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1-05-31 15:37:17
북미 박스오피스를 부활시킨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2>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주도하는 ‘북미’ 박스오피스 시장이 돌아왔습니다. 덕분에 할리우드 주요 영화 스튜디오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고 하는데요! 미국의 현충일, ‘메모리얼 데이’는 북미 주요 국경일로써, 가장 큰 수익을 내는 공휴일 중 하나로, 이번 연휴를 노리고 개봉한 두 편의 블록버스터 영화로 인하여 극장이 오랜만에 매우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본 기록이 북미를 비롯한 전세계 박스오피스 시장에서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는, 이번 박스오피스 수익이 팬데믹 이전의 박스 수익과 큰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2>의 전편인 <콰이어트 플레이스>는 2018년 4월 개봉 당시 5020만 달러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하였는데요. 이는 제작비 1700만 달러의 알려지지 않은 영화의 예측하지 못한 흥행이었기에, 제작사는 곧바로 속편 제작에 착수하였고, 전편보다 훨씬 큰 제작비인 6100만 달러를 투자하여 2편을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극장 매출을 개봉 일주일 만에 벌어들인 것이죠.
<콰이어트 플레이스 2>와 같은 날 개봉한 디즈니의 <크루엘라>의 경우, 북미에서는 자사 OTT 플랫폼인 디즈니+와 동시 개봉을 택했는데요. 디즈니+에서 극장 티켓가보다 비싼 30달러에 대여되고 있는 <크루엘라>는 OTT와 극장으로 관객이 양분된 상황 속에서, 오프닝 스코어 2130만 달러 (약 237억 원)을 기록하며 분전하였습니다.
현재, 약 75%의 극장이 가동되고 있는 북미 시장은 극장 좌석 수가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힘겹게 극장을 지켜가고 있습니다. 한 미디어 분석가에 의하면 “본 연휴를 맞아 개봉한 두 편의 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 2”, “크루엘라”)는 관객들의 대작에 대한 꺼지지 않은 관심을 다시 한 번 알아볼 수 있는 계기였다”고 하는데요. 국내에서도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가 개봉 2주 만에 관객 수 200만에 육박하는 기록을 써가고 있는 걸 보면, 개봉이 연기되고 있는 블록버스터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기세를 몰아 <컨저링 3: 악마가 시켰다> (6.4 북미 개봉), <인 더 하이츠> (6,11 북미 개봉), <히트맨의 보디가드 2> (6.16 북미 개봉), <분노의 질주: 더 얼티메이트> (6.25 북미 개봉) 등 매주 각 영화사의 텐트폴 영화들이 줄지어 개봉될 예정인데요.
북미뿐 아니라, 전 세계 박스오피스가 가장 활발한 ‘여름’ 시장이 올해는 정말 ‘활발’할 수 있길 바라며,
오늘 하루도 영화로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씨네랩 에디터 Cammie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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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얼리티를 이길 서사는 없다
이 다큐멘터리는 부국제에 갔다가 운좋게 보게 되었다. 뭐든 정보가 없어야 충격이 배가 되는 것일까. 영상물은 한 사람의 삶을 엿보는 것 조차 제작자의 입맛에 의해 편집될 수 있기에 그 입맛이 간파되는 순간 다큐는 매력이 반감될 때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신파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 부국제에 갔을 당시 다큐가 시작하자 다소 실망하기도 했었다. 울음바다가 될 극 속에 날 밀어넣었구나 싶어서. 그런데 상황은 반전된다. 그 곳에서 나도 찔끔 눈물이 날 뻔했기 때문이다.
1. 서사의 8할은 기법이 아닌 메시지
이 다큐는 여러 가족의 탈북기를 그린다. 모든 사람들이 탈북에 성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성공한다고 해도 죽음을 무릅써야함을 굳이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하나의 국경을 건너야 하는 일도 아닌데다가 중국의 공안들의 습격, 신분증이라도 검색하려고 하면 바로 걸릴 수 밖에 없으니 브로커를 따라가야 한다. 하지만 브로커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에 이들을 버리고 갈 여지도 있어 마냥 선인으로만 생각해서도 안된다.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세계임을 알 수 있다.
신파를 싫어하는 나도 탈북의 성공 여부에 따라 울컥하게 되더라. 이런 나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신파는 어쩌면 클래식과도 비슷한 말이지 않을까. 클래식한 소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있지만 잘못 건드리면 감정 과잉으로 이어져 진부해지니 신파라는 멸칭으로 한순간에 변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다큐처럼 소재 자체로 눈물을 유발하는 내용인 경우 카메라는 최대한 무미건조하게 찍어내야 하는 것 같다. 그저 카메라는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관객에게 알려야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더 빛나는 것 같다.
2. 모든 기법이 완벽하지 않아도
탈북이라는 단어를 한 번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다면 이 과정은 익히 알려져 있기에 이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걸까 싶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다큐의 진가는 모든 촬영이 날 것 그대로라는 점이다. 탈북 과정에서 위험한 순간들은 밤이든 낮이든 언제든 들이닥칠 수 있고 장소도 불문이다. 그런 상황을 찍어내야 하기에 한 밤중의 밀림을 조명도 없이 찍고 하다보니 그 과정에서 사람이 다치는 것도 눈이 아닌 소리로 캐치할 수 밖에 없다. 이 다큐의 시각적인 효과는 별게 없다. 어둡고 사람의 형체도 안보이는 것도 다반사이고 화질 그런 것은 별 소용이 없다. 하지만 시각적인 완벽함을 제외하니 소리가 들리고 더 상황에 몰입하게 된다
한 가족의 탈북기는 카메라로 직접 찍어내지는 않고 그저 북한에 있는 아들을 탈북시키려는 남한의 어머니와 브로커의 대화를 그저 듣는 형식이다. 그 가족의 경우 탈출 상황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황이라 상황이 잘못되는 순간 더 철렁하게 된다. 영화처럼 위기가 감지된다거나 하는 징조 전혀 없이 아침에 일어났더니 별안간 연락이 안되고 어디 잡혀간 것은 아닐까 더 노심초사하게 된다.
역시 인간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것은 특정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부 주지 않고 일정한 결핍을 제공할 때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총평
세상 모든 장르, 심지어 로맨스조차 현실에서 느낄 법한 사랑이야기여야 공감받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리얼리즘을 표방하더라도 리얼리티를 이길 내러티브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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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니엄의 환희와 청춘의 질감에 관한 인상적인 스케치
술 냄새가 난다. 담배 냄새가 난다. 땀 냄새가 난다. 정돈되지 않은 지저분한 집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약 냄새가 난다. 제대로 닦아내지 않은 정액 냄새도 문득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것 같다. 시끄럽다. 클럽 음악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진동이 내내 쿵쾅거린다. 싸우는 소리가 난다. 불평하는 소리가 난다. 서로를 원망하는 소리가 난다. 홀로 신세를 한탄하는 소리가 난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소리가 난다. 저주하며 울부짖는 소리가 난다. 청춘의 냄새, 청춘의 소리다. 이 지독한 냄새와 소리 속에서, 여성 청년 비키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한다.
2001년의 대만, 고등학교를 중퇴한 비키는 남자친구 하오하오와 동거 중이다. 하오하오는 ‘예술적 퇴폐’를 지향하는 남성이 갖고 있는 쓰레기 같은 전형성을 고루 갖추었다. 돈을 벌지 않고 여성의 노동에 의존한다. 아버지의 롤렉스 시계를 훔쳐 경찰 조사를 받을지언정 결코 직접 노동하는 법은 없다. 하오하오는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집의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비키를 의심한다. 그녀가 바람을 피운다는 망상이다. 자신이 노동하면 비키가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상한’ 하오하오는 이런 가능성을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하오하오는 클럽 음악을 만들고 친구들과 술 마실 때만 생기가 돈다. 가끔 욕구가 일어 다짜고짜 비키에게 관계를 요구할 때만 다정해진다. 자기 신세의 비참함에 심취해 마약을 하고 이를 말리는 비키를 경멸한다. 그렇다. 하오하오는 자신의 자발적, 의도적 비루함을 예술가의 고난으로 오독한다. 비키의 몸과 돌봄, 노동에 극단적으로 기생하면서도 그녀에게 군림하려 든다. 치가 떨릴 만큼 익숙한 인물이다(이상의 〈날개〉를 떠올려보라).
소란 끝에 비키는 하오하오를 떨쳐낸다. 그러고는 클럽 관리자 격인 잭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한다. 잭은 책임감이 있고 점잖다. 하오하오가 갖추지 못한 것을 가졌다. 그는 비키에게 안정감을 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으로 떠난다. 비키는 그가 남긴 흔적을 쫓아 일본에 따라간다. 잭은 그녀를 위해 숙소를 잡아주었고, 편지를 남겼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비키는 끝내 잭의 비밀에 다가가지 못한 채 혼자 남는다. 잭에게는 비키와의 관계보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음지의 일을 처리하고 관리하는 게 더 중요하다. 두 남자가 떠나간 후, 비키는 그제야 홀로 선다.
비키를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도대체 왜 저런 남자들이랑 붙어 있냐’라는 책망은 그 욕망의 소유자도 적당한 답을 내놓을 수 없는 물음이다. 우리 모두는 종종 알 수 없는 동기로 이해 못 할 선택을 내린다. 문제는 선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혼란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다. 욕망과 충동의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 후과를 알맞게 갈무리하는 것이 성인의 자격이다.
불쾌한 냄새와 소음으로 가득 찬 비키의 2001년은 지극한 성장통의 시기였다. 하오하오는 비키가 자신을 떠나려 할 때마다 애원하며 그녀를 붙든다. 그는 자신이 쓰레기인 것을 안다. 만에 하나 ‘예술가’로 성공하면 미련 없이 비키를 버리겠지만, 그 희박한 가능성이 현실로 도래하기까지는 기생할 상대가 필요하다. 그런 자신을 품어줄 여자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아는 하오하오는 그래서 비키에게 더더욱 매달린다. 비키는 이를 관계의 특별함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하오하오의 곁에 머물렀다. 잭은 상대적으로 비키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그녀와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지는 않는다. 비키는 잭에게 사랑의 대상이 아닌 친밀한 타자일 뿐이다.
세상의 떠들썩한 환호와 함께 맞이한 새로운 밀레니엄은 비키에게 지리멸렬한 현실의 연장에 불과했다. 오히려 모두가 희망적인 미래만을 말했기에 비키가 살아가는 현재의 형편없음이 더욱 극화되었다. 2001년 겨울, 비키는 하오하오와 잭을 거친 후에야 자신만의 뒤늦은 밀레니엄을 마주한다.
영화는 내내 명멸하듯 깜빡거리는 불빛과 뿌옇게 번진 빛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카메라에 담긴 대상의 경계를 명확하게 인식하기 어렵게 만드는, 많은 것을 뒤엉켜 보이게 하는 이 이미지들은 청춘의 열악한 삶을 환기하는 시청각적, 후각적 자극과 맞물려 비키가 살아가는 현실의 혼탁함을 구체화한다. 비키가 문제적 남성들을 떨쳐내고 하얗게 눈 덮인 일본의 한 마을에서 마침내 혼자가 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곳곳에 쌓인 하얀 눈은 어둡고 음습한 방의 뿌옇고 경계가 불분명한 혼탁한 이미지들을 단번에 무력하게 만든다. 일상적 장소에서의 이탈은 종종 시공간의 감각을 새로이 배열하여 기존의 감각을 성찰할 자원이 되어주고는 한다.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두 남자에게 연루되어 고통받던 비키는 이 극명한 빛의 대비와 일상적 시공간에서의 이탈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할 계기를 마련한다. 두 남자로 상징되는 벗어날 수 없는 폭력적 수수께끼를 뒤로하고 밀레니엄의 환희에 뒤늦게나마 동참하는 것이다.
*영화 매체 〈씨네랩〉에 초청받은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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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브리 정주행 특집 ③] 코쿠리코 언덕에서 (From Up on Poppy Hill, 2011)
- 지브리 정주행 특집 세번째 영화 -
"오래 됐다고 없애는 건 과거의 기억을 버리는 거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 죽는 걸 무시하는 거라고!"
코쿠리코 언덕에서, 2011
과거에 남겨져있는 우리들의 낭만을 위하여!
시간이 지나면 지금 이 순간도 낭만으로 기억되는 걸까?
<코쿠리코 언덕에서>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 Synopsis
바닷가 마을, 코쿠리코 언덕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우미'는 바다로 나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매일 깃발을 올린다.
그리고 '슌'은 매일 아침 등교하는 배에서 언덕 위 깃발을 바라보며 답신을 하듯 따라 깃발을 올린다.
한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일본에서는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자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
학교에서는 낡은 동아리 건물의 철거 명령이 내려오고, 우미와 슌 그리고 학생들은 역사와 추억이 담긴 동아리 건물을 보존하기 위해 운동을 벌이고 청소를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우미와 슌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키워가던 중, 우연히 우미의 사진첩을 보다가 서로의 아버지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좋아하는 감정을 이대로 계속 키워가도 좋을지, 고민하고 혼란에 빠진다.
▶ Review
1. 우리들이 사랑했던 그때 그 선배...?
개인적으로는 <귀를 기울이면>의 세이지보다 이 작품 속 슌이 첫사랑의 이미지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학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기 많은 선배 st...
학교 동아리 건물에서 필사를 하다가 우미를 돌아보는 장면이랑 롤러로 드사판을 밀어 신문을 복사하는 장면은 첫사랑 기억을 조작하기 충분했다.
2.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꿈꾸는 우리들
극 중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낡고 오래된 동아리 건물!
학교 이사장은 낡은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짓겠다고 하는데,
깨어있는 학생들은 과거가 있어야 현재도 미래도 있다며 철거 반대 운동을 한다.
나는 일상에서 등장하는 판타지적 요소를 좋아하는 편이다.
다시 말해, 배경도 인물도 전부 현실적인데 현실적으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 일어나는 것들.
예를 들면 아주 운명적인 인연이라던가... 아주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고 사는 집이라던가...
이 작품에서는 이 동아리 건물과 동아리부 학생들이 그랬다.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열정적으로 동아리 활동에 임하지 않았고
그저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하는, 또는 대학을 가기 위한 수단 정도에 불과했다.
이 작품에 나오는 학생들은 동아리 활동에 아주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동아리 건물도 다닥다닥 상점마냥 붙어서는 각각의 특성을 자랑하는 게 꽤 매력적이었다.
철거를 반대하기 위해 다같이 애정을 가지고 힘을 모아 동아리 건물을 청소하는 것도 그렇고...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꽤 판타지스럽게 다가왔다.
어떤 일이든 어떤 분야든 열정을 가지고 빠져드는 건 너무나 매력적인 것 같다.
그리고 과거를 기억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좋았다.
겉으로 보기 좋은 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가치가 변한다.
변하지 않는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우리는 항상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할 때 각각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
3. 막장 아닌 막장? 그때라서 그럴 수 있었던 오해들
이 작품에서는 막장 아닌 막장 요소가 나오는데, 바로 막장드라마의 단골 요소인 '이복남매' 설정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두 사람은 이복남매가 아니었는데
항해를 하다 죽은 친구를 위해 친구의 아이를 대신 키워주게 된 데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일부러 그렇게 그린건지는 몰라도 우미와 슌 두 사람 굉장히 닮았다...!!)
우리나라만 해도 예전에는 아이가 바뀌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고,
친구들이나 이웃끼리 교류가 많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을 생각했을 때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특히)한국인에게는 굉장히 익숙하고 진부한 설정인지라 보면서 읭??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아버지 세대의 세 사람의 우정은 보기 좋았다.
p.s 사실 보면서 읭??하게 되는 요소는 하나 더 있는데 바로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이 잠깐 등장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우미의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문에 죽은 피해자로 나오는데
사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려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게 불편한 건 사실이다.
단 한 마디 대사일 뿐이고 그 이상의 언급이 없긴 했지만 보면서 이미 찝찝해진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 Best Quotes
1.
오래됐다고 없애는 건 과거의 기억을 버리는 거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났다 죽는 걸 무시하는 거라고!
새로운 것에 매달려 역사를 무시하는 너희들에게 무슨 미래가 있지?
소수자 의견을 듣지 않는 너희들은 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어!
2.
내가 매일 깃발을 올리면서 아빠를 불렀기 때문에
아빠가, 아빠 대신...
선배님을 보내주셨다고 생각해요.
3.
- 자네들은 여기서 뭐하고 있나?
- 네! 10년간 태양의 흑점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 오호, 10년이라... 그래서 뭐 좀 알아냈나?
- 태양의 수명은 길고! 인간의 인생은 짧고! 아직 아무것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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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는 얼굴이 그립다.
소꿉놀이, 공놀이, 곰인형놀이, 아이스크림 가게놀이, 공주놀이, 잡기 놀이... 끊이지 않는 놀이는 결국 2시간을 채웠다. 허리가 아프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가 놀아주는 건지, 하늘이가 날 놀아주는 건지, 곰인형이 우리를 놀아주는지 분간이 안 되는 그때 자리에 슬그머니 눕기 시작했다. 눈치 빠르고 예리한 딸아이가 말한다.
“아빠 또 놀자.”
정말 신기하고 신비할 정도로 놀이에 몰입한다. 노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호모 루덴스”.
바로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 유희적 존재라는 것이다.얼마나 멋진 말인가. 인간의 다양한 정의 중에 정말 마음에 들고, 인간의 본질을 너무 잘 파악하는 말이다. 슬프게도 내 인생의 30대는 놀이를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10대, 20대.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놀았던 나. 삶에 점점 치여, 빠르고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놀이라는 단어가 어색해졌다. 과거 친구들과 놀다가 찍혔던 사진 속의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봤다. 살아있음. 생기. 활력. 그것들이 느껴졌다. 부러웠다. 사진 속에 놀고 있는 내가 부러웠다.
그 얼굴을 덴마크 할아버지 얼굴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얼굴에 주름이 그득하고 흰머리 가득한 그는 재밌게 놀면서 집을 짓고 있었다. 그는 그것도 레고(Lego)를 가지고 12000 제곱미터 면적에 외관과 내부를 레고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즐거움과 기쁨, 그리고 생기와 활력이 가득했고, 무엇보다 꿈을 이루어가는 표정이었다. 그가 바로 레고 창업자의 손자이자 경영자인 켈 키르크 크리스티안센이다. *(현재 CEO는 닐스 B. 크리스티안센이다.)
사실 레고의 시작은 1932년 그의 할아버지가 나무 장난감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업의 이름을 덴마크어로 '잘 놀다'라는 뜻의 'leg godt'를 착안하여 “레고”로 만든 것이다.
다큐멘터리 <레고 하우스>는 이런 전 세계 ‘레고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레고로 만든 집을 꿈꿀 텐데 그것을 실현해 가는 모습들을 잘 담아내고 있다.
“지금까지의 레고 놀이 중에 최고가, 이번 레고 하우스 설계였다.”
레고 하우스의 설계자 비아케 잉겔스라는 레고하우스 설계소감을 이처럼 말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레고하우스를 만들어가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과정을 꿈의 실현이자, 놀이의 모습처럼 나타내고 있다. 쉽지 않은 건축 과정과 내부의 아이디어들 하나하나를 놀이로 여기고 그것 이루어가는 과정이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느껴지도록, 보는 내내 함께 흥분하게 되고, 함께 놀게 된다.
<레고하우스> 초기 설계 모습
다큐멘터리가 끝나고, 한참뒤에 또 나는 이 다큐멘터리를 찾아봤다.
그리고 최근에 한번더 봤다.
나는 스스로 물었다. '나는 왜 이 다큐멘터리를 세번이나 보고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 아저씨들과 할아버지의 노는 모습, 노는 얼굴이 부러워서 일찌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즐겁고, 재밌게 놀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노는 얼굴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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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제된 악의 미학
영화사에서 가장 인상깊은 악역 캐릭터로 빠지지 않는 그 이름, 한니발 렉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는 그는, 영화 속에서 신입 FBI 요원 클라리스 스털링과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하며 범죄 심리 스릴러의 정점을 찍으며 동시에, 둘 사이에 미묘하게 흐르는 애틋함은 이 영화를 더욱 깊이 있는 작품으로 만든다.
살아숨쉬는 캐릭터의 품격
주인공 클라리스 스털링은 FBI 연수생으로,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을 추적하는 임무를 맡는다. 하지만 그녀가 범죄자를 추적하던 중 자신의 과거와 겹쳐 보이게 되고, 한니발 렉터 박사에 의해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안겼던 사건을 꺼내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자신이 지키지 못한 양들의 울음소리에 트라우마에 시달려온 그녀는 과거를 마주하고, 피해자를 구출함으로써 과거의 상처를 극복했다. 영화는 스털링의 내면을 세밀하게 조명하며, FBI와 범죄자의 세계에서 자신 내면과 싸우며 극복하고 한니발 렉터의 주도권을 서서히 잡아가며 성장하는 모습을 그리며 입체적인 캐릭터로 인상깊게 남는다.
한니발 렉터는 잔인한 식인 살인마이면서도 품격과 예의를 갖추었으며, 뛰어난 지적 능력까지 지닌 인물이다. 그의 대사는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상대의 심리를 꿰뚫는 면도날 같은 질문이며, 그를 마주한 순간 상대는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내면의 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렉터는 등장하는 장면마다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며, <양들의 침묵>을 단순한 스릴러에서 심리적 탐구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연출 중 하나는 한니발과 스털링의 관계다. 렉터는 스털링을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그녀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그녀를 조롱하거나 협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스털링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직면하고 성장하도록 유도한다. 두 사람은 감옥이라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며, 그 안에서 위험하면서도 은근한 신뢰가 싹튼다. 첫 만남은 신인 스털링을 한니발을 아래로 내려다봄으로써 상하관계가 형성되었지만,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한니발과 클라리스는 수평적인 관계이자 클라리스가 주도권을 가진 관계로 발전한다. 스털링은 렉터를 경계하면서도 그의 조언을 따라 사건을 해결하는 단서를 얻으며, 렉터 역시 그녀에게 흥미를 느끼고 독특한 방식으로 돕는다. 이러한 긴장과 협력의 균형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다.
웰메이드 범죄 스릴러
‘양들의 울음소리’는 그녀가 외면하고 싶었던 트라우마를 상징하며, 결국 그녀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는 외부의 범죄자가 아니라 내면의 상처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리고 한니발 렉터는 인간 내면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형상화한 존재다. 그는 살인마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버팔로 빌보다 훨씬 정제된 지성과 매력을 갖춘 인물로 그려진다. 이러한 대비는 악(惡)의 다양한 형태를 보여주며, 선과 악의 단순한 이분법을 허물어버린다.<양들의 침묵>은 공포와 긴장을 넘어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심리적 여정이다. 클라리스 스털링의 상처와 성장, 그리고 한니발 렉터라는 미스터리한 존재의 이중성은 매력적인 스토리로 살아숨쉰다.
변화를 원하는 것은 버팔로 빌뿐만 아니라 클라리스 스털링 그리고 한니발 렉터 또한 마찬가지다.
한니발과 클라리스는 서로가 서로를 만남으로써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번데기에서 나방으로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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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거부로서의 애도,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2015년 퓰리처 희곡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른 『Marjorie Prime』은 유족의 기억을 통해 망자의 정체성을 재현하는 인공지능 홀로그램, ‘프라임’을 중심으로 디지털 시대 죽음과 애도의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는 작품이다. 동명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Marjorie Prime> 또한 기억이라는 삶의 요소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맞물려 다양한 애도의 방식으로 분화되는지 다룬다.
그러나 '디지털 부활'은 더이상 픽션의 영역이 아니다. 2016년, 러시아 기자였던 Eugenia Kuyda는 사랑하던 연인을 잃고 그와 나눈 메시지를 모두 모아 구글 기반의 신경 네트워크(neural network)를 활용하여 그를 챗봇으로 부활시켰다. 챗봇 버전의 연인은 정말 사람 같아서 Kuyda는 챗봇과 과거와 미래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연인을 잃은 슬픔을 해소했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이 쓸 수 있는 대화형 챗봇, ‘Replika’를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2020년부터 매년 사망한 가족을 딥페이크, VR, 인공지능 등의 기술을 활용하여 ‘부활’시키는 <VR휴먼다큐멘터리-너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2025년 현재, 구글 플레이 스토어 기준 ‘Replika’의 다운로드 수는 천만 회를 넘어섰고, <너를 만났다> 프로그램 시즌 1 유튜브 클립 영상 조회 수는 3천 6백만 회를 기록하는 등, 디지털 부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망자를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디지털 부활'이 점점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고인이 된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과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부활을 가속화하고 있다. 조형래는 “망자를 기리는 첨단의 기술적 방식이 막대한 규모의 사회적 정동의 재구성을 초래하고, 죽음에 대한 사회적 태도 및 문화적 관행 전반에 영향을 초래할 것임이 분명”하다면서, “이러한 초혼(招魂)의 테크놀로지가 프로이트적 의미의 애도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더 나아가 유족들에게 끊임없는 추모의 고통을 유발”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반면 디지털 시대 죽음의 의미를 연구하는 심리학자인 일레인 카스켓은 디지털 기술을 통한 애도가 지속적 결속(continuing bonds)의 한 종류라고 주장하면서, 고인과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는 이들을 우울증 환자로 취급하는 경향을 문제시한다. 카스켓에 따르면, 고인과 유대 관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사랑하던 고인과 맺은 심리적, 정서적 유대를 소중히 하거나 심지어 더 강화하고자 하는 오래된 충동에 따르는 것뿐이다.
영화는 마조리가 월터 프라임, 그러니까 15년 전 사망한 자신의 남편을 홀로그램으로 재현한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월터 프라임은 자신이 청혼하던 날 함께 봤던 영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얘기를 꺼내고,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중요한 기억을 잊어버린 자신을 원망하던 마조리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대신 “<카사 블랑카>를 보고 돌아온 날 청혼했다면?”이라고 묻고, “다음에 우리가 (청혼) 얘기를 나눌 때는 이게 사실이 되는 거야.”라고 말한다. 어차피 거짓된 기억을 말해도 치매로 인해 사실 여부를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마조리는 이후로도 종종 월터 프라임에게 왜곡된 기억을 요청함으로써 망상적 위안을 얻는다.
생의 끝자락, 기억을 왜곡해서라도 숨기고 싶은 과거는 월터 프라임이 예전에 키우던 강아 지인 토니 얘기를 꺼내면서 분명해진다. 월터 프라임은 마조리에게 ‘자식이 없던 한 연인이 토니라는 이름의 검은색 푸들을 키웠는데, 토니가 죽고 나서 낳은 딸-테스-도 검은색 푸들을 골랐다’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마조리가 두 번째 푸들에게 ‘토니 2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설명하자, 월터 프라임은 두 번째 푸들도 금방 ‘토니’라고 불렸다며, 두 강아지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음에도 나중에는 토니와 토니 2세를 구분하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여기서 토니는 -2막에서 등장하는 앵무새와 마찬가지로-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프라임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첫 번째 토니를 죽이고 자살한 마조리의 아들, 데미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월터 프라임이 토니의 죽음을 설명할 때 마조리가 흘리는 눈물은, 키우던 강아지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대면한 자의 눈물로 해석할 수 있다.
프로이트는 「애도(슬픔)와 우울 Trauer und Melancholie」에서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으로 규정하고, 여기에는 “사랑하던 사람을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 그리고 사랑하던 이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행동도 금하는 것, 등이 포함된다”라고 설명한다. 달리 말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자아의 억제’를 통해 상실 그 자체 외에 다른 곳에는 관심을 둘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슬픔(애도)이 “사랑하던 대상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인식하고 그 대상에 부과되었던 리비도를 철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반발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이 너무 강하게 되면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아예 “현실에 등을 돌리는 일이 일어나게 되고, 환각적인 소원 성취의 정신병을 매개로 예전의 그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프로이트는 이렇듯 정상적 애도에 실패한다면 상실이 자아를 잠식하고 이것이 자기 혐오적 우울증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하지만, 대상의 상실이 극단적인 트라우마인 마조리의 경우, 자기 혐오적 우울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격리하려는 억압(repression)에 가까운 행동을 보인다.
“정신적 트라우마 현상의 핵심은 기억(표상)과 정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를 유발한 사건에 대한 강한 정동적 반응이 있었는지다. 달리 말해, 외상적 사건이 유발한 정동을 언어, 또는 행동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정동의 잔여가 정신적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트라우마적 사건의 상기(회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데미안의 죽음이 마조리에게 트라우마를 유발한다면, 이는 데미안에 대한 애도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미안이 사랑했고, 데미안이 죽인 토니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조리는 강한 정동을 경험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표상(기억)의 회고는 마조리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그래서 마조리는 데미안을 충분히 애도하는 대신,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의 억압을 택한다.
마조리는 지난 50년 동안 데미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그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집에서 치운 채 살아왔다. 하지만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데미안이 죽었다는 사실을 잊고 테스에게 “데미안은 지금 자?”라고 묻는다. 마조리가 치매를 앓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데미안의 행방을 물은 직후 월터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프란 색의 깃발을 바라보던 기억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마조리의 모습은 모순적이다. “(벤치에서) 일어나기 싫었어.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라는 마조리의 대사는 데미안의 죽음 이후에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마조리의 처참한 심정을 대변한다. 이것은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표상 (기억)이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정동의 잔여를 의미한다.
존은 마조리가 해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월터 프라임에게 마조리가 사프란 깃발을 바라봤던 날의 추억을 전해주지만, 영화는 플래시백 장면을 통해 마조리가 사실 공원 벤치가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아 TV에 나온 장면을 봤던 것임을 밝힌다. 테스의 주장처럼, 마조리는 “원래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며” 따라서 기억은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과 같은 것이 된다. 결국 프라임에게 주입되는 기억은 “실제 기억이라기보다는 마조리가 기억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과거”이다. 이렇듯 마조리와 월터 프라임을 통해 재구성되는 기억은 특정 시선에 의해 오염된 기억이며, 따라서 데미안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을 방해한다.마조리에게 데미안의 죽음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기억이기 때문에 마조리는 본능적으로 이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확연한 간극이 생길 때 발생”한다며, “억압의 본질은 자아를 위협하는 본능(충동)을 의식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억압의 동기와 목적은 본능이 만들어낸 “불쾌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트라우마가 해소되기 위해선 “억압의 극복과정을 통한 기억의 회복”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아들의 자살이라는 트라우마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치매에 걸린 마조리는 월터 프라임의 외형을 아들이 자살하기 전인 젊은 시절로 설정하면서 아들 죽음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고자 하는 충동을 보인다. 아들을 충분히 애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죽음을 잊고자 하는 마조리의 태도는 현실 도피적 성향을 띤다는 점에서 월터 프라임이 제공하는 망상적 위안을 통해 유지된다.
월터 프라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마조리조차도 망자와 망자를 재현한 인공지능 사이의 간극이 촉발하는 ‘두려운 낯섦’을 겪는다. 두려운 낯섦은 “공포감(또는 기이한 불안)의 일종으로,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오래전부터 친숙했던 것에서 출발하는 감정”이다. 이정환은 프로이트가 말한 ‘두려운 낯섦’이라는 개념이 로봇 공학과 관련된 논의에서 흔히 들을수 있는 “불쾌한 골짜기”와 연관이 있다고 설명한다. 두려운 낯섦에 대한 프로이트의 주장 처럼, 불쾌한 골짜기에 대한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비인간에 대한 인간의 무의식적 두려움”이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프라임이라는 ‘기술’에 호의적이든, 그렇지 않든,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랑 하는 사람을 재현한 프라임과 마주했을 때, 프라임이 자신이 생각했던 망상적 위안을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왜곡된 기억을 그대로 흡수하고, 젊었을 적 외형이 데미안의 죽음 이전을 상기하는 월터 프라임을 통해 데미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억압 하는 마조리조차도, 월터 프라임이 월터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자신이 생각한 실재의 이미지를 프라임이 충분히 재현하지 못할 때, 프라임은 망자의 말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앵무새에 불과한 존재가 된다.
이정환은 대상의 기억을 주입하면, 프라임을 통해 그 사람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만, 이 기억은 살아 있는 자의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에서 실재 망자와는 다른 결핍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생전에 사랑했던, 친숙한 망자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망자와는 다른 프라임의 모습은 유령과도 같은 두려운 낯섦을 유발한다. 허구의 작품뿐만 아니라 현실속 디지털 부활 또한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는 건 매한가지다. 조형래는 디지털 기술을 통한 망자의 재현은 늘 “고인에 대한 추모와 의미 부여를 둘러싼 다양한 상호작용을 거스르는 미묘한 위화감을 수반한다”라고 설명한다. 이렇듯 작품 안팎에 무관하게, 기술적 한계는 감각적인 측면에서도, 인지적인 측면에서도 대상을 완벽히 재현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늘 기이한 불안, 두려운 낯섦, 즉 불쾌감을 유발한다.
테스에게도 데미안의 죽음은 평생의 트라우마이다. 마조리는 평생 데미안의 이름 한 번 꺼낸 적 없지만, 테스는 늘 데미안의 죽음으로 인해 마조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외상은 테스의 자아에도 영향을 미쳐 영화 내내 테스는 “예민하고 성마른 성격의 소유자이자,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으로 묘사된다. 테스는 월터 프라임에게 질투를 느낄 정도로 프라임에 대해 부정적이지만, 결국 마조리가 사망하자 치유의 도구로서 마조리 프라임을 소환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토니 데리고 해변에 갔던 거 기억하니?’라고 묻는다. 테스는 기억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존이 개를 키우자고 제안했다면서, ‘카타훌라’를 고려하고 있다고 말한다. 생전 마조리는 ‘카타훌라’가 무엇인지 몰랐으므로, 마조리 프라임 또한 테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자 테스는 마조리에게 “‘카타훌라’를 검색해 보라”고 요청한다. 이는 프라임이 진정한 ‘대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의 환상이 필수적임을 의미한다. 달리 말해, 이것은 프라임의 ‘이용자’가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는 한, 프라임과의 대화가 어떠한 치유 효과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라임이 환상에 불과하다면, 프라임과의 모든 상호작용 또한 결국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의 요청에 따라 카타훌라 하운드의 사전적 지식을 로봇처럼 읊고, 테스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며 ‘(마조리 프라임이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진짜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모른 척을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한다. 테스는 이어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엄마 같다가도, 어떨 때는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연하다’라고 말한다. 이미 지와 실재의 간극은 이렇듯 과거가 아닌 현재의 기억으로 인해 명확해지며, 테스로 하여금 ‘엄마처럼 친숙하지만, 엄마가 아닌’ 두려운 낯섦을 느끼게 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이 두려운 낯섦으로 인해 프라임이 어떻게 치유의 실패로 이어지는지 묘사한다.
표면적으로 테스는 엄마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지만, 그의 근원적인 트라우마는 마조리와 마찬가지로 데미안의 죽음이 원인이다. 마조리 프라임은 ‘진짜 엄마 같지 않다는’ 테스의 불만에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말하고, 이는 자연스럽게 테스가 엄마의 기억을 회고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마조리 프라임이 ‘테스 말고 다른 자식이 있었냐’고 묻자, 테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없었다’라고 대답한다. 생전 마조리가 평생 데미안을 언급하지 않았던 것처럼, 테스 또한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숨기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반드시 생생한 정동적 경험을 포함하여, 망각된 외상적 사건을 기억해 정확히 말로 표현”할 때야 비로소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트라우마의 심리적 치유를 위해선 단순한 외상적 사건의 재현을 넘어선 생생한 재경험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프라임은 얼마든지 남아있는 자들에 의해 왜곡된 기억만을 선별적으로 저장할수 있으므로, 치유의 ‘도구’로서 프라임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없다. 기억의 선별과 왜곡된 기억이 유발하는 이미지와 실재의 간극, 즉 두려운 낯섦은 심리적 치유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라깡은 “욕망의 중심에 놓여있는 결여”를 ‘'대상 a'’라고 지칭하면서, 상상계적 질서 속에서 이 대상은 어떤 욕구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테스는 마조리 프라임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자신이 원하는 어떤 환상을 프라임에게 투사한다. 이 환상은 데미안의 죽음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에게 늘 다정하고 충분한 사랑을 주는 엄마이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이 정말 테스에게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말을 건네자, 테스는 ‘덜 웃어야 엄마 같아 보인다’라고 충고한다. 테스의 '대상 a'-엄마의 사랑이라는 욕망의 결여-를 충족하기 위해서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생전에 주지 못했던 사랑과 다정함을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사랑을 주면 줄수록 ‘진짜’ 마조리와는 멀어진다는 점에서 테스의 환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애증의 대상이자 환상 속 '대상 a'인 엄마의 상실은 테스를 우울로 이끈다. 프로이트는 우울과 슬픔의 차이를 ‘자애심의 추락’으로 설명한다. “우울증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을 들으면 그것이 자아와 관련된 상실감이라는 것이다.” 테스는 계속해서 마조리와 존의 입을 빌려 자기 자신을 ‘무너졌다’거나, ‘엄마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표현한다. 마조리에게 향해 있던 애증의 리비도가 마조리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고 테스의 자아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라도 챈 듯 마조리 프라임은 테스에게 ‘자기 자신에게 너무 가혹하게 굴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조리 프라임과 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애도의 실패-우울증은 결국 테스를 자살이라는 파괴 충동으로 이끈다.
프로이트가 정상적인 애도, 달리 말해 상실을 극복하고 애도를 마무리하는 ‘작업’을 중시했던 까닭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 자아를 좀먹고 파괴 충동으로 이끄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정상적인 애도와 비정상적 애도를 구분하는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을 비판하면서, 죽음이 타자를 잊는 여정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를 기억하는 여정의 시작이라고 주장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프로이트의 정상적인 애도가 갖는 문제는 타자의 타자성을 말살하려 한다는 데 있다. 성공적인 애도 작업을 통해 내면화가 가능해지면, 타자는 나의 일부가 되는데, 그렇게 되면 타자는 더는 타자가 아닌 것이 되기 때문이다.”
마조리에 대한 테스의 정동-상실감으로 인한 우울, 사랑, 증오-은 너무 강력해서 테스는 자신의 편협한 시선에서 기억하는 마조리의 모습-약간 허영심이 있고, 까칠하며, 자신에게 한번도 사랑한다고 해준 적이 없을 만큼 데미안을 사랑한-만을 회고한다. 마조리 프라임은 이렇듯 테스의 내면화된 타자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다는 점에서 테스에게 두려운 낯섦을 유발하고, 프로이트식의 ‘정상적인 애도’를 완수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애도의 실패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애도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성공과 실패의 반복적 진동 속에서 수행 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테스의 자살 이후, 존 또한 테스 프라임 앞에서 두려운 낯섦을 느낀다. 평소에도 프라임에 호의적이었던 존은 테스 프라임을 더 진짜 테스처럼 만들기 위해 적어두었던 테스의 특징들을 테스 프라임에게 읊어준다. 하지만 존 또한 이내 ‘(프라임은) 반사판 (Backboard)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나는 지금) 혼잣말을 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테스 프라임과의 대화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좌절된 내면화’는 “타자를 타자로서 존중하는 것, 즉 부드러운 거부의 자세”를 의미한다. 프라임에게 아무리 왜곡된 기억을 주입한다고 해도, 프라임이 환상 속 ‘대상 a’를 완벽하게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남아있는 자는 필연적으로 이미지와 재현의 간극으로 인한 두려운 낯섦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려운 낯섦이 초래하는 애도의 실패는 동시에 ‘타자를 타자로서 받아들이는’ 애도의 시작이 된다.
데리다는 “기억을 통한 내면화”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잠식하는 멜랑콜리아를 긍정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랑콜리아는 타자를 버려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적 퇴행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의 가능성과 불가 능성이 만나는 지점, 애도의 성공과 실패가 같아지는 지점, 애도와 멜랑콜리아가 중첩되는 공간”에 주목한다. 즉, “애도는 타인의 세계가 끝날 때, 타인을 위해 그 끝을 내 안에 담는 것이며, 동시에 관념화, 내면화, 그리고 식민화에 저항”해야 한다. “타자를 관념화하는 내사 (introjection)가 망각의 시작 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랑콜리아는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닌, 내사에 저항하는 힘이 된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느끼는 두려운 낯섦은 이러한 멜랑콜리아를, 자기혐오의 감정을 유발한다. 그러나 이 두려운 낯섦이야말로 테스 프라임을 ‘존의’ 테스로 만들려는 시도를 무화하고, “살아남은 자인 존에게 허락된 삶 자체”를 끊임없이 인식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존의 삶 속에 공거(cohabitation)하는 테스 프라임은 “우리 안에 사는 ‘목격자’”이다. 존은 마조리처럼 죽음을 망각하는 망상적 위안에 의존하지도, 테스처럼 멜랑콜리아를 견디다 못해 자살에 이르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자신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를 내면화하고, 테스와의 기억을 회고하며, 동시에 프라임의 본질적인 두려운 낯섦을 인식하고 절망하기를 반복하면서 테스의 죽음을 애도한다.
데리다는 “타자가 타자성을 유지하면서 우리와 대화 관계에 있는 ‘생각하는 기억’을 애도의 본질”로 보았다. 따라서 데리다는 멜랑콜리아와 애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인식하려는 애도, 달리 말해 애도 가능성과 애도 불가능성 사이의 진동이 애도하는 텍스트의 직물을 짜고, 애도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아포리아가 길을 여는” 멜랑콜리한 애도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도라고 주장한다. 인류 탄생 이래, 현실적으로 망자의 발언이 가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은 망자의 발언을, 망자의 부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데리다가 만약 살아 있다면, 망자의 동의 없는 기계적인 디지털 부활을 경계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디지털 부활은 오직 남아있는 자의 나르시시즘적 멜랑콜리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만 제작되고, 이용된다는 점에서, 기계적 디지털 부활은 너무도 쉽게 프로이트적 애도 작업의 완수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프라임이 어떻게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애도의 실패를 전제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프라임은 남아있는 자가 주입한 ‘기억’과 새롭게 형성된 ‘지식’, 그러니까 다른 프라임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에 검색함으로써 얻어낸 지식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애도의 실패와 성공을 오간다는 점에서, 데리다적 멜랑콜리한 애도를 체현한다. 존이 손녀를 테스 프라임에게 소개하는 장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멜랑콜리한 애도를 예증하는 장면이다. 존이 테스 프라임에게 ‘손녀가 분류학을 공부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자, 테스 프라임은 ‘이분법(Dichotomous)을 이용하지’라고 대답한다. 자연스럽게 분류학에 관한 대화를 이어 나가는 테스 프라임과 달리, 존은 테스 프라임이 분류학에 관한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존의 시선에서 바라본 테스의 기억과 테스 프라임이 새롭게 얻은 지식의 혼합은 이전 에는 ‘말할 수 없던 것’, 즉 손녀와의 예측할 수 없는 상호작용을 존이 인식하게 한다. 존은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테스 프라임에게 ‘입양이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묻다가도, 이분법을 말하는 테스 프라임에게 놀라면서 애도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한다. 테스 프라임은 그런 의미에서, 존의 내면에 식민화될 수 없는 테스의 이미지를 새기고, 테스의 죽음을 인식함과 동시에 존의 내면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테스 그 자체를 기억하고, 애도하도록 돕는다.
데리다의 관점에서 프라임의 가장 큰 의미는 ‘내면화되지 않는 지속적 기억’에 있다. 프라임은 남겨진 자들의 기억에 의존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은 인간과 달리, 프라임의 내면에 잡아 먹히지 않고 영원히 그 상태를 유지한다. 인간의 기억은 꺼내면 꺼낼수록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지만, 프라임의 기억은 처음 상태 그대로 지속되며, 프라임 자신의 내면에 의해 오염될 가능성도 없다. 인간이 되고 싶은 욕구를 드러내긴 하지만, 프라임에게 인간과 같은 완전한 자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러한 프라임의 기억을 영화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반복되는 ‘물’의 이미지를 통해 시각화한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희곡인 원작의 특성을 반영하여, 한정된 인물과 배경을 활용한, 절제된 미쟝센을 사용한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프라임 외에 다른 기술적인 특징은 눈에 띄지 않으며, 심지어는 기본적인 가구 이외의 소품조차 얼마 등장하지 않는 미니멀리즘적 미쟝센은 프라임과 인물들의 관계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미니멀리 즘적 집 내부와 대조적인 과잉 생산되는 물의 이미지는 영화의 주제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타포다.
월터와 마조리의 집이자 테스와 존의 집인 영화의 주된 배경은 바닷가에 위치한다. 그래서 영화는 해변가를 걷는 테스와 존의 모습이라든가, 인물 없이 파도치는 장면이 종종 삽입하거나, 계단 옆에 걸린 파도 그림을 클로즈업하기도 한다. 토니가 해변가 달리기를 좋아했다는 마조리의 대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데미안을 상징하는 토니가 사랑했던 바다는 영화 내내 ‘죽음’, 또는 일종의 상실을 상징한다. 마조리, 테스, 존이 사망한 이후 파도-또는 파도를 그린 그림-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재현한 이미지인 프라임이 등장할 때는-집이 바닷가에 위치함에도- 어둡고 꽉 막힌 실내나, 또는 커튼 뒤로 희미하게 비치는 나무만이 등장한다. 하지만 세 프라임이 모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실 밖 커튼이 활짝 젖혀있 으며, 잔잔한 바닷가의 모습이 포커싱되도록 인물을 모두 같은 방향에서 촬영된 것을 알 수있다. 이는 궁극적인 영화의 주제인 죽음과 애도를 인간이 모두 사망한 뒤에도 프라임이 이어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로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중요한 메타포는 ‘비’인데, 영화에서 딱 두 번 등장하는 폭우는 영화의 두 번째 주요 키워드인 ‘인간의 기억’과 연관성이 있다. 희미해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비는 끊임없이 흐르고, 또 쉽게 휘발되고 만다는 점에서 인간의 기억을 상징한다. 따라서 프라임 뒤에 켜켜이 쌓이는 포근한 눈의 이미지는 인간의 기억처럼 흘러가지 않고 차갑게 냉동되어 켜켜이 쌓이는 프라임의 기억을 시각화한 것이다. 이는 영화 속 첫 번째 폭우 장면에서 존과 테스가 기에 대해 나눈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되풀이될수록 희미해지는 복사본”같은 인간의 기억과 달리, 프라임의 기억은 “뇌 안의 퇴적층”처럼, 모든 기억을 원본 그대로 냉동시켜 저장 한다는 점에서 눈과 닮았다.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얼마가 흘렀는지조차 알 수 없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월터, 마조리, 테스 프라임은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그들 뒤 넓은 창에는 눈 내리는 바닷가의 풍경이 있다. 켜켜이 쌓이는 눈과 파도치는 바닷가가 보이는 통창 앞에서 프라임은 데미안의 죽음을 끄집어 낸다. 유일하게 데미안에 대한 기억을 들은 월터 프라임이 데미안의 죽음을 언급하고, 데미안에 대해 알지 못했던 테스와 마조리 프라임도 월터 프라임과의 대화를 통해 데미안을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특히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라는 마조리 프라임의 마지막 대사는 수 세기가 지난 뒤에도 바래지 않고 타자를 기억하는 애도의 자세를 체현한다. 그러므로 세 프라임 뒤로 펼쳐진 ‘눈 내리는 바닷가’는 테스, 월터, 마조리뿐만 아니라 데미안과 존까지 프라임이 모든 ‘타자’의 죽음을 인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영원히 기억하고 있음을, 서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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