주는 필수적이었다. 또 영화 초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봐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후관계도 걸어 다녀야 하는 제주의 특성을 살리기도 했고, 토속적인 장소를 구현한 좋은 수가 됐다.
글쓴이는 제주도 사람이다. 많은 영화들이 제주를 공간으로 사용했단 것을 알 수 있다. 가령 <계춘할망> 같은 경우는 공간을 제주로 설정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바로 주인공이 해녀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전도연 배우가 주연을 맡았던 <인어공주>가 있다. 여기서는 주인공이 제주로 가서 전원생활을 해야 했던 이유가 있다. 이런 인물의 서사와 함께 제주도 사투리가 들리는 것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 <소울메이트>에서 제주 사투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억지로 막 욱여넣지 않았다는 것이 글쓴이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서울과 제주의 거리 차이가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는 것을 이면으로 깔고 표면적으로는 이 공간을 묘사한 감독의 섬세함이 느껴졌다.
반복과 차이
영화의 핵심으로 작동하는 요소 중 하나는 반복과 차이에 있다. ‘소울메이트’라는 단어를 보고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는 ‘영혼을 공유하는 친구’라는 뜻이다. 영화는 이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우선 미소의 서사다. 미소의 가족 특성은 초반에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영화는 후반부에 정확히 반복된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 내지는 구성요소를 생각해 보면 감독이 영화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또 영화에서 대놓고 핵심처럼 보이는 미술이라는 소재 역시 감독이 설정한 반복이라는 모티브를 확인할 수 있다. 뭐 이렇게 핵심으로 작동되는 키워드가 아니더라도 영화 대사에서 두 사람의 처지를 관통하는 대사가 나온다.
이렇게 두 사람의 처지를 엇갈려서 제시한 이유는 사랑이라는 주제와 이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이 영화가 퀴어 로맨스를 다룬 영화일까?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이 영화가 그 소재를 다룬다고 보지 않는다. 영화는 두 사람의 처지를 병치시켜서 서로를 이해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런 대사가 있다. ‘너는 내가 살아온 걸 이해 못 해’라는 것이다. 영화는 사실 어떤 인물이 고른 선택지를, 다른 사람이 사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지사지의 영화인 셈이다. 이 세상의 인간관계를 생각해 보면 모든 갈등과 헤어짐이 관점의 차이에서 온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런 줄 알았는데 상대는 이랬고. 나는 그때 몰랐지만 내 생각보다 상대방이 날 더 좋아했고. 이렇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인간은 지루한 인간관계를 반복한다. <소울메이트>는 이를 잘 이해하듯 이 사랑이 왜 우리들에게 공감을 살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현실성을 인물 간의 관점을 혼합시켜서 부여한 것이다.
K-레이첼 맥아담스
글쓴이는 영화를 보면서 김다미 배우가 정말 뛰어난 역량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전부터 연기했던 몇몇 클립들을 봤었다. 드라마를 즐 안보는 글쓴이지만 <이태원 클라스>나 <그 해 우리는>의 활약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이 영화에서 김다미 배우가 보여준 연기는 그동안의 필모를 집대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다미 배우가 지금 1995년 생으로 27세다. 글쓴이랑 두 살 차이 난다. 글쓴이가 지금 교복 입고 고등학생 연기하면 민원 들어올 것 같은데 이 배우는 어떤 헤어스타일로든 찰떡같이 소화한다. 비주얼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 인물은 나이대에 맞는 인물의 행동을 잘 연기한다. 10대 때는 10대답게, 20대 초 불안한 일상을 보내는 청춘으로서의 일상, 악착스럽지 않으면 낙오되는 삶, 30대가 되고 나서 겪는 다른 인생까지 한 사람이 한 인간의 일생을 바탕으로 매번 다른 처지에 적응하는 모습을 잘 연기했다. 이는 영화의 주제적인 측면과도 이어진다. 매 번 다른 입장에 놓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소울메이트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감정적인 호소력, 눈물연기의 빈도는 뭐 말해 뭐 해? 수준이다.
하은 역을 맡은 전소니 배우도 연기가 좋았다. 하은 캐릭터는 감정적으로 입체적인 측면이 미소보다 넓어야 한다. 하은이가 받아들이는 것이 미소의 서사에서 핵심이고, 또 영화가 전하고자 했던 ‘이런 사랑이 있나요?’라는 질문과도 닿아있다(심지어 영화의 촬영 자체도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많이 짜여 있다). 전소니 배우를 이를 잘 이해하듯 중요한 부분마다 표정연기를 성공적으로 소화한다. 대표적으로 후반부에서 인물이 재회하는 장면이 있다. 영화의 후반부 각본이 살짝 작위적인 느낌이 듦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이 없으면 영화의 엔딩이 성립되지 않을 수준이다. 이 장면에서 세월 동안 쌓아놓은 애정과 증오를 눈빛으로 보여준다. 전소니 배우의 이름은 몇 번 들어봤어도 실제로 연기하는 건 처음 봤다. 이 배우의 얼굴을 효과적으로 연기를 이끌어낸 좋은 연출이 돋보였다.
작위적이긴 해
영화 장점 정말 많다. 글에서 크게 언급하지 않는 부분은 역시 촬영이다. 제주라는 공간적 배경이 아니더라도 영화가 유지하는 색감과 구도가 작품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괜히 대만 청춘영화의 업그레이드라고 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반부까지 전소니, 김다미 배우의 표정연기로 이야기의 작위적인 느낌을 끌고 갔다는 점은 아쉽다. 중반부까지 이어지는 서로 아끼는 친구 관계가 균열이 일어나는 기점이 있다. 이를 시작으로 후반부와 엔딩을 위해 이야기가 감정적으로 몰입할만한 요소가 살짝 적다는 느낌이 든다. 충분히 이 전에 이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뭐 영화를 보시는데 크게 지장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
- 나를 외면하고, 진실을 피하고, 흘러서 결국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니체, 선악을 넘어서영화 <아네트>를 보러 가기 전에 줄거리를 읽어보았다. 오페라 가수 '안'과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 첫눈에 반한 둘, 그리고 빛과 어둠. 파도를 배경으로 한 포스터는 꽤 격정적으로 보였고, 이것을 사랑의 소용돌이쯤으로 해석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게 있었다. 장르에 로맨스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 사랑을 노래하는 뮤지컬 영화인데 왜 분류를 이렇게 해뒀을까?
영화를 보던 중에 이해했다. 이건 사랑 영화가 아니구나.
**영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뮤지컬 영화답게 시작은 음악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음성이겠다. 숨도, 웃음도, 말도 허락하지 않는 사회자의 말. Ladies and Gentlemen.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에 할 법한 시작과 달리 그가 하는 말은 다소 기이하다. 노래부터 웃음, 하품, 눈물처럼 다소 즉각적인 반응, 심지어는 숨 쉬는 것마저 이 쇼에서는 금지된다. 우리 개인의 자유와 의사결정을 모두 빼앗듯이.
이제 밴드의 녹음 현장에서 실제 감독이 나와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So may we start. 플래시몹처럼 한 무리에 사람이 하나둘씩 불어나고, 끝으로 주인공들이 걷고, 걷다가 흩어진다. 이때부터 영화의 큰 특징이 드러났다. 함축과 생략. 대사가 곧 노래 가삿말이 송스루 뮤지컬 영화다운 면모다. 다만 <레미제라블>을 떠올리면 조금 당황스러울지도 모른다.
<아네트>는 서사 전개 방식이 평이하지 않다. 인물의 삶과 방향성, 사건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중요한 대목은 가십 뉴스 형식으로 짧게 보여준다. 그것도 음악과 어우러지니, 뉴스보다는 광고에 가까운 느낌이다. 시간을 뛰어넘기 용이한 구조다.
어느새 인물은 미래에 와있고, 생각이나 감정은 '무대'라는 공간을 통해서 드러난다. 오페라 가수 안, 스탠드업 코미디 헨리 모두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연기하는 사람이니까.
안이 맡은 배역은 늘 배신과 고통이 뒤따르며, 캐릭터의 죽음으로 끝난다. 옷과 역할은 바뀌지만, 그의 결말은 전혀 달라지는 게 없다. 이것이 하나의 운명인 것처럼. Where is the moon? Where is the starlight? 별빛도, 달빛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을 맴도는 안. 꼭 미래의 복선 같은 노랫말이 들린다. Though I thought that I knew him, I am wrong. I don't know him. He is a stranger. Tonight.
헨리는 무대에 오르기 전, 자신만의 루틴을 반복한다. 담배를 피우고, 바나나를 먹고, 가볍게 뛰면서 펀치를 휘두르고, 복싱 가운의 후드를 뒤집어쓴다. 관객들의 웃음, 환호, 박수를 받던 헨리. 유쾌함으로 물든 공간에는 하나의 물음이 끝없이 뒤따랐다.
Why did you become a comedian? 헨리는 질문에 대한 답 대신 안의 이야기를 한다. 안과 약혼했다고. 한창인 나이 때에 자유가 끝났다고 표현하자, 관객석 한 곳에서 약간의 타박이 들렸다. 다시, 헨리가 반응했다. 안은 너무 완벽한데 자신은 별 볼 일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느냐고. Yes, Yes, Yes. 이 대답은 실제 헨리가 들었던 반응일까, 아니면 헨리의 자격지심일까?
영화의 빌드업은 끝났다. 이제 차곡차곡 쌓인 불안이 모습을 드러내고, 탑이 무너질 때다.
둘은 결혼하고, 아이가 탄생한다. 딸의 이름은 아네트 Annette. 하지만 아네트는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보이지 않는 줄로 인형을 움직이는, 마리오네트 Marionette의 모습이었다. 아네트는 보호자의 품에 안긴 채 모든 움직임에 제약받는다. 뽀뽀를 피하려고 고개를 돌려도 그 작은 몸짓은 가뿐히 무시당하고, 결국 보호자는 원하는 바를 취한다. 이 또한 뒤에 펼쳐질 이야기의 단서가 된다.
여전히 승승장구하는 안과 대조적으로 헨리의 커리어는 퇴행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끝인 셈이다. 타인을 공격하고, 웃음거리로 만들고, 비꼬던 것이 통하지 않자 헨리는 더욱 자극적인 이야기를 펼쳤다. 오늘 안을 죽였다고. 이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농담이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순간, 헨리는 이야기를 멈췄어야 했다. 그건 더 이상 웃긴 이야기가 아니라 모욕적인 폄하라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헨리는 과거의 영광에 살면서 현재의 추락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안의 성공과 지위를 시기하기에 이르렀다. 열등감은 소위 '망한' 사람들 모두에게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 커리어가 망한 건 이유가 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잃은 사람들, 즉 자기혐오가 열등감으로, 열등감이 타인을 향한 공격으로 발현된다.
그 흔적은 헨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비슷한 이야기를 들고 온 여섯 명의 여성. Subjected to Henry McHenry's abuses. Witnesses to his violence. And his anger. His anger. 이때 그들의 모습은 꼭 경찰서에서 취조당하는 용의자 같았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나서서 말을 하느냐는 노랫말이 압박감을 더했다.
이때 교차된 장면은 공연장으로 이동하던 안이 잠결에 보았던 산불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헨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보였다. 약간 놀란 듯한 안의 표정에서도.
두 사람은 어긋난 관계를 회복하고자 요트 여행을 떠났다. 비가 퍼붓고, 배가 흔들리고, 왠지 모르게 스산한 여행을 누구도 상상하진 않았을 테다. 술에 잔뜩 취한 헨리는 비를 맞으며, 그만 들어가자는 안의 말을 모조리 무시했다. 그리고 갑자기 시작된 왈츠. 안은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헨리의 손아귀에 잡혀 마구잡이로 돌고, 휘청이고, 미끄러진다.
헨리는 안의 말을 개의치 않는다. 바람 때문에 목이 상한다는 말도, 이러면 위험하다는 말도. 오히려 그 말에 자극을 받은 듯 움직임은 더욱 과감해졌다. 결국 헨리의 우악스러움을 견디지 못한 안은 바닷속으로 빠지고 만다. 헨리는 그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작은 배를 타고 아네트와 탈출해 몸져눕는다.
달을 바라보는 아네트, 그리고 억울함에 유령으로라도 주변을 맴도는 안. 이제 안의 복수가 시작된다. 다름 아닌 자신의 딸, 아네트의 목소리로.
헨리는 아네뜨에게 줄 선물로 램프를 사 온다. 불을 켜면 방 안에 달과 별이 퍼지는 램프. 그때 아네트는 노래를 부른다. 노랫말보다는 멜로디다. 그 흥얼거림을 듣고, 헨리는 안과 오랜 인연이 있던 지휘자를 데려 온다. 그러니까, 자신의 커리어와 명성이 모두 소멸된 헨리에겐 새로운 기회였던 것이다. 지휘자는 이건 아동 착취라고 거부했지만, 그건 처음뿐이었다. 돈 때문이든, 명성 때문이든, 예술적 호기심 때문이든, 혹은 그 모든 것을 위해서든 아네트를 무대에 세웠다.
아네트는 금세 인기를 얻고, 그 인기의 보상처럼 헨리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아네트의 목소리는 멜로디를 부를 때만 들을 수 있지, 평소엔 어떤 말도 조잘대지 않았다. 장난감 악기를 가지고 놀던 뒷모습은 방과 무대에 갇힌 꼭두각시 같았다.
헨리는 지휘자에게 아네트를 맡겨두고 밖을 떠돈다. 자신의 존재를 알아봐 주고, 환호해 주고, 사랑해 줄 여성들을 만나러. 하지만 헨리는 아무것도 사랑을 하거나 받을 자격이 없다. 이미 자신의 손으로 사랑을 죽였고, 또 다른 사랑은 한 곳에 방치해 뒀으니까.
성공의 궤도에 오를수록 헨리는 불안해진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끝은 또 살인이었다. 아네트는 이 모든 것을 보았다. 그 현장을 제 눈으로 목도하지 않아도 헨리의 살짝 젖은 머리, 눈빛, 숨결에서 느꼈을 테다.
상황의 끝에 다다른 헨리는 갑작스럽게 아네트의 은퇴를 선언한다. 하지만 끝까지 돈벌이를 놓지 않았다. 성대하게 펼쳐진 아네트의 은퇴 전 마지막 공연. 언제나 그렇듯 아네트는 벼랑 끝 같은 구조물에 섰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점이 있다. 아네트는 멜로디를 부르지 않고,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말했다.
Dad kills people.
재판장.
탕. 탕. 탕.
총소리 같은 나무망치 소리.
드디어 마지막. 진짜 아네트를 만날 때다. 많이 변했구나, 한 마디로 마리오네트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아네트. 헨리도 변했다. 확 짧아진 머리. 사람을 죽일 때마다 자신의 턱 끝을 물들던 붉은 상흔도 어느새 꽤 큰 크기로 자리 잡았다.
헨리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며 아네트의 용서를 빈다. 하지만 아네트는 헨리와 안, 모두를 거부한다. 자신을 이용하려고만 했지 진정으로 아껴주고 사랑하지 않았다고. 특히 헨리는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아네트는 눈물을 흘리며 다짐한다. 용서하지 않고, 잊지 않고, 강해지겠다고.
마리오네트는 죽고, 이제 아네트는 교도소 밖, 세상을 살아간다.
숨소리까지 허용치 않던 쇼가 끝났다. 엔딩 크레딧에서 우리는 배웅을 받는다. 어쩌면 그들을 배웅하는 걸까. 우리는 그들이 비춰주는 수많은 달을 보며, 길을 잃지 않고 걸어갈 수 있을 테다. 달이 비추는 건 길이지만, 내가 비추는 건 나여야 한다. 남이 나를 어떤 식으로 보든, 내가 나를 잃는 순간 나의 심연은 괴물의 것이 될 테니까.
'괴물'이라고 해서 교활하고 치명적인 게 아니다. 옳고 그름의 판별 능력도, 상황 파악 능력도, 사랑할 능력도 대상도, 그 무엇도 없는 사람. 그러니까 줄이 달린 인형이 되는 셈이다. 그 줄을 끊는 건 결국 나의 보호자도 아닌 나 자신이고. 이 사실을 홀로 깨우친 아네트가 대견스러울 뿐이다.
*위 글은 씨네랩(https://cinelab.co.kr/)에서 초대권을 받아 참석 후 기고하였습니다.
-
- 「발신제한」영화 예고편 분석 및 리메이크 원작 요약ㅣ발신제한 조우진 지창욱ㅣ레트리뷰션 결말포함X 영화리뷰ㅣ
? "발신제한" 예고편 분석 및 원작영화 결말포함X 영화리뷰
원작영화(스페인) "레트리뷰션" 결말포함X 영화요약
"내부자들" 조우진 "편의점 샛별이" 지창욱 주연#발신제한 #발신제한영화 #발신제한원작
-
- 황보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다! 영화 팜스프링스 리뷰
영화 드라마 모두 마사지하듯 시원하게 이야기로 풀어드립니다! 씨네마사지 ? 씨내랩 크리에이터 자격으로 시사회에 초대 받은 황보! 황보가 먼저 본 팜스프링스는 과연 어땠을까...? *시사회 초대는 영화 전문 플랫폼 [씨네랩]에서 제공해주셨습니다.
-
- 영화 <잘리카투> 30초 런칭 예고편
폭주하는 물소, 광기 어린 인간들, 진정 누가 짐승인가?
푸줏간(도축장)에서 도망친 물소가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닌다. 마을 남자들은 폭주하는 물소를 잡기 위해 나서고 이웃 마을 남자들까지 몰려들자 한바탕 대소동이 벌어진다. 평화롭던 마을은 물소를 제압하려는 남자들로 인해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버리고, 인간과 짐승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 물소 사냥은 점차 무분별하고 폭력적인 광기로 변해간다.
※ 잘리카투(또는 살리카투) JALLIKATTU는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의 수확축제인 퐁갈에서 진행하는 전통있는 집단 경기다. 황소를 남자들 무리 속에 풀어놓으면 참가자들은 황소의 등에 올라타서 최대한 오래 버티거나 소를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는데, 이 과정에서 살벌한 장관이 펼쳐진다. 리조 조세 펠리세리 감독의 <잘리카투>는 잘리카투 경기를 묘사하는 영화는 아니다. 확실히 그렇다!
-
- 영화 <퍼스트 카우> 메인 예고편
19세기 서부 개척 시대,
사냥꾼들의 식량을 담당하는 쿠키는
표적이 되어 쫓기는 킹 루를 구해준다.
몇 년 후 정착한 마을에서 재회한 이들은
마을의 유일한 젖소의 우유를 훔쳐
빵을 만들어 돈을 벌기로 하는데…
“우리에게는 지금이 기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