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LAB2024-06-03 11:23:25
6월 첫째 주 주말 박스오피스 분석 with 씨네픽
<설계자> 제치고 1위한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 100만 돌파!!
국내 박스오피스 ✍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2주 연속 주말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습니다. 누적 관객 수 100만 명을 넘어서며 흥행세를 이어가고 있는데요. 한편 강동원 주연의 <설계자>는 29일 1위에 올라섰으나 주말 박스오피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정상을 탈환하며 2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죽었다>는 100만 돌파를 목전에 두고 3위를 기록했습니다.
북미 박스오피스 ✍
<가필드 더 무비>가 흥행 신드롬을 일으키며 1위에 올랐습니다. 존 크래 신스키 감독의 애니메이션 <이프>도 덩달아 2위에 올랐는데요. 한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주말 관객 수가 대폭 감소하며 3위로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Relative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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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7월 22일>, 영화가 고통을 재현하는 이유
넷플릭스 <7월 22일>, 영화가 고통을 재현하는 이유
2011년 7월 22일 오후 3시 반에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정부청사에 폭탄테러가 발생해 총리실 건물이 크게 파손되고 7명의 사망자와 19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같은 날 오슬러 북서쪽 30km에 위치한 우퇴위아 섬에서는 총기난사 테러가 발생했다. 우퇴위아 섬은 당시 집권 여당인 노동당 청년캠프 행사가 열린 장소였고, 700명이 넘는 10~20대 청소년이 캠프에 참여 중이었다. 고립된 장소에서 테러의 범인인 아네르스 브레이비크는 아무런 방해 없이 68명의 청소년을 죽였다. 2018년에 넷플릭스에서 공개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7월 22일>은 바로 이 노르웨이 테러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7월 22일>처럼 비극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은 언제나 해당 사건을 얼마나, 또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에 빠진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관음증적인 성격을 지닌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수 있다. 관객들은 철저히 제 3자의 시각에서 카메라에 담긴 인물들의 삶의 단면을 감상한다. 문제는 스크린에 펼쳐지는 인물들의 삶이 아픔과 고통으로 가득할 때다. 카메라는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을 뿐, 그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더라도 결코 도울 수 없다. "누군가의 상처를 엔터테인먼트로써 바라만 보는 것이 윤리적인 일일까?"라는 의문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특히 그 상처가 가상이 시나리오가 아닌,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면 해당 사건을 재현해서 관객들에게 오락으로 제공하는 영화의 윤리성에 대해서는 더더욱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전쟁 영화의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 시퀀스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상황을 가장 완벽히 구현해 강렬한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평가받는다. 영화는 관객들이 이 장면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느끼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전쟁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주인공들의 행동에 개연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재현의 윤리를 잊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꼭 제2차 세계 대전이 아니더라도 전쟁터에 복무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오프닝 시퀀스는 보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아무리 철저히 고증을 하고 생생한 카메라 구도로 당시의 상황을 보여줄지라도 관객들은 결코 전쟁터를 실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러한 재현은 철저히 기만이라고 볼 수도 있다. 비처럼 쏟아지는 포탄과 총을 맞고 다리가 잘려 나간 군인들의 비명소리는 스크린 속의 가상에 불과하다. 영화를 보면서 다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의자에 앉아서 고통스러운 이미지와 음성을 접하는 것만으로는 결코 그 현장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이는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다루지 않는다면 그 또한 문제다. 영화의 존재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극 예술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극 예술의 시작이 등장인물의 고통과 비극에서 비롯된 강렬한 페이소스와 카타르시스에 기반을 둔 그리스 비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길을 그 어떤 미디어보다 생생하고 쉽게 열어준다는 점은 영화의 가장 뛰어난 장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7월 22일>은 왜 영화가 때로는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재현해야 하는지에 대해 적절한 답변을 내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초반부만 놓고 보면 이 영화 역시 재현의 윤리를 잊은 듯 보인다. 테러를 준비하는 범인의 모습, 테러가 발생한 정부청사, 범인이 우퇴위아 섬에 들어가는 과정과 그 안에서 벌어진 학살극, 무방비로 죽고 부상당한 학생들과 수많은 유가족들의 눈물과 비명까지 영화는 감독 특유의 핸드헬드 기법을 활용해 결코 길지 않지만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전달한다. 이 대목에서 <7월 22일>은 분명 반인류적 범죄를 오락으로 소비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구성은 테러 사건의 고통스러운 이미지와 음성을 왜 되살려야만 했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7월 22일'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테러의 전후 사정과 흐름을 구체적으로 짚는 것과 별개로 영화의 초점은 테러가 아니라 테러 이후 피해자들의 삶에 맞춰져 있다. 실제로 작중 테러를 묘사하는 장면은 2시간 중 첫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총격을 당해 뇌수술을 받은 '빌야르(요나스 스트란 그라블리)'와 그의 가족이 살아가는 모습과 범인인 '아네르스(아네르스 다니엘센 리)'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을 번갈아 비추면서 그 이후 러닝 타임을 가득 채운다.
이러한 구성은 보는 것만으로는 가늠하기 어려운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를 실감은 못할지언정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주며, 더 나아가 영화의 메시지를 강조한다. 힘겹게 법정에서 증언하는 빌야르는 이렇게 말한다. "(범인이) 나를 죽일지 살릴지 알 수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 저는 선택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게는 아직 가족이 있고 친구들, 추억, 꿈, 희망, 그리고 사랑이 있어요.(...) 저는 살기로 선택했어요." 세상에 끔찍한 일이 많지만 이를 피해서는 안된다고, 두려움과 공포가 뺏지 못한 것을 믿고 이겨나가야 한다며, 가해자에게 그가 성공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힐난하는 이 대사는 물론 그 자체로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친구들을 잃고, 재활 과정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빌야르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모습을 옆에서 보며 최소한의 공감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영화가 참극을 굳이 재현하는 이유다.
한편 <7월 22일>의 재현은 테러 당시와 현재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유의미하기도 하다. 사건의 범인인 아네르스 브레이비크는 극우적인 이념의 소유자로, 늘어나는 무슬림 이민자들이 유럽을 망치고 있으며 백인들을 위한 유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로 테러를 일으켰다. 그리고 2020년 현재 모든 인류의 공통된 위기인 판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아네르스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민족주의가 흑인과 동양인을 대상으로 여전히 살아있음을 목격한 바 있다. 이러한 차별과 억압의 결과가 어떤 모습일지 <7월 22일>은 9년 전 사건의 재현하면 일깨워 주고 있으며, 이는 과거의 아픔을 재현하는 작품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이다.
E(Exceed expectations, 기대 이상)
때로는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영화가 고통을 되살려내는 이유
* 본 콘텐츠는 브런치 DAY 작가님의 자료를 받아 씨네랩 팀이 업로드 한 글입니다.
원 게시글은 아래 출처 링크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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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WFF 데일리] 그해 여름, 남매 성장기의 한 페이지
7★/10★(윤단비 감독 작품, 2019년, 104분, 한국.)
〈남매의 여름밤〉은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을 법한 유년의 기억 한 페이지를 소재 삼아 아이의 성장기를 담아낸 영화다. 겉보기에는 평온하고 잔잔하지만 아이들은 그 속에서 때로 격정을 느끼고, 아파하며, 성장한다. 여름과 성장의 질감이 짙게 묻어나는 이 영화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철거를 앞둔 재개발 골목에 흰 다마스 한 대가 서 있다. 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옥주와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동주가 아빠와 함께 할아버지의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서다. 할아버지의 집은 세월의 흔적이 많이 묻어 있다. 나무로 된 짙은 갈색의 실내 장식에서 나는 냄새가 화면 바깥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어느새 아늑해지는 그런 냄새. 옥주와 동주는 아주 느린 속도로 말하고 걷는 할아버지와 그의 흔적이 담긴 집이 어색하기도 하지만 이내 적응하고는 금세 웃음을 되찾는다.
영화의 서정적인 분위기와 빠르게 흘러가는 아이들의 시간은 꽤나 잘 어울려서 관객을 웃음 짓게 한다. 굉장히 섬세하고 구체적인 장면들도 눈길을 끈다. 어떻게 상상하고 연출했을까 싶은 장면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남매의 기분 좋은 여름날에 대한 몰입도도 높아진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시간은 마냥 행복하게만 채워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순간에 아이들은 성장한다. 첫 번째는 어른이라는 문제다. 옥주와 동주는 어려운 형편에도 남매를 잘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빠, 남편과의 문제로 언젠가부터 할아버지 집에서 함께 사는 고모를 잘 따른다. 자신들을 아껴주는 어른들의 마음이 진짜임을 알기 때문이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현실에 지친 어른, 현실에 지치다보니 현실과 닮아버린 어른이기도 하다. 두 어른은 거동이 힘들고 용변을 잘 가리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자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집을 팔고자 한다. 이것만으로 아빠와 고모를 욕할 순 없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어른이 엄청난 품이 드는 돌봄노동을 제대로 수행하기는 매우 힘들다.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간다면 꼭 그 집에서 살 필요가 없는 것도 맞다.
그러나 여기에는 빠진 게 있다. 옥주는 요양원과 집 문제를 두고 아빠에게 묻는다. “그걸 왜 우리가 결정해?”(요양원), “할아버지한테는 얘기했어?”(집). 옥주는 두 어른보다 현실과 윤리가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더 잘 알고 있다. 설령 할아버지가 요양원에 가더라도, 집을 판다고 하더라도 할아버지가 결정의 주체 혹은 의논의 대상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두 어른은 이 당연한 과정을 생략한다. 다소 화가 난 듯이 보이는 옥주의 감정은 정당하다. 어른이 부재한 곳에서, 아이들은 성장한다.
두 번째는 엄마 문제다. 옥주는 늘 엄마를 보고 싶어 하는 동주를 자존심도 없냐며 다그친다. 아마도 엄마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동주에게 엄마를 만나러 가면 혼내주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 그런데 동주가 몰래 나가 혼자 엄마를 만나고 선물까지 받아 온다. 옥주는 화가 나서 이를 뺏으려 하고, 동주는 엄마의 선물을 지키려 안간힘을 쓴다. 결국 두 남매는 소리 지르며 몸싸움까지 한다.* 그러나 옥주가 이렇게 화가 났던 건 사실 자신도 엄마가 보고 싶기 때문이다. 엄마 문제에 의연한 척했던 건 어떻게든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긍정하기 위한 포장이었을 뿐, 그 역시 동주와 같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어린이와 청년의 경계에서 홀로 의연히 버텨내고자 하는 옥주의 의지가 대견하면서도 쓸쓸하다. 그해 여름 한 소녀의 지극히 사적인 성장통이 보편적 호소로 다가오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덧. 이 영화를 배리어프리 영화(장애인이 함께 볼 수 있도록 제작된 영화)로 봤는데 굉장히 독특한 경험이었다. 덕분에 한국어 영화를 자막(일반 자막이 아닌 배경음악 등에 대한 정보까지 포함한 상세한 자막), 내레이션(박정민 배우가 재능 기부한 것으로 화면 움직임에 대한 해설 등으로 구성)과 함께 보며 모두가 볼 수 있는 영화란 무엇인지를 고민할 수 있었다. 내레이션의 문장 하나하나가 군더더기 없이 굉장히 문학적인 것도 인상적이었는데, 화면 대신 내레이션만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이 그려냈을 남매의 여름밤도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싸우는 두 남매를 중재하며 달래주는 사람이 할아버지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노쇠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오히려 남매를 다독인다는 것은 아빠와 고모의 판단이 틀린 것일 수 있음을, 우리 시대의 어른됨이 정상성(사회생활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육체적, 정신적 기준) 바깥에서만 가능한 것일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현실’이 인간을 찌들게 하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영화 전문 웹진 〈씨네랩〉에 초청받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SWIFF)에 참석한 후 작성한 글입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8월 25일부터 9월 1일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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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선지 위에 그려낸 실험정신
이 리뷰는 하이스트레인저 씨네랩에서 초대받은 시사회에 참석 및 관람한 후 작성되었습니다.
시험기간 도중에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시사회에 다녀왔다. 종강하고서야 쓰는 리뷰...!
<석양의 무법자>를 제외하면 엔니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맡은 영화를 많이 본 적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먼저 영화 시작하기 전에 영화사 진진 관계자분이 나오셔서 간략히 영화와 이벤트 설명해주시고 마지막으로 '오늘 밤 집에 돌아가시는 길에 귓가에 엔니오의 음악이 맴돌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해주신 게 정말 좋았다. 멘트 하고 가신 건데 뭔가 더 세심한 기획 같은 느낌을 받았다ㅎㅎ
앞서 쓴 것처럼 본 영화가 거의 없었고, 스코어나 클래식에 관한 지식도 정말 부족한데다가 시험기간에 바닥난 체력 + 다큐멘터리라는 점 때문에 집중하기 어려울까봐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러닝타임이 실제보다 짧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먼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해 잘 모르는 관객이 보더라도 영화음악가로서의 엔니오, 그리고 영화음악으로써 마에스트로가 된 그에 대해 많은 걸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성공했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띄었다.
영화가 후반부로 달려갈수록 8-90년대의 스코어(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미션>, <피아니스트의 전설>)들이 나오면서 엔니오의 음악이 할리우드 음악의 전형, 그리고 '영화를 보지 않아도 들어본 적은 있는' 아이코닉함을 가진 것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그가 '스타일'을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넬이나 디올이 새로운 '핏'을 만든 것처럼, 예술가로서 굉장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영화상으로는 후반부이기도 하고 나에겐 귀에 익은 음악들(그리고 그 당시 영화에 많이 나오는 형식들)이어서 무감해질 수도 있었지만, 그럴수록 엔니오가 커리어의 정점에 다다라서 끝내 스타일이란 것을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쉬워 보일수록 그 사람이 일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 그가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예술, 정치적인 철학이나 특별한 대의보다는 자신의 원칙과 작업으로서 음악에 접근하고, 실험할 기회가 있다면 받아들이고 협업하는 과정이 그가 이미 영화 음악의 거장이 되었을 시점까지도 계속해서 드러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연스레 다큐멘터리 또한 위인의 일대기가 아니라 예술가로서 일하는 방식과 정체성에 대한 작품처럼 읽힌다. 엔니오가 가진 겸손함도 자연스레 영화에 묻어난다.
영화 초반부부터 편집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편집상을 벌써 하나 받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잘 모르는 관객이 보더라도 영화음악가로서의 엔니오에 대해 많은 걸 알아갈 수 있도록 하는'영화로 거듭난 데에는 편집이 큰 역할을 한 것 같다. 이건 실제 엔니오의 인터뷰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지만, 인터뷰와 오케스트라 영상, 영화의 몽타주가 일정한 순서대로 배치되었고 엔니오가 인터뷰 도중에 흥얼거리면서 곡을 설명하는 장면을 영화 장면과 함께 사용하면서 그의 정체성(영화 음악가)을 강조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지알로부터 세르지오 레오네와의 작업, 8-90년대 할리우드 영화, 타란티노와의 협업에 이르기까지 정말 많은 작업량을 매끄럽게 담아냈다는 인상을 받았다. 덧붙여 관객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이러한 성공적인 편집은 적절하게 배치된 인터뷰와 에피소드로 완성되었다. 예컨대 스탠리 큐브릭 특유의 '아니면 말고!' 하는 반응 대문에 엔니오와의 작업이 불발된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는 관객인 내가 더 아쉬워질 지경이었다.
다만 영화의 극후반에 다다라서는 조금 더 깔끔하게 마무리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평가를 나열하는 식으로 여러 영화 및 음악인들의 인터뷰를 끊임없이 보여주면서 막을 내린다. 물론 엔니오를 기리고 훌륭한 예술가에 대한 찬사를 보내려는 것임을 이해한다. 그러나 앞부분에서 관객 스스로가 그의 예술적 성과를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고도 친절한 편집을 보여 주었다. 그래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칭찬 세례를 마지막에 전부 배치한 것이 영화의 막바지를 약간 느릿하게 만들어버린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실제 영화 푸티지를 극장에서 함께 경험할 수 있다는 점, 개인적으로는 거장 예술가를 새로 알게 해준 친절하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영화라는 점이 정말 만족스러웠던 시간이었다. 개봉하면 다시 극장을 찾아 관람하게 될 것 같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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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오브 더 월드
뉴스 오브 더 월드
남북 전쟁이 끝나고 5년이 지난 1870년, 키드 대위는 텍사스주 일대를 돌아다니며 마을 주민들에게 돈을 받고 신문을 읽어주는 일을 한다. 키드 대위는 남군 출신이어서 전쟁에 진 남부를 통제하고 있는 북군의 검문에 공손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북군의 총에 맞아 죽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북군은 점령군으로 남부에 진출했고, 전쟁에 참여했다 패한 남부의 여러 주를 '미합중국'의 연방으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남부의 인민들은 북부가 주도하는 연방제에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키드 대위가 남부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신문을 읽어주며 돈을 벌 수 있었던 건, 당시 인민 대부분이 글을 읽을 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신문을 매번 사 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인민은 급격하게 변하는 사회의 변화를 뉴스를 통해 알고 싶은데, 정보를 들을 수 있는 방법은 신문을 읽는 것이고,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키드 대위는 '신문 읽어주는 남자'가 되어 남부를 떠돌고 있었다.
키드 대위가 길을 가다 우연히 부서진 마차를 발견하고, 그 안에 있던 소녀를 보게 된다. 이 소녀는 영어를 하지 못했고, 마차에서 찾은 문서에서 소녀가 가야하는 목적지를 알게 된다. 키드 대위는 북군 기지를 찾아가 소녀가 사고를 당해 지금 혼자이며, 가족이 먼 곳에 있으니 찾아달라고 말하지만, 북군은 담당자가 없고, 최소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키드 대위는 소녀를 가족에게 데려다주기로 마음 먹는다. 소녀는 독일어를 하지만 마치 야생에서 들개처럼 자란 것처럼 보인다. 영화에서는 소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소녀가 백인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행동, 이동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무리를 보며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울부짖는 걸 보면서, 이 소녀가 어릴 때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함께 살았음을 추측할 수 있다.
키드 대위는 소녀를 가족에게 데려다 주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소녀를 딸처럼 생각하게 된다. 키드 대위의 가족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그의 아내가 젊은 나이에 콜레라로 죽었다는 장면이 짧게 나온다. 고향을 찾았을 때, 친구에게 전해들은 아내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키드 대위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 때문에 저주가 내렸고, 그로 인해 아내가 죽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키드 대위의 개인적 독백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미국의 역사에서 백인들이 저지른 온갖 만행을 압축한 상징적인 독백이기도 하다. 미국의 역사는 처음부터 학살의 역사였으며, 백인에 의한 다른 인종의 학살, 전쟁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했음을 의미한다.
키드 대위는 소녀를 딸처럼 여기며 보살피고, 소녀를 가족들이 있는 곳까지 데려가는 과정에서 소녀를 해치려는 백인들과 맞서 싸우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어렵게 목적지에 도달한다. 소녀를 가족에게 안전하게 데려다 준 것에 만족하고 돌아서지만, 키드 대위는 다시 소녀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발에 밧줄이 묶인 소녀를 발견하고, 다시 소녀를 데리고 나온다. 소녀를 받아들인 부부는 친부모가 아니었고, 단지 노동력이 필요해서 소녀를 받아들인 것이었고, 들개처럼 행동하는 소녀를 길들일 수 없음을 고백한다.
키드 대위는 소녀를 데리고 나와 함께 남부를 떠돌며 신문을 읽어주는 일을 계속한다. 키드 대위는 소녀의 아버지 노릇을 하고, 소녀는 들개처럼 떠돌던 삶에서 문명사회로 들어오게 된다. 두 사람은 가족을 이루게 되고, 이것은 백인이 저지른 범죄의 반성과 야생에서 고난의 삶을 살았던 아메리카 원주민과 유색인종의 화해를 보여주는 장면이지만, 이렇게 따뜻한 영화를 그저 따뜻한 마음으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한계이기도 하다.
다른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백인 군인이 아메리카 원주민의 삶으로 들어가 백인 문명-학살과 침략의 역사-을 거부하고, 스스로 아메리카 원주민으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흥행에도 성공한 예가 있었다.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백인들의 범죄를 반성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이야기는 꾸준한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럼에도 백인 주류 사회는 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한 이후, 백인이 저지른 온갖 만행에 관해서 은폐하려는 시도를 지금도 하고 있다. 이런 백인 주류 사회의 역사 은폐를 정면으로 비판한 학자가 '하워드 진'이다. 그는 '미국민중사'를 통해 미국의 역사라고 말하는 백인의 역사가 얼마나 왜곡되고, 미화되었으며, 진실이 은폐되었는가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헐리우드가 아주 드물게 백인이 저지른 역사에서의 범죄를 자백할 때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범죄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용서를 비는 행동과 실천은 당연히 꾸준해야 하고, 사죄와 반성의 증거를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지금도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차별 정책을 멈추지 않고 있으며,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에 대한 차별과 멸시가 심각한 사회 문제인 미국에서, 이런 영화가 한편 나왔다고 호평을 얻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물론, 이런 영화가 나오지 않는 것보다는 좋지만, 가해자가 어설프게 화해를 말하는 건, 오히려 피해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위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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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위로 흩어지는 광기 어린 숨결
더 노비스 (THE NOVICE , 2021)
"물 위로 흩어지는 광기 어린 숨결"
개봉일 : 2022.05.25.
등급 : 15세 관람가
장르 : 스릴러
러닝타임 : 97분
감독 : 로런 해더웨이
출연 : 이사벨 퍼만, 에이미 포사이스
개인적인 평점 : 3.5/5
쿠키 영상 : 없음
더 노비스 줄거리
대학 신입생 ‘알렉스’는 교내 조정부에 가입한 후 동급생 ‘제이미’에게 경쟁심을 느낀다. 늘 최고를 갈망하는 ‘알렉스’는 팀 1군에 들기 위해 훈련을 거듭하고,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몰기 시작하는데···
네 미친 짓으로 최고를 증명해 봐!
우리는 평생 다른 이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감과 동시에 그들과 끊임없는 경쟁을 벌인다. 노력형이든 타고난 천재든 상관없이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건 그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 1등,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사람뿐이다.
<더 노비스>는 선천적인 재능이 없는 대신 흔히 말하는 악바리 근성이 넘치는 주인공 '알렉스’의 질주를 담은 영화다. 알렉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대학에 입학한다. 고등학교에선 가까운 동네 친구들끼리만 경쟁을 펼쳤고, 그는 교내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다. 하지만 대학교에 오니 알렉스처럼 수재라고 불렸던 학생들이 바글바글한 거다. 알렉스는 더 노력하지 않으면 1등을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보다 더 큰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새롭게 가입한 교내 조정부에서 타고난 재능을 가진 동급생 '제이미’를 만나며 그 불안감은 독기로 변하게 된다.
다시 만나보고 싶었던 배우 이사벨 퍼만
<더 노비스>는 개봉을 앞두고 올해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선공개되었다. 영화제에서 무슨 영화를 볼까~ 한참 고민하던 찰나, "<오펀: 천사의 비밀> 그 여주인공이 나오는 신작도 상영한대!" 하는 소문을 듣고 이 영화 근처를 기웃기웃거렸는데 도저히 스케줄이 나오지 않아 만약 정식 개봉을 한다면 꼭 챙겨보자고 다짐했었다. (그 당시엔 정식 개봉 소식을 나만 몰랐었다..)
<더 노비스>를 기대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이 영화를 통해 데뷔한 로런 해더웨이 감독이 스스로 이 작품을 "조정을 소재로 한, <블랙 스완>의 느낌이 드리워진 <위플래쉬>"라고 소개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사벨 퍼만이라는 배우 때문이었다.
대략 10년전 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필모를 훑어보다 그가 <오펀: 천사의 비밀>이라는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어? 레오가 제작한 거면… 볼만하지 않을까?" 하며 용감하게 이 영화에 도전했었다. 그리고 아주 많은 관객들이 그러했듯 큰 충격에 빠졌고 이사벨 퍼만이라는 배우에게 의구심을 가졌었다. "이 사람… 나이 속인 거 아냐?"하고. 분명 아이 같은데, 아이가 맞는데… 아이가 아닌 것 같은 그의 연기에 충격을 넘어 의심이 들었던 거다.
이사벨 퍼만은 그 이후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지만, 국내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던 작품이 많이 없었기에 나에게 이사벨 퍼만의 이미지는 '오펀 그 배우’였다. 근데 그런 그가 <위플래쉬> + <블랙 스완> 같은 영화의 주연으로 나온다니. 이번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스로의 목을 조이며 나아가는 경주
광기와 독기. 그리고 약간의 호흡곤란. <더 노비스>라는 영화를 짧게 표현하자면 이 세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물 위에 떠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결승선을 향해 손을 갈고 위안에 든 모든 것을 토해내는 주인공 알렉스의 모습은 멋지다 못해 지독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해당 종목을 사랑한다 해도 끝없는 극한의 경쟁 속에서 부담감,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 선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팀에서도 1군이 있고, 2군이 있고, 또 대표가 있다. 알렉스는 학교를 대표하는 대표 선수가 되기 위해 훈련에 매진한다. 하지만 알렉스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체구가 작았고, 그만큼 힘도 약했다.
그런 그의 옆에 있는 제이미는 알렉스보다 체구도 크고 어릴 때부터 여러 운동을 접하며 자라 뛰어난 운동 신경을 자랑하는 팀의 에이스다. 이미 자신의 입지를 확보한 제이미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훈련에 참여한다. 알렉스는 제이미에 대한 열등감, 1등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며 타고난 그의 재능을 이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는다.
대표팀 멤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제이미와 예비역으로 대기하다 겨우 기회를 잡은 알렉스. 같은 훈련 과정을 밟고 있지만 두 사람의 표정과 행동은 확연히 차이가 난다.
타고난 천재와 노력형 수재. 겉으로 보기엔 같은 배에 앉아 같은 박자로 노를 젓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알렉스는 제이미와 함께 대표팀 자리에 앉기 위해 숨 쉴 틈 없이 달려왔다.
* 아래 내용부턴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같지만
제이미와 알렉스는 마치 달리기 경주에 참여한 토끼와 거북이 같다. 타고난 달리기 실력으로 여유롭게 결승선을 향해가는 토끼 제이미와 제이미가 푹 자고 있을 시간에도 열심히 훈련하는 거북이 알렉스. 근데 <더 노비스>에서 볼 수 있는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는 우리가 알고 있는 우화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의 초반, 열등감을 갖고 있는 알렉스가 열심히 훈련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노력해서 결국 제이미보다 더 팀에서 촉망받는 선수가 되려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알렉스의 목표가 팀의 1군, 대표 선수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그저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 팀에서도 1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인다.
알렉스의 목표는 팀의 단합, 팀의 우승보단 어찌 됐든 내가 젓고 있는 배가 1등으로 결승선에 통과하는 것이다. 팀의 단합보단 나의 1등을 향해 달려가는 그의 모습에 누군가는 훈련을 열심히 한다며 박수를 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혼자만 아는 재수 없는 놈이라며 욕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서 몇 번의 감탄과 탄식을 내뱉었다.
영화의 장단점
<더 노비스>는 알렉스의 불안감과 초조함을 시각, 청각을 이용해 탁월하게 표현한다. 알렉스의 몸에 흐르는 땀과 그의 눈빛, 마치 세상에 홀로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훈련 장면, 조각난 채로 환각처럼 지나가는 순간들, 긴장감을 끌어올려줌과 동시에 관객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도 하는 음악의 사용까지. 마치 알렉스의 불안한 마음속에 발끝을 몇 번 담가보는 느낌을 선사하는 탁월한 화면 구성이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다.
그에 반해 최대 단점이라면 이 이야기는 감탄과 탄식을 불러오긴 하지만 커다란 짜릿함을 주진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 내내 학교에선 공부로 경쟁하고, 새벽, 늦은 밤 할 것 없이 훈련을 반복하고, 숨쉴틈 없이 자신을 극한으로 몰아넣는 알렉스의 일상이 이어진다. 주인공의 치열한 일상을 함께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그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되기 마련인데, <더 노비스>의 엔딩엔 그런 보상이 없다. 상쾌한 해방이라든가, 끝내 승리하는 모습이라든가. 아니면 광기에 절여진 비극적인 결말이라든가. 딱 정해진 무언가가 있으면 탁! 정신이 환기되는 느낌이 들 텐데 어째 영화 내내 알렉스의 광기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끝나버리는 느낌이랄까. 알렉스가 결승선을 끊으며 주체적으로 만들어낸 엔딩이긴 하지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 위 리뷰는 씨네랩 크리에이터로서 시사회에 참석한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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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꿈, 중경삼림
아직도 중경삼림을 처음 봤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고화질의 중경삼림 포스터를 바탕화면에 띄운 일이었다. 얼핏 보았을 땐 정신없고 산만한 포스터가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보다 영화를 잘 나타내기도 힘든 일임을 깨달았다. 아무렇게나 잘라 붙인듯한 사진들이 콜라주 되어 하나의 작품이 된 포스터는 영화와 꼭 닮아있다.
홍콩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들 듯, 중경삼림 또한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영화이다. 누가 그랬듯 내게 있지도 않은 추억을 불러일으키고, 겪지도 않은 시대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러닝타임 내내 빨려드는 느낌을 받은 것은 단순히 왕가위의 촬영기법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중경삼림의 두 에피소드는 모두 이별로부터 시작된다. 이별이 낱말 뜻 그대로 이야기의 마지막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시작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다만 결과는 다소 다르다. 경찰 223이 과거를 받아들인다면 663은 미래를 받아들인다. 과거로 회귀하던 223은 결국 이별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지만, 메이와의 시간은 과거에 머물러 있음을 인정하고 그 자체를 사랑하게 된다.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도 모르게 미래로 향하던 663은 나아가 변화를 만들어나간다. 실연의 아픔은 잔존하고 과거는 침전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바뀌지 않는다. 불안하고 혼란한 건 매한가지이지만 그렇다고 슬픔과 함께 침전할 수만은 없는 것이었다.
한 칼럼은 중경삼림의 청춘들은 식민지 시대의 자유를 담았다고 표현한다.
'식민지 시대의 자유'. 언뜻 보았을 때, 이질적인 의미를 갖는 두 단어의 조합에서 확장되는 독특한 감수성을 중경삼림은 풍긴다. 처음 중경삼림을 보면서 느꼈던 혼란함 역시 이로부터 멀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소통과 불통, 이주와 정주, 우연과 필연, 풍요 속 결핍, 끝과 연속되는 시작. 감독은 이처럼 이질감 가득한 단어들을 교묘히 엮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끌어낸다.
덕분에 중경삼림은 몽환 그 자체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받는 느낌 중 하나이기도 하고, 왕가위 감독 역시 그런 느낌을 주기 위해 여러 요소를 곳곳에 배치해 두었다. 촬영 기법은 물론 영화 속 시간과 미장센, 옴니버스 형식, 장면을 넘나드는 음악과 보이스오버 등을 보고 있으면 마치 꿈속 같은 기분이 든다. 하룻밤 사이 개연성도 없이 황당한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나고, 출처 모를 소리가 머리에 울려 퍼지고, 장면은 예고도 없이 편집되며 자각할 새도 없이 순간 이동하듯 공간과 시간이 바뀌다, 그러다 눈을 뜨면 사라져 버리는, 夢中人. 그 때문 인지 항상 중경삼림을 보고 나면 101분이라는 시간 동안 꿈속을 부유하다 깬 기분이 든다.
오랜만에 다시 본 중경삼림은 또 달랐다. 앞서 영화를 볼 때도 홍콩에 대한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감독이 정치적 상황을 꼬집고 투영하기 위해 만든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단지 홍콩의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관통하며 자연스럽게 시대적 맥락이 담겼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쩌면 역사적 상황과 분리해 오롯이 심미적으로만 영화를 보고 싶었던 나의 욕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묵은 꿈속에서 벗어나, 새로이 본 중경삼림에는 생각보다 많은 장치가 있었다. 아편전쟁과 마약 딜러 그리고 서양 남자와 인도 하수인, 유통기한이 찍힌 통조림, 침사추이, Midnight Express, 캘리포니아와 노스탤지어...
영화 전반적으로 배어있는 몽환적인 연출과 설정, 꿈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곡들을 테마곡으로 사용한 데는 꿈처럼 믿기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안이 담겨있었던 게 아닐까.
오지 않을 것만 같던 1997년을 지나서 오지 않을 것 같은 2046년으로 향하는 홍콩은 여전히 부유한다. 영국과의 이별은 또 하나의 시작이 되어 또 다른 불안을 도래하게 했고, 홍콩인들은 지금도 불확실한 미래에 많은 에너지와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나만 꾸고 있다고 생각했던 꿈은 사실 하나의 거대한 꿈 중의 일부였다. 금발 여인의 꿈, 경찰 223의 꿈, 페이의 꿈, 경찰 663의 꿈, 왕가위의 꿈, 홍콩 젊은이들의 꿈, 차라리 꿈이었으면 싶던 홍콩의 꿈, 지나간 시대를 동경하는 한 세대의 꿈, 또다시 나아가야 할 홍콩인들의 꿈. California Drea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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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최면>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어요?
학교생활에 충실한 영문과 대학생 ‘도현’(이다윗).
우연히 편입생 ‘진호’(김남우)를 통해 최면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최교수’(손병호)에 의해 최면 치료를 받게 된다.
그러나 최면 체험 이후 그는 알 수 없는 기억의 환영을 보기 시작하고
친구들도 하나 둘 이상한 환영에 시달리다 의문의 사건을 맞이한다.
‘최교수’는 왜 ‘도현’과 친구들에게 최면을 걸기 시작한 것일까...?
기억의 빈틈, 진실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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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위쳐 시즌 2> 티저 예고편
[2021년 12월 17일, 넷플릭스 공개]
전설이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