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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이상 가족끼리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 '적과의 동침'은 친밀한 관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부부 사이에서 일어나는 가정폭력에 대해 다룬 영화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바로 생각난 드라마가 있었는데 국내에서는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이라는 소설을 드라마화한 '빅 리틀 라이즈'였다. 우선 영화 속에서는 주인공 로라의 남편인 마틴은 결혼 전 로라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으나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직후부터 로라를 때리고 협박하며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 ‘빅 리틀 라이즈’에서도 이와 비슷한 캐릭터, 비슷한 상황을 볼 수 있는데 전직 변호사였던 셀레스트는 결혼 후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서 아이들을 돌보며 동시에 남편을 보살피는데 조금이라도 남편의 심기에 거슬리는 일, 마찰 등을 겪으면 남편은 폭력을 행사하고 셀레스트는 으레 그렇다는 듯 그 폭력을 견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가정폭력을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을 자주 볼 수 있으며 이것은 단순히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나며 피해자가 발생한다. 법적인 제도가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 범죄가 존재하고 피해자가 존재한다면 그 원인과 문제점은 무엇일까? 나는 법의 허점과 법에 명시된 사항들이 피해자를 온전히 보호해주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가정폭력이라는 말을 들으면 배우자 폭행, 아동방임 등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법률적으로 명시된 정의가 아니다.
가정폭력은 범죄로 인정되긴 하지만 그 처벌법에 의하면 가정보호법으로 처리되어 크게 형사처리사건과 가정보호사건으로 구분된다. 형사사건의 경우 피해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피해자의 의사에 관계없이 사건을 진행하지만 가정폭력으로는 경미하다고 판단되어 가정보호사건으로 분류가 되는 경우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면 사건으로 진행하지 않는 '반의사불벌죄'가 성립된다. 이 경우 피해자가 고소 의사를 밝히고 사건이 기소된 후 유죄판결을 받은 뒤에야 가해자가 처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피해자는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갖고 있으며 피해자는 언제든 다시 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크다. 피해자가 더 불리한 입장에 놓였음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을 느껴야 할 주거공간이 공포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외국의 가정폭력의 경우 문제를 일으킨 폭력의 가해자가 퇴거명령을 받고 법원에서 개입 후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가해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기본 원칙인데 우리나라의 경우 피해자가 집을 떠나 쉼터로 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일어난다. 이는 근본적으로 현 사회가 가정폭력을 '폭력'보다는 '가정'에 방점을 찍어 가정의 안정을 유지하는 것을 더 우선으로 둔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가정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1997년 제정되어 그 이후 5번 정도 개정되었는데 20년이 넘는 법의 역사 속에 아직도 숱한 피해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제는 법이 피해자를 보호하고 구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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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쾌하고도 진솔한 러브
유쾌하고도 진솔한 러브
영화 <엘리멘탈>
감독] 피터 손
출연] 레아 루이스, 마무드 애시, 웬디 맥렌던 커비, 메이슨 베르트하이머
시놉시스] 불, 물, 공기, 흙 4개의 원소들이 살고 있는 ‘엘리멘트 시티’ 재치 있고 불처럼 열정 넘치는 ‘앰버'는 어느 날 우연히 유쾌하고 감성적이며 물 흐르듯 사는 '웨이드'를 만나 특별한 우정을 쌓으며, 지금껏 믿어온 모든 것들이 흔들리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스포일러 유의#
이민자의 이야기를 담다영화 엘리멘탈은 불 속성을 가진 엠버의 가족이 엘리멘트 시티로 이주를 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엘리멘트 시티에서 물, 흙, 공기 원소들은 평화롭게 그들의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에 불들이 이주를 오면서 엘리멘트 시티 외곽에 불의 집성촌(?)을 만들어 생활하기 시작한다.
초반 그들이 이주를 할때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이들이 없었다. 불의 속성상 화르륵 주변을 태우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낯선 존재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을 렌트할 수 없었던 그들은 엘리먼트 시티 외각에 아무도 살지 않는 쓰러지기 일보 직접의 집을 구해 그곳을 보금자리로 택한다. 엄청난 노력을 들여서 집다운 집을 만들고, 불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양한 식량과 자재들을 팔면서 점차 불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나간다.
엘리먼트 시티 내에 한 공간에 자리잡긴 했지만 엘리먼트 시티에서 함께 어울린다기 보다는 그저 한 공간에서만 그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기존 엘리멘트 시티와의 보이지 않는 경계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아무래도 이민가정들이 항상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있지만 그 뿌리가 다르다는 이유로 완벽하게 어울리기 힘들다는 모습을 이렇게 서로 다른 성질을 가닌 4원소 중 가장 대립적인 불을 통해서 이민가정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
영화를 보는 내내가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엠버와 그녀의 아빠 버니의 반목이다. 그 둘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너무나 사랑하여 서로를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다. 아빠 버니는 가게를 계속해서 이끌어오면서 이 가게를 딸 엠버에게 물려주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 너무나도 다혈질인 엠버에게 넘겨주기에는 때가 이른 것 같아서 더 성장하면 이 가게를 물려주고자 한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엠버 역시 가게를 물려받는 것을 꿈으로 생각하지만 정작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엠버의 정체성을 일깨워주는 존재는 바로 물 '웨이드'다. 다른 이들이 불인 엠버를 무섭고, 다른 존재로 인식하며 거리를 둔다면 웨이드는 엠버를 전혀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의 원소로 봐준다. 버니의 가게가 그동안 법을 어기면서 운영을 한 것을 적발하고 공무원으로서 이를 시청에 고발하지만 버니와 엠버의 사정을 알고 진심으로 이를 도와주고자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엠버에게 투명하고도 강한 유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웨이드는 그런 그녀에게 꿈을 찾아가라며 응원을 해준다.하지만 엠버는 자신을 키우기 위해 이제까지 희생을 한 부모님을 져버릴 수 없었다. 웨이드에게 모진 말을 해가며 가게로 돌아가지만 그 과정 속에서도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서로가 원하고 있는 것을 명확히 얘기하지 않고, 내가 이걸 사실대로 말하면 상대방이 상처를 입을까봐 걱정하는 마음에, 그 사랑이 너무나도 큰 나머지 계속해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면서 버니와 엠버는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결국 대홍수 속에서 엠버와 버니는 가게는 수단일 뿐 자신의 꿈도 목표도 아니라는 것을 서로가 알게 되면서 그동안 오해했던 묵은 감정을 풀어낸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서로에게 자신의 마음을 직접적으로 알려주지 않으면 지레 짐작을 할 수밖에 없고, 그 속에서 오해는 계속해서 커지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면서도 건강하게 서로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결국에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다른 원소들의 이야기는 어떨까?
영화 엘리멘탈은 4원소의 이야기 중에서도 물과 불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른 공기와 흙은 조연급이랄까? 물과 불의 이야기에서 다름과 이민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던 것 처럼 과연 다른 원소 공기와 흙의 이야기는 또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지 혼자서 기대를 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사실 현실세계에서도 불은 다른 원소들과 그리 좋은 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불은 나무를 태우고, 공기를 뜨겁게 가열시키는 존재니 말이다. 물과 불처럼 서로 상극은 아니더라도 나무와 공기 역시 서로에게 유익하게 무언가를 주고 받는다는 느낌은 아니다 보니 과연 다른 원소들과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지 궁금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엘리멘탈 2가 나와서 1에서는 조연급에 불과했던 흙과 공기의 비중이 높아져서 그들과의 관계성에 대해서도 보다 풍족하게 이야기가 펼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영화 엘리멘탈은 이민가정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한 가족의 사랑 방법에 대해서 유쾌하면서도 진솔하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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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욱신욱신하는 모든 이의 이름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우리의 의학발전은 인정하기 싫게도 과거 사람들에게 행해진 생체실험 덕분이라는 말이었다. 그래, 인정하기 싫게도, 맞는 것도 같다. 수많은 이에게 규칙적으로 바닷물 주사를 투여하지 않았다면 비브리오 패혈증의 존재는 보다 늦게 알려졌을 것이다. 바닷물이 혈액을 대신 할 수 있다는 거짓으로 판명된 가설 대신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인간에겐 하진 않고 실험용 동물을 쓴다. 매정하게 말하자면 과정은 비인간적이었으나 결과는 인간을 위하는 것일 때도 있다. 그 판단을 어떤 사람도, 어떤 시대도 쉽게 내릴 수는 없다. 우리는 시대 아래서 자유롭지 못하다. 시대가 펼쳐놓은 판에, 말이 되어 이리저리 움직인다. 시대가 만약 신이라면 참 체계적인 큰 손이 아닐까. 때맞춰 부딪히는 이념을 널어두고, 갈등을 만들어내면서 사람을 시험한다. 우리는 시험당하고 시험하는 존재이다. 태어날 때도 내 원이 아니었건만 사는 것도 내 원이 아닌 바에야 이게 대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소용'은 애당초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쓸모가 있고 득이 되는 것. 살아가는 것은 쓸모와 득으로는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영화 <동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그 말을 속삭이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말했다. 일제강점기 하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윤동주는 당대에는 빛을 발하지 못했으나 그의 시는 대대손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오래오래 남아있다. 송몽규는 일제강점기에서 열심히 앞장서 싸웠으나 결국 이름 하나 남기지 못했던 사람이라고. 이준익 감독 또한 윤동주는 과정은 좋지 않지만 결과가 좋았고, 송몽규는 결과는 없지만 과정은 훌륭했던 사람이라고 말했다. 윤동주의 아름다운 결과와 함께 과정이 아름다웠던 송몽규를 함께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름을 훗날 길이길이 남기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내 이름이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칭송을 받는다면야 그보다 좋을 일은 없다. 그러나 동주와 몽규가 그랬을까. 둘이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보았다. 동주와 몽규에게만은 적어도 과정과 결과, 그런 이분법을 두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다. 그게 영화에서 불편하던 포인트였던 것 같다. 그건 마치 영화 구석구석 드러나던 선택지와 같다. 처음 영화 시작부터 나타났던 신앙과 공산주의에 대한 고민. 일본순사가 교실을 박차고 들어와 내밀던 개인주의냐 전체주의냐, 일본사람이냐 아니냐, 하던 불편한 선택지. 혹은 아버지가 내미는 진로선택의 일침과도 같았다. 이과냐, 문과냐. 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무슨 쓸모냐 의사가 되어 사람을 구하는 것이 쓸모지. 마지막 자기 확신에 빠져 있는 일본 취조인의 이야기와도 같다. 야만이냐, 문명이냐. 국제법에 대강 끼워맞춰서 자발적인 듯 보이게 진술서를 받으면 문명이고, 그런 것조차 모르는 무지한 조선인은 야만이고. 이분법은 수많은 경우와 변수를, 이야기의 목을 댕강 잘라버린다. 마찬가지다. 과정과 결과는 그들이 원하지 않았을 이분법이다. 무엇이 과정이고, 무엇이 결과인가. 나에겐 동주와 몽규 모두 과정도 좋았고, 결과도 좋았다. 평생을 애써 자신이 뜻하는 바에 다가가려한 과정이 훌륭하다. 한스럽게 숨을 거뒀지만 이렇게 지금 다시 살아나 남은 우리가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결과가 훌륭하지 않은가.
아주 확고하게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주는 몽규의 그림자이자 2인자였다. 마지막엔 무려 동주가 절규하면서 몽규의 그림자인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드러나지 않았다고 동주가 수동적이며, 재능이 없고, 목적과 이유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동주는 몽규에 비해 수동적인 것처럼 보인다. 동주가 먼저 몽규를 부르지 않는데 비해 몽규는 영화 내내 '동주야'하면서 그를 부른다. 가장 귀에 많이 익은 대사이기도 하다. 동주가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은 여자에게 쭈뼛쭈뼛하면 몽규는 모르는 척 도와준다. 날 선 대화로 서로에게 흠집이 되는 말을 나눈 직후에도. 먼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고 기뻐하기는 커녕 동주 상심하지 않게 말할 것을 먼저 고민하는 몽규다. 그는 당선되지 않아 시를 꽁꽁 매어두는 동주에게 직접 잡지를 만들어 시를 발표하자고 제안한다. 원하던 대학에 붙고도 동주가 붙지 않으면 바로 대안을 찾느라 바쁘다. 몽규는 기분이 상한 동주가 좋아하는 정지용, 백석의 시집을 가져다 주면 이윽고 동주가 자신과 눈을 맞추리란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몽규와 동주의 관계는 극단적으로 몽규의 일방적인 적극성과 헌신, 동주의 일방적인 소극성과 고집으로 이뤄진 것인가? 형만한 아우없다더니 역시 동주는 몽규같은 형을 만나 재능을 알아봐주고 뒤늦게 날개를 펴게 된 건가? 아니다. 몽규와 동주는 서로 다른 사람이다. 그 선을 넘지 않으면서 서로를 소중히 하려고 노력한다. 몽규는 시보단 산문의 힘을,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을 중요시하고 동주는 문학, 시 그 자체의 울림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중요시한다. 몽규는 다른 이를 말로 설득하고 총을 들고, 동주는 시를 계속 쓴다.
어느 순간 몽규에게 동주는 동주이면서. '윤 시인'이다. 동주말마따나 시집도 안내고 등단도 안했는데 왜 시인이라고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는걸까. 그건 영화 속에 나온 것처럼 동주가 그림자도 2인자도 아니며, 전혀 수동적인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을지언정 시에 대한 그의 뚝심은 영화 내내 흔들리지 않는다. 그가 존경하던 정지용 선생님이 시를 그만 쓰라고 하는데도 그는 꿋꿋하게 내내 우리말로 시를 쓰고 모아둔다.
다카마쓰 교수가 그에게 시를 써보는 게 어떻냐고 물었을 때 그의 기분은 어땠을까. 동주는 사실은 시를 쓰고 있다고 대답했다. 출판을 하지 않아 시인은 아니지만 시를 쓰고 있다고. 그 때 다카마쓰교수는 조선어로 된 시라서 출간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며 한 마디를 날렸다. 그가 쟁여두고 있어서 출간하지 않았던 이유보다도 더 큰 이유는 시대가 정해놓은 한계이기도 했다. 그것을 교수가 지적한 것이다. 당신 잘못이 아니라 시대의 잘못이라고. 출간이 자유로웠다면 그는 아마 못이기는 척, 부끄러워하면서도 출간했을 것이다. 그가 부끄러운 것은 시를 줄곧 써서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숨어드는 것 같은 자책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자신있게 자신의 생각을 담은 그 시를 선뜻 낼 수 없는 시대때문이다.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울리지 못하고 혼자만의 우물에서 울리는 파장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시대가 막아놓은 둑에서도 물 한방울씩을 알뜰히 모아두고 있었을 뿐인데.
영화에선 쿠미라는 일본인 학생의 도움으로 영어로 시집을 출판하려 했다. 겁이 없이 진행된 해외 출간. 수동적인 이미지의 동주라면 마지막까지 쿠미가 알아서 빨리 출간을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엔 그 원고를 쿠미가 아니라 동주가 직접 보내겠다고 한다. 그 소심하고 겁많은 사람이. 그걸 하려고 그는 잡힐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몽규와 함께 가지 않고 하루를 꼬박 기다렸다. 그건 수동적인 사람이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실제로 윤동주는 직접 한정판이나마 출판을 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고, 출판이 실패하고 다른 사람에게 원고를 넘겨두기도 했다. 동주는 학교의 필수적인 교련도 거부하고, 창씨개명도 최대한 늦게 하려한다. 그 거짓부렁이 진술서에도 서명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윤동주의 과정이 좋지 않고, 결과만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몽규 역시 마찬가지다. 몽규는 결과가 없지만 과정이 좋은 사람인가. 과정과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다. 동주와 몽규 사이의 과정과 결과를 생각해보면 의미는 달라진다. 동주를 '대기는 만성이다'하면서 질투에 휩싸이게 할 정도로 이른 나이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술가락'이 있다. 홀연히 독립군 활동을 하고 돌아오고 공부를 시작하곤 잡지 <문우>를 직접 발간했다. 거기엔 동주의 시도 있지만, 몽규의 우리말 뜻인 꿈별이라는 이름으로 쓰인 시 '밤' 이 있다. 조선일보에 실렸던 <하늘과 더불어>까지. 영화에 나오지 않았으나 영화를 보고 나면 동주의 시만큼 몽규의 작품도 좋고 궁금해져서 나눠본다.
< 술가락 >
- 송한범(송몽규 아명)
우리부부는 인제는 굶을 도리밖에 없엇다.
잡힐 것은 다 잡혀먹고 더잡힐 것조차 없엇다.
「아- 여보! 어디좀 나가 봐요!」 안해는 굶엇것마는 그래도 여자가 특유(特有)한 뾰루퉁한 소리로 고함을 지른다.
「………」 나는 다만 말없이 앉어 잇엇다. 안해는 말없이 앉아 눈만 껌벅이며 한숨만 쉬는 나를 이윽히 바라보더니 말할 나위도 없다는 듯이 얼골을 돌리고 또 눈물을 짜내기 시작한다. 나는 아닌게 아니라 가슴이 아펏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다시 침묵이 흘럿다.
「아 여보 조흔수가 생겻소!」 얼마동안 말없이 앉아 잇다가 나는 문득 먼저 침묵을 때트렷다.
「뭐요? 조흔수? 무슨 조흔수란 말에 귀가 띠엿는지 나를 돌아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저 우리 결혼할 때… 그 은술가락말이유」
「아니 여보 그래 그것마저 잡혀먹자는 말이요!」 내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안해는 다시 표독스운 소리로 말하며 또 다시 나를 흘겨본다.
사실 그 술가락을 잡히기도 어려웟다. 우리가 결혼할 때 저- 먼 외국 가잇는 내 안해의 아버지로부터 선물로 온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 술가락과 함께 써보냇던 글을 나는 생각하여보앗다.
「너히들의 결혼을 축하한다. 머리가 히도록 잘 지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는 이 술가락을 선물로 보낸다. 이것을 보내는 뜻은 너히가 가정을 이룬뒤에 이술로 쌀죽이라도 떠먹으며 굶지말라는 것이다. 만일 이술에 쌀죽도 띠우지 안흐면 내가 이것을 보내는 뜻은 어글어 지고 만다.」 대개 이러한 뜻이엇다.
그러나 지금 쌀죽도 먹지 못하고 이 술가락마저 잡혀야만할 나의 신세를 생각할 때 하염없는 눈물이 흐를 뿐이다마는 굶은 나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없이 「여보 어찌 하겟소 할 수 잇소」 나는 다시 무거운 입을 열고 힘없는 말로 안해를 다시 달래보앗다. 안해의 빰으로 눈물이 굴러 떨어지고 잇다.
「굶으면 굶엇지 그것은 못해요.」 안해는 목메인 소리로 말한다.
「아니 그래 어찌겟소. 곧 찾아내오면 그만이 아니오!」 나는 다시 안해의 동정을 살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없이 풀이 죽어 앉어잇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다시 「여보 갖다 잡히기오 발리 찾어내오면 되지 안겟소」 라고 말하엿다.
「글세 맘대로 해요」 안해는 할 수 없다는 듯이 힘없이 말하나 뺨으로 눈물이 더욱더 흘러내려오고잇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전재산인 술가락을 잡히기에는 뼈가 아팟다.
그것이 운수저라 해서보다도 우리의 결혼을 심축하면서 멀리 ××로 망명한 안해의 아버지가 남긴 오직 한 예물이엇기 때문이다.
「자 이건 자네 것 이건 자네 안해 것-세상없어도 이것을 없애서 안되네」 이러케 쓰엿던 그 편지의 말이 오히려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숟가락이건만 내것만은 잡힌지가 벌서 여러달이다. 술치 뒤에에는 축(祝)지를 좀 크게 쓰고 그 아래는 나와 안해의 이름과 결혼 이라고 해서(楷書)로 똑똑히 쓰여잇다.
나는 그것을 잡혀 쌀, 나무, 고기,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돌아왓다.
안해는 말없이 쌀음 받어 밥을 짓기 시작한다. 밥은 가마에서 소리를 내며 끓고잇다. 구수한 밥내음새가 코를 찌른다. 그럴때마다 나는 위가 꿈틀거림을 느끼며 춤을 삼켯다.
밥은 다되엇다. 김이 뭉게뭉게 떠오르는 밥을 가운데노코 우리 두 부부는 맞우 앉엇다.
밥을 막먹으려던 안해는 나를 똑바로 쏘아본다.
「자, 먹읍시다.」 미안해서 이러케 권해도 안해는 못들은체 하고는 나를 쏘아본다. 급기야 두 줄기 눈물이 천천이 안해의 볼을 흘러 나리엇다. 웨 저러고 잇을고? 생각하던 나는 「앗!」하고 외면하엿다. 밥 먹는데 무엇보다도 필요한 안해의 술가락이 없음을 그때서야 깨달앗던 까닭이다.
<밤 >
- 꿈별(송몽규 필명)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 하늘과 더불어>
- 꿈별
하늘-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 수 있어 알 수 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太陽)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싶다
오오- 하늘아-
모-든것이
흘러 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思念)들만 뿌려 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意欲)의 잔재(殘滓)만
쓰디쓴 추억(追憶)의 反(반)추만 남아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연인(戀人)이 없어 고독(孤獨)스럽지 않아도
고향(故鄕)을 잃어 향수(鄕愁)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
하늘속의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맘속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
미풍(微風)이 웃는 아침을 기원(祈願)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 부르기를
가만히 기원(祈願)하련다.
몽규는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가 2등으로 졸업했다. 그 때 그는 분노할 때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2등 상이 어이없게도 대동아공영, 일본의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이었고 받자마자 이따위 것을 상으로 준다며 집어 던져버렸다. 그것이 세상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더라도, 그 자리에 있던 불편한 사람들의 마음은 아마 세상 속 시원하게 바꿔주었을 것이다. 동주와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날 땐 다시 교토제대에 합격했던 코스를 보면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있었던 능력자였다. 다만 동주와 마찬가지로 시대가 관여하는 일, 독립군 활동, 일본 내 유학생을 규합하려던 사건 등은 일이 목적대로 이뤄지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이다. 몽규는 영화에서 동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딪히고, 싸우고, 도전하며 멋진 형이자 동반자로 등장했다. 끝까지 동주보다 먼저 태어나 조금 늦게 세상을 떠났으니 참 인연은 인연이다. 그의 좋은 결과는 간략하게 설명하려 한다.
이 쯤되면 영화의 제목이 왜 <동주>여야만 했는지는 의문이다. 영화의 포인트 상으론 몽규도 같이 담겼어야 할 텐데 말이다. 게다가 왜 영화는 흑백이었을까. 어느 한 순간도 빠짐없이. 하지만 알 것도 같다. 영화를 보고 나면 동주, 몽규, 이렇게 성을 떼고 부르게 된다. 멀리 있는 분들이 가깝게 느껴진다. 동주는 윤동주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주야, 하고 부르던 몽규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영화에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살아남아 동주의 시를 같이 고민하고, 동주의 시를 출간해준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동주는 대명사인 것이다. 마음의 색이 흑백으로 강제로 물들고, 모든 선택이 흑백같이 이분법으로 재단되던 시대에 좋은 과정을 보여주려 끊임없이 노력하고도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이들, 우리는 설사 모른다 하더라도 이토록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이렇듯 감사하게 건네준 수많은 이들의 숨, 눈빛, 목소리, 마음이 담겨 있는 대명사. 들으면, 부르면 마음 한 켠이 욱신욱신해지는 그 모든 이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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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FF 데일리] '전생'에서 깨진 인연을 지금 다시 붙이고 싶다고?
스포일러 있습니다!
감독 : 셀린 송
출연진 : 그레타 리, 유태오, 존 마가로
울보 나영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국 어딘가에 살고 있는 초등학생 나영이다. 외로운 삶. 어린 나영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이런 나영에게 기댈 수 있는 그늘이 있다. 같은 학교 친구 해성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엔 항상 해성과 함께했다. 사실 왜 둘이 집을 같이 갈까 3자가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쉽다. 다만 서로가 각자의 마음을 알기엔 너무 어릴 뿐이다. 시간은 둘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민을 계획하고 있는 나영 가족. 이미 나영의 부모는 나영에게 ‘노라’라는 영어 이름을 붙여줬다. 이별이 다가오는 둘. 나영은 해성에게 ‘나 이민 가. 한국에선 노벨상 못 받으니까’라고 전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해성이다. 12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지 못했다. 분명히 노라는 날 좋아했었다는 미련을 가진 채로 살아간다. 떠나기 며칠 전에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선명하다. 페이스북으로 사람을 찾는다. 이름은 문나영.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사실만 알았지 이름이 ‘노라’가 됐다는 건 아예 모르고 있었다. 언젠가 연락이 오겠지? 기다리고 있는 해성. 그날은 해성의 친구가 연인과 헤어진 날이었다. 펑펑 우는 친구 옆에서 해성은 어쩔 줄 모르고 있다. DM 알림이 온다. “안녕. 나 나영이야.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나영이, 아니 노라에게 연락이 왔다. 미국과 한국, 뉴욕과 서울이라는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의 로맨스가 시작된다.
넘버 3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은 셀린 송이다. 영화가 흥미로웠던 점은 이야기 곳곳에 이 셀린 송이라는 인물의 자전적인 요소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셀린 송의 부친은 송능한 감독이다. 송능한 감독은 연출로 데뷔하기 이전에 임권택의 <태백산백>을 비롯한 몇 작품의 각본가로 활약했다. 충무로에서 나름의 명성을 쌓은 송능한 감독. <넘버 3>를 발표하며 금세 한국영화의 기대주로 올라선다(최근의 한국영화를 바탕으로 하면 아마 엄태화 감독쯤 됐을 것이다). 차기작을 기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기말>을 발표하는 송능한 감독. 하지만 영화 외적인 문제가 발생하며 흥행에 실패한다. 이민을 결심한 송능한 감독. 미국으로 떠난다.
영화는 셀린 송 감독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다. 극 중에서 나영의 아버지 직업이 영화감독이다. 하지만 ‘왜 아버지가 이민을 결심했는가’에 대해선 ‘설명하기 복잡하다’로 끝난다. 부친에 대한 감독의 코멘트가 어느 정도는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 영화가 주인공 나영이 성인이 되고 난 후의 직업을 ‘시나리오 작가’라고 설정했다. 실제로 셀린 송 감독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 전에 극작가(Playwriter)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있다. 작중 가족관계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에게 여동생이 있다. 실제 셀린 송 감독에게도 여동생이 있다. 감독의 남편 역시 실제 배우의 외모와 닮았다. 작중에서 노라의 남편 역을 맡은 배우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다. 실제 셀린 송 감독의 남편 사진을 찾아보면 이와 유사하다. 이야기를 구상하는 데 있어 많은 부분을 어디에서 착안했을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여백을 비추는 카메라
이 영화의 강점은 감정전달에 있어 여유가 느껴진다는 점이다. 앞서 쓴 바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는 자기가 잘 아는 것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이 덕에 장면마다 정보를 더 전달해야 한다는 강박이 안 느껴진다. 대표적으로 노라와 해성이 성인이 되고 나서 대면하는 신이 그 예다. 두 사람은 거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걸 온갖 대사로 보여줄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딱 한 문장으로 끝내되 대신 다른 장면에서 인물들과 관객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대표적으로 나영이가 울보라는 설정이 그렇다. 나영이는 잘 울었다. 하지만 봐줄 사람이 없어 감정을 받아줄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감정을 표현해도 울보라는 것을 알아봐 줄 사람이 없었을뿐더러 울 일도 줄어들었다. 받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노라의 성격이 변한 것이다. 반대로 해성이의 경우는 인물의 성격이 10대/20대 큰 차이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 중반부까지 본다면 20대의 해성과 어린 시절의 해성이 둘 다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둘은 얼핏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중간에 군 생활하는 장면이 있긴 하지만 이 사람의 시간이 12년이나 지났다는 것이 체감하기 어렵다. 특히 가족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그런데, 둘을 비추는 방식은 별 차이가 없다. 시각적으로 이들이 차이가 없는 것으로 연출해 실질적으로 변한 건 드물다는 것을 암시하는 연출이다.
또 영화에서 흥미롭게 리듬을 변주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시차다. 두 사람의 시차는 영화에서 첫 대면신에만 설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시차가 영화에서 내포하는 바는 의사소통의 균열이다. 이 균열이 일어나는 장면이 인물들의 관계마다 다 묘사되어 있다. 아마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술집의 장면은 주인공 해성-노라 / 노라의 남편으로 대화 구조가 짜여있다. 둘/하나로 나뉘는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노라의 남편은 한국어를 못한다. 그래서 둘은 내면의 은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언어로 시차를 둔 것이다. 이 시차는 두 주인공에게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에서 12개월을 기점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한 번 끊는다. 여기에서 해성과 노라가 연애를 시작한다. 해성이는 사랑을 끝내는데 반면 노라는 남편을 만나는 장면도 두 사람의 차이를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하이라이트 신에서는 노라가 직접('네가 원하는 나영이는 이제 없어') 의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해성이가 원하는 현재와 노라가 이해하는 과거가 다르기 때문에, 그러니까 해성이는 노라가 나영이의 모습으로 자기를 사랑해 주기 바라기 때문에 영화의 하이라이트가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영화는 시차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드러내고 있고, 이를 두 인물이 가진 고유의 리듬을 비틀면서 전개한다
뜨겁게 뜨겁게 안녕
이 영화를 만든 셀린 송 감독은 이 영화를 “새롭게 시작하는 이야기”라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글쓴이에게 있어 ‘새롭게 시작한다’라는 의미는 시차와도 관련이 있는 것처럼 들린다. 인간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나 자신에게 시차를 두는 일과 유사하다. 사람은 누구나 후회를 한다. 쉽게 털어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오래 가슴에 품는 이도 있다. 이 후회는 과거의 내가 보지 못했던 걸 현재의 자신이 알고 있다는, 일종에 시차로 인해 일어나는 일이다. 사실 영화는 이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내가 알지 못했던 걸 지금 고치기 위해 노라에게 간 해성. 하지만 과거의 내가 알든 현재의 내가 알든 그건 노라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는 걸 그 누구보다 해성이 잘 알고 있다. 영화는 이 과정을 깨닫는 해성의 내적 성장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또 사실상 노라의 현재를 상징하는 남편 캐릭터를 진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당신에게 현재는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한다. ‘전생’에 있었던 그 모든 사건보다 현생의 지금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유태오 배우는 열연을 펼친다. 대표적으로 이 영화의 중심 부분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는 회전목마 신에서는 이 인물이 그동안 품어왔던 그리움을 표정으로 보여준다. 네가 그리워라고 주절주절 떠드는 것 없이, 단 한마디로 모든 감정을 응축한다. 아마 유태오 배우가 이 감정에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실제로 GV(관객과의 대화)에서 유태오 배우가 참석했다. 유태오 배우는 “이 시나리오를 받고 울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이 영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보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술집에서 대화하는 신이다. 여기서 해성을 보면 영어에 서투른 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영어를 못해서 대충 눈치로 넘기는 장면을 보면 '정말 영어 못하나 보다'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자연인 유태오 배우는 영국과 미국에서 연기를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연기로 이 부분을 돌파한 셈인데, 유태오 배우가 연기에 얼마나 이 장면을 잘 이해하고 있어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한국에 정식 개봉을 앞두고 있는 <패스트 라이브즈>는 10월 9일 오후 12시 30분에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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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로운 노동에 영화라는 즐거움을 잊을 수 없어서
※영화 〈내일의 기억〉, 〈더 파더〉, 〈노매드랜드〉,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의 일부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존 스타인벡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글쓰기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노동이라고. 하지만 달리 보자면 또 그만큼 즐거운 외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 플랫폼에 적을 둔 사람들은 진정으로 고독을 즐길 줄 알기에 오늘도 어김없이 글을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생각만 쌓아 둔 채 글쓰기를 제쳐두었다. 그게 본심이 아니라면 나는 단지 외로운 노동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누가 뭐라고 한 적 없어도 글을 쓰기 위해 앉아있는 거라면, 분명 나는 그 즐겁고도 외로운 감정이 그리웠던 것이다. 본 영화는 늘어만 가고 쓰고 싶은 글은 산더미다. 특히 아카데미 시상식이 코앞으로 다가온지라 마음만 급하다. 이건 그간 봤던 영화들을 짧게 정리한, 말하자면 습작이나 초고와 비슷한 글이다. 아마 여기서 곧 발전할 글들이 생기리라 확신한다.
1. 내일의 기억 Recalled | 2021 | 서유민 | 99분
기시감, 흔히 ‘데자뷔 Déjà Vu’ 로 불리는 이 현상은 프랑스어로 "이미 본” 이란 뜻으로 최초의 경험을 마치 이전에 봤다고 느끼는 착각을 말한다. 처음 온 장소가 과거에 와 본 것처럼 익숙하고 방금 한 행동이 예전의 기억과 어렴풋이 일치하는 순간은 누구의 일상이든 찾아온다. 하지만 생사를 넘나든 큰 사고를 당해 이제야 의식을 찾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누구든 그 진위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기억을 잃은 수진이 단란한 가정에서 겪는 기이한 데자뷔로부터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 영화의 미덕이라면 관객을 집중시키는 스릴러의 장르적 쾌감과 조각난 기억을 함께 맞춰가는 추리의 맛이랄까. 이미 여러 영화에서 써먹은 소재와 구상에도 이 정도 재미를 뽑아내는 감독의 역량은 눈길을 끈다.
그런데도 플롯을 영화가 쫓아가지 못한다는 기분을 받는다. 실마리를 풀어가는 흥미로운 아이디어와 무의식의 깊이를 구현한 수직적 이미지가 툭툭 끊기는 영화의 편집을 만난다면 관객은 수진과 함께 혼란에 빠지고 만다. 모든 감독은 비장한 각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로 구현한다. 물론 그게 영화의 만듦새와 함께 가는 경우는 드물다. 이제는 ‘한국적 신파’에 치가 떨린다는 사람들을 보면 그간의 경험에 크게 덴 나머지 나름의 인장으로 넘길 수 있는 장면도 과민 반응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결말의 신파적 요소가 굳이 거슬린다면 〈해운대〉의 신파를 되새겨보며 이 정도면 영화적 기능으로 인정해 줬으면 한다. 만약 누군가가 등장 배우의 논란으로 영화도 보지 않은 채 덮어놓고 비판을 하고 싶다면 성인 수준의 상식에 미치지 못한 판단으로 드라마 전체를 망가뜨린 인물과, 이를 덮을 만큼 가십과 의혹만으로도 매장의 위기를 받는 인물 중 누가 현재의 가시적 해악에 더 가까운가를 생각해 보자.
2. 더 파더 The Father | 2020 | 플로리앙 젤러 | 97분
〈리어왕〉에서는 권력의 소용돌이에 비극적 선택의 첨병이 된 아버지로, 〈두 교황〉에서는 종교적 상징이자 시대와 평화의 ‘아버지’로 자신의 존재를 질문하고 토론하며 결국 내게 주어진 자리의 무게를 깨닫는 인물이 된다. 심지어 〈토르〉에서는 세상을 다스리는 신의 기원이자 두 슈퍼히어로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안소니 홉킨스’에게 〈더 파더〉만큼 노골적으로 현대의 아버지를 연기하는 것이란 어쩌면 심심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탄탄한 각본을 여전히 놀라운 연기로 끌어가는 80대의 배우가 보여주는 진가는 그 모든 아버지의 모습이 혼란스러운 정신 상태에서 조금씩 드러나도록 완급조절을 한다는 사실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 ‘안소니’의 눈에 이 세상은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다. 시공간의 왜곡과 변주는 원작인 연극을 보지는 못했지만 영화였기에 가능했던 탁월한 지점이다. 내 눈앞의 무엇인가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내가 알던 세계가 의심받는 상황만큼 공포를 자아내는 것도 없다. 돌이킬 수 없어 더 안타까운 진실에 이해하려 애쓰는 안소니의 모습은 숙연하며 시종일관 놀랍다. 극적인 감정의 파고를 홀로 묘사하는 장면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화의 제목이 ‘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인 이유는, 그를 지켜보는 딸 ‘앤’이 바라보는 시선이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날마다 달라지는 아버지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딸을 연기한 ‘올리비아 콜먼’의 연기 또한 눈을 뗄 수 없다. 어떤 감정이든 금세 관객이 이해하도록 만드는 능력은 미묘한 표정과 눈빛이 대답해주고 있다. 결국 모두의 삶을 위해 내리는 어떤 선택의 장면에 보이는 처연함과 머뭇거림, 슬픔과 확신이 뒤섞인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의 뇌와 우주는 놀랄 만큼 비슷한 구조와 패턴을 보여준다고 한다. 달리 ‘소우주’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우주 宇宙라는 단어에는 ‘집’이 두 번이나 들어간다. 영화 속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주인공인 안소니의 집은 사라지는 인간의 기억이라는 집과 실제 물리적 공간인 집이 교차하고 어긋나며 공포와 혼란을 극대화한다. 뇌라는 우주가 사라지는 동안 나를 지탱하고 보호했던 집 역시 희미해져만 간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막막함이란 우주 공간에 홀로 남겨진 안소니를 두고 떠나야만 하는 불가역적 소멸의 정서와 조응한다.
3. 노매드랜드 Nomadland | 2020 | 클로이 자오 | 108분
올해 보았던 영화 중 최고를 꼽자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금융위기 이후 집과 일터, 사랑하는 가족을 모두 잃은 ‘펀’은 밴 하나에 몸을 싣고 미국 전역을 유랑한다. 동명의 원작이 사회 현상을 포착하고 기록한 르포라면 영화는 책에 담긴 여러 인물을 펀이라는 가상의 인물에 대입해 미국의 역사와 사회를 헤쳐가는 유목민들, 더 나아가 인간의 실존과 삶, 영화의 근원에 관해 화두를 던진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클로이 자오 감독은 집을 소거한 삶의 공백에 우리가 놓거나 놓지 않는 것들을 찾아가는 한 인간으로 대답한다. 제작에 참여한 프란시스 맥도먼드가 직접 출연한 영화 속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떠도는 인물의 고독과 치열한 생의 모습을 마치 실존 인물처럼 연기한다. 사회 영화를 연상시키는 끊임없는 노동의 이미지는 배우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치와 능력을 한껏 발휘한다. 해답을 바라는 구도자의 순례는 결국 출발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한다. 하지만 과거의 그와 지금은 다르다. 기억으로 가득 찬 집과 사막을 뒤로한 채 다시 떠나는 밴의 뒷모습은 영화의 완벽한 엔딩이다.
배우가 아닌 실존 인물을 그대로 영화에 녹여내 가상의 상황을 연기한 등장인물들은 현실감을 더욱 높여준다. 연출과 실제를 넘나드는 영화의 연출은 가상 인물인 펀에게도 유효하다. 사실 펀을 연기한 프란시스 맥도먼드도 영화의 절반까지는 ‘펀’보다는 프란시스 자신처럼 보인다. 유목민 선배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드넓은 자연을 바라보는 펀의 모습은 영화의 인물이 아닌 다큐멘터리의 호스트로도 보인다. 그래서 〈노매드랜드〉는 중반까지는 미국의 사회 현실을 포착한 다큐멘터리에서, 그 이후 펀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그의 서사로 채워진다. 펀과 맥도먼드라는 두 인물이라는 정체성이 동화되고 중첩되는 과정은 영화라는 예술이 왜 인간에게 유효한가를 잘 드러낸다. 사회의 단면을 들여다보며 결국 커다란 서사가 자신의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이 곧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임을 깨닫는다.
흔히 미국은 자동차의 나라라고 불린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한 나라의 정체성과 상징을 드러낸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단단한 금속에 몸을 실은 유약한 인간은 그 넓은 땅덩어리를 쉼 없이 움직이며 지금의 미국을 만들었다. 유목민은 미국이 어떻게 건국하였고 여기까지 오게 된 그 정당성을 알려준다. 하지만 거창한 의미 안에는 피와 눈물로 맺힌 비운의 삶이 녹아있다. 노매드 nomad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주 transfer 하기 위해 돌아다니지만 이는 곧 밀려난 이들의 피난처 shelter를 전제한다. 필그림과 아메리카 선주민, 개척시대에 희망을 찾아온 이들, 그리고 부동산과 경제위기가 몰아낸 차 안의 노매드들. 상징으로 추앙받는 한가한 말들에는 나라는 존재가 부유하는 미국인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들은 여전히 떠돌아다니며 외면받는 존재이지만 바퀴 자국으로 미국이라는 땅에 궤적을 남긴다. 영화 속 미국이라는 땅에 잠든 오랜 역사가 새겨진 돌과 화석은 그래서 노매드를 닮았다. 단단한 돌에 새겨진 바람구멍은 국가와 사회를 구성하는 연약한 인간의 발자취, 더 깊이 들여다보면 단단하게 남아 있는 미국의 수많은 자동차에 담긴 인간의 삶과 기억을 나타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간은 더는 그 자리에 없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했던 빌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있는 한 화석처럼 영원히 살아남아 흔적을 남기고 말 것이다.
4.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 Judas and the Black Messiah | 2021 | 샤카 킹 | 126분
흑인 민권 운동사에 빠질 수 없는 1968년,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서거로 혼란스러웠던 미국에는 극좌파 민권 운동단체 ‘흑표당’이 세력을 결집하고 있었다. 당의 두 창립자 휴이 뉴턴과 바비 실은 각자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압적인 재판을 받고 있었다. 흑인 민권 지도자의 잇따른 부재로 구심점을 잃기를 바랐던 미국 정부와는 달리 위대한 혁명가는 어디서든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다. 흑표당 일리노이주 지부장으로서 투쟁을 이끌었던 20살의 대학생 프레드 햄프턴은 뛰어난 언변과 협상력으로 대중을 선동하며 후일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에 FBI는 그를 반체제 인사로 규정, 그를 감시하기 위해 비밀 정보원을 투입한다. 차량 절도와 FBI 사칭으로 구속 위기에 놓인 윌리엄 오닐에게 이 은밀한 제안은 거부할 수 없었다. 흑표당에 들어간 오닐은 그를 감시하는 동시에 점차 미국 사회의 불평등을 직면하고 헴프턴에 동화된다. 〈유다 그리고 블랙 메시아〉는 오로지 민중을 위한 혁명을 외친 ‘블랙 메시아’와 그를 감시한 ‘유다’의 삶으로 오늘날 여전히 유효한 미국의 역사를 보여준다.
BLM 운동과 트럼피즘의 후폭풍, 코로나 19의 확산으로 어느 때보다 소수자의 입지가 좁아 든 작금의 시기에 영화는 60년 전으로 돌아가 혁명과 변혁, 진보의 길에 둘러친 억압과 폭력을 드러낸다. 제목처럼 영화는 ‘유다’의 시선으로 ‘메시아’를 들여다본다. 전체주의와 국가주의의 광풍에 ‘유다’ 윌의 배신이란 너무도 평범한 시민이 사회와 상황 앞에서 생존이라는 목표에 움직이게 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오닐 역의 ‘라키스 스탠필드’는 고뇌와 갈등 앞에 선 불안한 심리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다. 이분법적 사고에 매몰된 사회에서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오닐의 피폐한 모습은 인간성과 도덕을 상실한 파시즘의 권력에 신념을 강요받는 무력한 인간을 묘사한다.
공포의 시대에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생리에 헴프턴은 단호히 부정한다. 직설적이지만 정확히 핵심과 구조를 꿰뚫는 화술을 지닌 그는 권력이라는 적에 대응하기 위해 연대와 사랑을 내세운다. 뛰어난 선동가이자 정치가인 그는 누구와도 손을 잡을 배포로 무지개 연합을 만들어 세력을 규합한다. 맹방기가 걸린 백인 빈민 교회에 당당히 들어가 고통의 역사를 직시하면서도 결국 그들을 설득해 당당히 남부의 깃발 앞 연단에서 백인들을 설득시키는 모습은 경이로우면서도 현대 정치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사유하도록 만든다. 위대한 인물을 연기하기에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다니엘 칼루야’는 그의 삶을 되새기며 뛰어난 연기를 펼친다. 클로즈업으로 잡아낸 연설 장면에서도 머뭇거림 없이 카메라의 시선을 이겨내는 칼루야의 모습은 리얼리티를 극대화하는 데 일조한다.
이념의 특성상 여성의 권익에 적극적이었던 흑표당과 국가의 대립에 한 축을 담당하는 뛰어난 여성 인물들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헴프턴의 연인이자 운동가인 데보라 존슨은 그의 마음을 다잡으면서 새로운 세대에게 지금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지적한다. 인간적이면서 강인한 여성으로 모든 상황이 종결된 마지막 장면에 잡히는 그의 감정은 많은 생각을 들게 만든다. 헴프턴의 동료 주디 하몬은 영화 내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진보적인 조직의 면모를 보이며 신념 앞에 불굴의 의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소화한 ‘도미니크 손’의 커리어가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의 영웅과 비극적 최후, 그리고 배신과 선택은 범죄 영화 〈무간도〉를 떠올리면서도 탁월한 정치 영화로서 그 매력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특히 소수자를 결합하는 연대의 유산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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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 서포터즈들의 축구 사랑을 볼 수 있다!
시놉시스
수카바티는 산스크리트어로 극락이라는 뜻이다. 나바루 감독은 3살 때부터 지금까지 안양에서 쭉 살았다. 나바루 감독이 말하길 안양은 매우 평범한 곳이라고 하는데 1997년 안양에는 RED 서포터즈들이 있었다. 그 서포터즈들이 안양의 축구 선수들을 응원했고 시간이 지나자 안양 FC는 서울 상암 FC로 옮기게 된다. 그 이후로 RED 서포터즈들은 안양에 축구단이 다시 생기기를 안양 시에 건의를 했고 매일 부결이 됐지만 포기하지 않는 RED 서포터즈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RED 서포터즈들은 붉은빛을 내는 폭죽을 들고 응원을 하며 다소 과격한 행동을 하지만 그건 안양 RED 서포터즈들이 다른 팀과의 차별화를 두기 때문이다. 안양은 1000년 전에 태조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안양에서 잠시 터를 잡았는데 오색구름이 나타나길래 지나가는 스님에게 물었더니 여기가 극락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도시이다. 그만큼 안양 RED 서포터즈들의 도시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데 80년 전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3S 정책에 의해 스포츠가 활성화되자 한국 축구는 더욱더 발전한다.
그리고 90년대에 들어서는 하이텔 같은 PC 통신의 발달로 각종 동호회가 창설되는데 그중에 축구 동호회도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2002년 전 국민을 들썩이게 만든 대한민국의 월드컵 4강 진출에는 붉은 악마 응원단이 있었는데 그 주역에는 RED 서포터즈가 있었다. RED 서포터즈는 단순한 축구 동호회를 넘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안양 LG 축구단이 서울 상암 FC로 이전하면서 RED 서포터즈들이 분노를 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해 안양에는 축구단을 다시 만들라는 RED 서포터즈들의 반발이 올라왔고 10만 명의 시민 청원을 받아 안양 시의회에 건의하기도 했다.
최대호 안양 시장은 자꾸만 부결되는 안양 축구단 설립을 안타깝게 보고 여러 당 시 의회 의원들에게 동의를 받아내고자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안양에도 축구단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의견이 시 의회에서 과반수로 득표를 얻었고 가결된다. 안양 축구단이 다시 만들어지고 안양은 K-LEAGUE에서도 훌륭한 성적을 거두진 못했지만 과거의 RED 서포터즈들은 자신의 축구단이 기죽지 않게 많은 격려와 아낌없는 응원을 해주었다.
과거의 안양 축구단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른 건 필요 없고 자신들의 일상에 기쁨을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한다. 승패를 떠나 그저 축구 팬으로서 즐거웠으면 되는 것이다.
안양에서 살고 자라 축구를 좋아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 씨네랩의 크리에이터로써 영화 시사회에 초대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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